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통일론과 통일정책: 분석적 이해

 

한익수

미주 평화통일연구소 연구원

이 글은 남(한국)의 김대중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김대중 당선자의 통일 행로를 고찰하고, 새 정부의 통일정책을 전망하는 시론적 작업으로 작성됐다.

김대중 당선자는 남(한국)내에서 정형화된 '통일론'을 주창하고, 이를 일관되게 제기해 온 '통일론자'였다는 점에서, 향후 남(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에 있어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향후 남(한국) 정부의 통일 정책은 한(조선)반도를 둘러싼 주·객관적인 조건과 함께 그가 견지해온 '통일론'이 융합을 일으키며, 한(조선)반도 정세 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0년 대통령 후보로 등장, 1997년 대통령 당선에 이르는 지난 27년간의 정치 행로속에서 변화, 확장되어진 그의 '통일론'은 김대중 새 정부의 통일정책을 전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아울러 제 15대 대통령 선거 전후 그가 보인 통일 정책 공약과 행보는 김대중 새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한 가늠틀로서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의 당선을 둘러싸고 나타난 미국과 북(조선)의 입장은 새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한 이들의 향후 대응 방향을 예고하는 지표로서 의미를 띠고 있어 주요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분석 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김대중 새 정부의 통일 정책과 향후 전망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김대중 당선자의 통일론 행로

1) '3단계 통일론'의 주창 -1970년대 '김대중 통일론(통일구상)'의 등장

김대중 당선자의 통일론 행보는 1970년 그가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남(한국)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훗날 '남북 교류와 공존에 기반한 평화통일론', '4대국 평화 보장론'으로 불리우게 되는 그의 '초기 통일론(통일구상)'을 1970년 10월 6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기자회견에서 최초로 제기하고, 이를 1971년 3월 24일 통일정책 관련 선거 공약으로 공식화시킴으로써 통일론 여정의 첫 발을 내딛는다.

그의 '초기 통일론(통일구상)'은 대통령선거의 낙선 이후 더욱 구체성을 띤 내용으로 심화, 확대돼, 1972년 2월 24일 일본 도쿄 외신 기자 클럽에서 밝힌 '3단계 통일 정책'으로 발전한다. 이 3단계 통일정책은 그해 7월 13일 서울 외신 기자클럽에서 재천명된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의 3단계 통일정책을 "평화적 공존, 평화적 교류의 확대, 평화적 통일의 3단계로 구분"하여 밝혔다.

그는 '평화적 공존'을 "국내적 공존과 국제적 공존"으로 나누고 국내적 공존의 방안으로 "남북간의 부전 선언, 평화협정, 감시 기구의 확대 개편"을 주장했다. 국제적 공존 방식과 관련해서는 "지금도 남북 어느쪽과 군사협정과 이에 준하는 관계에 있는 미국, 소련, 중국,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아시아에 있어서의 4대국에 의한 불가침조약 기운이 성숙할 때"라고 표명했다. 평화적 교류에 대해서는 당시 진행되던 적십자 회담외에 "기자 교류, 문화, 예술, 학문의 교환, 체육 교류, 방송의 상호 청취, 그리고 경제적 교류"를 주장했다.

이같은 그의 초기 통일 구상은 1970년대초 새롭게 조성되고 있던 동북아 정세와 맞물려 형성된 논리였다. 1969년 7월 닉슨 미 대통령이 아시아 방문을 마치고 괌도에서 발표한 '괌 독트린'과 이듬해인 1970년 2월 미의회에 제출한 외교 교서 「70년대 미국의 외교 정책-평화를 위한 신전략 (U.S. Foreign Policy for the 1970s: A New Strategy of Peace)」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닉슨 독트린'은 냉전 체제의 완화, 해소라는 과정, 이른바 '데탕트 시대'의 개막이라는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동을 불러왔다. 이 닉슨 독트린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지상군의 단계적 철수가 발표되고, 1971년 3월 주한미군 제 7사단 2만명의 철수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아울러 중국과 미국은 관계 정상화 회담에 돌입, 1972년 2월 평화 공존과 관계개선을 골자로 한 닉슨, 주은래의 '상하이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같은해 5월 닉슨은 모스크바를 방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 "긴장완화와 전세계적인 안전보장을 위한 국제 협력의 강화"라는 '모스크바정신'에 합의했다.

그는 당시의 정세 변화를 남북간 평화와 공존의 호기로 보았고, 남북 대결과 경쟁정책을 고수하려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극우 보수정책과 선을 긋는 평화 통일 정책을 제창했다. 그의 예견대로 닉슨 독트린은 주한미군의 감축과 함께 한(조선)반도에서 일시적이나마 긴장 완화를 불러왔다.

1971년 9월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개최로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는 1972년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 발표로 절정에 이른다. 그는 7·4 남북 공동 성명과 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7·4 남북 공동 성명은 오늘 세계의 조류인 '현상 인정 아래서의 평화의 방향'과 합치하는 것"이라며, "나는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전쟁지향적이고 폐쇄적인 대 북한정책에 반대하고 평화적이며, 개방적인 정책을 주장해 왔"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는 남북간 평화적 국제 공존의 방안으로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주장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남북간 공방이 돼왔던 '남북 교차 승인 문제'와 '남북 유엔 동시 가입론'은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평화통일 외교정책'이라 명명하며, 내세운 '6·23선언'을 통해 등장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온 것과는 달리 김대중 당선자가 남(한국) 정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제기한 문제들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같은 주장을 "사대주의적인 발언, 위험한 용공적인 발언"이라고 몰아붙이다, 1년 후인 1973년 6·23 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제안자의 선후 관계를 떠나 당시에 제기된 '유엔 동시 가입론'과 '남북한 교차승인론'이 어떠한 논리적 배경을 갖고 형성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은 김대중 당선자의 당시 통일론을 이해하는데 있어 관건이 된다는 점에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유엔 동시 가입론'과 '남북한 교차승인론'은 1969년 로버트 스칼라피노가 처음 주장한 방안으로 그는 분단 쌍방을 하나의 완전한 주권 독립국가로 인정, 상호 승인하고 유엔에도 동시 가입하게 하면,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쌍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서로 독립된 국가 사이의 전쟁이 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교차승인은 북(조선)이 추구해온 '민족해방 논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2국가 2체제의 유엔가입을 실현한 독일의 선례에서 착안된 것으로 '한(조선)반도 문제의 독일식 해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논의는 '두개의 한국(조선)론'으로 공론화되기 시작, 1975년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이 유엔총회에서 본격 제안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분단 쌍방이 별개의 독립 국가로서 서로 공존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승인, 합법화하자는 이 주장은 앞서 지적한 1970년대 초반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정과 깊이 연동된 제안이었다. 퇴조기에 들어선 미국의 동북아 전략 방안으로 떠오른 이 '한(조선)반도 평화 공존론'은 한(조선)반도의 현상 유지와 분단국가 합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 통일의 추진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 당선자의 초기 통일 구상은 위에서 서술한 미국의 한(조선)반도 평화 공존론과 밀접히 접맥하며 형성된 논리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이같은 '평화 공존을 통한 통일로의 점진적 접근'이라는 '통일 담론'은 후술하게 될 그의 20여년간 통일론 행로를 깊숙이 관통하는 핵심 '화두'로 작용하며, 한(조선)반도의 주·객관적 정세 변동에 따라 동심원과 얼개를 형성하여 변화, 확대해나가는 형태를 취한다.

1970년대 초반 그의 통일 구상은 평화 공존과 평화 교류 방안의 제시로 확장되고 있었으나, 평화적 통일 방안과 관련해서는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원칙적인 입장 표명에 그치는 '맹아적 형성기'에 머물렀다.

"한국 통일에는 여러 가지 안이 제기되고 있으나, (중략) 어떤 특정 방안을 고집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믿습니다. (중략) 나의 남북통일의 기본은 '자유 있는 통일을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평화리에 달성한다'는 '자유' '민주' '평화'의 3대 원칙에 의해서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1972년 10월 계엄과 '유신' 선포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3년 7월 통일방안과 관련, 구상의 단계이지만 '공화국연방제' 통일을 처음으로 제기한다.

그러나 새로이 모색되고 있었던 그의 공화국연방제 구상이나, 3단계 통일 정책은 1973년 8월 8일 그의 납치사건, 같은 달 28일 남북 대화의 중단, '유신' 정권하 가택 연금 상태 지속이라는 급격한 내외의 변동을 맞아 동면 상태로 빠져 든다.

2) 공화국 연방제, '선민주 후통일'론- 1980년대 정치 역정기의 통일론

1980년대 그의 통일론은 1980년 투옥, 1982년 12월 미국으로의 망명, 1985년 2월 귀국, 1987년 평화민주당총재로 대통령 출마와 낙선, 1989년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방북에 대한 그의 불고지 혐의 시비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정체기'를 맞는다. 외풍에 의해 강제된 이 '정체기' 동안 그는 자신의 통일론에 의식의 토대를 세우는 내면적 변화를 추구한다.

미국 망명시기였던 1983년 5월 13일 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세미나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통일」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선민주 후통일'론을 제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시 말하지만" "되풀이하여 강조하지만" 등의 강조점을 찍어 가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한국의 민주화"라고 규정 짓고, "그러므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국의 민주 회복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민주 후통일'이라 불리우는 이 '남(한국) 민주화 선행론'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민주'라는 개념을 통일론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의 통일론에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주장하는 '민주'라는 개념은 당시 남(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훗날 북(조선)에 대한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이른바 '햇빛론'으로 확장되는 분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남(한국)의 반독재 민주화와 북(조선)에 대한 반북 반공노선이 접합된 논리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또 그의 '선민주 후통일'론은 당시 정치규제에 묶여 합법적인 정치 공간에서 활동이 금지된 채, '재야'라는 모호한 이름 아래 '일시적 동거 상태'에 있던 '보수 제도 야당'과 '진보적 민족민주운동진영' 간에 빚어지고 있던 이념적 차별성 문제를 명확히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망명지에서 밝힌 '선민주 후통일'론이 남(한국)에서 통일 논의를 둘러싼 '제도 보수 야당'과 '진보적 민족민주운동' 간의 구별선으로 뚜렷이 인식되기까지는 일정한 시기의 경과를 필요로 했다.

1987년 10월 5일 그는 남(한국) 민족민주운동 조직인 민통련 초청 대담에서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라는 '3비주의'를 주장한데 이어, 1988년 9월 진보성향의 월간지 『사회와 사상』 창간호에 「3단계 통일방안의 제창」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당시 진보적 민족민주운동 세력내에서 일고 있던 통일 논의를 아래와 같이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민주발전을 등한히한 통일논의는 환상이요, 낭만에 불과하다. 그러한 순진한 자세는 통일에 성공을 가져오지 못함은 물론 통일을 원치 않는 세력왔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는 통일에의 유일한 지름길이다."

민주와 통일을 선, 후차라는 계단을 세워 단계론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민주'의 개념도 '형식과 절차상의 민주 회복'에 맞춘 그의 사고는 통일을 자주, 민주, 통일의 상호연관 관계에서 파악하고, 민주와 관련 '자주적 민주정부수립'을 당면 목표로 하는 변혁 지향성이 강한 진보적 민족민주운동의 통일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의 1970년대 초기 통일론이 남북 대결에 입각한 극우 '멸공 통일론'과 분리의 선을 긋는 통일론이었다면, 1980년대 통일론은 새로이 부상하기 시작한 진보적 민족민주운동진영의 통일론과 경계선을 뚜렷이 하는 통일론이었다. 결국 그의 1980년대 통일론은 '평화'라는 개념 아래 형성된 1970년대의 초기 통일론을 계승하고, 여기에 '민주'라는 개념을 첨가시키면서 '중도 보수 입장의 통일론'이라는 정체성을 세우게 된다.

