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과 워싱턴의 관계 개선: 그 교착과 충돌의 소용돌이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들어가는 말

조·미 핵대결이 끝나고 제네바 합의서가 채택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관개 개선 문제가 거론된지도 벌써 이태 반이 지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조·미 관계는 크게 바뀌지 않은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관계 개선 문제가 말만 무성한채 거의 답보 상태에 묶여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관계 개선 문제를 통하여 북(조선)과 미국이 바라보고 있는 지향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더구나 지향의 차이·대립이 교착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향점은 무엇이며, 서로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교착·충돌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돌이켜보면, 미국의 대북 정책은 1950년대 이후 냉전기 40년동안 봉쇄·대결 정책으로 일관되어왔고, 북(조선)의 대미 정책은 1980년대 이후 10년동안 미국의 봉쇄·대결 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움직여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탈냉전기에 들어와서, 미국의 봉쇄·대결 정책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정·폐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4자 회담과 연착륙이라는 두 개의 '화두'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전략 환경의 질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정책적 개념은 한(조선)반도에 대한 관여·확장 전략(engagement-enlargement strategy)을 적용하려는 미국의 지향과 의도를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북(조선)의 대미 정책은 조·미 평화 공존 체제의 수립을 지향하고 있다. 이 지향은 조·미 평화 협정 체결 및 조·미 관계 정상화, 미국의 핵무기 철거 및 한(조선)반도 비핵지대화,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및 주한미군 철수라는 3개 방면에서 지향점을 조준하고 있다. 북(조선)은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이 군사 전략을 주로 하여 수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북(조선)의 대미 정책도 주로 군사 전략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서 그 성격을 지니게 된다. 3개 방면의 지향점이 주로 군사적 긴장의 해소와 평화 공존 체제의 수립이라는 군사적 측면에 조율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북(조선)의 대미 정책을 파악하는 데서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핵심 문제는 북(조선)은 통일 실현의 문제와 대미 정책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미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여 조·미 관계를 개선해야 한(조선)반도 통일 실현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미국이 한(조선)반도 통일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반통일 외세라는 전제 위에서 나오는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북(조선)이 말하는 한(조선)반도 통일 실현이란 구체적으로 연방제에 의한 자주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뜻한다. 북(조선)은 통일 문제를 순전한 의미에서 민족 내부의 문제로만 규정하고, 반통일 외세인 미국을 배제·축출한 상태에서 오로지 남북 정치 협상을 통해서 통일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던 때도 있었으나, 그러한 생각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수정되었다. 북(조선)은 통일 문제를 민족 내부 문제라는 틀 안에서만 인식해오던 종래의 관점에서 벗어나 민족 문제이면서 동시에 동북아 지역 문제라고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하여, 통일 문제의 비중을 미국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조·미 관계와 한·미 관계의 총량으로 계상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열강들의 첨예한 이해 관계가 교차되어 있는 문제, 곧 유관국들과의 관계 문제라는 점도 아울러 강조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북(조선)은 남북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을 따돌리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다가, 미국이 핵문제를 들고 압박을 가하게 되자 대남 관계를 동결시키고 조·미 관계 개선으로 선회하였다. 지금 한(조선)반도의 전략 환경은 조·미 관계 개선을 우선하고 남북 관계 개선을 뒤로 미룬 상태에서 맴돌고 있다.

