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미국의 대북정책,

그 원인·경과·전망에 대하여

한호석

통일학 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미국은 1998년 8월부터 11월까지 북(조선)의 한 지방인 금창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굴착공사가 핵시설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북(조선)을 압박하였다. 미국은 직접 방문하여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의혹이 풀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을 공개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북(조선)은 현장 방문의 대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1998년 12월부터 북(조선)과 미국은 금창리 현장 방문을 허용하는 문제와 방문 대가를 지불하는 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북(조선)과 미국은 날카로운 대결국면을 가까스로 수습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93년 초부터 1994년 6월까지 영변 핵사찰 문제를 둘러싸고 북(조선)과 미국이 대결하면서 숨막히는 전쟁위기를 경험한 바있는 한(조선)민족은 제2의 전쟁위기가 몰려오는 게 아니냐 하면서 긴장하였다. 북(조선)과 미국은 지금 금창리 문제로 날카로와진 대결국면을 협상으로 타결하려 하고 있지만, 최종 합의를 본 것은 아니므로 불씨는 아직 남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이 금창리 의혹을 제기하였던 1998년 8월부터 북(조선)과 미국이 협상에 들어가기까지 석 달동안 서울과 평양은 워싱턴 정가에서 흘러나오는 이른바 '1999년 봄 위기설'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선임연구원 로버트 매닝(Robert Manning)은 금창리 굴착공사에 관련된 의혹 때문에 1999년 봄에 위기가 발생하면 1994년의 위기처럼 위험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전 국무차관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는 "여러가지 점에서 볼 때, 시계바늘은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기 직전의 시점으로 되돌려졌큤uquot;고 말하면서, "한(조선)반도의 안보상황은 차츰 위험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미국의 금창리 의혹에 대해서 어떤 견해와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북(조선)은 미국이 제기한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 공개 요구가 자주권 훼손과 내정간섭에 직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와 태도는 1993년 초부터 1994년 6월까지 일어났던 이른바 영변 핵사찰 문제에 대한 견해와 태도와 견주어 볼 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유엔주재 북(조선) 대표부의 리근 차석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자국 정보기관의 자료만 믿고 무조건 금창리 사찰을 실시하겠다고 공세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다. 지난 93년 6월 우리는 미국과 '자주권 인정'과 '내정 불간섭'에 대한 뉴욕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미국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금창리 시설의 공개는 이 원칙과도 어긋난다. 핵 관련시설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의 판단에 따라 '제네바 협정 파기' 운운하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위협적 자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우리 공화국 지도부의 확고한 자세다.

만일 금창리 굴착공사가 핵개발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는 미국의 의혹이 현장 방문에 의해 사실로 판명된다면, 북(조선)은 제네바 합의를 어긴 것이 되어 결정적인 외교적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만일 금창리 굴착공사가 핵개발과 관련된 공사라고 하면, 북(조선)은 무슨 구실을 달아서라도 현장 방문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북(조선)은 미국이 '보상'을 한다면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에 접근하도록 허용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북(조선)이 금창리 굴착공사가 핵개발과 관련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1998년 12월 11일 『아사히신붕』은 뉴욕발 기사에서 조·미 협상에 참석했던 미국측 관계자의 말을 빌려, 북(조선)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지하시설이 "안전보장 관계시설"이라고 언급하였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빌려 "문제는 북(조선)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그 장소에 접근하려는 요구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조선)이 이 시설에 관련한 무슨 계획을 세웠던 간에 그 계획은 산산 조각이 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전문가들은 다수가 금창리 굴착공사가 단순한 군사용이거나 대미 협상용이라고 관측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미국에게 현장 접근의 '보상'을 요구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다시 리근 차석대사의 말을 인용한다.

미국이나 한국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무런 배경설명 없이 무조건 우리가 금창리 시설공개와 관련해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미국이 꼭 금창리 시설을 사찰하겠다면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이런 요구는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국에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우리가 핵협정을 이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국을 존중하지 않고 미국 정보기관의 불확실한 자료만 가지고 일방적으로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미국의 트집을 순순히 받아들일 경우 이라크와 같은 꼴이 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에 대해 계속적인 수색을 요구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의 조-미 관계가 아직도 친선관계가 아닌 적대적 관계인데, 우리가 투자해 이뤄놓은 국가이익시설이 공개되면 그 본래의 중요성과 효과가 없어지게 되므로 다시 만들거나 전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보상을 미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몸수색을 당하면서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연극을 꾸며놓고 그 무대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무대 사용료 혹은 입장료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금창리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조·미 관계의 현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지금 언론은 금창리 문제가 현장 방문과 보상 지불이라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고 있다는 겉모습만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난 시기 미국이 제기했던 영변 핵사찰 문제가 핵시설을 공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대북정책을 결정지은 정치적 문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금창리 문제는 굴착공사 현장을 공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대북정책에 직결된 정치적 문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에 접근하겠다는 미국의 근본의도는 '현장 접근'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금창리 문제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느냐 아니면 새로운 방향전환을 해야 하느냐를 결정짓는 갈림길에 놓여있는 일종의 시금석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자면, 금창리 문제의 본질은 평양에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밝혀져야 한다.

이 글은 최근 금창리 문제를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조·미 관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 글은 금창리 문제에 관한 워싱턴 정가의 견해와 대응방식을 다루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한 원인과 경과, 그리고 전망을 다룬다. 금창리 문제에 대한 북(조선)의 견해와 대응방식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창리 문제 자체가 미국이 제기한 문제이고, 또 미국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2) 강경파의 대북관과 온건파의 대북관