1980년대 그의 통일론에 있어 또 하나의 특질은 '공화국연방제'의 제창에 있다. 그는 1987년 8월 15일 8·15기념사를 통해 '공화국 연방제'를 공식 제기하나, 당시 남(한국) 정부와 여당의 집중 공격을 받자 이 명칭을 잠정 폐기했다가, 1991년 4월 '공화국연합'이라고 개칭, 복원시킨다. 이 공화국연방안은 1970년대에 골격을 세운 '3단계 통일정책'의 셋째 단계인 평화 통일 단계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그는 "1단계 평화적 공존의 실현"⇒ "공존 체제가 이루어진 후 또는 공존체제의 합의의 진행부터 2단계인 평화적 교류로의 진입"⇒ "1, 2단계가 실천된 연후 3단계 평화적 통일 단계로 진입"이라는 "점진적, 단계적 통일론"을 계속 전개하며, 그 명칭 역시 1970년대 통일론의 연장선에 선 '3단계 통일방안'으로 명명하고 있다.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 행보가 미·소간의 신데탕트를 불러오며, 소련과 동구에 '개혁', '개방'이 심화되는 등 세기적 변화가 몰아 닥치고, 한(조선)반도에서도 1988년을 깃점으로 노 태우정권의 7·7선언 발표와 북방 정책추진, 민간 통일운동의 고양,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 재개라는 일련의 해빙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그의 통일론은 두 가지 점에서 남(한국) 정부가 수렴할 수 있는 통일론으로서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첫째는 그 당시까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남(한국) 정부의 통일방안에 밑그림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의 공화국연방제안은 남(한국) 노태우 정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통해 등장, 현재까지 남(한국)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자리잡고 있는 '국가연합(남북연합)'수립론의 이론적 토양이 된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북(조선)이 제기해온 '고려민주련방공화국'안이라는 '연방국가'수립론에 대응한 통합형태의 제창에 고심해왔으며, 이같은 방안으로 '공화국연방제'의 골격과 유사한 '남북연합론'을 제기했다.

공화국연방제안은 "연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남북은 각기 독립된 정부(공화국-인용자주)로서의 완전한 자격(군사, 외교, 내치권-인용자주)을 갖고", "중앙에 다분히 상징적인 통일기구를 수립"하는 형태로 노태우정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남북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하면서, "남북이 연합하는 기구를 설치"하는 형태의 '국가연합(남북연합)'수립론과 내용과 성격에 있어 일치하고 있다. 공화국연방제안은 그가 표현하듯 "영연방의 양상과 비슷"한 국가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훗날 그 스스로도 "국가연합식의 공화국연합제 통일"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국가연합 수립론으로 규정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는 3단계 통일방안의 1, 2단계에 해당하는 '평화 공존'과 '평화 교류'가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에 의해 가능한 현실로 다가오게 됐다는 점이다. 1988년 노태우정권이 7.7 선언을 통해 평화적 교류를 제창하고, 북(조선)은 남북 불가침선언을 주장하는 국면과 관련, 그는 "이 두 가지는 병행해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일괄타결 방식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1991년 12월 13일 공표된 '남북(북남)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 현실화되고, 그가 그동안 제기해 온 평화공존, 평화적 교류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그의 통일론은 급속도로 남(한국) 정부의 통일론 안으로 수렴, 정착되는 체제내화의 과정을 밟고, 그의 주장은 현실 구도속에서 가시화되고 있던 반면, 제도 정치권 내에서 벌인 그의 통일 행보는 벽에 부딪혀 제자리 걸음을 거듭한다. 노태우 정권이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를 추진하고, 김영삼 통일민주당총재는 노 정권의 지원하에 1989년 6월 6일모스크바에서 허담 북(조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회담을 갖는 등 여야 공조의 대북 대화가 이루어 지고 있었으나, 그는 1989년 3월 문익환목사, 6월 27일 서경원의원 '방북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통일론 행보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소외'를 겪는다.

3) '3원칙 3단계의 통일방안'의 제창-1990년대 통일론의 정립

독일의 흡수통합과 탈냉전시대의 진입이라는 세계사적 격변을 맞아, 1991년 4월 그는 그동안 전개해 온 통일론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3원칙 3단계 통일 방안'을 발표한다. '3원칙 3단계 통일 방안'이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 통일'을 '3원칙'으로 하고, 1단계 '1연합 2독립 정부의 공화국 연합제'⇒ 2단계 '1연방 1지역 자치정부'⇒ 3단계 '1국가 1정부'라는 경로를 점진적으로 추구해나가는 '3단계 통일'을 의미한다.

이는 1980년대말까지 주장해온 3단계 통일방안과 비교해 볼 때 ⸁1980년대까지 3단계로 명명해온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 통일'을 3기조로 변화시켰다는 점, ⸂종래 주장해 온 공화국연방제라는 명칭을 공화국연합제로 수정했다는 점, ⸃공화국연합(연방)이라는 1단계외에 새로이 2, 3단계를 설정하고, 2, 3단계의 성격과 이행 경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과 관련한 변화는 남북 고위급회담 진전과 남북 교류의 활성화라는 남북 관계의 진전 추세에 의해 평화공존과 평화교류가 현실화되고 있는 점을 감안, 이를 단계에서 분리, '기조'로 변화시킨 것으로 풀이 된다. ⸂에 관련한 변화는 그동안 공화국연방제라는 명칭으로 인해 '좌경'시비를 낳았던 점을 피하기 위해 용어상 전환을 꾀한 측면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써오던 공화국연방제 보다 연합제가 더 정확히 1단계의 통일 내용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연합제로 바꿨다"고, 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이유가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과 관련한 변화는 안팎으로 통일국가형태를 둘러싼 논의가 급진전하고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가시권에 접어들고 있는게 아니냐는 판단에 따라 이전의 통일방안을 체계화, 명료화시킬 필요가 생겼다는 점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같은 변화를 통해 제시된 새로운 '3단계 통일방안'의 성격과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의 통일론을 규명하는데 있어, 열쇠가 되고 있다.

제1단계 공화국연합의 성격은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남(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남북연합과 동일한 '국가연합'에 있다. 그는 이 1단계를 "남북간에 두 개의 공화국이 독립정부로서 현재와 같이 외교, 국방, 내정의 모든 권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권한이 매우 제한된 연합기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합기구의 임무와 관련해서는 "3원칙 즉 평화공존, 평화 교류,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간, 국제간에 파생되는 제반 업무를 처리한다. (중략) 연합의 각종 회의에서의 의결은 남북 대표간의 합의제로 하고 다수결의 제도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새로이 제시한 제 2단계는 연방제 단계로 "1연방과 2지역 자치정부의 체제"이다. 그는 "연방은 현재의 미국연방과 비슷한 것으로 외교, 군사의 권한을 전면적으로 장악하고 중요한 내정에 대해서도 권한을 가진다"며, "지금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도 이 단계에서 검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제 3단계에 대해서는 "통일의 완성 조치로서 3단계의 1국가 1정부 체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밝혀, 체제 통합으로의 귀결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3단계 통일론은 외견상 남(한국) 정부의 국가연합론(제 1단계에 해당)과 북(조선)의 연방국가론(제 2단계에 해당)이라는 통일방안을 접합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선차적으로 국가연합을 수립한 이후, 연방으로 진입하고, 연방을 '1국가 1정부'의 '완전통일국가'로 전환시키는 통일 국가 형태와 체제 통합 경로를 제시하고 있어, 남(한국) 정부의 통일방안과 궤를 같이 한다. 그의 통일방안은 노태우 정권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서 주장하는 '남북연합(완전한 통일국가로 가는 중간 과정의 과도적 통일 체제)⇒통일민주공화국(완전 통일국가)수립'이나, 김영삼 정부가 주장했던 '3단계통일방안'('화해 협력단계⇒ 남북연합단계⇒ 1민족 1국가[자유민주체제]의 통일국가 완성')과 내용상에 있어, 중간 이행단계로 연방제를 설정하고 있다는 차이를 제하고는 기본적으로 성격 일치를 보이고 있다.

남(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능주의적 사회통합론'에 근거, 독립된 두 개의 국가가 공존과 교류, 협력을 확대시켜 사회통합을 이룬 뒤, 이를 기반으로 정치통합을 이룬다는 논리를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권력의 통합을 우선으로 하는 연방주의적 정치통합론과는 상충되는 논리구도를 지니고 있다. 남(한국) 정부나 그가 제시하는 이같은 기능주의적 사회통합론은 크게 보아 두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정치통합보다 장구한 시기를 요구하는 사회통합을 우선시할 경우, 국가와 국가간의 평화적 공존상태는 가능할 수 있으나, 정치통합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 ⸂사회통합은 속성상 대등한 통합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한쪽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제도를 다른 한쪽이 침투, 변질, 흡수하려는 속성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많으며, 이에 대한 통제기구(정치통합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이 속성은 더욱 강화돼, 두 개의 사회 제도간의 격렬한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는 반통합의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갖는 문제는 나라 안팎으로 서로를 국가로 승인한 전제하에서 추구되는 국가연합이 장구한 사회통합을 시도하고, 이를 정치통합으로 가져간다는 논리가 결국 분단국가의 합법화와 통일없는 평화적 공존 상태 유지로 귀결될 수 있다는데 있다. ⸂가 갖는 문제는 사회 통합단계에서 남(한국)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유시장이라는 경제제도와 북(조선)의 '주체 사회주의'를 골간으로 한 정치, 경제제도가 경쟁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자유시장경제체제'에 기반한 1국가 1체제 1정부를 완성된 통일국가로 삼는 남(한국) 정부의 통일론에 있어, 사회통합을 우선시하는 국가연합이라는 과도기 단계의 설정은 결국 자본주의적 체제통합(흡수통합)을 수행하기 위한 징검다리 혹은 유인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의 3단계 통일론은 그가 1993년에 들어와 사회통합이 정치통합으로 연결되는 경로의 문제(공화국연합에서 연방제로의 전환, 이후 완전통일로 이행하는 경로의 문제), 제 3단계 완전 통일국가의 체제문제를 본격적으로 규정함에 따라, 앞에서 지적한 문제점중 ⸂의 사항과 깊게 결합하게 된다. 앞서 살펴본 그의 1970년대-1990년대초까지의 통일론이 분단체제하 평화 공존에 무게 중심을 둔 ⸁의 관점에 가까운 논리였던 반면, 1993년 이후 그가 밝히는 3단계 통일론은 ⸂의 문제점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데, 논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91년까지 그는 제 1단계 공화국 연합⇒제 2단계 연방제로의 이행 경로와 관련, "공화국 연합제를 통해서 상호 신뢰와 교류 협력 그리고 동질성이 증대되면 이 단계(연방단계-인용자주)로 들어 갈 수가 있는 것", "(연방제는-인용자주) 양공화국의 국민들이 분단과 상호 적대 행위로 인해 상실된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여 상호 수용한 사회를 이루었을 때"라는 입장을 전개했다. 제 3단계의 완전 통일의 단계에 대해서도 입장 유보의 태도이거나 차세대 결정론이라는 입장에 서서 "궁극적인 정부형태는 그때에 결정될 것", "마지막 단계인 1국가 1체제는 20년 혹은 30년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이 결정할 문제입니다.(중략) 우리는 현실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하고 다음 것은 다음 세대에게 맡겨야"한다고 밝힌 바 있다.

