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세기말의 한반도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세기 말의 개혁과 20세기 말의 개혁

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 세기말의 격동기에 한민족이 겪었던 역사적 경험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또다시 세기말의 격동에 휘말려 있는 우리에게 중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역사가 말해주듯,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한민족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외세는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일본은 제국주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아시아 침략의 길에 나섰다. 일제는 대만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나서 한반도에 달려들었다. 일제가 동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내걸은 전략적 방침을 한 마디로 줄여 부른다면 ‘근대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근대화 전략은 부정부패와 무능무력으로 망해가고 있었던 조선왕조에게 개방과 개혁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갑오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고나서 이른바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이행하라고 강요하였다.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친중파 수구정권을 무너뜨리자 친일파 개혁정권이 등장했다. 김홍집이 수장이 된 친일파 개혁정권이 ‘홍범 14조’를 선포하고 사회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니,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그러나 이 개혁정권이 개혁의 사령탑으로 설치한 군국기무처는 일본 공사 오토리가 고문으로 타고 앉아 간섭하고 배후조종하였다. 처음부터 김홍집 개혁정권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일제는 그 개혁정권을 조선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개혁의 자주적 주체로 등장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중이었다. 조선민중은 갑오농민전쟁을 거치면서 역사적 임무를 자각하고 사회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시 민중의 개혁 요구는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개조’로 집대성되었다. 민중의 개혁은 집강소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세기말의 혼란과 위기를 민중의 힘으로 극복하는 사회역사발전의 장쾌한 서막을 올렸다.

1백년 전 세기말 전환기에 한반도에는 이처럼 두 개의 개혁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 정권의 개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민군의 개혁이었다. 이 두 세력이 제시한 개혁안을 견주어보면 커다란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두개의 개혁은 서로 합류하지 못하는 다른 길로 각기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친일파 정권의 개혁은 일제의 근대화 전략에 종속된 외세의존적 개혁이었고, 농민군의 개혁은 민중 자신의 요구와 역량이 창조해낸 민족자주적 개혁이었다. 당시 한반도의 민중은 여덟 글자로 축약한 자신의 전략적 방침을 부여잡고 세기말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아갔으니, 그것이 바로 ‘척양척왜 제폭구민’이다.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배격하고 민중이 스스로를 폭력적 현실에서 건져낸다는 전략이었다.

두 개혁세력은 어떻게 되었던가? 친일파 정권의 개혁은 일제 침략의 폭풍에 휘말려 좌초되었고, 개혁의 수장 김홍집은 친일매국노라는 죄명을 쓰고 광화문 앞에서 성난 민중의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마쳤다. 다른 한편, 농민군은 백산전투에서 태인전투에 이르기까지 결사항전을 벌였으나 일제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민중의 역사발전 전략과 개혁 의지는 일제와 친일세력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그 뒤의 역사는 부정부패와 무능무력으로 휘청거리던 조선왕조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피눈물 젖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왕조 말의 집권세력은 외채부담에 짓눌리고 매관매직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저들은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산림벌채권, 어업권, 관세징수권을 비롯한 온갖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 넘기면서 재원을 조달하더니, 나중에는 나라를 통째로 외세의 손에 넘겨주는 매국노로 전락하였다. 1백년 전의 역사가 1백년 뒤인 오늘, 세기말의 전환기에 들어선 이 땅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 우리는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

