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혁운동의 현실과 자주성의 과학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사회변혁과 자주화
3.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
4. ‘씨써퍼스의 도로’를 넘어서
5. 현 단계 사회변혁강령에 대하여
   1) 최저강령의 유기적 구성
   2) 주요산업 국유화정책
   3) 토지 및 부동산 개혁정책
6. 현 단계 사회변혁경로에 대하여
7.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내부의 정파적 갈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더니,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일부 임원들이 저지른 비리사건이 사람들을 경악과 충격에 빠뜨렸다. 그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10.26 선거에서 실패한 것은 대중적 지지의 정체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였고, 비상체제가 꾸려졌다.

이러한 일련의 비상사태는 진보정당과 노동계급이 난관에 부딪쳤음을 뜻하는 것이다. 진보정당과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운동의 앞장에서 그 운동을 이끌어 가지 못하고 난관에 부딪친 것은 예사롭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요즈음 이러한 사태와 관련하여 언론들은 민주노동당의 침체와 민주노총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러한 언론보도들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적 관점에서 멀어지거나 그 관점과 엇갈린 것들이어서 침체와 위기를 과장왜곡하는 표현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오늘 남(한국)의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회변혁운동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증폭되는 것은 위기와 침체의 분위기이다. 민주노동당의 침체와 민주노총의 위기를 과장왜곡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은 그러한 분위기의 증폭현상으로 보인다.

명백하게도, 사회변혁운동은 수많은 시련과 난관을 헤치고 전진하여야 한다. 그 운동은 평온하고 안정된 흐름이 아니라 수많은 시련과 난관을 헤치고 나가는 힘들고 어려운 싸움의 연속이다. 안팎에서 부딪치는 난관이 사회변혁운동의 발걸음을 가로막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위기와 침체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역량은 시련과 난관 앞에서 위기와 침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나가면서 오히려 단련되고 강화되고 발전한다.

그러므로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적 관점에서 주시하는 것은, 그 운동이 겪는 시련과 난관보다도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갖춘 준비태세이다. 만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자기 앞에 놓인 시련과 난관을 뚫고 나갈만한 주체역량을 갖지 못했다면, 그것은 진보정당의 침체와 노동운동의 위기를 넘어서 남(한국) 사회변혁운동의 침체와 위기로 될 것이다.

여기서 나서는 물음은, 사회변혁운동이 자기 앞을 가로막은 시련과 난관을 뚫고 나가는 힘을 어디서 얻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역량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내놓는 답변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힘들이 결집되는 강한 단결에 사회변혁운동이 승리하는 힘의 원천이 있다는 정설이다. 그 정설은 사회변혁운동의 실천을 통해서 입증된 진리이지만, 정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역량을 강화발전시키지 못한다. 현 단계 사회변혁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정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방도를 찾아내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도란 여러 갈래로 흩어져있는 힘들을 결집시키는 방도, 곧 주체역량을 강화발전시키는 과학적 방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역량을 강화발전시키는 과학적 방도란 무엇일까? 그 방도는 사회변혁운동의 근본문제를 다시 꼼꼼히 살피고 깊이 연구하면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변혁운동의 근본문제란 사회변혁의 강령(program)과 경로(course)에 관한 문제이다.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역량은 그 운동의 강령과 경로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때, 오직 그러한 조건에서만 여러 갈래로 흩어져있는 힘들을 결집하게 되고, 하나의 강령을 기치로 치켜든 단결력과 하나의 경로로 나아가는 전진력을 얻게 된다.

사회변혁운동의 기초는 윤리가 아니라 과학이다. 다시 말해서, 그 운동은 억압자, 착취자에게 짓밟히고 빼앗기는 민중을 옹호하는 윤리적 의식에 자기의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과학적 인식에 자기의 기초를 두는 것이다. 사회변혁은 과학적이다. 따라서 사회변혁운동의 수행과정에서는 반드시 사회변혁의 과학적 인식이 심화발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변혁운동이 사회변혁의 과학적 인식의 기초 위에서 강화발전된다는 말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역량이 사회변혁의 과학적 인식을 공유하는 정치적 결합에 의해서 강화발전된다는 뜻이다. 사회변혁운동에서 말하는 주체역량의 결집이란 실무적 결합이 아니라 정치적 결합이다.

2. 사회변혁과 자주화

2-1) 사회변혁은 그것이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 현실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운동으로 진행된다. 사회변혁운동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사회변혁의 기본성격은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된다.  

선행이론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고대노예제사회에서 시작하여 중세봉건제사회를 거쳐 근대자본주의사회에 이르는 수 천년 동안 일어난 사회계급관계의 교체는 낡은 사회적 생산양식(social mode of production)을 새로운 사회적 생산양식으로 교체해온 것이었다. 그 역사는 사회계급관계가 철폐된 것이 아니라, 낡은 사회계급관계를 새로운 사회계급관계로 교체해온 역사였다. 사회계급관계가 철폐되지 않고 사회적 생산양식만 교체되어온 역사는 사회변혁의 역사가 아니라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천사에서는 사회적 생산양식의 교체가 선차적이고, 사회계급관계의 교체는 부차적이지만, 사회변혁의 역사에서는 사회계급관계의 철폐가 선차적이고 사회적 생산양식의 교체는 부차적이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봉건적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교체된 것에 의하여 봉건적 사회계급관계가 자본주의적 사회계급관계로 교체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사회계급관계의 철폐에 의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교체되었다.

사회계급관계의 철폐란 예속성에 묶여있는 낡은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고 자주성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였다고 해서 자주성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에서 자주성을 실현하는 문제는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는 문제와 구분된다. 억눌리고 빼앗기는 사회계급은 그 계급관계를 철폐함으로써 해방되지만, 계급해방이 곧 자주성의 완성은 아닌 것이다. 자주성은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는 계급해방에서 그 실현의 완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세워진 뒤에 더 높은 수준에서 실현되면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는 것도 자주화이고, 사회계급관계가 철폐되고 세워진 새로운 사회적 관계에서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도 자주화이다. 자주화란 자주성을 짓밟거나 자주성이 짓밟히는 낡고 반동적인 사회계급관계를 없애고, 자주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세우며, 새로운 사회적 관계에서 자주성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총체적 의미의 사회변혁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주화는 곧 사회변혁이다. 자주화가 사회변혁의 의미로 되는 까닭은,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본질적 속성이 자주성이기 때문이다.

자주성이라는 개념은, 흔히 쓰는 자주성이라는 일상용어와 구분되는, 자주성의 과학에서 해명된 고유명사이므로 다른 나라에서는 자주성에 꼭 들어맞는 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영어로는 우리말이 소리나는 대로 chajusong이라 적는다. kimchi라는 말을 갖지 못한 언어권에서 김치의 과학을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chajusong이라는 말을 갖지 못한 언어권에서 자주성의 과학을 이해하기 힘들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본질적 속성을 자주성으로 보는 관점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속성을 자주성으로 보는 인간관에 기초한 관점이다. 그러한 인간관은 과학적 이론의 범주를 넘어서 철학적 세계관의 구성부분으로 되는데, 이 글의 범위가 제한적이므로 자주성의 철학적 세계관까지 논하지는 못한다. 다만 철학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자주성이란 사람의 본질적 속성으로, 자주의식의 근원으로 되며, 자주의식은 자주성의 의식적 표현형태라는 사실만 밝혀둔다.

자주성의 과학에서 말하는 자주성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것을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이라 한다. 자주성이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으로 구분되는 까닭은, 자주화의 주체, 곧 자주성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족과 계급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투쟁을 전개할 때 그것을 반제투쟁(anti-imperialist struggle)이라 하고, 사회변혁의 주체가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투쟁을 전개할 때 그것을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라 한다. 민족이 반제투쟁의 주체라면, 계급은 계급투쟁의 주체이다.

민족적 자주성이란 민족국가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뜻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이 요구하는 본질적 속성이라는 뜻이다. 계급적 자주성이란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뜻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요구하는 본질적 속성이라는 뜻이다.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의 관계는, 민족과 계급이 각각 지닌 본질적 속성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그 관계는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킨 것도 아니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종속적, 부차적으로 포섭한 것도 아니라, 통일적으로 연관된 관계이다. 통일적 연관관계 속에 있는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은 고정되거나 정체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을 생성하는 변화발전을 거듭한다.

민족적 자주성을 국제정치부문의 자주성으로 오해하고, 계급적 자주성을 사회경제부문의 자주성으로 오해한 나머지,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의 관계를 상부구조(superstructure)와 토대(base)의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족과 계급으로 구분되는 것에 따라서 사회변혁운동의 형태도 반제투쟁과 계급투쟁으로 구분된다. 반제투쟁이 민족적 예속성을 제거하고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운동의 한 형태라면, 계급투쟁은 계급적 예속성을 제거하고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운동의 한 형태이다.

반제투쟁은 식민지예속국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가중되어 제국주의세력 대 식민지민족의 적대관계가 격화되었을 때, 또는 제국주의세력이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공세를 가하여 제국주의나라 대 사회주의나라의 적대관계가 격화되었을 때 힘있게 전개된다. 계급투쟁은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 대 지배계급의 적대관계가 격화되었을 때 힘있게 전개된다.

반제투쟁이 제국주의체제를 반대배격하는 투쟁이라면, 반미투쟁은 미국을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을 자행하는 미국의 지배계급을 반대배격하는 투쟁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을 겪는 식민지민족에게 반제투쟁은 반미투쟁으로 된다. 다른 한편,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체제를 반대배격하는 투쟁이며, 동시에 지배와 착취를 자행하는 자본가계급과 그 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이다.

반제투쟁과 계급투쟁은 통일적 연관관계 속에서 변화발전되고 사회변혁운동을 추동하며 자주성의 완성으로 나아간다. 식민지민족의 반제투쟁을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을 따라가는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좌파이론’의 인식은, 반제투쟁과 계급투쟁이 통일적으로 연관되고 변화발전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편견의 산물이다.

2-2) 사회적 관계는 정치적 권력관계(relation of political power)와 사회적 생산관계(relation of social production)를 중심축으로 하여 형성되고 공고하게 정착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계를 바꾸려면 정권관계와 생산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정권관계와 생산관계의 근본적인 개변을 사회변혁이라 한다.

사회적 관계는 사회변혁에 의해서만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운동을 사회변혁운동이라 한다. 그에 비해서, 정권관계와 생산관계를 바꾸지 않은 채 사회적 관계의 일부를 개선하는 운동을 사회개량운동이라 한다.

사회변혁운동과 사회개량운동의 차이는 전체와 부분으로 구분되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사회개량의 부분적 성과를 전체적으로 확대한다고 해서, 사회개량이 사회변혁으로 전화발전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변혁운동과 사회개량운동이 질적으로 다른 까닭은 강령과 경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변혁강령과 사회개량강령이 서로 다르고, 사회변혁경로와 사회개량경로가 서로 다르다.

