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혁명령도'와 '제2의 천리마 대진군':

1990년대 말 북(조선) 정세인식의 초점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서방세계는 세기의 전환기를 '개방의 시대'라고 하면서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가장 '폐쇄적인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가 북(조선)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북(조선)은 오늘의 정세를 더 강대해진 제국주의와 더 시련을 겪게된 동방의 작은 사회주의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활을 건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북(조선)의 정세인식에 따르면, 지금 "제국주의는 <공산주의의 종말>을 떠들면서 온 행성이 제 세상인 듯 살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지금 우리나라는 사회주의의 보루로 되고 있"으며, "우리는 사회주의의 보루를 지켜나가면서 미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북(조선)은 "그 모든 연대들 가운데서 가장 잊을 수 없는 1994년-1998년"의 기간 동안에 제국주의와 벌여온 사활을 건 싸움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익측도 후방도 없이 걸어온 간고한 행군길"이었다. "4년이라는 세월이 길다할 수 없지만 우리는 오늘의 높이에서 뒤를 돌아다볼 때 걸어온 그 길이 너무도 어렵고 험하였기에 몇십 몇백년 맞잡이로 추억된다"고 한다. 이 기간이 저들에게 그토록 엄혹하고 힘들었던 까닭은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제국주의 떼무리들과 단독으로 맞서 사회주의 보루를 수호해야 하는 고군분투에 그 전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식량난과 몇해째 계속되는 자연재해까지 겹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인민은 여러 해째 계속된 <고난의 행군>길에서 가슴 아픈 일을 수없이 겪었"으며, "지난 몇해동안의 <고난의 행군>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에 못지 않은 엄혹한 시련"이었다는 것이다. 북(조선)은 "이 나날에 한 나라가 몇백년 걸쳐서야 겪어볼 수 있는 최대의 고난과 시련을 당해보았고 우리는 또한 이 조국과 생사운명을 함께 하면서 남들이면 열백번도 더 쓰러졌을 운명의 막바지에 서보기도 했다"고 한다. 『로동신문』은 "우리 당과 혁명의 력사에서 지난 5년간은 가장 엄혹한 시련의 시기였다"고 적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의 인민경제부문 현지지도가 자강도, 량강도, 함경남북도 같은 북부지역에 주로 집중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북부지역 주민들이 남부지역의 주민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고, 따라서 더 많은 정책적 배려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북부공업지대의 노동자들은 같은 북부지대의 농업근로자들이나 남부 평야지대의 주민들보다 더 심한 식량난을 겪어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조선)에서는 식량을 각 도마다 자급자족하도록 되어 있는 데, 북부지역에서는 험준한 산악지형과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조건 때문에 원래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으므로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수송한 식량을 공급받아왔고 농사에 요구되는 비료도 마찬가지로 해결하였다. 또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식량과 비료를 철도수송이 거의 불가능한 북부산악지대에 보내는 일은 화물차수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극심한 유류부족으로 화물자동차마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게 되자, 북부지대는 남부 평야지대에 비해서 더욱 심한 식량난을 겪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고난의 행군'에 대한 북(조선)의 자체 평가는 외부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놀라우리만치 긍정적이다. "보통의 상식으로 볼 때 이런 시련에 부닥치면 혁명은 벌써 몇 년이나 좌절될 수 있고 나라에는 침울한 공기가 감돌고 신심을 잃은 사람들의 한탄과 눈물이 흐를 수 있겠"으나, 그 "행군길에서 우리는 50년 력사를 가진 자기의 국기와 국장도 지켜냈으며 소중히 가꾸어온 아름다운 사회주의 생활도 지켜냈다"고 한다. 저들은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긍지와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저들은 "제국주의의 포위 속에서, 혹심한 자연재해와 경제적 난관 속에서 단독으로 사회주의를 지키고 주체조선의 존엄을 높이 떨쳐온 것은 력사의 기적"이라고 칭송하면서, '고난의 행군'이 "수많은 자력갱생 모범단위들이 배출되고 자체의 힘으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혁명적 기풍이 높이 발휘"된 "자력갱생의 행군"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하는 과정에 우리 인민은 자력갱생의 참뜻을 더욱 가슴 깊이 새기였고 자체로 살아나가려는 강한 생활력을 가지게 되였다"는 것이다. 『로동신문』은 이제 "조선인민은 세계사적인 고난을 이겨낸 강의한 인민이 되였고 우리 조국은 력사의 대시련을 돌파한 강대한 나라로 되였다"고 기록했다.

북(조선)은 1997년 12월에 '고난의 행군'을 마감하였다. '고난의 행군'을 마감한다는 의미에는 그 기간에 겪었던 집단적 경험을 총화하고 자력갱생의 모범을 보인 근로자들의 위훈과 공로를 인정·치하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1998년 1월 2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는 '전국 자력갱생모범일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소집되었던 '전당 당일군회의'에 이어서 열렸다. 북(조선)은 이 회의와 대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공개하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전국 당일군회의'는 "<고난의 행군>과정에서 이룩된 성과와 경험을 총화하고" 앞으로 수행해야 할 "과업과 방도를 토의"하는 회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 자력갱생모범일군대회'에서는 국가표창 수여식이 진행되었는데, 23명에게 로력영웅 칭호와 함께 금메달 및 국기훈장 제1급이 주어졌고, 약 3천명에게 각종 훈장, 표창, 공훈칭호가 주어졌다. '자력갱생모범일군대회'는 그 뒤로도 각 지방, 각 부문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로동신문』은 '전당 당일군회의'와 '전국 자력갱생모범일군대회'는 "여러해째 계속된 <고난의 행군>의 가장 어려염恣者宙湧?성과적으로 극복"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에서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제끼고 강성대국에로의 힘찬 진군을 개시"하였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가장 엄혹한 시련이었던 '고난의 행군' 과정에서 난관과 역경을 넘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북(조선)의 실상을 알고자하는 사람들, 북(조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물음을 고찰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21세기의 북(조선)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이며, 어떤 지향점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게 될는지 모른다.

이 글은 1998년 1월부터 1999년 4월까지 나온 『로동신문』을 분석하면서 이 물음을 고찰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알려진대로, 『로동신문』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언론매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의 당보이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에 대한 보도보다도 인민에 대한 교양과 선전을 더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보의 교양과 선전 속에는 객관적 사실이 배경으로 깔려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객관적 사실을 찾아내어 재구성하고, 그 재구성한 사실과 교양·선전이 어떠한 의미체계로 결합하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것, 이것이 북(조선)의 현실에 접근하는 길이다. 북(조선) 정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로동신문』을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문헌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은 외부에서 북(조선)의 현실로 다가서는 통로가 『로동신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동신문』 분석을 통해 북(조선) 정세를 인식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다. 북(조선) 연구자들은 방대한 분량의 『로동신문』을 입수하기가 어려울 뿐아니라, 설령 입수한다고 해도 체계적으로 조사·정리하는 일도 힘들므로 이를 기피하거나 포기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형편이므로 북(조선) 정세에 대한 인식은 거의 공백으로 남아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공백이 반북논리에 뒷받침을 받은 자의적 해석과 오류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반북논리가 체질화되어 있고 북(조선)에 관한 오보가 거의 일상화되다시피한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단편적인 사실을 제멋대로 해석하거나, 베이징과 연변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의 유치한 만화 같은 뜬소문이나 삼류 괴기소설 같은 유언비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 공백이 너무 크고 너무 오랫동안 자리잡아왔기 때문이다. 북(조선) 정세인식의 공백을 메우고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2) 현지지도와 '선군혁명령도'

이 글은 북(조선)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김정일 총비서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을 중시한다. 그 까닭은 일본의 북(조선) 연구자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의 표현대로 '수령제 사회주의'인 북(조선) 체제가 김정일 총비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려진대로, 북(조선)에서 '수령의 현지지도'는 국가와 사회의 전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가장 중대한 정치사업으로 진행되어왔다. 북(조선)은 때로 그들이 위기와 난관을 겪어야 했을 때, '수령의 현지지도'가 이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북(조선)만이 지니고 있는 국정운영의 독특한 전통일 것이다.

