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다시 생각함:

동북아 지역의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향하여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 이 글은 1997년 5월 19일 워싱턴 디씨에 있는 연방 하원의원 국가안보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코리아 토론회(Korea Forum)에서 북미주 조국통일 동포회의(Congress for Korean Reunification in

North America) 이름으로 배포한 참고자료 "Reassessing America's Policies Towards Korea:

Peaceful Coexistence and Mutual Prosperity" 우리말본을 조금 가필한 것이다. 이날 코리아 토론회는 미 연방상원의원 Dianne Feinstien (캘리포니아주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현재 연방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위원), 미 연방하원의원인 Lee H. Hamilton (인디애나주 출신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현재 연방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 Ronald V. Dellums (캘리포니아주 출신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현재 연방 하원 국가안보위원회 위원) 의원 사무실이 공동 주최하여 열린 바있다.

한국(조선)전쟁의 포성이 멎은 뒤로 44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인들과 전면전을 벌였던 이 참혹한 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으로 남아있었다. 한국(조선)전쟁 참전 기념비가 워싱턴 디씨에 세워진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이 "잊혀진 전쟁"이 40년이 넘도록 정전 상태로 남아있는 한,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3만3천8백70 명을 비롯하여 모두 5만4천5백40 명이 희생되었고 8천1백68 명이 실종되었던 비극의 역사를 넘어설 수 없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주한유엔군사령관으로 정전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한, 미국의 역사는 "잊혀진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했던 교전 당사자로서, 정전 협정에 조인했던 당사자로서, 그리고 지금도 미군 병력 3만7천여 명을 한(조선)반도에 주둔시키고 한·미 연합군의 전시 작전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한국(조선)전쟁의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시켜야 할 정치적 책임을 안고 있다. 한(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한(조선)반도 내부에 국한된 문제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미국은 자국이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 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이익(security interests)의 관점에서 한(조선)반도의 평화 체제 수립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21세기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대한 과제는 한(조선)반도 문제와 대만 문제다. 대만 문제는 미·중 관계에, 한(조선)반도 문제는 미·일 관계에 직결되어 있다. 한(조선)반도의 불안정과 긴장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불안정과 긴장으로 직결되며, 한(조선)반도의 안정과 번영은 이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약속한다. 한(조선)반도의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고 정치·군사적 긴장을 해소하지 않으면, 한(조선)반도의 불안정과 긴장 상태는 지속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조선)반도와 그 주변 국가의 안보 이익 뿐아니라, 미국의 안보 이익에도 손실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다.

