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시대 민족 문제와 통일 민족주의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분단 시대와 통일 시대

사람들은 이 시대를 '통일 시대'라고 부른다. 통일 시대라는 말은 아직 분단의 어둠이 걷히지 아니한 하늘 저편 별빛 하나 떠있는 동녘에 새벽 노을이 푸름푸름 번져오고 있는 그런 상상력이 일어서게 한다.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은 통일이라는 말을 앞에 내세움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는가. '통일 시대'는 과연 새로운 개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분단 시대라는 개념을 쓰고 있었고 통일 시대라는 개념은 쓰지 않았다. 통일 시대라는 말은 분단 시대의 험한 고빗길에서 통일 의지를 안고 분단 질서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위에 쓰여진 새로운 시대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는 일찌기 우리 시대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 적이있다.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가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는 일을 그 최고 차원의 목적으로 삼은 시대라면, 20세기 후반기 즉 해방 후의 시대는 민족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을 민족사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 시대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역사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 이 시기는 <분단 시대> <통일운동의 시대>로 이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분단 시대 반세기를 지나온 것을 시간 길이로 가늠한다면 그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이 세상에 분단의 비극을 겪은 민족들이 몇 되지만, 우리 민족처럼 그토록 처절하게,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민족은 일찌기 없었다.

분단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던가는 지금 새삼 묻지 않아도 된다. 분단의 사회사는 민족의 삶은 물론 그 민족적 실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부분들이 참기 어려운 오욕과 견디기 힘든 상처를 안고 신음하도록 강요해 왔다. 분단 시대 반세기의 갈피마다 스며든 민중의 피와 눈물의 자취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한 번쯤 가늠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가슴에 쓰라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분단 시대의 비극 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비극은 분단 현실에 대한 외면, 또는 분단 고통에 대한 심리적 마비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강만길 교수가 같은 글에서 "분단 초기의 들끓었던 민족사적 사명감은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급격히 식어져갔고 이후에는 분단 체제 자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분단 체제를 철저한 현실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것에 편승하여 이 불행한 역사를 연장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분단 현실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현실주의자라고 강변하면서, 조국 통일의 당위성을 외치는 사람을 현실을 모르는 분별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불행한 세태가 분단 상처 위에 아픔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 시대의 모든 가치는 분단으로 깨어진 민족적 삶을 통일로 되살리는 곳에서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떤 지식인이 "분단 이후에 일어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상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할 때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통일 민족 국가 수립 문제와 관련하여 긍정적인 역할을 다했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하는 문제에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두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이었다.

분단 시대 반세기를 넘긴 시점인 1995년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통일 원년'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통일 원년이라니, 이 말은 또 무슨 말인가? 통일 원년이란 말은 분단 시대 반세기 동안 촉각마저 무디어진채 쓰러져 있던 민중의 통일 의지를 깨우치고 잠들어 누웠던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자는 각성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통일 원년과 통일 시대라는 말은 주저앉았던 통일 의지를 되살리고 민족의 얼을 일으켜 세우는 되살림의 술어다. 강만길 교수는 같은 글에서 "20세기 후반기를 '해방 후의 시대'로 부르는 데 반대하고 '분단 시대' '통일운동 시대'로 부르는 역사 의식은 분단 체제를 기정사실화하여 그 속에 안주하는 일을 경계하고, 그것이 청산되어야 할 시대임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청산의 방향을 모색하려는 데 그 본질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고 했다.

조국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 구분선, 통일 원년의 첫 해인 1995년에 이르러 이 시대를 분단 시대라 부르지 않고 통일 시대라고 고쳐 부르게 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까닭은 민중이 분단 시대 반세기의 혼돈을 거치고 나서 이제 비로소 통일로 나아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르거니와, 이 시대는 통일 시대다. 통일 시대는 분단을 극복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려는 칠천만 겨레의 통일 염원과 통일 의지가 비상히 높아가는 통일 운동의 시대며, 바야흐로 통일을 위한 한(조선)반도 안팎의 객관적 정세가 무르익고 있는 시대다. 우리가 조국 통일을 이룩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이 시대를 통일 시대가 아닌 다른 개념으로 부를 수 없는 까닭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적 의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조국 통일이 분단으로 찢겨나간 민족사를 제 모습으로 되살리고, 억눌리고 일그러진 민족사를 발전적으로 완성한다는 뜻일진대, 통일 시대는 민족사의 새로운 장래 운명을 여는 개척기라고 볼 수 있다.

2. 이 시대에 사상적 지표가 있는가

통일 시대를 사는 민족 성원들은 어떤 사상적 지표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논리와 관점을 가지고 이 새로운 시대의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이 시대를 통일 시대로 인식하는 모든 민족 성원들 앞에 던져진 물음이다. 오늘 민족 성원은 통일 시대의 민족 의식을 지니고 민족 문제를 풀어내는 데 힘써야 할 중대한 시기에 살고 있다. 민족 성원으로서 민족 의식을 저버리고 민족 문제의 해결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기의 민족적 양심을 저버린 것이요, 따라서 그것은 민족적 삶에서 자기를 분리하여 결국 민족 성원인 '나'를 소멸해가는 자기 해체의 과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족 성원에게 있어서 민족 의식이란 민족의 분단 현실과 통일 시대의 장래 운명에 자신의 현실과 운명을 일치시킨다는 뜻이 담겨있으며, 그러한 민족과 자신의 일체화는 분단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과업, 곧 조국 통일을 자기의 최고 임무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조국 통일의 역사적 의무는 민족과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민족 성원들이 받아안게 되는 민족적 양심의 순결한 발로(發露)요, 고귀한 자기 실현이다. 민족 성원들에게 민족 의식은 한낱 감성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심리 작용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아니되며, 그것은 곧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과 이론적 해명을 추구하는 치열한 현실 문제가 되어야 한다. 민족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눈을 뜬 의식과 행동이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집중되어 마침내 민족 성원들의 집단적 의식과 행동으로 형성될 때, 그것은 민족주의라는 언술 체계를 지니게 된다. 이로써 민족주의는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족 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된다. 우리 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통일 시대의 역사 인식으로 파악할 때, 그리고 우리 민족이 당면한 최고 문제를 조국의 통일이라고 할 때, 이 시대의 민족주의는 마땅히 통일 시대의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 통일 시대의 민족주의는 민족이 당면한 과업을 수행하는 임무를 받아 안은 민족주의며, 외세에게 침해당한 민족의 이익을 되찾고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민족 성원들의 의식과 행동을 안받침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가 정리한 '통일 민족주의론'을 여기 옮기고 싶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분단 시대 50년을 통해 한반도 지역은 7천만 주민 전체의 평화로운 발전을 추구하는 '통일 민족주의'가 사실상 소멸되고 남북 분단 국가들의 권위와 이익을 추구하는 '분단 국가주의'만이 강화되어왔다. 민족의 다른 한 쪽에 대해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분단 국가주의'가 아니라 7천만 한반도 주민 전체를 하나의 역사 공동체, 문화 공동체로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족의 평화적, 호혜적, 대등적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이데올로기로서의 '통일 민족주의'를 회복해가는 것이 분단 시대 역사 인식의 최대 과제라 할 수 있다."

통일 민족주의는 분단 국가주의에 맞서는 치열한 대립항으로, 아니 무거운 분단 멍에를 벗어버리는 자기 해방의 몸부림으로, 조국 통일의 길을 열어제끼는 전진의 발걸음으로 살아나야 한다. 통일 민족주의의 언술 속에는 눈 앞의 사적인 이익만을 챙기려고 허둥대는 온갖 형태의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분단 국가 체제에 묶여 생각하고 살아온 낡은 분단 의식을 극복하려는 진보와 발전을 향한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분단 국가주의의 굴레를 벗고 통일 민족주의의 드넓은 사고 지평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자기 해방, 바로 거기서 분단 극복의 의지가 빛난다.

통일 시대의 사상적 지표는 '통일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 분단으로 깨어진 민족의 삶을 통일로 되살리려는 뜻을 제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민족 성원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우리는 통일 민족주의자로 불러야 하리라.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담론들은 통일 민족주의라는 개념 안으로 포괄되고, 정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통일 민족주의를 사상적 지표로 받아들이지 아니고서는 이 시대를 참다운 의미에서 통일 시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통일 의지를 지닌 민족 성원들은 마땅히 통일 민족주의의 열렬한 신봉자, 힘있는 전파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통일 시대의 민족주의자는 조국 통일 과업을 당위가 아니라 현실로 받아안아야 하며, 의무가 아니라 영예로 받아안아야 할 것이다.

3. 그 불우한 이념의 발자취

그런데 지난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훑어보면 민족주의란 사실 '불우한 이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좌우 세력으로부터 모두 배척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좌우 세력이 제각기 이용하기도 했던,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던 이념.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에 달려 있는 빛바랜 평가서다.