미국은 북(조선)의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억제하여 동북아지역에서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미국의 지배질서를 유지하겠다는 기본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 원칙에 대해서 미국은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대량파괴무기 개발과 관련한 의혹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그곳이 영변이든 금창리이든 하갑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떤 지역이건 상관 없이 직접 '방문(visit)' 또는 '접근(access)'하거나, 아니면 더 강경한 의미에서 '사찰(inspection)'을 강행하여 북(조선)의 대량파괴무기 개발에 쐐기를 박아놓겠다는 것, 바로 이것이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비확산정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사실은 워싱턴 정가에서 비확산정책을 추진하는 방책이 두 가지로 나왔다는 점이다. 이른바 강온론에 따른 두 개의 방책이다. 워싱턴의 강경파가 제시하고 추진하려는 방책과 온건파가 제시하고 추진하려는 방책은 다르다. 그렇지만 추진 방책이 다르다고 해서 대량파괴무기 확산을 억제한다는 목적이 다른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상황에 들어가면 이 양대 세력은 방책의 차이를 넘어서서 일치점을 찾아내고 행동을 통일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의 국익추구'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외전략의 면모다. 최근 워싱턴의 강경파가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을 빌미로 삼아 온건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하다가도 이라크에 대한 미군의 미사일 공격이 시작되자 "미국의 국익을 위하여"라는 명분 아래 클린턴 행정부의 무력공격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워싱턴의 대외전략을 추진하는 방책이 어떠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냐 하는 문제를 판별기준으로 삼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볼 수 있지만, 사실은 이 두 세력이 제시하고 추진하는 방책의 차이는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 강경파와 온건파는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워싱턴 정가에서 누가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투쟁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미국 정치권이라는 일국적 범위를 넘어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각 지역의 안보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는 한(조선)반도의 안보상황에 대하여 미국 정치권 내부의 권력투쟁이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보아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이 생긴다. 미국의 대북정책 수행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는 어떻게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파헤친 연구 성과는 아직 찾아보기 힘든 게 현재 실정이지만, 미 국무부에서 북(조선) 담당관을 지낸 바 있는 케네스 퀴노네스(C. Kenneth Quinones)가 최근 발표한 글이 관심을 끌고 있다. 1998년 10월 5일 케네스 퀴노네스는 「북(조선)의 새로운 핵개발 현장-사실인가 허구인가?」라는 글에서 워싱턴 정가의 강온파 대립구도를 낙관-비관론의 견해 차이로 묘사하였다. 권력투쟁을 견해 차이로 축소하고 있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기 힘들지만, 워싱턴 정가 내부의 갈등 면모를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들어볼 만하다. 그는 "낙관론자들은 북(조선)이 국제사회의 책임적인 일원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되리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비관론자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낙관론자들은 북(조선)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한국)을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생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평양은 폐쇄상태에서 차츰 벗어나려 하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그들이 이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북(조선)이 비사회주의 나라들과 교역을 늘리고 있으며,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으며, 1992년에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1994년에는 제네바 합의서를 채택하였다는 것들이다. 이에 더하여 북(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 한(조선)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 세계 식량 계획 및 다양한 비정부기구들과 지속적으로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평양이 대량파괴무기 개발의 가능성-다른 말로 하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사업-을 대미 협상에서 최소한 양보하면서 최대한으로 실리를 얻기 위한 협상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낙관론자들은 북(조선)이 전격전을 벌이고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비관론자들은 북(조선)의 궁극적인 목적이 한(조선)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은 북(조선)이 최근 국제사회와 협력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유도하여 북(조선)의 경제를 현대화하려고 계획된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미 정보기관의 비관론자들은 북(조선)이 지금은 경제적으로 허약하고 기근을 겪고 있을지 모르나 일단 경제적 활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그동안 숨겨두었던 대량파괴무기들을 공개하고 미국과 남(한국)에 대해서 강압적이고 적대적인 정책으로 돌아갈 것으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워싱턴의 강경파는 금창리 굴착공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이들은 금창리 굴착공사가 대량파괴무기 개발의 '증거물'이라고 규정하면서 북(조선)에 대한 압박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1998년 11월 16일 미 연방의회 산하기관인 미 평화연구소(USIP)가 발표한 「불신과 한(조선)반도: 오판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대북정책 특별 보고서에 따르면, 이 '증거물'은 "외교수단을 동원하여 대량파괴무기와 관련 운반체계의 확산을 통제하기 위해 외교수단을 동원하여 애쓰고 있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는 것이다. 금창리 굴착공사를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북(조선)에 대한 압박공세는 '당연한 결론'으로 나온다.

돌이켜 보면, 강경파의 대북 공세론이 워싱턴 정가에서 제기된 것은 이번이냅냅습?아니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진 뒤에도 강경파는 기회만 있으면 대북 공세론을 제기하여 정세 긴장을 획책하곤 하였다. 그러나 대북 공세론은 워싱턴 정가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다만 일부 세력의 의도적인 문제제기로 치부되어 그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강경파의 대북 공세론이 '미국의 국익추구'와 결부되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서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논쟁은 일종의 관행처럼 이어져왔다. 케네스 퀴노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에 관한 논쟁을 벌여왔다. 중앙정보국, 국방정보국, 국가안보국,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북(조선)이 과연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련하여 지금도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정보기관들은 1995년에 북(조선)이 식량 지원을 정말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시작했다. 한 해 뒤에 이들은 북(조선)이 붕괴 위기에 몰려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말싸움을 벌였다. 지금 이들이 벌이고 있는 논쟁의 초점은 북(조선)이 비밀스럽게 핵개발 사업을 재개하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금창리 문제와 관련한 강온파 논쟁은 관행처럼 이어져온 기존의 논쟁과 뚜렷이 구분되는 양상을 띠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금창리 문제를 놓고 벌이는 강경파의 대북 공세론이 워싱턴 정가에서 설득력을 얻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그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 금창리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긴장상태의 본질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밝혀질 수 있다.

(3) 미국 대북정책의 실패

금창리 문제를 놓고 벌이는 강경파의 대북 공세론이 워싱턴 정가에서 설득력을 얻게 된 까닭은 제네바 합의 이후 워싱턴의 온건파가 주도해온 미국의 대북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여론이 워싱턴 정가에서 퍼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정책 관련자들은 이 여론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아놀드 캔터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갈림길에 서있다. 그것은 미국이 제네바 합의에 기초한 전략을 더욱 발전시키느냐 아니면 또 다른, 강경한 접근방식을 선택하기 위하여 제네바 합의를 포기하느냐 하는 갈림길"이라고 말했다. 미 평화연구소의 특별 보고서는 "북(조선)이 경제개혁을 받아들이게 하고 군비축소 조치를 통해서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은 지금 위태로운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북(조선)의 지속적인 도발 때문에 해체될 위험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대북정책 관련자들은 위험하다, 위태롭다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당혹감에 빠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미 평화연구소는 이 현상을 "워싱턴에서 특히 미 의회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북(조선)이 제네바 합의를 체결한 목적을 잘못 해석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늘어나고 있다"고 묘사하였다. 얼마전 대북정책 조정관(North Korea Policy Coordinator)에 임명된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는 연방의회에 제출할 자신의 보고서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판단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일까? 이 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워싱턴의 온건파는 1990년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한 뒤로 동력난과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조선)이 견디다 못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리라고 전망하였다. 저들은 '붕괴 위기'를 피하고 체제를 수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북(조선)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유일한 대안은 개혁·개방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저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북(조선)의 장래에 대한 '전망'이라기 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바로 이 '믿음' 위에서 북(조선)의 변화를 관리하는 정책을 수립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워싱턴 정가에서 한때 이른바 '연착륙' 담론에 관련된 논의가 무성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미 평화연구소의 특별 보고서가 "북(조선)이 개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가정한 것은 북(조선)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고 있는 조건에서 평양은 한(조선)반도의 현실, 곧 적대적인 분단상태를 더 이상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한 말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워싱턴의 강경파는 '붕괴 임박설'을 들고 나왔다. 이들 가운데 어떤 조급한 논자는 북(조선)은 몇 달 안에 붕괴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논자는 적어도 3-4년 안에는 반드시 붕괴하고 말 것으로 내다보았다. 온건파도 그러했듯이, 강경파의 '붕괴 전망'도 전망이라기 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워싱턴의 이 '믿음'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다. '개혁·개방을 향한 연착륙 유도설'과 '붕괴 임박설'이 대북정책의 쟁점으로 나온 뒤로 세월이 꽤 흘러간 뒤에야 비로소 저들은 자신의 '믿음'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강경파는 붕괴하고 있는 것은 북(조선)이 아니라 자신들이 제시한 '붕괴설'이라는 역설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었다. 미 평화연구소의 설명에 따르면, "김정일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여섯달 이상 버티지 못하고, '위대한 수령'의 사후에 1년 (또는 2-3년)이 지나면서 북(조선)은 개혁하지 아니면 붕괴하리라는 예상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연방의회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공화당 의원 참모로 동아시아 문제 선임보좌관인 피터 브룩스(Peter T. R. Brookes)는 "많은 사람의 믿음과는 반대로 북(조선)은 붕괴 위기에 있지 않으며, (미국의) 현재 정책은 사실상 북(조선)의 새로운 정권이 기존의 양태로 존속하면서 정치력을 강화하도록 허용했다"고 말했다. 북(조선)은 워싱턴의 전망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의 강경파가 느끼는 당혹감은 북(조선)이 동력난과 식량난을 겪고 있으면서도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선군혁명노선(先軍革命路線)'을 추구하며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생긴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워싱턴의 온건파는 북(조선)이 자기들이 예상한대로 경제난을 견디지 못하여 미국의 개혁·개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자력갱생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당황하고 있다. 온건파는 북(조선)이 개혁·개방을 선택하는 변화의 조짐이라도 보여줄 것으로 예상하고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였는데, 개혁·개방은커녕 '주체혁명노선'과 '사회주의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을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는 북(조선)의 모습을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아놀드 캔터에 따르면,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뒤 지난 4년 동안 북(조선)은 내부를 개혁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북(조선)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미 평화연구소의 특별 보고서는 "북(조선)의 의도는 외부의 관찰자들에게 불투명하게 남아있다"고 지적했으며,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지냈고, 지금은 대외관계협의회 산하 한(조선) 반도의 변화를 관리하는 특별대책반(Independent Task Force on Managing Change on the Korean Peninsula)의 공동의장으로 있는 제임스 레이니(James Laney)는 "북(조선)의 의도에 대하여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는 말로 온건파의 당혹감을 표현했다. 북(조선)이 붕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제임스 레이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네바 합의가 북(조선)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며, 한(조선)반도의 긴장을 완화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미국은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남과 북은 대화를 시작하고 미국과 북(조선)은 연락사무소를 상호 개설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다.

