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관계의 냉각국면은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 례>

(1) 조·미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정세관

(2) 부시 정부를 상대하는 북(조선)의 전술과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운동

(3) 두 가지 외교적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

(4) 부시 정부가 새로 제기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 조·미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정세관

세상이 아는 대로, 클린턴 정부 말기에 풀려나가던 조·미 관계는 부시 정부로 교체되자 냉각국면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와 달리 강경한 대북 정책을 취함으로써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고 소동을 피웠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무지한 판단이 빚어낸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조·미 관계를 냉각국면에 몰아넣은 부시 정부가 대북 관계를 적대정책에 언제까지나 묶어두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들은 한(조선)반도 정세가 어느 방향으로 변화·발전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이 지닌 시각에서는 정세가 변화하는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언제나 제국주의적 관점에 맹종하기 때문에 굄풂하다.

나는 전에 발표한 몇몇 논문에서 부시 정부가 조성해놓은 냉각국면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정권은 페리 보고서가 제시한 조·미 관계의 정상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미 논증한 바 있다. 그렇게 논증한 내용이 옳았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이 맹종하고 있는 제국주의적 정세인식을 비판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대북 강경책을 주장하는 세력과 대북 온건책을 주장하는 세력이 똑같은 제국주의세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강경성'이니 '온건성'이니 하는 미국 정권의 대외적 성격을 구분하는 법은 사실 부르주아 언론이 이른바 '당근'과 '채찍'이라는 모욕적인 말로 유포한 왜곡선전을 적당히 포장해서 내놓은 개념인데, 실제로는 야만적 국가폭력을 휘두르는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약탈적 본성을 가려주는 어설픈 위장막에 지나지 않는다. '당근'과 '채찍'이란 원래 몰이꾼이 길들이지 못한 말이나 나귀를 다룰 때 쓰는 물건이며, '강경책'이니 '온건책'이니 하는 말은 미국이 제 말을 듣지 않는 '깡패국가'를 다룰 때 쓰는 제국주의적 외교용어다.

정세변화에 따라 엇갈리며 나타나는 '강경성'과 '온건성'이라는 제국주의세력의 이중적 성격은 그 세력의 본성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성격이 아니다. 그 이중적 성격은 반제자주역량과 제국주의세력이 맞서 싸우는 반제전선의 일진일퇴에 의하여 결정되는 전세의 두 가지 반응양태다. 그러므로 부시 정부의 성격을 '강경성'과 '온건성'이라는 구분법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부시 정부는 미국의 역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침략·약탈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 제국주의세력의 권력기구다.

둘째,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한(조선)반도 정세가 반제자주역량의 힘과 전략에 의해서 변화·발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설령 안다고 해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제국주의세력의 관점에 맹종하는 예속세력이므로 정세를 바꾸는 힘은 언제나 제국주의세력에게 있다는 거짓말을 믿고 있다.

그렇다면 정세는 어느 쪽의 힘에 의하여 변화·발전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정세는 반제자주역량에 의하여 변화·발전되고 있다는 것으로 나온다. 제국주의세력은 자기가 유지·관리하고 있는 지배와 착취의 낡은 체제를 절대로 바꾸려하지 않으므로 정세의 변화와 발전을 반대하고 억누른다. 제국주의세력의 신식민지 체제를 뒤엎고 자주의 길을 개척하는 모든 변화와 발전은 언제나 반제자주역량의 힘과 전략에 의해서 실현된다.

제국주의적 정세관은 낡은 체제를 지키고 그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므로 반역사적일 수밖에 없지만, 민족주체적 정세관은 그 낡은 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교체하기 위한 관점에 서 있으므로 혁명적이다. 제국주의적 정세관에 대하여 비할 바 없이 우월한 민족주체적 정세관의 과학성, 우월성,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조선)반도 정세는 과학적이고 우월하며 혁명적인 민족주체적 정세관으로 바라보아야 제 모습이 보인다.