민족주의의 사상사적 족보를 볼 때, 우리는 그 첫 자리에 유럽에서 시작된 부르조아 민족주의가 기록되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난 시기 유럽의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민족주의의 깃발을 들고 시민 혁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낡아빠진 봉건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민족 국가를 수립해야 했던 역사적 임무가 주어졌던 그 시기에 탈봉건적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업 안에서 민족의 이익과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이익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다.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들고 진두에 나섰고,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 정치적 이념, 곧 민족주의로 무장했으며, 봉건 질서를 유지하려는 낡은 세력에 맞서 싸웠다.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유럽을 분할·지배해 오던 봉건 사회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한 체제로 통합된 민족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부르조아 계급이 민족주의를 들고 나와 민족운동을 선봉에서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가 부르조아 계급 뿐아니라 민족 전체의 이익을 반영하는 선진적 위치에서 민족 국가의 앞길을 개척했던 이념적 진보성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근대 민족 국가가 수립된 뒤에 부르조아 계급이 자기 계급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는 민족 공동의 이념적 기반에서 분리되었고 부르조아지를 위한 계급의 한계 안으로 몰려가고 말았다. 부르조아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마치 민족 전체의 공동 이익인 것처럼 속이고, 자기가 지배하게 된 새로운 계급 사회의 내적 동질성, 다른 민족 국가에 대해서 갖는 대외적 차별성을 강조했다. 이로써 유럽형의 민족주의는 부르조아 계급의 기득권과 결합된 지배 이념 체계로 변질되어 갔다. 부르조아 민족주의는 민중에 대한 이념적 배반인 국가주의로 퇴화된 것이다.

유럽 민족국가의 경제적 토대인 자본주의가 체제 위기를 맞게 되자 저들은 약소 민족 국가들과 아직 민족 국가를 이루지 못한 소수 종족 집단들을 침략하고, 그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부르조아 계급이 이념 도구로 장악한 국가주의는 제국주의로 확대되면서 침략적 성격을 띄게 되고, 마침내 민족 자체를 배반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민중을 침략 전쟁에 내몰았던 온갖 형태의 국가주의(이를테면 chauvinism, jingoism 따위들),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시켜주는 피묻은 도구들은 이렇게 해서 현대 세계사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고전적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부르조아 계급의 이념적 도구라고 파악하게 된 이유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이란 부르조아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조작한 허구적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민족주의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대립되는 반동적 이념이라고 배격하게 된 것이다. 지난 시기 맑스-레닌주의자들은 한때 민족주의가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호도하려는 자본의 자기 분식 논리라고 여겼고, 실제로 민족주의를 위장한 국가주의 이념은 파쇼 독일이나 일제가 써먹었던 인민 동원의 피묻은 기제로 기능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른 1920년대에 그 땅에 소비에트 정권을 세운 뒤, 제국주의 세력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복합 민족 국가의 다양성을 통합의 길로 이끌고 중앙 집권제와 국가적 단결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사회·역사의 발전 동력을 '민족'이 아니라 '계급'에서 찾았던 유럽과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민족주의는 전근대성을 지닌 고루한 지역주의거나, 아니면 국가주의와 내통하는 위험한 이념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지배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과 국제주의 원칙만을 옹호·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전수 받은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민족주의하면 일단 경계심부터 품는 조건 반사를 일으키는 경우가 흔하다.

부르조아 민족주의의 반역사성이 극점으로 치닫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민족주의는 다시 식민지 민중의 반제 투쟁 속에서 재생의 활로를 개척하게 된다.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끌어간 반제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약소 민족국가들과 소수 종족 집단의 피억압 민중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반외세·반침략의 이념적 토대를 강화해나갔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반(半)식민지 예속에서 벗어나서 자주적 민족 국가를 형성하려고 싸웠던 3개 대륙의 민족 해방 운동은 그 기본 이념이 언제나 반제 민족주의였으며, 그 운동을 주도한 민중들이 민족주의를 단결의 기치로 내세웠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이 전세계적 범위로 확장되면서 제국주의 세력이 가장 증오했던 대상도 또한 민족주의였다. 세계를 자기의 상품 시장과 자본 투하 시장으로 만들어가는 움직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고 도전했던 세력들도 언제나 한 손에는 민족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과 더불어 민족주의 세력을 경계·혐오하는 습성을 제 몸에 익혔다. 이러한 사고의 연동 법칙이 작동하는 환경에서 교육을 받은 자유민주주의 지식인들도 민족주의를 낙후한 폐쇄 심리 상태나 편집증쯤으로 치부하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하나로 보였다.

민족주의는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의 포괄적 성격은 민족주의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이념 체계와 자신을 결합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아니라, 바로 그 포괄적 성격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 비판·배척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기 민족주의가 양 진영에서 각각 환영과 수용, 비판과 배척을 받는 '불우한 운명'을 타고날 수 밖에 없는 근본 원인은 그것이 '민족'을 사회·역사 발전의 주체로 보는 이념체계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기를 러시아나 중국, 미국 같은 나라들처럼 복합 민족 국가건, 아니면 우리 나라처럼 단일 민족 국가건 간에 민족 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여 사회·역사 발전을 이루어나가고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면, 민족주의는 언제나 어디서나 민족 국가를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이념 체계로 등장하기 마련인 것이다.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사회·역사 발전의 주체를 강화하는 데 동원되는 이념이고, '민족'이라는 집단적 자기 확인에 복무하는 이념이다. 여기서 사회·역사 발전의 기본 단위인 민족 국가(nation-state)를 아직 형성하지 못한 혈통적, 언어·문화적, 사회·경제적, 역사적 결합체인 종족(ethnic)은 민족(nation)과 구별되어야 한다. 특별히 맑스주의 전통에서는 근대적 의미에서 민족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느슨한 결합력을 가진 미성숙한 단계의 종족 공동체를 '민족체'(nationality)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럽의 경우 여러 갈래의 종족들은 중세의 봉건 질서 안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가 형성되면서 비로소 민족 국가를 수립하였고 그 수립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nation)이라는 관념은 서구의 민족 국가 형성 과정(자본주의 국가체제의 수립과정)에서 도출된 역사적 개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있어서 민족 문제와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조아 계급의 국가 형성 과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부르조아 계급의 국가 권력을 반대했던 사회주의 세력들은 민족주의를 부르조아적 지배 이념으로 규정하고 이를 견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조아 민족주의(bourgeois nationalism)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proletarian internationalism)를 언제나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후자를 선택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달라서, 한(조선)반도와 만주에 생활 터전을 잡고 살아오고 있던 여러 종족들이 삼국 시대(고구려-백제-신라)와 남북국 시대(후기 신라-발해)를 거치면서 민족적 결합력을 차츰 높히다가 고려의 건국과 더불어 마침내 단일한 민족 국가 단위로 통합되면서 그 역사적 실체를 형성했다는 점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어쨋든 역사적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와도 결합할 수 있었고, 사회주의 체제와도 결합할 수 있었던 이념이었다. 민족주의는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할 때만이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진보적 이념으로 살아난다는 사실은 사상사적 족보가 이미 증거하고 있는 바다. 민족 문제의 본질을 밝혀주고 그것을 실현할 때만이 민족주의는 국가주의로 변질되지 아니하고 참다운 민족주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조선)민족의 역사에서 민족주의가 밝혀야 할 민족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세의 간섭과 개입과 지배에서 벗어나서, 또한 외세에 대한 의존과 종속의 질서를 버림으로써 마침내 이룩하는 민족 자강과 민족 자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곧 민족 자주성의 확립 문제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의 이념적 표현이며, 민족의 자주화를 추구하는 통합과 단결의 이념이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족의 통합·단결을 추구하는 이념으로 받아들일 때, 그 민족주의는 통일 시대의 이념적 지표로 나설 수 있다. 여기에 바로 민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열린 공간이 있다.

4. 민족적 관점을 살리려는 뜻

그런데 우리는 이 '불우한 이념'을 왜 다시 통일 시대의 한 복판에 복원하려고 하는가?

그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아니하다. 남(한국)의 자본주의와 북(조선)의 사회주의가 공존·공영할 수 있는 통일 시대의 새로운 역사적 공간은 통일 민족주의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역사공간이 아니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 민족주의란 남(한국)의 자본주의나 북(조선)의 사회주의가 모두 배척·부정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아니되는 공존·공영의 민족 장래를 밝혀줄 유일무이한 이념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남(한국)과 북(조선) 가운데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부정·파괴하는 흡수 통합, 또는 흡수 통합의 시도 때문에 몰려올지도 모르는 공멸·공망이 아니라, 남(한국)과 북(조선)이 통일된 한 민족 국가를 이루기 위한 공존·공영의 틀을 마련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민족적 자기 확인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니, 이러한 자기 확인은 통일 민족주의가 아니고서는 다른 데서 찾을 길이 없다.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를 형성하려는 민족사적 목표 아래서 우리가 바라보는 오늘 한(조선)반도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조선)반도에서는 이미 5천 년의 기나긴 역사를 통과하면서 단일한 혈통, 단일한 역사, 단일한 언어와 문화를 민족적 동질성으로 하는 '민족'이 역사적 실체로서 형성되어 있는 데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외세가 쌓아놓은 분단 장벽에 가로 막혀 통일된 민족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분단 극복과 통일 실현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는 5천년 민족사의 최고 완성단계에 이르는 길, 곧 근대적인 통일 민족 국가를 한(조선)반도 위에 건설하는 길이다.