미 평화연구소의 특별 보고서는 "북(조선)의 주요목표는 정권의 존립이라고 하는 가정 위에서, 그리고 북(조선)은 대미 관계개선이 정권 존립이라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하는 가정 위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수행되었다"고 전제하고, "이 논법에 따르면, 북(조선)의 핵개발 사업은 미국을 대북 직접 협상에 나오도록 추동하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이며, 그로써 제네바 합의가 포함하고 있는 실리, 곧 동력자원 지원, 경제제재 해제, (평양은 한·미 동맹체제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연락사무소 설치 같은 실리를 추구하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 바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오류였음이 드러났다. 한 마로로 말하자면, 미국은 북(조선)의 정세를 오판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 또는 변화관리정책)을 추진하여 "지구 상에서 가장 고립되고 불투명한" 북(조선)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겠다는 말을 하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북(조선)이 필연적으로 개혁·개방으로 나오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하여 붕괴할 터이므로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낙관적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미 평화연구소의 지적에 따르면, 제네바 합의는 "북(조선)이 내부개혁을 위해서 힘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따라서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보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주한미국대사 보스워스(Stephen Bosworth)는 미 국무부의 견해를 반영하여 "북(조선)의 경제와 군사력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말했다. 북(조선)과 대화·협상을 추진하려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바로 이러한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미 국무부의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견해와 그에 기초한 일련의 유화정책은 제네바 합의를 체결해놓고 북(조선)이 경제파탄과 군사력 약화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소극적 방관 전략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북(조선)이 대량파괴무기 선택권을 포기하도록 '유화 분위기'(이를테면 4자회담, 식량지원, 남북대화 따위들이다)를 만들어 왔으며, 북(조선)에 대한 대화·협상은 바로 이 유화정책의 전술단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제네바 합의는 정책의 목적이 아니라 정책의 수단"이라고 지적한 아놀드 캔터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아놀드 캔터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북(조선)의 경제를 개혁하는 것이나 북(조선)이 자기폐쇄적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미국의 대북정책의 목표와 결부되지 않는 한, 미국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 우리는 북(조선)의 경제개혁이나 폐쇄상태에서의 탈피를 북(조선)의 핵개발 사업, 미사일 개발사업을 중단시키고 해체시키며, 북(조선)이 한(조선)반도와 역내 안정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킨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 딸려있는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조엘 위트(Joel S. Wit)는 미국의 비확산정책(nonproleferation policy)을 이라크형과 남아프리카 공화국형으로 나누면서, 북(조선)에 대한 정책은 후자의 유형에 들어있다고 설명한 바있다. 그는 이라크형 정책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교체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경우며, 남아프리카 공화국형 정책은 백인우월주의 정권이 넬슨 만델라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핵무기 개발사업을 포기한 경우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유형분류법에 따르자면, 워싱턴의 온건파가 주도해온 대북정책은 대량파괴무기 선택권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유인한다는 이른바 남아프리카 공화국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은 우리 편에 있다'고 했던 대북정책은 지난 1998년 8월에 이르러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국제전략연구소(CSIS) 태평양회의(Pacific Forum)의 회장인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는 "'시간은 우리 편에 있다'는 클린턴 행정부의 가정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외관계협의회 선임연구원 로버트 매닝은 대북정책에서 실패를 맛본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를 두 가지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같은 무뢰한 나라의 핵무기 보유를 방지하고 이를 외부 감시에 두는 것과, 갑작스러운 북한의 붕괴를 막는 연착륙 유도 등 두 가지 목표였다. 또 이 목표들이 달성되지 못한다고 해도, 제네바 합의는 최소한 북한이 체제 내적인 취약함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약화되거나 심한 경우 붕괴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전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같은 클린턴 행정부의 전략적 목표들은 단 하나도 달성되지 못했다. 북한은 개혁 또는 개방에 나서지도 않았을뿐더러, 최근 폭로된 영변 지하시설 공사에서 드러났듯 핵개발도 포기하지 않았다. 또 시간을 번 것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1998년 8월이라는 시점을 강조하면서, 바로 이 시점에 이르러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작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언론에서 금창리 굴착공사가 초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8년 8월초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짤막한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 보도에서는 미 국무부 관리들이 미국 정보기관을 비롯한 강경파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금창리 문제가 미국 언론에 크게 떠오른 것은 『뉴욕 타임스』가 1998년 8월 17일자 기사에서 금창리 문제와 제네바 합의 파기 가능성을 결부시킨 내용을 보도한 뒤였다. 이 신문은 "정보자료에 관련하여 설명한 한 관리의 말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의 커다란 비밀 지하단지(huge secret underground complex)를 탐지했는데, 이 지하단지가 북(조선)이 그동안 동결했던 핵무기 개발사업을 재개하려고 힘쓰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대상물이라고 믿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첩보위성은 영변 북서쪽 25마일 지역의 거대한 공사장을 집중적으로 촬영"했는데, 그곳에서는 "수천명이 북적대면서 산에 굴을 파내고 있는"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조선)문제 전문가인 셀릭 해리슨(Selig S. Harrison)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첩보위성의 촬영자료에서 드러난 북(조선)의 공사인원은 약 1만5천명이라고 한다.