1993년 그는 입장 선회를 시도, 북(조선)의 '개혁', '개방'이 연방제 진입의 전제임을 주장하며, 이에 앞선 공화국연합이 북(조선)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과도 단계임을 분명히한다.

"북한이 자유민주주의적인 다당제를 허용하고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시장경제 원리를 받아들여야만 연방제가 가능합니다. (중략) 그러나 북한이 경쟁을 인정하지 않는 독재를 주장하고 시장경제를 용인하지 않는 한 연방제는 불가능합니다."

통일국가의 체제와 관련해서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두축이 되는 사회", "21세기 세계사적 조류에 따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사회복지를 구현한 체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일민족 일국가"로 규정, 통일국가의 체제가 자본주의체제로 되어야한다는 자본주의적 통합방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4) 아태평화재단의 설립-'통일문제 전문가'로의 변신

그가 이처럼 자신의 통일론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1993년은 '통일문제 전문가'로의 변신이라는 또다른 변화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1992년 12월 19일 대선 개표결과가 나온 새벽,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1995년 7월 13일 다시 정계복귀 선언을 하기까지의 2년 반 기간동안 '통일문제 전문가'로서의 행보를 줄달음쳐 나간다. 1993년 12월 창립된 '재단 법인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 Kim Dae-jung Peace Foundation for the Asia-Pacific Region)'은 그의 통일 활동의 전진기지이자, 국내외 통일인맥 형성의 창고로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아태평화재단의 이사장으로서 그는 1994년 한해 동안 남(한국)내 통일관련 강연에 20여 차례이상 연사로 등장하고,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홍콩, 필리핀, 미국, 캐나다, 러시아, 중국을 방문, 초청강연의 무대에 서는 왕성한 해외 활동을 벌인다.

아태평화재단을 통한 통일인맥 형성은 그에게 있어 '동교동 가신'과 '비판적 지지론의 재야인맥'을 중심으로 그동안 형성돼왔던 정치인맥과는 성격이 다른 '보수적 외교, 안보, 통일 인맥'과의 접맥을 가져왔다.

국제 사회의 대외창구도 1980년대 개설된 미국 워싱턴 디씨 소재 인권문제연구소 외에 아태평화재단 미주지부가 개설돼, 종전의 '인권 인맥'외에 한(조선)반도 정책 관련 전·현직 관리와 학자, 관련 기관으로 국제 교류의 폭이 확산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 기간중 그는 대북정책론으로 이른바 '햇빛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한다.

"즉 이솝이야기의 원리다. 바람과 태양이 서로 행인의 외투를 벗기는 경쟁을 해서 결국 태양이 이겼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태양의 정책을 썼다.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경제협력, 문화교류, 관광등 모든 접촉을 하고 돈도 빌려 주고 함으로써 개혁의 바람, 자유의 바람이 내부에 스며들게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저 거대한 공산제국이 밖으로부터 총 한방을 쏘지 않고 안으로부터 국민의 어떠한 반란 행위도 없었는데 소리없이 침몰하고 만 것이다."

그의 햇빛론은 한(조선)반도에 조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정세인식과 연동돼 있었다.

당시 그는 "이제 핵문제만 해결되면 남, 북한관계 그리고 북한과 서방세계의 관계는 급속히 진전될 것"이며 "경제 협력을 비롯한 각종 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북한의 개방과 국제적 발전관계의 시대가 점차 전개되어 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통일은 "당위를 넘어 가능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으며, "우리는 1993년 말 1994년 초까지 핵문제를 해결하고 1994년 말 또는 1995년 초까지 국가연합방식의 통일에 대한 협의와 국내적 조치를 취하면 해방 50주년이 되는 1995년 까지는 능히 제 1단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희망에 찬 낙관론을 펼쳤다. 이 낙관론은 그의 북(조선)에 대한 상황 인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는 북(조선)이 "체제에 올 상당한 영향을 각오하고 서방국과의 국교를 서두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북한의 경제위기가 너무도 급박하기 때문"이며, "둘째, 어차피 북한이 개방으로 가는 것이라면 김일성이 자기 당대에 자신의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관계를 정상화하여 주자는 생각"이 있고, "셋째로 지금 북한이 중국의 경험을 보니까 사회주의를 안바꾸고도 개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으로 배우고 고무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조선)은 "유엔에 가입하고, 교차승인하고 남한과 합의서를 채택하면, 북한에 대해서도 남한을 비롯한 서방국가가 이렇게 교차승인해 줄 것을 기대하고 경제협력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이 안되자 "마지막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 NPT탈퇴를 선언하고 "너죽고 나죽자하고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이처럼 북(조선)이 "마지막 절망속에서", NPT 탈퇴를 선언했지만, 이 핵문제가 타결되면, 결국 자신이 주장해온 공화국연합제 방식의 통일시대가 열릴 것을 아래와 같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밝히고 있다.

"김 주석은 첫째 자기가 죽기 전에 저의 1단계 통일방안인 '공화국 연합제' 단계라도 통일되는 것을 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은 저의 공화국 연합제 통일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혀왔습니다. 외교부장 김영남도미국의 세리그 해리슨이란 언론인에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중략) 국가연합 통일은 이제 남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통일방안입니다. 북한은 지금 연방제 통일안을 슬그머니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 인식을 배경으로 그는 1993, 1994년 핵문제를 둘러싼 긴장의 해법에 있어 '일괄타결'을 주장하고,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을 측면 지원하는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핵문제의 극적인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1994년 5월 12일 워싱턴 디씨 소재 전국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에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대한 충언」이라는 강연을 통해 지미 카터를 방북 특사로 보내 핵문제를 일괄타결하자고 주장했다. 김대중-지미 카터 간의 공조를 통해 진행된 지미 카터의 1994년 6월 15일 방북은 결국 극도로 긴장됐던 한(조선)반도 상황을 일시에 해빙 기류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2. 15대 대선시기 통일정책 공약과 대선 직후 동향

1) 통일 정세관

핵문제의 해결이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몰고 와 남북 국가연합방식의 통일을 가능케할 것이라는 그의 정세 전망과는 달리 1994년 하반기 이후 1997년까지 조미, 조일관계의 진전과 남북 관계의 교착이라는 '예기치 않던' 국면으로 한(조선)반도 정세가 흘러가자, 그는 「남북문제와 한반도 통일방향」이라는 글을 통해 새로운 통일 정세관을 제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철저한 안보 태세를 갖추고 동시에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는 새로운 햇빛정책(이른바 '북한 관리론')을 강조한다. 그는 남북 관계의 교착과 관련, 남북 정부를 동시에 비판하는 양비론적인 입장을 전개한다. "남한 적화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는 점이 오늘의 현실을 만들었지만"이라고 북(조선)의 책임을 우선 밝힌 뒤, 이어 남(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붕괴정책"을 펼치는데 이같은 "북한 멸망 기대론"은 "민족이 공멸하는 위기"를 초래하거나, 대규모의 "난민 유입부담"을 안을 수도 있는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며, 이같은 김영삼 정부의 정책은 "통일 철학 부재로 총체적인 실패"에 직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북한을 연착륙시켜 개방을 유도하고 제 2의 중국을 만드려 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중국 포위정책"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북(조선)은 "김일성이 죽기전에 정해놓은 정책" 즉,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을 "북한의 강경, 온건파가 일치"해서 추구하고 있어, "북한과 미국은 서로를 이용"하며 관계개선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일본 역시 "한국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보조를 맞추어" 나가고 있어, "미국과 북한이 국교정상화를 통해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면 일본은 바로 대북 국교정상화로 나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러시아의 경우도 한국에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등 남(한국) 외교는 "고립의 길로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북(조선)이 대남 정책과 관련해 "(강경, 온건파간에-인용자주) 차이가 있다"며, "온건파는 '미국과 일본과 손 잡고 잘 돼가려면 남한하고 잘 지내야 되지 않느냐'라는 주장이고, 강경파는 우리를 잡아 먹으려고 하고 흡수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손을 잡느냐, 잘못 개방해서 우리가 먹히면 어떻게 하는냐, 그렇게는 못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고, '강경, 온건파의 존재와 이들 간의 정책 대립론'을 펴고 있다.

그는 이같은 현실에서 "1971년 닉슨이 모택동을 만난 이후 햇빛 정책을 취해서 중국을 개방"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햇빛 정책을 취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하고 베트남이 친미국가"가 됐는데, "북한도 마찬가지"이며, "북한을 개방시키면 제2의 중국이 될 것"이라고 그는 전망한다. 그의 논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조선)에 대한 '개혁', '개방' 유도는 결국 점진적인 체제 변질을 불러 오게 될 것이며, 통일은 이같은 체제 변화이후 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선 안보와 개방, 후 통일'(혹은 선 북의 '민주화', 후 통일)이라는 사고로의 전환을 표명한다. 그래서 그는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북한은 개방하면 자유경제를 할 것이며, 그러면 돈벌이하는 사람이 생기게되고 돈벌이하는 사람은 중산층이 된다. 이 중산층은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게되고 선거에서 정권을 교체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남한하고도 차이가 없는 체제가 만들어 질 것이다. 그동안 북한과 끊임없이 교류를 추진하면 된다. 통일은 서두르면 안되며 남북문제에서 승패를 따져서는 안된다. (중략)승패는 이미 떠났으며 공산주의는 세계적으로 패배했다"

그는 한편으로 "4대국의 협력속에 북한을 개방시켜 제 2의 중국을 만들고 민주화시켜야 한다"며,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미, 일, 중, 러시아 등의 6자가 동북아 협력체를 만들어 상대방의 안전을 보장하고 협력해야"한다고 동북아 6자 안보협력체 구성를 촉구하기도 했다.

2) 김대중 당선자가 보인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 '전폭 수용'과 미국의 반응

(1) 밀월기에 접어든 '한미 공조'

과거 닉슨이 추구한 '데탕트 정책'을 모태로 하고, 현 미국의 연착륙 정책과 연동된 '햇빛 정책' 을 주장해 온 그는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 19일 당선 기자회견과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직접 통화, 보스워드 신임 주한 미대사와의 만남 등을 통해 미국의 대한(조선)반도 정책을 전폭 수용할 것임을 공표했다.

이날 그가 밝힌 미국의 대한(조선)반도 정책에 대한 전폭 수용 내용은 당면 핵심현안이 되고 있는 '한미 경제관계' 외에 대북 정책과 연계된 '경수로 지원 사업의 원만한 이행', '4자 회담의 추구', '한미 군사동맹의 적극 강화' '남북대화 및 남북 정상회담 추진'등으로 집약된다.

