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만 민족에게 통일의 신심을 안겨준 평양회담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나는 2000년 7월 4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새 천년과 민족통일 - 8.15 광복 55주년, 7.4 공동성명 발표 28주년 기념 통일토론회'에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그 토론회에 참석한 뒤에 나는 초청자인 조국평화통일협회의 요청에 따라 7월 5일부터 7일까지 오사카, 고베, 교토에서 재일동포를 위한 강연에 출연하였다. 이 글은 그 강연내용을 정리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원고 없이 진행한 강연이었으므로 세 차례 강연내용이 각기 조금씩 달랐으나, 이 글에서는 그 내용을 모두 아우르면서 다듬고 좀더 채워넣었다. 나를 초청하여 주었던 조국평화통일협회에게, 그리고 부족한 나를 반겨 대접해주었던 재일동포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해 드린다. 한여름 무더위를 무릅쓰고 원근각처에서 강연회장으로 달려온 수많은 동포들, 부족한 나의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때로 눈시울을 붉히고 때로 웃음보를 터뜨리며 감동의 열기를 함께 나눈 동포들의 순결한 마음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

< 차 례 >

(1) 통일의 항구를 찾아가는 고난의 항해

(2) 평양회담은 기적이 아니다

(3) 그때 그는 어디에 서있었던가

(4) 김정일 총비서의 결심과 전략

(5) 미국을 움직여 통일의 돌파구를 열다

(6) 민족대단결을 방해하는 미국

(7) 분단의 나그네에서 통일의 주인으로

(1) 통일의 항구를 찾아가는 고난의 항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1997년 10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김정일 총비서는 "지금 우리는 고생하고 있지만, 3년 뒤에는 정세가 풀리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도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아마 북(조선)의 당일군들도 고생하고 있는 자기들을 격려하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려니 하는 정도로 생각했을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1997년 10월이라는 시점은 김정일 총비서와 북(조선) 동포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6.25 전쟁 뒤로 가장 힘들었던 '고난의 행군'이 막바지에 오르고 있던 엄혹한 시련기였습니다. 시련을 겪으며 간고분투의 길을 가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3년 뒤의 희망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다가오는 새 천년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던 시절이었건만, 그때까지 식량난이라는 말조차 모르던 동포들이 통강냉이밥을 먹으며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습니다.

미국의 연구자들이 발표한 자료에 보면 이런 통계수치가 나옵니다. 북(조선)의 식량생산량이 최고 수준에 올랐던 때에는 연간 5백48만 톤까지 식량을 생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5년과 1996년에 연거푸 몰아친 대홍수는 국토의 4분의 3을 휩쓸어갔고 수재민 5백20만 명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유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원유수입량은 중국에서 해마다 1백20만 톤 씩 들여갔는데 1994년에는 20만 톤으로 줄었습니다. 이란에서 1백만 톤 씩 들여간 것이 20만 톤으로 줄었습니다. 러시아에서 85만 톤 씩 들여간 것이 20만 톤으로 줄었습니다. 연간 원유수입량 3백5만 톤이 60만 톤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석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원유공급의 절대량이 모자라게 된 것은 산업전반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장에서는 기계 동음이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철도수송과 화물차수송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협동농장의 트랙터가 멈춰 섰습니다. 비료생산량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식량생산은 곤두박질쳤습니다. 1995년과 1996년의 대홍수를 겪은 뒤인 1997년에 식량생산량은 3백49만 톤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식량이 2백만 톤이나 되었습니다. 국내총생산(GDP)을 보면 1997년에 마이너스 6.8퍼센트로 추락했습니다. 1997년에 북(조선)의 경제는 이처럼 거의 절망적인 상황으로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2천2백만 동포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강냉이가루빵과 장국을 먹으면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혈맹이라고 곧잘 말하던 중국도 북(조선)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북(조선)에게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해보려는 대국주의에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북(조선)으로 들어가는 송유관을 졸라매었고, 식량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북(조선)은 베트남에 특사를 보내어 식량을 얻어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세계 제2위의 쌀 수출국인 그 나라도 미국과 남(한국)의 눈치나 슬슬 살피면서 선뜻 식량을 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베트남 전쟁시기에 북(조선)은 자기들이 금싸라기 같이 아끼는 공군 조종사들을 보내어 베트남 민족의 해방전쟁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북(조선) 공군 조종사들이 격추한 미군 항공기는 1백20여대나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북(조선)은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에 맞서 싸우며 피를 흘린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베트남 정부관리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식량 1천 톤을 무상으로 줄 터이니 그거라도 가져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북(조선) 관리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박차고 회담장을 떠났다고 합니다.

『로동신문』을 읽어보면,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우리는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고립압살책동에 단독으로 맞서 싸웠다"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단독으로'라는 말에 찍혀 있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시련과 고난의 폭풍우에 휘말리며 갖은 고생을 겪고 있는 북(조선)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집권세력들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이 기회에 자기들의 최대 적대국으로 남아있는 북(조선)을 고립시키고 압살해보려고 날뛰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저걸 봐라. 폭풍우를 만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난파선은 이제 곧 침몰하고 말 거다." 저들이 내돌렸던 이른바 '북(조선) 붕괴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나운 폭풍우는 쉬지 않고 몰아쳤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사존망의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었습니다. 납덩이같은 중압감이 2천2백만 동포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갑판에는 비바람을 온몸에 맞으며 우뚝 서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배를 이끌고 있는 선장이었습니다. 선장은 선원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동무들, 우리는 이 성난 바다 위에서 폭풍우에 휘말려 있습니다. 배의 동력기관은 기름이 떨어져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배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분단의 항구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통일의 항구를 찾아 항해를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깃발을 저 돛대 위에 휘날리게 하시오. 자주의 항로를 따라 앞으로! 통일의 항구를 향해 앞으로!"

