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한 것은 누구인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들어가는 말

지난 6월 15일 '서해 교전 사태'로 알려진 해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정전 이후 남북의 정규군이 사상자를 내면서 벌인 해상 포격전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은 컸다. 그로써 조·미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이 추진되고 있는 한(조선)반도의 현정세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냉기가 엄습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지금 보수언론과 관변학자들은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모아 "북한이 남한의 영해를 침범하여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북(조선) 어뢰정을 격침시킨 남(한국) 해군의 전과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동족살상의 참사를 두고 적을 격퇴한 전과라고 칭송하는 따위의 소리는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민족적 양심은, 남북의 젊은이들이 동족의 가슴을 겨눈 총과 함포에 불을 당기며 언제까지 형제를 죽이는 피의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부르짖으며 오열해야 마땅하다. 꽃게잡이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연평도 앞바다에 나간 남북의 젊은이들이 무슨 원한이 그토록 사무쳤길래 서로 죽이고 죽는 참극을 벌여야 했던가. 선조들이 우리 후손에게 물려준 연평도 꽃게어장에서 남북의 어선들이 사이좋게 꽃게를 잡아올리며 만선의 기쁨을 안고 해주항으로 인천항으로 되돌아가는 그런 통일의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이번 서해 교전 사태에 대하여 우리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남북이 무력충돌로 나아가지 말고 평화적 해결의 길을 찾고 조국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틀린 주장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예리하게 관찰해야 할 문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원인분석을 덮어놓은채 문제해결의 길을 찾을 수는 없다. 남(한국)의 군당국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언론과 관변학자들도 예외없이 북(조선)이 남(한국)의 영해를 침범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원인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오류이며 무지이며 왜곡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지금까지 세간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잘못된 원인분석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고자 한다.

북방한계선 이남 수역은 남(한국)의 영해가 아니다

1953년 7월 정전회담에서 미군(유엔군)과 조선인민군(그리고 중국군)은 육상의 군사분계선을 획정하는 데는 합의를 보았으나, 해상의 군사분계선을 획정하는 문제는 의견이 엇갈려 합의를 보지 못했다. 정전협정 2조 13-B항에서는 "경기도와 황해도 경계선상에서 북서쪽에 있는 모든 섬들은 북(조선)이 관할한다. 단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다섯 섬은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정전협정은 서해 다섯 섬의 관할권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해상군사분계선은 규정하지 못한채 체결되고 말았다. 따라서 정전협정에 포함된 부속지도 22개 가운데 하나인 '지도 3'에는 서해 다섯 섬들에 대한 관할권은 표시되어 있지만, 해상군사분계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

