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특사의 방북과 조·미 정치협상의 재개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례 >

(1) 들어가는 말

(2)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 재개를 추진한 과정

(3) 북(조선) 외무성과 미국 국무부 사이에서 벌어진 전초전

(4) 부시 정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쟁

(5) 대통령 특사와 정부대표단은 평양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6) 조·미 정치협상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1) 들어가는 말

부시 정부는 출범 이후 지난 1년 9개월 동안 조·미 정치협상을 중단하고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는 한편, 조·미 관계의 긴장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발언으로 북(조선)을 자극하면서 의도적으로 강성기류를 형성해왔다.

일부 분석가들은 조·미 사이에 형성된 강성기류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으며, 나라 안팎의 반통일세력들은 강성기류의 파장을 더욱 증폭시키려고 책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권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부시 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라 안팎의 반통일세력들이 강성기류의 파장을 증폭시키려는 책동을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족민주운동권 일부에서는 조·미 사이의 강성기류가 완전히 고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며, 일반 대중들은 정세를 비관하였다.

그렇지만 부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조·미 사이에 형성된 강성기류는 일시적인 것이며, 머지 않아 정치협상이 재개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정세발전의 필연성을 논증하였다. 조·미 관계개선을 중심으로 하는 한(조선)반도 정세발전의 필연성에 대한 나의 전망은 주관주의에 기울어진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한(조선)반도 정세발전의 필연성에 대해 논증한 것은, 민족주체의 정세관을 견지하면서 정세변화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였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조·미 관계에 관하여 처음으로 집필한 논문은 1996년 7월에 발표한 『평화회담 제안과 군비증강의 모순』이었는데, 그 논문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6년 동안 나는 급류를 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정세의 변동방향을 분석하면서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지난 6년 동안 조·미 관계에 관하여 내가 발표해왔던 여러 편의 논문들이 담고 있는 중심내용은 다음과 같은 논점으로 정리된다.

첫째, 북(조선)은 1993년 이후의 조·미 대결에서 여러 차례 전술적 승리를 얻었다. 북(조선)은 1998년 8월 31일에 우주발사체 백두산 1호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조·미 대결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공세기에 진입할 수 있었다. 북(조선)은 그 동안 많은 난관을 하나씩 극복하면서 얻어낸 전술적 승리에 기초하여 공세기에 진입한 이후 전략적 승리를 향하여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

둘째, 부시 정부가 출범한 이후 조·미 정치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강경·난폭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며, 부시 정부는 머지 않아 조·미 정치협상에 나설 것이다.

셋째, 조·미 정치협상이 재개되면 북(조선)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은 북(조선)의 요구에 따라 주한미군 문제를 해결하는 최종적인 정치합의를 도출하게 될 것이다. 이 최종적인 정치합의에 의하여 두 나라는 국교수립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넷째, 조·미 정치협상 재개와 주한미군 철수는 미국이 북(조선)에게 베푸는 '정치적 시혜'가 아니라, 북(조선)이 강력한 정치·군사적 역량을 동원하여 조·미 대결을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가는 마감단계에 들어서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조·미 대결을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가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노선이 발휘하고 있는 정치·군사적인 힘이다.

여섯째, 북(조선)의 전략적 승리가 주는 정치적 의의와 성과는 조·미 관계개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민족적인 차원으로 파급됨으로써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한(조선)반도의 자주화와 통일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위에 열거한 여섯 개의 논점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나는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지난 1년 동안 부시 정부 내부에서 벌어진 일련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문제에 대한 북(조선)의 대응을 논하며, 조·미 정치협상의 진전 가능성을 전망하려 한다.

(2)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 재개를 추진한 과정

『워싱턴 포스트』 2001년 8월 26일자 기사에 보도되었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의 말에 따르면, 조·미 정치협상의 재개는 2001년 5월말 백악관에서 열렸던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전원일치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1년 5월 25일자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인 5월 중순,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L. Armitage)와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Paul D. Wolfowitz)가 참석한 외교·안보담당 차관급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는 그 차관급 회의에서 합의하여 제출한 조·미 정치협상 재개안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었다.

2001년 5월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조·미 정치협상 재개를 전원일치로 결정하도록 만들었던 주동자는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in L. Powell)→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로 이어지는 이른바 대북 '협상파'의 집행체계다. 부시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이 조·미 관계를 중심으로 한 한(조선)반도 정책의 추진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대북 협상파는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북 협상파의 수장 콜린 파월은 2001년 5월초에 부시 정부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와 실무책임자인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당시에는 부시 정부의 공식적인 대북 정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아미티지는 5월 9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부시 정부가 "몇 주안에" 대북 정책 검토를 완료할 것이며 "가까운 장래에"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여론을 조성하려고 시도하였다.

2001년 5월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직후인 2001년 6월 7일 부시 정부는 당시 남(한국)의 외무장관이었던 한승수를 워싱턴으로 불러 한·미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하고 그 결정사항을 남(한국) 정부에게 통보하였다. 미국 대통령 부시(George W. Bush)는 한·미 외무장관 회담 하루 전인 6월 6일 대통령 담화형식으로 대북 정책기조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부시의 발표문에는 북(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조항이 들어있었다. 그 조항은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와 더불어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문제도 협상의제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북(조선)의 견지에서 보면,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문제를 조·미 정치협상에서 논의하겠다는 새로운 조항은 조·미 정치협상 재개를 가로막는 장애조항이다. 부시 정부가 대통령 담화라는 비중 있는 형식으로 장애조항을 발표하였던 까닭에, 북(조선)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겠다는 부시 정부의 발표가 나온 뒤에도 상당기간동안 조·미 정치협상 재개문제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협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2002년 1월에 있었던 부시의 이른바 '악의 축' 발언이 조·미 정치협상 재개를 가로막는 악재로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북(조선)이 조·미 사이에 형성된 강성기류에 파열구를 내기 위한 주동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2002년 4월 27일이었다. 2002년 5월 1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Richard A. Boucher)의 발표에 따르면, 4월 27일 북(조선)은 부시 정부가 특사를 보내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직접 워싱턴 당국에 전화로 통보하였다고 한다. 북(조선)의 이러한 주동적인 조치에 대해서 백악관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앞으로 며칠 안에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할) 시기와 기타 구체적인 사항들을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응답하였다.

