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총비서 추대와 김정일 시대의 전망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과 제도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기준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상식을 바탕으로 판단해 이해 못할 일들을 양산해 내는 북한은 비정상이라고 간단히 규정해 버린다. 반대로 북한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남쪽 사람들을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어느 쪽이 정상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다. 서로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이해 못할 일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찾아보고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영영 갈라져 남남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통일이라는 역사가 우리에게 짐지워준 과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이 인용문은 『한겨레』의 김명걸 논설위원이 발표한 글에서 옮긴 것이다. 만일 우리가 비밀에 쌓여 있는 북(조선)을 이해하려는 지북론(知北論)적 관점에 서지 않는다면, 북(조선)은 통일을 이루고 살아야 할 동족이 아니라 '낯선 이방인'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며, 인용문에서 지적한대로 "영영 갈라져 남남이" 되는 민족사의 비극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통일은 우연한 기회에 받아안는 역사의 선사품이 아니다. 통일을 실현하는 역사적 과정은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민족 성원들의 과학적인 인식과 실천 속에서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며, 그러한 통일 과정에서 북(조선)에 대한 무지는 통일 정책, 대북 정책, 통일 운동을 퇴행의 길목으로 이끈다. 북(조선)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은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방법을 찾는 노력"에서 출발하며, 따라서 정부 차원의 통일 정책이나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이 떠맡고 있는 통일의 과제는 상식과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은 허구를 벗겨내고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이 글은 "우리가 가진 상식을 바탕으로 판단해 이해 못할 일"들 가운데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다. 그것은 조선로동당의 최고 지위가 3년 3개월동안 비어있었던 이른바 '권력 공백 현상'과 총비서 추대, 그리고 김정일 시대의 전망에 대한 분석적 이해다.

요즈음 북(조선)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각도에서 쓴 글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글들은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관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글쓴이의 솔직한 평이다. 지금 내로라 하는 북한 전문가들은 자기 식의 사고 방식으로 북(조선)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사건을 엉뚱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알팍한 상업주의와 선정적 자극을 선호하는 언론에서 퍼뜨리는 유행성 발언들이 북한학의 논의 속에서도 어색하지도 않고, 주저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북한 전문가들의 학문적 나태와 논리적 천박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북한학이 과연 학문으로 성립될 수 있을까 하는 성급한 비관론마저 안겨주고 있다.

오늘 북한 전문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상업주의 언론의 유행성 발언이 아니라 북한학을 학문 체계로서 정립·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초를 닦는 일, 곧 정밀하고 과학적인 문헌 분석이다. 그런데 세상이 다 알고 있는대로, 북한학의 앞길에는 남(한국) 당국이 만들어놓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고, 북(조선) 당국이 쳐놓은 비밀주의라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이 양대 제약 조건을 넘어서 북(조선)이라는 실체에 접근하는 일은 그야말로 치열한 학문적 분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그 제약 조건의 테두리 안에 침잠하는 안이한 분석에 자족한다면 우리는 주관주의적 가설과 관측의 오류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는 허상이나 어루만지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북한학의 앞길에는 이런 오류와 제약 조건이 널려 있기 때문에 정밀한 문헌 분석이 다른 학문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북한 전문가로서 지금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로 있는 스탠리 로스(Stanley Roth)가 의회 청문회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은 다음과 같은 말은 국가보안법과 비밀주의의 장벽 틈새를 비집고 북(조선)이라는 실체에 접근하려는 전문가들에게 의미있는 발언으로 들린다.

"북한 정세에 대한 어떠한 예언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얼마나 많은 예측들이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는가. 대북 정책 수립은 북한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학이 지향하는 목적 의식을 세우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무릇 모든 학문이 몇몇 학자들이 모여 있는 학계라는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의 교환 행위가 아니라 적어도 사회·역사 발전에 이바지하는 '열린 지식 체계'라고 했을 때, 북한학도 북한 전문가들의 지적 유희나 공리공담이 되어서는 안되며 조국 통일이라는 민족사의 발전을 위한 지식체계로서 자기의 사명과 목적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2) 수수께끼의 공백 3년 3개월

1997년 10월 8일 조선로동당은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공동 명의로 된 특별 보도를 통해 김정일 총비서 추대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조선로동당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한 뒤 3년 3개월 동안 공석으로 남겨 두었던 조선로동당의 최고 지위를 후계자에게 계승하였다. 이번에 총비서 추대가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국가주석직은 비어있는 상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석직이란 다분히 의전직(protocol post)이며, 실제적인 영도 권한은 당 총서기에게 있다는 점, 그리고 주석에 대대된 뒤에는 당연히 의전 관례 상 외국의 외교 사절들과 자주 만나야 하며 그로써 국제 사회의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부담도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북(조선)에서 주석 추대를 서두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쨋든 몇 달도 아니고 무려 3년 3개월 동안이나 당과 국가의 최고 지위를 공백 상태로 남겨둔 이 '권력 공백기'는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의 잣대를 가지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3년 3개월 동안 지속된 '수수께끼의 공백(enigmatic vacantness)'은 이 지구 위에 국가라는 조직체가 생겨난 뒤로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불가사의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북(조선)은 왜 3년 3개월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물음은 조선로동당과 북(조선)의 정치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외부 세계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밀주의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조선로동당과 북(조선)의 정치 현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오직 공식적으로 간행된 문헌들에 대한 분석만이 우리에게 비좁은 접근 통로를 열어주고 있을 뿐이다. 3년 3개월이라는 '공백기'가 보여주고 있는 불가사의성을 풀어내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 북(조선)의 외부에서 간단히 '비정상'이라고 규정해오고 있는 북(조선) 식의 특이한 정치 현실을 읽어낼 수 있는 '암호 해독(decipher)'이다.