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한 달쯤 뒤인 1953년 8월 30일에 미군의 함정, 항공기가 서해 해상에서 초계활동을 벌이기 위한 11개의 좌표를 이은 선을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으로 정하고 자기 이름으로 이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한강 하구에서 백령도까지 이어지는 1백50마일의 '북방한계선'이 그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북(조선)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보수언론과 관변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정전 이후 20년 동안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남(한국)의 관습법이 통용될 수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북(조선)은 서해 다섯 섬에 대한 관할권이 미군사령부(유엔군사령부)에게 있음은 인정하였지만, 그 주변해역에 대한 관할권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북(조선)은 미군사령관이 자의적으로 '북방한계선'을 그은지 1년 반만인 1955년 3월 5일 12해리 영해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자기들이 설정한 12해리 영해에 들어간 남(한국) 항공기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 차례도 '북방한계선'을 묵인한 적이 없었다. 북(조선)은 1973년 12월 1일 군사정전위원회 제346차 회의에서 "서해 다섯 섬을 드나들 때는 우리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만일 이를 위반하면 응당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1975년 2월 26일 북(조선) 어선 10여척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갔는데 남(한국) 해군함정이 그 가운데 한 척을 들이받아 침몰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남(한국)에서는 "국제법에 의하면 북방한계선은 공해이므로, 남(한국)이 강제로 항해를 통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박정희 정권은 "북방한계선은 20년간 지켜와 관습법으로 성립하는 군사분계선으로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조선)은 1977년 7월 1일 2백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였고, 이어서 8월 1일에는 해상군사분계선 설정문제와 관련하여, 동해는 영해 기산선으로부터 50해리, 서해는 경제수역으로 설정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번에 서해 교전 사태가 일어나면서 또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북방한계선'은 북(조선) 해안에서 불과 3해리(5.5km) 앞쪽에 그어져 있다. 빤히 바라다 보이는 거리다. 따라서 황해남도 앞바다에 배치된 북(조선) 해군의 활동은 크게 제한을 받고 있으며, 해주항은 발이 묶여 있는 셈이다. 해마다 5-6월에 형성되는 연평도 앞바다의 꽃게어장은 바로 그 '북방한계선' 남쪽에 있다. 이 꽃게어장을 두고 해마다 꽃게잡이철이 되면 남북 사이에서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여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에 남(한국) 어선들이 서해 어장에서 조업을 하다가 북(조선) 함정에게 끌려가는 사태가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는 북(조선)의 해군력이 상대적으로 강하여 남(한국) 해군이 문제의 수역에 마음대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남(한국)의 해군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처럼 남(한국) 어선이 북(조선) 해군에게 끌려가는 사태는 그리 흔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미군사령관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 때문에 남북이 꽃게어장을 두고 신경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이 서해의 영해문제를 놓고 충돌하고, 특히 해마다 이맘때면 꽃게어장을 두고 신경전을 거듭하게 되자, 주한미군사령관은 '북방한계선'이 황해남도 해안에 너무 가깝게 그어져 있으므로 쌍방이 우발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북방한계선' 남쪽 해상에 이른바 '완충수역'을 설정했다. '완충수역'이란 주한미군사령관이 북(조선)의 함정이나 어선이 고장 또는 실수로 '북방한계선'을 넘어갔을 때 남(한국) 해군이 과잉대응을 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남(한국)의 선박이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정해놓은 작전수역이다. 따라서 '완충수역'에는 북(조선)의 선박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남(한국)의 선박이 그 수역에 들어가려해도 남(한국)의 해군이 주한미군사령관의 허가를 받아내야 가능하게 되어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서해 다섯 섬 주변의 3마일 수역을 '작전수역(AO)'으로 설정해 놓고 이 작전수역을 직접 관할·통제하고 있는데, 이를 제외한 북방한계선 남쪽 해상의 '완충수역'에서는 남(한국) 해군에게 관할·통제하는 권한을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정확히 인식한다면, '북방한계선' 이남의 해역은 남(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해라고 볼 수 없다. '북방한계선'과 '완충수역'이란 남(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군대 사령관이 자기의 군사작전의 요구에 따라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이며, 따라서 법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국제법적 근거를 가지는 영해란 주권국가가 3마일 또는 12마일 범위를 설정한 수역인데, 만약 주변국가와 상충되는 수역이 생기면 서로 협의해서 인정하는 수역을 말한다. 국제법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설정한 '북방한계선'이니 '완충수역'이니 하는 개념은 없다. 공해, 영해, 배타적 경제수역, 공동관리수역 등을 당사국들이 합의한 조건에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완충수역'은 남(한국)의 영해가 아니므로,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함정 또는 선박이 그 수역을 지나갈 경우 남(한국)의 해군이나 해경은 검문할 수 없다. 주권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그 해역에 북(조선)의 함정 또는 선박에 대해서만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만일 이번에 문제가 된 수역이 남(한국)의 영해라는 법적 근거가 있다면, 당연히 남(한국)은 그 수역에 대해서 주권을 행사해야 하고 북(조선)의 선박이나 함정이 그 수역에 들어오는 것은 불법적 침범행위가 된다. 그러나 문제의 수역은 미군사령관이 군사작전에 필요하다고 하여 '북방한계선'과 '완충수역'으로 설정해놓은 군사작전수역이지 영해가 아니다. 외교통상장관 홍순영은 6월 18일 외신기자단 회견에서 "북한이 북방한계선과 관련해 평화적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협의에 응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문제의 수역이 남(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자기 나라의 영해를 협상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른 한편, 보수언론과 관변학자들은 그 군사작전수역이 영해가 아니라 남(한국)이 관할하고 있는 '관할수역'이라고 주장하지만, 남(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완전히 돌려받고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이전까지는 남(한국)이 독자적인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관할수역'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또한 설득력이 없다.

'북방한계선'과 '완충수역'을 설정해놓은 당사자인 미국 정부가 이러한 견해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 국무부 부대변인 제임스 폴리는 6월 16일 기자 설명회에서 문제의 수역이 공해인가라고 물은 기자의 물음에 대해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답변하고, 그 수역이 '국제수역(international waters)'이라고 밝혔다. '국제수역'이란 공해(high seas)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폴리의 발언에 대해 어떤 기자가 "그렇다면 왜 북한이 공해에서 조업권을 갖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폴리는 그 물음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미 국무부는 6월 15일의 교전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북(조선)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완충수역'에 들어간 것을 문제로 삼지 않았으며, 북(조선)의 어선들이 그 수역에서 꽃게를 잡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 국무부가 이번 사태를 북(조선)의 '영해 침범'으로 보지 않고 있으며, 남북 해군 함정이 꽃게잡이를 둘러싸고 '분쟁수역(disputable waters)'에서 일으킨 우발적인 분쟁으로 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도 분쟁수역 또는 분쟁이 일어난 해상경계라는 표현을 썼으며, 영해나 관할수역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이로써 영해권 또는 관할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북(조선)의 함정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했다는 남(한국) 당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지고 말았다.

