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 진보정당의 사회주의적 이상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
3. 분해되는 중산층, 실현불능의 복지주의개혁
4. 민주주의개혁의 부재와 정치정세의 혼란
5. 역사적 대체자 사회주의
6. 현실사회주의의 좌절과 사회주의발전전략의 요체
7. '제3의 길'은 없다
8.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찾아서
9. 연재를 마감하며

1. 글을 시작하며

민주노동당은 남(한국)에 존재하는 합법정당들 가운데 하나이다. 민주노동당만이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도 합법정당이다.

민주노동당이 합법정당이라는 규정은,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조직적 수준을 넘어선 비합법정당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나 의미 있는 규정으로 될 것이다. 아직 비합법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남(한국)사회에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합법정당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심지어 당의 정체성을 합법주의로 제한하는 오류가 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합법정당이라는 규정은 합법주의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민주노동당이 다른 합법정당들과 똑같이 합법주의에 의존한다면, 당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남(한국)의 합법정당들 가운데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가진 존재가치는 합법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합법정당이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합법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지니는 정체성은 대중정당이자 진보정당이라는 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 근로대중, 서민의 삼자 정치연합이라는 뜻에서 전위정당과 구별되고 계급정당과도 구별되는 대중정당이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로, 사회개량을 넘어 사회변혁으로, 민주주의개혁을 넘어 민주주의혁명으로 나아간다는 뜻에서 개혁정당과 구별되고 혁명정당과도 구별되는 진보정당이다.

대중정당이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다른 합법정당들과 질적으로 다른 합법정당이다. 모든 합법정당이 대중정당으로, 진보정당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정당이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은 현실과 이상이 만나는 접속선 위에 있다.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현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살며 투쟁하는 현실이며,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상은 사회주의적 이상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과 진보정당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민주주의혁명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이 민주주의혁명의 실천을 통해서 형성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 속에서 집권투쟁을 밀고 나가면서 그들의 미래를 사회주의적 이상으로 설계하는 정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여섯 차례 이어 실은 긴 글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논제는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적 이상으로 설계하는 미래사회의 상에 관한 것이다.

2.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

오늘 남(한국)의 현실을 여러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적, 계급적 관점에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적, 계급적 관점에서 오늘 남(한국)의 복잡한 현실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모든 형태의 개혁은 사회계급적 성격을 지닌다. 모든 개혁이 다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계급이 개혁을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개혁의 내용이 결정된다. 개혁은 그것이 지닌 사회계급적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현 시기 남(한국)에서 개혁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제국주의세력과 국내지배계급이 강행하는 신자유주의개혁(neoliberal reform), 중산층이 요구하는 복지주의개혁(welfarist reform), 그리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민주주의개혁(democratic reform)이다.

비유로 표현하자면 신자유주의개혁이란 신자유주의세계화가 낳아놓은 '패륜아'이다. 신자유주의개혁은 이른바 '시장개방'이라는 명목으로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 식민지초과이윤을 대량수탈하는 길을 터주고, 이른바 '민영화'라는 명목으로 중요산업의 공공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계급의 사적 소유와 지배를 극대화하며, 이른바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노동계급을 길거리로 내모는 대량실업을 자행하고, 이른바 '비정규직'이라는 명목으로 거대한 실업자군을 착취체제 안으로 흡수하여 그들의 피땀을 쥐어짜고, 이른바 '긴축재정'이라는 명목으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위한 기존의 사회안전망을 파괴하는 사회정치적 만행이다.

민주주의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복지주의개혁은 이른바 '복지사회건설'이라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체제의 모순, 신식민주의체제의 모순을 은폐, 완화하고, 노동계급을 자본계급과의 '사회적 타협'으로 유인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의지를 마비시키고, 중산층의 지지기반 위에서 자본주의사회의 지속적인 안전을 꾀한다는 뜻에서 보수적이다. 복지주의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중산층의 정치적 보수성은 민주주의혁명의 발전전망을 배제한다.

그에 비해서, 민주주의개혁은 현 시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요구에 전적으로 부합하고, 민주주의혁명을 밀고 나가는 발전계기로 된다는 뜻에서 진보적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민주주의개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실질적이고, 진보적이고, 자주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결정적인 계기이자 민주주의혁명으로 솟구치는 도약대이다. 신식민주의체제에서 일어나는 사회변혁은 반제국주의민족해방과 민주주의개혁을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으로 시작되어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파하고 사회주의건설로 성장, 전화하는 두 단계 사회변혁의 연속적 발전경로를 밟아나간다.

