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확장 전략과 한(조선)반도 핵외교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1) 한(조선)반도 핵위기에 얽힌 수사적 담론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회담에서는 지난 몇해 동안 밀고 밀리던 북(조선)과 미국의 치열한 '핵공방전'을 마감하는 '제2의 정전 협정'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1953년 7월에 체결된 정전 협정을 무력 충돌이 빚어낸 열전을 끝내고 기나긴 냉전에 돌입했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이번의 '제2의 정전 협정'은 외교 대결로 전세를 판가름한 열전을 마감하고 새로운 관계 설정에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1953년의 정전 협정을 냉전 시기에 대처한 미국의 대외 전략이었던 이른바 봉쇄 전략(containment strategy)의 한(조선)반도적 실현으로 볼 수 있다면, 1994년의 '정전 협정'은 냉전 질서가 무너진 뒤 미국이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대외 전략인 이른바 확장 전략(enlargement strategy)의 한(조선)반도적 실현을 알리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시기의 봉쇄 전략은 조·미 사이에서 비정상적인 준전시 상태를 지탱시켰지만, 오늘 확장 전략은 두 나라 사이의 국교 정상화를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우리는 미국이 한(조선)반도를 무대로 삼아 자국의 '핵외교'를 벌여온, 그리고 앞으로도 일정 기간 동안 벌여갈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외교가 노리고 있는 근본 목적은 봉쇄 전략을 확장 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북(조선) 핵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북(조선)을 자기 영향권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21세기에 가서도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자신의 일국적 지배 질서를 유지·강화하려는 데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북(조선) 대 미국의 '핵공방전'을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반확산 정책(counterproliferation policy)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해 왔다.

'핵공방전'을 시작한 나라는 미국이었으며, 그 '공방전'이 끝났다고 선언한 것도 미국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교전'을 끝내는 마당에서 미국이 얻은 '전과'를 우리는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을 억제한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대북 진출권 확보와 동북아 지배 질서의 유지인가? 물론 이 두 가지 '전과'를 동시에 얻었다고 평가해야겠지만, 후자에 비중을 두면서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외교를 파악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북(조선) 대 미국의 '핵공방전'을 봉쇄 전략에서 확장 전략으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반확산 정책의 수행이라는 관점에서만 흔히 논의하고 있는 까닭은 미국의 대외 전략이 마치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이른바 '과거·현재·미래의 핵투명성'을 완벽하게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수사적 담론(rhetorical discourse)에만 눈과 귀를 귀울이게 되면서 일어나는 정세 인식의 '부분 일식 현상'이다.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반확산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부치면서 세상에 내놓은 '수사적 담론'를 정리하면 이렇다.

① 북(조선)의 '핵모호성(nuclear ambiguity)'과 미국의 대북 정보 부족을 접합시키는 담론들.

② 이 '핵모호성'은 북(조선)이 핵무장을 하려는 숨은 의도와 맞아떨어지면서 동북 아시아 지역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는 설.

③ 만일 북(조선)의 핵모호성이 장차 어느 시점에 가서 핵무장의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핵무장의 도미노 현상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설.

④ 핵무장의 도미노 현상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중심축으로 한 현존 핵통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할 것이므로 미국에게 위협 요인이 된다는 설.

2. 핵모호성론은 사실이었는가?

미국이 펼쳐온 이 수사적 담론 속에는 우리의 정세 인식이 빠져서는 아니될 '함정'이 곳곳에 놓여있다.

첫째로는 북(조선)의 핵모호성과 미국의 대북 정보 부족을 접합시킨 수사적 담론에 관해서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표현만 서로 다르 뿐, 이 수사적 담론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북(조선)이 '핵모호성'을 대미 협상책으로 활용하여 관계 개선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주장한 노스 이스턴대 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견해는 그의 기고문 「북한의 핵논법(North Korea's Nuclear Logic)」에 나타나 있다. 그는 북(조선)이 핵모호성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활동을 적절한 시기에 방해하여 완전한 사찰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있다. 북(조선)은 적대국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핵모호성을 유지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외교 협상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핵모호성을 창출·활용하고 있는 주체를 미국이 아니라 북(조선)이라고 파악함으로써 미국이 자국의 동북아 지배 질서를 유지·확장하려는 대북 압력 수단으로 북(조선)의 핵모호성을 창출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1993년 9월 「대북 경수로 지원은 합리적인 결정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북(조선) 대 미국의 '핵공방전'을 '핵문제'로만 보고 있는 노틸러스 연구소 소장 피터 헤이즈(Peter Hayes)의 견해도 마찬가지 전제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핵모호성론과 다른 견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의 핵문제가 '핵'문제라기 보다는 조·미 사이의 정치 협상 문제라는 점을 솔직하게 밝힌 사람은 지미 카터(Jimmy Carter)였다.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분석 담당실의 동북아 담당관(Northeast Asia Division Chief)인 로버트 칼린(Robert Carlin)은 이 분야의 정보를 다루는 전문 관료답게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서 다른 견해들보다 더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그의 견해가 가장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논조로 이렇게 적었다.