지금 북한 전문가들은 이 수수께끼의 공백을 비정상적인 위기 관리 체제, 또는 비상 체제라고 단정하는데 아주 익숙하다. 그들은 김정일 총비서가 그 동안 최고 지위에 추대되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내부 사정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추정 방향으로 분석의 초점을 옮겨 놓으면서, 그 내부 사정을 밝혀보려는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를테면 세종연구소의 이종석 연구위원은 "그의 총비서 취임은 대내적으로 김일성 사후 지속되어온 과도기적 비상 체제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총비서 취임은 또 그동안 불구화되었던 국가 기능을 어느 정도 정상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로이터통신의 10월 8일자 보도도 "특별 보도의 참된 의미는 김일성 사후에 실제적으로 동면 상태(hibernation)에 빠져 있었던 당의 기능이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는 데 있다"고 분석했다.

지금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불가피한 비상 체제의 원인과 관련하여 대개 두 가지 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수수께끼의 공백'은 강경·보수파 군부와 온건·개방파 기술 관료들(technocrats) 사이의 갈등 때문에 생겨났으리라는 추정이다. 이것은 이른바 내부 갈등설이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로 알려진 셀릭 해리슨(Selig S. Harrison)도 이러한 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부 갈등설은 허구지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내부 갈등설을 말하는 전문가들은 현재 북(조선)의 정치 상황에 대해 정치사적 관점에서 분석하지 못하고 단지 단편적, 분절적 사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북(조선)은 이미 1970년대 초에 유일 지도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따라서 북(조선)에서는 '수령의 교시'나 '후계자의 말씀'에 어긋나는 어떤 이질적인 주장이나 견해도 생겨날 수 없는 유일 지도 체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령과 후계자의 영도가 절대적인 것에 비례하여 당의 통일·단결도 그만큼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이미 1974년에 이러한 유일 지도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 바로 김정일 총비서였다는 사실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주도했던 유일 지도 체계 확립은 유일 사상 체계의 확립과 궤를 같이 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조선)의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유일 사상 체계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때는 1968년 1월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유일 지도 체계의 확립과정은 1967년 5월 4-8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죄행을 폭로비판하고 주동자들을 당 대렬에서 제거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고, 이어서 1969년 1월 6일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제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와 각급 부대 당위원회 전원회의들에서 "당의 로선과 정책 집행을 태공하였을 뿐아니라 인민군대에 대한 당의 령도를 거부"한 이른바 '군벌관료주의자들'을 비판·철직시킨 사건과 더불어 추진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나중에 이 두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와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제4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하여 김일성주의 세계관을 더욱 튼튼히 세울 수 있었습니다"고 밝히고, "전당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할 데 대한 구호를 내세워야 하겠다는 것도 그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취한 뒤로 조선로동당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가 장악·주도하는 유일 지도 체계로 개편되었으며, 이 체계는 오늘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유일 지도 체계 안에서 강경·보수 노선이니 온건·개방 노선이니 하는 노선의 차이, 정책의 차이가 용납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김정일 총비서의 표현대로 "전당과 전체 인민을 하나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하나의 사상으로 숨쉬고 움직이게" 해야 하며 "따라서 중앙으로부터 하부 말단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의 사상으로 관통되여야" 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그 어떤 자그마한 이색적인 요소도 허용되여서는 안"되게 되어 있다. 그는 "우리 당의 력사는 종파를 반대하여 투쟁하여온 력사"라고 전제하고, "형형색색의 종파분자들을 반대하는 오랜 기간의 투쟁을 통하여 불패의 통일단결을 이룩하였으며 이 과정에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당의 통일단결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공고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더없이 귀중한 밑천"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나 아직 지방주의, 가족주의, 패배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상잔재가 남아 있는 조건에서 당 안에서 개별적인 반당분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한 편으로, 전문가들 가운데는 '수수께끼의 공백'을 유훈 통치설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유훈 통치설이란 김정일 총비서는 통치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동안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배경으로 과도기적 통치를 해올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북(조선)을 다녀온 미주 동포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내놓기 위해 손수 작성한 통일 관련 문건을 당의 의결 절차를 거쳐 최종 서명했던 때는 급서 하루 전인 1994년 7월 7일이라는 설이 있다. 분단 역사에서 최초로 이루어지게 될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내놓을 통일 제안이라고 한다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획기적인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그 대남 통일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으나,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의 북측 지역(여기는 북측에서 볼 때 최남단이며 분단의 정치적 의미가 있는 상징 공간이다)에 '1994년 7월 7일'이라는 날짜가 명시된 김일성 주석의 마지막 서명 필적이 새겨진 커다란 기념비가 서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북(조선)으로서는 수령의 유훈을 무조건 관철해야 하는 절대 임무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 '통일 유훈'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현하려고 할 것이라는 점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지난 8월 4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제목의 긴 논문을 발표한 것을 보아도,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수령의 통일 유훈'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일 총비서가 수령의 유훈에 의존하여 통치해왔다고 보는 이른바 유훈 통치설은 별로 의미 없는 소리로 들린다. 여기서 정작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유훈 통치설의 배경에 깔려있는 가설이다. 그것은 후계자인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유훈 형식으로 빌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후계자로서의 권위와 영도력이 미약하다는 가설이다. 과연 이 가설은 타당한 것일까? 이 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게 논의할 수 없는 복잡한 내용으로 전개될 만한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자세하게 논의하지 못하고 다른 기회를 얻어야 한다. 그렇지만 김정일 총비서가 지난 날 후계자로 추대된 과정, 그리고 후계자로서 쌓은 '업적'들에 관한 북(조선)의 문헌들을 분석·종합해 보면 대답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일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북(조선)에서 출판된 방대한 문헌들에 대한 역사학적인 정밀 분석을 요구하는 일이고, 따라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 단정적인 결론을 내놓을 만한 연구 성과는 글쓴이에게 아직 없지만, 시론적으로 정리된 요점을 적어보자면 이렇다.

