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관계 개선의 기류를 전망한다



(1) 빨라지는 조·미 관계 개선의 발걸음

『요미우리신문』 1996년 1월 6일자는 서울의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에서 코리아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KEDO)와 북(조선) 사이에서 경수로 공급 협정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1995년 11월 중순 북(조선) 외교부의 고위 관리가 미국에서 미 국무부 고위 관리를 만나 극비 협상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북(조선)은 이 극비 협상에서 경제 제재 조치를 완화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미국은 완화 조건으로 우성호 선원 송환, 미군 유해 수색 및 반환, 테러 포기 선언 등을 제시했다. 이 신문은 우성호 선원 송환, 애틀란타 올림픽 참가 표명 등은 이같은 합의에 따른 조·미 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핵외교'가 경수로 협정 타결로 완전히 마무리된 이후, 조·미 관계 개선의 발걸음이 생각보다 빨라지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보도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조·미 연락사무소 설치와 관련한 3차례 협상이 모두 타결되어 기술적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었으므로 1996년 3월까지 평양에 연락사무소 설치하겠다는 방침이 1995년 12월 22일 미 국무부의 외교 문서를 통해 남(한국) 정부에 전달되었고, 그 외교 문서에서 미국은 남(한국) 당국에게 양해를 요청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다. 이 보도는 남(한국) 당국의 고위 외교 소식통이 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는데, 이 보도가 나가자 미 국무부는 즉시 사실이 아니라고 전면 부인하는 바람에 '설'로 끝났지만, 남(한국) 당국의 고위 외교 소식통이 언론에 흘려준 이 정보가 전혀 사실 무근의 낭설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을 정도로 구체적인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① 미 국무부가 남(한국) 정부에게 '외교 문서'를 보냈다고 하여 공식성을 부각시킨 점.

② 최근 조·미 사이의 3차례 협상에서 영사 보호권, 사무실 임대, 사무소 직원의 행동 반경, 통신 및 보안 문제 등이 상호주의 원칙을 따라 최종적으로 완전 타결되었다고 한 점.

③ 완전 타결과 관련하여 미국이 요구한 외교 행낭의 판문점 통과 문제에 대한 협상 결과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 점.

④ 늦어도 1996년 3월까지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겠다고 시한을 명시한 점.

⑤ 미국이 평양에 있는 옛 동독 대사관 건물 일부를 임대하게 되었다는 점.

⑥ 연락사무소 설치를 위해 빠르면 1996년 1월께부터 통신 및 보안 시설 설치를 위한 기자재 반입을 시작할 계획이며 연락사무소 근무 요원 선발도 마쳤다고 한 점.

⑦ 일본도 조·미 연락사무소가 개설될 경우, 수교 협상과는 별도로 평양에 외교 공관에 준하는 '무역사무소'를 개설하겠다고 남(한국) 정부에 알려왔다고 한 점.

사실 북(조선)과 미국이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을 위한 실무 협의를 시작한 것은 위의 정보가 언론에 등장하기 전 석달 전인 1995년 9월 23일이었다. 미 국무부 코리아 담당관 제프 골드스타인을 단장으로 한 13명의 전문가들이 평양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실무 점검을 하였다. 언론은 "기술적 문제는 거의 해결된 상태"라고 하면서, "이번 실무 협의단은 통신이나 건물 내부 배치·개조·수리 등 미국 연락사무소 직원들 입주와 관련해 사전 해결이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점검"하였다고 보도한 바있다. 조·미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내정된 스펜서 리처드슨은 1995년부터 한 해동안 서울에서 대기상태로 머물러 있었으며, 1996년 3월 29일 방북하여 두 주간 이상 머물렀다고 하는 보도도 이러한 '임박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앤터니 레이크의 서울방문은 연락사무소 설치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레이크의 서울 방문 목적은 북(조선)의 핵문제에 국한되었던 미국의 "미시적이고 단선적인" 북(조선) 정책을 포괄적인 안보 차원에서 다시 조정하려는 데 있다고 보면서, "미국 정부의 외교·안보 관리들은 북한에 대한 시각과 문제 인식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게 됐다"고 밝혔다고 한다.