"기술적인 어려움과 정치적 압력이 없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북코리아는 아마도 1990년대 말까지 작은 병기고에 보내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코리아가 과연 이 플루토늄을 가지고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중략) 플루토늄을 가지고 핵무기를 제조하는 작업은 일련의 지속적인 정밀 공정(sustained precision engineering)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밀 공정은 북코리아 산업의 강점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견해가 밝히고 있는 중요한 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 플루토늄 생산 일정과 핵무기 제조 일정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

② 북(조선)의 플루토늄 생산 일정은 1990년대 말이라는 점.

③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도 북(조선)이 자체 생산한 플루토늄을 가지고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북(조선)의 정밀 공정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의문이라는 점.

셀릭 해리슨(Selig Harrison)의 견해도 이른바 핵모호성론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견해가 다른 점은 북(조선)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른바 핵개발 포기론자들(당·정의 고위급 기술 관료들)과 핵개발 고수론자들(군부 지도자들)의 의견 대립이 있으며, 미국의 대북 핵정책은 핵개발 고수론자들의 주장·논리를 약화시키고 핵개발 포기론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어 북(조선)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긍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의 기고문 「서울의 매파를 경계하라(Beware the Hawks in Seoul)」에서 다시 한 번 거듭되었다. 그는 요즈음 남(한국)과 북(조선)의 '매파'들을 모두 공박하고 있다. 그가 북(조선)에 대해 제재 조치를 비롯한 정치·군사적 압력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핵개발 고수론을 강화시킬 뿐이므로 이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점은 이 견해들은 한결같이 미국이 반확산 정책을 한(조선)반도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전제만을 가지고 북(조선) 대 미국의 '핵공방전'을 파악하고 있으며, 봉쇄 전략의 확장 전략으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는 파악하지 못하고(또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의 반확산 정책이 확장 정책의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며, 확장 정책을置置璿歐?위하여 반확산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외교'의 본질은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확장 정책을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어떤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밝혀내야 한다.

3. 미국의 대북 정보 부족설은 사실이었는가?

미국은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과연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지난 냉전 시기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은 소연방과 동독의 기술력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여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소연방과 동독이 무너지면서 그들 나라에게서 북(조선)이 전수·이전해 간 핵관련 기술 수준이 일정 정도 공개되고 말았으며, 이로써 미국은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이 어느 수준에 와있는지를 더욱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1994년 5월 15일자 기사에서 50명이 넘는 북(조선)의 핵전문가들이 옛 소련의 유명한 국제 핵연구 기관인 '두브나 연구소'에서 연구한 바있다고 보도하면서, 러시아 정보 기관은 오늘 평양측이 핵무기 제조 기술과 시설을 가지고 있다는데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의 핵안전 연구센터 소장인 재미동포 정대현 씨가 1992년 4월 서울에 와서 가진 대담 기사는 미국이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통설을 뒤집어엎고 있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핵과학자 1백83명의 명단을 입수, 이들에 대한 학문 배경, 전공 내용 등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국제원자력기구가 1992년 2월 북(조선) 핵사찰 위원으로 위촉한 사람이었다.

돌이켜 보면, 미 국방부와 미 중앙정보국은 대북 '핵공방전'이 시작된 뒤로 여러 차례 '말바꾸기'를 해왔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곧 개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말을 바꾸어서 내놓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주장은 북(조선)이 실험하지 못한 핵폭발물(nuclear device) 두 개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핵물질 보유 여부는 영변의 방사화학 실험실을 사찰하면 드러날 것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다시 말을 바꾸어 북(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에 아직 신고 하지 않은 '의혹의 영변 핵시설' 두 곳을 사찰하면 그대로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조선)(특히 북(조선)의 군부)은 이 두 시설이 미국이 말하는 핵폐기물 처리장이 아니라 군사 시설이므로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다고 맞섰다.

