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공동선언을 다시 읽는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 례 >

(1) 누가 6.15 공동선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가?

(2) 친미예속성, 그 낡고 썩은 관계의 속성

(3)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과 친미예속성을 청산하는 길

(4)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자주세력은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는가?

(5) 연방제 방안과 연방국가 창립방안

(6) 맺는 말

(1) 누가 6.15 공동선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가?

남과 북의 최고당국자가 6.15 공동선언에 서명한 뒤에 서로 맞잡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민족의 화해와 조국의 통일을 위해 함께 뜻을 모았던 평양회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감격의 시간으로부터 한 해가 흘렀다. 돌이켜 보면 지난 365일 동안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뒤엉키며 흘러왔다. 6.15 공동선언을 시야의 중심에 놓고 선언 발표 이후의 한 해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는 두 줄기의 흐름이 뚜렷이 보인다. 하나는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향하여 용용 흐르고 있는 민족사의 힘찬 물줄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쪽에서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가로막아 보려고 민족사의 물줄기를 거스르고 있는 반역사의 탁한 역류이다.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민족사의 저력과 그 저력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반역사의 탁한 역류, 그리고 그 두 물줄기 사이에 조성된 팽팽한 긴장관계. 바로 이것이 6.15 공동선언 발표 1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민족자주세력이 풀어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향하여 흐르고 있는 민족사의 물줄기를 누가 가로막고 있는가? 한(조선)민족의 조국통일위업을 누가 감히 저해하려 하는가? 만일 누군가가 6.15 공동선언이 실현되지 못하는 원인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차츰 희미해지는 집단적 망각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세를 너무 모르는 철부지의 유치한 발상일 터이다. 만일 7천만 겨레의 민족적 양심이 죽어버렸다면 모르되, 그 양심이 살아 심장과 핏줄 속에 붉은 피를 콸콸 흐르게 하고 있는 한, 한(조선)민족은 6.15 공동선언을 절대로 망각할 수 없다. 그 선언은 한(조선)민족의 자주역량에 의해서 남김없이 실현되고 영원히 빛나게 될 위대한 역사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7천만 겨레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반역사의 탁한 역류는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잘라 말해서 그 역류는 미국의 지배세력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 6.15 공동선언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원인이 미국의 지배세력이 펼치고 있는 방해책동에 있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외부세력에게 떠넘기려는 배외주의적 발상이 아니냐고 수근거릴지 모른다. 허나 그러한 의심의 눈초리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다. 미국의 지배세력은 한(조선)민족의 생활권 밖에 존재하는 외부세력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그 생활권 속에 침입해 들어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좌우하는 외래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논하는 것은 아무짝에 쓸모 없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지배세력은 6.15 공동선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들은 지난해에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것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였다. 백악관과 국무부, 그리고 연방의회는 지난해 6월 15일 직후에 평양회담을 지지한다고 말하였지만, 그 회담을 '역사적인 평양회담'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인 6.15 공동선언을 지지한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들이 6.15 공동선언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지배세력은 자기들의 머리 속에서 평양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자의적으로 분리했으며, 전자는 적당히 용인하되 후자는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회담은 지지하지만 6.15 공동선언은 지지하지 않는 저들의 해괴한 태도는 무엇을 뜻하는가? 저들이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선언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선언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다. 언뜻 이러한 말을 들으면, 미국의 지배세력에게서 6.15 공동선언에 대한 거부감과 방해행위가 교차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감정과 행위의 교차상태를 묘사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클린턴 정권은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 거부감을 지니었던 정권이었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부시 정권은 한 술 더 떠서 그 선언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정권이라는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3월초에 워싱턴을 방문하여 새로 취임한 대통령 부시를 처음으로 만나 한·미 정상회담을 하였을 때, 6.15 공동선언에 대한 부시 정부의 태도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 당시 언론들은 한(조선)반도의 당면정세에 대하여 김대중 정부와 부시 정부가 심각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견해차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6.15 공동선언을 대하는 김대중 정부와 부시 정부 사이의 견해차이였고, 결국 그 선언을 실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두 정부 사이의 엇갈리는 태도 문제였다.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김대중 정부와 부시 정부가 일정하게 엇갈리는 견해와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는 부시 정부의 반대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미 관계의 심층부에 들어있는 본질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겉모양만을 훑어보고 있는 사람들은 부시 정부가 아무리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주권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 정부가 왜 자기의 의사와 요구대로 그 선언을 실현하려 하지 못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미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남(한국) 정부는 미국의 지배세력의 의사와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한·미 관계는 주권국가 대 주권국가의 대등한 관계이지만,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은 정반대이다.