오늘 남(한국)에서 집권세력으로 군림하는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추구해온 개혁은 명백하게도 신자유주의개혁이다. 중산층의 지지를 등에 엎고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결국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자신의 지지기반인 중산층이 요구하는 복지주의개혁마저 냉혹하게 외면하고 가장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개혁을 밀고 나간 일련의 포악한 정치행위는, 그들이 자기의 지지기반을 제 손으로 허물어뜨리고 제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정치적 몰락의 행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행진의 끝에는 그들에게 몰아닥칠 처참한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집권하면서 이른바 '참여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걸었는데, 그 참여라는 말에는 중산층이 정치적으로 참여하여 자기들을 지지해달라는 기대가 섞여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개혁은 사회계급관계를 양극화하여 중산층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분해시킴으로써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애초에 걸었던 기대와는 정반대로 중산층의 정치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질곡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정치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거기에 있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복지주의개혁을 외면하고 신자유주의개혁을 밀고 나가면, 그들 자신이 정치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할 만큼 우매하기에 자승자박의 질곡에 묶인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승자박의 질곡에 묶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압력이 그들의 정치적 의사와는 무관하게,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의 정치적 의사를 짓누르면서 강제하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의사를 짓눌러 굴복시키고, 그들이 신자유주의개혁을 강행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인 압력이란 제국주의세계체제가 남(한국)의 신식민주의체제에 가하는 신자유주의세계화의 엄청난 압력이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신자유주의세계화의 압력에 굴종하여 신자유주의개혁을 밀고 나간 까닭에, 오늘 남(한국)사회는 '취업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에서 탈락한 대중의 좌절과 불행이 뒤덮인 비극사회로 전락하였으며, 가난한 근로대중은 죽을 수밖에 없고 노동계급은 일할수록 빚더미만 늘어가는 절망사회로 전락하였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적, 계급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남(한국)사회가 그렇게 전락하게 된 원인을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오만, 위선, 무능에서 찾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견해이다.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신자유주의세계화 요구에 굴종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개혁을 강행해온 것이야말로 남(한국)에 미증유의 정치적 파국과 사회적 위기를 몰고 오는 직접적 원인이다.

오늘 남(한국)사회의 현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대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밀고 나가는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개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삶을 최악의 상태로 끌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주택문제가, 사교육비의 폭증으로 교육문제가, 사회안전망의 파괴로 의료문제가 극단적으로 악화된 것이다.

2006년 9월 17일 재정경제부가 펴낸 『2005년 경제백서』에서 노무현정부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인 권오규는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세계화와 정보화에 따라 경제 양극화 현상이 진행돼왔고 경기부진 등 영향이 더해지면서 2003년 이후 저소득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됐으며 계층별로는 중산층이 줄어드는 대신 저소득층이 증가"하였다고 탄식하였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5년 8월 현재 법정 최저임금인 시간당 2천840원을 벌지 못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1백2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생활형편이 개선될 가망이 없는 최악의 빈곤에 빠져들었음을 뜻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들어간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이른바 양극화가 가장 심한 3대 국가는 남(한국), 미국, 멕시코이다. 멕시코는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뒤로 양극화가 심화되었는데,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그러한 멕시코의 불행을 못 본 체하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고 안달이다.

다시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남(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총인구의 전체 소득 가운데서 노동계급의 임금과 영세자영업자의 소득은 1990년부터 1996년까지의 기간에 평균 81.6%를 차지하였으나 2004년에는 68.4%로 떨어졌는데 비해, 극소수 자본계급이 거머쥔 소득은 18.1%에서 31.6%로 늘어났다. 요즈음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입만 열면 경제의 양극화를 걱정하고, 수다스런 보수언론들은 지면마다 소득의 양극화를 대서특필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저들이 그냥 양극화라고 모호하게 지적하는 사회현상은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강압과 신자유주의개혁의 강행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사회계급관계의 양극화이다.

사회계급관계의 양극화가 자본주의체제의 모순과 신식민주의체제의 모순을 격화시키면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 남(한국)의 사회계급관계가 양극화되면서 가장 심한 고통을 겪는 희생자는,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 무한정한 착취구조의 올가미에 목이 졸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통계자료가 그러한 현실인식을 뒷받침한다. 이를테면, 2001년에 737만 명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자수는 2005년에 84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98년에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사태가 터졌을 때 사상 최고로 치솟았던 실업률이 1999년부터 낮아진 까닭은, 노동계급에게 정규직 취업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화한다는 '노동개혁'의 명목으로 비정규직을 끊임없이 확대하였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사태가 몰고 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대량파산, 연쇄파산으로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실업자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환되었으며, 취업률의 증가는 비정규직의 확대와 동의어로 되었다.