미국의 첩보력이 과연 얼마나 허술하길래 그 두 미신고 시설이 핵관련 시설인지 군사 시설인지조차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이 북(조선)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은 미국의 대북 첩보력의 수준을 살펴보아야 그 진위를 판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5대 정보 기관들인 중앙정보국(CIA), 국가정찰실(NRO), 국가안보국(NSA), 전술정보활동국(TIARA), 국방정보국(DIA)은 전세계 곳곳을 24시간 샅샅이 정밀 추적하고 있다. 오산 미 공군 기지에는 캘리포니아주 빌(Beal)기지에 본부를 둔 제9 전략 정찰단 소속 제2파견대가 상주하면서 지난 1977년 2월부터 첩보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미 정보기관은 북(조선) 전역의 군사 시설과 주요 시설들에 고유 번호를 매긴 '북(조선) 시설 목록(North Korea Installation List)'을 갖고 있는데, 영변 핵시설은 1970년대 초반부터 이 목록에 올라 지난 20년 동안 감시해 왔다. 이를테면 영변의 핵시설 주변에 쌓여 있는 물자, 연통에서 나오는 수증기와 열, 동력선의 수, 용수량, 주변 도로의 물자 이동 등을 종합하면 원자로나 재처리 시설의 용량, 운전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주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위성과 첩보기들이 날마다 5-6차례씩 촬영하기도 한다. 적외선 추적 장비를 갖춘 첩보 위성은 구름이 낀 날에도 영변 상공에서 열추적을 통해 원자로의 가동여부는 물론 원자로가 어느 정도의 효율로 가동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의 정보 기관들은 영변의 5메가와트급 원자로가 1986년 가동을 시작한 뒤로 운전 이력을 완벽하게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U2R기와 RF4C기를 비롯한 첨단 전자 장비를 장착한 첩보기들이 북(조선)지역을 24시간 손바닥 들여다 보듯 감시하면서 미 국방부의 지시를 따라 미리 계획된 1백여 개의 영상 표적과 5백여 개의 신호 감청 기지를 한 시간 단위로 촬영·감청하고 있다. 정밀한 사진 촬영을 할 때는 KH-11, KH-12 첩보 위성이 동원된다. 첩보 위성은 몇 시간 단위로 북(조선) 상공 5백-1천 km에 떠서 돌다가 필요한 경우 1백 km 상공까지 내려가 근접 촬영을 하기도 하는데 땅 위에 있는 탁구공까지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변 핵시설 감시에 대해서는 첩보 위성이 찍은 조감 사진과 U2R기가 동해와 서해 상공에서 찍은 측면 사진을 합성하여 입체 영상까지 만들어 놓을 만큼 치밀하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라 남(한국) 중부 지역에 있는 미국 국가안보국이 직영하고 있는(주한미군 소속이 아니다.) 레이더 기지에는 국가안보국이 파견한 감청 부대가 있는데, 이들은 미8군의 제501 군사정보여단 감청 부대와 함께 최첨단 첩보 장비를 이용하여 북(조선)에서 돌아가는 웬만한 통화 내용과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 보고 있다.

미국은 영변의 '핵페기물 처리장' 두 곳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진작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의혹 표시를 달아놓아야 북(조선)과 협상 탁자에 앉을 때 국제 사회로부터 사찰 압박을 가할 구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의혹 시설'의 존재와 북(조선)의 핵모호성을 끈질기게 연계시켜 온 것이다. 만일 영변의 '의혹 시설'과 핵모호성의 의도적인 연계를 미국이 대북 압력 수단으로 동원한 책략이 아니라고 부인한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망나니 국가(rogue state)'의 의혹 시설에 대한 철저한 핵사찰을 당장 받지 않으면 쳐들어갈 것처럼 동해에 항공모함을 들이밀던 미국이 어째서 제네바 회담에서는 의혹 시설 사찰을 먼 뒷날로 미루면서 "쌍방은 정치·경제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합의(The two sides will move toward full normalization of political and economic relations.)"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이 김정일 비서를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라고 부르며 '보장 서한(letter of assuarance)'까지 써야 했는지에 대해 달리 답변을 찾을 길이 없다. 우리는 역사적인 제네바 기본 합의문을 서명한 자리에서, 북(조선)의 협상대표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이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도 계획도 없다"고 다시 한번 자신 있게 밝힌 것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4. 입증되지 않는 핵무장 도미노 가설

