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중의 민족 자주·통일운동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왜 김용중을 논해야 하는가?

미주 지역의 조국통일운동권은 지난해 1995년이 통일운동의 한 선각자가 이 미주 땅에서 숨을 거둔지 20주기가 된다는 사실을 모른채 다사다난했던 분단·해방 50주년을 보냈다. 이것은 미주 지역 조국통일운동이 자기 운동에 대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며, 운동사의 맥락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역사의식의 빈곤'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미주 지역 통일운동은 아직 자기 족보를 알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맥락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중력 상태에서 산생된 운동이란 없는 법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김용중을 미주지역 민족 자주·통일운동의 선구자, 선각자라고 부르며, 이미 망각의 흙무덤 속에 파묻힌 그의 생각과 행적을 찾아내어 복원하고 재해석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용중이 미주 지역에서 민족 자주·통일운동을 시작한 선구자, 선각자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항일운동과 통일운동을 민족 자주운동으로 연결·계승한 공로를 재해석해야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운동 논리와 실천이 오늘 우리의 민족 자주·통일운동에 역사적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용중이 항일운동가, 통일운동가로서 해외 민족운동사에 뚜렷이 남긴 자취와 업적의 부피와 무게는 역사적 조명을 통해 더듬어가면 갈 수록 비중 있는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리고 창피하게도 그의 자취와 업적은 우리 후대들의 무관심과 망각 그 한 구석에 내버려진 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1940년 초에서 1960년대 말까지 숨가쁘게 이어졌던 민족사의 격동기에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의 한 해외 현장을 지키며 그 곳에서 활동을 전개했던 김용중이 남긴 기록들은 그가 숨을 거둔지 2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찾아내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멸되고 말았으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지금까지 김용중의 생각과 행적에 관해서 발표된 글도 단편적인 사실 확인이 아니면 신문 기사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 글을 쓰면서 부닥친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김용중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83년 8월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 '동아시아 도서관(Kent Library)'의 지하 3층에 있는 '코리아실(Korean Collection)'에서 우연히 눈에 띈 한 책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그 무렵 유학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역사의식에 눈을 뜨면서 조국통일 문제에 대한 '독학'을 시작한 때였으므로, 1960년대 초반에 미주 지역에서도 통일운동을 했던 재미동포 선각자가 있었구나 하는 색다른 감정을 느낀 것 밖에 지금 남아있는 기억은 희미하다. 그나마 그 때 내가 읽은 책은 '중립화론'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는 김용중의 생각과 행적을 고작 중립화론의 제안이라는 시각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였으므로, 나는 김용중에 대해서 중립화론자라는 첫 인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 뒤로 내 의식 속에서 그의 이름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미주 지역 통일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읽은 글이 미주 통일운동 인사인 서정균 선생이 쓴 「재미동포 통일운동의 배경과 현황」이라는 글인데, 그 글은 '미주 통일운동의 뿌리'가 김용중 선생의 통일운동에 있다는 사실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통일운동의 황무지'에서 64년에 나타난 김용중의 활동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43년부터 '코리아문제연구소'를 설립, 60년까지 The Voice of Korea의 발행으로 주로 언론, 문건 활동을 통해 우리 문제를 미국 사회에 알려온 그는 64년 남북 정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줄임) 그의 괄목할 만한 제안은 남부 조국에서는 묵살되었으나 북부 조국으로부터는 김일성 수상(당시)이 답신을 보내오는 등 긍정적 반응을 받았다. 김용중의 통일 노력은 7·4 공동성명 발표 직전인 72년 6월 '조국 평화통일 재미 촉진위원회'(위원장: 노광욱)로 이어진다."

나는 1995년 봄에 구해서 읽었던 김삼웅 씨가 펴낸 책『통일론 수난사』를 처음 펼쳤을 때, 거기에「김용중의 영세 중립국 통일론」이라는 제목의 항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 제목의 항은 단 세 쪽 밖에는 되지 않은 짧은 것이었으며, 김삼웅 씨의 논조도 그를 중립화 통일론자로 보는 시각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므로 나에게는 커다란 자극으로 와닿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삼웅 씨의 글 마지막 부분에 나와있는 이런 구절이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김용중은 중립화 통일론과 더불어 박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투쟁 과정에서 한국 민족 자주통일 촉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맡게 된 것 등이 박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기피 인물로 낙인 찍혀서 노령에는 그토록 귀국을 희망했는데도 통일의 꿈은 커녕 귀국의 꿈조차 이루지 못한 채 이역에서 쓸쓸히 숨졌다. 그리고 그의 뼛가루조차 조국 산천에 뿌려지지 못하고 지금도 고혼이 되어 이역을 배회하고 있다."

그러던 가운데, 나는 내가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미주 평화통일 연구소(Center for Korean Affairs)에 소장된 북(조선)의 책에도 김용중의 통일논의와 관련된 글이 실려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나는 남(한국)에서 나온 책과 북(조선)에서 나온 책이 한 재미동포의 통일운동에 관하여 일치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 발견은 내가 김용중이라는 한 재미동포 통일운동가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다는 자책감을 느끼게 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만 스무 해를 넘긴 이 시점에서 무관심 속에 파묻혀 있는 그의 업적을 다시 조명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의무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김용중이라는 역사 속의 인물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책감과 의무감을 안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 도움의 손길이 와닿았다.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워싱턴 디씨 근교에 살면서 1970년대 초 이후 지금까지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로광욱 선생이다. 그는 1953년 미국에 유학생으로 건너와서 개인적 인연으로 김용중을 알게 되었고, 1963년부터 워싱턴에서 김용중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통일운동에 함께 했던 미주 지역 통일운동의 원로다. 현재 김용중의 민족 자주·통일운동에 관하여 증언을 해줄 사람은 로광욱 선생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로 선생이 최근 내게 넘겨준 신문 자료 사본들과 김용중의 언론 활동을 모은 The Voice of Korea 영인본, 그리고 김용중이 김일성 주석에게 보낸 영문 편지 사본 및 그 밖의 자료들, 그리고 김용중에 관한 로광욱 선생의 회고담은 이 글을 쓰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김용중 선생과 나 사이에 이렇게 끊어질 것같이 가느다랗게 이어진 정신적 인연은 로광욱 선생의 도움을 받아 어느덧 미주 통일운동의 운동사적 맥락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였다. 비록 나는 아직 김용중이 남긴 글과 자료를 충분히 구하지 못했으나, 미주 통일운동사의 뿌리를 더듬어가는 심정으로 그의 민족 자주·통일운동을 조명하려고 한다. 앞으로 더욱 체계적인 '김용중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의 연구에 디딤돌 하나를 놓아보자는 생각에서다. 분단이 반세기가 넘도록 장기화되면서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국통일운동이 당면 과제를 들어올릴 든든한 '지렛대'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오늘, 식민지 시대 말기에서 냉전 시대로 이어진 격동기의 소용돌이 속을 어렵사리 헤치고 가야 했던 김용중의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변화·발전되어간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는 데서 우리의 통일운동은 역사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은 이런 동기에서 쓴 것이다.

