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조·미관계, 세기초의 한(조선)반도 통일정세

제1부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북(조선)의 대응 핵전략

한 호 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나라 안팎의 언론매체들과 전문가들 가운데 거의 모두는 북(조선)의 핵문제를 인식하는 데서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첫째 잘못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문제에 대한 판단을 조심스럽게 유보하고 있으나, 인식의 주된 흐름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견해로 흐르고 있다. 이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면, 북(조선)이 한때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미국의 강압적인 저지력에 밀리면서 1994년에 핵개발을 포기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조선)이 한때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실제로 개발능력은 아직 없는데도 미국이 자기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서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을 과장했고 이를 구실로 삼아 북(조선)을 전면적으로 압박하여 굴복시켜 보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 둘째 잘못은 북(조선)이 1990년대 초의 심각한 위기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벼랑끝 생존전략'으로 핵무장을 추진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북(조선)의 핵문제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원인은, 미국이 북(조선)의 핵문제를 가장 중대하고 심각한 현안으로 국제사회에 들고 나왔던 바로 그 시기에 북(조선) 흡수통합설, 붕괴설 따위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가설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심하게 교란하거나 부식했기 때문이다. 오늘에 와서 거짓으로 드러난 이 가설들은 북(조선)의 핵문제를 인식하는 데서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한때 천박한 가설들을 가지고 무슨 대단한 정보를 다루는 양 호들갑을 떨었던 언론매체들과 전문가들은 아직까지도 북(조선)의 핵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기정사실로 여기면서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인식하는 데서 일종의 맹반현상(盲斑現象)에 빠져있다. 북(조선) 핵문제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을 뿐아니라, 제마음대로 가공처리한 정보를 언론에 흘려주고 있는 미국 정보기관들이 이 맹반현상의 배후에서 바쁘게 움직여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 자신도 한때 맹반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1998년 3월에 쓴 논문 『핵위기와 금융위기: 한(조선)반도 정세를 읽는 두 초점』에서 북(조선)은 핵무기 개발의 첫 단계인 플루토늄 추출 단계에는 이르렀지만 핵무장은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있다. 그러나 나는 그 뒤로 약 1년 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나의 그러한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두루 알려진대로, 북(조선)의 핵문제는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지역의 21세기 전략균형을 뒤바꾸어놓으며 이 민족의 장래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가벼운 논제로 여기거나 섣부른 판단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북(조선)의 핵무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한(조선)반도·동북아지역의 전략구도와 북(조선)의 핵무장을 알지 못하고 바라보는 한(조선)반도·동북아지역의 전략구도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나는 약 1년 동안 이어진 연구를 통해 북(조선)의 핵문제를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서 비로소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의 정세가 어떠한 방향타에 의해서 변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글의 제1부는 나의 섣부른 판단이 어떻게 바로 잡혀졌는지를 보여주는 시각교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미국 정보기관들이 가공처리하여 놓은 굴절된 상을 걷어내고 실상에 접근하려는 데 있다. 이 글은 북(조선)의 핵전략을 두 측면에서 고찰한다. 하나는 북(조선)이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맞서는 대응전력으로 핵무장을 추진한 군사전략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자주적 평화통일의 실현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통일정세를 조성하는 추진력으로 핵무장을 추진한 통일전략적 측면이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북(조선)이 핵무장을 통하여 추구하고 있는 정치적 목적이, 세상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이른바 '벼랑끝 생존전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 통일전략'에 있다는 사실이다. 북(조선)의 핵전략과 통일전략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은 핵무기로 남(한국)을 공격하여 무력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아래에서 논의하겠지만, 북(조선)의 핵무기는 남(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의 핵전략과 통일전략의 상호결합이 주는 의미는, 분단체제를 유지해온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략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분단유지의 전략균형을 통일실현의 전략균형으로 바꾸어놓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글의 제1부는 미국이 핵전쟁 위협으로 북(조선)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괴롭혀왔던 지난 50년 위기의 실상과 그에 대한 북(조선)의 대응전략, 곧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제2부는 북(조선)의 전략미사일 개발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이 조·미·일 세 나라의 전략균형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를 논구할 것이다.

마치 급류를 탄 듯이 숨가쁘게 바뀌고 있는 세기말, 세기초의 한(조선)반도 정세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도 북(조선)의 핵문제가 던져주는 정치·군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1990년대 10년은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지역의 전략구도가 북(조선)의 핵문제를 중심으로 극적인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해온 격동기였다. 새로운 세기의 첫 해인 2000년은 그 격동의 난기류 속에서 전략판도를 다시 짜는 재편기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재편기는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 10년 이상 넘어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재편기를 마감하는 시점을 전후하여 한(조선)반도는 자주화·중립화·연방화의 길로 나아가리라고 보는 것이 이 글의 제3부가 내놓는 정세전망이다.

 

(2) 한(조선)반도의 위태로운 전략균형과 미국의 대북 적개심

정전 이후 조·미 사이의 대결구도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이 북(조선)을 위협하는 구도 속에서 이어져온 전시적(戰時的) 대결이라는 데 있다. 정전 이후 3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한(조선)반도의 전략균형은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이에 대한 북(조선)의 재래식 무기의 대응력 사이에서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왔다. 그 전략균형이 매우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던 까닭, 그래서 이 민족이 정전 이후 거의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핵폭풍 전야의 악몽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까닭은,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 전개하고 있는 핵전쟁 보복전략에 대해 북(조선)이 재래식 전쟁의 대응전략으로 맞서왔다는 데 있었다. 한(조선)반도의 전략균형은 핵공격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놓고 있는 미국이 전쟁위협을 몰고올 때마다 심하게 요동쳤고, 여러 차례 전쟁위기를 가까스로 비켜가야 했다. 리영희 교수의 말대로, "핵군사력을 갖지 않은 약소국가에 대해 세계 최강 핵군사력이 일방적으로 핵전쟁 위협을 25년이나 계속하는 행위는 어떤 구실이나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사실상의 공격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난 냉전시기에 소련과 미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확률보다도 북(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이다. 미·소관계나 미·중관계의 전략균형과 견주어 볼 때, 조·미관계의 전략균형은 핵전력 대 재래식 전력이라는 심한 불균형이었으므로, 미국이 임의의 시각에 일방적으로 그 전략균형을 깨뜨려 버릴 수 있는 극도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리영희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미국의 횡포와 '힘의 오만'의 표시"였다.

그런데 미국은 한(조선)반도의 전략적 불균형 상태 위에 위태롭게 놓여져 있는 무력대결구도가 긴장완화구도로 돌아서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거기에는 세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 한(조선)반도의 긴장완화는 미국의 군사적 지배구도와 어울릴 수 없는 대척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일 긴장완화로 인해 미국의 군사적 지배구도가 약화되면, 남(한국)이 핵무장을 시도하여 핵확산금지정책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긴장이 완화되면, 남(한국)에 펼쳐놓은 미국의 무기판매시장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역사적으로 미국은 북(조선)에 대해서 뿌리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세 번째 까닭에 주목한다.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말대로,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 품고 있는 적개심은 미국 역사에 나오는 적대세력들, 곧 죠지 3세의 영국, 나치 독일, 중국, 쿠바에 대한 것보다 더 심했다. 지난 5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은 미국의 그러한 적개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다른 한 편에서 북(조선)도 미국에게 심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왜 북(조선)에 대해서 그토록 심한 적개심을 품고 있을까? 그 적개심은 한국(조선)전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삼년 전쟁은 미국이 아시아 공산주의자들과 맞붙은 첫 전면전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의 승패는 어쩌면 20세기 후반에 미국의 국운을 좌우하리라고 보아도 좋았다. 개전 초기에 미국은 전승을 낙관하였다. 그런데 창건된지 불과 이태 밖에 되지 않아 낙후한 농업국가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방의 약소국과 맞붙은 전쟁에서 얼마전 나치 독일과 일제를 꺾고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른 군사대국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나서 정전회담장에 나왔다. 런던의 일간지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특파원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은 정전회담의 정치적 의의를 "동방의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인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회담장에 마주앉은 최초의 사건"이라고 묘사하였다. 김정일 총비서는 "조국해방전쟁은 우리 인민이 전인민적인 영웅적 투쟁을 벌려 력사상 처음으로 세계 제국주의 우두머리인 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자기 조국을 수호한 세계사적 의의를 가지는 위대한 혁명전쟁"이었다고 지적한 바있다. 미국은 건국 이래 쓴 잔을 처음 마셨다. 오만한 대제국의 자존심은 구겨지고 말았다. 승전이 아니라 정전으로 전쟁을 서둘러 중단해야 했던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증오감과 적개심에 사로잡힌 데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다. 미국의 대북 핵전략이 보복성을 띄고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정전 이후에도 그 적개심은 풀어지지 않고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이 강토 위에 살고 있는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협해왔다. 정전 이후 전개된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관해서 피터 헤이즈(Peter Hayes)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전쟁 후에 미군은 억제라는 공공연한 깃발 아래 핵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 전쟁계획에서, 그들은 북한과 중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려고 계획했다. 근해에서 해군과 공군은 핵전략에 대한 지도력을 추구하며 다투었다. 핵전력과 임무의 중복으로 인해 미국은 억제 또는 강제에 이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핵병기고를 동아시아에 구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한(조선)반도의 핵전쟁 위기에 대한 관점과 체감도가 당사자들 사이에서 아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한국)은 미국이 북(조선)을 핵전쟁 보복전략으로 압박하고 있는 현실을 '핵우산의 보호'라고 착각하면서, 핵전쟁 위기에 거의 둔감한 상태에 있다. 반면, 북(조선)은 '군사적 포위환' 속에서 긴장감과 경계심을 한 순간도 풀지 못한채 살아오고 있다. 다른 한편, 미국인의 정신구조 속에는 자기 영토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조그만 반도에서 핵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한 정치·군사적 부담감보다는 적개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조선)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문제로 삼는 것은 남(한국)에 있는 미군과 미국 민간인들을 어떻게 보호하릎 ?전쟁에 이기느냐 하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조선)반도 전쟁전략을 수립하면서 북(조선)을 되도록 짧은 시간 안에 파괴·점령하여 주한미군과 주한미국인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문제에 관심을 모았다. 선제공격으로 북(조선)을 파괴·점령해야 한다는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3) 반세기 동안의 전쟁위기: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북(조선)의 대응

1) 한국(조선)전쟁에서 추진된 미국의 핵공격 계획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핵전쟁 보복전략이 첫 시행단계에 들어선 때는 대북 적개심이 폭발하던 한국(조선)전쟁 중이었다. 리영희 교수는 한국(조선)전쟁 기간에 미국이 핵무기를 남(한국)에 배치하지 않았다고 보았는데, 그렇지 않다. 미국은 한국(조선)전쟁 기간에 모두 40개나 되는 핵무기를 서울 남쪽에 있는 공군기지의 콘크리이트 벙커에 보관해두고 북(조선)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려고 하였다. 당시 전선을 지휘했던 미국의 두 군사지휘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그 후임자 매튜 릿지웨이(Mathew B. Ridgway)는 그 핵무기를 사용하는 최종 허가를 워싱턴에 요구하였다. 당시 미국은 재래식 전쟁을 수행하면서 핵무기를 최전선에 배치했던 것이다. 1953년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집권한 직후에 미국은 '새로 보기 전략(New Look Strategy)'을 수립했는데, 이것은 적이 침략할 경우 핵무기를 실은 전략폭격기를 동원하여 곧 보복한다는 전략이었다.

2) 1960년대 전쟁위기

1967년 12월 2일 함장 로이드 부커(Lloyd M. Bucher)를 비롯한 미 해군 장교 6명, 병사 75명, 민간인 2명을 합쳐 모두 83명을 태운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한 척이 첩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본 사세보(佐世保)항의 미 해군기지를 떠났다. 그 첩보함의 이름은 푸에블로호(USS Pueblo)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19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 북(조선)은 피(P)-4 초계정 네 척과 미그기 두 대를 동원하여 원산 앞바다에서 해상 첩보활동을 벌이던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였다. 나포과정에서 미 해군 병사 한 사람이 죽었다. 푸에블로호 나포작전은 김정일 총비서가 직접 지휘했다. 나포작전에 해병으로 참가했던 '공화국 영웅' 박인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 우리가 국적을 밝히라고 하자 놈들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성조기를 띄우며 거만하게 나왔습니다. 아마 미국이라면 감히 어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천만에, 놈들은 오산했습니다. 우리 7명의 해병들은 번개같이 배에 날아들어 순식간에 80여명의 적들을 모두 체포했던 것입니다.

