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이 보유한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조·미·일 삼각전략균형의 형성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 례 >

(1) 들어가는 말

(2) 김정일 총비서의 '병불염사' 전술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

(3) 미국 국가정보회의의 판단착오

(4) 북(조선) 탄도미사일 개발사를 바라보는 관점

(5) 인공위성체를 지구궤도에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

(6)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대한 미국의 대응

(7) 조·미 사이에서 벌어진 힘겨루기와 미국 국가안보회의의 정치적 패배

(8)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주체혁명의 무기'다

(9) 전환기에 형성되고 있는 조·미·일 삼각전략균형

(10)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전 세계에 실전배치되어 있는 지대지 탄도미사일은 모두 13,500 개로 추산되는데, 그 대부분은 사거리 70-600 킬로미터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들이다. 옛 소련이 개발한 스커드형 탄도미사일(Scud-type ballistic missile)을 실전배치한 나라들은 약 24 개 나라다.[1]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한 고유한 형의 미사일을 실전배치한 8대 미사일강국은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인도, 이스라엘,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8대 미사일강국 가운데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전략핵군(strategic nuclear forces)을 보유하고 있는 6대 군사강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미국의 미니트맨(Minuteman)3, 러시아의 에스에스(SS)24, 영국의 트라이던트 디(Trident D)5, 프랑스의 엠(M)4, 중국의 둥펑(東風)5, 그리고 북(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익명의 전략미사일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가운데서도 사거리 10,000 킬로미터가 넘는 중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다. 이동식 수직 발사대(transporter-erector-launcher, TEL)에서 발사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뿐이고, 나머지 나라들은 지상 고정발사대나 지하 격납고 발사대(silo)에서 발사할 수 있는데, 1999년 8월 2일에 중국이 사거리 8,000 킬로미터의 둥펑31을 이동식 수직발사대에서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 번째 나라가 되었다.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에 관련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해오고 있는 조셉 버뮤디즈 2세(Joseph S. Bermudiz, Jr.)는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에 관한 자신의 탐구를 집대성한 자료에서 "오늘(1999년을 뜻함-옮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3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탄도미사일 전력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초보적인 우주발사체 능력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고 결론을 맺었다.[2] 북(조선)이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는 전략무기인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전략핵군을 보유한 세계 6대 군사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과 연관성이 자리잡고 있다.

첫째, 한(조선)민족이 로켓무기를 발명한 역사적 근원은 지금으로부터 6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한(조선)민족은 이미 620년 전에 뛰어난 슬기와 창조력으로 로켓무기의 원형(archetype)을 만들어낸 민족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우왕 때인 1380년경에 고려사람들은 '주화(走火)'라는 원시적인 로켓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재래식 화살의 최대 사거리는 100 미터가 고작이었던 데 비해 주화의 사거리는 250-280 미터나 되었다. 최무선이 20여 년 동안 화약연구에 몰두하여 1373년에 마침내 화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화약을 개발한 당대의 선진국이 되었는데, 고려는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로켓무기 주화와 화약무기 '총통(銃筒)'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380년에 로켓무기 주화로 무장한 고려 수군(水軍)의 전함 100 척이 첫 전투에 나가서 고려에 쳐들어온 왜구의 전함 500 척을 모두 불태웠으니, 이 것이 오늘의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저 유명한 진포해전이다.

1448년 세종 30년에 나온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는 화약무기 설계도와 제조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신기전(神機箭)'에 관한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무기 설계도다. 신기전은 고려시대에 개발된 주화의 탄두부에 발화통(發火筒)을 장착한 당대의 첨단무기로서 '현대전의 총아'라고 하는 탄도미사일의 원형이다. 신기전 가운데 가장 큰 대신기전은 길이가 5.6 미터, 사거리가 2 킬로미터였다고 한다.

한(조선)민족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많은 신기전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이동식 다연장 발사대인 '화차(火車)'를 만들어냈다. 부속품 300여 개로 정교하게 제작된 화차는 사거리를 조절해가면서 신기전 100 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첨단무기로서 현대전에 등장하는 다연장 로켓포(multiple-rocket-launcher)의 원형이다. 임진왜란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산성 전투에서 8,000 명밖에 되지 않는 조선군은 화차로 선제공격을 퍼부어 왜군 30,000 명을 무찔렀다. 당시 왜군이 가지고 있었던 조총의 사거리는 겨우 50-100 미터에 지나지 않았던 데 비해, 조선군은 사거리 2 킬로미터의 신기전을 100 발이나 동시에 집중적으로 퍼부을 수 있는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 행주대첩의 위대한 전승기록을 남겨놓은 그 전투에서 왜군은 사상자 10,000 명을 내고 참패했으며, 왜군 총지휘관 우키다는 신기전 화차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3] 서양에서는 350년 뒤인 1805년에 가서야 영국사람들이 길이 4.4 미터의 로켓무기를 개발했다. 로켓무기 개발사에서 한(조선)민족은 서양인들보다 무려 350년이나 앞서 있었던 것이다. 한(조선)민족은 이처럼 우수한 두뇌와 창조력을 가진 민족이며, 외세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첨단무기를 개발하였던 자주민족이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둘째, 한(조선)민족의 첨단무기 개발사는 언제나 외세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는 시대적 요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릇 전쟁의 승패는 나라와 민족의 사활적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니, 승전국은 융성·번영했고 패전국은 역사의 무대 뒤쪽으로 밀려나거나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은 당대의 과학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위력적인 무력수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 국가라는 조직체는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군사조직에 근원을 두고 발전되어온 것이라고 설파했던 독일의 역사학자 오토 힌체의 지적은 전쟁과 국가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와 근세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외래 침략세력과 끊임없이 맞서 싸우지 않으면 민족 자체를 보전하고 발전시킬 수 없었던 한(조선)민족에게 전쟁은 민족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사활적 문제였다. 한(조선)민족은 자기를 보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온갖 난관과 역경을 뚫고 외래 침략세력을 물리칠 강력한 무력수단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강력한 무력수단을 보유하려는 한(조선)민족의 요구는 외래 침략군을 먼 거리에서 대량파괴력으로 집중공격할 수 있는 첨단무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고려사람들이 개발한 주화와 총통이 그러했고, 근세조선의 이름 모를 과학기술자들이 개발했던 신기전과 화차도 그러했으며, 그리고 오늘의 북(조선)이 개발한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그러하다. 한(조선)민족이 개발했던 당대의 첨단무기들은 그 발전수준과 성능은 서로 달랐지만, 그 원리와 목적은 먼 거리를 날아가 적을 공격하는 타격력으로 외래 침략군을 무찌르려는 요구에 따라 개발된 무력수단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이 것은 유럽, 중국, 일본의 전쟁사에 등장하는 당대의 첨단무기들이 주로 동족 내부의 전쟁이나 대외침략전쟁에 동원되었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14세기 이후 한(조선)민족 전쟁사를 살펴보면, 외래 침략군을 무찔렀던 첨단무기들, 원거리 타격력을 보유한 무기들은 민족자주의 무력수단이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먼 옛날 고려와 근세조선이 개발했던 원시로켓무기와 오늘날 북(조선)이 개발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사이에는 그러한 역사적 공통성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고려와 근세조선의 원시로켓무기는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전략균형을 바꾸어놓지 못하였지만, 오늘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한(조선)반도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주변 강국들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전략균형에 질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것은 고려와 근세조선의 원시로켓무기들이 강력한 무력수단으로 기능하는 군사력만을 발휘했던 것에 비해, 오늘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위력적인 무력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물론 더 중요하게는 역내의 전략균형을 뒤바꾸어놓는 정치·외교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글이 논증하려는 중심주제는 그러한 정치·외교력의 의미다.

현대전의 총아로 등장한 탄도미사일은 기체, 유도장치, 추진장치, 탄두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인 관성유도장치(inertial guidance)는 목표물의 위치에 이르는 비행궤도를 미리 입력함으로써 미사일이 날아가면서 입력된 궤도를 확인하여 현재의 자기 위치를 수정하는 첨단장치다. 탄도미사일의 추진장치인 로켓엔진은 액체수소를 연료로,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이용하는데, 연료와 산화제를 관을 통해 연소실로 보내어 혼합·분사한다. 혼합된 연료와 산화제를 점화하면 고온·고압개스가 발생하는데, 이 것을 분출구에서 뒤로 내뿜을 때 일어나는 반작용을 받아 미사일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게 된다. 탄도미사일은 네 단계를 거쳐 날아간다. 첫째 단계는 미사일이 발사된 뒤에 추진연료가 연소하면서 대기권 밖으로 날아가는 추력비행단계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경우 3-5 분이 걸린다. 둘째 단계는 추력비행 이후 단계(post boost phase)로 추진연료가 연소를 끝내고 탄두가 들어있는 재돌입체(reentry vehicle)가 미사일 본체로부터 방출되는 단계다. 탄도의 속도나 방향을 바꾸면서 비행궤도를 수정하는 작업은 이 때에 가능하다. 이 단계에서 미사일은 고도 약 1,000 킬로미터를 비행한다. 셋째 단계는 중간비행단계로 재돌입체가 방출된 뒤에 관성비행을 하면서 대기권에 다시 돌입할 때까지의 비행단계다. 관성비행단계에서는 비행궤도를 수정하지 못한다. 이 단계의 비행시간이 가장 긴 데, 대략 15-30 분이 걸린다. 이 단계에서 미사일은 탄도궤적의 최고점인 고도 약 1,200 킬로미터에 이르게 된다. 재돌입체의 비행속도는 마하(Mach) 20이다. 종말단계(terminal phase)는 재돌입체가 지구의 수평면과 40-45도 경사각을 이루면서 탄도의 항로를 따라 대기권에 돌입한 뒤에 하강비행을 하면서 지상의 목표물에 도달하는 단계다. 대기권의 높이가 지상에서 약 100 킬로미터이므로 이 단계는 1-2 분 안에 끝나게 된다. 재돌입체가 대기권 안에 돌입하여 하강하기 시작하면 공기와 마찰을 일으켜 불덩어리가 된다.

사거리 5,500 킬로미터가 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ICBM)은 물론이고,[4] 사거리 1,000-3,000 킬로미터의 준중거리 탄도미사일(medium range ballistic missile, MRBM)과 사거리 3,000-5,500 킬로미터의 중거리 탄도미사일(intermediate range ballistic missile, IRBM)도 모두 대기권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입하는 미사일이다. 단거리 탄도미사일(short-range ballistic missile, SRBM)의 사거리는 1,000 킬로미터 이하다. 로켓 추진체가 초속 7.8 킬로미터 이하의 속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은 탄도미사일이고, 지구 표면과 수평을 유지하면서 날아가다가 지구 상공의 타원형 궤도를 향해 초속 7.8 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진입하면 중력을 벗어나면서 인공위성체를 운반하는 우주발사체(space launch vehicle)가 된다. 로켓 추진체가 초속 11.2 킬로미터를 넘으면 지구 궤도를 벗어나는 우주선(spaceship)이 된다. 전술미사일(tactical missile)이란 적의 전함, 항공기, 전차 같은 무력수단을 공격하는 미사일을 말하며, 전략미사일(strategic missile)은 적의 주요도시, 산업시설, 군사기지 같은 전략거점을 공격하는 미사일을 말한다.

핵무기 운반수단인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않고 핵무기만 개발하는 나라는 없다. 핵무기의 종류를 크게 나누면 핵폭탄(nuclear bomb)과 핵탄두(nuclear warhead)가 있는데, 핵폭탄을 실어 나르는 전폭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핵탄두를 실어 나르는 전략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 더 손쉽고 유리하다.[5] 그러므로 전폭기를 보유하지 못한 핵무기 보유국은 핵탄두를 실어 나를 전략미사일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게가 1 톤이나 나가는 재래식 탄두는 제아무리 고성능 폭발력을 가진 탄두라고 해도 파괴범위가 고작 반지름 50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에는 엄청난 자금, 시간, 기술력이 들어가는데, 파괴범위가 반지름 50 미터밖에 안 되는 파괴력을 가진 재래식 탄두를 발사하기 위해서 그토록 엄청난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에 손을 대는 그런 어리석은 나라는 없다. 어느 나라든지 반지름 5 킬로미터가 넘는 파괴력을 가진 핵탄두를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북(조선)도 예외가 아니다. 북(조선)이 핵탄두 개발사업(핵폭탄 개발사업이 아니라)과 전략미사일 개발사업을 병행하여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서 일찌감치 밝혀진 바 있다.[6] 대북정책 조정관(당시)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는 1999년 3월 11일 워싱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는 이 것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그 자체가 핵무기 개발과 병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7] 버뮤디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난 30년 동안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그 개발사업은 그 나라의 국가철학인 주체사상과 완전히 일치하여 추진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일편단심의 결의를 가지고 전념해왔던 핵무기 개발사업과 완전히 일치하여 추진되었다."고 설명했다.[8]

그런데 일부 분석가들은 북(조선)이 매우 무겁고 부피가 커서 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없는 원시적인 핵폭발물을 한 두 개정도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중거리 탄도미사일이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탑재하는 소형화된 핵탄두는 아직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 국방부 대변인(당시) 케네스 베이컨(Kenneth Bacon)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해설한 내용을 보면, 핵폭발물을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핵탄두로 소형화하는 것은 1-2년 안에 가능하다고 한다.[9]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기술보다 앞섰으면 앞섰지 결코 뒤지지 않는 북(조선)이 아직까지 핵탄두를 개발하지 못했다고 보는 추정은 크게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행정부와 연방의회의 모든 당국자들은 북(조선)이 핵탄두를 개발하여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상한선은, 북(조선)이 아직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거나 또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개발하였다는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1994년 3월 17일에 미국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국장(당시) 제임스 울시(R. James Woolsey)는 북(조선)이 핵탄두, 화학탄두, 생물학탄두를 장착할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으며,[10] 그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국 국장이 되었던 존 도이치(John M. Deutch)도 1995년 11월초에 북(조선)이 노동 미사일과 대포동 미사일에 장착할 핵탄두, 화학탄두, 생물학탄두를 개발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아리송하게 발언한 바 있다.[11] 또한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는 1999년 9월 '페리 보고서(Perry Report)'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이 미사일의 탄두부에 장착할 핵무기 한 두 개를 만들기에 충분한 무기급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한 바 있고,[12] 미국 국방부도 북(조선)이 핵무기 4-5개를 만들기에 넉넉한 핵물질을 은밀히 개발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13] 미국인들은 이처럼 한결같이 북(조선)이 핵물질을 확보한 사실만 강조하면서 핵탄두를 보유한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서 1998년 7월에 나왔던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Rumsfeld Commission Report)'는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에 관하여 조금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다. 지금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에 임명된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가 의장으로 있었던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 평가위원회(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는 1998년 1월부터 6월까지 진행한 조사결과를 정리하여 1998년 7월 15일에 연방상원의 정보위원회에 307쪽에 이르는 장문의 비공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워싱턴에서 흔히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라고 불리는 이 보고서는 "북(조선)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핵물질을 적어도 핵무기 1-2개를 만들 수 있도록 변환(divert)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조선)은 핵무기 개발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데 이 것은 핵무기를 추가로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14] 이러한 표현은 워싱턴 정가에서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모호하게 표현하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추가로 생산할 수 있다.(North Korea could produce additional nuclear weapons.)"는 상투적인 표현은 '북(조선)자문단(North Korea Advisory Group)'이 1999년 11월에 미국 연방하원 의장 데니스 해스터트(J. Dennis Hastert)에게 보고한 보고서에서도 나온다.[15] 북(조선)자문단은 1999년 8월 23일 데니스 해스터트가 연방하원 대외관계위원회(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위원장 벤저민 길먼(Benjamin A. Gilman)에게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위협을 조사하여 보고할 자문단을 구성하도록 요청하여 생겨났는데, 이 자문단이 조사보고서를 제출한 때는 1999년 10월 29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반문은, 미국인들이 북(조선)이 무기급 핵물질(weapons-grade fissionable)[16]을 확보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무기급 핵물질을 오래 전에 보유한 북(조선)이 왜 여태껏 핵탄두를 만들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억지를 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17] 1994년 10월에 채택된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북(조선)의 핵시설을 동결시켰으므로 핵탄두를 만들고 싶었어도 만들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러한 억지주장을 내놓는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첫째, 북(조선)은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던 1994년 10월 이전에 이미 핵탄두를 개발했다는 사실이고, 둘째,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영변에 있는 민수용 핵시설을 동결시켰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북(조선)이 지금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장착하고 있는 핵탄두들은 1994년 10월 이후에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합의사항을 위배하면서 만들어낸 핵탄두가 아니라, 그 합의서가 채택되기 훨씬 이전에 미국의 정찰위성이 포착하지 못한 군사용 지하 핵시설에서 은밀히 만들어낸 핵탄두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전문가의 해설에 따르면,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이미 공개된 상태이므로 기폭기술(detonation technology)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정제된 플루토늄을 요구되는 양만큼 확보한 시점이 곧 핵무기를 보유한 시점이라고 한다.[18] 무기급으로 정제된 핵물질만 있다면 그 것을 가지고 핵무기를 만드는 데는 기술적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미국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마치 핵물질만을 보유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까닭은 미국이 북(조선)이 핵무장 국가라는 사실을 정말로 알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이 만일 북(조선)이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경우, 그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보유국이라는 사실도 자동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지금 미국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또 하나의 군사강국이 러시아와 중국에 이어 세계 무대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무조건,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있다. 그 군사강국이 미국과 가장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북(조선)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21세기를 사회주의가 없는 세기로 만들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아메리카 제국주의는 '주체혁명의 붉은 기'를 휘날리고 있는 군사강국의 존재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과 관련된 자세한 논술은 생략한다. 그 문제는 2000년 1월에 발표했던 나의 논문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북(조선)의 대응 핵전략」에서 이미 자세하게 논술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이 글에서는 북(조선)의 전략미사일 개발이 처음부터 핵탄두 개발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도 핵무기 개발사업과 마찬가지로 간고분투와 자력갱생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다. 이 글은 2000년 1월에 「세기말의 조·미관계, 세기초의 한(조선)반도 통일정세」라는 총제목 아래 3부작으로 발표하기로 하고 제1부로 나왔던 논문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북(조선)의 대응 핵전략」에 이어 나오는 후속논문으로 작성되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지금 미국의 전략가들을 진퇴양난의 궁지로 몰아넣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다. 페리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북(조선) 정책을 검토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관련 사업에서 이룩한 발전", 다시 말해서 "북(조선)이 핵무기나 장거리 미사일을 획득하는 것, 그리고 그 둘의 배합(핵무기를 장착한 장거리 미사일)"이라는 것이다.[19] 페리 보고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그러한 활동(핵탄두와 장거리 미사일을 획득하는 활동을 뜻함-옮긴이)은 또한 역내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사활적 이익을 거스르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미국의 목표는 그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20]

미국의 일부 전략가들 사이에서는 북(조선)이 앞으로 5년이 지난 뒤에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할 것이라는 주장이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그 것은 터무니없는 억측이 아니면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미국의 전략가들은 미국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적대국인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북(조선)의 전략미사일에 관하여 말할 때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라는 용어를 기피하면서 그저 장거리 미사일이라는 모호한 용어만을 쓰고 있다. 페리 보고서의 작성동기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위협 때문이었는데, 그 보고서도 예외 없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라는 용어를 기피하고 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지배와 약탈을 가장 날카롭게 반대하면서 반제자주위업을 수행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아시아·태평양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미국의 패권이 활개치고 있는 21세기 전략환경의 심장부를 겨냥하고 있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이름 있는 전략가들인 윌리엄 페리와 애쉬튼 카터(Ashton B. Carter)가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이 되는 것은 세 측면에서 미국에게 치명적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그 것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에 의한 살육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위험성, 일본과 남(한국)의 핵무장을 촉발시킴으로써 역내 군비경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 그리고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체제를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다.[21] 페리 보고서도 이와 똑같은 내용을 기술하였다.[22]

세계를 제패했다고 떠들고 있는 거대한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동방의 작은 사회주의 나라로부터 그처럼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은,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지배·약탈을 일삼고 있는 대제국의 위세와 체면이 마구 짓밟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얽혀있는 기묘한 사연들은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서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비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진실을 두려워하는 제국주의 세력이 진실을 제 아무리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비밀'로 만들려 해도 그럴 수는 없다. 이 글은 공개된 자료들을 정밀분석함으로써 '제국주의자들의 비밀'을 세상에 밝혀놓으려 한다. 이 것은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밝히기를 그토록 꺼려하면서 이러저러한 거짓 선전을 늘어놓고 있는 가장 민감한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던져주고 있는 정치·군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등장했던 모든 제국주의 세력들이 그러했듯이 아메리카 제국주의도 한 가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그 것은 제국주의 세력과 치열하게 맞서서 사회주의 수호전을 벌이고 있는 북(조선)이 '주체혁명위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쏟아내고 있는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사상, 의지, 열정이다. 반제자주의 길을 가고 있는 북(조선)은 언제나 사상, 의지, 열정의 힘으로, 오직 그 힘으로 자기의 앞길을 열어가고 있기에 자기보다 수 십 배나 강대한 제국주의 세력과 맞선 힘겨운 싸움길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종국에 가서는 기어이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제국주의 세력은 자기의 체질 속에 박혀있는 오만방자함 때문에 그러한 역사의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2) 김정일 총비서의 '병불염사' 전술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

"옛날 병서에는 <병불염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사에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하여 적을 기만하여야 합니다. 적을 기만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꾀를 써서 적들로 하여금 아군의 기도를 알 수 없게 하고 적을 속여넘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를 써서 적을 감쪽같이 속여넘겨야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의에 타격을 안길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23]

이 인용문은 김정일 총비서의 말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직접 지휘하여 추진해왔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은, 인용문에 나타나있듯이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미국에게 "불의에 타격을 안길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마련"하면서 진행되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하여 김정일 총비서가 택한 전술은 "여러 가지 꾀를 써서" 미국을 "감쪽같이 속여넘"기는 기만전술이었다. 말하자면 병불염사(兵不厭邪)의 기만전술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25년 전에 핵탄두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거창한 사업을 시작했으면서도 미국이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폐·위장하여 결국 미국을 속여넘겼던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매우 철저하게 은폐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미국이 그 동안 개발되어 실전배치된 북(조선)의 탄도미사일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서방세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노동(No Dong)'이니 '대포동(Taepo Dong)'이니 하는 미사일 이름들은 모두 미국인들이 지어낸 가짜 이름이다. 진짜 이름은 북(조선)만 알고 있다. 1994년 2월에 미국의 정찰위성(reconnaissance satellite)이 북(조선)이 모형 미사일을 시험발사한 것을 포착하였는데, 그 미사일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미국은 그 발사장이 위치한 옛 지명을 미사일의 이름으로 붙여놓았다.[24] 그 발사장이 있는 곳은 지금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舞水端里)이지만, 예전에는 함경북도 명천군의 노동(蘆洞)과 대포동(大浦洞)이라고 불렀다. 김정일 총비서의 기만전술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미국인들은 북(조선)이 개발한 미사일의 이름조차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발사장이 자리잡고 있는 지명을, 그 것도 옛 지명을 제멋대로 붙인 가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한심한 실정이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1982년 또는 1983년에 건설된 것으로 보고 있는 무수단리에 있는 발사장의 이름도 물론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수단리의 발사장은 1990년대 초까지 확장·보강공사가 계속되었다.[25] 지금까지 미국인들은 북(조선)이 익명의 발사장에서 익명의 탄도미사일과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광경을 그저 지켜보아야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2000년 1월 10일 워싱턴에 있는 민간단체인 미국 과학자연합(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이 미국 콜로라도주의 토온튼시에 있는 사기업인 우주영상사(Space Imaging Inc.)가 자체 소유의 정찰위성에서 무수단리의 발사장을 촬영한 영상자료를 받아서 공개하였던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영상자료에는 발사대, 통제소, 추진체 조립시설과 그 시설들을 연결하는 비포장 도로,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계단식 논밖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 과학자연합 관계자들은 그 영상자료를 보고 나서 무수단리에 있는 발사장은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설비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초라해 보인다고 말했다.[26] 미국의 케네디 우주기지나 러시아의 플레세츠크 우주기지, 또는 중국의 우자이 우주기지, 일본의 다네가시마 우주기지나 인도의 샤르 우주기지에 있는 웅장한 시설들이 그곳에도 있겠거니 하고 상상했던 미국인들의 눈에 그 익명의 발사장은 뜻밖에 너무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 것은 북(조선)이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탄도미사일에 관련된 중요한 시설을 땅 속 깊은 곳에 건설해놓았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생산기지들 가운데 일부인 평양시 형제산구역의 '125호 공장'이나 만경대구역의 '약전기계공장'은 이미 1977년에 지하화되었다.[27] 미국 의회조사국(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의 아시아문제 연구관 래리 닉쉬(Larry Niksch)는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배치할 지하시설을 건축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28] 주한미군사령부는 2000년 상반기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북(조선)의 지하군사시설이 모두 12,000 개소라고 밝힌 바 있으며,[29] 남(한국) 정부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땅 속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지하군사시설의 총길이는 547 킬로미터라고 한다.[30] 땅 속에 둘 수 없는 최소한의 설비들만 땅 위에 건설해놓은 병불염사의 전술을 모르는 미국인들의 눈에는 지상의 초라한 설비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병불염사의 전술에 말려든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북(조선)의 군사력에 대해서 별 거 아니라고 과소평가하면서 자기 힘만 믿고 우쭐대는 주관주의의 판단착오에 빠지는 것은 정한 이치다. 김일성 주석은 "원래 정보정치를 하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주관주의가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31] 중앙정보국 출신으로 한때 주한미국대사로 있었고 지금은 뉴욕의 코리아협회(Korea Society) 회장으로 있는 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는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은 북한이 핵무기 한 두 개를 만들면 세계의 종말이 멀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북한은 트럭에서 그 것들을 밀어 떨어뜨리는 정도의 운반능력 밖에 없습니다."고 말하면서 얕보았던 적이 있다.[32]

1998년 9월 23일 워싱턴에서는 연방상원 군사위원회(Committee on Armed Services)의 청문회가 열렸다. 이 청문회는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닛(George J. Tenet), 미국 국방정보국(Defense Intelligence Agency) 국장(당시) 패트릭 휴즈(Patrick M. Hughes)가 출석한 가운데, 두 시간 동안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우리가 이 청문회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북(조선)이 광명성 1호를 발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열린 이 비공개 청문회에서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북(조선)이 3단형 로켓 추진체를 발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고 실토한 데 있다.[33] 중앙정보국의 전략 및 핵무기 프로그램 담당 국가정보관(National Intelligence Officer for Strategic and Nuclear Programs) 로버트 월폴(Robert D. Walpole)에 따르면, "대포동 1호 미사일이 발사되리라고 예상했었지만 그 것이 3단형 우주발사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34] 그는 북(조선)이 3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대포동 1호(미국인들은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대포동 1호라고 부른다.-옮긴이)를 우주발사체로 쏘아 올린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것은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고 시인했다.[35]

미국 중앙정보국은 1998년 3월 다른 나라의 탄도미사일 개발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비공개 보고서에서는 북(조선)의 대포동 1호와 2호 미사일이 이르면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실천배치될 것으로 예측하였다.[36] 그러나 북(조선)은 그 보고서가 나온 뒤 불과 다섯 달만에 보란 듯이 광명성 1호를 실은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림으로써 미국 정보기관의 예측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1993년 2월에 미국 국방부 산하의 전략방위선제기구(Strategic Defense Initiative Organization)가 작성한 보고서 「미국에게 증대되고 있는 탄도미사일 위협(The Emerging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은 앞으로 10-20년에 이르는 기간에 예측하기 힘든 세 가지 불확실성이 생겨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첫째, 미국 정보기관들이 사용하는 정보지표(intelligence indicators)가 때로 모호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확실성이다. 둘째, 몇몇 나라들이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의도와 능력을 뒤바꿀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확실성이다. 셋째,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들과 미국의 정치적 관계가 극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확실성이다.[37]

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위의 보고서가 예측했던 내용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사전에 탐지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들이 사용하는 정보지표들이 모호하고 부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한 근본목적이 한(조선)반도의 자주화와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함으로써 조·미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위의 보고서가 예측했던 그 때가 채 다가오기도 전에 세 가지 불확실성은 지금 현실로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3) 미국 국가정보회의의 판단착오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능력을 탐지하면서 사용해온 정보지표들이 얼마나 모호하고 부정확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주관주의의 늪에 빠져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면서 어떠한 판단착오를 저질렀는지를 알아보려면, 지난 시기 미국 정보기관들이 작성한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관한 정보평가서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공개된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대해서 감시의 눈초리를 돌리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1992년부터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로버트 월폴에 따르면, 중앙정보국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과정을 추적해왔다고 한다.[38]

중앙정보국 국장(당시)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는 1992년 1월 15일 미국 연방상원 정부문제위원회(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의 청문회에서 증언하면서 "북(조선)의 핵미사일 및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가안전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39]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하지 못하고(또는 안 하고), 경고하는 수준에서 발언하는데 그쳤다. 이듬해인 1993년은 미국의 전략가들이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문제로 온통 떠들썩한 가운데 전쟁위기를 넘겨야 했던 시기였으므로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문제는 그들의 관심사가 정해놓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건은 미국 국가정보회의(National Intelligence Council)가 1993년에 작성한 비공개 문건인 국가정보평가서 「전세계적 범위에서 미국 본토를 겨냥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위협에 관한 전망(Prospects for the Worldwide Development of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Continental United States)」이다. 이 문건은 "현재로서는 오직 중국과 옛 소련에 속해 있었던 독립국가협동체(CIS) 몇 나라의 전략군만이 지상배치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정보분석결과는 앞으로 15년 동안에 그 밖의 다른 나라가 그러한 능력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면서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면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라는 '낙관론'을 폈다.[40] 국가정보회의는 워싱턴에서 정보집단(the Intelligence Community)을 이루고 있는 중앙정보국, 국방정보국, 국가안전국(National Security Agency) 등 13 개 정부기관의 고위급 정보분석가들과 유력한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백악관에서 열리는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는 국가정보회의가 작성하는 국가정보평가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정보회의는 정세를 분석·판단하고 국가안보회의는 정책을 수립·실행하는 것이다.