또한 북(조선) 외교부 이형철 미주국장이 1996년 2월 5일 워싱턴을 방문하는 일정도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는데, 그는 국제경제연구소(IIE)가 주최한 남북 관계 세미나에 참석하여, 미 국무부 관계자들을 만나 두 나라의 현안에 관련하여 포괄적인 논의를 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 대신 미 국무부의 정보조사국 부과장 로버트 칼린과 스탠포드대 교수 존 루이스 등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 관계자 및 북(조선) 문제 전문가 일행 5-6명이 북(조선) 외교부 산하 평화군축연구소의 초청으로 1996년 2월 27일부터 3월 5일까지 북(조선)을 방문하여 외교부 관리들과 군사·안보 세미나를 가졌다. 두 나라 외교 담당 관리들의 빈번한 접촉은 무언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신호' 앞에서 곤혹스러운 구도 속에 빠져들어가는 쪽은 언제나 남(한국) 당국이다. 남(한국) 당국이 남북 대화와 조·미 연락사무소 개설을 연계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는 데 반해 미국은 이러한 '희망'을 무시하고 개설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12월 12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 고위 전략 대화에서 남(한국) 대표가 미국에게 남(한국) 내부정치 일정 등을 들어 조·미 관계 개선 조치를 1996년 중반기 뒤로 늦춰주도록 간청한 것은 남(한국) 당국의 처지에서 보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최근 남(한국)의 한 언론은 워싱턴의 한 고위 외교 소식통이 한 말을 인용한 기사에서 미 국무부가 남(한국) 당국의 자제 요청을 받아들여 올 상반기 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려던 계획을 추진하지 않고 남북 관계의 진전과 균형을 잡을 때까지 일단 중지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한 바있다. 올 상반기에 북(조선)은 남북 대화를 다시 재개함으로써 남(한국) 당국의 '제동 장치'를 풀고, 미국에게 조·미 협상에 다시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될 것이다.


(2) 조·미 경제 교류의 활성화

새해들어 주한 미 대사관의 한 관리가 조·미 경제 교류 문제와 관련하여 던진 말이 은근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언론에 나타난 그의 말을 옮겨보면 이렇다.

"지난 연말 북한-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공급 협정 타결을 계기로 추가적인 대북한 경제 제재 조치 해제 분위기가 조성됐다. 워싱턴은 작게는 북한의 동결 자산 해제에서 크게는 북한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는 방안까지 폭넓게 검토 중이다. 그러난 북한에 대한 무역 최혜국 대우 부여 문제는 기존 법안과의 저촉되는 부분이 있어 당장 풀기는 힘들 것 같다."

 