노동계급을 더 악랄하게 착취하는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개혁을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강행하는 것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깨버린 착취의 올가미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을 조이면서 그들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무한정 착취하는 것이다. 이른바 '노동개혁'이라는 명목으로 기존의 착취구조를 더욱 강화, 확장하는 데서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의 반동성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추진해온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은 파산하고 말았다. 그것은 회생할 가망이 없는 전면적 파산이다. 신자유주의개혁이 그처럼 무참하게 파산한 까닭은 두 가지이다. 남(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을 더 이상 확대할 수 없을 만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고,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에 맞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저항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산발적 파업이 차츰 확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유권자의 신분으로 투표장에 나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열린우리당에게 등을 돌린 2006년의 5.31 지방선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5.31 지방선거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개혁의 구호를 떠들어대곤 하였으나, 지금은 헛구호마저 들리지 않는 적막감이 감돈다. 애초에 그들은 제국주의세계체제의 강압에 굴종하여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개혁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나니, 신자유주의개혁의 전면적 파산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은 신식민지체제에서 식민지초과이윤을 집어삼키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그에 예속된 국내독점자본의 이중적 수탈을 극대화하는 한 쌍으로 존재한다. 그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삶이 전반적으로 궁핍화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서 중산층마저 분해된다. 혼란과 격돌이 뒤엉킨 현 정세에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서민경제'를 살리자는 헛구호를 요란하게 외치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기만하거나, 진압경찰을 앞세워 그들의 저항을 짓누르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은 역사적 필연이다.

3. 분해되는 중산층, 실현불능의 복지주의개혁

중산층의 정치성향은 다층적이고 유동적이고 때로 불안정하지만, 대체로 형식적 민주주의(formal democracy), 정치적 다원주의(political pluralism),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울어져 있다. 중산층은 동요성, 이중성, 기회주의적 속성이 강한 사회계층이다. 중산층의 전형적인 사고와 행동은 사회정치적 안정에 대한 요구와 사회변혁에 대한 거부감으로 두껍게 포장된 정치적 보수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한(조선)반도의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남(한국)의 중산층은 이념적 경직성과 보수성에 매몰되어 사회변혁에 대한 공포감과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고, 독자성이 약하다.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얽매인 신식민주의체제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축적위기로 흔들릴 때마다 부침을 거듭해온 남(한국)의 중소기업의 불안정성이 장기적으로 덧쌓이면서 중산층은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정치세력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남(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그 어떤 사회보다도 중소자본이 발달하고 중산층이 비대해진 사회이다. 남(한국)에서 국내중소자본의 시장점유율이 부쩍 높아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남(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이라는 정치적 개념은 1987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중산층이라는 정치적 개념에는 중소기업경영인, 기업형 중농, 기업형 자영업자, 도시근로자 상층, 고소득 수입자 등이 포함된다.

중산층과 구분되지만, 흔히 섞어 쓰곤 하는 또 다른 정치적 개념은 서민인데, 서민이라는 정치적 개념에는 영세자영업자, 도시빈민, 빈농, 저소득 근로자, 실업자 등이 포함된다. 정치적 보수주의에 빠져있는 중산층과 달리,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서민은 민주주의혁명에 절실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민주주의혁명의 통일전선이 노동계급, 근로대중, 서민의 삼자 정치연합으로 형성되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남(한국)의 중산층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남(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중산층이 하나의 사회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계기는 1987년 6월에 폭발한 대중항쟁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근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한 중산층은 마침내 선거판세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문민정권'으로 분장한 김영삼정권이 제국주의세계체제가 강요한 신자유주의세계화를 추종하기 시작하고, 그 뒤를 이어 김대중정권이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사태에서 벗어나려고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개혁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중산층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무현정권이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을 막바지에로 끌어올리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고 광분하는 오늘, 중산층은 산산이 분해되고 있다. 중산층의 분해는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이 중소자본을 황폐화시키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서 필연적이지만, 그와 더불어 중산층을 분해시키는 정치적 요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 남(한국)의 중산층이 정치적으로 분해되는 까닭은,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강압에 굴종하여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을 밀고 나가는 노무현정권 및 열린우리당과 그들에게 저항하는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 사이에서 중산층이 혼란과 동요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혼란과 동요에 빠진 중산층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민주주의개혁에 대한 입장과 태도에 따라 여러 갈래로 분해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에 저항하여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과정에서 그 정치연합에 참가하는 중산층은, 중산층 일반이 아니라 민주주의개혁을 지지하는 진보적 성향의 중산층이다. 중산층은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과 정치적으로 연합할 때, 다시 말해서 통일전선에 참가할 때, 마침내 민주주의혁명의 적극적인 지지자, 협력자로 나서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밀고 나가는 신자유주의개혁이 파산하자, 복지주의개혁을 사회정치적 대안으로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복지주의개혁은 정부구조개혁, 중요산업의 사회화와 공공성 강화, 사회적 균등분배, 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향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중산층의 생활형편 개선, 사회보장정책 실시 등을 실현한다.

복지주의개혁을 실현하려는 여러 형태의 정치이념을 통틀어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라 부른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성장, 법치주의, 기회균등 같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귀가 솔깃해지는 가치를 내놓는다. 여러 갈래의 사회민주주의 가운데서도,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옹호하는 우경적 사회민주주의를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 한다.

주목하는 것은, 복지주의개혁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 계급투쟁을 회피하거나 잠재우고, 사회계급적 적대감의 완화 또는 사회계급적 협조 등으로 표현되는 일련의 사회개량을 실현한다는 점이다.