지금 김정일 총비서의 국정운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현지지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 김정일 총비서가 당중앙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1998년 2월 15일 현재까지 30여년동안 현지지도한 날은 모두 3천6백93일(10년 이상)이며 그 중에서 명절날과 일요일에 현지지도를 한 날짜는 모두 9백97일(약 3년)이 되며, 현지지도 거리의 총연장은 14만7천9백90여리에 이르고 현지지도를 한 단위는 2천1백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로동신문』을 살펴보면, '전환기'였던 1998년에 김정일 총비서의 현지지도가 모두 59차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부문에 대한 비공개 현지지도가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59차례의 현지지도 가운데서 군사부문 현지지도가 28차례로 가장 많았고, 문예공연 관람이 14차례였으며, 인민경제부문 현지지도는 9차례로 나타난다.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한 해동안 자신이 군사부문 현지지도에 집중한 것에 대해서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끝까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계속 인민군 군부대들에 대한 현지지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조선)은 그의 "끊임없는 전선시찰은 단순히 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며, "여기에는 인민군대를 주체혁명의 주력군, 기둥으로 내세우고 온 사회의 혁명적 군인정신화, 군민일치화를 실현하여 우리 혁명대오를 강철의 정예대오로 만들려는 전략적 의도와 확고한 의지가 깃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김정일 총비서의 군사부문 현지지도는 '군사중시사상'과 '선군혁명령도'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로동신문』은 김정일 총비서의 "군사중시의 정치가 빛나게 구현되여" "인민군대가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튼튼히 준비"되었으며, "온 나라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전변되였다"고 하면서, "오늘 우리식 사회주의는 군사적으로 확고히 담보되여있다"고 주장했다. "인민군대를 핵심으로 하여 혁명대오를 튼튼히 꾸리고 혁명적 군인정신을 무기로 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밀고나가는 것"은 김정일 총비서의 "독특한 령도방식"이라고 한다.

북(조선)은 왜 군사를 중시하는 정치와 사상을 구현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제국주의의 포위 속에서 끊임없는 군사적 위협을 받으며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조건에서 강력한 군대가 없이는 인민도 없고 사회주의 국가도, 당도 있을 수 없다"고 한 김정일 총비서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조선)은 "인민대중의 자주적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에서 로동계급의 당은 무엇보다도 먼저 총대를 틀어쥐여야 하며 그 누구보다 군대를 믿고 그에게 의거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북(조선)의 주장에 따르면, "150년의 공산주의 운동사는 이에 대한 완벽한 해명을 공백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대관과 관련하여 맑스-레닌주의가 이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적은 아래와 같이 계속된다.

선행한 고전가들은 로농동맹을 사회의 기반으로, 혁명의 기본 추동력으로 보았다. 계급관계의 견지에 기초한 그 리론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와 낫 우에 총대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군민일치를 혁명의 운명문제로 제기하지 못하였다. (줄임) 군민일치를 밑뿌리로 하여 강성하는 주체의 사회상, 이것은 사회성원들을 경제적, 계급적 관계에서 구분하던 종래의 리론을 초월하여 군대와 인민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구성과 그 발전완성방향, 위력의 근본원천을 명철하게 밝힌 것이다." "마치와 낫은 총대를 만들어내지만 총대의 사명과 위력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조선)은 소연방의 해체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의 몰락은 "군대를 비사상화, 비정치화함으로써 총쥔 군대가 당이 변질되고 국가가 와해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나앉아 혁명의 전취물을 지켜내지 못한 결과였다"고 분석한다.

기존 사회주의 사회의 군대관은 공백으로 남아있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군대관은 국가방위에 국한되어 있는데 비하여, 북(조선)의 군대관은 완전히 다르다. 북(조선)에서는 "로동계급과 농민, 지식인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고 활력있는 성원들로 선발된 혁명군대는 가장 잘 준비된 혁명의 핵심대오, 정예대오"이며, "사상적 높이와 계급적 자각에 있어서, 단결력과 전투력, 투쟁기풍과 도덕풍모에 있어서 군대의 수준을 따를 대오는 없다"고 한다. 저들은 "우리 혁명의 수뇌부를 옹위하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도 우리 군대이고 당의 위업수행에서 언제나 선봉부대로 되고 있는 것도 우리 군대"라고 믿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정책을 결사관철하는 귀감도, 자력갱생의 혁명정신과 혁명적 동지애의 숭고한 모범도 인민군대에서 창조되고 있으며 사회주의 문화도 인민군대에서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우리 군대는 혁명의 주력군이며 나라의 기둥"이라고 했고,『로동신문』은 북(조선)의 군대는 "온 사회에 혁명적 군인정신을 끊임없이 뿜어주는 저수지"라고 묘사하였다. 따라서, "인민군대는 혁명적 군인정신을 창조한 가장 힘있는 전투부대"이므로,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인민군대가 창조한 정신과 도덕, 투쟁 기풍을 적극 따라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군혁명령도'라는 개념이 나온다. "선군혁명령도는 인민군대가 창조한 정신과 도덕, 문화를 전체 인민이 따라배워 군대와 인민이 단결된 힘으로 혁명과 건설을 밀고나가게 하는 불패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일 총비서가 이처럼 군사를 중시하고 군대를 모범으로 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선군혁명령도'의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로, 저들은 북(조선)의 군대가 북(조선) '건국의 기초'인 항일무장투쟁사의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의 "혁명투쟁력사는 군대를 먼저 창건하고 그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을 승리에로 이끌어온 선군혁명령도의 력사"라고 말했다.

둘째로, 저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조선)을 지켜낸 김정일 총비서의 업적이 군사부문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저들은 김정일 총비서가 "가장 어려운 시련의 불길 속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단신으로 상상할 수 없는 정력과 눈부신 활약, 비상한 령군실력과 장군다운 배짱으로" 북(조선)을 지켜냈다고 믿고 있다. 저들은 "일시적으로 경제건설에 지장을 받고 인민생활이 어려워도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군사를 중시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여" 북(조선)을 "지켜낸" 김정일 총비서의 "선견지명과 민족사적 업적은 대를 두고 길이 칭송될 것"이라고 본다.

셋째로, 북(조선)은 군사중시란 곧 군사과학기술의 중시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북(조선)이 말하는 군사과학기술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 자체의 힘으로 미사일을 개발한 것을 말한다. 북(조선)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힘을 기울여왔는데, 저들은 이것이 김정일 총비서의 군사부문 '령도업적'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고 있다. 북(조선)이 '공화국 창건 50돐'에 앞서 '광명성 1호'를 발사한 것은 자체의 힘으로 개발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을 과시하고 핵무기 보유를 '암시'하기 위함이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북(조선)의 "인민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켜내고 내일의 부강조국을 위해 수억 달러의 자금을 그 부문(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뜻함-옮긴이)에 돌렸다"고 말했다. '광명성 1호'의 발사를 두고 북(조선)은 "오늘 우리 인민군대는 지구상의 그 어떤 곳에 있는 적들도 무자비하게 타격할 수 있는 위력한 공격수단", "우주적인 타격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장담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도 북(조선)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보유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넷째로, 저들은 '군사중시사상'과 '선군혁명령도'가 군사전략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라고 보고 있다. 저들은 "제놈들보다 약하다고 생각되거나 경각성을 늦추는 기미만 보이면 침략의 불을 지르는 것이 미제의 상투적인 수법"이라고 비난하면서 "미제가 지금껏 우리를 감히 건드리지 못한 것은 우리의 일심단결이 위력하고 군대와 인민의 전투동원태세에 추호의 빈틈도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만일 북(조선)이 낡은 재래식 무기 밖에 없고, 이라크나 유고연방처럼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아무런 공격수단이 없었다고 한다면 1990년대의 전쟁은 페르시아만이나 발칸반도가 아니라 한(조선)반도에서 먼저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미국은 '핵개발 문제'를 제기하면서 북(조선)을 무력으로 공격하려고 준비하였으며, 북(조선)은 이에 맞서 날카로운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1993년-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조선)반도에 전쟁위기가 몰려오던 1998년 12월초 북(조선)에서는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무엇보다도 미제와는 반드시 한번 맞서싸워 기어이 피값을 받아내고 말겠다는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살며 투쟁하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제의 가슴팍에 복수의 총창을 박는 심정"을 가져야 하며, "일을 해도 걸음을 걸어도 우리들의 심장마다에는 미제에 대한 복수의 일념이 세차게 끓어번져야 한다"고 한 표현에서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배어나온다. 저들은 "최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1998년 12월 2일에 발표한 성명을 뜻함-옮긴이)은 우리에게도 우리식의 작전계획이 있고 타격방식이 있다는 것을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이며, "수십년동안 다지고 숙련해온 막강한 군사기술적 힘과 우리식의 위력한 타격방식으로 침략자들에게 무자비한 징벌을 가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을 위협했다. 북(조선)은 초강대국으로 자처하고 있는 미국에게 살벌한 말로 공갈·협박하는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3) 궤도수정 없는 외길: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

서방세계는 지금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조선)이 결국 외세의 회유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본주의식 변화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마치 이에 대하여 답변을 주듯이 김정일 총비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는 것은 나의 확고한 결심이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이것은 나의 사상이 영원히 붉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은 사회주의적 확대재생산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최대한으로 다그치며 나라의 자립적 경제토대를 강화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정당한 로선"이라고 확언하였다.

