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조선)반도에서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길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정전 협정 체결 당사자와 정전 협정 유지의 책임 당사자

한(조선)반도를 파괴와 죽임의 참극으로 몰아넣었던 3년 전쟁을 정지시키는 정전 협정 서명식 현장에 있었던 한 중국인 목격자의 증언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정전회담 중국측 대표단 비서장이었던 시성문은 1953년 7월 27일 역사의 현장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정각 10시 건물 안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하다. 이윽고 조·중 대표단 수석대표 남일 대장과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이 건물 남문으로 들어서 각각 회의 탁자 앞에 앉았다. 두 수석대표는 자기 측 서명을 돕는 요원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 측이 준비한 9본 정전 협정에 서명한 후 9본을 교환, 상대방이 가져온 데다 서명했다. 그리고는 이 9본을 사령관에 보내어 서명하였다. 이 특이한 서명식은 쌍방 요원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에 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두 수석대표는 긴장은 했지만 일사불란하게 10분만에 18본 서명을 끝냈다. 사전에 이미 쌍방 수석대표 남일, 해리슨이 서명하는 시간을 협정 체결 시간으로 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서명식이 오전 10시 10분에 완료하고 남일 대장, 해리슨 중장은 따로따로 자기측 요원과 같이 일어나 건물을 빠져 나갔다."

그날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투는 끝났지만, 그로부터 40년이 넘은 오늘까지도 한(조선)반도의 정전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전쟁 상태를 완전히 마감하지 못하고 정전 상태를 40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는 이 특이한 현실은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길이 없다. 이처럼 인류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정전 협정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코리아의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이다.

정전 협정은 법적 당사자와 체결 당사자, 준수 당사자가 서로 다른 '이상한' 협정이다. 바로 이러한 당사자가 불일치하는 현실 때문에 정전 협정에 관한 문제가 복잡성을 띄게 된다. 정전 협정의 법적 당사자는 3자로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 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유엔군 총사령관 미합중국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로 되어 있고,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하여 조인한 당사자는 2자로서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과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 미합중국 육군중장 윌리엄 해리슨 2세로 되어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정전 협정 체결 당사자의 법리상 대표성과 사실상 대표성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국제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전 협정을 체결한 법리상(de jure) 당사자는 분명히 유엔(군)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전 협정을 체결한 사실상(de facto) 당사자는 미합중국(군)이었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가)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의 구성 무력들 가운데서 결정적인 역할과 지위를 차지하면서 구성 무력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나라는 미합중국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은 현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세계 각 분쟁 지역에 파병하고 있는 이른바 '유엔 평화 유지군(U.N. Peace-Keeping Force)이 아니었다. 그 유엔군은 명목상으로는 유엔군이었으나, 사실상은 걸프전에 참전한 나라들이 미합중국이 주도한 연합군에 편입되었던 이른바 다국적군(multinational force)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를 통해 유엔군 사령부를 창설하자고 결의하지 않았고, 다만 유엔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원조를 미합중국의 지휘를 받는 '통합 사령부'가 사용하도록 요청하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은 유엔군 사령부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공식 의결을 거쳐 설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이 결의안에 나타난 중요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 유엔 안보리는 유엔군 사령부(U.N. Forces Command)를 창설한 것이 아니라 '미합중국 예하의 통합 사령부(unified command under the United States)'를 창설하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남(한국)에 잔존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는 유엔 안보리의 공식 결의로 창설된 것이 아니라, 미합중국이 자국 예하의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통합 사령부의 이름을 '임의로'(합법적 절차나 법적 근거가 없이) 유엔군 사령부로 변경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② 유엔 회원국으로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하는 나라들은 자국의 참전 무력을 미합중국 예하의 통합 사령부가 지휘할 수 있도록 '권고(recommend)'하였다는 점이다. 위임이나 이양이 아니었다.

③ 애초에 유엔군 사령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엔기의 사용 문제에 관해서도 미합중국 예하의 통합 사령부가 '임의로(at its discretion)'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했으며(이 말은 유엔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음), 유엔기와 함께 다른 참전국들의 국기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했다는 점이다.

④ 통합 사령부가 수행한 작전에 관련한 보고서를 유엔 안보리에 제출하도록 미합중국에게 '요청(request)'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전 협정 체결 뒤로 유엔군을 구성했던 15개 참전국들(미합중국을 제외한 참전국들)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부의 결정에 의해서 자기 군대를 한(조선)반도에서 철수했다. 이러한 사실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남(한국)에 주둔했던 유엔군에 대해 지휘권을 행사한 적이 없었고,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유엔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한 주체는 미합중국이었고, 유엔군에 대해 지휘권을 행사한 주체인 유엔군 사령부는 사실상 미군 사령부였다.

(나) 유엔군 사령관의 임명권과 군사 지휘권은 유엔에 있지 아니하고 미합중국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유엔은 미합중국이 정치적으로 장악한 외교 무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 정전 협정 조인 당사자인 유엔군 대표단의 수석 대표는 미군 장성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정전 협정을 체결한 법리상, 사실상 당사자였으며, 정전 협정 체결 과정에서 법적 지위를 가진 당사자였다.