해마다 연평도 앞바다 '완충수역'에서는 남북의 어선과 함정이 오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연평도 앞바다의 '완충수역'은 풍부한 꽃게어장이어서, 해마다 5, 6월이 되면 꽃게를 잡으려는 남북의 어선들이 그 수역에 들어갔고, 그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북의 해군 함정들도 그 수역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 크롤리는 6월 15일 "이번 사건이 연례적"이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하고 묻는 기자의 물음에 대하여 "매년 꽃게잡이철이 되면 북한의 고깃배나 경비정들이 북방한계선을 내려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남(한국)의 한 어민은 "젊은 시절(그가 올해 61살이므로 1960년대를 뜻함-옮긴이) 연평도 근처에서 조기잡이를 했는데 그때도 북한군 때문에 그물을 걷지 못하기 일쑤였다"고 말하면서, 남(한국)의 어선들이 북(조선) 해군 함정에게 끌려갔던 사실을 회상했다. 남(한국)의 다른 어민도 "꽃게잡이 20년 동안 게를 잡다가 북한 경비정이 나타나 조업을 중단하고 대피한 적은 여러번 있었어도 이번처럼 출어를 금지당한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앞바다의 꽃게어장인 '연평어장'은 이 지역 섬주민들에게만 출어가 허용된다. 연평도의 어선들은 이 어장에서 어로한계선을 엄격히 준수하고 있다. 만일 어로한계선을 넘어섰다가 남(한국) 경비선에게 적발되면 정부융자금을 되돌려주어야 하고, 어업허가권이 취소되는 강한 책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조선)의걸게잡?어선들은 꽃게를 잡는 철인 5-6월에는 북방한계선을 넘어 '완충수역'에 들어가서 꽃게를 잡아가곤 한다. 이러한 일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된다는 것이 해양경찰청의 설명"이다.

이처럼 연평도 앞바다 '완충수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남북의 선박들과 함정들이 드나들었다. 해마다 5, 6월이면 그 연평도 앞바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설정해놓은 '완충수역'이 아니라, 남북의 어선들이 몰려들어 꽃게잡이를 하는 연평어장으로 변하였다. 지난 수십년동안 해마다 연평어장의 꽃게잡이가 되풀이되면서,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한 남북의 해군 함정들 사이에 가벼운 우발적 충돌도 있었고, 남(한국) 어선이 북(조선) 해군 함정에게 끌려가는 사건도 있었다. 남(한국)의 해군 함정은 '완충수역'에 들어간 북(조선)의 해군 함정에게 북쪽으로 돌아가도록 경고방송을 하고, 북(조선)은 대남방송을 통해 자국의 영해에 남(한국) 해군 함정이 침범했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방송하는 긴장 속에서도 해마다 남북의 어선들은 그 수역에서 꽃게잡이를 해왔다. 이러한 꽃게잡이와 경고방송은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선'이니 '영해침범'이니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어진다.

올해 남(한국) 해군함정이 자국 영해를 침범했다는 북(조선) 방송이 처음으로 나온 때가 6월 5일이었으므로, 연평도 어선들이 연평어장에 들어간 때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올해도 적어도 6월 9일까지는 꽃게잡이와 경고방송이라는 '연례적인 현상'이 연평어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6월 7일 오후 남(한국) 합참은 북(조선) 경비정이 "영해를 침범했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런 사실은 없으며, 고속정 세 척을 동원하여 통상적인 경계활동을 펼쳤다고 했다. 이러한 통상적인 경계활동상황은 이날 국방부 위기대책반장에게 보고되지도 않고 넘어갔다. 6월 9일 남북의 해군함정이 충돌하는 우발적인 접촉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남(한국)의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경비정의 영해침범은 무력시위보다는 수출용 꽃게를 잡는 어선을 보호하기 위한 '생계형 월선'으로 보인다. 무력사용을 자제하는 대신 경고방송 등을 통해 자진 귀환을 유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남(한국) 국방부가 6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북한 경비정이 해마다 20-30차례 북방한계선을 넘었다가 돌아가 심각한 상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6월 10일부터 갑자기 사태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남(한국) 해군은 연평도 어선들의 출어를 금지시켰을 뿐아니라, 연평어장에 들어간 북(조선) 해군 함정들에게 경고방송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 '충돌식 밀어내기'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긴장의 파고가 차츰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대로 그로부터 닷새 뒤인 6월 15일 마침내 해상 포격전이 벌어졌다. 서해 교전의 원인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꽃게잡이라는 연례적인 현상과 경고방송이라는 통상적인 경계활동이 갑자기 험악한 사태로 돌변한 까닭을 밝혀내야 한다.

6월 15일 공격의사는 어느쪽에 있었는가?