1. 북(조선)에 의하면, 김정일 총비서는 후계자로 추대되기 이전에 문예 부문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하여 '혁명적 문학예술'을 사회 전체에 확산·침투시킴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 그가 문예 부문을 장악·지도하면서 특히 집중적으로 힘쓴 분야가 영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있다. 북(조선)의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헤아려보면 그는 1964년부터 1990년까지 26년동안 모두 4백64편의 대중 공연 예술, 특히 영화 예술을 정력적으로 지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가 영화 부문을 집중적으로 장악·지도한 까닭은 "영화는 문학, 음악, 미술을 비롯하여 다른 예술의 특성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영화를 앞세워 발전시키는 것은 문학예술 전반을 발전시키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으며, "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는데서 영화만큼 영향력이 큰 예술은 없"으며,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군중을 대상하여 언제 어디에서는 돌릴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이며 기동적인 예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총비서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0 여년 동안 문예 부문을 집중적으로 장악·지도하여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후계자 추대 과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의를 가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문학예술 창조 사업'에 대한 그의 지도와 후계자 추대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관련해서는 외부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2. 북(조선)에 의하면, 그가 대중적 지지와 신뢰를 얻은 것은 항일유격대 출신 원로들이 그를 후계자로 추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후계자로 추대되는 과정에서 항일유격대 출신 원로들로부터 일치된 찬동을 받았다고 한다. 1970년대 초에 당과 군대, 국가 기관을 장악 지도하고 있던 유일한 세력은 항일유격대 출신 원로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3. 북(조선)에 의하면, 그가 후계자로서 이룩한 가장 커다란 '업적'은 '김일성주의의 정식화'라고 한다. 그는 아직 이론 체계가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에는 그저 민족 자주사상으로 알려져 있었고, 또한 조선로동당 안에서는 '주체적 혁명 사상'으로 논의되고 있었던 초기의 주체사상(Juche idea)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정식화하여 주체철학, 주체의 사회·역사적 원리, 영도 방법의 3대 체계로 이루어진 김일성주의(Kimilsungism)를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북(조선)의 문헌들은 초기의 주체사상을 맑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그리고 완성된 전일적 이념 체계로 정립하여 김일성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김정일 총비서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8일의 '특별 보도'에서도 그의 사상·이론적 업적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로동신문』 10월 10일자 사설에서도 '김정일 동지의 사상·리론'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에서는 수령을 정치가 이전에 먼저 사상·이론가로 보고 있으며, 수령의 업적들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상·이론적 업적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그가 김일성주의를 정식화한 것은 수령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북(조선)에 의하면, 그는 후계자로 추대되기 전후 기간에 당의 사상 사업에서 일대 쇄신을 불러일으켜 당의 통일·단결을 획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군을 지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공적을 쌓았고, 경제 분야에서도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북(조선)은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집권당의 정치적 지도에 의하여 운영·관리되는 국가 체제며, 집권당의 최고 지도자는 총비서다. 김일성 주석이 총비서로 있었던 지난 시기에도 그와 함께 후계자로서 당을 이끌어온 또 한 사람의 지도자는 김정일 비서였으며, 1980년 10월 이후 당 사업의 영도권은 차츰 후계자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후계자의 지도 체계를 확립하는 문제에 관하여 김정일 총비서 자신도 이렇게 지적한 바있다.

"당의 령도의 계승 문제란 당의 정치적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계승하는 후계자를 내세우고 그의 지도체계를 세우는 문제입니다. 로동 계급의 혁명적 당을 창건하고 혁명을 개척한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하며 수령의 위업을 빛나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후계자를 내세우고 그의 지도 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당이 변질되지 않고 당의 위업이 끝까지 수행될 수 있습니다.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교훈은 후계자를 옳게 내세우지 못하거나 또 후계자를 내세웠다 하더라도 그의 지도 체제를 바로 세우지 못할 때에는 배신자들에 의하여 당이 롱락되고 그 위업이 파탄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북(조선)의 독특한 정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후계자'라는 특수한 지위는 수령이 되기 이전에 대기 상태에 있는 지위가 아니라 수령과 함께, 또는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언제나 수령의 "가장 가까운 동지, 가장 충실한 방조자로서 우리 당을 진두에서 조직령도"해 온 최고 지도자의 지위라는 것이다. 10월 8일의 '특별 보도'에서는 김정일 총비서가 "일찌기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지금까지 전당, 전군, 전민을 이끌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특별 보도'의 내용 가운데 그를 조선로동당의 '공인된 총비서'로 추대되었음을 선포한다고 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인된 총비서'라는 표현 속에는 추대 이전 시기에 아직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총비서의 지위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추대란 총비서에 대한 전당적인 공인, 또는 공식화 절차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아직 공인되지 않은 총비서로서 당을 이끌어왔다면 3년 3개월의 수수께기는 쉽게 풀린다. 3년 3개월은 공백기가 아니었다.

