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혁명의 승리와 좌절, 니까라과의 역사적 경험 재인식

 

1. 글을 시작하며
2. 산디노의 후예들, 전선에 서다

3. 시련을 넘어서, 혁명전략을 찾아서

4.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민중봉기파의 투쟁
5. 민주주의혁명의 최후결전과 혁명정부의 수립
6. 민주주의혁명의 승리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
7.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저강도전쟁'과 민주주의혁명의 좌절
8.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킨 요인들
9.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2006년 11월 7일 니까라과 대통령선거에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Frente Sandinista de Liberacion Nacional/FSLN)의 최고지도자 다니엘 오르떼가(Jose Daniel Ortega Saavedra)가 승리하였다.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 떠도는 니까라과 정세에 대한 잡다한 '분석'들은 오르떼가가 대선에서 승리하여 16년만에 재집권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서 멈추고 말았지만, 오르떼가의 대선승리라는 짤막한 한 마디의 말속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헤쳐 가는 민주주의혁명의 간고하고 복잡한 발전경로가 비껴있다.

오르떼가의 대선승리를 오르떼가 개인의 정치적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변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두말할 필요가 없이, 오르떼가의 승리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승리이며, 민주주의혁명의 재생을 갈망하는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승리이다. 그렇다면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선거승리에서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재생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니까라과에서 16년 전에 좌절, 중지되었던 민주주의혁명이 재생된다면, 그것은 인구가 557만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의 영토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변이 아니라 민주주의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라틴아메리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승리로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수 십억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혁명적 신심과 열정을 안겨줄 것이다.

이 글을 집필하던 2006년 11월 22일 노동기본권 쟁취, 사회양극화 해소, 한미자유무역협정 저지를 요구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15만 명이 남(한국) 전역의 광역 시도청 앞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으로 총궐기한 대중항쟁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아직 갈 길이 먼 민주주의혁명의 앞날을 생각하였다.

2006년의 남(한국)과 1980년대의 니까라과는 사회계급구성과 신식민주의체제의 예속화정도, 사회변혁역량의 주체적 조건이 서로 다르지만, 민주주의혁명이라는 보편적인 사회역사발전의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민주주의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그들의 진보정당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승리와 좌절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어를 쓰는 니까라과 인민들의 언어적 자주성을 존중하여, 고유명사 표기는 영어 발음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스페인어 발음표기법을 따랐다.

2. 산디노의 후예들, 전선에 서다

1853년 6월 미국인 불법침입자(filibuster)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 1824-1860)가 니까라과에 침입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1856년 7월 스스로를 대통령이라 칭했다. 1908년에는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들이 니까라과에 몰려가서 커피산업, 사탕수수산업, 바나나산업 등을 장악, 수탈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미국 해병대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니까라과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미국 해병대는 1927년에 두 번째로 니까라과를 점령하였다.

제국주의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니까라과에서 마침내 반제투쟁의 기치를 치켜든 혁명적 민족주의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우구스또 산디노(Augusto Cesar Sandino, 1895-1934)이다. 1895년 니까라과 수도 마나과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이웃나라인 온두라스, 과떼말라를 떠돌면서 광산노동자로 일하였고, 멕시코 땀삐꼬 부근에 있는 미국의 석유기업에서도 노동자로 일하였다.

1926년 5월 26일 니까라과 자유당이 차모로 반동정부를 타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산디노는 니까라과로 돌아갔다. 1926년 10월 19일 산디노는 반미, 반차모로의 기치를 든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자유당의 반란군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1927년 5월 12일 자유당은 차모로 반동정부와 타협하고 무장투쟁을 포기하였다. 자유당과 차모로 반동정부의 결탁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산디노의 주위에 결집하였고, 산디노는 기존의 무장대오를 인민유격대로 확대, 개편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의 기간에 약 2천 명으로 구성된 산디노 인민유격대는 차모로 반동군대와 제국주의점령군의 거점을 들이치는 습격전투를 벌였다.

1930년대 초 살바도르 공산당 창건자이자 엘살바도르 혁명가였던 파라분도 마르띠(Augustin Farabundo Marti, 1893-1932)는 한때 산디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마르띠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지침을 따랐으나, 산디노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산디노와 마르띠는 결별하였는데, 그때부터 코민테른과 멕시코공산당은 산디노를 더 이상 지원해주지 않았다.

1932년 11월 자유당 대선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사까사(Juan Bautista Sacasa, 1874-1946)는 산디노에게 정치회담을 제안하였다. 산디노는 제국주의점령군이 전면철수하고 니까라과의 자주권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정치회담에 응하였다. 1933년 1월 2일 제국주의점령군이 니까라과에서 완전히 철수한 때로부터 한 달 뒤에, 산디노 인민유격대는 사까사 정부와 체결한 정전협약에 따라 자진하여 무장을 해제하였다.

산디노 인민유격대가 사까사 정부와 체결한 협약에 따라 자진하여 무장을 해제한 것은, 산디노를 제거하려는 적들의 함정에 빠진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니까라과 주재 미국대사는 소모사 반동세력(Somocistas)을 앞세워 1934년 2월 21일에 산디노를 살해하였고, 소모사 반동세력은 산디노 인민유격대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정세는 짙은 어둠 속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1936년 극악한 파쇼독재자 소모사 가르시아(Anastasio Somoza Garcia, 1896-1956)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동정부가 출현하였다. 소모사 반동정부는 종래의 착취를 더욱 가혹하게 자행하여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민생파탄에 몰아넣고 자기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1956년 소모사가 참석한 연회장에 숨어 들어간 시인 리고베르또 로뻬즈(Rigoberto Lopez Perez)가 그에게 총격을 가했고 소모사는 그때 받은 피격상처로 죽었으나, 그의 맏아들 소모사 데바일레(Luis Somosa Debayle, 1922-1967)가 소모사 반동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1967년에 소모사 데바일레가 죽자, 그의 동생인 아나스따시오 소모사 데바일레(Anastasio Somoza Debayle, 1925-1980)가 반동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산디노가 제국주의전쟁광들의 배후조종을 받은 소모사 반동세력의 손에 희생된 때로부터 근 25년이 지난 1959년 1월, 꾸바에서 혁명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피델 까스뜨로는 산디노의 부활"이라고 외쳤던 청년이 있었다. 원래 니까라과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던 그들은 꾸바혁명의 승리에 크게 고무되어 피델 가스뜨로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1967)의 혁명전략을 연구하였다. 그들이 바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창설자인 까를로스 폰세까(Jose Carlos Fonseca Amador, 1936-1976)와 또마스 보르게(Tomas Borge Martinez)이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창설되었던 1961년은 '꾸바 미사일 위기'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극도로 격화되었던 때이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 속에서 니까라과혁명의 깃발을 들었던 산디노의 후예들을 산디니스따(Sandinista)라고 부른다. 특히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전략가이자 이론가였던 폰세까는 '비적'이라는 악선전을 받아온 혁명적 민족주의자 산디노의 반제자주사상을 해설한 책을 다섯 권이나 쓰면서 산디노사상(Sandinisimo)을 대중화하기 위해서 애썼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창설한 산디니스따는 열 명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에 자기의 젊은 목숨을 바쳤는데, 1979년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민주정부의 내무상으로 일한 사람은 또마스 보르게 한 사람 뿐이었다.

3. 시련을 넘어서, 혁명전략을 찾아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1961년에 창설될 때 민족해방전선이라는 명칭만으로 불리다가 1963년에 산디노의 투쟁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뜻에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으로 개칭하는 한편, 체 게바라의 혁명전략에 따라서 온두라스 접경지역인 리오 꼬꼬(Rio Coco)에 최초의 핵심거점(foco)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핵심거점을 창설하고 그것을 근거지로 하여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전략은 유일하게 꾸바에서만 성공하였고, 과떼말라, 베네주엘라, 뻬루, 볼리비아에서는 실패한 전략이었다.

