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문제와 민족자주를 실현하는 과업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례 >

(1) 20세기말 북(조선)이 전개한 반제투쟁과 그 투쟁에서의 승리

(2) 클린턴 정권의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 수정과 그 결과

(3) 2001년의 통일정세에 난관을 조성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첩보활동

(4) 부시 정권의 군사전략 수정과 주한미군사령부의 '전군엄호령(Force Protection Condition)' 발동

(5) 부시 정권의 6.15 공동선언 사문화 책동

(6) 부시 정권의 조·미 공동성명 무효화 책동

(7) 조·미 공동성명은 이행될 것인가?

(1) 20세기말 북(조선)이 전개한 반제투쟁과 그 투쟁에서의 승리

20세기의 한(조선)반도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의 투쟁, 민족해방혁명세력과 제국주의세력의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가장 집중적으로 전개된 무대였다. 20세기의 인류사가 자주의 길로 진보하느냐 아니면 제국주의의 책동 앞에서 좌절하느냐 하는 세계사의 문제는 20세기말에 이르러 한(조선)반도에서 역사의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졌고 사회주의 대국이라는 중국은 반제자주노선에서 이탈하여 미국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던 국제정세는 세계 반제진영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였다.

사회주의와의 냉전에서 승리하였다고 떠들어대던 미국은 '중동의 화약고'에 침략의 불을 질렀다.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은 그 전쟁에서 미국은 자기의 추종국가들에게 파병과 전비부담을 요구했고 그 요구대로 되었다. 중동의 군사강국이라고 했던 이라크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그 추종국가들의 맹렬한 공격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였다. 미국이 중동에서 도발한 제1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곧 한(조선)반도에서 제2차 전쟁을 도발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을 마무리한 시점이었던 1991년에 이미 한(조선)반도에서 제2차 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을 수립하였다. 그 군사전략은 중동과 한(조선)반도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하겠다는 이른바 '윈-윈 전략(Win-Win Strategy)'이었다. 그 군사전략은 1991년 당시 국방장관 딕 체니(현 부통령)와 당시 합참의장 콜린 파월(현 국무장관)이 주도하여 작성한 군사전략검토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입안되었다.

1993년에 클린턴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이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때 한 개의 전쟁에 전쟁수행력을 집중시키되 다른 한 개의 전쟁은 정체전선으로 묶어두겠다는 이른바 '윈-홀드-윈 전략(Win-Hold-Win Strategy)'이라는 수정된 군사전략을 내놓았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 '윈-윈 전략'이 미국의 군사전략으로 채택되었다.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은 그만큼 한(조선)반도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윈-윈 전략'은 북(조선)과 이라크를 대상으로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였을 때, 한 개의 전선에 4-5개의 지상군 사단, 4-5개의 해병여단, 10개의 전투비행단, 50대의 장거리 전략폭격기, 5개의 항공모함 전투단을 동원한다는 내용의 가공할 전쟁전략이었다. 그 전쟁전략을 한(조선)반도에서 수행하기 위한 침략전쟁의 시나리오는 1991년에 처음으로 작성된 '5027 작전계획'이었다. 미 합동참모본부의 연구기관인 미 국방대학 산하 국가전략연구소와 미 태평양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가 합동으로 한(조선)반도의 침략전쟁 시나리오인 '5027 작전계획'을 작성하였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의 기간에 미국은 북(조선)과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전쟁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제 미국에게 남은 과제는 전쟁을 도발할 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했던 구실이 이라크의 침공을 받은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겠다는 것이었다면, 한(조선)반도에서 제2차 전쟁을 도발하는 구실은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었다.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전쟁준비를 다그치고 있던 그 시기에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한(조선)민족의 운명을 결정짓고 더 나아가 세계 반제진영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역사의 준엄한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었다. 클린턴 정권은 1993년에 집권하자마자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구실로 내걸고 북(조선)에게 덤벼들었다. 전면전의 칼을 뽑아든 클린턴 정은은 북(조선)을 위협하면서 굴복을 요구하였다. 클린턴 정권의 집권기간 8년 동안 북(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계속되었던 첨예한 대립과 치열한 투쟁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북(조선)에서는 이 8년 전쟁을 미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책동에 의하여 도발된 '총포소리 없는 조·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반제진영과 제국주의진영이 한(조선)반도를 무대로 하여 벌였던 20세기 최후의 대결이었다.

북(조선)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진영의 책동과 공세에 맞서서 치열한 반제투쟁을 전개하는 동안에 지원을 받을 곳도 지원을 요청할 곳도 없었다. 제국주의진영의 위세에 기가 질린 반제진영의 여러 나라들과 진보적 인류는 북(조선)이 그 대결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면서 정치적 지지와 연대성을 표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반제전선의 간고한 투쟁에서 반제진영이 승리하느냐 아니면 제국주의진영이 승리하느냐 하는 인류사의 최대 문제가 넘겨준 역사의 엄청난 무게를 북(조선)은 1990년대 10년 동안 홀로 감당해야 했다.

클린턴 정권은 반제진영의 유일한 영도국으로 남아있는 북(조선)을 없애버리면 반제진영 자체가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으로 타산하였다. 미 군부가 '5027 작전계획'를 가지고 실시한 컴퓨터 모의전쟁실험의 결과는 언제나 미군의 승리로 나왔다. 클린턴은 한(조선)반도의 전쟁계획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제국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호언장담하면서 흥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어리석게도 두 가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북(조선)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대비하여 어떤 준비를 갖추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총포소리 없는 조·미 전쟁'이 과연 어떻게 결말을 지을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북(조선)은 199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총포소리 없는 조·미 전쟁'에 대비하여 이미 20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미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일화는 북(조선)의 준비태세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클린턴 정권이 1993년 3월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세계 최대의 전쟁급 실전훈련으로 재개할 준비를 시작하였을 때,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 지휘관 회의가 소집되었다. 걸프전에서 이긴 미국이 첨단무기를 총동원하여 북(조선)에 쳐들어오면 과연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이냐 하는 김일성 주석의 질문에 대해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은 쉽사리 답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 우리가 이깁니다. 만일 우리가 지게 될 때면 지구도 깨어져 나갈 것입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고 답변하고, 미국의 공격에 맞서기 위하여 강력한 타격수단을 실전에 배치하였음을 밝히면서 미국과의 전전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반제전쟁의 시나리오를 설명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클린턴 정권이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하기 하루 전날인 1993년 3월 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고 북(조선)은 전시동원태세에 들어갔다.