선장은 비바람 속에서 조타기를 힘껏 움켜쥐었고, 선원들은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선원 한 사람이 돛대 꼭대기 높은 곳에 깃발을 매달아 올렸습니다. 그 커다란 기폭은 비바람 속에서 마치 몸부림을 치는 듯 나부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폭에는 '일심단결'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침몰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그 배는 일심단결의 깃발을 휘날리며 비바람 속을 헤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집채만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면서 뱃전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습니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조타기를 잡은 선장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이 배에는 이제 먹을 식량도 마실 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의 항구를 찾아 고난의 항해를 계속해야 합니다. 통일의 항구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생사운명을 같이 합시다."

폭풍우를 만난 그 배는 그렇게 1998년의 항로를 지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캄캄한 바다 위에서는 불빛 한 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폭풍우 속에서 다시 한 해가 지났습니다. 1999년이 왔습니다. 그래도 통일 항구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 해가 지나고 200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6월 13일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습니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통일 항구의 불빛이다!"

(2) 평양회담은 기적이 아니다

동포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평양회담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양회담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기적이 아니올시다. 조국통일의 길을 찾아서 험하고 험한 고난의 길을 헤쳐온 칠천만 민족의 피땀어린 투쟁이 있었기에 평양회담이 성사된 것입니다. 남북해외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희생의 길을 걸어온 수많은 통일일군들이 있었기에 평양회담은 성사된 것입니다. 평양회담은 하늘에서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칠천만 민족의 통일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고귀한 결정체입니다.

통일을 위해 흘리는 피땀과 눈물에 대해서 말하려하니, 조국의 남녘땅에서 제가 겪은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난해 8월 15일 서울대 광장에서 열린 범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습니다. 해마다 8.15가 되면 남녘땅 곳곳에서 통일일군들이 서울로 모여듭니다. 전세버스를 타고 수천 명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경찰병력 수천 명이 서울대 정문을 가로막고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청년학생들은 경찰의 봉쇄망을 피해서 서울대 뒤에 있는 관악산 높은 봉우리를 캄캄한 밤에 일렬종대로 타고 넘어 새벽 1시, 2시나 되어서야 대회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지금 여러분은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강연회장에 이렇게 앉아 계시지만, 범민족통일대축전이 열리는 현장에는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8월의 폭염이 사정없이 쏟아집니다. 뜨거운 직사광선을 가려줄 한 뼘 그늘도 없습니다. 비가 내리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우산도 없이 그대로 맞으면서 대회를 진행해야 합니다. 학교당국은 모든 학교건물을 미리 커다란 자물쇠로 잠가 두었기 때문에 밤에는 그 잔디밭에서 그대로 눈을 잠깐 붙이는 둥 마는 둥 날을 새야 합니다.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주는 데가 없습니다. 김밥이나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워야 합니다. "조국통일 완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낮과 밤을 그렇게 보내야 합니다.

대회를 마치면서 판문점 진격투쟁을 시작합니다. 한총련 학생들이 형형색색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투쟁에 앞장을 섭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목멘 소리로 절규합니다. 투쟁가 높이 부르면서 서울대 정문 밖으로 행진하여 나갑니다. 그러나 정문 앞에는 그 청년학생들보다 몇 배나 많은 경찰병력 수 천명이 커다란 방패와 진압봉으로 무장하고 길을 가로 막아 나섭니다. 팔짱을 끼고 대오를 이룬 청년학생들은 아스팔트길 위에 주저앉습니다. 무릎을 꿇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외칩니다. "조국통일 완수하자, 조국통일 완수하자......" 반바지 차림을 한 그들의 무릎은 아스팔트길 위에서 몇 걸음 가지 못하여 이내 맨살이 까지면서 피가 흐릅니다. 사나운 경찰들이 난폭하게 달려들어 진압봉을 휘두르고 그들을 철창으로 질질 끌어가 버립니다.

여러분, 조국통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남녘땅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자기의 청춘을 바치고, 구슬땀을 바치고, 그리고 마침내는 목숨까지 바치는 그런 통일일군들의 자기희생이 있었기에 평양회담이 성사된 것입니다. 평양회담은 결코 기적이 아니올시다. 저는 남녘땅의 통일일군들이 갖은 고생하면서도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잃지 않고 투쟁하는 장한 모습을 수없이 보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숨은 공로와 눈물겨운 투쟁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고 명예도 없습니다. 누가 넉넉하게 활동비를 주지도 않습니다. 어떤 때는 끼니를 걸러야 하고, 교통비가 없어서 걸어다녀야 합니다. 값싼 라면이나 끓어먹으면서 노동자들과 농민들 속에 들어가고, 청년학생들과 지역주민들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 그들의 장한 모습을 볼 때면, 맛난 음식을 실컷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반통일세력은 그들을 감옥으로 끌어갈 기회만을 노리면서 감시의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면서 체포하고 투옥하려 합니다. 끊임없이 협박과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통과 시련뿐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통일일군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때로 저는 그들의 신변이 걱정되어 괜찮겠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일 저들이 우릴 잡아가면 법무부가 운영하는 공짜 호텔에서 몇 년 푹 쉬고 나오면 됩니다. 그 동안 사업과 투쟁에서 지쳤는데 감방에서 책도 읽고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감옥투쟁을 벌이는 일군에게는 사업적 권위도 생깁니다."