1994년 3월 미국의 정보분석가들은 북(조선)이 개발하고 있는 대포동 1호 미사일의 사거리는 약 2,000 킬로미터,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사거리는 약 3,500 킬로미터라고 주장했다.[41] 이 것은 대포동 1호를 준중거리 미사일로, 대포동 2호를 중거리 미사일로 추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광명성 1호의 발사로 입증되었지만, 미국 정보분석가들의 그러한 추정은 북(조선)의 탄도미사일이 지닌 성능을 대략 4분의 1이나 낮게 평가한 오류였다. 이 글에서 나중에 논증하겠지만, 실제로 대포동 1호는 사거리 9,000-10,0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고, 대포동 2호는 사거리 11,000-13,0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다. 남(한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정찰위성은 북(조선)이 1994년 6월 14일에 대포동 1호, 2호 미사일에 부착할 로켓엔진을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처음으로 분사시험한 것을 포착하였으며,[42] 미국의 정찰위성이 평양시 산음동의 미사일 연구소 건물밖에 대포동 1, 2호 미사일이 놓여있는 것을 포착했던 때는 1994년이었다.[43] 로버트 월폴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들은 1994년에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

첫째, 1994년에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이 앞으로 다섯 해 안에(2000년 이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것이다. 월폴은 광명성 1호가 발사된 뒤인 1998년 12월 8일에 강연하는 자리에서 중앙정보국이 1998년 3월에 작성했던 정보보고서에서 중앙정보국은 "북(조선)이 적어도 10년 전부터(1988년부터라는 뜻임-옮긴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북(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고 곧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44]

둘째, 1994년에 중앙정보국은 북(조선)이 2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중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1994년에 시험발사하고 1996년 초에 배치할 것으로 예측했다는 것이다.

셋째, 북(조선)이 2단형 로켓 추진체의 성능을 개량하여 만들게 될 대포동 2호는 핵탄두를 미국 본토의 일부지역에까지 실어 나를 수 있고, 1994년 이후 몇 해 안에 시험발사될 것이며 2000년쯤에는 배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것이다.

넷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북(조선)은 199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것이다.[45]

우리가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위의 분석내용을 읽어보면 판단착오가 더러 눈에 띄지만 완전히 엉뚱한 오판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1994년 당시에는 그러한 분석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3세계의 어떤 나라도 앞으로 15년 안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장된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정보기관의 생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위와 같은 로버트 월폴의 주장에 따르면, 1994년이라는 시점에서 미국 정보기관돎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음을 인정하였으면서도 그 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과소평가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보지표를 북(조선)의 특수한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판단착오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다른 나라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평가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정보지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아래의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나라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시험발사를 실시하는 경우, 우리는 그들이 개발사업을 끝내기 이전에 최소한 5년이라는 경고기간을 확보한다. 우리는 그들의 개발사업이 끝나기 7-15년 전에, 그리고 최초의 시험발사를 실시하기 2-10년 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의 지표들, 특히 추진체와 관련된 개발노력들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46]

국방정보국 국장(당시) 제임스 클래퍼 2세(James R. Clapper, Jr.)는 1995년 1월 17일 미국 연방상원의 군사위원회에서 "사거리 500-1,000 킬로미터 또는 그 이상의 사거리를 가진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거기에 대량파괴무기 탄두(화학탄두, 생물학탄두, 핵탄두를 포함하여)를 장착하는 능력을 보유한 나라들을 우리는 21세기초에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47] 국방정보국은 미국을 위협하는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들이 5년 뒤인 2000년쯤에 등장할 것이라는 경고성 예측을 내놓았지만, 그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 않았고 그냥 '여러 나라들'이라고만 표현하였다.

그런데 1995년에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비공개 정보평가서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능력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미국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정보평가서는 북(조선)이 2000년까지 배치하게 될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의 사거리가 약 7,500 킬로미터가 될 것인데, 탄두무게를 줄일 경우 약 10,000 킬로미터까지 날아갈 수 있으므로 미국 본토를 타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 언론보도는 미국 국방부의 탄도미사일 방어기구(Ballistic Missile Defense Organization)가 제시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대포동 2호의 타격범위는 미국 본토의 서부해안지역은 물론 애리조나주, 콜로라도주, 캔서스주에 있는 주요도시들을 포함하며 중부지역의 대도시 시카고 부근까지 포함할 것이라는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48] 당시 미국 언론은 1995년에 나온 "국방정보국의 발표문은, 대포동 2호에 관한 언론계의 보도내용들은 사실이며, 북(조선)이 그러한 장거리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개발한다는 것은 미국의 국익과 동북아지역의 이익에 대한 도전을 촉발시키는 새로운 차원을 열게 될 것"이라고 해설하였다.[49] 1995년 6월에 미국 의회조사국은 「다른 나라의 탄도미사일 및 순항미사일 전력(Ballistic and Cruise Missile Forces of Foreign Countries)」이라는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대외정책 및 국방문제 분석가 로버트 슈이(Robert Shuey)가 작성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기존의 핵무장국인 미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 이외에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는 없다고 전제하면서, 브라질, 인도, 이탈리아, 이스라엘, 독일, 일본,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 1990년대에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능력을 보유할 수 있는 나라들이지만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조짐은 없으며, 북(조선)은 대포동 2호를 포함한 장거리 탄도미사일(정확하게 표현하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50]

그 무렵 중앙정보국에서도 북(조선)이 21세기초에 미국 본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 영토의 변방지역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클래퍼의 발언과는 거의 1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1996년 2월 22일에 중앙정보국장(당시) 존 도이치가 연방상원 정보특별위원회(Select Committee on Intelligence)에 나가서 보고한 내용에서도 미국 정보기관들이 거의 같은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51] 미국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보(당시) 로버트 아인혼(Robert J. Einhorn)은 1997년 10월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북(조선)은 1996년 10월에 노동 미사일 또는 다단형(multistage)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려고 준비하였다가 그만두었으므로 대포동 1호의 시험발사는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밝혔다.[52]

그렇지만 미국 정보기관들은 한결같이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주관주의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제104차 연방의회에서는 1996년 회계연도의 국가방위법안(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 for Fiscal Year 1996)을 심의하였는데, 공화당이 제출했던 이 법안에는 2003년까지 국가미사일방어체계(National Missile Defense)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중앙정보국은 1995년 12월 1일 연방상원에 보낸 의견서에서 국가미사일방어체계 설치를 반대하였다. 중앙정보국이 반대했던 까닭은, 중앙정보국은 앞으로 15년 안에는 기존의 주요 핵강국들(the major declared nuclear powers) 이외에 그 어떤 나라도 미국 본토와 캐나다를 위협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보유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던 국가정보회의의 정보평가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정보회의 의장 리처드 쿠퍼(Richard Cooper)는 1996년 2월 28일에 연방하원 국가안보위원회(Committee on National Security)의 청문회에 국가정보평가서 「향후 15년 동안의 북미주에 대한 미사일 위협(Emerging Missile Threats to North America During the Next 15 Years)」을 제출하였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 처음으로 작성된 이 국가정보평가서는 원래 1993년에 작성했던 것을 1995년 11월에 다시 작성한 개정판이다. 이 정보평가서는 당시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인데,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을 적대하고 있는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북(조선)은 가장 발달된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북(조선)이 개발하고 있는 미사일 가운데 하나인 대포동 2호의 사거리는 4,000-6,000 킬로미터로 평가되고 있다. 6,000 킬로미터의 사거리는 알래스카 일부와 하와이 제도의 서부를 타격하기에 충분하다. 북(조선)은 사거리가 더 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기술력을 확보한 것 같지는 않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난제들, 특히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불확실성과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면 새로운 추진체, 성능이 개량된 유도장치와 제어장치를 개발하고 시험발사를 실시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평양이 그러한 개발사업을 시작했다거나 시작하려 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북(조선)의 추진체 개발사업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53]

그런데 그 국가정보평가서에 대해서 워싱턴의 일부 분석가들은 그 것이 정치적 의도로 작성되었다고 의심하면서 알래스카와 하와이에 대한 미사일 위협을 너무 간단히 처리하였다고 비판하였다.[54] 당시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던 연방의회도 국가정보평가서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수준을 과소평가하였다고 비판하면서 1996년 회계연도의 국가방위법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1995년 12월 28일 미국 대통령(당시) 윌리엄 클린턴(William J. Clinton)은 이 국가방위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는데, 그 것은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가 앞으로 15년 안에는 미국 본토에 대한 미사일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 국가정보회의의 정보평가서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6년에 와서도 미국 정보기관들은 "공인된 핵강국들 이외에 다른 어떤 나라도 앞으로 15년 안에는 미국 본토의 48개 주와 캐나다를 위협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거나 보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15년 낙관설'을 논하고 있었다.[55] 중앙정보국 국장 존 도이치는 1996년 2월 22일 연방상원 정보특별위원회에서 "평양은 가까운 장래에 배치할 수 있는, 사거리 1,000 킬로미터의 노동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알래스카에 도달할 수 있는 대포동 미사일은 아직 개발 중인데, 21세기초에나 생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56] 미국 국방부가 1996년 4월 11일에 발표했던 전세계 대량파괴무기 확산에 관한 보고서도 북(조선)이 사거리 1,000 킬로미터의 노동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사거리 1,500 킬로미터와 4,000 킬로미터의 대포동 1호, 2호 미사일을 설계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지적했다.[57] 일본의 『지지통신』이 1996년 3월 24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국방정보국이 1995년 말을 기준으로 작성한 「북(조선) 군사력 기초」라는 보고서는 중거리 미사일 노동이 아직 실전배치되지 않았으며 대포동 미사일은 설계단계에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58] 1996년 12월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냈던 로버트 게이츠가 의장으로 있는 중앙정보국의 조사반은 1995년의 국가정보평가서를 다시 검토하고 나서 2010년 이전에는 제3세계의 어떤 나라도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외부로부터 전자장비와 기술을 지원 받음으로써 1995년의 국가정보평가서에서 지적한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된다고 해도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59] 대체로 이러한 '낙관론'이 당시 미국 정보기관들이 외부에 내놓고 있었던 공통된 견해였다.

1998년 5월 연방상원이 '미국 미사일 보호법안(American Missile Protection Act of 1998)'을 채택하려고 하였을 때,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는 1995년에 나왔던 국가정보평가서를 거론하면서 이 법안의 통과를 반대하였다. 이처럼 국가안보회의가 연방의회의 국가방어미사일체계 설치안을 계속 반대하자, 연방의회에서는 공화당 세력이 중심이 되어 자체적으로 탄도미사일 위협문제를 조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특별위원회가 발표한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는 요약된 내용만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서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커드형을 기반으로 하여 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내는 발달된 개발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외부의 도움을 받을 경우 약 5년 안에 사거리 5,500 킬로미터 이상이 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수 있다. 미국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자문관(당시) 존 홀럼(John Holum)은 1999년 11월 9일 워싱턴의 외신기자센터에서 열린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관한 설명회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1999년에 추정한 바에 따르면, 북(조선)은 10-15년이 아니라 아마도 5년 안에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60]

둘째, 북(조선)은 대포동 2호 탄도미사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체계에 대해서는 확실히 파악할 수 없으나 탄도미사일의 생산기반은 높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준비되기만 하면 여섯 달 안에 시험발사를 할 수 있다.

셋째, 북(조선)은 대포동 2호의 시험발사에 성공하는 경우 신속하게 배치할 것이다.

넷째, 미국은 대포동 2호의 시험발사를 사전에 파악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대포동 2호 미사일은 알래스카 전역과 하와이 제도의 서부지역을 사거리 안에 둘 것이다.

여섯째, 대포동 2호의 탄두를 경량화하면 10,000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으며, 애리조나주의 수도 피닉스, 위스콘신주의 수도 매디슨까지 도달하는 범위에 있는 미국 본토의 중서부지역까지 위협할 것이다.

일곱째, 대포동 2호의 성능을 개량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며 시험발사도 한 차례 더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덟째,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노동 미사일의 성능을 평가하는 데서 매우 어려움을 겪었던 사실에 비춰보면, 그들은 대포동 2호가 배치되는 것을 사전에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61]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약 4년 동안에 발표된 중앙정보국 정보평가서들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관점과 태도가 처음에는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나가다가 1998년 9월 이후에는 갑자기 바뀌면서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위협이 미국의 국가안보 문제를 좌우하는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미국 정보기관의 대북 인식은 1998년 8월 31일에 있었던 광명성 1호 발사를 전환점으로 하여 이전의 북(조선)과 그 이후의 북(조선)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것은 미국 국가정보회의가 광명성 1호 발사 이후의 북(조선)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미국의 국가안전을 위협하는 실체라고 인식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97년 2월 5일에 발표된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는 북(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동북아지역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파악하면서 이란과 이라크의 재래식 무력 문제와 함께 다루었다. 이 보고서에 나타나 있는 북(조선)의 위협이란 군사분계선 부근에 배치되어 서울과 주한미군 기지를 위협하고 있는 대구경 장거리포와 단거리 지대지 전술미사일에 국한되어 있다. 대량파괴무기 확산 문제를 언급한 대목에서도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라는 나라이름은 나와도 북(조선)은 거론하지 않았다. 지역분쟁에 관련해서도 중동, 남아시아, 보스니아, 에게해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식량난으로 인한 '붕괴 가능성' 따위였다.[62] 그 무렵 미국 국가정보회의는 북(조선)이 식량난으로 곧 붕괴할 것이라는 판단착오에 빠져있었으므로 북(조선)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무엇을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1998년 1월 28일에 발표된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는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미국에 대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이라크, 북(조선), 리비아, 시리아, 이란, 이라크라고 지목하면서 특히 이란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이 보고서가 1997년에 나왔던 보고서와 크게 다른 점은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 분석방향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문제가 아니라 북(조선)이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에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에 관련된 장비, 재료, 기술을 수출하고 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보고서에서도 여전히 북(조선)에 대한 인식은 식량난과 붕괴 가능성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63]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약 4년 동안에 발표된 중앙정보국 보고서들을 면밀히 분석하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 것은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것이다. 1998년 8월 31일 북(조선)이 광명성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함으로써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과시하였으므로, 1999년 2월 9일에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닛이 연방상원의 군사위원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지 테닛의 보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북(조선)은 미국 본토까지 커다란 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차세대 미사일을 개발해왔다. 대포동 1호 3단형 미사일을 지난 8월에 발사한 것은, 몇 가지 중요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면 비록 정확도는 좀 떨어지지만 매우 작은 탄두를 대륙간 사거리까지 다시 말해서 미국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사거리까지 운반할 수 있는 기술력을 과시하였다. 북(조선)은 커다란 탄두를 알래스카와 하와이에, 작은 탄두를 미국 본토에 운반할 수 있는, 더 진보된 2단형 미사일인 대포동 2호를 개발하고 있다."[64]

더구나 그 보고서는 앞으로 대포동 2호의 개발이 끝나면 그 것은 3단형 로켓 추진체가 아니라 2단형 로켓 추진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중량급 탄두는 알래스카와 하와이까지, 경량급 탄두는 미국 본토의 일부에까지 실어 나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는 로버트 월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2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대포동 2호는 수백 킬로그램의 탄두를 알래스카와 하와이까지 실어 나를 수 있으며 그보다 무게를 줄인 탄두는 미국 본토의 중서부까지 실어 나를 수 있다고 재확인하였다.[65] 이러한 주장은 1999년 4월 29일에도 미국 연방정부 관련기관들 사이에서 그대로 되풀이되면서 아예 기정사실로 굳어진 듯하다.[66] 다만 월폴의 주장과 테닛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은, 월폴이 3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대포동 2호가 수백 킬로그램의 탄두를 미국 전역에 실어 나를 수 있음을 인정하였던 반면에 테닛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67]

여기서 우리는 미국 정보기관이 이치에 닿지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실어 날랐던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3단형 로켓 추진체였으므로, 북(조선)은 이미 3단형 로켓 추진체를 만들어내는 고도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음이 입증되었는데도, 중앙정보국은 여전히 북(조선)이 2단형 로켓 추진체를 개발하고 있다는 억지주장만 되풀이하였다. 왜 그랬을까? 중앙정보국이 그처럼 억지를 부리고 있는 까닭은 북(조선)이 3단형 로켓 추진체를 개발하여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완성하고 실전배치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축소·은폐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북(조선)은 3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우주발사체의 탄두부에 소형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실어 지구궤도에 쏘아 올림으로써 3단형 로켓 추진체 개발을 이미 끝내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다(operationally deployed)는 사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과시하였다. 만일 북(조선)이 3단형 로켓 추진체를 아직 개발하지 못하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지 못했다면 절대로 인공위성부터 성급하게 먼저 발사하면서 미국을 심히 자극하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북(조선)이 절박하게 요구해왔던 것은 인공위성이 아니라 대륙간 탄도미사일이었다. 북(조선)이 추구했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3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었고, 미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무력수단, 곧 3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1998년 10월부터 2000년 초에 나온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평가서들은 미국에게 현실적인 위협으로 등장한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관하여 가장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건이다. 그런데 광명성 1호가 발사된 직후인 1998년 10월에 중앙정보국이 광명성 1호에 관하여 발표했던 '개정 비망록(updated memorandum)'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흥미로운 자료는 아마도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에 관해 가장 정확하게 분석·평가한 문건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관한 정확한 정보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관한 정확한 정보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을 크게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차마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광명성 1호가 발사되기 이전까지 미국 정보기관들이 주장해왔던 것처럼 만일 북(조선)이 아직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했다면, 미국 정보기관들은 그 이전과 이후의 다른 정보평가서들은 모두 공개하면서 유독 광명성 1호 발사 직후에 광명성 1호에 관련하여 자기들이 작성한 정보평가서만을 외부에 공개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북(조선)은 아직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기존의 평가내용을 그대로 다시 내놓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그들은 기존의 평가내용을 다시 내놓을 수 없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광명성 1호가 발사된 직후에 그에 관한 정보자료를 공개하지 못한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끝내고 실전배치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북(조선)이 광명성 1호를 쏘아 올리자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검토해야 했다. 이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1999년 9월 9일 국가정보회의가 작성했던 비공개 문건인 국가정보평가서 「앞으로 2015년까지의 외국의 미사일 개발과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Foreign Missile Develpo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이다. 이 중요한 문건은 1995년에 나왔던 국가정보평가서의 개정판이다. 1999년도 개정판이 1995년도 기존판과 다른 점은 대개 세 가지로 정리되는데, 그 것은 제3세계 나라들이 우주발사체 개발기술을 가지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내는 위험성, 다른 나라에서 탄도미사일 기술을 도입하여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위험성, 그리고 해상발사 탄도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하는 위험성이다.[68] 1999년도 개정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국가정보회의가 미국은 앞으로 15년 동안 러시아, 중국, 북(조선)으로부터 대륙간 탄도미사일 위협을 받게 될 것임을 '처음으로' 시인하였다는 사실이다.[69] '15년 낙관설'이 '15년 비관설'로 뒤바뀐 것이다. 국가정보회의가 작성한 국가정보평가서는 언제나 비공개로 처리되고 있는데, 1999년도 개정판 정보평가서의 일부 내용은 1999년 9월 16일에 로버트 월폴이 연방상원의 대외관계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담겨있다. 그 보고서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한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점이 눈에 띈다.

첫째,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전쟁수단이라기 보다는 전쟁억지(deterrence of war)와 압박외교(coercive diplomacy)를 추진하기 위한 전략무기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것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이 보유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군사적 측면보다는 정치·외교적 측면을 더 중시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미국에 대한 협상에서 압력을 넣으려는 목적으로 긴장을 조성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유력한 외교방책을 북(조선)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지적했던 의회조사국 연구관 래리 닉쉬의 분석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70]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가 "새로 등장하는 강대국들은 탄도미사일이 매우 효과적인 전쟁억지의 무기이며 동시에 미국을 포함하는 적대세력들을 강제하고 위협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분석이었다.[71] 1999년 8월 18일 당시 평양에서 취재하고 있었던 미국 씨엔엔(CNN) 방송의 마이크 치노이(Mike Chinoy)는 "북(조선)은 미사일 프로그램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양보와 경제적 양보를 얻어내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하였다.[72]

둘째, 북(조선)은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익명의 우주발사체(미국인들이 대포동 1호라고 부르는 3단형 로켓 추진체)를 변환하여 경량급 탄두(생화학탄두)를 미국에까지 운반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북(조선)은 수백 킬로그램의 탄두(초기 형태의 핵탄두)를 미국에까지 운반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대포동 2호)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넷째, 거의 모든 분석가들은 북(조선)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지연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대포동 2호를 시험발사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73] 이 것은 2000년 2월 2일 연방상원 정보특별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북(조선)은 올해(2000년을 뜻함-옮긴이) 대포동 2호를 시험발사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데, 이 미사일은 핵탄두를 미국에 실어 나를 수 있다."고 밝혔던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닛의 증언에서도 확인되었다.[74] 로버트 월폴은 2000년 2월 9일 연방상원의 국제안보, 대량파괴무기확산 및 연방업무 소위원회(Senat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에 제출한 보고서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에서 "대포동 2호는 아무 때나 시험발사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고 전제하면서 "3단형 대포동 2호는 수백 킬로그램의 탄두를 미국 전역에 실어 나를 수 있다."고 밝혔다.[75] 이 것은 북(조선)이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중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사실상' 시인한 증언으로 해석된다. 지금 미국 정보기관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비록 공개적으로 시인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일 총비서가 명령하면 언제라도 자기들의 머리 위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미국 국가정보회의 의장 존 개넌(John C. Gannon)은 2000년 2월 1일에 강연하는 자리에서 "1998년 8월에 있었던 북(조선)의 대포동 1호 시험발사는 북(조선)의 능력이 사거리 5,5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과시하였다."고 하면서, 북(조선)이 러시아, 중국과 더불어 앞으로 15년 동안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미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였다.[7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북(조선)이 러시아와 중국의 뒤를 이어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제3의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였음을 미국 국가정보회의가 사실상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옛 소련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했던 해는 1959년이었고, 중국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했던 해는 1981년이었다. 그리고 20세기말에 이르러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제3의 군사강국으로 등장하는 광경을 경악과 충격 속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연방하원들로 구성된 북(조선)자문단의 보고서가 "북(조선)은 러시아와 중국과 더불어 가장 심각한 미사일 확산위협을 가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평가였다.[77]

그런데 워싱턴의 일부 분석가들은 북(조선)이 2002년에 가서야 미국의 변방(알래스카와 하와이)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배치하게 될 것이고, 2004년 안에 미국의 서부해안과 다른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과소평가설을 여전히 내놓고 있다.[78] 이처럼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견해는 정보가 부족하여 생겨난 오판이 아니면, 정치적 의도로 각색된 것이다. 그러한 과소평가설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고 있는 '2004년 배치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후반기에 나온 중앙정보국의 정보분석을 살펴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대한 중앙정보국의 관심사는 2000년 2월 2일에 발표된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닛의 보고서를 끝으로 그 초점이 상당히 희미해지고, 그 대신 2000년 9월부터는 이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대한 관심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79] 2000년 9월 이후에 발표된 중앙정보국 보고서들에 나타난 대로, 2000년 후반부터 미국 정보기관의 주된 관심사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에서부터 이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 문제로 옮겨갔다면,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이란이 북(조선)보다 미국을 더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뜻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는 "이란의 탄도미사일 생산기반은 북(조선)의 그 것보다 더 정교하다."고 과대평가하였지만, 이란은 러시아와 북(조선)으로부터 탄도미사일 기술과 품품을 사들이고 있는 수입국이며, 핵무기도 보유하지 못한 비핵국이다.[80] 이란은 노동 1호 미사일의 변형으로 알려진 사거리 1,300 킬로미터의 탄도미사일 '샤하브(Shahab)3'을 1998년 7월에 시험발사하였고, '샤하브4'라는 이름을 가진 우주발사체를 개발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로켓 추진체의 연소실험을 1999년 2월에 실행하는 수준에 와있는 나라다.[81] 1995년의 국가정보평가서에서도 "이란은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 해도 2010년까지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낮게 평가한 바 있다.[82] 그에 비해 북(조선)은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개발을 끝내고 실전배치한 수준에 와있는 나라다.

그런데 왜 중앙정보국은 2000년 하반기에 북(조선)을 외면하고 이란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 것은 중앙정보국이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와 관련한 정보자료를 더 이상 공개적으로 내놓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밀려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므로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종래의 정보분석을 내놓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관한 미국의 주된 관심은 정보기관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제3의 군사강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하느냐 하는 정치·외교적 차원으로 옮겨간 것이다.