위의 일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필승의 전쟁시나리오를 수립해놓았다는 사실이다. 북(조선)의 반제전쟁 시나리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을 강타하는 강력한 타격수단을 실전에 배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강력한 타격수단은 곧 전략미사일을 뜻한다. 전략미사일은 북(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위력적인 반제전쟁의 수단이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자들의 힘은 군사력이며, 그 군사력의 실체는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이다.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이 없는 미국의 지배력은 상상할 수 없다. 미국은 자기만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을 무한정으로 개발하고 보유하려 하고 있으며, 5대 핵강국 이외에 다른 나라들은 절대로 보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미국은 핵확산금지조약이니 미사일기술통제협약이니 하는 국제법을 만들어놓고 모든 나라들이 그 조약과 협약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만일 반제진영의 어떤 나라가 핵무기나 전략미사일을 만들려고 하면, 미국은 그 나라를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국가'로 낙인을 찍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쳐들어가게 된다. 미국은 전략미사일과 같은 대량파괴무기가 반제진영으로 확산되는 것을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량파괴무기 확산문제는 반제진영이 전략미사일로 무장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말에 한(조선)반도를 무대로 하여 벌어진 반제진영과 제국주의진영의 치열한 대결은 반제진영이 전략미사일을 보유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결이었다.

오늘 반제진영은 반외세 민족주의세력과 반제민족해방세력이 공동보조를 취함으로써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였다. 반제진영에서 주도적 지위에 있는 것은 반제민족해방세력이다. 반제민족해방세력은 거의 모두 비국가적 체계로 조직화되어 있는데, 20세기말에 반제노선을 수호하는 혁명적 국가는 오직 두 나라, 곧 동반구의 북(조선)과 서반구의 쿠바밖에 없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쿠바의 국가역량은 전략미사일을 개발할 수 없는 수준에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므로 북(조선)이 전략미사일을 보유하는 문제는 20세기말에 제국주의의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된 세계 반제진영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대의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만일 반제진영의 어떤 나라가 핵무기와 전략미사일을 보유하게 되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구도에는 파열구가 뚫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미국의 최대 약점이었다.

북(조선)은 1993년 5월에 기습적으로 미국의 약점을 찌르는 제1차 공세를 단행하였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3년 5월 당시 미 해군 예비역 장교로 미 국방부 '전국군사합동정보센터(NMJIC)'에 근무했던 마크 커크(현재 미국 연방하원의원)는 얼마 전 '미국 연방의회 미사일 방어 문제 회의'에서 1993년 5월에 북(조선)이 중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을 때 미 국방부가 긴급비상태세에 돌입했다고 회고하면서, 미사일 연료를 기준으로 하여 사거리를 측정하는 '전국군사합동정보센터'의 컴퓨터는 시험발사 직후 예상되는 최종목표를 미국 본토로 계산하였는데, 그 뒤로 미국 서부 해안일대와 하와이 등으로 목표가 좁혀졌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사실은 북(조선)의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1999년 12월 30일자 기사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 기사에 따르면, 1993년에 끝난 제3차 7개년 계획이 아직 수행되고 있었던 후반부에 북(조선)은 세계적으로 아직 몇몇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위력 있는 전투기술기재를 짧은 기간 안에 완성했다고 한다. 여기서 세계적으로 몇몇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전투기술기재라는 것은 1993년 5월에 시험발사되었던 중거리 미사일을 뜻한다.

지금 미사일을 자체로 생산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미국이 감시대상으로 삼고 있는 나라들은 북(조선), 이라크, 이란, 리비아, 파키스탄, 인도 등이다. 파키스탄이 자체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던 미사일 '가우리'는 자국산이 아니라 북(조선)에서 수입한 미사일 '노동 2호'로 밝혀졌고, 이란이 개발한 미사일 '샤하브'도 북(조선)의 미사일 기술을 들여와 변형하여 만든 것이다. 파키스탄과 이란의 미사일은 사거리가 1,500킬로미터를 넘지 못하는 것들이다. 리비아가 생산하고 있는 미사일 '스커드' 개량형의 사거리는 288킬로미터이며, 이라크가 혹시 미국의 감시를 피해서 만든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사거리는 864킬로미터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인도의 미사일인 '프리트비'는 사거리가 150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으며, 사거리 2,480킬로미터의 미사일인 '애그니'는 3억 달러를 투자하여 개발하던 중 미국의 압력을 받고 개발사업을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제3세계의 그 어떤 나라도 미사일 개발능력과 생산능력에서 북(조선)을 따라오지 못한다.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대륙간 탄도미사일 제조에 필수적인 3단식 발사체를 개발하는 높은 기술수준에 이른 나라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거리 미사일을 자체의 힘으로 생산하는 나라도 아직 없다. 북(조선)은 제3세계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미사일 선진국이다.

북(조선)의 굴복을 받아내려고 위험한 전쟁책동에 매달리고 있던 클린턴 정권이 자신의 전쟁책동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는 북(조선)으로부터 제2차 기습공세를 받았던 1998년 8월이었다. 그 때 북(조선)은 자국 최초의 인공위성체 '광명성 1호'와 그 인공위성체를 탑재한 우주발사체를 우주공간으로 쏘아 올렸다. 『아사히신붕』 2001년 9월 7일자 보도에 따르면, 북(조선)이 1998년 8월에 인공위성체 '광명성 1호'를 탑재하여 발사했던 3단식 우주발사체의 이름은 '백두산 1호'라고 한다. 최근에 평양에서 발행된 『조선대백과사전』에 그 우주발사체의 이름이 나와있다는 것이다. 북(조선)에서 광명성은 백두산 상공의 밤하늘에 떠오르는 커다란 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백두 광명성'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인공위성체와 3단식 우주발사체의 개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휘에 의하여 추진되어 왔음을 암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북(조선)은 '백두산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함으로써 미국의 심장부를 날려버릴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였다. 만일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그 미사일이 미국의 심장부까지 날아가는 가상시간은 28분이다. 미국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일 북(조선)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했다면, 미국은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에 관한 정치협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정치협상의 요구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거의 모든 분석가들은 북(조선)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미국이 그 개발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북(조선)과 정치협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한 분석은 빗나간 것이다.