언론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금창리 굴착공사는 1989년에 시작되었다. 지난 9년동안 계속된 금창리 굴착공사의 규모는 40만평방m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축구장 20여개를 합해놓은 넓이에 비길 수 있다. 지난 9년 동안 미국의 첩보위성은 이 굴착공사현장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워싱턴의 강경파는 이 굴착공사현장을 1998년 어느 시점에 와서 처음 발견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외부에서 금창리 굴착공사를 의심하고 있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국)의 한 일간지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여 "지하시설의 규모가 다른 시설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는 점, 대규모 저수시설(댐)과 배수구, 환풍시설이 건설되고 있다는 점, 대규모 송전시설이 건설되고 있는 점, 엄중한 경비와 보안시설이 갖춰진 점"이 의혹을 사고 있다고 하면서, "금창리의 산악지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굴착공사는 크기도 문제지만 냉각수 공급을 위한 댐과 송선시설 등 핵시설 설치를 위한 인프라들이 건설되고 있는 점이 문제"라고 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세상에 알려진대로, 북(조선)의 군사시설과 군수공업시설은 대부분 지하에 건설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워싱턴 포스트』 1998년 7월 29일자는 미 의회 산하 '미국에 대한 미사일 위협 조사위원회'(위원장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의 비밀보고서를 인용하여, "북(조선)은 지하시설을 건설하는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직경 50피트, 깊이 200피트의 공간을 하루에 파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등 고도의 굴착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8년 12월 8일 남(한국) 국방부 북한정보본부는 북(조선)의 주요 군사관련 지하시설은 8천2백36개소이며 총연장은 5백47km에 이르며, 최근에 주요 군수공장 1백80개를 지하공장으로 건설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1개 군마다 평균 40여개의 지하시설이 빽빽하게 들어있는 셈이다. 일본의 NHK방송은 1998년 12월 8일 일본 방위청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에서 북(조선)이 지하 50-1백m에 미사일 기지로 추정되는 시설을 세 군데에서 건설하고 있는 것을 미군 첩보위성이 발견했는데, 건설작업이 가장 빨리 진척되고 있는 데서는 1-2년 안에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북(조선)에서 지하시설이란 '특수 시설'이라기 보다는 '일반 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금창리 굴착공사를 마치 '상식을 뛰어넘은 비정상적인 특수 지하공사'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어쨋든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굴착공사 현장을 촬영한 첩보위성의 사진자료를 근거로 하여 북(조선)이 제네바 핵합의를 깨고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워싱턴 정가를 뒤흔드는데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미 평화연구소의 특별 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과 핵관련 시설이 확실한 지하 시설에 관련한 최근의 증거들은 북(조선)이 공개된 핵개발 사업을 포기하는 문제에서는 미국에 대해 협조적이면서도 대량파괴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중거리, 장거리 미사일을 비밀스럽게 개발하고, 이 미사일에 장착할 탄두를 생산하는 핵시설을 눈에 잘 보이지 않게 건설하는 이중 전략(dual-track strategy)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케네스 퀴노네스는 "이들 가운데 일부 정보분석가들은 미국 언론에 비밀 첩보영상자료(imagery intelligence)를 흘려줌으로써 논쟁(강온파 논쟁을 뜻함-옮긴이)을 마감하고 미국과 남(한국)이 대북 정책을 바꾸도록 위협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이것을 "미 정보기관의 비관론자들이 저지른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셀릭 해리슨에 따르면, 금창리 굴착공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주된 인물은 국방정보국(DIA) 국장이며 현역 중장인 패트릭 휴즈(Patrick M. Hughes)라고 한다. 국방정보국이 지하시설 의혹을 제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98년 1월에 국방정보국은 '비밀문서'에서 자강도 하갑에 있는 지하시설을 '하갑 미확인 지하시설 단지'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 시설물은 2003년까지 핵무기 관련 시설로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북한내 9곳의 핵무기 관련 단지 중 북한의 유일한 지하시설물"이라고 밝힌 바있다.

여기서 우리는 금창리 문제가 미국의 언론에 나온 시점이 북(조선)이 '광명성 1호'를 함경북도 무수단 발사장에 옮기고 발사준비를 시작한 시점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제임스 레이니는 "8월 31일에 있었던 북(조선)의 미사일 실험은 우리의 만족감(complacency)을 산산이 부숴버렸으며, 핵개발의 가능성이 있는 지하 시설 현장을 발견한 것은 북(조선)이 세계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였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미 행정부가 영변 주변의 공사, 지난 8월 일본 상공을 넘어 발사된 미사일 시험을 포함하여 일련의 도발적인 행동이 나온 뒤로 북(조선)의 의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북(조선)은 1998년 8월 21일부터 9월 5일까지 뉴욕에서 미국과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광명성 1호'는 이 고위급 회담이 진행되던 기간에 발사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워싱턴의 강경파가 '광명성 1호'와 금창리 굴착공사의 상관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저들은 '광명성 1호'가 무수단 발사장에서 발사준비작업에 들어간 시점에 금창리 문제를 언론에 흘리면서 대북 공세를 개시하였다. 8월 31일 '광명성 1호'가 발사된 뒤에 워싱턴 정가는 강경파의 대북 공세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급속히 바뀌었다. 워싱턴 전략가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광명성 1호'는 북(조선)이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조오지 테넷(George J. Tenet)은 1999년 2월 2일 연방의회 군사위원회(Armes Services Committee) 청문회에서 "북(조선)이 지난 해 8월에 발사한 3단계 대포동 1호는 북(조선)이 몇 가지 중요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비록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미국 본토의 일부를 포함하는 대륙간 사거리에까지 작은 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북(조선)이 대미 협상용으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며, '광명성 1호'는 미국이 서태평양과 동북아시아에 구축해놓은 지배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해석했다. 미 국방정보국 국장 패트릭 휴즈는 "북(조선)은 앞으로 다섯 해 안에 미국을 대규모 광역전쟁의 행동계획(large-scale regional war scenario) 안에 끌어들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로 남아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미국에 대한 대규모 광역적 재래전을 벌이려는 위협은 거의 제한되어 있지만 오로지 북(조선)만이 예외가 된다"고 지적한 바있다.

'광명성 1호'가 발사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미 중앙정보국은 북(조선)이 앞으로 10년 내지 15년 안에는 알래스카와 하와이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기 어려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1998년 7월 9일 워싱턴에서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마친 뒤에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두 나라 국방장관은 북(조선)은 일본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IMBM) 개발을 완료했으며 이를 배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광명성 1호'는 이러한 판단을 뛰어넘어 우주공간으로 날아갔다. 파키스탄의 가우리(Ghauri) 미사일과 이란의 샤합(Shahab) 미사일은 모두 사거리 1천3백km의 중거리 미사일인데, 이 미사일들은 같은 사거리를 가진 노동 미사일을 개발한 북(조선)의 기술에 의하여 개발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북(조선)의 미사일 기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높은 수준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이 핵무기 개발과 함수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 전문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일반 무기체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값비싼 무기인 장거리 탄도 미사일 체계를 설계할 때에는 비용 대 효과를 고려한 하나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표적을 미사일 1기로 제압하려면 탄두 위력이 공산오차보다 커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거리 1000km에서 공산오차가 2km라면 탄두 위력은 2km를 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탄두는 당연히 핵무기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장거리 탄도 미사일과 핵은 동전의 양면, 혹은 동의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북(조선)이 경제난을 겪으면서도 연간 5억달러를 들여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북(조선)의 호전성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미국의 선제 핵공격이라는 가공할 위협 앞에서 미국과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북(조선)으로서는 미국의 공격에 응전하는 가장 유력한 공격수단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을 가장 위험한 존재로 규정한 '반역국가'의 범주에 넣고, 이 땅 위에서 없애버리려 하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과 포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북(조선)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에 맞서기 위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6위의 군사강국으로 올라서는 군사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워싱턴의 강경파가 '광명성 1호'의 발사를 두고 북(조선)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 "단순한 협상용이 아니라 미 본토를 겨냥한 전략적 행보"라고 평가한 것은 옳았다. 제임스 켈리는 "북(조선)이 우리 모두에게 위험을 들씌우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북(조선) 정권은 외부의 지원을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하고 위협전략에 동원하기 위하여 시간을 버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리 밀홀린(Gary Milhollin)은 "제네바 합의가 깨지면 북(조선)은 2년 안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 다섯 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이른바 '반제혁명노선'을 고수해온 북(조선)은 이제 미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공격수단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경파는 온건파가 주도해온 대북정책이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그 정책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제네바 합의도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고 보았다. 조셉 버뮤디즈 2세(Joseph S. Bermudez, Jr.)의 말대로, "제네바 합의는 영변 원자력 연구소의 플루토늄 생산을 저지했을 뿐"이고, "그 합의가 핵무기의 개발과 실험을 포함한 핵무기 사업을 중단시켰다고 하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강경파는 제네바 합의를 당장에라도 깨버리고 싶었지만, 깨버리더라도 그 파기의 책임을 북(조선)에게 떠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경파는 북(조선)이 제네바 합의를 저버리고 남모르게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공세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금창리 굴착공사를 핵개발 음모설에 결부시켜 워싱턴 정가와 국제사회에 폭로하는 계략이었다. 강경파의 이 계략에 의해서 9년 전부터 진행되어 오는 금창리 굴착공사는 느닷없이 지하 핵시설 공사로 둔갑되었고, 그에 따라 북(조선)의 핵개발 의혹설과 제네바 합의 파기설, 그리고 한(조선)반도 전쟁위기설이 잇따라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회만 있으면 대북 공세론을 들고 나오곤 했던 워싱턴의 강경파는 자신들이 제네바 합의 이후 4년이 넘게 북(조선)에게 속아오고 있었다고 느꼈을 때, 강한 보복심리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나온 대북 공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하였다.