여기서 다시 물음이 생긴다. 그렇다면 민족적 실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민족이라는 실체가 과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민족'이라는 틀이 아니고서는 사회·역사의 보전과 유지, 변화와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해명된다. 자본주의적 발전도, 사회주의적 발전도 따지고 보면 결국 민족 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여 생성·소멸하는 사회·역사적 운동이다. 물론 지구촌을 말하는 현대에 이르러 자본주의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가 민족-민족 국가라는 기본 단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오늘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적 차원을 자기의 활동 무대로 삼고 초국적 질서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대 자본주의가 민족 국가라는 기본 단위를 아예 떠나버렸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니 정반대의 논리가 성립한다. 오늘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의 발전 전략 수행 단위인 민족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초국적 질서를 만들어내었고, 그 안에서 운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실체를 사회·역사적 운동의 기본 단위라고 볼 수 있는 논리 근거는 오늘 어떠한 체제건 간에 민족 국가를 기초적인 구성 단위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 위에는 복합 민족 국가도 있고, 단일 민족 국가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회·역사의 발전이 자본주의 체제건 사회주의 체제건 간에 민족 국가를 구성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역사 발전을 만일 계급적 관점이나 체제적 관점에서만 인식·규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인 것이다. 사회·역사 발전은 민족적 관점에서도 인식·규정하여야 한다. 더우기 한(조선)반도에서 보듯이 남(한국)과 북(조선)이 서로 대립하는 체제로 맞서 있고 그 맞섬이 굳어져 있는 현재 상황에서 체제의 대립과 사회 성격의 분열 상태를 지양·극복하고 전민족적인 단결과 통일을 지향하고자 한다면, 그 때는 분명히 체제 대립의 관점보다는 민족적 동질성의 관점을 앞세워야 한다. 지금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우리의 민족적 양심은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민족적 관점보다도 체제 대립의 관점을 앞세우면서 통일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결국 상대방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체제를 자기의 체제 안으로 흡수 통합해보려는 정복 의지에 연동된다. 이러한 정복 의지는 쉽사리 분쟁과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실체와 '통일'이라는 과업이 과연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이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하여 민족과 통일의 상호연관성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죽산 조봉암의 논리를 여기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신태양』이라는 잡지 1957년 4월호에서 나눈 대담 가운데 나오는 한 귀절은 이렇다.

"계급사상적 이론으로는 어느 일정한 주의만이 민족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듯이 말합니다만은 민족이 통일되고 국토가 통일되어야 하는 현 단계의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 일정한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이익을 본위로 해야 하는만치 민족 전체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며 그것이 존중되자면 민주주의의 방법이라야 될 것이고, 민주주의적 방법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야 실천할 수 있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립과 증오에 기울어진 냉전·분단 세력은 통일 민족주의자 조봉암을 이른바 '간첩죄'로 몰아 처형장으로 끌어가고 말았다. 죽산이 통일 민족주의자로 살았던 짧은 기간, 아니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분단 시대를 통틀어 남(한국)의 생활 환경은 냉전적 반통일론과 통일 민족주의가 맞선, 그런데 언제나 냉전 의식과 반통일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어둠의 연속으로 이어져왔다. 그렇지만 분쟁과 증오에 갇힌 반통일론의 의식 구조에 견주어 볼 때 통일 민족주의는 그 폭이 넓고 깊은 강과 같이 이 민족의 양심 그 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소리없이 적시며 흐르고 있다. 통일 민족주의는 민족 성원을 그 너른 폭으로 감쌀 수 있는 열린 담론 체계다. 우리 남(한국) 사회에서 흔히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라고 부르는 자본주의 체제를 민족적 실체에 우선하여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올려놓은 관점과 논리는 통일 시대의 전진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시대착오적 망상이다. 이와 더불어 남(한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논리도 또한 더 이상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급진주의자의 독백이 되고 말았다. 이 양극단의 관점과 논리는 이제 통일 민족주의 앞에서 뒤로 물러나야 한다. 남북 사이에서 적대 관계와 대립 상태가 무한정 연장되는 것을 극력 반대하는 민족적 양심을 지닌 민족 성원은 누구든지 통일 민족주의에서 통일 시대의 사상적 지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남(한국)에 사는 통일 민족주의자는 북(조선)의 인민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아야 하며, 북(조선)에 사는 통일 민족주의자는 남(한국)의 민중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북(조선)의 사회주의자건 자본주의 체제를 신봉하는 남(한국)의 자유 민주주의자건 간에 그가 상대방을 증오와 척결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 함께 살아야 할 민족 성원이라는 동족 의식으로 만나려 한다면, 통일 민족주의에 눈을 떠야 한다. 동족 의식의 회복은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 세력과 북(조선)의 통일 민족주의 세력이 분산·분열되었던 정치 역량을 하나로 묶어내는 민족적 단결의 원칙에서 최고 단계로 실현된다. 그리하여 남(한국)과 북(조선)이 통일을 지향하는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고 민족 전체의 공존·공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통일 민족주의다. 통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남녘 동포들과 북녘 동포들이 함께 통일의 길로 나설 때, 통일 시대의 지평에 새날이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통일 시대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에게는 이제 더 이상 불우한 이념이 아니다.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이념의 장쾌한 깃발이다. 통일 민족주의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이루어가는 열린 이념 공간이다.

5. 다시 생각하는 통일 민족주의의 큰 줄기

오늘 남(한국) 사회 안에 통일 민족주의는 과연 살아있는가? 이 물음은 분단 시대 반세기 동안 남(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서 해답을 찾아야 할 물음이다. 우리 사회는 반세기 전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을 맞을 때, 근대적 의미의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역사적 과업을 떠맡게 되었다. 그런데 세계적 규모에서 벌어진 냉전 질서는 가장 악랄한 형태로 우리의 '해방 공간'을 점령하였고 한(조선)반도에 분단과 전쟁이라는 참극을 몰고 왔다.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남(한국)사회에서 장차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과업을 수행할 자주적 정치 역량을 옹호·지지하기는 커녕, 반공주의를 내걸은 친미 세력을 앞세워 그러한 자주적 정치 역량을 모조리 압살하였다. 분단 정권이 들어서고 한국(조선)전쟁이 일어난 뒤로 남(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국가 이념으로 자리를 잡기는 고사하고 아예 자취마저 감추고 말았던 사정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제국주의 대 민족해방운동 간의 대결이 냉전체제 하에서 반공 대 친공이라는 새로운 대치선을 따라 격렬하게 재편성되면서 민족주의 운동과 이념은 자연히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과연 8·15 '해방 공간'의 남(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를 사회 발전의 이념적 기초로 세운 정치 세력은 애당초 없었던 것일까? 없지 않았다. 옛날 유럽에서처럼 민족주의를 내걸고 사회 통합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만한 역량있는 부르조아 계급이 그 무렵 우리 사회에는 없었을 터나,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고 힘썼던 민중 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민중 세력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고, 3년 동안 치열했던 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 힘이 꺾이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쟁 뒤로 남(한국)에서 사회·정치적 발전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수행될 수 없었고,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자본의 외압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이식되는 경로가 아니면, 미국과 일본의 국제 자본과 결탁한 내부 세력들이 주도하는 파행 경로를 밟게 되었다. 분단 질서는 북(조선)을 언제나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는 반북 의식을 확산·심화시켰고, 이러한 경향은 민족주의를 배척하는 한편, 외세인 미국과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적 의존·종속 관계를 확산·심화시키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분단 시대 내내 남(한국) 사회에서는 친외세적이고 사대주의적인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민족'이 역사적 실체로서 형성·존재하고 있었는데도, 민족주의가 사회 통합의 이념, 국가 건설의 이념으로서 우리 사회에 정립될 수 없었던 원인이 된다. 분단 질서는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의 이념이 되어야 할 민족주의를 질식시켰고, 그 대신 외세에 대한 의존·종속 관계를 온존·확대시켰다. 따라서 외세에 대한 의존·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의 이념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짓눌려왔던 민족주의가 되살아나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게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민족주의의 되살림은 분단 질서를 극복하는 통일운동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통일 민족주의의 정립이다. 최장집 교수는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조국 통일을 위한 의식적 차원 뿐아니라, 그것을 위한 실천적 차원에서도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민족주의의 중요성은 하나의 민족 국가(가 되고자 하는 분단 국가)가 민족주의 이념이 하나의 교리로서 어떤 다른 정치적 관념 체계나 가치보다 우월하고 규범적으로 담지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 실제로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를 성취함에 있어서 민족주의의 결여가 통일의 목표·성격·방법·전략 등 모든 면에서 자주적 결정과 선택의 패러미터를 결정적으로 제한한다는 사실 때문이다"고 썼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분단 시대 반세기를 거쳐오면서 남(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던가?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남(한국)에서 민족민주운동이 장성하였다. 1980년대 이후 민족민주운동은 민족 자주와 조국 통일이라는 두 당면 과제를 결합시키면서 진보적 민족주의, 곧 통일 민족주의를 민중의 가슴에 되살린 것이다.

