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사건에 대한 분석적 이해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황장엽 사건은 세상을 놀라게 한 '뜻밖의 사건'이었다. 분단 시대 반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상식과 고정 관념을 뒤엎으며 터져나온 뜻밖의 사건들이 한 두 차례가 아니었건만, 이 사건에서 사람들은 반(反)상식적인 의외성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분단 질서가 우리의 상식과 정상적인 판단을 뒤엎어버린 비정상적이고 반상식적인 현실임을 인정한다면, 이 사건이 그러한 분단 질서의 현실 한 복판에서, 분단 질서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도 전혀 무리한 판단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필연성을 밝혀내는 것이다. 지금 세인의 관심은 황장엽의 망명 동기가 무엇인가, 그의 망명에 남(한국)쪽에서는 어떻게 개입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쏠리고 있다. 이 사건의 전모에 관한 가장 확실한 파악은 아마도 조국통일 이후에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이 사건을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특히 1990년대 들어와서 개혁·개방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북(조선) 상층부의 내부 형편, 북(조선)의 개혁·개방 문제 대한 남(한국) 당국의 의도 같은 당면 문제들을 읽어내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황장엽의 망명 요청이 어떻게 귀결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직 결정되기 이전에 작성된 시론이다.


(1) 황장엽의 행적

황장엽은 1925년 함경북도 주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인 회사의 사무원이었다는 설도 있고,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면장을 지냈다는 설도 있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5년 내내 황장엽과 같은 반에 있었던 한 동기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학창 시절에는 맑스주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주을의 경성중학교와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년 동안 평양상업학교에서 주산과 암산, 경제학을 가르쳤다.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된다.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에 들어가면서 맑스주의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는 비상한 두뇌로 맑스주의를 공부하여 철학부 학생들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낸 가운데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한(조선)반도가 전화의 불길에 덮혀 있던 1950년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하여 '지독하게' 공부한 끝에 1953년 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후 복구 시기에 평양에 돌아온 모스크바대학 출신의 젊고 유능한 황장엽은 곧 북(조선) 학계에서 대표적인 맑스주의 철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1954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강좌장이 되었고, 1958년에는 과학원 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황장엽은 단지 학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정치인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959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차관급)에 올랐다. 1962년 10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이 되었고, 1965년 10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다. 이 무렵 '사회주의 과도기 문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맑스-레닌주의와 어긋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1970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72년 12월에는 제5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이 되었다. 1977년 12월 제6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으로 연임되었다.

그는 1980년 10월 김국태와 함께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사상담당 비서가 되었으며, 1984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72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어 1982년까지 3기를 연임했던 시기에 그는 의원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1983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에서 밀려나 1997년 2월 망명하기까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재직하였다. 1991년 허담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김용순과 함께 당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가 되었다. 그는 1987년 이후 망명하기까지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으로 대외 학술 교류을 추진해왔다.

(2) 학자 황장엽, 당료 황장엽

남(한국) 언론들은 황장엽이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를 '주체사상의 창시자'며, 북(조선) 권력의 핵심 인물이라고 부각시켰다. 과연 그럴까?

황장엽이 사상 이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때는 1956년 무렵부터였다. 그는 1956년 7월 북(조선) 과학원에서 펴낸 연구지 『력사과학』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가능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같은 해 5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천명된 평화통일론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는 그 무렵 과학원 역사연구소 철학연구실장의 직위에 있으면서, 같은 해 '8월 종파사건'으로 촉발된 당내 이론 투쟁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력사과학』 1957년 3호에「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대한 몇 가지 문제들」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당기관지 『근로자』에 실린 김후선과 함께 공동 집필한 논문에서 1920년대의 조선 공산주의운동을 '종파적 운동'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1930년대 김일성 주석이 이끌었던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사를 체계화하기 위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형성에 관련한 전국 철학토론회」를 주도하고 기조 보고를 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북(조선) 정권이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명제를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했으며, 1947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수립된 시점을 사회주의 과도기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규정하였다. 이로써 1920년대의 조선 공산주의운동사를 중시하였던 이청원류의 세력과, 북(조선) 정권이 중국공산당의 이론에 기초한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연합 독재'의 단계에 있다고 보았던 송예정류의 세력은 이른바 '반당 종파분자'들이라는 비판·공격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 격변기의 이론 투쟁에 관련해서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사를 조선 공산주의운동사의 주체적 맥락으로 공식화하는 이론 투쟁이었다.

② 정치적으로 보면, 중국공산당에 대해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던 연안계 세력을 비판·몰락시키고 조선로동당의 독자성을 정립하는 이론 투쟁이었다.

③ 일제 식민지 시기에 활동했던 일본 유학 출신의 좌파 이론가들이 물러나고 모스크바 유학 출신의 새로운 세대가 당내 이론 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한 전환기였다.

황장엽은 이 전환기의 이론 투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9년에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1965년에는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황장엽은 대표적인 학자며 이론가라는 칭호를 들을 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이후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풍부화, 정교화하는 일련의 발전 과정에서 황장엽의 역할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황장엽 자신도 정체 불명의 남(한국)인사 A에게 보낸 1996년 11월 13일자 비밀 편지에서 "1966년부터 시작하여 1970년까지 새로운 철학사상을 개척했"다고 인정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20주년 기념 연설에서 황장엽이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종합대학의 제1생명이고 영광스런 전통이다"고 말했던 것은 1966년 9월 30일의 일이었다.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정치적 담론을 처음으로 공식 천명한 사람은 황장엽이었다.