(4) 강경파의 대북 공세와 '새로운 전쟁계획'

워싱턴의 강경파는 두 가지 방향에서 대북 공세를 퍼부었다. 하나는 제네바 합의를 깨버리기 위한 정치공세였고, 다른 하나는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전쟁위기로 끌어가기 위한 무력위협공세였다. 제네바 합의를 깨버리기 위한 정치공세에는 연방의회의 강경파가 앞장섰다. 대외관계협의회 아시아 안보담당 상임연구원이며 한(조선)반도 위기관리단 단장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이 전하는 당시 연방의회의 분위기는 이러했다.

지난 9월까지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가 의회의 협조를 받아 대북 중유비 예산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의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은 제네바 기본 합의문이 깨지는 것이 불가피하며, 궁극적으로는 북한과 또다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예견하고 있었다.

1998년 9월 24일 연방의회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나온 한(조선)반도 평화특사이며 한(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미국 대표인 찰스 카트먼은 강경파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협상에서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은 1993-1994년의 정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피하는 것입니다. (줄임) 국제관계위원회 의장과 의원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한(조선)반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북(조선)의 불안정한 행태에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강경하고 일치된 행동으로, 실패의 결과를 내다보면서 이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북(조선)을 제네바 합의에 묶어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제네바 합의가 규정하고 있는 우리의 의무, 특별히 한(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통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중유를 제공하는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연방의회와 행정부는 지금 비록 좌절을 경험하였지만 이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마이클 그린에 따르면, 강경파로부터 비판을 받은 온건파는 "의회가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이냐 아니면 한반도의 전쟁 발발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냐" 하는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이러한 강경파의 공세는 워싱턴 정가에서 온건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권력투쟁의 일환이었고 동시에 북(조선)에 대한 정치공세였다. 마이클 그린에 따르면, 이러한 긴장상태 속에서 대외관계협의회의 "위기관리팀은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한반도 상황을 검토했다"고 한다. 1998년 10월 7일 대외관계협의회의 한(조선)반도의 변화 관리에 관한 특별대책반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공개서한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미국의 현 정책을 새로운 상황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검토하도록 지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북(조선)의 의도를 해석하는 문제, 동맹국들과 미국의 협력이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 미국 정책의 장기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북(조선)에 대한 각이한 협상수단을 포괄적인 접근법으로 통합하는 문제, 북(조선)은 아직도 핵을 개발하려 하고 있는 경우나 제네바 합의가 깨어진 경우에 미국이 취해야 할 태도를 검토하는 문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 검토는 앞으로 60일 안에 완결되어야 한다.