1963년 6월 산디노의 옛 동지이며 대령 출신인 산또스 로뻬즈(Santos Lopez)와 33세의 또마스 보르게가 지휘하는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는 전투경험이라고는 전혀 없이 기초적인 군사훈련만 받은 60여 명의 학생운동출신 청년전사들로 편성되었다.

첫 무장투쟁에 나선 산디니스따들이 움켜쥐었던 혁명의 총은 북(조선)에서 보내준 것이다. 그 총은 지금 마나과의 혁명박물관에 보관되어 니까라과 혁명사를 증언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혁명이 사회주의나라 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적 나라들과 국제연대를 강화, 발전시키는 것은 혁명승리의 필수적 요소이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사회주의나라 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과 국제연대를 강화, 발전시키는 것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려는 고립압살책동을 무력화시키는 투쟁이었다.

산디니스따들이 무장투쟁을 벌이던 197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혁명을 적극 지원하는 혁명기지는 북(조선)이었다. 미국의 북(조선) 군사연구가 조셉 버뮤디즈 2세(Joseph S. Bermudez, Jr.)가 1998년에 펴낸 책 『북(조선)의 특수군(North Korean Special Forces)』에 따르면, 그 무렵 북(조선)은 여섯 곳의 훈련소를 열 곳으로 확장하고 단기훈련반과 장기훈련반을 운영하였는데, 1974년 현재 그 훈련소들에서 군사훈련과 정치교육을 받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전사들은 3-4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책에는 꼬스따리까 출신의 혁명전사 쁠루따르꼬 헤르난데즈(Plutarco Hernandez)의 이야기가 나온다. 꾸바에서 일곱 달 동안 정보활동훈련을 받은 그는 1971년 북(조선)에 들어가 집중적인 군사지휘훈련을 받았으며, 나중에 니까라과에 돌아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주요 군사지휘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되었다고 한다.

리오 꼬꼬의 빤까산(Pancasan)에 핵심거점을 설치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1963년 6월 처음으로 출전하여 농촌지대 라이띠(Raiti)를 해방하고 새로운 핵심거점을 설치하는 군사작전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소모사 반동정부의 방위군(Guardia Nacional) 분견대를 들이친 습격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로 후퇴하였으나, 생존자들마저 거의 모두 체포되었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시련에 처했던 1963년에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찾아온 청년전사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중에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하게 되는 다니엘 오르떼가이다.

1967년 다니엘 오르떼가가 스물 두 살 나던 해, 그는 미국은행(Bank of America) 마나과 지점을 들이쳐 혁명의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확보하는 습격전투를 수행하는 중에 적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오르떼가의 혁명동지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악형을 일삼는 소모사 반동정부의 감옥철창에 일곱 해 동안 갇혀있을 때 오르떼가는 자신을 더욱 단련시켰고, 그 이후 혁명투쟁에서 몰아닥친 온갖 시련과 역경을 헤쳐 나갈 강인한 혁명의지를 길렀다고 한다.

오르떼가가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겪으며 투쟁하고 있었던 1967년, 소모사 반동정부는 방위군을 대공세로 내몰아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궤멸시키려고 미쳐 날뛰었다. 1967년 8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 창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비오 마요르가(Silvio Mayorga)가 지휘하는 무장대오는 농민들의 신고와 헬기를 동원한 방위군의 기동작전에 말려들어 파괴되는 등 무장대오의 3분의 1이 전사하였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창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리고베르또 꾸르즈(Rigoberto Cruz Arguello)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들은 농촌의 핵심거점을 포기하고 도회지로 도피하였는데, 그해 11월 소모사 반동정부가 도시지역의 지하조직들까지 파괴하는 바람에 이웃나라로 피신하였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까를로스 폰세까도 방위군의 집요한 대공세를 피해 꼬스따리까로 잠시 피신하였다. 그런데 1970년에 꼬스따리까 반동정부가 폰세까를 체포, 투옥하였다. 엘살바도르의 혁명단체들과 프랑스의 좌파문필가 장 뽈 싸르뜨르(Jean Paul-Sartre, 1905-1980)가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국제활동을 조직하였다.

1967년 방위군의 대공세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산디니스따들을 적극 지원해주면서 꼬스따리까 감옥에 갇힌 폰세까의 석방을 위한 국제활동을 뒤에서 소리 없이 조직한 것은, 꾸바의 국가정보기관 종합정보부(Direccion General de Inteligencia/DGI)였다. 꼬스따리까에 들어간 산디니스따들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유나이티드 과일상사(UFC)의 직원들이 타고 가는 항공기를 납치하여 폰세까를 꾸바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핵심거점에 의거하는 혁명전략이 실패하였을 때, 또마스 보르게와 헨리 루이즈(Henry Ruiz)는 중국혁명의 대장정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경험에 근거하여 인민전쟁전략을 새로운 혁명전략으로 제기하였다. 그들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중심역량을 농민대중으로 규정하고, 농민대중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조용한 역량축적(silent accumulation of forces)'을 꾀하면서 장기적 인민전쟁(Guerra Popular Prolongada/GPP)을 벌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969년부터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주력은 농민대중 속에 흩어져서 무장투쟁을 재개하기 위하여 니까라과 북부지역으로 갔으나 농민대중의 장기적 인민전쟁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역사의 행로를 바꿔놓았던 모든 형태의 사회변혁이 그러하였지만,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 역시 거듭되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전진하여야 했다. 최후승리를 쟁취하려는 강철의 신념과 불타는 의지만이 혁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서슴없이 바칠 수 있게 하였고, 그러한 신념과 의지만이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끝내 혁명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한 무한대의 원동력이자 위대한 실천력이었다.

4.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민중봉기파의 투쟁

1974년 현재 니까라과에서는 두 갈래의 정치세력이 소모사 반동정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모로(Pedro Joaquin Chamorro Cardenal, 1924-1978)가 대표하는 중도정치연합인 민주해방연합(Union Democratica de Liberacion/UDEL)이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민주주의혁명으로 소모사 반동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우는 혁명적 정권교체를 추구하였고, 민주해방연합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소모사 반동정부를 새로운 민주정부로 바꾸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추구하였다.

1974년 12월 27일 밤, 15명의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는 자본가의 저택을 습격하여 반항하는 자본가를 사살하고 그곳에서 연회를 즐기던 소모사의 친척과 고위관리들을 모조리 포로로 붙잡았다. 사흘 뒤에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소모사 반동정부로부터 포로들의 '몸값' 100만 달러를 받아냈을 뿐 아니라,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성명을 언론에 발표하게 만들었고, 감옥에 갇혀있던 산디니스따 14명을 꾸바로 피신하게 만들었다. 감옥에서 풀려 나와 꾸바로 피신한 14명의 산디니스따들 가운데 다니엘 오르떼가가 있었다. 니까라과 인민들을 경탄케 하였던 대담한 습격전투, 그리고 소모사 반동정부를 굴복시켰던 처리과정은, 명백하게도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값진 승리이었으며 동시에 소모사 반동정부의 굴욕적인 패배였다.

소모사 반동정부를 정치적으로 굴복, 패배시킨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한 걸음 더 전진시킨 계기로 되었다. 그 뒤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인식이 달라졌다. 니까라과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혁명적 정권교체전략을 지지, 성원하게 되었고, 민주해방연합의 평화적 정권교체전략을 회의, 외면하게 되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습격전투로 타격을 입고 복수심이 끓어오른 소모사 반동정부는 1975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방위군 지휘관들에게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집중공격으로 궤멸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에 따라 방위군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소모사 반동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닥치는 대로 체포, 투옥, 고문,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산디니스따 무장대오와 방위군은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는 병력수와 무장장비가 비할 바 없이 우세하였던 방위군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희생도 컸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창설자들인 까를로스 폰세까와 실비오 마요르가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또마스 보르게는 체포되었다.