(1) 변모하는 안보 환경, 변화해야 할 안보관

한(조선)반도는 강대국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작은 지역이다. 북(조선)의 국토 면적은 12만4백10평방 km로 미시시피주 보다 조금 작은 크기다. 남(한국)은 9만8천1백90평방 km로 인디애나주 보다 조금 크다. 북(조선)의 인구는 2천2백만 명으로 캘리포니아주 인구보다 조금 많다. 남(한국)의 인구는 북(조선)보다 두 배가 많다. 그렇지만 이 작은 반도는 21세기에 해결해야 할 중대한 안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북(조선)은 '위험하고 포악한 악당 국가'로, 미국의 동맹국인 남(한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호전광 집단'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남(한국)은 대등한 관계의 동맹국이 아니라, 실제로는 미국의 보살핌과 지원을 받아야 할 '보호국(protectorate)'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남(한국)과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사고가 냉전 구도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한·미 관계와 조·미 관계를 규정해온 미국의 냉전적 안보관은 지금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안보 환경을 반영하지 못할만큼 퇴색되고 말았으며, 따라서 그것은 마땅히 새로운 안보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남(한국)은 미국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라가 더 이상 아니며, 중진국 수준의 국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로 장성·발전하였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였다. 그런데도 한·미 안보 동맹 관계는 아직도 불평등한 관계로 남아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차원의 안보 동맹 관계가 아니라, 불평등한 보호-피보호의 관계다. 이러한 불평등성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남(한국)이 미국의 '과잉보호'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장성·발전되었음을 인정하고, 한·미 안보 동맹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전환·격상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Mutual Security Treaty), 전시 주류국 지원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Wartime Host Nation Support), 한·미 행정 협정(SOFA)에 들어있는 불평등한 조항들은 개정·폐기되어야 한다. 오늘의 남북 관계를 보면, 군비의 수준과 경제 발전의 수준에서는 남(한국)이 북(조선)에 대해 우위에 있는 조건으로 변화되었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남북 관계는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아도 남(한국)은 북(조선)에 대해서 충분한 자위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이 만일 '강대한 북(조선)'의 위협으로부터 '약소한 남(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균형한 안보 동맹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그런 명분을 인정할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2)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지역 분쟁 억지 정책(deterrence policy of regional conflicts)과 대량 살상 무기 반확산 정책(counterploriferation policy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분쟁 억지 정책이란 북(조선)이 남(한국)을 침공하여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을 도입하고 이러한 전쟁 가능성을 억지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을 한(조선)반도에 배치하여야 한다는 논리 위에서 성립된 정책이다. 그런데 주한미군과 한·미 연합군의 움직임은 지역 분쟁 억지 정책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1966년부터 해마다 실시해고 있는 '독수리 훈련'은 미 7함대소속 지휘함, 핵잠수함등 주요 함정 9척이 참가하고, 워싱턴주, 알래스카주, 하와이주에서 공수된 미군과 주한미군 등 모두 3만4천여 명을 참가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인데, 이 훈련의 기본 성격은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미 연합군의 전쟁계획인 '작전 계획 5027(Operation Plan 5027)'을 보면, 만일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병력 40여만 명, 항공기 1천6백여 대, 5개 항공모함 전단을 비롯한 함정 2백여 척을 동원하여 2주 안에 평양을 점령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미국이 한·미 연합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공세적으로 배치·동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은 한(조선)반도에서 지역 분쟁을 억지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국은 주한미군 병력을 지역 분쟁이 일어났을 때 자동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인계 철선(tripwire)'으로 한(조선)반도에 배치해두고 있으며,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첨단 장비로 무장된 막강한 전력을 동원하여 북(조선)을 초토화하겠다는 공격 전략을 세워두고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군사 전문가들에 의하면, 북(조선)군의 전력은 한·미 연합군에 비하면 열세에 놓여있다고 한다. 북(조선)군의 무기는 매우 낡은 것들이어서 '고철 덩어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이며, 특히 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자 장비와 기술이 매우 낙후되어 있고, 군 장비를 움직일 유류마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반면에, 북(조선)군이 공격형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논거로서 휴전선에 전진 배치한 대구경 장거리포들, 중거리 미사일, 그리고 특수 부대를 흔히 지적하지만, 주한미군의 에이타킴스 지대지 미사일, 특수 작전용 헬기 H-53J, AH-64 아파치 헬기 항공여단, 그리고 남(한국)군 특전사 병력의 공격력을 본다면, 북(조선)군은 공격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한·미 연합군은 방어형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쌍방이 모두 방어형 전력과 공격형 전력을 배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배치 전력의 성능 수준, 장비 규모, 기술 수준에서 한·미 연합군이 질적으로 월등히 우세하다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느 쪽이 더 우세한 전력을 배치하여 상대방을 공세적으로 압도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한·미 연합군의 작전 교리가 미국의 지역 분쟁 억지 정책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북(조선)을 초토화시키고 점령하는 공세적 군사 전략을 따라 배치·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지금 육군 2만7천 명을 비롯한 주한미군 3만7천명의 전력을 유지·운용하기 위해 한 해에 24억7천9백만 달러의 직접 경비를 소비하고 있다. 만일 미국이 진정으로 한(조선)반도에서 지역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억지하려고 한다면, 막대한 군비를 쏟아부으면서 주한미군을 유지할 게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평화 유지군(U.N. Peacekeeping Forces)을 구성하여 휴전선 지역에 배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조선)반도에서 지역 분쟁 억지 정책을 수행하려 한다면 미국은 지금과 같이 막대한 군비를 부담하면서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으며, 주한미군 3만7천명의 목숨을 전쟁의 자동 개입을 위한 인계 철선으로 배치해둘 필요가 없다. 지역 분쟁 억지론의 관점에서 볼 때, 주한미군은 증강할 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감축하여 최저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한(조선)반도에 공고한 평화 체제가 수립되는 때에 맞춰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관리는 주일미군과 태평양 함대의 전력으로 충분하다.