(2) 항일운동에서 다시 통일운동으로

김용중은 1898년 3월 2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347번지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조국에서 갈 길을 찾지 못했던 젊은 김용중은 18살되던 해인 1916년 상해로 건너갔고, 거기서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 앤젤레스에서 자영업을 경영하며 자수성가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대에서 193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하버드대학, 남가주대학,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가 하버드대학 재학시절, 1928년 7월 8일자 『보스턴 선데이』지에 기고한 글 「일본의 황금 통치」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일본은 최상의 도둑이 최고 시민이라는 이상을 필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조선과 만주에 대해 일본이 펼친 정책을 보라. 일본은 서방 세계에 거짓말을 하고 조선을 강탈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조선인들에게 비수를 들이대 일본 군국주의자의 자존심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은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된다.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은 안창호 계열, 이승만 계열, 박용만 계열로 대별될 수 있는데, 김용중은 안창호 계열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 세력은 박용만이 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 운동과 미주 항일 운동을 연결시키려고 했던 시도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상해(나중에는 중경)의 임정 세력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 미주 항일 운동 세력은 임정 세력과 연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서로 단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 한족 대회'에서는 그 동안 분산되었던 미주 지역 항일 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자체 목적이 "대한민족의 독립운동과 항일 전선을 통일하며, 항일 승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재미 한인 단체들을 규합하여서 그 역량을 집중하며, 일반 운동의 확대·강화에 있다"고 선언한 이 항일 정치 단체에는 '북미 대한인 국민회'를 비롯한 9개 단체가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지역별로는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정치적 견해로는 안창호계, 이승만계, 김원봉계로 나뉘어져 있던 미주 항일운동 세력을 한 이름 아래 결집시켰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대 계열이 서로 갈등 관계에 있었으나 안창호-이승만-김원봉이 모두 '임정 세력'라는 범위 밖으로는 벗어나지 아니했으므로, 이 단체가 이른바 '임정 봉대론(臨政 奉待論)'에 합의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두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하와이에는 의사부 위원와 하와이 지방의원을 두고, 캘리포니아주에는 집행부 위원, 미주 지방위원을 두는 방식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김용중은 캘리포니아주 로스 앤젤레스에 설치한 집행부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1940년대 초반부터 국민회 공보부장으로 일하면서, 국민회 기관지인『신한민보』영문 주필로 일하게 된다.

김용중의 행적을 더듬어가다 보면, 우리는 식민지 시대 말기에서 분단 시대로 넘어가는 민족사의 격동기에, 그리고 4·19혁명 이후 통일운동 고양기에 그가 남긴 굵직한 자취들을 발견하게 된다. 1943년 3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설립한 조선 문제 연구소(The Korean Affairs Institute), 그리고 같은 해 11월 22일자로 창간한『조선의 소리(The Voice of Korea)』가 그것이다. 그 무렵 그는 미 정부의 전시 공보 방송에「조선의 소리」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하루에 서너 시간씩 영어로 방송을 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한 요구를 전세계에 알렸다.

1943년은 미주 지역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 해 김용중이 조선 문제 연구소를 설립한 뒤 약 6개월이 지난 10월 6일 로스 앤젤레스에서 조선민족 혁명당 미주 총지부가『독립』이라는 기관지를 펴낸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용중의『조선의 소리』가 영문으로 나와 국제 사회를 대상으로 한 항일 민족언론이었다면, 조선민족 혁명당 미주 총지부의『독립』은 미주 동포 사회를 대상으로 한 항일 민족언론이었다.

김용중이 워싱턴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국제 사회에 항일 민족 언론의 목소리를 높히던 때 식민지 조선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때는 1941년 12월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뒤 태평양 전쟁의 불길이 치솟던 전시였다. 1943년에만 해도 일제는 징병제 실시(8월), 학병제 실시(10월), 대동아 공영권 발표(11월)로 광분하고 있었고, 이듬해에는 총동원법에 의한 전면 징용 실시(2월), 여자 정신대 근무령 발표(8월)로 식민지 억압은 극에 이르고 있었다.

김용중의 생각과 행적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추구했던 항일 민족운동과 민족의 단결과 화해를 추구했던 조국통일운동을 하나의 틀로 아우르고 있다. 그가 식민지 시대의 항일운동과 분단 시대의 통일운동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었던 공통의 기반은 민족 자주와 민족적 단결이었다. 그는 자주 독립과 자주 통일을 일관된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했으며, 분열을 극복하고 단결하는 길이 자주 독립, 자주 통일의 길이라고 외쳤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민족자주란 외세의 침탈과 강점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업이었으며, 민족적 단결이란 외세의 앞잡이로 전락한 반민족 세력을 제외한 민족 주체 역량의 단결을 뜻한다. 김용중이 추구한 민족 주체 역량의 단결은 해방 직전에는 좌우 연립 정부안으로 나타났고, 해방 후에는 중도파의 좌우 합작 운동과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해방 전에 비록 국민회에 속해 있었지만,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고 있었던 조선민족 혁명당 미주 총지부의 정치적 견해와 같이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정국에서 북미 대한인 국민회 지도부는 여운형-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른바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용중의 민족 자주론은 두 가지 초점으로 모아진다. 하나는 미군과 소련군의 철퇴와 38도선 철폐며,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협정의 이행이었다. 이 두 초점은 한 쌍을 이루는 조치로서, 1946년에 미·소 공동위원회가 외세와 반민족 세력의 정치 음모에 휘말려 파탄에 빠져드는 위급한 상황을 보면서 그의 생각은 이미 민족자주화의 전략적 방침으로 굳어져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946년 6월 15일 김용중은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를 촉구하는 공개장을 트루만과 스탈린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적었다.

① 조선을 양단하는 부자연한 경계선을 즉시 철폐할 것.

② 전 미·소 양군은 조선으로부터 동시에 철퇴할 것.

③ 조선은 임의로 국가 재건을 위하여 고문 기술자를 초빙하게 할 것. 만일 미국인이나 소련인이 임명한다면 또다시 강력 정치가 재연될 것이다.

④ 미·소 양국은 공동으로 조선의 주권과 독립의 불가침을 보장하는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요구하지도 않고 타방에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맹서할 것. 이러한 협정은 조선을 침략 기지화하는 것을 방지할 것이다.

1946년 9월 8일 워싱턴 AP 합동통신발로 보도된 기사는 "조선 사정 소개 협회장 김용중 씨는 미군의 남조선 상륙 1주년을 당하여 다음과 같은 소신을 피력하였다"고 전하면서 그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보도했다.