북(조선)의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과 사회주의 계획경제노선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보다는 그 노선의 추진력을 더 강화하고 그 노선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더 강조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 경제의 자립성에 문제가 있어서 경제적 곤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립성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과 같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동신문』은 "세상에는 우리 인민과 같이 그처럼 일관성 있게, 그처럼 철저하게, 그처럼 간고하게 자립의 길을 걸어온 인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길에서 우리가 당한 외세의 압력과 간섭,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겪은 난관은 몇백권의 책에도 다 담을 수 없다"고 하였다. 1999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2차회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는 계획경제"와 "자립적 민족경제토대를 강화하기 위한" '인민경제계획법'을 채택하였으며, 인민경제부문에서 농업에 1백11%, 전력공업에 1백15%, 석탄공업, 광업, 금속공업, 기계공업, 철도운수에 각각 1백10%, 과학사업에 1백10%의 투자를 늘린 예산안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이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을 변함없이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어떻게 하여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을 변함없이 고수하려 하고 있는가?

첫째로, 북(조선)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이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 대응하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세계의 <일체화>흐름이라는 간판을 걸고 감행되는 제국주의자들의 민족말살정책의 위험성을 똑바로 보아야 하며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주의적 책동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북(조선)은 "제국주의자들의 세계 경제의 <일체화>책동이야말로 매개 나라의 민족경제를 무자비하게 말살하기 위한 악랄한 반동공세"이므로,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의 흉악한 속심을 옳게 꿰뚫어보고 경제의 <세계화>책동에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로선으로 맞서나가야"하며, "그들의 온갖 제제와 경제봉쇄를 혁명적 공세로 단호히 분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북(조선)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이 제국주의의 봉쇄전략에 맞서는 자력갱생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북(조선)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제국주의 봉쇄전략에 자력갱생의 전략으로 맞선다"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자력갱생의 길만이 혁명의 종국적 승리를 이룩하는 길이며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설사 <고난의 행군>을 열백번 겪는다 해도 외세에 경제의 명줄을 거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조선)은 "사회주의 자립적 민족경제의 우월성은 지난날에나 오늘에나 절대적인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북(조선)이 말하는 '자립적 민족경제의 우월성'이란 곧 중공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발휘하는 우월성을 뜻한다. 저들에 따르면, "우리식 경제구조는 자체의 강력한 중공업을 핵심으로 하고 모든 경제부문들이 조화롭게 갖추어진 자립적인 경제구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형적인 대외의존, 수출주도형 경제구조에 비할바없이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생활을 높인다고 하면서 중공업을 소홀히 하거나 외화가 있어야 경제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하면서 대외무역에만 치중하는 것은 옳은 해결방도로 될 수 없다. 물론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경공업도 발전시키고 대외무역도 확대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은 자립적인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기초 우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북(조선)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이 지금은 비록 난관을 겪고 있지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 오늘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북(조선)은 "자력갱생의 원칙은 과학기술이 안받침될 때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자력갱생 구호는 결코 과학을 무시하는 주먹구구식 구호가 아니"며, "최신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그에 기초하여 제 힘으로 살아나가는 길을 더욱 힘있게 열어나가는 것이 오늘의 자력갱생"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경제가 가장 전망성있는 경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조선) 스스로 시인하고 있는 것처럼 "자립을 위한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북(조선)은 "우리의 사회주의 경제가 아직은 어려운 고비를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이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대규모 금속공장을 비롯한 기간공업공장들에서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중공업부문의 활성화에 강조점을 찍었다. 이처럼 북(조선)이 중공업부문을 강조하는 까닭은 중공업이 자립경제의 기초이며 선행부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북(조선)이 지금 경제난을 겪고 있지만, "북(조선)은 중간 규모 국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했던 케이스 그리핀(Keith Griffin)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의 한(조선)반도 특사인 찰스 카트먼(Charles Kartman)이 1999년 5월 3일 뉴욕의 아시아협회(Asia Society)에서 북(조선) 경제가 몇 달 전 바닥을 친 것으로 보인다고 발언하면서 북(조선)의 경제난이 해소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남(한국)의 전문가들도 북(조선) 경제가 "침체의 늪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4) 재현되는 원역사(原歷史) - '제2의 천리마 대진군'과 4대 추진방향

북(조선)에서 1998년은 '고난의 행군'을 마감하고 맞이한 '전환기'로 기록되었다. 『로동신문』은 "우리는 지금 우리 혁명발전의 새로운 력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고 했다. 1998년은 "지난 몇해동안의 <고난의 행군>에서 이룩한 성과를 총화하고 일대 공격전으로 정치, 군사,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는 시기였다. 이 '전환기'의 북(조선) 정세를 파악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고난의 행군>에서 이룩한 승리에 기초하여 혁명과 건설에서 새로운 진격에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 김정일 총비서가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문제다.

김정일 총비서의 행적을 중심으로 북(조선) 정세를 파악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난의 행군'을 마감한 '전환기'에 그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추진한 활동이 자강도 현지지도였다는 사실이다. 1998년에 있었던 인민경제부문 현지지도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동안 자강도에서 19개 단위를 돌아본 현지지도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 기간 동안 강계시, 장강군, 성간군의 중소형수력발전소, 강계뜨락또르련합기업소, 2월제강련합기업소, 2.8기계련합기업소, 강계정밀기계련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현지지도를 하였으나 공개하지 않은 그밖의 단위들은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군수공업부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김정일 총비서를 따라 자강도 현지지도를 수행했던 당 간부는 자강도로 떠나기 직전 "날씨가 너무도 차고 위험한 고비도 많기 때문에" 자강도 현지지도를 미루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마음 먹은 일인데 갑시다"고 하면서 "굳이 강계로 향"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8년 1월 중순의 자강도 현지지도는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북방의 대소한의 추위" 속에서 강행된 "6천여리 눈보라길"이었다.

자강도 현지지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로동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김정일 총비서는 자강도의 어느 공장에 가서 "바다를 이룬 현대적인 기계설비들"을 보고 "이것이 다 우리 것인가"고 물었다. 공장의 한 책임자는 "그것이 다 우리의 기술자, 로동계급이 만든 100% 우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정일 총비서는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기술만으로는 이런 설비들을 만들지 못한다고 했는데 보시오, 그러나 로동계급은 해내질 않았소라고 감개에 넘치여" 말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노동자들에게 오늘 북(조선)의 어려운 경제형편에 관하여 해설해주면서 "오늘의 난국을 타개해나가는 데서 로동계급과 달리 일부 일군들의 정신상태가 문제로 된다는 데 대하여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 말을 들은 노동자들은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넘겨다보는 사람들을 우리한테 보내주십시오. 이 타닝반으로 그 허물을 다 벗겨주겠습니다"고 말했다. 김정일 총비서는 "지금 일부 사람들이 그 무슨 새 것을 찾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저절로 돈뭉치가 떨어질 것을 바랄 것이 아니라 전당이 5차 당대회 보고를 다시 학습하고 오직 그 결정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가 노동자들에게 학습하라고 강조한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는 1970년 11월 2일부터 13일까지 열린 대회를 말한다. 이 당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발전시키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중심과업」, 「사회주의 문화건설」, 「사상혁명·온 사회의 혁명화·로동계급화」, 「국방력 강화」, 「인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다섯 가지 과업을 제시한 바있다.

김정일 총비서가 노동자들에게 애로되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노동자들은 "일감을 더 주십시오. 실컷 일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김정일 총비서는 "여기에 와서 보니 힘이 난다. 우리 당이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고 말하며 "크나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로동신문』은 이것을 "굶어죽어도 기계만은 베고 죽겠다는 자강도 로동계급의 정신"이라고 묘사하였고, 자강도 인민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보여준 '모범'을 이렇게 기록한 바있다.

자강도는 다른 곳들보다 생활조건에서 불리하면 불리하였지 유리한 것이 없다. 지난 몇해동안 자강도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참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자강도 사람들은 제일 먼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를 크게 써붙여놓고 그 어떤 고난도 과감히 뚫고 전진하는 조선의 불굴의 신념과 락관을 감동깊이 보여주었다.