(2) 북(조선)의 조·미 평화협정 체결요구와 미국의 4자 회담 제안

북(조선)은 조·미 평화협정 체결과 조·미 관계 정상화를 요구해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은 조·미 관계 개선에 앞서 남북 관계 개선을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대응하였으나, 이 대응책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조문 파동, 한총련 사건, 잠수함 사건, 쌀지원 거부, 황장엽 사건 등 남북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악재들이 겹치면서 남북 관계를 경색 분위기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남북 당사자 해결원칙을 들고나오면서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미국의 의도에 대해서 북(조선)은 다른 탄력성 있는 대안은 없을까 하고 고심한 끝에 단계적 추진 방안과 동시 추진 방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단계적 추진 방안이란 조·미 평화협정을 곧바로 체결하기는 힘들 것이므로, 우선 조·미 잠정협정(modus vivendi)을 체결하고, 조·미 상호 안보협의체(mutual security committee)를 결성하여 평화 체제를 단계적으로 수립하자는 방안을 말한다. 그리고 동시 추진 방안이란 조·미 상호 안보협의체와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동시에 가동하여 조·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균형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남북 군사공동위원회의 설치·운영 문제는 남북 기본합의서에 이어 1992년 9월 17일에 채택한 '남북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 합의서'에서 이미 명시된 바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러한 북(조선)의 대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자 회담 제안은 이 대안을 거부한다는 미국의 의사 표명이었다. 한(조선)반도 평화체제 수립 과정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끌어들인 4자 협상 방식으로 새로운 판을 짜야겠다는 것이 미국의 의도다. 여기서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 속에 깔려있는 의도의 복선이 드러난다. 그것은 평화체제 수립을 주도하겠다는 의지와 북(조선)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 두 의지는 서로 어긋난 상태에 놓여있다. 한(조선)반도 평화 체제 수립 과정을 주도해야 할 실제 당사자는 북(조선)과 미국이라는 북(조선)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으려 하다보니까, 미국은 남북 관계개선을 우선하라고 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조·미 관계개선 보다 남북 관계개선에 더 많은 비중이 실리게 된다. 만일 미국이 북(조선)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도만을 앞세운다면, 한(조선)반도 탈냉전화(평화 공존 체제의 수립)의 주도권을 남북 관계에 넘겨주고 미국의 주도력은 약화될 것이다.

북(조선)은 미국이 비록 자국의 대안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한(조선)반도 평화체제 수립과정을 주도하겠다는 의도는 변하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다. 그리하여 북(조선)은 4자 회담 구상과 조·미 평화회담 구상 사이에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북(조선)은 4자 회담을 개최하되, 조·미 협상을 중심에 배치하고, 남(한국)과 중국까지 참여하는 본래 의미의 4자 회담은 보조 기능으로 결합시키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1세기 동북아 지역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역내 안보 지형을 조여왔던 냉전 체제를 새로운 탈냉전 체제(평화 공존 체제)로 바꾸어놓을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한(조선)반도 문제와 대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조선)반도의 평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세력은 미국이고, 대만통합문제를 해결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세력은 중국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이 두 지역 문제를 배타적, 독점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중국이 대만 통합 문제를 자국 주도로 해결한다고 해도 대만에 개입하고 있는 미굳 ?완전히 배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한(조선)반도 평화 문제를 자국 주도로 해결하려고 해도 남북 교차 수교국으로서 한(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국을 따돌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은 대만 문제 해결에서 미국·대만의 기존 관계를 인정하는 문제와 한(조선)반도 문제 해결에서 한(조선)반도·중국의 기존 관계를 인정하는 문제를 적정선에서 상호 인정하려는 타협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대만해협의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점에서 한(조선)반도 평화 회담에 중국을 끌어들인 4자 회담을 제안하게 된 외적 요인이다.

