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회담을 보는 새로운 시각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 례 >

(1) 들어가는 말

(2) 최고 수준의 정치협상에서 벌어진 정책대결과 그 결과

(3)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결정적 요인

(4)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과 대미평화공존전략

(5)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과 대남통일전선전략

(6) 맺음말을 대신하여 - 통일영웅 왕건을 다시 생각한다

(1) 들어가는 말

평양회담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적 재난으로 이어져온 반세기 분단역사의 역류를 통일시대의 물길로 돌려놓은 민족사의 위대한 전환이다. 전쟁과 학살, 예속과 억압, 치욕과 수난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분단시대의 민족적 재난에서 벗어나는 자주통일위업은 이처럼 눈물 흐르는 벅찬 감격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마치 꿈을 꾸는 듯, 칠천만 민족의 통일열망이 엮어내는 장엄한 서사시를 보았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 서사시를 수놓은 주인공들이 되어,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한(조선)민족의 핏줄을 받고 태어난 것을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칠천만 민족의 가슴마다 설레던 감동의 물결에 휩싸이며 우리는 소리치고 싶었다. 대지 위의 모든 숨쉬는 것들에게 소리쳐주고 싶었다. 우리에게 이제 민족재생의 활로가 마침내 열렸다고, 우리는 이제 분단체제의 민족적 재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평양회담은 미국의 한(조선)반도 분할·지배정책은 물론, 그 정책을 추종하며 민족분열주의에 빠져있는 반통일세력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남(한국)의 어떤 인사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그것은 "남측의 '반공체제'를 일격에 난파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72쪽) 남(한국)의 한 언론은 평양회담 이후 "각계각층에서 엄청난 의식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하면서 "분단 55년간 사회 전반에 스며있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6월 16일자) 다른 한편으로 평양회담은 항미자주독립의 험한 길을 헤쳐오고 있는 민족대단결운동 앞에 전진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그 전환점에서 우리는 민족사의 축이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옮겨지는 질적 변화의 시작을 보고 있다. 이 질적 변화가 장차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간단히 말할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민족사의 발전전망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연방제 통일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여 방향각을 잡았다는 데 있다.

평양회담이라는 사건 하나를 보면서 어떻게 민족사의 발전이 연방제 통일실현으로 연결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너무 성급하고 주관주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평양회담이 이루어진 배경과 요인을 파악하게 되면 그러한 해석이 이치에 닿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몇 가지 문제를 간추려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최고 수준의 정치협상에서 벌어진 정책대결과 그 결과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지도자 김정일 총비서와 자본주의 세계의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상봉과 회담을 성사시키며 감동과 경탄을 불러일으킨 그 광경의 배후에서는 정책대결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평양회담은 말 그대로 최고 수준의 정치협상이었다. 칠천만 민족과 전세계가 숨을 죽이며 그 협상의 진행과정을 지켜보았으며, 그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평양에서 벌어진 최고 수준의 정치협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미국과 남(한국)이 '공조'한 화해협력정책과 북(조선)의 자주통일정책이 한 판 맞붙은 정책대결의 장이었다. 평양회담은 자주통일정책과 화해협력정책 사이에서, 자주통일의지와 평화공존의지 사이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정치협상이었다. 이것이 평양회담의 본질이다.

남(한국)과 북(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책임자가 서로 자기의 정책을 놓고 오랜 시간 동안 정치협상을 벌인 그 회담의 결과에 따라서 앞으로 한(조선)반도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책대결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정책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자주통일정책이었다. 왜 그렇게 보는가?

1) 김정일 총비서는 평양회담을 통하여 칠천만 민족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자신의 자주통일정책을 천명하였으며, 그 정책을 기어이 수행하겠다는 자주통일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화해협력정책과 평화공존의지를 보여주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그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래 30여년 동안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 곧 자주통일위업을 위하여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쳐왔다. 김정일 총비서에게 있어서 자주통일의 위업은 다음 세대에게 맡겨놓아야 할 미래의 일이 아니다. 그의 생각에 분단시대는 무작정 연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명인 자주성을 짓밟고 있는 가장 혹독한 민족적 재난이었으므로 이 재난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자주통일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최우선적인 과업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주와 통일의 과업은 둘이 아니라 자주통일로 결합된 하나의 과업이며, 미래의 희망 속에 있는 후대의 과업이 아니라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당대에 우리 세대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하고, 또 능히 이루어낼 수 있는 당면과업이다. 남(한국)의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평양회담은 김정일 총비서의 그러한 생각과 의지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면서 위엄을 떨친 시위의 장이었다.