"매사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인내심에는 한도가 있다. 만약 조선인이 모스크바 협정에 서명한 각국 의사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우려하는 바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선인으로서 무리없는 현상일 것이다. 조선에 독립 정권을 수립시킨다는 모스크바 협정의 결의 사항을 양국 측이 이행치 못하고 있는만치 조선 사람이 의혹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하간 미소 양국은 그들의 의사를 조선에 강요할 권리는 없는 것이며, 또 조선을 상이한 양국의 이데올로기 희생물로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의 상이한 이데올로기를 조선 내에서 해결하려 하여서는 안된다. 조선은 열강 정책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김용중이 식민지 시대 말기 이후 민족 자주 노선의 연장선에서 해방 정국의 통일국가 수립운동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던 데 영향을 주었던 사람으로 미주 지역 항일운동 인사인 김호를 빼놓을 수 없다. 김호는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정 세력에 가담하였으며, 미국에 건너와 안창호 계열인 '북미 대한인 국민회'에서 대표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1941년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김용중과 함께 로스 앤젤레스에 설치된 집행부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김호는 1943년부터 1951년까지『조선의 소리』지의 재정부장으로 있었다. 김용중이 1947년 6월 16일 30년만에 귀국하여 서울에서 한 달 반을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가 귀국 기자 회견을 한 곳이 서울 성북동에 있던 김호의 집이었던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호는 1947년 12월 20일 결성된 '민족 자주 연맹'에 참가했다. 민족 자주 연맹은 통일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남북 지도자 회의를 제안했다. 김용중의 민족 자주·통일운동을 재조명하면서 우리가 김규식을 주석으로, 홍명희, 이극로, 원세훈,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 등을 정치위원으로 선출한 '민족 자주 연맹'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1947년 6월에 잠시 귀국했던 김용중이 김호라는 접촉점을 통해 여운형,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남(한국)의 민족 자주·통일운동 세력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호를 비롯한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의 대표단 성원들은 신진당에 참여하였다. 그 무렵 신한민족당은 1946년 4월 23일 전당대회에서 한독당과 합당하려고 했는데, 이에 반대한 세력들이 탈당하여 같은 해 9월 15일 김붕준의 신한민주당, 김진호의 조선혁명당, 송중곤의 청우당과 함께 손을 잡고 신진당을 결성했는데, 김호를 비롯한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도 신진당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가 참가한 신진당은 곧 민족 자주 연맹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중도파였던 김호는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극우 세력의 테러 명단에 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1947년 7월에 조직된 좌우 합작 위원회 위원 17명 가운데에 신진당 대표로 참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상해 시절 여운형과 만나 민족 의식을 깨우치고 그의 도움을 받아 도미 유학의 길에 올랐던 김용중은 미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김호의 영향을 받았고,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차츰 민족 자주·통일운동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김용중은 자신이 남(한국)의 '해방 정국'에 대해 아직 현장 파악을 하기 전인 1946년 2월 23일『조선의 소리』에 이렇게 적었다.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리 좋은 사상일지라도 그 어느 한 사상으로만 다른 사상을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양편이 타협적으로 합동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 통일치 못하고 분열해 있는 것은 민중의 의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수의 지도자들 때문이다. 우리는 새 지도자를 얻어야 할 것이다. 해외에서 국내로 간 지도자들은 자기만 가장 잘난 지도자인 척하지 말고 원수의 압박 밑에서 투쟁해 온 국내의 지도자에 모든 것을 양보하고 겸손한 태도로 타협하라. 기러기 같이 손가방 하나 들고 국내로 날라가서 국민을 구하려 한다고 하나 이것은 국민을 구하는 것보다 국민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좌우 대립을 반대하면서 정치 지도자들의 단합을 호소하고 있으며, 특히 '국내파 지도자'를 중심으로 타협·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단합의 중심은 아마도 여운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용중의 국내파 지도자 옹립론은 외국에서 귀국한 지도자는 외세의 간섭을 끌어들일 것이므로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경계심을 가졌던 인물은 이승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그의 국내파 지도자 옹립론은 여운형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김용중의 좌우 합작론은 그가 서울을 방문하고 있던 1947년 7월 8일 조선 라디오방송에서 한 방송 담화에서 분명하게 표명되었다.「단합을 호소함(Appeal for Unity)」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우리 인민들이 서로 증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좌익은 우익을 증오하고, 우익은 좌익을 증오합니다. 이것은 아니될 일입니다! 만일 이러한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단합하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지도자들이 인민대중의 복리를 위하여, 우리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공동의 근거를 마련하기를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김용중의 좌우 합작론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파 지도자 옹립론에서 출발하여 여운형 자신이 추구했던 좌우 합작론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김용중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분명하게 표명한 적은 없으나, 그가 여운형과 맺은 관계, 그리고 그가 여운형에게 보인 태도를 보면, 김용중 자신이 여운형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김용중과 여운형의 첫 만남은 상해에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김용중이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된 계기, 그리고 도미 유학의 계기가 되었다.

김용중과 여운형의 관계는 김용중이 남(한국)을 방문하고 있던 시기에 더욱 깊어진다. 여운형은 자신이 암살 당하기 전날인 1947년 7월 18일 김용중에게 영문 편지를 보냈다. 여운형은 다음날 김용중이 서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김용중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용중은 여운형과 만난 자리에서 올림픽 문제를 상의했고, 김용중은 여운형에게 방미를 제의했다. 김용중은 자기가 머물고 있었던 성북동 김호의 집에서 자신을 만나고 약 두 시간 뒤 돌아가던 길에 혜화동 네거리에서 피격 당한 여운형의 최후 소식을 충격 속에서 들었다. 7월 22일 김포 공항으로 나왔던 김용중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30년만에 밟은 조국 땅을 황망히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여운형 선생은 오늘 조선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며 우리 인민의 벗이었다. 이러한 지도자를 잃은 것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막대한 손실인 만큼 통탄해 마지 않는다."

워싱턴에 돌아간 김용중은『조선의 소리』1947년 8월 15일자 제1면에 여운형의 영정과 함께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그 추도문에서 여운형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하였다.

남(한국)에서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이 민족 분열로 악화되고 있던 위기 속에서 민족 자주 역량의 분열·분산을 극복하려 했던 여운형의 희생은 남(한국)에서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외세와 반민족 세력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하게 될 운명에 이르렀음을 예고하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여운형을 참살한 극우파 민족 반역 세력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민족 자주 역량을 압살하려 했던 그 암흑기에 그들은 김용중에게도 화살을 당기고 있었으니, 이승만이 총재로 있었던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김용중을 "민족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1947년 9월 20일의 일이었다.

김용중이 이승만계 세력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는 까닭은 민족 자주적 정치 노선과 대미 의존적 정치 노선이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통일국가 건설론과 단정 수립 불가피론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이 분단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면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보수 세력을 모아 이른바 자문 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을 설치했을 때, 김용중은 워싱턴에서 이 조치를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즉시 해체를 주장한 바있었다.