통상적인 경계활동이 교전 사태로 돌변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중요한 분기점은 6월 11일이다. 이날부터 갑자기 사태가 험악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6월 10일 남(한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고, 연평어장에 해군 함정을 투입하여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동안에는 북(조선) 경비정들이 '북방한계선' 남쪽 6km 해상까지 내려와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하는 것을 허용하고 경고방송을 하는 수준에서 예년과 같이 통상적인 경계활동을 펴왔지만, 이날부터는 공세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보다 하루 전인 6월 9일 남(한국) 국방부가 발표한 성명에서 '영해 침범'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월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북한의 도발'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북한의 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을 보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공세적 대응을 취하려는 의사는 없었고 되레 북(조선)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가 예년과 달리 공세적 대응결정이 내린 다음날인 6월 11일 아침 8시 국방장관 조성태는 군사상황회의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번 사태를 조기에 끝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2시간 뒤인 10시 국방부 대변인 차영구는 국방부 기자실에서 "북한경비정의 자진철수를 유도하기 위해 대규모 해상시위를 벌여본 후 그래도 퇴각을 거부하면 군사작전 돌입이 불가피하다. 닷새째 계속되는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조만간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다. 작전돌입은 2-3일 내로 이뤄질 전망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북한 경비정의 영해침범행위를 조만간 끝장내겠다"고 말했다. 언론은 그가 "비장한 어조"로 이러한 군사작전 개시의사를 발표하였다고 보도했다.

남(한국) 국방부가 군사작전 개시의사를 발표한 때로부터 1시간 40분 뒤인 11시 40분께 연평어장은 갑자기 군사작전 해상으로 바뀌면서 제1단계 작전이 개시되었다. 연평도 서쪽 10km 해상에서 남(한국)의 고속정이 정지상태에 있던 북(조선)의 경비정 꼬리부분을 들이받는 충돌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이때 북(조선) 경비정 세 척이 차례로 꼬리부분을 들이받쳤다. 남(한국)군의 교전규칙은, 해군의 경우 경고방송→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으로 단계적 대응을 취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날부터는 경고방송이 아니라 충돌작전으로 나아갔다. 언론은 "이런 선박 충돌작전은 사실상 발포 다음 가는 강력한 자위조치라는 것이 합참쪽의 설명"이라고 보도했다.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의 공세적 대응결정과 국방부의 충돌작전 명령이 내려진 뒤에도 얼마동안 남(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이러한 급변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기류 변동이었으므로, 관성의 흐름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6월 11일 남(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는 "금강산 관광과 베이징 차관회담을 앞두고 남북 긴장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도발행위를 해도 약간 양보해야 한다는 스탠스가 있다. 강경조치를 해서 금강산 관광을 막는 것이 국민의 바람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북한이 약간 도발하더라도 약간은 양보해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뜻"이라며, "강공책만이 국민여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양보'의 기류는 밀려나고 '공세'의 기류가 남(한국) 군수뇌부를 뒤덮고 있었다. 6월 13일 국방장관 조성태는 또다시 충돌작전을 명령하였다. 이날부터 북(조선) 경비정들도 남(한국) 고속정의 충돌공격에 대응하여 충돌공격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남(한국) 해군은 6월 14일부터 초계함 두 척과 고속정 여덟 척을 동원한 충돌작전을 전개하였다. 남북의 어선들이 예년처럼 대치상태의 긴장 속에서나마 꽃게잡이를 하고 있던 연평어장은 충돌작전이 몰고온 살벌한 위기감이 감도는 '작전수역'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던 끝에 교전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6월 15일 아침 9시 7분쯤 남(한국) 해군의 고속정 참수리 325호와 참수리 338호는 "영해를 침범해 들어오는 북한 경비정들에게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충돌하라"는 공격명령을 받고 북(조선)의 경비정을 향해 돌진했다. 고속정 338호가 먼저 북(조선) 경비정 함미를 향해 돌진하자 그 경비정도 고속정을 맞받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삽시간에 바다 위에서는 충돌공격에 나선 쌍방의 함정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혼전이 벌어졌다. 이때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대위)은 "적함의 측면을 향해 돌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고속정 325호는 전속력으로 북(조선) 경비정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지금까지 북(조선) 경비정의 꼬리부분을 들이받는 충돌식 밀어내기 작전을 바꿔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공격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고속정 325호가 북(조선) 경비정의 옆구리를 들이받는 순간, 조타실에 있었던 내연병 안태성(상병)은 "충돌 순간 갑판에 있던 북한군 몇 명이 바다로 나가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바로 옆에서 충돌작전을 펴던 고속정 338호는 북(조선) 경비정의 꼬리 부분을 들이받은 뒤 미처 뒤로 빠지지 못하고 뱃머리가 얹혀져 있었다. 옆면을 들이받쳐 크게 파손되고 갑판의 해군 병사들이 바다로 나가떨어지는 공격을 받은 북(조선) 경비정에서는 소총으로 응사했다. 그때 고속정 325호 조타실에 있었던 기관장 허욱(중위)은 "당시 조타실에 있었는데 유리창을 통해 북한군이 총쏘는 모습과 조타실 유리창에 소총탄이 박히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고속정 325호 정장 안지영은 22mm, 40mm 함포로 응사하라고 명령했다. 남(한국) 고속정에서는 22mm, 40mm 함포가 불을 뿜었고, 북(조선) 경비정도 함포를 발사했다. 북(조선) 경비정의 옆구리 선체를 뚫고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고속정 325호가 뒤로 빠져나오는 순간, 뒤에 배치되어 있던 초계함은 76mm 함포를 발사하여 북(조선) 어뢰정을 격침시켰다.