미국 해군 함정이 외국군에게 나포된 것은 미 해군역사 106년 만에 처음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격노하였다. 그들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미국에 대한 전쟁행위로 간주하고 핵공격으로 보복하려고 생각했다. 미 국방장관 클락 클리포드(Clark Clifford)에 따르면, 나포사건 보고를 받고 나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평양을 핵무기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핵공격 주장은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철회되었다. 미국 대통령 존슨(Lyndon B. Johnson)은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소련에게 북(조선)이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도록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부탁을 받은 소련은 북(조선)에게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소련의 "로골적인 압력"을 물리치면서, "공화국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우리나라 령해에 들어와 정찰행위를 감행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법에 따라 처리되여야 한다. 올 때에는 제마음대로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절대로 제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김정일 동지는 '수령님, 저는 미국놈들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절대로 석방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푸에블로>호는 우리의 전리품이므로 그놈들이 항복서를 낸다 해도 돌려주지 않겠습니다. 우리 인민군대가 나포한 미제 무장간첩선을 먼 후날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후대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미국놈들에게서 빼앗은 간첩선이라고 말해주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북(조선)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에 대해 충격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미국은 다음과 같은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①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 실질적 또는 잠재적 군사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음을 비공식 통로로 알려준다 ② 비무장지대 이북 80킬로미터 지역까지 공중정찰을 강화한다. ③ 첩보함 배너호를 동원하여 해상 첩보활동을 계속한다. ④ 소해정과 소형 잠수함을 동원하여 푸에블로호에서 바다에 버린 암호관련 장비를 수거한다. 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발진한 에이(A)-6 항공기가 기뢰 83개를 원산항에 떨어뜨려 봉쇄한다. ⑥ 북(조선) 함정을 나포한다. ⑦ 전폭기 92대가 원산 공군기지와 문평리 해군기지를 공습한다. ⑧ 군사분계선을 넘어 기습공격하여 비무장지대 이북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북(조선)군 제6사단 지휘부를 점령·파괴한다. ⑨ 원산항을 12해리 안에서 봉쇄한다. ⑩ 경제봉쇄, 특히 곡물수출을 차단한다.

이 대응책에 따라 미국은 세 개의 항공모함 전투선단을 북(조선) 연안으로 출동시켰고 전략폭격기를 서태평양에 배치하였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앞세운 미 해군 구축함과 전함 16척이 울릉도 남쪽 50마일 해상에 몰려들었고 미 공군기 3백72대가 출격태세를 갖추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표하여 공군 예비역 1만5천명에 게 긴급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북(조선)은 당시 재래식 무장력 밖에 없었지만 미국의 살벌한 핵전쟁 위협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주한미군을 공격하였다. 1968년 4월 14일 밤 열한시 판문점 남쪽 대성동 입구에서 북(조선)군 병사들은 주한미군과 남(한국)군 병사들을 수송하던 미군 군용트럭을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공격하여 미군 병사 두 사람과 카투사 두 사람을 죽이고, 다른 미군 병사 두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처럼 북(조선)군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에서 네 차례나 미군을 습격하여 모두 11명을 죽였다. 북(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이것은 1960년대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미제가 광란적인 전쟁소동을 일으켰을 때 평양에서 울려퍼진 조선의 대답이였다."

결국 미국은 북(조선)과 협상을 벌인 끝에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Gilbert H. Woodward)가 "아메리카 합중국 정부를 대신하여" 북(조선)의 요구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포로가 되었던 승무원 82명과 시신 한 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았다. 1968년 12월 23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도 푸에블로호는 조·미대결의 상징물로 남아있다. 그동안 원산항에 있었던 푸에블로호는 김정일 총비서의 지시로 1998년 12월초에 대동강으로 옮겨졌다. 북(조선)은 1866년 9월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격침당한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호 격침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대동강 기슭, 바로 그 기념비 옆에 전시된 푸에블로호를 가리켜 "우리나라에 대한 미제의 침략력사를 증시하는 또 하나의 증견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로동신문』은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샤만>호를, 20세기에는 <푸에블로>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으며 앞으로 "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고 주장하면서, 전리품으로 전시된 푸에블로호를 담은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미제야 함부로 날뛰지 말라"

돌이켜보면, 1960년대는 한(조선)반도에서 핵전쟁 위협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였다. 1969년 4월 15일 일본 아츠기(厚木)에 있는 해군 항공기지를 이륙한 미국의 전자정찰기 이씨(EC)-121에는 미 해군 장교와 병사 서른 명과 미 해병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이 정찰기는 동해 상공에서 북(조선) 연안을 따라 비행하면서 공중 정찰임무를 수행하였다. 청진 동남방 바다 위를 비행하던 이 정찰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보고가 미 해군기지에 들어온 때는 오후 두 시 쯤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 55분이 지난 시각 평양방송은 북(조선)군이 지대공 미사일로 이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발표하였다. 정찰기는 물론,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서른 한 명은 시체도 찾지 못한채 동해에 가라앉았다. 이 정찰기 격추작전도 김정일 총비서가 직접 지휘하였다.

바로 얼마전 존슨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한 바있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은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자마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정찰기 격추사건을 겪게 되었다. 닉슨은 두 개의 항공모함 전투선단을 동해에 출동시키고, 에프(F)-4 전폭기들을 남(한국)에 긴급배치하였다. 또한 미국은 이미 3월 중순에 시작한 포커스 레티나 군사훈련을 이 정찰기 격추사건과 연계하여 실시했다. 이 군사훈련은 미국 본토에서 남(한국)까지 미군 공정대원을 직접 공수하는 첫 훈련이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북(조선)은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뒤로 물러서지 않았을 뿐아니라, 되레 공세적으로 나왔다. 미 해군 정찰기가 동해에서 격추된 때부터 넉 달이 지난 8월 17일 한강 하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조선)군이 미군 헬리콥터(OH-23)를 격추한 것이다.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세 사람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1969년 12월 3일 미국은 북(조선)이 요구하는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

3) 1970년대 전쟁위기

1976년 6월 미국이 북(조선)을 겨냥한 핵전쟁 연습인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Team Spirit military exercise)을 처음 실시했던 때부터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은 8월 18일 미군 장교 세 사람과 미군 병사 일곱 사람이 남(한국) 노동자 다섯 사람을 거느리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다리 부근에 있는 커다란 미류나무가 미군 경비병의 관측시야를 가린다고 하면서 벌목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8월 6일에도 그 나무를 자르려고 현장에 나타났다가 북(조선)군 경비병에게 붸겨난 바있었다. 북(조선)군 경비장교가 다가와서 벌목작업을 그만두라고 제지하자 북(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 때 미군이 판문점에서 북(조선)과 협의하지 않은 채 미류나무를 자르려고 한다는 긴급보고를 받은 김정일 총비서는 "조선사람의 본 때를 보여줘라. 한국 노동자들은 놔두고 미군놈만 골라서 본때를 보여주라. 총은 쏘지 마라"고 지시했다.

현장에서는 미군이 북(조선)군의 제지를 무시하고, 남(한국) 노동자들에게 나무를 자르라고 명령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북(조선)군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잘 싸서 주머니에 넣고 나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미군 경비책임장교에게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때려눕혔다. 그러자 다른 미군이 남(한국) 노동자가 들고 있던 도끼를 북(조선)군에게 던졌다. 이를 피한 북(조선)군은 그 도끼를 집어들고 미군을 붸아가서 죽였다. 미군 경비책임장교인 대위 한 사람과 중위 한 사람이 현장에서 맞아죽었고, 다른 미군 여덟 명은 부상을 입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 안되는 것은, 주한미군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진 미군 경병병 관측소에 미리 설치해놓은 망원렌즈 촬영기로 이 사건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주한미군이 사건현장 부근에 기동타격대(U.S. Quick Reaction Force)를 대기시켜 놓고서도 즉각 출동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은 사건현장을 촬영한 영상자료 가운데서 북(조선)군이 미군을 죽이는 장면만을 언론에 넘겨주어 전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서방언론은 북(조선)을 난폭한 가해자로, 미국을 선량한 피해자로 묘사했다. 이로써 같은 날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열리고 있었던 비동맹회의에서 북(조선)의 국제적 위신을 훼손시키고, 북(조선)이 그 회의에 제기해놓았던 주한미군 철수 촉구안과 한(조선)반도 연방제 통일 지지안이 부결되도록 여론을 몰아갈 수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일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주한미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은 보고를 받고 어찌나 급했던지 전투기 뒷자리에 타고 남(한국)에 날아갔다. 초강대국 미국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자르기 위해서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를 동원했다. 미국은 미류나무 자르기 작전을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고 불렀다. 이 작전에서 미국은 에프(F)-111, 에프(F)-4 비행대대를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했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앞세운 전투선단을 동해에 출동시켰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1천8백명이 포함된 미 지상군 1만2천명에게 한(조선)반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은 한·미연합군에게 완전 경계태세를 명령했고, 부사령관 쿠쉬맨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포대를 북(조선)군에게 잘 보이도록 비무장지대를 따라 배치시켰다. 1976년 8월 20일부터 핵무기를 실은 비(B)-52 폭격기가 괌의 앤더슨 제13공군사 공군기지에서 출격하여 한(조선)반도 상공에서 전속력으로 북상하면서 평양을 향하다가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급선회하는 살벌한 위협비행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핵전쟁 위협에 대항하여 북(조선)도 전면전 태세에 들어갔다. 그 당시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관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 총비서는 "방안이 떠나갈 듯 호탕하게" 웃으면서 "놈들이 무력을 집결하면 뭐라는가, 놈들이 덤벼들면 한번 본때있게 싸워보자"고 말했다.

8월 21일 아침 일곱 시 정각, 주한미군과 남(한국)군 특수부대의 호위를 받는 미군 공병대원들이 미류나무를 자르기 위해 현장에 접근하였다. 중대병력을 태운 헬리콥터 20대가 무장 헬리콥터 7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임진강과 비무장지대 사이를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자 북(조선)군은 '폴 번연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미군 소장 브래디가 타고 있는 헬리콥터에 사격를 가했다. 그 헬리콥터는 두 발을 맞고 겨우 비상착륙했다. 같은 날 정오 비공개 회합에서 북(조선)군 대표는 주한미군 대표에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미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통지문을 읽어주었다. 이로써 한(조선)반도는 핵전쟁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갈 수 있었다.

이 전쟁위기를 겪으면서 미 국방부는 한(조선)반도 핵전쟁에 관한 연구를 민간회사인 싸이언스 어플리케이션(Science Applications, Inc.)에 의뢰했다. 이 회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미군이 북(조선)군을 마비시키려면 그들의 전차, 곡사포를 비롯한 기본장비의 30퍼센트 또는 병력의 40퍼센트, 또는 무선통신의 50퍼센트를 핵공격으로 파괴해야 하며, 서울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의 상공에서 폭발하는 핵무기 30개를 발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폴 번연 작전'이 끝난 뒤에 미 국방부는 비(B)-52 폭격기가 한 달에 한 두 차례 한(조선)반도 상공에서 폭격 비행연습을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있었던 미국은 인도차이나반도와 한(조선)반도에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던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은 이전보다 더 살벌한 핵전쟁 위기를 한(조선)반도에 몰아가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헬리콥터들이 비무장지대에서 35마일-50마일 밖에 있는 핵탄두 저장소로부터 비무장지대 부근의 최전선 저장소로 핵탄두를 계속 실어나르고 있다는 사실을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때는 1974년이었다. 주한미군이 비무장지대에 가까운 최전선에 배치한 핵탄두가 북(조선)의 공격목표로 될 수 있다고 우려하여, 한때 최전선에 전진배치했던 핵탄두를 군산의 미군기지에 있는 저장소로 다시 옮겨놓은 때는 이듬해인 1975년이었다. 주한미군이 핵탄두를 군산 저장소에 옮겨놓은 1975년 6월 미 국방장관 제임스 슐레진저(James Schlesinger)는 북(조선)이 남(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국은 핵공격을 하거나 더 많은 지상군을 투입할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8월 슐레진저가 남(한국)에 갔을 때, 주한미군 소장 제임스 홀링스워스(James Hollingsworth)는 미군의 전쟁준비태세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9일 전쟁계획'을 설명하면서, "만일 북한이 공격을 개시하면, 전쟁은 폭력적이지만 매우 단시간에 끝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지상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임) 나는 포격과 하루에 700-800회에 달하는 공습을 시간차로 실시하려 한다. 만일 북한이 공격하면 우리는 임진강을 건너 적 군사력의 심장부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항공모함 키티호크호를 제주도 남쪽 바다에 출동시켰으며 11월 14일에는 실물과 같은 크기로 된 모조 핵폭탄 비디유(BDU) 11개를 투하하는 핵전쟁 연습을 실시했다. 미국의 이러한 핵전쟁 위협에 대해서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적들의 침략전쟁에는 혁명전쟁으로 대답하고 적들의 기만적 <평화>술책에는 혁명적 원칙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 인민의 립장입니다. 만일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체 조선인민은 단호한 반격으로 대답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일 것입니다. 조선에서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 미제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4) 1980년대 전쟁위기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무한정한 무력증강을 국력강화의 목표로 내걸은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자, 한(조선)반도 정세는 더욱 위태로운 지경으로 밀려가게 되었다. 미국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조선)반도에서 종심공격(deep strike)과 핵공격을 통합한 이른바 공지전 교리(Air-Land Battle Doctrine)를 만들어내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1983년 2월 미 국방부 차관보 로버트 코머(Robert Komer)는 연방하원 재정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면서 "우리의 전진배치전략은 우리의 전쟁을 남의 부동산 위에서 수행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던 그 무렵, 한(조선)반도에서는 공지전 교리를 수행하는 가공할 전쟁연습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과 남(한국)군이 합동하고, 육해공 삼군을 동원하여 실시한 1983년의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에서 미국은 수륙양용 상륙전을 포함하여, 적진에 깊숙이 침공하여 전투하도록 고안된 공지전 교리를 연습했다. 피터 헤이즈의 지적에 따르면, 이 새로운 교리는 북(조선)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복하고 선제공격을 가하는 전략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전략이 전선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후방의 지원병력을 이른 시간 안에 종심공격한다는 개념과 정밀공격을 가하는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개념을 상호결합했다는 점이었다. 1976년에 실시된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에 동원된 병력은 4만6천명이었는데 비해, 1983년에 실시된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에 동원된 병력은 19만1천7백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 가운데서 남(한국)군은 11만8천명이었고 미군은 7만3천7백명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1972년 이후 전세계에서 실시하는 동맹국가(들)와의 군사 합동훈련 중 그 규모에 있어서 최대·최상급이며, 이라크 공격전(1991) 같은 실제 전쟁을 제외하면 유일한 '전쟁급' 핵 합동군 훈련"이었다.

