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 사건'에 얽힌 이야기 세 켤레

한호석

미주 평화통일연구소장

가랑잎이 수선스레 딩굴던 1996년 가을은 암울하기만 했다. 불안과 공포, 저주와 증오, 절망과 좌절 같은 극단적인 감정의 회오리가 몰아치며 민족적 양심을 태질하던 지난 가을 내내 사람들은 분단의 비극과 고통을 느껴야 했다.

잠수함 사건. 분단질서가 빚어낸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깊이 패인 골을 또하나 남기고 이제는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다.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분단질서가 이 민족에게 강요하고 있는 비극과 고통이 극한상황으로 전개되고, 처참한 몰골로 드러난 '잠수함 사건'을 분석·검토하는 일은 분단질서 한복판에 박혀있는 예민한 상채기를 건드리는 인식의 가학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이 글의 논리전개가 자꾸 서슴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차라리 속이나 편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분단질서에 도전하여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땀흘리는 통일일꾼들이라면 분단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이번 사건을 그냥 모른체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 사건을 민족적 양심에 비춰보며 되새겨 보아야 한다. 다시는 그런 분단비극, 분단고통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여기 이야기 세 켤레를 엮는다.

첫째 이야기

지난 가을 내내 우리가 신문, 방송을 통해서 보고 들었던 지긋지긋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장간첩', '공비'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에는 섬뾵한 공포감과 적개심이 흐르고 있다.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가 이 말 앞에서는 통하지 않고,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모두 무너져내린다.

무장간첩이란 원래 첩보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정보기관 요원을 뜻하는 개념이지 정규군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간첩이나 첩보원은 같은 뜻으로 쓰는 말인데, 우리의 분단의식 속에서 말느낌은 완전히 달라서, 전자는 흉악한 느낌이 드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007 영화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로 말하자면 사실 간첩 중의 간첩인데도 멋있는 사나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같은 첩보원이라고 해도 분단현실 속에 나오는 북(조선)첩보원의 상(image)은 포악하고 증오스럽다. 모든 간첩의 임무는 무력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첩보활동에 있다. 간첩이 무장을 할 경우에도 무장수준은 첩보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경무장이지, 무력행사를 하기 위한 중무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분단의식 속에서 간첩은 언제나 무력을 행사하며 납치와 테러, 양민학살을 능사로 하는 잔인한 무장간첩으로 나타난다. 요인 암살, 주요기관 폭파 같은 끔찍스런 비정규전에 동원되는 것은 간첩(spy)이 아니라 특공대(commando)다.