북(조선)의 주동적인 조치는 5월 3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더 강하게 제시되었다. 그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주발사체 백두산 2호(미국은 장거리 미사일이라고 부른다)의 발사를 보류하는 조치를 2003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그런데 5월에 들어와서 북(조선)은 부시 정부의 특사방북 제안에 대해서 갑자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에 정통한 유엔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 2002년 5월 10일 방송보도에 따르면, 북(조선)은 미국이 마치 북(조선)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해달라고 구걸하면서 협상재개에 응하고 있는 것처럼 발표하고 있는 데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유엔대표부는 미국이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특사방북은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 있다는 입장을 미국 국무부의 연락상대자인 코리아담당 과장에게 통보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소리』 2002년 5월 16일 방송보도에 따르면, 5월 15일 백남순 외무상은 『이타르타스통신』과 대담하면서 조·미 정치협상의 조건과 분위기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특사방북을 계속 추진하려고 하였다. 2002년 6월 14일 미국 국무부는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를 통하여 북(조선)에게 두 가지 사실을 전달했다. 미국 정부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대통령 특사로 파견한다는 것과 특사를 파견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알려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북(조선)은 미국이 전제조건 없이 특사를 파견하고, 특사 파견 시기를 먼저 정하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부시 정부가 평양에 파견하는 특사의 지위를 격상시켰다는 사실이다. 부시 정부가 특사의 지위를 격상시킬 것이라는 정보는 2002년 6월 17일과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리단(TCOG) 회의가 끝난 직후에 언론에 흘러나왔다.

부시 정부는 원래 대북교섭담당 특사 찰스 프릿처드(Charles L. Pritchard)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을 평양에 파견하려고 계획하였지만, 대표단의 지위를 격상하여 차관보를 대표로 하여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 격상된 대표에 선임된 인물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인 제임스 켈리다.

프릿처드는 클린턴 정부 시절인 2000년 10월 당시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bright)가 평양을 방문할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국장으로 미국 정부대표단에 포함되어 평양을 방문한 바 있는데, 지금은 한(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미국측 집행이사 겸 국무부 대북교섭담당 대사로 있다. 그에 비하여,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인 제임스 켈리는 부시 정부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검토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한(조선)반도 정책의 실무를 맡아보고 있는 비중 있는 인물이다.

조·미 관계에 정통한 워싱턴의 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한겨레』 2001년 6월 6일자 보도에 따르면, 부시 정부는 특사 프릿처드와 북(조선) 외무성 김계관 부상의 회담을 제의하였으나 북(조선)은 프릿처드의 격이 낮다고 하면서 회담제의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원래 미국 민간연구기관 국가정책센터(CNP)로부터 2001년 6월 5-7일까지 워싱턴을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면, 부시 정부가 특사의 지위를 격상시킨 새로운 조치는 북(조선)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조·미 정치협상 재개가 한(조선)반도의 정세에 미치는 파장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남(한국)과 일본의 외교담당자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6월 17일과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한·미·일 삼국 대북정책조정감리단 회의는 이러한 미국의 의도에 따라 소집된 것이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제임스 켈리는 미국이 자신을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여 평양에 파견할 것임을 통보하였다.

당시 콜린 파월을 수장으로 한 미국 국무부의 대북 협상파는 특사 파견을 마침내 성사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6월 21일 미국 연방상원 법사위 소위원회에 출석한 제임스 켈리는 지난 18개월 동안 중단되었던 조·미 정치협상이 몇 주간 안에 재개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제임스 켈리가 조·미 정치협상 재개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하기 하루 전인 6월 20일 오전 백악관에서는 주목할만한 일이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날 오전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는 조·미 정치협상 재개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재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미국 대통령 부시와 국가안보보좌관인 라이스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결재사안이 국가안보보좌관의 손을 거쳐 대통령에게 제출되어 최종적으로 결재를 받는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국가안보보좌관이 대통령에게 결재사안을 제출하였다는 것은 부시 정부 출범 이후부터 적어도 18개월 동안이나 국가안보회의 보좌관들,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군수뇌부 등 관련부서들 사이에서 줄곧 갈등과 격론을 빚었던 이견들이 어렵사리 조절·절충되어 최종안이 작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미국 언론들은 그날 대통령 집무실에서 라이스가 부시에게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보고하면서 미국 정부의 특사를 평양에 파견하는 문제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었다고만 보도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부시가 결재한 사안은 조·미 정치협상을 언제 재개하고 누구를 특사로 파견한다는 정도의 가벼운 실무적 내용만이 아니라 적어도 조·미 정치협상에 관련한 전략적 방침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국가안보보좌관이 대통령에게 결재사안을 제출한 것에 주의를 돌리는 까닭은, 조·미 정치협상은 조·미 사이에 걸려 있는 최대의 현안을 다루는 매우 중대한 정치협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미국측 협상대표로 나갈 것이고 협상은 언제 어디서 재개할 것이라는 식의 실무문제만 결정되었고, 협상에 관련한 전략적 방침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면,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6월 20일에 부시가 처리하였던 대통령 결재안은 부시 정부가 2002년 후반기부터 2003년 후반기에 이르는 약 1년 동안 미국이 대북 정책을 어느 방향으로 추진할 것인지에 관한 중대한 내용이 들어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부시 정부의 준비는 2002년 6월 20일에 대통령이 결재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2001년 5월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조·미 정치협상 재개안이 전원일치로 결정되었는데도, 부시 정부는 그 결정 이후 1년이 지난 2002년 6월까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에 1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끌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2002년 4월 8일과 9일 도쿄에서 열렸던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리단 회의에서 미국 대표는 부시 정부의 특사를 평양에 보내기에 앞서 "충분한 준비가 요구된다"고 하면서, 조·미 정치협상 재개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부시 정부 내부에서 아직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002년 6월 3일 대언론설명회에 나온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 필립 리커(Philip T. Reeker)는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데는 "신중하게 검토하여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 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현재 숙고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주시해야 할 것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기 전에 부시 정부는 자기의 내부에서 신중하게 검토하여야 할 중요한 사안, 또는 숙고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항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001년 5월말부터 2002년 6월까지 1년 동안 부시 정부의 관련부서들 사이에서는 바로 그 '신중하게 검토할 중요한 사안'을 놓고 심각한 논쟁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한 『워싱턴 타임스』 2002년 5월 24자 보도에 따르면, 국무부의 거의 모든 관리들과 국가안보회의의 일부 관리들은 특사방북을 찬성하고 있는 반면에, 국무부와 국가안보회의의 일부 관리들과 국방부는 특사방북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를 협상파라고 한다면, 후자는 대결파라고 할 수 있다. 특사방북을 반대하는 대결파는 특사방북을 북(조선)에 대한 '양보(appeasement)'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 6월 17일과 1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리단 회의 참석했던 남(한국) 정부 대표가 기자에게 지금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기에 앞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부시 정부의 대북 정치협상 재개문제에 관해서는 백악관이 직접 챙기고 있다고 강조한 것은, 부시 정부의 관련부서들 사이에서 조·미 정치협상 재개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논쟁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으므로 백악관이 조절·절충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부시 정부의 관련부서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진 원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논하려 한다.