다음으로는, 북(조선)의 '핵모호성'과 핵무장 도미노 가설을 접합시킨 수사적 담론이 있다. 만일 북(조선)이 미국의 통제력을 피해 핵개발에 성공하여 핵무장국으로 등장한다면, 남(한국), 일본을 비롯한 다른 비핵국들이 줄줄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핵무장국으로 변모하고, 그로써 미국의 핵통제 질서인 핵확산금지조약체제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논법이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앤터니 레이크의 확장 전략을 비판한 기고문 「되풀이된 냉전놀음(Cold War Games Again)」에서 국가기획협회(National Planning Association) 연구원 로버트 존슨(Robert H. Johnson)은 "사람들이 냉전 시기 내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끝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도미노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난 냉전시기에 미국이 이른바 도미노 가설을 들고 나왔던 근본 원인은 다른 제3세계 나라들의 내정에 개입하려는 명분에 있었지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핵확산금지조약 체제를 흔들고 있는 '진짜 도전자'는 북(조선)의 원시적인 '핵개발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국가안보문제 전문가 모리스 말린(Maurice A. Marlin)도 핵확산 금지 체제를 유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북(조선) '핵 개발 의혹 문제'보다 더 급박한 문제가 있음을 말한 바있다. 중국의 핵실험 문제, 프랑스와 일본의 플루토늄 재처리 문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옛 소연방 신생국들의 핵무기 보유 문제가 있으며, 핵무기 제조 및 핵개발 능력을 억제하는 문제만 해도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라크가 걸려 있으며, 북(조선)은 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설사 백 걸음 뒤로 물러서서 미 중앙정보국의 주장대로 북(조선)이 원시적인 핵폭발물 두 개를 개발·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물론 미국의 반확산 정책은 더욱 커다란 부담을 안게는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확산 정책의 차단력이 한(조선)반도에 대한 핵우산과 한·미 군사 동맹 및 미·일 군사 동맹의 뒷받침을 받으며 막강하게 버티고 있는 한 남(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핵통제권을 마음대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핵확산 금지 조약에 대한 다른 도전으로는 그 조약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국제적 불평등성 때문에 생기고 있는 비핵국가들의 반발을 들 수 있다. 1994년 9월 20일 제네바에서 열린 '핵확산 금지 조약 이행검토 제5차 회의 준비위원회 제3차 회의'에 참석한 북(조선) 대표는 이 조약의 불평등성을 비판하고 개정을 요구했으며, 다른 비핵국가들은 이 불평등 조약을 5-10년 동안 한시적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 반발을 어떻게 누구러뜨리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1995년의 핵확산 금지 조약 연장 문제에 대한 심의 일정을 앞에 둔 클린턴 행정부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5. 북(조선)과 일본의 상호 접근, 그리고 그에 대한 미국의 제동

미국이 어느 시점에서 북(조선)에 대한 '핵공방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본다면, 미국의 대북 핵외교가 추구해온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를 한층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1988년 12월 7일 미국과 북(조선)은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공식 대화를 시작했고, 다음 달인 1989년 1월 미국은 북(조선)과 관계 개선을 위한 조건으로 미군 유해 송환, 휴전선 일대의 신뢰 구축, 대미 비난 중단, 남북 대화 진전, 테러 행위 포기를 제시했다. 그리고 나서 곧 뉴욕에서 미국은 북(조선)과 미군 유해 송환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 조치 협정을 비준하는 문제를 대북 관계 개선의 새로운 조건으로 처음 내놓은 때는 1989년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5차 조·미 접촉에서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되짚어보자면, 미국이 맨처음 북(조선) 핵문제를 꺼내면서 '핵공방전'을 시작한 시점은 현존 사회주의 진영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 시점과 일치한다. 그 시점은 소연방의 해체와 동구권의 탈사회주의화, 옛 서독의 대북(조선) 경제 협력 시도, 그리고 독일의 흡수 통합 실현이 불러일으킨 국제 사회 변동의 거센 물결이 동북아시아와 한(조선)반도에 거듭 숨가쁘게 몰려오던 때였다. 또한 그 시점은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 정책(Nordpolitik)'과 일본의 대북 접근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남북의 유엔 분리 가입, 한·소 수교, 한·중 수교를 이끌어냈고, 조·일 관계 개선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북(조선)과 일본은 미국의 대북 협상 속도를 앞지르면서 두 나라 사이의 관계 개선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일본 언론은 북(조선)이 일본에게 조·일 관계 개선을 위해 3단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극비 교섭을 제안하고 있음을 보도하였고, 조선로동당 비서인 김용순 국제부장이 일본사회당 '일·조 우호 친선 협회' 대표단 단장 다나미 등과 가진 비공식 회담에서 북(조선)이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대일 외교 자세를 바꾼 것은 주목할만하다고 논평했다.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전 자민당 부총재)이 다나베 마코도 사회당 위원장과 함께 평양에 나타나,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조선로동당·일본자민당·일본사회당 3당 공동 합의문을 발표하더니, 이내 평양에서 조·일 수교 협상 제1차 회담이 열렸다. 일본 언론은 일본이 제4차 수교 협상 회담에서 기본 관계 조약안을 내놓았고, 북(조선)은 1991년 11월 18일에서 20일까지 열린 제5차 회담에서 '조·일 선린 우호 조약'안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북(조선)은 "배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고, "교전 관계를 전제로 한 보상"과 "전후 45년의 손실에 대한 보상"도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식민지 시대의 인적, 물적 피해·불행·고통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물질적 보상"만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로써 조·일 관계 개선의 어려운 조건들은 사라진 셈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발전하자 가장 당황한 쪽은 미국이었다. 미국으로서는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 정세 변화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하는 당혹감을 느낄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처럼 북(조선)과 일본이 급속도로 가까와지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으로서는 동북아 및 한(조선)반도의 정세 변화에 재빨리 대처하여 북(조선)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자국의 외교·경제적 영향력을 한(조선)반도 전역으로 확장해보겠다는 야심에 찬 외교 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일본의 대기업들이 앞장섰다. 가네마루와 다나베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들과 함께 방북길에 오른 사람들은 니시마트, 시미즈, 미쓰이, 미에다 같은 일본 대기업의 중역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짧게는 조·일 관계 개선과 함께 북(조선)이 받게 될 커다란 전시 및 전후 배상금을 노리고 있었고, 길게는 한(조선)반도 전역과 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를 잇는 거대한 동북아 경제권을 선점해 들어가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본 언론은 가네마루가 대북 진출을 노리고 있는 일본 대기업들과 손을 잡고 정치 자금을 뒷거래하고 있었다고 폭로한 바있다. 1991년 10월 23일 재미동포 여성 박경윤 씨가 주선한 전세기편으로 평양에 날아간 방북 시찰단도 다름 아닌 일본 대기업 중역들과 가네마루의 대북 창구 실무자로 알려진 노나카 히로무 일본 중의원 의원이었다. 가네마루를 정점으로 하고 다나베와 재미동포 실업가 박경윤 씨를 창구로 삼은 일본의 대북 교섭 추진은 가속도가 붙으며 일본 대기업들을 동원하고 있었고, 북(조선)은 대일 관계 개선을 대미 외교의 지렛대로 이용하며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일국적 지배 질서를 뒤흔드는 외교적 도전을 과감히 벌이고 있었다.