(3) 김용중이 본 민족 문제의 본질

민족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 했던 격동기를 살다 간 김용중은 민족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 그는 민족 문제를 민족 자주의 문제로 파악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조선의 당면 문제는 본질적으로 조선인으로써 해결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줄임) 미·소 양국은 당초에는 조선의 원조자였던 것이 현재에 달하여서는 조선의 주인적 행세를 하고 있다. (줄임) 미·소 양국은 친선적 태도로서 조선을 원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조선을 재건설함에 있어서 자기네들의 이념으로 이를 이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상이한 이념이 많이 있음으로 이는 단지 국난을 초래할 뿐이다. 반면 미·소 공동위원회가 단지 조선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조선 문제 해결은 용이한 문제다. 조선은 조선 식으로 재건설하고 조선 식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줄임) 미·소 공동위원회는 조선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고 조선은 조선인에게 일임하여야 한다. (줄임) 조선 3천만 민중은 금일 약속된 자주 독립을 위하여 기대하고 있는 이상 계속하여 조선인에 불필요한 위구심을 가지게 할 필요는 없다. 해결에 유일한 것은 미·소 양군의 군사 점령을 중지함에 있다. 만약 이것이 실행된다면 미·소 양국은 성스러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며 동시에 전세계에 유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훌륭한 전례로 될 것이다."

그가 "미 당국 지도자가 오히려 현재 혼란한 조선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조선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나 '미국 자본가들의 조선 진출'을 반대한 것도 이러한 민족 자주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살았던 시기가 가장 외세의 억압이 노골화·심화되었던 연대기적 상황, 곧 식민지 시대 말기→ 미·소의 분할 점령기→ 전쟁과 분단 고착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보았던 민족 문제의 본질은 외세 배격이라는 '부정의 원리'에만 고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국가건설이라는 '긍정의 원리'로 심화·발전되었다. 민족 자주의 과제와 통일국가 건설의 과제는 김용중의 논리와 인식 속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김용중의 이러한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구,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세력이 민족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던 사실에 견주어서 평가해야 한다. 이것은 민족주의 세력이 민족 자주의 과제와 통일국가 건설의 과제를 서로 분리시키고, 이른바 '즉시 독립론'과 '완전 독립론'을 외치면서 '반탁 운동'에 앞장을 서고 있었던 사이에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극우 세력이 미 군정의 비호를 받아 모스크바 삼상 협정과 그 협정에 기초한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를 파탄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결국 단정 수립 불가피론을 기정 사실로 밀고나갔던 상황 속에서 평가해야 할 문제다. 물론 김구,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세력은 미 군정과 국가주의 세력의 분단 고착화 정책의 반민족성을 뒤늦게 깨닫고, 국가주의 세력과 헤어져 대치선을 그었고, 그 대신 남북의 전민족적 자주 역량이 통일·단결하여 '민족사의 분열 위기'를 막아보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이에 비하여 김용중은 처음부터 민족 문제의 본질을 민족 자주의 과업과 통일국가 건설의 과업이라는 양대 과업을 하나로 통일시킨 민족 자주·통일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해방 정국'의 혼돈 속에서 김구,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우파 세력이 민족 문제의 본질을 양대 과업의 통일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반탁 운동'의 명분이었던 즉시 독립론, 완전 독립론에 기울어져 결국 극우 세력의 단정 수립 불가피론에 유리한 정황을 조성해 주었을 때, 김용중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었던가?

김용중은 자신도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고 밝히면서도, 우익 세력의 반탁 운동은 국제 관계의 현실을 모르는 맹동주의의 발호며, 우익 세력의 정치적 기만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소리』1948년 2월 17일자에 실린「현실주의적 해결을 구함(Wanted: Realistic Settlement)」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용중이 주장한 것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였다.

① 그는 남조선 단정 수립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견해를 분명히 표명하였다. 그가 남조선단정 수립론을 반대하는 근거는 그것이 "남북의 분단을 구체화하고 심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극우 세력의 남조선 단정 수립론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다.

"남조선이 나라의 전체 인구 가운데 3분의 2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이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전국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러한 구상은 비현실적이다. 오늘 남쪽에는 극우 세력의 테러와 폭력이 만연되어 있다. 조선 인민은 공포의 감옥에 갇혀 있다. 심지어 유엔 위원단이 보는 앞에서도 자유 선거는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도 가능하지 않다. 반대자들은 투표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소수에 의한, 소수의 선거가 될 뿐이다. 소수의 반동적 지도자들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정부가 북의 공산주의 군대와 맞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남조선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두 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첫째로, 남조선 단정 수립론자들은 미국의 재정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미국이 자국의 군대를 철수시킨다면 다른 형태의 원조도 끊어질 것이다. 외국의 원조를 받지 못하는 남조선 정부는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둘째로, 미국이 남조선에 식량과 무기를 계속 대준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북쪽에 무기와 원조를 공급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힘의 균형은 조선에서 갈등의 연장 이외에 다른 것을 조장하지 않을 것이다."

② 그는 미·소 양군의 즉시 철군을 촉구하였다. 그가 양군 즉시 철군론을 주장하는 근거는 "조선이 당면한 근본 문제들은 소련과 미국의 점령 아래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은 불을 보듯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민족 자주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옮겨보자.

"조선 인민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줄임) 조선은 외국의 점령 아래서는 참다운 대중 선거를 치룰 수 없다. 조선은 외국의 영향 아래서는 참다운 조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수립되는 어떤 정부도 그 생명은 점령이 지속되는 한에만 유지될 것이다. 소련과 미국이 유엔의 감시 아래 자국의 군대를 즉시 철군시키는 데 동의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두 나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도에서만이 조선 인민은 자기 정부를 수립하는 데서 자주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김용중의 주둔군 철수론은 이미 1946년 3월 7일 미·소 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가 파탄에 빠진 직후부터 제기되었던 일관된 주장이었다.『조선의 소리』1946년 3월 23일자는 머리기사 제목을「국제 권력 정치의 인질: 소련의 비협조적인 사례」라고 달았고, 아래와 같이 4개항의 촉구 사항을 내놓았다.

1. 일체의 장애가 없이 사람의 자유로운 내왕과 물자의 자유로운 교류를 보장하기 위해서 미·소의 경계선을 무조건 철폐할 것.

2. 조선인이 그들의 조국땅에 민주적인 임시 정부를 수립하도록 응당한 지원을 할 것.

3. 임시 정부를 수립한 뒤에 모든 미국과 소련의 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병시킬 것.

4. 조선이 조선의 민족적 삶을 재건하는 데 필요로 하는 고문과 기술자들을 선택하고, 조선의 국익을 위해 적절하지 않거나 또는 불필요한 고문과 기술자들을 면직시키는 권리를 조선 임시 정부가 행사하도록 할 것.