그렇다면 8·15 '해방 공간'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 이후까지 남(한국)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통일 민족주의의 긴 공백기로 볼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공백기처럼 보이는 이 기간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참된 의미에서 통일 민족주의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 캄캄한 분단 시대의 동굴 속에서 모두 주저 앉아 있을 때, 조국 통일의 빛줄기를 찾아나선 참된 통일 민족주의자가 과연 있었던가? 있다면 누구를 손꼽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남(한국) 통일 민족주의의 큰 줄기는 1940년대의 김구→1950년대의 조봉암→1970년대의 장준하→1980년대의 문익환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줄기는 남(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이어온 줄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8·15 해방 공간에서 남(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변혁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싸웠으나 힘이 부쳐 밀려나고 말았으며, 3년 전쟁을 거치면서 그 뿌리마저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지난 시기 그들이 벌인 싸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이라는 간판을 앞에 내세우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려했던 지배 계급의 반민족적 질서에 도전했던 힘겨운 싸움이었다.

그런데 남(한국)에서 민족주의를 이어온 다른 한 줄기는 한 때 사회주의를 경계하고 증오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럴수록 자유 민주주의에 한때나마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민족주의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았고, 그 안에서 통일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가려고 했던 사상의 순결성을 잃지 않았던 흐름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 흐름에 잇닿아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반민족 세력들에게서 모진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했고, 자유 민주주의가 만들어놓은 사상의 감옥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고달픈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민족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확장해 주는 체제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반민족 세력들과 싸웠고, 그래서 그 세력한테서 탄압을 받은 것이다. 이 줄기는 분단 질서를 유지하려는 반통일·반민족 세력들의 탄압 때문에 자칫 끊어질 것 같은 단절 위기를 넘기면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온 사상의 줄기다. 이 줄기를 총칼과 감옥으로 끊어버리려고 했던 세력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역대 분단·독재 집권 세력이며, 이른바 문민 대통령이 들어선 지금도 분단·독재의 유물인 안기부와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존치·운용하고 있음을 볼 때, 근본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① 장준하의 통일 민족주의

 

이 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도 더 넘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한 통일 민족주의자의 전형을 오늘 우리 시대 한 복판에 되살려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를 생각할 때면 모름지기 오늘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되묻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날선 물음이 가슴팍에 왈칵 다가오는 듯하다. 여기 통일 민족주의자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민족주의자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자기의 생애를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이것은 장준하가『씨량의 소리』1972년 9월호에 발표한 자신의 글「민족주의자의 길」을 시작하면서 던진 첫 물음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하여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삶, 고달픔과 보람을 민족의 그것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답을 주었다. 분단 국가주의자들이 판치는 이 답답한 세상 한 복판에서 통일 민족주의자의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나서고 있는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났던가? 그건 다른 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탁월하게 일치시키는 통일 정신의 푸른 싹이었다. 그 사상의 싹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설명을 달자면 그의 사상은 '민족'이라는 실체 안에서만 오로지 '개인'을 발견한다는 명제로 집약될 수 있다. 그를 통일 민족주의자로 부르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읽는 이들의 가슴에 울컥 뜨거움을 느끼게 하는 우리 시대 민족주의자의 넋이 스며있는 그의 글 가운데서 한 군데를 여기에 옮겨 적는다.

"남북의 동포가 다 합해야 겨우 5천만. 일본도 1억이 넘고, 미국이 2억, 소련도 2억이 넘으며, 중공은 약 8억이 아닌가. 우리 민족이 총단결해도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 사강 중의 어느 하나를 숫자로 맞먹기 힘든 판에 왜 5천만 민족의 총단결을 부르짖고는 실제에서는 단결 파괴적인 방향으로 돌진하는가. 겨우 5천만을 단결시킬 위대한 통일 정신이, 3천리 금수강산에 비길 수려한 통일 양심의 거인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내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반드시 통일을 쟁취해낼 속힘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장준하의 사상적 뿌리를 더듬어 가자면 문득 손끝에 집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젊은 시절 그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항일 민족주의다. 그가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달아나서 어렵사리 중경에 있던 임시 정부로 들어간 뒤에 임시 정부의 정신적 풍토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쓴『돌베개』라는 회상기를 보면, 물론 그는 간판만 남은 임시 정부를 보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다양한 세력들의 항일 민족주의에 이내 동질화되어 갔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장준하의 항일 민족주의가 일제가 우리 땅에서 물러갔던 8·15 해방 공간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민족주의가 8·15 뒤로 '항일'이라는 명분과 표적을 잃어버렸을 때, 그리고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 건설에서 쓰라린 좌절을 맛보아야 했을 때, 그 빈 자리에 접근하고 스며든 것은 공허감과 무력감이었을 터다. 그는 8·15 뒤로 김구의 곁을 떠나 있었던 것을 뒷날 크게 자책한다고 되뇌이곤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8·15 뒤로 외세가 분단선을 긋고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 세력이 단독 정부를 세우려고 몰아칠 때, 백범 김구 처럼 목숨을 걸지도 못했고, 그것을 민중의 역량으로 분쇄해낼 수 있도록 민중을 조직화해내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었다고 했다. 1960년대 '사상계 시절'을 거치면서 공허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그의 사상은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가 쳐놓은 자기 절대화의 울타리, 그 폐쇄 영역을 뛰어넘을만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자유 민주주의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 맥없이 갇혀 버린 한 민족주의자의 운명, 그것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격렬한 반공주의 공세 앞에서 힘을 잃어버린 민족주의로 명맥을 유지해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1988년에 펴낸『사상계지 수난사』를 들여다보면, 장준하는 1960년 4월 혁명 뒤로 일어난 조국 통일 운동을 비판하면서 "국가 형태야 어찌되든지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고 일부에서 환상적 논리를 펴고 있다"고 지적하고, 어떠한 형태의 중립주의도 반대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대결을 상기시켰으며,『사상계』1961년 6월호에 권두언으로 실은 글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에서는 박정희의 5·16 군사 반란을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실 따져보자면, 1960년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격렬한 반공주의 공세에 도전하면서 남(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통일 민족주의의 정신을 불태우고 있었던 공간은『사상계』가 아니라,『청맥』이었다고 평가해야 정당하다. 그 무렵『청맥』은 비합법 운동세력이었던 통일혁명당 서울시 준비위원회와 직접적 관련을 지니고 있었던 언론 매체였다는 사실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되지 아니한 채로 우리 현대사의 '빈칸'으로 남아있다.