동포 여러분,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요. 이번에 발표된 남북공동선언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고향에 돌아가시도록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것을 다 아실 겁니다. 그 선언이 발표되던 날 가장 기뻐한 분들이 남녘땅의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이었습니다. 지금 남녘땅에는 비전향 장기수 어른이 약 1백 명 가량 계십니다. 그분들이 감옥 안에서 보낸 세월은 평균 30년이나 됩니다. 한 평도 안 되는 독방에서, 누우면 발을 뻗을 수조차 없는 철창 속에 갇혀 30년이나 되는 기나긴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1백 명이나 되는 분들이 30년씩 감옥살이를 했으니 그 투옥기간을 모두 합하면 3천년이나 됩니다. 지금부터 3천년 전이라면 한반도는 청동기시대였는데, 그 아득한 옛날부터 그들은 오로지 조국통일을 위해 한 평도 안 되는 철창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왔던 것입니다.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 이외에도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녘땅에서 유명무명의 통일일군들이 감옥에서 보낸 날수를 모두 합한다면 아마 2천년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5천년 세월동안 감옥투쟁을 벌여온 것이 됩니다. 단군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그때부터 이 땅의 통일일군들은 반만년 세월을 오로지 조국통일을 위해 감옥투쟁을 벌여온 것입니다. 칠천만 민족의 반만년 역사가 통일일군들의 감옥투쟁 역사와 일치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남녘땅에서 조국통일운동이 그토록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과 더불어, 여기 해외동포사회에서도 헌신적인 조국통일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재일동포들 가운데 자기의 재산을 조국통일을 위해서 내놓은 분들이 여러분 계시다고 했습니다. 씹던 껌도 막상 뱉어버리려면 아까운 생각이 드는데, 하물며 평생토록 힘들여 모은 재산을 내놓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누가 자기의 재산이 아까운 줄 모르나요? 조국통일을 위해서 말없이 자기희생의 노력을 바쳐가는 해외동포들이 있었기에 평양회담은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3) 그때 그는 어디에 서있었던가

이제 우리의 눈길을 돌려 북녘땅을 바라봅시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던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는 인민군대를 찾아가는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끊임없이 인민군대를 찾아갔습니다. 북녘 동포들이 고난의 행군길을 헤쳐가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현지지도에 나선 김정일 총비서와 수행원들이 식사시간이 되어 함께 앉았는데 밥상에는 강냉이가루빵과 멀건 장국이 덜렁 올랐습니다. 그 밥상 앞에서 수행원들은 차마 숟가락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때 김정일 총비서는 말했습니다. "인민들이 강냉이가루와 장국으로 끼니를 이어가면 우리도 강냉이가루와 장국을 먹어야 합니다." 눈물을 글썽이는 수행원들의 목에 뜨거운 것이 막혀 멀건 장국조차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인민군대는 높은 산꼭대기에 주둔하고 경우가 많습니다. 김정일 총비서가 그런 곳에 현지지도를 가려면 험하고 가파른 산길을 굽이굽이 넘어야 합니다. 인민군대를 찾아가는 산길에는 음식점은 고사하고 멀건 장국이 놓인 밥상조차 펴놓을 데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김정일 총비서는 비상식량인 건빵봉지를 승용차 안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맹물에 목을 축이며 건빵을 잡수시고 인민군대를 찾아 길을 재촉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2천2백만 동포들이 지금 경제난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김정일 총비서는 공장이나 기업소나 협동농장을 찾아가야지 왜 자꾸 인민군대만 찾아가느냐고 말합니다. 철없는 사람들은 총대에서 밥이 나오는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립니다. 실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립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주한미군사령부가 세워놓은 전쟁계획이 있지요. 세상에 '5027 작전계획'이라고 알려진 전쟁계획말입니다. 존 리브시가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있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전쟁계획은 '작전계획 5027-95'라고 불렸습니다. '95'라는 숫자는 1995년에 만들어놓은 전쟁계획이라는 뜻입니다.

1995년은 어떤 시기였습니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슬픔에 잠겨있던 북녘땅에 엄청난 대홍수가 휩쓸고 갔고 원유와 콕스탄이 들어오지 않아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던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북(조선)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관차라고 할 수 있는 김책제철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경제난 때문에 그 제철소의 용광로가 식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용광로의 불이 한 번 꺼지면 큰일입니다. 불이 꺼진 용광로는 불을 다시 지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철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제철소의 경제선동차량이 김책시 거리에 뛰쳐나가서 다급한 목소리로 긴급방송을 했습니다. "김책시 인민여러분, 지금 김철의 용광로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용광로를 살려야 합니다." 그 긴급방송을 들은 인민들이 제철소 정문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장롱, 책상, 장작 같은 불을 땔 수 있는 온갖 물건들이 들려있었습니다. 제철소 정문 앞에는 그들이 들고 달려온 땔감들이 조그만 산을 이루며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땔감을 가지고서는 용광로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땔감더미 앞에서 노동자들과 인민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그 눈물겨운 장면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식어가는 용광로는 외국에서 전량 수입해야 하는 값비싼 콕스탄이 아니면 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주저 없이 하고 나선 인민들의 뜨거운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생사운명을 함께 하는 '일심단결의 강철대오'는 바로 그 마음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땔감으로 용광로를 살려보겠다고 몸부림치던 그 인민들의 가슴을 향해서 전쟁의 총부리를 들이댄 세력이 있었습니다. 포악한 아메리카 제국주의자들입니다. 1995년에 세워진 '작전계획 5027-95'는 다섯 단계의 전쟁계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북(조선)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사실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1998년 10월에 가서야 미국 군부가 '작전계획 5027-98'이라는 선제공격 작전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미국 언론에 흘려주었기에 알 수 있었습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칠천만 민족은 미국이 조성한 전쟁의 위기 속에서 숨막히는 나날을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위에서 살아간 것과 마찬가집니다.

저는 몇 해 전에 평양에 있는 조선컴퓨터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컴퓨터에 관해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그곳에서 해설을 들어보니까 대단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컴퓨터센터는 전국에서 뽑힌 우수한 두뇌 3천명이 일하고 있는 굉장한 연구기지입니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이가 삼심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컴퓨터 기술자의 설명을 듣다가 제 눈길이 갑자기 멎은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기술자의 책상 옆에 붙여놓은 조그만 종이쪽지였습니다. 그 종이에는 '비상시 가지고 가야할 물건'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고, 한 스무 가지 정도로 기억되는 비상물품목록이 죽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제 눈길을 콱 잡아당긴 것은 "양초 두 자루, 수류탄 두 알"이라는 글자였습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술자가 비상신호가 울리면 배낭에 비상식량과 양초와 수류탄을 넣고 컴퓨터 앞을 떠나야 합니다. 양초를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어두컴컴한 갱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컴퓨터 기술자가 미국의 전쟁위퓌㎍㏏??양초와 수류탄을 들고 갱도에 들어가야 하는 현실, 바로 그것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만일 북녘땅에서 쌀폭동이 일어났다는 정보가 주한미군사령부에 들어오기만 하면, 미군의 대량파괴무기에서는 일제히 불을 뿜을 선제 공격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만일 조국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다 죽게 됩니다. 남과 북의 동포들은 핵전쟁의 참화 속에서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민족 전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야말로 절대위기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김정일 총비서가 서있어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이었겠습니까? 공장이나 기업소이었을까요? 협동농장이었을까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인민군대였습니다.