2002년 6월 20일 대북 정책에 관한 대통령의 결재가 나자, 국무부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6월 25일 국무부는 북(조선)의 해당부서에 전화를 걸어 방북특사를 파견하는 시기는 오는 7월 10일부터 12일이 좋겠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최종적인 의견을 7월 4일의 연휴(미국 독립기념일 연휴)기간을 감안하여 알려달라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북(조선)은 미국에게 특사파견 시기에 관련한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은 북(조선)이 지난 5월 이후 조·미 정치협상 재개에 관련하여 취하기 시작한 유보적인 태도의 연장이었다. 조급해진 미국 국무부는 국무부 코리아담당 과장 에드워드 동(Edward Dong)을 6월 27일에 뉴욕으로 급파하여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를 방문하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북(조선)에게 전달된 부시 정부의 의사는, 부시 정부가 7월 10일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겠으니, 북(조선)은 특사방북시기에 관한 제안에 대해 시의적절하게 답변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기다리던 답신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29일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서해교전이 일어난 뒤에도 국무부는 북(조선)의 답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2002년 7월 1일 오전까지는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날 오전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조·미 대화 제안에 대한 북(조선)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다. 북(조선)으로부터 답신을 받으면 우리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고려해 입장을 검토할 것이다. 미국은 서해교전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북(조선)에게 대화를 제의한 만큼, 답신을 받으면 모든 사항을 총체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002년 7월 2일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는 정례적인 대언론설명회에서 "7월 1일 저녁에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에 당초 10일로 예정되었던 특사방북에 관한 제안을 철회한다고 통고했다."고 밝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이 특사방북 제안을 철회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아직까지 특사방북시기에 대한 북(조선)의 답신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6.29 서해교전이 조·미 정치협상을 진행하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우처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의 특사파견 제안은 협상탁자에서 사라졌다. 조·미 회담 일정을 다시 잡는 것은 현재에는 어렵고 장래에나 가능하다." 그의 발언에서 주목할 것은 특사파견 제안이 철회되었음을 밝히면서도 조·미 정치협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부시 정부가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려는 조치를 철회한 이유가 서해교전이 아니라 북(조선)이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서해교전은 표면적으로 내세운 철회이유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철회한 이유는 북(조선)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북(조선)이 부시 정부의 대통령 특사 파견제안에 대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일부 언론들과 분석가들은 북(조선)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려고 하였지만, 부시 정부가 그 요구를 묵살하면서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빗나간 것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2년 5월부터는 정반대의 현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 재개를 요청하고 있었지만, 북(조선)은 그 요구를 묵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북(조선)은 왜 부시 정부의 정치협상 재개요청을 묵살하였을까? 이 수수께끼 같은 물음은 언론과 분석가들의 빈약한 정치적 상상력으로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언론과 분석가들의 머리 속에는 미국은 언제나 강자의 지위에 있고, 북(조선)은 언제나 약자의 궁지에 빠져있다고 보는 편향되고 경직된 사고의 관성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약자의 궁지에 몰려있는 북(조선)이 감히 초강대국 미국의 협상요청을 묵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2002년 5월 이후 10월까지 6개월 동안 조·미 정치협상이 지연되고 있었던 원인은, 북(조선)이 부시 정부의 정치협상 재개요청을 묵살하고 있기 때문인데도, 미국과 남(한국)의 언론들은 지연의 원인이 부시 정부 내부에서 협상파와 대결파가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한 보도내용에 대해서 부시 정부의 관리들이 "매우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고 『연합뉴스』 2002년 5월 29일자 보도는 지적하였다.