지난 3월 7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보았던 워싱턴의 어떤 미국인 분석가는 "부시가 면전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격"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분석가는 "부시는 이번에 당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서울에서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겠다고 한 것과 같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물론 실제 뺨을 때린 것이 아니라 수사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로서는 민족적 자존심이 쿡쿡 찔리는 듯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러한 모욕적인 표현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3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에 근교에 있는 앤드류스 공군기지에 내렸을 때,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미국의 지배세력은 국가원수를 영접한다고 하면서 고작 주한미국대사 대리, 앤드류스 공군기지 부사령관, 국무부 차관보 대리, 국무부 코리아과장, 국무부 코리아과 정무반장 같은 하급 관리들을 내보냈다. 공식 환영행사도 없는 실무방문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를 맞이하는 격식으로서는 모멸적인 분위기였다. 2000년 10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했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 근교의 덜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영접했던 사람들은 한(조선)반도 평화회담 특사, 국무부 의전담당 대사 등이었다. 조명록 차수는 특사였는데도 미국의 지배세력은 그를 국가원수급 영접으로 정중히 맞이하였다. 적국의 특사를 영접하는 태도와 속국의 국가원수를 영접하는 태도는 그렇게 달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에 대한 부시 정부의 모멸적 분위기가 모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돌발적 행동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실무방문 막판에 가서 일어났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두 나라 대통령이 공식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을 가리켜 "김 대통령(President Kim)"도 아니고 "이 분(this gentleman)"도 아니고, "이 사람(this man)"이라고 불렀다. 마치 속국에서 파견 나온 하급 외교사절을 대하듯 업신여기는 태도가 명백하였다. 부시가 면전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격이라는 표현은 사실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지금 한·미 관계는 미국 정부가 뺨을 때리면 남(한국) 정부는 꼼짝하지 못하고 얻어맞아야 하는 치욕적인 관계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부시 정부는 만일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해도 영국, 독일, 일본의 총리들이나, 프랑스, 러시아의 대통령들, 그리고 중국의 국가주석에게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업신여기지 못한다. 그러나 남(한국)의 대통령에게는 그처럼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한·미 관계는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며, 뺨을 때리면 얻어맞는다는 모욕적인 표현이 어울리는 지배와 예속의 관계로 뒤엉켜 있다. 김대중 정부의 본질을 친미예속성이라고 규정하고 미국의 지배세력을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김대중 정부가 부시 정부의 방해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나가는 자주적 정부라면 6.15 공동선언은 거침없이 실현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부시 정부의 방해를 물리치고 북(조선) 정부와 손을 잡고 그 선언을 실현하는 길로 나서면 모든 문제는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줄달음치고 있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회담에서 6.15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서로 화해와 단합의 손을 잡았으므로, 부시 정부가 그 선언을 반대한다고 해도 왜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는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하고 장관급 회담을 재개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쉽게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에서 김대중 정부의 태도와 결정을 좌우하는 것이 청와대가 아니라 백악관인데, 김대중 정부가 부시 정부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비현실적인 공상이 되겠지만, 만일 김대중 정부가 부시 정부에 대해서 자주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북(조선) 정부와 손잡고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려 한다면 한·미 관계에서는 과연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 보나마나 남(한국)은 미국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엄청난 보복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정치·군사·외교·통상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보복조치를 퍼부을 것이다. 남(한국)은 그러한 제국주의적 대량보복조치에 맞설만한 대응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남(한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지배세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들은 부시 정부가 반대한다고 해도 왜 북(조선) 정부가 그것을 무시하고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지 못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북(조선)은 반제자주역량을 지니고 있는 자주강국이므로 그까짓 부시 정부의 반대쯤이야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대로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지금 남북관계가 아니라 조·미 관계를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만일 북(조선) 정부가 김대중 정부에게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대중 정부는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감당 못할 그 제안을 받고 나서 뒤로 물러서면서 어떤 핑계를 내세워서라도 적당히 피하고 말 것이다. 북(조선) 정부가 설령 김대중 정부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다고 해도 그것을 반대하는 부시 정부가 조·미 관계를 완전히 파탄국면으로 몰아가게 된다면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도 막혀버리게 되고 조·미 관계도 깨져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조선)으로서는 얻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온통 잃어버리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이 미국을 끌어당겨 조·미 관계를 개선하지 않는 한 6.15 공동선언의 실현은 실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북(조선)이 조·미 관계를 다시 개선의 궤도로 끌어 올려놓으면 6.15 공동선언도 실현의 궤도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김대중 정부가 대북 관계를 어떻게 개선하는가 하는 것에 있지 않고, 북(조선)이 조·미 관계를 어떻게 개선하는가 하는 것에 있다.

(2) 친미예속성, 그 낡고 썩은 관계의 속성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논의하는 데서 걸림돌로 나서는 것은 친미예속성이다. 친미예속성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동맹관계'로 위장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지배세력과 그에 결탁한 친미예속정권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을 보장하면서 친미예속국가 전체를 규제하는 특정한 국제관계의 속성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들추어내야 할 사실이 있다.

첫째, 친미예속성은 힘의 관계에서 창출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친미예속정권과 미국의 지배세력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에서 언제나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때에 따라 양측의 요구와 의사가 서로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불일치와 어긋남은 언제나 미국의 강한 지배력에 의해서 강제에 의한 일치로, 강요에 의한 찬동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이다. 친미예속성은 힘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친미예속정권이 제 아무리 반대하고 싶어도 미국의 강한 지배력 앞에서는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진 역대 정권이 모두 그러하였고 지금 김대중 정권도 친미예속성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둘째, 남(한국)의 국가권력 전반이 친미예속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친미예속성은 어느 한 때에 생겨났다가 세월이 지나면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친미예속성은 일차적으로 국가권력 내부에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어 국가의 전반적인 체계와 질서를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는 관계의 속성이며, 사회역사의 변화과정 속에서 차츰 심화되고 전면화되고 있는 속성이다.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주권을 행사하는 정부가 친미예속성으로 규제되고 있으면, 그러한 정부는 자기의 주권을 잃어버리고 제국주의 지배세력에게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친미예속성은 지난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러 정상회담의 공동선언을 파기한 사건에서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만난 한·러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를 반대하고 미·소 탄도미사일 협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을 '온건한 표현'으로 기록한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있었는데, 부시 정부가 한·러 공동선언의 그 내용을 지적·반대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한·러 공동선언을 스스로 파기하고 말았다. 이러한 파기행동은 김대중 정부가 제3국과 합의한 정상회담급 공동선언이라 할지라도 미국의 지배력이 반대하면 스스로 파기할 수밖에 없는 한·미 사이의 지배·예속관계를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남(한국)에서 국가의 친미예속화가 진행된 뒤로 지난 반세기 동안 역대 대통령, 정치권 인사들, 행정기관 고위급 관리들은 한결같이 미국식 교육을 받고 미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자랑과 영예로 여기고 있으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미국식 가치관을 예찬·신봉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지배세력에게 자기의 운명을 의탁하면서 만일 미국이 없다면 남(한국)은 곧 망한다고 생각하는 '안보관'을 가진 친미파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사회역사발전의 길은 곧 철저한 아메리카화의 길이며, 이들의 머리 속에 가득 차있는 것은 아메리카 제일주의이다.