대한민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유엔군의 일원이 될 법적 자격이 없었다. 따라서 대한민국(군)의 전쟁 수행은 유엔군에게 자기의 군사 지휘권을 넘겨준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 구성군들 가운데서 자국의 군사 지휘권을 이양한 교전 당사자는 대한민국 뿐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군)은 정전 협정 체결 과정에서 자연히 법적 지위를 인정 받을 수 없었고, 실제로 인정 받지도 못했다. 분명한 사실은 정전 협정 체결의 법적 당사자는 유엔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이며, 전시 피보호국이었던 대한민국은 그 당사자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전 협정을 준수·집행·유지하는 책임적 당사자는 체결 당사자와 다르다. 정전 협정 제17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본 정전 협정의 조항과 규정을 준수하며 집행하는 책임은 본 정전 협정에 조인한 자와 그의 후임 사령관에게 속한다."(Responsibility for compliance with and enforcement of the terms and provisions of this Armistice Agreement is that of the signatories hereto and their successors in command.)

이 조항은 정전 협정의 효력을 받는 당사자는 조인 당사자, 곧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미합중국)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유엔군 대표단이나 조·중 대표단은 그 대표단 자체가 법적 지위를 지닌 조인 당사자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협정 조인에 나섰던 양측의 '대표단'이란 조인 절차에서 편의상 대표성을 부여받은 잠정적 실체였지, 그 자체가 항구적인 법인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두 '대표단'들은 현재 한(조선)반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화인민공화국(군)은 정전 협정의 체결 당사자이긴 했으나, 그 협정을 준수·집행·유지하는 책임 당사자도, 현재 그 협정의 효력을 받고 있는 당사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전 협정의 원문을 보면, 체결(조인) 방식이 특이하게도 이중적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 있었던 서명식 현장에 나와서 정전 협정문에 서명한 사람은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인 조선인민군 남일 대장과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인 미 육군중장 윌리엄 해리슨 2세였고, 나중에 정전 협정문에 서명한 사람과 그 공식 직함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미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로 되어 있다. 이렇게 이중적인 서명 절차를 밝아야 했던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극렬한 정전 반대 행동을 우려한 조·중·미 세 나라의 배려 때문이라고 한다. 세 나라 최고 사령관들이 판문점 서명식에 참석하게 될 경우, 정전 협정 체결을 극력 반대한 이승만 정권이 그 서명식을 파탄시키려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매우 불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세 나라 최고 사령관들이 서명식 현장에 와서 서명하지 않고 먼저 쌍방 수석대표들을 판문점 서명식장에 보내서 서명하게 하고 각자가 최고 사령관들에게 보내서 다시 서명을 받아 협정서를 교환하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 방법에 합의하여 판문점 서명식장에는 조·중 대표단 수석대표와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가 참석하여 서명했고, 유엔군 총사령관 미 육군대장 크라크 장군은 같은 날 문산에 있는 막사에서 서명했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는 남일 수석대표가 그날밤 10시 평양에 있는 수상관저에 가지고 온 정전협정문에 서명했으며, 중국인민지원군 팽덕회 사령관은 그날 저녁 개성에서 열린 정전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한 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지원군 대표단의 새 회의실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다른 한 편, 대한민국(군)은 체결 당사자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1950년 7월 15일 이른바 '군사 지휘권(command authority) 이양공한'에 의해 유엔군 사령관에게 군사 지휘권을 이양하였고, 이로써 유엔군의 지휘·통제를 받음으로써 정전에 관한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를 따라 정전 협정의 효력을 '간접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북 기본합의서 제5조는 "남과 북은 현 정전 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 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 정전 협정을 준수한다"고 규정하면서 현 군사 정전 협정을 준수하는 주체가 남과 북임을 명시한 바 있다. 이 규정의 첫 귀절인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표현은 '협정' 또는 '조약'이라는 법적 개념을 피하고 '상태'라는 일반 개념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호하고 포괄적인 뜻으로 해석할 여기를 남겨주고 있는데, 현 군사 정전 협정을 준수한다는 둘째 귀절은 정전 협정 제17조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규정이다. 이 모순 규정에 대한 법리적 해석은 남측(대한민국)은 한·미 연합사를 통해서 대한민국(군)의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한·미 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의 지휘를 따라 정전 협정을 '간접적으로' 준수한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2) 교전 당사자와 정전 협정 체결 당사자