지구 곳곳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감시한다고 우쭐대던 미국 국가정보회의는 북(조선)을 과소평가하는 주관주의의 늪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북(조선)이 핵탄두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동안 알아채지 못하였고, 결국 판단착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더 중대한 점은 그 판단착오가 조·미 관계에서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에게 회복할 수 없는 정치적 패배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4) 북(조선) 탄도미사일 개발사를 바라보는 관점

조셉 버뮤디즈가 진행하였던 북(조선)의 탄도미사일에 관한 연구는 1999년 11월에 미국 캘리포니아주(洲) 몬트레이시(市)에 있는 몬트레이 국제연구원(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산하의 비확산문제 연구소(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에서 보고서 형식으로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도미사일 개발사(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에 연대기로 기술되어 있다. 이 자료가 가지는 의의는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의 독자성을 '일정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일정하게'라는 말을 덧붙이는 까닭은 그도 다른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북(조선)이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하여 중국과 옛 소련의 기술지원에 의존하였다는 근거 없는 억측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행정부, 군부, 언론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알려져 있는 재일동포 군사평론가인 조·미 평화연구소(Center for Korean-American Peace)의 김명철 소장은 북(조선)이 1970년대에 옛 소련에게 탄도미사일 제조기술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음을 지적하였으며, 중국의 기술지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83] 이 것은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독자적으로 추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른 측면을 보면, 버뮤디즈의 연구성과에 드러나 있는 한계는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 그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능력만을 인정하였을 뿐이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면, 북(조선)은 어디까지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잠재적 보유국으로 분류된다. 둘째, 그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지니고 있는 군사적 측면만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그의 일면적인 분석과 달리, 이 글은 군사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을 바라보아야 하며, 정치적 측면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정치적 측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논술할 것이다.

버뮤디즈에 따르면,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 40년은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1960년부터 1979년까지인데, 그는 이 시기에 북(조선)이 중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고 주장했다. 둘째 시기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인데, 그는 이 시기에도 북(조선)이 중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고 주장했다. 셋째 시기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인데, 그는 이 시기에 북(조선)이 독자적으로 장거리 탄도미사일(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고 말했다.

버뮤디즈는 북(조선)이 다단형(multistage)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를 1975년으로 보았다.[84] 그가 1975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하면서 그 때부터 다단형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고 주장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75년 4월에 김일성 주석이 9일 동안 중국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 김일성 주석을 수행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당시)은 중국에게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둘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1976년에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둥펑61을 개발하는 사업을 인준했다는 것이다. 셋째, 남(한국)이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Nike Hercules SAM)'을 모체로 하여 단거리 탄도미사일 '백곰'을 개발하기 시작하자 북(조선)도 중국의 둥펑61을 모체로 하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남(한국)이 단거리 탄도미사일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 때는 1978년 9월 26일이었다.

버뮤디즈는 위와 같은 세 가지 논거를 들면서 북(조선)은 중국의 둥펑61을 개량하여 두 종류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고 추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북(조선)은 1,000 킬로그램의 재래식 탄두를 장착하는, 사거리 600 킬로미터의 수출용 미사일을 생산하였고, 500 킬로그램의 핵탄두를 장착하는, 사거리 1,000 킬로미터의 내부용 미사일을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북(조선)이 남북의 미사일 개발경쟁 속에서 중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생산한 미사일은 길이 9 미터, 지름 1 미터가 되는 탄도미사일이었다고 추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버뮤디즈의 주장에는 두 가지 그릇된 논점이 들어있다. 그 하나는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독자적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술지원에 의존하여 추진되었다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조·미 사이의 군사적 대결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남북 사이의 미사일 개발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버뮤디즈의 분석과 평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첫째, 중국의 둥펑61 개발사업은 1978년에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중단되었다는 사실이다. 약 1년밖에 추진되지 못하고 중단되어 버렸던 둥펑61 개발사업이 북(조선)의 다단형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에 도움이 되었다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어설픈 추론은 바로 이 점에서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둘째, 버뮤디즈 자신도 밝혔듯이, 북(조선)이 중국의 둥펑61 개발사업에 어느 정도 참여하였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결국 그의 추론은 자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셋째, 버뮤디즈는 1970년대 중반에 남(한국)이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대응하여 미사일 개발을 경쟁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에 집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마치 남(한국)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에 대한 대응조치에서 비롯되었던 것인 것처럼 주장했지만, 그 것은 사실이 아니다.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겨냥하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남(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버뮤디즈 자신도 북(조선)은 동아시아에 있는 미군시설들과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전략미사일을 개발하려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85] 버뮤디즈는 1970년대 중반에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시작한 정치·군사적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오류에 빠짐으로써 결국 빗나간 추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이어진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에 관련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버뮤디즈의 빗나간 추론보다는 김명철 소장이 해설한 내용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김명철 소장은 그가 일본에서 펴낸 책 『김정일 조선통일의 날(金正日 朝鮮統一の日)』에서 "북조선 군부관계자의 설명"에 의거하여 기술하고 있어서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86] 그의 해설에 따르면, 북(조선)이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76년에 이집트로부터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았던 것이었다고 한다.[87] 그로부터 몇 해 전에 북(조선)은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요청을 받아 1,500 명이나 되는 군사요원(공군부대와 방공미사일부대의 요원)을 파병하여 이집트군을 적극 지원했다. 1973년 10월에 일어난 제4차 중동전에서 미그 21기의 조종간을 잡은 조명록 차수(당시 공군 대좌[대령])가 직접 이끄는 조선인민군 공군특공대는 이집트공군 항공편대를 이끌고 기상천외한 강습(强襲)작전을 수행하여 이집트가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88]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넘겨받은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은 그 공헌에 대한 답례형식으로 받은 것이었다. 원래 그 미사일은 옛 소련이 제3국에는 절대로 넘겨주지 말라는 조건을 달아 이집트에게 보내준 것이었으므로, 이집트는 은밀히 북(조선)에게 그 미사일을 넘겨주었다. 북(조선)은 이집트가 넘겨준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분해하여 역설계하는 매우 힘든 공정을 거쳤고, 결국 그 미사일을 모체로 하여 성능이 훨씬 더 개량된 고유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버뮤디즈도 이 사실에 관련하여 일부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모체가 된 소련제 미사일은 소련이 이집트에 수출했던 '스커드 비(B)'의 일종인 '소비에트 알(R)17이(E)' 몇 기와 MAZ543 이동식 수직발사대(TEL), 지원차량 및 장비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버뮤디즈의 자료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았던 시점을 1979년에서 1981년쯤이었다고 늦추어 잡았다는 데 있다.[89] 그는 북(조선)이 중국과 옛 소련의 기술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조건에서 탄도미사일을 자체의 힘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북(조선)은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았던 1979년 혹은 1980년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추정했다.[90] 그가 '1979년-1981년 인수설'을 주장하게 된 까닭은 북(조선)이 1981년 8월 21일에 이집트와 '기술협력 및 교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 미사일을 넘겨받은 것으로 추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것은 착오다. 협정을 체결한 시점과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버뮤디즈 자신도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분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시점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는 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집트가 1973년에 일어났던 제4차 중동전에서 세운 조선인민군의 공로에 대하여 무려 6-8년 뒤에 답례하였다는 것도 우선 말이 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미사일 답례는 전쟁 뒤 약 3년이 지난 시점인 1976년에 있었다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남(한국)의 언론도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비(B) 미사일 두 기를 넘겨받은 시점을 1976년으로 보도한 바 있다.[91]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시점과 북(조선)이 본격적으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1976년부터 3-5년 동안 북(조선)은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지 않고 그 미사일을 그대로 보관만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1976년이라는 시기가 조·미 군사대치상태에서 매우 심각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해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미국이 북(조선)을 겨냥한 핵전쟁 연습인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처음 실시했던 때가 1976년 6월이었으며, 같은 해 8월 18일에는 이른바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 일어나 한(조선)반도는 그야말로 전쟁 직전의 위기상황에 있었다. 그처럼 날카로운 군사대치상태에서, 특히 미국의 핵공격 위협이 한층 가시화되고 있었던 1976년에 북(조선)이 탄도미사일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버뮤디즈가 추정했던 '1979-1981년 인수설'은 설득력이 없다. 버뮤디즈 자신도 그 인수시점은 정확한 근거에 의하여 파악한 것이 아니라고 자인한 바 있다.[92] 북(조선)이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시점을 1976년이라고 보았던 김명철 소장의 견해가 옳으며, 따라서 북(조선)이 독자적인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던 시기를 1976년으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은 북(조선)은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약 8년이 되는 1984년에 마침내 모체인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 보다 성능이 훨씬 더 좋은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만들었다. 미국 국방정보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체인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의 사거리는 300 킬로미터였던 데 비해 북(조선)이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지대지 탄도미사일은 700 킬로그램의 탄두를 싣고 사거리 500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성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관성유도장치도 개량하여 정밀도를 더욱 높였다고 한다.[93] 북(조선)은 1984년 4월과 9월에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이 새로운 미사일의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버뮤디즈에 따르면, 그 때 시험발사한 탄도미사일은 모두 5기였는데, 그 가운데 3기는 성공했고 2기는 실패했다고 한다.[94]

150년이 넘는 장구한 공업화 역사와 전통을 뽐내며 세계 최강의 공업국이라고 떠들고 있는 미국이 지난 시기 사거리 600 킬로미터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퍼싱(Pershing)'을 개발하는 데 걸린 기간은 10년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공업기술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기술수준에 있었던 북(조선)은 모든 것이 부족한 조건에서 자체의 기술력으로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바로 이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버뮤디즈는 지난 1990년대 10년 동안에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보여준 두드러진 특징은 그 개발사업을 급속도로 추진한 것에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 기술, 산업기반 수준을 볼 때, 외부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그토록 수준 높은 미사일 기술력(특히 유도장치와 로켓엔진 부문의 기술력)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힘들다."고 실토했다.[95] 연방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북(조선)자문단도 "지난 5년 동안 북(조선)의 미사일 능력은 눈부시게 향상되었다(improved dramatically)."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96]

북(조선)의 과학기술자들이 이집트로부터 넘겨받은 스커드 미사일을 분해하고 역설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품을 하나씩 만들어갔던 그 공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 것인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 공정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맨손으로 일어서야 했던 전후 복구기에 소련제 트랙터 두 대를 들여와 분해하고 역설계하여 자체의 힘으로 트랙터를 만들어냈던 바로 그 간고분투의 과정이었으며, 증기기관차도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낙후한 조건에서 부속품 180,000 개를 정교하게 조립해야 하는 전기기관차를 서른 다섯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2년만에 기어이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냈던 바로 그 자력갱생의 투쟁이었다.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 25년을 꿰뚫고 흐르는 것은, 1930년대 항일혁명기에 마구간 바닥에서 긁어낸 흙과 버드나무를 태운 재로 연길폭탄을 만들어 일제 침략자들과 혈전을 벌였던 항일유격대의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탄도미사일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무력수단이 아니라 반제자주위업을 실현하는 무력수단이므로 북(조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주체혁명의 무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체혁명의 무기'를 다른 나라의 힘에 의존하여 개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모순이다.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그러한 무기는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관철하여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마땅한 것이다.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과정에 나타난 기술개발의 독자성과 주체성, 그리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추진된 기술개발의 혁신성은 자기 나라의 고유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하여 힘쓰고 있는 다른 나라들, 이를테면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의 미사일 개발사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수한 현상이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에게는 바로 그러한 특수한 현상을 파악할 정보지표가 없었던 것이다.

북(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시점이 1984년 4월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김명철 소장과 버뮤디즈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97] 버뮤디즈는 북(조선)이 1984년에 독자개발에 성공한 최초의 탄도미사일을 '화성(火星) 5호'라고 불렀다.[98] 버뮤디즈에 따르면, 화성 5호를 북(조선)으로부터 수입해간 이란은 1988년에 52일 동안 계속되었던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그 미사일을 약 77 기 발사하여 이라크 도시들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역설계하여 만들어낸 북(조선) 최초의 탄도미사일 이름에 대해서 분석가들 사이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주장이 뒤얽혀있다. 어떤 사람은 북(조선) 최초의 탄도미사일은 '화성 1호'였으며, 그에 기초하여 나중에 더욱 개량된 '화성 5호'를 개발하였는데, 이 것을 미국은 '노동 1호'라고 부르고 있으며, '화성 6호'를 '대포동 1호'라고 부르고 있다.

북(조선)이 탄도미사일 대량생산에 필수적인 설비인 10,000톤 급 대형 프레스를 자체의 힘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던 때는 조선로동당 창건 40돐을 기념하였던 1985년 10월이었으며,[99] 역시 탄도미사일 대량생산에 필수적인 반도체를 대량생산하는 평양 반도체 공장이 세워진 때는 1987년 4월이었다.[100] 북(조선)은 미사일 탄도를 조정하고 유도전파를 수신, 해독하는데 필요한 컴퓨터장비를 개발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그 결과 핵탄두 등이 장착된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대형 컴퓨터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101] 북(조선)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제조공정이 대량생산체계로 접어든 때는 대략 1987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102] 북(조선)에서 대량생산된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할 지하기지를 각지에 건설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103] 1986년 초에 조선인민군에는 지대지 미사일 부대가 창설되었으며, 1988년에는 미사일 연대로, 1991년에는 미사일 여단으로 계속 확대·강화되어갔다.[104] 1987년 1월 28일 남(한국)의 국방장관은 북(조선)이 원산 북쪽 지역에서 미사일 시험발사를 실시했다고 발표했으며,[105] 바로 그 해 1987년은 미국이 중심이 된 서방 선진국 7개 나라가 제3세계의 미사일 개발을 억제하려고 이른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를 만들었던 해였다.

버뮤디즈는 북(조선)이 화성 6호를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7년이나 1988년이었으며, 1989년에 개발에 성공하여 1990년이나 1991년에 이르러 대량생산체계에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정찰위성이 북(조선)의 새로운 미사일을 포착한 때는 1990년 5월이었는데, 그 때 미국 정찰위성은 동해안의 도골 근처에 있는 발사대에 새로운 미사일이 발사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촬영했다. 영상자료를 분석한 결과, 그 미사일은 길이 15.1 미터, 지름 1.3 미터로 판명되었는데, 길이 11.5 미터, 지름 90 센티미터의 소련제 스커드 비(B)보다 크기 때문에 사거리가 500-600 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106] 버뮤디즈에 따르면, 이 미사일은 화성 6호로서 1990년 6월에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처음으로 시험발사했다고 한다.[107] 1991년 7월에는 강원도에 전진배치된 조선인민군 미사일 부대의 이동식 수직발사대에서 화성 6호의 두 번째 시험발사가 성공하였다.[108] 버뮤디즈는 북(조선)이 노동 1호의 시제품을 완성한 때가 1991년 초라고 주장하였다.[109] 국무부 대변인(당시) 제임스 루빈(James P. Rubin)은 언론설명회에서 "우리는 90년대 초에 북한이 대포동 1호라고 불리는 2단형 미사일의 개발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110] 버뮤디즈는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대포동 2호를 개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초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111]

북(조선)은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더욱 진척시켜 1993년 5월 29일과 30일에 마침내 다단형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다단형 탄도미사일 시험발사가 있기 얼마 전인 1993년 5월 3일 북(조선)은 미사일로 일본이나 역내의 다른 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으며, 같은 날 미국 국방장관(당시) 레스 애스핀(Les Aspin)과 일본 방위청 장관(당시) 나카야마 도시오(中山敏雄)는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에 관한 회담을 하고 있었다.[112] 김명철 소장은 북(조선) 군부관계자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북(조선)은 다단형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기 전에 미국에게 사전통고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북(조선)이 1993년 5월 29일과 30일에 시험발사한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500 킬로미터의 단거리 미사일 1 기, 그리고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중거리 미사일 2 기였다고 한다.[113]

그런데 이에 대해서 버뮤디즈는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버뮤디즈에 따르면, 북(조선)은 사거리 500 킬로미터의 단거리 미사일(화성 6호) 3 기와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준중거리 미사일(노동 1호) 1 기를 시험발사했다는 것이다.[114] 남(한국)의 언론이 남(한국) 정부의 소식통이 전한 말을 인용하여 보도한 것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이 정밀분석한 결과 북(조선)의 노동 1호 미사일은 애초에 알려진 것처럼 사거리 500 킬로미터의 단거리 미사일이 아니었고, 일본열도를 넘어 발사지점에서 1,300 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의 공해까지 날아간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115]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에서도 그 때 북(조선)이 시험발사한 노동 1호 미사일이 사거리 1,300 킬로미터의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이었다고 주장했다.[116] 다른 한편, 일본과 남(한국)에서 나온 주장은 너무 심하게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일본 방위청 자료는 1993년 5월말에 시험발사된 노동 1호 미사일의 사거리가 1,000 킬로미터라고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하였으며,[117] 남(한국) 정보기관은 그 미사일의 사거리가 500 킬로미터라고 더욱 과소평가하였다.[118]

여기서 일본과 남(한국)의 어처구니없는 판단착오는 아예 논외로 치더라도 문제가 하나 생긴다. 1993년의 다단형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와 관련하여 버뮤디즈와 김명철 소장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그 탄도미사일이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미사일(IRBM)이었다는 김명철 소장의 견해와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1단형 준중거리 미사일(MRBM)이었다는 버뮤디즈의 견해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김명철 소장이 말했던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중거리 미사일은 일본, 오키나와, 괌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미군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데 비해, 버뮤디즈가 말했던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준중거리 미사일은 타격범위는 일본열도에 국한된다. 더욱이 2단형 탄도미사일과 1단형 탄도미사일 사이에 놓여있는 기술수준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이처럼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두 주장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사실일까? 여기서 우리는 버뮤디즈의 주장에 의문점이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만일 버뮤디즈의 주장대로 북(조선)이 1993년에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1단형 준중거리 미사일밖에 개발할 수 없었다고 하면, 북(조선)이 그로부터 불과 다섯 해가 지난 뒤인 1998년에 2단형 중거리 미사일(IRBM)을 개발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갑자기 사거리 10,000 킬로미터가 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로 변환될 수 있는 3단형 우주발사체를 발사할 수 있었을까?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이 아무리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고 인정하더라도 불과 다섯 해 동안에 2단형 탄도미사일 수준을 뛰어넘어 갑자기 3단형 우주발사체를 개발할 수 있는 높은 수준에 올라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1993년 5월의 2단형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관한 버뮤디즈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이 자명해진다. 1993년 5월에 시험발사된 탄도미사일이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미사일이었는데도 버뮤디즈는 그 것이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이었다는 그릇된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가 1993년 5월에 시험발사된 탄도미사일이 1단형 준중거리 미사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던 주장은, 그 자신이 밝혔듯이 그 미사일이 북(조선)의 기술지원으로 만들어져 1998년 4월 6일에 시험발사에 성공한 파키스탄의 미사일인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1단형 가우리(Ghauri) 미사일[119]과 같은 성능의 미사일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자신의 추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추정은 빗나간 억측이었다. 북(조선)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1999년 12월 30일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김정일 총비서가 주재한 인민군 지휘관 회의에서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장비는 세계적으로 아직 몇몇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엄청난 자금이 요구되었다. 이 장비를 개발한 시기는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이르는 제3차 7개년 계획의 후반기 과업을 수행하던 때라서 한 푼의 자금도 쪼개 써야 할 상황이었으나 김정일 총비서가 직접 자금을 풀어주어 짧은 기간에 위력 있는 전투기술기재를 완성했다."[120]

이 내용으로 보면 북(조선)은 1993년에 "몇몇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수준은 우주강국 인도의 탄도미사일 개발수준보다 6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북(조선)이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뒤에 실전배치하였음을 확인하였던 때는 1993년 8월이었다.[121] 미국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이 탄도미사일 공격에 대한 지상요격방어체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략방위선제기구(Strategic Defense Initiative Organization)를 탄도미사일 방어기구(Ballistic Missile Defense Organization)라고 바꾼 것은 북(조선)이 1993년 5월말 2단형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다.[122] 그 무렵 영국 언론은 북(조선)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1993년 10월말 또는 11월초에 이란의 루트 사막에서 또 한 차례 시험발사할 것이라는 예측보도를 낸 바 있지만[123] 그러한 시험발사는 없었다. 북(조선)이 1993년에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는 사실은, 1993년에 조선인민군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던 김광진 총참모장(당시)이 수행원에게 "사거리 4,000 킬로미터의 탄도미사일 개발이 곧(fairly soon)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 증언에서도 확인된다.[124]

그런데 그 무렵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내놓았던 정보평가서들을 분석해보면, 북(조선)이 1993년 5월에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한 차례 시험발사한 뒤에 실전에 배치했는데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그 사실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는 "노동 미사일은 미국 정부가 파악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실전배치되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125] 미국 정보기관들의 무능을 꼬집었다.

김명철 소장에 따르면, 북(조선)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96년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126] 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8,000-10,000 킬로미터의 경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라고 추정된다. 북(조선)이 1996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김명철 소장의 지적은, 1993년의 2단형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와 1998년의 3단형 우주발사체(광명성 1호) 발사 사이에 놓여있는 5년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그러나 버뮤디즈는 이 5년의 공백기에 관련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남(한국) 국방부의 주장을 근거로 삼아, 북(조선)이 사거리 5,500 킬로미터가 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게 될 시점을 훨씬 뒤로 잡으면서 2000년이 될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1996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김명철 소장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북(조선)이 이미 1996년에 사거리 5,500 킬로미터가 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김명철 소장의 견해는 바로 그 무렵에 조선인민군이 암시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의해서 뒷받침을 받는다. 1996년 12월 24일 김정일 총비서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다섯돐을 경축하는 중앙보고대회에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는 경축보고를 통해 조선인민군은 지금 "군건설기의 최전성기를 펼쳐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인민군대는 적들의 임의의 불의의 침공도 제때에 타격하고 짓뭉개버릴 수 있는 강위력한 공격수단과 방어수단을 다 갖춘 무적필승의 전투대오로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127] 『로동신문』 1997년 1월 1일자 공동사설은 "만약 적들이 전쟁의 불을 지른다면 미제침략군부터 먼저 타격소멸하고 조선반도에서 전쟁의 근원을 송두리채 들어내고야 말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우리 혁명무력 건설의 최전성기"라고 기록했다.[128] 이러한 표현들은 북(조선)이 1996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앙정보국 국장 존 도이치는 북(조선)이 1996년 말까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게 될 것이라고 여전히 과소평가했다.[129] 1995년 말까지만 해도 중앙정보국은 2000년까지 북(조선)이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과소평가한 정보평가서를 여전히 연방의회에 제출하고 있었다.[130]

세상에 알려진 대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요구되는 것은 실로 엄청나다.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이른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길러내야 하며, 연구·실험설비와 제조·생산설비를 비롯한 방대한 설비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설비운영을 담당하는 숙련된 전문인력을 길러내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막대한 자금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각 나라의 실정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연간 약 3억-5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이를테면 우주강국인 인도의 경우를 보더라도 우주발사체 개발사업에 연간 12,000여 명의 연구인력과 3억 달러가 들어간다고 한다. 파키스탄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칸 연구소에는 2,000여 명의 과학자를 포함하여 약 7,000 명의 전문인력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막대한 연구인력, 설비, 자금보다도 더 중요한 것,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 것은 나라 안팎에 조성되는 온갖 난관과 역경을 뚫고 기어이 자체의 힘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내겠다는 국가지도자의 정치적 결단과 의지, 그리고 강인하고 현명한 영도력이다. 이 것이 없으면 아무리 연구인력, 자금, 기술력이 든든하게 준비되어 있어도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주발사체나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개발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고 다른 나라에서 만든 탄도미사일을 사들이고 있는 스페인, 아르헨티나,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의 선행경험이 그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131] 김정일 총비서는 1999년 1월 1일 당정간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적들은 우리가 인공지구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만 몇 억 달러가 들었을 것이라고 하는 데 그 것은 사실이다. 나는 우리 인민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켜내고 래일의 부강조국을 위해 자금을 그 부문으로 돌리는 것을 허락했다. 그 돈을 인민생활에 돌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고 말했다.[132] 김정일 총비서의 말대로, 북(조선)은 인민들이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하는 어려운 경제형편에 있었지만, 막대한 자금과 기술을 들여 자체의 힘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어야 했다. 만일 북(조선)의 지도자와 인민들에게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이 없었다면, 그들은 온갖 난관과 역경을 뚫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사업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주도한 과학자는 '과학의 천재'로 알려진 서상국 박사라고 한다.[133] 그와 함께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권동환 박사, 한해철 박사, 김행경 박사 등이 미사일 개발에 참여한 최고 수준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134] 이들은 자체의 기술력으로 3단형 로켓 추진체를 분리하고 점화하는 기술, 고체연료를 쓰는 로켓엔진, 탄두부가 초속 7.2 킬로미터로 재진입할 때 생겨나는 1,000-2,000 도의 높은 열에 견디는 특수금속, 목표를 식별하는 장치 등 세계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였다.[135]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 그리고 북(조선)이 실전배치를 끝낸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바로 이러한 최첨단 기술의 종합체였다. 현재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기술 가운데 일부는 독일에서 수입해갈 정도로 발전되어 있다고 한다.[136]

(5) 인공위성체를 지구궤도에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

1998년 8월 31일 북(조선)은 광명성 1호를 실은 익명의 우주발사체(anonymous space launch vehicle)를 우주공간을 향해 쏘아 올렸다. 이 것은 북(조선)이 사거리 10,000 킬로미터가 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임을 과시한 대사변이었다. 기묘한 우연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날 한(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가 남(한국)이 경수로 건설비용의 70 퍼센트를 부담하기로 결정했으며, 일본은 10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137]

북(조선)은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3단형 우주발사체를 자체의 힘으로 개발하였음을 과시하였으면서도 그 우주발사체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익명의 우주발사체로 남아있다. 버뮤디즈는 북(조선)이 쏘아 올린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대포동 1 우주발사체(Daepo Dong 1 space launch vehicle)'라고 부르고 있다. 서방세계의 분석가들은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제멋대로 대포동 미사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그 우주발사체가 과연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추측이 무성하다. 버뮤디즈에 따르면, 대포동 1호는 1,000-1,500 킬로그램의 탄두를 1,500-2,500 킬로미터까지 운반할 수 있고, 앞으로 등장하게 될 대포동 2호는 같은 무게의 탄두를 4,000-6,000 킬로미터까지 운반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매우 낮은 수준으로 평가했다.[138] 그는 북(조선)이 무게 100 킬로그램의 인공위성체를 실은 우주발사체를 탄도미사일로 변환할 경우, 무게 200 킬로그램의 탄두를 싣고 북(조선)으로부터 10,000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가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조선)의 대포동 1호 미사일은 소형탄두를 장착하는 경우 그 사거리가 5,280 킬로미터라고 추정했다.[139]

위와 같은 추정들은 들쭉날쭉 제멋대로 평가한 것이어서 별로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광명성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 모습을 관측한 러시아 위성관측센터의 한 관리는 "위성발사는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140] 일본 월간지 『세카이슈호(世界週報)』 1998년 11월호는 미국이 광명성 1호의 발사를 북(조선)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141]

우주발사체를 개발한 나라는 시험발사를 더 하지 않고서도 신속하게 우주발사체를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변환할 수 있으며,[142] 최근 러시아에서 진행된 것처럼 거꾸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우주발사체로 변환할 수도 있다.[143] 1995년에 나온 국가정보회의의 국가정보평가서도 "우주발사체의 추진장치를 생산하는 능력을 가진 나라는 바로 그 생산설비와 인력을 이용하여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들어가는 부품들을 거의 모두 만들어낼 수 있다. 핵무장의 야망을 가진 적대국이 추진하는 우주발사체 개발사업은 잠재적인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의 핵심지표가 된다."고 기술한 바 있다.[144] 그런 까닭에 광명성 1호의 발사 이후 미국 정보기관들은 우주발사체를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변환시키는 기술적 문제들에 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로버트 월폴에 따르면, 국가정보회의는 1998년 여름에(광명성 1호 발사 전후를 뜻함-옮긴이) "어떤 나라가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려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을 과시하는 방법들을 가정하면서 우주발사체를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변환하는 방법들을 검토하는 비공개 문건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1999년도 보고서에 반영될 것"이라고 하였다.[145]

지난 시기 여러 나라들이 보여준 경험적 사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과 우주발사체 개발이 밀접하게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를테면 1957년 10월에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를 우주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렸던 옛 소련은 2년 뒤인 1959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였다. 인도가 1994년 2월에 시험발사에 성공했던 사거리 2,5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애그니(Agni)의 제1단계 로켓 추진체는 인도가 만든 우주발사체였고, 브라질의 에스에스(SS) 1000, 이스라엘의 예리코(Jericho)2비(B), 이라크의 개량형 스커드 비(B) 등도 모두 우주발사체를 개발한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중거리 탄도미사일들이다.

