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소장과 박세길 전국연합 정책위원장의 대담>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은 북(조선)의 공세에 밀려 흔들리고 있다

 

출처: 전국연합 기관지 [민] 10월호

<편집자 주> 북미 베를린 회담이 타결되면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한반도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칠천만 겨레에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통일의 실현 가능성과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민족자주진영이 가져야 할 과제이다. 격동하는 한반도 정세,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좌표를 향해 통일행보를 걸을 것인가. 이에 「민」 편집실에서는 지난 9월 29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박세길 정책위원장과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과의 대담을 마련했다. 이 대담이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 지난 9월 베를린 회담 소식이 전달되었는데요,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한반도 정세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고 하는 것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사실상 북한과 미국에 총성이 울려 퍼지지 않았을 뿐이지 10년간 전쟁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봅니다. 베를린 회담은 바로 그러한 북미간의 10년 전쟁이 매듭되고 있다는 상징적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과연 10년간의 북미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요.

- 베를린 고위급 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2차 인공위성 발사준비에 직접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게 없었으면 미국은 계속해서 시간끌기 작전을 전개하면서 북한과의 협상을 회피했을 것입니다. 지난해 8월 31일 제 1차 인공위성 발사는 미국에게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중앙정보국 산하 국가정보회의 연구보고서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듯이 광명성 1호 발사는 미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더 이상 시간끌기 작전을 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난해 11월 페리를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하게 되었고, 대북적대정책, 시간끌기 작전 등 그간의 모든 정책기조를 폐기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대북정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북한과 미국의 관계변화는 힘의 관계, 세력관계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북한과 미국이라는 특정한 관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그 세력관계에서 북한이 결정타를 날리면서 미국에게 외교적인 패배를 안겨다 준 것입니다.

지난 다섯달 동안 페리를 중심으로 한 정책연구집단이 대북정책을 골자로 한 새로운 한반도 정책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를 담고 있는 것이 페리보고서인데 그 내용은 크게 정책권고안과 대북협상안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미국의 외교적인 패배를 담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국이 북한과의 군사·외교적 대결전에서 승리했다고 한다면 페리보고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랑스럽게 공개 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페리가 직접 미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나가서 정책권고안의 일부를 소개했는데 그 보고 자리마저도 철저히 비공개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남한정부나 일본정부에 나누어 준 18쪽 짜리 요약본도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내용이 다소 모호한 표현을 빌어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에 비추어 보면 페리보고서의 기본 구도가 세 단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평화공존, 국교수립,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기묘하게도 6년 전에 있었던 1993년 6월 11일 뉴욕 조미 공동성명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6년 전에 있었던 조미 공동성명도 5월 29일 북한의 미사일발사실험이라든가 NPT 탈퇴선언이라는 초강력 공세에 밀린 미국이 어쩔 수 없이 협상자리에 나와서 북한의 요구 세 가지를 들어준 일종의 항복문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번에 다시 제2차 인공위성 발사 준비라는 초강력 공세에 밀려서 조미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이 바로 페리보고서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워싱턴과 서울의 보수언론이라든가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페리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진행된 과정을 알지도 못하고 공염불만 외우고 있습니다.

▶ 최근에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페리보고서를 미국이 북한에 대한 외교적 패배를 시인하는문서라고 규정하셨고 그렇게 된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준비라고 지적하셨는데, 인공위성 발사준비가 왜 미국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는지 그 전후맥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인공위성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인공위성을 군사기술적으로 전용하면 곧 대륙간 탄도탄이 됩니다. 전문가들은 사정거리 5500킬로미터 이상이면 대륙간 탄도탄이라고 분류합니다.

지난해 북한이 발사한 광명성 1호가 놀라운 충격을 준 것은 그것이 3단계 추진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3단계 추진체의 잔해가 떨어진 지점이 알래스카 앞바다였습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광명성 1호는 1초에 약 8킬로미터의 우주 속도를 내면서 대기권을 이탈해서 저궤도에 진입했는데 그 정도의 기술을 전용해서 대륙간 탄도탄을 제조하면 1만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갖는 대륙간 탄도탄이 된다는 것입니다. 1만킬로미터라 함은 북한이 워싱턴을 포함하는 미국전역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거리입니다.