판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국은 동북아와 한(조선)반도에서 자국의 외교적, 경제적 주도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긴급한 대책이 필요했다. 미국은 오랜 '금기'를 깨고 북(조선)에 대한 직접 접촉을 시작했다. 1991년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태소위 위원장 스티븐 솔라즈의 방북과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드세이 앤더슨과 북(조선)의 허종 유엔 대표부 차석대사 사이에 조·미 회담을 위한 두 차례의 비밀 접촉이 있었다. 이 접촉에서 미국이 먼저 1월 14일 조·미 뉴욕 회담을 갖자고 요구할 정도로 상황은 미국측에 다급했다. 미 대통령 부시가 1992년 1월초 도쿄와 서울에 날아온 것은 미국이 바로 이러한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무렵 미국이 취할 수 있는 '긴급 대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조선)의 '핵개발 의혹'을 유엔과 국제 사회로 끌고나와 그것을 북(조선)에 대한 강력한 압력 수단으로 삼고 북(조선)의 외교 지렛대를 꺾는 한 편, 다른 하나는 일단 북(조선)과 직접 협상을 한 차례 벌여 북(조선)-일본의 관계 개선 속도를 묶어두는 확실한 제동 장치를 가동하는 일이었다. 한(조선)반도의 핵문제란 일본, 중국, 러시아를 제끼고 미국이 유일한 당사국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유력한 수단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91년 9월 27일 부시 행정부의 전술 핵무기 폐기 선언에서 12월 18일 노태우 정부의 '핵부재 선언'으로 이어진 남(한국)의 '핵무기 배비 의혹'을 해소한 일련의 사건(검증은 없었다)은 미국이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들고나오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미국의 언론도 발빠르게 합류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제1면에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한 머리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 내용은 북(조선)이 서방의 핵기술과 단절되어 있는데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영국형 '칼더 홀' 원자로를 본떠 원자로를 건설했으며, 독일에서 핵연료봉 등 일부 자재를 사들였고, 소련 핵기술자들에게서 기술을 전수 받아 핵무기 개발에 급속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자극적인 가설'이었다.

1991년 11월 21일은 북(조선) 핵개발을 저지하자는 목소리가 미 의회에서 나온 첫 공개토론이 열린 날이다. 이 날 미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가 열었던 북(조선) 핵문제 관련 청문회에 나온 한승주 교수(그로부터 얼마 뒤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음)는 존 위컴 전 육군대장, 리처드 펄 전 국방차관보 등이 부르짖는 대북 무력 공격 촉구 발언에 파묻혀 이렇게 덧붙였다.