그러한 군사훈련이 벌어질 때면 북(조선)도 대응훈련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한·미연합군이 "전쟁연습의 절정을 장식"하기 위해 병종훈련을 실시하는 때에 맞춰 강력한 대응훈련을 전격적으로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한·미연합군이 병종훈련을 실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그 훈련지점을 미리 차지하고 있던 인민군대와 로동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원들은 현대적인 무기를 갖추고 맹렬한 대응훈련"을 하였고, 그 지역의 인민들도 이 대응훈련에 참가하였다.

미국은 1984년에 실시한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에서 '크로스 플로트 작전'(Operation Cross FLOT: Cross Forward Line of Own Troops)을 연습했다. 이 군사훈련의 특징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조선)을 공격하는 공중기동작전을 포함한다는 데 있었다. 이 공중기동작전에는 비(B)-52 전략폭격기가 동원되었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전쟁계획인 '5027 작전계획(Operation Plan 5027)'은 바로 이 새로운 작전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이때부터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에 동원되는 병력은 20만명을 넘어섰다. 야전전투 훈련은 보통 3월 하순에 시작되었고, 수륙양면 상륙전 훈련, 도강훈련, 공중투하훈련, 기동전 훈련, 지휘소 훈련, 근해 해군훈련, 화학전 훈련, 핵공격 훈련이 이어졌다. 그 훈련기간은 세계 군사훈련에서 그 유례가 없는 60일-90일이나 되었다.

1985년 초 미국은 핵공격 능력을 지닌 에프(F)-4, 에프(F)-16 전폭기들에 실을 핵중력폭탄(Nuclear Gravity Bomb) 60발을 군산의 미군기지에 배치했다. 같은 해에 미국은 203밀리미터 핵포탄 40발과 155밀리미터 핵포탄 30발을 군산의 미군기지에 배치했고, 그 배치수량을 더 늘려갔다. 203밀리미터 핵포탄 한 발은 지름 6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쑥밭으로 만들며, 전차 15대와 기타 장갑차량을 지닌 1개 기갑중대를 전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무기이다. 미 육군 야전교범 100-5에 따르면, 한(조선)반도에서 수행할 핵공격 작전에는 핵지뢰 두 개, 핵포 30문, 항공기 발사 핵탄두 5-10발이 동원되도록 되어 있는데 이 핵무기들은 특정시간에 특정지역으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다. 주한미군이 어네스트 존(Honest John)이나 써전트(Sergeant) 같은 구식 미사일을 대신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신형 랜스(Lance) 미사일을 배치한 때는 1986년이었다. 주한미군은 1987년에 세 가지 기본형의 핵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주한미군 지상병력 가운데 약 5퍼센트는 핵공격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러한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서서 북(조선)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까? 첫째, 1983년에 북(조선)은 평양 북쪽과 원산에 배치했던 타격부대를 전방으로 이동하였다. 둘째, 북(조선)은 1986년 10월 이후 1989년 9월까지 동해에서 세 차례 조·소 해공군 합동기동훈련을 실시했다. 그렇지만 이 훈련은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서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될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은 기동훈련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고 더욱이 그 무렵 소련은 반미노선을 포기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 태평양사령부 부사령관 마이클 케언즈는 조·소 합동기동훈련은 두 나라 군대 사이에 어떠한 조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형식적인 것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셋째, 미국에게 한(조선)반도의 평화와 군축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1986년 6월 북(조선)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미국에게 삼자회담을 제안했다. 피터 헤이즈의 말대로, 북(조선)은 이 제안을 내놓으면서 미국과 남(한국)에게 크게 양보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중요한 것은 북(조선)이 미국으로 하여금 남(한국)을 "완전히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 테이블로 데려오도록 제안함으로써, 미국의 오랜 요구를 충족시켜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삼자회담 제안을 거부했다. 미국 외교관은 "우리는 그 위에 온통 재를 뿌렸다"고 말했으며, 그 제안 문서를 받은 주한미군사령관 윌리엄 리브시(William J. Livesey)는 다른 사람이 서명했다는 핑게로 북(조선)의 제안을 일축했다. 1987년 6월 북(조선)은 미국에게 상호 병력감축을 제안하면서 1987년말까지 일방적으로 10만명 병력을 감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이 선전책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무시했다.

5) 1990년대 전쟁위기

1990년대의 핵전쟁 위협은 부시 정권이 제기했던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클린턴 정권에 이르러 더욱 심각해지는 가운데 몰려왔다. 1993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클린턴(William J. Clinton)은 기존의 외교정책을 탈냉전시대에 맞게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국가안보회의 실무진은 1993년 봄에 『위기에 대응하는 클린턴 독트린』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검토문서(Presidential Review Document) 제13호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는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는 경우를 1급 위기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위기상황이 생길 경우 미국은 일방적으로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1993년 1월 26일 주한미군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Robert W. Riscassi)는 제17차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3월에 재개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이번 훈련에는 핵무기를 실은 최신예 전략폭격기 비(B)-1비(B)가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시 정권 마지막해였던 1992년 봄에 미국은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중단한 바있었는데, 1992년 10월 7일에 열렸던 제14차 한·미군사위원회 본회의는 1993년에 가서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부시 정권이 발표했던 주한미군 감축계획을 유보하며, 한(조선)반도에 위기상황이 조성되면 미군의 '신속전개 억지전력'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서 미 국무부 동북아시아 정보조사담당관 로버트 칼린(Robert Carlin)은 이렇게 말했다.

그와 같은 결정은 대화를 중단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북한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것과 같으니까요. 팀 스피리트 훈련의 개최 여부는 원래 12월이나 1월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10월에 그것을 발표한다는 것은 시기를 잘못 선택했거나(사실이 그랬지요), 아니면 북한을 자극하기 위한 것입니다.

1993년 2월 미 공군대장 리 버틀러(Lee Butler)는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가 북(조선)에게 전략핵무기를 조준하고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했다. 1993년에 3월 9일에 시작된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에는 병력 12만명이 동원되었으며, 미군 병력 1만9천명이 추가로 파병되었다. 미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Les Aspin)은 북(조선)의 핵문제를 막바지로 몰아넣으려면 최후 통첩을 전할 대표단을 평양에 보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이 재개되기 하루 전날인 3월 8일 북(조선)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전신명령'을 발표하면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다. 3월 10일 김영남 외교부장은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를 앞세워 강요하고 있는 '특별사찰'을 거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3월 12일 오전 10시 50분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ty)을 탈퇴한다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북(조선)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선언은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은 기습공격이었으며, 핵전략에 기초한 미국의 세계지배구도에 강타를 날린 것이었다. 팻 부캐넌(Pat Buchanan)의 말대로, 그것은 "실로 민주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자아도취적 환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날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북(조선)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망했는데 그 발언이 나온 뒤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북(조선)은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핵확산금지조약 체제가 생겨난 뒤 23년 동안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의 보복이 두려워 탈퇴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북(조선)이 처음으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자 워싱턴 정가는 충격과 혼란으로 들끓었다. 갈팡질팡하는 워싱턴의 모습을 국가정보위원회 정보담당관 로버트 수팅어(Robert Sutinger)는 이렇게 묘사했다.

문제는 북한의 행동을 어떻게 처벌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미 행정부 내에서조차 상당히 의견이 분분했고 심각하게 논의를 벌였습니다. 제재 조치를 취할 것인가? 어떤 제재 조치를? 그것들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집행 방법은? 그것을 위해 무력도 사용할 것인가? 중국에게 그것을 수용하도록 종용할 것인가? 등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보복공격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1993년 6월 11일 뉴욕에서 정전 이후 최초의 외교문서인 조·미 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잠시 전쟁위기가 수그러들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은 미국의 핵전쟁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1993년 12월 10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미 국방부는 북(조선)과 넉달 동안 고강도 전투(very high-intensity combat)를 수행하는 '작전계획 5027'을 클린턴에게 제출하였다.

1994년 3월 16일 국제원자력기구는 북(조선)이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radiochemical laboratory)을 사찰단이 제대로 사찰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미국은 이를 구실로 조·미 고위급 회담 개최 약속을 깨고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 계획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맞서서 북(조선)은 만일 미국이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조치를 취한다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완전히 탈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1994년 4월 28일 뉴욕에서 열린 조·미 실무접촉에서 로버트 갈루치(Robert Gallucci)는 북(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nuclear safeguards agreement)을 계속 준수하고 남북 대화에 나선다면 1994년도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완전히 취소하고 3단계 조·미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겠다는 새로운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미 군부, 특히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Gary Luck)은 북(조선)과 정치협상을 벌이려고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갈루치가 내놓은 미국의 타협안에 대해 북(조선)은 지금까지 사찰을 다 받았으므로 남아있는 문제는 조·미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해결하자고 하면서 조·미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위기를 풀자는 역제안으로 맞섰다.

1994년 5월 13일 북(조선)은 미국이 역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또다시 강력한 공세조치를 취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도착하기 전에 영변에 있는 5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에서 사용한 연료봉을 전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연료봉 꺼내기작업을 전격강행함으로써 국제원자력기구가 북(조선)이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북(조선)은 미국의 허를 찔렀고, 미국은 또다시 외교적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미국은 북(조선)이 연료봉 꺼내기작업을 계속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조치를 내리도록 하겠다고 위협하였고, 미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는 이 사태는 매우 중대한 위기라고 규정하였다. 미국 언론은 "북(조선)은 미국을 우롱하고 있다. 북(조선)은 지금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핵개발 계획을 관철시키려고 한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곤경에 빠져있음을 인정하였다.

이처럼 북(조선)이 연료봉을 꺼내자, 국제원자력기구가 북(조선)의 핵개발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은 핵물질 폐기장에 대해 특별사찰을 실시하는 범위로 축소되고 말았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신고하지 않은 시설인 핵물질 폐기장에 대해 특별사찰을 실시하겠다는 제안을 북(조선)에게 내놓았지만, 북(조선)은 이를 일축하였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1994년 6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조선)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6월 10일 북(조선)이 연료봉 꺼내기작업을 마친 바로 그 날,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조선)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는 북(조선)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제재 결의안이 나오자 북(조선)은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즉각 탈퇴하고, 어떠한 사찰도 더 이상 받지 않겠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며 맞섰다.

이처럼 북(조선)에게 연속적으로 허를 찔린 미국의 대북 적개심은 터지기 직전 상태에 이르렀다. 1994년 5월말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모든 지역의 야전사령관들과 4성 장군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조·미 전쟁계획을 검토하였다.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은 조·미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은 8만명에서 10만명이 죽게 되고, 남(한국)군은 수십만명이 죽게 될 것이며, 전비는 걸프전에서 쓴 6백억달러를 훨씬 넘어 1조달러가 되리라고 보고하였다. 미 군부는 1993년의 전쟁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순항미사일과 에프(F)-117 스텔스 전폭기를 동원하여 영변 제2원자로와 관련 핵시설들을 강습(强襲)으로 파괴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는 전쟁피해 등 군사행동의 결과를 생각하여 일단 무력공격은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거의 같은 시각, 평양에서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가 참석한 군지휘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미국이 공격하기가 매우 불리하여 군지휘관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한 지점을 지적하면서 "적들은 주되는 공격을 지상을 통한 공격방법으로가 아니라 공중으로 기갑부대들과 특전대를 투하하는 방법으로 단행하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의 "음흉한 작전적 기도를 하나하나 명백하게 발가놓았다"고 한다.

워싱턴은 핵전쟁 보복전략으로 들끓고 있었다. 부시 정권 때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와 미 국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는 『워싱턴 포스트』 1994년 6월 15일자 공동 기고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나중에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북(조선)이 일정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김일성 정권의 몰락과 함께 북(조선)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북(조선)이 알게 하여야 한다. 이 싸움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있다. 우물쭈물할 때는 이미 지났다.