(4) 김정일 총비서의 결심과 전략

동포 여러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조선)이 돈이 없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식량난을 겪어야 했던 줄로 알고 계십니까? 달러가 없어서 공장을 돌리지 못했던 줄로 알고 계십니까? 3억 달러만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 식량을 사다가 인민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북(조선)에는 그만한 돈은 있었습니다. 식량을 사올 수 있는 달러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돈이 없어서 식량난을 겪으면서 고생을 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난의 행군'을 한 것일까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설명이 좀 요구됩니다.

북(조선)에서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국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 사업에는 한 해에 평균 5억 달러 정도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1994년 2월 4일에 일본은 자체 기술로 개발한 인공위성 로켓 '에이취-2'를 발사했습니다. 그 인공위성 로켓을 만들어내는 개발비용 말고, 단지 발사하는 데 들어간 발사비용만 해도 1백90억 엔이라고 합니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기업체 2백여 개가 그 개발사업에 달라붙었습니다. 인공위성 로켓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만들지 못하고 인공위성 로켓만 만들었습니다.

인공위성 로켓이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그저 몇 해 사이에 생각처럼 쉽사리 뚝딱거려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천문학적인 돈과 높은 기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 나라나 만들 수 없습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자원도 부족하고 기술수준도 뒤져있었던 북(조선)이 자력갱생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 엄청난 사업을 추진해야 했으니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한 번 세운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난관과 역경이 가로 막는다해도 돌파해야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무엇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한 두뇌와 강인한 의지를 가진 민족입니다. 미사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로켓무기를 만들어 외적을 물리친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1448년 세종 30년에 나온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신기전이라는 최첨단 로켓무기를 만들어 여진족과 왜적을 물리치는 전투에 동원했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로켓발사 원리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로켓무기인 신기전은 가장 큰 것의 길이가 5.6미터나 되었고, 발사하면 목표지점에 날아가 앞에 달린 발화통이 자동으로 폭발하는 강력한 로켓무기였습니다. 그 발화통에는 화약과 쇳조각이 들어있어서 폭발하면 주위의 적들을 쓸어눕혔다는 겁니다. 나중에는 신기전을 동시에 1백발이나 발사할 수 있는 이동식 발사대도 개발했습니다. 지금 첨단 전투무기라고 하는 다연장 로켓포와 이동식 발사대의 원형을 이미 5백년 전에 만들었던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3백50년 뒤인 1805년에 가서야 영국사람들이 길이 4.4미터짜리 로켓무기를 처음으로 개발했습니다. 조선민족이 앵글로색슨족보다 3백50년이나 앞서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던 민족이 어느 민족인지 아십니까? 우리 민족입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저 유명한 진주성 방어전투가 있었습니다.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진주성 싸움은 자기들 보다 수십 배나 많은 왜군의 완전 포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군민일치의 단결력으로 진주성을 지켜낸 위대한 방어전입니다. 그 진주성 싸움에서 사람을 태운 비차가 등장하여 왜군의 포위망을 넘고 남강 위를 날아가서 30리 밖으로 대피시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미 고조선 시기에 고대 중국의 상형문자보다 훨씬 앞서서 신지글자를 만들어 위대한 문자문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고구려사람들은 아시아 최고 수준의 고구려 문화권을 형성하고 강성대국을 건설했습니다. 해양강국 백제는 미개지였던 일본땅에 문명을 전파하고 그 땅에서도 나라를 세웠습니다. 신라사람들은 쇠못 한 개 쓰지 않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높은 나무탑인 황룡사 9층탑을 세우는 뛰어난 건축술을 자랑하였습니다. 고려사람들은 우수한 제지술로 저 유명한 고려종이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문명의 길을 열었으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상감청자의 비색을 창조해내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역사와 문화를 이어받은 우리 민족에게 못해낼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반만년의 영웅적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에게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굳은 결심과 창조적 두뇌와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아무리 힘든 조국통일과업이라도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북(조선)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이란 말은 선전물을 장식해주는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만주항일전쟁 때 조선인 항일유격대는 꽁꽁 얼어버린 감자 몇 알과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미시가루를 나누어 먹으면서 눈보라, 비바람 속에서 싸웠습니다. 만주 하늘에 군용기를 날리며 '무적황군'이라고 떠들어대던 관동군과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였으므로 만주 밀림 속에 수류탄 공장 하나 지어달라고 소련에게 요청했지만 그들은 점잖게 거절했습니다. 항일유격대는 우리 힘으로 만들어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염초를 제조하는 화학물질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 바닥의 흙을 긁어내고 버드나무 가지를 태운 재로 폭약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무기가 '연길폭탄'이라는 겁니다. 당시에 일본놈들은 항공모함을 다섯 척이나 가지고 있는 막강한 군사강국이었습니다. 조선인 항일유격대는 마구간 흙과 버드나무 재로 만든 '연길폭탄'을 던지면서 거대한 항공모함을 몰고 다니는 일본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태평양이 좁다 하고 싸돌아다니던 항공모함 위에서 일본놈들이 내려다보면, 만주 밀림 속에서 '연길폭탄'을 들고 싸우는 항일유격대는 저들의 말대로 '창해의 일속'으로 보였습니다. 저들의 눈에는 문자 그대로 망망한 바다에 떨어진 좁쌀 한 알, 바로 그런 존재로 보였겠지요. 그러나 일본놈들이 절대로 알 수 없었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연길폭탄' 속에 들어있는 민족자주정신입니다. 백두산 눈보라 속에서 단련된 강인한 민족자주정신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그 어떤 현대식 무기로도 꺾을 수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저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연길폭탄'에 내장되어 있는 불패의 위력과 불굴의 투쟁력을 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민족해방투쟁을 승리로 이끈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기에 만일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는 대신 그 개발비를 가지고 식량을 사왔다면 식량난은 겪지 않고 넘어갔을 겁니다. 북(조선)이 지난 20년 동안 수 십 억 달러를 들인 전략무기 개발비를 만일 경제건설에 돌렸다면 지금쯤 경제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쌀밥에 고기국 먹으며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넉넉한 물질경제생활을 포기하고 힘겨운 '고난의 행군'을 택하였습니다. 물질경제적으로 편안하게 살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넉넉한 삶이 분단시대를 연장하는 삶이라면 그런 안락한 생활 따위는 과감히 저버렸던 것입니다. 그 대신 자주통일시대를 열어놓기 위하여 험한 희생의 가시밭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하루 빨리 이루려는 김정일 총비서의 결심이었고 전략이었으며, 그 결심과 전략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는 2천2백만 동포들의 희생적인 삶이었습니다. 백두산 눈보라 속에서 단련된 민족자주정신은 항일의 '연길폭탄'에서 시작하여 오늘 항미의 '광명성 1호'에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의 5년 총공세에 단독으로 맞서 싸웠던 불패의 위력과 불굴의 투쟁력은 바로 거기에서 발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세기 전반에 히로히도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후반에 클린턴도 이 역사의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5) 미국을 움직여 통일의 돌파구를 열다