이 건의안이 나온 뒤에 강경파와 온건파의 타협이 시작되었고, 의회 강경파는 대북 중유 예산 지출과 관련하여 이 건의안이 제시한 조건을 새로 달았다. 이로써 워싱턴 정가에서 타협의 실마리가 풀렸고, 제네바 합의가 깨질 뻔한 위기는 일단 넘겼다. 그렇지만 강경파의 대북 공세는 더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것은 북(조선)이 미국을 속이고 핵개발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으므로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파기된 것이나 다름이 없고, 따라서 북(조선)의 합의 위반을 책벌하고 핵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의 정치력과 군사적 억지 및 상호주의에 입각한 더욱 집중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강경파는 이른바 북(조선) 침략에 관한 전쟁계획을 언론에 흘리면서 포문을 열었다. 이 공세는 1998년 11월 14일 언론인 출신 리처드 핼로런(Richard Halloran)이 발표한 「북(조선) 침략을 요구하는 새로운 전쟁계획」이라는 글로 시작되었다. 그는 '새로운 전쟁계획(new warplan)'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과 남(한국)의 군지휘관들은 만일 북(조선)이 적대행위를 일으켜 침공해오면 이를 격퇴할 뿐아니라 북(조선)을 침공해 들어가서 북(조선)군을 격멸하고 평양을 점령하여 북(조선) 정권을 괴멸시키려는 새로운 전쟁계획(new war plan)을 완성하고 있다. (줄임) 미국의 고위 관리는 우리가 일을 마치게 될 때, 저들은 어떠한 종류의 군사행동도 개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저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남(한국)의 연합군은 북(조선)의 국가기능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김정일의 통치를 끝장낼 것이며, 북(조선)을 남(한국)의 통제 아래서 재조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줄임) 새로운 전쟁계획의 단계는 북(조선) 공격 이전 단계, 초기 공격을 저지하는 단계, 반격을 개시하는 단계, 북(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하여 평양을 점령하는 단계로 되어 있다. (줄임) 북(조선)에 있는 공격목표들은 미국에서 출격하여 24시간 안에 북(조선)에 도착할 수 있는 B-1 폭격기, B-52 폭격기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남(한국)과 일본, 그리고 순항미사일을 장착하고 북(조선) 연안을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다른 전함들과 잠수함들과 함께 일본에 정박하고 있는 항공모함 키티 호크호에서 더 많은 전투기들이 발진하게 될 것이며, 하와이 진주만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은 닷새 안에 도착할 것이다. (줄임) 새로운 전쟁계획은 북(조선)을 둘로 나누어놓기 위하여 한(조선)반도의 가장 잘룩한 부분을 갈라놓는 미 해병대의 상륙공격의 가능성도 내다보고 있다. (줄임) 새로운 전쟁계획은 북(조선)의 시설을 마비시키기 위한 선제 공격을 포함하고 있는데, 특별히 장거리포와 폭격기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그들에 대한 선제 공격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계획은 닷새 뒤에 『워싱턴 타임스』 1998년 11월 19일자에도 실렸다. 강경파의 대북 전쟁계획이 워싱턴의 언론에 공개되던 바로 그날 기자회견장에 나온 미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William Cohen)은 "새로운 전쟁계획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을 공격할 경우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라는 점만은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새로운 전쟁계획에는 '작전계획(Operation Plan) 5027-98'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보도했다. 미 육군장관(Secretary of the Army) 루이스 칼데라(Louis Caldera)는 11월 20일 워싱턴의 외신기자 센터 설명회에서 '새로운 전쟁계획'과 관련하여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취하고 있는 일련의 계획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긴급 계획(contingency plans)이다. 이 계획은 공격 계획이 아니라 한(조선)반도의 안정과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계획이다. (줄임) 우리 군은 이러한 긴급 계획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1998년 11월 26일자 기사에서 홍콩 언론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뉴』에 그 무렵 보도된 대북 전쟁계획은 미국의 강경파들이 북(조선)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리처드 핼로런에게 제공한 것이라고 밝혔다. 『가디언』은 미 행정부 안에서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있다는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 군사전략가들은 북(조선)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약하며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998년 11월 26일자 보도에서 미 국방부는 북(조선)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처하는 새로운 대응전략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강경파의 대북 전쟁계획은 단지 '엄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워싱턴의 강경파는 전쟁계획을 행동에 옮겨 예행연습을 실시하였다. 미 군사전문지 『디펜스 뉴스』가 1998년 11월 16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 해군은 1998년 10월 24일부터 11월 2일까지 한(조선)반도 주변 바다에서 '델타(Delta)'라는 암호명으로 '미래전' 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 전쟁연습에는 제7함대가 동원되었고, 한(조선)반도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태평양에 배치된 지휘함 블루리지는 '전역미사일 방위망'을 가동하여 육군이나 해군이 추적한 각종 자료들을 토대로 북(조선) 미사일의 가상 공격을 공중에서 저지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미 해군 순양함들은 북(조선)이 발사하는 미사일을 추적하고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즉각 요격하는 훈련을 벌였다. 이것은 한(조선)반도 주변 바다에 전진배치한 전함들이 육군 및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북(조선)의 지상군과 미사일 공격을 격파하는 전술을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미 해군 전쟁대학장인 현역 중장 아더 세브로스키는 "이번 실험에서는 해군력을 전진배치해 유사시 전술을 응용해 본 결과 미래의 전쟁 수행을 위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지적하면서, 새 전술개념을 2001년 이후 해군 예산에 반영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11월 23일에는 미 국방부가 『1998년도 동아시아·태평양지역 안보전략 보고서(The United States Security Strategy for the East Asia-Pacific Region-1998)』를 발표하였다. 미 국방부는 이 보고서에서 대량파괴무기에 대한 비확산정책과 반확산정책(counterproliferation policy)을 정리하면서, 미국과 남(한국)이 북(조선)의 대량파괴무기 확산행위에 대처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비확산 대책반(Nonproliferation Task Force)'을 창설하고 운영해오고 있음을 처음으로 공식발표하였다. 이 '비확산 대책반' 제6차 회의가 서울에서 열린 때는 1998년 11월 13일이었다. 이 회의에는 미 국무부 국제안보·군축담당 차관보 존 홀름과 남(한국) 국방부 정책보좌관 김인종 육군 중장이 공동대표로 참석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때도 같은 시기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이 1998년 11월에 이라크에 대한 무력을 배치하면서 항모전단 1개와 항공기 2백대를 동원하였고, 3억달러를 군사비로 썼을 것으로 계산하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압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던 12월 16일은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이 연방의회에서 대통령 탄핵 심의라는 사건으로 폭발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에드워드 올슨(Edward A. Olsen)은 미국이 북(조선)과 이라크에 대해서 이중적 기준의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면서, "중동과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들어있는 이중기준을 없애야 할 때가 되었다. (줄임) 그러나 만일 이라크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필요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면 이라크형 기준을 북(조선)에 적용하려는 압력이 가중될 것같다"고 말했다.

한(조선)반도에서는 새로운 전쟁계획의 언론 공개로 대결분위기가 고조되고, 이라크에서는 미국의 미사일 공격으로 전쟁의 불길이 솟구치고 있던 당시, 워싱턴의 강경파가 대북관계에서 보여준 행동은 북(조선)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버리고 미국을 속이면서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해왔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가는 데 집중되고 있었다. 강경파들이 여론조성용으로 동원한 견해와 주장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

첫째로, '물적 증거 확보설'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금창리 굴착공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공사라는 '물적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샌너제 머큐리 뉴스』 11월 18일자는 미 국방부 관리들과 정보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한 보도에서 "미국 정보분석가들은 지하시설이 핵개발을 위한 공사이며, 현재 문제가 된 지하시설 외에도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금창리 굴착공사장에는 외부와 연결된 동력선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시설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목적으로 건설되는 시설이라고 판단하였다고 보도한 바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에서 3천 볼트급 전기 배선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나 대규모 송전시설이 건설되고 있다는 보도와 모순되는 주장이다.