미국 연방상원은 6월 16일 상원의원 존 맥케인(John McCain)이 제출한 수정안을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북(조선)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와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하여 미군 병력 1만명을 추가로 남(한국)에 투입하는 계획을 설명하였고, 전쟁에 대비하여 미국이 취해야 할 제1단계 조치들에 대한 계획도 확정했다.

북(조선)도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맞서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인민군대 간부들은 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내가 명령만 내리면 결사전을 벌리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과 총포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적들이 덤벼드는 경우에는 피어린 투쟁을 벌릴 각오를 하여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미제국주의자들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위기는 6월 15일 미국의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판문점을 거쳐 방북하여 6월 17일 김일성 주석과 만남으로써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남(한국)의 한 우익논객은 이렇게 말했다.

제재를 하여 전쟁판을 벌이든지, 한 발 물러나 협상판을 벌이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김일성은 클린턴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 각오만으로 족한 도박판이었지만 심약한 클린턴은 그 각오를 할 수 없었다. 흉내나 내보려던 제재마저 거두어 들였다. 격이 맞아보이는 선배, 카터에게 기대어 출구를 찾았다.

(4)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서는 북(조선)의 군사전략

북(조선)은 매우 불안정한 정전상태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핵전쟁 위협을 직접적으로, 지속적으로 받아오고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전 이후 북(조선)의 군사전략은 대략 다음과 같이 수행되었다.

첫째, 소련군이나 중국군의 전술과 다른 독자적인 전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북(조선)은 미국의 공세에 맞서는 독특한 전술과 전법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의 지형조건과 조선사람의 체질에 맞는 전법"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북(조선)의 '주체전법'에는 고속기동전, 기습전, 매복전, 포위전, 산악전, 야간전, 대부대전과 소부대전의 배합전술, 정규전과 유격전의 배합전술, 적을 분산시켜 각개격파하는 전술 등이 있다. 북(조선)의 '주체전법'은 "적 유생역량의 격멸, 남조선 전역의 동시전장화, 남조선 수도권의 조기점령, 남조선 전역의 조기점령"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공격전선을 확장하면서 상대의 영역을 점령해나가는 일반적인 전법이 아니라, 상대의 전략거점들을 동시에 집중적으로 기습공격하여 전쟁지휘력을 마비시키고 전쟁동원체제를 재기불능상태에 몰아넣으며, 미군 주력부대가 한(조선)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전법이다. 군사평론가 지만원 박사에 따르면, 이것은 "전쟁을 3일에서 1주일 이내에 끝내겠다는 것"인데, "전에는 8일 전쟁 시나리오 시대였지만, 지금은 3일 전쟁 시나리오 시대다. 3일 전쟁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전쟁은 일시적 오기나 끓어오르는 사명감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석한 두뇌들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시스템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조직·정신력 중심의 강병 육성 전략이다. 이것은 1962년 12월에 채택된 4대 군사노선으로 추진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먼저 전군의 간부화와 현대화, 전민 무장화의 전략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도 강대한 적을 때려부실 수 있다는 혁명사상과 그 어떤 핵무기와 같은 큰 무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힘에 의거하며 인민을 조직하고 단결시켜 그들과 함께 투쟁하는 혁명사상으로, 관병일치, 군민일치의 정신으로 군관들과 전사들을 준비시켜야 하겠습니다. 전체 인민이 무장하는 것은 우리의 특징이며 우리의 무궁무진한 군사력의 원천입니다. 이것은 로케트보다 더 낫습니다.

북(조선)의 전군 간부화와 전민 무장화 전략은 자본동원력과 기술력에서 미군보다 열세인 약점을 조직력과 정신력으로 보완·극복하려는 전략이다. 비교하여 설명하면, 남(한국)군은 보병력 중심의 군대이고, 미군은 자본·기술력 중심의 군대인데 비해 북(조선)군은 조직·정신력 중심의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전쟁 예비물자를 비축하는 전략이다.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계공업, 금속공업 등 인민경제 모든 부문이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을 위하여 복무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인민경제 모든 부문의 공장들에서는 다 전쟁에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한편으로는 전시에 쓸 수 있는 예비를 미리부터 마련하여야 합니다.

적어도 몇해 쓸 수 있는 물자예비를 마련해 놓아야 전쟁준비를 해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지하요새화 전략이다.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지하요새 건설이다. 이것은 세 방향에서 추진되었는데, 먼저는 미군의 공중공격을 방어하면서 역공세를 취할 수 있는 갱도망을 건설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전시에도 군수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 지하생산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전시에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대피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갱도망 건설에 관하여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원자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원자탄을 가진 놈들과도 싸워서 능히 견디여낼 수 있습니다. 동무들이 군사학에서 원자탄의 효력과 그 방위에 대해서 배웠겠지만 땅을 파고 들어가면 원자탄은 능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르는 곳마다 굴을 파놓아야 합니다. 전연지대뿐만 아니라 후방지대, 제2선, 제3선 할 것없이 온 나라를 다 요새화하여야 하며 대공방어와 해안방어를 강화해야 합니다.

미 국방정보국(DIA)은 북(조선)의 지하요새에 대하여 이렇게 파악하였다.

현재 요새와 장애물들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20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과 강고한 건설작업의 결과이다. 강화콘크리트, 강철, 통나무로 건설된 요새 안에는 자동화기, 탱크, 포병진지, 탄약 저장실, 요원숙소가 있다. (줄임) 군사분계선의 북쪽 끝으로부터 200-1,000m 지점에 있는 전방 보병부대용 터널은 강철문으로 닫혀있다. 각 문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을 화생방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무 패킹으로 밀폐되어 있다.

미 국방정보국은 북(조선)군이 군사분계선에 가까운 전선지역에 지상군 군사시설은 물론 해군 군사기지까지 모두 지하요새로 건설하였고, 그 지하요새에는 식량, 원유, 탄약을 보관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밝힌 바있다. 북(조선) 공군 항공기들 가운데 80퍼센트는 지하요새에 들어가 있는데, 미국 첩보위성이 촬영한 영상자료에는 맑은 날이면 항공기들을 활주로에 끌어내 말리는 모습이 포착된다고 한다. 한국국방연구원의 연구위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북(조선)은 군사분계선 가까이에 지하요새 1천8백여개를 건설했고, 북(조선) 전역에 8천개를 건설했다고 한다. 산악지대에 건설된 전투기 격납고에는 전투기 15대가 들어갈 수 있으며, 활주로로 연결된 출입구를 여러 개 내놓았으므로 한 출입구가 공격을 받더라도 다른 쪽으로 출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국이 유고전쟁에서 사용했던 지하시설 파괴용 폭탄 '벙커 버스터'는 지하관통력이 30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80미터가 넘는 땅속에 건설된 북(조선)의 지하요새에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남(한국) 국방부 북한정보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조선) 전역에는 지하요새가 모두 8천2백여개가 건설되어 있으며, 총길이는 5백47킬로미터로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미 국방부는 이 지하요새가 험한 산악지대에 배치되어 있으며 입구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미사일로 공격하기 힘들며, 순항미사일을 발사해도 정확히 공격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미 국방정보국은 북(조선)이 지하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한 때가 1970년대 초반이라고 파악했지만, 북(조선)은 그보다 10년이나 앞서서 이미 1960년대 초에 지하요새를 집중적으로 건설하였다. 1963년 2월 김일성 주석이 "동무들이 판 갱도에는 굉장한 량의 철재와 세멘트가 들어갔습니다. 이 기자재를 가지고 공장이나 주택을 건설한다면 대단할 것"이라고 말했던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 무렵 김일성 주석은 유명한 '고슴도치의 비유'를 들어 북(조선) 군사전략의 특징을 설명한 바있다. 이미 1960년대 초에 북(조선)의 군사학교에서는 '갱도학'을 정식교과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공장도 땅 속에 많이 건설하여야 한다"고 한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주요한 생산시설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주요 군수공장 1백80개를 땅속에 건설했으며, '전시 군수품 생산대'가 조직되어 주기적으로 전시동원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북(조선)의 한 경제학자는 지하공장 건설의 경제적 의의를 설명한 글에서 "현대전의 승패는 누가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어떻게 원만히 생산보장하는가에 달려있으며 그것은 적들의 그 어떤 현대적 무기에 의한 타격에도 인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지하갱도건설과 생산을 정상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지하공장을 질적으로 많이 건설하는데 그 확고한 담보가 있다"고 적었다.

(5) 군사적 남열북우론과 북(조선)의 핵무장 목적

이처럼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대응하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온힘을 기울여온 결과,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은 강화·발전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나온 한(조선)반도 전쟁에 관한 모의실험 보고서들은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국)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평가를 내린 바있다. 미 국방부 최종평가실(Office of Net Assessment)의 부실장이었던 로버트 개스킨(Robert Gaskin)은, 이태 동안 진행했던 연구분석 결과는 남(한국)의 방어선이 현대전을 수행하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우며, 북(조선)이 핵무기나 화학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군사력만을 동원해서도 서울을 이틀이나 사흘 안으로 점령할 수 있다는 비공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밝힌 바있다. 1993년 11월 29일자 『뉴스위크』 기사에 따르면, 1991년에 미 국방부가 은밀하게 실시한 전쟁 모의실험에서는 "남한의 방위체제가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숨돌릴 틈도 없이 신속하게 무너져 버렸다. 우리는 뭔가 실수가 있었을 것으로 여기고 계속 여러번 반복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남한의 붕괴라는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실험결과는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북(조선)은 핵무기를 사용하건 그렇지 않건 남(한국)을 이길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남(한국)군의 군사전략은 알파, 브라보, 찰리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3중 방어선(FEBA: Forward Edge of Battle Area)을 쳐놓고, 이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서울을 지킨 후 공격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군사전략의 열쇠는 제1선에 배치된 30만 보병"이다. 그런데 이 방어선에 배치된 남(한국)군과 주한미군 병력의 90퍼센트, 그리고 남(한국)군의 4개 기계화 사단이 모두 북(조선)의 장거리포 사정권 안에 들어있다. 북(조선)군은 고성능 포탄을 하루에 적어도 2천만발을 쏘아 이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2백50킬로미터에 걸쳐 늘어서 있는 남(한국)군은 몇 군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북(조선)군 기계화 부대의 집중공격에 무너지고, 공격을 받지 않은 대부분의 전선에 고착되어 있는 남(한국)군은 전방만 응시하고 있다가 포위되고 말 것이므로, "6·25전쟁식 선방어로 대처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에 맞서보겠다는 무모한 행위"다. 남(한국)의 지상군은 2백50킬로미터의 방어선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는 진지전 위주로 육성되어 왔기 때문에 현대전의 특징인 기동전에는 약하다.

남(한국)의 국방부는 남북의 군사력을 비교하면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남열북우론(南劣北優論)을 주장해오던 관행을 버리고 1999년에 처음으로 남우북열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남(한국)의 집권세력과 군부는 군사적 남열북우론을 주장하면서 북(조선)의 남침위협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최근 북(조선)의 핵무장과 전략미사일 보유사실이 차츰 세간에 알려지면서 군사적 남열북우론이 설득력을 얻게 되자 이제는 거꾸로 군사적 남우북열론을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조선)반도 군사문제에 관한 글을 발표해오고 있는 리영희 교수, 함택영 교수, 이삼성 교수도 한결같이 남우북열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러한 주장은 오류다. 이들은 군사장비의 수량과 성능, 군사비 지출, 인구, 경제력, 민간시설 및 장비 등을 비교분석하면서 군사적 남우북열론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장비·물량·비용을 비교하는 전통적인 분석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군사장비와 무기체계의 성능이 전쟁 승패를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조선)반도 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입체전, 군대와 민간인이 따로 없는 총력전이 될 것인데, 이와 같은 입체전, 총력전의 승패는 군사장비의 수량과 성능에 의해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자원을 전쟁에 기습적, 집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전쟁지휘력과 전쟁동원체계에 의해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전쟁이란 무기 대 무기 간의 1 대 1식 싸움이 아니라 시스템과 시스템 간의 싸움"이라는 지적은 옳은 말이다. 아무리 많은 첨단장비, 자본, 시설, 물자,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움직이는 지휘체계와 동원체계가 산만·허술하고,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고 훈련하지 못했다면 상대의 공격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휘체계가 산만·허술하고 훈련이 부실한 군대의 무기는 적의 집중공격 앞에서 거대한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더하여 한(조선)반도의 자연지리적 조건도 전쟁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 한(조선)반도는 종심이 짧아 작전반경이 좁은 데다가 여름에 너무 덥고 겨울에 너무 추우며, 70퍼센트가 산악지형이어서 넓은 작전지역에서 쓰도록 제작된 미국산 첨단군사장비는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

남북의 군사력을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리영희 교수는 미사일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현대전은 미사일전이므로 미사일 전력이 앞선 쪽이 우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리영희 교수는 남북의 군사력을 논하면서 전차, 장갑차, 야포, 공격헬기, 전투기, 전함과 같은 6대 공격용 재래식 무기만을 비교분석에 포함시켰고, 전술미사일 전력을 중시하지 않았다.