'공비'라는 말은 원래 '공산비적(共産匪賊)'의 줄임말로,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좌파 유격대를 일제가 '도둑떼'라고 비하하며 붙인 말이다. 우리 사회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공비'라는 폐어(廢語)을 언론에서조차 버젓이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남(한국)사회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잠수함을 타고 내려왔다가 자살하거나 사살당한 북(조선)사람들은 첩보기관 요원(간첩)도 아니고, 비정규전에 동원되어 내려온 특공대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민군 해군소속 잠수함 승조원들과 인민군 정찰국 소속 정찰병들이었다. 정찰(reconnaissance)이란 정규군이 수행하는 군의 일상임무며, 민간 첩보원의 첩보(intelligence)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정찰이란 적진에 근접하거나 침투해서 적정을 살피는 군사행동을 말한다.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간첩을 훈련·배치하는 첩보기관인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과 군의 정찰기관인 국가 정찰실(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이 따로 있다. 국가 정찰국이 정찰하는 나라들은 적대국이거나, 적대성향을 가진 나라들이다. 물론 북(조선)군은 미군의 주요 정찰대상이다. 첨단 정찰기를 휴전선 남측 상공에 띄우거나, 정찰위성을 북(조선)상공에 배치하여 24시간 정찰활동을 벌이는 임무는 주한미군이 아니라, 워싱턴의 국가 정찰국이 직접 수행한다. 북(조선)군에 대해서 미군이 이럴진대, 남(한국)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군사 기밀사항이라서 밖으로 알려진 바 없고, 그래서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국군도 미군처럼 인민군에 대한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전협정체제란 전투행위를 일시 멈춘 무력 대치선을 유지하고 있는 준전시상태이기 때문에 정전 이후 43년동안 그 대치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꾸준히 정찰을 벌여왔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만일 이번에 잠수함을 타고 내려왔다가 자살하거나 사살당한 북(조선)사람들을 '공비'라고 규정한다면 이번 사건은 북(조선)이 남(한국)에 대해서 특공대(또는 특전대라고도 한다)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도발'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이 된다. 만일 그들을 '무장간첩'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번 사건은 북(조선)의 대남 공작기관이 남한에 대해서 대남 첩보활동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국군의 공식 발표내용을 보더라도, 인민군 정찰국 소속 정찰병들과 해군 소속 잠수함 승조원이었지, 대남 공작기구의 무장간첩이나 특공대 병력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이 인민군 정찰병이라고 한다면, 이번 사건은 북(조선)군이 남(한국)군에 대해서 정찰활동을 벌이다가 실패한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흔히 '강릉 무장간첩 침투사건'이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건의 성격을 잘못 규정하는 것이며, '북(조선)군 정찰사건'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가운데 이야기

핵동력으로 추진되는 핵잠수함은 그렇지 않지만, 디젤·축전지 구동형 잠수함은 잠항할 때는 디젤엔진을 끄고 축전지의 전기로 스크루를 돌려서 운항한다. 디젤엔진은 운항을 위한 구동엔진이 아니라, 물 위에 떠올라 공기를 들여마시며 축전지에 재충전하기 위해서 장착된 충전엔진인 것이다. 그런데 축전관련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요즈음에도 잠수함이 물 속에서 최고 속력으로 1시간 정도 달리면 축전지의 전기가 모두 방전되어 충전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물 위에 떠올라 디젤 엔진을 돌리거나, 스노클(Snokel, 공기통)을 물 위에 내놓고 디젤 엔진을 돌려야 한다.

문제의 잠수함도 북(조선)의 군항을 출발하여 해상 분계선을 지나 강릉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물 위에 떠올라 디젤 엔진을 돌리며 충전해야 했을 것이다. 3백t급 잠수함이 물 위에 떠올라 있던 충전시간 동안, 대잠 작전능력이 아직 부족한 남(한국) 해군에게는 혹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조선)반도 전역을 마치 손바닥 보듯 내려다보고 있다는, 성능 좋기로 소문난 미군 정찰위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9월 16일 새벽부터 19일 새벽까지 사흘동안 그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서 오가면서 물 위로 여러 차례 떠올라 충전하고 있었을 텐데 미군 정찰위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잠수함이 좌초된 뒤로 꼼짝하지 못하고 묶여있던 시간동안에도 미군 정찰위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좌초지점은 국군의 동해안 군사시설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미군의 정찰위성이 빼놓지 않고 감시해온 지역이 아니었던가.