남(한국)에서 반통일세력의 정세인식과 통일운동세력의 정세인식이 갈라서는 지점은 민족주체적 정세관을 내세우느냐 아니면 제국주의적 정세관을 고집하느냐 하는 문제에 잇닿아있다. 민족주체적 정세관은 제국주의세력과 맞서 싸우며 자주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반제자주역량의 전략과 전술에 의거하여 부시 정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따라서 조·미 관계를 인식할 때, 우리는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나는 성격을 놓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반제자주역량이 어떠한 전략과 전술을 수행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

반제자주역량의 실상은 그에 대한 부르주아 정권과 그 언론들의 왜곡선전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심하게 굴절된 모습만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명백한 사실은, 반제자주역량이 위력적인 전략과 전술을 수행하여 정세를 자주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반제자주역량의 우세한 힘이 제국주의세력을 압박·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입증되고 있듯이, 제국주의세력과 반제자주역량의 관계는 힘에 의한 대결로 일관하는 적대관계다. 제 힘만 믿고 날뛰고 있는 제국주의세력은 반제자주역량을 협상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야만적 국가폭력으로 압살하여야 할 적대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제국주의세력이 반제자주역량과 정치협상을 벌이게 되는 원인은 반제자주역량의 우세한 힘에 의해서 저들의 압살정책이 무력화되고 결국 정치협상의 길로 강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원인은 없다. 그런데 반대로 반제자주역량이 미약하고 전략적으로 실패하고, 그리하여 정세가 불리하게 전개되는 경우에 제국주의세력은 반제자주역량에 대한 압살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오게 되고 그로써 제국주의세력은 침략·약탈적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세력과 반제자주역량이 정치협상을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주의세력의 압살정책에 대해 반제자주역량이 승리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지난 6월 6일에 부시 정부가 넉 달 동안 지속된 대북 관계의 냉각국면을 접고 북(조선)과 정치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북(조선)의 반제자주역량이 부시 정부를 정치협상의 길로 강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로, 제국주의세력과 적대관계에 있는 반제자주역량은 왜 정치협상의 길을 택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제국주의세력과 벌이는 정치협상은 반제투쟁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반제노선을 수정한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반제자주역량의 정치협상이 '평화공존'과 '평화적 이행'을 떠들다가 자멸하였던 현대 수정주의세력의 반제전선 이탈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하고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있다.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반제자주역량이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파탄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니까 하는 수 없이 제국주의세력과 타협하려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의구심은 쓸 데 없는 것이며, 그러한 선전은 논할 가치도 없는 사실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조·미 정치협상을 추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한 마디로 말하여,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조선)민족이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게 되면, 오랫동안 분단체제에 의해서 격폐·분산되어 있었던 반제자주역량은 7천만 민족의 힘을 통일적으로 조직·동원하는 위력적인 민족주체역량으로 비약적으로 강화·발전될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그러한 통일적인 민족주체역량을 지니고 있어야 침략과 약탈을 자행하는 제국주의세력이 한(조선)민족을 다시는 노리지 못하게 된다. 또한 통일된 한(조선)반도의 반제자주역량이 그러한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여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반제자주역량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으며, 전세계 민중의 반제자주화운동을 힘있게 고무·추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연방통일국가는 전세계 혁명적 민중의 반제전선에 무한정한 동력을 공급하는 자주시대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제국주의적 정세관으로 보면 조·미 정치협상은 '평화공존'을 실현하기 위한 협상으로 보이지만, 민족주체적 정세관으로 보면 그 정치협상은 반제자주역량의 승리와 전진을 위한 협상으로 보인다.

(2) 부시 정부를 상대하는 북(조선)의 전술과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운동

클린턴 정부 시기에 조·미 정치협상이 여러 차례 진행되고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해도, 조·미 관계는 아직 대결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미 관계의 대결구도를 인식하는 데서 명확히 지적해야 할 문제는, 조·미 두 나라가 초강대국과 약소국의 대결구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미 관계의 성격을 초강대국과 약소국의 대결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내용은 덮어두고 형식만을 더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약소국인 북(조선)이 어떻게 초강대국 미국에 당당히 맞서나가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조·미 관계의 성격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서 하는 말이다. 조·미 관계의 성격은 약소한 반미국가와 강대한 미국의 관계가 지니고 있는 성격과 질적으로 구별된다. 반미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다른 반미국가들과 달리 북(조선)은 사회주의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반제자주역량을 지니고 있다. 조·미 관계는 제국주의세력과 반제자주역량의 정치·군사적 대결구도로 파악해야 하며 동시에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대결구도로 파악해야 한다.