둘째, 남(한국)의 사회생활 전반이 친미예속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친미예속화 현상은 사회성원들의 사회적 의식이 제국주의 세력의 사상·문화적 침투를 받아 변질·타락되면서 아메리카 제일주의를 맹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성원들의 사상·문화생활은 제국주의 세력이 가장 먼저, 가장 집요하게 침탈하는 대상분야이다. 제국주의 세력은 지배대상의 사상·문화생활을 자기들이 지배·통제해야 그 대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상·문화생활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을 언어생활이라고 할 때, 지금 남(한국) 사회의 언어생활은 아메리카화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남(한국) 사회에서 미국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남(한국) 사회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창제되고 가장 발달된 우리말과 우리글을 헌신짝 버리듯이 팽개치고 미국말을 배우고 미국글을 받아쓰는 데에 거의 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이 식민지의 말과 글을 빼앗았던 아시아의 몇몇 나라들, 이를테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나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가 더 지난 옛적에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식민주의의 사상·문화적 잔재인 영어를 그대로 공용어로 쓰고 있는데, 남(한국)의 친미파 세력은 그러한 식민주의 잔재를 부러워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지 말고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더라면 자기들도 지금쯤 영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영어 공용어권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영어식민지가 되고 싶어한다. 요즈음 친미파 세력이 영어를 나라의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느니, 제주도라도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특별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목청을 높이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나는 얼마 전에 남(한국)에서 나온 일간지의 문화난을 읽다가 기사제목에서 '시티콤'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이 미국사람들이 줄여 쓰는 '상황희극(situation comedy)'의 입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인터넷 속에 나오는 광고문안을 보니까 '탕탕'하는 총소리 의성어를 미국사람들이 하는 대로 '뱅뱅(bang bang)'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았다.

사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남(한국) 사회에서는 미국에서 직접 들여온 미국말과 미국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도쿄에서 일본식으로 덧칠되거나 탈바꿈되어 들여온 일본식 미국말과 일본식 미국문화가 전염병처럼 사회 곳곳에 퍼지고 있다. 검은 머리결에 노란색, 빨강색 물감을 들이고 다니는 창피한 짓은 '왜소한 노랑 원숭이'들이 도쿄의 긴자거리에 퍼뜨린 '양키 고릴라 흉내내기'인데, 그것이 어느새 서울거리에 흘러 들어와 젊은 여성들의 첨단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식 발음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미국말을 마구 섞어 쓰는 사람들의 허세가 통하는 그런 사회. 일간지들은 표제와 기사들을 외래어와 영문자로 어지럽게 꾸며대고, 대학강의와 회사간부회의는 영어로 진행해야 우수한 평가를 받는 그런 사회. 고가품을 파는 상가일 수록 내건 간판들은 거의 모두 영어로 적혀 있고, 도로표지판은 물론이요 정부청사의 현판과 표지판에도 예외 없이 영어가 들어가 있어야 멋이 나고 권위가 선다고 착각하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에서 민족자주성을 찾을 수 있을까?

만일 민족이 나라의 주권을 제국주의 세력에게 빼앗겼다면 자주독립운동으로 언젠가는 자기의 주권을 되찾아올 수 있지만, 민족이 자기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고 제국주의자의 의식구조와 일체화되고 제국주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다면 그런 민족은 영영 다시 일어설 수 없다. 기능주의 언어관을 들먹이고 있는 사람들은 말과 글을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조선)민족에게 말과 글은 그러한 도구만이 아니라 민족의 얼이다. 민족의 말과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민족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민족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는 민족자주정신의 요체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언어생활이 더럽혀지면 민족정기가 흐려지는 것이요, 민족이 자기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중국말보다 훨씬 아름답고 세련되고 발달된 우리말이 있었는데도 역대 친중예속정권들이 한자문화권에 휘말려든 뒤로 거의 2천년 세월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고유한 우리말은 차츰 없어지고 중국식 우리말(한자어)이 7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중국식 우리말이 없으면 언어생활 자체를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한자문화권을 예찬하면서 우리말의 70퍼센트가 중국식 우리말이므로 중국글자(한자)를 우리 글자와 함께 써야 한다고 우겨대는 언어식민주의자들의 궤변이 아직도 떠돌아다니고 있는 한심한 실정이다. 중국식 우리말을 차츰 없애고 고유한 우리말을 되살리기 위해서 아득바득 애를 쓴대도 앞으로 중국식 우리말을 몰아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지 모르는 판인데, 쓰기를 그만두었던 중국글자까지 다시 쓰자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인 범행이다.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이 미국의 언어식민지화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소중한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다듬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언어생활의 모든 문제를 민족주체적 언어관에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국) 사회가 아메리카 제일주의를 신봉하는 집단적 정신질환에서 벗어나려면 언어식민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3)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과 친미예속성을 청산하는 길