김정일 총비서와 북녘 동포들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넉넉한 물질경제생활을 포기하고 힘겨운 '고난의 행군'을 택했다고 말하면 그 뜻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도대체 '광명성 1호'와 민족의 자주통일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칠천만 민족이 지난 반세기 동안 그렇게도 조국통일을 부르짖으며 통일실현을 위해서 피땀을 흘렸는데도 통일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칠천만 민족의 자주통일역량이 분단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반민족세력의 힘, 조국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반통일세력의 힘을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일정세가 불리한가 유리한가 하는 문제는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 사이의 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그런데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강한 반통일세력은 누구입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입니다. 미국이라는 반통일세력은 55년 전에 38선을 그어놓은 국토분할의 주범이었으며, 그 뒤로 반세기 동안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분단영구화를 추구해온 원흉입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두 코리아 정책(Two-Korea Policy)입니다. 두 코리아 정책이란 이미 1970년대 후반에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한(조선)반도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제시한 개념입니다. 미국의 두 코리아 정책은 북(조선)에 대해서는 적대정책을 펴면서 남(한국)에 대해서는 지배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대북적대정책과 대남지배정책은 반통일정책을 이루고 있는 한 쌍입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반통일정책을 봉쇄하고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방도가 문제입니다. 미국의 반통일정책을 봉쇄하고 무력화시키는 방도는 무엇일까요? 그 방도를 고심한 끝에 김정일 총비서는 미국을 정치협상에 끌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폭풍우를 만난 난파선이라고 보고 있는 동방의 작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을 협상탁자로 끌어낼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북(조선)이 평화제안을 수없이 내놓았어도 미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미국에게 협상하자는 진지한 뜻을 보여주었어도 워싱턴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간은 어느덧 흘러 1998년이 되었습니다. 전쟁과 분단의 피눈물로 얼룩진 고통을 칠천만 민족에게 안겨주었던 20세기가 차츰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북(조선)은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꼭 50년이 되던 해인 1995년 8월에 정부 비망록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비망록에서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을 받들어 90년대에 반드시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칠천만 민족 앞에서 맺은 약속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은 90년대 안에 지켜야 합니다. 90년대 안에 '반드시'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아야 했던 겁니다.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으려면 무엇보다도 미국을 정치협상의 자리에 끌어내야 하는데, 미국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북(조선)을 깔보고 오만방자하게 거들먹거리는 미국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어서 조미협상을 진전시킬 긴급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998년 4월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파기하고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겠다고 하면서 미국을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초강대국 미국은 그만한 위협쯤에는 별로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김정일 총비서는 지난 20년 동안 피땀어린 노력으로 만든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했습니다. '광명성 1호'를 발사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19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가 지구의 대기권을 가르며 우주공간을 향해 솟구쳐 올랐습니다. 인공위성은 똑딱하는 일초 사이에 8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우주속도를 내야 지구의 중력을 박차고 우주공간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인공위성과 그 운반로켓을 만드는 데는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하고 창안한 모든 첨단과학기술이 총동원되어야 합니다.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자강도에 있는 1백20여 개의 지하공장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현대과학기술의 가장 빛나는 결정체 '광명성 1호'는 마침내 꿈쩍하지도 않던 미국에게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워싱턴은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쾅하고 얻어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집권세력은 '광명성 1호'가 자기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더니 기절하여 나자빠지고 말았습니다.

화들짝 놀란 클린턴은 영리한 전략가 페리에게 한(조선)반도의 정책을 재검토하라고 긴급지시를 내렸습니다. 미국이 드디어 정책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난공불락의 거만한 요새처럼 버티고 있던 미국의 두 코리아 정책이 '광명성 1호' 한 방에 그만 무너졌습니다. 미국은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평화공존정책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적대정책이 무너지면 그것과 한 쌍을 이루고 있는 남(한국)에 대한 지배정책도 함께 무너지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바로 이것이 반통일세력 미국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김정일 총비서의 탁월한 통일전략이었습니다.