포항급 초계함에 장착되어 있는 76mm 함포는 이탈리아 오오토메라사가 만든 것으로 발사단추를 누르면 컴퓨터 화면에서 공격목표가 사라질 때까지 분당 3백발의 포탄이 발사된다. 사거리는 12-13km이며, 발사된 포탄은 30-40cm 철판을 뚫을 수 있는 파괴력이 있다. 당시 현장에 배치된 초계함들은 76mm 함포를 가동하는 컴퓨터에는 북(조선)의 모든 경비정들과 어뢰정을 공격목표로 입력해놓은 상태였다.

위의 상황전개에서 드러났듯이, 함포를 먼저 발사한 쪽은 남(한국) 해군이었다. 남(한국) 해군의 발포명령이 내려진 과정을 밝혀달라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남(한국) 군부는 "충돌공격을 시작으로 양측의 혼전이 거듭되자 오전 9시27분께 2함대 사령관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응사준비를 지시했다"고 답변했다. 북(조선) 해군이 처음으로 사용한 발사체가 소총이었는지 아니면 25mm 기관포였는지를 물은 기자의 물음에 대해 남(한국) 군당국은 "최초 발사체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6월 15일 합동참모본부의 발표에서는 북(조선)이 "먼저 기관총 공격을 가해 즉각 응사했다"고 밝혔다. 꽃게잡이를 하다가 교전현장을 목격했던 남(한국) 어민의 증언을 들어보자. "갑자기 '쿵'하는 폭음이 들렸다. 처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불과 수분 사이에 수백발의 총성과 포성이 울려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했다. 조업중인 해상에서 2마일쯤 떨어진 서북쪽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이 다연발 총을 쏘자 곧바로 우리 고속정에서 함포를 쏴 응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목격담에서 나오는 '쿵'하는 폭음은 남(한국) 고속정이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북(조선) 경비정의 선체를 들이받았을 때 났던 소리였다. 북(조선) 경비정이 '다연발 총'을 쏘았다는 것은 북(조선)군의 개인화기인 AK-자동소총을 사격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조선) 경비정이 쏜 소총탄이 조타실 유리창에 박히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다는 남(한국) 해군병사의 말은 북(조선) 경비정이 쏜 최초 발사체가 함포가 아니라 소총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쪽에서 먼저 공격의사를 드러내보였는가? 공격의사를 드러내보인 쪽은 남(한국) 해군이었다. 북(조선) 해군과 교전했던 남(한국) 함정의 해군병사는 기자에게 자신들이 '충돌전법'으로 북(조선) 함정을 공격했을 때, 북(조선) 해군병사들은 심하게 욕을 하면서 주먹을 내지르는, 속칭 '감자 먹이기'를 해보였고, 어떤 병사는 먹고 있던 무말랭이를 던지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북(조선) 해군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전투복이 아니라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현장에 있던 북(조선) 함정이 공격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선체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려는 충돌공격에 대해 북(조선) 해군병사들이 소총으로 응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북(조선) 해군은 당시에 공격의사를 갖지 않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해마다 되풀이되어왔던 연평어장의 꽃게잡이 현장에서 올해는 경고방송의 통상적인 경계활동을 넘어서 갑자기 군사작전 명령이 하달되자 충돌공격이 개시되었으며 그 공격에 대응하여 북(조선) 해군 병사가 소총을 발사했고 남(한국) 해군함정이 함포로 응사하여 결국 쌍방이 포격전을 벌이는 해상 교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연평도 군사작전은 누가 명령을 내렸는가?