자강도 현지지도를 마치면서 김정일 총비서는 "자강도 사업이 잘되고 있는 것은 일군들이 혁명적으로 달라붙어 일을 해제끼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자강도 사람들의 정신상태와 일본새"에 만족하여 "마치 인민군 협주단 공훈합창단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면서 만족을 표시했다고 한다. 자강도 현지지도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자강도는 공산주의 리상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강도에서는 이제는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락원의 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번에 자강도에 와서 이곳 일군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투쟁성과에 만족하였습니다." "자강도는 모든 일이 다 잘되니 마음이 놓입니다. 자강도에 오면 기분이 대단히 좋습니다. 나는 자강도 인민들이 당을 따라 사회주의 붉은기를 지켜나가는 투쟁에서 계속 앞장서 나가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하늘 아래, 이 땅에서 우리식으로 걸린 고리를 풀고 난관을 뚫고나가야 합니다.

김정일 총비서의 자강도 현지지도에 관한 보도를 읽으면 1956년 12월 28일에 있었던 김일성 주석의 강선제강소 현지지도를 연상하게 된다.

첫째로, 김일성 주석이 강선제강소를 현지지도하면서 당시 어려운 나라 형편에 관해서 노동자들에게 말해주었듯이, 김정일 총비서도 1998년 1월 자강도를 현지지도하면서 오늘의 난국에 관해서 말해주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김일성 주석은 강선제강소 현지지도에서 소련과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당내 '종파주의 세력'을 강하게 비판하였는데, 김정일 총비서는 일부 간부들의 정신상태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신상태란 "그 무슨 새 것을 찾는다고 하면서 하늘에서 저절로 돈뭉치가 떨어질 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극주의,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패배주의, 그리고 "우리의 기술만으로는 이런 설비들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넘겨다보는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비주체성, 즉 발전된 나라의 자본과 기술을 들여오는 수입정책을 자력갱생노선보다 더 중시하는 관점과 태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김일성 주석의 호소를 들은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저마다 어떤 어려운 과업이라도 해내겠다고 결의하여 나서면서 종파쟁이들을 전기로에 집어넣겠으니 우리에게 보내달라고" 하였던 것처럼, 자강도의 노동자들도 정신상태가 그릇된 일부 간부들의 허물을 타닝반으로 벗겨주겠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넷째로, 김일성 주석이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에게서 "또 한번 힘을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정일 총비서도 자강도의 생산현장에서 일감을 더 달라고 요청한 노동자들, 자체 기술을 동원하여 설비를 만들어낸 노동자들에게서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다시 확인하고 힘을 얻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정일 총비서가 김일성 주석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혁명성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정일 총비서의 이러한 관점은 "로동계급은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해방하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투쟁하는 가장 자주적인 계급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로동계급의 력사적 위업"이라고 지적한 그 자신의 말에 잘 나타나있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오늘 북(조선)에서는 김정일 총비서의 자강도 현지지도가 주는 의미를 1956년에 있었던 김일성 주석의 강선제강소 현지지도라는 원역사(原歷史)를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자강도 안의 일군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오늘과 같이 어려운 때에 당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 것을 실천적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수령님께서 해방 직후와 전후 복구건설의 어려운 시기에 강선을 찾으시고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도록 전국에 내세우신 것처럼 강행군을 하는 오늘에 와서는 강계시를 내세우자고 합니다. 자강도에서는 전후 시련의 시기에 강선의 로동계급이 그러했듯이 오늘의 강행군의 앞장에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봉화를 높이 들고 나아가고 전국이 자강도를 따라 사회주의 강행군을 힘있게 벌려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로동신문』은 김정일 총비서의 자강도 현지지도가 "조선혁명의 전환적 국면을 마련한 력사적인 현지지도"이며, 김일성 주석의 "강선제강소 현지지도와 같은 력사적 사변"이며, "사회주의 건설 전반을 앙양에로 이끄는 전환적 계기로, 경제분야에서 일대 고조가 일어나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기록하였다. 저들은 "지금 우리는 강선의 정신이 창조되던 때와 같은 격동적인 시기에 살고 있다"고 한다.

1950년대 '천리마운동'이 강선제강소에서 시작되어 북(조선) 전역에 퍼져나갔던 것처럼 오늘 북(조선)은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이 자강도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가 '고난의 행군'을 마감한 전환기에 자강도를 현지지도의 첫 번째 대상지로 선택한 데는 이처럼 1950년대의 '천리마운동'을 재현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는 "천리마운동은 우리가 일관되게 틀어쥐고 나가야 할 사회주의 건설의 총로선"이라고 말했다.

북(조선)은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을 전개하면서, 1950년대 '천리마운동' 시기에 겪었던 집단적 경험을 되살리고 있다. 『로동신문』은 「천리마 대고조를 일으키던 전후의 나날을 더듬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1998년 5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실었다.

북(조선)은 1950년대 말에 "밖으로는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반공 반공화국 소동과 대국주의자들의 압력이 계속되고 안으로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들이 당에 정면으로 도전해나서고 있던" 시련과 난관을 겪어야 했다. 바로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북(조선)은 천리마운동을 일으켰다. 북(조선)에 따르면, "당시의 형편에서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키고 혁명과 건설을 전진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1990년대 말의 "현실은 전당, 전군, 전민이 한결같이 떨쳐나 50년대와 같은 천리마 대고조를 일으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후 반세기 력사 중에 조선은 두 번째로 천리마를 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제1차 5개년 계획기간에 일어났던 '사회주의 경쟁운동'인 '천리마운동'은 무엇을 이루었던가? 북(조선)의 기록을 찾아보면, 1958년에는 자체의 힘으로 '천리마호' 트랙터와 '승리-58형' 화물자동차를 생산했으며, 연이어 8m 타닝반과 굴착기를 생산했다. '천리마호' 트랙터를 생산한지 3년 뒤인 1961년에는 당시 "기계공업의 정수"라고 하는 전기기관차 '붉은기호'를 생산했다. 이것은 "서방이 수백년동안 걸려서 한 나라의 공업화를 단 14년만에 실현"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김일성 주석은 '천리마운동'의 성과에 대하여 말하면서 공업총생산액을 2.6배로 증가시키는 5개년 계획의 목표를 불과 2년반만에 달성했으며,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기간에 공업총생산액은 3.5배로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서 생산재는 3.6배, 소비재는 3.3배가 증가함으로써 공업생산의 연평균 증가속도는 36.6%라고 밝힌 바있다. 북(조선)은 1961년에 평양 지하철 공사에 착공하였다. 이러한 '천리마운동'의 성과에 대해서 조앤 로빈슨(Joan Robinson)은 「코리아의 기적」이뗏 ?글에서 "전후 세계의 모든 경제적 기적은 이 성과 앞에서 빛을 잃는다"고 격찬했고, 르네 뒤몽(Rene Dumont)은 "북(조선)은 농업부문은 물론이고 아마 공업부문에서도 사회주의 진영을 이끌고 있다"고 칭송한 바있다.

지금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은 1950년대말의 '천리마운동'과 마찬가지로 자강도라는 모범을 창조하여 그것을 선전하고 따라배우게하여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모범 창조와 일반화라는 북(조선)의 전통적인 대중운동 방식이 자강도의 모범에서 시작된 '제2의 천리마 대진군'에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은 자강도 당위원회 연형묵 책임비서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1998년 7월 2-3일에는 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집단적으로 자강도의 인민경제 여러 단위를 참관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경제난을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는 북(조선)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을 더욱 강화·발전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두고 지금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을 추진하고 있다. 아래에서 살펴보게 될 공업부문의 전력증산운동과 중공업부문 생산정상화, 농업부문의 감자농사혁명, 토지정리사업은 바로 이러한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의 4대 추진방향이다.

1. 전기화의 자력갱생과 전인민적 전력증산운동

자강도 장강군에 흐르고 있는 장자강의 지류인 북천 부근에는 북(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장자산 혁명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1950년대 초 전쟁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가 잣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거목으로 자라난 사연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1998년 1월 자강도 현지지도에 나선 김정일 총비서가 마침 그곳으로 통하는 길을 지나게 되자 수행원들이 "이번만은 꼭 그곳에 들리기를 거듭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민들이 잘 살게 될 때 찾아오겠다. 후에 보자"고 말하고 "인민들에게 하루 빨리 전기화의 혜택을 안겨주려고 갓 일떠선 어느 한 발전소로 향"했다.