③ 그는 한(조선)반도문제가 유엔의 개입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해결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유엔의 "정치적 수완(statemanship)"을 구상한 것은 그 당시 한(조선)반도가 내전의 불길 속으로 차츰 밀려들어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족 내부에서 파멸적인 내전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유엔이 미·소 양국 점령군의 대결장으로 변한 한(조선)반도의 전쟁 위기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만일 점령군이 즉시 철수하면,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만일 이 나라가 더 이상 분단 상태로 남아있게 되면, 더욱 격심한 혼란에 빠져 결과적으로 파멸적인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조선은 내전을 치루지 아니하고서는 독립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분쟁의 씨앗은 국제적인 패권 정치 구도에 뿌려지고 그 속에서 자라났으며, 내전의 꽃은 피어나고 있다. 만일 유엔이 이 내전의 꽃이 죽음의 열매를 맺기 전에 그것을 제어한다면 유엔은 조선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의 안보에 대해서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이제 유엔은 조선에게서 미·소의 대결이라는 짐을 벗겨내야 한다. 조선 문제는 미봉책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현실주의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보수적이고 '미적지근한' 외교관들의 임무가 아니라, 대담한 국제적 수완가들의 임무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남조선 단정을 수립하려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새력의 투쟁이 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던 도전과 위기의 시기에 김용중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이미 여운형-김규식의 민족주의 세력이 주장했던 좌우 합작론을 받아들였던 김용중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남북의 단합과 민족 대단결론으로 심화·발전시키고 있었다.『조선의 소리』1948년 5월 1일자는「남북 지도자들의 의견교환」이라는 제목으로 "남쪽의 김규식 박사와 김구 선생이 북쪽의 김일성 장군과 김두봉 선생에게 보낸" 서한을 자세히 실었고, 이어서 1948년 4월 3일『독립신보』에 실린, '민족 자주 연맹'의 지도자 김규식이 민족 자주 역량의 단결 및 남북 협상 개최를 주장하는 글을 실었다.

그 무렵 남(한국)과 북(조선)의 민족 자주·통일운동 세력이 '남북 협상'을 통하여 전민족적 단결과 단선 단정 반대 투쟁을 벌였으나, 분단과 분열을 막지 못했다. 민족 자주·통일운동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5·10 단선이 강행되었을 때, 김용중은 1948년 5월 15일자『조선의 소리』에 아무런 논평도 싣지 않고, 우익 세력, 중도 세력, 좌익 세력의 선거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요약하여 실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김용중은「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경고(A Caution to President Rhee)」라는 제목의 논평 기사에서 이런 내용의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박사가 새로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해온 일이다. 그는 한국에 돌아간 뒤로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힘써 일해왔다. 나는 그의 개인적 성공을 축하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가 만일 자기의 정치적 도구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통치를 계속한다면, 조국의 통일이 불가능해질 뿐아니라, 우리 민족은 유혈적인 내전의 결과로 인하여 몇 세대에 걸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가 언제나 민족적 이익을 생각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줄임)

그가 우려하고 경고했듯이, 이승만은 '무자비한' 독재자로 나섰고, 조국통일의 길은 더 멀어졌을 뿐아니라, 우리 민족은 3년 동안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4) 평화 통일을 향한 김용중의 탈냉전·중립화론과 민족 자주화론

임박한 내전의 징조들을 보면서 김용중은 내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북(조선)의 정권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미·소 두 나라가 한(조선)반도에 대한 협상을 재개하며, 한(조선)반도 문제를 남북 대표가 참여하는 유엔 회의에서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김용중이 이미 1949년에 들어와서, 북(조선)의 정권적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조선)반도에서 미·소 냉전 질서를 해소하기 위한 정치 협상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용중은 냉전의 희생물이 된 한(조선)반도의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냉전 질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주적 통일 국가를 건설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김용중은 이러한 자주적 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탈냉전 전략'을 중립화론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부터 김용중은 한(조선)반도의 분단은 냉전 질서라는 외세의 강력한 규정력이 우리 민족에게 강요한 역사의 비극이라고 파악했고, 따라서 통일은 냉전 질서에서 벗어나는 탈냉전, 곧 중립화 전략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중립화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 세력은 남북의 단합된 민족 자주 역량이라고 생각했다. 김용중의 중립화론은 국제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탈냉전 전략'이었으며, 동시에 민족 내부적 관점에서 보자면 자주적 통일국가 건설 전략이었다. 그가 중립화론을 처음 제기한 시점은 한(조선)반도에 전운이 뒤덮히던 1950년 5월 당시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Lie)에게 호소문을 보낼 때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통설로는 김용중의 중립화 통일론이 1960년 4월 혁명 이후 남(한국)의 통일운동이 활성화되는 정세 변화와 1960년 11월 미 상원의원 맨스필드(Mike Mansfield)의 제안에 영향을 받아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용중은 이미 10년 전인 1950년 5월 한국(조선)의 중립화 구상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맨스필드가 주장한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 방안이라는 것은 거꾸로 김용중의 제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냉전 질서가 한(조선)반도를 참혹한 전쟁의 불길 속에 몰아넣었던 시기인 1951년 3월 부활절 아침에 김용중은 국제 언론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 장군에게 보내는 평화 호소문(peace appeal)」을 발표했다. 이 호소문은 남북의 두 지도자들에게 모두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묻고, 오늘의 재난을 우리 민족 자신의 힘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면서, 두 지도자의 동시사임을 촉구하였다. 김용중의 정전 촉구론과 평화론은 미국·소련의 냉전 대결 구도를 남(한국)·북(조선)의 대결 구도로 등치시키는 논리의 연장선 위에서 남북의 정권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중립적 견해는 전쟁의 성격을 민족 자주 세력과 외세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양대 진영의 '앞잡이 정권'들이 서로 싸우는 '대리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남북의 정권을 모두 비자주적이고 종속적인 정권으로 규정하는 '양비론'에 묶여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 시기에는 정전 문제를 민족 자주의 원칙에서 보지 못하고 도덕주의적 평화론에서 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항일운동에서 출발하여 해방 공간의 자주적 통일국가수립운동으로 이어왔던 민족 자주론은 도덕주의적 평화론 안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김용중의 정전 촉구론과 평화론이 정치적 제안으로 보기 힘들고 일종의 도덕적 권고와 같은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그의 도덕적 권고는 개인의 도덕 행위에 호소하는 추상적 논리를 앞세운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냉전 질서가 강요한 민족 모순과 분단 모순, 그리고 이 양대 모순의 착종과 폭발이 몰고온 귀결로서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가 그의 정전 촉구론을 사로잡고 있었다. 1951년 6월 24일에 나온 그의「평화 호소문(An Appeal for Peace)」은 10개 항의 평화 제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김용중의 평화 제안은 남북의 현 정부를 해체하고 '평화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비현실적인 제안을 담고 있다. 김용중의 평화 호소문이 세계 종교 지도자들(정치 지도자들이 아니라)에게 보내는 평화 제안이라는 점에서 그의 평화 제안에는 도덕적 관점을 중시하는 데서 오는 비현실성이 두드려져 보인다. 김용중이 현실 정치의 논리를 동원하여 한(조선)반도의 분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안을 내놓기까지에는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김용중이 이미 1950년 5월에 제기했던 한국(조선)의 중립화 구상을 도덕적 당위론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논리로 더 풍부화, 구체화하여 하나의 정치 제안으로(도덕적 호소가 아니라) 제시한 때는 1952년 3월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정세 인식의 한계가 엿보이는데, "미국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이며 통일된 코리아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고 남코리아를 방어하기 위하여, 그리고 '집단 안보의 실제적인 시위 조치'를 위하여 힘쓰고 있다"고 하면서 미국의 코리아 정책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장기적인 냉전 전략의 관점에서 보자면, 크레믈린도 또한 러시아가 평화적인데, 미국은 침략적이라는 점을 아시아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하여, 중국을 공격하려는 미국의 위협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국 내정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그리고 코리안들이 반감을 갖게 하기 위하여 남코리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 점령을 연장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소련에 대한 비판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정세 인식이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했던 시기가 미국에서 맥카시즘이라는 극우 반공 세력이 준동하고 있던 암흑기라는 점을 감안하고 평가해야겠지만, 김용중의 정세 인식에서 한계가 발생했던 근본 원인은 그가 한(조선)반도를 전쟁으로 몰고간 냉전 질서를 제국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과 모순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한(조선)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국제 정치 구도에서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용중은 1955년에 이루어진 오스트리아 영세 중립화에서 자극을 받고 강대국들의 보장을 받는 영세 중립국 수립안을 '관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대 강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보낸 1955년 6월 29일자 서한에서 제시한 코리아 문제 해결을 위한 8개 항의 제안, 그리고 1956년 12월 인도 수상 네루의 워싱턴 방문에 맞춰 내놓은 코리아 문제 해결을 위한 9개 방안은 이러한 고민이 낳은 결실이었다.