6.15 공동선언의 제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조국통일위업에 관한 문헌에서 이보다 더 분명하게 민족자주성을 밝혀주는 대목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미국의 지배세력이 거부감을 느끼는 대목이 바로 그 제1항인 것은 명백하다. 6.15 공동선언이 이처럼 민족자주성을 가장 중시하여 제1항에 밝혔다는 사실이 바로 미국의 지배세력이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그 선언의 실현을 반대하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15 공동선언을 실현한다는 말은 민족자주성을 지키고 민족자주성의 요구에 따라서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한다는 말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하기 전에 언젠가 '비반미 민족자주'라는 이상한 말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그것을 굳이 풀이하자면 미국을 반대하지 않으면서 민족자주성을 지킨다는 뜻일 것이다. 미국의 지배력이 남(한국)의 자주성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미국을 반대하지 않고 민족자주성을 지킨다는 말은 '친미예속적인 민족자주'와 같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미국을 반대하지 않으면 민족자주성을 지킬 수 없으므로 '비반미 민족자주'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친미예속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응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지난날 일제의 식민지적 지배 밑에서 살던 시기에 식민지의 지배와 수탈을 반대하고 투쟁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제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삶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자주시대의 반미주의는 국수주의의 고립성을 예찬하거나 쇄국주의의 자기폐쇄욕구를 충동하는 사상관점이 결코 아니라는 데서 제시된다. 반미주의는 미국이나 미국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턱대고 반대·배격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민족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서 남(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을 반대·배격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미국식 언어식민지화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만일 각급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없애어 후대들이 영어를 배우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쇄국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 되고 만다. 문제의 초점은 영어를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대하는 태도가 자주적이냐 예속적이냐 하는 데 있다.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것이 민족자주성의 요구에 따라서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 선언을 실현하는 문제는 친미예속성을 청산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려는 의사를 지니고 있는데도 부시 정부가 중지하라고 요구하면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은, 6.15 공동선언의 실현이 무엇보다도 친미예속성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친미예속성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는가? 위에서 지적한대로 친미예속성이 힘의 관계에서 형성되고 고착된 구조의 속성이라면 그것을 청산하는 것도 당연히 힘의 관계에서 결정될 것이다. 힘의 관계를 바꾸어놓으면 된다는 말이다. 친미예속적인 정권을 민족자주적인 정권으로 교체하여야 친미예속성을 청산할 수 있다. 친미예속정권이 민족자주정권으로 교체되면 남(한국)은 친미예속성에서 벗어나서 자주성을 완전히 되찾게 될 것이다.

여기서 친미예속정권을 민족자주정권으로 교체하는 방도의 문제가 제기된다. 남(한국)에서 민족자주정권으로 교체되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려면, 지금 저항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민족자주세력이 집권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야 한다. 민족자주세력이 집권하려면 정권을 교체하는 선거에 나서서 이겨야 한다. 민족자주세력이 선거에 나서려면 정치세력화하여야 하며 자주적인 정치조직(정당)을 창건해야 한다. 그렇지만 민족자주세력이 자주적인 정치조직을 건설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정치조직은 남(한국)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민족자주세력의 정당이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민중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 민중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고, 민중의 요구와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그래야 민중이 믿고 따르며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조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남(한국)의 민중은 무엇을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가?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받는 것, 이것이 가장 절실한 요구이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청년학생, 여성을 비롯한 절대다수 민중의 요구는 생존권의 요구로 집약된다. 이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활의 절실한 요구다. 노동자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서 길거리에 내몰리고 있으며, 농민들은 농정파탄으로 신음하고 있고, 도시빈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학생들은 바로 그러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아들딸로서 자기들의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다. 여성들은 그러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으로서 가부장적 사회체제 속에서 남성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부르주아 선동가들은 이러한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경기침체'라는 개념으로 파묻어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민족자주세력이 이러한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으려고 한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그러므로 민족자주세력은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민주개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은 입으로는 개혁을 중얼거리고 있지만, 민중이 요구하는 민주개혁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설령 생각한다고 해도 실천에 옮길 능력이 없다.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경우를 보더라도, 지난 시기 친미예속적인 파쇼정권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들어선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들은 한결같이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민중의 절실한 요구에 말잔치로 응답했을 뿐 아무 것도 이루어놓은 것이 없었다. 민중의 생활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무능, 한계, 실패는 그 정권들이 애초부터 자주역량을 지니지 못한 채 친미예속성에 묶여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3개 대륙 전체를 완전히 아메리카화하려고 덤벼들고 있는 미국의 침탈책동 앞에서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이 제 아무리 '개혁프로그램'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체계와 이윤수탈체계 밖으로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후반부로 넘어오면서 정권의 무능, 한계, 실패가 드러나고 있는데, 저들은 그것을 '개혁 피로감'이라는 교묘한 말로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서툰 위장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민중들의 정당한 요구는 날이 갈수록 더욱 폭발적으로 제기될 것이며, 민중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부르주아 개혁정권은 폭력탄압으로 그 요구를 짓누르면서 자기들의 무능, 한계, 실패를 감추려고 할 것이다. 결국 남(한국)의 민중은 자기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자기의 단결된 힘밖에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체계와 이윤수탈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민족자주세력이 전개하는 반제투쟁에 합류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오늘 남(한국) 민족자주세력의 투쟁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타격방향을 조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와 수탈을 반대하는 투쟁,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의 실패와 무능을 폭로·규탄하는 투쟁이 그것이다. 민족자주세력이 이 세 가지 타격방향에서 대중투쟁을 조직할 때, 전체 민중의 지지와 성원을 얻을 수 있으며, 민중의 지지와 성원을 받는 자주적 정치조직으로 일어설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정권교체를 위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부르주아 정객들은 자기들의 집권이 권모술수와 자금동원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지만, 민족자주세력은 자기들의 집권이 각성된 민중의 힘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있어서는 안 된다.