그 무렵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한 정파는 농민대중 속에서 역량을 축적하면서 장기적 인민전쟁을 벌이려는 기존 혁명전략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공장노동자와 농촌노동자를 조직한 기초 위에서 레닌주의적 노동계급정당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이메 윌록(Jaime Wheelock Roman)이 대표한 그 정파를 프롤레타리아파(Fraccion de Proletarios)라 불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파의 혁명전략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우르과이의 뚜빠마로스(Tupamaros)와 아르헨띠나의 몬또네로스(Montoneros) 같은 무장대오가 추진하다가 실패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파는 도시지역에서 몇몇 지하조직을 결성하였을 뿐, 레닌주의적 노동계급정당을 건설하지는 못하였다.

다른 한편,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니까라과에서 대중항쟁이 폭발하여 소모사 반동정부가 무너지는 경우,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집권하여 신식민주의체제마저 무너뜨리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차단하고 신식민주의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반혁명책략은, 대통령직선제와 사회개량정책을 도입하여 소모사 반동정부를 퇴진시키고 중도정치세력이 집권하게 만듦으로써 대중항쟁의 폭발을 예방하는 이른바 평화적 이행전략이었다.

소모사 반동정부에 반감을 가진 중산층, 도시빈민계층, 실업자, 학생계층, 지식인계층, 종교세력 등 각계각층이 산발적인 반파쇼민주화운동에 나서고 있었으나,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그들의 투쟁을 결집, 지도할 역량을 전혀 갖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장기적 인민전쟁을 벌이기 위한 농민대중의 역량을 축적하는데 집중하면서, 도시에서는 대학가에서 새로운 성원을 선발하거나 금융기관을 습격하여 얻어낸 자금을 무장대오에 보내주는 병참지원에 투쟁을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은 새로운 혁명전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혁명전략을 고민하는 산디니스따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다니엘 오르떼가와 그의 동생 훔베르또 오르떼가(Humberto Ortega Saavedra)이다. 그들은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각계각층 민주세력들을 결집시킨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그 전선역량으로 대중항쟁을 일으키고, 산디니스따들의 무장투쟁과 대중항쟁을 결합시키는 전략적 과제를 생각하였다. 통일전선이 형성되지 못한 조건에서는 대중항쟁이 일어나기 힘들며, 설령 대중항쟁이 일어나더라도 그 항쟁은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장기적 인민전쟁을 혁명전략으로 고수해온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 지도부는 민중봉기파의 통일전선전략을 소모사 반동정부를 민족자본가들로 교체하려는 '소자산계급의 모험주의(petty bourgeois adventurism)'라고 비판하였고, 프롤레타리아파는 민중봉기파의 통일전선전략이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사회개량주의의 함정에 빠뜨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중봉기파는 비판과 반대를 무릅쓰고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통일전선의 대중항쟁과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무장투쟁을 결합시킨 새로운 혁명전략을 제시하였다. 때는 1977년 5월이었다. 통일전선전략을 제시한 정파를 민중봉기파(Fraccion de Insurreccion)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1977년 10월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계, 재계, 종교계 저명인사들을 포함하여 각계각층 대표자 12명이 이웃나라인 꼬스따리까에서 반소모사 정치연합을 결성하였다. 반소모사 정치연합을 12인 집단(El Grupo de Los Doce)이라 불렀다. 12인 집단의 결성은 민중봉기파가 추진한 상층통일전선의 성과였다. 다니엘 오르떼가가 1997년 10월 미국 텔레비전방송 씨엔엔(CNN)과 진행한 대담에서 밝혔듯이, 민중봉기파가 12인 집단을 결성하도록 적극 도와주었던 방조자는 당시 꼬스따리까 민족해방당의 대표로 대통령이었던 사회민주주의자 호세 피구에레스(Jose Figueres Ferrer, 1906-1990)였다.

12인 집단의 등장은 민중봉기파의 통일전선전략에 힘을 실어주었다. 민중봉기파는 12인 집단과 정치적으로 연대함으로써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참여는 물론 국제적 지지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민중봉기파는 12인 집단과 연대하여 전선역량을 더 한층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월 10일 반정부성향의 신문 라 쁘렌사(La Prensa)의 발행인으로서 소모사 반동정부를 반대해온 민주해방연합의 지도자인 차모로가 소모사의 아들이 지휘하는 방위군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12만 명의 인민들이 그의 장례행렬을 따랐다. 대중의 분노가 거대한 암장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가운데, 차모로의 피살은 인민봉기형태의 대중항쟁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되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덧쌓여온 분노와 원한은 차모로 피살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13일 뒤인 1월 23일에 폭발하였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소모사 반동정부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 총파업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그라나다, 리바스, 꼬린또, 산따 끌라라에서 소모사 반동정부의 거점들을 무력공세로 타격하였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전국적 총파업투쟁은 반동적 탄압을 뚫고 열흘 동안 계속되면서 소모사 반동정부를 마비시켰다.

소모사 반동정부의 힘으로는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1978년 2월부터 소모사 반동정부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하였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소모사 반동정부를 포기하였음을 눈치챈 제국주의독점자본들 가운데 일부가 니까라과에서 빠져나갔다. 자본이탈, 투자중단, 통화팽창, 실업폭증은 니까라과 경제체제를 급속도로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소모사 반동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완전한 고립상태에 빠졌다.

1978년 2월 21일 모님보(Monimbo)에서 시위대오를 공격한 방위군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한 주민들이 대중항쟁에 궐기하였다. 엽총, 장총, 권총, 사제폭탄으로 무장하고 통행차단물을 설치한 모님보 주민들은 방위군과 맞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 차단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한 대중항쟁은 7일 동안의 격전을 끝에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산디니스따들은 자기의 무장투쟁을 모님보 대중항쟁과 결합시키려고 애썼으나 방위군의 고립차단작전에 밀려 실패하였다.

모님보 대중항쟁의 실패를 겪으면서 민중봉기파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무장투쟁이 대중항쟁으로부터 투쟁동력을 지원 받는 것이 아니라, 무장투쟁이 대중항쟁을 지원하는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5월 소모사 반동정부와 타협하여 대파국을 피해보려는 중도정치세력들이 결집하여 니까라과 민주화운동(Movimiento Democratico Nicaraugunse/MDN)을 결성하였다. 그에 맞서 1978년 7월 민중봉기파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체인 연합인민운동(Movimiento del Pueblo Unido/MPU)을 결성하였다. 연합인민운동에는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노동조합, 농민조합, 여성단체 등 23개 대중조직이 망라되었다.

특히 니까라과 여성들의 혁명적 진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혁명 초기부터 니까라과 여성들은 독자적으로 여성조직을 꾸려 민주주의혁명의 길에 나섰다. 농민여성들은 농촌지역에 민주동맹(Federacion Democrarica/FD)을 조직하고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는 투쟁을 벌였다. 산디니스따들이 삶과 죽음의 계선을 넘나들며 투쟁한 수많은 격전지와 감옥과 형장에는 여성전사들이 흘린 고귀한 피땀이 스며있다. 중국인 아버지와 니까라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0대 소녀로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아를렌 시우(Arlen Siu, 1952-1972)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민중봉기파가 연합인민운동을 결성하였던 때에, 중도정치연합인 민주해방연합이 12인 집단을 끌어들여 '폭넓은 반대전선(Frente Amplio Opositor/FOA)'을 결성하였다. '폭넓은 반대전선'은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 총파업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방위군은 그에 대응하여 반동적 군사정변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 소모사 반동정부 퇴진투쟁을 중도정치세력이 주도하거나, 반동적 군사정변이 일어나는 것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좌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에게는 중도정치세력의 주도권 장악과 반동적 군사정변을 예방하기 위한 비상대책이 요구되었다.