워싱턴 강경파의 '물적 증거 확보설'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곳은 미국 언론이 아니라, 남(한국)의 언론이었다. 남(한국)의 고위 외교당국자는 "북한의 지하시설 의혹은 한국이 먼저 확인했으며, 인적 정보도 활용되고 있다고 밝힌 바"있으며,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공사장 주변의 나무껍질과 나뭇잎, 두께 1cm가량의 표토, 특히 지하시설에서 흘러 나오는 폐수 등을 수개월 간에 걸쳐 극비리에 수집, 분석한 결과 지하시설이 핵시설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1998년 11월 20일자 기사에서 금창리 주변의 물과 흙에서 플루토늄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내용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플루토늄 흔적이 들어있는 금창리 주변의 물과 흙을 채취한 것은 남(한국)의 전현직 영관급 장교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정보공작단이었다는 사실과 이들이 수집한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남(한국)측의 결론이 내려진 시점인 1998년 4월 미 국방정보국 국장이 방한하여 청와대를 방문했고, 수집한 증거물을 최종 분석한 곳은 미 국방정보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보도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물적 증거 확보설'은 미 국방정보국과 남(한국)의 군부가 합작으로 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은 1998년 11월 23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문제의 시설이 완공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다면서 금창리 시설 의혹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James P. Rubin)은 1998년 11월 19일 『중앙일보』의 보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특사(special envoy) 찰스 카트먼(Charles Kartman)은 1998년 11월 19일 외교통상부 최성홍 차관보와 회담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 두 나라는 이 시설이 핵개발과 '연관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증거'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닷새 뒤에 '물적 증거 확보설'에 대해서 "황당한 소문(wild rumors)"이라고 일축했다. 11월 24일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은 "이 지하공사가 핵시설로 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처음부터 미국쪽의 분위기가 한국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강경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볼 때, 온건파는 강경파의 '물적 증거 확보설'에 대해 '비부인 비시인(NCND)'이 아니면 '말 뒤집기'로 궁색하게 대처하는 수세적 처지에 놓여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기폭실험설'이다. 이 주장은 주로 일본 언론을 통하여 나왔다. 일본의 『아사히신붕』은 1998년 11월 21일자 보도에서 미국과 남(한국)의 소식통이 한 말을 빌려, 북(조선)이 기폭장치를 실험했다고 주장했다. 북(조선)이 기폭실험을 했다는 주장은 『요미우리신붕』 1998년 11월 25일자에도 실렸으며, 『중앙일보』도 다음날 이를 보도했다. 일본의 『요미우리신붕』은 1998년 11월 25일자 보도에서 미국은 금창리 이외에 하갑지역, 그리고 구성군과 태천군에 걸쳐있는 지역에서 지하시설을 더 발견하고 이를 남(한국)에 알렸으며, 금창리 남동쪽 10km 지점에 건설된 기폭실험장에서 지난해부터 핵개발에 필요한 기폭실험이 적어도 세 차례 실시된 사실을 포착하여 남(한국)에 알렸다고 전했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북(조선)은 이미 1991년 이전에 기폭장치의 일부장치에 관련한 고폭실험을 70여 차례나 실시했으며, 올해 들어서도 핵물질은 넣지 않은 핵폭탄 완성품을 만들어 수차례 실험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1998년 11월 22일자에서 남(한국) 당국의 말을 인용하여, 미 정보당국은 3년여 전부터 추적하기 시작하여 1997년초 KH-12 첩보위성을 통해 금창리 굴착공사장에서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구성시 인근지역에 있는 고폭 실험장을 찾아냈으며, 그곳에서 여러 차례 고폭 실험을 실시한 흔적을 포착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핵무기 개발을 위한 기폭실험은 실제로 마구 할 수 없기 때문에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을 이용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첩보위성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북(조선)이 1980년대부터 기폭실험장을 지상에 버젓이 차려놓고 기폭실험을 해왔다고 하는 워싱턴 강경파의 주장은 이러한 점에서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셋째는 '제2차 미사일 발사실험설'이다. 1998년 11월 17일 미 국방부의 탄도미사일 방위기구(BMDO)는 북(조선)의 미사일 전력 증강에 대비하기 위해 12월 둘째주 알래스카주에서 네 차례의 공청회를 열어 국가미사일방위(NMD)기지 건설이 환경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한 반응을 알아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방위기구의 공청회는 원래 노스 다코다주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알래스카주로 개최지를 바꾸었다. 1998년 11월 20일 미국의 CNN방송은 미 행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북(조선)이 지난 8월 31일에 이어 알래스카나 하와이까지 도달할 수 있는 두 번째 미사일 시험발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워싱턴 포스트』는 미 정보소식통의 말을 빌려, 북(조선)이 '대포동 미사일'의 두 번째 발사시험을 계획하고 있어 동북아 지역의 긴장을 높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북(조선)은 영고동에 미사일 추진연료를 저장할 수 있는 지하시설과 발사대를 건설하고 있는데 내년에 완공될 것으로 추정되며, 스커드 미사일 생산기지인 지하리에 또 다른 '대포동 미사일' 발사기지를 짓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는 1998년 11월 23일자에서 미 정보당국자의 말을 빌려, 지난 11월 3일 평양 산음동 미사일 제조창을 빠져나온 위장망을 씌운 '마흐 53트럭'에는 대포동1호 미사일 2기가 실려있었는데, 그 최종 목적지는 무수단 발사기지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붕』 1998년 12월 2일자는 미국 정보위성이 북(조선)의 미사일 부품이 저장소에서 발사장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을 탐지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주간지 『에비에이션 위크 앤드 스페이스테그놀로지』는 1998년 12월초 보도에서 워싱턴의 정보당국자의 말을 인용하여 북(조선)이 새로운 미사일 발사장소를 건설하고 있으며 일련의 시험발사가 곧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과 그 시기는 모든 것이 잘 될 경우 아마도 연말께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제2 미사일 발사가 임박한 것으로 보이는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고 부인하였고, 미국 정보소식통들은 제2 미사일 발사가 1999년 2월로 연기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5) 워싱턴 온건파의 대응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은 1998년 11월 9일 기자설명회에서 북(조선)이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에 대한 사찰을 거부한다고 밝힌 데 대해 "미국은 북한과의 핵합의 이행을 위해 문제의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1998년 11월 18일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은 "우리는 북(조선)에게 현장 접근이 중요하다며, 우리는 구두 보장(verbal assurances)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북(조선)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온건파는 '현장사찰(inspection)'이라는 강경한 개념 대신에 현장방문(visit)' 또는 '현장접근(access)'이라는 개념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가 취한 중요한 조치는 찰스 카트먼 특사를 평양에 보낸 것이었다. 평양에서 열린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려진 바없지만, 우리는 남(한국) 정부 당국자가 언론에 흘린 내용을 통해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서 체결 당시 합의서에 약속된 북한의 모든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 등의 세부일정을 명시한 별도의 비밀각서(confidential minuite)를 작성한 바 있다. 그 각서에는 북한이 핵무기의 원료인 풀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흑연로와 핵재처리시설 등 핵관련 시설을 앞으로 건설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포함돼 있다. 미국은 이 각서를 근거로 지난 16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지하시설 의혹 해소를 위한 북-미 회담에서 금창리 지하시설 현장접근을 무조건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각서의 내용은 인정하지만 반드시 사찰에 응해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며 반발했다.

미 국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1998년 11월 10일 찰스 카트먼 특사의 방북에 관한 배경 설명에서 북(조선)이 영변 주변의 지하시설에 대한 핵의혹을 해소하지 않으면 제네바 기본합의를 종결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의혹이 가는 지점을 금창리 굴착공사라고 집어서 말하지 않고 '영변 주변의 지하시설'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영변 주변의 지하시설'은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만이 아니라 여러 군데이므로, '영변 주변의 지하시설'이라고 할 경우 여러 군데를 모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미국이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을 꼭집어서 처음으로 말한 것은 찰스 카트먼 특사가 방북하고 돌아온 뒤에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 자리에서였다. 찰스 카트먼은 1998년 11월 20일 서울에서 한 일간지와 나눈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한이 (줄임) 핵관련 시설을 건설한 의도로 공사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줄임) 북한이 핵관련 시설을 갖고 있느냐를 증명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북한이 핵관련 시설을 건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이번 협상에서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가장 빠르고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금창리에 들어가 현장에 접근(access)하는 것이다.

1998년 11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정상회담 뒤에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양국 정상은 금창리 굴착공사를 핵시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의혹이 상당히 있는 만큼 현장 접근을 통해 사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린턴은 이튿날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8군 보병2사단 전용 포사격 훈련장(KTC)를 방문하여, 대규모 기갑부대의 기동훈련과 신형 탱크를 비롯한 각종 첨단 화력무기의 사격훈련을 참관했다.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부대의 기동훈련과 사격훈련을 참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러한 행동으로 북(조선)을 자극하면서도, 1998년 11월 하순 미국이 북(조선)에 지원하기로 한 밀 30만t 가운데 일차분을 실은 미국 선박을 미국 항구에서 출발시키는 이중 행태를 보였다.

(6) 해결의 실마리는 있는가

리처드 핼로런은 북(조선)과 미국의 관계를 긴장으로 몰아넣은 금창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다섯 가지를 내놓았다. 그것은 지속적 대화(Keeping Talking), 은근한 무시(Benign Neglect), 조용한 최후통첩 (Quiet Ultimatum), 중국의 외교(Chinese Diplomacy), 이스라엘의 선택(Israeli Option)이다. 그러나 그는 각 대안은 그 나름대로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도 밝혔다. '지속적 대화'라는 대안을 추구할 경우, 협상이 질질 끌게 될 경우 북(조선)이 협상 목적을 성취하려 하지 않으면서 미국과 남(한국)이 양보하도록 계속 밀어부치게 될 위험성이 생긴다. '은근한 무시'라는 대안을 추구할 경우, 북(조선)을 은근히 무시하면 북(조선)이 3-4개월 안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핵물질을 생산하는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조용한 최후통첩'이라는 대안을 추구할 경우, 북(조선)이 미국의 최후통첩을 위협으로 여기게 되므로 유화와 대결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갈 위험성이 생긴다. '중국의 외교'라는 대안을 추구할 경우, 미국이 중국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의 선택'이라는 대안을 마지막 선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 경우 북(조선)은 서울을 겨누고 있는 1만 문의 대구경 장거리포로 공격할 수 있다. 일본의 한 전문가는 이런 점에서 북(조선)은 남(한국)을 볼모(hostage)로 잡고 미국과 대치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적절한 대안이라고 할 수 없다.