남(한국)의 한 일간지는 미국이 생각하고 있는 대북 경제 제재 해제 조치에 최혜국 대우(MFN)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다소 충격적인 대목"이라고 지적한 뒤, 이 발언은 한(조선)반도 긴장 완화와 관련한 성의있는 가시적 조치가 있을 경우 2단계로 하반기에 가서 북(조선)에 대해 최혜국 대우를 부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미국의 대북 정책 구상폭이 뜻밖에 넓다고 평가했다. 이 기사는 미국의 최혜국 대우 부여가 이미 일정에 오른 기정 사실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계기는 한(조선)반도의 긴장 완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매우 타당한 논리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기사는 긴장 완화 조치란 북(조선)이 휴전선에 전진 배치했다고 하는 병력과 장비를 후방으로 철수하는 문제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빗나간 예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른바 '휴전선 전진 배치설'과 그에 근거한 이른바 '도발 징후설'은 교토 통신의 1995년 12월 12일자 보도가 그 진원지였지만, 미 국무부는 같은 날 이러한 보도 내용을 공식 부인하는 논평을 내보냈고, 그날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었던 제1차 한·미 전략 대화에서도 이 '설'은 부정되었다고 한다. 일본 관방장관 노사카 고켄도 다음날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나섰다. 미 군축국장 존 홀럼은 12월 16일 남(한국)을 떠나면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고 나섰고, 다음날 한·미 연합사도 부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다면 한(조선)반도의 긴장 완화와 관련된 획기적인 조치란 과연 어떤 형태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이 '유해 외교'(미군 유해 송환 문제를 다루는 조·미 외교 협상)로 시작되는 조·미 정치·군사 회담이 아닐까 하고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의 최혜국 대우 부여 문제와 '유해 외교' 및 정치·군사회담 개최 문제를 올해 조·미 관계 개선을 추동하는 한 단위로 묶어서 전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에 앞서 우선 미 행정부가 단독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완화 조치는 북(조선) 동결 자산에 대한 해제 조치, 조·미 금융 거래 허용 조치 등이다. 미국은 이것부터 시작해서 분위기를 잡아갈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조·미 관계 개선, 특히 경제 제재 완화 조치는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이 북(조선)과 경제 관계를 설정하는 데 크게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북(조선)과 경제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은 독일과 일본이 미국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올해 조·미 관계 개선 일정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군부를 포함한 보수 세력이 몰고올 '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미국의 국방부와 일본의 방위청에 포진하고 있는 일부 세력들은 이른바 '북(조선) 멸망 임박설'과 '북(조선) 군부의 이상 행동설'에 매달리면서 조·미 관계 정상화, 조·일 관계 정상화에 제동을 걸어보려고 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조·미 연락사무소 설치 임박설이 보도된 직후, 그리고 하와이 미군 유해 송환 협상 개최 발표가 나오기 직전에 미국 군부가 남(한국) 군부와 함께 미국 본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차원 높은 연합 훈련"을 실시하기로 한 사실을 주한미군의 한 고위 소식통의 입을 통해 남(한국) 언론에 흘려주고, 미국이 육군 1개 연대 규모인 2천7백40여 명의 주한미군 병력을 오는 2003년까지 증강하겠다고 한 발표를 연거푸 내놓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두 나라의 군부 세력이 자국과 북(조선)의 관계 정상화에 제동을 걸어보려는 것은 한(조선)반도의 긴장 완화가 군부 세력의 입지를 좁히는 '긴속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계산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올해 조·미 관계 개선은 한·미·일 군부 세력, 또는 보수 세력의 역풍을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 하는 버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3. 북(조선) 식량 문제에 비친 조·미 관계 개선

북(조선)의 식량 위기설에 대하여 해석이 구구하지만, 1995년 10월 10일부터 두 달 동안 북(조선)에 머물었던 국제 적십자사 구호단장 피에로 칼비파리세티(이탈리아 사람)가 언론에 던진 아래와 같은 말을 곱씹어 보는 것이 '실상'에 접근하는 길이라고 하겠다. 그는 북(조선)의 수해 피해가 사실보다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 인용자 주) 진위 여부를 가릴 위치에 있지 않다. 북한의 피해 발표를 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향후 국제 적십자사의 구호 활동도 이 숫자를 토대로 계획되고 집행될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 부족이다. 과거 아프리카 등지에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했을 땐 영양 실조가 이미 광범위하게 만연하자 비로소 국제 적십자사가 구호를 시작했지만 북한은 아직 그런 상황이 아니다. 아동들의 체중을 달아본 결과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에는 미달하지만 영양 실조는 아니다. (기자의 물음 - 일부 단체에서는 노약자, 임산부, 아동들에게서 이미 영양 실조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보고를 한 적이 없다. 시간적으로도 영양 실조 상태를 조사할 겨를이 없었다. 의학박사인 내가 만난 사람 중 그런 사람은 없었다."

조·미 관계 개선을 알리는 신호등이 켜지고 있던 시기와 때를 맞추어 남(한국)에서는 북(조선)의 식량 위기설이 걷잡을 수 없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북(조선)의 식량 위기설에는 조·미 관계 개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보려는 보수 세력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는 볼 수 없을까?