일본 NHK방송의 보도에 의하면, 동해에서 정찰하고 있던 미군 정찰위성은 남행하는 북(조선) 잠수함을 발견하고도, 그 사실을 남(한국)군에게 통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 해군정보기관에서 일하던 남(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을 미 연방수사국(FBI)이 간첩죄로 체포한 이유는 미군이 북(조선) 잠수함을 발견하고도 이를 묵인한게 아니냐는 의혹를 품은 남(한국)군부가 사실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를 통하여 미 해군의 비밀정보를 빼내려했기 때문이라는 추론도 나왔다. 어쨋든 미군이 남행하고 있는 북(조선) 잠수함을 발견하고도 묵인했는지, 아니면 미군 정찰위성도 그 무렵 잠시 기능 정지상태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혹만 무성한채 영원한 비밀 속에 가려져 있다. (이 글을 발표한 뒤에 나온 『월간 조선』 1998년 2월호는 간첩죄로 미국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는 김채인[미국 이름은 로버트 김]씨의 증언을 실었는데, 그에 의하면 당시 북에서 내려왔던 정찰 잠수함은 모두 두 척인데, 그 가운데 한 척은 북으로 돌아갔고, 다른 한 척은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되었다고 한다. 물론 미군 정보기관은 이 잠수함 두 척의 남행을 처음부터 마족굣까지 감시·추적하고 있었는데도, 남[한국]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미군이 북(조선) 잠수함의 남행사실을 남(한국)군에게 즉각 통보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남(한국)은 전군을 전투태세로 동원하고 북(조선) 잠수함을 격침하기 위하여 대잠 작전을 전개했을 것이며, 북(조선)군도 대응작전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아마도 동해안에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한(조선)반도는 위기상황으로 밀려갔을지 모른다. 만일 미군이 잠수함의 남행 사실을 묵인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근본이유는 미국이 동해안에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하였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건이 일어난 뒤 북(조선)은 그 잠수함이 기관 고장 때문에 표류하다가 강릉 앞바다에 좌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남(한국)은 강릉 앞바다에 침투하였다가 좌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팽팽히 맞서고 있는 '표류·좌초설'과 '침투·좌초설'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서 현장취재 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자로서 볼 때 맨처음 취재를 가면서 가장 의문이 갔던 부분은 과연 이게 침투냐, 아니면 표류냐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침투라고 보기에는 어리숙한 점도 있었다는 거죠. 잠수함에서 발견된 총이 대부분 녹이 슬어 쏘지 못할 정도였고, 행동을 봐도 쉽게 자기 정체를 노출하는 아마추어 같은 행태를 보였어요. 그런데 또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점이 왜 간첩들이 복장을 남한식으로 했느냐는 점이예요. 상황을 종합해볼 때, 동해안 침투를 통한 일상적인 정찰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잠수함 기관고장으로 표류하게 되자 내륙으로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듭니다." (『신동아』 1996년 11월호, 144쪽)

위의 추론은 침투·좌초설과 표류·좌초설을 모두 인정하려는 일종의 절충설이라고 볼 수 있다. 표류설을 인정한다고 해도, 기관이 고장나서 표류하게 된 최초의 해상위치가 해상분계선 이북이냐 이남이냐 하는 문제가 걸린다. 이 문제도 혹시 미군의 정찰위성 자료가 있다면 거기에서나 판명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아무도 증명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쨋든 남(한국)군의 발표내용을 인정한다면, 잠수함이 해상분계선을 넘어 남(한국) 해역에 침투해서 정찰활동을 하다가 좌초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녹슨 권총과 소총 몇 자루, 게다가 비상식량도 없이 적진에 침투하는, 세상에 이처럼 바보같은 정찰병도 있을까? 상륙·침투한 뒤에도 동해안 해변도로 옆에서 웅성거리다가 택시운전기사에게 들키고마는, 세상에 이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침투병력도 있을까? 이런 정황을 생각하면, 그들이 고도로 대남정찰훈련을 받고 남행·침투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며, 더우기 이번 사건을 계획적인 무력도발이라고 규정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잠수함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꽁꽁 얼어붙고 말았으며, 한(조선)반도는 냉전의 거대한 빙하에 뒤덮혀 있다. 특히 남(한국)은 잠수함 사건에 대응하여 대화와 협상이 아니라,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미국의 정가와 언론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뉴욕타임스』11월 17일자 기사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김영삼이 권력누수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긴장과 권위를 유지하려 하는 한 방법이다(Politically, it's a way for Kim Young Sam to maintain tension and authority to prevent himself from becoming a lame duck.)"고 발언한 서울에 있는 북(조선)문제 자문가 마이클 브린(Michael Breen)의 지적이나, 남(한국)의 외무장관 자리에서 대북 온건론자가 밀려났고(apparently forced out), 대북 강경론자로 대체되었다고 한 지적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표류나 침투냐 하는 문제를 놓고 남북대결을 벌일 때가 아니다. 표류든 침투든 간에 이번 사태는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 '대북응징'이니 '대남보복'이니 하는 자극언어는 그만두어야 한다. 남과 북의 당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매듭을 풀어야 한다. 이번 사태를 빌미로 강경발언을 일삼으면서 남북 사이의 긴장을 더욱 높히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한(조선)반도에서 무력을 대치하고 있는 당사자들인 남·북·미 세 나라는 현존하는 정전협정체제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지를 체감(體感)해야 한다. 우발충돌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정전협정체제를 새로운 평화질서로 바꾸는 문제를 더는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한(조선)반도의 무력대치 당사자들은 어서 빨리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 평화회담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 이 민족의 가슴에서 전쟁의 공포와 불안을 가시게 하고 안정되고 번영된 미래를 약속하는 길이 보이게 된다.

