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외 동포가 부르는 조국의 이름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밖에서 보는 조국의 모습

분단은 모순이다. 그것은 겨레의 피줄을 타고 난 당대의 칠천만 동포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다. 우리 해외 동포들의 눈에 삼천리 조국 강토는 분명히 하나로 보인다. 남도 북도 내 조국이다. 수 천년을 한 핏줄, 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이다. 그런데 조국의 이름을 둘로 나누어 부를 수 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모순이다. 민족의 실체를 조용히 깨뜨리고 있는 모순이다. 그 강요를 거부하고, 그 연장을 거부해야 할 모순이다.

나 같은 분단국 출신의 해외 동포는 조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그늘이 지고,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조국의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이다. 조국의 북녘 땅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조국의 이름을 '조선'이라고 부르고 있고, 남녘 땅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조국의 이름을 '한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국의 남녘이건 북녘이건 간에 조국 안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은 조국의 이름을 둘 가운데 어느 하나로 정해 버렸지만, 나와 같은 해외 동포들에게 조국의 이름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조국 땅에 살고 있는 본국 동포들은 우리보다 차라리 편할지 모른다. 본국 동포들은 분단 현실 한복판에서 살기 때문에, 분단의 실체를 몸으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해외 동포들은 조국의 '밖'에서 조국을 바라보고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조국의 분단 현실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물론 이러한 모순을 별로 개의치 않는 해외 동포들도 많아서, 어떤 해외 동포들은 조국의 이름을 '한국'이라고 하고, 어떤 해외 동포들은 '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로 쓰면 그저 '코리아(Korea)'라고 하면 그만인데, 우리말이나 우리글로 하게 되면 두 이름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나와 같이 남과 북을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통일 지향적인 해외 동포들은 조국의 이름을 말하고 쓸 때마다 고심한다. 나는 조국의 두 이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라고 하는 강요된 선택을 거부한다. 재미 동포 사회처럼 남(한국)출신의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해외 동포 사회에서 조국의 이름은 당연히 '한국'으로 확정되어 그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셈인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국의 두 이름을 놓고 고심하는 모습은 용납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살펴보면, 이 땅 위에는 우리 민족처럼 나라가 둘로 갈라져 분단의 비극과 고통을 겪었던 나라들이 몇이 있다. 우리가 분단국의 슬픈 운명을 생각할 때면 으례히 독일과 베트남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런데 그 분단국들은 비록 분단이 되었어도 한결같이 나라이름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정하지 않았다. 동독과 서독,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갈라설 때도 독일이나 베트남이라는 나라이름은 공동으로 쓰면서 그 나라이름 곁에 다른 정치적 개념을 덧붙여 나라이름을 지었지, 우리 민족처럼 아예 공동의 나라이름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나라이름을 각기 하나씩 지어서 갈라서지는 아니했다. 중국도 그렇게 갈라서지는 아니했다. 나라이름을 정하게 된 사정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분단국으로서 가장 불행한 경우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분단국으로서 나라이름마저 다른 것으로 정했다는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 민족과 독일 민족은 그 경로야 어찌되었든 통일되었고, 통일 이전에도 서로를 적대하지는 않았다. 중국과 대만도 적대감을 거두고 상호 교류가 활발하다. 그러나 아직도 적대감으로 살벌하기만 한 휴전선의 철조망 앞에서 이 민족의 넋은 한없이 괴롭고 아프다.

잊지 못할 1991년 9월 17일

본국 동포들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태평양 건너 만리이역에서 살아가는 나 같은 해외 동포들에게도 분단 현실이 뼈아픈 체험으로 다가오는 때가 한 두 차례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1991년 9월 17일의 체험을 아마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은 우리 민족사에 골패인 분단 상처에서 또다시 피가 흐른 날로 기록되어 있다.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한국)과 북(조선)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이름으로 동시 가입을 승인 받은 날이다.