남(한국) 일간지를 뒤덮고 있는 북(조선)의 식량 위기설과는 달리 미국과 유엔은 이 '위기'에 대해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실제로 식량 위기는 없으며, 식량 위기설이 혹시 식량 위기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세력들의 여론 조작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한다. 북(조선) 식량 문제에 대해서 가장 앞장 서서 떠들던 유엔세계식량계획(WFP)도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작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이르러서는 뒷전에 물러서고 말았다. 남(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입을 모아 북(조선)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다 못해 '아사' 보다는 차라리 '전사'를 택하겠다는 생각에서 군사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고 목소리를 높히고 있는데도, 미국은 여유있는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 니콜러스 번스는 1996년 1월 4일 워싱턴의 프레스 센터에서 가진 설명회에서 "유엔과 다른 국제 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올해 북한에 엄청난 궁핍과 기근이 예상된다. 미국은 북한이 식량 원조를 요청할 경우 이를 심각하게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다. 미 국무부는 북(조선)의 궁핍과 기근에 대한 언급이 자체 정보가 아니라 유엔과 다른 국제 기구의 정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식량 위기설을 스스로는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으며, 북(조선)이 식량 원조를 요청하면 생각해보겠다는 정도로 넘기고 있는데, 이것은 남(한국)에 팽배한 식량 위기설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은 지금 미국은 식량 지원 문제를 조·미 관계 개선을 위한 '카드'로 쓰지 않으려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에게는 식량지원말고 다른 '카드'가 준비되어 이미 판에 올라있다는 말도 된다. 그 다른 '카드'는 '쌀'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아래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그 '카드'는 '실종 미군의 유해'가 아닐까 한다.

어쨋든 이 점에서 북(조선)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식량 지원이라는 '카드'밖에 쥐고 있지 못한 일본은 미국과는 처지가 좀 다른 것 같다. 일본의 외무성의 한 간부가 "국교 교섭의 재개는 빠를 수록 좋다는 입장이나 마땅한 계기가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고 하면서, 일본은 북(조선)에 대한 쌀지원이 조·일 국교 정상화 교섭을 재개하는 윤활유가 된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한 남(한국) 언론의 보도는 이러한 사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이 북(조선)과 관계 개선을 위해서(식량 위기 때문이 아니라) 식량 지원을 하고 있는 마당에 이미 관계 개선에 한 발 먼저 들어간 미국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미국도 일본과 함께 북(조선)에 대한 식량 지원에 나설 수 밖에는 없을 것이며, 오직 남(한국)만 이러저러한 구실을 달아서 식량 지원에 반대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반대는 실제로는 미국과 일본이 북(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에 제동을 걸어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1996년 1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릴 한·미·일 3자 협상은 바로 이러한 의견 불일치를 조절할 필요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미국과 일본은 북(조선)의 식량을 지원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며, 남(한국)은 식량 부족에 관련한 정확한 정보의 확보, 식량 제공 이후 배급 과정의 투명성 확보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지원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조·미 관계 개선과 조·일 관계 개선이 진척되면 될 수록 관계가 나빠질 수 밖에 없는 관계 개선의 반비례 법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남북 관계다. 그렇지만 남(한국) 당국의 대북 식량 지원 반대 조치는 미국과 일본의 철회 압력 앞에서 오래동안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남(한국) 정국을 뒤흔든 전두환-노태우의 반란 및 내란 문제, 부정비리 축재 문제, 광주 학살 책임 문제는 북(조선)에게 대화 상대자 부재론의 명분을 안겨 주었다. 북(조선)은 대화 상대자가 없다고 하면서 남북 당국자 대화의 문에 빗장을 걸었던 것이다.

(4) '유해 외교'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1996년 1월 10일부터 하와이에서 미군 유해 송환 문제 협상이 열렸다. 미 국무부가 이번 미군 유해 송환 협상에 관하여 처음으로 공식 발표를 낸 때는 1996년 1월 2일이었다. 이 날 미 국무부의 글린 데이비스 부대변인이 정례 설명회를 통해 밝힌 것은 미 국방부 부차관보(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제임스 월드(James Wold)를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이 하와이에서 북(조선) 대표단과 송환 협상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북(조선) 대표단의 구성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북(조선)은 이번 하와이 협상에서 정치·군사 회담의 성격을 부각시키려고 했다는 점이다. 외교부 산하 군축평화연구소 김병홍 소장을 단장으로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부대표 박임수 대좌, 동 대표부 연락장교 신근성 중좌와 통역 장교, 외교부 미주국 박석균 부국장, 외교부 자승남 군축과장,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장수진 국장으로 구성되었다. 외교부의 군축평화전문가와 판문점 인민군 대표가 앞에 나섰고, 유해에 관한 기술적 처리 문제를 담당할 사람은 정작 한 사람 밖에 배치하지 않은 점이 그러한 의도를 보이고 있다.