복지주의개혁이 사회개량의 유연성(flexibility)을 발휘할 때, 그 유연성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산발적 저항을 어지간히 흡수, 해소하면서 자본주의체제의 지탱력을 보강하고 체제안정을 실현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복지주의개혁을 통하여 자본주의사회의 지속적 발전전망을 내올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중요산업의 부분적 사회화 및 통제에 의존하는 이른바 반독점 혼합경제체제를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복지주의개혁을 실현할 때, 자본주의체제의 모순과 신식민주의체제의 모순이 각각 은폐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계급적 적대감이 완화됨으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의식에는 체제순응의 요구가 만연하게 된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실질임금 상승, 노동시간 단축, 고용조건 개선, 노동조건 개선, 사회보장 확대 등으로 생겨난 이른바 '계급상승'의 기회에 편승하여 신흥중산층이 출현하고, 노동계급 내부에 비노동계급적 요소가 침투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계급의식과 반제의식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을 뜻한다. 진보정당이 사회민주주의 정치이념과 복지주의개혁강령에 손발이 묶이면 '투표용지로 세상을 바꾸자'는 허황한 구호를 외치면서, 승리의 가망이 없는 선거전술과 의회정치에만 몰두하다가 '영구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의 광풍이 몰아치는 남(한국)에서는 노동계급의 실질임금 상승, 노동시간 단축, 고용조건 개선, 노동조건 개선, 사회보장 확대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무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개혁의 광풍에 사회민주주의전략으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남(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개량을 실현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기력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남(한국)사회에서 복지주의개혁이 실현될 수 없는 까닭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째, 제국주의 미국이 장악, 주도하는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내부모순이 격화되는 경우, 그 격화의 파장을 남(한국)의 신식민주의체제로 마구 떠밀어버리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저지른 과잉투자, 과잉생산, 과잉신용의 누적은 제국주의세계체제의 내부모순을 한껏 격화시켜 결국 자본주의세계시장의 급격한 위축,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성장둔화라는 일련의 파장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을 '호황의 종식'이라 한다. 제국주의세계체제의 '호황기'가 끝나는 때로부터, 그 파장은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자본주의체제보다 먼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신식민주의체제에 사나운 광풍을 몰아온다. 그 광풍에 휘말린 남(한국)의 경제는 발전동력을 잃어버린 채, 한때 차지하였던 '신흥공업국'의 자리에서 밀려나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둘째, 복지주의개혁이 그럭저럭 실현되었다는 스웨덴 같은 나라와 달리, 남(한국)에는 신식민주의체제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수언론들이 이른바 '국부유출'이라는 기만용어로 표현하는 경제현상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국부'란 말 그대로 나라의 재부라는 뜻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창출한 초과이윤이며, '유출'이란 말 그대로 흘러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윤수탈이다. 남(한국)의 신식민주의체제에서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창출한 초과이윤을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모조리 거둬 가기 때문에 복지주의개혁의 가능성이 봉쇄되는 것이다. 거칠게 비유하면, 제국주의독점자본은 식민지초과이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괴물'이며, 신식민주의체제는 그러한 '괴물'이 마구 휩쓸고 다니는 '쥬라기공원'이다.

복지주의개혁에 의존하는 사회민주주의는 그것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반독점민주화에 부응하여 중요산업의 사회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할 수는 있지만, 민주주의혁명으로 발전하지는 못한다. 신식민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이중모순을 타파하는 민주주의혁명의 발전전망을 배제하고, 그 혁명의 발전경로와 단절된 복지주의개혁이 남(한국)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4. 민주주의개혁의 부재와 정치정세의 혼란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전망을 지닌 진보적인 개혁을 민주주의개혁이라 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조직인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민주주의개혁이 가장 진보적인 개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전망을 가진 민주주의개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계급적 이익과 일치할 뿐 아니라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쟁취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개혁은 그것이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전망을 가질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적,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의 발전계기로 되는 것이다.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전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개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 계급투쟁은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 계급투쟁에 의거하여 민주주의개혁이 실현된다는 말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그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항쟁을 일으킴으로써 신식민주의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타파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논한 신자유주의개혁이나 복지주의개혁이 집권세력의 행정집행으로 추진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민주주의개혁은 하나의 전선으로 결집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대중항쟁을 일으켜 전투적으로 밀고 나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에 의해 '아래'로부터 추동되는 민주주의개혁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이자,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민주주의혁명의 발전계기이다. 민주주의개혁은 민주주의혁명의 과정 안에 하나의 발전계기로 포괄되고 그 혁명의 강령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강령에서 제시한 민주주의개혁정책은, 곳곳에서 부정확한 서술이 눈에 띄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을 정책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민주주의개혁정책을 개발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민주주의개혁을 실현하는 투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현 시기 민주노동당 앞에 나선 당면과업이다.