그 무렵 남(한국) 당국은 남(한국)이 유엔에 가입하면 유엔 성원국이 되어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국가적 위상을 높히게 될 거라는 그럴듯한 선전을 수없이 되풀이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정반대였다. 유엔 동시 가입은 남(한국)과 북(조선)이 결국 국제법상 별개의 주권 국가로 유엔의 승인받게 되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국제 사회에서 우리 민족은 영영 두 나라로 갈라선다는 분단 질서의 합법화를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북(조선)은 유엔 동시 가입을 '분단 고착화 책동'으로 규정하고 반대했으나, 미국과 남(한국)의 집요한 동시 가입 공세 때문에 결국 동시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앞으로 조·미 국교 정상화, 조·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남북에 대한 주변 네 나라의 교차 승인 구도가 완결될 것이며, 이로써 남(한국)과 북(조선)은 적어도 국제 사회에서는 완전히 분열된 두 개의 국가로 갈라서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국통일을 향한 전민족의 숙원을 배반하고, 통일 국가 건설의 전망 앞에 돌이킬 수 없는 걸림돌을 박아놓는 반민족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은 9월 중순이 지났는데도 유난히 무더웠다. 나는 그날 아침부터 뉴욕시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유엔 본부 청사건물 맞은 편의 조그만 랠프 번치 공원(사실 공원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길쭉한 화단 하나와 금속 조형물이 덩그러니 서있는 적은 공간이다)에서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는 침묵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 내 아내도 난지 넉 달된 첫딸을 들쳐업고 시위 현장에 나왔다. 머리에 '조국통일'이라는 글씨가 적힌 띠를 두른 한 서른 명 남짓한 소수의 재미 동포들이 모인 침묵 시위였지만, 한(조선)반도 통일 문제가 다시 한 차례 커다란 획을 긋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라서 그랬던지 남(한국) 언론 기관의 특파원들과 외신기자 여러 명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시위 현장에 찾아왔다. 특히 우리말을 잘 하는 일본 신문 기자들이 여러 사람 눈에 띄었던 기억이 난다. 북(조선)에서 온 촬영 기사도 북(조선) 유엔 대표부 관리와 함께 우리의 시위장에 찾아와 촬영하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임창영 선생도 팔십 노구를 이끌고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켰다. 그는 제2공화국 시절 유엔 대사를 지냈다가 박정희 군사 반란 때 미국에 정치 망명을 하였고, 그 뒤로 해외 동포의 통일운동을 이끌어왔던 원로였다. 그 날은 9월 중순이 지났는데도 한여름처럼 찌는듯한 무더위가 맨해탄을 짓누르고 있었다.

유엔 청사 앞에서 벌이는 시위라면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다. 1989년부터 해마다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유엔 총회가 열리는 기간에 미주 지역의 통일운동 세력들은 남(한국) 당국과 미국이 추진해왔던 남북 유엔 동시 가입 기도를 반대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구하는 노천 단식 농성을 그 공원에서 벌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9월 중순 그날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 온몸을 옥죄고 들었다. 민족의 장래를 자주적 통일국가 건설의 길로 이끌기 위한 민족의 몸부림과 외침이 희뿌연 물거품이 되어 꺼져가는 듯한 절망감이 그날의 침묵 시위 현장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차 먼지를 뒤짚어쓰고, 가을 찬비를 맞으며 벌였던 우리의 단식 농성 투쟁이 오늘로 물거품이 되는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민족의 통일 열망이 이렇게 한 군데 무너지는구나 하는 좌절감이 그런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저녁 6시쯤 되었을까, 이윽고 운명의 시각이 다가왔다. 유엔 본부 청사의 만국기 게양대에서 그날 유엔에 새로 가입 승인을 받은 나라들의 국기를 올리는 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침묵 시위 현장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는 팔차선 차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만국기 게양대쪽으로 허겁지겁 몰려갔다. 모두들 긴장되고 상기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맨먼저 소연방에서 분리·독립하여 유엔에 가입하는 발틱해 연안의 세 나라 국가가 연주되면서 낯선 국기 세 개가 게양대에 조용히 올라갔다. 뉴욕에 살고 있는 그 나라 출신 이민자들이 자기 나라 국기가 올라갈 때마다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유엔이 독립을 승인해준 기쁨에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아니었다. 극적인 대조였다. 우리에게 그 짧은 시간은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분단 합법화에 찬성표를 던진 냉혹한 국제 현실 속에 내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에 휘감겨 있던 우리들의 처연한 모습은 아마 내 망막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몇 초가 다시 흘렀을까, 영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먼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으로 시작되는 북(조선)의 애국가가 연주되자 붉은 별이 그려진 깃발이 올라갔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우리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다. 뒤이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남(한국)의 귀에 익은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태극이 그려진 깃발이 올라갔다. 분단 민족사의 또 다른 비극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목 너머로 뜨거운 것을 삼키고 있었다. 맨해튼 고층 건물 사이로 몰려오는 저녁 바람을 받아 허공에 펄럭이는 두 개의 깃발, 우리는 그 두 개로 찢겨진 조국을 길 건너편에서 올려다 보면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떨구어야 했다. 우리의 가슴에 간직된 조국통일의 열망이 그 한 순간 냉혹한 분단 현실의 한 복판에서 산산조각으로 찢겨져나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듯한 비극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난지 넉 달된 첫 아이를 안고 서있던 아내도 울분을 삼키며 눈굽을 적시고 있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어느새 우리들은 모두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Korea is one! Korea is one! Korea is one!......"