하와이 협상은 미국 대표단과 만나 미군 중앙유해 감식소(Army Central Identification Laboratory)에서 유해 감식 기법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유해 송환 방법과 시기, 비용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고 하지만,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북(조선) 대표단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미 태평양 사령부(CICPAC)도 돌아보았다.

미군 유해 송환 협상은 그 동안 북(조선)이 합동 조사단 구성때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유해 발굴 비용 지급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해왔고, 반대로 북(조선)은 유해의 발굴·수송 과정에 미국 관계자의 참여를 거부해 중단 상태에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은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이미 지난 1995년 11월 3일 미 국무부는 대변인 니컬러스 번스의 정례 설명회를 통해 미군 유해 발굴 작업과 관련해 북(조선)이 3백50만 달러를 요구한 데 대하여 미국은 북(조선)과 이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협상의 길을 막지 않았다.

'유해 외교'라고 부르고 있는 이 조·미 협상은 그 동안 지루하게 진행되어온 '핵외교'가 끝나는 시점에서 새로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유해 외교'는 전쟁 당사국이었던 베트남과 미국이 연락사무소 설치→국교 정상화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넘어야 했던 고빗길이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와 달리 남(한국) 당국이 완강히 반대해온 조·미 군사 접촉을 군사 정전위를 벗어나서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미군 태평양 사령부 영내에서 가졌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미국이 생각하고 있는 '유해 외교'의 정치적 의의를 가늠해보면 다음과 같은 밑그림이 그려진다.

① 1996년 선거전을 앞두고 클린턴 행정부가 미군 유해를 반환해옴으로써 미국 시민의 정서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②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가 마비된 상태에서 미국이 북(조선)과 대화 통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

③ 미국은 앞으로 평양의 연락사무소를 오가게 될 자국의 외교 행낭이 군사분계선을 지나갈 수 있기를 북(조선)에 요구하고 있는데, 이 요구를 반대해온 북(조선)의 군부를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가 된다는 점.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도주의적 명분을 앞세운 '유해 외교'를 조용히, 그러나 강한 의욕을 가지고 추진해온 쪽은 미국이었다. 북(조선)은 1994년에 받은 이 초청에 응답을 미루어오다가 1995년 말에 가서야 방미 결정을 미국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유해 외교'를 구실로 삼아 북(조선)군 관계자들을 하와이에 초청하도록 추진한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당혹감과 불안감에 휘감기는 쪽은 남(한국) 당국이다. 언론에 비친 당혹감과 불안감을 읽어보자.

"실질적인 미·북 단독 군사 접촉임을 뻔히 알면서도 유해에 관한 인도적 차원의 대화라는 미국의 설명을 반박하기가 어렵다. 미국이 우리 의사와는 달리 북한과의 단독 접촉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다. 어떤 대화든 군정위 틀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의 입장이 하와이 접촉 결정에서 사실상 무시된 셈이다."