북(조선)이 20세기말에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는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자체의 기술과 자금으로 만들어내기까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만일 그 20년의 준비가 없었더라면 북(조선)은 1993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의 침략전쟁에 의해서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걸핏하면 다른 나라들을 침공해왔던 미국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전면전 직전의 험악하고 첨예한 지경으로 몰아갔으면서도 북(조선)에게는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북(조선)은 뒷걸음질을 치는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맹공을 퍼부으면서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결국 세계의 면전에서 미국의 콧대를 꺾어놓았다. 지난 10년 동안 제3세계의 힘없는 나라들이 미국의 일방적인 침공을 받고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던 바로 그 기간에, 전면대결의 상황 속에서 미국에게 연속적으로 강한 정치적 타격을 가하고 미국의 콧대를 꺾어놓았던 유일한 나라는 북(조선)이었다. 클린턴 정권 8년 동안 지속되었던 미국의 전면전 위협 앞에서 북(조선)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나가면서 세계 반제진영을 수호하고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심장부를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강타할 수 있는 대량보복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상대만 골라서 전쟁을 하는 나라다. '백두산 1호'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신흥군사강국 북(조선)이 미국이 전쟁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클린턴 정권에게 깨우쳐 주었다.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한 뒤에 견제장치가 없어진 틈을 타서 전 세계를 집어삼킬 듯이 휘젓고 다니던 미국은 세계의 면전에서 벌어진 '총포소리 없는 조·미 전쟁'에서 자기가 이길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클린턴 정권은 패배하였다. 클린턴 정권은 뒤로 물러섰고, 자기의 한(조선)반도 전략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1998년 말부터 클린턴 정권을 고민에 몰아넣은 물음이었다. 클린턴 정권이 신흥군사강국 북(조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한(조선)반도 전략을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클린턴 정권의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 수정과 그 결과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은 정치외교전략과 군사전략으로 대별될 수 있다. 20세기말의 조·미 대결에서 패한 클린턴 정권의 전략검토는 그 두 분야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한(조선)반도에 대한 정치외교전략의 검토와 수정을 총지휘한 사람은 윌리엄 페리였다. 그는 1999년 9월에, 그러니까 북(조선)이 우주발사체 '백두산 1호'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했던 때로부터 근 한 해 뒤에 한(조선)반도에 대한 정치외교전략 수정판을 완성하였다. 그 수정판을 세간에서는 '페리 보고서'라고 부른다.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치외교전략 수정판인 '페리 보고서'의 핵심내용은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조·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적대관계를 청산한다는 말은 전쟁을 기피하겠다는 말이고, 조·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말은 두 나라가 국교를 수립한다는 말이다.

2000년에 들어서서 클린턴 정권이 자기의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을 수정한 뒤에 김대중 정권에게 요구한 것은 대북 정치협상의 추진이었다. 2000년 3월부터 시작된 남북 정부당국 사이의 접촉은 마침내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이라는 역사적 대사변을 이루어내었다. 클린턴 정권은 평양회담에서 자기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이 채택되도록 사전에 조치하였다. 미국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을 남북관계의 틀로 변형하면, 그것은 남북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남북관계의 정상화라는 것은 하나의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두 개의 주권국가로 상호인정한 기초 위에서 국가연합을 수립하는 것이다. 세상에 공개된 '페리 보고서'에서는 비록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클린턴 정권은 한(조선)반도의 평화공존전략(국가연합수립전략)을 조·미 관계 정상화에 수반되는 필수조건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6월 13일 7천만 민족과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던 김대중 대통령의 손에는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전략에 따라 국가연합 수립을 지향하기 위하여 채택하려고 하였던 남북평화선언문 초안이 들려있었다. 『요미우리신붕』 2001년 6월 6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실천적인 조치를 합의하자고 제안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하여 거절당했다고 한다. 1991년에 나왔던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를 합의하려는 김대중 대통령의 구상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한(조선)민족의 통일염원에서 한 걸음 비켜나가서 한(조선)반도에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두 개의 나라, 다시 말해서 국가연합을 수립하려는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에 근거를 둔 전략구상이다.

클린턴 정권은 크게 오산하였다. 평양회담에서 채택된 것은 국가연합을 수립하기 위한 남북평화선언이 아니라,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이정표인 6.15 공동선언이었다. 6.15 공동선언의 채택은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이 미처 착수되기도 전에 파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사변이었다. 클린턴 정권이 한(조선)반도에서 추진하려고 고안했던 국가연합수립전략은 6.15 공동선언이 채택됨으로써 클린턴의 책상서랍 속에서 휴지로 변해 버리는 결정타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클린턴 정권은 자기들이 김대중 정권을 앞세워 추진하려고 했던 국가연합수립전략이 6.15 공동선언으로 파탄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행되고 있었던 조·미 정치협상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북(조선)에게 패한 클린턴 정권에게 조·미 정치협상을 계속 진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 정권은 자기들의 집권기간 8년 동안 북(조선)을 전쟁으로 없애버리기 위한 전면전을 도발하려 했던 전략을 포기하고 평화공존전략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99년의 페리보고서 작성이 2000년의 조·미 공동성명으로 이어졌고, 다시 조·미 정상회담 개최 계획으로 진전되었던 것이다.

2000년 10월 21일 워싱턴에서 채택된 조·미 공동성명은 어느 날 갑자기 조명록 특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으로 가서 클린턴과 회담하여 채택된 문서가 아니다. 그 성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북(조선)은 간고하고 험난한 반제투쟁을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속하였다. 물론 북(조선)은 1945년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국토가 분할되었을 때부터 반제투쟁을 전개해왔으므로, 북(조선)의 반제투쟁의 기간을 56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데 이 글에서 북(조선)의 반제투쟁이 1945년 9월 미군의 한(조선)반도 상륙 이후부터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대신에 반제투쟁의 30년을 강조하는 까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3년에 후계자로 추대된 이후에 2000년 10월까지 근 30년 동안의 반제투쟁을 이끌어 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미 공동성명 채택이라는 역사적 사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하여 왔던 북(조선)의 30년 반제투쟁의 승리였다.

그 30년 투쟁역사의 갈피에는 세상에 밝히지 못하고 묻어둔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모른다. 그 수많은 사연들은 먼 훗날 통일조국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한(조선)민족의 위대한 반제투쟁사로 기록되어 20세기의 인류 역사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조·미 공동성명을 채택하기 위하여 북(조선)은 지난 30년 동안 온갖 역경과 난관을 무릅쓰고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세력과 맞서서 대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을 정치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가장 위력한 수단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확보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하였다는 사실, 그 두 가지다. 웬만한 나라 같았으면 열 차례도 더 좌절하였을 수 있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폭풍이 몰아쳤던 지난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북(조선)은 미국을 정치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반제투쟁에서 물러서지 않고 간고분투하였다.

북(조선)은 경제건설의 전략과 전망이 확고하게 있고, 물질·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과학기술적 성과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지금 북(조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건에 놓여있는 원인은, 자기의 국가적 자원과 능력을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30년 동안의 반제투쟁에 우선적으로 투입하였다는 데 있다. 만일 북(조선)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공세적 반제투쟁을 포기하고 자기의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수세적 방어전에 주력하면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발전에 자기의 국가적 자원과 능력을 투입하였다면, 북(조선)은 오늘 경제적 난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73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북(조선)의 경제적 풍요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조선)민족 전체가 분단으로 인하여 겪는 민족적 재앙을 극복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더 중대한 과업이라고 믿었다. 미국에 의하여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지고 나라의 반쪽이 미국에게 자주권을 짓밟히는 민족적 재앙이 지속되는 조건에서 북(조선)의 경제적 풍요만을 추구하려는 국가발전의 길을 택하는 것은, 민족의 자주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주체사상과 모순되는 것이며 한(조선)민족 전체의 절실한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며 조국통일위업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북(조선)은 자기들의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반제투쟁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항일투쟁 20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반제투쟁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북(조선)은 그 길에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간고하고 험난한 30년 반제투쟁을 마침내 조·미 공동성명 채택이라는 빛나는 승리로 장식하였다.