그러나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한(조선)반도의 평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이 주체가 되고 남북이 객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남북이 모두 바라고 있는 바다. 이 문제를 북(조선)의 견지에서 보자면,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에서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문제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패권 경쟁 구도 속으로 말려들어가게 되는 것을 극력 저지하기 위해서, 4자 회담이 개최되더라도 조·미 2자를 회담의 중심축으로 세우려는 의도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는 조선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한 <4자회담>에 대하여 떠들면서 막후에서는 칼을 물고 달려드는 적들의 속심이 어디에 있는가는 불을 보듯 명백합니다"고 한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북(조선)은 미국에 대해서 극도의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북(조선)이 미·중의 경쟁적 타협 구도를 돌파하여 조·미 중심축을 과연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북(조선)이 지금까지 추진해오고 있는 자주 외교 노선을 결정적인 시험대에 올려놓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3) 북(조선)의 핵무기 철거요구와 한(조선)반도 비핵지대화 요구, 그리고 미국의 대량 파괴무기 비확산 정책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에서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철거할 것과 한(조선)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이것은 최대·최고의 핵강국인 미국이 비핵국인 북(조선)에 대해 집요하게 전개해왔던 핵공격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1991년 12월 18일 남(한국) 대통령이 발표한 '남한 내 핵부재 선언'을 통하여 남(한국)에 배치해두었던 미국의 전술 핵무기들이 철거되었음을 확인했고, 미국은 북(조선)에 대해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음을 보장한다는 문구를 제네바 합의서에 넣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미사일에 장착하여 북(조선)을 겨냥했던 핵탄두, 그리고 전방지역에 매설한 핵지뢰, 침투 폭파용 핵배낭 같은 전술 핵무기들은 철수했다고 해도, 미 태평양사령부가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전략 핵무기들은 여전히 북(조선) 전역을 겨냥하고 있으며, 한(조선)반도 주변 해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잠수함에 장착된 전술 핵무기들과 주일미군 기지에서 발진하는 전폭기에 장착된 전술 핵무기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한다면 주한미군의 지상배치 전술 핵무기 철수가 지니고 있는 군사적 의미는 축소·탈색되는 셈이다. 한 마디로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 위협은 남(한국)을 '핵우산'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명분 아래서 변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이 주장하고 있는 한(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란 이러한 핵공격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있는데, 미국은 전술 핵무기의 철수라는 책략으로 비핵지대화 요구를 빗겨간 셈이 되었다.

미국은 대량 파괴무기 비확산 정책을 내세우면서, 북(조선)의 핵개발 잠재력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강력한 압박을 가하였다. 조·미 핵위기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전개된 공방전이었다. 결국 북(조선)이 경수로 건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공방전은 마감되었다. 미국은 200메가와트급 경수로 건설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을 마련하는 문제를 국제 컨소시움을 결성함으로써 경비 부담을 주로 남(한국)에 떠넘기고 자국은 '바람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미 핵대결이 경수로 건설 합의로 일단락된 뒤에도 미국은 다시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 능력에 족쇄를 채워보려고 조·미 미사일 회담을 개최하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미국이 자국의 안보 이익에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라고 판단하는 대량 파괴 무기의 범주에는 핵무기 뿐아니라, 핵탄두 운반 수단인 미사일도 포함되며, 생화학무기도 포함된다. 따라서 조·미 미사일 회담이 일정한 타협선에서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다시 북(조선)의 화학무기 보유 문제를 겨냥한 정치 공세를 펴게 될 것이다.

(4) 북(조선)의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요구와 주한미군철수 요구, 그리고 미국의 지역분쟁 억지 정책

북(조선)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자국을 위협하는 '북침 연습'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들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되면, 즉각 전군이 대응 태세에 들어가게 될 뿐아니라, 전국의 노동자들과 농민들도 공장과 협동농장에서 노농적위대로 편제되고, 전국의 대학생들도 붉은청년근위대로 편제되어 전투 동원 태세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 기간동안에 전국의 공장, 협동농장, 대학들은 정상 기능이 정지되는데, 이로써 국가 경제에 발생하는 타격과 손실은 치명적인 수준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적 위협과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북(조선)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라고 요구했으며, 한·미 연합군을 주도하고 있는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미국은 이러한 북(조선)의 요구에 대해서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는 대신, 다른 형태의 합동군사훈련과 미군 단독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지역분쟁 억지 정책을 내세우면서 반대하고 있다. 미국은 만일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북(조선)이 남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남북의 군사력 균형에 대해서도 수량적 우위를 앞세우면서 북(조선)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미국은 북(조선)을 지구 위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위험하고 불안정한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대북관에 기초하고 있다면 한(조선)반도에서의 군사 훈련을 중지하는 문제나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된다. 문제는 미국의 조야에 널리 펴져있는 냉전적 대북관이 탈냉전적인 대북관으로 전환되지 않는 이상, 미국의 대북 정책도 전환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한미군 문제에 관련해서 북(조선)은 전면적, 즉각적 철수를 주장해오던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통일 이전까지는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겠다, 남북의 병력을 감축하는 데 비례하여 주한미군 병력도 단계적으로 감축해야 한다고 하는 선으로 한 발 물러섰다. 이것은 전술적 탄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북(조선)의 전술적 탄력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한미군을 현수준에서 더 이상 감축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주한미군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여 주둔하고 있는 것이므로,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 문제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해당 항목을 변경·제거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북(조선)과 미국 두 나라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5) 조·미 관계의 정상화 문제, 그리고 연방제 통일 정책과 연착륙 정책의 충돌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과 북(조선)의 지향점은 서로 다르다. 미국은 4자 회담 제안 수락, 미군 유해 송환, 테러 의지 포기 등과 같은 민감한 사안들을 관계정상화의 선결 조건으로 부각시키면서 그 선결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조·미 국교 수립을 종국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북(조선)은 관계 정상화를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우선 경제 제재 조치부터 완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경제 제재 조치를 완화하는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은 북(조선)의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다. 카길사가 물물교환 방식으로 북(조선)에 곡물을 수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문제, 미국 안에 있는 북(조선) 자산 동결을 해제하는 문제, 북(조선)의 광물을 미국 회사와 공동으로 개발하는 문제, 미국의 부동산 회사와 북(조선) 회사가 합영 방식으로 평양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문제, 조·미 항공협정을 체결하여 북(조선) 영공을 통과하는 여객기들이 영공 사용료를 지불하지 못하도록 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문제, 북(조선)이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지원하는 문제 등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경제 문제다. 이것은 북(조선)이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풀기 위한 내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다.