황장엽 자신의 말에서도 확인되었듯이 1970년도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발전 과정에서 커다란 전환기로 기록된다. 조선로동당이 맑스-레닌주의와 더불어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공식화하였음을 발표한 것은 1970년 11월 2일에 열렸던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였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발전 과정에서 황장엽의 역할이 1970년대 중반로 끝나게 된다는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주체사상의 이론적 발전이 김정일 비서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때부터 주체사상의 이론 작업에는 국내파 제2세대 이론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김정일 비서가 당비서로 취임한 직후인 1973년 10월에 철학연구소 역사적 유물론 연구실이 펴낸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창시하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울데 대한 사상과 그 빛나는 구현」이라는 글에서는 처음으로 유일 사상 체계가 강조되었다. 그 뒤로 김정일 비서는 1976년 2월 19일 전국 당선전 활동가 강습회에서 한 연설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가지 과제에 대하여」에서 맑스-레닌주의의 시대적 한계와 지역적 제약성을 지적했고, 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공식화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의 흐름은 1974년 4월 14일 김정일 비서가 당간부들에게 발표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원칙」에서 집약되었으며, 1976년 10월에 발표한 김정일 비서의 논문 「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올바로 인식할 데 대하여」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북(조선) 철학계에서 주체사상의 기본 체계를 정립·완성한 '로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김정일 비서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발표된 것은 1982년 3월 21일의 일이었다. 1986년 7월 15일 김정일 비서는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에게 한 연설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해명함과 동시에 소련과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비판하였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김정일 비서가 정립한 주체사상의 이론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과 중국의 개혁·개방론을 비판해왔으며, 따라서 1980년대 중반 이후 황장엽의 생각을 사로잡게 되었던 중국식 개혁·개방론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1960년대 후반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그러니까 김정일 비서의 주체사상 체계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시기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던 최고의 이론가는 누구였을까? 세간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황장엽이 아니라 양형섭이었다. 양형섭은 황장엽과 같은 시기인 1950년에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하여 같이 철학을 전공했으나, 황장엽이 대학에서 교육사업에 나선 것과 대조적으로 양형섭은 사상·이론을 정립하는 이론가로 나섰다. 그는 1970년대에 맑스-레닌주의 연구소장과 사회과학원장을 역임했다. 그가 사회과학원장으로 있었던 1972년에 열린 사회과학자대회에서 그는 주체사상을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사상으로 채택할 것을 선언했다. 양형섭은 이미 1970년대에 당중앙위원회 사상담당 비서,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어 당서열에서도 황장엽보다 우위에 있었다. 양형섭은 현재 최고인민회의 의장이며,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핵심 당료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장엽의 지위는 격하되기 시작했다. 양형섭이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던 1983년에 황장엽은 자신이 재직해오던 의장직에서 외교위원장직으로 밀려났다. 그 뒤로 그의 활동 범위는 당중앙위원회 사상담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서의 의원외교, 그리고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으로서의 학술 교류 사업에 국한되게 된다. 1993년 그의 당직은 사상담당 비서에서 국제담당 비서로 바뀌었다. 국제담당 비서로 재직하다가 사망한 허담의 뒤를 이어 그 무렵 국제담당 비서가 된 사람은 황장엽말고 김용순도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당 국제부장, 국제담당 비서 등을 거치면서 당의 국제사업을 담당했던 사람은 사실 황장엽이 아니라 김용순이었다. 현재 김용순은 대남담당 비서, 외교위원회 통일정책위원장, 세계인민과의 연대성위원회 위원장,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가지고 당의 대남 사업과 국제 사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당중앙위원회에서 국제 사업을 실질적으로 책임맡는 직책은 국제담당 비서가 아니라 국제부장인데, 최근까지 국제부장으로서 당의 국제 사업을 총괄했던 사람은 현준극이었다. 현준극은 황장엽 사건 직후, 그 사건에 관련되었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해임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해임에 대하여 지난 2-3년동안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과 국제부장 현준극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온 당 국제 사업이 커다란 변동을 맞고 있다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외부 언론들은 황장엽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결같이 "주체사상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느니, "권력 투쟁의 산물"이라느니, "북한 지도 체제의 내부 균열"을 반증한다느니 하는 이른바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견해를 여과없이 대서 특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망명을 비유하자면 소련에서 공산주의의 시조인 맑스가 탈출한 것과 같으며, 자유주의의 신봉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을 버리고 망명한 것과 같다"고 썼다. 그러나 황장엽은 각국 언론들이 지금 부각시키고 있는 것처럼 '주체사상의 창시자'도 '북(조선) 최고의 사상이론가'도 아니고, '권력의 핵심적인 인물', '외교의 핵심'도 아니다. 황장엽을 여러 차례 만났던 미국의 전문가 셀릭 해리슨(Selig Harrison)에 의하면, 황장엽은 북(조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실세 정치가는 아니며, 당서열로 따져도 25위 이내가 아니라, 65위 또는 70위 이내라고 한다. 남(한국)의 한 언론은 황장엽을 가리켜 "그저 명예 퇴직의 날을 기다리는 한 원로 정치학자였을 뿐이다"고 평하기도 했다.

1980년대 의원 외교로 활동했던 경험과 주체사상 이론가라는 명성을 가지고 황장엽은 1993년에 당 국제담당 비서를 맡은 뒤에 망명 요청 이전까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또는 학자의 신분으로 학술 교류차 외국 방문을 자주하였다. 그는 1994년 10월 쿠바, 우루과이, 브라질을 방문했고, 1995년 11월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1996년 1월 러시아를, 6월에는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리고 1997년 2월의 일본 방문은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해외 방문이 된 셈이다. 박철언의 말을 따르면, 황장엽은 1997년 4월 미국의 카터 센터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자신과 황장엽이 초청되었다고 하면서, 황장엽이 이 기회를 틈타 망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여러 정황과 경로를 통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3) '파생론'의 파산 이후 '수정주의'로

황장엽은 김일성 주석의 급서 뒤에 조선로동당의 지도부가 주체사상을 체제 유지에만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이 '안타까움'은 당 지도부와 황장엽 자신이 정치적으로 도저히 양립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까지 차츰 악화되어 왔으며, 종당에는 '망명'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고, 당 지도부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배신'의 길을 택한 셈이 되었다.

여기서 황장엽이 주체사상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달리하게 되었으며, 결국 이른바 '신주체사상'이라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황장엽은 1995년 3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국제 주체재단 이사회'라는 이름으로 3백21쪽에 이르는 방대한 논문 초안 「인류의 광명한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두 개의 집필 요강 「현시대와 당면한 력사적 과제」, 「철학의 사명」을 작성했다. 그는 이 논문 초안과 집필 요강을 세계 각 나라의 주체사상 연구회에서 발표하기 위하여 비밀스럽게 작성해 두었다고 한다. 그는 이 논문 초안의 머릿말에서 "일반적으로 주체사상이라고 하면 조선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께서 창시하시고 김정일 령도자께서 계승발전시켜 나가시는 정치적 지도사상으로만 리해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주체사상은 "인간중심 사상의 보편적 진리"이므로 "조선의 정치적 지도사상"으로 국한되어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1996년 11월 10일자로 작성했던 자신의 편지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났는데, 그는 "원래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밝히기 위해 창시된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이 학설은 왜곡되어 독재의 무기로 이용되고, 남(南)의 청년학생들을 기만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적었다. 황장엽의 수양딸 박명애는 1995년 12월 서울에 왔을 때, 남(한국)의 한 언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에 서울에 오기 전에 아버지를 만났다. 그분은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분이 원래 창시한 사상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주체철학의 변질을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는 요즘 세계에 펼쳐 보이고자 하는 자기의 주체철학을 별도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언젠가 빛을 볼 것이다. 틈틈이 쓰시는 내용을 내가 평양에 갈 때 조금씩 넘겨주신다."