서해 교전이 일어나기 전에, 남(한국) 정부의 고위당국자는 기자에게 "우리는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다. (줄임) 상황에 맞게 대응하고 불필요하게 확대되는 것을 막는 게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이다. 예를 들어 소총을 쏘는 데 여기서 1백55mm 포를 쏠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말했지만, '완충수역'에서는 충돌공격에 맞서 소총으로 응사한 북(조선) 경비정을 향해서 미리 조준하고 있었던 76mm 함포를 발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던 그의 말과는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왜 이러한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그 해답은 누가, 어떤 목적에서 연평도 군사작전 명령을 내렸는가를 밝혀야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남(한국)군이 1994년 말 주한미군으로부터 평시 작전지휘권을 돌려받은 뒤로, 평시에 육군과 해군의 자위권 발동명령은 한미연합사 구성군 사령관(한국군 장성)이 내리게 되어 있으며, 공군의 자위권 발동명령은 주한미군 제7공군사령관이 내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평시에 육군과 해군의 자위권 발동명령이라 할지라도 주한미군사령관의 허가가 없이 남(한국)군 사령관이 독자적으로 자위권 발동명령을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번 해상 교전 사태가 주한미군사령부의 '작전수역'인 연평어장에서 국지전을 상정하고 벌였던 군사작전이었으므로, 공격명령과 발포명령은 주한미군사령부가 아니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번 연평도 군사작전에서 공격명령과 발포명령을 집행한 것은 남(한국) 해군이었지만, 남(한국) 군부는 군사작전에 처음부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고 통상적인 경계활동을 벌였던 것이 사실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이번 해상 교전 사태를 전후해서도 주한미군은 용산기지에 설치된 지하시설 'CC서울'에서 미군 정찰기로부터 수집한 첩보를 분석한 정보를 남(한국)군 합참에게 제공해왔다. 미군 첩보위성에서 수집한 첩보는 워싱턴에 있는 국가정찰국에서 직접 관장하고 있지만, 그 첩보도 주한미군사령부가 남(한국)군 합참에게 넘겨준 정보자료들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첩보를 분석한 정보에 기초하여 군사작전을 결정하는 사람은 남(한국)의 합참의장이 아니라 주한미군사령관 존 틸럴리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남(한국) 합참지휘통제실에 미군 연락장교를 상주시키고 있으며, 그 통제실에 비상연락선을 설치해놓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남(한국)군은 자체의 첩보능력이 없으므로, 주한미군의 작전지시를 받아서 남(한국)군에 대한 작전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작전지시 불능현상은 이번 교전사태에서도 드러났다. 합참이 교전사태를 처음으로 발표한 시각은 6월 15일 오전 10시 5분이었는데, 교전지역의 정확한 위치와 교전을 벌인 북(조선) 함정의 종류에 대해서는 무려 두 시간 반이 지난 12시 30분께 발표하였다. 이처럼 서해 교전현장에 대한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남(한국)군이 주한미군의 작전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명령을 내릴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제 해상 교전 사태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한미군사령부의 동향이다. 교전 사태가 일어난 '완충수역'을 작전수역으로 설정하고 그 수역에서 작전을 명령하는 최종 결정권자는 남(한국) 군당국이 아니라 주한미군사령관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움직임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남(한국)의 군관계자들은 '완충수역'의 긴장된 분위기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가 종전과 달리 상당히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1996년의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 등과 같은 긴장사태가 일어났을 때 주한미군사령부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6월 9일 주한미군사령관 존 틸럴리는 합참의장 김진호를 만났다. 이때부터 남(한국) 합동참모본부와 주한미군사령부의 대령-중장급 실무자들이 수시로 만나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위기조치반'을 가동하기 시작했던 6월 11일에도 주한미군사령관 틸럴리는 합참의장 김진호와 긴급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연평도 군사작전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점검했다. 여기서 말하는 '최악의 상황'이란 서해에서 남북이 함포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항공기들이 공중공격을 퍼붓는 국지전을 의미한다. 이때 이미 주한미군사령부는 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 주한미군 대변인 칼 크라프는 "유엔사는 북한의 북방한계선 남쪽 해상 침범을 긴장을 고조시키는 명백한 도발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북한은 북방한계선 남쪽에 해군 함정을 보내는 것을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 북(조선)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가? 충돌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남(한국)군 내부의 통신내용이 북(조선)측에 의해 감청되어 북(조선)의 서해 해안포 부대 지휘부에 보고되었다. 이로써 북(조선) 군당국도 남(한국) 해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파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조선) 군당국은 공세적인 군사작전에 대처할 만한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6월 15일의 교전사태가 일어난 직후 인데도, 북(조선)의 일부 공군기지들에서는 전투기들이 엔진을 걸어놓고 활주로에서 발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대기상태에만 머물렀다. 또한 북(조선)이 서해에 배치한 가장 강력한 해군부대인 9전대 소속 함정들도 평상적인 활동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기서 서해 교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 클린턴 행정부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그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하게 소집하지 않았다. 국가안보회의 대변인 크롤리는 "국가안보회의는 일상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 사건으로 특별히 소집된 적은 없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폴리는 공식논평에서 "우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대결을 피하고 긴장완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의 또 다른 대변인 해머가 "잘못은 북한에 있다"는 논평을 냈던 사실과 관련하여 어떤 기자가 서해 교전 사태에 대한 북(조선)의 책임을 지적한 것은 국가안보회의나 백악관의 견해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국가안보회의 대변인 크롤리는 "북한이 보다 공격적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이 잘못했다는 논평은 해머의 견해일 뿐"이라고 했다. 이것은 백악관-국무부가 국방부-군부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래에서 밝혀지게 되겠지만, 백악관과 국무부는 북(조선)과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해 교전 사태와 같은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고 있었다.