그 비상대책으로 추진된 것이 1978년 8월 22일 민중봉기파가 벌인 국회의사당 습격전투이다. 23명으로 구성된 민중봉기파의 무장대오는 국회의사당을 습격하여 소모사의 조카와 사촌을 포함한, 1천여 명에 이르는 국회의원들과 정부관리들을 이틀 동안 감금하였다. 소모사 반동정부는 민중봉기파의 요구에 따라서 또마스 보르게를 포함하여 59명의 산디니스따들을 감옥에서 석방하였고, 니까라과 인민들에게 대중항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성명을 대중언론을 통해 발표하게 하였고, 50만 달러의 '몸값'을 지불하였으며, 국회의사당 습격사건에 나선 23명의 산디니스따들이 이웃나라 빠나마로 피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소모사 반동정부가 1974년 12월에 이어 두 번째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에게 굴복한 것이었다.

민중봉기파의 국회의사당 습격전투가 승리로 끝난 직후, 여섯 개 도시에서 수많은 인민들이 반무장상태(semiarmed)로 대중항쟁에 궐기하는 것과 때를 맞춰 민중봉기파의 무장대오는 방위군의 여러 거점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였다. 대중항쟁과 무장투쟁을 결합시킨 그 혁명공세는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사에 1978년 9월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소모사 반동정부 퇴진투쟁의 주도권이 중도정치세력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였던 민중봉기파는 자기와 정치적으로 연대하면서 반소모사 투쟁에 참가해왔던 12인 집단을 1978년 11월에 '폭넓은 반대전선'에서 탈퇴하도록 유도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체인 연합인민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12인 집단(EGLD), 독립자유당(Partido Liberal Independiente/PLI), 사회기독교대중당(Partido Popular Social Cristiano/PPSC)을 비롯한 중도정당들을 하나로 묶어 더 큰 덩어리의 통일전선체를 결성하였으니, 그것이 1979년 2월 1일에 출범한 전국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FPN)이다. 전국애국전선이 출범함으로써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각계각층 대중역량이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로 총결집하게 되었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사에서 전국애국전선의 출범이 가지는 의의는, 민중봉기파가 소모사 반동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폭넓은 통일전선체를 건설함으로써 대중항쟁을 정치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하였다는데 있다. 주목하는 것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 안에서 제기된 비판과 반대를 무릅쓰고 통일전선전략을 고수해온 민중봉기파가 그 전략에 의거하여 1978년 8월 의사당 습격전투와 9월 대중항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므로 폭넓은 통일전선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민중봉기파가 이처럼 1978년 하반기부터 통일전선전략을 힘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요인들 가운데는 지하방송인 라디오 산디노(Radio Sandino)의 역할도 있다. 라디오 산디노는 대중항쟁의 타격방향과 투쟁전술을 실시간대로 항쟁현장에 전해줌으로써 민중봉기파가 대중항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투쟁력을 집중시키는 전국적 통신수단으로 이바지하였다.

남(한국)의 민주주의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그들의 진보정당은, 민중봉기파의 투쟁경험을 읽으면서 대중항쟁의 전략거점은 통일전선이라는 민주주의혁명의 진리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5. 민주주의혁명의 최후결전과 혁명정부의 수립

1978년 9월 항쟁이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사에서 가지는 특별한 의의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정파들인 프롤레타리아파와 장기인민전파가 민중봉기파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 자기의 내분을 극복하기 시작하였음을 뜻한다. 민중봉기파가 제시한 통일전선전략이 과학적인 것임은 대중항쟁의 혁명적 실천에 의해서 입증되었고, 과학적인 혁명전략을 제시한 민중봉기파의 정치적 주도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내분은 차츰 수습되었다. 1978년 12월부터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세 정파들은 재통합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서 1979년 3월 7일에 마침내 분열을 청산하고 재통합을 실현하였다. 그때부터 각 정파에서 세 명 씩 내온 아홉 명의 대표들이 전국지도부(National Directorate)를 구성하여 재통합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을 지도하게 되었다. 새로 추대된 전국지도부 성원들은 민중봉기파의 다니엘 오르떼가, 훔베르또 오르떼가, 빅또르 띠라도(Victor Tirado), 장기인민전파의 또마스 보르게, 헨리 루이즈, 바야르도 아르쎄(Bayardo Arce),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파의 하이메 윌록, 루이스 까리온(Luis Carrion), 까를로스 누에즈(Carlos Nuez)이다.

이처럼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재통합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이전보다 더 열렬한 지지와 참여로 응답하였고, 그로써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전투력과 지도력은 날로 강화, 발전되었다.

혁명의 지도핵심세력이 통합되고, 폭넓은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소모사 반동정부의 고립이 심화된 것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다가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산디니스따들은 1979년 5월말부터 무장투쟁과 대중항쟁을 결합한 마지막 공세(final offense)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니까라과 전국에 걸쳐 다섯 개의 무장대오를 지휘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년유격대와 민족방위대는 거의 날마다 전투를 벌였다.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들이 곳곳에서 방위군 거점들을 타격하는 가운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대중항쟁으로 소모사 반동정부를 마비시켰다. 바야흐로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은 최후결전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1979년 6월 4일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호소에 따라 소모사 반동정부가 퇴진하는 날까지 계속할 전국적 총파업투쟁에 궐기하였다. 무기한 총파업투쟁은 수도 마나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전국적 총파업투쟁이 폭발하자 당황망조한 소모사 반동정부는 1979년 6월 6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발악적으로 대응하였다. 소모사 반동정부는 방위군을 총동원하여 총파업투쟁에 궐기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닥치는 대로 체포, 투옥, 고문, 살해하는 야만적 폭력을 휘둘렀다. 방위군은 레온, 에스뗄리, 치란데가, 마사야를 공중폭격으로 파괴하여 무고한 양민 6천여 명을 현장에서 몰살시켰다. 1978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기간에 방위군의 잔인한 살육만행에 희생된 사람은 5만 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80%는 비무장한 민간인들이었다. 1980년 5월 전두환 군사파쇼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광주민중항쟁에 궐기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였던 계엄군의 잔혹한 범죄는 1979년 6월 니까라과 방위군에 의해서 똑같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동세력의 야수적 폭력은 전략적 우위를 상실하였고, 전세는 이미 혁명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79년 6월 16일 마침내 니까라과 국가재건혁명정부(Junta de Gobierno de Reconstuccion Nacional/JGRN)가 세워졌다. 국가재건혁명정부를 구성한 다섯 사람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FSLN) 대표 다니엘 오르떼가, 전국애국전선(FPN) 대표 모이세스 하싼(Moises Hassan Morales), 12인 집단(EGLD) 대표 세르지오 라미레즈(Sergio Ramirez Mercado), 니까라과 민주화운동(MDN) 대표 알폰소 로벨로(Alfonso Robelo Callejas), 민주해방연합(UDEL) 대표 비올레따 바리오스(Violeta Barrios de Chamorro)이다.

국가재건혁명정부를 사실상 대표한 수반은 다니엘 오르떼가이었고,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 전국지도부가 결정한 정책이 국가재건혁명정부를 통하여 집행되었으므로, 그 정부는 사실상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국가재건혁명정부를 통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를 실현하기 시작하자,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던 중도정치세력은 국가재건혁명정부를 떠났다. 니까라과 민주화운동의 알폰소 로벨로와 민주해방연합의 비올레따 바리오스는 나중에 국가재건혁명정부에서 사퇴하였다.