그는 정체 불명의 남(한국)인사 A에게 보낸 1996년 11월 13일자 비밀 편지에서 "지금 짬짬이 눈을 피해가며 써놓은 것도 진리를 적라라하게 전달하는 데는 부족점이 있음. 이 사상을 깊이 아는 사람을 아직 양성하지 못했음. 지금까지 쓴 것만이라도 마음 놓고 한번 다시 검토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여 남겨두었으면 하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라고 적었다. 남(한국)언론은 황장엽이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새로 쓰기 시작한 사상·이론을 '신주체사상'이라고 불렀다. 황장엽은 자신이 망명하기 2년여 전인 1995년부터 '신주체사상'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한국)언론에 부분적으로 밝혀진 '신주체사상'의 핵심내용을 검토해보면 황장엽이 주체사상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가치법칙, 그리고 개인주의를 용인해야 한다는 견해가 눈길을 끌고 있다. 그가 "시장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결합시켜주는 장소이며 시장을 발전시켜야 사람들의 창조적 열성을 적극 발양할 수 있다"고 주장한 대목이라든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고 개인의 이익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 개인적 존재라는 것을 무시한 잘못된 생각이다"고 주장한 대목에서 그의 수정주의적 견해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황장엽의 '신주체사상'이 내세우고 있는 수정주의적 관점을 만일 주체사상의 정통적 관점에서 비판한다면 대략 아래와 같은 논점이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① 주체사상을 북(조선)의 지도사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기존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보편성', 또는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관념론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

②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가치법칙을 용인하려는 개혁·개방론에 기울어져 있다는 점.

③ 사회주의적 집단주의가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개인주의를 인정하고 자본주의적 사회관과 인간관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황장엽은 어떻게 하여 이른바 '신주체사상'이라는 수정주의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1970년대 이후 주체사상의 이론적 변천 과정에서 황장엽의 사상·이론적 관점이 어떤 궤도를 타고 움직여 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북(조선)에서 전개되어온 주체사상의 이론적 변천 과정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전문적인 검토가 요구되지만, 이 글에서는 일단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면서 황장엽의 사상·이론적 관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북(조선)의 주체사상 이론가들은 이미 1980년대부터 맑스-레닌주의의 제한성을 강조하면서, 주체사상이 그 제한성을 극복한 포괄적이고 독창적인 사상 체계로 완결된 사상이라고 보고 있다. 선행 철학에 대한 주체사상의 계승성·연속성 및 혁신성·독창성 가운데서 혁신성과 독창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를 이러한 새로운 전환의 기준점으로 삼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1980년 10월에 열렸던 제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규약에서 당의 지도 사상을 오직 주체사상 뿐이라고 밝힘으로써,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모두 당의 지도 사상으로 규정했던 1970년대의 사상 노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북(조선)이 주체사상의 기초를 정립한 최고 권위의 논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김정일 비서의 「주체사상의 대하여」(1982년)에 관련하여 북(조선) 철학계의 해석 및 해설들이 이 기간에 쏟아져 나오면서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85년 당창건 40돌을 기념하여 10권짜리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가 출판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총서의 제1권과 제2권은 주체사상의 철학 체계를 집대성한 문헌인데 황장엽은 이 문헌의 집필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1980년대 북(조선)의 철학계에서 논의되었던 주체사상의 '사상적 정통성'에 관한 담론들은 주체사상이 맑스-레닌주의에 그 근원을 두고 파생되어 나왔다는 이른바 계승·발전론의 관점을 폐기하고, 주체사상 안에 맑스-레닌주의가 일부분으로 포괄되어 있다고 보는 포괄론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대하여 북(조선)의 주체사상 이론가 박승덕은 "세계의 본질과 그 변화발전의 합법칙성에 대한 견해(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을 뜻함-인용자)와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하는 관점과 립장을 결합시킨 철학적 세계관의 구조는 주체철학에 의하여 마련되였다"고 밝힌 바있다. 북(조선) 철학계에서 1980년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포괄론의 기본 명제들을 정리해보면 대략 아래와 같은 논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① '철학의 근본 문제'와 관련하여 선행 철학에서는 물질-의식(존재-사유)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명에 머물러 있었는데, 주체사상은 세계-사람의 관계 문제를 새로운 철학의 근본 문제로 제기·해명함으로써, 물질-의식의 관계 문제는 세계-사람의 관계 문제 안에 일부분으로 포괄되어 있다는 점을 밝혔다.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진리에 대한 선행 철학의 이론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철학적 세계관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② 사적 유물론의 기본명제 가운데서 사회·역사 발전의 주체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보았던 선행 철학의 시대적, 지역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이라고 해명함으로써, 노동계급을 핵심 역량으로 포괄한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건설론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사회·역사 발전의 본질을 해명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사적 유물론에서처럼 계급투쟁을 사회·역사 발전의 본질로 보지 않고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그 본질로 보게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새로운 주체사관의 정립이라고 한다.

③ 선행 철학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제시하였지만, 주체사상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제시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자기의 논리구도 안에 일부분으로 포괄하는 새로운 정치철학을 정립했다고 한다.

황장엽은 1979년에 발표했던 자신의 논문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은 주체의 사상·리론·방법의 전일적인 체계」에서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주체사상을 해석하기는 했지만, 주체사상이 맑스-레닌주의를 북(조선)의 현실에 맞게 계승·발전시킨 일종의 파생사상이라고 보는 종래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모택동사상의 관계 설정과 주체사상의 관계 설정에서 각각 드러나는 차이를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모택동사상은 맑스-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계승·발전론에 서있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를 철학적 세계관(상위 개념)으로, 모택동사상을 실천적 이념(하위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해, 주체사상은 자기 안에 맑스-레닌주의를 포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1970년대에 나온 '파생론'(모택동사상의 계승·발전론과 일치함)과 1980년대의 '포괄론' 사이에서 드러난 쟁점구도는 주체사상 1세대에 속한 황장엽과 주체사상 2세대 사이에서 이론적 상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데 황장엽의 파생론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파산당하고 말았다.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소련·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맑스-레닌주의의 파산·몰락은 그 파생 사상인 주체사상의 파산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상적 대파국'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소련·중국의 개혁·개방론을 비판하고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체제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괄론자들에게는 소련·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사상적 동요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황장엽과 같이 70년대식 계승·발전론에 집착해있던 파생론자에게는 사상적 동요·혼란·좌절이 컸음은 물론이다.

1990년대의 황장엽이 사상적 파산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갈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파생론에서 벗어나서 주체사상의 포괄론과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사상의 근본 명제들을 뒤집어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하는 길이다. 황장엽은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무렵부터 북(조선)의 유일 사상 체계에서 벗어나, 주체사상의 기본 명제들을 뒤집어보는 수정주의적 관점으로 흐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일부 사상적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주장하는 사상이 낡아빠진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선진 사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기 사상의 절대적 진리성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상이야말로 미신이며 역사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유일 사상 체계를 '미신'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른바 '선진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선진 사상이란 이른바 '신주체사상'이다. 그는 신주체사상을 정립하면서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북(조선)도 중국처럼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서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인 시장 경제 체제를 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미 1992년을 전후해 자신의 사위이며 주체과학원 산하 정책연구소 부소장인 김 아무개(49살)에게 자본주의 체제와 이념을 연구하라고 했는데, 그가 끔찍히 아꼈던 사위는 20여 개 자본주의 나라들을 돌면서 꾸준히 관계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황장엽 자신도 중국의 경제학자들을 초청해 밤새도록 토론하였다. 황장엽은 특히 랴오닝 대학 총장을 지낸 펑위중(64살)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펑위중은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교육자로 평가 받는 인물"이며, 한·중수교 이전에 벌써 남(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친한파' 학자로 1996년 6월 「내가 본 한국」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중국의 당·정 관리들은 황장엽을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중국의 개방 정책을 깊이 연구해온 인물로 인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를 자기들과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소수의 친중파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황장엽의 수정주의적 관점은 중국식 개혁·개방에서 멈추지 않고, 남(한국) 자본주의의 경제 발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황장엽의 측근은 "그가 최근 집중적으로 접한 책들은 주로 한국의 1970년대 경제 발전을 다룬 책이었다. 그는 북한을 방문한 외국의 지인들에게 다음에 올 때 꼭 경제 관련 책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여기에 물론 한국 책도 포함된다. 이 때문에 그는 고위층으로부터 눈총을 받았다"고 말했다.