현재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실어 나르는 우주발사체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인도, 이스라엘,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북(조선) 등 11 개 나라밖에 없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우주발사체 개발기술을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기술로 전환하여, 거기에 장착하는 핵탄두를 개발·보유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북(조선)밖에 없다. 미국의 정보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가능성을 있거나 개발사업을 추진할 의도가 있었던 나라는 브라질, 인도, 이탈리아, 이스라엘, 독일, 일본, 스웨덴이다.[146]

물론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우주강국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이 된다는 법은 없으며 예외도 있다. 이를테면 인도는 중량급 인공위성을 우주발사체에 실어 정지궤도에 올려놓는 우주강국[147]이면서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에서는 아직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1999년 4월 11일에 사거리 3,000 킬로미터의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애그니2를 시험발사한 수준에 있다. 인도의 탄도미사일 개발수준은 아직 3단형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중국을 영토분쟁을 벌여온 전통적인 숙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 두 인접국을 겨냥하여 구태여 사거리가 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급하게 개발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까닭에 인도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우주발사체의 개발에 국력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게다가 인도는 1994년에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그만두라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중지한 적이 있는 데,[148] 그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아서 지금도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서방세계의 분석가들과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개발한 고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배치하게 될 시기를 늦추어 잡고 있으며,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해도 사거리가 비교적 짧아 미국 본토의 서부지역까지 밖에 미치지 못하는 경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2000년까지 배치할 것이라는 '2000년 배치설'이 미국의 언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때는 1995년 9월이었다. 1995년 9월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조선)이 2000년까지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사거리를 미국 본토의 서부지역을 타격할 수 있도록 늘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149] 거의 같은 시점에서 남(한국) 정부의 한 관리는 러시아의 정보자료를 인용하여 북(조선)이 2000년까지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컴퓨터 모의실험을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사거리는 4,300-6,000 킬로미터로 나와있지만, 러시아의 정보자료에 따르면, 북(조선)이 관성유도장치, 탄두무게, 연료분사장치에 관련된 기술문제를 해결하는 경우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사거리는 9,600 킬로미터까지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50]

버뮤디즈는 2000년에 개발될 것으로 내다보았던 '대포동 2호'를 2단형 로켓 추진체라고 추정했고, 대포동 3호의 개발단계에 가서야 3단형 로켓 추진체가 될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그는 북(조선)이 1999년 말까지 대포동 1호 우주발사체를 최대 10기까지 생산하게 될 것이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의 원형을 1-2기 생산하게 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151] 그는 북(조선)이 대포동 2호를 개발하여 배치하는 데 총력을 집중하게 될 것으로 내다본 바 있다.[152] 그에 따르면, 대포동 2호는 700-1,000 킬로그램의 탄두를 장착하고 6,700 킬로미터를 날아가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인데, 탄두 무게를 좀 더 줄인다면 미국 본토의 모든 도시를 타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153]

버뮤디즈는 '대포동 미사일 개발사업'이 1999년 12월까지 진행되리라고 예측한 바 있는데, 결국 그 예측은 거의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그의 빗나간 예측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조선)은 제2의 인공위성인 광명성 2호를 실은 대포동 1호 우주발사체를 1998년 8월에 이어 두 번째로 시험발사할 것이다. 둘째, 대포동 1호 준중거리 미사일 또는 대포동 1호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처음으로 시험발사할 것이다. 셋째, 대포동 2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처음으로 시험발사할 것이다. 넷째, 인공위성 광명성 2호를 실은 대포동 2호 우주발사체를 시험발사할 것이다. 다섯째, 대포동 2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를 하지 않은 채 실전배치할 것이다.[154] 그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실전에서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최초 작전력(Initial Operational Capacity)은 이미 1998년에 완성됐다고 말했다.[155] 그러므로 시험발사를 하지 않고 곧바로 실전배치된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미국 공군의 국립항공정보센터(National Aeronautic Intelligence Center)가 10월 19일에 발표한 정보보고서를 검토한 미국 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북(조선)이 광명성 2호에 해당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고 있는데, 대포동 2호에 대한 북(조선)의 신뢰도는 시험발사를 하지 않고서도 배치할 만큼 높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156]

비록 버뮤디즈의 예측은 거의 모두 빗나갔지만, 우리는 그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작전력이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1999년 12월까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를 하지 않은 채 실전배치하였다고 지적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버뮤디즈는 1999년 10월 27일 미국 연방의회 청문회의 증언에서 북(조선)의 미사일 보유현황에 관하여 말하면서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대포동 2호)을 1-5 기, 중거리 미사일(대포동 1호)을 5-10 기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157] 그러나 버뮤디즈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북(조선)이 이미 사거리 10,000 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중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그의 표현을 빌리면 대포동 3호)의 개발을 끝냈다는 사실이다. 1999년 7월에 나온 미국의 한 전문지는 북(조선)이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약 15,000 킬로미터의 대포동 3호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였지만,[158] 2001년 현재 그 개발은 이미 완료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1996년 5월까지만 해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대포동 2호 개발사업에 관한 자기들의 정보분석이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북(조선)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159] 대포동 2호는 명백히 대륙간 탄도미사일인데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그 미사일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중거리 미사일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외부에 내돌렸던 이러한 정보자료들과 자기들이 내부에서 분석하고 있었던 정보자료들은 서로 달랐다. 우리는 바로 그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94년 2월 미국의 정찰위성은 평양 산음동에 있는 미사일 연구개발단지에서 새로운 미사일의 모의실험이 진행되었음을 포착하였는데, 이 모의실험에 등장한 새로운 미사일은 2단형 탄도미사일로, 사거리 3,500 킬로미터의 대포동 2호(중거리 미사일)였다는 것이다.[160] 중앙정보국 국장 제임스 울시는 1995년 1월 10일 연방상원 정보특별위원회의 청문회에 나가서 "우리는 1단형 미사일인 스커드 시대에서 수천 킬로미터의 사거리를 확보한 대포동 미사일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미사일은 아직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아니지만 그 미래는 분명하다."고 말했다.[161] 이처럼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1990년대 중반부터 은밀히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왜곡·축소한 정보자료를 외부에 내돌리며 세상을 기만하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는 상대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반면, 인공위성 발사는 상대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런데 북(조선)은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끝낸 조건에 있었는데도,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지 않고 왜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은 인공위성을 발사하였을까? 쉬운 방법이 있는 데도 굳이 어려운 방법을 택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명은 세 갈래에서 나올 수 있다.

첫째, 북(조선)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경우, 동해와 일본열도 상공을 날아가서 태평양의 공해를 탄착점으로 하는 방향, 즉 동쪽을 발사방향으로 정할 수밖에 없다. 서쪽으로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대륙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영토를 탄착점으로 삼을 수는 없다. 태평양의 공해를 탄착점으로 하는 경우에 일본열도 상공을 지나가야 한다. 만일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여 그 것이 일본열도 상공을 지나갔다면 일본은 더욱 미친 듯이 반발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북(조선)은 인공위성 발사라는 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둘째, 북(조선)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함으로써 그 것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유사실을 미국에게만 슬쩍 알려주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인공위성을 실어 나르는 3단형 우주발사체를 만드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미국에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 것이 근본목적이었다. 북(조선)이 그러한 기술력을 미국에게 보여줄 경우, 미국은 일본이 북(조선)의 기술력에 의해서 자극을 받지 않도록 우주발사체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일본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광명성 1호가 발사된 뒤에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 사실은 일체 말하지 않은 채, 북(조선)이 우주발사체를 발사했지만 지구궤도에 올라서기 직전에 추락하였다는 '실패설'을 내돌림으로써 충격과 경악 속에 휘말리며 미친 듯이 반발하던 일본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셋째, 북(조선)은 우주발사체 개발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인공위성을 미국이나 제3국이 대신 발사하라고 요구하는 보상문제를 미국에게 제기해야 했다. 만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더라면 그러한 보상을 요구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경우 북(조선)은 우주발사체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절약하면서도 인공위성체를 개발하는 사업은 계속 추진할 수 있는 실리를 얻게 된다. 강성대국 건설을 국가적 목표로 내세운 북(조선)에게 있어서 인공위성 개발사업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조선)이 이미 개발을 끝내고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지 않고 인공위성을 탑재한 우주발사체를 만들어 시험발사한 것은 북(조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성능에 관하여 지금까지 이 글에서 다루었던 여러 가지 분석과 평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북(조선)은 처음부터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사정권 안에 두려는 목적을 세워놓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으므로 2001년 현재 북(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1,000 킬로그램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12,000-13,000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는 성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에 처음으로 경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던 북(조선)은 지난 5년 동안 그 성능을 계속 개량하여 지금은 중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은 지금 그러한 중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많이 보유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약 3-4 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6) 북(조선)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대한 미국의 대응

북(조선)이 전략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미국이 나타냈던 반응은 시기적으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90년대 초에 미국이 나타낸 반응은 북(조선)이 노동 1호 미사일을 제3세계의 반미국가들에게 판매하는 문제에 대하여 집중되었다. 미사일 수출국으로 부상한 북(조선)과 미사일 수입국인 이란, 시리아, 리비아 같은 반미국가들이 미사일 수출입 문제로 연계됨으로써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사일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당시 미국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였다. 그 무렵 중앙정보국 국장 제임스 울시는 연방의회 청문회의 증언에서 북(조선)은 노동 1호 미사일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인 일본을, 이란은 미국의 중동지역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리비아는 지중해 지역의 동맹국들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62] 1992년 3월 13일 미국 국무부 정치군사문제 담당 차관보(당시) 리처드 클락(Richard Clark)은 연방의회에서 "지금 북(조선)은 제3세계에 대한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한계선을 넘어서 완성된 미사일 체계를 팔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한 바 있다.[163] 북(조선)의 미사일을 수입해 가는 나라들이 주로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는 아랍나라들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북(조선)의 미사일 수출문제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1990년대 초에 있었던 특이한 현상이었다.[164] 이스라엘이 독자적인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동기는 바로 북(조선)의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아랍나라들에게 대응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1994년에 이르러 워싱턴에서는 북(조선)의 다단형 미사일에 관한 정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엇갈린 견해가 나오고 있었다. 첫째 견해는, 북(조선)이 다단형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미사일의 개발이 완성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며, 개발사업의 성공여부도 미지수라고 주장하는 '낙관론'이다.[165] 둘째 견해는, 북(조선)이 중거리 탄도미사일 대포동 1호와 2호를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비관론'이다.[166]

미국 국방부의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당시) 조셉 나이(Joseph Nye)는 1994년 12월의 언론대담에서 미국은 앞으로 노동 미사일,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하는 사업을 제한하는 문제에 관하여 북(조선)과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167] 핵문제에 관한 조·미 협상에 미국 대표로 나왔던 로버트 갈루치(Robert L. Gallucci)는 1995년 6월 미국은 북(조선) 탄도미사일의 생산과 수출을 중지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168] 북(조선)이 경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던 1996년은 조·미 관계에서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1996년 1월 15일 미국은 북(조선)에게 포괄적 정치협상을 제의하였는데,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차관보(당시) 토머스 허바드(Thomas C. Hubbard)가 북(조선)과 미사일 확산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접촉을 시작하여 처음으로 베를린에서 조·미 미사일 협상이 열린 때는 1996년 4월 21일이었다. 최초의 조·미 미사일 협상이 1996년에 시작되었던 원인은, 그 미사일 협상에서 미국 대표로 나왔던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보 로버트 아인혼이 1997년 10월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밝혔던 대로, 북(조선)은 1996년 10월에 노동 미사일 또는 다단형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려고 준비하였다가 그만두었으므로[169] 미국은 북(조선)이 대포동 1호를 언제든지 시험발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였던 클린턴 행정부는 결국 종래의 대결 일변도 대북정책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이면서 이른바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1996년 2월에 클린턴이 발표했던 '관여와 확장의 국가안보전략(A National Security Strategy for Engagement and Enlargement)'에 제시되었던 전략구도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의 관여정책이 시동을 걸었던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관여정책을 발표했던 1996년 2월에 북(조선)은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해제하라고 요구하면서, 관여와 확장의 전략은 말만 바꾼 제국주의적 책동이라고 강하게 반대하였다. 북(조선)과 미국 사이의 팽팽한 대치상태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1996년과 1997년은 북(조선)의 '고난의 행군'이 막바지에 오르고 있었던 매우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미국의 전략가들은 북(조선)의 '조기 붕괴설'을 떠들면서 50년 묵은 봉쇄의 빗장을 여전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런데 1998년 8월 31일에 있었던 광명성 1호의 성공적 발사는 그러한 대치상태를 하루아침에 뒤바꾸어놓았다. 광명성 1호의 발사가 "우리의 만족감을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실토했던 미국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한(조선)반도문제 특별연구반 공동의장 제임스 레이니(James T. Laney)의 말[170]이나 북(조선)의 인공위성 개발사업은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수준이 미국 정보기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극도로 염려되는 기술적 경이(technical surprise)가 아닐 수 없다."고 실토했던 미국 연방하원의원 커트 웰던(Curt Weldon)의 말[171]은 당시 충격과 혼란에 빠진 워싱턴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의회조사국 연구관 래리 닉쉬는 그 당시 분위기를 "미사일 충격(missile shock)"이라고 묘사했다.[172] 미국 국가정보회의는 1999년 9월 9일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1998년 8월에 일본열도를 넘어 날아간 북(조선)의 3단형 로켓 추진체는 미국 정보기관들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었다고 시인했다.[173]

그렇다면 광명성 1호를 쏘아 올린 우주발사체에 관하여 미국의 분석가들과 정보기관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으며, 클린턴 행정부는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버뮤디즈는 그 우주발사체의 탄두부 또는 탄두부에서 떨어져나간 파편이 발사지점으로부터 약 4,000 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 공해상에 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그 우주발사체에는 100 킬로그램의 관측기기가 실려있었는데[174], 우주발사체의 총길이는 28.1 미터이며, 첫째 단계 로켓 추진체는 길이가 16.3 미터에 지름이 1.33 미터이고, 둘째 단계 로켓 추진체는 길이가 8.3 미터에 지름이 0.883 미터이며, 셋째 단계 로켓 추진체는 길이가 3.5 미터에 지름이 0.884 미터이며, 우주발사체 전체 무게는 19.9 톤이었다고 추산했다.[175]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총길이가 28.1 미터라는 것은, 1970년 4월 24일 중국이 처음으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뚱팡홍(東方紅) 1호'를 지구궤도에 실어 나른 우주발사체 '창쩡(長征) 1호'의 총길이가 29.5 미터였던 것과 비슷하다. 일본이 1997년 2월 12일에 발사했던 우주발사체 '엠(M)5 1호'는 3단형 고체연료 로켓 추진체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총길이 30.7 미터, 지름 2.5 미터, 무게 130 톤이었다.[176]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나 중국의 창쩡 1호는 모두 3단형 로켓 추진체로 된 우주발사체인데, 1단계와 2단계는 액체연료를, 3단계는 고체연료를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177]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광명성 1호 발사를 준비하는데 걸린 기간은 25일이었다. 북(조선)에서는 "우리의 위성 발사자들은 1998년 8월 7일에 무수단리의 발사장에 도착해서 기재 전개를 끝내고 부분 연동시험과 종합 연동시험을 한 데 기초해서 8월 31일 12시 07분에 발사했다."고 밝힌 바 있다.[178] 그 25일 동안 미국이 정찰위성을 동원하여 발사준비 작업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촬영하였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처음에 미국은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사거리 1,600 킬로미터의 2단형 탄도미사일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가 나중에 사거리 3,800-5,900 킬로미터의 3단형 로켓 추진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것은 거짓말이다. 중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씨에스에스(CSS)4는 길이가 11.6 미터에 사거리가 12,800 킬로미터라고 하는데,[179] 그에 비해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길이는 중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길이보다 두 배가 조금 넘는다. 북(조선)이 1999년 9월 5일 조선중앙텔레비전을 통해 공개했던 우주발사체의 사진을 보면 그 길이가 매우 길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남(한국)의 정부당국자는 탄도미사일은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머리부분이 뾰족한 형태로 되어 있으나 무수단리의 발사대에 세워진 발사체의 위성사진에 나타난 것은 머리부분이 뭉툭한 것으로 보아서 인공위성이 탑재된 우주발사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180] 중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보다 길이가 두 배가 더 길고, 머리부분이 뭉툭한 그 발사체가 무수단리의 발사대에 서있는 것을 워싱턴에 있는 국가정찰국(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이 여러 날 동안 정찰위성을 통해서 촬영하여 시시각각 분석해오고 있었는데, 그 것을 어떻게 2단형 탄도미사일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을까?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미국은 나중에 가서 그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8월 7일 이후 무수단리의 발사장에 세워졌던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3단형 로켓 추진체였음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에는 3단형 로켓 추진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떠들면서 전 세계를 상대로 기만선전을 내돌렸던 것이다.

만일 미국이 8월 7일 이후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3단형 로켓 추진체를 쏘아 올리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솔직하게 그대로 발표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일본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광명성 1호의 발사를 지켜보려 했을 것이다. 일본은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시설을 악착스럽게 동원하여 광명성 1호가 지구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포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이 성공사실을 파악했더라면 미국은 실패설을 조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발사장에 세워지는 광경을 정찰위성을 통해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샅샅이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처음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거짓말을 댈놀놓으면서 사실을 왜곡하였다.

만일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일본 또는 다른 나라들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미국이 실패설을 조작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만일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실패설이 통하지 않았다면, 그 것은 국제사회가 광명성 1호의 성공을 인정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 것은 북(조선)이 "미국 본토와 세계의 임의의 지점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보유능력을 보여준 것"으로써[181] 북(조선)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6대 군사강국으로 공인되는 엄청난 사변이 되는 것이다. 이 것은 북(조선)을 주요한 대상으로 삼아왔던 미국의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정책이 일거에 무너지는 파국을 몰고 올 것이다. 게다가 '미사일 충격'에 휩싸인 일본은 전략미사일과 군사정찰위성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미국의 '핵우산(nuclear umbrella)'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는 제2의 파국을 몰고 올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태는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정책과 미·일 동맹체제가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최악의 정치·군사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광명성 1호를 실은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세워지는 광경을 정찰위성을 통해 목격하고 있었던 미국은 바로 그러한 파국과 재앙이 자기 눈앞에 차츰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공포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발사된 이후에 내놓을 여러 가지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싸매야 했을 것이다.

1998년 8월 31일 낮 12시 7분 광명성 1호가 발사된 직후, 미국은 그 것이 인공위성을 실어 나른 우주발사체라는 사실을 즉각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은 처음에 그 로켓 추진체가 2단형 로켓 추진체라고 착각했다가 훨씬 강한 로켓 추진체였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 3단형 로켓 추진체임을 알게 되었고, 제3단계 로켓 추진체는 고체연료를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처음에 그 로켓 추진체가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발사체인지 장거리 탄도미사일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가운데 갈팡질팡하였다.[182] 미국이 그 우주발사체의 성능을 즉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갈팡질팡하였다는 언론보도는 미국의 정부기관들이 조작했던 왜곡된 정보에 의하여 발생한 오보다. 미국은 그 우주발사체의 성능을 파악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우주발사체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즉각 결정하지 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갈팡질팡하고 있던 미국이 광명성 1호의 발사가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발사한 것이 아니라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린 것이었다고 시인한 때는 1998년 9월 15일이었다. 북(조선)이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발사했음을 공식 발표한 때가 9월 4일이었으므로, 미국은 인공위성을 발사한 그 날로부터는 무려 15일이 지난 뒤에야, 그리고 북(조선)의 공식발표로부터는 10여 일이 지난 뒤에야 인공위성 발사 사실을 시인한 것이다. 남(한국) 정부관계자가 미국으로부터 광명성 1호에 관한 분석작업을 끝마쳤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힌 때는 9월 7일이었으므로,[183] 미국은 분석작업을 끝마친 뒤에도 무려 한 주간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주장했던 대로, 발사 순간부터 로켓 추진체의 비행궤적을 추적했던 정찰위성이 보내온 자료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고 판독실수로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미국은 정찰위성과 적외선 감시위성 레이더 등을 동원하여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비행한 궤적과 연소가 끝난 로켓 추진체가 떨어진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함으로써 우주발사체의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184] 판독실수나 혼동은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을 지체한 현상은 판독과정이 시간을 요구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이 시간을 요구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정보자료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떤 내용으로 공개하느냐 하는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했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정치적 판단과정에서 지체현상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군부와 정보기관, 그리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5일 뒤에야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린 것이었음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3단형으로 된 우주발사체는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놓기 전까지 비행하면서 연소가 끝난 로켓 추진체들을 1-2분의 짧은 시차를 두어가며 차례로 지구 위에 떨어뜨린다. 미국 정보기관에 따르면,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제1단계 로켓 추진체는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약 300 킬로미터 떨어진 동해의 공해에 떨어졌고, 제2단계 로켓 추진체는 1,320 킬로미터를 날아가 일본의 항구도시 하치노에에서 약 330 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한다. 일본 엔에이취케이(NHK) 방송이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 우주발사체의 제3단계 로켓 추진체는 발사지점으로부터 약 6,000 킬로미터 떨어진 알래스카 부근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한다.[185] 이 것이 광명성 1호가 12시 7분에 발사되고 나서 지구궤도에 진입한 4분 53초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다. 미국 국방부 대변인 케네스 베이컨은 고체연료를 사용한 3단형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는 3,875 킬로미터에서 5,986 킬로미터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186]

그런데 그러한 미국의 발표내용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난다. 미국은 연소가 끝난 제3단계 로켓 추진체가 태평양 어디에 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다. 1998년 9월 17일 미국 국방부 대변인 케네스 베이컨은 광명성 1호를 실어 나른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파편이 알래스카 부근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전한 일본 엔에이취케이 방송의 보도에 대해서 "그 같은 보도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였다.[187] 그러나 미국은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제3단계 로켓 추진체가 구체적으로 태평양 어디에 떨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밝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우주사령부(United States Space Command, USSC)는 전 세계에 배치된 지상 감지장치와 미사일 경보레이더, 50여 개의 정찰위성을 활용하여 소프트공만한 로켓의 파편이나 우주비행사들이 버린 우주장갑까지도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188] 그렇다면 길이가 무려 3.5 미터에 지름이 0.884 미터나 되는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3단계 로켓 추진체가 연소를 끝낸 뒤에 떨어진 지점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소리다. 미국 국방부 대변인 케네스 베이컨도 기자회견에서 북(조선)의 인공위성체가 너무 작아서 포착하기에 어렵지 않느냐는 물음이 나오자 "우주사령부는 그보다 훨씬 작은 물체도 탐지해낼 수 있기 때문에 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않았던가.[189] 적도 상공 35,862 킬로미터 정지궤도에 떠서 적외선 탐지기로 전 세계의 탄도미사일 발사상황을 감시하고 있는 미국의 조기경보(Defense Support Program)위성은 북(조선)의 우주발사체가 발사되는 순간부터 전 과정을 포착하였다.[190] 미국의 정찰위성은 인공위성항법장치가 장착되어 있는 정찰위성(Global Positioning Satellite)인데 이 것은 우주발사체의 전파를 탐지할 수 있으므로 3단계 로켓 추진체의 비행궤적을 정확히 탐지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연소가 끝난 제3단계 로켓 추진체가 떨어진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심한 거짓말은 그 다음에 나왔다. 미국은 인공위성 발사사실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하면서도 '실패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1998년 9월 15일 국무부 대변인(당시) 제임스 루빈은 북(조선)의 인공위성 발사는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그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발사체를 추적하는 데 실패했던 까닭은 그 우주발사체가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191] 국무부의 발표와 때를 맞추어 미국 정보기관들은 한 목소리로 북(조선)의 인공위성과 우주발사체가 지구궤도에 올라서기 몇 초 전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고 하면서, 그 파편은 북(조선)으로부터 거의 4,000 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정보기관은 제3단계 로켓 추진체가 탄두부에 실려있던 인공위성체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패한 경로와 원인을 정확히 밝히지 못하였다. 실제로는 미국이 제3단계 로켓 추진체가 연소를 끝내고 나서 태평양 어디에 추락했는지를 파악했으면서도 외부에는 일체 밝히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로버트 월폴은 북(조선)이 광명성 1호의 발사를 발표한 직후인 1998년 9월 17일에 있었던 강연에서 "우리는 그 것(제3단계 로켓 추진체를 뜻함-옮긴이)이 실패한 이유와 그 것의 성능에 대해서 더 많은 내용을 알아보려고 하고 있으며 더 많은 분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넘어갔다.[192] 그 발언이 있은 뒤로 지금까지 미국의 어느 정보자료도 광명성 1호의 실패원인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만일 미국이 광명성 1호의 성공을 시인하면 그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음을 시인하는 것이 되며 동시에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자동적으로 파기될 것이며, 그 이후에는 대파국(catastrophe)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서는 광명성 1호의 '실패설'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기관들이 조작된 실패설을 내놓기 이전에 정반대의 정보가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중앙방송에서 광명성 1호 발사사실을 공표하기 이전인 1998년 9월 3일 일본의 항공공학 전문가 나카도미 노부오(中富信夫)는 "미국 우주연구기관에 문의한 결과 미확인 소위성 비행을 1일부터 2일 사이에 한 차례 확인한 사실이 있었던 점을 시인했다."고 밝혔다.[193] 여기서 그가 말한 미국의 우주연구기관이란 미국의 국립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국방부 소속인 북미방공사령부(NORAD)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광명성 1호가 실패하였다고 주장하였던 반면, 국립항공우주국은 처음에 광명성 1호가 지구궤도를 따라 돌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1998년 9월 10일 연방상원 대외관계위원회 동아·태 소위원회 위원장 크레이그 토머스(Craig Thomas)는 북(조선)에 관한 청문회에서 국립항공우주국의 판단을 인용하면서 광명성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지구궤도를 돌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불확실했지만, 국립항공우주국은 북한이 비록 제대로 기능은 못하고 있지만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194] 그 때 미국의 정부기관들이 광명성 1호가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가 아니면 지구궤도에 올라서지 못하고 떨어졌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상반되게 분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국방부 대변인 케네스 베이컨의 말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는 1998년 9월 17일에 있었던 언론설명회에서 "북한이 발사한 로켓의 3단계 추진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위성의 대기권 재진입이나 파편이 해상에 떨어졌는지 등에 관해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195]

익명의 우주발사체의 제3단계 추진체가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과 러시아의 첨단설비밖에 없다. 일본의 우주개발사업단(NASDA)과 문부성 우주과학연구소는 자기들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을 관제하고는 있으나 다른 나라의 인공위성을 추적할 수 있는 첨단 기술력은 없고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다.[196] 그렇지만 북(조선)은 발사장 위치와 발사각도, 분리된 로켓 추진체들의 낙하지점, 광명성 1호의 타원궤도를 발표하였으므로 그 것을 추적자료로 삼아서 컴퓨터 모의실험(simulation)을 실시하면 광명성 1호의 실제궤도를 찾아낼 수 있다. 예컨대 남(한국)의 과학기술부에 따르면,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오는 3월 초순으로 예정된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Mir)의 추락에 대비하여 러시아 글라프코스모스 항공우주국과 미국 국립항공우주국으로부터 미르의 위치좌표를 제공받아 컴퓨터 모의실험으로 추락궤도를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197] 광명성 1호에 관하여 북(조선)이 구체적인 자료를 공개했으므로 인공위성관측장비를 갖추고 있는 나라들이 광명성 1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한국)의 과학기술연구원 인공위성센터와 한국항공우주연구소에서도 컴퓨터 모의실험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의 인공위성센터와 항공우주연구소는 광명성 1호에 대하여 컴퓨터 모의실험을 통하여 자체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러나 분석결과에 관해서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관련 연구원들에게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에 있었다.[19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의 정부기관들은 광명성 1호가 실패했다고 주장했던 반면, 러시아는 그 것이 성공하였음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광명성 1호가 발사되기 넉 달 전인 1998년 4월 세계 각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상황을 탐지할 수 있는 인공위성 '코스모스(Cosmos)2351'[199]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았던 러시아는 이 인공위성체계를 통해 광명성 1호가 지구궤도에 올라서는 결정적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이 1998년 9월 5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 군부 소속인 러시아 위성관측센터 대변인은 9월 4일 오후 "북한이 지난달 31일 북위 40.8도, 동경 129.7도에 위치한 무수단리에서 성공적으로 최초의 자국산 인공위성을 발사했다."고 밝혔고, 이튿날에도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면서 북(조선)의 인공위성은 "지구로부터 제일 가까운 거리는 218.82 킬로미터, 제일 먼 거리 6,987.2 킬로미터의 타원형 궤도를 따라 돌고 있으며 주기는 165분 6초인데, 그 위성은 위성목록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고 말했다."고 하였다.[200]

그러나 러시아가 광명성 1호의 존재를 인정한 때로부터 사흘 뒤에 나온 미국의 발표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미국 정부기관들은 1998년 9월 8일 북(조선)의 인공위성에 관련하여 "아직까지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 어떤 물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는 언론설명회에서 "미국은 현 시점에서 소형 인공위성을 발사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확인할 수 없다."느니, 또는 "미국 정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느니 하면서 판단을 유보한다는 모호한 발언만 되풀이했다.[201]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인 9월 10일 미국 정부는 국립항공우주국(NASA), 국가안전국(NSA) 등 관계기관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북(조선)의 인공위성 발사에 관한 자료분석 결과를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202] 바로 이 회의에서 미국 정부의 관계기관 대표자들은 광명성 1호에 관한 정보를 조작한 실패설을 내놓아 세상을 기만하기로 공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회의 이후에는 미국의 일부 정부기관들이 북(조선)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였다고 인정했던 초기의 발표내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대신에 북(조선)이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나 실패했다는 실패설이 미국 정부의 공식 견해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이 광명성 1호에 관하여 조작된 실패설을 공식 견해로 내놓자, 러시아도 광명성 1호의 성공사실을 인정했던 발표를 뒤집어 '우리는 모른다'는 식의 엉뚱한 태도로 돌아섰다. 1998년 9월 15일 러시아의 글라프코스모스 항공우주국 수석전문가 겐냐디 크로모프는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서 충분한 감시체제를 갖고 있는 러시아가 현재 북(조선)의 인공위성 발사 여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203] 세계 여러 나라가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경우 곧 그 성패여부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유독 북(조선)이 발사한 광명성 1호에 관해서는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상반된 견해와 판단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 까닭은 광명성 1호의 존재가 단순히 과학·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매우 민감한 정치·군사적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광명성 1호의 존재를 확인해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두 나라 가운데 미국은 실패설을 주장하면서 세계를 기만하였고, 러시아는 모르쇠로 돌아서면서 사람들을 혼동시켰다. 그 것은 광명성 1호의 성공이 던져주는 정치·군사적 파장이 엄청날 것임을 알고 이를 우려한 강대국들이 연출한 우스꽝스러운 촌극이었다.