미국이 강자이고, 북(조선)은 약자라는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조·미 관계의 본질과 그 발전방향을 알 수 없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지난 1993년 이후 거의 10년 동안 지속되어온 조·미 대결에서 북(조선)이 얻어낸 전술적 승리가 그러한 인식의 오류를 부정하고 있으며, 가까이는 지난 5월 이후 부시 정부의 정치협상 재개요청을 묵살한 북(조선)의 당당한 태도 역시 그러한 인식의 오류를 부정하고 있다.

지난 5월 이후 북(조선)이 부시 정부의 정치협상 재개요청을 묵살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북(조선)의 대미전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 나는 지난 수 년 동안 조·미 관계에 관한 논문을 집필하면서 북(조선)의 대미전략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은 바 있는데, 이 글의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그 분석의 중심논제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조선)의 대미전략의 본질은 조·미 평화공존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의 자주화다. 다시 말해서 북(조선)은 조·미 정치협상을 통하여 조·미 평화공존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의 자주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둘째, 북(조선)이 추진하고 있는 한(조선)민족의 자주화전략은 남(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세력인 미국을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함으로써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다.

셋째, 북(조선)이 추진하고 있는 한(조선)민족의 자주화전략의 수행방도에는 군사적 방도와 정치적 방도가 있는데, 북(조선)은 한(조선)민족의 자주화전략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사적 방도를 선행시키면서 정치적 방도를 동원하는 선군후정(先軍後政)의 전략적 방침을 견지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천명한 선군혁명노선은 한(조선)민족의 자주화전략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립되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넷째, 북(조선)이 선군후정의 전략적 방침을 견지하는 이유는, 미국의 한(조선)반도전략이 군사력을 앞세운 전쟁전략으로 일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조선)반도의 현실은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연합군과 조선인민군이 방대한 군사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준전시상태에 놓여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북(조선)이 선군후정의 전략적 방침을 견지하면서 조·미관계를 풀어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조·미 정치협상은 언제나 핵문제, 미사일문제, 주한미군문제와 같은 군사문제를 핵심의제로 다룰 수밖에 없다.

여섯째, 북(조선)은 미국의 동북아시아전략의 중심축인 미·일 동맹체제를 상대로 맞서야 하므로, 조·미 정치협상과 조·일 정치협상을 병행하게 된다. 조·미 정치협상과 조·일 정치협상 가운데서 어느 것을 앞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성된 정세에 따라서 결정된다.

나는 지난 9월 23일에 집필한 논문 『조·일 정상회담의 추진배경과 조·일 평양선언의 역사적 의의』에서 북(조선)은 조·미 정상회담이 일정에 올랐다가 성사되지 못하고 클린턴 정권이 퇴진한 직후인 2001년 1월 일본에게 조·일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으며, 그에 따라 2001년 1월 27일 싱가포르에서 일본 총리의 비공식 특사 나카가와 히데나오와 북(조선) 외무성의 강석주 제1부상이 극비회담을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북(조선)이 조·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려 했던 것은, 2000년 11월말 당시 대통령 당선자 부시의 아시아전략문제 자문역을 맡았던 리처드 아미티지(현재 국무차관)가 당시에 일본 언론과의 대담에서 밝혔던 대로,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남북 관계→조·일 관계→조·미 관계의 순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전략구상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부의 한(조선)반도전략에 대해서 언제나 주동을 장악하고 있는 북(조선)으로서는 당연한 대응조치였을 것이다.

부시 정부의 출범 이후 북(조선)의 주동적인 대응조치에 의해서 조·일 정상회담은 물밑에서 꾸준히 준비되고 있었다. 부시 정부가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던 2002년 6월 하순이라는 시점은, 그 동안 북(조선)의 주동적인 대응조치에 따라 물밑에서 추진되어 왔던 조·일 정상회담의 준비가 막바지에 올라서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시점에서 북(조선)은 부시 정부의 대통령 특사 파견제안을 묵살하는 것이 전술적 효과를 극대화할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부의 대통령 특사 파견제안을 묵살하는 조치에서는 두 가지 측면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첫째, 당시의 정황에서는 부시 정부의 대통령 특사 파견제안을 받아주는 것보다 조·일 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 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조·일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그 자체가 부시 정부를 조·미 정치협상으로 끌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둘째, 조·미 사이에서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2003년이라는 시점에 되도록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것이 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2002년 7월 2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가 정례적인 대언론설명회에서 7월 1일 저녁에 특사방북 제안을 철회한다고 북(조선)에게 통고했다고 밝히면서, "조·미 회담 일정을 다시 잡는 것은 현재에는 어렵고 장래에나 가능하다."고 밝혔지만, 조·미 정치협상 일정을 다시 잡게 될 그 '장래'는 예상 밖으로 빨리 다가왔다. 불과 30일 뒤인 7월 31일에 정치협상 일정을 다시 정하는 계기가 살아났던 것이다. 그것도 북(조선)과 미국의 외교부문 최고책임자가 극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살아난 것이다.

바위가 강물의 흐름을 막지 못하듯, 6.29 서해교전은 조·미 정치협상 재개 일정에 잠시 혼란을 줄 수는 있었지만, 그 일정을 진척시키고 있는 정세변화의 흐름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세의 흐름을 전략적 방향에서 읽지 못하고 있는 언론들과 분석가들은, 느닷없이 6.29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강성기류를 넘어 전쟁위기로 악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북새를 떨었다.

그러나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정체변화의 주동을 장악하고 있는 북(조선)에 의해서 조·미 관계와 조·일 관계에서 전환을 불러일으킬 계기를 준비해가고 있었다.