사회개량의 강령과 경로는 사회적 관계의 예속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의 일부를 개선하는 임무를 규정한다. 그러한 강령을 사회민주주의강령(social-democratic program)이라 한다. 그에 비하여, 사회변혁의 강령과 경로는 사회적 관계의 예속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임무를 규정한다. 사회변혁의 강령과 경로는 사회적 관계의 예속성을 제거하고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2-3) 사회변혁운동이 사회적 관계에서 예속성을 제거하고 자주성을 실현하는 과정은 단계적이다. 그것을 사회변혁의 발전단계라 한다. 자주성의 과학이 해명한 바에 따르면, 사회변혁의 발전단계는 민주주의적 단계(democratic stage)에서 사회주의적 단계(socialist stage)로 단절 없이(uninterruptedly)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사회변혁은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사회주의적 단계로 전화발전하는 변증법적 운동형태를 갖는 것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와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의 관계를 보조축과 중심축의 관계로 보는 ‘좌파이론’의 인식은, 사회변혁이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밟아간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편견의 산물이다.

그런데 사회변혁의 발전단계가 변증법적 운동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사회변혁이 생명유기체의 진화와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진화론이란 점진적인 개량을 영구화하여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반동적 이론이다. 사회변혁운동은 어디까지나 주체가 사회역사적 현실을 자기의 자주적 요구에 맞게 개변함으로써 자주성을 실현하는 투쟁이다. 다만 지적하는 것은, 자주성을 실현하는 투쟁이 변증법적 운동형태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사회변혁이 단계적으로 전화발전되는 까닭은, 민족적 예속성을 제거하고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임무, 그리고 계급적 예속성을 제거하고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임무가 사회변혁에서 통일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회변혁이 민족적 자주성만 실현한다고 보거나, 또는 계급적 자주성만 실현한다고 보는 경우, 사회변혁의 발전단계는 부정될 것이다

사회변혁이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 가운데서 어느 하나만을 무단계적으로 실현한다고 보는 것은 비과학적인 발상이며, 사회변혁의 과정이 변증법적 운동형태를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견해이다. 사회변혁의 발전단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이 민주주의적 범위에서 실현되는 단계를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라 한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이 민주주의적으로 실현되는 사회체제를 진보적 민주주의체제(progressive democratic system)라 한다.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볼 때, 민주주의를 흔히 소수의 지배가 아니라 다수의 통치라고 하는데,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논하는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는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를 뜻한다.

그에 비하여,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이 사회주의적 범위에서 실현되는 단계를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라 한다.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에서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이 사회주의적으로 실현되는 사회체제를 자주적 사회주의체제라 한다.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의 실현은 민주주의적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적 단계로 향한다. 계급적 자주성의 실현이 두 단계를 거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자주적 사회주의로 전화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자주성의 실현도 두 단계를 거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자주적 사회주의로 전화발전한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것은 사회개량강령이 아니라 사회변혁강령이며, 사회개량경로가 아니라 사회변혁경로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강령이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강령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라고 해서, 그것이 사회개량강령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회변혁의 무단계설을 주장하는 ‘좌파이론’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강령을 사회개량강령과 혼동하고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추진되는 사회변혁운동을 사회개량운동으로 오해하는데, 그것은 사회변혁의 발전단계를 알지 못하는 비과학적이며 비변증법적인 오류이다.

2-4) 사회변혁운동은 착취와 수탈이 극에 이르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궁핍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폭동(riot)이 아니다. 사회변혁운동의 발생원인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경제적 궁핍에서 찾는 것은 비과학적 견해이다. 사회경제적 궁핍은 사회변혁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되지 못하며, 그 운동을 떠밀어 가는 동인으로도 되지 못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궁핍은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나는 하나의 객관적 요인일 뿐이다.

만일 사회경제적 궁핍이 사회변혁운동의 발생요인이라는 견해가 옳다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사회변혁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며, 인민들이 지금보다 더 심한 착취와 수탈을 당하고 생산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하지 못하여 극도로 궁핍하였던 중세기에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났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역사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궁핍이 사회변혁운동의 발생요인이라는 비과학적인 견해를 주장하면, 사회변혁의 주체가 빈민층에서 형성된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되며, 사회변혁운동과 폭동을 혼동하는 오류를 빚게 된다.

사회계급관계가 세워진 뒤로 수 천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는 노예폭동, 농민폭동, 빈민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그러한 폭동이 사회역사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까닭은, 사회역사적 현실의 근본적 변화가 폭동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그들이 궁핍하다고 해서 사회변혁운동에 나서지 않는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궁핍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폭동을 일으킨다. 궁핍이 폭동의 발생원인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도 입증되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계 및 중남미계 빈민들이 일으킨 도시폭동이나 최근 프랑스에서 아프리카계 및 중동계 빈민들이 일으킨 도시폭동이 가장 최근에 겪은 경험이다.

물론 폭동은 사회변혁운동이 취하는 하나의 격렬한 운동형태로 되고, 사회변혁운동은 거의 모든 경우에 폭동양상을 보이지만, 폭동이 곧 사회변혁운동은 아니다.

사회변혁운동을 일으키는 주체적 요인은 사회변혁강령의 기치를 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결집력이며, 사회변혁운동을 떠밀어 가는 동인은 사회변혁경로를 따라 전진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력이다.

사회변혁강령이 비과학적인 것일 때, 또는 사회변혁운동의 지도핵심세력이 사회변혁강령을 뚜렷이 내놓지 못하였을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결집력을 갖지 못하며, 그에 따라 사회변혁운동 자체가 쇠퇴의 운명을 면하지 못한다. 또한 사회변혁경로가 비과학적인 것일 때, 또는 사회변혁운동의 지도핵심세력이 사회변혁경로를 뚜렷이 밝히지 못하였을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은 좌우를 오락가락하게 되며, 그에 따라 사회변혁운동은 위기와 침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사회변혁의 강령문제와 경로문제는 사회변혁운동의 사활적 문제이다. 사회변혁운동의 강령문제와 경로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2-5) 20세기초 유럽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강령의 기치 아래 결집할 수 있었고, 사회주의강령을 실현하는 투쟁에 나섬으로써 명실공히 사회변혁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한 사회변혁운동에 의해서 세워진 새로운 사회체제가 사회주의체제이다.

그런데 그 체제는 불과 80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20세기말에 일어난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그 체제를 세워놓은 사회변혁운동이 좌절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 운동이 제시한 강령과 경로에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회주의체제를 세워놓은 뒤에도 계속하여 사회변혁운동을 떠밀어 나가면서, 더 높은 단계의 사회변혁이 요구하는 강령과 경로를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 바로 이것이 20세기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 원인이며 그 체제를 세워놓은 사회변혁운동이 좌절한 원인이다. 강령과 경로가 없는 사회변혁운동은 과학(science)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지 못하고, 공상(utopia)을 맴돌다 주저앉는다.

사회주의체제를 세워놓은 뒤에 전개되는 더 높은 단계의 사회변혁이 요구하는 강령이란, 밖으로는 제국주의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안으로는 관료주의요소에 맞서 싸우는 사회주의의 자주적 발전경로를 밝혀주는 새로운 강령을 말한다.

20세기 사회변혁운동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세웠으나, 사회주의체제를 세운 뒤에 제국주의(imperialism)에 맞서는 자주화강령과 관료주의(bureaucracy)를 극복하는 자주화강령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 빠졌다. 20세기 사회변혁운동은 그 한계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제국주의노선과 반관료주의노선을 수정하거나 포기하였고, 결국 좌절하였던 것이다.

20세기 사회변혁운동사가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새로운 사회주의강령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사회변혁운동의 시대적 요구에 해답으로 제시된 것이 자주적 사회주의의 강령이다. 21세기 자주적 사회주의의 강령은 반제국주의적 자주화와 반관료주의적 자주화를 밝혀주는 정치강령이다. 제국주의와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힘을 집중하였던 자주적 사회주의체제가 사회주의체제 붕괴의 대혼란을 뚫고 계속 전진해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국주의와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자주적 사회주의의 강령은 자주성의 과학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발전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2-6) 자주적 사회주의란 자주성의 과학에 기초한 강령에 따라 실현되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주의이다. 21세기의 자주적 사회주의는 자주성의 과학에 기초한 사회주의강령을 가진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자주성의 과학에 따르면, 사회변혁운동이란 사회변혁의 주체가 자주성을 실현하는 운동이며, 사회주의체제를 세운 뒤에도 반제국주의 자주화강령과 반관료주의 자주화강령을 관철하는 사회변혁운동을 계속 떠밀어 간다는 것이다.   

(2)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는 것은, 자주성을 실현하는 필수적인 첫 공정일 뿐이지, 그것이 곧 자주성의 실현은 아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회계급관계가 철폐되었다고 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실현은 착취와 수탈이 강요한 사회경제적 궁핍으로부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해방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세우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민족적, 계급적 자주성을 완성하는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자주성의 과학은 사회주의적 발전이 사회주의적 생산력의 발전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관료주의를 넘어선 자주성의 사회주의적 완성이라는 사실을 해명하였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레닌(Vladimir Ilyich Lenin)의 표현을 빌리면, “기계제 대공업과 전기화의 말에 올라타고” 사회주의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주성의 과학에서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주적 주체’로 일어서는 것이다.

이처럼 자주성의 과학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로부터 사회주의적 단계에 이르기까지 사회변혁의 전과정에 걸쳐 단계별로 강령과 경로를 밝혀주는 사회변혁이론의 기초로 된다. 그러한 자주성의 과학을 좌파민족주의의 담론(discourse)으로 보는 것은 ‘좌파이론’의 무지와 편견이다.

3.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

3-1) 2002년 현재 남(한국)의 근로대중은 약 2천200만명에 이른다. 2천200만명의 근로대중 가운데 임금노동자는 약 1천500만명이다. 남(한국) 사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정책 아래서 생존권을 짓밟히고 있다.

2005년 현재 남(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수는 855만명에 이른다. 임시직, 일용직, 자영업 무급종사자는 912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41%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2003년 9월 22일자)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동계급의 초보적인 권리인 노동3권마저 빼앗겼을 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48.6%밖에 받지 못한다. (『연합뉴스』 2005년 9월 21일자)

또한 남(한국) 노동계급 앞에는 정리해고의 덫이 놓여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609개 상장기업의 종업원수가 평균 23%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공장과 기업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시달린다. 2001년 현재 남(한국)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은 연 평균 2천623시간인데, 이것은 동유럽 나라들의 노동시간 2천시간에 비해 600시간 이상 길고 서유럽 나라에 비하면 1천시간 이상 길다. (전창환, 김진방 외 지음, 『위기 이후 한국자본주의』, [2004], 438쪽) 또한 남(한국) 노동계급은 OECD나라들의 평균 노동시간보다 한 해에 114일이나 더 일한다. (『민중의 소리』 2004년 9월 14일자) 남(한국)의 노동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동안 노동하는 것이다.