(4)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자주세력은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는가?

오늘 미국의 지배력은 전 세계적 범위로 팽창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세 대륙에서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냉전시기에 사람들은 이 세 대륙을 통칭하여 제3세계라고 불렀다. 1990년대 초에 제1세계(자본주의 진영)와 제2세계(사회주의 진영) 가운데 제2세계가 와해되면서 냉전구조가 해체되었으므로 이제는 제3세계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는 냉전구조와 무관하게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와 수탈이 자행되는 현장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를 피로 물들인 크고 작은 침략전쟁들은 모두 이 세 대륙을 무대로 하여 일어났으며, 그러한 침략전쟁의 뒤에는 언제나 미국의 침략정책이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중남미 지역의 여러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미국과 가깝고, 더욱이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지배 아래에서 수 백년을 살아와야 했던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미국이 1896년에 쿠바를 침략·점령했던 뒤로 지금까지 100년을 넘은 세월동안 미국의 집중적인 지배와 수탈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남(한국)과 필리핀이 미국의 지배와 수탈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유럽과 가깝고,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의 점령지였던 배경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유럽나라들로부터 수탈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와 수탈을 받고 있는 3개 대륙에서 민족자주세력은 친미예속정권을 물리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는가? 3개 대륙의 민족민주운동사가 보여주고 있는 결론부터 말하면 민족자주세력이 정권교체에 성공하여 집권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아시아와 중남미의 정치정세를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과업에 따라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이 도출될 수 있다.

제1유형은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웠다가 제국주의 세력 및 그들과 결탁·공모한 친미예속세력에게 집중적인 타격을 받고 자주적 민주정권이 무너진 유형이다. 이러한 경우는 칠레와 니카라과의 정권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칠레에서는 1970년에 살바도르 아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웠다. 이것은 제국주의 세력과 친미예속정권을 반대하여 투쟁해온 민족자주세력이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특이한 역사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유명한 칠레의 혁명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아옌데와 함께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데 참가하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1973년 9월 미국의 군사지원과 배후조종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세력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1989년까지 유혈적 파쇼통치가 계속되었다. 피노체트 파쇼통치 17년 동안 칠레의 민족자주세력은 3천여 명이 이상이 살해되거나 실종되는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피노체트 파쇼정권이 물러간 뒤로 칠레의 정권은 기독민주당에게 넘어갔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지금도 민족자주세력은 집권하지 못하고 있다.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

니카라과에서는 1979년 7월 19일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끄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파쇼적 압제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친미예속정권을 타도하는 혁명투쟁에서 승리하여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웠다. 그로써 소모사 가문의 50년 독재정권은 끝났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은 니카라과가 '제2의 쿠바'로 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미국은 콘트라 반군을 창설하여 군사지원과 배후조종으로 움직이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자주적 민주정권을 전복하려고 획책하였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과 콘트라 반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1990년에 끝났으나 그 해 2월의 선거에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비올레타 차모로를 대표로 하는 14개 친미파 부르주아 세력의 연립정당인 민족재야세력연맹(NOU)에게 패하여 혁명에 성공한 뒤 11년만에 정권을 내놓고 말았다. 지금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제1야당으로서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과 경쟁하면서 다시 집권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1993년부터는 노농혁명전선(FROC)이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과 맞서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제2유형은 친미파 개혁정권과 민족자주세력이 내전을 끝내는 평화합의를 체결하고 정치적으로 경쟁하고 있으나, 민족자주세력의 힘이 약하여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지 못하고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세력이 계속하여 집권하는 유형이다.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가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엘살바도르의 민족자주세력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2년 동안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을 결성하여 친미예속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 내전에서 약 7만5천 명이 희생되었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과 친미예속정권은 유엔 엘살바도르 감시단이 벌인 4년간의 중재활동으로 1992년 1월에 평화합의를 체결하고 내전을 끝냈다. 그로써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합법정당으로 전환되었으나 선거에서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세력인 민족공화동맹(ARENA)을 이기지 못해 아직 집권하지 못하고 있다.

과테말라의 민족자주세력은 1960년부터 1996년 12월까지 36년 동안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국 군부와 중앙정보국으로부터 군사원조와 배후조종을 받는 과테말라 친미예속정권과 민족자주세력이 맞붙은 36년간의 내전에서는 약 15만 명이 죽고 4만 명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테말라에서 친미예속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민족자주세력은 1996년에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과 평화합의를 체결하고 과테말라 민족혁명전선(URNG)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전선은 아직 집권하지 못하고 친미파 부르주아 세력이 계속하여 집권하고 있다.