20세기 말의 한반도는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초강대국과 맞닥뜨리고 있다. 미·소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 견제장치가 풀려버린 국제사회에 거대한 공룡의 모습으로 등장한 미국은 지금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화란 워싱턴의 전략가들과 뉴욕 월가의 국제금융자본가들이 냉전 이후의 세계를 지배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워놓은 새로운 전략이다. 미국의 세계화 전략은 1백년 전 일본의 근대화 전략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 세계화 전략의 성패를 가름할 최적지로 미국이 선택한 곳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는 한반도다. 미국은 지금 남한과 북한에게 모두 개방·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1997년 12월 외환·금융위기에 휘말린 남한이 국제통화기금 관리망 안으로 편입되면서 경제가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엄청난 재부가 남의 나라에 팔려나가고, 그와 더불어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개혁정권이 들어선 것은 미국의 세계화 전략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있다. 외환·금융위기와 국제통화기금의 관리가 남한에 국한된 특수현상이 아니라 동아시아, 브라질,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수우익정권이 퇴장하고 친미파가 주도하는 새로운 개혁정권이 등장하는 정치변동도 세기말의 격동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추세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변동추세의 배후에는 언제 어디서나 미국의 세계화 전략이 움직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금 남한사회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개혁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김대중 개혁정권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이다. 김대중 정권은 ‘제2의 건국’을 제창하면서 사회정치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제통화기금 관리망 안에 편입되어 ‘경제적 생사여탈권’을 국제금융자본에게 빼앗긴 채 경제 개방이 심화·전면화되면서 2백만 실업자가 거리에 내몰리고, 민중 전체의 생존권은 날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중은 지난해 12월 ‘민중대회’를 통하여 10대 개혁 요구를 제시하였다. 민중의 개혁 요구는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 맞서는 민중 자신의 역사발전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민중의 전략은 ‘민족자주, 민생보장’이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되는데, 이것은 1백년 전 농민군의 전략이었던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받고 있다.

김홍집 정권의 갑오개혁이 일제의 근대화 전략에서 벗어나 농민군의 역사발전전략에 결합되지 못했고, 바로 그러한 까닭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험을 되새겨보면서 우리는 오눙穩兀陸? 정권의 개혁이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서 벗어나 민족자주와 민생보장이라는 민중의 역사발전 전략에 결합되어야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얻게 된다.

이것은 1백년의 민족사가 이 시대의 개혁세력에게 주는 절실한 요구이자 준엄한 가르침이다.

미국의 북한 개방·개혁 요구와 제네바 합의

미국의 세계화 전략은 북한을 겨냥하면서 개방과 개혁의 요구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전면거부로 맞서고 있다. 1993년과 1994년의 ‘한반도 핵위기’는 북한의 핵시설을 개방하라고 요구한 미국과 이를 거부한 북한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일어났다. 당시 북한과 미국의 대결은 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절대위기를 몰아오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미국의 개방 요구를 거부한 북한을 공격하려는 최종 결정을 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는 만일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터지면 칠천만 겨레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참화와 재앙을 입게 되리라고 예감하면서 북한과 미국의 대결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이 민족의 생사여탈권이 민족의 의지와 무관하게 또는 그 의지에 반하여 백악관에 모여 앉은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관리들 손에 있었다는 참담한 현실은 이 민족의 가슴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겨놓았다.