"조국통일! 조국통일! 조국통일!......"

맨해튼을 질주하는 수많은 자동차들의 소음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진 그 외침은 차츰 울부짖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우리들의 얼굴 위로 저녁 햇살을 받은 맨해튼의 고층 건물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났다. 오늘도 맨해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나는 가끔 자동차를 타고 유엔 본부 청사 앞길을 지날 때면 그날의 울부짖음이 기억 속에 되살아나곤 한다. 나는 만국기 게양대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조국의 두 깃발을 쳐다보면서 분단국 출신의 해외 동포가 된 참담한 느낌을 받아안곤 한다. 남(한국)과 북(조선)의 두 깃발이 한 경내 안에서 아무일 없었다는듯 허공에 나부끼는 곳, 그리하여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의 민족적 양심을 비수처럼 아프게 찌르는 곳은 하늘 아래 아마도 거기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입버릇처럼 마음 속에 이렇게 자꾸 되뇌이고 있다.

"내 딸이 먼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저 게양대에서 통일 조국의 깃발이 휘날리게 될 까? 아, 사람들이여 그대의 민족적 양심에 물어보자. 저 어린 것들에게까지 분단의 비극적 운명을 넘겨주어야 하는가."

'조선'이라는 이름의 조국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이름이며, 민족사의 여러 시기에 걸쳐 나왔던 나라이름이다. 먼 옛날 단군 시조가 세웠다는 '조선'이 있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반군 세력이 고려를 뒤엎고 정변을 일으켜 세운 '조선'이 있고, 8·15 직후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이름을 정하기도 했다. 오천년 역사를 돌아보면 단군 조선 뒤로 크고 작은 군주국들이 한(조선)반도를 무대로 하여 일어섰다가 사라졌는데, 1945년 8월 15일 직후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아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했을 때, 그 건국 사업은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 공화국을 세우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여운형 선생은 봉건 군주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주인이 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건국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해방된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때 그 나라이름을 '인민의 공화국'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 무렵 우리에게는 '국민'이라는 개념은 이른바 '황국 신민'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청산해야 할 일제의 언어 잔재였고, '인민'이라는 말을 널리 통용하고 있었다. 8·15 뒤로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 군국주의 언어 잔재인 '국민'이라는 말을 청산하면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소학교'라고 바꾸었는데, 정작 일제의 식민지 피해를 입었던 남(한국)에서는 저들이 남겨 놓고 간 '국민'이라는 말과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반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쓰고 있었던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1996년 3월에 와서야 겨우 '초등학교'라고 바뀌었다) 이것은 비단 일제에게 빼앗긴 말과 이름을 되찾느냐 마느냐하는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일제에게 빌붙어 잘 먹고 잘 살았던 친일파들이 남(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이해 관계에 들어맞는 국가와 사회를 세웠다는 근원적 비극에서 비롯된 역사적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본래 줄기로 되돌려보자면, 여운형 선생의 건국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은 불행하게도 그 무렵 건국 운동에 참여했던 다양한 정파들의 일관된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미 군정과 그 추종 세력의 극렬한 탄압 소동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웠던 몽양의 건국 운동이 비록 민족 내부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해서, 그 건국 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아주 허물어지고 만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을 막고 자주적이며 통일된 민족 국가를 한(조선)반도에 세우는 건국 과업은 전민족적인 지향과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건국 과업은 여기에 국한된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의 건국 운동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구 열강과 일본이 조선 왕조에 대해 개항 압력을 가하고 있던 시기로부터 한(조선)반도에서 저들의 이권 쟁탈전이 극에 달하여 러일전쟁,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마침내 조선 왕조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자주 민족 국가를 수립하는 건국 과업은 우리 민족의 일관된 지향이요 열망이었다. 