북(조선)이 미국과 정치협상을 추진하고 미국의 동맹국들과 잇달아 국교를 수립하게 되자,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은 마치 북(조선)이 반제자주화전략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일정부분 수정한 것으로 오판하고 이른바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선전이다. 오늘 북(조선)이 부시 정부를 대하는 관점은 1945년 8월 15일이래 미국의 역대 정부들을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제자주적 관점이다. 부시 정부에 대한 북(조선)의 전략은 미국의 역대 정부에 대한 전략과 같은 반제자주화전략이다. 미국이 예나 지금이나 제국주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한 북(조선)의 관점은 예나 지금이나 반제자주적 관점이며, 그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반제자주화전략이다.

여기서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미국에 대한 북(조선)의 전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전략은 변하지 않았지만 전술은 변하였기 때문에 변화된 전술에 관심이 집중된다. 미국에 대한 북(조선)의 전술은 민감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민첩하게 수행되고 있다. 오늘 같은 전환기에 전술적 변화는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다. 북(조선)이 부시 정부를 어떻게 상대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전략단위의 논의가 아니라 전술단위의 논의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권과 그 언론들은 북(조선)의 반제자주화전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북(조선)이 전개하는 전술단위의 움직임을 마치 전략단위의 움직임인 것처럼 왜곡하면서 '개방'이니 '신사고'니 '변화의 조짐'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사람들의 대북관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미국이 제국주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그리고 북(조선)이 사회주의혁명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북(조선)의 반제자주화전략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자기의 반제자주역량을 동원하여 부시 정부를 상대하고 있는 전술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북(조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에서 자기의 전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미국이 틀어쥐고 있는 외교적 봉쇄망을 뚫고 나가는 돌파전술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북(조선)은 199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자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냉전시기에 북(조선) 외교의 활동범위는 사회주의 진영과 비동맹 진영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 두 진영을 매개로 하여 자본주의 진영의 일부에 걸쳐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비동맹 진영이 약화되자 북(조선) 외교는 곤경에 빠졌고 그 활동범위는 위축되었다. 미국은 그 틈을 노리고 외교적 봉쇄망을 더욱 조이며 압살정책을 휘둘렀다. 부르주아 정권과 그 언론들은 북(조선)이 봉쇄 빗장을 걸어놓은 '폐쇄국가'라느니 '농성국가'라느니 하면서 선동하였지만, 그 빗장은 북(조선)이 안에서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미국이 밖에서 걸어놓은 것이었다.

외교봉쇄는 경제제재로 직결된다. 북(조선)이 1990년대 이후에 들어오면서 경제난을 겪게 되는 일차적 원인은 미국이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에 더욱 조여놓은 외교적 봉쇄망과 그에 의한 경제제재의 압박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대북 경제제재 조치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386급 컴퓨터를 여러 대 연결하면 군사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고 강변하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시골 초등학교 학생들도 잘 쓰지 않는 386급 컴퓨터마저도 미국이나 제3국의 기업이 북(조선)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있다. 경제제재 조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북(조선)의 식량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요소인 화학비료가 재래식 폭약을 제조하는 데 전용될 수 있다고 강변하면서 미국이나 제3국의 기업이 화학비료를 북(조선)에 수출하기 못하도록 봉쇄하고 있다.

북(조선)은 미국의 외교적 봉쇄망을 뚫고 나가는 것이 부시 정부가 조성해놓은 조·미 관계의 냉각국면을 해소하는 유력한 방도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미국이 틀어쥐고 있는 외교적 봉쇄망을 뚫고 나가야 경제제재 조치가 무력화되고 경제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북(조선)이 미국의 동맹국들과 줄이어 국교를 수립하고 있는 마당에 부시 정부가 50년 묵은 외교적 봉쇄망을 예전처럼 무한정 붙들고 늘어질 수만은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북(조선)이 요즈음 유럽연합에 속한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과 줄이어 수교하는 것은 조·미 관계의 냉각국면을 해소하는 우회 돌파전술이다.