광명성 1호 발사는 세 가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먼저 군사적 의미에서 볼 때 광명성 1호 발사는 북한이 미국에 대한 대량파괴 보복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이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을 상대로 마음대로 침략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보복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고슬라비아나 이라크가 그냥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복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이 전인민적인 지구전을 펴서 승리하긴 했지만 십수 년 세월 동안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보복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광명성 1호 발사를 통해 군사기술적으로 미국전역을 사정권으로 두는 대량파괴 보복능력을 확보했음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결정적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런데 대륙간 탄도탄이라고 하는 것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서는 개발할 수도 없고, 개발할 필요도 없는 무기체계입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정밀 유도 무기체계를 개발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가지고 있는 중거리 이상의 탄도 미사일, 그 중에서도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정밀한 군사목표물보다는 도시를 공격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만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날아가서 탄두가 폭발하면, 재래식 탄도일 경우 파괴범위가 반지름 50미터밖에 안 됩니다. 결국 반지름 5킬로미터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핵탄두를 장착하지 않으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이 국력을 기울이고 엄청난 달러를 쏟아 부어 개발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기본적으로 핵보유 전제 아래서 개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파키스탄과 북한이 핵무기 제조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서로 교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고도 핵탄두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견해를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데 저도 그 견해가 타당하다고 봅니다.

군사기술적으로 볼 때 미국은 수만 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실질적으로 5027작전계획에서 본 것처럼 북한을 선제 핵공격으로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것이 미국의 대북한 군사전략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막상 핵전쟁이 붙는다면 북한은 초토화되겠지만 미국 역시도 북한의 핵보복 때문에 결정타를 입고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북한은 모든 군사시설과 주요산업시설, 주민대피시설을 지하요새로 건설했습니다. 굉장히 피땀어린 노력을 기울여서 8천개가 넘는 지하요새를 건설했는데 휴전선 155마일 최전선에만도 1천2백개가 넘는 엄청난 지하요새가 있습니다. 핵전쟁은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들을 날려버릴 수 있지만 지하요새를 파괴하는 것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핵탄두를 장착한 북한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미국의 뉴욕과 워싱턴을 강타했을 때 결국 누가 먼저 손을 들 것인가는 매우 분명합니다. 미국은 군사적 패배를 피할 수 없는 것이죠. 미국은 이 점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비확산 정책 즉 핵무기 독점체제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선언을 하게 되면 이는 미국의 비확산 정책을 무너뜨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미국의 비확산 정책 때문에 눈치를 보던 핵개발 잠재국들이 들고 일어나서 핵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비확산 정책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고 NPT는 휴지조각이 되며 IAEA도 문을 닫아야 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세계의 군사지배질서가 무너지게 되는 위기가 오는 것이죠. 이런 재앙을 미국은 절대로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세 번째,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는데, 핵무기 보유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 보유를 배경으로 한 북한의 초강력 공세는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겨냥한 전략이라는 사실입니다.

북한은 한미 동맹체제를 와해시키는 것을 기본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를 위해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의 약한 고리인 미일 동맹체계를 집중 공격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미일 동맹체계가 가장 약한고리가 된 까닭은 일본이 정치·외교·군사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으려고 하는 강력한 움직임을 보여온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이 독자노선을 걷게 되면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일본의 손에 내주어야 합니다. 이는 미국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재앙인 것이죠. 그런데 독자노선을 가려고 하는 일본이 핑계삼는 것이 바로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능력입니다. 일본은 바로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능력을 핑계삼아 독자적으로 핵개발을 하겠다, 독자적으로 첩보위성을 개발하겠다, 독자적으로 군사정보력을 가지겠다, 독자적인 작전계획능력을 가지겠다고 하면서 ‘반미, 개헌, 군비증강’이라고 하는 세 가지 축을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은 북한의 미일동맹체제에 대한 공세를 억제하기 위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며 그러자면 한미 동맹체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남아있는 선택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한미 동맹체제를 포기하면서까지 미일 동맹체제 유지에 매달리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은 여러 군데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근거의 하나로 올해 5월에 미중앙정보국이 발표한 정책연구보고서에서는 미일 동맹체제가 표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 워싱턴 정가에서 나오는 정책보고서나 연구보고서, 특히 동북아시아 정책연구보고서의 주된 내용은 21세기에 가서 어떻게 미일 안보체제를 유지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건 웬만한 전문가는 다 아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미국이 그만큼 미일 동맹체제의 표류와 동요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체제가 무력화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질서가 무너진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자주역량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공간이 마련됩니다. 그 뒤의 시나리오는 다음에 이야기하죠.