묻고 싶은 물음은 이제 나온다. 그런데 장준하는 사그러져가던 통일 민족주의를 어떻게 되살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반공주의에 도전과 심판을 내리게 되었던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그가 '사상계 시절'에 대한 자기 비판이 있고 난 뒤 1970년대, 그가 암살 당하기 전까지 말년에 해당하는 기간에 일어났던 역사적 변화들과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장준하 자신도 '사상계 시절'을 "낡은 자유주의만 앞세우는 잡지 경영에만 몰두함으로써 사실상 퇴영적 문화주의에 빠져 있었던 점을 자성"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강토에서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그 역사적 실체인 북(조선)을 반대하는 파괴적인 이념 기제로서만 기능하던 반공주의 앞에서 항일의 깃발을 내린 장준하의 민족주의는 그렇게 겨우 정신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1962년 8월 필리핀 마닐라에 건너가서 반공주의자 막사이사이를 기념하는 상을 받을 때, 아시아의 반공주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있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자유 민주주의의 뒷편에 도사리고 있는 냉전·분단 세력을 한때 기웃거리던 빛바랜 과거사를 목격하고 멈칫 놀라게 된다. 심지어 그는 1960년 후반에 쓴 글에서 "대한민국 국토의 반은 공산 괴뢰 집단이 강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공산 북괴의 노예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국토를 방위할 수 있는 철저한 이념 무장을 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냉전·분단 세력의 편을 오락가락하던 그에게도 마침내 커다란 전환의 계기가 찾아왔으니, 그것은 반공주의 공세 앞에서 한때 뒤로 물러섰던 통일 민족주의가 자유 민주주의의 편협한 틀을 부수고 새로운 공간으로 뛰쳐나온 자기 해방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장준하에게 있어서 통일 민족주의를 향한 사상의 힘찬 도약이었다. 그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받은 충격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가다듬었던 글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우리는 이 힘찬 도약의 자취가 뚜렷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한 역사학자는 "7·4 공동 성명에서 사거할 때까지 장준하의 통일에 대한 열정은 1960년대까지의 그의 반공의식, 냉전의식과 비교해볼 때 정말 놀랄 만한 변화였다"고 적었다. 장준하는 「민족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글에서 "7·4 성명이란 이와같이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분단이 현실화된 민족사의 한 부분과 이 분단을 거부해온 민족사의 심연이라는 두 개의 부분이 논리적으로 또는 실천적으로 통일되기를 기원하는 백성들의 염원에 불을 당긴 쾌사였다"고 외쳤다. 중량천의 가난한 판잣집에 사는 도시 빈민들 앞에 서서 그는 "7·4 성명은 우리 민족의 거울이다. 이놈을 우리 민족의 현실 앞에 걸어놓고 있으면 조만간에 가짜와 진짜가 가려질 것이다.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한 짓인지 아니면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 명분으로 한 짓인지 분명히 가려질 날이 곧 올 것이니 두고보라"고 말했다. 이것은 실로 선견지명이 번득이는 설파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예언적 설파가 현실로 나타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아니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분단 영구화를 꾀하던 반민족성을 이른바 '평화 통일에 관한 외교 전략'이라는 그럴듯한 기만의 포장지로 쌓아 세상에 내놓았던 '6·23 선언'은 사실상 통일 민족주의에 대한 완전한 부정과 반역임이 밝혀졌을 때, 그는 무척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반역의 날'을 맞은 자신의 쓰라린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그래도 나는 생각해 보았다. 석간 신문 한 장을 들고 그 성명 내용을 조목조목 읽어보았다. 애들도 이미 잠들고 밤거리를 스치는 자동차 소리마저 끊긴 면목동의 깊은 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석간 신문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거듭 읽어가며 괴로운 심경을 달래야만 했다." 그의 괴로움은 깊은 밤에 스쳐가는 한 줄기 감상 따위가 아니었다. 민중이 냉전·분단 세력의 압박에 가위눌린채, 아직 7·4 남북 공동 성명에 천명된 통일 민족주의를 실현할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지 못한 이른 새벽녘에, 통일 민족주의의 정치적 선언은 통일 민족주의에 반역의 칼을 댄 세력들에 의해서 한낱 휴지 조각처럼 허공에 날아갈 수 밖에 없음을 뒤늦게 깨우치면서 얻은, 그처럼 살아픈 자책과 반성이었으리라. 아니 그것은 전면적 도전을 받았던 장준하의 통일 민족주의가 한때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던 신념의 위기이기도 했다. 그가 남기고 간 원고 초안 「민족통일전략의 현단계」를 읽노라면, 그의 자책과 반성이 진하게 묻어난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7·4 성명은 사실 한 장의 휴지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것을 놓고 날뛰던 나 장준하, 이제 나도 내 일생 중에서 가장 위험한 시련에 맞서게 되었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일찌기 20대에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그것이 죽음의 길이 아니라 나를 끌고가는 그 놈들과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기회임을 자각했을 때, 나는 오히려 나를 끌고 가는 일제의 청년이 된 것보다는 피흘리는 식민지하의 젊은이임을 보람으로 느꼈었다. 그러나 60 고비를 바라보는 지금 나는 이 희한한 민족사의 변전 앞에 보람보다는 일제하에서보다 더 암울한 곤혹을 느낀다. 왜 이 사태를 일찍 간파하지 못했고 왜 이 사태에 대항할 민중을 일으키지 못했는가."

우리는 그가 냉전·분단 의식을 벗어나 통일 민족주의로 나아간 사상 도약의 근본 원인을 오로지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라는 역사적 충격 때문이었다고 성급히 규정해서는 안된다. 그의 사상 도약은 7·4 남북 공동 성명의 기본 정신인 통일 민족주의를 민중 주체 통일관과 하나로 일치시키는 치열한 인식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정확하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통일 정책(실제로는 반통일 정책이었다.)이 드러내놓은 반역성을 민중 주체의 통일관이라는 사상적 무기로 과감하게 뚫고 나간 돌파구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7·4 남북 공동 성명의 통일 민족주의가 생명력을 찾고 되살아나는 열린 지평을 두 눈으로 보게 되나니, 그는 바로 이 뜻을 깊이 깨우친 것이다. 사실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는 그를 이러한 사상 도약의 발판으로 이끌어갔던 한 계기로 작동하였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장준하에게 있어서 이러한 계기를 사상 도약의 '유일한' 근본 원인으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사상 도약 저 밑바닥에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던 민중 주체의 통일관을 가볍게 보아넘기고마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사실 뭇사람들은 지금까지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일 민족주의의 정치적 선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민중 주체의 통일관이 그리 선명하게 들어나 있지는 않다. 허나 장준하는 자신의 사상 도약으로 민중 주체의 통일관을 뚜렷이 빚어내어 우리 민족사 앞에 웅혼한 기념비로 남겨놓았다.

이로써 장준하의 사상 도약은 우리 시대 통일 논의가 반드시 수용해야 할 '진보'의 발자취로 조국 통일 운동사에 당당히 기록된다. 그 기록은 냉전·분단 의식이 배태하고 있는 반역성을 소멸하고 통일 민족주의의 정치적 선언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거기에 민중 주체의 통일관을 결합시키는 통일 시대 최고의 진보적 통일관으로 전진한다. 통일 문제를 민중 주체의 관점에서 파악했던 통일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진보적 통일관. 그것은 그대로 오늘 우리 시대 한 복판에서 힘차게 일어서고 있는 통일 시대의 통일관에 피와 살이 뜨겁게 통하고 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또한 지금 통일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민족 통일을 민중과 갈라 현실적으로 이를 다루는 정부나 관계기관의 일로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는 고향이 그립다든지 흩어진 가족이 보고 싶다든지 하는 감정과 차원에 그치게 하여 직접 이산가족이 아니면 민중의 실생활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통일 없이는 가난, 부자유, 이 모든 현실적 고통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 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따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현재 진전되고 있는 남북 문제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점들은 보다 보충하고 염려해야 할 점이지 남북 관계의 진전 자체를 부정해야 할 근거가 못 됨은 변함이 없다."

"그러면 누가 진실로 통일을 원하는가 돈 있는 사람들인가, 권력 있는 사람들인가. 물론 이러한 사람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진실로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통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이 땅의 백성들, 분단 때문에 생활이 파괴되었고 분단 때문에 생명을 잃어가는 민족적 양심들, 당장 살기가 힘들고 끼니가 어려운 불쌍한 절대 다수의 백성들만이 통일을 하루가 여삼추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장준하의 통일 민족주의가 민중 주체의 통일관을 그 내용으로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거기에 생각을 멈추어서는 아니된다. 우리가 그의 사상을 통일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적 이정표로 보는 까닭은 그의 통일 민족주의가 민족 자주의 관점을 선명하게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이 점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민족 자주의 관점을 오늘 1990년대 후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통일 민족주의가 담아내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 문제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를 통일 시대를 20년 전에 미리 내다본 선각자라고 아니 부를 수 없다. 통일 민족주의의 핵심인 민족 자주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장준하의 논리는 그가 남긴 글을 읽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날카로움으로 다가선다.

"첫째는 정치, 경제, 문화 어디서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음은 하나의 민족을 향해 서로 개혁해 나가야 한다. 그 개혁은 조국은 하나라는 민족 전래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의 조국은 두 개의 국가 때문에 피해 받는 민중의 조국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개의 국가란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한 몇 사람의 것이요, 민중의 조국은 끝까지 하나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줄임) 적어도 각 분야에서 대외 의존이 청산되고, 자주성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통일 민족의 의식과 도덕이 확립된다면 복합적 사회 체제가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② 김구의 통일 민족주의

장준하보다 일찌기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가 발원하는 분단사의 원점에 우뚝 서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백범 김구다. 나라 안팎의 분열주의 세력들, 분단 국가주의 세력들, 친미 사대주의 세력들이 미친듯이 날뛰고 있었던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그는 민족 분열을 반대하는 비장한 결의를 가슴에 새겼다.

백범이 만일 자주적인 통일 조국 건설을 지향한 이러한 비장한 결의를 좀더 일찌기 가슴에 새기고 민족 대단결의 길에 나섰더라면 아마 해방 이후의 정치사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백범이 해방 이후의 복잡하고 혼미했던 정치 공간에서 통일 민족주의자의 임무를 자각하기까지에는 수많은 곡절을 겪어야 했다.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각각 스스로를 해체시키면서 단결·합작을 이루어 새로운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한 사회주의 세력의 제안을 받은 백범은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살려 이를 수용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때 백범을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은 마땅히 사회주의 세력의 합작 제안을 받아들여 단결된 힘으로 통일 국가 건설에 매진했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에 관한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도 백범을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은 "통일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는 의정서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주의 세력과 전민족적 단결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통일 민족주의자로 걸어가야 할 백범의 앞길을 이토록 가로막고 있었던 걸림돌은 무엇이었던가? 가슴 아픈 평가지만, 그것은 '임정의 주도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자기 중심주의였다. 백범은 "조선에 관한 의정서"를 전면 부정하는 친미 사대주의 세력 이승만 일파와 손을 잡고 이른바 '반탁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그 무렵 백범이 반탁 운동에 앞장선 까닭은 기울어진 임정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리고 임정 세력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편협한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반탁 운동의 지도자로 일어서면서 임정의 주권 행사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오였다. 아니 착오에서 더 나아가 분단 정권을 세우려는 이승만의 계략에 말려들어가고 말았던 오류였다.