남(한국) 노동계급의 생활이 얼마나 참담하게 보였으면, 남(한국)의 경제상황을 보도한 유럽의 언론조차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안정한 고용상황이 이 정도에 이른 경우는 없다”(『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2005년 7월 호)고 지적하였겠는가. 노동계급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생존권마저 폭력적으로 짓밟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국내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은 그야말로 야만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2002년 현재 남(한국)의 근로농민은 190만명에 이른다. 1960년대에는 1천만명이었던 농민의 수가 40년 동안에 수직으로 떨어졌다. 지금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은 50만명도 채 안 될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세상이 다 아는 대로, 그들은 쌀시장을 개방하는 제국주의지배세력과 국내지배계급의 살농정책 아래서 생존권이 짓밟히고 있다.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소득의 75%에 지나지 않는다. 농가부채는 1985년에 200만원, 1995년에 900만원, 2000년에 2천20만원으로 폭증하였다.

2000년 현재 전체 농지의 43.6%가 임차농지이고, 전체농가의 72.3%가 임차농가이다. 임차농지의 69.1%는 비농민이 소유하고 있다. 농민에게 농지를 빌려준 비농민들은 재촌비농민이 50.3%, 부재비농민이 49.7%이다. 비농민이 농지를 농민에게 빌려준 까닭을 살펴보면, 재촌비농민들 사이에서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26.0%, 노동력이 부족한 경우가 22.0%로 나타났고, 부재비농민들 사이에서는 농촌을 떠난 뒤에도 농지를 계속 소유하는 경우가 31.6%, 농지를 상속으로 물려받은 경우가 6.3%, 농지를 사들인 경우가 8.8%로 나타났다.

농지를 농민에게 빌려준 비농민은 봉건지주가 아니라 농지소유자이며, 비농민에게서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는 임차농은 소작농이 아니라 자영농이다. 비농민 농지소유자와 임차자영농의 관계는 봉건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아니므로, 비농민 농지소유자는 임차자영농으로부터 소작료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지대(rent)를 받는다. 사회계급구성으로 볼 때, 임차자영농은 빈농과 중농으로 이루어졌다.

2003년 현재 남(한국)의 연간 곡물소비량은 2천98만톤인데, 그 가운데서 수입곡물이 1천544만톤이나 되는 바람에 식량자급율이 26.9%로 곤두박질하였다. 511만톤에 이르는 쌀을 뺀 나머지 곡물의 자급비율은 2.7%밖에 되지 않는다. 그로써 인천항은 세계 최대의 곡물수입항구로 되었다. (『디지털 말』 2004년 9월 16일자)

남(한국)에 남아있는 농업기반은 쌀농사 밖에 없는데, 제국주의지배세력과 국내지배계급은 쌀시장을 열어놓아 마지막 농업기반마저 파괴하려고 날뛰고 있다. 마지막 남은 쌀시장마저 빼앗으려는 것은 190만명에 이르는 근로농민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가고 남(한국)의 식량공급권을 미국의 곡물시장에게 통째로 넘겨주려는 범죄행위이다.

1980년 현재 남(한국)의 노동계급은 44.7%, 근로농민은 31.7%였는데, 2002년 현재 노동계급은 62.0%로 늘어났고, 근로농민은 8.3%로 줄어들었다. 2002년 남(한국)의 사회계급구성은 1980년 일본의 사회계급구성과 비슷한 분포를 보인다. 당시 일본의 노동계급은 67.1%, 근로농민은 9.8%였다.

2005년 현재 빈민층은 남(한국) 인구의 15%에 이르는 7백16만명이다. (『연합뉴스』 2005년 8월 11일자) 빈민층만이 아니라 중산층에 속하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정리해고의 덫을 늘어놓는 구조조정정책 아래서 불안에 떨고 있다.

양적으로 따져본다면, 남(한국)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구성원은 성인인구 3천100만명 가운데 약 0.5%밖에 되지 않는 17만명이다. 이들은 현금과 은행예금, 주식, 국공채 등을 포함하여 유동자산 30만 달러 이상을 가진 사회적 집단이다. (『연합뉴스』 2004년 10월 27일자) 사회적 재부를 독점한 17만명은 흔히 부유층으로 분류된다. 그 가운데서도 금융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최고부유층은 6만5천명이다. (『연합뉴스』 2004년 10월 24일자) 2004년 말 현재 1천억원이 넘는 자산을 독점한, 흔히 재벌이라고 부르는 대자본가들은 63명인데, 그들의 재산총액은 25조2천678억원이다. (『연합뉴스』 2005년 2월 23일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2천200만명이 장시간 노동으로 땀흘려 만들어낸 사회적 재부를 골프와 해외여행을 즐기는 부유층 17만명에게 집중적으로 몰아줌으로써 사회적 재부를 독점한 17만명이 4천만명을 지배하는 체제, 그러한 반민중적인 사회체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곳이 남(한국)이다.

당연히, 사회체제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 속에서 생겨나고 있다. 언론에서 흔히 빈부격차라고 부르는 사회계급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확대될수록 그 요구는 더 절실해지고 더 강렬해진다. 얼마 전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빈부격차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93%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2005년 2월 16일자) 사회계급의 양극화(polarization of social class)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3-2) 민주노총이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계급적 요구를 뚜렷이 반영한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변화는 불안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안정과 행복이 보장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것, 곧 사회체제의 변화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에게는 자신의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짓눌리는 생활 자체가 사회체제의 변화요구를 절실하고 강렬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이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남(한국) 인구의 절대다수가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뜻이지만, 사회구성원 절대다수가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 체제가 그 요구대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이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사회체제를 바꾸는 변화요인들 가운데서 가장 초보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구성원 절대다수가 사회체제가 바꿔지기를 요구하는 가장 초보적인 변화요인만으로 만일 그 체제가 바꿔질 수 있다면, 남(한국) 사회체제는 지금까지 수없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3-3) 사회구성원 절대다수가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데도 체제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3-3)-(1) 사회체제의 변화를 향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요구는 현존 사회체제를 바꾸는 정치적 실천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고 단순한 요구에 멈추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세상이 변화되기를 요구하면서도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에 나서기를 꺼린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은 자기들을 옥죄는 불안과 고통을 체념과 한탄으로 바꾸면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견디는 생활에 익숙하다. 남(한국) 노동자의 66%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잘 살 수 없다고 절망하는 현실(『연합뉴스』 2004년 12월 1일자)에서 체념과 한탄의 소리가 들려온다.

참고 견디는 생활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살이나 사회적 범죄가 일어난다. 남(한국)에서는 매일 평균 3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으며, 매일 평균 960명이 자살을 기도한다. 해마다 1만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35만명이 자살을 기도한다. 최근 10년 동안 자살자는 7만명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2004년 11월 19일) 2003년 한해 동안 61세 이상 노인 자살자수는 3천653명이었다. 노인 자살자 비율은 전체 자살자의 28%를 차지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10월 13일자)

분신항거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들, 농약을 삼키고 쓰러지는 농민들,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강물과 저수지에 몸을 던지는 파산자들과 실업자들, 방안에서 목을 매는 노인들의 참혹한 실상은 날마다 언론에 나오고 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생활고를 비관하는 자살충동이 아니라 억압, 착취, 소외를 강요하는 반동적인 사회체제이다. 생존권이 완전히 박탈당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과 빈민층이 택하는 자살은 반동적인 사회체제가 강요한 죽음이다. 그러한 죽음을 흔히 사회적 타살이라 한다.

자살만이 아니라 사회적 범죄도 급증하고 있다. 2004년 한 해 동안 범죄건수는 260만6천718건으로, 전년도에 비해 6.8%가 늘어났다. (『연합뉴스』 2005년 2월 18일자) 2003년 한해 동안 살인사건으로 죽은 피살자수는 837명이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9일자)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살이나 사회적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그 경제성장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2천200만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유층 17만명을 위한 것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남(한국)의 자살율이 높아지고 사회적 범죄가 확산되는 현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그리고 몰락하는 중산층이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가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3-3)-(2)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변화요구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제기되는 경제적 요구이다. 그 요구는 경제생활의 불안정과 파탄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제기되는 것이므로, 그 요구의 범위는 생존권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불안정과 파탄의 근본원인은 생존권 밖에 있는 데도, 변화요구는 생존권의 범위에 머무는 것이다.

노동계급이 자기의 생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 근로농민과 빈민층이 자기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상적 계급투쟁이다. 사회계급의 양극화가 확대되는 추세에 정비례하여 그 저항은 차츰 격렬한 양상으로, 대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고 직종별, 지역별로 갈라져 있으므로, 그들의 요구는 계급적 요구로 통일되지 못하고 산만하게 흩어져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일으키는 자연발생적 파업투쟁이 언제나 산발적인 저항에 머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경제적 파업투쟁은 생존권의 범위에서 순환하는 투쟁이라는 뜻에서 일상적 이익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일상적 계급투쟁은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으므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rug)의 문학적 표현을 빌리면, 그 투쟁은 ‘씨써퍼스의 도로(Sisyphean labor)’이다. 레닌은 그것을 경제편중주의(economism)라 불렀다.

3-3)-(3)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몰락하는 중산층이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사회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 사회체제는 법과 정책에 의해서 유지되며,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법과 정책을 통하여 작용한다.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을 지배력이라 하며, 그러한 힘을 가진 사회적 집단을 지배계급이라 한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지배계급은 자기 나라에서 자본주의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하는 여러 유형의 사회주의정당들이 활동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지배계급이 현존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정당을 용인하는 까닭은, 그 체제가 사회주의정당들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견고하기 때문이며, 사회주의정당들과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관계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지배계급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제기한 경제적 요구의 일부를 받아줄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틀어쥐고, 그들의 집단적 저항을 예방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를 작동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주의정당들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허약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사회주의정당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국)의 지배계급은 사회주의정당을 용인하지 않는다. 지난 시기 군사독재정권의 낡은 유물인 ‘국가보안법’이 사실상 사문화되었는 데도 남(한국)의 지배계급이 그것을 폐지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붙들고 있는 까닭은, 그 법을 폐지할 경우 현존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정당이 등장하고 현존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정치활동이 합법화되면서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이 그러한 정당이나 그러한 정치활동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두려워하는 것은, 현존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정당과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이 정치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지배계급과 달리, 남(한국)의 지배계급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제기한 경제적 요구의 일부를 받아줄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틀어쥐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집단적 저항을 예방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남(한국)의 사회체제가 그만큼 견고하지 못하다는 뜻이며, 또한 사회변혁의 객관적 조건이 그만큼 유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변혁의 객관적 조건이 유리한가 불리한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경제적 파업투쟁과 산발적 저항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존권을 짓밟는 현존 사회체제를 겨냥한 투쟁, 곧 민족적,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파업투쟁에 나서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문제이다.