황장엽은 박명애에게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은 천리마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다만 북조선은 자력갱생을 내세웠고, 박정희는 대외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남조선의 새마을 운동은 성공했지만, 북조선의 천리마 운동은 실패했다. 그래도 남조선의 대통령(원래 박명애가 말할 때는 중국식 표현으로 '총통'이라고 했음-인용자) 중에서는 박정희만한 인물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남조선이 그만큼이나 먹고 살게 된 것이 아닌가.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 사우디에 사람을 팔아서 번 돈으로 기반을 잡아 경제 개발에 성공했지 않느냐"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1995년 2월 미국 경제 사절단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황장엽을 만났고, 같은 해 9월에는 평양 영악산 초대소에서 이틀동안 황장엽과 함께 지냈다는 재미동포 기업가 백영중도 황장엽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공산주의자라기 보다 인간 사랑과 안창호를 존경하는 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로 보였다고 말했다.

(4) 북(조선)에서 비판·공격을 받은 황장엽

1995년 8월 황장엽은 중국 심양의 한 호텔 로비에서 "내가 우리 땅에서 실현하려 했던 이상은 이제 끝났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급서, 수해피해, 에너지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에 그가 내뱉은 이 좌절감 깊은 한 마디의 말 속에서는 그 자신이 심취해있었던 고정 관념, 즉 주체사상을 단지 맑스-레닌주의를 계승·발전시킨 파생사상으로 보는 관점이 파산당했다는 패배와 절망의 심연이 엿보인다. 그러나 황장엽은 자기의 파생론은 이미 1980년대에 이르러 극복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주체사상 2세대 이론가들이 포괄론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장엽에게 있어서 파생론의 사상적 동요·혼란·좌절은 그를 주체사상에 대한 수정주의 노선으로 이끌었다.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히로하루는 1996년 8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황장엽의 측근으로부터 '주체 자본주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주체 자본주의는 황 비서가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주체사상에 자본주의를 접목시킨 것으로 보인다.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가 아닌 인간 중심의 자본주의를 통해 북한의 경제를 되살리려 했던 것같다. 무역 사업 등을 담당하는 황 비서 측근들 사이에서는 주체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으나 김정일 측근 세력으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해 공식적인 정책에는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의 수정주의 노선은 조선로동당의 정책 수립가들과 주체사상 2세대인 포괄론자들의 격렬한 비판과 공격을 받으며 침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 언론의 추정에 의하면, 황장엽은 1996년 逼逼壙?비판·공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한 소식통은 1996년 5월 북(조선)의 한 근로자 대회에서 황장엽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황장엽이 정체 불명의 남(한국)인사 A에게 보낸 1996년 11월 13일자 비밀 편지에 나오는 이런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당국은 금년(96년) 5월 9일을 계기로 나의 사상이 자기(김정일을 뜻하는 뜻함)의 통치 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공격을 개시했으며, 나에 대한 감시를 집중하고 있음. 특별 강연회를 소집하고 나의 이름은 찍지 않고서, 그러나 청중이 누구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알 수 있게 비판하고 사상이론적 권위를 떨구기 위한 깜파니야(캠페인)를 계속하고 있음."

1996년 5월부터 시작된 황장엽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이 그 뒤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밖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 기관지들을 통하여 나온 비판적 견해를 읽어보면 그 분위기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로동신문』1996년 5월 10일자는 「야심가, 음모가들의 비렬한 본색」이라는 글에서 소련의 붕괴 원인이 스탈린 이후 소련공산당을 장악했던 현대 수정주의자, 사회주의 배신자들 때문이었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쓰딸린이 서거하자 당과 국가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갖은 음모적 방법으로 혁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령과 혁명에 충실하고 당과 쏘베트 조국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해온 혁명가들이 붸겨났다. 이런 수법으로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당과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줄임)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저들이 내놓은 '개편' 정책을 위장하기 위하여 레닌의 이름을 악용하였다. 그들은 '레닌적 리해에 의하면 계승성이란 부단한 전진, 새로운 문제들의 제기와 해결,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의 제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레닌의 이름을 빌려가며 계승성을 떠벌인 것은 저들이 내놓은 '개편' 정책이 쏘련공산당의 기성의 강령과 로선들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줄임) 그들은 선임자들이 꾸려놓은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우익 급진분자, 부르죠아 복귀주의자들을 끌어들여 정치국을 분열시키고 그 기능을 약화시켰으며 당 중앙위원회 비서국의 기능도 마비시켰다. (줄임)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당 중앙위원회 사업을 '개편'한다는 미명 하에 당 중앙위원회 부문별 꼬미씨야(committee의 러시아말-인용자)를 내오는 방법으로 비서국의 이와 같은 기능을 정지시켜 버렸다. (줄임) 야심은 결국 배신과 변절에로 굴러떨어지고 혁명에 엄중한 해독을 끼치는 독약, 죽음의 약이였다. 쏘련에서 사회주의는 바로 야심가, 음모가들인 현대 수정주의자들에 의하여 자기의 궤도에서 탈선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였으며 종당에는 붕괴되고 말았다." (줄임)

당 기관지인 『근로자』 1996년 7월호에도 황장엽의 수정주의 노선을 겨냥한 비판 논문이 실렸는데, 그것은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개편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독창적인 이론 체계라고 주장"하는 포괄론자의 글이라고 한다. 북(조선) 사정에 정통한 도쿄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른바 '주체사상의 수정주의 노선'에 기울여져 있던 황장엽은 김정일 비서가 주체사상에 대한 수정주의적 오류를 지적·비판했던 1995년(1996년의 착오로 보임-글쓴이) 7월 23일 조선로동당 내부 담화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고, 그 결과 젊은 층 당 고위간부들로부터 황장엽은 사상적 정통성에 문제가 있으며, 관념론자라는 집중적인 비판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황장엽은 같은 해 11월 프랑스-조선 친선협회 부회장 앙드레 오브피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상원에서 주체사상에 대해 강연을 했을 때에도 주체사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계속 발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있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말한 계속적인 발전이란 결국 주체사상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을 뜻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사히신문』의 보도를 따르면, 황장엽은 199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 세미나에서 강연한 직후 당내에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6년 7월 26일 김정일 비서가 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일꾼들에게 제시한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는 제목의 논문에서 주체사상은 북(조선)에서 독창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주체사상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당에서 수정주의자로 혐의를 받기 시작한 황장엽은 북(조선)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남(한국)의 한 언론은 황장엽은 "최근에는 북한 권력 중심부에서 사실상 완전히 밀려나 있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예로 1997년 2월 7일 북(조선) 언론들은 도쿄 개최를 앞두고 있었던 국제 학술회의 소식을 전하면서 이 회의에 최고위급 인사로 참석하기로 된 황장엽의 이름을 단 한 차례도 거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황장엽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해 비판·공격을 가한 사람들은 주체사상의 '정통노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는 당내 고위 관료들과 정통파 이론가들이다. 이들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로서 항일무장투쟁 참가자들의 후손들, 한국(조선)전쟁 희생자의 후손들로 당·정·군 주요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는 핵심 인사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황장엽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당내 1세대 이론가들로는 김국태(비서국 사상담당), 양형섭(정치국 후보위원), 김기남(비서국 선전선동담당)을 손꼽을 수 있다.