북(조선)의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을 논외로 치고, 재래식 군사력만을 가지고 남북의 군사력 균형을 논할 때 북(조선)이 더 우세하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다. 첫째, 남(한국)의 군사력은 미군이 창설했고, 육성했으며, 지휘해오고 있는 기형화된 군사력이기 때문에, 전투수행력은 있지만, 전면전을 벌이는 전쟁수행력은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도, 전시 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도 지니지 못한 채, 언제 미군이 도로 가져갈지 모르는 평시 작전통제권만을 가지고 있는 "군사적 예속국가"가 어떻게 전면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북(조선)에 대한 군사정보를 거의 모두 주한미군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전쟁계획을 수립하지 못하는 군대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성능이 뛰어난 미국산 무기를 수입하여 쌓아놓았다 하더라도 군사정보력이 없고 독자적인 전쟁계획이 없으며 작전지휘권, 작전통제권이 없는 군대는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으며, '서해교전' 같은 소규모 무력충돌이나 국지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북(조선)은 남(한국)의 심장부인 수도권을 아름드리 굵기의 대구경 장거리포 사정권 안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북(조선)이 남(한국)을 볼모(hostage)로 잡고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만일 장거리포 수천문이 1천8백여개 지하요새에서 포신을 내밀고 불을 뿜는다면,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에는 포탄이 분당 1만 발씩 떨어져 "불바다"를 만들 것이다. 만일 수도권 땅속에 거미줄처럼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는 도시가스관이 포탄공격을 받아 폭발한다면 상상을 뛰어넘는 참사가 생길 것이다. 수도권 안팎의 모든 길은 몰려나온 민간인 수백만 명과 차량 수백만 대가 뒤엉키면서 완전 마비되어 한·미연합사 지상군은 수도권 방어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장부를 상대의 장거리포 사정권 안에 놓아둔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곧 패전으로 직결될 수 있다.

그런데 군사적 남우북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은 장차 재래식 군사력에 있어 한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보고, 소규모 핵 보유를 이에 대비한 보험책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을 논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남북의 재래식 군사력을 비교할 때 북(조선)이 우세하며, 유리한 조건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북(조선)이 남(한국)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엄청난 시간, 자금, 기술이 들어가야 하고, 또한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핵무장을 선택할 까닭은 없다. 따라서 북(조선)의 핵무장은 남(한국)의 재래식 전력에 맞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음이 자명해진다. 이에 관해서 마이클 마자르(Michael J. Mazarr)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의 핵위협은 한국전쟁 이래 줄곧 북한의 전략적 사고와 행동을 규정지어 왔으며, 북한 지도자들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촉발케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차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북한은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핵 사용 위협을 저지하고 미국의 핵우산에 대응하려 했다는 점이다.

(6) '혁명전쟁'의 공세전략과 북(조선) 핵무장의 정치적 난제

리영희 교수는 북(조선)의 핵무장이 "20여 년 전에 남(한국)이 놓였던 위기 상황보다 몇 배 내지 몇십 배 더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한 최후의 자위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조선)의 핵전략을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대한 수세적, 방어적 측면에 국한하여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격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북(조선)이 추진해오고 있는 군사전략,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 항일무장투쟁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 근원을 두고 있는 북(조선)의 군사전략은 언제나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이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적들이 검은 칼을 갈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는 붉은 칼을 날카롭게 벼려야 하며 적들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는 단호하게 혁명전쟁으로 대답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이란 북(조선)이 미국과 전쟁으로 맞붙게 되면, 미국을 결정적으로 타격하고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전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일성 주석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그것은 '혁명적 대사변'이 된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적 대사변'은 '혁명전쟁'의 공세전략 앞에 놓여있는 두 개의 표적, 곧 미국에 대한 결정적 타격과 조국통일의 성취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미국이 우리나라를 폭격하면 즉시에 강력한 대응타격을 가할 것입니다. 적들이 때리면 맞받아 때리려는 것이 우리의 변함없는 원칙적 립장"이라고 밝혔다. 이 말에는 미국에 대한 대응타격력, 대량보복력을 갖추어야 하고, 또 갖추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혁명전쟁'의 공세전략과 조국통일의 전략이 맞물려 있는 상호관계에 대하여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군사력을 계속 강화하여야 합니다. 우리 당은 나라의 통일을 될 수 있는대로 평화적 방법으로 이룩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평화적 방법으로 조국을 통일하려고 하지만 만약 적들이 무력으로 우리 혁명운동의 전진을 방해할 때에는 물론 우리는 무력으로 조국통일을 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김정일 총비서도 "미제침략자들이 무모한 전쟁을 도발한다면 그들을 단매에 때려부시고 조국통일의 력사적 위업을 반드시 성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북(조선)의 재래식 무장력은 대량파괴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로 무장하고 있는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미국을 '결정적으로' 타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북(조선)이 미국의 공격을 받는 경우 대량보복을 가할 수 있는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은 핵무장 전략 밖에는 없는 것이다. 미국의 핵공격에 대한 대량보복은 재래식 무기로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적 대사변'은 재래식 무장력으로는 결코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되리라는 것을 북(조선)은 잘 알고 있었다.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북(조선)의 핵무장에는 불가피한 정치적 난제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할 경우, 남(한국)과 일본에게 핵무장의 구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를 구실로 하여 남(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을 추진하게 되는 사태는 북(조선)이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북(조선)은 이 정치적 난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그것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였다. 북(조선)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 문제를 처음으로 제안한 때는 1986년이었다. 1989년부터 북(조선)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계속하면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정치협상을 제안하였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문제 전문가 셀릭 해리슨(Selig S. Harrison)에 따르면, 1991년 12월 24일에 열렸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아들일 것과 '한(조선)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핵개발 사업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결국 북(조선)은 '한(조선)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남(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북(조선)이 핵무장의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추진했던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사실상 미국도 매우 바라고 있던 문제였다는 점이다. 미국은 북(조선)의 핵무장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 남(한국)에게도 핵무장 구실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유럽의 미군기지에 배치해두었던 전술핵무기를 철수하는 기회에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도 철수하면서 남북이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1991년 9월 27일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Bush)는 남(한국)에 배치되어 있던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전술핵무기의 철수작업은 1991년 말까지 마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미국의 전술핵무기 철수는 남북이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도록 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당시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과정에 참가했던 남(한국)의 고위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이미 조야한 핵탄두를 보유했고 1992년 6월쯤 영변의 핵재처리 시설이 완공되면 이때부터 북한은 핵양산체제에 들어간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판단이었다. 북한의 핵보유가 임박했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 빨리 북한의 핵시설을 육안으로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91년말 레이먼 군축국장이 방한해 족보에도 없는 '시범사찰'을 제안한 것도 미국의 다급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6공 정부는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빨리 북한에 들어가 핵개발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미국의 거센 압력에 비핵화 선언을 받아들였고, 원전에 필수적인 기술인 재처리시설과 핵농축 시설까지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1992년 1월 20일 채택되고 2월 19일 발효됨으로써 남(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자, 모든 압박수단을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저지에 집중하였다.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던 그 무렵 김일성 주석은 핵무기 보유문제에 관해서 "우리에게는 핵무기를 만들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한 두 번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어도 쓸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동족을 반대하여 남조선에 핵무기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문장을 얼핏 읽으면 핵무장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이 문장은 동족을 죽이기 위한 핵무장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포함으로써 핵무장을 조건적, 부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에게는 핵무기를 만들어 동족을 살해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북(조선)은 동족을 죽이는 핵무장은 부정하였지만,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서는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핵무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요컨대 북(조선)이 말하는 '혁명적 대사변'이란 미국에게는 대량보복 핵공격을 뜻하며, 동족에게는 조국통일의 성취를 뜻한다고 해석된?

(7) 군사용 핵개발과 민수용 핵개발의 병진

앞에서 살펴본대로, 북(조선)은 중요한 군사시설과 무기생산시설을 지하요새에 배치하였다. 지하요새화 전략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의 공중공격을 피하면서 반공격을 가한다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그와 더불어 미국의 첩보위성과 정찰기의 감시·정찰체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은폐전략이기도 했다.

그런데 북(조선)이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문제이면서 가장 중요한 군사문제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 개발을 미국 첩보위성의 감시·정찰체계에 그대로 드러내보인 채 추진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북(조선)은 영변의 핵시설 가운데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중요한 시설들을 지하요새에 배치·은폐함으로써 미국 첩보위성의 감시·정찰을 피해 은밀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어야 마땅하다. 어느 나라나 핵무기 개발을 극비사업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북(조선)은 핵시설 건설현장과 핵무기 개발현장을 미국의 첩보위성에게 일부러 보여주는 태도를 취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북(조선)이 영변에서 기존 핵시설 이외에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시설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현장을 미국 첩보위성이 처음 포착했던 때는 1982년 4월이었고, 그에 근거하여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조선)이 그 핵시설을 착공한 시점이 1979년이라고 추정했다. 그 뒤로 미국은 끊임없이 영변 핵시설을 촬영·감시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북(조선)이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점점 더 짙게 느꼈다. 1986년 3월에 미국은 영변 핵시설단지를 촬영한 첩보위성의 영상자료에서 두 가지 중요한 대상물을 발견했다. 하나는 핵시설 부근에 있는 구룡강 모래밭에 생겨난 몇 개의 원통형 폭발구덩이들(cylindrical craters)이고, 다른 하나는 축구장 두 개 길이가 되는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이 건설되고 있는 공사현장이다.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그 폭발구덩이들이 핵무기 개발과정의 둘째 단계에서 진행하는 고폭실험(experimental high-explosive detonations)이 남긴 흔적이라고 파악했다. 1989년 6월 미국의 핵문제 전문가들은 북(조선)이 영변지역에 고폭실험장을 건설했다고 발표하였다. 북(조선)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1년까지 영변의 구룡강 모래밭에서 고폭실험을 약 70차례 실시하였다.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그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그들은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 1987년 2월 미국은 첩보위성이 촬영한 영상자료에서 아직 지붕을 씌우지 않은 그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 안에 두터운 벽으로 된 격실(cell)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이 격실들이 플루토늄을 분리·추출하는 공정을 위하여 배치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뒤 그 건물에는 지붕이 씌워졌고, 그때부터 미국은 그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생긴다. 정밀실험을 많이 해야 하는 핵시설 바로 옆에서 충격파가 매우 큰 고폭실험을 70여 차례나 실시할 수 있을까? 미국의 첩보위성이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곳에 버젓이 고폭실험 흔적을 남겨둘 수 있을까? 건축공정에서는 지붕을 씌우고 나서 내부공사를 진행하는 것이 정상인데도, 북(조선)은 어째서 격실이 배치된 건물 내부모습이 미국 첩보위성에 드러나 보이도록 그 직사각형 건물의 지붕을 나중에 씌웠던 것일까?

지하시설이 있는데도 이를 활용하지 않고 구태여 지상에 핵시설을 건설했고, 핵시설 건설과정에서도 지붕을 뒤늦게 씌워 격실을 배치한 현장을 드러내보였고, 핵시설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고폭실험을 실시한 흔적을 남겨놓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살펴볼 때, 북(조선)은 1986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미국의 첩보위성에게 영변의 핵시설 공사현장을 촬영하도록 일부러 드러내보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왜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영변의 핵시설 공사현장과 고폭실험 현장을 미국에게 일부러 드러내보였던 것일까? 당시 세상의 관심은 북(조선)이 영변의 핵시설에서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무기를 만들었느냐 아니면 아직 만들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에만 온통 쏠려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과 관련이 있는 핵시설 공사현장과 고폭실험 현장을 미국에게 일부러 드러내보인 의도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북(조선)의 노출의도는 그 핵시설 공사와 고폭실험 현장을 이용하여 미국을 정치협상으로 끌어내려는 데 있었다.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그 핵시설은 조·미 정치협상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 2월 국제원자력기구에 파견된 북(조선) 대표는 영변의 핵시설과 관련한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남(한국)에 배치된 모든 미국 핵무기를 철수하라는 것과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1990년 4월에 북(조선)의 그 요구를 묵살하였다. 1990년 7월 21일 북(조선) 외교부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영변의 핵시설을 사찰하는 조건으로 조·미 직접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남(한국)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한다면,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발표했다.

1991년 6월 11일 마침내 미국은 북(조선)의 요구에 대해 핵무기 불사용 원칙으로 응답했다. 그날 미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Richard Boucher)는 미국이 북(조선)이나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국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1990년 6월 16일 북(조선)이 미국이 자국에게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한 때로부터 꼭 한 해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6월 20일 북(조선)의 김영남 외교부장은 미 국무부 대변인의 6월 11일 발표를 환영한다고 말하면서, 남(한국)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했는지를 확인하는 사찰을 해야 하며,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미국의 대북 핵공격 포기선언을 이끌어낸 북(조선)은 한 발 더 나아가 대미 정치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북(조선)은 1994년 4월 1일 외교부 발표를 통해 영변 핵시설에 대한 현장사찰 문제는 미국과 직접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의 고위관리들은 1994년 5월 3일 북(조선)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완전한 사찰을 받아들이면 미국은 경제관계와 외교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영변의 핵시설이 이처럼 미국을 정치협상으로 이끌어내는 지렛대로 작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미 실무급 회담이 1994년 5월 1일에 열렸다. 이 실무급 회담이 성사된 직후에도 조·미 두 나라는 전쟁이냐 협상이냐를 판가름하는 긴박한 위기상황을 또 한 차례 넘겨야 했으나, 결국 1994년 8월 5일 미국은 조·미 고위급 회담장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조미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미국에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원래 우리와 회담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줄임) 조미회담은 이와같이 우리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투쟁에 의해서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의 회담을 한사코 반대하던 미국을 조미회담장에 끌어낸 것은 우리의 커다란 승리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말한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투쟁'이란 영변의 핵시설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의 전쟁계획을 무력화시키고 협상으로 이끌어낸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이클 마자르의 분석은 들을 만하다. 그는 이렇게 평가했다.