한국(조선)전쟁에서 교전 당사자는 누구였는가? 우리는 참전 16개국을 모두 교전 당사자로 인정할 수 없으며, 참전 16개국이 구성한 유엔군을 교전 당사자로 인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상(de facto) 교전 당사자와 법리상(de jure) 교전 당사자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의 교전 당사자는 미합중국(군)과 대한민국(군)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과 중화인민공화국(군)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4자 형식을 띄고 있었지만, 법리상의 교전 당사자는 대한민국(군)이 유엔군에게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으므로,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과 중화인민공화국(군)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3자였다. 정전 협정을 체결하던 당시, 대한민국은 완전한 독립·주권 국가가 아니었으며, 미국이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후견하는 전시 피보호국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그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유엔 회원국의 군대로서 구성되는 유엔군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전시 피보호국의 무력이 독자적인 지위와 권능(군사 지휘권)을 지닐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사실상의 교전 당사자라고 해서 법리성을 초월하여 모두 정전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군)은 사실상의 교전 당사자이기는 했지만, 정전 협정 체결과정에서 아무런 법적 지위도 인정 받지 못했으므로 정전 협정 체결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정전 협정 체결이란 국제법으로 인정 받는 체결 당사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문제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3) 교전 당사자와 현존 무력 대치 당사자

현 정전 상태란 법리상으로 보자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의 체결·발효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지만, 사실상으로 보자면 현재 무력을 대치하고 있는 상태, 정전 협정의 효력을 받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의 현 정전 상태란 교전 당사자였던 유엔군과 중화인민공화국(군)의 무력이 한(조선)반도에서 철수하고 난 뒤의 정전 상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까닭은 아래와 같다.

(가) 유엔군은 미군을 제외한 모든 구성국 무력이 남(한국)에서 철수하여 유엔군 사령부만을 형식적으로 남겨놓았다는 점.

(나) 1975년 11월 제30차 유엔 총회에서 주한유엔군 사령부 해체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므로, 유엔군 사령부는 그 명목상의 존립마저도 거부당했다. 유엔 총회 결의안 제3390B호가 그것이다. 그 결의안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현 정전 상태가 코리아에서 지속되는 한 항구적인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그리고 코리아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이 지역의 무력 충돌을 미리 막고 긴장을 해소하며, 코리아의 내정에 대한 외부 간섭을 끝내기 위한 새로운 결정적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 깃발 아래 남코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군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 총회에서는 유엔군 사령부의 존속 결의안도 결의안 제3390A호로 통과되어 상반되는 두 결의안을 모두 통과시키는 모순을 드러낸 바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 당시 유엔 총회는 동서 진영 냉전의 싸움판으로서 두 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팽팽하게 외교적 대결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유엔군 사령부 해체 및 주한 외국군 철수 촉구안은 유엔 총회에 상정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남(한국) 당국과 북(조선) 당국은 물론 다른 유엔 회원국들도 이 사안이 유엔 총회에서 쓸모 없는 진영 대결만을 드러내는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결국 아무도 꺼내지 않는 외교적 '기피 사안'이 되고 말았다. 유엔 총회가 유엔군 사령부 해체 문제 및 정전 협정 처리 문제를 기피하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1991년 9월 제46차 유엔 총회는 남북 동시 가입을 승인하는 '이변'을 낳았다. 이것은 북(조선)과 유엔군 사이에 정전 협정을 그대로 유지시킨 상태에서 북(조선)을 유엔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다) 유엔군을 구성했던 주한미군과 대한민국 군에 대한 유엔군의 군사 지휘권은 1978년 11월 한·미 연합사령부 창설과 더불어 한·미 연합사령부로 넘어갔으므로, 그 뒤로 유엔군에게는 이름과 깃발만 남아있는 꼴이 되어 유엔군의 존재는 소멸한 것이며, 따라서 사실상의 현존 무력대치 당사자로 볼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군)은 사실상의 교전 당사자(법리상의 교전 당사자가 아니라)였고, 사실상의 현존 무력 대치 당사자(법리상의 무력 대치 당사자가 아니라)라고 보아야 한다. 법리상의 현존 무력 대치 당사자는 미합중국(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지만, 사실상의 현존 무력대치 당사자는 미합중국(군), 대한민국(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다.

중화인민공화국(군)은 사실상의 교전 당사자며, 법리상의 교전 당사자였으나, 1957년 자국의 무력을 한(조선)반도에서 완전 철수하였으므로, 사실상으로나 법리상으로 현존 무력대치 당사자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한(조선)반도에서 현재 무력을 대치하고 있는 당사자가 앞으로 평화질서 수립을 위한 실질적 책임을 진다고(또는 실질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볼 때, 그 당사자를 사실상 당사자로 규정하느냐, 아니면 법리상 당사자로 규정하느냐를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만일 현존하는 무력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미래의 평화질서 수립에 법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법리상의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밝힌다면, 그것은 미합중국(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될 것이고, 만일 그 사실상의 당사자를 밝히자면 그것은 미합중국(군), 대한민국(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미합중국이 대한민국(군)에게 군사 지휘권을 이양하지 않는 한, 법리상의 당사자와 사실상의 당사자가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법리성과 사실성, 이 양자의 불일치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실질적으로 풀어내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드러난다.