4. ‘씨써퍼스의 도로’를 넘어서

정치적 파업투쟁의 목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우는 것이다. 경제적 파업투쟁은 정치적 파업투쟁으로 상승발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기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경제적 파업투쟁과 산발적 저항을 벌이면서도, 자기의 생존권을 짓밟는 현존 사회체제를 겨냥한 정치적 파업투쟁에는 나서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나라 노동계급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국제운송노조(IBT), 서비스노조국제연맹(SEIU), 미국철강노동자연합(USA), 전국자동차노조(UAW) 등이 벌이는 경제적 파업투쟁이 늘어나고 있지만(『연합뉴스』 2005년 11월 16일자), 그들의 투쟁이 정치적 파업투쟁으로 발전될 가망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파업투쟁이 정치적 파업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4-1) 일반적으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기들을 고통과 불안으로 옥죄는 착취와 억압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현존 사회체제의 구조와 성격, 그 체제의 발생기원과 변천경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갖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현존 사회체제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과학적 전망을 갖지 못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적 인식을 갖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념을 전파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언론, 대중문화, 종교가 거짓정보와 환상을 퍼뜨리고 주입함으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족적, 계급적 의식이 끝없이 교란 당하고 있다. 언론, 대중문화, 종교가 지배계급의 이념을 전파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의식화되는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양이 많고 진행속도가 빠르며 침투력이 강하다. 의식의 교란과 과학적 인식의 빈곤은, 경제적 파업투쟁이 정치적 파업투쟁으로 상승발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요인이다.

4-2) 남(한국) 근로대중의 절대다수는 노동계급이다. 2005년 현재 남(한국) 노동계급이 근로대중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율은 65%에 다가서고 있으므로, 노동계급이 근로대중의 사회정치활동에서 지도적 역할과 임무를 떠맡을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절대다수이면서도 근로대중을 하나의 강령 아래로 결집시키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된 근본원인은, 노동계급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조직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명백하게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기의 조직활동을 통해서 의식화된다. 조직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민족적, 계급적 자주의식과 과학적 인식을 갖게 될 리는 없다. 노동계급의 의식화는 노동계급을 근로대중의 전위(vanguard)로 일으켜 세운다.

노동계급의 의식화(consciousness-raising)는 그 계급의 기본조직인 노동조합에서 진행된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된 뒤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일상적인 투쟁거점으로, 칼 맑스(Karl Marx)의 좀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사회주의의 학교’로 되어 왔다.

그런데 남(한국) 노동계급의 조직활동거점인 노동조합의 조직화 형편은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3년 말 현재 노동조합수는 6천257개, 조합원수는 154만9천949명이다. 민주노총 산하 조합수는 1천332개, 조합원수는 67만3천880명이고, 한국노총 산하 조합수는 3천951개, 조합원수는 83만1천66명이다.

조합원수가 50명 미만인 노동조합은 3천146개로 50.3%이며, 5천명 이상인 노동조합은 34개로 0.5%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주력부대가 되어야 할 대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상용직 노동자의 조합가입률은 21.3%, 임시직 노동자의 조합가입률은 1.4%, 일용직 노동자의 조합가입률은 0.4%이다. 이것은 생존권이 더 심하게 짓밟히는, 그리하여 더욱 저항적일 수 있는 임시직, 일용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노조조직률은 11.0%이다. 다른 나라의 노조조직률을 보면, 미국 12.9%, 일본 19.6%(이상 2003년 현재), 독일 22.3%, 영국 29.0%(이상 2002년 현재)이다. (『연합뉴스』 2004년 12월 15일자) 이것은 자기 승용차를 굴리는 노동계급의 노조조직률이 생존권을 짓밟히는 노동계급의 노조조직률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이상현상’이다.

2천200만명이나 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가운데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불과 155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노동계급을 의식화하는 전략거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노동계급 가운데 89.7%에 이르는 절대다수는 아직 자기의 조직조차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조직활동을 통한 의식화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다.

20세기초 국제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독일에는 1천500만명의 노동계급이 있었고, 그 가운데서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 노동자는 20%에 이르는 300만명이었다. 당시 독일의 사회변혁운동을 추동하였던 기본동력은 바로 그 20%의 조직화된 노동계급에게서 나왔다.

20세기초 독일의 상황과 오늘 남(한국)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남(한국)에서 사회변혁의 기본동력이 되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노조조직률을 20% 이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면, 그리하여 사회변혁운동의 기본동력을 강화하지 못하면, 아마도 사회변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가슴에 꿈으로 남게 될지 모른다. 지배계급의 계속적인 공세와 탄압을 뚫고 나가지 못한 채 울분과 체념의 나날을 보내는 노동계급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길은 조직화밖에 없으며, 사회변혁의 길에 나선 그들이 손에 잡을 무기는 조직적 단결밖에 없다. 노조조직률을 끌어올리는 노동계급의 조직화(organization-building)가 절실히 요구된다.

4-3) 노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조합원들이 저절로 의식화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의식화는 노동운동의 지도세력이 조합원들의 공동학습을 조직하고, 실천과 투쟁을 통하여 과학적 인식을 신념화하는 길로 이끌어 주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일이다.

남(한국) 노동조합원의 의식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서 의식화 수준을 알아볼 길 없으나, 내 개인경험으로 가늠해보면 그 수준이 높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2000년 8월 어느 날 경상남도 울산시 교외의 초등학교 교사를 빌려 열렸던 민주노총 산하 지역노조의 활동가연수회에 강사로 나간 적이 있다. 강의를 마치고 토론이 오가는 시간에 나는 지역노조 활동가들의 토론수준이 내 예상보다 낮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놀란 적이 있다. 그러한 놀라움은 같은 시기 강원도 춘천시 교외에서 열렸던 강원도지역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산하 지역농민회의 활동가연수회에서도 똑같이 느꼈다.

대기업의 노동조합이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것을 반대하고, 노조집행부가 탄압을 받아 무너지는데도 자기 정파와 다르다고 해서 외면하고, 상용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것 등은 현 시기 남(한국) 노동계급의 의식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오늘 남(한국) 노동계급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11% 정도에서 맴돌면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근본원인,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들 가운데서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조합원이 불과 5%밖에 되지 않는 근본원인도 모두 노동계급의 의식화 수준이 그 정도에 머물러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일부 임원들이 저지른 비리사건들이 드러나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준 사건은, 일반언론이 지적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노조활동가들의 의식화가 부실하게 진행되었음을 드러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계급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의식화는 자주성의 과학이 밝혀준 사회변혁의 진리를 머리 속에 넣어두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를 신념화하고 양심화하여 자주의식으로 무장하는 것이므로, 의식화된 노동자에게서 부정비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조활동가들이 사회변혁의 진리를 신념화하고 양심화하여 자주의식으로 무장할 때,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방지극복할 수 있으며 노조활동가를 타락시키려는 자본가계급의 회유책동을 깨부술 수 있다.

4-4) 여러 갈래로 흩어져있는 노동계급을 사회변혁강령의 기치 아래 묶어 세우고, 그들이 단결의 무기를 억세게 틀어잡게 하며, 그들과 함께 사회변혁의 험한 길을 헤쳐 가는 것은 노동운동의 지도세력에게 맡겨진 최고의 임무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서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망설임이나 제자리걸음이 있을 수 없다. 혁신과 전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남(한국) 노동운동의 지도세력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정파적 분열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노동운동에 정파적 분열이 생긴 것을 당연한 현상이라고 강변하지만, 노동계급이 틀어쥔 단결의 무기를 녹슬게 만들고 사회변혁의 전망을 흐리게 만드는 정파적 분열을 당연한 현상으로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관료화된 노동운동 간부들을 청산해야 한다는 노조활동가의 따끔한 지적(『코리아포커스』 2005년 11월 10일자)이나, 노조 상층부를 장악하는 문제만 골몰하면서 다른 정파의 집행부가 실패하기만 기다리고, 시행착오가 보이기만 하면 공격하기에 바쁜 정파적 행동의 폐해에 대한 노조활동가의 비판(『코리아포커스』 2005년 11월 13일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노동운동 지도세력의 정파적 분열은 노동운동의 분열로 확대재생산되고 지도체계의 관료화를 불러온다. 노동운동의 분열은 노동계급이 자기를 분열하는 것이고, 노동운동 지도체계의 관료화는 노동계급이 뇌사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기분열은 그 계급 내부에서 일어난 이해관계의 분열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사상적 분열이다. 그것은 과학적 진리와 비과학적 오류 사이의 분열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변혁의 길에서 사회변혁의 주체가 비과학적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좌우편향과 시행착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패배와 좌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 사회변혁운동사나 국제노동운동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치열한 논쟁의 역사는 지식인들의 학술논쟁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주체가 비과학적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리하여 사상적 분열을 넘어서 하나의 강령을 기치로 들기 위한 뼈를 깎는 듯한 노력과 투쟁이었다.

선행이론의 제한성을 알지 못한 채, 자주성의 과학을 한낱 좌파민족주의의 담론으로 오해하거나 그러한 담론으로 깎아 내리는 ‘좌파이론’의 무지와 편견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남(한국) 노동운동의 지도세력은 노동운동의 분열을 확대재생산하는 정파적 분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정파로 나뉘어져 갈등하는 남(한국) 노동운동의 지도세력에게 자주성의 과학은 멀리 있는 것으로 보인다.

4-5) 지금 남(한국)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앞길은 위에서 지적한 내적 장애물만이 아니라 외적 장애물도 가로막고 있다. 그 앞길을 가로막는 외적 장애물이란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지배세력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맞서 있는 지배세력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외적 장애물만이 아니라 그들을 짓누르는 억압자이며 그들의 생존권마저 앗아가는 착취자이다.

여기서 나는 언론에서 흔히 고위층과 부유층이라고 부르는 지배계급이라는 개념을 쓰지 않고 지배세력이라는 개념을 쓴다. 남(한국)의 자본과 그에 결탁한 정권을 뜻하는 국내지배계급만이 아니라, 그 뒤에 정체를 감추고 그들을 조종하는 제국주의지배세력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앞길을 가로막고 그들의 정당한 활동을 짓누르며, 그들의 생존권마저 앗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이라는 개념보다는 제국주의지배세력까지 포함하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제국주의지배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국내지배계급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기의 손발을 묶는 법과 정책을 개선하라고 지배계급에게 강하게 요구하지만, 지배계급은 그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이다.