이같은 그의 입장 표명과 관련, 클린턴 미 대통령은 1997년 12월 19일 당선 축하 전화를 통해 김대중 당선자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마이클 매커리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낮 정례 '브리핑'을 통해 당선 축하와 함께 "우리는 한국과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제네바에서 진행중인 4자회담을 위해 공동 협력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한국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았다. 같은 날 제임스 폴리 국무부 대변인 역시 낮 정례 '브리핑'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한국 민주주의 확립을 공고화한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논평한 뒤, "김 당선자는 강력한 한미관계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많은 친구를 갖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김 당선자와 훌륭하고 생산적인 협력관계를 고대하고 있다", "4자회담에 대한 한국의 공약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우리는 예상하지 않는다. 김 당선자는 이미 4자회담을 지지를 선언했으며 우리는 이에 매우 고무되고 있다", "남북대화와 관계발전은 4자회담의 틀안에서 성공의 전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김 당선자의 남북대화 추진에 어떤 우려도 갖고 있지 않다"는 발언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갖는 정치적 의미, 향후 대북 한미공조의 전망 등을 밝혔다.

공식 논평을 통해 드러나는 차분한 논조의 전망과는 달리 언론에 비쳐진 미 행정부내 관리들의 반응은 향후 긴밀해질 한미공조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차 있다.

뉴욕타임즈는 1997년 12월 20일자 기사에서 익명의 미 행정부 고위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김대중 당선자에 대한 미 행정부의 기대감을 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미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우리가 김영삼 대통령과는 불가능했던 (보다 긴밀한-인용자주)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밝혔으며, 또다른 미 행정부 관리(백악관의 한 외교정책담당관리)는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당선 때 처럼 경이적인 일이며, 우리는 북한을 다루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을 일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얻었고, 한미 양국의 역동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할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미국내 언론과 한(조선)반도 전문가들의 반응 역시 김영삼 정부 하에서 빚어졌던 한미공조의 삐걱거림에서 벗어나, 김대중 새 정부 하에서는 한미공조가 순항을 거듭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한미 공조하에서 진행될 남북 대화에 대해 기대에 찬 전망을 내보이고 있다.

김대중 당선자에 대한 미국의 반응중 이례적인 부분은 그의 사적인 면모에 해당하는 그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는데, 미국의 일부 관리나 언론들은 그가 미국에 2년 3개월 이상 체류했으며, 미국 주요인사와 교분이 깊다는 '지인론'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나아가 미국의 주요 언론과 전직 대한(조선)반도 정책관리들은 김대중 당선자와 미국과의 관계를 '은인론'이라는 차원에서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향후 한미 공조관계가 '구원자'와 '피구원자'간의 우호 동맹 관계로 나가야 함을 은연중 암시하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일련의 보도와 발언들이라 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리처드 홀브룩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수석부차관보는 뉴욕 타임즈 1997년 12월 24일자 공동 기고를 통해 지난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형이 선고됐던 김대중 당선자는 당시 카터 행정부의 노력과 로널드 레이건 차기 행정부간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사형집행의 위기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당시의 '비사'를 공개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997년 12월 29일자 보도를 통해 "김 당선자는 지난 1973년 납치사건 당시 바다에 수장될 위기를 맞았으나 미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의문의 조명탄이 발사돼 목숨을 건직 적이 있다"면서 "이번에는 클린턴 행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12개 선진국을 설득, 1백억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미국에 의해 두 번째로 구원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김 당선자 역시 이에 화답하듯 1997년 12월 29일 주한 미군 2사단을 방문, "개인적으로 73년 납치사건때도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80년 사형집행 중단때도 미국의 도움을 받는 등 공사로 미국과 깊은 관계가 있고 감사하는 심정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등, 새로운 한미 공조관계에 있어 '은인론'은 한미 양국간의 공동 교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2) 대선 시기 김대중-미국과의 교감

김대중 당선자에 대한 미국의 '지지' 시각은 남(한국) 대선 경선이 본격화되고 있던 1997년 10월 중순부터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어느 특정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미 국무부의 공식 발언과는 달리, 김대중 후보에 대한 미국 '지지' 입장은 미 행정부내 복수 익명의 고위 관리들 발언을 종합해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지 1997년 10월 13일자 기사를 첫 시작으로 미국 언론에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날 기사를 통해 "미국의 일부 관리들은 오는 12월의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할 경우 남북간의 직접 대화와 관계확대를 위한 새로운 기회가 조성될 것으로 기대, 한국내 정권교체를 열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뒤를 이어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1997년 10월 15일 보도를 통해 "김대중씨가 한국 선거에서 선두주자로 등장한 것은 한국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김대중씨가 차기대통령이 될 태세를 보이고 있다"고 당선 가능 예측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이 기사에서 "닉슨의 데탕트 정책이 북한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본인의 대북정책은 김영삼대통령의 강경노선보다는 클린턴 미정부의 정책과 근접해 있다"는 김대중 후보의 발언을 게재하는 등 김대중 당선자의 통일 정책을 아울러 소개했다.

이같은 미국 언론의 보도에 대해 남(한국) 정부는 민감하게 대응했다. 남(한국) 정부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와 관련, 유명환 외무부 북미국장은 제임스 위틀록 주한 미대사관 정무참사를 외무부로 불러 기사에 대한 사실 규명과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해명을 요구했다.(『한겨레신문』, 1997. 10. 14.) 주미 한국대사관은 김준길 공보공사 이름으로 쓴 워싱턴 포스트지 1997년 10월 27일자 기고문을 통해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한국 국내정치에 엄격한 중립을 유지해왔다. 한미 양국간에는 대북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심각한 균열도 없다. 한국의 강경입장이 4자회담의 진전을 가로 막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책이 새 정부 출범으로 쉽게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북정책이 한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반박을 했다.

남(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워싱턴 포스트지 제프리 스미스기자가 쓴 이 기사가 "미국무부의 '의도적인 흘리기'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던져주고 있다는데 있다.(『중앙일보』, 1997 10. 14.) 제프리 스미스기자는 이 기사에서 1995년 10월경 한미간에 오고 간 비밀 외교 문서를 공개, 익명의 관리가 한미관계에 정통한 미 국무부 관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비밀 외교 문서의 내용은 임성준 당시 외무부 미주국장과 토마스 허바드 당시 미 국무부 아태 담당 부차관보 사이에 오고 간 전문으로, 남(한국) 외무부와 미 국무부가 1996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서로 공조해 선거에 개입한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임 당시 미주국장은 "김영삼 대통령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국내 보수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북미간 연락사무소개설을 한국 총선전에 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이에 미국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남(한국)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국의 고위 관리가 익명으로 남(한국) 김영삼정부의 대북 강경노선을 비판하고, 정권교체를 바란다고 피력하며, 비밀 외교 문서 내용을 기자에게 알린 것은 의도성이 짙어 보인다.

이같은 미국 언론의 보도는 곧 진화되는 듯 했으나, 남(한국)내 일부 언론이 미 언론사의 논조의 연장선에 서서 '미국의 김대중 후보 지지설'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 '설'에 대한 공신성이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시사저널은 '미국은 DJ의 든든한 후원자?' 라는 제하의 1997년 10월 30일자 기사를 통해 △미국의 대한(조선)반도 정책관련 주요 관리들이 김대중씨와 자주 비밀 접촉을 벌이고 있으며, △대외문제에 관한 한 미국 정부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해 온 미국 언론들도 김중중씨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내보내고 있으며 △김대중씨에 대한 색깔 논쟁을 희석화 시키는데 미국이 지원하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친다. 이와 관련 주한 미대사관은 제프리 섹스틴 공보관 대리 명의의 반박 기사(『시사저널』, 1997. 11. 6.)로 이같은 '설'의 증폭을 제어하려고 시도한다.

언론을 통한 지지설 확산은 1997년 11월 중순을 넘기면서 미국내 주요 인사의 남(한국) 방문과 맞물려 '지지 확인'이라는 기정 사실로서 자리잡게 된다. 조지 스테파노플러스 전 미 백악관 대변인의 1997년 11월 중순 남(한국)방문은 클린턴 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미묘한 시기에 방문해, 공식 강연회장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개인적 지지의사를 밝히고, 김대중 후보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든 자서전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선거 중립'의 틀을 깬 계산된 돌출 행동이었다.

선거 막바지인 1997년 12월 16-18일에 접어 들어서는 레이니 전 주한 미대사가 급거 방한, 김대중 후보와 면담하는 등 김대중-미 정부 간의 교감이 더욱 진하게 드러나는데, 이에 앞서 1997년 12월 초 김대중 후보는 안보관련 방미 대표단을 파견, 미 정부 관리들에게 '김대중 새정부의 안보전략'을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디펜스 뉴스』는 1998년 1월 5일자 보도를 통해 "김대중 후보는 김홍구 예비역소장을 단장으로 한 3인을 워싱턴 디씨에 파견, 찰스 카트먼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를 비롯한 미 행정부 관리와 안보 전략가들에게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경우의 안보 관심 사항을 전달하고 한-미동맹 강화를 다짐했다"고 전했다.

3) 미국의 대북 핵심 현안에 대한 김대중 당선자의 입장

미국은 연락사무소개설 및 관계개선 문제, 유해 회담, 미사일 회담과 이들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조미(준)고위급회담이라는 조미 직접 대화 얼개와 한미 공조를 토대로 전개되는 대북 접근이라는 또다른 얼개를 갖고 대북 정책을 구사해왔다. 여기서 한미 공조를 토대로 한 얼개는 "경수로의 원만한 이행", "4자 회담의 추구", "한·미·(일) 동맹의 강화", "남북대화및 남북 정상회담 추진"등이 해당된다.

(1) 조미관계의 '뇌관' 경수로 지원 사업 이행

위 사안들중 미국의 대북 정책에 있어 사활이 걸린 당면 핵심 현안은 경수로 지원사업의 이행에 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1997년 11월 25일 집행국 이사회의를 통해 경수로 건설에 소요되는 개략사업비(ROM)를 51억 7천만달러로 확정 지은 뒤, 1997년 12월 8일 이를 분담하기 위한 집행국 이사회의를 개최해 분담금 논의에 들어 갔으나, 한국의 "경제 위기 때문에 분담금 비율 결정에 실패"했다.(『문화일보』, 1997. 12. 9.)