우리는 조·미 공동성명 채택의 의의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조·미 공동성명은 7천만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조·미 공동성명에 민족자주의 좌표가 들어있다는 말은 2000년 10월에 조·미 공동성명이 채택됨으로써 조·미 관계가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질적 변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북(조선)의 외무성 대변인이 2001년 10월 23일에 발표한 담화에서 조·미 공동성명의 채택으로 일어났던 조·미 관계의 질적 변화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담화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 조·미 사이에는 대화가 활발해지고 적대관계의 종식을 확약한 공동코뮈니케와 테러를 반대하는 공동성명도 발표되었었다. 두 나라 지도자들 사이에는 특사방문과 친서들이 교환되고 최고위급 상봉이 일정에 오르는 정도로 이해와 신뢰가 조성되었었다. 더욱이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 일정에는 미국이 위협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미사일 문제를 서로의 이익에 맞게 해결하려는 우리의 중대결단에 대한 토의가 핵심사항으로 포함되여 있었다."

2000년 12월 30일자 『뉴욕타임스』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미사일 문제와 관련한 북(조선)의 '중대결단'이라는 것은 미사일의 실험과 수출만이 아니라 개발까지 중단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클린턴 정권 시기에 대북정책 조정관이었던 웬디 셔먼은 클린턴 정권 말기에 북(조선)과 미국은 북(조선)이 모든 종류의 미사일의 개발, 배치, 실험을 중단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진지한 협상을 벌였다고 밝혔다. 클린턴 정권 시기에 국무부 정책기획담당 차관보였던 몰튼 핼퍼린도 클린턴 정권 말기에 북(조선)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유예하겠다는 선언을 항구적인 협정으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북(조선)이 이처럼 모든 종류의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중대결단을 내린 것은, 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대결단을 통해 조·미 관계에서 제기된 초미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클린턴에게 제시하였고 클린턴은 그 방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것이 클린턴 정권 말기에 조·미 관계가 질적 변화를 일으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렇다면 클린턴 정권 말기에 북(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당시 내외 언론들은 한결같이 북(조선)이 인공위성 대리 발사, 테러지원국 해제, 경제지원을 요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알맹이가 빠진 이야기다. 클린턴 정권 말기에 진행된 조·미 정치협상에서 북(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하였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주한미군 철수였다. 북(조선)은 2001년 8월 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러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조·러 모스크바 선언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한 강력한 의사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으로부터의 미군 철수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로 된다"는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인공위성 대리 발사, 테러지원국 해제, 경제지원 등과 달리 주한미군 철수는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라는 것이다. 북(조선)이 2000년 10월에 워싱턴에서 열렸던 조·미 정치협상에서는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를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는데, 10개월 뒤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러 정상회담에서 비로소 그 문제를 중시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클린턴 정권 시기에 조·미 정치협상에서 극적으로 타결될 뻔하였던 핵심내용은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확약하는 것과 더불어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중지를 확약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외 언론들이 떠들었던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부차적인 것들이다. 앞으로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에 나와서 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새로운 합의문을 채택하는 경우, 그 합의문에는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문제를 반드시 적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미 공동성명에 명시되어 있는 조·미 평화보장체계의 수립은 곧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에 나와서 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합의문을 채택하는 경우, 그 합의를 이행함으로써 실시될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는 한(조선)반도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남·북·미 3자 협상에서 다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까닭에 클린턴 정권 시기에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였던 스탠리 로스 같은 사람조차도 2001년 1월 11일 아시아협회에서 연설하면서, "조·미 미사일 협정을 맺게 되면 재래식 군축협상과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미국은 포괄적인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회를 포착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중지가 상호타결방식으로 확정되면 남북관계는 획기적으로 발전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끼리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자주통일의 전망은 더욱 확고하게 될 것이 명백하다.

(3) 2001년의 통일정세에 난관을 조성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첩보활동

2001년 2월 부시 정권이 들어섰을 무렵에 김대중 정권은 부시 정권이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을 그대로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2월의 시점에서 그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전략에 대한 부시 정권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김대중 정권은 올해 2월말까지만 해도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평화공존과 국가연합에 관한 전략)을 그대로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청와대는 6.15 공동선언에 들어있는 내용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과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에 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청와대의 추진계획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에 기초하여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에 평양회담에서 거절당했던 제안을 다시 꺼내어 합의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남북평화선언이 국가연합 수립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에 6.15 공동선언은 연방제 통일실현을 지향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차이를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2001년 2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은 남(한국)의 지방지와 나눈 대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요미우리신붕』 2001년 3월 13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5월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이 성사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맞춰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남북평화선언문 초안을 작성하여 평양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 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들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 채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을 추진하면서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난 4월 4일 서울에서 열린 비공개 전략토론회에서 미 연방의회 산하연구기관인 미국평화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윌리엄 드렌넌이 "미국은 남북이 평화선언을 채택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남북평화선언은 남(한국)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경고성 발언'을 하였던 것을 보면, 부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평화선언 채택을 준비하는 사업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부시 정권은 청와대에서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던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 준비사업과 한(조선)민족끼리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려는 준비사업을 파탄시키려는 흉계를 꾸몄다. 그 흉계는 김대중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불러 한·미 정상회담을 벌여놓은 자리에서 부시가 직접 김대중 대통령을 질책함으로써 김대중 정권이 부시 정권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한(조선)민족끼리 민족문제를 논의하려는 계획을 중단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백악관의 흉계를 알 턱이 없는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3월 8일 가벼운 마음으로 백악관에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한·미 정상회담장에 나온 부시는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과 남북평화선언을 준비해온 것을 지적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질책하고 즉시 중단하라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클린턴 정권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에 따라 계획되었던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려는 것과 관련하여 부시로부터 예상치 못한 질책을 받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굴욕적인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앞으로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과 관련한 대북 접촉은 사전에 반드시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다음날 미국 대외관계협의회(CFR)와 미국 기업연구소(AIE)가 워싱턴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간담회에서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며, 남북기본합의서에 들어있는 불가침 합의를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뒤로 물러섰다. 이것은 부시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고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과 남북평화선언 채택을 준비해오던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포기선언이었다. 이로써 지난 5월로 예상되었던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은 무기한 연기되고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에는 난관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북(조선)은 지난 10월 23일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를 통해 미국은 "남조선으로 하여금 북과 남이 협의해야 할 민족내부 문제마저 먼저 미국의 승인을 받도록 복잡한 공정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북남 공동선언 이행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부시가 남북평화선언을 준비해왔던 청와대의 극비사항을 한·미 정상회담 전에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워싱턴에서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평화선언을 채택하기 위하여 극비로 추진해왔던 대북 사업에 관한 정보가 어떻게 백악관으로 새어나갔는지를 조사하라고 국가정보원에게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실시된 국정원의 자체 감찰 결과, 국정원 대북전략국 과장이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요원(재미동포로서 미국 시민권자)에게 1999년부터 포섭된 이후 김대중 정권의 대북사업에 관한 극비정보를 계속 넘겨주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 대북전략국은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평화선언 준비사업을 실무적으로 집행한 부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극비로 추진했던 대북 접촉은 국정원 대북전략국 과장→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미 중앙정보국 국장의 경로를 거쳐 부시의 책상 위에 보고서로 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 대북전략국 과장을 포섭하여 청와대의 극비정보를 미 중앙정보국을 통해 백악관에 넘겨준 것은 명백한 간첩행위며, 그러한 행위를 했던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요원은 간첩이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은 간첩이 누구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체포하기는커녕 손도 대지 못했으며,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국정원이 통상적인 정보교류를 오해하였다. 국정원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되레 역정을 냈다.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민족민주운동권 인사들에게 '북한 간첩'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탄압하고 있는 국정원은, 자기의 내부에 파고 들어와 극비정보를 빼내간 미국의 간첩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였으며, 그 간첩을 파견한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게 되레 질책만 받은 꼴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 준비사업을 추진했던 총책임자인 국정원장 임동원은 이 사건으로 미 중앙정보국으로부터 미움을 샀으며, 이 사실을 간파한 한나라당을 비롯한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8.15 민족통일대축전 문제를 구실로 삼아 국정원장에게 집중공세를 취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자기의 자리를 내놓아야 하였다.