(3) 북(조선) 외무성과 미국 국무부 사이에서 벌어진 전초전

백남순 외무상은 2002년 7월 31일 기자회견에서 콜린 파월에게 만나자고 먼저 제안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서 "상대측에서 요구하면 응할 것"이라고 답변함으로써 북(조선)이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7월 30일 콜린 파월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조선)의 외무상과 만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르나이에 도착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보면, 미국과 남(한국)은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담과 남북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담이 각각 열리기 위해서는 북(조선)이 먼저 만나자고 제안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연합뉴스』 2002년 7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남(한국)의 정부당국자는 "북측이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하지 않는 이상, 남북외무회담, 북미외무회담이 열리기는 쉽지 않다. 북미 사이의 외무회담 여부에 대한 어떤 진전도 없다."고 말했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는 누가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느냐 하는 문제가 하찮은 것이지만, 국가 대 국가의 외교관계에서는 그 문제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는 쪽은 다급한 처지에 있음을 노출하는 것이며, 그 제안을 받는 쪽은 여유 있는 처지에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 된다. 국가 대 국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협상 과정에서 다급한 처지는 언제나 수세적으로, 여유 있는 처지는 언제나 공세적으로 된다. 정치협상에서 주동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나자고 제안함으로써 자신의 다급한 처지를 상대방에게 노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8월 1일자 보도와 『연합뉴스』 7월 31일자 보도에 나온 바대로, 콜린 파월을 수행하고 있었던 제임스 켈리의 말에 따르면, 콜린 파월과 제임스 켈리는 그날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장에 일찍 나가서 북(조선) 대표단이 나왔는지 알아보기로 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은 회의장에 미리 도착하였다. 콜린 파월은 북(조선) 대표단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제임스 켈리에게 백남순 외무상에게 가서 "이쪽으로 와서 커피를 함께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먼저 만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물꼬는 이렇게 터졌다. 북(조선)과 미국의 외교부문 최고책임자의 극적인 만남은 약 15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주는 정치적 의의는 과소평가될 수 없었다. 미국 국무부의 내부 사정에 정통한 워싱턴의 소식통들이 당시에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가 회동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관측하고 있었고, 콜린 파월을 동행하였던 미국 기자들도 백남순 외무상을 자기들의 취재 대상에서 아주 제외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은 사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백남순-파월의 극적인 회동은 2000년 7월 28일 태국 방콕에서 이루어졌던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담을 연상하게 한다. 방콕의 회의장에서 북(조선)의 백남순 외무상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담을 진행하였다. 당초 예정되었던 회담시간은 20분이었지만, 그 역사적인 회담은 7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담에 정치적 의의가 실리는 까닭은, 그 회담에서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문제가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뒤에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북(조선)을 방문하여 조·미 정상회담의 일정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백남순-파월의 극적인 회동에서는 미국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는 문제가 합의되었다. 백남순 외무상은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직후에 기자들의 물음에 대해 답변하면서 "제임스 켈리가 평양을 방문하기로 미국측과 합의했다. 미국의 특사파견에는 전제조건이 없다."고 밝혔다. 백남순 외무상은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뒤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백남순 외무상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7월 31일 브루나이에서 만나 상호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으며, 양측은 이 만남에서 조·미 대화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둘째, 제임스 켈리가 미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하는 것을 환영한다. 셋째, 켈리 특사의 방북시기는 추후 확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동의 한쪽 당사자인 콜린 파월은 특사방북문제가 합의되고,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중대한 사실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말을 아꼈다. 회동 직후에 발표문을 내놓았던 백남순 외무상의 태도와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미국 국무부의 공식발표도 역시 매우 조심스러운 기조로 나왔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8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 필립 리커는 "대북 후속조치는 파월 국무장관이 귀국한 뒤에 부시 대통령과 국가안보회의에서 논의한 뒤에 취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백남순-콜린 회동에서 합의한 사안들에 대하여 부인도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콜린 파월과 국무부는 조·미 외교부문 최고책임자 회동의 합의사항을 자신 있게 발표하지 못하였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조·미 관계개선문제에 관련하여 콜린 파월과 국무부의 행동을 제어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부시 정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쟁이다.

(4) 부시 정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쟁

부시 정부안에서는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계파들 사이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갈등은 언론에 가끔 보도되는 논쟁정도가 아니라 고질적인 파쟁이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5월 14일자 보도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지금 부시 정부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쟁은 "무자비한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 튀기는 싸움(blood feud between implacable foes)"이다.

부시 정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쟁은 국무장관 콜린 파월을 대표자로 하는 협상파와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를 대표자로 하는 대결파, 이 두 계파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그 두 사람은 워싱턴의 정치권 및 관료집단들 사이에서 1970년대 말 이후 약 20년 동안 파쟁을 벌이고 있는 양대 계파의 후예들에 지나지 않는다.

『워싱턴 포스트』가 언급한 뿌리 깊은 파쟁은, 이전의 부시 집권기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던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계파와 레이건 집권기에 국방부 관리였던 리처드 펄(Richard N. Perle) 계파가 벌이고 있는 싸움이다. 스카우크로프트 계파를 협상파라고 한다면, 펄 계파는 대결파라고 할 수 있다. 스카우크로프트 계파가 '국제사회의 협력'을 중시하면서 대외정책을 추진하려는 비교적 온건한 흐름을 대표한다면, 펄 계파는 '힘의 정책'을 동원하여 단독적으로 대외정책을 추진하려는 강경한 흐름을 대표한다.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스카우크로프트와 연방의회 상원의원 헨리 잭슨(Henry Jackson)의 보좌관이었던 펄이 처음으로 숙명의 파쟁을 벌이기 시작했던 때는 1975년이었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잭슨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포드가 소련과 헬싱키 협정을 체결하려고 했을 때 이를 반대하였는데, 펄은 잭슨의 보좌관이었고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는 스카우크로프트의 밑에서 포드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니와 럼스펠드는 레이건 집권기에 협상파에서 대결파로 돌아섰다. 현재 국가안보보좌관인 라이스도 이전의 부시 집권기에는 협상파 계열에 속해 있었는데, 나중에 대결파 계열로 돌아섰다.