미국의 주장대로 만일 광명성 1호가 지구궤도에 올라서지 못하고 실패했다면 북(조선)은 마땅히 그에 대한 후속대책을 강구해야 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든지 인공위성을 발사할 때는 1차 발사에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후속발사를 준비해놓는다. 남(한국)의 언론은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보도에서 북(조선)은 8월 31일의 발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9월 5일에 2차 발사를 시도하려 했고, 만약 2차 발사도 실패하는 경우에는 9월 9일에는 3차 발사를 준비했다고 전했다.[204] 그러나 북(조선)은 인공위성을 8월 31일에 단 한 차례밖에 쏘아 올리지 않았다. 이 것은 8월 31일의 인공위성 발사가 실패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아서도, 광명성 1호 발사가 실패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거짓임이 드러난다.

미국이 아무리 실패설을 주장하면서 세상을 속이려 해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광명성 1호의 진실을 감추어보려는 미국인들의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무색하게 하면서 광명성 1호는 지구궤도를 따라 돌고있었다. 북(조선)의 발표에 따르면, 광명성 1호는 지구궤도를 돌면서 주파수 27 메가헬츠(MHZ)로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 그리고 '주체조선'이라는 모르스부호의 전파를 9일 동안 지구를 향해 발신하였다.[205] 인공위성을 관측하는 인공천체관측사진망원경, 인공위성추적사진기, 전파망원경 등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는 북(조선)의 국가과학원 평양천문대[206]에서는 지구 상공 저 멀리 거대한 타원형 궤도를 유유히 돌고 있는 광명성 1호를 관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로동신문』 1998년 10월 6일자는 10월 3일 새벽 광명성 1호를 육안으로 관찰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였고, 당창건 기념탑 앞마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광명성 1호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환성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7) 조·미 사이에서 벌어진 힘겨루기와 미국 국가안보회의의 정치적 패배

1998년 9월 25일 북(조선)은 "우리의 인공지구위성 발사가 군사적 목적에 이용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전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적대세력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했으며, 1999년 7월 18일에는 "백 번 천 번 인공지구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으로 강성대국 건설의 장엄한 포성을 계속 울리려는 것이 우리의 의지"라고 하면서 미국을 위협했다.[207] 북(조선)은 유엔총회에서도 미국을 위협하면서 압박외교를 계속하였다. 1999년 9월 27일 백남순 외무상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우리가 위성을 쏴 올리는 것은 유엔이 인정하는 동등한 우주 리용권리의 행사"라고 지적했다.[208]

백남순 외무상의 말대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은 모든 주권국가가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다. 다른 지역은 그만두고 아시아의 인공위성 판도를 살펴보면, 일본은 1년에 두 차례 꼴로, 인도는 2년에 한 차례 꼴로 각각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있으며, 남(한국)은 1992년 이후 1년에 한 차례 꼴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도 아무도 그 것을 문제로 삼을 수 없다. 자기들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수많은 인공위성을 발사해오면서도 남의 나라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공들여 만들어낸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을 두고 괜히 트집을 잡거나 방해·저지하려는 짓은 남의 나라 주권을 짓밟는 제국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놓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한 바로 그 다음날인 9월 16일 북(조선)과 미사일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는 발빠른 대응으로 나왔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미국은 무엇에 붸기고 있는 듯 여유가 없이 매우 다급하고 초조한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한 대응은 미국이 주장한 광명성 1호의 실패설과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미국의 주장대로 만일 그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실패했다면 미국이 그토록 다급하고 초조한 행동을 보여야 하는 아무런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급하고 초조해지기만 하는 미국,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여유를 가지고 대미 압박외교를 밀고 나가던 북(조선)이 '미사일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조·미 정치협상은 1998년 10월 1일에 열렸다. 익명의 우주발사체가 굉음을 내며 우주공간으로 솟아오른지 꼭 한 달만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였다. 그 협상자리에는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 아인혼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이 나왔다. 그런데 아인혼이 북(조선) 대표단과 협상자리에 마주 앉아있던 그 시각,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은 1998년 8월 31일에 있었던 대포동 1호 발사는 "미국이 크게 우려하는 문제(a matter of deep concern to the United States)"라고 말하면서 북(조선)이 만일 그러한 시험발사를 더 추진하거나 장거리 미사일을 수출한다면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협박성 발언을 하였다.[209] 이 것은 조·미 미사일 협상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이며 난항을 겪을 것임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조·미 미사일 협상은 미국의 다급한 요청으로 열리기는 했지만 그 한 차례의 협상에서 어떤 해결점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 협상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장 심한 자극을 받았던 것은 아무래도 미국 군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맞불작전'으로 나왔다. 그들은 1998년 11월 19일 『워싱턴타임스』를 통해 다섯 단계 전쟁계획인 이른바 '5027 작전계획(Operation Plan 5027)'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 전쟁계획은 1998년 10월 9일 주한미군사령부의 작전 부참모장 레이먼드 아이어스가 주한미국공보원이 언론인 13명을 초청한 자리에 나타나서 설명한 것이었다.[210] 그 때 미국 군부는 그러한 전쟁계획을 공개하는 것으로 북(조선)을 위협하는 맞불작전을 전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것은 오산이었다. 전쟁계획을 발표하는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 압박외교를 멈출 그런 나약한 북(조선)이 아니었다. 1998년도 저물어가던 무렵, 북(조선)은 힘겨루기를 계속하려는 미국을 제압하기 위하여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광명성 2호 발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1998년 12월 9일 미국은 정보자료에 근거하여 대포동 미사일 부품들이 보관장소로부터 발사장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하면서, 북(조선)이 12월 안에 대포동 미사일을 두 번째로 시험발사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211] 여기서 미국이 제멋대로 부르고 있는 두 번째의 대포동 미사일이란 인공위성 광명성 2호와 그 것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을 익명의 우주발사체를 뜻한다. 1998년 12월초에 북(조선)을 방문했던 유럽연합 의회대표단은 북(조선)이 제2의 인공위성을 발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212] 북(조선)도 1998년 12월 15일 『로동신문』 논평을 통해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북(조선)은 광명성 2호 발사준비와 더불어 미국을 더한층 위협하였다. 그 위협은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함으로써 대량보복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암시한 것이었다. 북(조선)은 "전쟁사에 일찍이 없는 섬멸적 보복타격을 가할 만단의 준비"[213]와 "우주적인 타격수단"[214]을 갖추고 있으며, "그 어떤 대적의 무력침공도 일격에 타격할 수 있는 강위력한 수단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것을 피할 자리는 이 행성 우에 없"으며,[215] "미제 호전광들이 핵폭탄을 떨구면 미국 땅덩어리도 불바다로 될 것"[216]이라는 살벌한 위협발언들을 워싱턴을 향해 맹렬히 퍼부었다. 1998년 12월 2일에 나온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은 미국에 대한 북(조선)의 압박외교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성명의 한 부분을 옮겨 적으면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작전계획이 있다. <외과수술 식> 타격이요, <선제타격>이요 하는 것들은 결코 미국만의 선택권이 아니며 그 타격방식도 결코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다. 우리 인민군대의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타격을 피할 자리가 이 행성 우에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줄임) 미제가 <대화>와 <협상>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정세를 전쟁접경으로 끌어가고 있는 오늘의 엄중한 사태에 대처하여 우리 혁명무력은 미제 침략군의 도전을 추호도 용서치 않고 섬멸적인 타격으로 대답할 것이라는 것을 주체조선의 존엄을 걸고 엄숙히 선언한다."[217]

거대한 공룡과 같은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낸 뒤로 그처럼 살벌하게 위협한 나라는 없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수많이 쌓아놓고 있는 군사강국 러시아나 중국도 미국을 그처럼 살벌하게 위협하지 못한다.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라크, 유고, 리비아, 시리아, 쿠바 같은 나라들은 언제나 미국으로부터 위협을 받기만 하였을 뿐 미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북(조선)은 정치·군사적으로 미국을 위협하면서 압박외교를 전개하는 유일무이한 나라다.

북(조선)이 광명성 2호를 곧 발사하려는 압박외교에 당황망조한 미국은 북(조선)에게 그 발사를 재고(reconsider)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매우 다급해진 미국이 북(조선)에게 재고를 요청했다는 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준 것은 중앙정보국이었다.[218] 그런데 미국은 광명성 2호의 발사를 재고해달라고 요청하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북(조선)에 계속하여 맞서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아마도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알량한 자존심이 동방의 사회주의 나라에게 간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해가 바뀌어 1999년이 되었다.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미국을 계속 위협하였다. 1999년 2월 8일 조선중앙방송은 북(조선)은 미사일의 개발과 시험발사는 자국의 주권문제에 속한 것이므로 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219] 1999년 3월 2일 연방하원의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 벤저민 길먼은 "북한은 지난 40 년 동안 남한 뿐 아니라 3만7천 명의 주한미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미국 본토까지도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국무장관(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는 "북한은 미국의 거대한 위협"이라고 하였으며,[220] 연방상원의 민주당 원내총무 토머스 대쉴(Tomas Daschle)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목격한 이상, 직접적 위협이 없다는 논리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221] 연방하원의원들로 구성된 북(조선)자문단이 1999년 10월 29일에 발표했던 조사보고서는 "5년 전과 달리 오늘의 북(조선)은 고성능 폭탄, 화학탄, 생물학탄, 혹은 핵무기를 운반하는 미사일로 미국을 타격할 수 있다. 이제 미국은 그 위협을 막아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222]

조·미 미사일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99년 ??31일 북(조선)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북(조선)은 자체의 힘으로 미사일을 개발하고 실험하고 생산하며 자국의 안전을 지키는 정당한 자위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누구와도 흥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국방장관(당시) 윌리엄 코언(William Cohen)이 1999년 2월에 연방의회에서 했던 발언을 겨냥하듯, 미국이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삼고 국가미사일방어체계를 세우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223] 그러한 비난은 그냥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북(조선)은 미국을 더욱 압박하면서 벼랑끝으로 차츰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북(조선)은 1999년 4월에 들어서자 무수단리의 발사장에 광명성 2호를 발사하기 위한 발사대를 세웠다. 1999년 6월 23일자 『아사히신붕(朝日新聞)』은 미국의 정찰위성이 1999년 5월초에 북(조선)이 로켓엔진 분사실험을 진행한 열흔적을 포착했다고 보도했다. 이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이 말한 대포동 2호에 해당하는 우주발사체를 다시 발사함으로써 대륙 ?탄도미사일 보유능력을 더욱 분명하게 과시하려는 정치적인 압박이었다. 조·미 미사일 협상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타결점을 찾을 수 있을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북(조선)은 광명성 2호를 발사할 준비를 착착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벼랑끝으로 밀린 미국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었다. 미국은 마침내 1999년 5월 25일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를 미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하는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간 페리는 미국을 겨냥한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위협을 중지해주는 조건으로 조·미 관계 정상화, 경제지원, 경제제재 조치 해제를 추진하겠다는 일괄타결안을 북(조선)에 제안하였다. 미국 국무부의 설명에 따르면, 북(조선)은 페리의 제안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224] 그렇지만 북(조선)은 단지 관심을 보였을 뿐 그 것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북(조선)도 페리에게 제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페리는 평양 방문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서 북(조선)이 미국에게 내놓은 제안이 무엇인가를 밝히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북(조선)이 미국에게 제안했다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고 마치 미국의 제안만이 있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미국에게 과연 무슨 제안을 내놓았을까? 이에 관하여 미국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고, 북(조선)도 밝히지 않았으므로 북(조선)의 제안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북(조선)의 제안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내는 실마리는 셀릭 해리슨(Selig S. Harrison)의 글에서 드러났다. 그는 미국의 정책전문지 『세계정책저널(World Policy Journal)』에 기고한 글에서 북(조선)은 평양을 방문한 페리에게 미국이 주한미군 병력의 전부 또는 일부를 철수시킬 경우에 한해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거나 종식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밝혔다.[225] 이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주한미군이 정치·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실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것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단지 미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무력수단만이 아니고, 그 본질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정치력에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페리의 방북이 실현되기 약 석 달 반전인 1999년 2월초에 의회조사국 연구관 래리 닉쉬는 "북(조선)의 지도부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에 미국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수행하는 수단(trump card)으로 보고 있다. 북(조선)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그 대가로 워싱턴이 바라고 있는 바대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해체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는데 그 것은 크게 빗나간 예측이 아니었다.[226] 북(조선)의 주한미군 철수 제안을 받았던 미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에 대하여 외부에 알려진 바는 없지만,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 분명하다. 선뜻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분명하게 거절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페리 보고서에서는, 적어도 공개된 페리 보고서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견해를 표명하였기 때문에 그렇다.[227]

그런데 이처럼 평양에서 조·미 협상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두 주일 뒤에 협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1999년 6월 15일에 일어났던 '서해해전'이 그 것이다. 그로써 한(조선)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의 파고는 높아졌다. 그 사건 직후 미국 국방부는 일본의 미국 해군기지에 머물고 있던 전함 두 척과 전투기를 사고 해역으로 파견하였다.[228] 바로 그 다음날인 1999년 6월 16일 일본의 『교토통신』은 일본 방위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북(조선)이 사거리 4,000 킬로미터에서 6,000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포동 2호 미사일을 한 두 달 안에 시험발사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99년 6월 18일 미국 행정부의 관리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북(조선)에서 올 여름에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고 밝히면서, 새로운 미사일 대포동 2호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사정권 안에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229] 미국의 한 고위관리는 북(조선)이 광명성 2호 발사를 준비하는 것을 두고 "이 것이야말로 지구 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프리스티나(당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던 코소보의 도시-옮긴이)의 시가지가 아니라 한국(조선)의 경계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230] 최근 미국 국무부 차관으로 지명된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L. Armitage)는 그 무렵 "지금 북(조선)의 미사일 시험발사는 군사적 영향은 물론이고 매우 심각한 정치적 영향을 미치게 될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역미사일방어체계(Theater Missile Defense)를 촉진시킬 것이며 페리의 구상에 대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매사추세츠주 민주당 소속 연방상원의원 존 케리(John Kerry)는 "제2차 미사일 시험발사가 매우 도발적이며 위험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다. 이 시점에서 미사일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제2차 시험발사가 진행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며, 바로 이 것이 북(조선) 문제에 더욱 관여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231]

1999년 6월 중순 북(조선)은 광명성 2호의 발사를 중지하는 대신 미국에게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232] 그 요구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지금까지 북(조선)의 대미전략에 의거하여 추정한다면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조·미 국교를 수립하고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라는 내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째든 그 것은 미국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조건이었다. 그 뒤에도 미국은 북(조선)의 광명성 2호 발사문제를 여전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999년 6월 24일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당시) 스탠리 로스(Stanley O. Roth)는 만일 북(조선)이 또 다시 미사일을 시험발사하게 될 경우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233] 1999년 6월 30일 미국 국방부는 북(조선)이 앞으로 몇 주 또는 몇 달 안에 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고 처음으로 공식 확인하였다.[234] 같은 날 국방부 아시아 담당 부차관보(당시) 커트 캠벨(Kurt Campbell)은 미국은 북(조선)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집중적인 외교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235] 7월 1일 한 미국 관리는 미국은 제2의 미사일 발사가 절박한 위협이라고 알고 있으나, 그에 대해 미국과 동맹국들이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말했다.[236] 이 것은 북(조선)이 우주발사체를 개발한 것을 보고 경악한 나머지 경수로 분담금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등 마구 떠들면서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일본을 의식하면서 그들에게 자제하라고 충고하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북(조선)은 미국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광명성 2호를 발사하기 위한 준비는 차츰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99년 7월초에 북(조선)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본인 특사 아카시 야수시(明石康)나 미국 연방상원의원 로버트 토리첼리(Robert G. Torricelli)가 전해주었던 말을 종합해 보면 북(조선)은 이미 광명성 2호 발사준비를 마쳤으며 그 해 여름 안으로 발사를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237] 1999년 7월 7일 미국 국방부 대변인 제임스 베이컨은 북(조선)이 새로운 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조짐을 포착했다고 밝히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미국 해군의 정찰함 인빈써블호(USNS Invincible)를 동해에 배치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북(조선)은 1999년 8월말 광명성 1호를 발사한 지 꼭 한 해가 되는 때에 다시 광명성 2호를 발사하기 위하여 무수단리의 발사장에 있는 발사대 높이를 20 미터나 더 높였다.[238] 1999년 8월초가 되자 북(조선)은 우주발사체 연료를 발사장으로 옮겼다.[239]

1999년 9월 9일 미국 국가정보회의가 발표한 국가정보평가서는 "앞으로 15년 안에 미국은 러시아, 중국, 북(조선)으로부터 탄도미사일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란으로부터는 그런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이라크로부터는 그런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조금 있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240] 이 지적은 2000년 3월 21일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닛이 연방상원의 대외관계위원회에 제출했던 정보평가서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241] 이 문서의 전반적인 논조는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에 관하여 가장 최근에 발표되었던 1998년 3월의 보고서보다 더욱 우려하는 '비관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연방하원의 대외관계위원회 의장 벤저민 길먼은 북(조선)이 제3의 새로운 미사일을 배치하게 되면 그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조성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242]

이처럼 파국의 벼랑끝에 몰린 미국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99년 9월 7일 베를린에서는 조·미 두 나라가 미사일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나흘간의 정치협상을 시작했다. 이 정치협상에서 북(조선)은 윌리엄 페리가 평양에 갔을 때 제안한 내용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243] 이 정치협상에서 북(조선)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광명성 2호의 발사를 유예(moratorium)하기로 했다. 우리가 이 정치협상의 중요성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미국이 이 협상에서 처음으로 북(조선)에게 국교수립을 제의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것은 그로부터 7년 전인 1992년 1월 21일 뉴욕에서 조선로동당 김용순 비서와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당시)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 사이에 열렸던 최초의 조·미 정치협상에서 북(조선)이 미국에게 국교수립을 제의했는데도 미국이 이를 거부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반대의 현실로 뒤바뀐 것이었다. 1992년의 조·미 협상에서 미국은 국교수립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며, 공동성명을 발표하자는 북(조선)의 제의도 거부했고, 추가회담을 열자는 제의도 묵살하고 회담은 단 한 차례로 끝내버리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여준 바 있었다.[244] 그러나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지난날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미국은 먼저 국교수립을 제의하는 '낮은 자세'로 어느덧 밀려가 있었다. 그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조·미 관계의 질적 변화였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580 기나 쌓아놓고 있는 세계 최강의 군사강국이라는 아메리카 제국주의는 두 번째로 우주발사체를 발사하겠다고 나선 북(조선)과 벌린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회의가 자기의 정치적 패배를 인정하고 북(조선)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하여 작성한 정책문건이 이른바 페리 보고서다. 1999년 9월 15일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는 미국 행정부 특별토론회에서 지난 8개월 동안 자신의 주도로 미국의 전략가들이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연구해온 결과를 발표하면서 미국은 북(조선)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하여(더 정확히 말하자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보유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조선)과 외교통상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245] 이 특별토론회가 개최되기 몇 일 전에 페리는 클린턴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작성된 비공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246] 그 페리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1999년 9월 17일 클린턴은 한국(조선)전쟁 이후 지속되어온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상당부분 해제한다고 발표하면서 50년 묵은 봉쇄의 빗장을 벗겼다.[247] 미국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가 첫 걸음을 뗀 것이다.

그러나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지니고 있는 정치·군사적 측면을 잘 알지 못하는 워싱턴의 일부 정치권에서는 페리 프로세스가 양보할 까닭이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양보만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서 반발하였다. 연방하원 대외관계위원회 의장 벤저민 길먼은 그러한 반감을 뚜렷이 표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북(조선)은 오늘 미국의 국가안전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대상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서 "우리는 또다시 북(조선)에게 강탈당하는 순환과정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했다.[248] 길먼을 앞세운 공화당 세력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길먼이 1999년 10월 21일 아시아협회(Asia Society)에서 행한 연설 '갈림길에 서있는 미국의 북(조선)정책(America's North Korea Policy is at the Crossroads)'에서 주장한 네 가지 원칙과 네 가지 정책방안은 공화당 세력의 반발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북정책은 확고해야 한다. 둘째, 대북정책은 미국의 국가안전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대북정책은 북(조선)의 호전성에 대하여 강한 조치를 취하려고 해야 한다. 넷째, 대북정책은 북(조선)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미국의 결의를 오판하지 말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가 제시한 네 가지 정책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북정책의 검토결과를 실행하기 위하여 높은 급의 저명한 인사를 대통령 특사로 임명할 것. 둘째, 다무적인 정책을 조율하고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하여 일본, 남(한국), 그 밖의 나라들과 긴밀하게 협의할 것. 셋째, 대북정책은 앞으로 상호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추진할 것. 넷째, 전쟁억지와 군사적 우세를 대북정책의 전면에, 그리고 중심에 배치할 것이다.[249]

그러나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지니는 정치·군사적 측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윌리엄 페리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가 북(조선)에게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데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하면서, 비무장지대를 따라 주한미군을 배치하고 강화시키자는 강경세력의 대안은 북(조선)에 지불하는 경제적 대가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 될 것이라고 논박했다. 그는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북(조선)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250]

조·미 힘겨루기에서 미국 국가안보회의가 정치적으로 패하고 난 뒤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가 있다. 그 것은 이전의 조·미 미사일 협상에 차관보를 대표로 내보내던 관행을 바꾸어 국가안보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려고 한 것이었다. 이 것은 2000년 후반기에 들어와서 생겨난 가장 커다란 변화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는 것은 조·미 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들이 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되면, 기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기 위한 결정적인 국면이 열리게 된다. 클린턴은 그러한 국면을 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런데 2000년 11월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예상치 못한 진흙탕에 빠지자 클린턴은 평양을 찾아가서 역사적인 조·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기회를 놓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맡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는 앞으로 김정일 총비서의 서울 답방과 제2차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이 성사된 뒤에 페리 보고서에 제시된 미국의 새로운 전략에 따라서 평양을 찾아가서 조·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조·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은 두 나라가 북(조선)의 평화적 우주개발사업에 관련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해법이라는 것은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우주발사체 발사를 중단하는 대신 미국은 북(조선)의 평화적 우주개발사업을 계속 추진하도록 보장하는 타결점을 찾는 것이다. 이 정치적 해법은 이미 김정일 총비서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을 통하여 클린턴에게 구두로 제안하였고,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할 때 클린턴에게 보낸 김정일 총비서의 친서에서 제안한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자신이 평양을 찾아가서 김정일 총비서를 만나 회담할 때 다루었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바로 그 평화적 우주개발사업을 보장하는 문제였다고 밝힌 바 있는 데, 김정일 총비서는 올브라이트에게 직접 그 문제를 제안하였다.[251] 클린턴은 김정일 총비서의 그 제안을 "진지한 제안(serious proposals)"이라고 부르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252] 북(조선)의 평화적 우주개발사업을 보장하는 문제는 2000년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콸라룸푸르에서 열렸던 조·미 미사일 협상에서도 토론되었으며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253]

가까운 장래에 열리게 될 조·미 정상회담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 회담에서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에 관한 미국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것이며,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조·미 국교 수립, 연방제 통일 지지를 실행하라는 북(조선)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것이다. 바로 이 것이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고 있는 조·미 정치협상에서 논의된 이른바 일괄타결 방안이며, 페리 보고서의 비공개 문서에 제시된 미국의 새로운 전략, 곧 '숨겨진 페리 프로세스'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그 새로운 전략에 따라 한(조선)반도 전략을 수행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8)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주체혁명의 무기'다

"북(조선)은 그들이 생산한 모든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만일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면 그 것이야말로 최악의 악몽 시나리오다." 이 것은 '핵문제'를 놓고 조·미 두 나라가 전쟁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1994년 6월에 미국 정부의 관리가 내뱉은 말이다.[254] 미국의 전략가들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1944년과 1945년에 나치 독일이 영국의 대도시들을 향해 퍼부었던 브이(V)1, 브이(V)2 로켓무기를 기억하며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탄도미사일도 아니었던 그 원시적인 로켓무기는 67,111 명의 사상자를 내고 2백만 채의 집을 파괴면서 영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 있다.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자기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파멸적 공격의 가능성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미국인들이 그리고 있는 악몽의 상상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인용문이 조금 길지만, 그 악몽의 상상도를 여기 소개한다.