1950년대 김용중의 통일론은 민족 자주화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문제 해결의 방향은 언제나 강대국들에게 한(조선)반도의 중립화를 보장해달라고 촉구하는 기조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1950년대 남(한국)에서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자라날 수 없을 정도로 억압적이었고 피폐했던 시대적 한계, 그리고 그가 활동하던 미국에 맥카시즘의 공포가 뒤덮혀 있던 시대적 한계가 그의 1950년대 통일론에도 일정하게 외부 제약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한국)과 북(조선)에서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1940년대 후반기에 그가 민족 문제를 민족 주체 역량의 전민족적 단결을 추구하는 민족 자주·통일운동 시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1950년대에 와서 그의 시계는 되레 흐려지고 있었다. 이것은 동서 진영의 냉전 질서 속에서 주변 강대국들이 한(조선)반도의 중립화를 보장해야 주어야 한다는 중립화 촉구 운동에 기대를 걸었던 김용중의 한계, 그리고 중립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유엔에 (그 무렵 미국이 장악하고 있던 유엔에) '순진한' 기대를 걸었던 김용중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 한계는 1960년 4월 혁명과 조국통일운동의 활성화 과정을 통해서 어차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대상이기도 했다.

우리가 여기서 한(조선)반도의 중립화 통일론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맨스필드(Mike Mansfield)가 아니라 김용중이었다는 단순 사실만을 밝히는 데 머물지 아니하고, 맨스필드식의 중립화 통일론과 김용중의 중립화 통일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다른 데 있으니, 그것은 곧 김용중의 중립화 통일론은 어디까지나 냉전의 질곡에서 벗어나서 자주적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 자주·통일운동의 한 전개 단위로 변화·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용중의 생각과 행적을 단지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시각에 국한하여 파악하려는 것은 편협한 것이며, 민족 자주·통일운동의 관점에서 파악하여야 한다.

김용중은 전쟁의 불길이 다가오고 있던 전야에 평화통일을 외쳤고, 냉전 질서의 엄청난 무게가 한(조선)반도에서 분단을 강요하고 있던 시기에 탈냉전을 외쳤고, 민족이 분열되어 외세의 개입과 간섭을 막지 못했던 시기에 민족 자주를 외쳤지만, 현실은 그의 외침과는 반대 방향으로 떠밀려가고 말았다. 전쟁의 상처는 너무 참혹하였으며, 냉전 질서는 너무 견고하였으며, 분단 장벽은 너무 높았고, 민족 내부의 분열은 너무 골이 깊었다. 한 재미동포 통일운동가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기에 1950년대 분단 현실은 너무 냉혹하게 얼어붙어 있었고, 냉전 질서는 너무 엄청난 무게로 압박하고 있었다. 그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린지 어언 40여 년의 긴 세월이 흘러,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 그의 민족 자주화론에 기초한 평화 통일론과 탈냉전 전략, 그리고 중립화론은 새롭게 평가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5) 4월 혁명과 김용중의 민족 자주·통일운동

1960년 4월 혁명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항일운동으로부터 그 맥을 이어온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완전히 끊겨 버린 것같은 좌절 속에서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준 민족사의 다시 일어섬이었다. 김용중은『조선의 소리』1960년 5월호에서「민주주의를 위한 승리(A Victory for Democracy)」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이 비상 시국에서 인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한다"고 하면서 "민족의 궁극적 운명은 이 나라의 평화적 통일에 달려있다. 이것이 코리아 인민의 최고 임무다"고 외쳤다.

1960년대 김용중의 생각과 행적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시대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무렵 남(한국)에서는 진보적 학생운동의 조국통일운동과 더불어 이른바 혁신 정당 및 혁신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국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혁신 정당들 가운데는 이름만 혁신이라고 했지 실제로 통일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공·반북 성향에서 탈피하지 못하여 보수 정당과 별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혁신계 운동이 가지는 의의는 1940년대말 민족자주연맹과 남북 협상에 참여한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진보당의 평화 통일론을 거쳐 4월 혁명의 '해방된 공간'에서 복원되었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보적 학생운동이나 혁신계가 주도했던 통일 논의의 중심 주제는 남북의 대화와 교류를 통한 평화 통일론, 남북의 긴장 완화와 감군 조치를 통한 평화 통일론, 중립화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민주당은 이러한 진보적 학생운동과 혁신계의 통일 논의, 통일 운동에 대해 용공성 시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4월 혁명 이후 불과 석 달만에 치룬 7·29 총선에서 혁신 정당계는 민주당에게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선거 참패 이후의 혁신계 운동은 1960년 9월 30일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자주·평화·민주의 원칙에서 남북 정치 협상, 민족통일 건국 최고위원회 구성, 외세 배격, 남북 대표의 통일 협상을 주장하였다.