국제사회가 조·미 관계의 변화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미 관계는 국제사회의 변화에서 영향을 받는다. 북(조선)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이 북(조선)과 우호·친선적인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미국의 외교적 봉쇄망에 파열구를 내고 있으며, 부시 정부가 조성해놓은 조·미 관계의 냉각국면을 해소하고 있다.

둘째, 북(조선)은 중국, 러시아와 공조관계를 형성하는 전술을 전개하고 있다. 올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였고, 지난해 7월에는 푸틴이 북(조선)을 방문하여 조·러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올해 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며, 장쩌민의 북(조선)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북(조선)과 중국, 러시아의 관계가 공조관계로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과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공조관계로 이어주고 있는 것은 그 세 나라들 사이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통의 이해관계란 부시 정부가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는 책동을 반대하는 문제다. 북(조선)은 바로 그 공통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중국, 러시아와 공조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공통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서로 가까워지고 있는데, 7월 16일 장쩌민의 러시아 방문에서 우호·친선·협력조약이 체결된 것은 중·러 관계에서 40년만에 일어난 큰 변화다. 주시해야 할 문제는, 그 공조관계가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반미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중·러 공조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술적 대응범위에 한정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는 반제전선에서 이탈하고 각각 미국과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관계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조·중·러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부합하는 측면보다 어긋나는 측면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부시 정부가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는 책동을 반대하는 조·중·러 공조관계가 형성된다고 해도 그것은 전략적 반제전선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전술적 공조에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이처럼 북(조선)이 중국, 러시아와 공조관계를 맺을수록 동북아시아 정세는 미국에게 불리하게 바뀌어간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북(조선)은 부시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조·중·러 사이의 전술적 공조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의 강경세력이 집권하여 한·미·일 남방 삼각동맹체제를 강화하게 되자 그에 대응하여 조·중·러도 북방 삼각동맹체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냉전체제가 구축되고 있는 것이므로 한(조선)반도의 분단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외적 요인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제국주의세력을 중심에 두고 정세를 파악하는 데서 생겨난 착오다.

북(조선)이 부시 정부의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책동에 반대하는 공통의 이해관계 위에서 중국,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면서 전술적 공조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냉전체제를 수립하는 계기가 아니라 제국주의세력의 강권과 전횡을 반대하는 투쟁이며 군사적 패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세력의 야만적 책동을 견제하는 조치다. 북(조선)과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냉전체제를 수립할 의사가 없다. 이에 관해서는 중국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북(조선)이 동북아시아에서 공조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은 조·미 정치협상 과정에서 드러날 부시 정부의 횡포를 예방·통제하고 조·미 관계를 북(조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선하여 주한미군을 철퇴시키고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유리한 국제정세를 조성하기 위한 전술이다.

북(조선)의 반제자주역량이 반미공조관계의 측면지원을 받아 강화되면 제국주의세력은 몇 걸음 뒤로 밀려나게 되고 그에 따라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에 나와서 횡포와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시 정부는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책동을 반대하는 조·중·러 공조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공조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부시 정부가 북(조선)과 정치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전민족적인 운동이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현실에서 입증된 것이지만, 남북관계는 조·미 관계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진전시킨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전민족적인 운동은 거꾸로 조·미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주면서 관계개선을 재촉하고 있다. 남·북·해외 조국통일운동세력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전민족적 운동을 힘있게 전개하면 그 운동은 자연히 조·미 관계를 냉각국면에 빠뜨리고 남북관계 개선에 제동을 걸어놓은 부시 정부의 반통일 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불을 붙일 것이며, 남(한국)의 대중들 속에서는 반미 민족주의가 퍼져나갈 것이다. 조국통일운동세력이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것은 부시 정부가 냉각국면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박탈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남(한국)에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려는 통일열기가 달아오를수록 대중은 반미 민족주의를 외치게 될 것이며 부시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은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대중운동에 힘을 집중해야 할 절실한 요구를 지니게 된다.