알려진대로, 김정일 총비서는 전력난 해소를 위하여 중소형발전소 건설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대규모발전소 건설과 함께 전인민적 운동으로 이르는 곳마다에 중소규모의 수력발전소들을 많이 건설할 데 대한 당의 방침이 아주 정당하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중소형발전소 건설에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강도를 전인민적인 전력증산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모범단위로 정하고 1997년 가을에 자강도 당위원회 연형묵 책임비서에게 "국내외의 중소형발전소 건설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할 데 대한 과업"을 주었으며 "자강도가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는데서 선행단위가 되며 전국적인 방식상학을 조직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자강도에서 중소형발전소 건설운동이 시작되자 김정일 총비서는 "수시로 건설정형을 알아보면서 건설자재로부터 발전기 설비에 이르기까지 요구되는 모든 것을 우선적으로 생산보장해주도록 힘있게 밀어주었다." 그리고 1998년 1월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자강도의 중소형발전소 현장을 찾아갔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일 총비서가 자강도에서 현지지도로 보낸 "3일간은 원자력을 바라보는 일부의 허망한 기대를 불살라 버리고 철저한 자력갱생만이 광명의 길이라는 진리의 확인으로 온 나라를 다시금 불러일으킨 힘찬 력사의 순간들"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정일 총비서가 전력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전인민적 전력증산운동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자강도에 건설한 수많은 중소형발전소들을 돌아보고 "자강도의 중소형발전소 건설이 매우 잘되었다"고 치하했다. 그는 자강도 장강군에서 중소형발전소가 생산한 전기를 쓰고 있는 55동의 새 살림집, 그리고 강계시와 성간군에 55세대씩 건설된 전기화된 살림집을 돌아보고 그 집들에게 텔레비전을 선물로 보내주도록 지시하여, 수행원을 그 밤길로 평양에 보냈으며, 텔레비전은 다음날 기차편으로 강계에 도착하였다. 김정일 총비서는 텔레비전들이 기차에서 내려지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음 현지지도를 위해 길을 떠났다.

사실 북(조선)에서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는 문제는 오늘에 와서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아니다. 당 제5차대회와 제6차대회 보고에서도 이미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는 과업이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오늘 북(조선)에서 "전력의 긴장성은 인민경제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오늘 전력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사활적인 문제로 나서고 있"기에 지난 시기에 제기되었던 중소형발전소 건설과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조선)은 "전군중적운동으로 중소형발전소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것은 우리 식의 발전소 건설방식이며 현시기 전력문제를 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라고 보고 있다.

자강도는 "해발고가 120메터로부터 2천메터까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산악지대이면서 "압록강, 청천강, 장자강 등 물량이 많은 큰 강들과 근 800개의 크고 작은 하천들이 흐르고" 있으므로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기에는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이에 관해서 『로동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자강도에서도 발전소를 건설하자고 하니 발전기와 타빈 문제, 언제를 막을 세멘트와 강재 문제가 제기되였고 기술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도 많았다. 때로는 숱한 품을 들여 쌓아놓은 언제가 홍수로 순식간에 없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강도의 일군들과 당원들, 근로자들은 언제 한번 주저앉지 않았고 발전기가 없으면 전동기를 개조하고 세멘트와 강재가 없으면 토목식 언제를 막아 일단 발전소 건설에 착수한 다음에는 전기가 나와 그 덕을 볼 때까지 꾸준히 밀고 나갔다.

자강도에서는 1998년 3월 8월까지 다섯 달동안에 70여개의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고 1만5천4백kw의 발전능력을 조성하여 중소형발전소 건설에서 계속 앞장서나가고 있다고 한다. 자강도에서 건설한 중소형발전소들은 "건설원가가 적게 들면서도 경제적 효과성이 매우 큰 토목언제식, 수로식, 띄우개식, 부벽식, 수문언제식 등"이며 "발전기들은 거의 모두가 도 안의 로동계급이 자체의 힘으로 제작하거나 전동기를 개조하여 만든 것들"이다. 1998년 9월까지는 자강도 안의 5개 군에서 자체로 생산한 전기로 지방산업공장을 다 돌리게 되었다고 하며, 자강도는 앞으로 몇 년 안으로 전력을 자급자족하게 된다고 한다. 자강도에서는 "중소형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로 난방도 하고 밥도 지어먹으며 여러 가지 가정용 전기제품도 쓰고 목욕탕도 운영"한다고 한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자강도에서는 1998년 한 해동안 1만7천여kw의 발전능력이 새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강도의 중소형발전소 건설 경험은 1998년 2월 23일부터 12월 31일까지 『로동신문』에 「자강도의 전기화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15차례나 연재되었다. 올해 들어 자강도의 중소형발전소 건설을 본보기로 하여 각지에서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는 전군중적 운동이 벌어진 결과, 1999년 4월 현재 북(조선) 전역에서 5천여개의 중소형발전소가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난 시기 몇해동안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여 조성한 발전능력을 8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조성한 성과라고 한다. 이로써 중소형발전소의 발전능력은 수십만kw로 늘어났고 수십개의 시, 군들과 리들에서 지방산업공장을 비롯한 지방살림살이에 요구되는 전력을 자체로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 다시 일어서는 기계공업과 제강공업

1998년 6월 1일 김정일 총비서는 자강도의 기계공업도시 희천에 있는 청년전기련합기업소,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 2월26일공장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현지지도하였다. 희천 현지지도에 관한 『로동신문』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김정일 총비서는 청년전기련합기업소를 방문했을 때 공장벽에 폭 3m, 높이 12m로 크게 써붙인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를 크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저 구호를 보시오, 얼마나 좋소라고 만족해하면서 우리도 이렇게 웃으면서 가고 있지 않는가고 웃었고" 수행원들도 모두 함께 웃었다고 한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30여년 전에 세워진 청년전기련합기업소는 용접봉 생산기지, 카바이드 생산기지, 압연강 생산기지를 비롯하여 생산에 요구되는 자재를 자체로 해결하는 '자력갱생기지'들을 수십개나 보유하고 있고, 6천여평방미터의 온실과 수백평방미터의 버섯 재배기지, 염소 방목지를 갖추고 있으며, 기능공학교와 공장대학을 자체로 운영하고 있는 모범적인 기업소라고 하는데, 이 공장대학에서는 최근 몇해사이에 2백여명의 '로동자 대학생'들이 졸업하여 현장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김정일 총비서는 생산현장은 물론 '로동자 합숙'도 방문하여 "로동자들의 학습정형도 료해"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노동자들과 함께 청년전기련합기업소 로동자 문화회관에서 조선인민군협주단 공훈합창단과 조선인민군 제313대련합부대 예술선전대의 공연을 관람했다. 자강도 각지의 노동자 대표들이 이 문화회관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려 김정일 총비서는 2시간동안 기다렸다고 한다.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은 북(조선)에서 "기계공업의 어머니공장, 모체공장"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공장이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에 설비와 원료가 모자라 이 공장의 일부 시설이 돌아가지 못했고, 식량난을 겪는 노동자들은 "풀죽으로 끼니를 에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부 노동자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공장을 떠나 농촌에 있는 친척집으로 갔다. 『로동신문』은 이러한 상황을 "우렁찬 동음을 울리지 못하는 기계바다, 일시적인 생활상 난관 앞에 맥을 놓은 적지 않은 로동자들, 텅 비다시피한 자재창고, 불을 끈 가열로"라고 묘사하였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어떤 노동자의 아내는 "아침마다 남편의 점심곽밥에 나물절반, 통강냉이절반인 밥을 눈물과 함께 담으며 한숨을 내쉬"다가 식량을 얻으러 집을 나섰고, 남편도 다섯살난 아들을 업고 앓고 있는 부모의 병구완을 위하여 고향으로 떠났다. 일부 노동자들은 "밥투정질하는 자식들을 보다 못해 농촌으로 떠났고" "부모를 찾아 고향으로 떠났다." 이것은 북부 공업지대의 식량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러한 난관에 빠져 있던 공장에 김정일 총비서가 "소문없이" 찾아갔다고 한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공장을 이탈하여 고향에 갔던 그 노동자는 김정일 총비서가 자신이 일하던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을 현지지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로당원'인 아버지가 "동지들 앞에, 당조직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거라"고 한 말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며 공장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처럼 한때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공장을 떠났던 노동자들이 다시 돌아와 공장에 나왔지만 공장에는 "쇠물을 녹일 선철도, 주형을 만들 모래도, 규소철도 없었고, 가공능력도 부족했으며 기능공도 모자랐다".