한편 4월 혁명 직후 북(조선)에서도 조국통일을 위한 새로운 정책 수립과 제안이 있었는데, 1960년 4월 26일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면서 외세를 배제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국을 통일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북(조선)의 통일 정책은 같은 해 8월 14일에 있었던 김일성 수상(당시)의「조선인민의 민족적 명절 8·15해방 15돐 경축대회에서 한 보고」에서 외세를 배제한 남북 총선거론과 과도적 대책으로서의 연방제 통일론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이 통일론은 남(조선) 혁신계의 통일 논의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김용중도 남북에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에 힘입어『조선의 소리』1960년 11월호에「통일을 위해 다시 탄원함(A Further Plea for Reunification)」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남(조선)의 통일 논의에서 드러나고 있던 문제점들, 이를테면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협상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북 협상 반대론,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력을 강화하자는 무력 증강론, 통일 문제는 뒤로 하고 우선 미국의 원조를 받아 국민 경제를 일으키자고 하는 경제 건설 우선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북(조선)에서 제안한 과도적 대책으로서의 연방제 통일안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판했다.

"최근 공산주의 지도부(북[조선]의 지도부를 뜻함-인용자 주)는 나라의 두 지역을 포괄하는 연방국가(confederation)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만일 이기적인(selfish) 제안이 아니라면, 서투른(clumsy) 것이다. 우리 코리안은 한 민족이며 한 국가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인구 비례 대표제에 근거한 자유로운 총선거를 통하여 수립될 한 정부 아래서 통일해야 한다. 이와 같은 총선거는 남북에 대해 공정함을 보장하는 비동맹 국가들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감시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용중은 여기서 북(조선)의 연방제 통일안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기 이전 시기에 과도적 대책으로 수립되는 국가연합적 성격을 지닌 주체를 수립하자고 제안하고, 그리고 경제·문화 부문에서 비정치적 교류를 추진하는 주체를 수립하자고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조선)의 통일안이 남북 총선거 실시를 궁극적인 목표로 밝히면서도 유엔은 물론 비동맹 국가들까지 포함하는 어떠한 외세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히 자주적인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반면에, 김용중의 통일안은 비동맹 국가들로 구성된 선거 감시 위원회를 상정하고 있다는 차이가 드러난다. 그 글에서 김용중은 여전히 오스트리아 방식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면서 미 상원의원 맨스필드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남(한국)의 조국통일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는데, 1961년 2월21일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이 결성되었고, 이 단체는 김용중을 명예 의장으로 추대했다. 5월 10일에는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주도하여 남북 학생회담 지지, 남북 협상 촉구, 남북 사이의 서신 및 문화 인사 교류 실현, 남북 경제 교류, 남북 혼성 선수단 파견, 통일을 방해하는 외세 배격을 주장하는 결의문이 나왔고, 사흘 뒤에는 '남북 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궐기대회'가 1만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다. 한편 혁신계 운동의 대변지로 기능했던『민족일보』도 통일 논의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용중은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었다. 1961년 1월 14일자로 된, 장면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김용중은 아래와 같은 5개 항의 제안은 내놓았다.

① 민족통일 정책은 유엔과 미국의 협조를 받아 탄력성있게 수립되어야 한다.

② 여러 나라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이 코리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할 모든 당사자들과의 적극적인 협상을 환영할 것이다.

③ 북쪽 정권이 간첩 행위의 도발과 기만적 선전을 중지한다는 조건에서, 최종적 해결을 향한 첫 단계로서 교역, 우편, 통신, 이산가족 결합과 같은 평화적 교류를 회복하는 문제를 남북이 협상해야 한다.

④ 국가 안보를 보장하지 못하는 군사력 증강 조치는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⑤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하고, 외세 간섭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나라의 중립화를 추구하여야 한다.

또한 김용중이 1월 19일자로 된 공개 편지에서 김일성 수상(당시)에게 제안한 내용을 요약하면, 북(조선)은 남(한국)과 미국에 대한 비방 선전을 중지해야 하며, 화해와 협상의 길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북(조선)의 선전은 "남(조선) 지도자들과 민주 세력들-특히 미국에 대해서 근거없는 비난과 경멸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줄임) 미국이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고 '수탈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데, 남(조선)에는 수탈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우기 미국은 남(조선)의 경제적 혜택을 위하여 1945년 이후에 약 2억5천만 달러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전세계가 알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지원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나, 소련도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북(조선)을 지원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적었다. 여기서 김용중은 1960년대의 남(조선)정부와 미국이 반통일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김용중은 이에 앞서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1월 8일자에 한국(조선)의 통일 문제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이 나가자 남(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한결같이 김용중이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 노선을 추종하고 있다고 인정된다"고 하였고, 김용중의 평화통일론과 외국군 철수론, 중립 기관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론에 대해서는 "이러한 방식은 북경 및 평양 공산 정권이 공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방안과 흡사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하겠고, 따라서 어느 항목이나 전국 공산화의 길을 열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과 같은 자유 천지에서 언론 자유의 혜택을 배불리 누리고 있는 김 씨가 공산 치하에서 자기 주견을 주장하는 시험을 해본다든지, 서울 시민들처럼 단 석달이라도 공산 정치의 맛을 보았다하면 그같은 나이브한 공상적 생각을 버릴 수 밖에 없으리라"고 하면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김용중의 통일론에서 가장 중요한 결실은 그가 1964년 11월 12일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보낸 제2차 공개 서한에서 나타났다. 이 서한에 담긴 내용은 그로부터 3년 전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보낸 제1차 공개서한에서 그가 내놓았던 5개 항의 '추상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 인식상의 오류가 엿보이는' 통일안의 한계를 수정·보완·극복하고, 남북 협상을 통하여 분단 질서를 유지·강화시켜오고 있는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도를 더욱 세련된 현실 정치의 논리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중 평화통일론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서한에서 자신의 민족 자주화론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조국의 운명은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으며, 우리 한인이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문제와 난관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외부의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이 일을 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그가 제기한 통일 방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불가분의 조국을 그의 본래 상태에 복귀시키기 위한 협상을 하기 위해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통일위원회를 수립하되 위원은 남북에서 5명씩 선출하여 11번째 위원은 쌍방이 동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할 것.

② 정치적 해결의 서막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긴급한 인도주의적 조치를 즉시 실시할 것.

衁. 이산가족이 다시 모여 그들이 거주지를 어디라도 희망하는대로 선택하는 자유.

遁. 국가 양부분 간에 무역할 수 있는 무제한한 자유

鑁. 남북 간의 이주와 여행의 자유

鱁. 국가 양부분 간의 우편, 전화, 전신, 수송과 전력 공급의 재개

ꁁ. 전국을 통한 학술과 체육 활동에 참가

③ 통일위원회의 지도 하에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를 동시에 철거시키고 한국의 병력을 다만 국내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대 수준으로 축소할 것.

