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국교수립과 한(조선)반도의 통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이 글은 서울에서 발행되는 대중시사잡지 월간 『말』 2000년 11월 호에 실린 기고문이다. 그 잡지에 실려있는 제목은 「긴급진단: 10.12 북미공동성명 합의의 배경과 전망 - 미국도 속으론 연방제 통일 원한다」인데, 읽는 이들이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어서 새로운 제목을 달았다. 본문에 나오는 표기법은 월간 『말』에서 적은 대로 놔두었다. ⊙

한반도가 다시 격동하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이은 10·12일 북미공동성명 발표.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보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과연 한반도 정세 변화의 끝은 어디이며 그 근본적 동인은 무엇인가. 북미관계 정상화와 주한미군 철수, 한반도 평화통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지난 10월 12일 발표된 '북미공동성명'은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서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명백한 의사를 밝힌 외교문서다. 이 외교문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북·미 두 나라가 국교수립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북·미공동성명에 나타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란 상호 적대관계 청산, 상호 주권존중 및 내정불간섭, 상호 불가침, 상호 경제협력, 미국의 한(조선)반도 통일 지지다.

둘째, 북·미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미국의 실천행동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외교문서에 합의해놓고도 시간을 질질 끌어왔던 과거 미국의 행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북의 생각이었고, 바로 그래서 예상을 깨고 이번 워싱턴 회담에 권력 2인자인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을 특사로 파견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 측에 적대관계 청산 의사를 실제 행동으로 입증하라는 무언의 요구였고, 결국 미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미국이 북에 대한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사는 11월로 예정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과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라는 실천행동으로 입증될 것이다.

북·미수교 이끌어낸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

다음으로 북·미 두 나라가 국교수립을 추진하게 된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자.

지금 북·미 관계를 국교수립으로 끌어가고 있는 변화의 원인은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다급한 요구에 있다. 지금 미국은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말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미 1993년 5월 3천km 다단식 미사일 발사에 성공해 하와이를 사정거리에 둔 북은 19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 발사를 통해 미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 발사능력을 과시했다. 위성 관찰을 통해 이를 확인한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고,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극비에 붙인 채 북과의 전면적인 관계 재정립을 모색해왔던 것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실험 수준이 아니라)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일본의 재무장은 필연이 되고, 이는 곧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의 실질적 와해를 뜻한다. 아울러 미국 주도의 세계군사질서는 극심한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1993년과 1994년 미국이 수립했던 '5027 계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제 핵공격으로 아예 멸망시켜야 할 '깡패국가'로 낙인찍었던 북과의 관계개선으로 돌아선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99년 5월 미국 군사전문가 조셉 버뮤디즈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사정거리가 1만km"라고 인정한 것처럼, 미국이 김일성 주석 사후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위기로 결국 파멸의 길을 걸을 것이라 예측하며 제네바 합의서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북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미국 본토 공격이 가능한 미사일 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북이 만일 '광명성 2호'를 발사한다면 그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미국의 군사전략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량파괴무기 확산저지전략의 파탄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급한 쪽은 미국이며 고삐를 쥐고 있는 쪽은 북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1990년대에 일어났던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세 차례의 정세변화는 모두 북의 핵무기 문제 및 장거리 미사일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1993년 6월의 북·미 공동성명 발표(이 때 북·미는 이번 공동성명의 합의내용과 같은 평화공존, 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통일 실현이란 3대 원칙에 이미 합의했다)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 문제와 북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1994년 10월의 북·미 기본합의서 채택도 북의 핵무기 개발 문제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 미국의 대북정책을 뒤바꾸어놓은 1999년 9월의 '페리 보고서' 발표 역시 1998년 8월의 '광명성 1호' 발사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이 북의 '광명성 2호' 발사를 저지하는 문제는 북에 대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여 평화공존관계로 들어서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미국의 대북 평화공존전략을 담고 있는 '페리 보고서'도 결국 미국이 이제부터 북과 전쟁할 의사를 포기하겠으니 북도 자기들과 전쟁할 의사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북 전쟁포기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화공존은 곧 국교수립을 의미한다. 이것이 북미수교 추진의 배경이다.