(4) 당사자 불일치성을 해결하고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길

한(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길은 '현 정전 상태'를 극복·청산하고 항구적인 평화 질서를 보장하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합의를 이루어내고 그것을 이행하는 과업과 현존 무력 대치 상태를 극복하고 실질적으로 군비를 축소하는 과업, 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관한 대부분 논의들은 여기서 말하는 공고한 평화 질서를 보장하는 합의를 '평화 협정 체결'이라는 개념으로만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는 데, 공고한 평화 질서를 보장하는 문제를 반드시 '평화 협정 체결'만으로 국한시켜서 규정할 필요는 없다.

또한 용어 선택에 관해서도 나는 '휴전' 협정이라는 용어보다는 '정전' 협정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듯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평화' 협정'이라는 용어보다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음을 뚜렷이 나타내는 평화' 조약'(peace treaty)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한(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길에는 두 가지 조치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법적 조치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조치다. 법적 조치와 실질적 조치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법적 조치가 선결되지 않는 한 실질적 조치를 이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법적 조치란 한(조선)반도 평화 문제의 당사자들이 평화 회담을 시작하는 일이며, 그 평화 회담의 결과로 회담 참가자들이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새로운 법적 규범(조약)을 만들어내는 일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질적 조치란 한(조선)반도 평화 문제의 당사자들이 위에서 말한 새로운 법적 규범에 근거하여 군축 회담을 열고 실질적인 군비 축소를 합의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이다. 남(한국) 당국은 한(조선)반도의 군축 문제에 관하여 우선 '신뢰 구축 조치(confidence-building measures)'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한 논리다. 군축 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먼저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는 구호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군축의 실질적인 이행이 '법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신뢰 구축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군축이란 신뢰 구축 조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법적 규범의 창출과 그 규범 이행 여부에 관한 철저한 현장 감시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 지역에서 있었던 군축 이행의 역사적 경험은 이러한 법 규범을 창출하는 것과 현장 감시 체제를 가동하는 것 밖에는 다른 어떠한 조치도 효과·의미가 없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남(한국) 당국의 이른바 '신뢰 구축 조치 우선론'은 실질적인 군축 이행을 위한 범규범 창출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담긴 게 아닌가 하는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전 상태 및 평화 문제에 관련한 당사자의 불일치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19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 및 1994년의 조·미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이후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정전 상태 및 평화 문제에 관련하여 법리성과 사실성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평화 회담 참석 당사자와 평화' 조약' 체결 당사자도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할 책임적인 당사자는 과연 누가되어야 하는가 (또는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몇 가지 주장과 견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 남북 당사자론

남(한국) 당국은 이른바 '당사자 해결 원칙'을 내세우면서 남북 양 당국이 평화 문제에 관련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한국) 당국은 현존 무력 대치 당사자(사실상의 당사자)라는 것만이 유일한 자신의 지위인데도 '당사자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남북 기본합의서 제5조는 "남과 북은 현 정전 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 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 정전 협정을 준수한다"고 규정하면서 현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는 주체가 남과 북임을 명시한 바있다. 이 조항은 정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전환시킨다는 표현이 아니라,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시킨다고 표현함으로써 모호한 개념으로 남겨두었다.

한(조선)반도의 평화 문제에 관련한 당사자를 남측 당국(대한민국)과 북측 당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미합중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남과 북만이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하는 남(한국) 당국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일 뿐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이 주장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대로 아래와 같은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① 남(한국) 당국은 정전 협정 체결을 반대하였고, 정전 협상을 위한 본 회의에 참관 자 자격으로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정전 협정 조인식에도 참관자 자격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남(한국) 당국이 '북진 통일'을 주장함으로써, 정전 협정을 체결하려고 협상하고 있던 미합중국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있다. 남(한국) 당국은 1953년 6월 8일에 체결된 전쟁 포로에 관한 협정을 파괴하기 위해 6월 18일 이른바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정전 협정 체결을 극력 반대하고 있던 남(한국) 당국을 무마하려는 미합중국의 조치는 1953년 6월 6일자로 「미합중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Letter of President Eisenhower to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on Proposed Korean Armistice and U.S. Policy in Korea)」와 1953년 7월 11일에 나온 「이승만과 미 국무차관 로벗슨의 공동성명(Joint Statement by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and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Walter S. Robertson)」에 드러나 있다.

② 정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정전 회담이 열리고 있었던 당시로 말하면 남(한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유엔군으로 참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 남(한국)이 그 협정의 법적 효력을 받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따로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합중국은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15일 유엔군을 대표하여 남(한국)과 그 군대가 정전 협정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과 유엔군이 책임을 지고 남(한국) 당국이 정전 협정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겠다는 것을 북(조선) 당국에 보장하였다. 그리고 미합중국은 이러한 보장 조치를 지키기 위하여 남(한국) 당국을 군사 정전위원회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한국)의 군사 정전위원회 참석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정전 협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한 미국의 조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③ 남(한국) 당국은 현 정전 상태를 규정하고 있는 정전 협정의 법적 지위를 지니지 못하고 있고, 유엔군이 법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전 협정을 체결·조인·유지·준수·집행하는 법리적 당사자는 유엔군 사령부를 '대표'하는 주한미군 사령관이다.