백범의 반탁 운동은 사회주의 세력과의 통일·단결에 결정적인 파탄을 가져왔고, 임정의 주권 행사 선언도 미 군정의 압력으로 하루만에 취소할 수 밖에 없는 좌절을 낳았고, '조선에 관한 의정서'를 지지하는 임정 좌파가 떨어져나가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함으로써 그나마 힘이 미약했던 임정 세력이 결국 둘로 쪼개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로써 "나와 나의 동지는 오직 통일된 독립 자주의 민주 국가를 완수하기 위해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갖고 귀국했다"고 했던 1945년 11월 23일의 귀국 성명을 발표하면서 조국 땅에 첫 발을 디뎠던 민족주의자 백범은 그즈음 친미 사대주의 세력의 대표자 이승만과 자리 다툼이나 벌이는 비좁은 골방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외세에게 분할 점령을 당하여 조국 강토가 둘로 갈라지고, 강대국의 지배 밑으로 굴러 떨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민족사 최대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범은 조국과 민족의 비틀거리는 운명보다는 이미 정치적 파산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임정의 운명을 정치적 실천의 첫 자리에 놓고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임정 세력은 반북·반공·반소의 선봉장이 되어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1946년 조병옥을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 일부는 '백의사(白衣社)'라는 비밀 테러 집단을 입북시켜 그해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장에서 김일성 위원장(그때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였다.)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소련군 경비대장이 이를 막아 대신 크게 다침으로 미수에 그쳤던 백색 테러도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 공작대'를 만들어놓고 그 대원들을 밀입북시켜 북(조선)에서도 일제의 앞잡이 관료 출신자들을 규합하여 반탁 운동을 일으키고 정부 수립을 준비하려고 했다. 이처럼 백범은 극우 보수 세력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치열한 암투를 계속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 분열을 재촉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 무렵 이승만이 김구와 유일하게 다른 측면이 하나 있었다면, 이승만은 미 군정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친미 사대주의자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백범을 저버리지 않았다. 민족사는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평생을 바친 그를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역사는 그의 발길을 통일 민족주의자의 길로 돌려 놓았다. 강대국의 손바닥 위에서 허리가 동강나게 된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보면서, 그는 민족의 통일·단결된 힘을 다시 갈망하게 된 것이다. 그가 북녘의 공산주의자들도 같은 피와 언어와 조상을 가진 동족이라면 마땅히 함께 손잡고 단결하여 분단 흑암 속으로 기울어져가는 이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아 활로를 개척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단결하여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곧 민족 자주와 조국 통일의 대의를 위해서는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 전민족적 단결·단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통일 민족주의를 자기의 심장으로 깨달은 사상적 도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믿음은 마침내 그의 마음 속에 가로놓여 있던 분단선을 지워버렸고, 그의 발길을 북행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 속에 삼팔선이 무너져야 땅 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눈물로 민족의 양심에 호소하지 아니했던가. 분단의 어둠이 깊어만 가던 1948년 2월 10일 그가 남긴 불후의 명문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다시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런 대목에 가서 눈길이 멎는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나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하는 것은 전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한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이란 무엇일까? 통일 민족주의를 뜻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강렬한 통일 민족주의는 반세기 가까이 지난 오늘에도 이렇게 뜨거움을 뿜어내고 있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삼팔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 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 자매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하라."

궂은 비 내리는 날이면 분단 장벽을 싸고 도는 원귀의 곡성이 귓가에 울리고, 고요한 밤이면 민중의 모습을 눈 앞에 그리며 괴로워하던 이 늙은 통일 민족주의자는 자신의 소원대로 마침내 북녘 땅을 밟았으며, 그로부터 한 해 뒤에는 자신의 목숨을 통일 제단에 바치고 분단 조국의 흙 속에 묻혔다. 허나 그의 넋은 죽지 않았다.

백범이 반통일 세력의 손에 참살 당한지 거의 반세기가 되어오는 오늘에 이르러서 뭇사람들이 그의 이름과 행적을 기리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우러러보는 것은 어떤 사연이 있어서일까? 그것은 분명히 그가 늙은 몸을 일으켜 반통일 세력의 분단 국가주의에 맞서 저항했기 때문이며, 항일 민족주의자로 살아왔던 파란만장한 자기 인생의 마지막 걸음을 그 길이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감연히 통일 민족주의의 가시밭길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백범이 원한 맺힌 숨을 거둔지 어언 반세기 가까이 흘러간 오늘, 역사는 이 탁월한 통일 민족주의자가 걸어갔던 자기 희생의 발자국 소리를 후대들의 귓전에 생생히 들려주는 듯하다.

1995년 ?한 방송사가 남(한국) 전 지역의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50년 동안 남(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을 조사한 결과 김구가 40.7%로 으뜸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식민지 시대의 항일 민족주의자요, 분단 시대의 통일 민족주의자인 그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얼마나 뜨겁게 살아있는지를 가늠케 하는 이야기다. 통일 민족주의를 압살하려고 기세를 올리면서 분단 국가주의와 친미 사대주의에 매달렸던 이승만은 얼마전 보수 언론들이 이른바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니 무슨 "거대한 생애-이승만"이니 하고 소란을 피우며 '이승만 미화 작업'을 벌였는데도 그 여론 조사 결과에서 이승만은 겨우 12.9%의 지지 밖에 얻지 못하여 5위로 밀렸다고 한다. 역사는 비록 그 걸음걸이가 더딜지 모르지만 뒷날 언젠가는 반드시 엄정한 심판을 내린다는 가르침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분단의 먹구름이 조국의 땅과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던 1948년 4월 19일, 백범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 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삼팔선을 넘어 북녘 땅을 향해 나선 북행길은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자가 분단 질서의 수립을 막기 위해서 기어이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험한 길이었다. 백범은 1948년 4월 23일 평양에서 열리고 있었던 남북 연석회의 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시련의 고빗길을 헤치며 칠십 평생을 살아온 백범이 역사 앞에서 자기 삶을 솔직하게 되돌아보면서 내린 맺음말이 아니었던가.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아 나선 분단 장벽 앞에서 민족 자주와 조국 통일을 전취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마지막 순간이 차츰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는 통일 민족주의자만이 할 수 있는 참된 고백이 아니었던가. 그 해 5월 6일자로 백범이 우사 김규식과 함께 남긴 남북 협상에 관한 공동 성명에서 우리는 통일 민족주의의 광채나는 원광석을 발견하는 설레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글에 담아 역사 앞에 남겼다.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행동으로써 증명한 것이다.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서 양 조선의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줄임) 우리는 행동으로써만 우리 민족이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 뿐 아니라 사실로도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통일 민족주의자 김구는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이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내다보며 괴로와했다. 그는 우리 강토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 민족은 3년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참화를 겪었다.

③ 조봉암의 통일 민족주의

그렇다면 파괴와 학살의 구렁텅이에서 통일 민족주의도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가? 통일 민족주의의 주체적 맥락은 그 전쟁의 포연과 함께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일까? 사뭇 떨리는 가슴으로 이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통일 민족주의가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민족의 양심을 일깨우고 있다고 힘있게 말한다. '민족과 통일'이라는 절대 명제를 그 비극과 고통 속에 파묻지 않고 다시 살린 통일 민족주의자가 전후의 폐허 위에 일어섰으니, 그가 바로 죽산 조봉암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통일 시대의 시대 정신이 조봉암의 평화 통일론을 곰곰히 생각해야 할 정신적 빚을 받아안게 되는 까닭은 냉전·분단 의식과 반통일론의 유령이 흉악스런 꼴을 하고 떠돌아다니며 이 민족의 정치 의식을 가위누른 암흑기였던 1950년대 후반기에 그가 통일 민족주의라는 불꽃을 다시 지펴올렸다는 데 있다.

1950년대의 조봉암을 냉전·분단 질서로 황폐해진 남(한국) 사회에 유럽형 사회 민주주의를 역사적 대안으로 제시하려 했던 혁신계 정치인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그를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통일 민족주의자로 보려고 한다. 조국 땅에서 전화의 피내음이 가신지 불과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57년, 진보당 기관지였던「중앙정치」10월호에 실은 자신의 글 「평화 통일에의 길」에서 그는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하고 묻고 그 물음에 답변을 적어가면서 자신의 통일 민족주의적 관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가 말하는 통일의 필연성, 당위성은 '단일 민족'이라는 역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통일 민족주의자 조봉암은 말한다.