평양회담의 특별수행원이었던 문정인 교수의 말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원래 북한에 갈 때는 '공동성명' 수준을 생각하고,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게끔 남북정상이 노력하였다는 취지 하에 이산가족 문제 등을 언급하는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5개항의 합의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120쪽) 평양회담의 성격이 자기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통일회담으로 된 것에 대해서 백진현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예상 외로 핵심화두는 통일이었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함께 남북 양측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하였다. 우리 정부가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우선시 해왔다는 점에 비추어 통일협상의 개시를 시사하는 공동선언은 놀라운 것이다. (줄임)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한 이유는 경제난 해소에 있으며 따라서 정상회담도 경제협력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번 회담은 통일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김정일은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부각할 것으로 보인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116쪽)

다른 한 편,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은 이번 평양회담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용어인데, 사실은 햇볕정책의 이름만 바꾸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 자신의 대북정책을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을 때, 북(조선)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한때 포용정책이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포용정책이라 하면 클린턴의 포용정책과 같은 이름인데, 이처럼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바람에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포용정책을 추종하는 하부집행단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평양회담에 나선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차마 클린턴의 포용정책과 똑같이 포용정책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생각 끝에 새로 달아놓은 것이 화해협력정책이라는 이름이다. 이처럼 집권한지 이태 반 동안 자신이 추구하는 대북정책의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는 것만 보아도 그 정책에 대해 별로 자신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평양회담에서 설정된 가장 커다란 쟁점은 21세기 민족사 발전의 목표를 자주통일로 설정할 것이냐 아니면 화해협력으로 설정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칠천만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이 중대한 문제를 인식할 때 우리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은, 자주통일은 화해협력을 배제하지 않고 자기 안에 포섭하고 있는 반면, 화해협력은 자주통일을 회피하거나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족사의 발전이 자주통일의 실현경로로 설정된다면 그 경로 안에 화해협력의 실현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이치다. 화해협력을 배제하고 자주통일이 실현될 수 있을까? 전연 불가능하다. 화해협력을 배제한 자주통일이란 그 실현이 가능하지 않으며 그러한 개념 자체가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자주통일정책은 화해협력을 자기 안에 포섭할 수 있는 '통 큰 정책'인 반면, 화해협력정책은 자주통일을 배제하려는 편협한 정책이다. 화해협력은 자주통일과는 무관하게, 또는 자주통일의 길에서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고, 또 화해협력정책의 추진주체는 그렇게 하려는 강한 의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 자주통일문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배제하려는 의도가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 속에 깔려있다는 사실은 이번 평양회담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원래 화해협력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 아니라 클린턴의 포용정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대리정책이다. 화해협력정책이 안고 있는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고 언론조차 눈을 감아주고 있지만,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정책의 본질은, 한(조선)민족의 자주통일 실현이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해친다고 보면서 자주통일에 관한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억누르고 있는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만들어 추진하고 있는 반자주, 반통일정책이라는 데 있다. 워싱턴의 집권세력이나 전략가들이 한(조선)반도 문제를 논하면서 자주통일에 대해서 한 마디 말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려는 힘과 남의 나라의 전략적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진 남의 정책을 대리집행하려는 힘이 정치협상에서 정책대결을 벌였다면, 그리고 '통 큰 정책'과 편협한 정책이 정치협상에서 정책대결을 벌였다면, 그 결과는 보나마나 뻔한 것이다.

2) 김대중 대통령은 회담 과정에서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거나 반대할 수는 없는 처지였으므로,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할 때 하는 수 없이 자주통일문제를 가장 중대한 문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 기조를 명백하게 담고 있는 문안이 남북공동선언의 제1항으로 설정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겨나고 있다. 회담석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 기조를 받아들여놓고서 이제 와서는 '자주'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느니, 반외세 자주가 아니라 외세와 협력하는 '열린 자주'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느니 하고 있다. 이러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일 외세와의 '공조'를 파기하는 문제와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를 빼놓고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 기조에 합의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억지라는 비판을 면할 길 없다.

자주라는 개념은 평양회담을 위해서 김정일 총비서가 창안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면 한(조선)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사회역사발전의 근본원칙에서 도출된 역사철학적 개념이며,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지난 20세기 1백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세 대륙의 수십억 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총화한 역사적 경험에서 도출된 정치철학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주라는 개념은 누가 제멋대로 더하거나 덜할 수 있는 자의적 해석의 대상이나 정치협상의 흥정물이 아니라, 사상이며 철학이고 사회역사발전을 추동하는 생명력 그 자체다. 김정일 총비서가 이러한 자주의 개념을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천명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오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며, 그것은 김일성 주석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남북공동선언 제1항에서 천명된 자주통일의 원칙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침탈 아래서 고생하고 있는 민족의 한 성원이라면 누구나 전적으로 지지해야 하고 응당 따라야 하는,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원칙이다.