이에 따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1998년 상반기중 분담금 협상을 매듭짓기로 방침을 세우고 협상타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남(한국)측은 경수로 총 사업비의 70%정도를 분담하는 것으로 잠정 결정된 상태로 알려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 1. 5.) 일본은 총 사업비의 20% 혹은 10억달러중 적은 선에서 결정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우고 있어,(『조선일보』, 1997. 8. 15.) 이같은 추산을 근거로 한다면 남(한국)은 36-37억 달러를, 일본은 10억 달러를 각각 부담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문제는 경수로 지원 사업 분담금에 대해 김대중 당선자측은 분담금 액수 절충 시도라는 입장을 전개해 미국과 미묘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게다가 추락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남(한국)의 경수로 지원 분담금 부담에 차질이 예상되는 등 경수로 지원 사업에 난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당선 직후 기자 회견과 클린턴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북한 경수로 지원도 차질없이 진행할 것"을 약속하고, 대선 170대 핵심 공약에서도 이를 명시하는 등 기조상으로 볼 때 경수로 지원 이행에 한미간 이견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원금 분담과 관련한 각론에 들어 가서는 한미간에 이견이 상존하고 있다. 그는 대선 시기인 1997년 11월 17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선 후보 합동 토론회에 참석, "경수로는 우리 외교 실패의 표본"이라며, "북핵문제는 우리 문제라기 보다는 미국문제"라고 주장하고, "미국이 경수로 비용을 부담해야 했는데 우리가 잘못해 뒤집어 쓴 것"이라고, 남(한국)이 경수로 지원 분담금을 중심적으로 부담해야하는 점을 비판하고 나섰다.(『조선일보』, 1997. 11. 17.) 그는 또 "미국, 일본, EU 등에 비용분담을 적극 요구해야"한다며, "중유 공급비용을 포함한 총 공사비의 50%선을 한국이 부담하는 선"에서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최근 김대중 당선자측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남(한국) 외무부에 외환위기 타개책의 일환으로 경수로 분담금의 경감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청(『조선일보』, 1997. 12. 30.)하는 한편, 공개적으로 경수로 비용 분담에 남(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맡게 된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인수위원회측은 1998년 1월 5일 장진섭 경수로 사업단장을 불러 경수로관련 특별보고를 청취했는데, 이에 앞서 "경수로 사업의 참여 결정 배경과 비용분담 협상, 사업일정등 경수로 협상상의 문제점을 파헤칠 것"이라고 사전에 발표했다. 인수위원회측은 또 "국내 경제가 초비상 상황인 점을 감안할 때 미국측도 비용을 분담해야한다는 입장을 정부측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중앙일보』, 1997. 1. 4.) 게다가 인수위원회측은 지난 1994년 가을 미국과 북(조선)이 핵문제를 일괄타결할 때 경수로 비용분담에 관해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공개하라고 청와대에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1998년 1월 10일 "정상간에 오고간 편지는 양측의 명확한 공개합의가 없는 한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특히 경수로 비용 분담문제는 지금 한-미-일 3국간에 협상이 진행중인 만큼 공개할 수 없다"(『조선일보』, 1998. 1. 10.)고 거부하는 등 김영삼 정부와 차기 김대중 새 정부 간에 경수로 분담금 책임 소재를 놓고 서로 공을 떠 넘기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미국은 이미 1997년 하반기 부터 전 현직 미 국무부 관리들의 입을 통해 한푼도 제공할 수 없다는 요지 부동의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스탠리 로스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9월 11일 남(한국) 외무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경수로 비용에 드는 비용은 미국이 부담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동아일보』, 1997. 9. 13.) 리처드 크리스텐슨 주한 미대리대사는 1997년 10월 23일 한미우호협회주최 강연회에 참석, 「한미간의 장단기 과제」라는 주제의 강연을 한 뒤, "한미 양국은 94년 가을 중유비용은 미국이, 경수로 비용은 한국과 일본이 부담하기로 잠정 합의했고, 미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중앙일보』, 1997. 10. 23.) 로버트 갈루치 전 미 핵대사(조지타운대 외교학장)는 1997년 11월 3일 쌍용증권에서 열린 조지 타운대 한국 동문회에 참석, 「한국 정치의 혁신」이라는 강연 연설에서 "미국도 경수로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의회로 부터 관련 예산을 승인 받는데 실패했고, 현재 대북 중유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며, 미국의 비용부담이 불가능함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제네바 합의가 이뤄지기전에 한미일 3국은 한국이 한국형 경수로를 채택하는 댓가로 경수로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고, 일본도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맡기로 합의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중앙일보』, 1997. 11. 3.) 토머스 폴리 주일 미대사는 1997년 12월 17일 일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의 경제 위기를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까지 대북한 중유제공을 도맡는 등 가장 많은 부담을 해왔다"고 말해, 미국이 경수로 분담금을 낼 용의가 없음을 우회적으로 밝혔다.(『중앙일보』 1997. 12. 17.)

위 미국 전 현직 관리들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남(한국)이 '한국형 경수로'를 채택하는 대가로 경수로 사업 비용을 대부분을 제공키로 이미 약속한 바 있으므로 남(한국)은 이를 이행해야 하며, 미국은 의회 승인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유 공급외 비용 분담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공화당 보수세력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미 의회는 경수로 지원 사업은 물론이고, 미국이 지원하기로 약속한 대북 중유 공급 조차도 제동을 걸기도 하는 등, 조미 제네바 합의 이행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미국은 지난 1997년 7월 미 의회가 대북 중유 공급 1997-1998년 회계연도 예산 3천만달러를 배정하지 않아, 대북 중유 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남(한국)과 일본에 중유 분담을 요청한 바 있다.(『중앙일보』, 1997. 7. 22.) 이외에도 미국의 경수로 지원금 지출을 불가능케하는 법적제약 사항이 있는데, 미국의 경수로 지원금 분담은 코콤(COCOM)의 규제 사항, 적성국 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TWEA), 수출 관리법(Export Administration Act; EAA)의 저촉 사항에 해당된다.

이처럼 미국의 지원금 분담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데, 주도적으로 제공을 약속한 남(한국) 역시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해 분담금 부담이 벅찬 실정에 직면하고 있어 경수로 지원 사업 분담금 문제는 심각성과 복잡성을 더 해 주고 있다. 잠정 합의된 37억 달러에 달하는 남(한국)의 분담금은 사실상 이행이 불가능한 액수라 할 수 있다. 남(한국)이 부담해야할 경수로 비용은 남(한국)의 보유 외환 고갈과 지난 1년 사이 원화 대 미화 환율의 2배 절상 요인을 감안해 볼 때 경비에 대한 부담도가 최소 2배이상 껑충 뛰어 올랐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융통성을 발휘, 남(한국) 분담금중 원화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원화로 부담할 수 있도록 조건을 완화해주더라도 경비 제공의 어려움은 마찬가지인 형편이다. 당초 남(한국) 정부가 주장한 '한국형 경수로'와는 달리 실제 경수로의 핵심 부품들은 미국 제품들로 구성된 '미국산 조립형 경수로'로 이들 핵심 부품 경비는 모두 달러로 지불되어야 하고, 원화로 대체할 수 있는 분담금은 남(한국)의 노동력과 일부 기자재 등에 불과한 실정이다. 결국 남(한국)의 경수로 분담금 문제는 제공의 의지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낼 수 있느냐하는 부담 능력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외형상 순조로운 진전을 거듭하고 있는 경수로 지원 사업은 향후 조미관계의 진전 향방에 있어 예기치 않은 국면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은 '밑에 용암이 흐르는 활화산'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데 조미 제네바합의서와 클린턴 미 대통령의 '담보서한'을 통해 보장한 경수로 사업이 지원금 분담 문제로 지연되어 "2003년까지 완공"이 약속 불이행의 상황에 빠져들 경우 미국은 제네바합의의 핵심 사안을 지키지 못한 결과를 낳게 돼, 북(조선)의 외교 공세에 휘말려들고, 미국이 추진해 온 일련의 대북정책에 파탄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998년 1월 13일자 보도에서 "한국은 금융위기로 인해 경수로 비용 지불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며, 이처럼 경수로 비용에 차질이 생길 경우 미국과 북한간의 핵합의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는 1997년 12월 17일자 보도를 통해 미의회 의원들이 금융위기에 처한 남(한국)으로 인해 경수로 지원사업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미 의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도널드 그레그는 "김대중씨가 유세과정에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의 활동과 관련, 경수로 건설 경비 부담 재협상 운운한 대목에 관해서는 많은 나라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의 대북관계에 있어 가장 중시되고 있는 분야가 이 분야인 만큼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게 제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중앙일보』, 1997. 12. 21.)

결국 경수로 지원 사업은 한미 양국 중 어느 누구도 사실상 이 경수로 분담금을 적극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한미 양국의 내부 사정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수로 지원 사업은 한미 양국이 기대했던 '트로이 목마'가 아니라 공포의 '판도라 상자'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위의 정황으로 볼 때 김대중 당선자는 미국의 주장을 수용, 36-7억 달러에 달하는 분담금을 떠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남(한국)내에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어날 것이 분명해, 김대중 당선자 진영은 1998년 2월 경수로 분담금 협상을 앞두고 심각한 진퇴 양난의 고심에 빠져 들고 있다.

(2) 4자 회담을 둘러싼 한미 공조의 향방

대선 시기 경수로 문제와 함께 김대중 후보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사안은 4자회담이었다. 그는 대선 시기 4자회담에 대한 발언을 거의 하지 않는 등 이 사안에 대해서 간과의 태도를 보여 왔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진영이 대선 공약중 '남북간 긴장완화와 신뢰조성을 위한 실천 사항'에서 가장 우선 순위로 제시한 내용이 "4자 회담의 지속 추진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킨다"는 것인 반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공동 공약으로 제시한 170대 핵심 공약 사항에는 4자 회담에 관련한 내용이 누락돼 있다. 결국 그에게 있어 4자회담의 중요성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듯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는 도리어 종전 그가 주장해 온 "남, 북, 미, 중, 일, 러의 동북아 6자 안보협력체 구성"을 다시 꺼내면서, "남북한이 주축이 되고 미, 중, 러, 일등 국제 사회가 보장 또는 지지하는 항구적 평화체제를 확립"하겠다는 내용을 170대 대선 핵심 공약사항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는 대선 기간 중 4자 회담은 남북 대화와는 별도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에 있어서 주변국의 협력을 얻는데 필요한 포럼"이라고 밝히고 있어, 4자 회담이 남북 대화의 보완물이라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문화일보』, 1997. 12. 6.)