민주주의혁명은 민주주의개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발전계기로 자기 안에 포괄하는 사회변혁이므로, 민주주의개혁을 밀고 나가는 동력은 마땅히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과 진보정당의 삼자 정치연합 곧 통일전선에서 나와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대중조직들 및 개혁적 대중조직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개혁이 파산한 지금, 민주주의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며, 시급하고, 중대한 정치과업으로 된다.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생계불안과 민생파탄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가운데, 그들의 잠재동력을 표출, 발동하는 산발적 파업투쟁, 비정규직차별 철폐투쟁, 한미자유무역협정 저지투쟁이 곳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외면하지만, 몇 해 사이에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에 저항하여 분신하거나 희생된 노동자와 농민은 15명이나 된다.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을 고무, 찬양하는 선동가들은 민주노총의 정당한 파업투쟁을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관행적인 파업과 강경한 투쟁'으로 왜곡하는 비방선동에 열을 올리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파업투쟁을 통해서 정치적 보수성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대중조직에 결집될 수 있으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조직역량이 비상히 강해져야 세상을 바꾸는 투쟁동력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 연재물에서 논한 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의 대중조직들에 결집하는 것이야말로 민주노동당과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이 정치적으로 연합한 큰 덩어리의 통일전선체를 결성함으로써 민주주의혁명의 주체적 조건을 성숙시키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이 파산된 지금, 민주노동당의 민주주의개혁정책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설득력,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까닭은 5.31 지방선거 결과에서 드러난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한계선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5.31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여러 갈래로 진행된 분석들 가운데서 주목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전략적 차별성을 부각하는데서 명백한 한계를 보였다는 지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략적 차별성이란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개혁정책과 민주노동당의 민주주의개혁정책 사이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전략적 차별성을 뜻한다.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개혁정책이 지닌 전략적 차별성을 뚜렷하게 부각시키지 못한 까닭은,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강행하는 신자유주의개혁의 해악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폭로하지 못하고, 민주주의개혁강령을 실현할 동력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 속에서 표출, 발동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과 진보적 민주주의개혁의 부재 사이에서 형성된 것은 일종의 정치공백이다. 그 정치공백을 틈타 한나라당, 뉴라이트 같은 반동적 정치세력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속이는 정치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치선동은 두 갈래로 나오고 있다.

첫째, 1970년대 식 '경제성장'을 고무, 찬양하는 정치선동이다. 요즈음 반동적 정치세력은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속에 이른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성과'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환상이 떠도는 까닭은,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들 가운데 일부가 1970년대 식 '경제성장'이 생계불안과 민생파탄에서 자신들을 구출해줄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을 30년 후퇴시키려는 책동이다.

둘째, '노사상생'을 고무, 찬양하는 정치선동이다. 요즈음 반동적 정치세력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상호협력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유언비어로 불안감을 자극하면서,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상호협력만이 경제위기의 탈출로라는 식의 선동에 목청을 높이고 있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반동적 신자유주의개혁이 파산되고, 다른 한편에서 민주노동당이 민주주의개혁의 전략적 차별성을 아직 부각시키지 못한 매우 불투명한 정세에서, 정권을 다시 거머쥘 반전기회를 노려온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동적 정치세력은 일제히 공세로 돌아서고 있다. 그래서 정국이 더 혼란스럽다.

비록 오늘 남(한국)의 정치정세는 반동적 정치세력의 공세로 혼란스럽지만,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은 민주노동당과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에게 민주주의개혁을 추진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전진시키는 기회로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이 민주주의혁명의 전진계기로 되는가 아니면 반동공세를 허용하는 역행계기로 되는가 하는 문제는, 진보정당과 보수정당과 반동정당으로 구성된 삼자 대립구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결집한 삼자 정치연합 곧 통일전선에서 결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진보정당, 노동계급, 근로대중의 삼자 정치연합이 형성되지 못하면, 신자유주의개혁의 파산과 반동공세의 악화가 뒤엉킨 정치혼란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반동적 계급독재는 계속 이어질 것이며,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을 해체하고, 국내중소자본을 민주주의적으로 통제하는 민주주의혁명의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5. 역사적 대체자 사회주의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사회주의(socialism)는 언제나 낯설고, 내놓고 말하기 거북한 개념이다. '먹고사는 민생문제'를 해결하기에 힘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사회주의라는 낯설고 거북한 개념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국가안보'를 해치는 사상적 독소로 배척, 능멸해온 반공주의의 사상적 질식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견뎌온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사회주의는 한낱 회피와 거부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먹고사는 민생문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설고 거북한 개념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는 여러 형태로 실현되었으나, 그것의 본질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역사적 대체자라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먹고사는 민생문제'를 근본적으로,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이념, 운동, 체제이다.