이 사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2001년 5월에 예상되었던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의 추진계획을 파탄시키고 2001년의 통일정세에 난관을 조성한 방해세력은 남(한국)의 친미예속정권이나 반통일세력이 아니라 부시 정권이라는 사실이다. 클린턴 정권은 6.15 공동선언을 지지한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반대하였고, 부시 정권은 한 술 더 떠서 한(조선)민족의 조국통일위업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는 것, 그것은 반세기 넘은 세월 동안 지속되어온 미국 역대정권들의 변함없는 태도이며, 일관된 정책이며 확고한 방침이다.

(4) 부시 정권의 군사전략 수정과 주한미군사령부의 '전군엄호령(Force Protection Condition)' 발동

클린턴 정권이 한(조선)반도에 대한 정치외교전략의 검토와 수정을 진행하는 것과 더불어 한(조선)반도에 대한 군사전략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2000년 4월 19일 민주·공화 양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 연방의회의 초당적 기구인 국가안보자문위원회에서는 '윈-윈 전략'이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부적절하다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연방의회에서 현행 군사전략의 낙후성이 공공연하게 지적되었다는 것은 클린턴 정권이 이미 자기의 군사전략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밀려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클린턴 정권은 자기의 집권시기에 한(조선)반도에 대한 정치외교전략만이 아니라 군사전략도 재검토하고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집권말기의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에 군사전략에 대한 검토작업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퇴장하고 말았다.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했던 것은 클린턴 정권이 처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던 군사전략을 검토하는 일이었다. 럼스펠드는 국방장관 자리에 앉자마자 20명의 군사전문가들을 지명하여 개인화기로부터 핵무기 사용의 명령과 통제에 이르기까지 현행 군사전략을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 검토작업이 일차적으로 마무리되었던 2001년 3월 20일을 전후한 시점에 럼스펠드는 부시에게 '윈-윈 전략'을 폐기할 것을 건의하였다.

미 국방부의 수정된 군사전략이 국방장관 럼스펠드와 군 수뇌부의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던 때는 2001년 7월 12일이었다. 이 일간지는 미 국방부 문건을 인용한 보도에서, 부시 정권은 북(조선)과 이라크를 겨냥하여 유지해왔던 '윈-윈 전략'을 폐기하고 미국 본토 방어, 침략국의 적대행위 예방, 1개의 대규모 전쟁에서의 결정적 승리, 한정된 기간의 국지전 참전을 동시에 수행할 능력을 확보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수정된 군사전략을 채택하였다고 보도했다. 부시 정권이 채택한 수정된 군사전략은 '원-플러스 전략(One-Plus Strategy)'이라고 부른다.

2001년 8월 미 합동참모본부는 미군 야전사령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호한 대결(Positive Match)'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모의전쟁실험(simulation)을 실시하였다. 이 모의전쟁실험은 수정된 군사전략에 의거하여 전쟁을 수행할 때 과연 승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실험의 결과는 미군이 승리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2001년 8월 17일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부시 정권의 수정된 군사전략에 관하여 발언했는데, 그의 발언내용 가운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이 1개의 대규모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그는 미군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까지 쳐들어가서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미국은 신흥군사강국 북(조선)과의 전면전을 기피하는 대신 이라크에 대한 전면전을 도발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윈-윈 전략'을 폐기함으로써 방대한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쏟아 부었던 군사비를 첨단 군사력으로 무장하는 데 돌려 미군 무력을 현대화하는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부시 정권이 채택한 수정된 군사전략은 재래식 공격능력의 제한성과 미사일 공격능력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정된 군사전략은 전지구적 범위의 미사일 요격망을 설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부시 정권은 2002년 회계연도에 탄도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예산을 82억9천4백만 달러로 책정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의 1999년도 총군사비가 13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윈-윈 전략'과 '5027 작전계획'이 폐기됨으로써 미 군부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는 쪽은 미 지상군이다. 미국의 군사전략이 '원-플러스 전략'으로 수정된 것은 재래식 군사력의 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지상군 가운데서도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지상군부터 일차적으로 감축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주일미군이 공군, 해군, 해병대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주한미군은 지상군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원-플러스 전략'이 채택되자 가장 커다란 불안감을 느낀 것은 주한미군사령부였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자기의 존재이유를 미 군부와 워싱턴 정가에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방도는 한(조선)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조선)민족을 군사적 긴장으로 몰아넣을 궁리만 하고 있었던 주한미군사령부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윈-윈 전략'의 폐기를 발표했던 날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서 터졌던 테러사건이었다.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9.11 테러사건은 어떻게 하면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고심하고 있었던 주한미군사령부에게 '결정적인 기회'였다.