④ 1954년 4월 26일에서 6월 15일까지 쌍방 참전국 및 관련국 19개국 대표들이 참가하는 정치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을 때, 남(한국) 당국도 이 정치 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들어 정전 협정의 법적 지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회의는 '인도차이나와 한(조선)반도에 관한 국제 회의'로서 원래 한(조선)반도 문제만이 아니라, 인도차이나 문제를 비롯한 아시아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며, 따라서 한(조선)반도의 정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대체하려는 목적으로만 열린 회의가 아니었다. 그 회의에는 정전 협정의 법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참전국들도 참석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소연방은 참전국이 아닌데도 별도로 초청을 받아 참석한 바있다. 따라서 이 정치 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곧 정전 협정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⑤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늘까지 정전위원회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담당하고 처리한 것은 남(한국) 당국이 아니라, 유엔군을 대표하는 주한미군이었다.

⑥ 한·미 연합군의 군사 지휘권(작전 통제권만이 아니다.)은 미합중국(군)에게 있으므로 현재 한(조선)반도에서 무력을 대치하고 있는 법리상 당사자는 미합중국(군)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1950년 7월 이른바 '지휘권 이양공한'을 통해 유엔군 사령관(미합중국 장성)에게 넘어간 대한민국의 군사 지휘권은 1978년 11월 한·미 연합사령부 설치법을 따라 한·미 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에게 다시 넘어가고 말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한·미 연합사령부 설치법은 한·미 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은 오로지 미합중국의 합동참모본부에만 보고하고 그 지시를 받을 뿐 남(한국) 당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고를 할 필요가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⑦ 남(한국) 당국은 북(조선)에 대해 무력을 대치하고 있는 실질적 당사자인 주한미군의 존재를 부정·배제할 수 있는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미합중국은 남(한국)과 북(조선) 사이에서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민족 내부의 단독적인 합의(미합중국을 배제한 합의)는 반대하고 있다. 미합중국이 '혹시'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한 뒤라면 모르겠지만(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란 군축 문제만이 아니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파기, 즉 동맹 관계의 해소를 뜻하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현재 상태에서라면 남북 평화조약 체결론은 미합중국의 반대로 성사되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북(조선) 당국도 지금껏 남(한국) 당국을 당사자로 인정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이므로, 남북 평화조약 체결론은 북(조선) 당국이 반대하기 때문에라도 실현되기 힘들다. 남북 평화 조약 체결론은 북(조선) 당국과 미합중국이 모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성사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남(한국)과 북(조선) 사이에서는 분단 이후 이제껏 한 번도 서로를 국가로 승인한 적이 없다. 서로를 '자신의 영토 일부를 무력으로 불법 점령하고 있는 교전 단체(belligerency), 또는 반란 단체(insurgency)'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남북 기본합의서에서는 남북 관계를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 관계", 곧 단일한 민족 공동체 내부의 특수 관계로 인정함으로써, 처음으로 상대방을 국가도, 교전 단체도, 반란 단체도 아닌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발효 이후 남북 관계의 법적 지위가 변화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남북 평화 협정을 거론하게 되면, 이것은 복수의 주권 국가들 사이에서 맺는 '강화 조약'을 뜻하게 된다. 국가와 교전 단체 사이에서도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법적 합의를 맺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약'이란 국가 대 국가의 관계, 상대방을 공식적으로 국가라고 승인한 조건에서 맺는 법적 합의를 뜻한다. 이를테면 1952년의 미·일 평화 조약, 1978년의 중·일 평화 우호 조약 같은 것이 그것이며 19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도 동서독 상호 간에 국가적 승인을 공식적으로 합의했다는 점에서 이에 속한다. 남북이 서로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한 최초의 역사적 문서를 남북 기본'조약'이라고 하지 않고, 남북 기본'합의서'라고 한 까닭도 바로 이러한 국가 승인을 거부해야 하는 사정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존 남북 관계를 분열·독립된 주권국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반적 국제 관계가 아니라, 단일 민족 공동체 내부의 특수 관계라고 규정한다면,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어떠한 형태의 합의도 '조약' 또는 '협정'으로 표기할 수 없으며(또는 표기해서 안되며), '합의'라고 표기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남(한국) 당국이 주장하는대로 남(한국)과 북(조선)이 서로를 분열·독립된 주권국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남북 국가 연합' 단계, 곧 남북 상호 승인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나라 사이에 평화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것은 이른바 '남북 평화 공존 시대'가 개막하게 되리라는 기대로 표현되고 있다.)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한국) 당국의 이른바 3단계 통일 방안에 들어있는 국가 연합 단계론은 이런 점에서 남북 당사자 평화 조약 체결론과 적어도 논리적으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남(한국) 당국의 논리대로 하자면, 유엔에의 남북 동시 가입 → 한(조선)반도 주변 4개국의 남북 교차 승인 완성 → 남북의 상호 국가 승인 → 남북 평화 공존 시대 개막이라는 변화 과정을 밟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한(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있을지 모르나, '통일'을 완전히 포기·배제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자는 반통일적 주장이며, '평화 공존'과 '호혜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무장 대치한 군사 분계선을 평화로운 국경선으로 바꾸어놓아 결국 조국 분단과 민족 분열을 영구화·합법화하려는 반민족적인 발상이다. 사실 '평화 공존 및 호혜 평등의 원칙'이라는 개념은 지난 시기 '미·소 평화 공존'이라는 용어 사용에서 보이듯이 일반적으로 주권국 대 주권국의 상호 관계에서 통용되는 행동 양식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의 경우처럼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에 적용해서는 아니된다. 만일 이 개념을 민족 내부안에서 서로 다른 두 체제(국가가 아니라)가 '평화적으로' 공존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러한 해석은 전민족적인 통일의지에 배치되지 않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 통일·외교·안보 대정부 질문에 나선 민자당 의원 정재문은 이 문제를 이렇게 밝혔다.