"첫째,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라는 것이다. 수천년 동안 단일 민족으로서의 역사를 가졌고, 또한 단일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감정을 가졌고, 단일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긍지를 가졌다. 그런만치 우리 민족은 통일되어야 한다. 외세에 의해서 무단히 양분된 이 민족을 우리는 민족적 긍지에서도 민족적 감정에서도 그대로 참을 수 없고 꼭 통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을 각각 중심으로 하는 양대 진영의 날카로운 모순이 한(조선)반도의 분단 질서를 더욱 옥죄고 있던 냉전기였다. 분단 모순에 대한 진영 모순의 규정력이 가장 맹렬하게 작동하고 있던 시기였다. 민족 모순, 계급 모순, 진영 모순이 한데 뒤엉키면서 폭발한 한국(조선)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분단 모순의 내면화를 강요하고 있던 암울한 시기였다. 통일을 추구하는 움직임은 낌새도 찾을 길 없고, 분단 현실 속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려고 하는 패배주의, 민족 허무주의가 넘실거리던 검은 바다에서 민족 성원들의 민족적 양심은 표류하고 있었다. 그 표류하는 양심들 속에서 죽산 조봉암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조봉암은 1948년 이승만 정권 수립에 참여하더니,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승만의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지지하고 나서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한때나마 조봉암이 발을 들여놓았던,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남(한국)의 지배 세력은 이른바 '북진 통일'과 '실지 회복'을 내걸었고, 그 구호를 무너져가는 자기의 지배 권력을 지키기 위한 흥정물로 삼고 있었다. 이 시기에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분단 모순, 진영 모순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야 했던 1950년대 냉전·분단 질서의 아성에 과감하게 평화 통일론의 도전장을 던진 조봉암의 발자취가 뚜렷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냉전·분단 세력이 그의 도전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958년 1월 13일 이승만 세력의 손에 붙잡혀 쇠창살에 갇혔던 조봉암은 다음해 7월 31일 자신의 환갑을 두 달 남짓 앞두고 분단·독재의 형장에서 끝내 희생당하고 말았다. 그가 희생되기 하루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이승만 도당이 선생님을 모살할 것이라"는 진보당 관계자의 말을 들은 조봉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뭘 그렇게 노여워들 하시오. 한 사람이 죽어야 한 사람이 사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 박사가 절대로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내 나이 딱 환갑입니다. 병으로 죽은 사람,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많은데 평화 통일운동을 하다 이렇게 떳떳이 죽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유언 같은 그의 말에서는 통일 민족주의자가 이를 수 있는 높은 경지가 엿보이는 듯 숭고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있다.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이튿날, 이승만 독재 정권은 치안국장 이름으로 된 일종의 '협박문'을 각 언론 기관에 보냈는데, 거기에는 "조봉암은 북한 괴뢰를 위하여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한 반국가적이고 반민족적인 범증에 의해 처단되었다. 그의 행적에 관한 기사는 민심을 자극할 뿐아니라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언론인들은 이 점에 유의해주기 바란다. 오늘 석간부터는 이 사형수에 관한 기사는 법에 저촉되는 것이니 일절 보도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냉전·분단 세력의 야만적 행위는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었다. 조봉암의 정치적 희생을 슬퍼하여 찾아오는 문상객의 수마저 딱 마흔명으로 제한하여 철저히 통제했으며, 그의 주검을 실은 영구차가 가는 마지막 길에는 트럭 열 대에 가득 실린 무장 군인, 경찰들이 따라붙어 삼엄한 분위기가 뒤덮혀 있었다.

죽산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누워있다. 사람들의 눈에 그의 희생은 통일 민족주의자의 죽임으로 비쳤으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희생은 개인의 육체적 생명을 끊어 놓음으로써 통일 의지를 짓밟으려고 발버둥치던 냉전·분단 세력에게 준엄한 역사적 심판으로 되살아나 우리 민족사의 한 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죽산이 끌려간 형장에서 통일 민족주의자 한 사람의 목숨은 끊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통일 민족주의의 되살아남은 막을 수 없다는 역사의 진실, 죽임당한 통일 민족주의자의 뒤를 이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사의 흐름은 살아있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후반으로 이어진 통일 민족주의의 수난사는 1960년대 4·19 혁명의 대중적 분출과 조국 통일 운동으로 되살아났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분단·독재의 길로 들어선 정치적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통일 민족주의의 대중적 확산을 두려워한 반통일 세력의 위기감이 술렁이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18년동안 저들이 가장 극렬하게 탄압한 것은 통일 민족주의의 재생력이었고, 저들이 언제나 미친듯이 추구해왔던 것은 냉전·분단 질서의 고착화, 영구화였다.

④ 문익환의 통일 민족주의

남(한국)에서 통일 민족주의의 주체적 맥락이 1970년대에 이르러 장준하의 통일 의지로 되살아났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있는데, 1940년대 말 분단 초기에 있었던 김구의 북행 체험을 40년 뒤에 통일 민족주의자가 받아야 할 실천 과제로 받아들인 또 한 사람 통일 민족주의자가 우리 조국 통일 운동사에 우뚝 자리잡고 있으니, 그가 바로 늦봄 문익환이다. 늦봄이 1989년 3월 북녘 땅에 이르러 「평양땅을 밟으면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도착 성명서에서 자신보다 40년 앞서간 선구자 백범 김구의 얼이 깃든 저 유명한 시를 인용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문익환의 통일 운동을 통하여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는 1940년대의 김구 → 1950년대의 조봉암 → 1970년대의 장준하 → 1980년대의 문익환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큰 줄기를 우리 앞에 드러내보여주고 있다. 문익환은 자기가 장준하의 주검을 흙에 묻으면서 그의 죽음 앞에 "네가 하려다가 못다한 일을 내가 하마"고 맹세했노라고 생전에 자주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가 통일 방북 때문에 안동교도소 쇠창살에 갇혀 있던 1991년 겨울 부인인 박용길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준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 가장 뚜렷한 인물을 들라면 아무래도 우리의 영원한 벗 장준하의 이름을 들어야 할 것 같군요. 일제 시대의 그의 생의 의미와 목적은 독립이었죠. 해방 이후 혼란기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자유와 민주였지요.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그게 '통일' 아니었어요? 자유니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모든 가치가 민족 통일에 기여하는 한 의미있는 것이라고 그는 외쳤거든요."

늦봄 문익환의 통일관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통일 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자유'와 사회주의 체제의 '평등'을 하나로 융합·통일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이요, 한(조선)반도의 통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씨알의 소리』1978년 3월호에 발표한「민주화와 민족통일」이라는 글이나, 1980년 3월호에 발표한「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라는 글(이 글은 당국의 언론 탄압 때문에 전면 삭제당했다.)이 이 시기 그의 통일관을 정리한 대표적인 글들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유와 평등이 통일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이상 사회를 향하여 남과 북의 현존 체제가 모두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그의 통일관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체제론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 제도인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의 정치 제도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한(조선)반도에서 통합하는 것이 곧 통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통일 문제를 두 체제의 최고 가치(자유와 평등)를 민족사의 현실 속에서 수렴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983년에 그가 쓴「7·4 공동성명 이후의 민족문제」라는 글에서 한 대목을 옮겨 보자.

"평등만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는 북녘이 자유를 향해서 궤도 수정을 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통일은 속임수이다. 또한 자유만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는 남녘에서는 부의 평등, 기회의 평등, 자유의 평등을 향해서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고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를 심화시켜가면서 말하는 통일은 진지한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통일 문제를 체제 수렴 문제로 이해하고 있었던 늦봄의 생각은 차츰 민족주의적 관점에 기울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통일관 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함께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중에 이 중심 주제는 통일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틀로 빚어져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늦봄은 어떤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던가? 그는 1984년 6월 한 강연에서 통일 민족주의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의 관심의 초점에 자리잡기 시작한 민족주의론도 같은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4 공동 성명의 통일 3원칙, 즉 자주 통일의 원칙, 평화 통일의 원칙, 민족 대동단결의 원칙도 민주주의 원칙인 동시에 민족주의 원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민족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되어 있는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민족 통일이라는 민족의 지상과제 앞에서 우리 모두 소승적인 자세를 버리고 대승적인 자세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 민족주의적인 관심의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른 통일 민족주의자들에게서도 한결같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문익환의 통일 민족주의도 민족 자주론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이 지적했던 것처럼,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 문익환한테는 민족 자주였다." 문익환은 1988년 4월 16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 대토론회에서 자신의 민족 자주론을 이렇게 설파했다. "한국을 분단한 외세의 냉전 논리를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남의 결정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굴종적인 자세를 떨쳐버리고 민족 자주의 논리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1988년은 늦봄이 자신의 통일관을 민족 자주론에 입각하여 열정적으로 표현한 시기로 기록된다. 그 이듬해인 1989년 3월 그가 방북을 결행하기까지 아마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민족 자주'와 '조국 통일'이라는 두 개념을 하나로 결합하고 아우르는 새로운 생각의 틀, 곧 통일 민족주의로 정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3월 그는 마침내 북녘 땅을 밟았다. 국가보안법이 맹렬하게 작동하고, 반통일 세력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남녘 땅에서 분단선을 넘어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방북은 통일 방북이었다. 방북을 통하여 그의 통일관은 강조점을 다른 곳에 찍게 되었다. 그는 통일 문제를 자유, 평등 같은 체제 지향적 가치론에서 보던 종래의 관점을 수정하였다.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과제 속으로 통일 문제를 포함시켰던 종래의 관점을 수정한 것이다. 그 무렵부터는 거꾸로 통일 문제를 중심에 두고 그 모든 문제들을 파악하게 되면서, 장준하의 통일관과 깊은 교감을 나누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김구→조봉암→장준하를 이어온 통일 민족주의의 사상사적 맥락에 자신의 통일관을 견고하게 접목시킬 수 있었다. 통일 방북 때문에 쇠창살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생각에는 대략 이러한 강조점의 이동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박용길 선생에게 보낸 옥중 서신의 한 구절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적은 것이리라.『사회와 사상』1988년 9월호에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그런데 민중 민주주의 통일 운동은 가는 곳곳에서 절벽에 부딪쳐 왔다. 그 절벽이 무엇인가? 그것은 외세다. 분단을 고정시키고 자국의 권익만을 지키려는 미·일의 국가 이익은 원천적으로 한국 민중의 권익과 상충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일이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나 민족 통일 운동에 지원을 보내온 일이 언제 있었는가. 민주화는 오로지 우리 민중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민족 통일도 오로지 우리 민중의 힘으로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이 지난 44년 분단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이러한 까닭에 민중민주 세력이 추구해야 하는 민족 통일 운동은 민족 자주 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민주화 운동도 민족 자주 운동이어야 한다. 셋은 곧 하나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민주화 운동도 통일 운동도 반외세 민족 자주 운동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반외세 민주화 투쟁은 고립과는 다르다. 외세가 우리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우리가 자주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걸 막지 않는데도 우리가 반외세 투쟁을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운동의 강조점은 '반외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자주'에 있다."