그런데 『로동신문』은 김정일 총비서가 현지지도를 한 직후 이 공장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첫째로, 공장 당위원회는 5백여명의 기술자와 기능공으로 수십개의 '4.15기술혁신돌격대'를 조직하고 이 돌격대가 '2월17일 과학자·기술자 돌격대'와 긴밀히 협력하여 "생산공정의 종합적 기계화, 자동화"를 추진하게 했다. 이로써 몇해째 돌리지 못하던 여러대의 가공중심반, 수자조종보링반, 연마반과 같은 가공설비들이 원상복구·가동되었으며 합성주철생산공정을 비롯한 2백50여건의 기술혁신안이 생산에 도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2월26일공장에서도 비슷하였는데, 이 공장에서도 공장 당위원회의 지도 아래 '4.15기술혁신돌격대'가 기술혁신에 앞장섰다.

둘째로, 김정일 총비서가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을 현지지도하였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공장을 이탈하여 농촌으로 떠났던 노동자들이 공장에 돌아왔다. 『로동신문』은 이 때의 상황을 "순간의 실수로 사회의 버림을 받고 종적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사람들이 신념과 각오를 안고 한 사람같이 붉은기 아래 모여들었다"고 묘사했다.

셋째로, 공장 안에서 생산의욕과 열의가 되살아나고, 희천시민들이 생산현장을 지원하는 사업이 벌어졌다. 『로동신문』은 "공장안의 모든 일군들과 로동자들은 침식을 현장에 옮기고 불꽃 튀는 전투를 벌리고" 있으며, 노동자의 가족들도 밤이면 생산현장에 나와 일손을 도와주고 있으며, 공장병원 의사들은 생산현장 곳곳에 '현장치료초소'를 설치하고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하고 저녁마다 오미자차와 콩우유를 공급해주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은퇴한 '공로보장조 로인'들이 '로병돌격대'를 조직하여 생산현장에 합세했고, 희천시내 인민반원들은 노동자들에게 지원물자를 보냈으며, 소년단원들은 꼬마기동예술선전대를 조직하여 생산현장에 찾아갔다. 이와 같은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6월 7일에는 희천시의 공장, 기업소들에서 '노동자 궐기모임'이 진행되었으며, 6월 22일에는 희천시에서 '청년전위들의 충성의 궐기모임'이 진행되었다.

확실히 희천의 기계공업 생산현장은 달라지고 있었다.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은 김정일 총비서의 현지지도 이후 두 달 동안에 공작기계 생산과제의 70% 이상을 수행했으며, 마침내 8월말에는 100%를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유압펌프, 전동기, 전기유도로, 전기로 천장 보수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고장난 설비를 보수하고 교체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들이 제기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과제를 기한보다 앞당겨 완수했다. 2월26일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이 1t짜리 소둔로, 소형가열로를 자체로 제작하고 내부예비 동원사업을 추진하는 등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1년분 생산과제와 맞먹는 생산과제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수행했다.

1998년 10월 20일 김정일 총비서는 희천시를 또다시 현지지도하면서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 청년전기련합기업소, 2월26일공장, 희천제사공장, 희천려관을 돌아보았다. 10월 20일의 희천시 현지지도는 6월의 현지지도에서 가을에 다시 오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한 것이기도 하지만, 김정일 총비서가 같은 공장을 몇 달 사이에 두 차례나 현지지도를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은 이 지역의 공장과 기업소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공장의 가동을 정상화시킴으로써 북(조선)의 기계공업부문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0월 20일의 현지지도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희천의 노동자, 과학자, 기술자들을 적극 지원한 희천려관의 노고를 치하하고 텔레비전, 랭동기, 화물자동차를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희천려관의 노고라는 것은 희천려관 간부들과 종업원들이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 안에 구내식당을 차려놓고 노동자들에게 특식과 간식을 공급하고, 자신들이 만든 솜옷과 작업복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며, 노동자들을 위한 음악공연도 진행했던 것을 말한다.

10월 20일의 현지지도에서도 김정일 총비서는 공장기동예술선전대의 15분짜리 공연을 노동자들과 함께 관람했다. 그는 이 예술선전대의 공연이 인민군 대련합부대 예술선전대의 공연을 보고 꾸민 것임을 알고 다른 대련합부대 예술선전대를 또 보내주겠다고 노동자들에게 약속하였다. 이것은 김정일 총비서가 노동자들의 문화정서생활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인민군 예술선전대의 공연이 노동자들의 공연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98년 한 해동안 김정일 총비서의 59차례 현지지도 가운데 문예공연 관람이 14차례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문예부문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에 대한 자강도 예술선전대의 지원도 특기할만하다. 이 예술선전대는 노동자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출근길 선동공연과 하루 8차의 순회공연을 벌이고 준비해간 지원물자도 전했다고 한다. 10월 26일에는 '희천시 근로자들의 궐기모임'이 진행되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1월에 자강도 희천의 기계공업 부문을 현지지도한 뒤에 3월 9일에는 함경북도 성강에 있는 성진제강련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이 기업소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성진제강소로 불렸는데, 해방 직후 김일성 주석이 이곳을 찾아와 산재와 고역의 상징으로 노동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던 원철로를 과감히 폭파해버리도록 조치했던 곳이다. 문제의 원철로가 있었던 옛터는 지금 금붕어와 사슴을 기르는 구내공원으로 바뀌어있다고 한다. 이 기업소는 규소강판, 베아링강, 고속도강을 비록한 강재들을 대량생산하는 대규모 철강생산기지다.

3월 9일 이른 아침 "소문도 없이, 기별도 없이 문득"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 도착한 김정일 총비서는 "로동계급의 고난의 자욱이 어린 공장의 구내길을" 지나서 전기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전기로 앞에서 "고난은 많지만 그 속에서도 전기로에 불을 활활 걸고 쇠장대를 억세게 휘두르고 있는 용해공들의 모습을 말없이,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리고나서 노동자들에게 "어려울 때마다 당을 받들어온 성진제강련합기업소의 로동계급이 다시 한번 천리마를 탄 기세로 대고조의 선봉에 설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강철직장 전기로와 고압관 직장을 돌아본 뒤에 현장에서 "강철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는 관계부문 일군협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1998년 말 이 기업소에 내연기관차 두 대를 보내주었다.

김정일 총비서의 현지지도 이후 이 기업소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 기업소의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은 "자체의 힘으로 수천립방메터 능력의 산소분리기를 되살려냈으며 전기로와 기중기를 비롯한 설비들을 수리정비하여 그 가동률을 더욱 높"였으며, "강괴겁 문제, 전기로 천장 내화재료 문제도 해결하였으며, 전극을 기업소 전극 직장에서 질적으로 만들어쓰기 위한 사업에서도 큰 진전"을 이루었고, "고압관 직장 전기로의 유압화를 실현&quo하하였다. 그 뿐아니라 "생산정상화의 중요한 고리의 하나인 압연 롤목을 직장 자체로 가공하기 위한 기술혁신사업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 "압연강 재생산을 정상화하고 더욱 늘이기 위한 돌파구"가 열렸고, "나흘 동안에 수백건의 창의고안과 기술혁신안이 창조되"었으며, "나라에서 준 자금량의 3배에 해당한 생산실적을 내면서 주체 야금법을 최단 기간에 완성"하였다. 이 기업소의 5월17일공장에서는 "우리 식의 주체적인 제강법을 보다 원만히 완성하는 데서 큰 진전"을 이루어 "철강재 생산을 높은 수준에로 끌어올릴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로동신문』은 김정일 총비서의 성진제강련합기업소 현지지도는 "우리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거대한 력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기록하였다. 북(조선) 각지의 공장, 기업소들은 "성진제강련합기업소 로동계급의 호소에 호응하는 궐기모임"을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김책제철련합기업소를 비롯한 함경북도 안의 공장, 기업소들이 성진제강련합기업소를 지원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김정일 총비서가 북(조선)의 기계공업과 제강공업을 대표하는 생산현장을 집중적으로 현지지도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생산을 정상화하여 경제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하고 생산현장의 열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 영향이 각급 당조직들과 다양한 선전교양매체를 통하여 산업 전반에 파급·침투되면서 각 공장과 기업소의 당위원회, 노동자, 기술자는 물론 일반 주민들까지 분발하여 생산을 정상화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북(조선)은 이러한 운동을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이라고 부르면서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량강도의 '감자농사혁명'과 강원도의 토지정리사업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10월 1일 량강도 대홍단군을 현지지도하였다. 그는 대홍단군 종합농장, 농업과학원 감자연구소, 대홍단 2호 발전소, 5호 발전소를 찾아갔다. 『로동신문』의 표현을 빌리면, 대홍단군 종합농장은 "지난날 버림 받았던 불모의 땅이 옥토로 전변되였고, 오늘은 <공산주의 사회의 본보기 농장>으로 전변되여가고 있다"는 농장이다. 대홍단군은 "1만정보의 새 땅을 찾아내고, 3천5백여리에 달하는 방풍림을 조성하였으며 농장의 종합적 기계화를 실현하는 데서 커다란 전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10월 1일 "대홍단군에 가서 감자농사실태를 알아보고 대단히 흥분하였고, 새로운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대홍단군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고 격찬하였다. 『로동신문』은 대홍단군의 모범을 창조하는데 앞장섬으로써 '로력영웅'의 칭호를 받은 군당위원회 책임비서의 이야기를 보도한 바 있는데, 이 이야기는 '대홍단 책임비서'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인민상'을 받기도 했다. 김정일 총비서가 돌아본 소홍단수의 대홍단 2호 발전소와 서두수강의 대홍단 5호 발전소는 "집에서 부양을 받고 있던 가정부인들이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10년 세월 개미가 뼈다귀를 갉아먹듯이" 공사를 진행하여 마침내 1986년에 완공한 '자력갱생의 창조물'이며 '중소형발전소의 선구자'격인 발전소들이다.