9.11 테러사건의 현장이 씨엔엔방송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던 9월 11일 밤 11시 45분(서울 시간)에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미연합군사령관 토머스 슈워츠의 이름으로 한미연합군에게 비상경계령을 발동하였다. 그 시각은 미국 동부 시간으로 하면 오전 9시 45분이 된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첫 번째 항공기가 충돌한 시각이 오전 8시 45분이었고, 미 국방부 건물에 항공기가 충돌한 시각은 9시 40분,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진 시각은 9시 50분이었으며, 부시가 이 사건을 가리켜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라고 발표한 시각은 9시 31분이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미국 본토를 제외한 지역에서 가장 신속하게, 마치 9.11 테러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비상경계령을 발동하였던 것이다. 이 비상경계령은 최고 수준의 테러경계령으로서 이른바 '전군엄호령-디(Force Protection Condition-D)'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침 그날 토머스 슈워츠는 말레이시아에 출장을 나가있었고, 미8군사령관이며 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인 자니니도 미국에 출장을 나가있었으므로 한미연합군사령부는 사령관과 참모장이 없는 가운데 긴급하게 비상경계령을 발동했던 것이다. 비상경계령의 발동과 더불어 '한미연합군 위기관리체제'가 가동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이에 한국군 수뇌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국방장관 김동신이 했던 일은 한국군 주요지휘관들에게 상황근무 및 대북감시 태세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장관서신'을 보낸 것이 전부다. 한국군이 주한미군사령관으로부터 평시 작전통제권을 넘겨받았다는 발표가 나온 지도 벌써 7년이 되었으므로, 이번에 한국군에게 비상경계령을 발동해야 할 군령권자는 한국군 합참의장 조영길(당시)이었는데, 그는 미군 지휘관들에게 밀려 말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헌법상 군의 최고통수권자로 되어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9월 12일 한국군과 경찰에게 비상경계태세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이 지시는 비상경계령의 발동이 아니라 의례적인 담화지시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며 한미연합군사령관인 토머스 슈워츠가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며, 한미연합군사령부는 미군 합동참모본부의 휘하에 있다는 사실도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따라서 한미연합군에 대한 비상경계령 발동권은 한국군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아니라 미군 합동참모본부의 휘하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틀어쥐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1994년 12월 1일에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 합참의장에게 넘겨주었다고 발표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발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번에도 드러났다. 한(조선)반도에는 언제나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준전시체제만이 존재하고 있으며 평상시체제는 없으므로, 작전통제권을 평시와 전시로 구분할 수 없는 데도, 미 군부는 마치 두 종류의 작전통제권이 있는 것처럼 조작하여 평시 작전통제권을 넘겨준다는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준전시체제에 있는 한국군이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지휘·명령체계에 편제되어 작전통제를 받고 있는 이상, 평시와 전시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한국군은 언제나 주한미군사령관의 지휘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한국군이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벗어나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는 미국의 예속군대라는 사실은 이번에도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부시 정권은 지난 5월 1일에 이른바 '세계테러보고서'라는 문건을 발표하면서 북(조선)을 올해도 여전히 '테러지원국'이라고 지목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반미국가와 반미조직에 대하여 이른바 '테러범'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하여 1988년부터 해마다 되풀이하고 있는 짓이다.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하고 있는 북(조선)의 눈앞에서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연합군을 동원하여 테러사태에 대비한 비상경계령을 발동한 것이 북(조선)과 무관하다고 말한다면 그런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가 비상경계령 발동으로 악화되고 6.15 공동선언의 이행에 심각한 난관과 장애가 조성되었는데도, 김대중 정권은 비상경계령이 북(조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헛소리를 되풀이하였다. 김대중 정권의 헛소리는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를 군사적 대결로 악화시키려는 부시 정권의 반통일책동을 옹호·두둔하는 술책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임무는 한(조선)반도에서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저지하면서 첨예한 군사적 대치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그가 해야 할 다른 일은 없으며, 가끔 날씨가 좋은 날 시간이 좀 남으면 미8군 영내 골프장에서 골프클럽이나 휘두르면 된다. 1999년 6월에 일어났던 '서해교전'의 작전명령서를 내려보낸 군령권자가 주한미군사령관 존 틸러리였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1999년 11월에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틸럴리는 현대그룹 간부들에게 현대그룹이 금강산관광사업을 통하여 북(조선)에 지불한 현금이 군사적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떠들면서 금강산관광사업마저 방해하려고 책동하였다. 주한미군사령관이 금강산관광사업을 방해한 이유는 그 사업이 진척됨으로써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대치상태가 혹시 이완되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주한미군사령관은 9.11 테러사건이 터지자 미국으로부터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남(한국)에서 비상경계령을 발동하여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더욱 첨예한 지경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이번에 한미연합군에 비상경계령이 발동되어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것 때문에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 당국자 회담이 난항을 겪었고 결국 결렬되었다. 한미연합군에게 비상경계령을 발동하여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그로써 우리 민족끼리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가로막은 방해책동은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은 세월 동안 되풀이되어 오고 있는 미국의 대결주의적 행동의 전형이다.

이번에 비상경계령 발동사태에서 드러난 것은 6.15 공동선언의 이행을 가로막고 있는 방해책동의 주범이 부시 정권이라는 사실이다.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길에 난관과 장애가 조성된 주요 원인은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이 그 선언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부시 정권이 그 선언에 대하여 방해책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남(한국)의 반통일세력들도 6.15 공동선언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인이지 주된 요인은 아니다.

(5) 부시 정권의 6.15 공동선언 사문화 책동

남(한국)에서 내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데, 어떤 사람은 김대중 정권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반대하고 있는 극단적인 반통일세력이 집권하면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파탄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6.15 공동선언마저 실종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차기 정권도 미국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친미예속정권일 것이므로 차기 정권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할 것인가 아니면 이행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기 정권이 아니라 부시 정권이 결정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을 '북한 퍼주기 정책'이라고 비난하며 사사건건 반대하고 있는 극단적인 반통일세력이라 할지라도 일단 집권하면 미국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미국은 자기에게 충실하게 복종하지 않는 세력에게는 집권의 기회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백악관과 청와대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조공과 책봉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부시 정권이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로 나오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부시 정권이 남(한국)의 차기 정권에게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라고 지시하면 그 선언은 급속도로 이행될 것이며, 만일 그 선언을 이행하지 말라고 지시하면 그 선언을 이행하는 길에는 난관과 장애가 조성될 것이다.