위의 긴 인용문은 우리가 문익환의 통일 민족주의 안에 그 이전의 김구와 장준하와 다른 분위기가 들어있음을 선뜻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차별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문익환의 통일 민족주의가 지사(志士)적인 외침만이 아니라, 저 민중 운동의 한 복판에서 민중과 함께 뒹굴며 민중과 함께 달려가며 그들의 뜨거운 통일 의지 속에서 달궈지며 다듬어지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문익환의 통일 민족주의는 남(한국)의 민중을 의식화·조직화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존재하였다. 물론 김구나 장준하의 통일 민족주의도 민중적 운동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김구가 통일 민족주의를 자신의 사상과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암살을 당하기 얼마 전부터였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자신의 통일 민족주의를 민중 운동으로 전화·확산시키지 못했으며, 조봉암과 장준하가 통일관을 세우던 시기는 냉전·분단 세력의 압도적인 우세에 짓눌려 민중 운동이 아직 조직적으로, 이념적으로 성숙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김구, 조봉암, 장준하의 통일 민족주의는 종종 '지사적 분위기' 속에서 표현되곤 했던 반면, 문익환의 통일 민족주의는 언제나 민중 운동을 이끌어가는 이론과 실천의 견인력으로 그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통일 민족주의의 민중 운동화는 문익환이 살았던 1980년대 후반이 한국(조선)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국)사회에서 민중 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객관 정세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구→조봉암→장준하→문익환으로 이어진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 줄기를 면면히 꿰뚫고 흐르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을 잡아낸다면 그것은 어떤 걸까? 이 글에서는 그것을 민중 주체의 관점과 민족 자주 관점의 합일이라고 선뜻 규정하고 싶다. 이 합일의 원동력은 김구의 통일관에서 싹을 틔워, 조봉암의 희생과 장준하의 통일 의지 속에서 피어났으며, 마침내 문익환의 통일 실천에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허나 지난 반세기 동안 통일 민족주의는 단 한 차례도 현실 정치권 안에 발을 들여넣은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현실 정치의 밖에서 현실 정치의 반역사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운동력으로 존재해왔다. 통일 민족주의자들은 현실 정치의 혼탁한 흐름 속에는 도저히 합류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민족적 양심과 사상적 순결성을 지녔기 때문이었을까. 김구와 조봉암의 통일 민족주의가 이승만을 정점으로 삼았던 분단 국가주의 제1세대가 당긴 흉탄 앞에서, 교수대 위에서 쓰러지고, 장준하의 통일 민족주의가 박정희를 정점으로 삼았던 분단 국가주의 제2세대가 휘두른 냉전·분단 세력의 압박 아래 무참히도 짓눌렸던 역사의 비극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자칫 그 실천과 논리가 더 넓어지고 깊어지지 못하고 말았던 게 아닌가 하는 탄식과 절망 속으로 밀려갈 수도 있으나, 실은 그런 패배 의식에 빠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통일 민족주의는 고통과 죽임의 가시밭길 앞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 사상이 문익환의 통일 운동에서 강인한 재생력으로 되살아났음을 역사는 우리 앞에 증언하고 있다.

6. 생각을 바꾸는 길

남(한국)의 통일 민족주의가 걸어온 험난한 길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조국의 통일 과업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되풀이하여 말하거니와 통일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통일 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이란 북(조선)의 사회주의 세력을 배척·말살하려는 반북 승공의 길이 종국적으로 이르게 될 전민족적인 공멸·공망의 나락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 만나서 이루려는 화해와 화합, 단결과 단합의 완성이라고 했을 때, 그러한 통일은 통일 민족주의의 개방성과 포용성으로 안받침을 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통일 민족주의 개방성, 포용성이 남(한국) 민족주의자의 궤적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통일 시대라고 부르는 지금은 우리 민족이 통일 민족주의로 향한 개방성, 포용성을 다시 깨우치고,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가 아닌가.

지금까지 냉전·분단 질서가 우리에게 끼친 가장 커다란 해악을 꼽아보자면 그것은 '민족 의식'의 파괴일 것이다. 냉전·분단 질서는 '민족'보다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특정한 사상과 이념을 절대적 실체로 숭상하면서 동족을 증오하고 저주하도록 강요해 왔다. 해방 이후 50년의 사회사는 우리 남(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민족 의식이 실종되어온 기간이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파괴하려 했던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을 맞은 이후, 민족이 자기를 되찾아 새로운 민족 자주의 길을 개척해야 했는데도 지난 50년의 사회사는 민족이익에 배치되는 기형적 구조를 사회 각 분야에 재조직화한 어두운 길로 이어져왔다.

이러한 사태로 밀려들어간 것은 민중들이 못나서가 아니다. 남(한국)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배 권력이 지난 50년 동안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들을 권력 장악에 앞장세웠던 미국의 반(反)한(조선)반도적 정책 수행과 그러한 반한(조선)반도적 정책을 열심히 따라갔던 친미 사대주의 세력의 발호(跋扈)에 비극 발생의 근본 원인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의도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또는 정책적으로나 일상적으로 강대국을 숭상하고 자기 민족을 비하하는 데서 자기의 존립 명분을 찾으려 하는 약소 민족의 자기 부정이라는 처참한 모순은 이렇게 외세와 그 추종세력의 손에서 조직되고 재생산된다.

요즈음 돌아가는 판을 보면, 남(한국) 사회는 민족 의식이 완전히 마비되고 주변 열강들에게 총체적으로 동화되려는 도착된 욕구로 들끓으며 사태 악화의 길로 밀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 남(한국) 사회에는 대미 관계와 대일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자주적인 본질은 가리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사이비 민족 감정과 국가주의적 애국심을 조장하는 것으로 문제의 본질을 가려보려는 경향이 있다. 남(한국) 사회에서 외세의 이익이 민족의 이익을 배제·구축하고 있는 동안 지배 권력이 고작 추진한다는 게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사이비 민족 감정과 국가주의를 대중에게 불어넣는 것만 되풀이해왔던 것은 아닐까.

남(한국) 사회는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동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동일한 체제 속에서 결착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외세를 동족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 도착증'에 걸리고 말았다.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왜 동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배격해야 하는가. 사상과 체제가 다른 동족을 왜 동족으로 인정해서는 안되는가. 그들과 공존·공영하는 길을 왜 찾지 못하는가. 남북 기본합의서 제1장 제1조에 명시한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합의 내용을 왜 이행하지 못하는가.

민족 의식의 출발점은 동족을 동족으로, 외세를 외세로 보는 시야가 올바로 선 자리다. 통일 민족주의는 동족을 동족으로, 외세를 외세로 보게 하고, 통일을 민족 공동의 최고 이익으로, 분열·분단을 외세의 이익으로 보게 하는 근본적인 시각 교정을 요구한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 시대의 앞날은 이러한 통일 민족주의적 시각 교정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는 아마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남(한국) 사회는 민족 자주와 평화 통일이라는 커다란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판단기준, 사고의 틀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민족 공동의 최고 이익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외세의 이익을 추구하느냐 하는 물음으로 정세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민족 의식을 사고의 새로운 틀로 삼아야 한다. 발상의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차겁게 얼어붙은 분단 장벽의 틈을 魰고 마침내 민족 자주와 평화 통일의 눈부신 빛줄기가 비쳐들게 될 것이다.

이제 통일 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적 양심 앞에서 어느 특정한 사상과 이념을 절대화하는 독선적 주장과 배타적 논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민족 공동의 최고 이익 앞에 특정 계급이나 특정 지역의 개별 이익, 부분 이익을 앞세우거나 절대화하는 주장과 논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민중의 조국은 '맞서 있는 둘'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했듯이 '영원한 하나'다. 이 땅 위에 이제는 분단 국가주의를 몰아내는 통일 민족주의의 새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 그 바람을 만일 냉전·분단 질서 아래서 가위눌려 왔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는 자기 해방의 신바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어라고 부를까. (1996년 8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