1979넌 7월 9일 국가재건혁명정부는 강령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모사와 그 일당이 소유한 재산을 국유화한다. 광산과 천연자원을 국유화한다.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조결성의 권리를 보장한다. 식량, 의류, 의약품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을 안정시켜 민생보장에 힘쓴다. 주택을 개량하고,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지방학교를 증설하며, 문맹퇴치운동을 추진한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에 따라 민주적인 인민군대를 조직한다. 비동맹 외교노선을 추구한다.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신교의 자유, 정치적 망명자들의 귀환의 자유를 보장한다. 고문, 사형, 암살을 철폐한다. 열대우림지대와 야생동물을 보호한다. 대체에너지 개발사업을 추진한다. 농약살포를 통제한다.

자주적 민주정부의 강령은 곧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이므로, 위의 강령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전략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강령은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집권의지와 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정치이념이 부분적으로만 반영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래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그에 예속된 국내독점자본을 몰수하는 민주주의혁명의 국유화강령을 배제하였음이 눈에 띈다.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들은 1979년 7월 6일까지 30여 개 지역을 해방하였고, 대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혁명적 대공세에 밀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소모사는 7월 1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달아나 버렸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소모사는 미국에서도 쫓겨나 빠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으로 옮겨갔는데, 거기서 1980년 9월 17일 현지혁명세력의 손에 처단되었다.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는 7월 18일 방위군의 마지막 거점도시인 그라나다를 해방하고 그날 밤으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수도 마나과에 입성하였다. 그로써 44년 동안이나 니까라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던 소모사 반동정부는 무너졌고,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은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군복과 무기를 내던진 방위군 패잔병들은 산 환 델 수르(San Juan del Sur) 항구에 몰려들어 다른 나라로 도망칠 배편을 잡으려고 북새통을 이뤘고,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붙잡힌 반동관료들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1979년 7월 19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와 눈물로 써 내려온 라틴아메리카 혁명사는 꾸바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때로부터 꼭 20년만에 니까라과에서 두 번째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베트남에서 패한 때로부터 4년 뒤에, 그리고 이란에서 패하였던 바로 그해에 자기들의 '뒷마당'에서 또다시 쓰라린 패배를 당하였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승리에 크게 고무된 이웃나라 엘살바도르의 혁명세력들은 1980년 10월 파라분도마르띠 민족해방전선(Frente Farabundo Marti de Liberacion Nacional/FMLN)을 결성하였다.

소모사 반동정부가 무너진 뒤,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민주주의혁명의 집권전략에 따라 세워지는 새로운 정부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부, 곧 자주적 민주정부라 한다. 1980년 5월 국가재건혁명정부는 47명으로 구성된 국가평의회를 구성하여 제헌의회의 기능과 임무를 수행하였다. 1981년 국가재건혁명정부는 3명으로, 국가평의회는 51명으로 각각 재편, 강화되었다.

한편, 북(조선)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직후인 1979년 8월 21일 니까라과의 혁명정부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국교를 수립하였다. 다니엘 오르떼가는 1983년 3월과 1986년 9월 평양을 방문하였다.

6. 민주주의혁명의 승리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

소모사 반동정부의 붕괴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집권은 민주주의혁명이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모사 반동정부의 붕괴가 곧 신식민주의체제의 붕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집권한 산디니스따들의 앞길에는 반동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혁명과업들이 놓여있었다. 그들은 신식민주의체제를 무너뜨리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자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경로에 따라 전인미답의 새 길을 개척하여야 하였다.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경로가 전망하는 전인미답의 새 길을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이라 한다.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경로를 규정한 혁명의 발전론적 사상(stagist idea of revolution)에 따르면,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역사적 임무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사회주의적 발전의 촉진,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적 발전이란, 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더 높은 단계의 투쟁에 나선 자주적 민주정부의 끊임없는 혁명투쟁, 그리고 그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 성원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투쟁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니까라과혁명을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democratic phase)에서 사회주의적 단계(socialist phase)로 전진시키는 혁명투쟁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라틴아메리카에서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경로를 밟아간 혁명의 전형은 꾸바혁명에서 창조되었다. 꾸바 민주주의혁명은 1959년에 승리하였고, 1960년에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실현하였으며, 혁명적 대중단체들을 더욱 강화, 발전시킨 대중적 기반 위에서 1965년에 꾸바공산당을 창당하였고, 1976년에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함으로써 마침내 자주적 사회주의의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여기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하였던 시기에 니까라과에 형성된 사회계급관계이다. 1980년 현재 니까라과의 사회계급구성은 자본계급 0.2%(2천200 명), 중산층 19.4%(17만6천 명), 부농 및 중농 13.9%(12만5천900 명), 빈농 16.4%(14만9천300 명), 농촌노동자 11.1%(10만500 명), 노동계급 16.9%(15만3천500 명), 소상품생산자 8.8%(7만9천700 명), 실업자 및 가내노동자 13.3%(12만400 명)으로 되어있었다.

당시 경제활동인구 가운데서 노동계급이 차지한 비율은 17%이었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할 무렵, 노동계급은 전체인구 400만 명 가운데서 3.8%에 이르는 15만 명밖에 없었다. 니까라과 노동계급 15만 명 가운데서 노동조합에 망라된 노동자는 6%에 이르는 9천200 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이처럼 극소수인 까닭은, 공업화수준이 뒤떨어진 니까라과에서 농촌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빈농과 농촌노동자들이었고, 주요한 농업생산력은 중소규모의 농축산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니까라과 경제의 60%가 사적 소유에 묶여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농업경제의 사적 소유는 80%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계급관계가 말해주는 것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고 파업투쟁 속에서 단련되고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노동계급이 1만 명도 안 되는 극소수였으므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였다는 점, 소모사 반동세력과 농민대중의 대립이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되었으므로 민주주의혁명의 과업수행에서 토지개혁이 중요하였다는 점이다.

소모사와 그 일당은 니까라과 경제를 악착스럽게 틀어쥐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짓밟았다. 1975년 현재 1.5%의 대지주들이 전체 경작지의 41.5%를 소유하였다. 소모사와 그 가족은 니까라과 산업의 25%, 경작지의 10%를 소유하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1979년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졌을 때, 니까라과는 16억 달러의 외채에 짓눌려 있었고, 국고는 비어있었다. 이것은 니까라과 경제의 완전파탄을 뜻하였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세운 자주적 민주정부는 소모사 반동정부가 파탄으로 내몰았던 경제를 되살리는 매우 힘겨운 과제를 해결하여야 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이후 건설되는 새로운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 발전전망을 가진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체제이다. 민주주의혁명에서는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임무와 사회주의적 임무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게 결합되기 때문에, 진보적 민주주의는 반드시 사회주의적 발전전망을 갖게 되고, 그로써 그러한 발전전망을 갖지 못하는 사회민주주의와 형식은 비슷하나 내용적으로는 달라지는 것이다.

우선 자주적 민주정부는 소모사와 그 일당이 소유한 재산을 무상몰수하여 국유화하였고, 광산과 산림을 국유화하였다. 식량의 수출입도 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첫 해에 소모사와 그 일당이 소유한 토지 80만9천400ha를 국유화하였고, 1980년 봄에는 농업협동체(ATC)가 소유한 농지를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부농과 중농이 소유한 토지는 몰수하지 않았다. 토지개혁이 실시된 첫 해에 8만 가구의 빈농들이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았고, 뒤이어 빈농과 도시빈민 18만4천 가구도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았다. 토지를 우선적으로 분배받은 사람들은 혁명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 소모사 반동세력에게 고문을 당하거나 전사한 사람들의 유가족들이었다. 민주주의혁명을 지지하는 니까라과 농민들과 축산업자들은 1981년 4월 26일 전국농축산업조합(Union Nacionale de Agricultores y Ganaderos/UNAG)을 결성하였다. 전국농축산업조합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가장 열렬한 지지세력이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1981년 8월부터 토지개혁법과 협동조합법을 시행하였고, 1982년 가을부터 전국협동조합 개발사업(Programa Nacionale de Desarollo Cooperativo)을 추진하였다. 소농과 농업협동조합에게 저리융자를 제공하였으며, 지대를 85%나 낮추었다. 몰수하여 국유화한 농장을 국영농장으로 개조함으로써 농촌경리를 사회주의화하기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한 결과, 1983년에 국영농장의 면적은 전체농지면적의 21%, 협동조합의 농지면적은 5%로 늘어났다. 부농이 차지한 농지면적은 1978년 현재 전체농지면적의 36%이었지만, 토지개혁을 실시한 결과 1983년에는 14%로 크게 줄었다. 반면에, 중농이 차지한 농지면적은 거의 변화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였다.