그러나 그는 1998년 12월 19일 대통령 당선 기자회견, 클린턴 대통령과의 통화를 통해 4자 회담의 지속적인 추진을 공표하는 등 입장 선회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김대중 당선자측의 정권 인수위원회는 최근 4자회담에 대한 남(한국) 정부 대책회의에 인수위원의 참여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 참여 입장을 굳히고 있다. 이같은 그의 입장 변화는 4자 회담에 대한 시각 변화라기 보다는 남북간 첫 접촉 무대로서 4자회담 적극 활용이라는 단기적 효과를 계산한 적극성이 아니냐는 추정을 낳게 하고 있다. 1998년 2월 중순 베이징에서 열리게 되는 2차 본회담의 특별소위원회 회의와 1998년 3월 16일 제 2차 본회담 제네바 개최 예정등 4자회담 개최 일정이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 공식 취임 전후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제 2차 4자 본회담은 김대중 새 정부와 북(조선)이 최초로 공식 석상에 마주 대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향후 남북관계의 향방을 상호 탐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4자 회담에 대한 그의 시각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해온 '4자회담을 통한 남북 대화의 실현'이라는 '대북 우회 접근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그는 후술하게 될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을 통한 남북 대화재개라는 '대북 직접 접근'을 기본으로 하고, 4자 회담을 보조축으로 삼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같은 대북 접근법은 4자 회담을 통해 북(조선)을 남북 대화의 자리에 끌고 온다는 남(한국)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이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한(조선)반도 문제에 대한 남(한국) 정부의 발언력을 약화시켰으며, 남북 대화 교착을 심화시켰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최근 4자 회담을 둘러싸고 각 당사자 간에 일어난 미묘한 기류속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1996년 4월 클린턴 미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제주공동선언'을 통해 등장한 4자회담은 남(한국)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북(조선)이 취하고 있던 일련의 정치 공세-중립국 감시단 철수를 통한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 판문점 시위, 조미 평화협정에 선행한 잠정협정제안-에 대응하기 위한 제안이었고, 조미 관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는 경색되고 있는 점을 감안, 조미관계의 일방적인 진전에 제동을 거는 한편, 남북 대화를 간접적으로 나마 유도하기 위한 틀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문제는 북(조선)이 이 4자회담에 참여를 수락하고, 본회담이 개막되게 됨에 따라 남(한국)정부는 4자 회담을 둘러싸고 깊은 논리적 모순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남북 대화를 유도하기 위한 4자 회담 개최"라는 논리에 서게 되면, 4자 회담은 추진되나 남북 대화는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될 경우 이를 타개할 대안책이 없으며, 역으로 남북간 직접 대화가 이루어질 경우에는 4자 회담의 의미는 상실의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한국) 정부는 4자 회담을 적극 추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4자 회담을 접어 넣을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한, 미 공조라는 단선적인 대응체계가 4자 회담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복잡한 남, 북, 미, 중 관계와 맞물리면서 혼선의 상황을 초래할 위험 부담까지 증폭되고 있다.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 북(조선)이 "미군 철수와 조미 사이의 평화협정체결"의 입장을 본회담장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앞으로도 제기할 것임을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변해도 우리의 원칙적 입장만은 불변할 것이며 이를 위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은 더욱 강렬해 질 것이고,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될 것"(『조선중앙통신』, 1997. 12. 30.)이라고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는 반면, 남(한국)은 앞서 밝힌대로 한계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남북 대화재개와 남북 당사자 원칙이라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어, 북(조선)의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로서는 취약성이 계속 노출되고 있다. 만약 김대중 정부 하에서 남북 합의서 이행을 향한 남북 직접 대화가 가시화될 경우, 남(한국)은 4자 회담을 통해 주장해 온 남북 대화진전, 남북 기본합의서를 골격으로 한 4자회담 진행이라는 논리적 틀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이런 구도하에서 4자 회담이 진행될 경우 4자 회담은 종래 남(한국)이 주장해 온 '4-2=남북 대화 혹은 2(남, 북)+2(미, 중) 대화'라는 방식이 아니라, '4-2= 조미 협상'이라는 조, 미가 중심축이 되는 회담으로 전변하거나, 북(조선)이 국제 무대를 향해 "미군 철수와 조미 사이의 평화협정체결"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정치공세의 선전장으로 흘러 들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진다.

이같은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대화를 신속히 재개, 조미회담과 병진을 시도하고, 4자 회담을 보조축으로 삼는 대북전략 구상이 최근 미국내 한(조선)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부상하고 있는 등 4자 회담의 장래를 둘러싼 논의가 무성히 일고 있다. 4자 회담 문제를 제안 초기부터 직, 간접 간여해 온 케네스 퀴노네스 전 미 국무부 북(조선)담당관은 1997년 11월 5일 연세대 통일연구원 주최 세미나에 참석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면 4자 회담이 왜 필요하겠는가"(『중앙일보』, 1997. 11. 6.)라며 남북 직접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4자회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복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제임스 릴리의 발언.『조선일보』, 1997. 12. 21.)등의 주장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어 미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4자회담의 중요성 강조와는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북(조선)의 '통미봉남'책에 대한 발묶기라는 측면이 계산됐던 4자 회담이 본회담이 열리는 현시점에 와서는 조미, 남북 대화의 진전을 가속화시키는 측면보다는 이를 제약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점 역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부장관은 1997년 11월 12일 "4자 회담 본회담이 내달중 개최되기를 희망한다"(『중앙일보』, 1997. 11. 13.)고 4자 회담 성사 희망 시기를 사전 발표하는 등 1997년 12월 제 1차 본회담을 서두른 측은 미국이었는데, 이는 "한국의 대통령선거 이전에 본회담을 열어 놓아야 신정부에서도 4자 회담이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경향신문』, 1997. 11. 15.)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 당선자의 남북대화 재개 표명에 대해 국무부 대변인 발표 역시 "남북대화와 관계발전은 4자회담의 틀안에서 성공의 전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남북 대화의 추진을 환영하면서도, 남북 관계의 급진전으로 인해 4자회담이 유실될 것에 대한 대비를 한편으로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반면 남(한국) 김영삼 정부는 조미 관계의 급진전에 제동을 걸기 위해 4자 회담을 활용해 왔다. 이같은 점들을 놓고 볼 때, 북(조선)과의 직접 대화를 둘러싸고 한미가 서로를 견제, 조절하는 발묶기 틀로 4자 회담이 역작용하고 있어, 이에 대한 한미간에 상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할 수 있다.

미국은 다자간 대북 대화 채널인 4자회담 개최와 조미 직접 대화 채널인 조미 (준)고위급 회담을 병진해서 열어가며 이같은 4자회담의 한계를 벗어가고 있으며, 최근 "조미 대화 격상 ", "경제 제재 해제 조치 가시화", "조미간 군사 대화 채널모색" 등 조미 관계의 향후 급진전을 예고하는 일련의 행보를 내딛고 있다.

한편 4자 회담 본회담 개최는 중국의 한(조선)반도 문제에 대한 자동 개입을 불러 왔는데, 미·중간에는 탈냉전기 동북아 역학 구도를 놓고 공존 속에 협력과 경쟁이라는 양측면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남(한국)은 사실상 남, 북, 미가 참여하는 3자 구도보다도 더 복잡하고, 어려운 구도를 돌파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결국 한미에 있어 4자 회담이 갖는 장기적 측면의 의미는 크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한(조선)반도의 긴장상태를 잠정적으로 완화시키는 유효성 외에는 별다른 실효가 없는 셈이 되고 있다. 이같은 면을 고려해 볼 때 남(한국)과 미국은 선차적으로 조미 직접 대화, 남북 직접 대화라는 두 개의 축을 동시에 진전시키면서, 4자 회담이라는 다자간 대화틀은 보조축으로 유지, 활용하는 형태로 향후 대북 관계를 조성해 나갈 공산이 크다. 4자 회담에 대한 김대중 당선자의 소극성은 이같은 4자 회담이 갖는 한계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고 추정된다.

북(조선)은 이같은 4자회담을 둘러싼 한미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최근 4자회담 적극 참여라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조선중앙통신』은 1997년 12월 30일 「4자회담과 관련한 공화국의 원칙적 입장」이라는 보도를 통해 "회담의제와 참가측들 사이의 호상관계를 비롯한 일련의 문제들을 놓고 시비를 론하고 나름대로 전망을 점치고 있는 여론들은 모처럼 시작된 조선반도의 평화과정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립장과 견해로서 회담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4자회담에 대해 일고 있는 회의론에 경계를 표하고, "4자회담이 조미 대화와 함께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좋은 대화 마당이며, 특히 우리 주장의 정당성을 세계에 다시금 알리도록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3) 한미 안보 공조의 강화와 남(한국)군 현대화 계획

김대중 당선자는 당선 직후 1997년 12월 29, 30일 서부전선 육군 28사단 최전선 초소, 미 제 2사단, 3군 사령부가 있는 계룡대, 1998년 1월5일 해군함대전투사령단와 공군전투비행단, 한미연합사령부를 연이어 방문하는 '안보 행보'를 통해 그의 안보관을 내외에 드러내고 있다. 1997년 12월 30일 계룡대를 방문한 그는 "한미관계가 확고해야 안보에 차질이 없다", "미군의 한국 및 일본 주둔은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면 동북아에서 군사적 진공상태가 발생해 일본과 중국사이에 패권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주한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한미 군사동맹의 중요성과 지속성을 강조했다. (『한겨레 신문』, 1997. 12. 30.,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실 발표문, 1997. 12. 30.)

한미 군사동맹의 중핵을 이루는 주한미군의 주둔에 대한 그의 견해는 두 개의 시기로 구분되어 드러나고 있다. 1980년대에서 1992년까지에 해당하는 첫째 시기는 주한 미군의 현 주둔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주한미군의 조건부, 단계적 점진 철수를 조심스럽게 주장하던 발언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둘째 시기는 1993년 이후의 발언들로 주한 미군의 통일후까지 주둔을 강조하는 '반영구 장기 주둔론'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1991년 "미군철수는 영구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일의 진전과 보조를 맞추어 점차적으로 진행돼어야"한다고 완곡하게 조건부, 점진적 철수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며, 1992년 대선에서는 그와 그가 소속된 민주당이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과 정책 연합을 하며, 주한 미군 문제에 대해 단계적 철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1993년 이후 그는 "주둔"이라는 단어에 수식어를 점차 강화시키는 특유의 화법으로 발언 수위를 조절해가며, 주한미군 반영구 장기주둔론을 역설한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켜야 한다."(1994. 5. 12.)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한이 통일돼야 한다."(1995. 5. 4.) "주한 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은 한국 통일이 성취된 이후에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1997. 4.)

주한미군의 주둔에 관해 그가 입장 변화을 시도하기 시작한 1993년경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본격적인 통일론 행보를 걷던 시점인데, 그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것이라는 종래의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 주장 외에도 탈냉전기 주한 미군이 동북아 평화의 안정자, 균형자 역할을 하게 됐으며, 북(조선) 역시 주한미군을 용인하려고 한다는 그의 새롭게 수정된 인식을 바탕으로 이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종전의 한미군사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는 방안으로 "한미합동 작전 지휘통제 체제를 발전"시키고, "한반도 위기 고조시 적시에 미 증원군이 전개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전면전 수행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한, 미간의 정보 협력 및 연합 연습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한미간 평시 위기관리 체제를 확고히 하겠"다고 대선 핵심 170대 공약에서 밝히고 있다.

앞서 인용한 『디펜스 뉴스』 1998년 1월 5일자 보도에서는 김대중 당선자 진영이 작성한 보고서를 인용하며, 김대중 당선자측은 "최신 군장비에 입각한 한미 군사동맹의 강화"를 추구하고, "황 장엽 망명등에서 미국이 불만을 제기한 대북정보의 상호 공유문제도 개선"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어, 종전 김영삼 정부하에서 빚어졌던 미국산 무기 구매를 둘러싼 한미간의 마찰, 대북 정보에 대한 불편한 구도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안보 공조 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대중 당선자측은 한미 군사동맹 강화 외에 신국방정책을 통한 남(한국)군의 군조직 개편, 각료급 국가안보자문회의 창설, 대북 극비 안보 기관 요원의 대폭 충원이라는 남(한국) 군, 안보기관 강화를 꾀할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새정치국민회의 임복진의원은 군조직 개편과 관련, "목표는 작고 강한 군대, 이는 21세기 신안보 환경에 맞는 과학군, 정보군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 1997. 12. 24.)

그의 이같은 한미 군사공조 강화 ,남(한국) 국방 강화 정책은 최근 남(한국)의 경제위기로 인해 전면 수정의 기로에 서 있다. 남(한국) 국방부는 1998년 1월 7일 재경원이 금년도 예산중 1조 4천억원을 삭감하도록 요구해 옴에 따라 예산 삭감에 따른 대형 방위력 개선 사업의 전면 보류 또는 투자 규모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고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있는 1천 5백톤급 차기 중형잠수함사업, 공중 조기 경보통제기(AWACS)도입등 4천여억원 소요 47개 신규사업의 1998년내 추진이 불투명해지고, 1989년 부터 추진해 온 고등훈련기사업(KTX-2)등 173개의 '계속사업'도 사업 규모가 축소되거나 자금 투입시기가 연기되는 등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다. 또 국방부는 유류비 인상으로 유류 소비가 많은 해군 함정과 공군 전투기, 육군 기계화부대 등의 훈련 축소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1998. 1. 7.)

