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동아시아의 정세와 한(조선)반도의 미래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신흥 세력 중국과 수구 세력 미국의 갈등

유일한 초강대국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적 질서는 미·일 안보 동맹과 한·미 안보 동맹으로 안받침되어 왔다. 그런데 아무도 도전할 수 없을 것처럼 견고하게 보였던 이 패권 질서에 대해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한 나라가 있으니 그것은 중국이다. 1979년 덩샤오핑과 지미 카터가 손을 잡고 국교를 수립한 뒤로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 궤도에 진입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이 사회주의 계획경제 전략을 포기한 뒤로 미국과 중국의 교역 규모는 더욱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혀주었다. 지난 20년 동안 양국의 교역액은 40배 이상 늘어났으며, 여기에서 흑자를 보고 있는 쪽은 중국이다. 드넓은 영토, 엄청난 인구, 풍부한 자원을 가진 중국이 고도 성장을 거듭하게 되자, 미국을 중심으로 짜여진 역내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와 접촉·교류를 급속히 확대하던 한 세기 전에 나돌았던 이른바 '황화론(黃禍論)'을 다시 꺼내어 들먹이는 일부 미국인들은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21세기 어느 시점에 가서는 결국 미국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는 경계 논리를 펴고 있다. 최근 덩샤오핑의 죽음, 홍콩의 중국 귀속, 장쩌민 주석의 러시아 및 미국 방문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장쩌민 체제의 정치·외교적 위상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본주의가 중국에 대해서 경제·문화적으로 침식하고 있는 범위와 수준은 날로 심화·확대되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이른바 '화평연변(和平演變)'이라고 부르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열강들이 중국의 개방정책에 편승하여 중국 내부에 침식하는 속도는 중국의 국력이 강화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개방 정책으로 돌아서자 자본주의 열강들은 중국을 빠른 시간 안에 자본주의화함으로써 거대한 중국 대륙을 상품과 자본의 시장으로 분할·점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열강으로부터 침탈을 받았던 청조 말의 시련을 잊지 않고 있는 중국은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개방 정책은 확대·심화하되 개방에 편승한 외세의 침식을 저지하자는 민족주의 노선을 강조하고 있다.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에서 중국공산당이 '인민의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유혈적으로 진압한 것은 중국공산당이 천안문 사태를 외세의 사주를 받은 반체제 세력이 급진적인 자본주의화를 촉구하며 혼란을 일으켜 당의 통치 체제를 위협한 사태로 인식하였으며, 그러한 사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장쩌민 체제는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를 여전히 중국의 체제와 이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중국적 사회주의는 풍화 작용을 받아 그 성격이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자본주의적 성격이 지배적으로 되고 있다. 지금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중국은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중국공산당의 통치력마저 이완되면서 거의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로 바뀌게 되리라고 내다보는 것도 무리한 예측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아무리 촉진된다고 하더라도 21세기의 중국이 미국의 관리권 안으로 맥없이 편입·종속 당한 삼류 자본주의 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화되어 가는 중국은 중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 패권국으로 나서려고 할 것이 분명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21세기의 중국은 동아시아에 구축된 미국의 패권적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도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지금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겉으로는 이른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말로 가리워져 있지만, 이러한 발언들은 한낱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속으로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에서 신흥 세력과 수구 세력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갈등 양상을 띄고 있다. 앞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하면 할수록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미국은 자국의 패권적 질서를 계속 유지·강화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팽창에 대한 차단막을 형성하고 견제력을 강화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도차이나반도, 타이완, 한(조선)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이 세 지역을 잇는 차단막을 견고하게 설치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일본과 기존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이 지역에서 미·일 동맹 체제의 정치·군사적 역할과 범위를 한층 고도화·확대할 수 밖에 없다. 최근 미·일 방위 협력 지침을 채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미·일 방위 협력 지침에 대해서 중국이 매우 민감하게 반발한 것은 그것이 바로 자국을 겨냥하게 될 차단 전략의 중심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미국이 교전 당사국인 베트남과 서둘러 국교를 수립한 것은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사전에 차단하는데 일단 외교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거의 같은 시간대에 줄이어 일어났던 타이완 해협의 위기와 4자 회담의 제안은 미국이 인도차이나반도→타이완→한(조선)반도를 잇는 중국 차단막을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 구도를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망을 펼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 가운데는 중국이 이란에 미사일을 판매하여 이란의 군비를 현대화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페르시아만을 봉쇄할 수 있을 만큼 증강되고 있는 이란의 무력 강화 의지를 저지해야 하는 다급한 이유도 있다. 만일 이란이 페르시아만을 봉쇄하면서 역내 미국 함대를 미사일로 공격하게 되면 원유 공급선이 파괴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에 '원유 대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 차단 전략을 추진하자 중국도 이에 맞서기 위해 중·러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려고 서두르고 있다. 지난 4월 장쩌민 주석의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발표한 '국제 사회의 다극화와 새 국제질서 구축에 관한 공동 선언'은 미국의 패권 질서에 대한 중국의 도전장이었다. 옐친 대통령도 오는 11월초에 중국을 방문하여 중·러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게 될 것이다.