이 건국 과업을 위하여 수많은 유명무명의 항일 선열들은 피를 흘려야했다. 8·15 직후 이른바 '해방 공간'에서 마침내 근대적 자주 민족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우리 민족에게 찾아왔으나, 진영 모순에 기반을 둔 외세의 간섭과 개입,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버린 외세 의존 세력의 발호 때문에 모처럼 맞이한 통일된 자주 민족 국가 수립의 기회는 파탄에 빠지고 수많은 민족 자주·통일운동 세력은 커다란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한국(조선)전쟁의 깊은 어둠을 지나오면서 우리에게는 분단 시대 초기에 항일 선열들이 모진 희생을 무릅쓰고 앞장섰던 통일된 자주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는 건국 운동은 사라졌고, 그 대신 외세 의존 세력의 통치 아래서 살다가 보니 민족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기피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를 세우려는 건국 과업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민족의 최고 과업으로 남아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몽양의 건국 운동과 건국 이념은 비록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적절한 협의·통합 과정 없이 그저 임의로 연립 정부 구성에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현실 감각에서 벗어난 무리가 눈에 띄는 건 당연하다 하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부차적인 문제점보다도 위에서 말한 1백년에 걸친 민족사적 최고 과업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하는 문제 의식에서 다시 검토·평가해야 할 것이다. 몽양을 비롯한 통일된 자주 민족 국가 건국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참살하면서, 이른바 '인공 타도'를 외쳤던 세력들은 한결같이 외세 의존적이며 반통일적이었다는 점을 밝히게 되면, 몽양의 건국 운동과 건국 이념이 비쳐주고 있는 의미가 환하게 되살아난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사에 나타났던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은 과거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오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조선'이 있다. 1948년 9월 9일 삼팔선 이북 지역에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남(한국)의 국가 보안법은 이 '조선'에 대해서 "정부를 참칭하면서 휴전선 이북 지역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반국가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남(한국) 당국이 북(조선)을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 단체"라고 하면서도, 동일한 대상과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은 논리적 모순치고는 해괴하다 아닐 수 없다.

이 세 나라이름을 구별하기 위해서 맨처음 조선은 '옛 조선'이라고 부르고, 두번째로 나타난 조선은 '근세 조선'이라고 부르고, 지금 북녘 땅의 조선은 '사회주의 조선'이라고 부른다. 조선이라는 말은 '빛나는 아침'이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빛나는 아침의 나라'였다. 근세 조선 말기에 서구 열강의 침략 정책을 몰고 들어왔던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이름 뜻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이라고 잘못 옮겼다. 동해의 푸른 물 수평선 너머에서 삼천리 강토, 우리 겨레의 가슴으로 안겨오는 아침은 '고요함'이 아니라 '빛남'이다. 자본주의의 분망성과 소음성에 익숙해진 서양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회관으로 바라본 근세 조선은 저들에게 저으기 고즈녁한 인상을 주었을 테고, 그래서 저들은 조선을 '은둔 왕국(Hermit Kingdom)'이라고도 불렀다. 자본주의 시장을 찾아서 땅과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서구인들의 귀에 동방의 땅끝에 자리잡은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둔 왕국'은 정복자의 충동을 자극하기에 알맞는 신선한 언어 감각을 주었을 터였다.