제3유형은 민족자주세력이 원래 미약하여 무장투쟁을 벌이지 못했고 따라서 친미파 부르주아 세력이 계속하여 집권하고 있는 유형이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우루과이가 이 유형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제4유형은 친미파쇼세력이 무너지고 새로운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세력이 집권하였으나 민족자주세력이 그러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하여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정권을 타도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유형이다. 필리핀, 멕시코, 페루, 콜럼비아, 볼리비아의 경우가 이 유형에 든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1969년부터 신인민군(New People's Army)이 제국주의 세력과 친미파 세력에 맞서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1986년 2월 민중의 대규모 시위투쟁에 의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친미예속정권이 무너졌으나 새로운 친미파 부르주아 개혁세력은 아퀴노, 라모스, 에스트라다, 아로요 정권으로 이어지며 계속 집권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과 인민혁명군(EPR)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1987년에 민족자주세력이 통합하여 재창당한 멕시코사회당(PMS)이 있으나 집권하지 못하고 있다. 민족자주세력이 가장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는 페루와 콜럼비아다. 페루에서는 빛나는 길(Shining Path)과 투팍아마루혁명운동(MRTA)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콜럼비아에서는 콜럼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민족해방군(ELN)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8년 11월 콜럼비아의 친미예속정권은 스위스 영토 만한 남부지역을 비무장지대로 만들어 콜럼비아 무장혁명군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으며, 콜럼비아 무장혁명군은 1만7천여 명의 정예병력으로 전체 영토의 40퍼센트를 장악하였다. 콜럼비아 내전에서는 지난 40여 년 동안 약 30만 명이 희생되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민족해방군(ELN)이 페루의 투팍아마루혁명운동의 지원을 받으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제5유형은 민족자주세력이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 정권을 견결히 옹호·고수하여 차츰 사회주의 정권으로 발전시킨 유형이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쿠바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민족자주세력은 오랜 세월 동안 투쟁해오고 있지만 아직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역사적 경험에 나타난 공통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 지역은 오래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살아온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의 식민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중남미 지역에서 특이하게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이 지역이 제국주의의 지배와 수탈을 수 백년에 걸쳐서 받아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식민주의의 역사적 뿌리가 깊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째, 이 지역은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유럽계 백인, 원주민, 아프리카계 흑인, 혼혈인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인종적 분열은 스페인 식민주의가 낳아놓은 불행한 결과다. 따라서 이 지역의 민족자주세력은 인종적 분열을 극복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

셋째, 스페인 식민주의의 유산인 천주교(Catholicism)가 뿌리 깊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지역의 천주교 세력 가운데는 지난 1970년대 이후 해방신학을 정립하면서 민족자주세력과 연대한 분파들도 있으나 천주교의 주된 세력은 거의 모두 친미예속정권과 결탁하고 민족자주세력과 대립하였다.

넷째, 이 지역에서 몇몇 나라는 예외적이지만 거의 모두 낙후한 농업국으로서 민중의 문맹률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수탈을 받고 있으므로 민족자립경제와 민중교육이 발전할 수 없었고 문맹률이 높은 낙후한 농업국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낙후한 농업국이므로 노동계급이 아직 사회세력으로 장성하지 못했다. 이 지역의 민족자주세력은 사회변혁운동의 일환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여야 하는 형편에 있다.

다섯째, 이 지역의 민족자주세력은 각 나라별로 고립된 조건에서 투쟁해오면서 북(조선), 옛 소련, 쿠바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섯째, 이 지역의 민족자주세력은, 몇몇 나라가 예외적이지만, 대부분 통일전선의 역사적 경험이 없다. 맑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좌파정당들을 중심으로 결집된 비합법 민족해방전선운동이 동력의 전부이다. 통일전선운동이 없거나 미약하므로 자연히 전선운동이 대중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게 된다. 통일전선운동이 미약하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민족자주세력과 좌파정당들이 민족이 아니라 계급을 사회변혁의 중심단위로 규정한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사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현실과 오늘 남(한국)의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은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과업수행에서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유리한 조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조선)민족은 20세기초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처럼 식민주의의 역사적 뿌리가 그리 깊지 않다. 식민주의의 역사적 뿌리가 깊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 투쟁에서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한(조선)민족은 단일민족이어서 인종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다.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은 인종적 분열이 안겨주는 어려움을 전혀 알지 못한다.

셋째, 남(한국)에는 어느 한 종교집단이 지배적이지 않고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어우러져 있다. 친미예속적인 종교집단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서 앞으로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이 친미예속성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친미예속적인 종교집단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지만,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에서처럼 특정한 종교집단의 지배적 영향력에 의해서 정치상황이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넷째, 남(한국)의 경제는 공업화되었으며, 전반적으로 문화수준과 교육수준이 높다. 공업화된 남(한국)에서 노동계급은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장성하고 있으며, 생산현장에서 노동조합운동으로 조직되고 단련된 무한한 저력이 잠재되어 있다. 앞으로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이 노동계급의 조직되고 단련된 저력을 중심으로 민족민주전선운동의 투쟁력을 재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남(한국) 민중의 높은 문화·교육수준은 민중이 민족자주의식을 각성하는 데서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남(한국)에서 민족의 자주성을 정립하는 역사적 임무는 남(한국) 민족자주세력이 홀로 수행하는 고립적 임무가 아니라, 남·북·해외의 민족자주세력이 단합된 힘으로 수행해야 할 전민족적인 임무이다.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민족자주세력이 각 나라별로 고립된 조건에서 투쟁해오고 있는 것에 비하여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은 매우 다른 조건에서 투쟁하고 있다.