1985년 현재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는 9만5천104ha의 땅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1980년부터 무상으로 분배해온 토지면적가운데 약 75%에 이르는 것이었다. 1985년 내내 다니엘 오르떼가는 전국의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에게 토지와 총을 나누어주었다. 토지는 경제건설을, 총은 혁명수호를 뜻하였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1989년에 토지개혁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다. 1989년 현재 경작지 비율을 살펴보면, 소농 48.7%, 협동조합농장 13.8%, 국영농장 11.7%, 중농 9.0%, 부농 6.4%이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실업률을 절반으로 줄였다. 특히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되었는데, 1979년 소모사 집권시기의 노조조직율은 6%밖에 되지 않았으나 1986년에는 55%로 크게 늘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지도하는 민주노조는 전체 노동계급의 3분의 2를 포괄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그에 예속된 국내독점자본을 국유화하지 않았으므로, 인민경제를 지배하는 중요산업의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 수 없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파산위기에 빠진 중산층에게 재정을 지원하였고, 낙후한 농촌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세웠고, 전체 인민들을 위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무상의료정책에 따라 인민들은 예방접종혜택을 받게 되었고, 영아사망률은 33%에서 8%로 줄어들었고, 평균수명은 7년이 늘어났다. 소모사 집권시기에는 의사가 전국에 1천 명밖에 없었으나,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의사가 해마다 500 명씩 배출되어 무상의료를 맡아보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꾸바 의사 1천500 명이 니까라과에 파견되었다. 연인원 500만 명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00만 명이 넘는 니까라과 인민들이 문맹퇴치운동의 혜택을 받았다. 소모사 집권시기에 문맹자 비율은 전체 인구의 50%를 넘었으나 1986년에는 13%로 줄어들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꾸바혁명 방위위원회를 본받아 산디니스따 방위위원회(Comites de Defensa Sandinista/CDS)를 조직하였다. 산디니스따 방위위원회는 지방자치단위로 기능하면서, 식량배급, 환경정화사업, 문예활동, 약탈방지, 방위군 패잔병 감시를 맡아보았으며, 나중에는 반혁명세력의 무력침공에 맞서 싸우는 민간무력의 역할과 군사정보망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처럼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정책들을 실시하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그 정부를 더욱 지지, 신뢰하게 되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지지와 신뢰는, 소모사 반동정부가 무너진 뒤 1985년에 처음으로 실시한 선거에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다니엘 오르떼가는 대통령으로, 세르지오 라미레즈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새로 구성한 96석의 의회에서 집권당이 되었는데, 각 정당들이 얻은 의석수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FSLN) 61석, 민주보수당(Partido Conservador Democrata/PCD) 14석, 독립자유당(PLI) 9석, 사회기독교대중당(PPSC) 6석, 대중행동운동-맑스레닌주의(Movimiento de Accion Popular, Marxist-Leninist/MAP-ML) 2석, 니까라과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Nicaragua/PCdeN) 2석, 니까라과 사회당(Partido Socialista Nicaraguense/PSN) 2석이었다.

7.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저강도전쟁'과 민주주의혁명의 좌절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 1911-2004)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온갖 파괴공작과 암해책동을 자행하였다. 1980년 7월 레이건은 "우리는 니까라과 인민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도록 지원할 것이다"고 떠들었으나, 이듬해부터 니까라과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고, 같은 해 11월 레이건은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복작전에 정부재정 1천900만 달러를 지출하였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신식민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악명 높은 '저강도전쟁(low intensity warfare)'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려는 반동무력은 두 갈래로 조직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과 국무부가 니까라과 방위군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반동무력이 니까라과 민주군대(Fuerza Democratica Nicaraguense/FDN)이었고, 니까라과 남부지방에서 소모사 반동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던 아따나시오 빠스또라(Eden Atanacio Pastora Gomez)가 산디니스따들과 함께 투쟁하다가 1982년에 돌아선 뒤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반대하여 싸운 반동무력은 민주혁명동맹(Alianza Revolucionaria Democrarica/ARDE)이었다. 이 두 종류의 반동적 무장단체를 통틀어 꼰뜨라 반혁명세력(contrarevolucionarios)으로, 또는 줄임말로 꼰뜨라로 부른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1983년 여름부터 니까라과 이웃나라인 온두라스에 1만 명이 넘는 반동무력을 집결시키고 니까라과에 침투시켜 반동적 파업을 선동하였으며, 산디니스따 인민군 거점, 식량창고, 석유시설, 병원, 학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 파괴하였고, 항만에 기뢰를 설치하였다. 1980년 중반에 이르러 꼰뜨라의 병력수는 1만5천 명으로 늘어났다.

꼰뜨라와 살인집단(death squad)을 지휘하면서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려고 날뛰었던 자는 온두라스 주재 미국대사였는데, 그가 바로 오늘 부쉬 밑에서 15개 국가정보기관을 총지휘하는 국가정보국장 존 니그로폰테(John D. Negroponte)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자기들의 적국인 이란에 무기를 밀매하여 거머쥔 자금을 꼰뜨라에게 보내주거나, 빠나마의 마약총책 대통령 안또니오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 Moreno)를 통해서 마약밀매로 긁어모은 검은 돈을 꼰뜨라 지원금으로 보내주었다. 그러한 비밀공작을 전담하였던 자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었던 이란-꼰뜨라 사건의 주범 올리버 노스(Oliver North)이다.

꼰뜨라가 '저강도전쟁'에 미쳐 날뛰자 도시와 농촌의 청년근로자들은 산디니스따 인민군에 들어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고, 그로써 도시와 농촌의 노동력이 감소되었다. 특히 꼰뜨라는 니까라과 인민을 식량난에 몰아넣기 위해서 식량창고를 파괴하고 전국농축산업조합 지도자들을 살해하였다. 그 결과, 식량공급체계가 무너지면서 식량난에 빠졌고, 시장은 급격한 통화팽창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식량난과 통화팽창이 극에 이르렀던 1988년 2월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공공지출을 줄이는 긴축정책을 실시하였고, 6월에 긴축정책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통화팽창은 실로 천문학적으로 폭증하여 3만3천%까지 오르면서 니까라과 경제체제를 무너뜨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강력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산업시설과 생활환경을 파괴하였다. 노동계급의 임금은 1981년 이후 90%까지 줄어들었고, 실업률은 소모사 집권시기의 실업률을 웃돌았다. 경제성장률은 세계은행이 예측하였던 것의 25%밖에 채우지 못하였다. 인민의 생활수준은 하이티보다 낮아지면서 최빈국으로 되었다. 가혹한 시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자주적 민주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로부터 무기와 재정을 받는 꼰뜨라의 '저강도전쟁'에 맞서 방어전을 수행하여야 하였던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는 1980년대 중반에 정부재정의 40%, 국민총생산(GNP)의 50%를 군사비로 지출하게 되었다. 1990년 현재 니까라과의 군사비는 정부재정의 62.5%를 차지하게 되었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사회주의적 발전을 위해서 쓰여져야 할 막대한 재정과 자원이 군사비로 쓰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 현재 4만 명이 넘는 니까라과 인민들이 꼰뜨라의 '저강도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꼰뜨라와의 전쟁에서 5만8천 명이 희생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궁핍은 자주적 민주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신뢰를 감소시키고 있었다. 자주적 민주정부와 인민대중을 갈라놓는 격리전략, 바로 이것이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자주적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밀어붙였던 반동적 체제붕괴전략이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자주적 민주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책동은 꼰뜨라를 '저강도전쟁'에 내모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1985년 5월 니까라과에 대한 강력한 경제봉쇄를 실시하고 니까라과가 다른 나라로부터 재정지원이나 차관을 받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이것은 이미 1982년부터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이 니까라과에 대한 금융지원을 중단하였던 것에 추가하여 취해진 경제봉쇄이다.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와 인민들은 꼰뜨라의 '저강도전쟁'과 제국주의경제봉쇄라는 이중적 시련을 겪게 되었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요청한 긴급지원에 부응한 첫 번째 도움의 손길은 꾸바로부터 왔다. 꾸바는 니까라과 사탕수수산업을 현대화하는 사업에 기술자를 보내주고 재정을 지원하였다. 꾸바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설된 현대적인 사탕수수공장은 1985년 1월 피델 까스뜨로(Fidel Alejandro Castro Ruz) 의장이 니까라과를 방문하는 때에 맞춰 완공되었다.