클린턴 정권은 평양회담에서 남북평화공존전략을 관철시켜 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물러났으나, 부시 정권은 6.15 공동선언을 반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클린턴 정권의 남북평화공존전략마저도 외면하고 있다. 부시 정권은 클린턴 정권의 남북평화공존전략을 추진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한(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클린턴 정권의 남북평화공존전략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부시 정권이 한(조선)민족끼리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이처럼 부시 정권은 김대중 정권에게 6.15 공동선언을 당장 파기해 버리라고 지시하고 싶을 터이지만, 차마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김대중 정권이 부시 정권의 지시에 따라 6.15 공동선언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하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하게 될 것이다. 부시 정권은 북(조선)으로부터 강력한 정치공세를 받게 될 것이고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권을 비롯하여 전민족적으로 강력한 정치공세를 받게 될 것이다.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고 있는 대로, 북(조선)의 대외정책은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서 수행되고 있다. 만일 부시 정권이 친미예속정권으로 하여금 6.15 공동선언을 파기하게 한다면, 북(조선)은 조·미 사이에 채택되었던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파기하는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 분명하다. 약속 파기에는 약속 파기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북(조선)의 초강경 공세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동결을 약속한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파기한다고 선언하고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재가동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북(조선)이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파기하면 미국에게 '백두산 2호'의 발사를 2003년까지 유예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자동적으로 무효화된다. 유예약속이 무효화되면 북(조선)은 우주발사체 '백두산'을 2호, 3호 연속적으로 발사할 것이다. 이러한 초강경 공세 앞에서 부시 정권은 버티지 못하게 되어있다. 지금 부시 정권이 6.15 공동선언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자꾸 방해하면서도 차마 그 선언 자체를 파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초강경 보복공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30년 전의 역사적 경험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972년에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통일정세는 질적 변화를 일으켰다. 미국이 혐오하고 반대하는 자주통일운동이 전민족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게 되었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도 지지와 성원을 보내었다. 그렇게 되자 미국은 박정희 친미예속정권에게 7.4 남북공동선언을 파기하라고 지시하였다. 박정희 친미예속정권은 그 지시에 따라 7.4 남북공동선언을 사실상 파기하는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 당시 미국이 친미예속정권에게 그 선언을 파기하도록 지시했어도 북(조선)은 미국에게 초강경 보복공세를 가하지 못했다. 보복공세의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파기행동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3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미국과 친미예속정권의 타산은 완전히 빗나갔음이 드러난다. 미국과 친미예속정권은 자기들이 7.4 남북공동선언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고 해서 조국통일 3대 원칙이 파기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저력을 알지 못하는 미국은 조국통일 3대 원칙이 얼마나 위력적인 전파력과 생활력을 발휘하면서 그 이후 30년 동안에 자기의 원칙을 실현하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지난 30년 동안 이어져온 한(조선)민족의 조국통일운동에 의하여 마침내 2000년 6월에 평양회담이 성사되었고 자주통일을 실현하는 이정표인 6.15 공동선언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30년 전과 달리 북(조선)이 미국에게 초강경 보복공세를 가할 수 있게 된 오늘, 7.4 남북공동성명을 파기하려고 날뛰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미국이 6.15 공동선언을 파기하려는 노골적인 책동을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미국이 6.15 공동선언을 방해하기 위한 책동은 그 선언을 사문화하는 책동밖에 없다. 사문화 책동이란 그 선언을 파기한다고 선언하지는 못하는 조건에서, 친미예속정권이 적당히 핑계를 대면서 시간만 질질 끌고 그 선언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하여 선언을 사실상 사문화시키려는 음흉한 책동을 의미한다.

(6) 부시 정권의 조·미 공동성명 무효화 책동

2001년 1월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가장 먼저 손을 대었던 중대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클린턴 정권이 수정해놓은 한(조선)반도 정치외교전략을 다시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 재검토 과정에서 부시 정권이 문제로 삼은 것은 6.15 공동선언이었다. 부시 정권은 그 선언이 '페리 보고서'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전략, 곧 국가연합 수립전략을 이미 파탄시켰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부시 정권은 '페리 보고서'에 포함되어 있는 한(조선)반도 국가연합 수립전략이 6.15 공동선언에 의해 파탄되었으므로 '페리 보고서'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도 전반적으로 파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2001년 2월부터 넉 달 동안 부시 정권이 '페리 보고서'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을 재검토한 결과는 지난 6월 6일 부시의 대북정책 발표문에 요약되어 있다. 부시는 그 발표에서 조·미 공동성명에 기초하여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겠다는 말은 일체 꺼내지 않았고, 조·미 정치협상의 목표가 두 나라의 관계 정상화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그 대신 부시는 제네바 기본합의의 이행을 개선하는 문제, 미사일 계획을 검증할 수 있는 제재조치에 관한 문제, 미사일 수출을 금지시키는 문제, 재래식 군사태세의 위협을 완화시키는 문제를 조·미 정치협상에서 다루겠다고 말했다. 그 발표문은 2000년 10월에 워싱턴에서 채택된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고, 클린턴 정권 8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조·미 정치협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다섯 해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던 미사일 문제에 관한 조·미 정치협상의 성과를 내던지고 협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부시 정권의 궤변은 더 이상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협상 중단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부시가 대북정책 발표문을 내놓기 한 달 전인 5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조치를 2003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부시 정권이 대북정책을 어떻게 검토하겠는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관심을 표명하였는데도 부시 정권은 그러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사실상의 협상 중단을 선언했던 것이다.

부시 정권의 협상 중단 선언에 대하여 북(조선)은 지난 10월 23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신의 있는 조·미 대화의 재개는 부시 행정부가 최소한 클린턴 행정부의 마지막 시기에 취했던 입장수준에 도달해야 논의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고 밝혔다. 북(조선)이 말하고 있는 '클린턴 정권 말기의 수준'이라는 것은 2000년 10월 워싱턴에서 채택된 조·미 공동성명을 뜻하는 것이다. 조·미 공동성명을 인정한 기초 위에서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해야 한다는 말이다.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위의 담화에서 "조·미 대화가 이미 두 나라 정부 사이에 합의된 기본합의문과 공동코뮈니케를 이행하기 위한 실천적 문제들로부터 논의하는 대화로 되어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공정으로 될 것이라는 것은 상식"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연구가로 알려진 셀릭 해리슨도 지난 8월 2일자 『뉴욕타임스』에 발표한 기고문에서 부시 정권이 진정으로 조·미 정치협상을 바란다면 조·미 공동성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은 조·미 정치협상의 성과를 부인하고 처음부터 협상을 다시 시작하자는 궤변을 떠들면서도, 똑같은 그 입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아무런 조건 없이 북(조선)과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지난 7월 27일 서울에서 열렸던 한·미 외무장관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북(조선)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대화를 재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8월 8일 미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도 똑같은 거짓말을 되풀이하였다.

부시 정권이 지금에 와서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려는 책동을 벌이게 된 것은 '페리 보고서'의 수정된 정치외교전략의 일부가 6.15 공동선언에 의하여 파탄되었으므로 그 전략에 의하여 채택된 조·미 공동성명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물러나는 퇴각을 예고하는 민족자주의 좌표가 조·미 공동성명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정권이 조·미 대결에서 패배하여 조·미 공동성명을 작성하였으므로 그 공동성명을 이행하면 종국적으로 미국은 남(한국)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고 한(조선)반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시 정권이 조·미 공동성명의 성과 위에서 제2단계의 조·미 정치협상을 진행시키게 되면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의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부시 정권은 결국 철수결정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그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주한유엔군사령부 해체, 한미합동군사훈련 폐지, 남(한국)에 대한 미국산 무기강매 같은 일련의 문제들을 조·미 정치협상 탁자 위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북(조선)은 조·미 정치협상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철폐시키는 마지막 단계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한(조선)민족에게는 민족자주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면에 미국에게는 남(한국)에 대한 반세기 동안의 지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부시 정권은 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이라는 각도에서도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지 않고 있는 까닭을 설명할 수 있다. 부시 정권이 만일 조·미 공동성명을 인정하고 그 성과 위에서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는 조·미 정치협상을 추진하게 되면 자연히 '북(조선) 미사일 위협'이 효력을 잃어버리고 차츰 사라지고 말 것이므로, 부시 정권은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려는 책동을 벌이고 있다고도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조·미 공동성명 무효화 책동의 주되는 원인은 아니다. 부시 정권은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는 문제와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를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부시 정권이 조·미 공동성명을 인정하고 그 성과 위에서 조·미 정치협상을 추진한다고 해서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려는 부시 정권의 계획이 전면적으로 파산 당하는 것은 아니다. '북(조선) 미사일 위협'이 효력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부시 정권이 꺼낼 수 있는 다른 빌미들이 있다.