일본과 미국의 전문가들도 대개 이러한 방향에서 황장엽 사건을 파악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쿄대 교수 와다 하루끼는 "자신의 (개혁과 개방에 관한) 유연한 사고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면서 황 비서가 망명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황 비서가 최근 주위에 자신의 역량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한탄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세이가쿠인대 교수 누테키 마사유키는 "개방 노선을 주장해온 황 비서가 노동당의 보수파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망명을 감행한 듯하다. 황 비서는 식량난과 관련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최종적으로는 개인농을 인정할 것, 암시장을 묵인하는 동시에 자유 시장을 설립할 것, 중국과 자유 무역 지대를 만들고 경제 교류를 활성화할 것 등을 주장했다"고 했다. 게이오대 교수 오코노기 마사오는 "황 비서가 김정일 비서의 권력 승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권력 투쟁과 세대 교체의 바람에 휘말려 궁지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센터 연구원 셀릭 해리슨은 황장엽을 "개혁파의 리더"라고 평가하면서, "그는 북한 지도부 인사 가운데 가장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견해를 가진 지도적 온건 진보파였다. 그는 북한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줄임) 온건파의 상징과도 같은 황의 망명은 온건파들이 매우 어려운 입지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이 북한 권력 구조의 핵심부에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망명을 북한내 권력 투쟁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했다.

(5) '신주체사상'과 개혁·개방론의 표리 관계

황장엽의 수정주의 노선 추구는 개인의 구상과 탐구에 그친 학술 연구 사업이 아니었다. 그가 학술 연구 사업 뒤에서 '비밀 사업'을 벌여왔다는 사실을 밝혀야할 필요가 있다. 그의 비밀 사업은 "두 개의 '비선 조직'을 움직이며 국제적으로 광범한 관계망을 구축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비선 조직'이란 김덕홍을 내세운 '국제 주체재단'(그 이름이 '평화 주체재단'이라는 설도 있다)과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 그리고 진영걸을 대남 교류에 내세운 '조선 사회과학자협회'다. 진영걸은 이 협회의 부위원장이다. 김덕홍은 "베이징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해외의 고위인사들이 베이징을 방문할 때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황 비서와 관계를 맺어주는 구실"을 했다고 한다. 김덕홍이 총사장으로 있는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는 이와 같은 황장엽의 '독자적인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김덕홍은 자금 조달을 위해 해외동포 기업인들은 물론 남(한국) 기업인들과 접촉해왔다. 남(한국) 언론은 남(한국)의 한 소식통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가 남북 교역에서 거래 실적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는 '천보'라는 남(한국)의 한 기업과 "상당한 거래"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지적하고, 이는 "이상한 일"이라고 보도한 바있다.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와 '천보'의 거래 실적이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면, 이들의 거래는 비밀 거래라고 볼 수 있는데, 남(한국)의 기업이 남(한국) 당국이 모르게 북(조선)의 기업과 비밀 거래를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황장엽-김덕홍 인맥과 경제 교류를 추진하고 있는 '천보'라는 기업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황장엽은 김덕홍을 내세워 남(한국) 부유층의 이산가족을 상봉시켜주는 비밀 사업을 주선하고 대가를 받는 방법으로, 그리고 자기 아들 황경모와 수양딸 박명애를 통해 북(조선)의 국보급 골동품과 고화 등을 남(한국)에 팔아넘기는 불법적윽????유출 방법 등으로 "상당한 자금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은 김덕홍을 내세워 현재 북(조선)이 공사하고 있는 원산-금강산 도로 건설에 남(한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주겠다고 하여 투자 유치 중개에도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황장엽-김덕홍은 투자 유치 중개를 통해서 남(한국)의 재벌 기업과 접촉해온 과정에서 재벌 기업의 뇌물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김덕홍은 중국의 한 도시에 호텔을 사들이려 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서 이들의 자금 동원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황장엽은 1987년 이래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선 사회과학자협회에서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몇몇 수정주의자들과 함께 중국식 개혁·개방 정책과 한국식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연구하면서, 그 협회의 부위원장인 진영걸을 내세워 남북 학술교류를 성사시키고 교류를 통해 대남 접근과 남(한국)측 인사들과의 인맥 구축을 은밀히 추진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의 대남 접근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친한파 중국인 학자 펑위중이었는데, 그는 "94년 이후 매년 한 두번씩 '비공식적인 남북 학술교류'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황장엽이 '국제 주체재단'과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가 모금한 자금을 동원하여 추진하려고 했던 '비밀 사업'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수양딸 박명애의 발언을 들어보면, 황장엽의 '비밀 사업'은 황장엽과 선이 닿아있는 남(한국)의 인맥을 통하여 자금을 받아 북(조선)의 각계에 남(한국)의 물자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1996년 4월부터 11월까지 황장엽과 연계된 남(한국)측 자금원에서 동원한 대북 지원물자는 모두 2백25만 달러였다고 한다. 8월 '한총련 사건'과 9월 '잠수함 사건' 등으로 남북 관계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기간에 황장엽은 버젓이 막대한 지원 물자를 남(한국)에서 동원하여 북(조선)에 들여보내고 있었다. 황장엽은 당 중앙위원회 비서라는 고위직을 이용하여 이러한 막대한 물자를 비밀스럽게 북(조선)에 들여가, 자신과 선이 닿아있는 각계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박명애는 "내 이름 석자가 알려지면 절대 안되듯이, 아버지의 일과 상황이 알려져서도 절대 안된다. 지금 나와 아버지는 한국에서는 무얼 어떻게 해도 두렵지 않으나 이북에서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만일 내가 아는대로 얘기하면 아버지도 끝장난다"고 말했다.