'광명성 1호'가 전세계에 안겨준 경이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 1998년을 보내는 세밑에 이르러 김정일 총비서는 고심하였습니다.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 새해 첫 날 칠천만 민족에게 21세기의 통일조국을 향한 희망을 어떻게 안겨줄 것인가를 고심하였습니다. 21세기 민족사의 발전전망을 한 마디로 요약한 구호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그가 생각해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강성대국'이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강성대국은 김정일 총비서가 창안해낸 새로운 개념입니다. 이 강연이 끝나고 집에 가셔서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세요. 강성대국이라는 낱말이 나오는가.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강성대국이란 무슨 뜻일까요? '강'이라는 글자는 강하다는 뜻으로, 힘이 세다는 말입니다. 국력이 강하다는 뜻이지요. '성'이라는 글자는 왕성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번창한다는 뜻이지요. '대'라는 글자는 크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는 무엇일까요? 인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인 인민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이라는 글자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두 쪽으로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통일실현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성대국이라는 네 글자 안에는 국력이 강하고 나라의 모든 것이 번성하며 인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통일된 나라라는 민족사의 발전전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 1월 1일 김정일 총비서는 21세기 민족사의 발전전망을 단 네 글자로 축약하여 칠천만 민족에게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해 5월에는 클린턴의 특사 페리가 평양에 찾아갔습니다. 그가 방북길에 들고 갔던 가방 안에는 미국의 정책전환을 담은 중요한 문건이 들어있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세워진지 올해로 꼭 2백24년이 됩니다만, 미국의 역사에서 자기 보다 약한 나라에 대통령 특사를 먼저 파견하여 정책전환을 시도한 사례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습니다. 지난 시기 미국은 북(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구 위에서 없어져야 할 '깡패국가', 또는 '테러집단'이라고 모욕하면서 전복·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미국 외교관은 제3국의 외교석상에서 우연히 북(조선) 외교관과 마주쳐도 절대로 인사말을 건네지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제3국의 외교관 사교모임에서 북(조선) 외교관이 커피 한 잔 함께 마시자고 권해도 외면해야 했습니다. 미국 외교관이 만일 제3국의 외교관 사교모임에서 북(조선) 외교관과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사전에 미 국무부 서열 3위인 정무차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초강대국의 외교행태라고 하기에는 정말 졸렬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미국은 북(조선)과 외교적으로 대화하고 접촉하는 모든 행위는 공적이건 사적이건 간에 그 자체를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던 미국이 1993년 6월 뉴욕에서 조미공동성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고, 1994년 10월에는 제네바에서 조미기본합의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조선)의 역공에 밀려 공동성명과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는 했지만, 대제국을 지휘하면서 전세계를 호령하는 클린턴의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클린턴은 초강대국이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는 동방의 작은 나라가 퍼부은 역공전술에 밀려 두 차례나 외교문건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홧김에 바람 피운다는 말이 있는데, 화가 난 클린턴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홧김에 모니카 르윈스키와 바람을 피웠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클린턴은 성추문사건 때문에 하마터면 대통령 자리에서 붸겨날 뻔했습니다.

1999년 5월에 미국이 자기의 대통령 특사를 먼저 평양에 파견했던 놀라운 사건은 세계 정치외교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변 중의 이변입니다. 평양에 들어간 페리는 김정일 총비서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페리는 북(조선)의 고위관리가 답방 형식으로 워싱턴을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정일 총비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북(조선)을 이른바 테러국가 명단에서 지우지 않으면 워싱턴에 고위급 관리를 보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초강대국이 기가 질려 움찔할 만큼 강하고 당당하게 나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던 오만방자한 미국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미국의 군부는 매우 노여워했습니다. 그래서 남(한국)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은 남(한국)의 해군 함정을 연평도 앞바다에 출동시키는 작전명령서에 서명했습니다. 1999년 6월 15일의 '서해교전'은 그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만일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명령에 따라 연평도 앞바다에 출동한 남측 호위함 두 척을 북(조선)이 강력한 해안배치무력으로 타격하여 침몰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조선)이 자제하지 않았더라면 '서해교전'은 아마 더욱 심각한 사태로 비화되었을 게 분명하고, 그로부터 꼭 한 해 뒤인 2000년 6월 15일의 남북공동선언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 군부의 건방진 도전을 본 김정일 총비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비장의 무기'를 꺼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광명성 2호'가 그것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시겠지만, 1998년 8월 31일에 발사된 인공위성 로켓을 '광명성호'라고 하지 않고 '광명성 1호'라고 한 것은 2호, 3호, 4호를 만들어놓고 앞으로 언제든지 발사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광명성 2호'를 발사하겠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나오자마자 워싱턴은 경악과 공포에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쿄는 광적인 발작증세를 보였습니다. 궁지에 빠진 미국은 하는 수 없이 베를린 고위급회담에 끌려나왔고, 페리보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앞으로 또다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문제를 푸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평양방송에서 "광명성 2호 발사 준비"라고 한 마디만 내보내면 됩니다. 그러면 미국이 쩔쩔매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한다는 초강대국이 인구도 적고 영토도 넓지 않은 동방의 사회주의 나라에게 마치 코뚜레 꿰인 소처럼 질질 끌려다니게 된 꼴이 아닙니까.