날로 갈등 양상을 띄어가고 있는 미·중 관계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양상으로, 타이완 해협에서는 쌍방 사이의 충돌 양상으로, 한(조선)반도에서는 협상을 위한 제한적 공조 양상으로 각각 나타난 바있다. 타이완 문제에 있어서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와 '타이완 관계법'은 필요한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하나의 중국'을 이루겠다는 중국의 타이완 통합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으며, 한(조선)반도 문제에 관련해서 미국은 북(조선)과의 관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2) 한(조선)반도에서 펼쳐지는 4자 관계의 변주곡

미국이 한(조선)반도문제에 중국을 끌어들인 4자 회담을 제안하게 된 까닭은 물론 북(조선)의 3자 회담 제안을 회피하기 위한 역제안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만, 북(조선)과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북(조선)을 끌어당기려면 미국의 단독적인 힘을 동원하는 것 보다는 미·중 공조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타산한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속셈은 효력을 낼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끌어들인 4자 회담이라는 대안 밖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을 테지만, 4자 회담 구도에 들어간 중국은 북(조선)의 반감을 사면서까지 미국과 공조 관계를 유지할만큼 외교적으로 허술하지 않으며, 만일 4자 회담과 관련하여 미국과 북(조선)이 의견 대립을 보일 경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중립을 지키거나 타협안을 제시하는 선에 머물게 될 것이다. 따라서 4자 회담은 실제로 미국과 북(조선) 사이에서 벌어지는 한판 외교대 결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한국)은 4자 회담 구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자신의 발언권을 지탱시켜온 유일한 발판인 한(조선)반도 문제의 남북 당사자 해결 원칙마저 스스로 무너뜨리는 외교적 손실을 입었으며, 결국 미국의 중국 차단 전략에 말려들어가 자신의 안보 이익을 잃어버리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 남(한국)은 북(조선)에 대해서 4자 회담에 나오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고, 북(조선)은 이에 대해서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다. 남(한국)이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은 대북 정책의 기조로 삼은 이른바 '북(조선) 붕괴설'이라는 가상 논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량난으로 견디기 힘든 붕괴 위기에 몰려있는 북(조선)은 남(한국)로부터 식량을 지원 받기 위해서라도 결국 4자 회담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보았던 남(한국)의 상황 인식은 지난 시기 얼마 동안 상당한 전파력을 가지고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너무 안이한 상황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북(조선)은 남(한국)의 식량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중국과 국제 사회의 식량 지원을 얻어내는데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었을 뿐아니라, 북(조선)사회 내부에 체질화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백두의 붉은 기 정신'을 앞세우고 '고난의 행군'으로 나아가면서 식량난의 고비를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북(조선) 붕괴설'을 가장 먼저 논의한 쪽은 남(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걸프전의 승리에 자만·도취했던 미국은 북(조선)에 대해 핵문제를 제기하면서 전면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예기치 않게 김일성 주석의 급서와 수해 피해의 연속이라는 미증유의 시련이 몰아치자 미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은 이제 북(조선)도 별 수 없이 미국 앞에 무릎을 꿇던가 아니면 무너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미국이 북(조선)의 경수로 건설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면서 제네바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북(조선)에 경수로가 세워질 때쯤이면 북(조선) 체제가 무너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며, 바로 그 예상을 담보로 남(한국)에게 경수로 건설 자금의 대부분을 떠맡으라고 요구했다. 남(한국)도 '북(조선) 붕괴설'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이 성급한 예상과 행동은 미국과 남(한국)의 외교적 실책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미국은 경제 제재 조치 해제와 경수로 건설 계획 성사라는 두 지렛대를 번갈아 들어올리면서 북(조선)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경수로 건설 자금의 대부분을 떠맡아야 할 남(한국)은 지금 구조적인 경제 위기에 빠져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대선 이후 새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경수로 건설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내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남(한국)의 경제난으로 경수로 건설 계획이 어긋나게 되면 미국은 제네바 합의 사항 가운데 절반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약속 위반자의 신세가 되고, 그렇게 되면 북(조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네바 합의 사항의 나머지 절반을 이행하라는 요구를 들이댈 것이다. 