대홍단 현지지도는 감자농사에 집중되었다. 대홍단군은 원래 '감자농사의 명산지'라고 한다. 김정일 총비서는 "내가 오늘 대홍단군 종합농장에 온 것은 감자농사정형을 알아보고 감자농사에서 전환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감자농사에 대한 김정일 총비서의 관심과 열정은 각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간부들을 외국에 보내어 감자농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게 하였고, 대홍단군에 농업과학연구원 감자연구소를 창설하였다. 그는 1998년 3월에 갓 세워진 이 연구소에 "수십종의 우량한 감자종자, 무균조작대, 고압멸균기, 생물현미경, 세균려과기 그리고 감자조직배양시험연구에 필요한 시험관, 지어는 솜"에 이르기까지 수백점의 감자 종자조직 배양설비와 영농자재를 보내주었다. 이러한 특별배려에 힘입은 이 연구소는 감자원종의 유지·보관방법을 개발하였고 새로운 감자품종을 육성해내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우리가 감자농사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이런 사업에 한 10년 전에만 달라붙었더라도 우리 인민이 지금처럼 식량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감자농사를 위해 얼마나 관심과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감자농사 뿐아니라 농업전반에 대해 커다란 관심과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택에서 몸소 농작물을 시험재배하고, 새로 나온 농업기술자료들을 빠짐없이 읽고 있으며, 자신이 읽은 자료들을 해당 부문에 수시로 보내준다고 한다. 이처럼 김정일 총비서는 평소에 농업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읽으면서 농작물을 시험재배해오고 있는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번에 대홍단군 현지지도에서도 감자농사와 돼지기르기를 순환체계로 연계하는 방안, 감자수확의 기계화와 감자농사의 종합적 기계화 방안, 감자의 저장·수송·가공 방안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북(조선)에서는 "감자를 정보당 60톤만 내도 쌀을 15톤 생산하는 것으로 된다"고 하면서 "감자를 많이 심으면 식량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량강도와 자강도를 비롯한 산간지대의 협동농장들에서는 "화학비료사정이 매우 긴픮uquot;한 조건에서 돼지배설물을 물에 희석시킨 '물거름'으로 지력을 높여 감자농사에 이용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감자밭 1정보에 농사를 짓자면 16마리 정도의 돼지를 길러 해마다 약 70t의 물거름을 생산하면 된다고 한다. "감자농사를 잘하면 식량문제도 풀 수 있고 고기문제도 풀 수 있다"는 김정일 총비서의 가르침은 감자농사와 돼지기르기를 연관시켜 돼지기르기에서 감자농사에 요구되는 유기질 비료를 생산하여 감자를 증산하고 감자를 사료로 하여 돼지기르기를 잘하여 돼지고기를 생산하는 일종의 순환생산체계를 세우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대홍단군 종합농장 현지지도에서 돼지우리를 현대적으로 짓고 겨울철에 우리의 온도를 보장하는 문제, 흐름식으로 고기를 생산하는 문제 등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대홍단군 당위원회 책임비서는 돼지고기 생산목표가 1만t이라고 밝혔다.

북(조선)은 1950년대 말 '천리마운동'을 하면서 종래의 잡곡생산체계를 수확고가 훨씬 높은 옥수수생산체계로 바꾸었는데, 1990년대 말에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을 시작하면서 옥수수보다 단위 수확량이 10배나 많은 감자생산체계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들은 "감자농사를 잘 지을 데 대한 당의 방침은 우리 인민들의 식의주문제를 우리식으로 해결하여 남부럽지 않은 윤택하고 행복한 생활을 마련할 수 있는 정당하고 현명한 방침"이라고 보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앞으로 감자는 부식물로 하지 말고 주식물로 하여야 하며, 그러자면 식생활양식을 바꾸고 감자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받아들이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으며, 『로동신문』은 감자 재배법, 감자의 영양가, 감자 가공법과 저장법에 관한 정보를 기사로 실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북(조선)은 현재 근 60개의 감자 품종이 육종되어 '국가농작물품종'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1998년 10월 9일에는 대홍단군 근로자들과 량강도 근로자의 '궐기모임'이 각각 진행되었다. 대홍단군 종합농장에서는 모든 분장에 '감자 전문화 작업반'을 배치하여 각 작업반이 1백정보의 감자 경지면적을 책임지게 되고, 모든 작업반들은 추위에 잘 견디는 다수확 품종을 위한 2백평방m 규모의 조직배양온실을 건설하게 된다고 한다. 올해 량강도에서는 지난해에 비해 감자밭 면적이 2천정보가 늘어났다. 김정일 총비서는 대홍단군의 감자농사를 위해 제대군인들을 보내주기로 조치했으며, 현지에서는 그들을 위해 3백50세대의 살림집을 건설하고 있다.

북(조선) 농업성 발표에 따르면, 1999년에는 지난해 보다 감자밭 면적이 4만3천여정보가 더 늘어났으며, 이를 2002년까지 체계적으로 늘이는 계획을 세웠으며, 자강도, 량강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같은 산간지대는 물론 평지대에서도 논벼 앞그루로 감자를 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미 함경남도, 평안북도에서는 1997년과 1998년에 논벼 앞그루로 감자를 심어 "자랑할만한 수확"을 내었다고 한다. 농업성은 대홍단군의 감자농사기술을 일반화하기 위하여 각 도 농촌경리위원회 책임자들이 대홍단군에 찾아가 감자농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기술강습을 통하여 널리 보급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 밖에도 거름 생산, 다수확품종 육종개발 및 확보, 감자농사의 기계화 추진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미 국무부가 산하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를 앞세워 미국 공법 480조에 의거한 정부예산 3천만달러를 지원하면서 이러한 북(조선)의 감자농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량강도를 모범지역으로 삼아 진행되고 있는 '감자농사혁명'과 더불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또다른 중요사업으로 손꼽히는 것은 토지정리사업이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1998년 5월 어느날 동부전선의 군부대 시찰길에 나섰던 김정일 총비서는 이른 새벽 강원도 산골 창도군 대백리의 농촌길을 가다가 차를 멈추게 하고 "산골짜기 여기저기 널려있는 다락논과 뙈기밭들을 가리키면서 강원도의 토지를 정리해야 하겠다고 하며 즉시에 관계부문 일군들의 협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강원도의 토지정리를 본보기로 하여 전국의 토지정리사업을 전당적, 전국가적 사업으로, 나라의 부강번영을 위한 만년대계의 대자연개조사업으로 내밀데 대한 강령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그 직후 김정일 총비서의 "긴급조치"로 "강원도 토지정리 전투장으로 인민군 군인들이 달려가고 대기계화 군단을 앞세운 전국의 근로자들이 물밀 듯 모여들었다"고 한다. 강원도 토지정리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5월 강원도 토지정리사업을 발기하고, 9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로 12월 1일, 1999년 2월 10일, 3월 11일에 토지정리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였다. 『로동신문』은 강원도 토지정리사업을 시작한지 4개월만에 2만여정보의 논밭을 규격포전, 기계화 포전으로 정리한 1단계 목표를 기한 전에 달성했음을 보도하였으며, 1천7백60여정보의 논밭면적이 늘어났다. 1999년 4월 2일에는 내각 위원회, 성, 중앙기관 간부들이 토지정리를 마친 강원도의 협동농장들을 참관하였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김정일 총비서는 '전환기'에 량강도에서 '감자농사혁명'을,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토지정리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지금 북(조선)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는 "감자농사를 잘하는 것도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정도로 감사농사를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감자농사가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임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동신문』은 김정일 총비서가 "감자농사에서 일대 전환을 일으켜 가까운 년간에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조선)은 "감자농사혁명이 승리하면 나라의 식량문제가 풀리고 강성대국의 경제적 담보가 마련된다. 그것은 먼 래일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정일 총비서는 "토지정리를 농업생산을 늘이기 위한 중요한 방도의 하나"로 보고 "강성대국 건설에서 토지정리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1998년에 북(조선)의 농업생산량은 3백88만t(정부 통계)에 이르렀고, 지난해에 대비하여 11%가 늘어났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올해 긴급한 식량지원이 요구되는 나라가 러시아, 중국, 아프가니스탄, 쿠바, 인도네시아, 이라크를 비롯하여 38개 나라라고 하면서, 그 가운데 물론 북(조선)도 포함시켰지만, 올해 북(조선)은 1백70만t에 이르는 외부의 식량지원에다가, 이모작, 감자농사, 토지정리사업이 진척되면서 농업생산량이 늘어나 식량난을 해소할 것으로 보인다.