(3) 총비서 '취임'은 있었는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절대권력의 상징인 이른바 「수령」을 나타내는 명실상부한 직책이다. 따라서 그의 총비서 취임은 북한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임이 틀림 없다"고 한 이종석 씨의 분석이 설명하고 있듯이 총비서 추대는 수령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계하는 정치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10월 8일의 '특별 보도'도 총비서 추대의 정치적 의미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것은 "당과 혁명 발전에서 획기적 의의를 가지는 력사적 사변"이라고 지적했다. 후계자의 승계는 소련공산당의 경우에 후르시쵸프-고르바쵸프로,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경우에 임표-화국봉으로 이어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사회주의 정치사에서 그 성공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뿐아니라 북(조선) 정치사에서도 처음으로 진행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이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조선로동당이 수령의 지위를 어떠한 방법과 절차로 승계하고 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북(조선)이 말하고 있는 수령이라는 특유의 개념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북(조선)의 주장에 의하면, 수령을 당과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 지휘관의 지위와 역할에 국한하여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김정일 총비서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그러나 수령을 단순히 최고 지휘관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줄임) 수령과 전사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지휘하는 사람과 지휘 받는 사람의 관계로만 리해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지휘하는 사람은 지휘할 권리만 있고 지휘 받는 사람은 지휘에 복종할 의무만 있다고 보면 그것은 순수 권리와 의무의 관계이지 동지적 사랑과 혁명적 의리에 기초한 관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개인주의적 생명관에 기초한 부르죠아 민주주의에서는 지휘하는 사람과 지휘 받는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권리와 의무의 관계로 봅니다. 부르죠아 민주주의적 견지에서는 혁명적 수령관을 제대로 리해할 수 없습니다. 수령은 어디까지나 사회정치적 집단의 생명의 중심이라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동지적 사랑과 혁명적 의리에 기초한 관계"란 사회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수령과 전사의 관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전사란 정치적으로 각성된 대중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 있듯이 그는 '개인주의적 생명관'에 대치되는 '집단주의적 생명관'과 이른바 '혁명적 수령관'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안에서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 혁명적 수령관은 사회정치적 집단도 고유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독특한 생명관을 이론적 기초로 하여 성립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의 핵심이 된다. 다종다양한 생명 유기체들 가운데서 오직 사람만이 사회정치적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니게 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은 사회정치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회적 집단의 성원들 가운데는 사적인 생활 공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회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의 견지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력이 없거나 아주 미약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에서 모든 집단이 다 똑같은 사회정치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부패무능하고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는 집단에게는 사회정치적 생명력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매우 미약하며 죽어가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집단은 자연발생적으로 사회정치적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수령을 중심으로 단결한 혁명 활동을 하는 집단만이 사회정치적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는 논리에서 북(조선)이 주장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의 핵심 명제가 부각된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 핵심 명제를 "혁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령은 정치적 생명을 주고 혁명가로 키워주는 은인이고 스승이며 보람찬 삶과 행복을 안겨주는 어버이"라고 수사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북(조선)에 의하면, 그가 말한 '은인', '스승', '어버이'라는 수사적 개념들이 표현하고 있는 실체는 위에서 말한 '동지적 사랑과 혁명적 의리에 기초한 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수령관'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령은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고 취임하는 그런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수령의 공식 지위인 당 총비서도 선출할 수 없는 지위가 되는 것이다. 저들에게 있어서 당 총비서라는 지위는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이 추대하는 수령의 지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총비서 추대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를 '선거'한다고 규정한 조선로동당 규약 제24조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조선로동당은 "그 어떤 실무적 절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당적인 일대 정치적 사업으로 당의 최고 령도자를 추대한 것은 로동 계급의 당 건설력사에 일찍이 없었던 사변"이라고 하면서 "우리 식의 당 조직건설의 최고 정화"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후계자가 비록 법률상(de jure)의 총비서는 아니었지만, 이미 사실상(de facto)의 총비서로 지위와 역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선출이라는 규약 상의 절차를 밟지 않고 '공인된 총비서'로 추대하는 정치적 절차만을 밟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조선로동당은 각급 당조직들의 대표회들을 지난 9월 하순부터 줄이어 개최하고, 그 대표회에서 당 총비서를 선출한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총비서로 추대하는 문제를 토의하고 "모든 대표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찬동 속에" 그를 "총비서로 추대할 데 대한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지난 10월 8일 "전당의 의사에 따라" 그가 "당의 공인된 총비서로 높이 추대되시였음을 엄숙히 선포한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추대'라는 개념과 '취임'이라는 개념은 얼핏 보아서는 별반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우 대통령은 반드시 선거라는 절차를 걸쳐 취임해야 하지만, 저들의 경우는 다르다. 북(조선)의 경우, 총비서 추대는 후계자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식 선출하는 절차를 밟고 나서 피선된 총비서가 당대표들과 인민들 앞에서 취임식을 거행하는 방식으로는 진행될 수 없었다. 저들의 논리에 따르면 수령에게는 임기가 없으므로 수령의 공식 지위인 당 총비서와 국가 주석에게는 퇴임이나 취임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선거에서 취임식으로 이어지는 국가 지도자 선출 방식은 자본주의 정치 문화에 익숙한 우리쪽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선거-취임 방식으로 수령을 선출하는 것은 저들의 정치 문화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저들의 경우 총비서로 추대되었음을 10월 8일의 '특별 보도'를 통해 선포한 것이 전부였고, 실제로 총비서 취임식은 없었으며 오로지 총비서 추대를 축하하는 대중적인 경축 행사만이 북(조선) 전역에서 동시 다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지금 총비서 추대 문제와 관련하여 남(한국)의 언론은 주로 '취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미국의 언론들은 '선출(election)', '서임(investitute)', '지명(name)', '임명(appointment)', '즉위(ascension)', '거양(elevation)'이라는 표현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10월 8일의 미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James P. Rubin)의 공식 논평에서는 '임명(appointment)'과 '선출(election)'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부정확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추대'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추대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10월 8일의 '특별 보도'를 통해 총비서 추대 사실을 선포한 주체일 뿐이며, 추대 주체는 북(조선) 전역에 있는 당 조직들의 대표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0월 8일의 '특별 보도'는 추대 주체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대표회, 도(직할시) 대표회, 성, 중앙 및 도당 기능을 수행하는 당 조직들의 대표회들"이라고 명기하였다. 당 중앙위원회가 추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외교안보연구원의 서동만 교수는 총비서 추대를 이러한 북(조선)의 정치 현실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김정일 비서가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1993년에는 국방위원장에 취임할 때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추대되는 절차를 밟았는데, 이번 총비서 추대 과정에서는 그러한 공식 절차가 없었고 군, 도, 시 등의 당 대표회에서 추대한 것만 가지고 전당의 의사로 추대된 것으로 간주했음을 지적하고 "당 중앙위원회도 열지 못할 사정이 당 내부에는 발생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것은 주관주의적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서 교수는 그의 기고문에서 "추대란 선출의 높임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해설하였지만, 추대와 선출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수령 추대'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대통령 선출' 사이의 차이만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지, 단순히 높임말의 용법 차이가 아니다.