미국 군부는 왜 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하였는가?

주한미군사령부가 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하였고, 그것이 결국 교전 사태로 이어졌음은 이미 위에서 밝힌대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한미군사령부는 국지전을 상정한 군사작전을 추진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되지 못하고, 군사행동의 집행단위일 뿐이라는 점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미 태평양사령부의 휘하에 들어가 있으며, 미 태평양사령부는 미 국방부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므로 서해 교전 사태와 관련한 주한미군사령부의 움직임은 '군사적 행동'을 보여줄 뿐이며, 연평도 군사작전을 벌이도록 추동한 정치적 동기는 워싱턴의 미국 군부에게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번 서해 교전 사태는 미국 군부의 정치적 동기를 파악하지 않으면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미국 군부가 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한 정치적 동기는 무엇일까?

연평도 군사작전과 관련한 미국 군부의 정치적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주한미군사령부의 군사행동을 추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연평도 군사작전을 추진한 미국 군부의 정치적 동기가 백악관, 국무부, 의회가 최근 조·미관계와 관련하여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동향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미관계와 관련하여 움직이고 있는 워싱턴 정치권의 동향을 살펴보면, 미국 군부의 정치적 동기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조·미관계와 관련하여 워싱턴 정치권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엄청난 변화는 두 개의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사건이란 미국 대통령 특사 윌리엄 페리가 클린턴의 친서를 들고 평양을 방문했던 사건을 말한다. 1994년 6월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평양을 방문한 것이 한(조선)반도의 위기사태를 전환시킨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에 대통령 특사가 친서를 들고 평양을 방문한 것은 한(조선)반도 분단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을 수 있을만한 중대한 사건이다. 5년 전 지미 카터는 민간사절의 신분으로 방북했지만, 이번에 윌리엄 페리는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간 특사의 신분이었다. 이 점은 매우 중대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통령 특사의 파견과 친서 전달은 중대하고 획기적인 사태의 진전을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대로, 이번 페리의 평양방문을 통하여 클린턴 행정부가 북(조선)에게 전달했던 내용은 이른바 '포괄적 접근방안'이라는 것이다. 페리는 워싱턴으로 돌아온 뒤에, 포괄적 접근방안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나 그 방안에 대한 북(조선)의 반응에 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능히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방북이 조·미관계 개선을 위한 한 단계 높은 정치협상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번 페리 조정관의 방북으로 미·북간에 심도있는 대화채널이 형성되었다. 미국측이 북한과의 관계개선 구상을 충분히 전달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조·미관계의 개선이란 결국 경제제재조치 해제(경제부문)→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군사부문)→국교수립(정치부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략적 경로를 뜻한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러한 경로를 추진하면서 북(조선)에게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북(조선)이 대량파괴무기의 개발과 수출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북(조선)과 국교를 수립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북(조선)이 특사 파견과 친서 전달을 통해서 북(조선)에게 요구한 대량파괴무기의 개발과 수출을 원안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고 방북길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사방북단의 한 성원은 워싱턴에 돌아온 뒤에, 북(조선)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제안이 덫을 파놓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보였지만, 미국의 제안을 매우 주의 깊게 들었으며, 질문을 많이 하면서 기록하였다고 말했다.