④ 통일위원회에는 38도선에 있는 '외국의 장벽'을 철폐하고 군사 휴전위원회를 해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것.

⑤ 전국적인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제헌국회 선거를 위한 통일위원회의 지도와 감시 하에 비례 대표제에 의해 실시될 자유로운 전조선 선거를 준비할 것.

⑥ 현재의 양 정권이 체결한 모든 협정 조약과 공약을 무효화시킴에 따라 미국과 유엔이 인방 제국에 의해 보장될 한국의 중립적 지위를 확립할 것. (줄임)

1964년에 나온 김용중의 통일 방도는 이전에 김용중의 통일 제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엔이나 비동맹 국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고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의하여 민족 자주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하였다는 점과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군축 조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전 단계로서 남북 사이의 비정치적 교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 외세 개입과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중립화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이전에 그의 통일 논의에서 나타나곤 하던 반공주의적 비판은 자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4월 혁명 이후 남(한국)에서 친미 군부 세력이 반공·반통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통일 논의와 통일 운동을 혹심하게 탄압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2차 공개 서한이 발표된 뒤부터 김용중과 북(조선)의 김일성 수상(당시) 사이에는 몇 차례의 공개 편지가 오고 갔는데, 김일성 수상(당시)의 1965년 1월 8일자 답신, 김용중의 1966년 11월 12일자 공개 서한, 김일성 수상의 1967년 1월 4일자 답신, 김용중의 1971년 12월 18일자 편지로 이어졌다. 김일성 수상은 김용중에게 보낸 1965년 1월 8일자 답신에 이렇게 적었다.

"나라의 통일은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없이 반드시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기초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합니다. (줄임) 조선의 통일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일체 외국 군대를 철거시켜야 한다는 당신의 제의는 정당한 것입니다. (줄임) 조선에서 유엔은 미국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여 왔습니다. 유엔은 조선 문제에 관여할 어떠한 자격도 없습니다. (줄임) 당신이 제기한 통일위원회는 우리가 말하는 최고 민족위원회와 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련방제 형식을 취하지 않고라도 남북 조선 대표들로 구성되는 그 어떤 다른 형태의 통일적인 기관을 창설하여 남북 간의 민족적 련계를 회복하며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줄임) 우리는 남북 조선 군대를 국내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대의 수준에까지 축소할 데 대한 당신의 제의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줄임) 우리는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정견과 사상의 차이, 과거의 여하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그와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줄임) 민족 자결의 원칙에서 우리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고 전민족이 단결하여 투쟁할 때 우리는 어떠한 외세의 '보장'도 필요없이 나라의 위력을 굳건히 할 수 있으며 부강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용중은 김일성 주석에게 1971년 12월 18일자 개인 편지를 보냈는데, 1975년 9월 6일 78살을 일기로 숨진 그로서는 이것이 북(조선)에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민족 통일을 위한 당신의 제안들이 나의 제안과 가깝다는 점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고 적었다. 그가 통일 문제에 관련한 견해의 접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밝힌 바없으나, 1973년 6월 23일 김일성 주석이 발표한 통일 방안과 김용중의 통일 방안을 비교한다면, 군사적 긴장 상태의 완화 문제, 남북의 민간 교류 실현, 통일을 추진할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 부문에서 견해의 접근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차이점은 북(조선)이 남북 연방제 실시와 단일 국호 유엔 가입을 제안한 반면, 김용중은 비례 대표제에 의한 전국 총선거 실시와 외세에 의한 중립화 보장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 편지에 나타난 김용중의 생각을 살펴보면, 그의 정세관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가 "우리 내전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북에 있는 우리 인민들이 미국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고 한 대목은 그로부터 꼭 10년 전 김일성 수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이 왜 대미 비방만을 늘어놓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한 대목과는 달리 북(조선)에서 적대적인 대미관이 형성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자세로 변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북(조선)이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회담 자리에 박 정권이 나올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고 하였다.

이 편지를 쓸 무렵 김용중의 평화 통일론은 북(조선)과 미국의 평화 공존론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국제 정세가 평화 공존을 향하여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만일 코리아에 평화가 찾아오게 되는 일이라면, 두 나라(북[조선]과 미국-인용자 주)는 영원한 적대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동의하리라고 믿습니다. 국제 정치에서 우리는 흔히 오늘의 적이 내일의 벗으로 되고 그 반대로도 된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일본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가 좋은 사례입니다"고 했다. 김용중은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평화 공존의 첫 단계로 민간급 교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편지에서 "북(조선)정부가 미국의 각계 인사들(다양한 견해를 가진 의회 지도자들, 저명한 학자들, 언론인들, 기업인들)을 초청하면" 미국인들이 "남북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그러나 김용중이 생각했던 것처럼 1970년대 초 동아시아 정세는 베트남전쟁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평화 공존'이 아니라 열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었고, 북(조선)의 대미관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때문에 매우 적대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북(조선)이 미국에 대해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고 공식적으로 요구한 때는 1973년이었지만, 미국은 이를 거절했고, 조·미 관계는 냉전의 한 복판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김용중이 바랐던 평화 공존을 향한 조·미 관계 개선의 움직임은 그로부터 20년도 훨씬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유럽 지역에서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냉전 질서가 해체된 오늘에 와서야 조금씩 보이고 있다. 김용중의 조·미 평화 공존론은 '평화의 봄'이 오기 전에 너무 일찍 모습을 드러낸 '겨울눈 속에 핀 매화'였다. 김용중의 강렬한 통일 의지는 언제나 현실정합성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당위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72년에 들어와서 김용중은 미주 지역에서 결성된 최초의 통일운동단체라고 할 수 있는 '조국 평화통일 재미 촉진위원회' 의장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1975년 9월 6일 미국 로스 앤젤레스 남가주 대학병원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앉은채 눈을 감았다.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뼛가루를 조국 땅 휴전선에 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6년부터 1975년까지 낯선 이역에서 가파른 삶을 살아왔던 해외동포가 한 줌 뼛가루가 되어 조국 산천에 뿌려져 넋이라도 깃들기를 바랐던 통한의 귀국길에는 반통일 세력이 가로막고 서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마지막 소원조차 이루지 못했다. 로광욱 선생은 그의 뼛가루를 조국 땅에 뿌리기 위해 5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으나, 끝내 귀국이 허용되지 않아 미국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되돌려 줄 수 밖에 없었다.

'해방 정국'에서 민족 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해 힘썼던 여운형, 김구, 김규식 같은 남(한국)의 통일민족주의자들처럼 김용중도 여기 미주 대륙의 한 켠에서 통일민족주의자의 선명한 자취를 남겼으며, 그가 숨을 거둔 뒤 꼭 20년이 지나 조·미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오늘 우리 재미동포 후대들에게 민족사의 격동기에 해외동포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미리 보여주었다. (1996년 1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