(1) 법과 정책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요구에 맞게 바꾸는 것은 제국주의지배세력의 요구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세력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지배세력에 예속된 국내지배계급은 제국주의지배세력의 요구에 배치되고 그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

(2) 만일 국내지배계급이 사회구성원 절대다수의 변화요구에 맞게 법과 정책을 바꾸는 경우, 자기들이 지배력을 잃어버리고 정치적으로 몰락하기 때문이다. 국내지배계급은 법과 정책을 고수하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당한 활동마저 가로막고 짓누른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법과 정책이 아니라 사회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제국주의지배세력과 국내지배계급이 틀어쥐고 있는 낡은 법과 정책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위한 새로운 법과 정책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사회체제의 변화방향은 사회변혁강령에서 밝혀지고, 사회체제의 변화가 일어나는 진행과정은 사회변혁경로에서 밝혀진다.

5. 현 단계 사회변혁강령에 대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그들의 정당한 활동을 짓누르고 그들의 생존권마저 앗아가는 현존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한 싸움은, 그 체제를 틀어쥔 지배세력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 체제의 성격과 구조, 그 체제의 발생기원과 변천경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가진 사회정치세력이 일차적으로 추동하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사회정치세력을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라 한다.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속에서 형성되어, 그들의 이익을 쟁취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목표를 내걸고 투쟁에 나서는데, 그 목표를 성문화하였을 때 그것을 사회변혁강령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회변혁강령이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변화를 향한 요구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집약한 것이다. 사회변혁강령은 낡은 세상을 바꾸려는 피억압민족과 피지배계급의 요구와 열망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인 것이다.

사회변혁강령은 최저강령(program-minimum)과 최고강령(program-maximum)으로 이루어진다. 최저강령이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정치강령이라면, 최고강령은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정치강령이다. 또한 최저강령이 통일전선의 강령이자 진보정당의 정치강령이라면, 최고강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강령이자 사회주의정당의 정치강령이다.

그런데 ‘좌파이론’은 최저강령을 부인하고 최고강령만을 무단계적 단일강령으로 인정한다. ‘좌파이론’이 최고강령만 인정하는 까닭은, 사회변혁의 발전단계를 떠나 무단계적인 사회변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약 80년 전 노동 대 자본의 모순관계가 격화되어 불과 몇 해 안에 무단계적인 사회변혁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던 유럽의 선행이론에서 배운 학습내용을 그대로 신념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무단계적인 사회변혁도 단계적인 사회변혁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지배세력에게 예속된 기형적 자본주의(deformed capitalism)가 발달함으로써 오늘 사회변혁운동의 정세는 제국주의지배세력 대 식민지피압박민족의 적대관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20세기를 지나면서,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생겨난 신흥중산층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의 사이에 중간지대를 만들어 그곳에 정착하였고, 그에 따라 사회민주주의가 번창하였다. 한편, 제3세계 나라들에서는 제국주의지배세력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받는 식민지민족의 반제자주화투쟁이 사회변혁운동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선행이론이 제기하였던 노동계급의 궁핍화론(theory of growing poverty)은,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모든 중간층은 없어지고, 생산수단과 생활자료의 생산에 요구되는 원료, 도구 등을 독점한 자본가계급과 어떠한 자본도 가지지 못하고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임금노동자로 양분되면서 노동계급의 궁핍지수(misery index)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행이론은 노동계급의 분화를 예상하지 못하였다. 노동계급의 분화란, 자본주의의 생산활동과 생산체계가 복잡화되면서 제조업부문의 노동계급과 서비스업부문의 노동계급으로 나뉘어지는 것을 말한다.

남(한국)의 경우, 제조업부문 노동계급은 2001년 현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가운데 20.3%였는데, 2004년에는 19.1%로 낮아지면서 429만명으로 되었다. 그에 비하여, 서비스업부문 및 사회간접자본(social overhead capital)의 노동계급은 2001년 현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가운데 69.0%였는데, 2004년에는 72.1%로 늘어나면서 1천640만명으로 되었다.

노동계급의 분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중산층의 변동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낡은 봉건적 사회체제의 유물인 전통적 중간계급이 분해되고 자본주의적 분업이 확대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겨난다. 원래 중간계급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중간에 있는 사회경제적 집단인데, 그 가운데 일부가 신흥중산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중간계급의 상층을 이루는 기업체 임원과 고위관료는 중산층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에 속한다. 중간계급의 중간층을 흔히 중산층이라 하는데, 전통적 중산층은 독립자영업자로 분류되는 중소상인, 중소수공업자, 자영농으로 이루어지고, 신흥중산층은 중소서비스업자, 전문기술직, 관리사무직으로 이루어진다. 중간계급의 하층을 이루는 단순사무원, 단순판매원은 중산층이 아니라 노동계급에 속한다.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산층은 자본가계급의 압박에 떠밀려 몰락할 때는 사회계급의 양극화를 촉진시키고,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를 지나면서 자본가계급의 회유에 포섭될 때는 계급적 충돌을 흡수하는 일종의 완충기능도 한다. 그러나 중산층의 존재가 사회계급의 양극화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체제의 상대적 안정기가 끝날 때,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체제가 과잉생산의 거대한 수렁에 빠져들 때, 그때까지 궁핍을 모르고 먹고 살만한 생활을 해오던 중산층은 느닷없이 분해되어 빈민층으로 몰락하면서 사회계급의 양극화를 촉진한다.

중산층이 빈민층으로 몰락하고, 노동계급의 궁핍화가 확대되어 사회계급의 양극화가 촉진되는 근본원인은 자본주의체제의 과잉생산(overproduction)에 있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생산의 무정부성과 시장의 무한경쟁에 따른 과잉생산이 필연적이며, 과잉생산은 자본의 이윤율을 계속 떨어뜨림으로써 자본주의체제의 전반적 위기를 불가피하게 몰고 온다. 그때부터 자본가계급은 자기들의 목을 조르는 그 위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 몸부림은 기업구조 조정정책에 의한 대량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으로 노동계급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제국주의체제는 제국주의침략전쟁을 도발하여 약소국의 석유자원을 약탈하고 제국주의독점자본을 앞세워 약소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착취하고 세계무역기구(WTO)를 앞세워 세계시장을 지배한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은 약소국에서 수탈한 막대한 이윤 가운데서 극히 일부를 자국의 노동계급과 중산층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의 생활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의 환상을 주입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약소국에서 수탈한 이윤의 일부를 자국의 노동계급과 중산층에게 나누어준다고 해서 노동계급의 궁핍화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에서는 자본주의체제의 과잉생산이 사회계급의 양극화를 촉진하는 것에 비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는 자본주의체제의 과잉생산과 제국주의체제의 수탈가중이 사회계급의 양극화를 가속적으로 촉진한다. 따라서 제3세계에서 진행되는 사회계급의 양극화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훨씬 더 가혹하고 야만적이다.

그런데 사회변혁의 선행강령은 노동 대 자본의 모순관계가 격화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반영하여 자본주의체제와 제국주의체제를 같은 체제로 규정함으로써, 전세계 노동계급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그에 따라 ‘좌파이론’은 식민지예속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이 전개하는 반제자주화투쟁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반제자주화투쟁을 전세계 노동계급의 반자본주의투쟁에 종속된 부차적인 계기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와 제국주의체제는 같은 체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체제와 그 체제를 틀어쥔 자본가계급이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노동계급의 계급적 자주성을 짓밟고 있다면, 제국주의체제와 그 체제를 틀어쥔 제국주의연합세력은 제3세계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족적, 계급적 자주성을 짓밟고 있다. 오늘 ‘신자유주의의 야만성’에 맞서 싸우는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은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노동계급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서 분출되고 있다. 제국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를 타격하는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은 제3세계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결집한 통일전선으로부터 나온다. 전세계 노동계급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인정한 ‘좌파이론’의 강령은, 현실변화를 알지 못하는 빛바랜 교의(doctrine)이다. 사회변혁강령은 사회정치적 현실변화로부터 동떨어진 교의가 아니라 사회역사적 현실의 변화를 반영한 과학적 인식의 소산이다. 낡은 교의에서 사회변혁강령이 나올 수 없다.

식민지예속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이 제국주의체제를 타격하고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며 국내자본주의체제를 타격하고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나온 사회변혁의 새로운 강령이 최저강령과 최고강령이다.

현 단계 사회변혁운동은 최저강령을 실현하는 운동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는 최저강령의 실현과 최고강령의 실현 사이에 걸쳐있으며, 사회변혁운동은 최저강령을 실현하고 최고강령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밟는다.

5-1) 최저강령의 유기적 구성

남(한국)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은 세 가지 구성부분으로 되어있다. 반제자주화강령과 진보적 민주개혁강령, 그리고 연방제 통일강령이 그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흔히 자주, 민주, 통일의 강령이라 한다. 반제자주화강령과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이 사회변혁강령이라면, 연방제통일강령은 조국통일강령이다.

사회변혁강령과 조국통일강령을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남(한국)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은 다른 나라의 최저강령에 비해 특수하며, 8.15 해방 직후 제시되었던 최저강령과도 다르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국통일강령은 사회변혁강령이 아니지만, 최저강령은 남(한국) 사회변혁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그 강령을 포괄하였다.

사회변혁강령과 조국통일강령이 하나의 강령으로 된 까닭은, 사회변혁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강화발전하기 때문이다. 최저강령의 세 가지 구성부분은 무모단조하게 늘어놓은 병렬항목이 아니다. 최저강령은 세 가지 구성부분의 기계적 조립이 아니라 유기적 구성이다.

남(한국)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당연히 반제자주화강령이 제기되고, 그 강령을 중심으로 다른 두 강령이 결합된다. 국내지배계급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착취를 보장해주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짓밟고 있으므로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이 제기된다. 또한 사회변혁이 수행되는 나라가 제국주의지배세력이 강요하는 분단체제에 포박되어 있으므로 연방제통일강령이 제기된다.

사회변혁이 수행되는 역동적 과정에서 3대 강령의 실현은 서로 연관될 뿐 아니라, 최고강령을 향하여 수렴되고 전화되고 발전된다. 자주성의 과학에서 보면, 최소강령의 실현에서 최고강령의 실현에 이르는 총체적 과정은 민족적,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매우 복잡한 사회변혁과정이다. 그 복잡한 행정을 해명하는 것이 사회변혁경로에 관한 이론이다. 경로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5-1)-(1) 최저강령의 첫 번째 구성부분은 반제자주화강령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반제자주화강령을 실현함으로써 제국주의지배체제에서 벗어나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한다. 민족적 자주성의 실현이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계급이 남(한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고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남(한국)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한미동맹체제(실제로는 대미예속체제)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다. 한미동맹체제는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미연합군사령부를 폐지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하는 것으로 해체되지만, 그것과 더불어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남(한국)에서 장악한 물적 기반도 무너뜨려야 한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의 물적 기반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반제자주화강령은 진보적 민주개혁강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체제 해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5-1)-(2) 최저강령의 두 번째 구성부분은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에 따라서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한다. 진보적 민주개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압하는 권력기구를 해체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지위와 경제생활을 결정적으로 향상시키고, 체제변화를 요구하는 여러 사회정치세력들을 하나의 강령 아래 결집시킨다.