스카우크로프트와 펄은 현재 부시 정부안에서 비교적 비중이 낮은 고문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스카우크로프트는 공화당의 대외정책을 검토하는 협상파의 실세로 존재하고 있으며, 펄은 국방부자문기구인 국방정책부(Defense Policy Board) 책임자로서 대결파 계열을 이끌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실제로는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 수행과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펄의 대결파 계열은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와 그의 보좌관들인 루이스 리비(Lewis Libby), 에릭 에들먼(Eric Edelman)을 통하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라이스에게로 이어진다. 라이스의 차관급 보좌관이며 안보정책 책임자인 스테픈 해들리(Stephen Hadley)도 대결파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 국가안보회의 보좌관들 중에서는 대량파괴무기 비확산 담당 선임보좌관인 로벗 조셉(Robert Joseph), 엘리엇 에이브람스(Elliott Abrams), 웨인 다우닝(Wayne Downing), 잘메이 칼리잣(Zalmay Khalizad)이 대결파 계열로 분류된다. 국방부에서 대결파 계열에 속한 관리들은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물론이고,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 국방정책담당 차관보 더글러스 페이스(Douglas Feith)다. 국무부에서는 국제안보 및 군축 담당 차관보 존 볼튼(John R. Bolton)이 대결파 계열에 속해 있다.

대결파 계열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호전집단이며,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조선)을 이른바 '악의 축'이라고 표현하였던 폭언을 부시의 상하양원 합동연설에 기어이 포함시킴으로써 전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장본인들이며, 지금은 이라크 침략전쟁을 일으켜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서 국제사회의 협력을 중시하는 스카우크로프트의 경향은 국무장관 콜린 파월, 국무부 정책기획담당 보좌관 리처드 하스(Richard Haass),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관리 서열 제3위인 마크 그로스먼(Marc Grossman),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클린턴 집권기부터 중앙정보국 국장을 맡아오고 있는 조지 테닛(George J. Tenet)이나 현재 유엔주재 미국대사인 존 니그로폰트(John D. Negroponte)도 스카우크로프트의 협상파 계열로 분류된다.

포드 정부 시절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가 워싱턴에서 대통령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던 1970년대 중반, 당시 육군 중령이었던 콜린 파월은 한(조선)반도의 군사분계선에서 25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최전선 동두천에 배치된 제2보병사단에서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전쟁에도 참가한 바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그 역시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바 있으며, 1975년 사이공이 함락 당하던 패전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인물이다. 콜린 파월은 리처드 아미티지가 전에 미국 국방부에서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를 지낸 경험을 높이 평가하여, 부시가 각료진을 구성할 때 그를 국방장관에 추천한 바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를 주재한 경험이 있으며, 용산에 있는 주한미군사령부를 이전하기 위한 협상을 타결하기도 했다.

부시 정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대 계파들 사이의 파쟁은 대외정책 전반에 관련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중동의 팔레스타인 문제와 이라크 침략전쟁 재개 문제, 중국과 대만에 대한 외교·정치문제,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는 문제, 러시아에 대한 외교·정치문제 등이다. 그 파쟁이 부시 정부에게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으로 제기되어 있는 대북 정책을 결정하는 데서 노골화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6월 3일자 보도는,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 토론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정부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재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자는 북(조선)의 제안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내부의 심각한 견해차이를 아직 조절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북 정책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정부관리의 말에 따르면, 북(조선)은 진지하게 대미 정치협상을 추진하려 한다고 보는 협상파의 견해와 그렇지 않다고 보는 대결파의 견해가 상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앞길이 불투명하다"는 말로 상황을 묘사하였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6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시 정부의 한 관리는 대북 정책에 관련하여 진행하고 있는 관련부서들 사이의 논쟁 때문에 자신이 "늙어버릴 지경"에 있다고 실토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한(조선)반도 정책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를 가지고 파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워싱턴 포스트』 2002년 6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파쟁은 주한미군을 재배치하거나 감축하는 문제를 조·미 정치협상 의제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다고 한다. 그 언론기사는 주한미군의 재배치 및 감축에 관한 문제라고 표현하였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다.

거의 모든 언론과 분석가들은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문제다.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면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시 정부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파쟁은 주한미군 문제를 원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은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명백히 제시되었고, 클린턴 정부가 그 해법을 수용하려고 하였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당시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에게 미사일문제에 관련하여 파격적인 해법을 제시하였다. 내외 언론들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브라이트를 통하여 미국에게 제시하였던 파격적인 해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북(조선)은 일본을 겨냥하여 실전배치한 중거리 미사일을 전량 폐기하는 문제를 검토할 용의가 있다. 둘째, 북(조선)이 해마다 제작하게 될 인공위성 3기를 미국이 북(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대리 발사해 주는 조건으로 우주발사체 백두산의 발사를 영구 중단하는 것은 물론 우주발사체에 관련된 기존시설을 모두 폐쇄할 수 있다.

부시 정부가 들어선 뒤로 핵문제와 미사일문제의 해법은 그 기본구도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을 총괄하는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가 북(조선)의 인공위성을 대리 발사하는 문제를 부시 정부가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던 것은 2001년 6월이었다. 일본 『지지통신』이 2001년 7월 3일에 발행한 『세계주보』와의 회견기사에서 아미티지는 자신의 그러한 견해를 표명하였는데, 인공위성을 대리 발사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에게 제시하였던 미사일문제의 해법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북(조선)이 일본을 겨냥하여 실전배치한 중거리 미사일에 관한 문제는 미국이 일본을 동원하여 적절하게 보상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1999년 10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조·미 미사일협상에서 일본의 경제협력 방식으로 보상한다는 것으로 이미 해법의 기본구도가 마련되었으며,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렸던 역사적인 조·일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조·일 평양선언에서 일본의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에 관해서는 9월 23일에 작성한 나의 논문 『조·일 정상회담의 추진배경과 조·일 평양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것은 미사일문제의 해결하기 위한 기본구도에 대해서 조·미 두 나라가 의견접근을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을 감안할 때, 앞으로 조·미 정치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등장하는 것은 주한미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자기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주한미군 문제를 조·미 정치협상에서 해결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북(조선)도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가져올 수 있는 정치·군사적 파장을 예의 주시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다.