여기서 나머지 절반이란 조·미 국교 수립을 뜻한다. 지난 8월 4일 김정일 총비서가 발표한 논문에 나오는 "미국은 조선 문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서 마땅히 자기가 서명한 공약과 의무를 성실히 리행하여야 한다"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1990년대 미국의 대북 외교 경험은 지금까지 미국이 북(조선) 정세를 읽는 과정에서 북(조선) 체제의 견고성을 너무 가볍게 평가했다는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의 북(조선) 붕괴설은 북(조선)에게 불리하게 조성된 객관적 조건에만 주목할 뿐, 그 객관적 조건을 돌파할 수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자체 역량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파악하지 못한 채로 조급하게 성립된 가상 논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북(조선)은 사회주의 노선에서 이탈하여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중국에 대해서 겉으로는 비판하지 않고 있지만, 속으로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북(조선)은 자본주의적 개혁·개방을 선택했던 사회주의 나라들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세력에 대해서 '수정주의', '변절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해 왔으며, 혁명과 건설에서 이른바 '주체의 사회주의 노선'을 옹호·고수하겠다고 되뇌여 왔다. 김정일 총비서가 지난 6월 19일에 발표한 논문에서도 이러한 북(조선)의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편 중국은 조·미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북(조선)에 대해서 겉으로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속으로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한·중 수교 이후 벌이진 북(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불안감을 가시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북(조선)에게 줄곧 식량을 지원하면서 추파를 던져 왔다.

북(조선)은 중국과의 관계가 아무리 벌어진다고 해도 결코 호혜 관계의 전통을 버리고 갈등 관계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조·중 호혜 관계의 견고성은 한(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중국 차단 전략이 성립되기 힘들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차단막에는 결국 한(조선)반도라는 구멍이 생겨나게 된다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관계개선에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면, 짧게는 북(조선)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능력을 저지하여 핵확산 금지 조약 체제의 붕괴를 막아보려는 다급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길게는 북(조선)을 전통적인 조·중 호혜 관계에서 떼어내어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립화시킴으로써 한(조선)반도를 중국 차단 전략의 최종적 완결 지역으로 만들어 보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이 북(조선)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한국)과의 국교 수립에 응하자, 남(한국)은 한 중수교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면서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곤경에 빠진 북(조선)을 완전 포위하여 진공적으로 압박해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먹혀들지 않았다. 중국은 남(한국)의 북(조선) 포위 ·략에 동원될만한 헐렁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중국은 한 중 수교를 계기로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남(한국)과 국교를 터놓음으로써 한(조선)반도 전체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고, 대남 관계에서는 경제적 이익만 얻어가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권 안에 편입되어 독자 외교의 폭이 제한되어 있던 남(한국)의 외교적 지위와 역량은 중국과 같은 대국을 외교 전략에 이용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만일 남(한국)이 미국에 대해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미국과 중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 전략을 가동하여 북(조선)을 포위·압박할 수도 있었을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아니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조·중 호혜 관계를 유지하려는 중국과 조·미관계 개선으로 중국 차단 전략을 추구하려는 미국은 지금 북(조선)을 둘러싸고 물밑에서 외교 경쟁을 벌이고 있다.