"남북간 평화 체제 구축과 관련, 정부가 내세우는 북한과의 당사자 협정 체결은 곧 북한을 국가로 공식 승인하는 효력을 갖기 때문에 기존 남북 관계는 '특수 관계'에서 '국가간 관계'로, '민족 내부 거래'는 '국가간 거래'가 돼 대북 기본 입장이 바뀌는 것이 아닌가."

(나) 조·미 평화 조약 체결론

북(조선) 당국은 일찌기 1970년대에 조·미 평화 조약 체결을 미합중국에 제안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미합중국의 제안과 무응답이라는 상황 전개는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왔는데, 1996년 4월의 4자회담 제안은 미합중국이 무응답의 관행을 깬 첫번째 행동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합중국이 패전한 뒤인 1976년 3월 28일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평화 협정을 맺는 문제를 비롯하여 미국 당국자들과 끝장을 보아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줄임) 그러나 우리는 미국과의 회담이나 접촉을 어디까지나 평등한 립장에서 하려고 하지 그들에게 구걸하는 형식으로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 당국자들이 정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바꿀데 대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제라도 그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 당국자들은 우리 공화국의 평화 협정 체결 제의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 어떤 긍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구태여 그들에게 빌면서 대화의 문을 두드리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평화 협정 체결 문제를 가지고 미국과 회담을 하자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미국 당국자들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답은 하지 않는데 억지로 회담을 하자고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북(조선) 당국이 공고한 평화 질서 수립을 위한 당사자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으로 규정하고 남(한국) 당국을 배제한 채 조·미 2자 회담 개최와 조·미 평화 조약 체결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아래 두 가지다.

① 정전 협정의 조인 당사자이며 동시에 정전 협정을 준수·집행·유지하는 책임 당사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뿐이라는 점.

② 현재 한(조선)반도에서 법리상(de jure)의 무력 대치 당사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뿐이라는 점.

이처럼 북(조선) 당국이 조·미 평화 회담 개최 및 평화 조약 체결을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는 법리성의 범주에 국한된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법리성과 사실성의 불일치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한다면, 이 양자 가운데서 과연 사실성을 무시·배제한채 법리성만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기게 된다. 법리성을 주장하는 북(조선) 당국의 논리는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성을 용인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미합중국과 남(한국) 당국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어 결국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은 열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법리성과 사실성 가운데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이른바 '현실주의적 선택'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다) 4자 평화 협정 체결론

현재 일부에서는 한(조선)반도의 정전 상태 및 평화 문제에 관련한 당사자를 남·북·미·중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4자 사이의 다자간 평화 회담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주장은 김대중 아태 재단 이사장이 자신의 강연에서 말한 대목일 것이다. 그는 「남북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란 주제의 강연에서 남·북·미·중 4자 사이의 평화 협정 체결이 아니면, 남북이 평화 협정을 체결한 뒤 미국과 중국의 보장을 받는 방식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밝힌 바있다. 4자 회담 개최문제에 대하여 남(한국) 당국이 적극적이라는 사실도 지적해야 한다. 남(한국) 당국의 4자 회담 개최안은 2+2 방식으로서, 평화 협정 체결 문제에 중국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조·미 관계 정상화를 지향한 조·미 정치·군사 협상(2자 회담 개최안)을 반대하고, 그 대신 남북 직접 협상을 제의하기 위하여 내놓은 대안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대안은 논리적으로 모순일 뿐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평가하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의 무력을 한(조선)반도에서 완전 철수시킨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1958년 10월에 철수했다.), 현존 무력 대치 당사자가 아니다. 또한 한(조선)반도의 현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문제는 앞으로 이 지역에서 21세기의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을 평화 회담의 당사자로 받아들이자는 제안에 대해서 미합중국과 북(조선) 당국은 모두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미합중국은 이 지역에 사활적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가뜩이나 역내 패권국으로 등장하지나 않을까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터라, 중화인민공화국의 평화 회담 참여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남측 당국도 이 문제에 관하여 미합중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북측 당국도 중화인민공화국이 한(조선)반도의 평화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라) 3자 평화 회담과 이중적 합의 구조

한(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당사자를 미합중국(군), 대한민국(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으로 인정하고 이들 사이에 3자 평화 회담을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존 무력 대치 당사자를 사실상(de facto)의 당사자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논리적 근거를 갖게 된다.