(5) 대통령 특사와 정부대표단은 평양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2002년 9월 26일 백악관은 미국 대통령 특사의 평양방문에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성명은 다음과 같다.

"부시 대통령은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관련부서 합동대표단에게 10월 3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할 것을 요청했다. 켈리 차관보는 북(조선)과 포괄적인 대화를 탐색한다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또 남(한국) 및 일본과의 긴밀한 조절에 의거하여 미국의 정책을 설명하고 미국과 국제사회가 우려했던 일련의 오랜 현안에 관한 진전을 추구할 것이다."

위의 백악관 성명에서 주시할만한 두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차관보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을 파견하는 데 백악관이 직접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무게를 실었다는 사실이다. 성명은 부시 정부의 특사와 정부대표단의 방북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으며, "대통령의 뜻에 따라"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특사와 정부대표단의 평양방문에 정치적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번의 평양방문은 대통령 특사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의 방문이었다.

둘째, 대통령 특사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의 임무는 '탐색'과 '설명'이었다. 조·미 정치협상의 진전방향을 탐색하고, 북(조선)에게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켈리와 정부대표단의 평양방문이 조·미 정치협상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신중한 탐색전으로 될 것이라는 사실은, 켈리와 정부대표단이 평양에 들어가기 약 석달 반 전에 미국의 언론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6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앞으로 재개될 조·미 정치협상은 부시 정부의 전략에 대한 실제적인 실험(real-life test)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더라도 처음부터 협상에 들어가지 않고 신중하게 협상을 진전시킬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대통령 특사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을 태운 미국 공군의 특별군용기가 경기도 오산의 미군 공군기지를 이륙한 뒤에 서해직항로를 통과하여 평양에 내린 것은 2002년 10월 3일이었다. 미국인이 서해직항로를 이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98년 5월 미국 대북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대통령 특사로 방북할 때는 서울에서 일본 요코다 기지로 되돌아가서 동해를 거쳐 평양에 들어가는 동해우회로를 택한 바 있었다. 대통령 특사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이 평양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명의 실무자들이 정치협상을 준비하기 위하여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여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1998년 5월에 대통령 특사 페리가 방북할 때 그의 손에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가 들려 있었던 것에 비하여, 이번에 대통령 특사 켈리는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9월 26일의 백악관 성명에서 드러난 대로, 켈리의 방북은 '탐색'과 '설명'을 위한 방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방북하기 전날인 10월 2일에 서울을 찾은 켈리가 "이번은 어디까지나 실무방문(working visit)"이라고 밝혔던 것을 의미하였다.

대통령 특사를 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의 방북에는 내외신 기자들이 전혀 동행하지 않았고, 그들이 평양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워싱턴 당국과 통신하지도 않았으므로 조·미 정치협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부시 정부의 대통령 특사와 정부대표단은 평양에서 무엇을 탐색하고 돌아갔을까?

켈리는 평양방문을 마치고 서울에 잠깐 머물고 있었던 10월 5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첫째, 부시 정부는 미국의 '우려사안'들인 북(조선)의 핵문제, 미사일문제, 재래식 군사력 문제, 인권문제, 인도주의적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했다. 둘째, 북(조선)이 미국의 '우려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포괄적으로 노력할 경우 조·미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셋째, 부시 정부는 앞으로 대화를 통해 '우려사안'을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달했다. 넷째, 워싱턴으로 돌아가 협상결과를 검토한 뒤에 장차 어떤 조치를 취할지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켈리는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온 짤막한 성명을 읽고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그는 예정되어 있는 만찬도 취소하고 서둘러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일정에 올랐다.『교토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이튿날인 10월 6일 도쿄에 간 켈리는 일본 관방장관 후쿠다 야스오, 외상 가와구치 요리코 등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방북결과를 설명하면서 북(조선)은 종전의 주장을 반복하였고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번에 평양에서 재개된 조·미 정치협상에서 부시 정부가 제시하였던 '우려사안'은 다섯 가지다. 다섯 가지 '우려사안' 가운데서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는 이미 해법이 나와있는 것이므로 부시 정부가 실천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부시 정부가 이번에 새로 들고 나온 것은 이른바 '인권문제'와 '인도주의적 문제'였다. 2001년 6월 6일 부시는 대북정책기조에 관한 발표문에서 핵문제와 미사일문제에 더하여 재래식 군사력 문제를 제기하더니, 그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나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면서는 '인권문제'와 '인도주의적 문제'를 더 포함시켰다.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에 관련하여 기존의 장애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위적인 장애를 끊임없이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부시 정부가 북(조선)의 '인권문제'와 '인도주의적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1993년 6월 11일 뉴욕에서 발표된 조·미 공동성명에서 두 나라는 "상대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합의한 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이다.

북(조선)은 앞으로 진행될 조·미 정치협상에서 '인권문제'와 '인도주의적 문제'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거부할 것이므로 그 문제들은 논의대상으로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부시 정부가 앞으로 조·미 정치협상에서 '인권문제'와 '인도주의적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경우, 내정간섭에 대해서 추호도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는 북(조선)이 미국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도 있다.