"북한은 한국이나 미국에 무력 사용 구실을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무력이 사용된다면 북한은 전면전까지는 유발하지 않을 만큼의 보복, 가령 한국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감행할지 모른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마침내 북(조선)의 '핵개발 의혹'을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만들어 내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 때부터는 미국이 몰아부치기 시작한 '한(조선)반도 핵위기의 돌풍' 앞에서, 다른 모든 논리와 명분은 아니나 다를까 한 발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고, 강제 사찰을 해야 한다느니, 유엔 안보리를 동원한 경제 제재를 해야 한다느니, 아예 영변 핵시설에 대해 정밀 폭격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오로지 협박과 대결을 부추기는 살벌한 언동들만이 나라 안팎에서 난무하기 시작했다. 7천만 겨레를 한때 전쟁 공포에 몰아넣었던 이른바 '한(조선)반도의 핵위기'는 이러한 저들의 의도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6. '냉전의 마지막 얼음 조각'을 녹이려는 미국

다른 한 편, 미국은 북(조선)과 직접 협상을 한 차례 벌임으로써 대북 관계 개선 속도에서 자신을 앞지르고 있던 일본을 완전히 뒤로 따돌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92년 1월 22일 뉴욕에서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 미 국무부 차관(부시 행정부)과 김용순 조선로동당 비서가 마주앉은 역사적인 조·미 첫 번째 고위급 회담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대일 제동 전술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조·일 관계 개선을 대미 외교의 유인책으로 삼아 미국을 직접 협상 자리에 끌어들이려 했던 북(조선)의 외교적 도전이 미국으로부터 일단 긍정적 반응을 얻은 사건이었다.

미국은 냉전 질서의 붕괴가 몰고온 한(조선)반도의 급격한 지각 변동에 직면하여 지난 40여 년 동안 동북아 지역에서 변함 없이 유지해왔던 미국의 일국적 지배 질서와 그 정책 기조인 봉쇄 정책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파산해가고 있는 냉전 질서의 버팀목인 봉쇄 정책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붙들고 있다가는 동북아 지역에서 자신의 일국적 지배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속에서 미국은 정책 전환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이 아시아 정책을 국제 질서 변동에 맞게 전환하고 있다는 조짐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때도 바로 위에서 말한 전환 시점인 1991년 말과 일치한다. 부시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가 Foreign Affairs 1991년 11·12월 호에 발표한 중요한 논문 「아시아 속의 미국: 태평양 공동체의 미래 설계(America in Asia: Emerging Architecture for a Pacific Community)」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냉전 질서 이후 21세기를 앞두고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를 밝혔다. 바야흐로 떠오르고 있는 미래의 '설계 구도'를 잡아놓은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아시아에서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와 기회를 감안할 때, 안정과 번영을 성취할 태평양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떠오르고 있는 설계는 다음 세 가지 점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미국은 이 지역의 경제적 역동성을 유지하고 개방된 세계 교역 질서를 뒷받침해줄 경제 통합의 기본틀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미국은 민주화의 추세를 지지하여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경제적 활력을 증진시키며, 독재의 모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공동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셋째, 미국은 이 지역의 다양한 안보 관심사를 반영하고 지역 안의 공포와 의혹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방위 구조를 규정해야 하며, 이것은 지속적인 경제·정치적 발전을 위한 안정 유지에 필수 조건이 된다."

한(조선)반도를 '아시아에 마지막 남은 얼음 조각'이라고 묘사한 그는 한(조선)반도 정책의 장래 구도에 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조선)반도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접촉도 점차 다자간 협상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한(조선)반도에서도 유럽 방식의 신뢰 구축 방안을 모색하고, 궁극적으로 유럽 방식의 재래식 무기 감축이 이루어질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남북 대화가 진전되면 미국은 남북과 동북아 4대 강국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아시아에서 '마지막 남은 얼음 조각'이 녹기 시작했다는 베이커의 정세 인식은 그 '얼음조각'을 반드시 미국의 입김으로 녹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지를 움직일 수 없는 전제로 삼고 있다. 그 무렵 바야흐로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과연 어떻게 하면 일본과 중국의 입김을 원천 봉쇄하고 오로지 미국의 입김으로 '얼음 조각'을 녹일 수 있는가를 검토·연구하는 데로 집중되었다. 여기서 '미국의 입김'이란 결국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제도와 자유 민주주의 제도를 한(조선)반도 전역으로 확장하는 것,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안보 구도를 확립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미국의 입김이 북(조선)에 대한 '핵외교'로 나타난 것이다.