(4) 3년 3개월은 '군부 통치기'였는가?

10월 8일의 '특별 보도'를 발표한 주체가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문제로 등장한다. 조선로동당은 총비서 추대를 선포할 때, 왜 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단독으로 선포하지 않고 당 중앙군사위원회(Central Military Commision)와 공동으로 선포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로동당 규약에 의하면 당 중앙위원회 안에는 크게 나누어 정치국과 비서국이라는 두 개의 국(two bureaus)과 군사위원회와 검열위원회라는 두 개의 위원회(two commisions)가 있는데, 당 중앙군사위원회란 당 중앙위원회의 한 기관인 군사위원회를 말한다. 당규약에 의하면,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당 군사 정책 수행 방법을 토의·결정하며 인민군을 포함한 전 무장력 강화와 군수 산업 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지도하며 우리나라의 군대를 지휘한다"고 한다. 이처럼 중앙군사위원회가 군사 노선과 정책을 수립하고 군에 대한 정치지 도를 총괄하는 당 기관이라고 한다면, '사회주의 헌법'에 나와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National Defense Commission)'는 국가의 전반적 무력을 지휘·통솔하는 국가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기관인 국방위원회는 산하에 인민무력부를 두고 있다. 조선로동당은 1970년 11월에 열렸던 당 제5차 대회에서 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안에 군사위원회(Military Affairs Committee)를 설치한 바있는데, 이 이름은 나중에 중앙군사위원회로 바뀌였다. 당 중앙위원회는 산하에 있는 비서국 전문 부서들 가운데에도 군사부를 두고 있으며, 도(직할시), 시(구역), 군의 당위원회 산하에도 각각 군사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에 이르는 범위에서 각급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게 된 원인은 군에 대한 당의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인민군 안에는 이미 1950년대부터 당 위원회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1960년대 말에 와서 '군벌 관료주의자'들이 생겨나 군부 안에 있는 "당 조직과 정치 기관들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좌지우지하였을 뿐아니라 총정치국이 당 중앙위원회의 해당 부서들과 련계를 가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와 통제를 거부해 나섰"고, 이로써 "결국 인민 군대 안에서 당 정치 사업을 심히 약화시키고 당의 군사 로선을 제대로 관철할 수 없게 하였으며 군민 관계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조선로동당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당의 지도·장악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당 중앙 군사위원회와 각급 지방 군사위원회를 설치했으며, '군사 중시 정책'을 강조해 왔다. 당과 군의 관계 문제와 관련하여 일찌기 김정일 총비서는 이렇게 강조한 바있다.

"당이 군대를 장악하지 못하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으며 혁명을 령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군대를 틀어쥔 당만이 불패의 위력을 지니고 혁명과 건설을 승리에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혁명을 령도하는 당은 군대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혁명하는 당에 있어서는 당권이자 군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당과 군대를 틀어쥐고 혁명을 끝까지 하려고 합니다. 당과 군대는 인민의 운명이며 생명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을 살펴보면, 북(조선)이 이번에 총비서 추대를 선포하는 주체에 왜 당 중앙군사위원회를 포함시켰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서동만 교수는 "당 중앙위원회를 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당 중앙위원회의 실체가 모호해진다"고 주장하고 "현 북한 체제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는 당 군사위원회라고 해석"하면서, 10월 8일의 '특별 보도'의 실제적인 주체가 당 중앙위원회가 아니라 당 군사위원회라고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억측은 "군부에 의거한 위기 관리 체제가 계속된다", 또는 "김정일이 당 총비서에 취임함으로써 통치가 정상화되어 종래의 당 우위 체제가 회복된다기보다는 군 우위가 당, 정 양면에 걸쳐 관철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릇된 추론을 낳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연철 씨도 3년 3개월 기간의 정치 현실을 '군부 중심의 위기 관리 체제', 또는 '군부 정치'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는 논거로 1994년 이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나 최고인민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는 이것이 "군부가 북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는 여기에 더하여 정치·사회적인 군사화의 강화 현상, 이데올로기의 군사화 현상, 김정일 총비서의 공식 활동이 군 관련 행사에 집중되고 있는 현상 등을 열거한다. 그러나 당 총비서가 없는 '몽상(蒙喪)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당 총비서가 주재해야 할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당 규약에 명시된 공식 회의)는 열지 못하는 조건에서 당 중앙위원회 '책임 일군 회의'를 가동해왔다는 점, '몽상 기간'에 최고인민회의는 열리지 않았지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통하여 국정 운영의 의안들을 처리해 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당 기관과 국가 기관의 기능이 정지된 '군부 정치'가 생겨났다는 설은 설득력이 없어진다. 또한 다양하게 포착되는 '군사화 현상'들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조선로동당이 오랜 전통으로 지녀오고 있는 군사 중시 정책의 일환일 뿐이지, 그런 현상들을 군부가 당과 국가의 권력을 장악·지도하고 있다는 논거로 제시할 수는 없다. 김연철 씨는 지난 3년 3개월 동안 "주요 정책 결정이 군 통수권자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수령의 후계자가 1980년대부터 이미 당 사업을 장악·지도해 왔고, 특히 지난 3년 3개월 동안은 사실상의 총비서로 일해 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5) 김정일 시대의 전망