5-1)-(3) 최저강령의 세 번째 구성부분은 연방제통일강령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연방제통일강령에 따라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와 연방제통일의 낮은 단계를 결합시킨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세워지는 자주적 민주정부가 사회주의정부와 연방제방식으로 통합될 때 자주적 통일정부가 세워진다. 자주적 통일정부의 수립은 민족적, 계급적 자주성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남과 북(북과 남)이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사회통합적 접근을 통해 통일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나간다고) 표현한 민주노동당의 조국통일강령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와 연방제통일의 낮은 단계를 결합시키는 연방제통일강령과 너무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국가연합방안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강령만을 절대화하는 ‘좌파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은 자본주의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자본주의체제를 개량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강령으로 보이고, 최저강령의 실현은 사회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보일 것이다. 더욱이 그 관점에서 보면, 반제자주화강령과 연방제통일강령은 자본주의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회변혁에서 멀어진 좌파민족주의의 담론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굳어진 관점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이 아니다.

최저강령을 실현하지 못한 조건에서 최고강령을 실현하려는 것은 좌경적 오류이며, 최저강령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를 부정하는 것은 교조주의(dogmatism)의 오류이다.

최저강령과 최고강령의 단계적 실현을 부정하면서 최고강령의 내용을 당면한 투쟁구호로, 당면한 전략방침으로 제기하는 좌경이론은 비변증법적이며 비과학적이다. 반대로, 최고강령을 부정하면서 사회역사발전의 전망을 최저강령의 범위에 가두어버리는 우경이론 역시 비변증법적이며 비과학적이다.

지배계급정당의 강령이 계급적 지배와 착취를 은폐하기 위하여 추상적인 문구로 장식되는 것과 달리, 사회변혁강령에는 구체적인 정치과업이 담겨진다. 사회변혁강령의 정치과업을 정책(policy)이라 한다. 사회변혁에서 강령과 정책은 분리되지 않으므로 흔히 정강정책이라 한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사회변혁강령의 정치과업은 진보정당의 정책으로 제시된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정치개혁정책, 평화통일정책, 사법인권정책, 조세정책, 민생정책, 노동정책, 농업정책, 여성정책, 소수자정책, 보건의료정책, 교육정책, 문화정책, 환경정책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외교정책과 국방정책을 별도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 눈에 띄는 결함이다.

‘좌파이론’은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강령 곧 반제자주화강령이나 연방제통일강령을 사회변혁강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강령만 사회변혁강령으로 인정한다. 최저강령에서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구성부분은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이므로, ‘좌파이론’과 벌이는 강령논쟁은 언제나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특히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의 정치과업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사회경제정책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다.

최저강령의 사회경제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은 주요산업 국유화(nationalization of the major industry)에 관한 정책과 토지 및 부동산 개혁(agrarian and property reform)에 관한 정책이다. 물론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져야 주요산업 국유화와 토지 및 부동산 개혁이 실시된다. 주요산업 국유화가 사회주의적 정책이라면, 토지 및 부동산 개혁은 민주주의적 정책이다. 진보적 민주개혁은 사회주의적 정책과 민주주의적 정책을 상호결합하여 추진한다.

5-2) 주요산업 국유화정책

주요산업 국유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사회변혁강령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정책이다. 1951년 1월 영국, 1951년 2월 베트남, 1951년 10월 인도, 1952년 11월 서부독일, 1953년 12월 브라질, 1954년 3월 인도네시아, 1954년 12월 스페인에서 진보정당과 사회주의정당들이 주요산업 국유화정책을 사회변혁강령의 정치과업으로 인정하였다.

주요산업 국유화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물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관계를 세우며, 그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경제생활을 결정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이다. 그러므로 주요산업 국유화로 추진되는 진보적 민주개혁은 당연히 반제국주의적 성격과 반독점자본적 성격을 지니게 되며,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함께 실현하는 것으로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재벌지배 대기업들 가운데 공공성이 높은 부문인 통신, 운수, 병원, 학교 등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으로 전환한다”고 밝힌 것은,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의 주요산업 국유화정책과 크게 어긋난다. 공공성이 높은 부문을 공기업으로 전환한다는 말은, 주요산업의 소유권을 틀어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을 제한통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한통제가 불가능한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지배와 착취를 제한통제하겠다는 것은 사회민주주의 경제강령의 기만적 선동과 다르지 않다. 진보정당은 통일전선강령과 사회민주주의강령을 뒤섞어놓을 수 없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은행과 금융, 철도와 운수, 조선과 자동차, 석유와 화학, 전자와 통신, 철강과 전력, 군수와 무역, 토지와 부동산 등 주요산업부문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갖는다. 그에 비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주요산업부문에서 공장 및 기업의 경영권을 갖는다. 경영권이란 공장 및 기업의 생산활동과 판매활동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권한을 뜻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정부가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갖는 자본주의국영기업이 존재하고, 이전 시기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정부가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갖는 사회주의국영기업이 존재하였다. 자본주의국영기업을 공기업(public enterprise)이라 한다. 정부운영기업, 정부투자기업, 정부출자기업이 공기업에 속한다. 그에 비해서, 자주적 민주정부가 국유화한 기업은 노동계급이 경영권을 갖는 기업이므로, 자본주의국영기업과 전혀 다르다. 그러한 새로운 기업을 민주적 국유기업(democratic state-owned enterprise)이라 한다.

민주적 국유기업에서는 노동 대 자본의 모순관계가 해소된다. 그 기업에서는 노동력을 팔고 사지 않기 때문에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임금노동자가 아니다. 민주적 국유기업의 노동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기업경영자이므로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에서 자신의 생활비를 공평하게 분배한다.

민주노동당 강령에 나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민주적 경제체제’는 민주적 국유기업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주요산업 국유화정책을 실시하면,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이 장악지배하여온 국가경제 또는 국민경제(national economy)는 민주적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된 인민경제(people's economy)로 교체된다.

진보적 민주개혁에 의해 건설되는 민주적 국유기업은, 노동계급이 공장 및 기업의 경영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볼 때, 사회민주주의 경제강령에서 말하는, 노동자가 공장 및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는 이른바 ‘민주적 참여기업’이 아니다. 또한 자주적 민주정부가 기업의 소유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볼 때, 민주적 국유기업은 노동조합이 공장 및 기업의 소유권을 갖는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이 아니다.

8.15 직후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노동계급은 공장자치위원회 또는 공장관리위원회를 내오고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힘있게 밀고 나갔다.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적 분할점령으로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지지 못한 조건에서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자주적 민주정부가 진보적 민주개혁을 추진하는 생산현장에서는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경영위원회(democratic management committee)가 결성된다. 노동계급을 착취해온 자본주의기업은 민주경영위원회에 의해서 민주적 국유기업으로 교체된다. 진보적 민주개혁이 추진되는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기업을 공동으로 경영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적 국유기업에서는 이전에 자본가가 가졌던 경영권을 노동계급이 소유하게 되므로, 자본가는 민주경영위원회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민주경영위원회는 민주노동당 강령에 나오는 ‘노동자와 경영자가 동반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결정제’와는 무관하다.

민주경영위원회에는 노동자, 기술자, 자주적 민주정부의 파견자가 참여한다. 민주경영위원회가 경영의 주체를 선출하면서 기술자(engineer)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생산현장에서 추진되는 기술의 혁신과 개발이 생산력 발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주적 민주정부는 민주적 국유기업의 소유권자이므로, 정부의 경제부서는 각 민주경영위원회에 파견자를 보낸다. 자주적 민주정부와 민주경영위원회의 관계는 행정명령의 관계가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진보적 민주개혁과 생산력 발전을 함께 추진하는 유기적 결합관계이다.

자주적 민주정부의 중앙집중적 경제계획과 민주경영위원회의 민주적 기업경영을 대립관계로 보는 견해는 비과학적이며 비변증법적이다. 민주적 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에서 집중화와 민주주의가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주적 민주정부의 인민경제건설에서 중앙집중적 경제계획과 민주적 기업경영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된다. 양자의 변증법적 통합을 부정하는 노동자 자주관리(workers self-management)는 무정부주의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가 야합한 아나코-씬디컬리즘(anarcho-syndicalism)에 빠진다.

국가적 소유(state ownership)와 사회적 소유(social ownership)를 대치시키면서, 국가적 소유를 지령경제(command economy)에 의한 관료적 중앙집중화로,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로, 더 심하게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bureaucratic state-capitalism)로 규정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집중화(centralism)와 관료주의(bureaucracy)는 동의어가 아니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주요산업부문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까닭은, 주요산업부문과 중소산업부문 사이에서, 그리고 중소산업부문 내부에서 아직 시장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존재하는 중소산업부문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가 집적집중되는 경향을 없애려면 자주적 민주정부가 주요산업부문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기반 위에서 중소산업부문의 생산수단이 집적집중되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한다.

다른 한편, 노동계급이 주요산업을 직접 경영하는 까닭은, 그들이 민주경영위원회를 통하여 민주적 국유기업의 생산활동을 조직하고 생산체계를 관리하면서 생산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생산활동과 생산체계를 자주적으로 조직경영하는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사회경제부문에서 진보적 민주개혁을 힘있게 떠밀어 나갈 수 있다.

자주적 민주정부와 민주경영위원회는 생산현장에서 실시되는 진보적 민주개혁을 반대하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생산방해 및 기업폐쇄책동을 막아내고, 지역별, 부문별로 생겨난 불균등한 발전을 해소하기 위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합리적으로 배분이용하며, 인민경제를 계획적으로, 통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힘을 합치게 된다.  

5-3) 토지 및 부동산 개혁정책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실시되는 진보적 민주개혁은 토지문제와 부동산문제를 해결한다. 토지개혁정책이 실시되면, 자주적 민주정부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농지는 빈농에게 무상분배하고 비농지는 국유화한다. 그와 더불어, 근로농민은 민주적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민주농업위원회(democratic agricultural committee)를 결성하여 토지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된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농가부채를 탕감하고 근로농민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는 한편, 귀농정책을 실시하여 제국주의지배세력과 예속정권이 파괴한 농업기반을 복구한다. 자주적 민주정부와 민주농업위원회는 힘을 합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식량자립을 실현한다.

민주농업위원회는 근로농민, 영농기술자, 자주적 민주정부의 파견자로 이루어진다. 영농기술자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영농기술을 혁신하고 개발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자주적 민주정부는 농업부서의 대표를 민주농업위원회에 파견한다. 농업부문의 토지개혁정책은 자주적 민주정부와 민주농업위원회의 합작으로 추진되는데, 그 합작이 상명하복이 아니라 유기적 결합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000년 현재 전체 농지의 43.6%가 임차농지이고, 임차농지의 69.1%를 비농민이 소유하고 있는데, 토지개혁이란 비농민이 소유한 농지를 모두 몰수하여 임차자영농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몰수대상은 자주적 민주정부의 토지개혁법으로 정해야 할 것이다.