사적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약탈적 투쟁을 벌이는 약육강식의 야만을 넘어서, 사람이 상품을 섬기는 물신숭배의 야만을 넘어서,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문명한 미래의 새 세상을 지향하는 곳에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가치와 이상으로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신성불가침'으로 규정함으로써 개인적 행복을 이기적으로, 맹목적으로 충족시키려 하지만, 약육강식과 물신숭배의 야만으로 전락한 개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적 협동으로 공동체적 행복을 추구하는 곳에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가치와 이상으로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오늘의 행복을 이기적으로, 맹목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음 세대가 살아갈 내일을 외면하는 오류에 빠져있지만, 미래의 새 세상을 건설하려는 정치활동과 혁명실천 속에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가치와 이상으로 살아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낯선 개념을 회피하고 거부한다 해도,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실천 속에 여러 형태로 실존하며, 그 실천 속에서 실현될 그들 자신의 미래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의 새 세상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표현하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조직인 진보정당은 그들이 희망하는 미래의 새 세상을 과학적으로 설계하여 그들에게 하나의 상으로 제시하여야 하는데, 진보정당이 과학적으로 설계하고 제시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미래의 새 세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개념이 사회주의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희망하는 미래의 새 세상은 그들의 눈에 아직 선명한 영상으로 비쳐지지 않고 있지만, 사회변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현된 미래사회이다.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하나의 가설적 미래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의 투쟁을 통해서 실현하는 보편적 가치의 총체이며 과학적인 이상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너무 포괄적이지만, 사회주의의 이념, 운동, 체제를 역사적 존재형식으로 크게 나누어 본다면 현실사회주의(real-socialism),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 자주적 사회주의(chaju-socialism)라는 세 종류의 사회주의로 정리된다.

6. 현실사회주의의 좌절과 사회주의발전전략의 요체

현실사회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듯, 발전전망을 잃어버리고 좌절하였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가 좌절하였다고 해서, 사회주의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주의의 이념, 운동, 체제를 부정하려는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현실사회주의의 좌절을 사회주의 자체의 종말로 왜곡하면서 마구 흥분하였지만, 그들은 사회주의의 역사적 존재형식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존재형식이 종식된 것임을 끝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현실사회주의의 좌절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한때 소비에트체제를 성립시키고 유지하였던 사회주의정치이념이 쇠락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쇠락해버린 사회주의정치이념을 스탈린주의라 한다. 따라서 현실사회주의의 좌절은 사회주의의 이념, 운동, 체제의 총체적 실패가 아니라 스탈린주의라는 사회주의정치이념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소비에트체제의 좌절로 규정되어야 한다.

스탈린주의가 실패하고 소비에트체제가 좌절한 근본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건설을 강제적, 급진적으로 밀고 나갔다는 데 있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1928년의 강제적 농업집단화이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 결의문의 표현을 빌리면, 소련에서는 산업의 국유화, 농업의 집단화, 부농 청산을 추진하여 사회주의계획경제를 성립시킴으로써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언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는 사회주의계획경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국가기구가 밀고 나간 강제적 집행과 급진적 방식의 승리였다.

주목하는 것은, 사회주의계획경제를 사회주의국가기구의 강제적 집행과 급진적 방식에 의존하여 수립하는 경우 사회주의건설의 주체인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발성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스탈린 시기의 소련공산당은 제국주의세력의 포위공격으로부터 신생 소비에트체제를 수호하는 한편, 국유화할 수 없을 만큼 영세한 소상품생산과 소농이 지배적이었던 경제적 낙후와 인구의 70%에 이르렀던 문맹률을 극복하면서 사회주의공업화를 빠른 속도로 추진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여야 할 복잡하고 힘든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였으므로, 낡은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고 생산력을 급속히 높이는 과정에서 강제적 집행과 급진적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조건의 불가피성을 관대히 인정하더라도, 스탈린주의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발성을 발동시키지 못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소련에서 국가기구는 생산활동관리를 전담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생산노동을 전담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요구되는 사회적 생산활동을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해야 사회주의계획경제가 실현되는데, 생산활동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임무와 역할이 국가관리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발성이란, 사회변혁의 과학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표현하면, 인민대중의 자주성이다. 따라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발성을 발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자주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비에트체제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주성을 실현하지 못하였을 때, 사회주의집권당은 그들로부터 사상적으로 유리되고,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유리된 고립공간을 채운 것은 관료주의(bureaucratism)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관료주의 병폐가 반동관료집단의 계급독재를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는 것과 달리, 사회주의사회에서 생겨나는 관료주의 병폐는 사회주의집권당과 사회주의국가기구의 관료들이 인민 위에 군림하면서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병폐이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 시기 소련에서 고위관리의 소득은 노동자보다 60배나 많았다고 한다.

소비에트체제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발성을 발동하지 못한 조건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관료주의는 결국 사회주의집권당과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을 갈라놓았고, 사회주의사회의 발전동력을 소진시켰으며, 사회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가로막았다.