이종석 씨는 "김정일은 자신의 취임을 계기로 위기 탈출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정책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면서, "김정일 정권의 경제·외교 정책은 그들이 어떤 말로 표현하건 간에 구조적으로 개방과 구 서방과의 관계 개선으로 틀지워져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전망은 "보다 개방 지향적인 정책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내놓은 전망도 다르지 않다. 1997년 10월 9일자 『뉴욕타임스』는 니콜러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가 쓴 도쿄발 기사에서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권력에 오른 것은 부친의 3년 상이 끝났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더불어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감질나게 보여주는 일련의 암시를 주었다"고 관측했다. 이 신문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의 암시는 "외국인 투자의 유치, 그리고 농촌에서 생겨나고 있는 식량과 의류를 판매하는 사적 시장의 증대와 같은 온건한 경제적 자유화 조치"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1997년 10월 10일자에 「북(조선)의 왕조 정치(Dynastic Politics in North Korea)」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설도 북(조선)은 농업 개혁과 시장 개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뒷받침할만한 명확한 논리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재 북(조선)이 경제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혁·개방 정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불가피설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북(조선)이 오늘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전문가들은 분석의 시각을 이러한 객관적 조건에만 고착시키고 있을 뿐아니라, 북(조선)이 하루빨리 개혁·개방하기를 바란다는 일종의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그 고착된 시각에 일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북(조선)의 주체적 조건을 간과하는 인식의 오류를 낳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조선)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난관을 겪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북(조선)의 전후 역사에서 지금 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1957년에서 1959년에 이르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 위기 상황은 "헐벗은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쌀은 다른 나라에서 사다 먹었고 집도 모자라 많은 사람들이 토굴에서 살고 있었"을 정도로 궁핍했으며, "그런데다가 대국주의자들이 우리 당이 자기들을 추종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왔으며, "당 안에서는 사대주의에 물젖은 종파분자들이 자기의 상전을 등에 업고 당의 로선을 반대하여 머리를 쳐들었"으며, 미국과 남(한국) 당국은 "<북진> 소동을 요란스럽게 떠들어 댔으며 전복된 착취 계급 잔여분자들을 사촉하여 우리 혁명의 전취물을 침해하고 우리 인민의 건설 사업을 파괴하려고 날뛰었"던 시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북(조선)이 취한 조치는 "대중적 영웅주의를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이른바 '천리마 작업반 운동'이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이 운동의 성과와 경험을 통하여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이라는 이른바 3대 혁명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천리마 작업반 운동'은 1975년에 와서 '3대혁명 붉은기 쟁취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지금 경제난을 겪고 있는 김정일 체제는 이른바 '붉은 기 정신'을 앞세우면서 '고난의 행군'으로 난국을 타개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김일성 주석이 30여 년 전에 제창했던 대중적 영웅주의에 기초한 천리마 작업반 운동, 그리고 그 성과와 경험을 더욱 심화·발전시켰다는 3대 혁명 로선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연속성에서 현재 상황을 분석해 보면,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북(조선)은 겉만 조금 바뀌고 속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국가 경영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북(조선)이 이처럼 수십 년동안 정책적 일관성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북(조선)의 국가 경영 전략이 유일 지도 사상인 김일성주의에 대한 절대화된 신봉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김일성주의를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방송을 장식하는 선전 문구로 보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주의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비판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것은 사회 전반에 절대적인 신봉 체계로 침투되고 체내화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일성주의 신봉 체계는 북(조선)이 저들 앞에 놓여 있는 난관을 자력으로 돌파해 나가겠다는 대중의 집단적 의지를 불러일으키면서, 실제로 1950년대 이후 오늘까지 이른바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 정신'을 앞세우는 매우 특이한 방식의 국가 관리 체제를 유지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체제는 앞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이 보장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는 김일성이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바꿔 가야 함을 뜻한다. 이것이 과거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직결됨은 필연적"이라고 하는 전문가의 주장은 북(조선)이 처해 있는 객관적 조건에 분석의 시각을 고착시키고 있기 때문에 주체적 조건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일면적 분석이라는 점, 그리고 북(조선)의 위기 관리 정책의 일관성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고 김일성주의 신봉 체계로 안받침되어 왔는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일종의 몰역사적인 분석이라는 점에서 논리적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북(조선)의 경제난과 관련해서 김연철 씨의 주장은 좀더 구체적이다. 그는 올해 식량난이 더욱 악화되었고, "배급제의 위기로 식량의 사적 생산과 거래가 증가하는 등 비공식 부문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고 단정한다. 지금 북(조선)에서 식량 생산량은 크게 부족하지만 식량 공급 체계(그들은 '배급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공급 체계[public distribution system]라는 표현을 쓴다)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북(조선)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견딜 수 있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식량 공급 체계를 효과적으로 가동하고 있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식량 공급체계의 가동은 주민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당의 정치적 지도와 정무원의 행정 실무를 통하여 운영·관리되고 있다. 문제는 김연철 씨의 주장처럼 과연 식량을 사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는 비공식 부문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식량의 비공식 부문이라고 하면 협동농장원들이 마치 식량을 당국의 눈길을 피하여 몰래 생산하는 개인 경리가 자리잡히고 식량을 사적으로 판매하는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데, 협동농장원들이 사적으로 여유 양곡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여유 양곡을 판매하는 것은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홍수 피해가 컸던 일부 지역에서 양곡을 사적으로 판매하는 암거래의 일탈 현상이 생겨나고 있을 거라는 추론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양곡 암거래가 시장 체제로 형성되었을 뿐아니라 북(조선)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면서 식량 공급 체계 전반이 마비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과장·왜곡이다. 농민 시장에서는 개인 터밭, 부업 축산, 가내 부업으로 생산한 농축산품, 생활 필수품을 팔고 있다. 농민 시장에 관해서 북(조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장려책은 아니지만 유지·보존 정책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도회지의 사무원이나 생산지의 노동자들 가운데 공급 체계를 통하여 충분한 부식물과 소비품을 얻을 수 없는 경우, 농민 시장을 찾아가게 되며, 그래서 부식물을 구하러 등짐을 지고 다니는 주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굶주린 주민들이 마치 유민들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하는 소문들은 유언비어가 아닐 수 없다. 북(조선)의 식량 공급 체계는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파탄적 상황은 아니다. 미 의회 조사국(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의 북한 전문가 래리 닉시(Larry A. Niksch)가 한 표현대로, 북(조선)의 식량난은 "어려움은 겪겠지만 그럭저럭 버텨낼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그런데 김연철 씨의 주장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이러한 공급 체계 마비 현상이 협동농장 뿐아니라, 공장과 기업소들에도 일반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적 생산과 거래'라는 '불법 현상'이 급증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장은 북(조선)에서는 무너지고 있는 사회주의적 공급 체계를 포기하고 이미 조금씩 묵인해 오고 있는 시장 경제 체제를 합법화하는 자본주의적 개혁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보면서 "개혁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보다 빠른 속도로 확대될 것"이라고 보는 근거 없는 관측을 낳는다. 