▶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준비로 미국을 굴복시킨 몇 가지 이유 중에서 세 번째로 지적하셨던 부분이 특히 주목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북한은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는 미일 동맹체제를 집중 타격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미일 동맹체제 유지를 위해 한미동맹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몰아붙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미 동맹체제의 무력화 혹은 해체는 한반도 통일정세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 양상을 예측해 본다면 어떤 것입니까?

- 한반도 정세의 지각변동의 끝은 연방제통일의 실현입니다. 이제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연방제통일의 실현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몰튼 헬프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보고서가 있는데, 그 내용은 ‘21세기에 들어가서 어떻게 미일 동맹체제를 유지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미일 동맹체제가 흔들리고 있는 원인이 바로 북한의 미사일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가. 이에 대해 몰튼 핼프린은 ‘일국 양제(One country Two systems)’, 한 나라 안에 두 체제가 공존하는 방식 즉, 한반도가 연방제통일로 나아가는 시나리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미 국무부의 정책기획실장으로 들어간 사람이 작성했던 보고서가 이러한 전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한반도가 연방제로 통일된다고 하는 시나리오를 유일한 시나리오로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제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한 번도 미국이 한반도 연방제 통일실현이라고 하는 21세기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변화하는 방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세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미국이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문제제기의 요지입니다. 이에 대해 나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해서 설명하고 싶습니다. 1972년에 미국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중 관계의 평화5원칙을 합의하면서 그 연장선장에서 대만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습니다.

그 평화5원칙의 한반도적인 전개가 1993년 6월 11일 ‘조미 뉴욕 공동성명’이었고, 그것을 미국의 정책기조로 발표한 것이 이번의 페리보고서입니다. 다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분단국가 아닙니까? 그런데 미국은 ‘하나의 중국’을 지지했습니다.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다는 뜻은 중국공산당의 통일정책인 ‘일국양제’라는 중국식 연방제를 지지한 것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미국과 중국은 평화5원칙을 합의하면서 이면합의를 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대만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포기하고 대만 주둔 미군병력을 철수하며 대만에 배치한 미군기지들을 폐쇄하겠다는 것이었고 미국은 실제로 이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 북미관계의 질적인 변화와 그것이 야기하는 한반도 정세변화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북미간의 관계개선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해 어떻게 예상됩니까?

- 미국이 페리보고서의 구체적 내용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시나리오를 짰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발표된 내용 중 평화공존이라고 하는 것은 평화협정 체결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휴전선을 경계로 적대적으로 대치한 쌍방의 무력이 총구를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해서든지 조미평화협정체결로 나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반대로 북한은 어떻게든지 조미평화협정체결 구도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타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잠정협정을 거쳐서 조미평화협정으로 가는 방식이 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1996년 2월 북한이 외교부 발표 형식으로 미국에 공식제안한 것이예요.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하는 북한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들어줄 수 없는 현실적 조건에서 그 대안으로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그 잠정협정을 이행하고 감독할 수 있는 조미공동군사기구를 두며 그 잠정협정을 이행하기 위해서 조미군사고위급 회담을 열자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이러한 절차의 문죌 함께 평화협정이라는 형식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형식의 문제에서도 타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국제법상 조약의 효력을 낼 수 있는 공동성명 형태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과 미국은 적대관계를 청산하면서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과 미국은 공동성명형식으로 평화체제 수립문제로 해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평화조약(또는 평화협정)체결을 대신했던 좋은 선례가 있습니다.