(3) 두 가지 외교적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

북(조선)이 반제자주화전략을 일관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지적하였다. 여기서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은, 북(조선)의 반제자주화전략은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 실현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북(조선)의 반제자주화전략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은 조·미 국교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북(조선)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목적은 반제노선을 포기하거나 수정하여 제국주의세력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오로지 주한미군을 철퇴시키고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여 반제자주역량을 전민족적 차원에서 비상히 강화·발전시키려는 데 있다. 만일 북(조선)이 조·미 관계를 개선하려 하면서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 실현이라는 전략목표를 추진하지 않는다면 북(조선)은 반제자주화전략을 포기하고 제국주의세력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려 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북(조선)은 주한미군을 철퇴하고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려 하고 있으므로 조·미 국교수립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기존의 반제자주화전략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북(조선)은 조·미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반제자주역량을 비상히 강화하고 한(조선)반도에서 반제자주화전략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조·미 국교수립은 현상적으로 대결구도와 준전시상태를 없애고 평화공존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한(조선)반도에서 반제자주화전략을 승리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적대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국교수립을 완결하기까지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우여곡절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복잡한 절차와 우여곡절의 과정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두 나라가 이루어낸 외교적 합의내용이다. 국교수립은 두 나라가 밀고 당기는 외교전을 벌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 합의를 이행하면서 국교수립이라는 목표에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조·미 두 나라가 장차 국교수립을 내다보면서 이루어낸 외교적 합의는 두 가지 외교문서에 담겨져 있다. 1994년 10월의 조·미 기본합의문과 2000년 10월의 조·미 공동성명이 그것이다. 여기서 관심의 초점은 조·미 두 나라 사이에서 이루어진 외교적 합의내용이 과연 어느 나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국교를 수립하는 방향은 수교를 준비하고 추진하는 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외교적 합의내용에 의하여 결국 결정된다. 그러므로 조·미 사이에서 채택된 두 가지 외교문서의 내용이 어느 나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가를 파악하면 조·미 국교가 수립되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두 가지 외교문서의 내용은 북(조선)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그 외교적 합의의 내용이 왜 북(조선)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까? 부르주아 정권과 그 언론들은 그 두 가지 외교문서에 들어있는 합의내용은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그것은 착오다. 또 어떤 사람들은 조·미 사이의 외교적 합의가 북(조선)의 '핵문제' 및 '미사일문제' 해결과 조·미 국교수립을 상호교환하기 위한 합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견해도 착오다. 그 외교적 합의는 조·미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는 전략목표에 부합되어 있다고 해석해야 옳다.

미국의 견지에서 보면,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저지하여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이지 북(조선)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제거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미국의 적대국이 아니라 동맹국이라도 일단 핵무장을 하게 되면 미국이 그 나라의 핵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적대국이 핵무장을 하는 경우에는 파멸적인 핵전쟁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적대국의 핵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핵무장을 하지 못하도록 핵확산금지조약체제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조선)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강국이지 그것을 개발하고 있는 핵무장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 (나는 이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이미 여러 차례 논증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는다.) 미국이 북(조선)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제거한다는 것은 전연 불가능하다. 미국에게는 북(조선)을 핵강국으로 대우하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 부시 정부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권은 적대적인 핵강국인 북(조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우호적으로 바뀐 핵강국과 새로운 평화공존관계를 맺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조선)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은 북(조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여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조선) 이외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나라들에게 핵무기 개발이 파급·확산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미국을 적대적인 핵강국인 북(조선)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핵확산금지조약체제를 유지하면서 적대적인 핵강국을 우호적인 핵강국으로 돌려세워 보겠다는 궁여지책이다. 부시 정부가 별 수 없이 냉각국면에서 벗어나서 조·미 국교수립의 궤도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 논리적 근거가 거기에 있다.

부시 정부의 견지에서 조·미 국교수립을 보면, 미국의 안보이익을 보장하는 궁여지책이지만, 북(조선)의 견지에서 보면 조·미 국교수립은 북(조선)이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 실현이라는 자기의 전략목표를 이루어내는 결정적인 계기다. 조·미 두 나라가 이루어낸 두 가지 외교적 합의는 북(조선)의 전략목표를 실현하는 데, 그리고 미국의 안보이익을 보장하는 데 공통적으로 부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미 국교수립은 두 나라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방향에서 실현되리라고 전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미 국교수립은 미국에게는 패배를, 북(조선)에게는 승리를 안겨주는 역사의 대전환을 가져올 것이다. 주한미군 철퇴는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약탈의 전략거점인 한(조선)반도에서 제국주의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연방제 통일이 실현되어 제국주의세력을 견제·압박하는 통일된 민족주체역량을 형성한다는 것은 제국주의세력에게 판정패를 안겨주는 것이다. 따라서 조·미 국교수립으로 주한미군이 철퇴하고 연방제 통일이 실현되면 그것은 미국의 패배이지 쌍방의 무승부는 아니며 미국의 승리는 더욱 아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북(조선)이 왜 조·미 사이의 외교적 합의를 중시하면서 이를 이행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부시 정부가 왜 조·미 사이의 외교적 합의를 이행하는 데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부시 정부는 그 외교적 합의를 파기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이행을 무작정 지연시키거나 제멋대로 회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북(조선)은 부시 정부가 조·미 사이의 외교적 합의를 이행하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조·미 관계의 냉각국면을 뚫고 나가는 돌파력을 발휘하고 있다.