그는 "하부 기업들의 수평적 거래를 합법화"하는 것과 "형식적인 독립 채산제를 보다 현실화"하는 것을 이른바 '개혁 조치'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북(조선)은 하부 기업들의 수평적 거래와 독립 채산제를 집단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경제 관리의 보조 수단으로 인정하고 이를 정상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다만 자재가 모자라거나 일부 단위 기업소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와 본위주의 때문에 일부 유통 체계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치 하부 기업들의 거래를 불법적인 것처럼 묘사한다면 그것은 사실 왜곡이다. 또한 독립 채산제가 형식적이기 때문에 현실화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판단 착오와 왜곡된 주장은 일부 전문가들이 북(조선)의 생산 현장과 경제 관련 1차 자료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로 '월남 귀순자'들이 전해 주는 말이나 '내외통신'의 발표내용을 일방적으로 듣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북(조선)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농민 시장, 독립 채산제, 기업소들의 수평적 거래를 사회주의 사회의 과도적 성격을 반영한 경제적 공간으로 인정하고 이를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으므로 일부 전문가들이 추론하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자본주의적 개혁'의 조짐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김정일 총비서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과도적 성격을 반영한 경제 법칙과 범주는 집단주의적 원칙을 더 잘 실현하도록 자극하고 통제하는 경제적 공간으로 리용되여야 합니다. 과도적 성격을 반영한 경제 법칙과 범주는 낡은 사회의 유물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리용하는가 하는데 따라 집단주의적 원칙을 실현하는데 효과적으로 복무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조장시키는데 리용될 수도 있습니다. (줄임)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가치 법칙의 작용과 관련한 원가, 가격, 리윤, 수익성 같은 경제 범주도 인민 경제의 계획적 균형적 발전과 기업 관리의 합리화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정확히 리용하여야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 총비서가 지난 몇 해동안 군부에만 의존하면서 경제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경제 사업은 일부러 외면해 왔다고 보고 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판단의 근거는 김정일 총비서가 1996년 12월 7일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한 뒤 당 간부들에게 한 비공개 연설에서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나에게 절대로 경제 사업에 말려들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경제 사업에 말려들면 당 사업도 못하고 군대 사업도 할 수 없다고 여러 번 당부하시였습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북(조선) 당국은 이 비공개 연설과 관련하여 그런 연설이 아예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한 바있는데, 설사 그 연설이 실제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대목에 대한 일부 전문가들의 해석은 매우 자의적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 총비서가 '골치 아픈' 경제 문제를 아예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난이 더욱 심각해진 것처럼 추론하고 있는 데 이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기서 경제 사업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은 경제 부문에 대한 당적 지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정무원과 그 산하 기관들이 수행하고 있는 경제 사업, 곧 경제 부문의 행정 실무 사업을 당의 지도부나 당 기관들이 대행하지 말라는 의미다. 경제 부문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경우 당의 지도부가 행정 실무 사업에 개입하는 시행 착오가 줄곧 문제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조선)에서의 당 사업과 경제 사업의 상호 관계를 정확히 가려보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문구에 매달려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당의 지도부가 경제 사업에 말려들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북(조선)의 공식 문헌에 나오는 당 사업의 원칙에 관련된 지침이다. 당 지도부가 경제난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경제 사업을 일부러 외면하려고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지난 3년 3개월의 기간 동안 김정일 총비서가 공장, 기업소에 대한 현지 지도를 나간 경우가 매우 드문 것은 사실이지만, 현지 지도를 모두 외부에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당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공개하지 않는 것도 많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설사 생산 현장에 대한 현지 지도가 드물다고 해서 경제 부문에 대한 정치 지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북(조선) 당국은 생산 현장에 대한 현지 지도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있을 뿐이고, 요즈음처럼 경제난을 겪고 있는 시기에는 당의 지도부가 생산 현장에 대한 당적 지도에 더욱 힘을 기울이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비단 북(조선)이라는 특정 대상에 대한 분석 뿐아니라, 일반적으로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한 분석이 모두 그러하듯이 주체적 조건을 간과한다면 한 쪽만을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일종의 '시각 장애'를 일으키게 되며, 문헌 분석에서 역사학적 관점을 놓쳐버리면 평면적이고 분절적인 사고에 흐르기 쉽다. 역사학적 분석의 실종과 분절적 사고의 오류는 '체제의 개혁·개방'이 유일한 대안이며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적 사고와 결합되면서 엉뚱한 결론을 내놓게 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엉뚱한 결론이 전문가의 입에서 언론으로 전달되면서 아무도 의문이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지배적인 담론으로 정착되고 말았다는 데 있다. 통일 정책, 대북 정책, 통일 운동의 파행성과 시행 착오는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 교수는 "김정일로서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고 변화를 경제에 한정시킴으로써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려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관측하고 있는데, 이것은 황장엽 류의 담론에서 나올 법한 정경분리 방식에 의한 개혁·개방 정책을 뜻하며, 이른바 중국식 국가 경영 전략에 직결된다. 김정일 체제가 전통적인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수정하여 중국식 경제 개혁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는 관측은 몽상에 가깝다. 지금 북한 전문가들이 주문처럼 되뇌이고 있는 '중국식 개혁 불가피설' 보다는, 북(조선)의 경제 구조는 그 공업화 수준이 중국 베트남형이 아니라 동유럽형과 비슷하다고 보고, 북(조선)의 경제 개혁에는 체코나 폴란드가 경험했던 이른바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했던 미국 평화연구소(The U.S. Institute of Peace)의 스콧 스나이더(Scott Snyder) 연구원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에서 돋보이는 것은 '중국식 경제 개혁'이 아니라 '동유럽식 경제 개혁'을 제시하며 북(조선)의 공업화 수준에 걸맞는 개혁설을 거론했다는 점인데, 북(조선)의 경제 구조를 분석한 측면에서 보자면 스나이더 연구원의 관점이 서 교수보다 더 현실주의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나이더의 논리는 경제 구조 분석에서는 옳았지만, 경제 개혁 불가피설은 오류였다. 김정일 체제의 경제 전략이 김일성주의의 전통적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김정일 총비서가 자신의 경제 전략을 밝힌 1991년 7월 1일의 논문 「주체의 사회주의 경제 관리 리론으로 튼튼히 무장하자」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북(조선)이 난관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동시켜온 특이한 국가 경영 전략인 유일 사상 체계의 핵심 내용은 결국 '수령제'라고 볼 수 있다. '수령제'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일단 접어두고, 수령의 의도 의사가 조선로동당의 의도·의사로 확대되며, 온 사회에 거미줄처럼 조직되어 있는 각급 당 위원회들의 집체적 지도(이것을 '대안의 사업체계'라고도 부른다)를 통하여 전체 주민들의 의식 구조 속에 침투되는 이른바 '수령제 사회주의'라는 체제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수령의 지위를 계승한 김정일 총서기의 의도·의사가 어떠한가를 엿보는 것은 김정일 시대를 전망하는 데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일이 된다. 김정일 총비서의 생각을 보여주는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은 동구라파 나라들을 녹여버린 다음 우리나라도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습니다. 이 엄혹한 현실을 보고 과연 사회주의를 끝까지 건설할 수 있겠는가 하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비겁한 자들은 혁명의 기발을 버리지만 우리는 혁명의 붉은 기를 끝까지 지키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정력을 다 바쳐 당과 혁명에 끝까지 충실할 것이며 누가 뭐라고 하여도 당을 이끌고 전체 인민을 하나로 묶어세워 우리 앞에 나선 혁명임무를 기어이 수행하고 이 땅 우에 륭성번영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야 말 것입니다."