사회주의사회에서 관료주의적 병폐가 생기는 원인을 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 찾아보려고 애쓰는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현실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 부르면서 관료주의적 병폐를 '관료독재'라고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 비난은 사회주의계획경제가 사회주의근로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발전전략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나오는 헛소리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건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발성을 발동하지 못하고 피동성과 소극성에 빠진 원인은, 사회주의계획경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발성을 발동시키는 사회주의발전전략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현 시기 민주주의혁명이 그 누구의 지시와 명령, 강요와 통제로 수행될 수 없는 것처럼, 사회주의건설도 사회주의국가기구의 지시와 명령, 강요와 통제로 추진될 수 없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이,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실천에 의해서, 오직 그것에 의해서 발전한다. 민주주의혁명이나 사회주의건설을 가릴 것 없이 모든 형태의 사회변혁의 추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실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실천은 그들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본능의 발로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주의건설의 주체임을 자각한 자주적 사상의식의 주동적 작용이다. 자주적 사상의식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혁명적 실천으로 이끌어가고, 혁명적 실천에서 사회주의건설의 기본동력이 뿜어져 나온다. 이러한 원리가 민주주의혁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자명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주의발전전략의 요체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혁명적 실천으로 이끌어 가는 자주적 사상의식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데 있다. 사회주의건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발성을 발동시키는 사회주의발전전략은, 그들 속에서 자주적 사상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이다. 사회변혁의 과학에서는 그 전략을 사상혁명이라 부른다.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세뇌(brainwash)'라고 헐뜯지만, 사상혁명이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속에서 자주적 사상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주의발전전략이다.

모든 형태의 혁명이 반드시 조직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처럼, 사상혁명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자신의 조직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신의 조직 안에서 교양과 설득, 학습과 실천으로 자주적 사상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적 사상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정치과업을 알지 못하였고, 소비에트체제에서는 사상혁명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와 소비에트체제가 사회주의발전전략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말년의 레닌은 문화혁명을 강조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문맹퇴치와 노동교육을 뜻하였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발전전략 부재라는 결정적인 한계는 결국 관료주의라는 과오를 낳고 말았다.

현실사회주의가 제시하였던 사회주의건설의 요체는 사회주의계획경제를 통하여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건설을 밀고 나가는 기본동력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실천에서 찾지 않고, 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 찾았다.

사회주의사회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적 노동은 그들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려는 혁명적 실천으로 확장된다. 만일 사회주의사회에서 사회적 노동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만 제한되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실천은 사라지고 생산현장에서는 생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일을 시키고 공장과 기업을 독단적으로 경영하는 지령과 통제가 만연되며, 결국 사회주의계획경제의 발전이 정체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사회주의건설은 사회주의계획경제에 의거하여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하는 경제건설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공업화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하였다고 해서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건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혁명적 실천으로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완성하는 것이다.

7. '제3의 길'은 없다

현실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시장사회주의이다. 역사적으로 시장사회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 본질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란 자유(freedom)와 평등(equality)이다.

자유를 자본주의적 가치로, 평등을 사회주의적 가치로 각각 규정하는 등치개념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따위의 천박한 등치개념에 사로잡히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평등 없는 자유'가 실현되었고,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자유 없는 평등'이 실현되었다고 착각하는 도식적이고 비역사적인 관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 전 서유럽의 부르주아혁명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자유라는 가치는 봉건주의억압사슬을 끊어버리는 시민적 자유를 뜻하였고, 평등이라는 가치는 봉건주의신분족쇄에서 벗어나는 시민적 평등을 뜻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라는 가치는 자본가들끼리 힘을 겨루는 자본주의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을 뜻하고, 평등이라는 가치는 자본계급과 중산층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유와 분배의 평등을 뜻하게 되었다.

주목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영구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제기되었던 고전적 가치이고, 자본주의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게 될 한시적 가치이다.

관심의 초점은, 시장사회주의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시장사회주의는 자본주의시장의 자유경쟁에 사회주의적 소유와 분배의 평등을 접합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시장사회주의는 자본주의시장의 자유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퇴행적이고, 사회주의적 평등을 소유와 분배의 평등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발전전망을 갖지 못한다.

시장사회주의를 사회주의의 장점과 자본주의의 장점을 접합한 이른바 '제3의 길'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오류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질적 차이인 것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는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이다. 사람의 장점과 짐승의 장점을 배합해서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제3의 생물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각각의 장점만 따서 배합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아니다. '제3의 길'에 관한 발상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혼동하는 데서 생겨난 착오이다. 더 명확하게 정리하면, 시장사회주의란 '제3의 길'이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자본주의로 들어서지 못한 이행기의 이념, 운동, 체제의 총체이다.

8. 사회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찾아서

현실사회주의나 시장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자주적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하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이념, 운동, 체제의 총체이다.

자주적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는 평등이 아니다. 평등이라는 가치는 소유와 분배의 평등 그 이상의 가치로 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평등으로 제한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이다.

자주적 사회주의가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적 가치는 자주이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자주로 규정하는 가치관은 사람의 본질적 속성을 자주성으로 규정하는 세계관과 부합한다.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은 자주라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실천은 자주라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자주적으로 되려면 반드시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므로, 자주라는 가치에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내포된다.