"2000년 6월 북(조선)은 남(한국)에 기습공격을 퍼부었고, 그로써 서울은 곧 함락의 위기에 몰렸다. 1950년에 일어났던 한국(조선)전쟁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듯 하자, 미국은 남(한국)을 구출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로서 서둘러 한(조선)반도에 무력을 증파하였다. 혈전을 벌인 끝에 미군은 북(조선) 군대를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밀어 부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과 남(한국)군이 북쪽으로 진격하자 북(조선)은 핵탄두가 장착된 대포동 2호 미사일 세 발을 미국을 향해 발사하였다. 그 가운데 한 발은 태평양에 떨어져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다른 두 발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타격하였다. 핵폭발의 화염에 휩싸인 미국에서는 1,000,000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것은 미국의 건국 이래 단일한 사건으로서는 최대의 인명손실이었다. 핵폭발 이후의 방사성 낙진은 농작물과 식수원을 모조리 오염시키면서 미국 전역을 남김 없이 파괴하였다. 또 다른 미사일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미국은 공포에 잠겼으며, 주요 도시들에서는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다. 주식시장은 무너져 내렸고 은행에서는 수 십억 달러의 예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북(조선)의 추가 공격을 예방하고, 보복조치를 단행하라는 압력을 받은 미국 대통령은 보복 핵공격을 명령하였다. 미국의 핵공격을 받은 평양에서는 민간인 1,000,000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도시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의 결정은 보복공격에 대한 요구를 들어준 것이었지만 미국의 보복 핵공격은 아시아 전역에서 격렬한 반미감정에 불을 붙였다. 미국이 이처럼 혼란에 빠지자 미국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고 곧 이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이 내려진 미국에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로서 시민적,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었다. 해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국가방위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제3세계의 적대국들은 이러한 위기상황을 이용하여 일제히 덤벼들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침공했으며,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였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미국의 지도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으며, 대혼란에 휘말린 국제경제는 곤두박질쳤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 주정부, 지역정부의 관리들이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유지하느라고 온통 난리였다. 미국인들은 미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자유를 다시 누리게 될 수 있을지 의심하였고,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었다. 그 것은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북(조선)의 치명적인 미사일 공격이 미국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워싱턴에 있는 보수파 두뇌집단인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이 1999년에 펴낸 『위기의 아메리카: 미사일 방어에 관한 시민 편람(America at Risk: The Citizen's Guide to Missile Defense)』의 서문에 적혀있는 악몽의 상상도다. 이 악몽의 상상도는 개전 초기에 서울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제야 미군이 증파되어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지만, 그 것은 매우 잘 못 그린 상상도다. 한(조선)반도의 전쟁은 북(조선)이 일본과 태평양에 널려있는 미군전략기지들에 대한 전략미사일 선제공격을 퍼붓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므로 처음부터 한(조선)반도의 범위를 벗어나 조·미 전면전이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북(조선)이 보유한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을 향해 발사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미 전쟁은 그 악몽의 상상도보다 더 참혹한 파멸을 미국인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미국에게 몰아닥칠 참혹한 파멸에 대해서 그 악몽의 상상도는 "단 한 차례의 핵공격을 받는 것으로 미국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전쟁에서 입은 손실보다도 더 많은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이 핵공격을 받을 경우 엄청난 인명피해, 방사능 낙진에 의한 재앙, 국가경제의 몰락, 국제질서의 붕괴, 정치적 대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북(조선)의 전략미사일은 미국의 핵공격에 대응하여 개전 초기에 미국을 제압하는 대량파괴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북(조선)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북(조선)은 개전 초기에 강력한 무력수단을 총동원하여 미국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199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이 벌였던 두 차례의 현대전인 걸프전과 발칸전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전쟁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은 미군이 정밀유도무기인 해상발사 및 공중발사 순항미사일로 상대의 전략거점을 불시에 공격·파괴하여 전세를 압도한다는 전법이었다. 미국 언론은 미군의 공격이 마치 비디오 게임(video game)을 하듯이 간편하고 손쉽게 진행된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미국은 첨단무기의 위력을 자랑스럽게 선전하면서도 그 첨단무기를 운용하기 위해서 엄청난 규모의 병참기지를 설치해야 했던 사실은 숨겼다. 미군의 무기가 첨단화, 전자화되면 될수록 그 것을 운용하기 위하여 설치해야 하는 병참기지는 더욱 비대해진다. 미국은 걸프전에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터기에 거대한 병참기지를, 발칸전에서는 이탈리아에 거대한 병참기지를 마련해야 했다.

걸프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미군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 약 나흘 반이 되는 115 시간 뒤에 이라크에 쳐들어갔다. 개전 초기인 두 주간동안 미국은 전쟁물자를 약 460,000 톤 공수하였지만, 그 것은 기껏해야 걸프전에 들어간 전쟁물자 총량의 5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게 전면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때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 다섯 달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미군은 병참기지를 전장에 가까운 동맹국 영토에 전진배치하느라고 다섯 달 반이라는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이처럼 미군은 거대한 병참기지를 전진배치하지 못하면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예일 대학교 교수 폴 브래큰(Paul Bracken)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현대전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은 적의 사령부를 외과수술 식으로 타격하는 순항미사일이 아니라 미국이 전투에서 요구하는 거대한 병참시설, 곧 탄약보급창, 공군기지, 정비시설, 그리고 숙소이다.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 공군기지에는 보급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보급물자가 쌓여있는 그 기지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군사전략가들은 적군이 대량파괴무기를 장착한 탄도미사일 한 발이면 미군의 작전을 분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시아에서 확산되고 있는 대량파괴무기는 그러한 병참기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일정한 장소에 고착되어 있는 병참기지들은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아킬레스 건(Achilles' heel)이다."[255]

브래큰은 "한때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미사일 공격의 볼모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아시아의 군사기술은 미국의 강점이 아니라 미국의 약점을 겨냥하고 있다. 아시아의 탄도미사일과 대량파괴무기는, 서방세계의 군사기술을 실제 군사력에서 차츰 쓸모 없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서방세계의 군사기술적 우위를 압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256] 미군이 다섯 달 반이나 걸려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에 거대한 병참기지를 마련하고 있었을 때 이라크군이 그 것을 집중공격하였더라면, 그리고 발칸전에서 만일 세르비아군이 이탈리아의 미군 병참기지를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집중공격했더라면, 아마 전세는 역전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라크군이 미군 병참기지를 향해 발사했던 스커드 미사일의 재래식 탄두는 그 기지들을 파괴하지 못했고, 세르비아군은 지대지 미사일을 보유하지 못한 약체였다.

걸프전과 발칸전이 주고 있는 교훈은 핵탄두를 장착한 전략미사일로 불시에 '미군의 아킬레스 건'을 끊어버리는 전법을 동원하면 전쟁에서 미국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걸프전과 발칸전의 경험을 치밀하게 연구·분석한 북(조선)은 지하시설에 은폐해두고 있는 전략미사일 몇 기를 불시에 발사하여 '미군의 아킬레스 건'을 끊어버림으로써 미국이라는 거인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리는 전법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북(조선)의 전략미사일이 겨냥하고 있는 타격목표는 자명하다. 그 것은 태평양지역에 널려있는 미군의 비대한 전략거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핵탄두를 장착한 북(조선)의 미사일이 겨냥하고 있는 '미군의 아킬레스 건'은 미군 태평양사령부가 마련해놓은 다섯 지역권의 군사전략거점들인 일본열도, 하와이, 알래스카, 괌, 오키나와를 말한다.

하와이의 전략거점은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 태평양함대사령부(PACFLT)를 말한다. 이곳은 핵동력 잠수함 5 척, 잠수함 48 척, 항공모함 7 척을 비롯한 각종 전함 260 척과 항공기 1,600 대, 병력 210,000 명을 지휘하는 거점이다. 하와이 히캄기지에 있는 미군 태평양공군사령부도 북(조선)의 공격목표다. 알래스카에 있는 미국 공군의 전략거점도 북(조선)의 공격목표가 된다. 미군 태평양공군사령부의 주력은 알래스카 엘먼도프에 있는 미군 태평양공군사령부 예하 제11공군사령부에 있다. 에프(F)15 44 대, 에프(F)16 18 대, 씨(C)130 수송기 10 대, 이(E)3비(B) 조기공중경보기(AWACS) 2 대가 배치되어 있다. 이 엘먼도프 공군기지는 제11공군사령부 이외에도 알래스카 통합사령부, 북미방공사령부가 함께 자리를 잡고 있는 미군의 전략요충지다. 이 엘먼도프 공군기지에서 서울까지의 비행시간은 7시간 30분이다. 이 공군기지는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 본토의 병력을 한(조선)반도로 투입하는 중간기착지이며 수송기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괌에는 미군 태평양공군사령부 예하 제13공군사령부가 있는 앤더슨 공군기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도 북(조선)의 중거리 미사일 공격목표에서 제외될 수 없다. 일본열도에도 미군의 전략거점들이 널려 있는데, 이를테면 미군 태평양함대사령부 예하 제7함대의 모항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 주일미군사령부와 미군 태평양공군사령부 예하 제5공군사령부가 있는 요코다(橫田) 공군기지와 미자와(三澤) 공군기지, 그리고 이와쿠니(岩國) 해병항공기지,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 등이 그 것이다. 오키나와(沖繩)에는 미군 제3해병사단, 제18항공단, 제36해병항공단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열도와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들은 모두 북(조선)의 미사일 사정권 안에 들어있다.[257]

여기서 우리는 1993년 5월에 북(조선)이 시험발사한 3 기의 준중거리 미사일과 중거리 미사일들이 일본열도, 하와이, 괌이 위치한 세 방향으로 각각 날아갔으며, 1998년 8월에 북(조선)이 발사한 우주발사체의 비행궤적은 알래스카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북(조선)의 작전계획은 일본열도와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들을 핵탄두를 장착한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알래스카, 하와이, 괌에 있는 미군기지들을 핵탄두를 장착한 경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타격하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북(조선)의 전략미사일은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대량보복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미국의 심장부란 수도 워싱턴을 말한다. 북(조선)의 중량급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공격하려면 약 10,500 킬로미터를 날아가야 하는데, 이 때 원형공산오차(Circular Error Probability, CEP)[258]를 8 킬로미터라고 추산하는 경우 그 탄두는 폭심지로부터 반지름 8 킬로미터의 범위를 파괴할 수 있는 핵탄두가 아니면 안 된다.[259]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무기 전문가 데이빗 라이트(David Light)는 북(조선) 미사일의 오차한계가 대략 반지름 6.5 킬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260]

핵탄두가 폭발하면 시속 900 킬로미터의 폭풍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날려보내고, 무쇠를 녹여버리는 엄청난 고열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를 불바다로 만든 미군의 원시적인 핵폭탄은 폭심지로부터 반지름 4 킬로미터에 이르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물체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이어서 미군의 핵폭탄으로 공격을 받았어도 그 파괴범위가 반지름 4 킬로미터로 국한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워싱턴,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들은 주변에 산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개활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미사일 공격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으므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공격을 받을 경우 그 파괴범위가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장착된 핵탄두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시적인 핵폭탄의 파괴력 보다 조금 더 강력한 티엔티(TNT) 20 킬로톤(kt) 정도의 파괴력만 가지고 있다고 해도 미국의 대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는 1999년 9월 페리 보고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1999년 5월말 평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인민군의 고위급 지휘관이 자신에게 "우리는 제2의 유고슬라비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말을 상기하면서, 그 말은 북(조선)이 미국에게 공격을 가하지 못한 채 미군의 폭격을 받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261] 여기서 페리는 북(조선)이 미국에게 어떠한 공격을 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선인민군이 미국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공격하는 것이다. 조·미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핵탄두로 타격하여 점령과 약탈의 주범인 제국주의세력을 완전히 꺾어놓겠다는 것이 조선인민군의 의지인 것이다. 이렇듯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주체혁명의 무기'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제국주의의 아성을 한 순간에 불바다 속에 쳐넣을 이 무서운 무기는 분명히 제국주의의 발호와 준동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무력수단이기에 반제혁명의 무기가 된다. 제국주의 세력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며 갖은 고생을 겪어왔던 북(조선)으로서는 이제 자기들의 사회주의를 수호하면서 반제혁명을 더욱 위력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무력수단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주체혁명의 무기'를 단순히 무력수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혁명세력은 자기들의 손에 든 무기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모든 무기들은 그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정치적 실체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무력수단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북(조선)이 '주체혁명의 무기'를 가지고 과연 무엇을 관철시키려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핵전쟁이나 벼르고 있는 호전국(好戰國)일까? 그렇지 않다. 미국의 전략가라고 자처하고 있는 일부 단순무지한 사람들은 북(조선)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호전국이라고 착각하면서 공포심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북(조선)은 결코 호전국이 아니다.

1999년 9월 16일에 로버트 월폴이 연방상원 대외관계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북(조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전쟁수단이라기 보다는 전쟁억지와 압박외교를 위한 전략무기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분석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지니고 있는 전쟁을 억지하는(deter) 측면을 말해주고 있으므로 전혀 빗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분석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누구의 전쟁위협을 억지하는 무력수단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차마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로버트 월폴을 포함한 미국의 분석가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군의 핵공격 위협 앞에서 고통을 겪어온 북(조선)이 이제는 그 위협을 억지하는 무력수단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262] 그러나 우리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미국의 전쟁위협을 억지하는 무력수단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겨냥하고 있는 정치적 목표다. 국가정보회의 의장 존 개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미국과 맞서있는 적대국들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잠재적 적대국들은 그들이 장거리 미사일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경우 그 것이 위기상황에서 미국의 결정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잠재적 적대국의 장거리 미사일 체계들 가운데 일부는 특정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다른 일부는 주로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63]

로버트 월폴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압박외교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압박외교를 통하여 추구하고 있는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분석가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북(조선)이 추구하고 있는 '주체혁명'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얻어낼 수 있다. 북(조선)의 이론에 따르면, 주체혁명은 사회적 집단의 자주성을 완성하기 위한 혁명이다. 그러므로 한(조선)반도에서 주체혁명의 목표는 남(한국)의 자본주의 제도를 사회주의 제도로 교체하는 사회주의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조선)반도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사회적 집단인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데 있다.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한다는 말은 한(조선)민족이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반통일정책(Two-Korea Policy)에 의해서 유지·관리되고 있는 분단현실을 자기 힘으로 타파하고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실현한다는 말이다.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실현되지 못하는 한,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은 미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조선)반도의 통일은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길이며, 민족이 자기의 존재양식을 되찾아 자주적 발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바로 이 것이 북(조선)이 추구하고 있는 주체혁명의 당면목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체혁명의 무기가 겨냥하고 있는 정치적 목표는 자명해진다. 그 무기가 겨냥하고 있는 정치적 목표는 명백하게 한(조선)민족 자주성의 완성과 한(조선)반도 연방제 통일위업의 완수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북(조선)은 김정일 총비서의 영도에 따라 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감수해왔고 마침내 결승점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조선)민족은 그 움직임의 파동을 체감하고 있다. 1998년 8월의 광명성 1호 발사, 1999년 5월의 페리 방북과 9월의 페리 보고서 발표, 2000년 6월의 평양회담과 6.15 공동선언 발표, 7월의 푸틴 방북과 조·러 공동선언 발표, 10월의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과 조·미 공동성명 발표, 그리고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마치 급류처럼 밀려오고 있는 움직임의 파동이 그 것이다.

그렇다면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한다는 말의 정치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 것은 관계의 질적 변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조선)민족과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어놓는다는 것이다. 일찍이 1993년 2월에 미국 국방부 산하 전략방위주도기구의 보고서가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과 미국 사이의 정치적 관계에 극적이고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264]이라고 했던 그 예상이 놀랍게도 지금 한(조선)민족의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은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려면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한(조선)민족을 지배하고 간섭하는 낡고 고통스러운 체제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은 조·미 적대관계와 한·미 예속관계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관계의 사슬을 끊어버리면 그 것이 곧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을 타파하는 것이며, 그로써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은 완성된다는 말이다. 그 관계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은 한(조선)반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제국주의 세력의 물리적 수단과 법적 장치를 제거하는 것이다. 북(조선)이 제거하려는 물리적 수단이란 주한미군이며, 제거하려는 법적 장치란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안보조약이다. 여기서 북(조선)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물리적 수단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물리적 수단이 없는 법적 장치는 한낱 무력한 장치로 존재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그렇다. 북(조선)이 조·미 정치협상에서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연계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안보조약은 무력화될 것이며, 그로써 한(조선)반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와 간섭은 그 사슬이 끊겨 나가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자주위업과 연방제 통일위업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경로를 통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1999년 9월 27일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뉴욕을 방문했던 북(조선)의 백남순 외무상은 대외관계협의회(CFR)에서 연설하면서 그 정치적 경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는 "미국은 제재조치들을 마저 해제하고 나아가서 미군철수, 조미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서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끝장내야 합니다. 미국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그에 상응하게 신의 있게 호응해나갈 것입니다."고 하면서 "미국이 공정한 립장에 서서 조선의 련방제 통일을 지지해 나선다면 그 것은 우리 민족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선의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265]

지금 북(조선)은 김정일 총비서의 영도에 따라 자주위업과 통일위업의 정치적 목표인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의 실현을 앞당기기 위해서 고생을 감수하면서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바꾸어가고 있으며, 한(조선)민족은 그 변화의 열기를 체감하고 있다. 1998년 8월의 광명성 1호 발사 이후 2000년 10월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으로 이어진 2년의 과정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열기가 그 것이다. 1998년 8월 31일 섬광을 뒤로 뿜으며 우주공간을 향해 솟구쳐 오른 익명의 우주발사체는 그러한 변화의 열기를 불러일으킨 발화점이었다.

(9) 전환기에 형성되고 있는 조·미·일 삼각전략균형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는 1999년 10월 12일 연방상원의 청문회에서 "만일 우리가 북(조선)을 무시하거나 봉쇄하려고 한다면, 북(조선)은 이른 시일 안에 개발할 수 있는 미사일과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266] 그렇지만 이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정치적인 발언이다. 페리가 그러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서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페리 보고서에는 들어있는 아래와 같은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리 보고서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두 가지로 내놓았다.

첫째, 페리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북(조선)이 그런 무기(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뜻함-옮긴이)를 보유한다면 그 것은 동북아지역의 군비경쟁을 촉발시킬 뿐 아니라, 핵무기와 탄도미사일과 관련된 전 세계적인 비확산체제를 크게 훼손시킬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 것은 미국의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체제의 존폐에 관련된 매우 중대한 정치문제다. 둘째, 페리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북(조선)이 제2의 미사일을 발사하면 그 것은 일본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문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며, 일본이 자기의 안보정책을 광범위하게 수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267] 이 것은 미·일 동맹체제의 존폐에 관련된 매우 중대한 정치문제다.

여기서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다면 그 것이 일본의 안보정책을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했던 페리 보고서의 지적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그 것은 일본이 지금까지 그 아래에 들어가 있던 미국의 '핵우산'을 벗어버리고 정치·군사적 독자노선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그 핵우산은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전략을 지탱하고 있는 정치·군사적 요체인데, 그 전략이 겨냥하고 있는 주공방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중국 전략과 일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하위동맹국으로 포섭한 일본을 중국의 진출을 저지하는 전략거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일본이 미국의 하위동맹국 지위에서 벗어나서 정치·군사적으로 독자노선을 추구한다면,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전략은 가장 든든한 전략거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남(한국)의 한 전문가는 "만일 일본이 미국의 안보공약보다 자신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독자적 군사노선으로 선회하게 된다면 동북아 지역은 걷잡을 수 없는 지정학적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 확실하다."고 예상했다.[268] 미국이 일본이라는 전략거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동북아지역이 중국과 일본의 긴장이라는 새로운 대치구도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하며, 미국의 중국 전략이 무력화됨으로써 태평양을 독점적으로 지배해온 미국의 지배구도, 곧 남(한국)과 일본을 하위동맹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미국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은 1993년 5월 북(조선)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이후에 생겨나기 시작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서 잔뜩 긴장하였다. 불안해진 미국은 미·일 동맹체제를 더 한층 공고하게 만드는 새로운 아시아전략을 수립하려고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이 새로운 아시아전략보고서를 작성한 때는 1995년이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은 '새로운 방위계획대강'을 작성하면서 미국의 전략을 추종하였다. 미국이 새로운 아시아전략을 수립한 이듬해인 1996년 4월에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미·일 공동선언을 발표하였고, 1997년 9월에는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이른바 '새로운 가이드 라인')이 확정되었다. 그 뒤를 이어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법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한(조선)반도 유사사태를 상정한 주변사태법안, 자위대법 개정안, 미·일 물품용역상호제공협정(ACSA)이 각각 채택되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추진되었으므로 재래식 전력을 증강하는 것에 한정되었다. 일본이 핵탄두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하기 직전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까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하위동맹국의 지위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은 북(조선) '미사일 위협'을 핑계로 삼아 미국의 핵우산을 벗어버리고 하위동맹국의 지위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일본의 방위청이 펴낸 1999년 판 『방위백서』는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를 일본 안보정책을 수정하는 핵심근거로 삼았다.[269]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er)(당시) 샌디 버거(Sandy A. Berger)는 1999년 9월 19일 미국 엔비씨(NBC) 텔레비전 방송에서 "북(조선)이 미국과 아시아 지역을 위협하는 장거리 미사일 계획을 강행한다면 아시아에서 미사일 군비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기서 그가 우려하고 있는 아시아지역의 미사일 군비경쟁이란 일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미국은 일본이 미사일 군비경쟁에 뛰어들 경우 단순한 군비경쟁으로 끝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은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핑계로 삼아 탈아메리카화 독자노선으로 나아감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전략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게 될 것이라는 데 미국의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우선 북(조선)의 전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비상조치를 강구해야 했다. 미국이 취할 수 있었던 비상조치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비상조치는 미국은 마치 자기가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일본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느닷없이 꺼내놓은 것이 이른바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사건'이다. 우리는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미국의 의혹이 북(조선)의 우주발사체가 미국에게 보란 듯이 무수단리의 발사대 위에 세워지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미국에 의해서 제기되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정찰위성이 금창리에서 지하시설 공사현장을 포착했는데, 그 지하시설은 핵개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도는 『타임(Time)』지 1998년 8월 10일자에 나왔으며, 일주일 뒤인 8월 17일에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가 다시 보도하였다. 미국의 정찰위성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공사현장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그 공사가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시설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 잠자코 있었던 것인데, 북(조선)이 우주발사체를 발사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정찰위성을 통해 포착하자 갑자기 금창리 지하시설 공사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부산을 떨었던 것이다. 1998년 9월 10일 북(조선) 광명성 1호의 발사를 공식 발표하여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행하는 문제와 '금창리 문제'를 연계하려 하였다.[270] 이에 대해 북(조선)은 『로동신문』 1998년 9월 19일자에서 금창리 지하시설이 민간용이라고 밝혔다.

1998년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던 조·미 회담에서 북(조선)은 미국에게 금창리 문제와 제네바 기본합의 이행문제를 연계하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금창리 지하시설을 현장에 와서 직접 보려면 보상금 3억 달러를 내라고 요구하였다. 이 회담에서 조·미 두 나라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금창리 사건이 해법을 찾은 것은 1999년 2월 27일부터 3월 15일까지 뉴욕에서 열렸던 조·미 회담이었다. 이 회담의 합의결과는 3월 16일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은 북(조선)에게 식량을 지원하고 정치·경제관계를 개선한다는 것, 둘째, 북(조선)은 금창리 조사방문을 허용한다는 것, 셋째, 조·미 쌍방은 1993년 6월 11일 조·미 뉴욕공동성명과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문을 이행할 것을 재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미국은 1억7,700만 달러에 이르는 식량 40만 톤을 북(조선)에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미국은 마치 자기가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고 있는 듯이 행동하여 일본을 진정시켜야 했으므로 그처럼 막대한 경제지원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271] 1999년 5월 18일부터 24일까지 미국 국무부, 국방부 관리들과 전문가 15 명으로 이루어진 조사단이 금창리 지하시설을 찾아갔다. 이 조사단이 금창리 지하시설 공사현장에 가서 한 일은 텅 비어 있는 커다란 인공동굴을 한 바퀴 돌아본 것이 전부였다. 1999년 6월 25일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루빈은 금창리 지하시설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것은 텅 비어있는 동굴과 같다고 하였다. 미국 조사단이 컴컴한 인공동굴을 멋적게 구경하고 난 바로 다음날인 5월 25일 대북정책 조정관 페리가 미국 대통령이 보낸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처럼 클린턴 행정부가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간파한 연방의회 공화당 세력의 반발도 있었다. 미국 조사단이 금창리를 향해서 떠나던 바로 그날, 연방하원의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 벤저민 길먼은 '북(조선) 위협 감소 법안(North Korea Threat Reduction Act of 1999)'을 상정하였다. 이 것은 대북정책 조정관 페리가 평양을 향해서 떠나기로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다음날인 5월 19일에 발표하기로 되어있으므로, 페리가 평양에서 돌아올 때까지 위의 법안을 상정하지 말고 기다려달라는 국무부의 요청을 묵살하고 추진한 것이었다. 이 법안은 북(조선)이 여덟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미국 행정부가 한(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에 대한 재정지출을 허용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것은 결국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와 제네바 기본합의 이행문제를 연계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이 북(조선)에게 요구하는 여덟 가지 조건이란 다음과 같다.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할 것, 남북 대화를 추진할 것,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행할 것, 영변 핵시설에서 나온 핵연료봉을 봉인할 것, 미국의 식량지원을 전용하지 말 것,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을 해소할 것, 우라늄 농축기술이나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거나 획득하지 말 것, 미사일 수출 문제를 포함한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보일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덟 가지 조건은 일방적인 강요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그러한 조건을 내세우는 것은 결국 한(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재정지출을 막아버리고, 그로써 제네바 기본합의는 파국의 위험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두 번째 비상조치는 미국이 오래 동안 묵혀두었던 미사일방어체계를 세우려는 책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이 책략에 대해서 행정부와 연방의회는 서로 일치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은 1999년 1월 20일 2000년 회계연도부터 2005년 회계연도까지 국가미사일 방어체계(NMD)와 전역미사일 방어체계(TMD)를 개발하는데 66억 달러를 추가로 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1999년 2월에 연방의회와 대통령에게 제출한 연례 국방보고서에서 이른바 '깡패국가(rouge states)'들의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능하다면 이른 시일 안에 미사일방어체계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72] 1999년 3월 미국 연방의회는 국가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한다는 법안을 의결했다. 국방부 차관(당시) 월터 슬로컴(Walter Slocomb)은 1999년 11월 5일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어체계를 두 단계에 걸쳐 구축하는 주된 목적은 북(조선)의 미사일 공격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273]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에서 전역미사일방어체계에 관한 합동연구를 시작하자고 합의한 때는 1999년 6월이었다. 미국이 일본과 전역미사일방어체계를 공동으로 개발하면 그 것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제압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비상조치를 취함으로써 독자노선을 추구하려던 일본의 발걸음을 급한 대로 저지하려고 하였지만 일본은 그들 나름대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일본 방위청이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에 예산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9년 회계연도의 군사연구 및 개발예산 가운데 탄도미사일 개발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34 퍼센트인 372억 엔으로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역미사일방어체계를 포함한 7 개 미사일 개발사업에 배정된 예산이 전년도에 비해 1.5 퍼센트 늘어났는데, 이 것은 항공기개발사업 예산이 40 퍼센트나 줄어들 것과 대조를 이룬다.[274] 일본은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고, 더욱이 1961년부터 핵무장을 노리고 있으므로 만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즉각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흉악한 군국주의 세력으로 변신할 수 있다.[275]

둘째, 일본 방위청은 북(조선)이 1993년 5월에 미사일을 시험발사한 것에 자극을 받아 북(조선)을 감시할 수 있는 군사정찰위성 5-7 개를 개발하는 연구를 은밀히 시작했다.[276] 1998년 8월 31일 북(조선)이 광명성 1호를 쏘아 올리자 일본 정부는 정찰위성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개발사업을 정식으로 허가하였다.[277] 미국은 미국산 정찰위성을 사가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고, 2002년까지 정찰위성 4 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278] 독자적인 정찰위성을 보유한다는 것은 미국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전쟁수행능력을 확보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셋째,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임이사국으로 가입하려 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미국이라는 '보호자' 밑에서 지내온 패전국의 '정치난쟁이' 딱지를 떼어버리고 정치대국으로 올라서겠다는 야심이 거기에서 드러난다. 일본은 또한 '평화헌법'을 개정 또는 폐기하고 교전권을 확보하고, 그에 따라 정규군 보유권, 그리고 동맹국과 공동으로 전쟁을 벌이는 이른바 집단자위권을 거머쥐겠다는 전략구상을 무르익히고 있다.[279]

이처럼 정치·군사적 탈아메리카화의 야심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서 1999년에 작성된 미국 중앙정보국 보고서가 분석한 내용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 보고서는 최근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주성과 독립성을 더욱 제고하는 양다리 걸치기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는 새로운 독자노선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으며, 미·일 관계가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명확해졌다"고 분석하였다.[280]

미국은 북(조선)이 1993년 5월에 2단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것을 핑계 삼아 탈아메리카화의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미·일 동맹체제를 이완시키려는 일본의 움직임 때문에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판이었는데, 북(조선)이 1998년 광명성 1호의 발사를 계기로 하여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면 그 것은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보유국으로 공인됨으로써 미·일 동맹체제가 파탄지경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는 최선의 방책은 미국이 북(조선)의 정치적 목적을 용인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 것은 미국이 조·미 국교수립을 서둘러 추진함으로써 미·일 동맹체제를 종전처럼 유지한다는 방책이었으며, 그 것이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최선의 선택에 관하여 페리 보고서는 "만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관련 활동과 장거리 미사일 관련 활동을 협력적으로 중단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면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81]

미국이 북(조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한다는 것은 곧 조·일 국교수립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따라서 일본은 더 이상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핑계 삼아 탈아메리카화의 독자노선을 추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미·일 동맹관계의 파탄이냐 아니면 조·미 적대관계의 청산이냐 하는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후자를 택함으로써 미·일 동맹관계가 파탄의 위기로 밀려가는 것을 예방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 움직임 때문에 지금 조·미·일 삼각전략균형이 형성되면서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 조·일 국교수립 문제를 살펴보면, 북(조선)은 조·일 국교수립이 성사되려면 먼저 일본이 조선민족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범죄를 공식적으로 시인하고 배상하여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내놓고 있다. 이 것은 북(조선)이 조·일 국교수립을 통하여 일본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키겠다는 대일 압박외교로 보인다.