1988년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꼰뜨라와 에스뀌뿔라스 제2협약(Esquipulas II)을 체결하였다. 그 협약은 꼬스따리까의 사회민주주의자 대통령 오스까르 라파엘(Oscar Rafael de Jesus Arias Sanchez)이 니까라과 자주적 민주정부와 꼰뜨라 사이에서 중재한 것이다. 그 협약에는 쌍방이 전투를 중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 협약에 따라, 1990년 2월 26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선거에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대선후보 오르떼가는 14개 정당들의 선거공조체제인 전국반대연합(Union Nacional Opositora/UNO)의 대선후보 비올레따 바리오스에게 패하였다. 전국반대연합에 결집한 정당들은 대중보수연합(APC), 니까라과 민주화운동(MDN), 전국행동당(PAN), 보수전국행동당(PANC), 전국보수당(PCN), 전국신뢰민주당(PDCN), 중미통합당(PICA), 자유당(PL), 자유헌정당(PLC), 독립자유당, 사회기독교대중당, 사회민주당(PSD), 그리고 좌파정당을 자처하는 니까라과 공산당과 니까라과 사회당이었다. 1990년 총선에서 총의석수는 92석이었는데, 각 정당들이 얻은 의석수는 전국반대연합 51석,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 39석, 대중행동운동-맑스레닌주의 3석, 니까라과 공산당 3석, 니까라과 사회당 3석, 대중사회기독교당 3석, 민주보수당 3석, 독립자유당 3석, 사회기독교당(Partido Social Cristiano/PSC) 1석, 혁명단결운동(Movimiento de Unidad Revolucianaria/ MUR) 1석이었다.

1990년에 실시된 니까라과 선거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그 선거가 실시되기 두 달 전인 1989년 12월 23일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빠나마를 침공하여 대통령 노리에가를 체포하고 미국으로 압송하여 플로리다주 연방교도소에 투옥한 사건이었다. 빠나마를 침공한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전국반대연합(UNO)의 대선후보 비올레따 바리오스가 당선되지 않을 경우 니까라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여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비올레따 바리오스의 선거재정을 지원하였다. 빠나마 무력침공 이전에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율은 47%였으나, 빠나마 무력침공 직후인 1990년 1월에 지지율은 37%로 급락하였다.

1991년 4월 대통령 집무실을 떠나던 날, 오르떼가는 "우리 산디니스따 전사들은 정부직책에 집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존엄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렸으니, 승리의 걸음으로 여기를 떠난다"고 외쳤다.

우려했던 대로, 새로 등장한 친미예속정부는 민주주의혁명의 성과들을 제거하고,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신자유주의정책에 따라 공기업들이 다시 민영화되었고, 반동세력의 대중선동을 차단하기 위한 언론검열제도가 폐지되었다. 각급 학교들에서는 미국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만들어진 교재를 쓰면서 니까라과 반제투쟁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다. 군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병력수를 9만7천 명에서 1만3천500 명으로 줄이고 민병대를 해산하였으며 징병제를 폐지하고, 산디니스따 인민군을 국방군(Ejercito Nacional)으로 개칭하여 혁명군대의 성격을 제거하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천주교(Catholic Church)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천주교에서는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물결이 일어났다. 니까라과의 천주교 성직자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기초공동체(Communidades Eclesiais de Base/CEB)를 건설하고 농민대중의 의식화사업에 나섰으며, '대중교회'들은 민주주의혁명을 지지하였고, 천주교 신부 가스빠르 가르씨아(Gaspar Garcia Laviana, 1941-1978)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를 따라 혁명의 무기를 들고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민중시인이며 천주교 신부인 에르네스또 까르데날(Ernesto Cardenal Martinez)은 자주적 민주정부의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니까라과 천주교의 교권세력은 반동적이어서 민주주의혁명을 줄곧 반대하였다.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는 천주교가 운영하는 라디오방송(Radio Catolica)이 반동적인 내용의 방송을 내보낼 때마다 여러 차례 송출을 중단시켰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한 근본원인은 제국주의전쟁광들의 반혁명전략에 있었지만, 천주교 교권세력의 반동성도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킨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8.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킨 요인들

8-1) 지난 시기 산디니스따들은 제국주의 미국의 군사강점에 맞서 싸운 산디노의 반제투쟁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뜻에서 자기 조직의 이름을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으로 정했고, "양키는 인류의 적"이라는 구절이 들어간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혁명가를 부르면서 투쟁하였다. 2006년 10월부터 시작된 선거유세에서 다니엘 오르떼가는 이렇게 외쳤다. "양키들은 더 이상 니까라과를 지배하지 말라. 미국은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하지 말라! 우리는 혁명의 길을 펼쳐갈 것이다. 그것이 미제국주의에 항복하지 않는 승리적 대안이다."

그러나 소모사 반동정부와 맞서 싸울 때 산디니스따들은 대중항쟁을 전개하면서도 수도 마나과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공격하지 않았다. 1974년 12월 27일 밤, 산디니스따 무장대오가 자본가의 저택을 습격하여 소모사의 친척과 고위관리들을 포로로 붙잡았을 때도, 니까라과 주재 미국 대사 터너 쉘튼(Turner Shelton)이 연회장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떠난 직후인 밤 10시 50분에 가서야 습격전투를 개시하였다.

이처럼 산디니스따들이 제국주의 미국과의 대결을 피한 것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제국주의세계체제와의 단절과 신식민주의체제의 붕괴라는 반제국주의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산디니스따들이 집권한 직후인 1979년 9월 다니엘 오르떼가는 워싱턴을 방문하여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오르떼가는 니까라과와 미국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자고 제안하고, 경제지원을 요청하였다. 산디니스따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적대관계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꼰뜨라를 앞세워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고립, 압살하는 '저강도전쟁'으로 응답하였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이 반파쇼민주화의 과업을 완성하고 나서 반제국주의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경로가 차단되고 민주주의혁명이 중도에서 멈추었음을 뜻한다. 반제국주의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 민주주의혁명의 길에서 반자본주의계급해방의 과업을 수행하는 사회주의적 발전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8-2) 만일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가 니까라과를 제국주의세계체제와 완전히 단절시키고 신식민주의체제를 무너뜨렸다면, 그 정부는 불가피하게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과 대결해야 하였을 것이다. 자주적 민주정부에게 제국주의전쟁광들과의 대결이란 무력침공, 경제봉쇄, 전복공작의 3중 포위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뜻하였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의 3중 포위공격을 막아내고 민주주의혁명의 전취물을 수호하고 그 혁명을 사회주의적으로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도 혁명군대를 건설하는 과제부터 해결하여야 하였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산디니스따 무장대오를 주축으로 하고 훔베르또 오르떼가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산디니스따 인민군(Ejercito Popular Sandinista/EPS)을 5만 명의 병력으로 조직하였고, 민병대(Milicias Populares/MP)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공업화수준이 매우 낮고 생산력이 피폐해진 니까라과에 무기생산능력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자주적 민주정부는 산디니스따 인민군을 무장시킬 수 없었다. 꾸바로부터 무기를 넘겨받기는 하였으나 턱없이 모자랐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소련정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련정부는 미그-21기를 제공하고 공군조종사를 훈련시켜주기로 약속해놓고서도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자기들에게 압력을 넣자 시간을 끌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하는 수 없이 프랑스정부에게 미라주전투기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 대통령 프랑수아 미떼랑(Franc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1916-1996)도 응낙하였으나,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전투기들이 니까라과에 도착하는 경우 항만시설을 폭격하겠다고 공공연히 위협하였다.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는 항만시설이 폭격을 받더라도 미라주전투기를 들여오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였으나, 프랑스정부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의 협박에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리비아정부가 보내준 소형군용기들이 중간기착지인 브라질에 이르렀을 때,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그 군용기들의 항로를 가로막고 리비아로 돌려보냈다.