토지개혁정책과 더불어 실시되는 것은 부동산개혁정책이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이 소유한 부동산과 외국인, 내국인이 투기목적으로 소유한 부동산을 국유화하고, 주택에 대한 투기행위를 금지한다. 그로써 국내부동산시장에 몰려든 막대한 투기자본을 거세한다.

각 지역주민은 지역주민단체를 중심으로 민주부동산위원회(democratic property committee)를 결성하여 부동산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된다. 민주부동산위원회는 지역주민, 자주적 민주정부의 파견자로 이루어진다. 부동산개혁은 자주적 민주정부와 민주부동산위원회의 합작으로 추진된다.

토지 및 부동산 개혁정책으로 추진되는 진보적 민주개혁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물적 기반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당연히 반제국주의적 성격과 반독점자본적 성격을 지니게 되며,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함께 실현하는 것으로 된다.

명백하게도, 주요산업 국유화와 토지 및 부동산 개혁의 성패는 민주경영위원회, 민주농업위원회, 민주부동산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오늘 민주노조, 농민회, 지역주민단체의 조직화를 더욱 확대하고 그 구성원을 의식화하며 일상적 투쟁과 사업을 통하여 조직의 역할을 높이는 것은 주요산업 국유화와 토지 및 부동산 개혁을 추진할 주체역량을 준비하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개혁은 자주적 민주정부의 행정명령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다.

주요산업 국유화와 토지 및 부동산 개혁으로 재편된 인민경제는 북(조선)의 사회주의경제와 통합되면서 통일적 민족자립경제를 건설하게 된다. 진보적 민주개혁강령과 연방제통일강령이 통일적 연관관계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6. 현 단계 사회변혁경로에 대하여

6-1)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사회변혁운동의 경로는 최저강령을 실현하는 경로이다. 그 경로는 반제자주화강령에 따라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고, 진보적 민주개혁강령에 따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경로이며, 연방제통일강령에 따라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통일적으로 실현하는 경로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반제자주화와 진보적 민주개혁이 실시되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라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체제로부터 벗어났으나 아직 그것의 잔재가 남아있고, 사회주의체제를 향하여 진보하였으나 아직 그것에 이르지 못한 과도적 사회체제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남아있지만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새로운 사회체제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는 자본주의체제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들여와 낡은 체제를 개량한 체제가 아니고,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의 우월한 요소들을 절충혼합한 제3체제도 아니며, 그 두 체제 사이에서 중립적 지위에 놓인 체제도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하는 예비체제(transitional preparatory system)라 할 수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다.

6-2) 사회변혁경로는 세력관계의 변화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서 말하는 세력관계란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과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사회변혁운동은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이 고립약화되고,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이 확대강화되면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대로,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이 확대강화되고,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이 고립약화되면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 전략적 대치기에 들어서게 된다.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이 결집하면서,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과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것은 전략적 대치기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전략적 대치기에는 반제투쟁과 계급투쟁,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이 전반적으로 강하게 전개된다.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은 주도세력(leading force)과 동맹세력(allied force)으로 이루어진다. 주도세력에는 노동계급, 농민계급, 청년학생계층이 속한다. 주도세력이 두 개의 계급과 한 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들의 지위와 역할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농민운동은 전투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나 농민계급은 계속하여 분해감소되고 있다. 더욱이 농촌에 기계영농이 보급되면서 농민계급은 중농과 빈농으로 갈라지고 있다.

또한 지난 시기 진보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대학생의 정치의식이 차츰 보수화되면서(『프레시안』 2005년 11월 11일자), 청년학생운동이 약화되었다. 새로운 유형의 우익집단(New Right)에 청년학생들이 참가한 것은 청년학생계층이 보수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실변화는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중대해졌음을 말해준다.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주도세력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한편, 사회변혁의 동맹세력에는 여성계층, 빈민층, 중산층, 진보적 지식인, 민족자본가, 진보적 성향의 종교인과 군인 등이 속한다. 사회변혁의 동맹세력은 계급, 계층적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지라도, 공동강령을 합의하여 내올 수 있다. 최저강령이 바로 그 공동강령이다.

주도세력과 동맹세력이 최저강령을 공동강령으로 인정할 때 통일전선(united front)이 형성된다. 민주노동당 강령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진보대연합’을 형성하는 것이다. 통일전선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동맹관계를 기본으로 하여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정치연합이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통일전선의 중심과제이다.

6-3) 세계 통일전선운동사에 따르면, 처음에 통일전선은 노동운동 내부의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노동계급의 행동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에서 출발하였는데, 노동계급과 농민의 계급동맹을 위한 통일전선으로 확대발전되었고, 마침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연합을 위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으로 확대발전되었다.

통일전선은 주도세력과 동맹세력이 하나의 강령 아래 결집하는 정치연합이다. 통일전선은 힘이 약한 주도세력이 동맹세력을 끌어들여 힘을 강화하는 일시적 제휴가 아니라 주도세력과 동맹세력이 하나의 전선에 결집되어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전략적 동맹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사회변혁운동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는 통일전선형태로 추진된다. 이것이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와 다른 점이다.

‘좌파이론’은 노동 대 자본의 모순관계를 강조하면서 그 어떤 경우에도 자본가와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연합할 수 없다고 못박았지만, 통일전선은 자본가와 노동계급이 노자양리(勞資兩利)를 추구하는 계급화해, 계급협조, 계급연합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통일전선에 민족자본가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민족자본가란 중소자본가가 아니라 통일전선의 최저강령을 지지하는 개별자본가, 또는 통일전선의 편에 기울어진 개별자본가를 말한다. 민족자본가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고정적인 사회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한국)의 중소기업이 295만개이므로, 민족자본가도 그 정도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소자본가와 민족자본가를 혼동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좌파이론’은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통일전선에 민족자본가가 참여하는 것이 노동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적대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착오이다. 통일전선의 중심문제는 노동계급과 민족자본가의 정치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연합에 있으므로, 통일전선에 민족자본가가 참여하는 문제를 노동계급과 민족자본가계층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통일전선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다.

통일전선에서 언제나 노동계급이 지도적 지위와 역할을 맡게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통일전선운동에서 노동계급이 지도적 지위와 역할을 맡게되는 까닭은, 노동계급의 지도적 지위와 역할이 노동계급의 선진역량에 의해서 보장되기 때문이다. 선진역량을 갖지 못한 노동계급은 통일전선운동에서 지도적 지위와 역할을 맡지 못한다.

6-4) 사회변혁경로는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 전략적 대치기, 전략적 공세기를 거쳐가는 경로이다. 현 단계 사회변혁운동은 전략적 수세기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 전략적 대치기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회변혁운동은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것은 통일전선에 힘을 결집하는 것을 말한다.

힘의 결집과 관련하여 최근에 눈에 띄는 것은 진보정당의 결성과 활동, 새로운 정치연합체 결성을 향한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움직임 등이다. 그러한 성과는 통일전선이 힘을 결집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앞으로 계속 그러한 추세를 유지한다면 머지 않아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새로운 유형의 우익집단이 출현한 것은, 통일전선역량이 강화되는 추세에 민감한 세력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도세력과 동맹세력이 결집한 통일전선이 형성될 때, 그리하여 통일전선역량으로 제국주의지배세력과 국내지배계급에 맞서는 강한 투쟁이 벌어질 때, 사회변혁의 전략적 대치기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통일전선역량이 비상히 강화되면서, 사회변혁을 반대하는 세력이 분열약화될 때, 그리하여 통일전선역량이 세력관계에서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게 될 때, 사회변혁의 전략적 공세기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6-5) 통일전선역량이 강화되는 것은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세력들이 진보정당에 결집하여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통일전선정당이므로, 통일전선 강화전략은 곧 진보정당 강화전략으로 된다. 진보정당 강화전략은 최저강령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자신의 강령으로 제시하는 정치활동으로 추진된다. 진보정당 강화발전에 힘을 집중하는 전략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세력관계를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진보정당의 강화발전은 진보정당의 분열이나 난립을 막아야 가능하다. 진보정당의 분열과 난립으로 통일전선역량이 분산약화된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남(한국)에서 진보정당이 단일정당인 것은 진보정당 강화발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8.15 해방 직후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진보정당이 난립하여 통일전선역량을 소모약화시켰던 과거사가 되풀이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보정당을 단일정당으로 옹호고수하는 것은 현 시기 통일전선운동에서 나선 중요한 정치과업이다.

진보정당이 강화발전하는 지름길은 통일전선의 주도세력인 노동계급이 그 정당에 결집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당원구성은 사회계급구성비율과 합치되어야 한다. 현재 민주노동당 당원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은 43%이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 가운데서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조합원은 불과 5%밖에 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결합수준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지금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10%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과 노조조직율이 10%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치현상이 아니다.

20세기초 유럽에서 사회변혁운동의 견인차로 불렸던 독일사회민주당은 100만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독일사회민주당의 당원 100만명이 1천500만명의 독일 노동계급을 사회변혁강령의 기치 아래 결집시켜 투쟁하였다면, 러시아보다 독일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 당원은 8만명이 채 되지 못한다. 당원 증가추세가 정체된 것과 대중적 지지율 증가추세가 정체된 것은 우연한 일치현상이 아니다. 오늘 남(한국) 사회변혁운동의 현주소는 2천200만명의 근로대중이 있는 사회에서 겨우 8만명이 진보정당에 결집한 것이다.  노동계급이 진보정당에 결집하려면 노동계급 자신의 의식화가 추진되어야 하며, 노동계급의 의식화를 추진하려면 현존 노동조합을 의식화의 전략거점으로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확대발전시켜야 한다.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이 30%를 넘어서야 사회변혁의 전략적 대치기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려면 노조조직율을 2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노동계급의 다수를 차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 노조조직율을 끌어올리려면 노조활동가들이 정파적 분열을 넘어서서 공동투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 노조활동가들이 정파적 분열을 넘어서서 공동투쟁을 벌이려면 사회변혁의 강령문제와 경로문제를 두고 집체적 학습과 토론을 벌이면서 과학적 인식과 비과학적 오류를 가려내고 공동과업을 내와야 한다.

그 다음으로 살펴보는 것은, 진보적 성향을 가진 대중단체들의 움직임이다. 진보정당이 활동하는 것과 더불어, 진보적 성향의 대중단체들이 결집한 통일전선도 형성된다. 전국민중연대(민중연대)와 6.15 남북공동선언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 그리고 그 밖의 대중단체들이 하나의 강령 아래 통합하려는 최근의 움직임은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하나로 결집한 정치연합체가 형성됨으로써 통일전선역량이 강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진보적 대중단체의 활동가들이 사회변혁의 강령문제와 경로문제를 두고 집체적 학습과 토론을 벌이면서 과학적 인식과 비과학적 오류를 가려내고 정파적 분열이나 조직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일이다.