여기서 조·미·일 삼각전략균형이 형성됨으로써 일어나게 될 근본적인 정세변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미국의 일부 분석가들은 그 변화현상을 군사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서 한(조선)반도의 군비통제를 예상하기도 하지만[282] 그 것은 빗나간 추론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주한미군의 철수와 더불어 일어나게 될 조·미·일 세 나라 사이에 얽혀있는 불균형한 대치구도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 물론이지만, 그 변화는 군사적 전략균형의 변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외교적 전략균형의 질적 변화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전망을 페리 보고서에서 읽어볼 수 있다. 페리 보고서의 전망에 따르면, 그 전략균형의 질적 변화의 핵심부에 놓여있는 것은 한(조선)반도의 평화 정착과 한(조선)민족의 평화통일 실현이라는 것이다. 페리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조선)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맺고 궁극적으로는 한(조선)민족의 평화통일(peaceful reunification)로 나아가는 것"이 "미국 정책의 지속적인 목표"라는 것이다.[283] 페리 보고서가 예상하고 있는 한국(반도)전쟁 종식이란 미국이 북(조선)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을 뜻하며, 한(조선)민족의 평화통일이란 연방제 통일을 뜻한다. 이 것은 미국이 북(조선)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결국 북(조선)의 연방제 통일안을 지지할 것이라는 정치적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올브라이트는 평양을 다녀온 뒤에 워싱턴에서 가진 언론설명회에서 북(조선)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목적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데도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실현하려는 데도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284] 이 것은 미국이 북(조선)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한(조선)반도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발언이다.

(10) 맺는 말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는 1998년 10월 22일에 발표한 「국제 군비·군사력 보고서」에서 북(조선)이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은 일본보다 더 멀리 있는 미군을 위협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며, 경제난 속에서도 북(조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해주고 아시아의 안보정세에 충격을 주었던 '비장의 수'였다고 평가하면서 그에 따라 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이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285]

과연 2000년은 동아시아의 전략균형이 뒤바뀌고 있음을 실감한 해였다. 역사적인 평양회담과 6.15 공동선언 채택,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방북과 조·러 공동성명 채택,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과 조·미 공동성명 채택, 그리고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방북과 클린턴의 방북 계획 발표가 줄을 이은 가운데 조·미 미사일 협상은 진전을 이루었다. 올브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의 방북은 "한(조선)반도에 항구적인 안정을 조성하기 위한 역사적 과정의 일부"이며, "그 역사적 과정은 대량파괴무기가 조성한 위험을 줄이고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클린턴 행정부의 전략에서 핵심부분"이라는 것이다.[286] 올브라이트는 "우리가 만일 50년 묵은 냉전시대의 분단을 넘어서기에 유리한 역사적 기회를 놓친다면,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들을 겨냥하고 있는 북(조선) 미사일의 위험을 줄이기에 유리한 역사적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87]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대로,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조·미 미사일 협상으로 나타났다. 2000년 11월 1일부터 3일까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렸던 조·미 미사일 협상을 마치고 미국 협상대표였던 로버트 아인혼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 협상은 "구체적이고, 건설적이며 매우 실질적(detailed, constructive, and very substantive)"이었다고 한다.[288] 클린턴은 자신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조·미 미사일 협상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다.[289]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2001년 1월 12일 『로이터통신』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재임 중에 이루지 못한 북(조선) 미사일 수출중단과 위성대리발사에 관한 협상을 부시 행정부가 마무리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290] 클린턴이 말했던 인공위성 대리발사는 아마도 미국이 북(조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 가운데 마지막 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의 인공위성을 대리로 발사해주는 경제적 보상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북(조선)을 상대로 한 최대의 정치적 현안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최대의 정치적 현안'이란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 지지로 이어지게 될 조·미 국교수립이다.

클린턴의 말대로, 이제 남아있는 것은 부시 행정부의 선택밖에 없다. 부시 행정부는 집권 초기라서 아직 명확한 견해와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결국에는 북(조선)으로부터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정치·군사적 공세를 받아 파국으로 밀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을 자진해서 철수하고 조·미 국교를 수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문제를 일괄타결하기 위하여 조지 부시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북(조선)을 방문할 것이며,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에서 역사적인 조·미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김정일 총비서와 함께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관한 조·미 공동선언을 발표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화당 대통령 조지 부시는 1972년에 적대국이었던 중국을 방문하여 중·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공화당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이후에 두 번째로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 적대국의 수도에 먼저 찾아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는 외교업적을 이룩하는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난 시기 냉전구도가 해체되면서 크게 이완되었던 조·중·러 삼각전략균형이 복원되고 있으며, 조·미·일 삼각전력균형이 형성되는 것과 반비례하여 기존의 한·미·일 삼각전략균형은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남(한국)은 한·미·일 삼각전략균형을 주도하는 정치·군사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새롭게 한·중·러 삼각전략균형을 형성시킬 수는 없다. 앞으로 조·미, 조·일 국교수립이 실현되면 조·미·일 세 나라 사이에서 새로운 삼각전략균형이 형성될 것이며, 그 것은 기존의 조·중·러 삼각전략균형과 대치되는 구도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이 전환기에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중심부에 서서 4강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열쇠는 김정일 총비서가 쥐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진행한 논의를 돌이켜보면,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전략균형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동인은 북(조선)이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러시아, 중국의 뒤를 이은 제3의 군사강국으로 등장하고 미국에 대한 강압외교를 전개함으로써 마련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이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알지 못하고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논하는 것은 핵심에서 비켜선 주변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익명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어려운 사업을 완수하여 주체혁명의 무기를 마련한 김정일 총비서는 그 주체혁명의 무기를 가지고 미국의 전쟁위협을 제거하고 조·미 관계를 국교수립으로 이끌어가면서 새로운 조·미·일 삼각전략균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로써 한(조선)반도의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고 있다. 이 것이 새로운 세기의 머지 않은 장래에 통일된 삼천리 강산에 강성대국을 건설하려는 김정일 총비서의 전략구상이다. 지난 시기 오래 동안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와 간섭을 받으며 살아왔던 한(조선)민족은 연방제 통일위업을 완수한 강의한 민족으로 다시 일어나 '태평양 시대'를 자주와 평화와 번영으로 이끌어가는 역사창조의 주역이 될 것이다. (2001년 2월 28일 작성)

< 주 >

1) Jim Hackett, "The Strategic Missile Threat, 1996," Center for Defense and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이 것은 1996년도의 자료이므로 그 뒤로 탄도미사일 보유량은 더 늘었을 것이다.

2)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Monterey, California: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1999년 11월), 33쪽.

3) 고려와 근세조선의 원시로켓무기 개발에 관해 여기에 기술한 내용은 1998년 11월 21일 남(한국)의 케이비에스(KBS)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역사스페셜 - 고려시대, 우리는 로켓을 쏘았다」에서 발췌·인용한 것이다.

4) 지난 시기에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5,500 킬로미터 이상으로 규정한 것은 솔트조약(SALT-I)에서 미국 영토 대륙부의 북동 국경과 옛 소련 영토 대륙부의 북서 국경 사이의 최단 거리 5,500 킬로미터를 넘는 사거리를 가진 지상발사 탄도미사일을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5) 인도국방문제연구소 소장인 자지트 싱은 전폭기를 이용한 핵폭탄 투하는 성공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핵탄두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5월 14일자)

6)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는 『워싱턴포스트』 1992년 2월 23일자에 기고한 자신의 글에서 미국의 한 분석가가 한 말을 인용하여 그러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러시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위관리인 블라디미르 쿠마체프(Vladimir Kumachev)도 북(조선)이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Agence France-Press, 1994년 2월 14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4-1995", 5쪽에서 다시 옮김) 미국 해군정보국 국장인 해군 소장 에드워드 쉐이퍼(Edward Shaefer)에게 제출된 1994년도 정세보고서는 북(조선)이 이르면 1995년까지 노동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늦어도 2000년까지는 노동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Jane's Defense Weekly, 1994년 6월 18일자) 데이빗 올브라이트도 미국 정보기관의 평가자료에 근거하여 북(조선)이 노동 미사일에 장착할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David Albright, "How Much Plutonium Does North Korea Have?," 2000년 5월 1일.)

7) New York Times, 1999년 3월 12일자.

8)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32쪽.

9)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6월 4일자.

10) Washington Times, 1994년 3월 19일자.

11) Jane's Defense Weekly, 1995년 11월 11일자.

12) New York Times, 1999년 9월 18일자.

13) Washington Times, 1995년 9월 29일자.

14) "Executive Summary of the Report of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7월 15일.

15) North Korea Advisory Group, "Report to the Speaker U. S. House of Representative," 1999년 11월.

16) 무기급 핵물질이란 고농축 우라늄(highly enriched uranium)과 고순도 플루토늄(highly pure plutonium)을 말한다.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에 따르면, 고농축 우라늄 25 킬로그램이나 플루토늄 8 킬로그램만 있으면 핵폭발물(nuclear explosive)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며 미국 동력자원부(Department of Energy)는 그보다 더 적은 양을 가지고서도 핵폭발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United States General Accounting Office, "Nuclear Nonproliferation: Status of U. S. Efforts to Improve Nuclear Material Controls in Newly Independent States," Chapter Report, 03/08/96, GAO/NSID/RCED-96-89에서 다시 옮김)

17) 1990년대 초반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젠 등지에 있는 민수용 핵시설이나 군사용 핵시설에서 흘러나온 핵물질이 독일, 동유럽, 터키의 국제암시장에서 1킬로그램에 250,000 달러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당시 핵무기를 만들려고 했던 나라는 국제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던 핵물질을 사들일 수 있었다. 미국을 테러로 위협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이 국제암시장에서 핵물질을 사들이려고 했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인터넷 연합뉴스』, 2001년 2월 10일자) 이라크가 미국의 삼엄한 제재와 감시를 뚫고 이미 핵폭탄을 2개 만들어냈고, 또 하나를 만들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인터넷 연합뉴스』, 2001년 1월 18일자) 그 것은 국제암시장에서 핵물질을 사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18)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사업은 1976년에서 1981년까지 5년 동안 추진할 계획이었다. 만일 미국이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여 5년만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앙일보』 1997년 10월 28일자, 1998년 8월 8일자, 9월 29일자 참조) 그런데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사업은 훨씬 더 오랜 기간동안 적극적으로, 그리고 은밀히 추진되었으므로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 이전에 이미 핵폭탄과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대만의 경우를 보면, 대만은 1964년부터 핵무기 개발사업을 시작했는데, 핵무기 개발기술을 획득했던 1986년 무렵에 미국이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핵무장국이 될 수 있었다. (『중앙일보』 1997년 12월 23일자, 2000년 1월 6일자 참조)

19)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Unclassified Report of North Korea Policy Review, 1999년 10월 12일.

20) 같은 글

21) Ashton B. Carter and William J. Perry, Preventive Defense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99), 221쪽 참조.

22)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1999년 10월 12일.

23) 김철우, 『김정일 장군의 선군정치』 (평양: 평양출판사, 2000), 280쪽.

24) Barbara Starr, Jane's Defense Weekly, 1994년 3월 12일자, 1쪽.

25) Joseph S. Bermudiz, Jr., "North Korea's Musudan-ri Launch Facility," Center for Defense and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1999년 8월.

26) New York Times, 2000년 1월 11일자. 일반적으로 우주기지에는 발사대, 통제소, 우주발사체 조립시설, 연소시험시설, 광학추적시설, 기상관측시설, 발사요원숙소, 헬기장 등 15개의 대형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27) 『중앙일보』 1999년 3월 30일자.

28)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s," PacNet Newsletter, 1999년 2월 5일자.

29) 「미8군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북한군 전력평가 보고서」, 『월간 중앙』 2000년 10월 호, 인터넷 자료.

30) 『중앙일보』 1998년 12월 9일자. 1997년 10월 미국 연방상원 정부문제위원회 산하 국제안보, 확산, 연방사업 소위원회가 주최한 북(조선) 미사일 확산에 관한 청문회에 나갔던 '탈북자'는 증언에서 1972년경에 자기의 동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평안남도에 있는 지하시설에서는 10,0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사일 엔진을 비롯한 군사장비를 생산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North Korean Missile Proliferation," Hearing Before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of the 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 1997년 10월 21일)

31) 김일성, 『우리 민족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와 한 담화, 1979년 5월 12일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34쪽.

32) Susan Rosegrant in collaboration with Michael D. Watkins, Carrots, Sticks, and Question Marks: Negotiating the North Korean Nuclear Crisis, (1995년), 서재경 옮김, 『한반도, 운명에 관한 보고서』, (서울: 김영사, 1998), 87쪽.

33) 이 것은 이 비공개 청문회에 참석했던 버지니아주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척 롭이 미국 언론에 전했던 말에 근거한 것이다.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24일자)

34) Robert D. Walpole, "Speech at 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98년 9월 17일.

35) Robert D. Walpole,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Statement for the Record to the Senate Foreign Relations Committee, 1999년 9월 16일.

36) 『세카이슈호(世界週報)』 1998년 11월 호 기사를 인용한 『인터넷 연합뉴스』 1999년 1월 25일자 보도.

37) 1996년 8월 30일에 나온 미국 연방의회의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의 보고서 "Foreign Missile Threats: Analytic Soundness of Certain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인터넷 자료)에서 다시 옮김.

38) Robert D. Walpole, "Speech at 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98년 9월 17일.

39) Robert Gates, "Testimony of CIA Director before Senate Governmental Affairs Committee," 1992년 1월 15일,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2-1993", 1쪽에서 다시 옮김.

40) Central Intelligence Agency, "Prospects for the Worldwide Development of Ballistic Missile Threats," 이 보고서의 공개된 내용은 연방의회 사무관(Director of Congressional Affairs) 스탠리 모스코위츠(Stanley M. Moskowitz)가 미국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의장 로널드 델럼스(Ronald V. Dellums)에게 보낸 1993년 11월 17일자 문건에 실려있다.

41) Washington Times, 1994년 3월 19일자.

42) 『조선일보』, 1994년 7월 1일자.

43) 김연광, 「대북 첩보전선의 비상」, 『월간 조선』 1994년 8월호, 218쪽.

44) Robert D. Walpole, "North Korea's Taepo Dong Launch and Some Implications on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Speech at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1998년 12월 8일.

45) Robert D. Walpole,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1999년 9월 16일.

46) "Emerging Missile Threats to North America During the Next 15 Years," 1995년 11월. 이 국가정보평가서 가운데서 공개된 내용은 연방의회 사무관(Director of Congressional Affairs) 존 모스먼(John H. Moseman)이 미국 연방상원 정보특별위원회 의장 알렌 스펙터(Arlen Specter)에게 보낸 1996년 12월 13일자 문건에 실려있다.

47) James R. Clapper Jr., "The World Threat to U. S. Interests", Statement of Director of Defense Intelligence Agency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Senate Armed Services Committee, 1995년 1월 17일.

48) Washington Times, 1995년 9월 29일자.

49) 같은 신문

50) 1996년 8월 30일에 나온 연방의회 회계감사원(GAO)의 보고서 "Foreign Missile Threats: Analytic Soundness of Certain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인터넷 자료)에서 다시 옮김.

51) John M. Deutch, "Worldwide Threat Assessment Brief" Statement of the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Senate Select Committee on Intelligence, 1996년 2월 22일.

52) Appendix: Responses to Questions from Mr. Robert Einhorn Submitted by Senator Cochran, "North Korean Missile Proliferation," Hearing Before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of the 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 1997년 10월 21일.

53) "Emerging Missile Threats to North America During the Next 15 Years," 1995년 11월.

54)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National Missile Defense: Status of the Debate," 1998년 5월 29일.

55) Richard Davis, Director of National Security Analysis, National Security and International Affairs Division, "Foreign Missile Threats-Analytic Soundness of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95-19", Statement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Senate Select Committee on Intelligence, 1996년 12월 4일.

56) John M. Deutch, "Worldwide Threat Assessment Brief," 1996년 2월 22일.

57) 『세계일보』 1996년 4월 13일자.

58) 『세계일보』 1996년 3월 26일자.

59) Robert Gates, Independent Panel Review of "Emerging Missile Threats to North America During the Next 15 Years," Joseph Cirincione, "Assessing the Assessment: the 1999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of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he Nonproliferation Review, 2000년 봄 호, 127쪽에서 다시 옮김.

60) 『중앙일보』 1999년 11월 12일자.

61) "Executive Summary of the Report of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7월 15일.

62) George J. Tenet, "Current and Projected National Security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Statement of Acting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Senate Select Committee on Intelligence Hearing, 1997년 2월 5일.

63) 같은 글

64) 같은 글. 이 내용과 똑같은 내용은 1999년 4월 29일에 발표된 존 로더의 문건에서 되풀이되었다. (John A. Lauder, Special Assistant to the DCI for Nonproliferation, "Unclassified Statement for the Record on The Worldwide WMD Threat"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Organization of the Federal Government to Combat the Proliferation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1999년 4월 29일.)

65) Robert D. Walpole,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1999년 9월 16일.

66) John A. Lauder, Special Assistant to the DCI for Nonproliferation, "Unclassified Statement for the Record on the Worldwide WMD Threat"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Organization of the Federal Government to Combat the Proliferation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1999년 4월 29일.

67) Robert D. Walpole,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1999년 9월 16일.

68) Jack Spencer, "Assessing the Intelligence Community's Report on the Missile Threat," The Heritage Foundation Backgrounder, No. 1329, 1999년 9월 29일.

69) 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Key Points, (Joseph Cirincione, "Assessing the Assessment: the 1999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of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he Nonproliferation Review, 2000년 봄호, 127쪽에서 다시 옮김) 1999년도 국가정보평가서가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위협을 과대평가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할 것. Joseph Cirincione, "Assessing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estimony Before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of the Senate 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 2000년 2월 9일.

70)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s," 1999년 2월 5일자.

71) "Executive Summary of the Report of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7월 15일.

72) CNN 인터넷 자료, 1999년 8월 18일자.

73) Robert D. Walpole,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1999년 9월 16일.

74) George J. Tenet, "The Worldwide Threat in 2000: Global Realities of Our National Security,", Statement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Senate Select Committee on Intelligence, 2000년 2월 2일.

75) Robert D. Walpole,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Statement for the Record to the Senat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2000년 2월 9일.

76) John C. Gannon, Chairman of 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The CIA in the New World Order: Intelligence Challenges Through 2015," Remarks to the Smithsonian Associates' "Campus on the Mall", 2000년 2월 1일.

77) North Korea Advisory Group, "Report to the Speaker U. S. House of Representative," 1999년 11월.

78) 이를테면 의회조사국 연구관 래리 닉쉬가 '2002년 배치설'을 내놓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s," 1999년 2월 5일자)

79) Robert D. Walpole, National Intelligence Officer for Strategic and Nuclear Programs, "The Iranian Ballistic Missile and WMD Threat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Statement for the Record to the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Subcommittee of the Senate Governmental Affairs Committee, 2000년 9월 21일, A. Norman Schindler, Deputy Director of DCI Nonproliferation Center, "Iran's Weapons of Mass Destruction Programs to the International Security," Statement as Prepared for Delivery to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Subcommittee of the Senate Governmental Affairs Committee, 2000년 9월 21일, John A. Lauder, Director of DCI Nonproliferation Center, "Russian Proliferation to Iran's Weapons of Mass Destruction and Missile Programs," Statement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Senat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2000년 10월 5일.

80) "Executive Summary of the Report of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7월 15일.

81) 『한겨레』 1999년 2월 9일자. 이란의 탄도미사일 개발수준에 관한 개괄적인 정보는 Aaron Karp, "Lessons of Iranian Missile Programs for U. S. Nonproliferation Policy," The Nonproliferation Review, 1998년 봄-여름호를 참조할 것.

82) "Emerging Missile Threats to North America During the Next 15 Years," 1995년 11월.

83) 김명철, 『金正日 朝鮮統一の日』(東京: 光人社, 1998), 92-98쪽.

84)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4쪽.

85) 1997년 10월 미국 연방의회 청문회에 나갔던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내부에서는 북(조선)이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미국 본토를 핵탄두로 타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North Korean Missile Proliferation," Hearing Before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of the 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 1997년 10월 21일)

86) 김명철, 『金正日 朝鮮統一の日』, 94쪽.

87) 같은 책, 92쪽.

88) 김일성 주석은 "1973년 10월 전쟁 때에는 우리 나라 비행사들이 직접 애급형제들과 함께 한 전선에서 어깨겯고 싸웠"다고 말했다. (김일성, 「애급신문 <알마싸> 책임주필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 1986년 10월 16일, 『김일성 저작집 40』[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195쪽) 제3차 중동전쟁에서 패하여 시나이반도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그 무렵까지 이집트군을 지원해왔던 소련 군사고문단을 돌려보내고 그 대신 북(조선) 군사고문단을 초청하였다. 당시 이집트 공군사령관은 지금 대통령인 무바라크였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공군 특공대는 북(조선)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기습공격작전을 폈으며, 이집트 기갑부대는 시나이반도로 진격했다. 북(조선)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 차수는 당시 공군 대좌로 북(조선) 공군 1개 대대를 지휘하여 참전한 이스라엘에 대한 공습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이스라엘군을 이끈 백전노장 지휘관은 전투에서 잃은 한 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모습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모세 다얀(Moshe Dayan)이었다. 그 전쟁은 중동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아랍민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김명철, 『金正日 朝鮮統一の日』, 124-127쪽 참조) 남(한국)으로 넘어간 한 탈북자는 제4차 중동전쟁에 북(조선) 공군 1개 대대(30명)가 참전하여 이스라엘 공군과 싸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98년 9월 15일자) 일반적으로 유능한 공군 조종사 한 사람을 길러내려면 약 50억 원의 비용과 10년의 양성기간이 들어간다고 보는데, 공군 1개 대대를 참전시킨 것은 비중이 큰 군사지원이었다.

89) Joseph Bermudiz, Jane's Defense Weekly, 1993년 4월 10일자, 20쪽, 22쪽. 1999년에 나온 그의 자료에서는 그 시점을 1979년 또는 1980년이라고 수정하였다.

90)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9쪽

91) 『인터넷 연합뉴스』 1993년 6월 24일자.

92)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9쪽, 각주 73 참조할 것.

93) United States General Accounting Office, "Nuclear Proliferation: Implementation of the U. S./North Korea Agreed Framework on Nuclear Issues" (Letter Report, 06/02/97, GAO/RCED/NSIAD-97-165), Appendix IV:3.2-Some Movement Towards addressing U. S. Concerns About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s에서 다시 옮김.

94) Joseph S. Bermudiz, Jr., "North Korea's Musudan-ri Launch Facility," 1999년 8월.

95) Joseph S. Bermude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1쪽.

96) North Korea Advisory Group, "Report to the Speaker U. S. House of Representative," 1999년 11월.

97) 김명철, 『金正日 朝鮮統一の日』, 94쪽. Joseph S. Bermudiz Jr., Jane's Soviet Intelligence Review, 1990년 8월, 343-345쪽. Asia-Pacific Defense Reporter, 1991년 4월, 24쪽.

98)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10쪽 각주 43 참조할 것.

99) 김일성, 「기술혁명을 다그치며 금속공업을 발전시킬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1차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86년 2월 5-8일, 『김일성 저작집 39』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318쪽. 김정일 총비서는 1984년 5월 18일 룡성기계련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면서 10,000 톤 프레스를 만들라는 과업을 주었다. 그 기업소에서 만든 10,000 톤 프레스는 천리마 제강소에 설치되어 가동에 들어갔다.

100) 경용원, 「남북한 미사일 개발경쟁 비화: 현무 대 스커드」, 『월간 조선』 1991년 4월호, 384쪽.

101) 대한무역진흥공사, 『북한의 산업』 (서울: 대한무역진흥공사, 1995), 151쪽.

102) Asia-Pacific Defense Reporter, 1991년 4월, 24쪽.

103)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17쪽. 1997년 10월 미국 연방의회에 나갔던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조선)은 1985년에 평안남도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 지하기지를 완공했으며, 1986년에 평안북도에, 1988년에 함경북도에,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함경남도 마양도에 각각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한 지하기지를 완공했으며, 1995년에는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를 타격하기 위한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한 지하기지를 중강진에 완공했으며, 1991년에는 강원도에서 일본열도에 있는 미군기지를 타격하기 위한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한 지하기지를 착공하여 6-7년 안에 완공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North Korean Missile Proliferation," Hearing Before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of the 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 1997년 10월 21일)

104) 『한국일보』 1995년 10월 4일자.

105) 경용원, 「남북한 미사일 개발경쟁 비화: 현무 대 스커드」, 381쪽.

106) 이 내용은 1990년 7월 5일자 『워싱턴타임스』가 미국 정보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한 것이다. (경용원, 「남북한 미사일 개발경쟁 비화: 현무 대 스커드」, 380쪽)

107) Joseph S. Bermudiz, Jr., Jane's Defense Weekly, 1993년 4월 10일, 20, 22쪽.