둘째로, 미국은 핵무기나 미사일과 같은 대량 파괴 무기를 통제하는 반확산 정책을 남(한국)과 북(조선)에 모두 적용하고 있다. 한(조선)반도의 핵무기에 대한 반확산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은 주한미군의 지상 배치 전술 핵무기를 철수했으며,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켜 북(조선)에서 기존 원자력 시설의 운영을 동결시키는 대신 경수로 제공과 중유 공급을 약속하여 북(조선)의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 주었다.

현재 한(조선)반도에서 문제의 초점으로 등장한 대량 파괴 무기는 북(조선)과 남(한국)의 미사일이다. 미국은 남(한국)의 미사일에 대해서 '한·미 미사일 양해 각서'를 통하여 미사일 개발을 통제하고 있다. 북(조선)은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을 뿐아니라, 미사일은 물론이고 미사일 개발 기술, 미사일 부품들을 반미 국가인 이란, 시리아 등에 수출하여 대량 파괴 무기가 중동 지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이 혐의를 두고 있는 문제의 초점이다.

북(조선)이 미사일과 그 관련 기술 및 부품을 반미 국가들에 수출하는 것은 미국을 세계 각지에서 공격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북(조선)의 미사일 수출 문제는 북(조선)이 군비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외화를 얻기 위하여 군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외 무역의 주요한 부분이다.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하여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를 가장 많이 판매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북(조선)의 미사일 수출도 자체의 군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무기 판매라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의 경제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인민 경제와 군수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북(조선)이 군수 경제를 독자적으로 운영·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외화가 필요하며, 따라서 군수 경제에서 '고부가 가치'로 생산되는 미사일 수출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미국의 반확산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북(조선)의 미사일 수출 문제는 그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던 간에 결과적으로는 대량 파괴 무기를 확산시키는 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무엇인가?

미국이 한(조선)반도의 핵문제와 관련하여 반확산 정책을 수행했던 경험에서 우리는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한(조선)반도 미사일 문제의 해법은 미국이 북(조선)과의 미사일 회담을 통하여 북(조선)은 미사일 수출을 금지하고 미국은 주한미군에 더이상 새로운 미사일을 반입하지 않는 상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북(조선) 미사일 수출 금지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와 더불어 남북은 공동으로 미사일 기술 통제 체제(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 가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한(조선)반도에서 핵무기와 미사일이 확산되는 것을 예방·억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군사적 긴장의 완화다.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 북(조선)의 군비 부담이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북(조선)의 군비 유지를 위한 외화 수요량이 줄어들 것이다. 군수 경제에 들어가는 외화의 수요가 줄어들면 북(조선)은 미국의 반확산 정책에 배치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미사일 수출을 강행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량 파괴 무기의 확산을 억지하려는 반확산 정책은 대량 파괴 무기를 생산·수출하고 있는 나라들을 강제·강압하여 수행할 수는 없다. 반확산 정책은 쌍방이 안보 대화와 정치 협상을 통하여 군비 부담을 덜어가고 군비를 감축하는 평화의 의지와 실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3) 쌀과 무기