▶ 평화협정 체결의 형식과 절차에서 타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간 북측에서 일관되게 요구했던 주한미군 철수를 일정 정도 수용하지 못한다면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 그렇지요. 그것은 국제법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페리보고서에서 국교정상화가 제2단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건 다른 말로 하면 북미간의 국교수립입니다. 국교수립을 하려면 적대관계를 청산해야 하고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면 평화협정체결과 적대적인 대치상태 해소가 기본 전제이며 이는 주한미군철수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세가 국교수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미군이 즉각적이고 전면적으로 철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남한의 정권이 통일을 지향하면서 연방제 통일회담을 추진하는 때까지는 단계적인 철수과정을 밟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갑자기 미군의 무력이 철수되었을 때 남한정권이 극단적인 안보위기에 빠지게 되면서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든지, 핵을 개발하겠다든지 하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다른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미국과 북한은 남한이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는 등 무력을 증강시키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에서 북한과 미국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남한의 안보위기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갑작스런 미군철수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남북정권 사이에서 연방제통일로 나아가는 합의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미군이 잔존할 것입니다.

이 역시 역사적 경험에서 유추해 전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베트남에 배치되었던 방대한 미군 무력이 철수된 적이 있어요. 그 때 미국은 자기들이 쓰던 무기를 모두 티우정권에 넘겨주고 가버렸습니다. 그 덕에 티우정권이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지요. 미국, 러시아, 중국 다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티우정권이 그 군사력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잔인하게 탄압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북베트남은 이 점에 대해 미국에 항의했어요. ‘너희들이 갑자기 빠져나가면서 무기를 남베트남의 티우정권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엄청나게 탄압받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한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완전철수라는 기본원칙은 지키되 어떻게 전술적으로 풀어나갈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연방제 통일이라 했을 때 전제되는 것은 7·4남북공동성명에서 밝혔듯이 자주의 원칙입니다. 달리 말하면 남한에서의 민족자주정권 수립은 연방제통일의 기본 전제인 것이지요. 그런데 현재 남한의 민족자주역량은 급변하는 정세에 발맞추어 민족자주정권을 수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객관정세의 진행과 주체적 준비정도가 일치되고 있지 못한 것인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의 민족자주 문제는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 사이의 치열한 투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두 가지 문제는 중간세력의 존재와 국보법 체제의 몰락이라고 보여집니다.

미국의 지배구도가 무력화되면 민족자주역량도 비약적으로 커지겠지만, 중간세력 또한 커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자주역량과 중간세력 사이에 새로운 구도가 설정될 것입니다. 그 구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중간세력을 정치협상의 자리에 이끌어냄으로써 자주와 통일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도 역사적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파리 평화협정의 조항 중에는 남베트남의 중간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들어가 있습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친미예속정권인 티우정권에도 가담하지 않는 제3의 정치세력으로서 중간세력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파리 평화협정은 남베트남의 중간세력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북베트남 이 3자가 ‘민족화해협의회’라는 정치기구, 통일협상기구를 결성하자는 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남한의 경우 중간세력이 남베트남처럼 약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베트남처럼 중간세력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면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하고 손잡고 통일을 이루는 길을 걷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남한의 국가보안법 체제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조미관계는 변화발전하는데, 미국이 지배해 온 남한의 정치권이 반통일노선의 국보법 체제를 그대로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반통일세력이 전적으로 의존해왔던 국가보안법 체제는 조미국교수립과 더불어 붕괴될 것입니다.