미국의 대북 핵외교는 머지 않아 남북에 대해 주변 4강국이 교차 승인 구도를 완성하는 것으로 귀결되겠지만, 미국은 그 구도를 자국의 지배 질서를 한(조선)반도 전역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조여가려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 민족사는 한·미·일 남방 삼국 동맹이 북(조선)의 무제한 개방을 추진하는 '북진 흡수 통합 전략'과 북(조선)의 제한 개방을 통한 '주체 사회주의 발전 전략' 사이에 새로운 대치선이 그어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1991년 11월 베이커의 논리가 풍겼던 '차분하고 따스한' 해빙 분위기는 같은 시간대에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 벌이기 시작했던 날카롭고 싸늘한 '핵공방전'의 결빙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을 주고 있다. 우리는 베이커의 논리와 '핵공방전' 가운데서 과연 어떤 것이 미국의 한(조선)반도 외교 정책의 본질이며, 어떤 것이 단기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술적 조치인가를 넉넉하게 가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한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논란들, 즉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제재 압력을 가하면 한(조선)반도에서 다시 전쟁의 불길이 치솟게 되는 게 아니냐 하는 '한(조선)반도의 핵위기'에 뒤얽힌 수선스런 논란들은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한(조선)반도의 당면 정세는 마지막 남은 '사회주의 동방 초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는 '전쟁 도발 음모'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냉전의 얼음 조각'을 자신의 입김으로 천천히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부드럽게 녹여 버리고 한(조선)반도 전역에 대한 일국적 지배 질서를 구축해 보겠다는 야심에 찬 미국의 외교전략 설계도면 위에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4년 9월 12일 외교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한 연설 「민주주의의 확장: 힘과 외교의 결합을 위하여(The Reach of Democracy: Tying Power to Diplomacy)」에서 레이크가 "오늘 새로운 세계 현실은 냉전 이후의 현실로 변하면서 민주주의와 열린 시장이 승리하게 될 국제 질서를 재조정하고 창조하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한 '자신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외교 전략 설계를 셀릭 해리슨은 기고문에서 이렇게 점잖은 말로 묘사했다.

"미국은 서로 죽이려하는 남북의 갈등(남북의 매파들이 벌이는 갈등이라는 뜻임.-인용자)과 인연을 끊어야 하며, 한(조선)반도 전역의 인민들과 친선 관계를 맺는 새로운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7. 미국의 한(조선)반도 위기설과 '판촉 작전'

사실 미 국방부와 미 중앙정보국, 그리고 의회와 다양한 여론 형성 집단에 박혀 있는 대결론자들이 토해내곤 했던 '선제 타격(preemptive strike)'이니, '전쟁 불사'니 하는 따위는 실제 위협(actual menace)과 수사적 위협(rhetorical threat)의 양면성(兩面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 위협이 없었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북(조선)을 비롯한 다른 제3세계 반미 성향국들의 안보 위협에 관한 미국의 주장이 '협박과 공갈'이었음은 세상이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이 점은 뉴욕에 있는 20세기 재단(Twentieth Century Fund)의 총무 데이빗 캘러핸(David Callahan)이 Foreign Policy 1994년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국방비를 절약하는 길(Saving Defense Dollars)」에서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대고 수사적 위협을 동원한 까닭은 비첨단 잉여 무기를 남(한국) 군부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냉전 질서가 무너져가는 시대에 어쩔 수 없이 구조 조정 작업에 들어간 미국의 관·군·산 복합체에게 반사 이익을 안겨주는 '무기 판매 촉진'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 9월 26일 국방부에 대한 국정 감사에 나온 임복진 의원(민주당)의 발언 내용은 미국이 한(조선)반도의 위기를 고조시켜 놓고 뒤에서는 비첨단·저성능 잉여 무기를 팔아먹고 있는 미 국방부의 '판촉 작전'에 관련한 내막의 일부를 드러내주고 있다. 그는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

"국방부가 1994년 4월 중기 국방 계획을 변경하여 3천3백억 원의 율곡 예산을 전용해 미국 무기를 긴급 도입하기로 했다. 중기 국방 계획을 따르면 원래 이 미국 무기들은 1995년 뒤에나 사들이게 되어 있다. 이로써 전반기에 이미 1천8백억 원을 배정했고, 올해 말까지는 나머지 1천5백억 원을 집행할 예정이다. 이같은 긴급 구매는 미국이 한반도 위기 상황을 강조하면서 무기 구매 압력을 가중시킨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이 율곡 예산 전용을 결재한 4월 17일 직전인 3월 25일 미 국방장관 페리가 워싱턴에서 특별 기자 회견을 갖고 한국 정부에게 대응 포격 체계 강화 등 지상군 무기를 증강하도록 강력히 요청한 바있다. 더구나 이번에 미국에서 사들이는 무기들은 페리가 거론한 판매 무기 목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코브라 헬기와 야간 사격 통제 장비는 1990년 중기 국방 계획에서 그 성능에 문제가 있어 제외했던 장비들이다."