108) 1991년 7월 15일 남(한국)의 국방장관은 국회에서 북(조선)은 자체로 생산한 스커드 씨(C) 미사일로 무장한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연대를 배치한 것로로 보인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인터넷 연합통신』 1991년 7월 15일자) 국가안전기획부장(당시) 서동권은 북(조선)이 동해안에서 사거리 5백 킬로미터의 스커드 씨(C) 미사일을 이동발사대에서 성공적으로 시험발사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로써 북(조선)은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를 자체로 생산하고 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북(조선)이 황해도 사리원에 스커드 씨 미사일 36기를 배치한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연합통신』 1991년 10월 4일자, Jane's Defense Weekly, 1991년 10월 12일자)

109) Joseph S. Bermudiz, Jr., Jane's Defense Weekly, 1993년 4월 10일, 20, 22쪽.

110)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6일자.

111) Joseph Bermudiz, "The Rise and Rise of North Korea's ICBMs," Jane's International Defense Review, 1999년 7월.

112) Proliferation Issues, 1993년 5월 10일자.

113) 김명철, 『金正日 朝鮮統一の日』, 94쪽.

114) 당시 일본의 『교토통신』, 미국의 『뉴욕타임스』, 남(한국)의 주요 일간지 등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조선)은 모두 미사일 4 기를 발사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500 킬로미터를, 다른 하나는 100 킬로미터를 날아갔으며, 나머지 둘은 100 킬로미터도 날아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한·미·일 세 나라의 언론보도에 나온 북(조선) 미사일의 사거리는 버뮤디즈의 자료에 나온 사거리보다도 더 과소평가된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때 북(조선)은 미사일 시험발사의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라진급 프리깃트함 한 척과 소해정 한 척을 일본의 노도(能登)반도 앞바다에 배치하였다.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동남쪽 직선거리로 500 킬로미터가 되는 지점은 일본의 노도반도 영해 바로 밖의 공해가 된다. 그렇다면 100 킬로미터 남짓 날아가는 단거리 미사일의 시험발사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500 킬로미터나 떨어진 노도반도 앞바다까지 함정을 배치하였다는 말인가? 세 나라 언론들은 북(조선) 미사일의 사거리를 크게 축소하여 보도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115) 『조선일보』 1998년 10월 23일자.

116) "Executive Summary of the Report of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7월 15일.

117) Proliferation Issues, 1993년 5월 10일자.

118) 『조선일보』 1993년 12월 3일자.

119) 미국 정부 관리들은 파키스탄의 신형 가우리 미사일은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중거리 미사일이라고 하면서, 이 미사일은 북(조선)의 기술제공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보았다. (New York Times, 1998년 4월 11일자) 1998년 11월 25일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이끌었던 압둘 카디르 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탑재가능무게 700 킬로그램, 사거리 1,500 킬로미터의 중거리 미사일 가우리를 대량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밝혔다. (『동아일보』 1998년 11월 28일자)

120)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2월 1일자에서 다시 옮김.

121) Executive News Service, 1993년 11월 12일자.

122) New York Times, 1993년 6월 11일자.

123) Guardian, 1993년 10월 26일자. 그러나 『조선중앙통신』은 그러한 보도내용을 부인하였다.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2-1993," 18쪽에서 다시 옮김) 이란의 고위급 군지휘관도 그러한 보도내용을 부인하였다. (AFP, 1994년 2월 24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4-1995," 5쪽에서 다시 옮김)

124) 이 것은 1997년 10월 연방의회 청문회에 증언자로 나갔던 '탈북자'가 직접 들었다고 밝혔던 내용이다. ("North Korean Missile Proliferation," Hearing Before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Security, Proliferation, and Federal Services of the Committee on Governmental Affairs, 1997년 10월 21일)

125) "Executive Summary of the Report of The Commission To Assess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7월 15일.

126) 김명철, 『金正日 朝鮮統一の日』, 94쪽.

127) 『로동신문』 1996년 12월 25일자.

128) 「정론: 금성철벽의 성새」, 『로동신문』 1997년 4월 4일자. 그 '정론'에는 "이 것은 빈말이 아니다. 이 것은 혁명의 수뇌부를 철벽으로 옹위해 나선 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의 철의 의지이고 엄숙한 경고이며 어김없는 실천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무궁무진한 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9) Jane's Defense Weekly, 1995년 11월 11일자. 이 것은 미국의 정보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 데, 남(한국) 국방부도 북(조선)이 1996년 말까지 노동 1호 미사일을 배치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국일보』 1995년 10월 10일자)

130) Reuters, 1995년 12월 12일자.

131) 스페인의 우주발사체 카프리코니오(Capricornio) 개발사업, 아르헨티나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콘돌(Condor)2 개발사업, 이집트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벡터(Vector) 개발사업,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중거리 미사일 아니스턴(Arniston) 개발사업은 중단되었다.

132) 『중앙일보』 1999년 4월 26일자. 이 것은 중앙일보가 평양방송이 보도한 내용을 인용하여 보도한 것이다. 미국의 연간 우주개발비(1992년 기준)는 350억 달러, 러시아는 70억 달러, 유럽연합은 59억 달러, 일본은 14억 달러다. 북(조선)은 5억 달러로 알려졌다. 남(한국)은 4,600만 달러다. 타이완이 1999년 1월 26일 과학인공위성 록샛 1호를 발사했는데, 인공위성 제작비는 8,300만 달러, 미국의 우주발사체를 이용한 비용은 1,800만 달러 등 모두 1억100만 달러가 들었다. (『인터넷 연합뉴스』, 1999년 1월 27일자) 남(한국)이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들어간 비용(개발비용)은 모두 850억 원으로 추산된다. (경용원, 「남북한 미사일 개발경쟁 비화: 현무 대 스커드」, 388쪽)

133) 서상국 박사가 옛 소련에 유학하였을 때, 그의 천재적 능력을 보고 놀란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에게 소련에 남아서 함께 과학을 연구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국방과학권 연구사를 거쳐 지금은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 강좌장으로 있다. (이재승, 『북한을 움직이는 테크노크라트』 [서울: 도서출판 일빛, 1998], 121쪽)

134) 변진일, 『북조선 X파일 100』 (서울: 한국산업훈련연구소, 1999), 121쪽.

135)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추진체는 구조가 간단하고 발사준비 시간이 짧은 이점은 있지만 로켓 추진체의 속도를 제어하기 어려워 정밀궤도 진입이 힘들다.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추진체는 구조가 복잡하고 발사 직전에 연료를 주입하는 준비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정밀궤도에 진입하는 데는 유리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1-2단계는 액체연료를 쓰고 3단계는 고체연료를 쓰는 혼합형 다단형 로켓 추진체가 많이 쓰이고 있다.

136) 「토론: 북한 붕괴, 득보다는 실이 많다」, 『신동아』 1997년 4월호, 682쪽.

137) Reuters, 1998년 8월 31일자.

138) Joseph Bermudiz, "The Rise and Rise of North Korea's ICBMs," 1999년 7월.

139)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6일자.

140)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5일자.

141) 『인터넷 연합뉴스』, 1999년 1월 25일자에서 다시 옮김.

142) Robert D. Walpole, "Foreign Missile Developments and the Ballistic Missile Threats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2015," 1999년 9월 16일.

143) 러시아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100 기를 상업위성을 쏘아 올릴 우주발사체로 변환하였다.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5월 30일자)

144) "Emerging Missile Threats to North America During the Next 15 Years," 1995년 11월.

145) Robert D. Walpole, "North Korea's Taepo Dong Launch and Some Implications on the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1998년 12월 8일.

146) "Foreign Missile Threats: Analytic Soundness of Certain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 (Letter Report, 1996년 8월 30일)

147) 인도는 1980년에 자체로 제작한 '우주발사체3(Space Launch Vehicle3)'에 인공위성 로히니(Rohini)를 실어 저궤도에 올려놓았다. 1992년에는 더욱 커다란 인공위성을 실은 증대우주발사체(Augmented Space Launch Vehicle)를 쏘아 올렸으며, 지금은 4단형 우주발사체인 극궤도위성발사체(Polar Satellite Launch Vehicle)를 쏘아 올리는 우주강국이다. 1994년과 1996년에는 무게 1 톤의 중량급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았고, 1998년의 지구정지위성발사체(Geosynchronous Satellite Launch Vehicle)는 무게 2.7 톤의 인공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았는데, 이로써 인도는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일본과 같은 우주강국의 대오에 들어섰다. 이 우주발사체를 탄도미사일로 변환하면 사거리 14,0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Jim Hackett, "The Strategic Missile Threat", 1996, Center for Defense and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148)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5월 4일자.

149) Washington Times, 1995년 9월 29일자.

150) 『서울신문』, 1995년 9월 11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4-1995," 20쪽에서 다시 옮김)

151) Joseph S. Bermudiz, Jr., A History of Ballistic Missile Development in the DPRK, 29쪽.

152) 같은 자료, 30쪽.

153) 같은 자료, 같은 쪽.

154) 같은 자료, 31쪽.

155) 『세계일보』, 1999년 3월 12일자.

156) Washington Times, 1999년 10월 28일자.

157) 『아사히신붕(朝日新聞)』, 1999년 10월 28일자.

158) Aviation Week and Space Technology의 보도내용을 인용한 New York Times 1999년 7월 4일자, 그리고 『인터넷 연합뉴스』 1999년 7월 3일자.

159) 이러한 내용은 1996년 5월 8일 백악관의 국방정책 및 군축 담당 선임보좌관인 로버트 벨(Robert G. Bell)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Aerospace Daily, 1996년 5월 9일자)

160) Jane's Defense Weekly, 1994년 3월 12일자, Washington Post, 1994년 3월 18일자.

161) Defense Week, 1998년 1월 23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4-1995", 19쪽에서 다시 옮김)

162) Christian Science Monitor, 1993년 12월 27일자.

163) Richard A. Clark, "Statement of Assistant Secretary of Politico-Military Affairs, Department of State" as Prepared for Delivery to the Joint Economic Committee and Subcommittee on Technology and National Security, 1992년 3월 13일.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2-1993", 4쪽에서 다시 옮김)

164) 당시 언론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정보기관 모사드(Mossad)가 북(조선)의 미사일 문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스라엘 외교부 차관(당시) 에이탄 벤처(Eitan Bentsur)가 은밀히 평양을 찾아가서 북(조선)이 시리아에 미사일을 팔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협상하였다는 보도가 나온 때는 1992년 11월 초였다. 1993년 5월 29일 북(조선)이 다단형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자 이스라엘 외교부 장관(당시)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북(조선)이 이란에 미사일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 평양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으며, 6월말에는 에이탄 벤처가 북경에서 북(조선) 관리들과 협상하였다. 당시 북(조선)은 이스라엘이 북(조선)의 민수산업에 약 10억 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중동지역에 대한 미사일 수출을 중지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에는 이스라엘 총리(당시) 이츠학 라빈(Yitzhak Rabin)은 미국의 강한 중단요구에 밀려 그 동안 이스라엘이 북(조선)의 미사일이 중동에 판매되는 문제에 관하여 북(조선)과 협상을 해오던 것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1994년 3월초에 이스라엘의 고위급 외교관들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경에서 북(조선) 대표들과 만났다. 그러나 1994년 3월 22일 이스라엘 외교부 대변인은 북(조선)과의 비밀협상에 관한 언론보도내용을 부인하였다. 1994년 6월 라빈은 북(조선)이 시리아에게 스커드 비(B), 스커드 씨(C) 미사일 뿐 아니라 생산설비도 판매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라빈의 주장은 1994년 12월 12에도 나왔다.

165) 미국 국방부 대변인(당시) 캐틀린 디 래스키(Kathleen de Laski)는 북(조선)의 다단형 탄도미사일 대포동 미사일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 미사일이 개발되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개발사업이 언제 끝나게 될는지 또는 과연 성공하게 될는지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대포동 미사일은 "미래의 무기"라고 주장했다. 지난 시기 부시 행정부 때 국방부 관리를 지낸, 비확산 문제 전문가 헨리 소콜스키(Henry Sokolski)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Jane's Defense Weekly, 1994년 3월 19일자)

166) 중앙정보국 국장 제임스 울시는 중앙정보국 회의에서 북(조선)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호와 2호를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 미사일들이 아직 시험발사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동아시아의 대부분과 서태평양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Washington Post, 1994년 3월 18일자)

167) Jane's Defense Weekly, 1994년 12월 17일자.

168) 『인터넷 연합통신』 1995년 6월 16일자.

169) Appendix: Responses to Questions from Mr. Robert Einhorn Submitted by Senator Cochran, "North Korean Missile Proliferation," 1997년 10월 21일.

170) "Politics and the Agreed Framework: North Korean Deal on Thin Ice?", Global Beat Issue Brief no. 44, 1998년 11월 10일.

171) Washington Times, 1998년 9월 16일자.

172)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s," 1999년 2월 5일자.

173) Los Angeles Times, 1999년 9월 9일자.

174) 참고로, 1999년 5월 26일 인도의 우주발사체에 실려 쏘아 올려진 남(한국)의 인공위성 '우리별 3호'는 무게가 110 킬로그램이었다.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5월 23일자) 미국이 자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렸던 인공위성의 무게는 겨우 14 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다.

175) 『세계일보』, 1999년 3월 12일자.

176) 『한겨레』, 1997년 2월 13일자.

177)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23일자.

178) 2000년 2월 18일 평양방송 보도내용을 인용한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2월 18일자.

179) New York Times, 1999년 3월 15일자.

180) 『한국일보』, 1998년 9월 15일자.

181) 이 표현은 2000년 3월초에 평양방송이 1998년 8월말 광명성 1호를 발사할 당시 어느 외국인이 했던 말을 빌려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3월 9일자에서 다시 옮김) 그 외국인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역사학 후보 원사이며, 조·러 친선 및 문화협조 러시아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블라디미르 톨스치코프다. (『한국일보』, 2000년 2월 18일자)

182) New York Times, 1998년 9월 15일자 참조.

183)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7일자.

184) 『한겨레 인터넷』, 1998년 9월 1일자.

185)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6일자. 의회조사국 연구관 래리 닉쉬는 제3단계 로켓 추진체가 약 5,000 킬로미터를 날아가 알래스카 부근의 바다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 1999년 2월 5일자)

186) Washington Times, 1998년 9월 16일자.

187)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8일자.

188) 『한국일보』, 1998년 9월 16일자.

189)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9일자.

190) 남(한국)의 국방과학기술연구소가 펴낸 『월간 국방기술정보』 1999년 3월 호는 일본의 군사전문지 『군지긴큐(軍事硏究)』의 기사를 인용하여 미국은 1998년 8월의 우주발사체를 정찰위성이 아닌 조기경보위성으로 발사와 동시에 포착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관련국에게 알려주었다고 밝혔다. 이 위성은 옛 소련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를 감시하기 위해 쏘아 올린 위성이었는데 북(조선)과 이라크 같은 나라들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연합뉴스』, 1999년 3월 16일자)

191) Associated Press, 1998년 9월 15일자.

192) Robert D. Walpole, "Speech at 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98년 9월 17일.

193)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4일자.

194)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1일자.

195)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8일자.

196)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4일자.

197) 『인터넷 연합뉴스』, 2001년 2월 6일자.

198)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5일자.

199) '오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인공위성은 39,700 킬로미터 상공에서 전 세계의 탄도미사일 발사 상황을 감시하고 있다.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5월 10일자)

200)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5일자.

201)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9일자.

202)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2일자.

203)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16일자.

204)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24일자.

205) 그런데 이 전파는 약 40년 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던 시대에 사용한 주파수대와 같은 것이어서 주파수가 너무 낮아 그 것을 수신할 수 있는 설비가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한다.(『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9월 4일자)

206) 재일조선인총련합회가 펴내는 『조선신보』는 광명성 1호가 발사되기 약 석 달 전인 1998년 5월에 국가과학원 평양천문대에 관한 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인터넷 연합뉴스』, 1998년 5월 20일자 참조)

207) Inquisit, 1998년 9월 26일자, 『로동신문』 1999년 7월 18일자.

208) Statement by H.E. Mr. Paek Nam Sun,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o the Fifty-Fourth Session of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1999년 9월 25일.

209) Inquisit, 1998년 10월 2일자.

210) 셀릭 해리슨, 「대북한 '선제공격론'의 함정」, 『한겨레』 1999년 4월 5일자.

211) Jane's Defense Weekly, 1998년 12월 9일자.

212) 『교토통신』 1998년 12월 12일자.

213) 김정옥, 「공공연한 선전포고」, 『로동신문』 1998년 12월 5일자.

214) 동태관, 「무자비하게 징벌하라」, 『로동신문』 1998년 12월 4일자.

215) 군사론평원, 「상대를 똑바로 알고 덤벼들라」, 『로동신문』 1998년 12월 4일자.

216) 백문규, 「조선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라」, 『로동신문』 1998년 12월 5일자.

217) 『로동신문』 1998년 12월 3일자 보도.

218) New York Times, 1998년 12월 25일자.

219) Pacific Stars and Stripes, 1999년 2월 9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 Latest Update," 2쪽에서 다시 옮김)

220) 『세계일보」 1999년 3월 5일자.

221) 『조선일보』 1999년 3월 19일자.

222) North Korea Advisory Group, "Report to the Speaker U. S. House of Representative," 1999년 11월.

223)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 Latest Update," 4쪽.

224) New York Times, 1999년 7월 3일자.

225)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12월 28일자.

226)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s," 1999년 2월 5일자.

227)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1999년 10월 12일.

228) New York Times, 1999년 6월 18일자.

229) 같은 신문

230) 같은 신문

231) 같은 신문

232) 이러한 사실은 1999년 7월 4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남(한국) 정부관리의 말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북(조선)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미국의 찰스 카트먼(Charles Kartman) 특사의 협상에서 북(조선)이 이러한 일괄타결안을 제시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교토통신』 1999년 7월 4일자)

233) Associated Press, 1999년 6월 24일자.

234) Florida Today Space Online, 1999년 8월 7일자.

235) Washington Times, 1999년 7월 1일자.

236) "US Wants KEDO Preserved Even if 2nd Missile Launched," 『교토통신』, 1999년 7월 2일자.

237) New York Times, 1999년 7월 3일자, 그리고 Pacific Stars and Stripes, 1999년 7월 13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 Latest Update," 9쪽에서 다시 옮김)

238) 이 것은 1999년 7월 13일 남(한국)의 정보기관을 통해 알려진 내용이다. (Pacific Stars and Stripes, 1999년 7월 13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 Latest Update," 9쪽에서 다시 옮김])

239) Florida Today Space Online, 1999년 8월 7일자.

240) Los Angeles Times, 1999년 9월 10일자.

241) George J. Tenet, "The Worldwide Threat in 2000: Global Realities of Our National Security," 2000년 3월 21일.

242) Benjamin A. Gilman, "Speech to the Asia Society," 1999년 10월 21일.

243) New York Times, 1999년 8월 26일자.

244)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99년 9월 21일자를 참조할 것.

245) 외교통상관계의 정상화란 완전한 관계정상화, 곧 국교수립을 뜻하는 개념이다. 미국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for International Security Affairs)(당시) 리처드 아미티지가 1999년 3월 4일에 연방하원 의장 길먼에게 제출했던 '아미티지 보고서'도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일괄타결안(comprehensive package)를 제시하면서 "북(조선)이 미국의 안보관심사를 충족시켜준다면 미국은 완전한 관계정상화로 나아갈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The Armitage Report on North Korea: Naval Blockades and Preemptive Strikes by Japanese Forces?," 1999년 3월 4일)

246) New York Times, 1999년 9월 15일자.

247) New York Times, 1999년 9월 18일자.

248) 같은 신문

249) Haksoon Paik, "The Berlin Agreement and the Perry Report: Opening a New Era in U. S.-North Korea Relations,"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Unification Studies, Korea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Vol. 8, 1999, 89쪽.

250) New York Times, 1999년 9월 18일자.

251) "The State Department transcript of Albright's remarks," 2000년 11월 2일.

252) "Statement by the President on U. S. Policy Toward North Korea," 2000년 12월 28일.

253) Press Statement issued by Robert J. Einhorn, Assistant of State for Nonproliferation in Kuala Lumpur, Malaysia, 2000년 11월 3일.

254) Washington Times, 1994년 6월 8일자.

255) Paul Bracken, "The Second Nuclear Age", Foreign Affairs, January/February 2000, 153쪽.

256) 같은 글, 같은 쪽.

257) 이러한 내용에 관해서는 1996년 4월 21일부터 26일까지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아태주둔 미군기지를 가다」에 주로 의존하였다.

258) 원형공산오차가 2 킬로미터인 경우, 표적에 미사일 100 발을 쏘면 표적을 중심으로 반지름 2 킬로미터 안에 50 발이 떨어진다. 1 밀(mil)이란 1,000분의 1을 뜻한다. 사거리 200 킬로미터의 탄도 미사일의 원형공산오차가 1 밀이라고 하면, 200 미터가 된다. 사거리 100 킬로미터의 탄도미사일은 원형공산오차가 100 미터 정도가 되며, 사거리 1,000 킬로미터의 탄도미사일은 원형공산오차가 2 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259) 일반적으로 사거리 100 킬로미터의 탄도 미사일은 원형공산오차가 100 미터 정도가 된다고 본다. 미사일 전문가들은 북(조선)의 미사일은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에 비해 원형공산오차가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조선)이 1993년 5월 29일에 시험발사한 미사일의 사거리를 2,500 킬로미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경우 공산오차는 2 킬로미터로 보고 있다. 이러한 비율이라면, 사거리 10,0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그 공산오차가 8 킬로미터라고 생각된다.

260) 셀릭 해리슨, 「일본의 군사대국 '야망'」, 『한겨레』 1999년 8월 2일자.

261) New York Times, 1999년 9월 18일자.

262)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이 1997년 1월 17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핵전략은 재래식 공격을 핵무기로 대응하는 전략과 핵공격을 핵무기로 대응하는 전략으로 나뉘어져 있는 데, 한(조선)반도에 대한 전략은 북(조선)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하더라도 핵무기로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전략이라고 한다. (『중앙일보』 1997년 1월 29일자)

263) John C. Gannon, Chairman of 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The CIA in the New World Order: Intelligence Challenges Through 2015," 2000년 2월 1일.

264) "The Emerging Ballistic Missi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commissioned by the Strategic Defense Initiative Organization of the Department of Defense, prepared by the Proliferation Study Team, chaired by Lieutenant General William E. Odom, USA (ret.), 1993년 2월.

265) 백남순 외무상의 연설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형편과 그 밖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1999년 9월 27일.

266) George Gedda, "Report: N. Korea Nuke Ability Vast," Associated Press, 1999년 10월 12일자.

267)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1999년 10월 12일.

268) 김경원, 「북 미사일 왜 문제인가」, 『조선일보』 1999년 8월 11일자.

269) 『한겨레』 1999년 7월 29일자 참조.

270) Washington Post, 1998년 9월 11일자.

271) 미국 연방하원 정책위원회 의장인 크리스토퍼 콕스(Christopher Cox)가 2000년 7월에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던 대로, "미국은 1948년에 북(조선)이 건국한 이래 지금까지 북(조선)에게 동전 한 푼 도와준 일이 없었는데, 클린턴 행정부에 와서 북(조선)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대외원조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가 된 것"이며, "클린턴 행정부는 북(조선)의 지속적인 군비증강을 방지하는 대신에 재정적으로 도와주었다." (Christopher Cox, "Clinton-Gore Aid to North Korea Supports Kim Jong-Il's Million-Man Army Enough Plutonium to Build 65 Nuclear Bombs A Year," The House Policy Committee's Perspective Paper, 2000년 7월 27일) 또한 북(조선)자문단은 1999년 11월 3일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은 북(조선)에게 해마다 2억7,000만 달러를 지원하여 지난 다섯 해 동안 모두 6억4,500만 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머지 않아 10억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이 자기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고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면서 괴롭히고 있는 적대국인 북(조선)에게 가장 많은 경제지원을 해야 하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미국이 이른바 '깡패국가'라고 부르는 나라들 가운데 오로지 북(조선)만이 미국의 경제지원을 받고 있는 특별한 지위에 있는 나라며, 미국이 더 이상 봉쇄와 전쟁의 위협을 가하지 못하게 된 특별한 지위에 있는 나라다.

272) Young Whan Kihl, "Engagement Policy, North Korea, and Preventive Diplomac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Unification Studies (Seoul: Korea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Vol. 8, 1999), 4쪽에서 다시 옮김.

273) 『중앙일보』 1999년 11월 9일자. 월터 슬로컴이 말한 두 단계 대응체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응체계는 지상운영 요격미사일 100 기와 이를 유도하는 레이더로 이루어진 국가미사일 방어체계 개발사업을 2001년에 시작하여 2005년까지 알래스카에 구축한다는 것인데, 이로써 미국 50 개 주 전역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대응체계는 요격미사일과 기지, 유도레이더를 추가로 배치하고 인공위성에 요격기를 탑재하여 미국 본토로 날아오는 탄도미사일을 초기 상승단계에 요격할 수 있는 체계다. 첫째 대응체계가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중간비행단계(midcourse phase)에서 요격하는 방어체계라고 한다면, 둘째 대응체계는 초기의 추력비행단계(booster phase)에서 요격하는 방어체계라고 할 수 있다.

274) 미국의 군사주간지 『디펜스 뉴스(Defense News)』를 인용한 『한국일보』 1999년 3월 17일자.

275) 1996년 9월 24일 『교토통신』이 보도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일 안보조약이 개정된 이듬해인 1961년에 일본 정부각료들 사이에서는 핵무장론이 제기되었는데, 이를 저지한 것은 미국이었다고 한다. (『한겨레』, 1996년 9월 25일자) 중국이 처음으로 핵폭발을 실험했던 때로부터 석 달 뒤인 1965년 1월 12일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당시) 존슨(Linden B. Johnson)을 만난 일본 총리(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는 중국이 핵무기로 무장하게 되면 일본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겨레』, 1998년 5월 26일자) 존슨 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발견된 1964년 6월 26일자 문서 「일본의 장래에 관한 국무부의 정책」은 일본이 핵개발에 나선다면 1970년까지 핵탄두를 탑재한 사거리 1,600 킬로미터급 미사일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분석하였다. (『세계일보』, 2000년 12월 29일자)

276) Reuters, 1994년 9월 7일자.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Chronology of North Korea's Missile Trade and Developments: 1992-1993," 18쪽에서 다시 옮김.

277) 『니혼게이자이신붕(日本經濟新聞)』, 1998년 11월 7일자.

278) 셀릭 해리슨, 「일본의 군사대국 '야망'」, 『한겨레』 1999년 8월 2일자.

279) 일본 헌법 제9조는 "1.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및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2. 전 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 전력은 보지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280) 『아사히신붕(朝日新聞)』 1999년 7월 25일자 보도를 인용한 『한겨레』 1999년 7월 26일자 보도.

281)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1999년 10월 12일.

282) 페리 보고서가 나오기 이전에 나온 주장이었지만, 의회조사국 연구관 래리 닉쉬는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한(조선)반도의 군비통제라는 큰 틀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Larry Niksch, "North Korea's Coming ICBMs," 1999년 2월 5일자)

283)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1999년 10월 12일. 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조선)반도의 통일에 관하여 많이 토론했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페리 보고서에서는, 적어도 공개된 보고서에서는 명확한 견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한국(조선)의 통일에 관하여 많은 견해가 나왔지만, 통일문제는 궁극적으로 한국(조선)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284) "The State Department transcript of Albright's remarks," 2000년 11월 2일.

285) 『한겨레』 1998년 10월 24일자.

286) "The State Department transcript of Albright's remarks," 2000년 11월 2일.

287) 같은 자료.

288) Press Statement issued by Robert J. Einhorn, Assistant of State for Nonproliferation in Kuala Lumpur, Malaysia, 2000년 11월 3일.

289) USA Today, 2000년 12월 29일자.

290) 『인터넷 한겨레』 2001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