미국의 고뇌와 최종선택

평화공존과 국교수립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근원을 제거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전쟁의 물리적 수단인 주한미군철수 문제가 필연적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군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배구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배구도는 한·미동맹체제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주한미군이 없는 한·미동맹체제는 그 존재이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주한미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과정에도 한·미동맹체제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되겠지만, 북을 적대하는 군사·정치동맹체제의 성격은 소멸되어갈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는 한·미군사동맹체제의 급격한 약화, 더 나아가서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저해해오고 있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구도가 무너진다는 것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앞당길 수 있는 환경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페리 보고서'에 담겨 있다. '페리 보고서'가 지향하고 있는 전략목표는 두 가지다.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것과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주한미군을 자진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미국의 전략가들의 고민이 있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주한미군을 철수한 뒤에도 미국이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고 있을까? 적대적이지 않고 우호적이며, 적대적이지 않고 평화적인 그런 기형적 분단체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전망은 사실상 공상에 가깝다. 주한미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상황은 분단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 곧 한반도의 통일이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상황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한미군은 분단체제의 적대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의 실체다. 따라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는 것은 그 적대적인 분단체제의 유지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대적인 분단체제는 북·미 적대관계와 남·북 적대관계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적대관계가 해소된다면 분단체제는 우호적이며 평화적인 분단체제로 성격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부터 허물어질 것이다.

페리 보고서의 '감추어진 전략목표'

미국이 '페리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계속 추진하여 북과 국교를 수립하는 경우, 분단체제의 평화적 관리라는 미국의 목표나 의도와는 정반대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라는 귀착점으로 다가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째서 '페리 보고서'를 추진하여 북과 수교하려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미국의 한반도 전략이 자기의 선택권을 결정적으로 제한 당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지금 미국의 한반도 전략의 선택권은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 저울질하는 상황에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무장한 군사강국인 북이 대량파괴무기 확산저지전략을 무너뜨리는 것을 허용하느냐, 아니면 미국과 중국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영세중립화된 연방제 통일국가의 출현을 허용하느냐. 미국은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불가피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인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결국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후자의 가능성을 미국의 한반도 전략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페리 보고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 작성된 것이다.

'페리 보고서'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분단체제의 평화적 관리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보여주는 전략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보고서는 주한미군을 자진 철수하고, 중립화된 연방제 통일국가의 등장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는 '감추어진 전략목표'를 담고 있는 정책문서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외부에 공개된 '페리 보고서'의 내용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로 그 일부가 '보여주는 전략목표'인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페리 보고서'는 '감추어둔 전략목표'를 향하여 움직여나갈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북은 미국의 전략이 '감추어진 전략목표'를 향해 움직여나가도록 강제할 것이다.

적대관계 청산과 국교수립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과정이 곧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이다. 중·미수교 협상과정을 보면, 적대관계 청산의사를 밝히고 수교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2월 상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1980년 1월에 이르러서야 등소평이 워싱턴을 방문함으로써 수교협정에 조인할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북·미 관계는 중·미 관계와 매우 다른 경로를 밟을 것을 보인다. 예상보다 빠른 시일 안에 수교협정이 체결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북·미관계 정상화를 촉발시킨 결정적 요인은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다. 미국은 이로 인한 대량파괴무기 확산저지전략의 파탄 위기에 때문에라도 북과의 관계 정상화를 더욱 빠른 속도로 추진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비해서 중·미관계 개선을 촉발시킨 요인은 중국의 핵무기 문제나 대륙간탄도미사일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소 대립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분열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과 손을 잡고 소련을 고립·약화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에 따라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그다지 다급하지 않았다.

둘째, 남북관계 개선의 급진전이 북미관계 개선을 재촉하는 측면이 있다.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북관계는 화해·교류·협력을 향해서 치닫고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될수록 북미관계 개선을 반대하는 워싱턴의 강경파들(주로 연방의회에 포진하고 있는 대북 강경파들)은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 북·미 국교수립을 추진하려는 북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평양회담과 6·15 공동선언 발표에 적극적이었으며, 그 이후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화해·교류·협력 사업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무너지는 분단체제, 다가오는 통일시대

다른 한편, 대량파괴무기 확산저지전략의 파탄위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있는 클린턴 행정부도 남북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는 것을 늦출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남북 철도복원 사업에서 드러났듯이, 그 사업이 휴전선에 배치된 인민군대가 서울로 직통하는 진격로에 묻힌 지뢰를 걷어내고 아스팔트까지 깔아주는 문제이며, 주한미군 지상군이 지키고 있는 전략요충지를 인민군대에게 개방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도 미국 군부는 (속으로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방치하고 있다.

전략요충지의 개방을 방치하는 이러한 현상은 클린턴 행정부가 남북 화해·교류·협력사업의 급진전을 전혀 정치적 부담으로 느끼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리어 남북관계 개선의 급진전을 바라고 있다는 인상마저 갖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내 보수주의자들의 남북관계 '속도조절'을 일축이라도 하듯 파격적인 북·미공동성명에 합의한 것이다.

남북관계가 개선될수록 북·미 관계는 개선될 것이다. 그 반대 현상도 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계속하여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한반도 정세의 질적 변화를 추동할 것이다. 이제 밑으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분단체제가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격변으로 나아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