부시 정부가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 '인권문제'와 '인도주의적 문제'를 꺼낸 의도는, 그러한 문제제기를 협상책략으로 이용하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미 정치협상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내정간섭에 관한 사안을 들고 나와서 성공한 예가 없었다는 점에서 부시 정부의 의도는 무력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부시 정부의 다섯 가지 '우려사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역시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문제는 미국이 남(한국)에 배치해놓은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문제는 결국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문제다.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주한미군 철수문제라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다. 조·미 정치협상이 재개되면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반드시 중심의제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부시 정부는,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을 후방으로 재배치하고 감축하는 문제를 협상의제로 삼겠다고 이미 공언한 바 있다. 이번에 재개된 조·미 정치협상에서 켈리는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을 후방으로 재배치하고 감축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대통령 특사인 켈리가 1년 9개월만에 재개한 조·미 정치협상에서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북(조선)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10월 7일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과 회견하면서 밝혔던 내용은 북(조선)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외무성 대변인의 회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대통령 특사는 '우려사안'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북(조선)이 먼저 해결하여야 조·미 관계는 물론 조·일 관계와 남북 관계도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심히 압력적이고 오만하게 나왔다"는 것이다. 둘째, 부시 정부의 '우려사안'은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셋째, 부시 정부가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이 확증되었으므로 북(조선)은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그에 해당한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똑똑히 밝혀 보냈다."는 것이다.

10월 5일의 켈리 성명과 10월 7일의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 회견내용을 종합해보면, 이번 조·미 정치협상은 상대방의 견해와 주장을 상호확인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조선)의 외무성 대변인이 회견에서 언급한 북(조선)의 '원칙적 입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지난 7월 31일 부르나이에서 백남순-파월의 극적인 회동이 있었던 이튿날인 8월 1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발표한 북(조선)의 안보보고서에 담겨있다. 그 안보보고서에서 북(조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부시 정부에게 다시 확인하여 주었다.

첫째, 미국은 조·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유엔군사령부 해체, 주한미군 철수, 대북 적대정책 포기라는 4대 과제를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은 자위를 위한 수단이므로 주한미군 철수와 조·미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는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조선)이 부시 정부에게 제시한 4대 과제는 결국 주한미군 철수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지금 조·미 정치협상의 중심의제는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의 재배치 및 감축문제라고 볼 수 있다. 조·미 두 나라가 정치협상을 재개하면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쟁점은, 북(조선)은 주한미군이 철수된 뒤에 군사력을 재배치하고 감축하겠다는 것이며, 미국은 북(조선)이 군사력을 재배치하고 감축한 뒤에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것이다.

핵문제나 미사일문제은 이미 그 해법이 나와있는 문제이며, 그 해법의 실천도 단기간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조선)의 재래식 군사력 감축문제와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아직 그 해법을 찾지 못한 문제일 뿐 아니라, 조·미 두 나라가 그 해법을 합의한다고 해도 그 해법은 단기간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을 두고 실천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철수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분석가들의 예상이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6) 조·미 정치협상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이번에 조·미 정치협상이 재개되기는 했으나, 상호인식의 격차를 확인한 것에 그쳤으므로 조·미 관계가 한 두 달 사이에 급진전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2003년 안에 조·미 정치협상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룰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북(조선)이 미국에 대한 정치협상 전략을 여러 방면에 걸쳐서 유례없이 강하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조선)은 조·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조·미 정치협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이 조·일 정상회담을 통하여 조·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서울방문과 제2차 남북 최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킬 것이다. 조·일 정상회담 이후 만일 제2차 남북 최고위급 회담이 성사되면, 조·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조건은 더 강화되는 셈이다. 남(한국)에서는 올해 12월에 대통령선거가 일정에 올라있지만, 제2차 남북 최고위급 회담을 개최하는 문제는 대통령선거 일정과 적절하게 조절되며 추진될 것이다. 제2차 남북 최고위급 회담을 개최하기 위해서는 남북 사이의 상호방문과 교류·협력사업이 전면화되어야 한다. 올해 9월부터 남북 사이의 상호방문과 교류·협력사업이 전례 없이 다양하게, 연속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셋째, 북(조선)은 재래식 군사력 감축에 관하여 주동적인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10월 7일 『교토통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조선)은 군사분계선에 집중배치한 재래식 군사력의 임전태세를 완화하고, 2만-5만 명의 병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공식적으로 러시아 정부에게 귀띔해준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 보도내용이 사실이라면, 북(조선)은 조·미 정치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먼저 재래식 군사력에 관한 파격적인 해법을 실천에 옮기는 평화공세를 취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북(조선)은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설치함으로써 조·미 정치협상을 개재하는 데서 주동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은 북(조선)의 '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고, 북(조선)은 그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북(조선)은 전격적으로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설치하였다.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설치한 목적이 미국이 요구해온 '개방'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북(조선)이 부분적인 '개방'을 실시한 것이 분명하다. (신의주 특별행정구 설치의 목적을 미국의 '개방' 요구가 아니라 북(조선)의 강성대국 건설전략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별도로 논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북(조선)은 조·미 정치협상에서 부시 정부를 제압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장거리 미사일이라고 부르는 우주발사체 백두산 2호를 발사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는 조치가 그것이다. 그 조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령에 따라 2003년까지 연장될 것이 분명하지만, 만일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에 인위적인 장애를 조성하면서 대결주의 책동을 고집할 경우, 북(조선)은 발사보류 조치를 중단할 것이다.

이처럼 북(조선)이 조·미 정치협상에 대하여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부시 정부는 고질적인 파쟁에 휘말려있으므로 대응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월 스트릿 저널』 2002년 9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한(조선)반도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부시 정부의 관리는 조·미 정치협상에서 "미국이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채 망설이고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진행될 조·미 정치협상은 준비된 역량과 준비 없는 역량이 승패를 겨루는 격돌이 될 것이다. 그 치열한 힘겨루기에서 준비된 역량이 승리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2002년 10월 1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