다른 한편, 자주적 사회주의가 제시하는 사회주의적 이상은 사회주의공업화가 높은 수준에서 달성되어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그리하여 물질적 풍요 속에서 소유와 분배의 평등이 실현된 그런 평등사회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이 가장 높은 수준에서 완성됨으로써 그들의 운명이 일체화된 미래사회를 지향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이 완성되고, 그들의 사회정치적 운명이 일체화된 미래사회는, 대중적으로 단순화하여 표현하자면, 사랑과 믿음의 자주적 운명공동체이다. 두 단계 사회변혁의 미래에 건설될 자주적 운명공동체의 기본성격을 사랑과 믿음이라는 덕목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미래사회를 이상적으로 그려보는 정치적 상상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건설에 나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의 생산과 생활을 혁명적 실천으로 이끌어 갈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이 완성되고 그들의 사회정치적 운명이 일체화됨으로써 사랑과 믿음의 자주적 운명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의 자주적 운명공동체를 추구하는 자주적 사회주의의 반대편에는 약육강식과 물신숭배의 야만에 사로잡힌 자본주의가 있다. 곱새겨보면, 약육강식과 물신숭배의 야만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에서는 그 어떤 미래사회의 이상도 찾을 수 없다.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유일한 목표는 '경제성장'인데,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성장이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돌려지는 물질적 혜택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무한정한 자본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착취와 수탈에 격렬하게 저항할 때마다, 불안감을 감출 길 없는 자본가들은 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속셈으로 그 무슨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균형'이라는 헛소리를 곧잘 내뱉곤 한다.

자본주의체제와 신식민주의체제의 모순이 자기파멸을 불러올 때, 그와 더불어 자본주의체제와 신식민주의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살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열망이 분출할 때, 그때 비로소 사회주의적 이상은 역사적 필연으로 전화되기 시작한다.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경로를 살펴볼 때,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사회주의는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연속적인 발전의 두 단계이다. 선진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희망하는 자주적 사회주의는 민주노동당이 실현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속에서, 그것을 통하여 연속적인 다음 단계로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혁명을 위하여 투쟁하는 민주노동당은 자주적 사회주의를 한낱 추상적 사유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으로 진지하게 대한다.

자주적 사회주의는 현존하는 낡은 사회체제와 전면적으로 단절됨으로써 혁명적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이다. 하지만 미래의 새 세상은 아무런 단계도 거치지 않고 한꺼번에 급격하게 실현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아무런 단계도 거치지 않고 한꺼번에 급진적으로 사회변혁을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종말론적 신화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9. 연재를 마감하며

이 연재물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남(한국)사회에서 사회변혁에 관한 글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척박한 풍토에 대한 반성과 우려였다. 나는 사회변혁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이론의 빈곤이 곧 사회변혁의 실천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론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혁명의 미래는 암담해질 것이다.

민주주의혁명의 과학적 전망을 논하려는 '과욕'을 가지고 여러 달에 걸쳐 적어 내려간 이 연재물을 다시 훑어보니, 처음에 생각하였던 집필구상과 달리 서술순서가 뒤바뀐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 글의 완성도를 높이지 못한 탓에, 긴 글의 끝자락에 문득 아쉬움이 맺힌다.

하지만 무딘 붓을 내려놓는 지금, 아쉬움을 뒤로 밀어내며 내 가슴에 강렬하게 파고드는 건, 그야말로 뜻밖의 희망이다. 너무 흔하게 쓰는 바람에, 그리고 이런 딱딱한 글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안겨주지 못하는 희망이라는 말 이외에, 나는 다른 말을 찾지 못한다.

파국의 먹구름이 감도는 이 낡고 썩은 세상에서 희망의 언어를 주고받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그래서 억압과 착취와 기만의 광풍이 몰아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더 듣고 싶다. 낡고 썩은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언어를 더 듣고 싶다.

어떤 독자들은 민주주의혁명을 논한 이 연재물을 대하면서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내릴지 모른다. 사회개량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민주주의개혁이 아니라 민주주의혁명에 강조점을 찍었으므로 그러한 평가는 뿌리칠 수 없을 만큼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폭력경찰의 날선 방패에 찍혀 쓰러지면서 울부짖는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묻은 투쟁을 보면서, 나는 사회변혁에서 떨어져나간 사회개량을 말할 수 없었다. 민생파탄의 올가미에 걸려 몸부림치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너무도 억울한 죽음 앞에서, 나는 민주주의혁명에서 떨어져나간 민주주의개혁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억압과 착취와 기만을 온몸으로 밀쳐내며 싸우는 진보정당의 외침은 민주주의혁명의 언어 이외에 다른 언어가 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민주노동당의 언어는 민주주의혁명을 말하는 희망의 언어이다.

이 연재물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오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혁명은 대세로 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당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혁명을 힘있게 밀고 나가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민주노동당도 사회변혁의 길을 묻고, 투쟁의 길에 나섰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말하는 민주노동당은 자기의 정치실천을 줄곧 민주주의혁명의 언어에 담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에 진심으로 바쳐야 하리라. (2006년 9월 21일 작성)

* 이 글은 민주노동당 정책이론지 '이론과 실천' 2006년 10월호에 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