미 평화연구소의 대북정책 특별 보고서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앞으로 "북(조선)이 한(조선)반도와 주변지역에 현존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온화하기는 하지만 험악해질 가능성이 있는 안보환경이 제공하게 될 긴장완화, 남북화해, 경제개혁의 기회를 받아들이는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는 수준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지금까지 북(조선)이 거부해오고 있거나,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대안이라고 보기 힘들며, 이미 실패로 판명이 난 기존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미 관계의 매듭을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셀릭 해리슨은 "북한이 평북 대관군 금창리에 핵 시설을 건설하려면 최소한 4년이 소요될 것이다. 시간이 아직 충분한 만큼 미국과 북한은 정치, 경제 및 군사적인 분야에서 '주고 받기'식의 타협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련계 재일동포 군사평론가 김명철 씨는 "미국의 유일한 선택은 북(조선)을 즉시 외교적으로 인정하고, 경제재재를 해제하며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일괄타결"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은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북(조선)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 클린턴 행정부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고심하면서, 몇 가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기존의 대북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98년 11월 12일 전 국방장관 월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1998년 11월 20일 미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과 회담을 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과의 관계 설정에서 중요한 시점에 와있다. 북한은 북미 관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장단거리 미사일에 관해 우려를 갖고 있으며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 정책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미 행정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페리는 제네바 합의를 지키는(salvage) 방도를 연구하도록 요청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페리를 대북정책 특별조정관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대북정책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연방의회의 공화당 세력으로부터 널리 인정받고 있는 강경론자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1999년 1월 12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EIP) 주최로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비확산회의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 샌디 버거는 "미국은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개발·수출을 중단시킬 수있도록 윌리엄 페리 대북 정책 조정관의 지원 아래 기존 정책을 재검토, 북·미 기본협정을 보완하는 대북 장기전략 마련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둘째는, 북(조선)과 직접협상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협상을 통하여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고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북(조선)과 미국이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전망이 그것이다. 미 행정부의 고위관리는 뉴욕에서 12월 11일에 끝난 제2차 협상과 관련하여 이 협상에서 북(조선)이 금창리 현장접근에 대한 현금보상 요구를 철회하고 그에 상당하는 식량지원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며, 미국도 제네바 합의 내용 이외의 새로운 보상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한 강경자세를 버리고 추가로 식량을 지원할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협상의 진전을 이루어냈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미 행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문제 해결의 단계에 있는 것 같다. 의견의 차이가 있으나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현장 접근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난 시기 인도적 목적으로 북(조선)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 바있으며 앞으로 다시 그렇게 할 용의가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폴리(James Foley)도 "협상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커다란 간격이 남아있으나 가능한대로 빨리 그 간격을 좁히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조선)의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부상도 "이제 꼭대기는 뗀 것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망 섞인 관측과는 달리, 워싱턴의 온건파는 강경파가 금창리 문제와 관련하여 내걸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풀기 어려운 과제로 등장한다. 클린턴 행정부의 한 관리는 연방의회가 내놓은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클린턴은 이번에 북(조선)에게 중유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안보 조치권을 동원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연방의회는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지원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번의 금창리 문제가 워싱턴의 온건파와 북(조선)의 협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위기를 넘긴다고 해도, 강경파는 앞으로 북(조선)의 다른 시설을 촬영한 영상자료를 언론에 흘려주면서 핵무기 개발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로써 또다시 정세를 긴장시킬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케네스 퀴노네스는 "북(조선)이 새로운 비밀 핵시설을 건설하느냐 하는 문제는 불가사의한 문제(mystery)로 남아있다"고 하면서 워싱턴의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북(조선)은 워싱턴 강경파가 '새로운 전쟁계획'을 언론에 흘려 자신들을 자극하면서 군사력을 동원한 압박을 가하는 한, 북(조선)을 겨냥하고 있는 알래스카와 괌의 전략공군기지와 오키나와의 해병기지, 그리고 하와이의 태평양사령부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생산을 중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조선)은 워싱턴의 온건파가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를 유지하면서 외화난의 주요 원인을 제공하는 한, 이란, 시리아, 파키스탄, 페루 같은 나라들에 대한 미사일 판매를 추진할 것이다. 미국이 북(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개혁·개방으로 유인하겠다는 변화관리정책을 추진하는 한, 북(조선)은 '미국 주적론'으로 맞설 것이며, 21세기를 앞두고 '광명성 2호'를 발사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워싱턴의 강경파는 제2, 제3의 금창리 사건을 터뜨리면서 대북 공세를 가할 것이고, 온건파들은 시류를 좇아 적절히 대처하며 맞장구를 칠 것이다. 북(조선)과 미국이 정면 충돌할 수 있는 불씨는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다.

(7) 맺는 말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는 오는 3월쯤 연방의회에 제출할 보고서에서 미국은 앞으로 더 폭넓은 외교적, 경제적 대북 접촉을 진행할 것이지만, 만일 이 접촉마저 실패할 경우 북(조선)의 현재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면서 일정 기간 북(조선)을 무시하는 전략을 제시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워싱턴 정치권 내부의 집단 이기주의와 권력투쟁이 정책의 신뢰성과 정합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북(조선)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강경파와 온건파가 북(조선)의 의도와 미래의 불확실성에 관련하여 쓸모없는 논쟁과 갈등을 계속하는 가운데 미국의 대북정책은 멍이 들었고, 결국 실패의 쓴맛을 보고 말았다. 실패한 미국의 대북정책은 지금 미래전망이 보이지 않는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자기의 대북정책에서도 실패를 맛본 미국이 남(한국)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지지·성원하고 있다는 말은 알맹이 없는 외교적 발언이 아니면 자가당착이다.

이제 워싱턴은 새롭고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세워야 한다. 지난 냉전해체기에 '새로운 사고(new thinking)'를 대외정책 수립과정에 들여왔던 워싱턴은 지금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수립하는 과정에도 새로운 사고를 들여와야 한다. 이미 정책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겨준 강온론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사고가 요구된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에서 천명한 '비확산'과 '국교수립'의 원칙을 추구하려 한다면, 강경파의 붕괴설과 대결정책, 그리고 온건파의 연착륙설과 포용정책을 모두 넘어서야 한다. 새로운 사고는 강경책과 온건책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대북정책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북(조선)을 '적대국(adversaries) 범주' 보다 더 심한 '반역국(renegades) 범주'에 넣어놓고 압살하려고 하는 대북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제3의 대북정책을 세우느냐 아니면 관성적 사고에 묶여 실패를 거듭하느냐 하는 문제는 워싱턴의 전략가들에게 달려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클린턴 행정부는 강경파의 대부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연방의회 강경파의 비판과 공세를 피해보려는 정치관행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사고에 바탕을 둔 제3의 대북정책을 수립할 의지가 별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에 남아있는 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대외정책의 한계인지 모른다. (1999년 2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