그런데 여기서 물음이 하나 생긴다. 북한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전쟁을 벌이려고까지 하였던 미국, 북한을 ‘깡패국가’라고 욕하면서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는 미국이 어째서 1994년 10월에 북한과 협상자리에 마주앉아 제네바 합의를 채택하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미국이 만일 북한과 전쟁을 벌인다면 미국도 너무나 많은 피해와 손실을 입게 되리라고 타산하여 전쟁계획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미국이 북한의 전쟁수행력을 이라크 정도라고 판단했다면 한반도는 1994년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한 정권이 적어도 5년 안에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북한 붕괴설’이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싱턴 전략가들 가운데 일부는 북한 정권이 2-3년 안에 곧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제네바 합의에 들어있는 미국의 두 가지 약속, 곧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하겠다는 약속이나 북한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은 붕괴의 벼랑에 몰려있는 북한을 개방과 개혁의 연착륙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워싱턴의 자신감을 반영한 방책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동결시키기만 하면 북한 연착륙 정책이 성공하리라고 내다보고 제네바 합의문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정작 무너진 것은 북한이 아니라 ‘북한 붕괴설’이라는 당혹스런 현실 앞에 마주서게 되었다. 미국이 북한 정세에 대해서 오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게 되었다. 1994년 이후 제네바 합의에 기초한 미국의 대북정책, 곧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정책과 연착륙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비관적인 자체 평가가 워싱턴 정가에 나돌기 시작했다. 이로써 미국의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금창리와 광명성 1호, 그리고 미국의 대북 전쟁계획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한때 세계의 눈길을 끌었던 북한의 한 이름 없는 지방 ‘금창리’에 얽힌 사연이다. 미국이 금창리 문제를 처음으로 들고 나온 때는 1998년 8월 초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북한의 지하시설 공사문제를 들먹였고, 이어서 「뉴욕 타임스」 8월 17일자 보도는 북한의 지하시설 공사문제가 제네바 합의의 파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금창리 문제로 워싱턴 정가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하던 8월 31일 북한은 ‘광명성 1호’라는 이름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소식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자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는 급변하였다. 북한이 미국의 눈을 속이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비밀스럽게 개발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한이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정책을 뒤엎고 결국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고 판단하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들 강경파는 미국이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을 사찰하여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개발 의지를 꺾어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만일 북한이 금창리 사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미국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선택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통해서 북한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워싱턴의 강경파가 금창리 굴착공사 문제와 인공위성 발사 문제를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북한의 인공위성이 함경북도 무수단의 발사장에 옮겨져 발사준비작업에 들어갔던 바로 그 시점에서 미 국방정보국(DIA)은 금창리 문제를 언론에 흘리면서 북한이 미국을 속이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금창리 굴착공사는 1989년에 착공되어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것인데, 그동안 첩보위성을 통해 그 공사현장을 감시해오고 있던 미국이 왜 하필이면 1998년 8월에 이 공사현장을 핵개발 의혹과 결부시키려 했을까? 그 까닭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준비작업을 초기에 포착한 국방정보국은 인공위성 발사를 구실로 북한을 압박할 수는 없었음으로, 금창리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이를 핵개발 의혹에 결부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국방정보국과 중앙정보국, 군부와 연방의회에 포진하고 있는 강경파는 금창리 굴착공사를 핵개발 의혹과 결부시키면서 제네바 합의 무용론과 대북 전쟁불사론을 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개발 의지를 꺾지 못했고, 북한을 개방과 개혁으로 이끌어내지도 못했으며, ‘북한 붕괴설’도 오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비판의 화살을 퍼부었다. 클린턴 행정부가 이행되지 못할 제네바 합의나 붙들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북한은 4년이라는 시간을 벌면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까지 개발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실책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공격을 퍼부었다.

1998년 11월에 들어서자 워싱턴의 강경파는 북한을 침공하는 이른바 ‘새로운 전쟁계획(new warplan)’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북한을 자극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를 조성하려 하였다. ‘작전계획 5027-98’로 알려진 이 전쟁계획은 알래스카와 괌의 전략공군기지에서 출격한 장거리 핵폭격기들이 주한미군기지와 주일미군기지, 그리고 동해에 들어선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최첨단 항공기들과 합세하여 선제공격으로 북한을 맹타하고 오키나와에서 출병한 해병대를 남포와 원산을 자르는 동서 최단선에 투입하여 평양을 점령한다는 네 단계 군사작전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강경파의 발언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북한은 선제타격권은 미국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 본토를 미사일로 공격하겠다는 항전의지를 담은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반도 전쟁위기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패한 미국의 대북정책

제네바 합의에 기초한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하였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워싱턴 정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말싸움을 벌이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살벌한 대결국면이 조성되자, 미국의 대외정책 수립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대외관계협의회(CFR)의 한반도 위기관리단은 클린턴에게 건의서를 보내어 워싱턴 정가의 공방을 그만두고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중단한다는 보증을 1999년 5월 31일까지 받아오라는 내용의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 중재안이 받아들여져 일단 위기국면이 수습되었고, 제네바 합의를 유지할 수 있는 대북 중유제공 예산 일부가 지출되었지만, 지금 클린턴 행정부는 오는 5월 31일까지 시한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난제를 받아안고 있다. 만일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이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중단한다는 보증을 5월 31일까지 받아오지 못하는 경우 연방의회는 대북 중유예산을 지출하지 않게 되고, 결국 제네바 합의 이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합의 자체가 깨져버릴 운명에 놓여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워싱턴의 강경파가 요구하는 대로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중단한다는 보증을 결코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5월 31일 이후 제네바 합의는 파탄상태에 이를 수도 있으며 합의 파탄 이후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미증유의 대결국면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남아있다. 당황한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한반도 핵위기 당시 전쟁불사론을 외쳤던 강경파의 대부인 국방장관 출신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조정관에 서둘러 임명하여 제네바 합의에 기초한 기존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도록 조치하였다.