 

(5) 맺음말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마감하고 맞이한 1998년 1월 1일 김정일 총비서는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일군들을 불러 오랜 시간에 걸쳐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기 위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새해 첫날 강성대국 건설과 관련하여 말한 요점은 아마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강성대국이란 사회주의 강성대국입니다. 우리의 강성대국은 자력갱생의 강성대국입니다. 우리가 지금 일시적으로 난관을 겪고 있지만 멀지 않아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몇해동안 간고한 투쟁을 벌려 부강조국 건설의 튼튼한 도약대를 마련한 조건에서 강성대국을 건설하는 것은 가까운 앞날에 실현할 수 있는 일이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사회주의 강성대국'이라는 표현은 『로동신문』 1998년 1월 4일자 정론 「사회주의 승리자의 기개를 떨치자」에서 처음으로 나왔으며, '주체의 강성대국'이라는 표현은 『로동신문』 1998년 2월 3일자 사설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강행군 앞으로!」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최근 『로동신문』에 자주 나오고 있는 강성대국 건설의 담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을 옮겨적으면 이렇다.

오늘 우리가 강성대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빈소리가 아니며 료원한 리상도 아니다. 그것은 가까운 앞날에 수행하여야 할 당면한 투쟁목표이며 능히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사실상 우리나라는 사상과 정치, 군사분야에서는 이미 강성대국의 지위에 올라섰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정치사상전선과 군사전선을 계속 강화하면서 경제전선에 화력을 집중하여 전환을 일으키면 가까운 앞날에 얼마든지 우리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 지금 경제건설에서 일정한 난관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나라의 농업구조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며 나라의 자연부원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기간공업부문과 경공업부문에서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면 우리나라를 능히 경제강국으로 만들 수 있다.

북(조선)의 주장에 따르면, "주체의 강성대국 건설은 가장 신성하고도 위대한 애국애족위업"이며, "우리 당이 내세운 주체의 강성대국 건설위업은 주체사상을 전면적으로 구현하여 우리나라의 국력을 정치와 군사, 경제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최강의 경지에 올려세우기 위한 거창한 애국애족의 위업"이라고 한다. 이 '위업'은 김정일 총비서가 "선대 국가수반 앞에, 조국과 민족 앞에 다진 애국충정맹약이며 조선을 이끌어 21세기를 찬란히 빛내이려는 담대한 설계도"라고 한다.

요컨대 김정일 총비서의 "주체적인 강성대국 건설방식"은 "사상의 강국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튼튼히 세우고 그 위력으로 경제건설의 눈부신 비약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1998년 8월 31일에 있었던 '광명성 1호'의 발사는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의 첫 포성"이었다고 묘사한다. 이로써 "강성대국 건설의 포성은 이미 울렸다"는 것이다. 북(조선)은 "오늘 우리에게는 강성대국을 자체의 힘으로 일떠세울 수 있는 모든 토대가 충분히 마련되여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북(조선)이 말하는 '토대'란 구체적으로 "우리 당의 옳바른 정치, 우리 인민의 일심단결된 위력과 높은 문화기술수준, 우리 경제의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풍부한 자원, 이것이 우리나라가 끝없이 륭성번영할 수 있는 기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북(조선)이 선택한 길은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길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투쟁으로 헤쳐가야 하는 험난한 행군길이다. 그까닭은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은 <힘>의 전략을 휘두르는 제국주의자들과의 치열한 계급투쟁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렇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의 포위 속에서 단독으로 사회주의를 지켜나가자니 시련도 많고 곤난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억천만번 죽더라도 모든 시련과 곤난을 뚫고 사회주의를 지켜나간다, 누가 최후에 웃는가 보자, 이런 신념, 이런 배짱을 가지고 싸우면 당해낼자가 없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이 "개척한 혁명의 길이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그 길로만 가야"하며, "그 길에 지뢰밭이 있어도 우리는 그 길로 가야한다"고 자신의 결심을 밝힌 바있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누가 최후에 웃는가 보자,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는 말은 김정일 총비서의 "좌우명"이라고 한다. 북(조선)의 인민은 "몇해째 계속된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단련된 인민이며 그 어떤 시련도 맞받아나가는데 체질화된 강의한 인민"이라고 한다. 이처럼 북(조선)은 최고지도자의 결심이 확고하고 단련되고 강의한 인민이 있으므로 '강성대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이것은 북(조선)이 '체제생존전략'에 의존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있다고 보는 서방세계의 대북인식과는 거의 정반대의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물음은 북(조선)이 과연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을 성공으로 이끌어 과연 '강성대국'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북(조선)의 '강성대국' 담론은 과연 실현될 것인가? 이 물음과 관련하여 단정적으로 답변하기는 아직 힘들다. 그렇지만 역사적 실례를 살펴보면 이러한 비교와 유추해석이 가능하다. 중국 강서성의 서금 소비에트는 1933년 10월부터 한 해동안 중국 국민당 군대의 포위와 봉쇄를 견디어야 했던 것에 비해, 북(조선)은 1953년 7월 정전부터 1994년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기까지 무려 40년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련합세력'의 포위와 봉쇄를 견디어야 했으며, 그러한 상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기간의 연장과 강도의 수준에 따라 북(조선)은 그만큼 더 단련된 강인한 저항력을 축적해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중국 홍군의 대장정은 1934년 10월부터 이듬해 10월 연안에 이르기까지 1년동안 진행되었던 것에 비해, 북(조선)의 '고난의 행군'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이나 계속되었다. 이러한 '고난의 행군'은 1950년대 말에도 겪었던 바있다. 오늘 연구자들은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이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 시련과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패배의 행군이 아니라 철의 의지로 단련되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중국 역사를 바꾼 '혁명 승리'를 이룩한 계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뒷날의 연구자들은 북(조선)은 중국공산당이 '대장정'에서 그러했듯이 '고난의 행군'으로 난관과 위기를 돌파하고 '강성대국'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게 될 것인가?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워싱턴-도쿄-서울의 당국자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의 북(조선)을 가리켜 얼마 가지 않아서 곧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고, 포위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자기들의 요구대로 개혁과 개방의 길로 끌려나오리라고 장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예측은 빗나갔고 그 장담은 무색해졌다. 북(조선)은 붕괴하지도, 개혁과 개방의 길로 끌려가지도 않았다. '고난의 행군'은 북(조선)이 '제국주의 련합세력'의 포위와 봉쇄 속에서 자기들의 사상과 체제를 어떻게 지켜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북(조선)의 21세기 미래상을 예시해준 사건이었다. 오늘 북(조선)은 붕괴와 패배도 아니고 개혁과 개방도 아닌 '제3의 길'을 가고 있다. 이 '제3의 길'로 나아가는 길목에 저들은 '제2의 천리마 대진군'이라는 '전설적인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1999년 5월 1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