소련·동구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국제 시장체제가 파괴되자 북(조선)은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에 시달리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만일 북(조선)으로 외화, 식량, 에너지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국이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북(조선)이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서 북(조선)에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압박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에, 미국은 경제 제재 조치를 완화하지 못한채 엉거주춤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연락 사무소를 개설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경제 봉쇄의 빗장을 풀어제끼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북(조선)은 국가 경제 회생의 객관적 조건을 해결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면서 국가 경제 회생의 주체적 조건을 강화하기 위한 주동적 조치('붉은 기 수호 정신'의 고취, '고난의 행군 정신'의 고취)를 추진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경제 제제 조치를 풀어내는 해제 과정과 함께 연착륙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 체제 변질을 유도하려고 할 것이다. '붉은 기를 지키려는 고난의 행군'과 연착륙 정책은 격돌의 현장으로 다가서고 있다.

북(조선)은 조·미 관계를 개선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연방제에 의한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두고 있다. 북(조선)이 대미 관계를 개선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까닭을 통일 실현의 정책적 의지가 아니라, 단지 경제적 실리만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본다면, 그것은 전략은 보지 못하고 전술만 가지고 평가하는 오류가 될 것이다. 북(조선)은 대미 관계 개선을 통해서 정치력과 경제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으면서, 그 힘을 동원하여 연방제에 의한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북(조선)의 전략을 미국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미국은 북(조선)의 연방제 통일 정책에 대응하는 전략적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세간에 연착륙 정책이라고 알려진 대북 정책은 바로 이러한 대응 조치로 나온 것이다. 미 행정부에서는 연착륙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치밀한 전략이라고 보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대북 관계에서 연착륙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연착륙 정책이란 북(조선)이 자본주의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하도록 유도하려는 일종의 체제 변질 유인 정책이다. 북(조선)도 중국과 베트남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북(조선)이 개혁·개방을 추진하게 되면 연방제 통일 정책은 파탄될 것이며, 그로써 미국이 지배하는 탈냉전기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부드럽게 유도·편입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북(조선)은 이러한 미국의 저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개혁·개방을 지향한 연착륙 정책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번에 황장엽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북(조선)에서는 중국식 개혁·개방 정책이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도 연착륙 정책의 미래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북(조선)은 자국의 개방 정책이 있다면 '인민대중 중심의 주체 사회주의'를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우리식 개방'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미국의 정책 수립가들, 분석가들 가운데는 연착륙 정책의 목적이 붕괴 위기(경착륙 또는 추락)에 다가서고 있는 북(조선)문제에 개입하여 붕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고 강변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붕괴설이라는 가설적 전제 위에 서있는 논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연착륙 정책의 실제 목적은 연방제 통일 정책을 무력화시키려는 데 있다. 이로써 북(조선)의 연방제 통일 정책과 미국의 연착륙 정책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결말이 날 것인가? 이 두 정책이 상호 절충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교착과 충돌의 파장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1996년 7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