8. '설계도' 완성을 향한 미국 외교의 움직임

아시아 정책의 설계도는 첫 구도를 잡아놓은 공화당 정권-부시 행정부가 물러나고 민주당 정권-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외교 정책 기조로 계승·발전되고 있다. 이 정책 설계도는 공화당 정권이니 민주당 정권이니 하는 정당 차원의 차별성을 넘어선 전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의 안보 질서를 유지·강화하고 그 국익을 획득·확장하려는 완결 구도로 차츰 틀잡혀 가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베이커의 '미완성 설계도'를 좀더 발전시킨 사람은 당시 미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인 윈스턴 로드(Winston Lord)다. 1993년 3월 그가 미상원 외교관계 위원회에서 "새로운 태평양 공동체 창설"을 주제로 발표한 내용과, 8월 31일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 정책」이라는 주제의 특별 설명회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핵심 내용은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 제도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제도에 바탕을 둔 새로운 태평양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새 태평양 공동체 건설론은 사실 백악관 국가안보 담당관인 앤터니 레이크(Anthony Lake)가 미국의 21세기 외교 정책 기조를 명확한 개념으로 정리해서 발표한 이른바 '확장 정책'의 동아시아·태평양적 지역 구도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 뒤인 1993년 9월 21일 레이크는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합킨스 대학원 국제학과에서 한 중요한 연설 「봉쇄에서 확장으로 (From Contaiment to Enlargement)」에서 확장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시장 경제 제도와 자유 민주주의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논리는 바로 전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미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가 신고립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를 미국의 외교 정책 기조로 삼아야 한다고 한 연설에서, 그리고 몇 일 뒤인 9월 27일 빌 클린턴의 유엔 연설에서 거듭 천명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워싱턴에 있는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아시아 정책담당 선임연구원인 해리 하딩(Harry Harding)은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펴내는 Foreign Policy 1994년 가을호에 실은 자신의 논문 「벼랑에 선 아시아 외교(Asia Policy to the Brink)」에서 미국의 확장 정책은 미완으로 남아있으며, 이로써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1994년 봄 원스턴 로드는 워런 크리스토퍼에게 내놓은 중요한 비망록에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쌍무 관계가 동시적으로 침식되면서 불안(malaise)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클린턴 행정부는 장기 목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 목표에만 집착하려는 경향, 그리고 외교 정책을 미국의 국익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 위에 두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관이나 부서의 좁은 관점에 두려는 경향을 가졌음을 비판했다"고 하딩은 전했다. 또한 로드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결론적 태도 때문에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골목 깡패'가 아니면 '유모'의 꼴이 되고 있으며, 미국의 주도권에 대해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더욱 반발을 살 뿐이라고 경고했다"고 하딩은 전했다.

이러한 하딩의 혹평은 일면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아직 미완의 설계도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그 설계도는 지금 착착 완성되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미 국방부의 정책 결정 집단들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른바 '협력 안보(cooperative security)'라는 개념과 그 개념의 동북아 지역판으로 볼 수 있는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론도 미국이 거대한 미완성 설계를 그려가고 있는 안보 전략의 움직임이다.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이 갈 수록 드세지는 까닭도 '확장 정책'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미완의 설계도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대외 경제 전략의 움직임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번에 조·미 핵문제의 일괄 타결로 한(조선)반도와 동북아 지역에서 더 한층 분명한 전략 구도, 즉 한(조선)반도 전역을 자신의 대외 전략 구도 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설계도를 한층 뚜렷이 그리게 되었다고 '만족'하고 있다.

대통령 클린턴은 조·미 제네바 '기본 합의(agreed framework)'를 승인한 뒤, 백악관 기자실에 나와 이런 말을 남겼다.

"이번 합의는 미국과 우리 동맹국들에게 좋은 일이며, 전 세계의 안전을 위해 좋은 일이다. 이 합의는 북코리아를 국제 사회로 끌어내는 중대한 조치다."

제네바에서 핵문제가 일괄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워싱턴 정가에 알려지던 날, 미상원 의원 로버트 돌(Robert J. Dole, 당시 캔서스주 출신 공화당)이 이 합의를 두고 "장기 전략적 중요성(long-term strategic considerations)이 이번 단기적 협상을 뒷전에서 이끌어간 것같다"고 한 평가는 주목할 만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클린턴 대통령, 카터 전 대통령, 갈루치 씨는 적은 비용을 들이고 많은 성과를 얻어내는 진로를 입안하였으므로 뜨거운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갈채를 보냈다.

글을 맺으면서 우리 민족이 서 있는 자리로 돌아와 보자. 이제 남·북·해외 7천만 겨레의 민족 자주 역량은 미국의 수사적 담론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이 미완의 설계도를 착실하게 하나씩 완성해가는 미국의 대외 전략을 시기, 국면마다 정확히 읽어내고, 거기에 대처하는 전 민족적 차원의 대응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야 할 임무를 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열망하고 있는 자주·평화·통일의 21세기 장래 운명을 단결된 민족 주체 역량으로 실현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민족사적 문제는 이 대응 전략의 성패에 달려 있다고 보아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994년 12월에 작성한 것을 뒤에 가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