우리 민족이 외세가 강요한 분단의 통한을 안고 반세기를 넘겨 살아온 것만 해도 생각할 수록 분하고 억울한 일인데, 거기에 더하여 동족끼리 서로 죽이려 한다면 그건 민족전체를 망하게 하는 짓이다. 형제끼리 서로 다투는 집안치고 망하지 않는 집안이 없다는데, 동족끼리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는 커녕 반세기가 넘도록 서로 싸우기만 하면 민족적 치욕을 뒤집어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종당에는 민족전체에 재앙이 드는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닌가. 분단은 재앙이며, 영구분단은 영구한 재앙의 연속이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남겨진 최후의 선택은 서로 죽임(相克)이 아니라, 서로 살림(相生)이요, 분단질서의 유지가 아니라 통일조국의 건설이다. 동족의 가슴에 겨누고 있는 공멸·공망의 총부리를 거두어야 한다.

마지막 이야기

"투항하면 살 수 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같이 죽자!"

"우리는 서울에서 온 특전대원들이다."

"이리 와라. 이야기하자."

"총 버리고 내 말을 들으면, 그리로 가지."

"담배 한 대 다오."

"담배는 없다."

서로의 날카로운 눈빛이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입 속에 침이 말라 버렸다.

"옷을 벗고 이리 나오면 살려 주겠다. 내 말 믿어라. 10초만 기다려 주겠다. 더는 안된다. 자, 그럼 시작한다." 그러나 열을 채 세기도 전에 '따르륵' 하는 짧은 연발사격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90초 동안 주고 받았던 '마지막 대화'가 끝났다.

이것은 『월간 조선』 1996년 11월호에 실린, 지난 9월 19일 칠성산에서 일어났던 극적인 현장기록이다. 이 현장기록에 나오는 저들은 누구인가? 남(한국)사람을 만나면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가릴 것없이 보는대로 쏴죽이고 남(한국)사회를 파괴·전복하려고 쳐들어온 오랑캐 적군이었던가? 죽음의 골짜기로 붸기던 인민군들도, 그들에게 총탄을 퍼붓던 국군들도 모두 한 핏줄로 조국강토에 태어나, 가갸거겨를 배우며 자라난 동족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조국땅에 태를 묻고 김치와 된장국으로 잔뼈가 굵은 단군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닌가.