(4) 부시 정부가 새로 제기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지난 6월 6일 부시는 대북 정책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조·미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발표내용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협상의제로 내놓겠다고 새로 제기한 문제다. 이 문제야말로 부시가 발표한 내용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핵무기와 미사일에 관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재래식 무력에 관한 문제까지 조·미 협상에서 다루겠다는 것은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 전체를 포괄적으로 해소하는 문제를 조·미 두 나라의 정치협상에서 다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주시할 것은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를 해소하는 데서 남(한국)이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부시 정부는 남(한국) 정부를 배제하고 자기 혼자서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 전체를 포괄적으로 해소하는 대북 협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처럼 중대한 내용을 발표하기 전에 부시 정부의 관리들은 남(한국)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기는커녕 단 한 마디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이 남(한국)의 정치·군사적 권한과 지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며, 김대중 정권은 친미예속정권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협상의제로 내놓겠다고 한 부시 정부의 발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나돌고 있다. 어떤 사람은 클린턴 정부는 핵무기와 미사일에 관한 문제를 의제로 삼고 정치협상을 진행했었는데 부시 정부는 거기에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하나 더하여 결국 조·미 협상의 앞길에 난관을 만들어놓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는 북(조선)의 무장을 해제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제국주의세력이 자기의 적대세력에게 대해서 무장을 해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내 보인 것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래식 무력의 감축하는 문제를 협상의제로 내놓겠다고 한 부시 정부의 발표내용을 해석하는 데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한(조선)반도에서 군사적 대결구도를 해소하지 않고 조·미 국교를 수립할 수 없으며 연방제 통일을 실현할 수 없는데, 군사적 대결구도를 해소하는 문제에는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조·미 두 나라의 군사적 대결구도는 미국의 핵전쟁 위협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전쟁위협을 조성하고 있는 한미연합군의 재래식 무력에 대해서 조선인민군의 재래식 무력이 대치하고 있는 준전시상태로도 존재한다.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에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조선인민군과 한미연합군의 재래식 무력을 상호감축하는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조선인민군과 한미연합군의 재래식 무력을 상호감축하는 문제는 당연히 주한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기지를 폐쇄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부시 정부는 앞으로 조·미 정치협상이 재개될 경우, 3만7천명 주한미군을 그대로 남겨둔 채 조선인민군과 한국군의 재래식 무력만을 상호감축하고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궤변과 억지를 무턱대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부시 정부가 그러한 궤변과 억지를 고집하면 그 순간 정치협상은 깨지게 될 것이므로,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추진할 생각이 아예 없다면 그러한 궤변과 억지를 고집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협상을 거부하지는 못하게 되어 있다. 조·미 정치협상을 거부하지 못하는 부시 정부가 그 협상을 깨뜨려 버리는 궤변과 억지를 고집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러므로 부시 정부는 한(조선)반도에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에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 부시 정부는 주한미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조·미 정치협상을 진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조·미 정치협상에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부시 정부의 구상은 조·미 정치협상이 진전되는 데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앞으로 부시 정부가 조·미 정치협상을 진전시켜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하면 조·미 국교수립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무력을 철수하는 과정에서 맨 처음으로 손을 대는 문제는 주둔기지를 축소하고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병력과 군사장비를 단계적으로 철수한다. 병력과 군사장비의 완전철수, 주둔기지의 완전철폐는 맨 나중에 이루어진다. 부시 정부가 김대중 정부와 진행한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관한 협상에서 주한미군 기지와 훈련장을 축소·반환하겠다고 결정하였다는 사실이 지난 7월 18일에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그것은 부시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의 첫 단계(주둔기지를 축소하고 재배치하는 단계)에 접근하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부시 정부 시기에 조·미 정치협상이 진전되면 그 정권은 조·미 국교수립의 전략목표에 대해서 클린턴 정부보다 한 걸음 더 접근할 것으로 전망된다.