하와이 조·미 협상이 끝난 직후 미 국방부 부차관보 제임스 월드는 주미 한국대사를 찾아가 하와이 협상에서 유해 송환 문제만 논의되었음을 강조하고 이번 접촉을 조·미 관계 개선으로 여기지 말아 달라는 외교적 발언을 했다. 남(한국)의 언론들이 일제히 "협상 결렬"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부정적 시각에서 협상 결과를 보도했던 것과는 달리, 뉴욕 타임스지는 "적어도 돌파구를 낸 미국"(U.S. at least breaks the ice)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번 협상을 "중대한 외교적 발전"(significant diplomatic development)이라고 평가하면서, 미국측 대표단 일원이었던 미 국방부의 전쟁 포로 및 실종자 담당 부총무(deputy director for prisoners of war and troops missing in action for the Defense Department) 앨런 리오타(Alan Liotta)가 미래의 협상을 위한 "문은 열려 있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이번 조·미 협상에서는 유해 발굴 보상금을 2백만 달러로 합의하였다고 하는데, 미국측 대표 제임스 월드는 "다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협상을 진전시키거나 합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다른 문제란 무엇이며, 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명백한 답변은 협상 내용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찾을 길은 없지만, 뉴욕 타임스지의 보도에서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한 조·미 공동 조사단을 구성하는 시기 문제에 관하여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러한 시기 문제의 의견 대립은 북(조선)과 미국 대표단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북(조선) 대표단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북(조선) 대표단 7명 가운데 외교부 대표들은 조·미 공동 조사단 구성에 긍정적이었으나,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 2명이 반대하였다고 한다. 북(조선)의 군 대표가 반대한 이유는 조·미 공동 조사단 구성문제가 조·미 판문점 군사협상 개최 문제(다른 말로 하면, 유해 외교와 평화 체계 수립 문제)와 서로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유해 외교는 조·미 두 나라가 1993년 8월 판문점에서 '미군 유해에 관한 합의서'를 조인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 유해 외교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셀릭 해리슨을 통하여 지난 1995년 9월 말 외부에 알려진 북(조선)의 협상·공존 전략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유해 외교가 '조·미 상호 안보 대화체' 창설을 향한 첫 걸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셀릭 해리슨의 전언에 담긴 북(조선)의 분명한 전략 구상 때문이다. 즉 북(조선)은 일단 유해 외교를 기점으로 낮은 수준의 조·미 정치·군사 협상을 시작하고 이 협상을 점진적, 단계적으로 심화·발전시켜 '상호 안보 대화체'로 정착시킬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북(조선)은 조·미 평화 협정(조약) 체결로 나아가는 복잡하고 긴 협상 과정에서 거쳐가게 될 '중간적인 조치'로서 이러한 조·미 상호 안보 대화체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유해 외교로 시작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미국도 이 현안에 대하여 일정 부분 동의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하와이 유해 외교가 성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와이에서 조·미 유해 외교가 진행되고 있던 때와 하루 차이로 중국 베이징에서는 세간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회의가 열리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회의는 1996년 1월 8-9일 베이징에서 열린 동북아 안보 협력 대화(NEACD) 제4차 회의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한국)의 정부 및 군 관계자, 민간 학자들이 참석한 이번 회의는 1993년 10월 제1차 회의 이후 논의 성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신뢰 구축 조치를 마련하여 조속한 실천을 각국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 회의 성과를 발전시켜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체인 동북아 다자간 안보 대화(NEASED)를 발족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이미 1995년 여름 북(조선)의 최우진 외교부 부부장이 북(조선)이 아세안 지역 안보 포럼(ARF)에 참여할 희망을 전달했다는 사실과 1996년 1월 18일 하버드 대학 행정대학원 초청 연설에서 미국 외교 정책 3대 기조를 미국의 이해에 중요한 지역의 평화 정착, 새로운 다국적 안보 위협 대처, 시장 개방 촉진이라고 밝히면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수준의 정치 협력을 모색할 것이라고 한 미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의 발언은 동남아와 동북아 두 지역에서 새로운 수준의 다자간 안보 협력체 창설 구상 및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의 외무부 당국자는 동북아 지역의 다자간 안보 협력체는 "가상적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냉전 시대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다르다. 이 점을 강조함으로써 북한까지 이 체제에 끌여들여 동북아판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를 구축한다는 것이 5개국의 장기적 구상이라"고 말했다. 북(조선)으로서도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체에 참가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수 없는 처지라고 생각된다. 다만 여기에 참가하는 문제는 조·미 상호 안보 대화체 창설 문제와 연계될 것은 명백하다.

여기서 우리가 하와이 유해 외교의 지향점과 베이징 다자간 안보 협력체 창설 구상의 지향점을 분리하여 볼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한(조선)반도의 평화 조약 체결 문제를 핵으로 한 미국의 동북아 전략 구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개의 차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996년 1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