클린턴 정권은 북(조선)이 미국의 심장부를 날려버릴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이를 인정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점에서는 부시 정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북(조선) 미사일 위협'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보유사실을 감추는 한편,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적당하게 꾸며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허구를 꾸며내서 빌미로 삼고 그에 따라 자기들이 노리고 있는 군비증강을 획책하는 일은 미국의 전문분야다.

부시 정권이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려는 책동의 주된 원인은, 미국이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남(한국)을 클린턴 정권이 조·미 공동성명 한 장으로 포기하려 했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실책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회해보려고 획책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7) 조·미 공동성명은 이행될 것인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조·미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의 채택은 한(조선)민족의 21세기 운명과 동아시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역사적 대사변을 예고한 것이다. 조·미 공동성명은 민족자주의 좌표이며, 6.15 공동선언은 자주통일의 이정표다. 민족자주의 과업과 자주통일의 과업이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조·미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도 하나의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미 공동성명이 이행되고 6.15 공동선언이 실현되면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달성하는 결정적인 국면이 마련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조선)민족은 사상과 정견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일치단결하여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고 6.15 공동선언을 사문화하려는 부시 정권의 책동을 저지·파탄시켜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정세가 한(조선)민족에게 제기하고 있는 절실한 요구이며 반만년 민족사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절박한 임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북(조선)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제압하여야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고 6.15 공동선언을 사문화하려는 부시 정권의 책동을 파탄시키고 그 두 개의 문서를 현실화하는 길을 열어놓을 수 있는데, 북(조선)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제압할 수 방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자신에게서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세력에 대한 환상과 공포다. 제국주의자들의 허장성세 앞에서 주눅이 들고 '강대성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 민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패배주의와 절망밖에 없다. 자기 민족이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주체역량을 믿는 믿음, 그리고 민족의 자주역량을 조직·동원하면 그 어떤 강대한 제국주의세력이라도 능히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필승불패의 각오, 이것이야말로 반제투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사상적 요인으로 된다.

부시 정권은 북(조선)과 전면전을 각오한 대결을 벌인 경험도 없고 그 대결에서 정치적으로 패배한 경험도 없으므로 클린턴 정권이 초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의 힘만 믿고 허장성세하면서 큰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강대한 제국주의세력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는 게 아니다. 문제는 허장성세 뒤에 감추고 있는 그 약점을 꿰뚫어보는 지략이다.

부시 정권의 조·미 공동성명 무효화 책동과 6.15 공동선언 사문화 책동을 파탄시키기 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략은 미국의 약점을 겨냥하고 있는 '시한 설정 전략'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3년을 최종 시한으로 설정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5월 3일 평양에서 열렸던 조선·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백두산 2호'의 발사를 2003년까지 유예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미국에 대한 시한부 통첩이다. 또한 2003년은 미국이 신포에 경수로 두 기를 책임지고 완공해주기로 약속한 시한이기도 하다. 신포 경수로를 2003년까지 완공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2003년은 미국이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는 매우 불리한 시점이다. 또한 2003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 추대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시 정권이 만일 끝내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고 6.15 공동선언을 사문화시키려는 책동을 버리지 않는다면, 북(조선)은 미국이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위반하게 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어있는 2003년에 가서 '백두산 2호'의 발사 유예조치를 해제하고 '백두산 2호'를 발사대에 세우게 될 것이다. '백두산 2호'의 발사 유예조치는 조·미 공동성명에 명시되어 있다. 조·미 공동성명과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연계되어 있다. 조·미 두 나라는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따른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기 위한 공약과 노력을 배가할 것을 확약한다는 문구를 조·미 공동성명에 넣었던 것은 그 두 문서가 연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미 공동성명과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한꺼번에 파기될 것이다.

부시 정권이 제네바 기본합의의 약속 시한인 2003년까지 그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북(조선)은 5만킬로와트, 20만킬로와트의 발전능력을 가진 흑연감속로 공사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북(조선)은 2001년 5월 16일에 조선중앙방송의 보도를 통하여, "미국이 2003년 경수로 제공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핵동결 해제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고 경고하였다. (『연합뉴스』 2001년 5월 16일자에서 재인용)

만일 조·미 공동성명과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동시에 파기되면 미국은 북(조선)과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려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2001년 4월 18일에 조선중앙방송이 보도한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미국이 깡패식 논리에 기초해 조미 기본합의문을 파기하고 조선반도의 평화과정을 파괴한다면 그로부터 초래되는 모든 후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핵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무기의 힘이 결코 미국의 고유한 독점적 특허권으로 존재하기 않으며 미국의 핵기지 또한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아직까지 조선은 미국 땅에 포탄 한 발 던진 적이 없지만 이제 다시 미국이 조선을 건드리고 전쟁으로 도전해 온다면 조선 인민은 지난 전쟁시기의 복수까지 합해 미제 침략자들에게 천백 배의 보복타격을 가할 것이다." (『연합뉴스』 2001년 4월 19일자에서 재인용)

 

부시 정권이 끝내 조·미 공동성명을 무효화하고 6.15 공동선언을 사문화시키려는 책동을 버리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국)과 해외의 한(조선)동포들로부터도 격렬한 정치공세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2003년까지의 기간에 남(한국)과 해외의 한(조선)동포들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단결하여 자기의 투쟁력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남(한국)과 해외의 한(조선)동포들이 6.15 공동선언을 방해하고 있는 최대의 반통일세력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반미자주의 기치를 들고 조국통일운동을 더욱 힘있게 전개하게 될 것이다. 민족적 단결을 실현하고 그 단결력으로 반미자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을 벌이는 것은 미국에게 커다란 타격으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시 정권의 책동은 제네바 기본합의서와 조·미 공동성명의 파기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나는 2003년에 가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파탄되고 말 것이다. 한(조선)민족은 부시 정권의 책동을 꺾고 승리하게 될 것이며, 미국으로 하여금 제네바 기본합의서와 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도록 강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여 민족자주위업과 연방제 통일위업을 완수하는 결정적인 국면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부시 정권의 정치적 패배는 불가피하며, 한(조선)민족의 정치적 승리는 확정적이다. 시간은 앞으로 2년밖에 남지 않았다. (2001년 11월 24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