여섯째, 한(조선)민족에게는 통일전선의 역사적 경험이 풍부할 뿐 아니라 6.15 공동선언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주객관적 조건이 성숙되고 있다.

위와 같은 요인들을 살펴볼 때,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은 중남미 지역과 필리핀의 민족자주세력에 비하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개 대륙의 민족자주세력은 지난 수 십년 동안 커다란 희생을 치르며 투쟁해오고 있으면서도 아직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유리한 주객관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남(한국)의 민족자주세력은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정권교체에 성공하여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할 것이며, 조국통일위업을 완수할 것이다.

(5) 연방제 방안과 연방국가 창립방안

6.15 공동선언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선언이 조국통일방안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조국통일의 앞길을 밝히는 역사적인 문헌에서 조국통일의 원칙만 강조되고 조국통일의 방안이 제시되지 못하면 아니 된다.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통일원칙과 더불어 통일방안이 명백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조국통일의 원칙은 1974년에 발표된 7.4 공동성명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이 그것이다. 7.4 공동성명의 제1항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6.15 공동선언의 제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힘으로써 7.4 공동성명에서 제시된 조국통일의 제1원칙인 자주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방안은 통일원칙이 제시된 뒤에 비로소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조국통일의 원칙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그 방안부터 먼저 나올 수는 없다. 통일방안은 어디까지나 통일원칙에 근거하여 수립되어야 한다.

6.15 공동선언의 제2항에 나오는 조국통일방안은 7.4 공동성명의 제2항에 나오는 평화통일의 원칙에 근거하여 수립된 통일방안이다. 7.4 공동성명에서 제시된 평화통일원칙은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고 밝혀져 있다. 6.15 공동선언은 바로 이 평화통일의 원칙에 의거하여 평화통일의 방안을 수립할 수 있었다.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때가 1972년 7월이었고,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때는 2000년 6월이었으므로 남과 북의 정부당국이 조국통일원칙을 합의하고 발표한 뒤에 그 원칙에 의거하여 통일방안을 합의하고 발표하기까지는 무려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셈이다.

6.15 공동선언은 제2항에서 평화통일원칙에 근거한 조국통일방안을 밝히고 있다. 그 방안에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혀졌다. 여기서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공통성이 있다고 한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놓고 남(한국)의 분석가들은 갖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새로운 개념은 반드시 북(조선)의 조국통일정책사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북(조선)의 조국통일정책사는 조선로동당의 조국통일정책사이므로 그것은 조선로동당의 유일한 영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문헌에 근거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문헌에서 연방제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나온 것은 1960년 8월 14일 「조선인민의 민족적 명절 8.15 해방 15돐 경축대회에서 한 보고」이다. 1960년 8월은 4.19 혁명이 일어난 뒤 약 넉 달이 지난 시점으로서 남(한국)에서 조국통일운동이 고조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김일성 주석은 그 보고에서 "과도적인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련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우리가 말하는 련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호상 리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호상 간의 불신임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한다면 조국의 완전한 평화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인정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김일성 주석이 1960년에 제시한 연방제 방안은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연방국가를 창립하는 방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북의 접촉과 협상,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과도적인 대책이었다. 당시 조국통일의 과정은 남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었으므로 최초의 연방제 방안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과정이었다. 1960년은 분단원년으로부터 불과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남과 북의 체제가 오늘처럼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체제로 굳어지기 이전이었다. 남(한국)에는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이지 못했고, 북(조선)에서도 아직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이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두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연방국가를 창립하는 통일방안은 요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남북 총선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1980년의 상황은 달라졌다. 남과 북의 체제는 서로 다른 체제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0년의 시점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은 남북 총선거로 실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결국 두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연방국가를 창립하는 방도로 통일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1980년에 발표한 통일방안에서 1960년의 과도적인 연방제 방안을 민족통일정부를 구성하고 연방공화국을 창립하는 연방국가 창립방안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1980년 10월에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발표하면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국가라는 조직체에는 국가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대표체가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한 대표체를 정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완성된 통일방안에 나오는 "련방형식의 통일국가"에는 그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련방형식의 통일정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김일성 주석은 그 연방형식의 통일정부를 "최고민족련방회의와 그 상임기구인 련방상설위원회"라고 불렀다.

김일성 주석이 1993년 4월에 발표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도 연방제 통일은 연방국가를 창립하는 문제로 규정되었다. 거기에서는 "북과 남은 현존하는 두 제도,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범민족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고 전제되었고 "범민족통일국가는 북과 남의 두 지역정부가 동등하게 참가하는 련방국가로 되여야" 한다고 밝혀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의 연방국가 창립방안과 1993년의 연방국가 창립방안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자가 먼저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그 밑으로 두 개의 지역자치정부를 구성하는 하향식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데 비하여, 후자는 현존하는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상향식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 10월이라고 하면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뒤 약 다섯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광주학살의 주범이 집권하고 있는 남(한국)의 전두환 정부를 정부로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당시로서는 그러한 불법정부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위에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상향식 방법은 제시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3년 4월이라고 하면 최초의 '문민정부'라고 하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이었으므로 그러한 문민정부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위에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상향식 방법이 제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6.15 공동선언에서 김정일 총비서가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김일성 주석이 1980년과 1993년에 각각 제시했던 연방국가 창립방안과 구별된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김일성 주석이 1960년에 제시했던 연방제 방안과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15 공동선언에서 김정일 총비서가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범민족통일국가를 창립하는 연방국가 창립방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의 대화와 협상,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과도적인 대책'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1960년 8월에 처음으로 연방제 방안을 제시하면서 "특히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비록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통일적인 련합정부가 못되여서 통일적인 국가적 지도는 못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김정일 총비서가 6.15 공동선언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통일적인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직 아니며, 따라서 통일적인 국가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연방제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연방제는 또한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범민족통일국가도 아직 아닌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6.15 공동선언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설명되어야 한다.