지금 언론이 알려주고 있는대로, 클린턴 행정부는 새로운 대통령 특사를 임명하여 대북협상을 일원화하고 대북교섭창구를 대통령 특사급으로 격상시키려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 윌리엄 페리는 6월 10일 지미 카터와 전화로 통화한 뒤, 워싱턴에서 열린 한 강연에 나가 클린턴 행정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를 워싱턴에 초청하기로 했으며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가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될 것이며, 그의 워싱턴 방문은 7월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북(조선)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에 대해 "긍정적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과 북(조선)이 특사교환을 통하여 조·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준비에 들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양-워싱턴의 특사교환이 실현되면서 조·미관계는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사건은 5월 20일부터 닷새동안 14명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현장조사단이 금창리 지하시설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조사결과를 아직 발표하고 있지 않지만, 현장조사를 마친 바로 다음에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은 "땅속의 매우 넓은 공간에 텅빈 굴들이 이리저리 뚫려있는 미완공 지하시설을 보았다"고 밝힌 바있다. 이로써 금창리 지하시설공사를 핵개발 의혹으로 연결시키려 했던 워싱턴 강경파의 음모는 파탄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사건, 다시 말해서 평양-워싱턴 특사교환의 추진과 금창리 핵개발 의혹의 해소라는 엄청난 사건로 인해 타격을 입은 쪽은 두말할 것도 없이 워싱턴의 강경파들이다. 지난해에 금창리 지하시설공사를 핵개발 의혹으로 연결시키면서 북(조선)의 핵개발 음모설을 내돌렸던 국방정보국(DIA)은 이번에 금창리 현장조사 이후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망신을 당했다. 또한 금창리 핵개발 의혹을 빌미로 삼아 한(조선)반도에 제2차 핵위기를 몰아가려고 했던 미국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평양-워싱턴 특사교환이 성사되면서 한(조선)반도의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제기되고, 조·미관계 개선이 속도를 높이게 되면 결정타를 입는 세력도 또한 워싱턴의 강경파들이다. 조·미관계 개선의 진전에 반비례하여 주한미군사령부의 위상은 추락들 것이다. 평화협정의 체결이 주한미군 감축으로 이어진다면, 주한미군사령부는 존폐위기로 몰려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클린턴은 유고전쟁 이후 추락하고 있는 지지도를 끌어올려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내년 11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재집권하기 위해서 자기 임기 안에 화려한 외교치적을 만들어내놓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 클린턴이 1996년 대선에서 이기고 재집권할 때 그가 내세운 가장 성공적인 외교치적이 1994년의 제네바 합의였던 것을 상기한다면, 내년 대선에서도 제네바 합의에 버금가는 대북정책의 획기적인 조치를 이용하여 민주당의 재집권 전략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나온다. 클린턴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특사교환은 바로 이러한 민주당의 재집권 전략에 연동되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추진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당 재집권 전략에 강하게 반대하는 세력은 연방의회의 공화당 세력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화당 세력은 이러한 클린턴의 대북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회에서 클린턴 반대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 벤저민 길먼은 6월 9일 페리의 방북결과 보고를 들은 다음, 클린턴 행정부가 의회와 협의하지 않고 북(조선)과 은밀히 정치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반대의사를 밝힌 바있다.

이처럼 조·미관계 개선을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연방의회의 공화당 세력과 미국 군부가 똑같지만, 미국 군부는 공화당 세력이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조선)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무력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이다. 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은 이러한 정치적 의도에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윌리엄 페리가 평양-워싱턴의 특사교환을 언론에 공개했던 날이 6월 10일이었고, 주한미군사령관 틸럴리가 합참의장 김진호와 긴급회동을 갖고 국지전을 상정한 연평도 군사작전을 최종 점검한 날이 6월 11일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주한미군사령부는 서해의 교전 사태가 확산될 경우, 해안포와 미사일 공격에 의한 국지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지전 시나리오는 남(한국) 군당국이 언론에 공개한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평시의 군사훈련에 관한 계획이 아니므로 당연히 전시 군사작전을 행사하게 되어있는 주한미군사령부가 작성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만일 이번에 북(조선)군의 어뢰정이 남(한국) 초계함에 대해 어뢰공격을 감행하고, 황해남도 해안에 배치된 해안포들이 불을 뿜었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경우 미국 군부의 의도대로 쌍방 사이에 해안포와 미사일을 발사하는 대규모 교전으로 확대되어 결국 국지전이 터졌을지 모른다. 만일 서해의 해상 포격전이 대규모 무력충돌로 확대되면서 국지전이 터졌더라면, 클린턴 행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추진하려고 하는 '포괄적 접근방안'은 의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침몰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는 조·미관계는 다시 대결의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민족은 또 한 차례 아슬아슬한 전쟁위기를 비켜간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이번 서해 교전 사태를 남북의 무력충돌이라는 겉모습만으로 파악하려는 잘못된 시각을 거부해야 한다. 지금 남북 정부당국은 연평도 꽃게어장에서 연례적으로 있어왔던 남북 함정의 대치를 위험한 무력충돌과 국지전으로 이끌어갈 아무런 명분도 실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조·미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는 백악관과 국무부도 한(조선)반도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이번 서해 교전 사태는 조·미관계가 개선되는 추세에 따라 정치·군사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 미국 군부가 그것을 만회해보려고 무모하게 일으킨 저강도 분쟁이다. 미국 군부가 획책한 저강도 분쟁(low intensity conflict)은 교전사태를 전면전으로 확대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정치·군사적 요구에 따라 분쟁 강도를 조절해가는 무력행위인 것이다.

미국 군부의 저강도 분쟁 책동이 파탄되고, 남북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평양-워싱턴의 특사교환은 앞으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겠지만, 서해 교전의 화를 관계 개선의 복으로 바꿀 수 있는 새로운 협상의 돌파구를 열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미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은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올해 우리 민족민주운동에게 주어진 책무는 이러한 개선의 방향이 평화적 분단관리가 아니라 자주적 평화통일의 실현으로 이어지도록 온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금세기 마지막 해는 이 민족에게 매우 중대한 기회를 안겨주고 있다. (1999년 6월 2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