이같이 남(한국)의 무기구매에 차질이 예상되자,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1998년 1월 21일 -22일 남(한국)을 방문, 김 당선자 면담, 김동진 국방장관과 국방장관회의를 일정으로 잡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 1998. 1. 7.) 코언 장관의 방한은 남(한국)이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전력 증강을 위한 무기 도입 계획을 크게 축소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조건 완화를 통해 미국산 무기의 판매를 지속하기 위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윌리엄 코언의 방한과 관련, 1998년 1월 8일 미국방부 고위관리는 "한국은 6개월전과 지금 상황이 너무 다르다"면서 코언 국방장관의 방한 기간중 미국산 무기판매에 관한 재협상 문제가 토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1998. 1. 9.)

4) 남북 관계- 진전과 교착의 갈림길

(1) 남북합의서의 이행을 통한 남북 직접 대화 및 정상회담 제의

1997년 12월 19일 오전 9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선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당선자는 "남북한간 교류와 협력을 재개하고 필요하다면 북한의 김정일 공산당 대표와 정상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합니다"(『조선일보』, 1997. 12. 19.)라고 남북 정상회담 개최의 용의를 표명했다.

그의 이같은 언급은 그가 대선 시기 수차례에 걸쳐 남북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밝힌 바 있어, 이미 예고된 발언이었다. 그는 이날 기자들이 정상회담의 구체적인 복안을 묻자, 한걸음 물러나 "원칙론적 얘기를 한 것"(『한겨레신문』, 1997. 12. 19.)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당선이 확정된 첫날 당초 공식 발표문에는 빠져있던 정상회담 '카드'를 던진 점은 발언의 파급력을 계산한 행보였다고 할 수 있으며, 정상회담에 대한 그의 집념과 의욕를 엿 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남북 기본 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남북정상을 개최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당선 기자 회견에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며, "이제 이(남북 기본합의서-인용자주)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것이고, 필요하다면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혀,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연동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했다.

그는 정상회담의 성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집권시 남북한 군축을 비롯해 경제 및 민간 교류 협력(그는 이 모든 내용이 기본 합의서에 담겨있다고 주장해왔다-인용자주)등을 위해 정상 회담을 추진할 것이다. 이에 앞서 미국과 일본의 지도자를 만나 한반도에서 평화정착을 위한 한미일 공조 체제를 다질 것이다."

아울러 그는 정상회담시 '무력 불사용', '흡수통일 불가', '적대 정책 불사용' 등 '3불 원칙'을 제기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얘기인데, 그건 만나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얘기가…, 남한에 대한 어떠한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대신 우리도 말하자면 북한에 대해 무력 침공을 안한다. 둘째는 과거 정부는 북한을 흡수 통일한다는 이상…, 우리는 그런 생각없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하고 당신네들 체제를 유지해 나가는데 우리는 반대 안한다. 셋째는 북한은 남한하고 화해 협력해야만 하는 거니까 화해 협력하자."

그가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연동된 남북 직접 대화 및 정상회담 '카드'를 던진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이 카드야 말로 조미관계의 진전, 남북관계의 교착이라는 남(한국)의 소외 상황을 타개하고, 조미, 남북 관계의 동시 진전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협상 '카드'라는 인식하고 있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대선 당시 그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의 수교는 남북관계의 발전과 조화되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중략) 남북기본합의서에 입각한 서울과 평양의 연락 사무소 설치, 각 부문별 남북 공동 위원회 등의 설치 운영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될 것이며, 한국은 북미관계의 일방적인 진행에 대한 불안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남북 정상회담 및 직접 대화 추진에 강한 의사를 피력하고 있는 것과 관련 미국 정부와 언론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전폭적인 기대와 환영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지는 1997년 12월 20일자 기사를 통해 그의 발언보다 한걸음 더 앞질러나가 "김대중 당선자가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보도했고, 같은 날 워싱턴 포스트지는 "김당선자는 곧 빌 클린턴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그는 1997년 12월 19일 클린턴 미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 안정을 가져 올 수 있도록 북한이 남한과 직접 대화에 나서도록 북한에 강력히 요청했으면 좋겠다"고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일보』, 1997. 12. 19.)

그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 주목되는 인사는 대북문제에 있어 그와 깊은 공조를 취해온 지미 카터이다. 지미 카터는 이미 1997년 10월경부터 차기 남(한국) 대통령과 김정일 총비서간 남북 정상회담을 자신이 중재하겠다고 간접적으로 표명한 바 있으며(『동아일보』, 1997. 10. 30.), 1997년 12월 22일 김대중 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곧 한국을 방문해 남북문제를 협의하고 싶다"(『한겨레신문』, 1997. 12. 23.)고 밝히는 등 그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 의도는 한미 공조하에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2) 남북 경협, 대북 지원의 강화

대선 시기 남북 합의서 이행을 통한 남북 대화의 재개라는 정치적 접근 외에 그는 경제 분야, 인도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며 "경제 분야는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한 남북 경협 강화, 인도적 분야에서는 민간 차원의 대북식량 지원확대에 역점을 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170대 핵심 공약을 통해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남북 경제 협력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통일에 대비한 중장기적 국토개발, 사회 간접 자본 확충, 산업 구조 조정 계획 수립 △남북 경협 절차 간소화 △ 남북 직교역 실현과 이를 위한 제도적, 행정적 장치 마련 △남북 교통망 복원, 남북 직항로 증, 개설 △나진, 선봉 지역등 경제 특구에 대한 집중 투자, 북 지역 자원 공동 개발 및 제 3국에의 공동 진출, △관광 특구에 대한 투자 및 관광 협력 사업 적극 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북(조선) 식량문제 지원 사업에 대해서는 △대북 식량지원의 탄력적 제공△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협력, 북 농업구조의 개선과 영농 기술 혁신, 다수확 품종 개량등 구조적, 근본적 해결 도모를 주장하고 있다.

이외 교류, 협력 사업으로 △이산가족의 재회 및 편지 왕래 실현 △비무장지대에 평화시 건설 △철원 평야 공동 농업 개발 △금강산, 설악산을 관광 특구로 공동 개발 △ 남북 방송 프로그램 공동 제작 및 순차적 방송 개방 △남북 전화, 광케이블 등 '한반도 고속정보통신망' 구축 △문화, 예술, 학술, 체육, 환경 분야에서 공동 조사, 연구, 상호 교류, 협력 사업추진 △민족문화 유산에 대한 공동 조사, 발굴, 언어 동질성 회복 추진 등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위의 공약은 대부분 다른 후보들이 내건 공약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대동소이한 교류, 협력 방안들로 구체성과 현실성이 문제로 남아 있고, 일부 분야는 이미 민간 기업, 단체에서 추진되고 있다. 공약 내용중 김대중 당선자가 취임 이전 부터 적극적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중인 분야는 임가공 합작을 통한 남북 경협안, 금강산-설악산 공동개발이라는 관광특구 조성안, 인도적인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안으로 최근 그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김 당선자는 1998년 1월 12일 방한 중인 미셸 캉드쉬 국제 통화기금총재 일행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은 경제 살리기와 행정 개혁, 국제 신인도 제고 등의 문제 때문에 남북문제를 크게 벌여나갈 여력이 없다"며 "남북문제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그러나 북한의 값싸고 군사훈련으로 단련된 노동력을 이용하면, 남한 기업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남북 경협은 적극 진행시켜 나갈 것임을 드러냈다.(『조선일보』 1998. 1. 12.)

금강산-설악산 공동 개발안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1998년 1월 1일자 보도에서 익명의 새정치국민회의 통일 정책담당자의 말을 빌어 "새정부는 남북간 교류 및 경제협력을 통한 신뢰관계 구축에 주력할 것"이며, "남북 교류 정책과 관련, 금강산 공동 개발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고 전했다.(『경향신문』, 1998. 1. 3.,『세계일보』, 1998. 1. 3.) 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금강산 개발 사업은 단계적 추진을 상정하고 있으며, 우선 속초항 등 군사분계선에서 가까운 남(한국)측 항구와 북(조선)측의 해금강 지역을 왕래하는 해상 유람선을 취항시킨 다음 속초-원산간 연락선을 개설, 철도와 연결시키는 방안을 검토중에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당선자측의 금강산 공동개발 구상을 밑받침해 주듯 최근 한국관광공사측은 '설악산 금강산 공동 개발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보고서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설악산과 금강산에 지정 통로(회랑지대)를 확보해 관광객을 출입시키면 분단상황에서도 안보논리와 체제 수호를 우선시하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내국인이 왕래할 수 있고 여행객의 신변안전에 도움을 준다"며, "금강산의 부족한 숙박, 위락 시설과 도로망을 설악산에서 보완해 주기 때문에 관광 수요가 급증해 남북한간 쌍방간의 관광 산업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제안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금강산-설악산 지정통로로 육로, 선박, 항공편 세가지의 장단점, 현실성을 비교, 검토한 뒤 우선 유람선을 통한 수송방편이 가장 현실성이 있다고 밝히고, 속초-장전 혹은 원산항간 운항이 남북 합의를 이루는데 가장 바람직하다고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 1998. 1. 7.)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은 이미 구상이 끝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정부의 직접 지원외에 민간 지원을 활성화한다는 구도 아래 식량 지원 및 농업구조 개혁을 위한 국제적 기구의 창출, 식량 지원 여론 조성을 위한 대규모 국제 행사의 개최, 수퍼 옥수수 종자의 제공 등을 측면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들중 식량 지원 및 농업구조 개혁을 위한 국제 민간 기구창출과 대규모 국제 행사 개최는 지미 카터의 구상 하에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지미 카터 방북시 남북 정상회담 중재용 '카드'가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겨레 21』, 통권 제 190호, 1998. 1. 8.)

북(조선) 식량지원 문제와 관련, '북한 농업개혁 국제 컨소시움'의 구성을 위한 첫회의가 1997년 12월 19일 미 조지아주 아틀란타 소재 카터센터 주관으로 열렸고, 이 자리에는 카톨릭 구제서비스등 미국내 북(조선)지원 단체와 유엔 국제농업개발기금, 캐나다 곡물은행 관계자, 유니세프 평양사무소 대표 등과 남(한국)측 북녘동포돕기 민간단체 전국회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측이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 참석자들은 북(조선)의 농업 개혁을 위해 비정부 민간단체의 컨소시움 구성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북(조선)이 가장 신뢰하는 인사'인 지미 카터가 컨소시움을 이끌 수 있도록 하자는데 동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 글)

식량 지원을 위한 대규모 국제 행사는 표면상 미국인 가수 마이클 잭슨이 추진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 행사의 첫 구상자는 지미 카터이며, 지미 카터는 이를 김대중 당선자에게 제안하고, 김 당선자측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접촉, 행사 추진을 성사시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시사저널』, 1997. 12. 11.) '북한 어린이 돕기공연-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으로'라는 제목을 달고 마이클 잭슨이 창립한 국제어린이 재단과 남(한국)의 선우 그룹 주관하에 추진되는 이 행사는 1998년 10월 3, 4일 판문점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마이클 잭슨 외 유명 연예인, 지미 카터, 넬슨 만델라등 정치인이 참석한 가운데 대형 자선 문화 행사를 갖고, 이를 1백 57개국에 위성 생중계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대선 기간중 김대중 후보에 대한 공식 지지를 선언하고, 박철언 자민련부총재와 함께 경북 지역 유세를 함께 하며, "나는 슈퍼 옥수수를 개발해 북한동포를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다", "DJ와 박부총재, 그리고 나는 모두 통일전문가로서 세명이 힘을 합하면 통일을 앞당 길 수 있을 것"(『한겨레 21』, 1998. 1. 10.)이라고 호소했던 수퍼 옥수수의 개발자 김순권 경북대 교수는 1998년 1월중 북(조선) 아태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 초청으로 방북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997년 6월 자신이 개발한 수퍼 옥수수 종자를 갖고 방북하려다, 통일원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방북이 무산된 바 있는데, 이번에는 방북 허가가 무난히 나올 것으로 남(한국)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조선일보』, 1998. 1. 13.)