셋째, 조선인민군은 혁명무력이므로 감축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더욱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독창적인 선군정치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조선인민군을 감축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부시 정부는 그러한 사정을 잘 알면서도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자는, 북(조선)이 타협하기 힘든 난제를 일부러 협상의제로 내놓음으로써 결국 협상에 결정적인 난관을 조성하는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조선)이 조선인민군을 절대로 감축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부시의 6월 6일 발표에 대한 북(조선)의 공식 반응은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의 6월 18일 담화로 나왔는데, 그 담화는 "우리의 상용무력은 (줄임) 최소한 남조선에서 미군이 물러가기 전에는 론의의 대상으로조차 절대로 될 수 없는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서 6월 14일에 '북남공동선언 발표 1돐 기념 평양시 보고회'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양형섭 부위원장은 보고를 통해 부시 정부는 "상용무력 축감을 운운하기에 앞서 우리의 자위적 무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남조선 강점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조치부터 취해야 합니다."고 지적하였다. 『로동신문』 6월 20일부에 나온 '우리의 의문부터 풀어주어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는 "미국이 우리의 <상용무력축감>을 바란다면 남조선 강점 미군부터 먼저 철수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주시해야 할 사실은 북(조선)은 부시 정부가 새로 제기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시키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는 점, 그리고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지 않으며, 그 문제를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결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먼저 주한미군을 철수한 뒤에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북(조선)의 주장대로 미국이 주한미군을 먼저 철수한 뒤에 조·미 정치협상에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북(조선)이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려는 의사를 보이지 않는 데도 주한미군을 먼저 철수하는 양보조치를 선행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조선)반도에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한미연합군의 재래식 무력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것과 상응하여 조선인민군의 재래식 무력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방향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주한미군이 철수하여 한미연합군이 해체되고 남북 사이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면 북(조선)은 조선인민군의 전술미사일과 대구경 장거리포로 주한미군 기지와 한국군 기지를 겨누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며,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는 많은 병력과 군사장비를 종전대로 유지할 필요도 없게 된다. 주한미군이 철수되고 한미연합군이 해체된 이후에는 남(한국)도 북(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한 반통일적이고 반화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서 한국군을 재배치하고 감축하게 될 것이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과정은 남북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현함으로써 각자의 무력을 불가침 수준으로 하향조정하는 감축과정, 그리고 남북의 군대를 합쳐 민족을 보위하는 민족연합군으로 만들어 가는 통합과정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조선)반도에서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것은 조선인민군을 일방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 조치가 아니다. 그것은 주한미군을 철퇴시키고 조·미 국교수립으로 나아가는 길, 그리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현하는 길과 잇닿아있다. 북(조선)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88년에 '조선반도의 평화와 군축에 관한 포괄적 제안'을 내놓은 바 있는데, 북(조선)은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이 포괄적 제안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넷째,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조·미 정치협상에서 논의·해결하면 남(한국) 정부당국은 한(조선)반도의 정치·군사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소외라는 말은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조선)반도의 정치·군사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한국) 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북(조선) 정부가 정세변화를 주도하게 되면 남북관계는 연합제가 아니라 연방제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진전될 것이 분명하다. 재래식 무력을 감축하는 문제를 협상의제로 삼겠다는 부시의 발표가 나오자 김대중 정권이 매우 당황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 * * *

지금 한(조선)반도 정세는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제국주의세력이 자기의 낡은 체제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해도, 남(한국)의 반통일세력이 별의별 반역을 저지른다 해도 그 길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 굽이치고 있다. 한(조선)반도 정세가 그렇게 변화·발전되는 까닭은 반제자주역량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은 어떠한 전술을 가지고 반제자주화의 큰 흐름에 합류할 것인가? 이것은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가장 절실한 물음이 되었다. (2001년 7월 2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