 

김정일 시대를 전망하는 문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김정일 총비서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실용주의에 기울어졌던 덩샤오핑 류의 개혁·개방론자가 아니라, '완성된 공산주의 혁명이론'이라는 김일성주의를 체계화·정식화한 '철저한 공산주의 정치가'라는 사실이다. 북(조선)의 주장에 의하면, 공산주의 정치가란 견디기 힘든 역경과 물질적 궁핍 속에서도 공산주의적 혁명 임무를 수행하는 이른바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가'를 뜻한다. 저들은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것은 지난날 어려운 시기에 혁명을 포기하고 역경에 굴복했던 이른바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수정주의, 투항주의를 용납하는 일이며, 민족성과 주체성을 저버리고 중국 같은 대국주의 세력에게 자기의 운명을 내맡겨 버리는 사대주의의 범죄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정일 총서기가 "우리가 더 빨리 발전하자면 다른 나라에서 새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분명히 대외 개방의 원칙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가 대외 개방 정책에 관해 말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새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아무 것이나 망탕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새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반드시 주체적 립장과 로동 계급적 원칙을 지켜야" 하며, 그래야 "그것이 우리 혁명과 건설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고 한 조건절의 의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정일 시대는 앞으로 남(한국)과 미국의 대외 개방 요구에 대해서 겉으로 전술적 탄력성을 보이며 대응하기는 하겠지만, 여러 전문가들의 개방·개혁 불가피설과는 달리, 속으로는 여전히 김일성주의에 기반을 둔 '우리 식 사회주의'의 체제를 고수하는 '붉은 시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1997년 11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