만일 미합중국이 대한민국(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되돌려 준다면, 대한민국(군)은 사실상의 당사자일 뿐아니라, 법적 지위도 회복한 법리상의 당사자가 되어 그만큼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회담의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국)의 군사 지휘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변동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군)은 미합중국에 대하여 군사 지휘권을 되돌려 달라는 요구를 계속해오고 있으며, 미합중국도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회담의 가능성을 앞에두고 작전 통제권 반환에 관련한 일련의 제한적 조치를 취한 바있다. 가장 최근의 조치는 1994년 12월 1일 대한민국(군)에 평시 작전 통제권을 되돌려 준 일이다. 원래는 1993년에 평시 작전 통제권을, 1995년까지 전시 작전 통제권을 되돌려 주기로 했던 계획보다 늦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평시 작전 통제권을 되돌려 주더라도 한·미 연합 체제에는 실제적인 변동이 없으며, 되레 군사 주권을 미국에게 더 많이 넘겨준 측면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시 및 연합 체제에 관한 권한, 곧 조기 경보를 위한 첩보 위성 및 정찰기 등 정보 자산을 운용하는 권한, '신작전 계획(OPLAN) 5027' 등 전시 연합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권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비롯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권한, 교리를 채택하는 권한 등 군사 지휘권의 핵심은 여전히 한·미 연합사령관이 장악하고 있다. 12·1 이양 조치의 핵심은 평시 부대 이동 권한에 국한된 형식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전시와 평시의 구분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평시가 전시로 바뀌어 대한민국(군)의 평시 작통권이 한·미 연합사령관에게 다시 넘어가는 시점(이른바 '위기 단계')이 너무 이르고, 굳이 전쟁 상황이 아니라도 한(조선)반도에서 군사 긴장이 조금만 높아졌다고 미합중국(군)이 판단하면 평시 작통권은 곧 미합중국(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어 있다.

또한 평시 작통권을 넘겨 받는 대가로 창설하게 된 지원 사령부가 고리가 되어 지금까지 한·미 연합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아도 되었던 2군의 전시 작통권마저도 한·미 연합사령관에게 추가로 넘겨주게 되었다.

그것 뿐아니다. C4I 상호 운용성이라는 항목도 추가로 넘겨주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 수행에서 핵심이 되는 지휘(command), 통제(control), 통신(communication), 컴퓨터(computer), 정보(information)에 관련하여 한·미 사이에 호환이 가능하도록 한 것인데, 이로써 대한민국 군의 통신 체계, 화력 통제 장치, 각종 무기 체계, 군수 지원 물자를 미군의 그것과 일치시키도록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미합중국은 대한민국 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결코 포기·이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3자 평화 회담의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평화 회담에 관한 제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3자 평화 회담을 처음으로 제기한 쪽은 미국이었다. 1979년 7월 미합중국 대통령 카터가 서울 방문을 통하여 발표한 한·미 공동성명에서 제안한 것이다. 북(조선) 당국도 1984년 1월 11일 미국 정부와 의회 및 남(한국) 당국에 보낸 공식 서한에서 원래 미국의 제안이었던 3자 회담 개최안을 제창했다. 그런데 북(조선) 당국의 3자 회담 개최제안은 조·미 평화 조약 체결과 남북 불가침 선언 채택이라는 이중적 합의 구조를 담은 것이었다. 여기에 조·미 사이의 주한미군 철수 문제 협의와 남북의 무력 불사용 원칙, 군비 축소에 관한 남북 당국의 합의가 따라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북(조선) 당국의 주장과 제안은 1988년 11월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무원 연합회의에서 채택·발표한 '포괄적 평화·군축안'(이른바 4대 평화 방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 방안은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회담에 관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책임있는 당사자들의 회담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남조선이 참가하는 3자 회담을 진행한다. 3자 회담의 테두리 안에서 조미, 북남 사이의 쌍무 회담도 할 수 있다. 3자 회담에서는 단계적인 미군 무력의 철수와 북남 무력의 축감 문제를 합의한 데 기초하여 그것을 조미 사이의 평화 협정과 북남 사이의 불가침 선언으로 확인하고 고착시킨다."

그렇지만 이 3자 회담 개최 제안은 우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합중국과 남(한국) 당국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조·미 기본합의서 채택과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에서 보듯이 조·미, 남북 사이의 '쌍무 회담'이 각각 일정한 시차를 두고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3자 회담 개최안을 합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결국 북(조선) 당국이 조·미 평화 조약 체결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주한미군 철수론으로 좁혀진다.

그런데 최근 북(조선) 당국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유보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새로운 대미 접근 전술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유보하는 전술을 채택한 것이 3자 회담의 걸림돌을 걷어내는 기능을 하여 결국 3자 회담 개최 가능성을 더욱 높혀주게 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유보하는 대미 접근 전술은 이미 1992년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1992년의 구체적인 계기들은 아래와 같다.