북한 지도자들이 핵 보유를 하나의 외교적 지렛대로 간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줄임) 북한 관리들은 그들이 핵 능력을 가질 경우 그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양국 간의 철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의도는 적중한 셈이다.

그러나 마자르는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핵시설 공사현장과 고폭실험 현장을 미국에게 드러내보인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만일 북(조선)이 핵무기를 미처 보유하지 못했는데도 '외교적 지렛대'(영변의 민수용 핵시설)부터 먼저 움직여서 미국에게 발목이 잡히고 그 결과 핵무기 개발을 동결하는 조치를 받아들여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그러했다면, 북(조선)은 핵무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의 전면적인 핵전쟁 위협을 받아, 영변 핵시설은 미국의 외과수술식 타격(surgical strike)으로 파괴되고, 한(조선)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타격은 미국 군부가 1993년과 1994년에 각각 검토한 바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북(조선)이 처음부터 군사용 핵개발과 민수용 핵개발을 병진적으로 추진해왔다는 것이다. 영변의 핵시설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건설되고 있었던 군사용 핵시설이 아니라 민수용 핵시설이었다. 민수용 핵개발은 소련, 동유럽 나라들과 기술협력을 하면서 추진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조선)은 소련, 동독, 체코슬로바키아와 민수용 핵개발 협정을 체결하였다. 북(조선)은 1986년 12월 29일 핵과학자 최학근 박사를 부장으로 하는 원자력 공업부를 설치하고 민수용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조선)은 민수용 핵개발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고, 1990년대 초부터는 민수용 핵개발에 대해 핵무기 개발의혹을 제기하는 미국과 정치협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영변 핵시설은 원래 민수용 핵개발 시설이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 시설을 크게 확장하고 새로운 설비를 들여오자 이 시설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조·미 정치협상의 지렛대가 되었다. 반면에 군사용 핵개발을 위한 시설은 미국의 첩보위성과 정찰기가 포착하기 힘든 지하에 건설되어 있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문제 전문가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는 김일성 주석이 1970년대 말에 북(조선)의 과학원, 군부, 사회안전부에게 영변의 기존 핵시설을 빨리 확장하고 핵무기 개발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영변의 기존 핵시설을 확장하는 사업은 민수용 핵개발을 뜻하는 것이며, 핵무기 개발사업은 군사용 핵개발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은 영변의 민수용 핵개발 시설을 현장조사한 뒤에 그 시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30년 묵은 낡은 시설이어서 그 시설을 가지고서는 가까운 장래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북(조선)의 핵시설은 외부에 공개한 영변의 민수용 지상 핵시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군사용 지하 핵시설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군사용 지하 핵시설은 영변의 민수용 지상 핵시설보다 훨씬 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군비통제·군축국(US Arms Control and Disarmanent Agency) 국장 로널드 레먼(Ronald Lehman)이 1992년 6월 북(조선)의 핵개발 기술은 매우 발전되었다(very advanced)고 지적했을 때, 그가 말한 매우 발전된 핵개발 기술이란 영변의 낡은 민수용 핵시설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군사용 지하 핵시설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정하고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북(조선)의 경우, "매년 수십 개의 플루토늄 폭탄을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은 수백만달러의 경비만 들이면 몇 개월 내에 완성할 수 있으며 탐지되지 않게 해낼 수 있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은밀하게 제조하기 위해 작은 재처리시설을 지하에 건설하는 문제는 1년 안에 1천만 달러만 투자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북(조선)이 민수용과는 별도로 군사용 핵시설을 건설·가동해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다. 미국의 첩보위성이 1998년에 영변에서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구성에서도 고폭실험 흔적을 포착했다고 한 것은 핵시설이 영변 이외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3년 2월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이 이미 1960년대 말에 소련의 기술을 이용하여 영변의 핵시설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비밀 핵시설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북(조선)에서 일했던 소련의 군사전문가는 북(조선)이 핵시설을 깊은 산 속이나 위장시설에 감추어 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 차관보는 양강도에 비밀 핵시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1991년 9월 프랑스 항공연구소(Aeronautical Research Center)의 지구탐사위성이 촬영한 영상자료에는 평안북도 박천에 있는 또 다른 핵시설이 나타났는데, 이 핵시설은 산 속에 약 1킬로미터에 걸쳐 건설된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에게 제출된 1995년 3월의 정보기관 보고서는 북(조선)이 영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핵분열성 물질을 은밀하게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영변의 핵개발 시설을 해체하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하면서 1994년의 제네바 합의서를 채택한 뒤에도 핵무기를 계속 개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미국 정보기관 보고서에 따르면, 북(조선)은 자강도에 두 곳, 하갑, 평안북도 태천과 구성 사이의 한 곳 등 모두 네 곳에 거대한 지하시설을 건설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자강도의 지하시설은 핵개발에 사용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북(조선)은 지하 핵시설에서 핵무기 개발을 마친 뒤에, 영변의 민수용 핵개발을 정치협상의 지렛대로 가동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북(조선)은 영변의 핵시설을 집중감시하면서 핵무기 개발의혹을 제기하는 미국을 정치협상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맞서고 있는 북(조선)이, 협상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미국에게 핵문제를 가지고 도전하여 협상자리에 끌어내는 일은 전쟁이냐 협상이냐를 판가름하는 숨막히는 위기 속에서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북(조선)이 만일 핵무장을 하지 않은 조건에서 미국을 향해 핵협상을 하자고 도전했다면 그것은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며 그 도전으로 발생된 핵전쟁 위기도 돌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조선)은 군사용 지하 핵시설에서 개발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수용 지상 핵시설을 협상대상으로 내놓을 수 있었고, 또한 미국과 제네바 기본합의문을 채택하면서 그 지상 핵시설을 동결하도록 허락했다.

미국의 한 분석가가 지적한대로, "북(조선)은 그들이 가장 바랬던 것을 얻었다. 그것은 (줄임) 미국과 직접 교섭하는 것"이었다. 북(조선)은 핵무장력과 대미 협상력을 모두 얻었고, 반면에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과 대북 협상력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8) 북(조선)의 자력갱생적 핵개발과 미국의 묵인정책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과 보유는 비밀에 묻혀있다. 외부에서 이 비밀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보유가 비밀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오버도퍼가 지적한대로, 핵개발 사업을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추진했기 때문이다.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사업이 자력갱생적으로 추진된 것은, 북(조선)을 건국한 세력이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지금까지 견지해온 노선이 자력갱생노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북아지역의 전략균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놓을 핵무기 개발사업과 관련하여 북(조선)에게 직접적인 지원과 협력을 제공해줄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으레 '혈맹'이니 '동맹'이니 하는 외교적 수식이 따라붙었던 조·중관계나 조·소관계에서 북(조선)은 언제나 대국주의, 패권주의를 반대하는 자주노선을 견지하였고,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중국과 소련은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지원·협력할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소련과 중국은 핵무기 개발에 협력해 달라는 북(조선)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중국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핵관련 기술을 북(조선)에 넘겨주지 않았으며 북(조선)에 나가있던 핵관련 기술자를 철수시켰다. 1989년 6월 소련과 중국은 영변의 재처리 시설 건설을 지원해 달라는 북(조선)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1990년 소련은 북(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면서 핵관련 장비와 연료의 수출을 중단하였다.

북(조선)은 처음부터 군사용과 민수용의 핵개발 사업을 자력갱생의 길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조선)은 1980년 9월 자체의 자본과 기술로 영변에 5메가와트급 제2원자로 건설을 시작했고 이 원자로는 1987년 10월에 가동되었다. 이 원자로는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흑연을 감속재로, 이산화탄소를 냉각재로 사용하는 원자로다. 이 원자로는 플루토늄 239 동위원소 순도가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해낼 수 있다. 미국은 1985년에 첩보위성의 영상자료를 분석한 끝에, 영변 제2원자로는 1956년에 가동하기 시작했던 영국 최초의 원자로인 60메가와트급 캘더 홀 맥녹스 원자로(Calder Hall magnox reactor)의 기밀해제된 설계 정보에 기초하여 만든 복제형 원자로라고 파악했다.

북(조선)은 이처럼 자력갱생의 자본과 기술로 핵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에 핵개발의 자주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북(조선)의 핵개발 기술력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1990년대에 가서도 미국에 맞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만일 북(조선)이 중국이나 소련의 기술지원에 크게 의존하여 핵개발을 추진했더라면, 질적으로 변화된 1990년대 탈냉전 이후의 미·중관계나 미·러관계가 북(조선)의 핵문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한 비밀이 밖으로 새어나왔을지도 모른다.

둘째, 설령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핵무장 사실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으며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 정보기관은 국제사회에 밝힐 수 없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 이른바 비시인·비부인(NCND: Neither Confirm Nor Deny)정책을 견지해왔다. 이 정책은 비단 미국 정보기관에 고유한 것은 아니며, 다른 나라도 수행하는 일반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문제도 비시인·비부인정책을 견지한 대표적인 경우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경험에서 유추해 볼 때, 비시인·비부인정책은 사실상 시인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미국이 북(조선)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를 묵인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묵인정책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1994년 3월이었다. 묵인정책은 북(조선)의 핵무기를 모른체 하겠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북(조선)이 앞으로 핵무기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보겠다는 적극적인 억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1994년 2월 28일자에 실린 크레이머의 기고문은 미 국무부 관리의 말을 옮겨 적으면서, 북(조선)의 "핵의 존재가 의문의 여지없이 드러나면, (미국은-옮긴이) 당장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럴 바에는 현재 그다지 우려되지 않는 상태인만큼 그냥 두고, 그 머리만 누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적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 1994년 3월 10일자에 실린 짐 호글랜드의 기고문은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이미 핵을 개발했거나 아니면 신속히 개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북한이 원자로에서 전용한 플루토늄은 이미 엎지른 우유와도 같다. 정부는 평양이 가까운 장래에 원형폭탄(proto-bomb)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이미 체념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시인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그런 체념이 현 정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타임』은 미국이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한 것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묵인정책은 윌리엄 페리가 국방장관이 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3월 28일 미국의 새 대북정책을 반영하듯, 레스 애스핀에 이어 국방장관에 취임한 윌리엄 페리는 미국의 노력은 앞으로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빼앗기보다는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더 치중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셋째, 북(조선)은 자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미국에게만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북(조선)이 핵무기를 은밀히 개발하여 핵무장을 했는데도, 미국이 이를 모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그러했다면, 미국은 북(조선)을 협상 상대로 여기지 않을뿐더러 핵전쟁 위협을 계속 가했을 것이다.

북(조선)은 영변의 핵시설을 이용하여 미국을 정치협상으로 끌어내야 했지만, 그와 더불어 미국에 맞서는 핵무장력을 갖추고 있음을 미국에게 은밀히 알려주어야 했다. 만일 미국이 북(조선)은 핵무장을 아직 갖추지 못했고 핵개발 능력만 가지고 있다고 오판할 경우, 미국은 북(조선)에 대해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어떻게 핵무기 보유사실을 미국에게 알려주었을까? 핵무기 개발의혹을 제기한 미국과 치열하게 힘을 겨루던 대결 분위기가 최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 북(조선)은 미국에게 핵무기 보유사실을 극적으로 알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매우 높은 가능성이 포착되기는 했으나, 확인할 길이 없어 강한 의혹으로 남아있었던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1994년 6월 15일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나타났던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손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카터의 방북은 미국이 북(조선)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전쟁이냐 굴복이냐를 택하라는 최후 통첩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클린턴은 카터를 평양에 파견해놓고 백악관 각료회의실에서 외교·군사·정보부문의 최고위급 관리들과 함께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한 최후 결정을 내리는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평양에 들어간 카터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제재조치를 결정하고 무력을 증강하기만 하면 북(조선)이 선제공격으로 먼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전쟁위기를 체감하면서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깨어날 만큼 정신적 압박감에 눌려 있던 카터는 보좌관으로 따라간 매리온 크릭모어(Marion Creekmore)를 판문점에 내려보내 남(한국)에 있는 미국의 비상연락망을 통해 클린턴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도록 대기하라고 조치하고 나서, 김일성 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6월 17일 카터와 김일성 주석이 만난 역사적인 자리에서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는 세상에 알려진 바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전쟁위기의 국면이 풀려나가는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카터는 이러한 극적 타결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기적적인 타결'이 이루어졌을까?