최근에 나온 「월 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의하면 윌리엄 페리가 3월 연방의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기존의 대북정책을 재검토한 뒤에 내린 결론은 클린턴 행정부가 집권 기간 동안 외교치적으로 자랑해왔던 제네바 합의에 기초한 대북정책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한때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예상했던 북한의 붕괴란 근거 없는 착오였고, 북한을 개방과 개혁으로 유도하겠다는 연착륙 구상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으며,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저지하겠다는 비확산정책도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로 파탄의 위기를 맞았다. 북한은 미국 정보기관의 예상을 뒤엎고 알래스카와 괌에 배치된 전략공군기지와 하와이의 태평양사령부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미국의 대도시를 겨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이 지구 위에 있는 180여개 나라들 가운데서 미국에 대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영순위 적대국’은 다름 아닌 북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깡패국가’라고 깔보면서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이 자국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는 현실 앞에서 워싱턴 전략가들은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 전략은 북한의 도전을 받고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세계화 전략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 전쟁을 벌이겠다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아직도 워싱턴 정가에서 울려나오고 있지만 1993-1994년 한반도 핵위기 국면에서 이미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에게 얼마나 심각한 타격을 가할 것인가가 판명되었으므로 섣불리 강경파의 전쟁불사론이 워싱턴 정가에서 설득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의 대안, 남한 민중의 대안

대북정책의 실패와 클린턴의 성추문 탄핵심의로 궁지에 몰려있는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오는 3월에 내놓을 새로운 대북 정책보고서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금창리 문제와 관련한 대북 협상을 마무리하고 현장방문단을 파견해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에 가본다고 한들, 어두컴컴한 지하공간에 굴착기계들 밖에 다른 것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강경파가 핵개발 의혹과 결부시키면서 제기한 금창리 문제를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북한과 억지 춘향식의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금창리 문제 협상을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하고 있으므로 북한에게 식량을 지원하고 경제제재 조치의 일부를 해제하는 실리를 안겨주면서 금창리 굴착공사 현장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번 사태를 매듭지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 언론에 의하면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제시하는 대안은 앞으로 광범위한 포괄적 협상을 진행하되 이 협상마저 실패할 경우 북한을 무시하는 전략일 것이라고 한다. 워싱턴의 온건파가 북한에 대해서 정치·경제적 관계개선을 제안하고 추진하려는 목적은 결국 북한을 개방과 개혁으로 유도하는 데 있으며, 북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미국의 관계개선안은 북한의 대응전략에 부딪혀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은 마지막 대안으로 북한을 무시하는 전략을 취할 터인데, 워싱턴의 온건파가 제아무리 북한 무시 전략을 취한다 하더라도 강경파가 한반도에 상존하고 있는 대치상태를 자극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는 셈이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이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게 되면 북한은 물론 남한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가뜩이나 경제위기로 시달리고 있는 남한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 외국의 투자가 끊기고 그동안 끌어들였던 외국자본들도 정세불안지역을 피해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면 거의 회복할 수 없는 경제파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최근 김대중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조금씩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치 않은 위기를 미연에 막아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미국의 세계화 전략이 남한과 북한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한민족 전체를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1백년 전 갑오농민군이 이 민족의 역사 앞에 제시하였던 민중의 역사발전 전략과 개혁 요구를 되새기며 민족의 장래운명을 개척하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때다. 21세기의 대안은 민족자주와 민생보장의 실현, 그리고 이 두 과제를 포괄하는 통일국가 건설이 될 것이다. 칠천만 겨레가 세기말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은 자주민주통일의 실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