그랬건만, 1996년 가을에 사람들은 동족을 동족이라고 부르면 아니되었다. 오로지 사살해야 할 적군으로 보아야 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잔인한 공격심리와 살인광기만이 찬양·고무되었다. 뒷날 군복을 벗고 부모처자가 기다리는 함경도, 아니면 전라도의 고향집에 돌아가면 추억과 희망을 나누며 살아갈 미래의 약속도 간직하고 있었겠건만, 그들은 붸고 붸기며, 죽고 죽이는 무시무시한 동족상잔의 벼랑끝에 내몰리고 있었다.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던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참혹한 악몽에 가위눌려 세상은 온통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참담한 어둠 속에도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다. 동족상잔의 흑암을 뚫고 겨레의 양심에 조용히 비쳐든 동족애의 불빛 한 점, 그것은 김형태 변호사의 글이었다. 편지글 형식의 기고문에 나오는 감동어린 귀절을 옮겨본다.

"그도 어젯밤, 어느 숲속을 붸기면서 지금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숲속 나뭇가지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숨죽이고 바라보며 북에 있는 처자들과 조상들을 생각했을까. 호주머니속 한웅큼 햇도토리로 조상들에게 마지막 차례를 지내지나 않았을까. (줄임) 둁형, 이번에 내려온 북한 군인들을 생포해서 만경뜰에서 난 햇곡식과 거제 앞바다에서 잡은 햇멸치 그리고 경주법주 한보따리를 들려 휴전선 넘어로 보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나이 39살의 유림이 북의 고향집에 가서 이 보따리 풀어 조상님들께 차례 지내고 그 아이들과 처와 오순도순 나누어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런 동화같은 상상을 하는 제 눈에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한겨레신문』 1996년 10월 7일자)

글마디마다 감동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뒤틀려 있는 남(한국)사회의 어느 한 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일지언정, 거기에 민족적 양심이 죽지 않고 가녀린 숨결을 이어가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동족을 적이 아니라 동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민족적 양심의 온기를 누군가의 몸에서 느끼게 될 때 선뜻 밀려오는 감동이기에 그것은 진하고 뜨겁다. 눈물 젖은 그의 글은 분단시대의 메마른 양심을 질타한다. 그의 글은 동족을 동족으로 보는 민족적 양심이 쓰러져 숨죽여 흐느끼고 있던 나약하고 비겁한 이 시대의 가슴팍을 쿵쿵 때리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의 글이 신문에 나온지 닷새 뒤인 10월 12일, 경기도 가평군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생 최윤정 어린이가 『한겨레신문』에 쓴 글을 읽으며 사람들은 다시 한번 눈굽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메마른 양심을 흥건히 적셔준 감동이 6학년짜리 어린애의 가슴 속에도 조용히 번지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이렇게 적었다.

"며칠 전 담임선생님이 읽어주신 『한겨레 신문』 10월 7일치 시평, 김형태 변호사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무장간첩이 침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그들이 너무 무섭고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글을 다시 한번 읽고 난 뒤론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죄없는 우리 국군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것은 한없이 슬프지만 무장간첩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도 가슴 아프다."

모두들 죽어버린 것같은 적막감 속에서 이따금씩 하늘을 찢으며 울리는 동족상잔의 총소리, 아 그 속에서도 민족적 양심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피비린내, 화약내가 뒤덮힌 흙 위에 총맞은 주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처참한 능선에 소리없이 피어난 가을 풀꽃 한 송이, 그 조그만 꽃에서 생명의 신비감을 느끼듯이, 동족상잔의 어둠에 잠긴 1996년 가을 한복판에서 이 어린애의 고백은 비록 가물거리는 한 점 불빛이지만, 분명히 꿈과 희망을 담은 신비한 불빛을 비추고 있지 아니한가. 그 작은 불빛 한 점은 "동화 같은 상상"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통일민족주의자 늦봄 문익환 목사가 가슴에 안고 떠나간 꿈, 그래서 그 뒤를 잇는 많은 사람들이 이루어야 할 통일의 위대한 꿈,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여 물어보자, 국군과 인민군의 뼈가 썩은 강원도 산자락의 흙을 한 삽씩 떠서 양지 바른 화해의 언덕에 합장하는 늦봄의 통일꿈이 이 민족의 가슴에 살아있는가? (1996년 11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