오늘 '조선'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눈총을 받게 되는 억압적인 분위기가 무려 50여년이나 흐른 뒤인데도, 아직도 남(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한국 팔도, 한국 된장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 팔도, 조선 된장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에 세운 『조선일보』라는 일간지도 '조선'이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으며, 광주에는 조선대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도 있다. 남(한국) 사람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은 묘한 조건반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조선)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이름은 똑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라는 이름의 조국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이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때다. 1948년 이른바 '인공 타도'를 내세웠던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을 줄여서 한국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분단된 남녘 땅에서 수립한 국가적 실체의 공식 이름이 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실체는 그 민족사적 법통을 어디서 계승하고 있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모여든 정치 망명자들이 중심이 되어 수립되었다. 그 때 나라는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발 아래 짓밟혀 주권을 빼앗긴지 오래였으며,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여 신음하고 있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런데 상해에 모여든 항일 독립운동 세력은 임시정부의 이름은 조선 임시정부라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지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근세 조선 말기 외세의 침탈이 극도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다 기울어져가는 조선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겠다는 생각에서 고종이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친 사실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은 황제가 통치하는 군주국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있는 나라이름이었다. 만일 그 당시 우리 나라에 군주제를 타파하고 공화제에 기초한 근대적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는 사회·정치세력이 있었더라면, 프랑스 혁명이 그랬듯이 봉건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로 급진적으로 이행하는 부르조아 혁명을 일으켰거나, 아니면 그 무렵 대영제국이라고 자칭했던 영국이나 대일본 제국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던 일본처럼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사는 최악의 경우인 식민지 전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일제의 강점과 침탈 앞에서 이미 나라힘이 쇠잔해질대로 쇠잔해진 터라 그러한 가능성은 영영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말았다.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운 항일운동 세력은 황제가 통치하는 군주국을 바꾸어 인민이 주인이 된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뜻으로 대한민국을 나라이름으로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대한제국은 국제법상 주권국으로 인정 받지 못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국제법상 주권국의 정부로 인정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은 국제법상 주권국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이어왔다고 말하기에는 힘들만큼 허약한 '나라 간판'을 내걸었던 역사였다. 고종이 쓰러져가는 왕조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나라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스스로 대한제국의 황제 등극식을 벌였을 때도 국제사회는 외면했고 아무런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대일본제국이 대영제국의 나라이름을 모방하고, 대한제국은 대일본제국의 나라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인상마저 들기도 한다. 민중들도 대한제국이라는 귀설은 이름보다는 조선이라는 귀익은 이름을 계속 쓰게되었다. 민중들에게 우리 나라의 이름은 여전히 조선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조선 독립 만세 소리는 들었어도 대한 독립 만세 소리는 잘 듣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생각하기에도 분노할 일이지만, 일제 침략자들도 우리를 가리켜서 '조센징'이라고 모욕했고, 식민지를 지배하는 폭압권력의 총본산을 한국 총독부가 아니라 조선 총독부라고 했다. 다만 공화제를 주장했던 조선 말기의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 '한인'이라는 표현이 더러 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안중근 의사의 글에 '대한인'이라는 표현이 더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이 일제 식민지 시기 내내 대중 의식 속에 자리잡은 나라이름이었다고 한다면, '한국'이라는 나라이름은 그 시기의 일부 지식인, 정치인들의 의식 속에 들어있던 나라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8·15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면서, 민중들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인'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 해외 동포 사회에서 있었던 현상이 아닌가 한다. 특히 미주 지역에 건너왔던 우리 동포들이 '미주 한인', 또는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주 지역 동포 사회에서 '한인'이라는 표현은 이승만 세력이,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은 안창호 계열 세력이 각각 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이승만 세력이 분단 정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을 정하게 된 배경에는 일찍부터 미주 지역에서 일해왔던 이승만에게 조선인이라는 명칭 인지도보다 한인이라는 명칭 인지도가 더 뚜렷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솔직히 사실을 말하자면, 김구가 주석이었던 이른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말이 임시정부였지, 소수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한 망명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으며, 상해에서는 동포 여성들이 젖먹이 애들을 잘 봐주곤 하여 애보개 할아버지로 소문이 났었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러한 무력한 정치 단체였기 때문에 항일전에 참가할만한 무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과 함께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에 찾아가 항일 투쟁을 벌였던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로 지금 뉴욕에서 살면서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재미동포 윤영무 선생의 말에 의하면,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겨우 꾸릴 수 있었던 '광복군'이란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지상담병(紙上談兵)'의 소수 집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신은 최일선에서 지하 공작에 참가했었다고 회고한 바있다.