지금 북(조선)의 '기근설'이 서방측 보도를 통해 널리 퍼져 있다.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과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같은 국제 기구들의 식량 지원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북(조선)의 식량 문제는 1995년과 1996년 여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수해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에너지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적 동력 원천인 석유(petroleum)와 점결탄(coking coal)을 수입해오던 사회주의 국제 시장이 무너지면서, 북(조선)은 에너지난에 빠지게 되었다. 석유 부족은 전력 생산에 타격을 주어 산업 전반에 어려움을 몰고왔다. 석유 부족은 특히 화학 비료와 농약의 생산량을 감소시켰으며, 물자 수송에도 영향을 미쳐 협동농장들에 대한 화학 비료 및 농약의 수송량, 그리고 협동농장들이 도시에 공급하는 곡물의 수송량이 줄어들었다. 북(조선)의 경작지는 수 백년 전부터 농사를 지어왔기 때문에 비료를 제대로 치지 않으면 수확량이 크게 떨어지는데, 화학 비료 생산량이 감소하고 그나마 제때에 수송하기가 어렵게 되자 수확량은 더욱 감소하였다. 석유 부족은 또한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 가동률, 협동농장 관수 체계 가동률, 식품 가공 공장 가동률도 떨어뜨렸다.

거기에 더하여 점결탄 부족은 강재 생산량을 감소시켜 기계 공업의 조업률을 떨어뜨렸다. 곡물 생산에 직결된 화학 비료 공장과 농약 공장들의 설비, 화물 자동차나 화차 등의 수송체계, 각종 농기계들에 필요한 부품들의 생산량도 강재 부족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농업생산에 동원되는 화물 자동차, 화차, 각종 농기계의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정비 체계에도 이상이 생겼다.

오늘의 식량 문제는 결국 석유와 점결탄의 절대 부족 상태가 1992년 이후 계속되면서 북(조선)의 산업 전반에 어려움을 가중시켰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따라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석유와 점결탄의 수입량을 1992년 이전의 수준만큼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북(조선)의 산업 전반에 석유와 점결탄이 필요한 양만큼 공급된다면 북(조선)은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북(조선)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일시적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북(조선)의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는 결국 석유와 점결탄이라는 필수불가결한 연료를 수입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근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조해야 할 사실은 북(조선)에서 석유와 점결탄의 절대 부족이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는 북(조선)이 외화 부족에 시달리게 된 주원인이다. 사회주의 국제 시장에서 통용되었던 우호 가격(friendship price)이 없어진 지금 경화 결재로 처리되는 석유와 점결탄의 수입은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북(조선)에게 결정적인 한계를 안겨주고 있다.

만일 미국이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대로 북(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한다면, 북(조선)은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과의 경제 교류도 활발해질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동아시아의 한 약소국인 북(조선)에 대해서 경제 제재 조치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미국의 이익보다는 그것을 해제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은 훨씬 크다. 북(조선)이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 때문에 에너지와 식량이 부족하여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오늘, 문제의 근본 원인인 경제 제재 조치는 그대로 두고 약간의 식량을 보낸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북(조선)에 대한 식량 지원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미국은 북(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완전 해제한다면, 북(조선)의 식량 문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북(조선)의 식량 문제를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 제재 조치를 완전 해제함으로써 북(조선)을 동북아 지역에서 경제 협력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고, 장차 북(조선)을 통과하여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과 방대한 인구를 포괄한 거대한 동북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는데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는 40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으며, 이로써 북(조선)은 미국으로부터 가장 오랫동안 경제 재재 조치를 받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북(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풀겠다고 약속한 바있었고, 그 합의에 따라 북(조선)은 "일련의 개방 조치를 취해왔는데", 미국은 아직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도 않은채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문제는 단순히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곧 조·미 관계 개선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조·미 관계의 개선이란 정전 협정에 묶여있는 양국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는 정치 문제다. 국교 수립 이전에 밟아야 할 단계는 당면하여 조·미 연락사무소의 상호 설치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문화·과학·교육 부문의 상호 교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조선)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해제되어야 하며, 양국의 외교 관계는 전향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조·미 관계 개선은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역내 강대국들인 중국과 일본을 앞지르면서 미국의 주도하는 새로운 탈냉전적 안보 환경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인 지렛대로 작용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이익을 보장·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올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북(조선)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하여 에너지 문제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안정(stability)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미 관계 개선은 동북 아시아 지역이 안정과 평화, 번영과 발전의 새로운 세기로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디딤돌이다.