황장엽이 추진하고 있었던 비밀 사업은 남(한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업, 또는 남(한국)이 적극 협조하고 있는 사업인데 반해, 북(조선)에서는 당국의 눈을 피해 추진해야 하는 비밀 사업이었다. 황장엽이 추진하고 있었던 비밀 사업의 목적은 남(한국)으로부터 경제 지원을 끌어들여 북(조선)에서 중국식 개방·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남(한국)과 미국의 언론들은 대체로 황장엽을 개혁·개방을 주장해온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로 분류하면서, 개혁·개방을 반대하고 있는 '강경파'(외부에서는 흔히 군부 세력이라고 보고 있다)와 대칭 구도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황장엽의 비밀 사업이 북(조선) 당국이 '적대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남(한국)의 강경 세력으로부터 고무·추동과 경제 지원을 받으면서 은밀하게 추진하려 했던 것이라면 이를 온건파의 개혁·개방이라고 볼 수 있을까? 북(조선) 당국은 그를 '적과 내통한 배신자'로 낙인찍을 것이 분명하다.

(6) 황장엽·김덕홍·박명애의 비밀 사업

김덕홍은 황장엽의 망명 사건에서 '주역'으로 드러나 있다. 황장엽은 1995년 3월 해외의 주체사상 연구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 주체재단'을 설립한 뒤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 총사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김덕홍에게 재단 총재직(또는 이사장직이라고도 한다)을 맡겨 자금 모금을 담당하게 하였다. 황장엽은 1996년 11월 13일자로 정체 불명의 남(한국)사람 A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서 김덕홍을 "나의 동생이고 전우"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죽더라도 그는 "살아남아 일을 마지막까지 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김덕홍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출신으로 황장엽의 제자며, 황장엽의 핵심 측근으로 오랫동안 일해왔다.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을 역임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는 망명의 시기 선택과 절차와 방법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추진해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95년 4월부터 '조선 려광무역련합 총회사 총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베이징에 나와서 활동하였다. 그는 지난 2년동안 대북 투자 알선, 남북 교역, 대북 임가공 사업을 하면서 남(한국) 기업인들을 접촉하고 있었으므로 남(한국)의 대북 관련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연락을 주선하기도 했다. 남(한국) 사람이 중국에서 북(조선) 사람, 그것도 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을 역임했던 사람을 마음대로 접촉할 수는 없다. 더우기 그를 통하여 대북 경제사업이나 이산가족 연락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안기부의 개입 또는 통일원의 허가가 없이 가능한 일일까?

여기서 김덕홍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황장엽의 수양딸로 알려진 조선족 박명애다. 박명애는 황장엽이 중국 방문 기간에 중국어 통역과 문서 교정을 맡아 해주면서 그것을 인연으로 1992년에 수양딸로 되었다고 하는데, 박명애와 김덕홍은 1994년 랴오닝대학의 총장(당시) 펑위중의 소개로 남(한국)의 무역회사와 거래를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족 사회에서 '막강한 배경을 가진 여자'로 알려진 박명애는 1995년 5월과 1996년 7월 남(한국)에 들어와 제주도에 머물렀고, 1996년 1월에도 서울을 다녀갔다고 한다. 남(한국)을 방문하여 그는 "정치권 인사들"과도 만났다고 한다.

남(한국)의 한 일간지는 황장엽의 비밀 사업에 관련하여 "수십만 달러를 한국에 투자해 음식점을 차린 뒤 수양딸 박 아무개씨를 한국에 들여보내 한국쪽 인사들과의 교류 창구로 활용하려 했다는 계획"이었다고 보도한 바있다. 황장엽은 박명애를 남(한국)에 들여보내고 그를 통하여 남(한국)과 접촉·교류·협력하고 있는 사실을 북(조선)당국에게 비밀로 부쳐둔 것은 그들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의혹점이 떠오른다. 황장엽은 왜 북(조선) 당국이 모르게 박명애를 시켜서 남(한국)과 접촉·교류·협력을 추진하는 '정치적 모험'을 벌이고 있었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황장엽의 수양딸로 알려진 조선족 여성,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김덕홍과 함께 움직인 박명애, 조선족 동포사회에서 심양에 있는 북(조선) 총영사관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의 추도식장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면서 '막강한 배경을 가진 여자'로 소문이 난 박명애가 어떻게 안기부의 눈을 피해 남(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할 수 있었을까? 안기부는 박명애를 감시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박명애를 남(한국)으로 불려들여 황장엽 귀순 공작을 꾸미고 있었던 것일까?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인 황장엽이 거금을 들여 서울에 음식점을 차리고 박명애를 서울에 상주시켜 남(한국)측 인사들과 접촉·교류하는 비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보도내용이 만일 사실이라면 황장엽의 그러한 구상은 안기부의 묵인이나 도움이 없이 가능한 일일까?

(7) 벼랑끝에 선 황장엽의 선택: 반체제 활동

『월간조선』에서 공개한 자료들을 읽어보면, 황장엽은 남(한국)의 지원을 받아 북(조선)을 개혁·개방하려던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자, 북(조선)의 정권과 체제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망명 직전에 구상하고 있었던 것은 중국식 개혁·개방이 아니었다. 남(한국) 인사 A는 『월간조선』기자에게 "북한이 중국처럼 개혁 개방에 성공해서 경제가 잘 돌아간다 칩시다. 북한 군사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은 더더욱 버거운 「북한」이라는 상대와 맞서야 된다는 점을 황 선생은 걱정하더군요"라고 말했다. 황장엽의 수정주의가 도달한 최종 목표는 결국 북(조선)의 현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말하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은 이렇게 극적으로 변신을 하여 이제는 '당과 수령'에 대해 반기를 들고 저주·공격하는 정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김덕홍은 1996년 7월 4일 남(한국) 인사 A를 만난 자리에서 황장엽이 "늘 나에게 하시던 말씀"이라고 하면서, "공화국 붕괴 촉진책"을 이렇게 전해주었다.

"중국과 북한을 이간시켜 중국이 공화국을 불신하게 만들어 경제 원조를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일본이 전후(戰後)배상이나 어떤 명목의 배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본의 배상금이 북한에 들어가면 김정일 정권이 유지될 것이다. 또 미국이 서둘러 경제 원조를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김덕홍은 중국 국적을 취득하는 한편, 중국에서 활동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중국의 한 도시(아마 베이징일 것으로 추정된다)에 호텔을 구입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1996년 7월 26일 베이징에서 정체 불명의 남(한국) 인사 A를 만나, "우리가 사업체에 매달리는 것은 먼저 말한대로 거점 확보다. 이것이 제대로 되면 황 선생은 망명할 것이다. 그리고 망명 정부까지도 구상하고 있다. 이런 일은 우리만 가지고는 안된다. 망명 정부 수립 구성과 실천은 상당한 지원 세력이 없으면 힘들다"고 말했다. 김덕홍은 "김정일 제거에 대한 희망을 비추었"고, "공화국의 자구책은 김정일의 하야나 국외 망명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황장엽은 "침략 세력을 빨리 와해시키기 위한 전략 전술을 세우는 데 조언을 할 수 있다" 적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 속에는 극렬한 정권 타도 의지, 체제 전복 의지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다고 있음을 본다.