▶ 이제는 연방제 통일국가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준비해야할 단계라고 봅니다. 지금껏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객관정세는 연방제통일국가 건설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성숙되고 있는데 반해 남쪽에서는 민족자주정권을 수립할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객관정세와 주체적 준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간세력의 존재와 남한 정권의 통일지향적 개조라는 ‘과도기’를 예상하고 설정한 가운데 연방제 통일국가 건설로 나아가는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이 상당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연방제통일국가 건설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통일국가 건설의 3대원칙으로 자주화, 중립화, 연방제를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중 중립화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운동진영에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중립화원칙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중립화 문제가 21세기 한반도 정치과제로 제시된 것은 한반도가 가지는 전략적 위치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추구하면서 어느 일방에 속해서는 통일실현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주변에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이 있는데 우리가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면 대외관계에 있어서 영세중립국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세중립국이 된다는 것은, 미국과의 관계 역시 적대관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면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걸로 생각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미국하고 평등과 호혜의 원칙에 기초한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도리어 온갖 외세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나면서 자주적인 국가로 번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가 영세중립국인데 반미국가는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으면서 미국에 예속된 나라도 아닌 것이죠. 자주적인 나라입니다. 그들은 영세중립국가로서 대미관계에서 자주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통일된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때는 미일동맹체제와 중국이 치열한 갈등국면으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 대치지점에 ‘통일된 한반도’가 있게 되는데, 우리는 중국과 일방적 동맹관계를 맺거나 반대로 미국, 일본과 일방적 동맹관계를 맺는 것 역시 자주노선을 실현하는데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적으로 연방국가를 건설한다면 필연적으로 영세중립화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7천만 겨레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친미, 친일, 친중 그 어느 것도 아닌 자주적 영세중립국인 것이지요. 그럴 때만이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면서 자주의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 1994년도에 북미간 제네바합의가 성립되자 민족민주운동 진영 일각에서는 반미자주화 문제를 둘러싸고 혼란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는데 반미를 계속 주창하는 것은 뭔가 어긋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데요.

- 나의 주장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반미자주화노선을 수정하거나, 또는 더 극단적으로 포기하려 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반미 자주화의 본질은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을 반대하는 까닭은 미국이 한반도 지배전략을 추진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한반도 지배정책을 포기할 때까지 당연히 반미자주화 노선은 일관되게 견지되어야 하지요. 앞으로 21세기 어느 시점에 가서 미국이 한반도 지배전략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미국을 반대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정세변화에 맞게 반미자주화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경로에 관한 것입니다. 반미자주화 노선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통해서 관철시켜 나가는 경로도 있을 수 있고, 북한이 취한 것처럼 전쟁없이 승리하는 경로도 있습니다.

어쨌든 북미관계의 변화는 남한 민족민주운동의 반미자주화운동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를 조성할 것입니다. 남한 민족민주운동이 그러한 객관정세의 발전을 주동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민족자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고 봅니다.

▶ 중국의 어느 전략가는 적이 물러나면 추격하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뒷걸음질 치면 우리는 더욱 몰아쳐야 할 것인데요. 주한미군 철수운동을 포함하는 반미자주화운동을 더욱 확산시켜야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때만이 민족자주역량의 비약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럴 때만이 급변하는 객관정세를 자주적인 통일국가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해 과거의 관성에 빠지지 않고 거대한 변화를 주동적으로 헤쳐나가기 위해서 남측 민족민주운동진영의 간부일꾼들이 가져야 할 관점이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 당부라기보다는 함께 하는 동지적 관계로서 고민할 과제라고 봐요.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사상적으로 도덕적으로 볼 때, 압도적으로 우월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조직역량이예요. 조직역량으로 우리가 상대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곧 승리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약 5년 동안은 조직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에 두 지역을 다녀왔는데, 그 중 지난 1월에 방문했던 지역도 있었어요. 8개월만인데도 피부로 느낄 정도로 조직역량이 강화 발전돼 있음을 보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우리가 역량관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비결은 튼튼한 지방조직력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전선운동 중앙의 정치역량이라고 하는 것은 지방조직의 밑받침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두 번째로 정보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승리적 신심을 갖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력을 가져야 해요. 정세는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보수언론과 보수적인 전문가를 자처하는 집단들의 왜곡된 정보, 왜곡된 보도에 의해 인식의 혼란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식의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서는 미래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운동의 결정적인 강점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신념체계로 받아들인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혼란이 발생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지역근거지 강화와 정보역량의 강화를 집중적으로 강조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전국연합이 다가오는 역사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싶은데요. 정세의 혁명적 전환은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전국연합 간부일꾼들은 사상과 이론 정책에서 전면적인 재무장을 서둘러야할 때라고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바라며 귀중한 말씀에 거듭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