북(조선)의 에너지 문제와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한(조선)반도에서 정전 체제의 대치 상태와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북(조선)에 대한 식량 지원은 분명히 인도주의와 화해의 행동이지만, 휴전선에서 대포와 미사일을 겨냥하고 수 십만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 훈련을 벌이고 있는 군사적 긴장과 살벌한 대치 상태가 의연히 지속되는 한, 인도주의와 화해를 내세운 식량 지원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탈냉전기에 들어와서 전통적인 맹방이었던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북(조선)이 한·미 연합군의 막강한 전력에 대응한 자체의 군비를 유지하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그들에게 쌀이나 걷어주는 인도주의적 행동은 과연 얼마큼 인도적일 수 있을까? 문제의 근본은 식량 문제가 아니라 군축 문제다. 대치하고 있는 쌍방이 서로 상대방의 목숨을 노리는 무기를 버리고 상호 군비 축소와 평화 공존, 그리고 21세기 공동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조선)군과 한·미 연합군이 군비 증강과 군사 훈련을 위해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을 계속한다면 북(조선)의 에너지 문제와 식량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한(조선)반도의 불안과 긴장은 가실 수 없을 것이다. 1997년 4월 15일 미 국무부 대변인 니콜러스 번스는 "한(조선)반도에 그처럼 많은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없으며, 병력 규모를 조속히 줄일 수 있다면 한(조선)반도 평화와 안정이 한결 쉬워질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조선)에게 군비 축소를 촉구하였는데, 한(조선)반도의 군축을 촉구한 것은 정당한 주장이지만, 한·미 연합군의 막강한 전력을 그대로 두고 북(조선)군에게만 군비를 축소하라는 것은 형평을 잃은 무리한 요구며, 북(조선)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의도로 비쳐짐으로써 북(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한(조선)반도에서 과도한 군비 경쟁을 중지하고 군축을 실현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은 정당하지만, 군축은 한(조선)반도의 무력 대치 당사자들인 남(한국)·북(조선)·미국 3자 사이에서 상응하는 규모와 범위로 실현되어야 한다.

남(한국)·북(조선)·미국은 냉전의 유산으로 넘겨받은 무모한 소모전(war of attrition)을 중지해야 하며, 화해와 협력,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미국은 한(조선)반도의 평화와 군비 축소(arms reduction)에 관련하여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있는 것만큼, 화해와 협력의 주도권을 쥐고 새로운 안보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외교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안정과 번영의 21세기를 창조하는 출발점이다. 21세기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 정책은 한(조선)반도의 평화와 군비 축소를 실현하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4) 방향 전환을 위하여

북(조선)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의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84년 1월 미국의 3자 회담 제안을 수용한 3자 회담을 역제의하였으나, 레이건 행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지난 1980년대에 북(조선)은 미국과 남(한국)에 대하여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내놓았지만, 어느 하나도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지금 북(조선)은 한·미 양국의 4자 회담 공동 제안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매우 민감한 문제인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도 북(조선)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오던 종래의 입장을 철회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44년전 한국(조선)전쟁에서 미국의 또 다른 교전국이었던 중국에 대해서나, 1960-1970년대에 미국의 교전국이었던 베트남에 대해서는 오늘 미국 사회가 혐오감이나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지 않는데, 유달리 북(조선)에 대해서만은 냉전기의 낡은 정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냉전기에 적대국이었던 중국과 베트남에 대해서 관계를 개선하였지만, 조·미 관계는 아직 냉전적 대치 상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한(조선)반도는 냉전의 빙하 속에 갇혀있다. 역사는 한(조선)반도에서 이러한 냉전적 대치 상태가 무한정 연장되는 모순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냉전적 대치 상태의 연장은 남(한국)과 북(조선)에 대해서는 물론 미국에게도 안보 이익을 저해하는 요소다. 한(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 체제의 수립은 남(한국)과 북(조선)은 물론 미국에게도 안보 이익을 안겨다줄 것이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지구 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 화해와 협력의 해빙 정책이 되어야 한다. 한(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체제가 수립될 때 비로소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21세기의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실현하게 될 것이며, 인류 공동체는 냉전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탈냉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1997년 5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