① 김일성 주석의 1992년 신년사가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주장을 처음으로 담고 있지 않았다.

② 같은 해 1월 22일 뉴욕에서 열린 김용순 당 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 사이의 조·미 고위급 회담에서, 북(조선) 당국은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한다는 것과 연방제 통일 뒤에도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면 단계적으로 철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비롯해 남(한국) 당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모든 조약은 존중될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③ 같은 해 6월 24일 미국 호놀루루에서 열린 동북아 지역의 6개국 전문가 회의에 참석한 북(조선) 대표 리삼로 평화군축연구소 고문(당시 조·일 수교회담 대표단장)의 개막 기조 연설에서 "동북아의 안정에 필요하다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도 용인할 수 있다. 남과 북이 통일 이전에 외국과 맺었던 모든 조약들은 통일 뒤에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 발언에서 '철군 주장 유보론'이 다시 확인되었다.

④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1994년 10월 조·미 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북(조선) 당국은 주한미군 수수론을 내놓지 않았다.

⑤ 김일성 주석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공표한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 8월 11일자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비망록」에서도 연방제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

⑥ 1995년 9월 19-26일 평양을 방문했던 셀릭 해리슨이 도쿄에서 가진 기자 회견을 통해 나온 북(조선) 당국의 견해를 보면, 북(조선) 당국은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상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무기한 주둔을 용인하는 대신, 현 정전 체제를 '새로운 평화 체계(new peace mechanism)'로 전환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3자 회담 개최안과 주한미군 철수론을 연계시켰던 북(조선) 당국의 주장은 이 양자를 분리하고, 후자를 거론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평화 회담에 관련해서 나온 미합중국 국무부의 공식 반응은 1995년 2월 23일 국무부 임시 대변인 크리스틴 셸리가 발표한 공식 성명에 드러나 있다. 그 성명은 "코리아반도의 평화는 남북 코리아 당사자 사이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나 미합중국은 남북 코리아가 모두 희망할 경우, 이 과정에 기꺼이 참여할 의사가 있지만, 북코리아만을 상대로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한 양자 협상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성명은 국무부 차관보 윈스턴 로드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 발표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실린 것이었다. 이 성명 내용에는 미합중국이 3자 회담을 바라고 있다는 우회적인 의사 표시가 담겨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평화회담에 참가하는 당사자가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라고 해서, 이 3자 평화 회담은 곧 남(한국) 당국과 미국을 일방으로 하고 북(조선) 당국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성사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평화 회담이란 한·미 연합군 대표와 조선인민군 대표 사이에 이루어지는 '군사' 회담이 아니라, 관련 당사국(또는 당사자)들 사이의 정치·외교·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한 급 높은, 포괄적인 '정치' 회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평화 회담은 이중적 합의 구조 안에서 성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회담의 합의 구조가 이중적이 되어야 하는(또는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위에서 말한 법리성과 사실성의 불일치 때문이다. 이중적 합의 구조라는 것은 법리상 당사자들이며 또한 사실상 당사자들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은 남(한국), 북(조선), 미국 3자 평화 회담을 통해 조·미 평화 조약(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사실상 당사자들인 남(한국) 당국과 북(조선) 당국은 3자 평화 회담을 통해 '남북 평화·군축 합의서'를 체결하는 방안을 말한다. 이미 조·미 기본합의서를 통해서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기로 하고 양국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합의한만큼, 조·미 평화 조약을 거부할 명분은 사라지게 되었다. 만일 앞으로 조·미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면, 그 내용에는 한(조선)반도에서 조·미 두 나라의 대치 무력을 감소시키는 상호 군축, 즉 주한미군의 단계적, 점진적 감축에 관한 원칙적 합의 내용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주한미군의 감축 문제는 남북의 상호 군축과 병행되어야 할 문제다.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 문제는 한(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민족적 범위 안에서만 다루어서는 안되고, 한(조선)반도에 사활적 이해 관계가 걸려있는 주변국들인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러시아와 미합중국의 관계 문제, 곧 동북아 질서에 대한 다국적 군축 회담을 통하여 논의·해결하는 국제적 범위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다.

남북 사이에는 이미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고, 그 안에 남북 불가침에 관한 조항이 들어가 있으므로, 이 조항을 확대·발전시켜 남북 사이의 평화·군축에 관한 더욱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새로운 규범을 '남북 평화·군축 합의서'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평화 조약은 그것이 체결된 뒤에 우호·선린 관계로 개선되지만,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인 남북의 평화에 관한 합의는 실질적이고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상호 군축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평화 문제가 남북 기본합의서와 조·미 기본합의서라는 '이중 합의 구조'를 통해서 비록 형식적이나마 차츰 풀려나가고 있듯이, 남북 합의에 의한 평화·군축 이행과 조·미 합의에 의한 평화 조약 체결이라는 '이중 합의 구조'는 현실적 방도며 정당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 (1995년 4월 작성, 뒤에 가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