김덕홍의 말을 종합해보면 황장엽은 중국에 거점을 확보한 뒤에 남(한국)의 지원을 받아 북(조선) 붕괴를 촉진시키는 정권 타도 활동, 반체제 활동을 벌이고, 러시아나 그 밖의 해외지역에 있는 '고위급 탈북 인사'들을 모아 해외 망명정부(또는 해외 망명단체)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덕홍은 북(조선) "내부에서의 거사"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전까지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가능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자신감에 차있었다고 한다.

황장엽에게는 자신이 혼자 망명하는 문제도 엄청난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일터인데, 그가 이처럼 해외 망명정부 수립과 반체제 활동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 이른바 '내부 거사'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황장엽과 김덕홍은 불과 몇 사람의 힘으로 조선로동당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고, 현 정권을 타도하고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꿈꾸는 허풍쟁이나 몽상가들이었을까? 지적 수준과 논리적 사고능력을 가늠해 볼 때, 그들은 결코 허튼 소리나 내뱉는 허풍쟁이나 몽상가들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정권 타도·체제 전복 의지를 뒷받침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거대한 배후 세력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그 배후세력은 북(조선)의 체제 전복과 흡수 통합을 주장하고 있는 남(한국)의 강경 세력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황장엽은 김덕홍, 박명애, A를 통해서 남(한국)의 대북 강경 세력과 선이 닿아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북 강경 세력은 A를 통해서 김덕홍에게 접근하여 그를 '포섭'하고, 그를 통하여 황장엽의 정권 타도 및 체제 전복 의사를 고무·추동했고, 종당에는 비판·공격을 받으면서 국가안전보위부의 뒷조사를 받고 있었던 황장엽이 망명의 길을 택하도록 적극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월간조선』이 밝힌 자료들에 의하면 황장엽은 시간이 흐를수록 극우 반북 세력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눈에 북(조선)은 처참한 '생지옥'으로 비치고 있다. 그는 북(조선)은 사회주의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봉건주의", "군국주의"며, 인민들이 굶어죽는 생지옥이라고 했다. 그는 "북의 인민들은 지금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무자비한 탄압과 허위와 기만으로 충만된 암흑의 땅에서 인민들은 전전긍긍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위대한 장군님」만세를 부르고 있다.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봉건적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인민대중을 기아와 빈궁에 빠뜨리고 있다"고 격렬한 어조로 비난·공격했다. 그 뿐이 아니다. 북(조선)정권은 "지금 허다한 사람들을 마구 총살"하고 있는 "극악무도한 정권"이며, 따라서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저주했다.

'탈북 귀순자'들에게 있어서 자기가 버리고 온 북(조선)을 극한 언사를 동원해 저주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황장엽의 경우도 그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황장엽의 대남 정세관이 극우 반북 세력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북의 마수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다느니, 또는 가짜 주체사상에 기만당하고 있다느니, "당면하여 남조선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서는 강력한 여당을 건설하고 안기부를 결정적으로 강화하는 두 가지 문제를 기둥으로 틀어쥐고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른 대목에서는 남북 대화는 백해무익하다고 지적하고, 북(조선)의 인권 문제를 강하게 들이대야 한다고 한다든지, 군대 강화론, 통일원 강화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안기부법과 로동법을 개선하여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은 좋은 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남(한국)에서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그가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을 비난하면서, 대북 강경 세력을 옹호·두둔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북(조선) 당국은 이러한 황장엽의 움직임에 대해서 무엇인가 수상하다는 낌새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1996년 10월 이후에는 북(조선)의 국가안전보위부가 황장엽에 대한 뒷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만일 그가 국가안전보위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남(한국)의 경제 지원을 동원한 중국식 개혁·개방을 추진하려 했을 뿐아니라, 남(한국)의 대북 강경 세력으로부터 고무·추동을 받아 정권 타도와 체제 전복을 구상했다는 혐의사실이 확인되면, 그는 아마도 이른바 '반국가사범'으로 단죄를 받고 처형을 받게 되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정체 불명의 A에게 보낸 1996년 11월 10일자 비밀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기는 가까운 사람이 없다. 겉으로 다 가까운 사람이지만 이 체제의 감시 속에서의 교제이다. (줄임) 명년 7월에 가서는 인사 문제를 단행할 것이 예견됨. 그러면 할 일 없게 됨. 지금 위치에서 찧어지면(붸겨난다는 뜻) 외국 출장도 불가능하고 손님 만나는 것도 다 중지되게 됨. 그때 가서 더 살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봄. (줄임) 2월에 큰 행사가 있으므로 그때까지 나를 이용하고 소문내지 않고 내적으로 처리하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어느 때 문제가 제기될지 예측할 수 없음. 나와 나의 전우가 한꺼번에 잘못되지 않도록 최대의 주의를 돌려주기 바람."

얼마 전부터 이론적으로 비판·공격을 받았고, 거기에 더하여 국가안전보위부의 조사 대상에 오르기까지 했던 '반체제 인사' 황장엽은 "더 살 필요가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신적 압박감과 위기감에 짓눌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국이 꾸며낸 자료에 의해 공개적으로 규탄받고 죽는 것보다는 그 전에 자결함이 여러 모로 유리함"이라고 1996년 11월 13일자 편지에 적었다. 결국 이 늙은 '반체제 인사'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 아니면, 남(한국)으로 넘어가는 것 밖에는 없었다.

(8) 귀순 공작

남(한국)의 일간지 『한겨레』는 황장엽의 사상적 동요가 처음으로 남(한국)쪽에 알려진 때는 1995년 2월께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하면서, 그 무렵 북(조선)을 방문한 재미동포 기업가 백영중(67살)에게 황장엽이 "북한이 더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주체사상으로는 안될 것 같다"는 내용의 귀엣말을 하면서 이를 평양상업학교 2년 후배인 김재순(전 국회의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고 한 이동복(자민련 소속 의원)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안기부는 1995년에 이미 황장엽의 사상적 동요 상태에 관련한 첩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안기부가 적어도 1996년 하반기에는 황장엽의 망명을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간 것은 1997년 초 이전이라고 보도한 바있다.