진보정당 형태의 통일전선체와 대중단체 정치연합체 형태의 통일전선체는 그 지위와 역할이 똑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의 지위와 역할이 후자의 그것보다 더 중대하다. 필리핀의 사회변혁운동을 보더라도, 통일전선체는 두 가지 형태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1973년 4월에 세워진 필리핀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 of the Philippines)과 1985년 5월에 세워진 신애국동맹(BAGONG ALYANSANG MAKABAYAN, New Patriotic Alliance)이 그것이다. 필리핀민족민주전선의 지위와 역할이 신애국동맹의 그것에 비해서 중대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통일전선역량의 핵심으로 형성된 정치연합체는 필리핀민족민주전선이다. 필리핀민족민주전선에는 혁명적 노동조합평의회(Revolutionary Council of Trade Unions)와 전국농민연합회(National Association of Peasants)가 가입되었고, 신애국동맹에는 5월1일운동(May 1 Movement, KMU)과 필리핀농민운동(Philippine Peasant Movement, KMP)이 가입되었다.  

진보정당 형태의 통일전선체와 대중단체 정치연합체 형태의 통일전선체는 통일전선운동이 심화발전되는 것에 따라, 사회변혁의 전략적 대치기에 들어서면서 통합될 것이다.

6-6) 남(한국)에서 제국주의지배세력을 몰아내면,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이 약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까닭은, 제국주의지배세력의 축출이 그 세력에게 예속되어 그 세력의 보호와 육성을 받아온 국내지배계급이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제자주화운동은 남(한국)에서 제국주의지배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을 고립약화시키는 전략을 추진한다. 제국주의지배세력을 몰아내는 반제자주화운동의 투쟁은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을 고립약화시켜 지배예속관계의 약한 고리를 끊어버리는 투쟁이다.

역설적으로, 지배예속관계의 약한 고리는 지배예속관계를 유지하는 물리력인 주한미국군이다. 주한미국군이 지배예속관계의 약한 고리라는 역설은 다음과 같은 논거 위에 성립한다.

6-6)-(1) 조미관계에서 북(조선)이 주한미국군 철군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이 북(조선)의 철군압박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조미 두 나라가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를 6자회담 틀 밖에서 쌍방접촉으로 논의하자고 동의한 것은, 그 동안 6자회담을 고집하면서 버텨왔던 미국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6자회담 틀 밖에서 시작되는 쌍방접촉은 북(조선)이 주한미국군 철군압박을 가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6-6)-(2) 지금 주한미국군은 재편과 감축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그 변화는 이른바 반테러전쟁이 수렁이 빠지면서 매우 불안정하게 진행되고 있다. 불안정한 변화는 주한미국군의 존재근거를 흔들고 있다.

6-6)-(3) 주한미국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사건을 겪고,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군이 저지르는 양민학살과 포로고문 등의 만행이 드러나면서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제국주의점령군의 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인식변화는 미국군 철군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준다.

재편감축계획에 따라 주한미국군의 재배치가 진행되는 곳은 평택이다. 평택은 재편감축과 반테러전쟁에 매달려있는 워싱턴의 국방부로 직통하는 통로이다. 그 직통로에 투쟁력을 집중하는 것은 미국 국방부에 정치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평택주민의 토지를 강제로 사들이려는 것에 맞서 대중투쟁이 전개되는 조건에서, 평택에서 반미대중투쟁을 조직하여 주한미국군의 재배치를 방해저지한다면, 지배예속관계의 약한 고리는 끊어질 것이다.

지배예속관계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제국주의지배세력이 국내지배계급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 포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주한미국군 철군이다.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은 한미동맹체제의 점진적 해체로 이어진다. 주한미국군의 철군은 한미동맹체제의 해체를 촉진한다. 주한미국군의 철군이 한미동맹체제의 해체를 촉진하는 까닭은, 주한미국군의 철군과 더불어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철수함으로써 제국주의지배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기 때문이다.   

주한미국군의 철군이 완료된 뒤 불과 1-2년 안에 한미동맹체제는 해체될 것이다. 주한미국군의 철군으로 제국주의지배력의 약화되고 한미동맹체제가 해체되는 일련의 사태는 제국주의지배세력에게 예속되어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국내독점자본과 예속정권을 결정적으로 고립약화시키는 것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주한미국군의 철군과 한미동맹체제의 해체는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며,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철수와 국내독점자본의 고립은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물론 주한미국군이 철군한다고 해서 한미동맹체제가 저절로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군 철군이 동맹체제 해체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는 필리핀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1990년 9월 28일부터 필리핀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필리핀 주둔 미국군문제에 관한 협상을 벌였다. 1991년 9월 16일 필리핀 상원에서는 필리핀-미국의 주둔군협정 연장안을 표결하였는데 12 대 11로 부결되었다. 1992년 11월 14일 필리핀-미국의 주둔군협정이 만기일을 맞으면서 주둔의 법적 근거가 소멸하자, 미국군은 철군하였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미국군의 철군은 필리핀-미국 동맹체제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철군의 결정적 요인이 필리핀통일전선의 철군운동에 있지 않았고 필리핀과 미국 두 나라 지배계급의 정치적 흥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 지배계급의 정치적 흥정에 따라 미국군이 철군하였으므로 필리핀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착취하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은 미국군을 따라 철수하지 않았다. 물론 필리핀통일전선은 미국군 철군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미국군을 몰아내는 결정적인 요인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대중투쟁으로 주한미국군을 몰아내는 것은,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에 힘을 기울이는 남(한국) 통일전선운동이 필리핀통일전선운동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세력은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을 분열고립시키지 않으면 세력관계에서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사회변혁의 전략적 공세기는 주한미국군 철군일정과 맞물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세력관계를 바꾸어놓는 의의를 갖는다.

6-7) 주한미국군의 철군과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철수는 조용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진보적 민주개혁을 추진할 때,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여 일본과 유럽연합 등이 결탁한 제국주의연합세력은 남(한국)에게 강력한 경제제재를 들이댈 것이다. 제국주의연합세력이 자주적 민주정부를 고립압살하는 것은 갓 태어난 인민경제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제국주의연합세력은 국제금융거래를 중단시키고, 해외금융자산을 동결하고, 식량과 에너지, 원료와 부품을 수입하는 해상 및 항공수송로를 봉쇄하는 등 사상초유의 보복행위로 자주적 민주정부에 대한 전면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제국주의경제제재가 몰고 오는 국내시장의 교란과 마비,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에 하청계열화되었던 중소기업의 집단적 파산과 중산층의 혼란과 동요, 통화팽창(inflation)과 물가상승, 생활필수품 부족사태에 대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불만, 그러한 대혼란을 틈타서 거세게 일어나는 자주적 민주정부에 대한 국내반정부세력의 파괴전복책동과 진보적 민주개혁에 대한 국내자본가계급의 집단적 반항 등이다. 제국주의연합세력의 경제제재는 불가피하며, 그에 따른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도 불가피하다. 이것은 자주적 민주정부가 견디기 힘든 위기와 고통, 가혹한 시련과 난관에 부딪칠 것임을 예고한다.

제국주의지배체제에서 벗어난 자주적 민주정부와 그 주위에 결집한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이 제국주의연합세력의 경제제재로 좌절하지 않고 시련과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지금 진행 중인 남북(북남)의 경제협력을 전면화하여 통일적 민족자립경제를 건설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은 반동적 대외예속경제를 통일적 민족자립경제로 완전히 바꾸는 길이다. 6.15 공동선언에 따라 이미 개성공단에서 시작한 통일적 민족자립경제의 실험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요산업 국유화정책과 토지 및 부동산 개혁정책을 실시하는 문제는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는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추진하는 진보적 민주개혁의 지속과 완성은 연방제통일의 실현으로 가능한 일이다.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사회변혁강령과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사회변혁강령이 유기적으로 결합된다는 점은 여기에서도 입증된다.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사회변혁강령만 강령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한 유기적 결합을 설명하지 못하는 ‘좌파이론’은 무능하다.

7. 글을 맺으며

사회변혁운동은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는 운동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사회계급관계를 철폐하는 운동은, 그 단계에서 제시된 최저강령을 든 통일전선이 떠밀어 간다. 통일전선은 최저강령의 기치 아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통일전선의 강령은 자주, 민주, 통일의 강령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계급의 양극화가 확대되는 것이나 생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산발적 저항이 확산되는 것은 사회변혁의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현 시기 사회변혁운동은 사회변혁의 주체적 조건이 무르익지 못한 까닭에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려면 사회변혁의 주체적 조건이 무르익어야 한다. 주체적 조건이 무르익는 길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통일전선운동에서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의 지위와 역할, 특히 노동계급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을 분열고립시키는 길이다.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노동계급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려면 노동계급의 선진역량이 노동계급을 조직화하고 의식화하여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신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것은 노동운동을 강화발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통일전선에서 지도적 지위와 역할을 맡음으로써 사회변혁운동을 강화발전시키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최저강령을 자기의 강령으로 삼고 투쟁하여야 진보정당이 강화되고 통일전선운동이 전진한다.

또한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세력을 분열고립시키려면 제국주의지배세력이 틀어쥔 지배예속관계의 약한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국내지배계급을 고립시키는 반제자주화운동을 벌여야 한다. 약한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은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을 철군시켜야 한미동맹체제가 해체된다. 그 체제의 해체는 제국주의지배세력이 국내지배계급을 포기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지배세력이 국내지배계급을 포기하여야 국내지배계급이 고립약화되면서 세력관계가 뒤집어져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우위에 올라서게 된다.

현 시기 사회변혁운동의 당면과업은 노조조직화와 진보정당 강화, 그리고 평택의 대중투쟁 조직과 미국군 철군운동 강화이다. 정파적 분열을 넘어서서 공동과업을 내오고 그에 따라 노조조직화를 추진하고 조합원들을 진보정당으로 결집시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노조활동가들의 임무이다. 평택에서 대중투쟁을 조직하여 주한미국군의 재배치를 방해저지하고 지배예속관계의 약한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민주노조, 농민회를 비롯한 진보적 대중단체 활동가들의 임무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진보정당의 역할과 임무는 결정적이다. 그 까닭은, 진보정당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사회변혁의 강령과 경로를 가장 뚜렷이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며, 사회변혁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통일전선으로 결집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조직자로 되기 때문이며, 자주적 민주주의체제에서 집권당으로서 진보적 민주개혁과 연방제통일을 촉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논한 대로, 노동운동, 통일전선, 진보정당에서 제기되는 사회변혁의 과제를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해명할 뿐 아니라, 반제자주화, 진보적 민주개혁, 연방제통일의 강령문제와 그 경로문제를 해명하는 이론은 자주성의 과학에 근거한다. 사회변혁은 과학적이며, 자주성의 과학은 변혁적이다. (2005년 11월 2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