3. 결론을 대신하여

김대중 당선자가 주장해 온 통일론과 통일 정책 공약은 향후 한(조선)반도 정세, 남북간의 역학관계, 남(한국)내 주·객관적인 조건들과 맞아 떨어지는 범위안에서 현실화되는 과정을 밟아나갈 것이다. 그 과정이 당면한 남북 관계개선과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민족과제에 긍정적으로 나타날 것인가, 혹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논하는 앞날에 대한 전망은 그의 통일론과 통일정책 공약에 대한 검토에서 시발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에 대신하여 김대중 당선자가 주장해 온 통일론과 통일 정책 공약에 대한 검토를 통해 향후 전망에 대한 논의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통일방안'에 대하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대중 당선자의 통일정책은 '평화 공존과 평화교류'를 밑그림으로 하여 변화, 확장돼 왔다. 그가 주장해 온 '평화 공존과 평화 교류'는 각도에 따라 빛을 달리하는 프리즘과 같이 한(조선)반도의 정세 변화, 안팎의 주객관적 조건 변화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라 지고 논점이 회전하는 형태로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의 '평화 공존과 평화 교류'는 이중성을 띄게 됐다.

그의 '평화 공존과 평화 교류'정책은 자주적 평화 통일과 무관한 분단 합법화 과정, 즉 통일없는 공존으로 나가거나 북(조선)의 체제변질을 꾀하기 위한 '개혁', '개방'의 유도 수단으로 흐를 수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내포돼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평화 공존과 평화 교류' 정책은 남(한국)의 역대 정권이 추구해 온 북(조선)에 대한 적대 대결정책에서 벗어난 유연성 있는 정책으로 전환될 소지도 함께 지니고 있어, 남북 대화재개, 긴장 해소에 순기능 역할을 할 가능성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그의 3단계 통일 방안은 남북 모두가 수렴할 수 있는 통일방안이라는 그의 낙관적 주장과는 달리 종래 남(한국) 정부가 주장해온 국가연합(남북연합)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것은 연방국가 수립을 주장하는 북(조선)과 견해 차이를 좁히기 힘들다 할 수 있겠다.

특히 그는 북(조선)의 '개혁', '개방'을 유도한 뒤, 연방제 단계를 거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체제통합의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도 이는 '흡수통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북(조선)은 이를 '흡수통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봐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외투'를 벗긴다는 그의 '햇빛론'에 대해 북(조선)은 어떤 시각을 갖고 있을까?, 또한 '햇빛론'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일까? 북(조선)은 "새해 주체 87년(1998년)은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우리식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를 이룩해 나가는 보람찬 투쟁의 해, 새로운 비약의 해"라고 밝히고 있는 등 그의 '햇빛론'이 무색할 정도로 사회주의의 '외투'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있다.

통일 정책 공약과 관련하여

한미 공조의 틀에 전적으로 밑받침되고 있는 그의 통일정책이 민족 전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인지에 대해 심각한 고려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한미 공조는 추상적 언어가 아니라 미국의 대한(조선)반도 정책과 손발을 맞추는 동맹적 공조를 의미하며, 이 동맹적 공조는 역대 정권 하에서 한미간의 수직적 공조의 형태로 진행돼왔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자주성' 문제가 제기된다.

한편으로 그의 통일 정책 공약은 자민련과 공동 집권을 약속하며, 일련의 수정과정을 거치게 됐는데, 이는 그의 통일론에 보수성을 강화시키는 측면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주장해온 통일정책의 존립 근거마저 흔들고 있어, 향후 그가 구상해 온 통일 정책과 이같은 보수적 입장이 완충, 조절과정을 겪든가, 충돌, 대립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김대중 당선자는 그가 1987년, 1992년 대선시기 줄곧 공약으로 주장해 온 3단계 통일방안을 이번 대선에서도 제기했다가, 자민련과 공동 공약(170대 핵심 공약)을 발표하며 삭제하고,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라는 추상적 문구로 바꾸었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자신의 3단계 통일방안을 접었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개, 폐하고 '민주질서수호법'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해왔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통일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던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기로 한 것은 자가당착적 모순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며, 향후 남북 관계나 남(한국)내 통일 논의에 있어 쟁점의 불씨가 될 소지가 있다.

경제 위기와 연동된 통일정책

최근의 남(한국) 경제 위기는 그의 통일론이나 통일 정책 공약을 뒤흔드는 엄청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른바 '북한 관리론'을 주장하며, 안보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우던 그의 공약은 당선 이후 이어진 군부대 시찰이라는 '안보 행보'에서도 다시 강조되고 있으나, 앞서 살펴 본 대로 경제 위기로 인해 예산 삭감, 무기도입과 군사훈련의 축소라는 걸림돌에 부닥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걸림돌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하는데 있다. 그는 1993년 9월 서울대학교 행정 대학원에서의 강연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통일만이 살 길이요, 선진국가로 등장할 수 있는 길입니다. 통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앞날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냉전시대에는 세계 모든 국가들, 특히 우리의 경쟁상대인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국방과 경제건설에 인적, 물적 자원을 분배해 양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이제 경제 전쟁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경쟁국들은 모든 자원을 경제발전에 집중하는데 우리만이 양분해서 자원을 쓸 뿐만 아니라, 전쟁 가능성이 내포한 대결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도 밀리고 있는 우리가 경제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합니다. 결국 우리는 비참한 삼류국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단·대치 상황속에서 군비를 증강하는 냉전적 정책은 결국 경제패배를 불러온다며, 통일만이 살 길이라고 말하는 그의 4년전 주장과 최근 '선 안보강화와 경제위기 탈출, 후 남북대화'를 주장하는 그의 견해는 논리적 모순관계에 있다.

아울러 그의 통일정책 기조는 이른바 '북한 관리론'이나 '햇빛론'등에서 보여지듯 체제 우위에 선 남(한국)이 북(조선)을 개혁, 개방시킨다는 '맏형'의 입장에 서 있는데, 최근 심화된 남(한국)의 정치, 경제 위기는 이같은 논리 구도를 붕괴시키고 있다. 김영삼 정부가 추구해 온 대북 압박 정책은 물론이고 경제 우위를 통한 북(조선)의 체제 변화를 시도하고자 한 그의 통일 정책도 남(한국)의 경제 현실을 놓고 볼 때 현실성이 결여된 통일 정책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한국)내 통일논의와 관련하여

남(한국) 내에서의 통일 논의는 크게 △북(조선)의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을 주장해온 보수적 통일 정책론, △북(조선)의 '개혁', '개방'을 통한 점진적 흡수 통일론, △자주, 평화통일, 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 통일 3대 원칙을 강조하며, 연방국가수립을 주장하는 진보적 민족민주운동세력의 통일론의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보수적 통일 정책론은 남북 관계의 교착을 심화시키고, 다른 통일 논의와 갈등, 충돌을 일으키며, 통일 무용론의 확산을 조장해왔다. 통일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김대중 당선자가 종전에 주장해 왔듯이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이같은 통일 논의의 진전을 가로 막아왔다.

김영삼 정부의 보수적 통일 정책은 남북 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끌고 갔지만, 그같은 주장을 펼치는 세력들은 아직 집권세력 내에 엄존하고 있으며, 이들의 갈등 조장이 남(한국)내 통일 논의의 위축, 남북 관계의 경색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 역시 고려돼야 한다.

남북 대화와 관련하여

1998년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는 앞서 열거한 김대중 새 정부의 '선 안보와 경제위기 탈출, 후 남북대화', '선 공존과 교류, 후 통일논의', 북(조선)의 '선 남(한국)의 정책 변화, 후 대화' 입장이 맞물리면서 방향과 자리를 찾는 씨름에 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정부와 북(조선) 당국간에 빚어졌던 대화 중단과 대결 분위기는 남북 양 당국자간의 의지와 객관적 현실 조건으로 인해 교착의 굴레를 벗고, 대화 재개의 방향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대중 당선자의 공존 논리가 형태상으로 볼 때, 김영삼 정부의 적대적 공존과 다르지만 경쟁적 공존의 의미도 강하게 담고 있어,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가 순항을 걷기보다는 마찰의 과정을 겪을 소지도 있다.

남북 대화, 정부 당국간 대화가 남(한국) 새 정부와 미국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북(조선)의 의지가 관건 사항이 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당선자가 제의한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통한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현실성이 있는 제안인가하는 문제도 검토가 요구된다. 김대중 당선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국제 조약'이라고 밝히고 있다.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맺어진 남북합의서에 대해 그가 내린 다른 해석은 분단 국가를 안팎으로 인정하고 공존, 교류를 하자는 의도이거나, 주변국의 승인하에 '남북 평화협정체결'을 추구하기 위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이미 북(조선)에서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인준을 거쳤으나, 남(한국)은 국회 인준을 밟지 않았다. 북(조선)은 국회 인준의 선행을 요구할 수도 있다. 북(조선)은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이 좌절된 것은 남(한국)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조선)은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해서는 남(한국) 정부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남북 기본합의서는 양측의 고위급 회담을 통해 이루어 졌다.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해 양측 최고위급 정상이 만나 이를 확인하기 보다는 특사 교환, 고위급회담선에서도 충분히 조절될 수 있는 문제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 북(조선)은 "(김 주석이-인용자주) 1994년 7월 7일 조국통일문제와 관련한 중대한 문건에 력사적인 존함 친필을 남기시고 7월 8일 새벽 2시 애석하게 뜻 밖에 서거하시었다"고 밝히고 있어, '미공개된 미완의 통일 유훈', 즉 남북 정상회담시 북(조선)이 펼쳐 보일 대남제의 내용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북(조선)은 1994년 7월 이후 구체적인 남북 정상회담안을 가지고 조건과 시기의 문제를 저울질해 오고 있었으며, 김대중 새 정부에서의 실현 여부 역시 그들 북(조선)의 의지에 달려있는 셈이다.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는 필연적으로 남북, 해외의 민간 교류나 연대의 확산 과정을 불러와 통일 논의의 열린 공간을 창출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김대중 새 정부의 대응 양태에 따라 남북 정부 당국자간 대화, 남북 민간 대화, 남(한국)내 정부와 민간과의 통일 논의 교류는 그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역대 남(한국) 정권은 통일 논의나 남북 대화를 독점적으로 장악하였고, 민간 대화, 연대를 제약하거나 불법화하고 억누른 경향이 강했는데, 남(한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한 새 정부가 이 낡은 경향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새 정부의 통일 정책은 '역사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1998. 1. 22.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