흔히 북(조선)이 영변의 핵시설을 동결하고 경수로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함으로써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카터의 방북 이전에 북(조선)이 이미 미국에게 제안한 것으로서 최후 통첩을 '기적적인 타결'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이고 새로운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그 극적인 타결은 북(조선)이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핵전쟁에는 핵전쟁으로 대응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의 위협과 공갈을 한층 더 강한 위협과 공갈로 누르는 것이 북(조선)의 전통적인 대미 전술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단호한 태도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 반응 속에는 북(조선)이 핵무장국임을 카터에게 확인해주는 내용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최후 통첩을 들고 평양에 들어갔던 카터는 김일성 주석과 만난 뒤에, 자신과 함께 간 씨엔엔(CNN) 텔레비전의 평양발 방송 카메라 앞에 서서 김일성 주석의 발언내용을 되풀이하여 전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매우 중요하고 긍정적인 조치"였음을 자꾸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최후 통첩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워싱턴의 수뇌부에게 카터의 발언은 국제원자력기구 요원 두 사람을 붸아내지 않고 영변에 그대로 머물게 하겠다는 조치 이외에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카터가 미국에 돌아온 직후인 6월 22일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조·미 3단계 회담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이상한 반응'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이냐 굴복이냐를 판가름하는 최후 통첩장을 던진 미국이 어째서 국제원자력기구 요원 두 사람을 종전대로 머물도록 허락한다는 별 것 아닌 조치 앞에서 최후 통첩을 접어두고 정치협상을 재개하기로 결정했을까? 국제원자력기구 요원을 종전대로 머물게 하는 조치는 북(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 가입국으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인데, 어째서 이 마땅한 의무이행 앞에서 그토록 살기등등하던 미국이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미국이 카터의 방북을 통해 북(조선)이 핵무장국임을 확인하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이 북(조선)이 핵무장국임을 확인한 사건은 조·미 대결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전쟁이냐 굴복이냐 하는 미국의 거센 압박구도가 사라지면서, 공멸이냐 공존이냐 하는 새로운 구도로 교체된 것이었다. 그것은 상호 핵공격에 의한 조·미 공멸이냐 아니면 미국이 핵무장한 북(조선)과 공존하느냐 하는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오버도퍼는 이러한 극적인 국면전환을 "외교적, 군사적 위기는 갑자기 새로운 정치적 차원으로 접어들었다"고 묘사했다. 핵전쟁에 의한 공멸을 두려워한 미국은 하는 수 없이 북(조선)과 공존하는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채택된 조·미 기본합의서는 미국이 핵전쟁 보복전략을 포기하고 평화공존을 약속한 외교문서였다. 그때부터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북(조선) 자신과 그것을 확인한 미국이 알고 있는 '둘만 아는 비밀'로 남게 되었다.

(9)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능력과 첫 핵무기를 보유한 시점

아무리 북(조선)과 미국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둘만 아는 비밀'로 간직한다 해도,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사건들을 추적해 보면, '비밀의 윤곽'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실체 없는 그림자가 없듯이, 실체 없는 윤곽은 없는 법이다. '비밀의 윤곽'은 '비밀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창구다.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능력은 핵과학자들의 능력, 기술공학발전 수준, 그리고 핵무기 개발의 시간대라는 세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다.

1) 북(조선)의 핵과학자들

중국의 핵무기를 개발한 대표적인 과학자는 첸쉐썬(錢學森)이고,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개발한 대표적인 과학자는 압둘 카디르 칸(Abdul Kadir Kahn)이다. 그렇다면 북(조선)의 핵무기를 개발한 과학자는 누구인가? 그 주역들을 살펴보면 '비밀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까?

북(조선)의 핵무기를 자력갱생적으로 개발한 대표적인 핵과학자는 북(조선)이 자랑하는 3대 과학자다. 세계적인 화학자 리승기 박사, 세계적인 물리학자 도상록 원사, 그리고 북(조선) 핵물리학의 원조 한인석 박사가 그들이다. 리승기 박사(1905-1996년)는 일제 식민지시기에 "헐벗은 조선민족의 옷 입는 문제를 해결하려 몸부림쳤던 과학자.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최초이며, 세계에서 세 번째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발명해 낸 섬유공학자"였다. 그는 북(조선) 국방과학원에서 소장 계급장(북[조선]에서는 별 하나를 소장이라고 함)을 달고 무기개발에 힘썼는데, 그가 방사포(다연장 로켓포)에 사용하는 고성능 화약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북(조선)에서는 방사포를 '리승기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리승기 박사는 1965년 6월 영변의 연구용 제1원자로가 가동을 시작했을 때 원자력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일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이끌었다.

도상록 원사(1903-1990년)는 함경남도 흥남항 부근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1930년대에 양자역학에 관련한 논문을 일본과 미국의 과학전문지에 발표하여 세계 물리학계에 이름을 떨쳤던 양자역학, 핵구조, 핵이론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는 핵가속장치를 자체 기술로 제작하여 북(조선)에서 처음으로 핵반응 실험에 성공했으며, 새로운 핵모형을 수립하여 핵물리학을 발전시킨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한인석 박사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과 독일에서 공부했고, 해방 뒤에는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다가 월북했다. 정전 뒤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최신 핵이론을 공부하고 돌아와 1960년대부터 핵개발과 관련된 수많은 논문을 내놓았다.

이 3대 과학자 이외에도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북(조선) 최고의 과학자들은, 김책공업대학 총장으로 있었던 화학자 김경완 박사,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아들 여경구 박사, 소련에서 원자물리학을 전공하였으며, 핵개발 실무 총책임자로 알려진 정근 박사, 원자력연구소 소장과 원자력공업부 부장을 지낸 최학근 박사,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문가로 현재 핵전자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계용순 박사,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내고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있는 박관오 박사다. 지난 시기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Dubna Nuclear Research Institute)에서 연구한 북(조선)의 핵과학자는 수백명에 이르는데, 이처럼 우수한 두뇌집단이 20여 년 동안 전력을 기울였는데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도상록 원사는 1973년에, 리승기 박사는 1980년 4월에 각각 김일성상을 받았으며, 이 두 과학자는 모두 1986년 3월에 인민과학자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을 함께 받았다. 1986년에 있었던 수상경력은 이들이 핵무기 개발에서 이룩한 공적과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 북(조선)의 기술공학 수준

북(조선)은 일찍부터 기술공학 발전에 정력적으로 달라붙었다. 증기기관차도 만들어본 적이 없던 북(조선)이 부속품만 해도 1만4천여종, 18만개를 만들어 조립해야 하는, '기계공업과 전기공업의 정수'라는 전기기관차를 자체의 힘으로 설계하여 생산해낸 때는 1961년이었다. 평양 지하철 공사도 그 무렵 착공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는 3백마력 불도저, 10입방미터 굴착기, 3천마력 고속엔진, 10-케이브이에이(KVA) 발전기, 4천2백마력 전기기관차를 자체 기술로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1만톤급 프레스, 18미터 터닝, 20미터 대형 선반 같은 대형 기계를 만들어냈다. 김정일 총비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곧 혁명에 대한 관점과 태도이며 과학기술을 홀시하는 것은 혁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과학기술 중시정책을 추진해왔다.

북(조선)은 무엇보다도 군사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온힘을 집중하여왔다. 김정일 총비서는 현대전의 성격을 "립체전이며 과학기술전"이라고 규정하면서 "오늘 우리의 군수공업은 최신무기와 전투기술기재를 자체로 생산할 수 있는 자립적이며 현대적인 군수공업으로 발전"하였다고 지적하고, "현대전에서 승리하려면 국방과학을 더욱 발전시켜 현대적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를 더 많이 생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북(조선)이 고도의 기술력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잠수함을 자체 기술로 제작한 때는 1975년이었으며, 이듬해는 한 해에 잠수함을 다섯 척이나 만들어내기도 했다. 북(조선)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미 티(T)-59 전차, 알피지(RPG)-7 대전차 로켓포, 130밀리 자주포와 180밀리 자주포, 152밀리 곡사포, 엠(M)-1973 장갑차, 미사일 고속정, 1천5백톤급 호위함, 1천4백톤 알(R)급 잠수함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군사기술력을 보유하였다. 또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케이(K)-61 수륙양용 장갑차, 티(T)-62 전차, 고속상륙정, 프록(Frog) 5/7 미사일을 자체 생산하였다.

북(조선)은 일찍이 1960년대 말부터 미그-15기 부품 가운데 상당부분을 국산화하였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미그기를 기술면허에 의한 조립생산(licensed assembly production)으로 제작하였고, 1980년대부터는 미그기 부품 가운데 70퍼센트를 국산화하였고,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대 항공기 제작의 정수'라는 최신예 미그-29기를 조립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북(조선)은 군수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전자공업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당면하여 전자공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가장 현대적인 설비를 사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전자공업을 하루 빨리 세계적 수준에 올려세워야 합니다"고 하면서 전자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자공업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반도체 공장인 '69호 공장'은 남(한국)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과 비슷한 규모로 50메가 디램(D RAM)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북(조선)은 1986년에 전자전 군사학교인 '미림대학'을 설치하고 전자전 요원을 길러내오고 있다.

다음으로 북(조선)의 핵공학기술 수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조선)은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고 있었던 1955년 4월에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고, 1956년 3월 26일에는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 창설에 참여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핵과학자들을 연수시키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북(조선)이 1956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에 핵개발 연구인력 2백여명을 보낸 바있으며, 1991년 현재 30명의 북(조선) 과학자들이 이 연구소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조·소 원자력협정이 체결된 때는 1959년 9월이었다. 북(조선)은 이미 1960년대에 소련의 재래식 기술인 퓨렉스 재처리 기술(Purex reprocessing technology)을 들여왔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영변에 민수용 아이알티(IRT)-2000형 연구용 원자로 건설에 착공한 때는 1962년 1월이었고,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한 때는 1964년 2월이었다. 북(조선) 외교부의 강석주 제1부부장은 북(조선)이 핵개발 사업에 5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북(조선)은 1980년 9월에 자체 기술로 건설하기 시작한 영변의 제2원자로를 1986년 가을에 시험가동했으며, 1987년 10월부터는 정상가동하였다. 남(한국)의 원자력연구소가 1994년 12월부터 가동하는 열출력 30메가와트급 원자로와 북(조선) 영변의 5메가와트급 제2원자로(열출력으로 환산하면 30메가와트급)를 비교해보면 북(조선) 원자로의 부피가 1천5백배나 크다. 남(한국)의 원자로는 노심의 지름이 0.5미터, 높이가 0.7미터인 원통형인데, 북(조선)의 원자로는 노심의 지름이 6.6미터, 높이가 6미터이다. 핵연료의 양은 남(한국) 원자로가 50킬로그램, 북(조선) 원자로는 5만킬로그램이다.

북(조선)이 영변에 50메가와트에서 2백메가와트로 추정되는 대형의 제3원자로를 자체의 기술로 건설하기 시작한 때는 1984년이었다. 이 원자로가 미국의 첩보위성에게 포착되었을 때는 이미 공정의 50퍼센트가 끝나 있었던 때였다. 제3원자로는 1995년에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대형 원자로가 완공될 경우 해마다 플루토늄 7-8킬로그램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며, 그로써 한 두 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외부의 전문가들은 1987년에 북(조선)은 영변의 재처리 시설(방사화학실험실)을 공사하기 시작하였다고 판단했고, 미국 첩보위성이 영변에서 연구소, 주택단지, 고폭실험장, 제3원자로, 재처리 시설이 건설되고 있는 현장을 감시하고 있었던 1989년에는 북(조선)이 미완의 재처리 시설을 이용하여 적은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데 이미 성공한 뒤였다. 1992년 5월 15일 북(조선)의 대일 수교 협상을 이끈 리삼로 대표는 북(조선)이 비군사적 목적으로 매우 적은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적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1990년 4월 19일 미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는 영변의 재처리 시설이 건설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완공되려면 앞으로 몇 해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 중앙정보국 국장 제임스 울시(James Woolsey)는 북(조선)이 적어도 핵무기 한 개를 제조하기에 넉넉한 플루토늄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으며 러시아 국가정보기관의 1990년 보고서도 이를 인정하였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슈테른』은 북(조선)이 1992년 러시아에서 은밀하게 플루토늄 56킬로그램을 확보했다고 보도하였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는 북(조선)이 1995년 말까지 핵무기 4-5개를 만들기에 넉넉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것으로 추정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북(조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던 파키스탄의 군사기술력 수준은 북(조선)보다 뒤져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군사기술력 수준이 낮은 파키스탄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는데, 우수한 군사기술력을 가진 북(조선)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남(한국)은 1974년부터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는데, 만일 미국이 저지하지 않았다면 이미 1980년대 중반쯤에 핵무기를 가졌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북(조선)의 군사과학기술은 남(한국)에 뒤지지 않았으므로, 북(조선)이 1970년대 말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면 적어도 1980년대 중반에는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을 것이다. 지만원 박사의 말대로, "북한이 엄청난 군사기술을 가지고도 40년 동안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3) 북(조선)이 첫 핵무기를 보유한 시점