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물밑 경쟁이 숨막히는 암투를 벌이는 지경으로 격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중 관계의 경쟁화 추세는 남(한국)의 외교적 지위를 떨어뜨리고 그에 반비례하여 북(조선)의 외교적 지위를 높여주는 결과를 낳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은 미국과 중국의 한(조선)반도 외교 경쟁 속으로 파고 들며 중·소 분쟁기에 몸에 익힌 특유의 자주 외교 전략을 가동하여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한편 미국과 관계 개선을 추구하여 한·미 동맹 체제를 약화시키고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고 할 것이다.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킴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질서를 뒤흔들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북(조선)과 중국의 이해 관계는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조·중 이해 관계의 일치는 앞으로 남(한국)의 안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은 미국이 중국 차단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대북 관계 개선이 자신에게 안보 위기를 몰고 오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 관계 개선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최근 미국의 대북 관계 개선 문제를 둘러싸고 들려왔던 한·미 관계의 마찰음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중심부는 한·미 안보 동맹이 아니라 미·일 안보 동맹과 중국 차단 전략의 이중 접합 공간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실 한·미 안보 동맹은 미·일 안보 동맹의 하위 체계로 기능해왔으며, 한·미 안보 동맹의 주목적은 북(조선)에 대한 대결 구도를 유지하는 데 있었는데, 만일 미국과 북(조선)의 대결 구도가 일정하게 완화된다면 한·미 안보 동맹의 전략적 가치는 그만큼 감소될 것이다. 미국이 미·일 안보 동맹 체제를 위축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고 도리어 그것을 강화할 것이 분명하지만, 앞으로 미국은 대북 관계 개선이 중국 차단 전략에 더없이 긴요하다고 판단하는 단계에 이르면 한·미 동맹 체제를 일정하게 위축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중국 차단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앞으로 중국의 국력이 더욱 중강되어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중 관계가 더 심하게 갈등하면 할수록 미국은 중국 차단 전략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대북 관계 개선을 본격화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바로 이러한 전망은 21세기 남(한국)의 안보에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올해로 끝내겠다고 하는 북(조선)은 지금 4자 회담의 틀을 이용하여 남북 당사자 해결 원칙을 완전히 파기하는 것과 더불어 4자 회담과는 별도로 미국에 대한 직접 협상의 폭을 확장하는 이른바 통미봉남의 대남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북(조선)은 미국의 중국 차단 전략에 협력할 뜻은 전혀 없지만, 미·중 관계의 갈등 국면을 이용하여 한·미 동맹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킴으로써 한(조선)반도의 통일 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고 할 것이다. 지난 8월 4일에 발표된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 관련 논문에서도 나타나있는 것은 북(조선)이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른바 '연방제 방식의 민족 통일 국가 창립'을 여전히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조선)이 '연방제식 통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내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미·중 관계의 변동이 한(조선)반도의 21세기 안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활용하여 자신들이 통일 정세를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조선)의 예상은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까? 이에 대응하여 남(한국)은 어떠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 남(한국)로서는 미국의 중국 차단 전략을 반대·저지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에 대해 외교적 대응력이 없는 약소국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미·중 갈등과 조·미 관계 개선이 진행 속도를 높히면 북(조선)은 통미봉남 전략에 중국까지 끌어들이면서 남(한국)을 압박해올 것이다. 남(한국)의 새로운 정권은 21세기에 밀어닥칠 이러한 도전적 상황을 뚫고나가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넘겨 받았다. (1997년 10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