일본 NHK의 보도를 따르면, 1996년 9월쯤부터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김영삼 대통령의 분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음)가 베이징에서 김덕홍을 극비 접촉하여 망명 의사를 확인한 뒤, 이를 즉각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안기부가 동원되어 황장엽의 귀순 공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황장엽이 망명 결심을 굳힌 것은 이처럼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직접 나서서 귀순 공작에 나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간조선』은 이미 1996년 말에 황장엽의 망명 동기를 적은 친필 서한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남(한국)의 한 월간지가 그 때 망명 요청의 '물증'까지 확보하였다면, 안기부는 그보다 앞서서 이미 황장엽의 귀순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는 황장엽의 망명이 확실해지자 『월간조선』에 친필 서한을 넘겨주어 망명 실행 이후의 여론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황장엽은 정체 불명의 남(한국) 인사 A에게 보낸 1996년 11월 13일자 비밀 편지의 맨처음에 "대표부 비서와 심중히 토의하여 주기 바람"이라고 적었으며, 본문에는 자기가 남(한국)으로 망명하면 "대표부 고문으로 되어 이름을 내지 않고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바로잡"겠다고 했고, 자신과 김덕홍이 만일 죽는 경우에는 "비서가 우리 사업을 대신하도록 미리 토의"해야 한다고 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비서의 일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했다. 황장엽 자신이 마지막까지 도우려고 했던 '비서의 일'이란 무엇일까? 이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황장엽은 남(한국) 측에 있는 정체 불명의 대상인 '대표부'와 '비서'를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절대적 신뢰 관계는 짧은 기간 안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며, 적어도 오랜 기간(어떤 언론은 약 3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11월 15일자 비밀 편지에서는 그를 "비서 동지"라고 부르기도 한다.??조선)에서 비서 동지라고 부르는 대상은 적어도 위원장급이나 장관급 고위 관리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동무'라고 부른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대표부'란 어떤 기관을 말하는 것이며, '대표부 비서'란 누구일까? 대표부는 안기부고, 대표부 비서는 안기부 고위 관리가 아닐까?

만일 황장엽이 김덕홍-박명애를 통하여 남(한국)과 북(조선)을 연결하는 개혁·개방의 비밀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문제를 안기부가 모른체 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안기부는 A를 통해 황장엽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보아야 하며, 더 정확히 표현하면 안기부는 A를 통해 황장엽을 공작 대상으로 삼고 그의 비밀 사업에 개입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가운데 황장엽이 북(조선)에서 비판·공격을 받고 당국의 뒷조사가 시작되자 '귀순 공작'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우기 안기부는 황장엽을 망명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황장엽과 같이 수정주의 노선에 기울어져 있는 북(조선)의 관료와 학자들을 여러명 '포섭'하여 그들을 베이징에 확보하려 했던 '활동 거점'과 연계를 맺게 한 다음, 그들을 연쇄 망명(또는 집단 망명)을 실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1996년 11월 10일자로 황장엽이 정체 불명의 남(한국)인사 A에게 쓴 비밀 편지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짜 주체사상에 오염된 사람들(황장엽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권을 뜻한다고 풀이된다 - 인용자)을 모여(아)놓고 읽게 하고, 토론하게 한 다음 그 토론을 지도함이 좋을 것 같다. 토론 지도자를 북에서 비교적 준비된 사람을 데려가면 좋을 것이다. (줄임) 비교적 주체사상을 잘 아는 사람이 세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그의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데려가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남(한국)의 언론은 황장엽이 다른 고위 인사 4명과 동반 망명을 준비해 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과 김덕홍만 망명했다고 하면서,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오래 전 당 비서로 있다가 1975년에 숙청 당한 류장식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도한 바있으며,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인 2월 12일 베이징 남(한국)대사관 영사부에서 미 중앙정보국(CIA) 관계자와 남(한국) 정보 관계자들이 35분 동안 황장엽과 면담했을 때, 그는 자신에 뒤이어 망명을 준비중인 인물들이 5-7명이 있는 데 그들은 당 간부들이며 그중에는 고위급 간부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여기서 남(한국) 언론에 "사업가 A"로 드러나 있는 정체 불명의 인물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95년 후반기 김덕홍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뒤로 황장엽과 직·간접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이번 귀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돈 생기는 일도 아니고, 잘못 하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지도 모르는" 황장엽 사건에 자신의 "생업을 팽개칠 정도"로 발벗고 나섰다. 황장엽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1993년부터 소규모 중국 무역을 시작한 사업가로 알려진 그는 70살의 나이로 원산출신이며,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기 위해 탈북자들을 귀순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중국에서 '귀순 공작'을 이미 줄기차게 벌여온 사업가라고 한다. 언론이 그의 필체가 신문 지상에 공개되지 않도록 배려할만큼, 그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는 인물이다. 이 정체 불명의 인물은 안기부 요원은 아니지만, 안기부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A는 자살용 "독약 앰플과 독침"을 구하여 김덕홍과 황장엽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간첩이나 공작원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특수 물품을 구하여 그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아도 A와 안기부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남(한국)의 한 언론은 안기부가 A를 비롯한 다른 통로를 통해 황장엽에게 망명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도, "실제 망명할 경우 일어날 문제들을 고려해 적극 개입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지만, 이러한 분석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들린다. 황장엽이 망명한 뒤에 일어날 문제들이란 남(한국)측에 유리한 것들 뿐이지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이 분석은 황장엽 같은 '거물급 인사'들이 망명하겠다는 것을 안기부가 왜 그대로 방치하였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납득할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안기부는 A를 통해 황장엽의 반체제활동 준비 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협조하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종당에는 '귀순 공작'을 벌였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8) 마무리하는 말

황장엽과 김덕홍이 서울에 가게되면, 남(한국)에서는 '고정간첩 색출'을 전사회적으로 벌이는 때아닌 맥카시즘 소동이 일어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은 남(한국)에는 북(조선)의 간첩이 4만-5만 명이 암약하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최고위급 귀순자 황장엽의 '증언'과 최근 날치기 통과로 복원·강화된 안기부 수사권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만들어낼 이른바 '공안 파동'은 남(한국) 사회를 다시 1950년대로 되돌려놓는 냉전 회귀의 역풍을 몰고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황 선생이 입을 열기만 하면 우리 사회, 특히 국가 기관이나 정치계, 언론계 곳곳에 숨어있는 북한 간첩 조직이 백일하에 드러날 지도 모릅니다"고 했던 A의 말은 폭풍 전야의 긴박성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 국회 본회의에서도 황장엽의 "권부 고첩설(權府 固諜說)"과 관련하여 "정부의 주요 부서 내부를 점검하고 있으며 수사 역량을 강화하여 불순분자 색출에 노력하겠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장엽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몇 가지 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개혁·개방을 주장했던 대표 인물 황장엽이 견디지 못하고 망명한 것으로 미루어보아서, 조선로동당의 정치노선은 중국식 개혁·개방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취할 것이라는 점.

② 황장엽 처럼 처음에는 조선로동당을 위하여 충성하던 당의 고위 간부가 사회주의 진영 몰락 이후로 태도를 완전히 바꿔 개혁·개방론자로 변신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남(한국)의 대북 강경 세력과 손을 잡고 정권 타도와 체제 전복을 구상하는 '반체제 인사'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점.

③ 그 규모와 분포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주장하는 세력이 북(조선)의 상층부에도 있(었)다는 점. 하지만 조선로동당의 노선에 어긋나게 중국식 개혁·개방론을 주장하는 이 세력은 매우 미약하여, 당내에서 이론 투쟁, 노선 투쟁조차 제대로 벌이지도 못한채, 일방적으로 비판·공격을 받으며 밖으로 나돌고 있다가 결국 국외로 탈주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④ 황장엽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북(조선)의 개혁·개방론자들은 개혁·개방의 필연성,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북(조선)의 현실을 붕괴 직전의 참상으로 묘사하면서, 결국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붕괴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 (1997년 3월 4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