북(조선)은 언제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였을까? 인민무력부 총참모부에 핵·화학방위국이 설치된 때가 1961년이었고, 핵·화학방위국 산하에 총괄지도부와 일곱 개 부서를 두었고, 55연구소, 710연구소, 398연구소 등을 두었던 것을 보아서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 사업을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말로 보아야 한다. 오버도퍼는 러시아 정보기관 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일성 주석이 북(조선)의 과학원, 군부, 사회안전부에게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때가 1970년대 말이었다고 밝혔다. 1981년 5월 북(조선) 관리들은 평양을 방문한 동독 집권당 대표단 고위대표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는 원자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이 1990년대 초가 아니라, 그보다 10년 이상이나 앞선 1970년대 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 말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그 무렵 북(조선)은 남북관계에서 경제적으로뒤지지 않았으며,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하고, 비동맹진영에서 북(조선)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한 것과 박정희 정권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시도 때문에 한·미관계가 매우 악화되고 있었다. 이처럼 북(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위기상황이 아니라 매우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시기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리영희 교수는 북(조선)이 "1991년에 소련의 핵우산 포기 통고를 받고 총력을 투입하여 본격적으로 자체적인 핵·미사일 군사화에 돌입하였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첫째, 지금도 그렇지만, 지난 냉전시기에도 조·소관계는 핵우산으로 보호해주고 보호를 받는 한·미관계와는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이다. 옛 소련이 극동에 배치했던 핵무기는 북(조선)을 보호해주는 핵우산이 아니었으므로 핵우산을 포기한다고 통고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위에서도 밝혀졌지만,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초가 아니라 1970년대 말이라는 사실이다.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목적이 1990년대에 들어서 위기상황에 몰린 북(조선)의 생존전략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리영희 교수의 관점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한 목적이 수세적, 방어적 생존전략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적극적, 능동적인 공세전략에 있었음을 보지 못하고 있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을 밝혀내는 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면, 다른 나라의 핵무기 개발기간에 비추어봐서 북(조선)이 핵무기를 제조한 시점도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대국인 미국은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완성했으며, 다른 핵보유국들은 핵분열성 물질을 획득한 뒤 핵무기를 완성하기까지에는 대략 6-7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어느 나라나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면 늦어도 6-7년 안에는 핵무기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 경험에 비추어봐서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기간을 6-7년으로 잡는다면,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때는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1970년대 말에서 6-7년이 지난 1986년쯤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의 첫째 단계 기술인 플루토늄 추출기술을 확보했던 때가 1979년이었고, 기폭장치와 특수폭약을 개발하는 핵무기 개발의 둘째 단계 기술인 고폭실험에 성공한 때는 1983년이었다. 1989년에 북(조선)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상온에서 핵융합 반응을 실현시키는 높은 기술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핵기술 수준의 발전과정으로 볼 때, 북(조선)은 이미 1986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첫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북(조선)의 핵무기 제조 시점을 1990년쯤으로 늦추어 보고 있다. 1989년 2월 소련의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Eduard A. Shevardnadze)는 북(조선)이 머지 않아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말을 남겼지만, 러시아 정부의 비밀보고서는 북(조선)이 핵탄두 한 두 개를 제조하는 데 이미 성공했다고 밝혔다. 1994년 2월 미국의 전쟁 대학(War College)를 방문하고 있던 중국 정부 관리들은 북(조선)이 이미 한 두 개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셉 버뮤디즈 2세(Joseph S. Bermudez, Jr.)는 북(조선)이 1990년에서 1991년 사이에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독일의 주간지 『슈테른』 1993년 3월 14일자는 옛 소련의 국가정보기관(KGB)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북(조선)은 1990년 2월에 첫 핵탄두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고서는 북(조선)이 이미 핵무기 개발을 완료하여 핵무기 6-7개를 실전에 배치하는 단계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러시아와 중국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1993년도에 나온 미국 국가정보평가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에 따르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문제에 관한 미국 정보기관의 견해는 둘로 갈라져 있어서, 중앙정보국과 국방정보국은 북(조선)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반해, 국무부와 백악관은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한다. 미 국무부는 1992년 3월 초 북(조선)이 핵폭탄을 만들려면 앞으로 2년 또는 그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미 국무장관 레스 애스핀은 1993년 12월 12일 미국 엔비씨(NBC) 텔레비전 방송에서 미국의 정보자료를 인용하면서 북(조선)은 핵폭탄 한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하였으며, 이미 핵폭발물 한 개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1991년 미 국방부는 북(조선)이 군용수송기나 화물열차에 실을 수 있는 투박한 플루토늄 핵폭발물(crude plutonium-based nuclear device)을 만들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는 달리 미 중앙정보국은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시점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으면서도 핵무기 보유사실은 사실상 인정했다. 미 중앙정보국 국장 로버트 게이츠(Robert M. Gates)는 1992년 2월 25일에 열린 미 연방하원 대외문제위원회 청문회에서 북(조선)이 핵물질을 넉넉하게 확보하고 있으며 불과 몇 달 안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단계에 있다고 증언하였다. 미 중앙정보국은 외부에 공개한 정보에서는 북(조선)이 핵무기를 곧 제조할 것이라고 밝혔던 것과는 다르게 내부적으로는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의 비밀 핵개발 계획이 미국 정보기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진척되어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 놀란 미 중앙정보국은 1백여명이나 되는 핵문제, 군축문제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핵확산금지센터(Nonproliferation Center)'를 설치하고 지난 20년 동안 축전해온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련한 자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했는데, 북(조선)이 이미 많은 플루토늄을 추출했고, 이미 핵폭탄을 한 두 개 가졌을 것으로 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미 중앙정보국은 북(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투박한(crude)' 핵무기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찍었다. 중앙정보국의 평가가 '투박한', '조야한', '원시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자꾸 달아놓는 까닭은, 북(조선)의 핵무기가 미국에게 별로 위협적인 물건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남(한국)의 전직 최고위 정보 관계자는 "미 중앙정보국은 1991년까지 북한이 한 두 개의 원시적인 핵폭탄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에는 그 가능성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런데도 '가졌다'고 발표를 못하는 것은 '있다'고 했을 때의 대응책까지 고려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북(조선)의 핵폭발 실험 여부다. 북(조선)은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북(조선)이 아직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2년 3월 14일에 발행된 러시아의 주간지(Argumenty i Fakty)는 북(조선)이 핵폭발 장치를 개발한지 1년이 넘었다는 사실과 핵무기 개발 사실을 비밀로 하기 위하여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 중앙정보국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북(조선)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하 핵실험도 계획한 바 있으나 실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핵폭발 실험이란 핵무기 개발에서 필수 요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1974년에 핵폭발 실험을 단 한 차례 하고 나서 핵무장국이 되었고, 그 뒤로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고서도 핵무기를 만들었다.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고서도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면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는 이른바 임계전 핵실험을 통하여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라늄 농축기술이다.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데는 엄청난 전력이 소모되므로, 가뜩이나 전력난을 겪고 있는 북(조선)으로서는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지만, 북(조선)은 화학적 방법으로 이 난제를 해결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한국) 국방부의 한 전문가는 북(조선)이 폭발속도가 초당 9백미터를 넘는 고성능 폭약을 개발하고 그것을 가지고 대포식(gun type) 기폭장치를 만들 것으로 보았다. 대포식 기폭장치는 구형(globe type) 기폭장치보다도 폭발확률이 매우 높아서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핵폭탄은 대포식(gun barrel type)이었고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핵폭탄은 내폭식(implosion type)이었는데, 나가사키 핵폭탄은 사전 폭발실험을 거친 뒤에 사용한 것이었고, 히로시마 핵폭탄은 폭발실험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북(조선)의 핵무기는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포식 기폭장치를 내장한 핵무기일 것으로 보인다.

둘째, 다른 나라의 핵폭발 실험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을 받는 나라는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은 1970년대 초 줄 피가르 알리 부토 총리가 "풀을 먹더라도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뒤로, 독일과 영국에서 우라늄 농축 장비와 기술을 들여오고 중국에서 핵폭탄 설계기술을 들여와 1980년대 중반에 핵무기 개발을 완료하였다. 파키스탄이 1998년 5월 28일에 지하 폭발실험을 실시한 핵폭탄은 개발비용이 적게 들고 짧은 기간 안에 제조할 수 있는 우라늄탄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은 현재 핵탄두 20여 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기술과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 기술이 서로 교환되었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정되고 있다. 북(조선)과 파키스탄이 '과학기술문화협정서'에 조인한 때는 1982년 10월이었는데, 이때부터 북(조선)은 파키스탄에 기술자를 보내 핵관련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정보기관은 1984년 서유럽 나라들의 국제차관단인 유렌코(Urenco)에서 도난당한 의혹이 있는 우라늄 농축기술에 관한 정보가 스위스를 거쳐 파키스탄으로부터 넘어갔고, 파키스탄은 이를 다시 북(조선)에게 넘겨주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북(조선)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자료를 넘겨받았다면 핵폭발 실험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10) 맺음말

정전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조선)반도는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과 북(조선)의 재래식 대응전략 사이에서 매우 위태로운 전략균형을 유지해오면서 전쟁위기를 수없이 넘겼다. 연속되는 전쟁위기 속에서 북(조선)은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에 맞서는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을 끊임없이 강화·발전시켜 왔으며, 그 결과 군사력에서 남(한국)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혁명전쟁'의 공세전략은 미국에 대한 대량보복을 상정한 전략이었으므로, 북(조선)은 핵무장의 길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북(조선)의 핵무장은 군사용 핵개발과 민수용 핵개발의 병진정책으로 추진되었고, 1986년을 전후한 시점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북(조선)의 핵무장이 비밀로 지켜지는 까닭은 북(조선)이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핵무기를 개발해왔기 때문이며, 미국이 북(조선)의 핵무장을 묵인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조선)의 핵기술공학 수준을 평가할 때, 북(조선)은 1986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첫 핵무기를 만들었고, 그 뒤로 1996년까지 약 10년 동안 군사용 지하 핵시설에서 핵무기 제조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996년 이후에는 전략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더욱 발전된 핵탄두를 여러 개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이 알고 있는대로, 5대 핵강국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다섯 나라다. 이 다섯 핵강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정치·군사적 질서를 좌우하는 결정권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5대 핵강국 외에도 핵무장국들이 더 있는데, 이들은 북(조선),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이 다섯 나라는 5대 후발 핵무장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캐나다,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은 핵무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지만 미국의 핵확산금지조약 체제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5대 후발 핵무장국 가운데 인도가 1974년에 가장 먼저 핵폭발 실험에 성공하였고 1998년 5월에는 세 차례나 핵폭발 실험을 실시하더니 1999년 8월 17일 마침내 핵주권을 선언하였다. 중국, 파키스탄, 미얀마 세 나라에게 포위되어 있는 인도는 냉전시기에 중국을 견제하려던 소련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다른 한 편, 인도의 숙적인 파키스탄도 미국이 묵인하는 가운데 핵무기를 개발하여 1980년에 핵폭발 실험을 실시함으로써 핵무장국으로 등장했다. 중동의 군사강국 이스라엘과 아프리카의 군사강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각각 미국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의 하위동맹국이다. 지난 시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은밀히 개발·보유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인차별정책(Apartheid)에 의존했던 백인정권이 물러가면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흑인정권이 들어서게 된 권력교체기에 가서야 핵무기 보유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므로 이제 5대 후발 핵무장국 가운데 오직 북(조선)과 이스라엘만이 핵무장국이면서도 이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특수한 상태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사실에 대해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지원했고, 이를 묵인해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세이모어 허쉬(Seymour M. Hersh)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관료집단은 30년이 넘도록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계획에 대해 모르는 체 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미국 관료체제의 모든 부문은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 실험을 핵무기 실험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이스라엘이 핵무장을 선택한 까닭은, 아랍국가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강력한 대응전력을 핵무장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고, 그와 더불어 아랍국가들을 정치협상으로 이끌어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졌던 네 차례 중동전쟁은 재래식 무기를 동원한 전쟁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첫 핵폭발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1974년부터 아랍·이스라엘의 전략균형은 질적으로 달라지게 되었고 중동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며, 비록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미국이 중재하는 아랍·이스라엘 정치협상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핵무기가 아랍진영에 대한 전쟁억지력과 정치협상력을 보장해준 것이다.

중동지역과 더불어 세계에서 전쟁위기가 가장 심각한 동북아시아지역에서도 중동지역과 비슷한 정황이 1980년대에 조성되었는데, 그것은 북(조선), 남(한국), 대만의 핵무기 개발이었다. 미국은 자기의 하위동맹국인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파키스탄이 핵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은밀히 지원하거나 묵인해주었지만, 자기의 보호국인 남(한국)과 대만의 핵무기 개발은 저지했으며, 적대국인 북(조선)이 핵무기로 무장하는 것은 완강히 반대했고 여차하면 무력을 동원해서 이를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북(조선)은 미국의 완강한 반대와 강압적인 억제가 몰아치기 이전에 핵무장에 성공하였고, 대응 핵전략으로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을 돌파할 수 있었다. (2000년 1월 작성, 다음호에 제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