8·15 이후 남(한국)의 해방 공간을 점령한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김구를 비롯한 임정 세력은 결국 개인 자격으로 조국 땅을 밟아야 했다. 한 때 '임정 봉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자파 세력의 확장을 위한 한낱 기만적 구호에 지나지 않았고 임정 세력의 정치기반, 대중적 지지기반은 매우 허약했다. 이것이 임정 세력이 이승만 세력의 공격 앞에서 맥을 못추고 비틀거리게 된 사연이며, 임정 세력 내부가 좌파, 중도파, 우파로 분해되면서, 좌파와 중도파는 민족 자주·통일운동에 합류하고 우파는 이승만 세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공중 분해되었던 비극적 운명과 연관되는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일어난 임정 세력의 분해 과정은 민족주의의 계급적 분해 과정이었으며, 민족주의 좌파와 중도파는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하여, 민족주의 우파는 외세의존적 분단 국가 건설을 위하여 각각 적대 관계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 뒤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외세 의존적 분단 국가를 건설하고 이끌어간 역사가 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민족주의 좌파 및 중도파 세력의 명맥을 '반공·반소'의 구호 아래 제거하는 탄압의 역사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민족주의 좌파와 중도파에 대한 희생 위에서 일어선 것이었다. 이승만 세력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을 정하면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른바 임정 세력들에 대해서는 외면 또는 탄압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임정 주석이었던 민족주의 중도파의 거두 김구가 이승만 세력의 외세 의존적 분단국가 수립에 반대하면서 민족 자주·통일운동에 앞장섰다는 것 때문에 1948년 6월 결국 이승만 세력의 손에 참살 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임정 세력을 형성했던 민족주의 좌파와 중도파는 월북하거나 남(한국)에서 목숨을 잃거나 정치 역량을 잃고 좌절하는 세 길 가운데 한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남과 북, 북과 남

 

어떤 사람들은 지금 우리 나라의 분단 국호를 쓸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을 '남'이라고 하고 조선을 '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남이나 북이라는 말은 동서남북의 방위 개념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남북의 정치적 실체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못해 해외 동포인 나는 한국을 남(한국)이라고 쓰고, 조선을 북(조선)이라고 쓰게 되었다. 내가 남과 북이라는 방위 개념보다도 묶음표 안에 분단 국가의 이름을 일종의 '부속 개념'처럼 쓰는 까닭은 통일된 나라의 국호가 정해지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분단 국가의 이름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남과 북이라는 방위 개념을 쓰는 배경에는 남과 북에 있는 국가적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남북의 당국자가 1972년 7·4 공동성명을 작성·발표할 때도, 서로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발표할 때도, 제목에서 남과 북이라는 방위 개념만을 썼고, 맨마지막에 서명 주체를 밝힐 때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이름을 썼다.