(6) 민족대단결을 방해하는 미국

북(조선)이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파기하고 영변의 원자로를 재가동하겠다고 미국을 위협한 긴급조치가 나왔던 1998년 4월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일이 또 하나 평양에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김정일 총비서가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발표한 것입니다. 1998년 4월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남(한국)의 원로 정치인들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외세배격과 평화통일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역사적인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린 지 꼭 50년이 되는 때였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그 50주년을 기념하는 연구토론회에 보낸 서한에서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천명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민족대단결의 원칙이란 "사상과 이념과 정견의 차이를 뒤에 두고 우선 한 민족으로 단결하여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조국통일을 위하여 특색 있게 이바지하자"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남(한국)에서 돈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자 명단의 첫째줄에 적혀있는 이름은 정주영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이 발표된지 꼭 여섯달만인 10월 30일 평양의 백화원 영빈관에서는 '돈 있는 사람' 정주영 씨가 김정일 총비서의 접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주영 씨가 김정일 총비서의 접견을 받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각 청와대에서는 낯선 미국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 미국사람은 미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넷입니다. 미국 정보기관의 최고책임자가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며, 더욱이 그 나라의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백화원 영빈관에서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이 실현되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조지 테넷은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우연한 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칠천만 민족의 민족대단결을 가장 두려워하고 방해하는 세력은 미국입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남(한국)에서 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권력자 명단의 첫째줄에 적혀있는 이름은 대통령의 이름이었습니다. 백화원 영빈관에서는 김정일 총비서와 김대중 대통령이 마주앉았습니다.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이 실현되고 있는 역사적인 장면을 여러분도 다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회담장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좌우편에 나타난 배석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에는 황원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앉아있었고, 왼쪽에는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앉아있었습니다. 그 회담이 통일문제를 다루는 회담이었으므로 통일문제를 다루는 주무부처의 책임자인 박재규 통일부 장관이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정상인데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통일부 장관은 그 자리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좌우에 앉아있었던 그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옥逞寧舟瞞?합니다. 그 두 사람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군장성 출신으로서 통역 없이도 미국 사람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군부출신 친미파의 대표주자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평양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6월 16일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은 태평양을 날아가 클린턴과 올브라이트에게 소상하게 보고를 했습니다. 언론에는 포착되지 않았지만, 임동원 국정원장은 평양회담을 마치고 돌아가자마자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을 만나 그에게 자세하게 보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총비서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민족적 양심에 따라 소신을 밝히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눈과 귀'가 평양회담장까지 따라와 있기 때문입니다. 평양회담 전에 김정일 총비서가 고심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김 대통령과 만나면 마음을 터놓고 진심을 나누어야 하겠는데 미국의 '눈과 귀'를 어떻게 따돌리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평양회담 직전에 북경을 비공식 방문한 김정일 총비서는 장쩌민 주석에게 이번에 김 대통령이 평양에 오면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듣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 대통령의 진심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묘안을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만든 '리무진 회담'이 그것입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백화원 영빈관으로 향하는 리무진 승용차에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타고 가면서 55분 동안 단독회담을 하였습니다. 단독회담이 진행된 리무진 승용차 안은 미국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절대비밀이 보장된 공간이었습니다. '리무진 회담'이라는 묘안 앞에서는 미국이 믿었던 감시망은 완전히 무력해졌으며, 미국이 자랑하는 첨단 첩보위성도 한낱 무기력한 쇳덩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순안비행장에서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백화원 영빈관이었지만 단독회담이 열리고 있던 리무진 승용차는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55분의 회담시간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차창 밖에서는 60만 군중이 "결사옹위 김정일"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 '리무진 회담'은 김 대통령이 평양을 떠나던 날에도 한 차례 더 진행되었습니다. 김정일 총비서가 뜻밖에도 김 대통령이 탄 리무진 승용차에 오르는 장면을 텔레비전 중계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국인들은 "우리가 또 당했구나"하면서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문제는 '리무진 회담'에서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은 그 단독회담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안달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은 유능한 첩보요원들을 서울에 보내어 '리무진 회담' 내용을 파악하느라고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클린턴에게 찾아가 직접 보고를 했는데도 워싱턴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헐레벌떡 북경과 서울에 날아갔습니다. 국무장관을 급파하는 긴급조치는 원래 예정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리무진 회담'에서 나눈 회담내용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 통일이 되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겁니다.

기상천외한 '리무진 회담'을 사전에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김정일 총비서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정일 총비서는 미국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공간에서 미국에 관한 문제를 놓고 김대중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미국 문제가 아니라면 구태여 그렇게까지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리무진 회담'에서 논의된 미국 문제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문제입니다.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북경과 서울에 황망히 날아가서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워싱턴 당국자들도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국통일문제는 결국 반통일세력인 미국의 반통일정책을 봉쇄하고 무력화시키는 문제이고, 그것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과 대남지배정책을 바꾸는 민족자주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적대정책과 지배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힘의 실체는 바로 주한미군입니다. 주한미군은 북(조선)에 대해서 적대하는 힘으로, 남(한국)에 대해서는 지배하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통일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빼놓는다면 그것은 핵심내용을 제거하는 것이 됩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번 평양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주한미군 문제를 논의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결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상상하는 것입니다만, '리무진 회담'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손을 꼭 잡고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으면 민족자주를 실현할 수 없고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미국과 정치협상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반드시 철수시킬 것입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평화적 방도로 통일을 실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진심이고 결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전략균형이 깨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남측과 일본에서 군비를 증강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미국사람들에게 주한미군을 당장 철거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미군을 언제까지 철수하겠는지를 약속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는 단계적 철수과정에 맞춰 북과 남은 군비를 증강할 게 아니라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김정일 총비서와 손을 잡은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부터 워싱턴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당당하게 나가야 합니다. 김 대통령이 민족대단결의 길에 나선다면 칠천만 민족이 뜨겁게 지지하고 성원할텐데 워싱턴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총비서와 손을 잡고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하는 길에 적극 나선다면 칠천만 민족이 그를 지켜줄 것입니다. 여러분, 김대중 대통령에게 우리 모두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7) 분단의 나그네에서 통일의 주인으로