병력수와 무장장비가 훨씬 우세하였던 소모사 반동정부의 방위군 정규무력을 제압한 산디니스따들에게 5만 명 정규무력으로 창설한 산디니스따 인민군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1만5천 명밖에 되지 않는 비정규무력인 꼰뜨라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꼰뜨라의 반동무력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뒤에 그들을 움직이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디니스따들은 제국주의전쟁광들이 꼰뜨라를 앞세운 '저강도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정부 수립 이후 10년만에 좌절하였다.

8-3) 민주주의혁명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그에 예속된 국내독점자본을 무상몰수하여 국유화하는 경제강령을 실현하는 데, 니까라과에서는 국내독점자본이 성숙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국주의독점자본을 몰수하면 중요산업의 국유화강령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적 민주정부는 소모사와 그 일당이 소유한 기업체들을 몰수하면서도 제국주의독점자본들인 엑슨(Exxon)과 제너럴 밀스(General Mills)가 소유한 생산수단은 몰수하지 않았다. 이것은 꾸바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이듬해인 1960년에 꾸바의 자주적 민주정부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그에 예속된 국내독점자본의 생산수단을 무상몰수하여 중요산업의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실현하였던 역사적 경험과 비교된다.

니까라과에서 자주적 민주정부가 제국주의독점자본을 용인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가로막은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을 용인한 조건에서,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대량착취, 대량수탈을 방치한 조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은 중요산업의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뜻하며, 경제체제 전반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완성은, 자주적 민주정부가 낡은 자본주의착취체제를 청산하고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된 중요산업의 생산력을 계속 발전시켜 사회주의공업화를 힘있게 밀고 나갈 때 가능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중요산업의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외면하고 이른바 '혼합경제(mixed economy)'라고 부르는 개량주의경제강령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없고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도 없다.

산디니스따들이 영도한 자주적 민주정부의 경제강령은 민주주의혁명의 국유화강령을 외면한 사회민주주의에 기울었으므로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은 반제국주의민족해방과 반자본주의계급해방의 길을 밝혀주지 못한 채 중도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국유화한 중요산업을 물적 기반으로 하여 사회주의공업화를 추진하여야 하였으나, 니까라과의 자주적 민주정부에게는 그러한 물적 기반이 없었다. 그 좌절이 불러온 결말은 친미예속세력의 집권과 신자유주의경제체제의 복귀라는 역사의 비극이었다.

8-4) 소모사 반동정부를 무너뜨린 산디니스따들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revolutionary party of the working class)을 건설하는 혁명과업에 집중하여야 하였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소수의 혁명적 정파들이 하루아침에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진보정당의 기초 위에서 건설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혁명의 불길 속에서 강철처럼 단련된 노동계급의 선진역량이 진보정당의 계급적 중심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확대함으로써 노동계급은 마침내 자신의 혁명적 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노동계급적 중심과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지 못하였다. 1981년에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당원수는 500 명이었고, 전성기의 당원수도 1만2천 명에 머물렀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진보정당으로 정치세력화되지 못할 때, 그리하여 진보정당이 빠진 채 체질이 약한 통일전선이 형성될 때, 그 전선은 자기를 와해시키는 고질적 병폐인 기회주의(opportunism) 또는 종파주의(sectarianism)가 좌파정당의 간판을 들고 돌아치면서 전선을 분열시키는 것을 막지 못한다.

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에 맞서 대립각을 세우고 전선을 분열시켰던 좌파정당들은 니까라과 공산당과 니까라과 사회당이었다. 그 두 당은 1990년에 미국 중앙정보국의 원격조종으로 출현하여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에 맞선 전국반대연합에 참가함으로써 제국주의선거공작에 놀아나고 말았다. 일부 좌파세력들은 전국반대연합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대중행동운동-맑스레닌주의, 니까라과 맑스레닌주의당, 노동자혁명당으로 분산, 분열되었다. 기회주의와 종파주의에 사로잡힌 좌파정당들의 모습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채, 좌파정당의 간판만 간신히 지키고 있는 꼴이다. 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는 시기에 좌파정당들끼리 갈라져서 싸우는 것은 대체로 미국 중앙정보국의 분열공작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은 이른바 정치적 다원주의(political pluralism)를 청산하지 못하였다. 정치적 다원주의란 배반과 야합의 생리를 가진 부르주아정치제도의 근본인 다당제를 뜻한다. 다당제는 부르주아선동가들이 떠드는 그 무슨 정치적 자유가 실현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모순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적 분열과 대립이 제도화된 결과물이다. 선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다당제는 1990년 선거에서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켰다.

민주주의혁명의 승리가 사회계급적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진보적 민주주의의 완성이 정치제도의 근본변혁을 추구할 때, 그때부터 자주적 사회주의의 정치적 일치, 협동, 단결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계급사회의 낡은 유물인 정치적 다원주의를 청산하고 자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간다.

9. 글을 맺으며

꾸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그리고 니까라과로 이어지는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혁명의 대장정이 지난 수 십 년 동안 몰아닥친 시련과 난관을 딛고 승리의 궤도를 따라 전진하게 될 것인가? 이 물음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주목하는 것은, 2006년 11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대선승리가 곧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까닭은, 오늘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역량이 1980년대 전성기의 역량에 비해 취약하기 때문이다. 니까라과 노동계급은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의 혁명적 노동운동, 중도파계열의 노동운동, 보수우익계열의 노동운동으로 갈라져있고, 제국주의무력침공을 막아줄 군대는 무력화된지 오래이다.

이번 대선에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승리한 주요원인은, 그들의 주체역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익정치세력이 분열하여 약화되었고, 다니엘 오르떼가가 우파후보와 선거공조체제를 형성해서 지지표를 모았다는데 있다.

2006년 4월 1일 니까라과는 미국과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을 체결하였다. 꾸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가 제국주의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신식민지체제 사이에 맺어지는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FTA)'에 대항하여 인민무역협정(People's Trade Agreement/PTA)을 추진하고 있는데, 다니엘 오르떼가의 새로운 정부가 중미자유무역협정을 폐기하고 인민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재생은 혁명의 주체역량이 재생되는 것을 뜻하므로, 오르떼가가 집권한 새로운 정부가 16년 전에 좌절한 민주주의혁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마땅히 혁명의 재생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혁명의 재생력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조직역량에서 분출되는 거대한 힘이다. 꾸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가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재생을 지원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니까라과 민주주의혁명의 재생여부는 일차적으로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조직역량을 결집시킨 통일전선을 일으켜 세우고 그 전선역량으로 신식민주의체제를 무너뜨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2006년 11월 2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