그런데 남(한국)과 북(조선)을 그저 남과 북이라는 방위 개념만으로 부르게 될 때도 문제가 생긴다. 남(한국)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라고 하는 데 북(조선)에서는 북남 최고위급회담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상회담이란 두 주권 국가의 수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외교 행위를 뜻하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이라고 하면 남과 북의 정치적 실체를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모순에 빠진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동서남북이라고 하지 서동북남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북남이라는 표현이 너무 어색하다고 주장한다. 방위의 공간·지리적 개념도 동서양의 쓰임새가 서로 다르다. 우리는 동서남북이라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동서북남'(East, West, North, South)이라고 한다. 어쨋든 동서남북을 말할 때의 남북은 방위를 나타내는 공간·지리적 개념에 지나지 않고, 남북 정상회담을 말할 때의 남북은 한(조선)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수립된 정치적 실체를 뜻하는 정치적 개념이다.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 쓰는 공간·지리적 개념과 분단의 정치적 실체개념을 구별하여야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대등한 위치와 자격에 있는 두 실체를 한꺼번에 부를 때, 어느 실체의 이름을 먼저 부르느냐는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미국 사람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말할 때는 미·일 관계라고 하고, 일본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말할 때는 일·미 관계라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남(한국)에서 한(조선)반도 주변의 네 나라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나라이름 순서를 정렬하는 형식을 보면 미국이 언제나 가장 첫 자리에 올라가게 되며, 그 다음으로 중국, 러시아, 일본 순이라는 점이다. 미·일, 미·러, 미·중이라고 쓰고, 일·미, 러·미, 중·미라고는 하지 않는다. 중·일, 중·러라고 쓰고, 러·일라고 쓰지 그 반대 순서로는 적지 아니한다. 이러한 일반 현상은 그만큼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 관계를 보는 대미의존적 관점이 우리네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도 된다.

남(한국)에서는 자기를 중심으로 남북 기본합의서라든지, 또는 남북 관계라고 하면 되고, 북(조선)에서는 자기를 중심으로 북남 기본합의서라든지, 또는 북남 관계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 해외 동포들에게는 남북의 순서 정렬 문제가 다시 걸린다. 그래서 어떤 해외 동포들은 '남북(북남)관계' 이런 식으로 적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분단 질서가 우리의 언어와 개념 속에도 분단선을 그어놓았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서 사는 우리 동포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일상 생활에서 겪는 경험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코리안'이라고 부를 때는 한 민족으로 여기는 게 일반적이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한국) 사람이냐 북(조선) 사람이냐를 구태여 갈라놓고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남(한국) 사람이 국제 사회에서 망신을 사면 북(조선) 사람도 함께 망신을 당하게 되며, 만일 북(조선) 사람이 국제 사회에서 칭송을 받는 일을 하면 남(한국) 사람도 함께 칭송을 받게 된다. 물론 우리 해외 동포들도 '코리안'이라는 민족적 실체 안에 포괄되어 하나로 취급되기는 마찬가지다.

조국은 하나다

민족이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끈끈한 유대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한 민족 국가를 이루고 살아온 우리에게 조국이 둘이고, 나라이름이 둘이라는 모순에 찬 현실은 민족 구성원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민족은 하나며, 조국도 하나라고 믿는 우리의 민족적 양심은 넘을 수 없는 분단 모순의 장벽 앞에서 괴로움에 휩쌓여 몸부림치고 있다. 이 몸부림은 남과 북 두 지역에 나누어져 있는 두 정치적 실체를 서로 다른 나라, 별개의 주권 국가라고 인정하려는 모든 분단 의식의 합법화, 영구화에 저항하는 몸부림이다. 우리 해외 동포의 통일된 조국관으로 보자면, '한국'도 내 조국이요, '조선'도 내 조국이다. 해외 동포들에게까지 어느 한 쪽을 자기 조국으로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모든 분열 조작을 우리는 마땅히 거부해야 하며, 남과 북을 민족애의 가슴으로 보듬어 안는 치열한 통일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갈라진 조국은 하나로 되어야 한다. 이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해내외 동포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요, 21세기 민족사에 주어진 절대절명의 과업이다. 갈라진 조국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과업, 이보다 더 절실한 과업은 우리의 민족적 양심에 존재하지 않는다. 창공에 나부끼는 한 나라깃발을 우러러보며 한 나라이름으로 부르는 칠천만 겨레의 만세 소리가 삼천리 강토에 울려퍼지는, 아아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이 민족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은 언제일까? 해외 동포는 우리 조국을 한 나라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통일 조국의 품 안에서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후대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 가슴 속에 이런 뜨거운 목소리가 문득 울려옴을 느낀다.

"통일의 기운 넘쳐라, 내 사랑 조국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