동포 여러분! 이번에 저는 일본에서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오사카 이꾸노지역을 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맛 본 일본 음식이라는 게 하나 같이 양념문화나 발효식문화가 없는 음식이라서 제 입에는 맹물에 조약돌 삶은 맛처럼 느껴지는데, 오사카의 조선시장에 척 들어서니까 우리 식 양념냄새, 김치 냄새가 확 풍기는 게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시장에서 나와 이꾸노에 있는 민족학교도 찾아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치원과 초급학교, 그리고 중급학교를 가봤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재일동포의 민족교육 현장을 직접 보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재일동포의 정당한 민족적 권리를 억누르는 일본놈들의 민족차별정책은 민족학교를 정규교육기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정규교육기관은 소학교라고 부르는데 우리 민족학교는 초급학교라고 불러야 하고, 중학교가 아니라 중급학교라고 부를 수밖에 없으며, 조선대학이 아니라 조선대학교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민족학교 졸업생들은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조선대학교를 나와도 일본사회에서는 무학력자로 취급된다는 기막힌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아무리 민족차별정책으로 우리 조선동포들을 짓눌러 보려고 악착 같이 날뛰어도 우리 동포들은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선민족의 피와 넋을 이어받은 해외동포로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오사카에 있는 중급학교 현관에 들어서자 커다란 글씨가 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말은 곧 민족이다"는 글입니다. 손으로 써서 현관벽에 내걸은 그 글을 읽는 순간, 제 가슴속에 뜨거운 피가 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실에 가보았습니다. 교실에서는 놀랍게도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교복으로 입은 여학생들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의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운데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교사가 일본말 억양이 섞인 조선말로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3세 선생님과 4세 아이들이 땀을 흘리면서 배우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학급시간표에는 조선말, 조선역사, 조선지리가 가장 비중 있는 학과목으로 적혀있는 게 눈에 보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춤과 음악, 태권도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일본말 억양이 섞인 조선말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그만 왈칵 눈물을 쏟을 뻔하였습니다. 저를 안내하신 그 학교 선생님에게 눈시울이 뜨거워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저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 학급에서 저와 똑같은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선생님과 학생들을 보았더라면, 아마 저는 별로 감동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민족의 피와 넋이 들어있는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3세 선생님과 4세 학생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자취가 그 일본말 억양이 섞인 말마디마다 어려있기에 제 눈시울이 뜨거워진 겁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곧 민족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해외동포의 한 사람인 저도 미국땅에서 딸 둘을 키우며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는데, 남의 나라에서 우리말과 우리옷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압니다.

1998년에 '광명성 1호'가 발사되자 깜짝 놀라 미쳐날뛰던 일본의 우익깡패놈들은 치마 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가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감히 덤벼들면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지르며 칼로 치마폭을 찢는 난동을 부렸다는 얘기를 저는 들었습니다. 여학생들의 신변을 걱정한 학교당국에서는 교복인 치마 저고리를 교내에서만 입게 하고 학교를 오갈 때는 제2교복을 입게 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우리의 자랑스런 여학생들은 조선사람의 민족정신이 담긴 치마 저고리를 벗지 않겠노라고 한답니다. 일본놈들이 우리 동포들 ?악랄하게 차별하고 억누르며 날뛰어도 조선사람의 민족정신은 절대로 꺾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조선말을 빼앗을 수 없고 치마 저고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조일수교가 성사되면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문제가 정당하게 해결될 것이며, 조국이 통일되면 일본놈들이 감히 차별정책을 휘두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 사회에는 여러 인종과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은 유태인들입니다. 미국의 소수민족들 가운데 하나인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말 한 마디로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도 유태인입니다. 글 한 줄로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뉴욕 타임스 사장 아더 슐츠버거 2세도 유태인입니다. 유태인은 미국의 대기업체, 대학교, 문화예술단체 같은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물론 워싱턴의 관가와 정가에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미국땅으로 건너온 유럽출신의 유태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동네마다 유태인 회당을 번듯하게 지어놓고 민족정신을 지키고 민족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3세, 4세에 와서는 백인사회에 동화되는 유태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지금 유태인 회당은 노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돌아가면 유태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민족성이 강하고 우수한 민족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웃기지 마라.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을 봐라. 그들이 차별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자기를 지켜나가고 있는지를 알면 큰 소리를 치지 못할 거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동포 여러분! 남녘땅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 가운데 최남규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철창 안에서 반평생을 보내신 분입니다. 전향서 한 장 써 주면 그 몸서리치는 철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그는 통일을 향한 민족적 양심을 지켰고 자기의 사상과 신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겪은 모진 전향공작고문으로 그의 육신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의 망가진 몸을 보살펴줄 보금자리는 없었습니다. 운동권 인사들과 뜻있는 분들이 푼돈을 모아 마련해준 전세방에서 근근히 살아가야 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찾아와서 밥도 지어 드리고 집안일을 도와드리곤 했습니다. 노쇠한 최남규 선생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상에서 두 팔에 링거 주사바늘을 여러 개 꽂고 누웠습니다. 코에도 고무호스를 꽂았습니다. 대학생들이 스물 네 시간 교대로 병상을 지키면서 똥오줌을 받아냅니다. 운명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두 마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고향......통일......"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그것은 임종의 유언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 가야 해, 통일을 해야 해"라고 부르짖은 피맺힌 절규였습니다. 고향과 통일은 별개로 떨어진 말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 그것은 곧 조국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해외동포인 우리는 모두 통일조국의 고향을 떠나와 살아가는 분단시대의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분단의 나그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통일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원한 맺힌 일본땅에서 한많은 분단 나그네의 생을 마치고 이제는 한 줌 유해로 남으신 1세 동포들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이 오면, 아아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이 오면, 여러분은 1세 동포들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꿈에도 그리던 통일조국의 고향에 돌아가야 합니다. 분단의 나그네가 아니라 통일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강연하면서 때때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조국통일운동은 우리가 평생토록 해야 할 운동이 아닙니다. 앞으로 10년 전후로 연방제 통일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통일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 통일운동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우리는 이제 조국통일운동의 막차를 탄 사람들입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이 막차는 기적 소리 크게 울리며 통일의 종착역에 가닿을 첫 통일열차가 될 것입니다. 통일운동의 막차가 떠나고 있습니다. 막차를 놓치지 마시오."

동포 여러분! 통일의 주인인 여러분!

조국통일을 성취하여 60억 세계 인류가 보란 듯이 자주강국, 경제부국, 문화대국을 세우는 영광의 그날까지 우리 모두 손을 잡고 나아갑시다. 민족대단결의 대오에서 한 사람도 흩어지지 맙시다. 조국과 민족의 위대한 미래를 위해 뜨거운 열정을 바쳐갑시다.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