첫째, 김일성 주석은 이미 1960년 8월에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제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40년 전에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김대중 대통령과 합의하고 6.15 공동선언에 포함시켰다.

둘째, 6.15 공동선언의 발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60년 8월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에서 시작되어 1980년과 1993년의 연방국가 창립방안으로 발전·완성된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방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조국통일방안을 제시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방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남북 정부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는 임무, 그리고 민간부문에서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는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그러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시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남(한국)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연합제도 이와 마찬가지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는 역할과 임무의 공통성을 가진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남북 정부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고 민간부문에서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는 연방제이므로 그러한 연방제의 역할과 임무는 연합제의 역할과 임무와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김정일 총비서는 6.15 공동선언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는 공통성을 가진다고 밝힐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6.15 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연합제안이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데도 마치 공통성이 있는 것처럼 밝혀놓은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 아니냐고 의구심을 갖고 있는 데, 이것은 연방제 방안과 연방국가 창립방안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함으로써 오류에 빠진 것이다. 연방국가 창립방안과 연합제안 사이에는 공통성이 없지만,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 사이에는 차이보다 공통성이 훨씬 더 많다.

넷째, 6.15 공동선언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연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힌 것은, 그 공통성에 바탕을 두고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는 공통성을 기초로 하여 조국통일위업을 위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남북 정부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 그리고 민간부문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은 모두 두 방안의 공통성을 기초로 하여 조국통일위업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다섯째,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남(한국)에서는 아직 남(한국)의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망라하고 대표하는 정부가 수립되지 못할 수 있지만 앞으로 반드시 그러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지금 남(한국) 정부에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대표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4천3백만에 이르는 남(한국) 인구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한국) 사회를 성장·발전시키고 있는 주체세력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대표자가 전혀 참가하지 못하는 정부를 어떻게 남(한국)의 모든 민족성원을 망라하고 대표하는 정부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사회역사발전의 주체인 민중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어야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연방국가 창립단계로 발전될 수 있으며 연방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대표자가 참가하고 민중의 의사와 이익을 실현하는 민주정당이 건설되고 그러한 정당에 의하여 세워진 정부를 우리는 자주적 민주정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남(한국)에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 가는 과정과 일치하게 된다. 남(한국)에서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된 뒤에야 그 새로운 정부와 북(조선)의 정부를 그대로 지역정부로 두고서 그 위에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범민족통일국가를 창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연방제 통일과정의 완성이다.

여섯째, 남(한국)에서 아직 각당, 각파, 각계각층을 모두 망라하고 대표하는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라도 북(조선)은 남(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정부를 상대로 하여 대화하고 협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국)에서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북(조선)이 무작정 기다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남(한국)에 아직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되지 못하였다고 해도 북(조선)은 현존하는 정부와 대화하고 협상하여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하기에 평양회담이 성사되었고,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6) 맺는 말

민족적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6.15 공동선언에 대하여 한결같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은, 그 선언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6.15 공동선언의 발표는 평양회담을 화려하게 꾸몄던 장식품이 아니었으며, 특정한 시기에 한 번쯤 벌어지는 일회성 우연사도 아니었다. 민족적 양심은 6.15 공동선언이 남과 북의 최고당국자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총의에 따라 민족 앞에 그 실현을 엄숙히 서약한 역사적 문헌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면 그것이 곧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6.15 공동선언을 조국통일의 이정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선언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6.15 공동선언은 그 내용 전체를 전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자의적으로 선별·분리해서 실현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현될 수도 없다. 민족자주세력은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선별·분리하려고 하는 분절화·파편화 기도를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둘째,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적 주체가 요구된다. 그 선언을 지지·찬동하는 남과 북의 정부, 그리고 남·북·해외의 정당, 사회단체가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전민족적인 기구를 창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6.15 공동선언 발표 1주년이 되는 오는 6월 15일에 금강산에서는 남·북·해외의 사회단체 대표자들 6백 여명이 모여서 민족통일대토론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남과 북의 최고당국자가 손을 맞잡고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지 꼭 365일만에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1948년 4월 분단초기에 남·북·해외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평양에 모여 구국통일의 길에 나서기로 합의하였을 때 그들은 모란봉과 대동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조국통일의 미래를 마음속에 그렸다. 그로부터 어언 53년이 지나 2001년 6월이 되었다. 올해 남·북·해외의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금강산에 모여 민족대단결의 깃발을 세우는 날, 그들의 감격 어린 눈망울에는 아름다운 1만2천 봉우리와 동해의 푸른 물이 눈부신 영상으로 비쳐들 것이다. 53년 전에 조국통일운동의 선배들이 간직했던 그 결심을 그대로 안고 그들은 조국통일위업을 완수하는 21세기의 선진대오로 나설 것이다. (2001년 6월 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