잘 알다시피, 한(조선)민족의 지난 1백년 역사가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은, 외세와 자주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외세는 언제나 우리의 자주역량을 짓밟는 난폭한 지배자였고 우리 것을 앗아가는 약탈자였다. 한(조선)민족에게 외세는 언제나 단순히 외부에 있는, 또는 외부에서 온 세력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세력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의 자주역량은 언제나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외세의 침탈과 유린에 맞서 싸우며 자주독립운동의 길 위에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 아닌가. 외세와 자주 사이에는 공조니 협력이니 하는 듣기에 좋은 이야기는 아예 통하지 않았고 통할 수 없었다. 이것을 부정하면 그것은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망령된 짓이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침탈은 21세기로 넘어온 지금도 여전하다. 매향리 미군 폭격훈련장에서는 오늘도 민족의 존엄을 짓이기는 폭음이 농섬을 파헤치고 있고, 그것을 막아나선 민족자주역량은 경찰의 진압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쇠창살 안으로 끌려가고 있다. 3만7천명 주한미군에게 해마다 '분담금'이라는 명목으로 갖다 바쳐야 하는 천문학적인 달러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으며,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신성불가침의 작전지휘권은 파란 눈을 가진 주둔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다. 외세에 의존하여 겨우 일어섰던 경제가 외환위기로 무너진 뒤에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아래서 몇 해 견디다보니 이 땅의 민중들은 어느새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공세 앞에 벌거숭이로 내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독도와 그 앞바다를 일본이 슬금슬금 먹어가고 있는데도 빚진 종이라서 그런지 그저 쉬쉬 하면서 덮어두려고 하는 한심한 꼴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다. 사정이 이런데도 오늘의 제국주의는 개과천선한 제국주의고, 그래서 공조하고 협력할 수 있는 친선적인 외세로 바뀌었노라고 우겨대는 '세계화의 논리'야말로 궤변 중의 궤변이다.

이번 평양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총비서와 손을 잡고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는 원칙에 합의했다면,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할 게 아니라 떳떳하게 민족자주의 관점을 내세우고 '외세공조'가 아니라 민족대단결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오늘과 같이 중대한 역사의 전환기에 낡아빠진 '외세공조'의 틀을 내던지고 민족대단결을 추구할 훌륭한 정치인은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불현듯 김구 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였지만 국토분할과 민족분열의 위기 앞에서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김일성 주석과 손을 잡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의 길에 감연히 나섰다. 김구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이을 정치인은 없는가?

3) 김정일 총비서는 오늘의 통일정세를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단계에로 이끌어올렸다는 사실이다. 통일원칙을 합의한 기존의 단계에서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말이다.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통일원칙을 합의하지 못했는데 통일방안부터 합의할 수는 없다. 이미 28년 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처음으로 합의했고,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그 원칙을 재확인했고, 이번에 4월 10일의 남북합의서에서도 다시 확인했다. 근 30년에 이르는 남북 정부당국의 정치협상 역사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평양회담에 나서는 김정일 총비서의 생각은 통일원칙을 재확인하는 단계에서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이 결심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김일성 주석의 결심이기도 했다. 1990년 10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비공개 회담을 진행한 바 있는 서동권 전 안기부장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남북의 최고 책임자가 만나서 밥이나 먹고 헤어질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남북 간의 7000만 동포에게 책임을 느끼는 의미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뜻을 동포들에게 전하고, 통일 의지를 세계에 알리려면 연방제 통일안을 남측이 수용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 내용이 공동성명 내용에 포함되어야만 정상회담에 임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월간 조선』 2000년 5월호, 155쪽) 김정일 총비서가 이번 평양회담에서 통일방안을 합의하려고 했던 애초의 결심은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을 실현하려는 결심이었다.

평양회담 뒤에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에 따르면, 이번 회담에서 통일방안을 합의하자는 문제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으며 나도 이것까지 논의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터넷 한겨레』 2000년 6월 16일자) 그러한 상황은 10년 전 서동권 특사가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하라는 강한 제안에 대해 '순간적인 판단'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얘기 도중 자연스럽게 접점이 이뤄졌으며 연합국가와 느슨한 연방제가 같은 얘기였고 그래서 합의문에 넣게 됐다"고 설명했으나(『인터넷 한겨레』 2000년 6월 16일자),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의 말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접점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박준영 수석은 김 대통령이 평양회담에서 통일방안 문제를 논의할 때 "젖먹던 힘을 내서 진실되게 설명했다"고 하면서, "2차 회담에서 김 대통령이 상당한 인내심을 갖고 설득했다. 상당한 토론과 의견교환이 있은 후에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다. 회담시간이 3시간 50분이었지만 3시간 40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특히 통일방안에 대해 두 정상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말했다. (『인터넷 연합뉴스』 2000년 6월 15일자) 남(한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통일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은 남북이 별도로 행사하는 것이 연합체"라고 설명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것이 바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이니 연방제에 합의했다고 명시하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대통령은 "그럼 김대중이 평양에 와서 북한 통일론을 일방적으로 합의해주고 왔다는 오해를 받을 것 아니냐"고 맞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논의한 끝에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함께 명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매일경제』 2000년 6월 20일자) 김대중 대통령이 6월 16일 국무회의에서 한 말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이 김용순 비서와 한참 얘기한 끝에 낮은 수준의 연방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인터넷 한겨레』 2000년 6월 16일자)

지금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나 언론들은 남북공동선언 제2항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합의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서, 김정일 총비서가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에 이끌려 연합제안의 양국론을 인정한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이야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의 초점은, 조국통일위업을 다음 세대가 맡아야 할 먼 장래의 일로 밀쳐놓고서 우선 남북이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여 두 나라로 평화공존을 하자는 양국론을 주장해오던 김대중 대통령이 일국론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합제안의 양국론은 사실상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자는 통일방안이 아니라 화해협력과정을 거쳐 완전히 두 나라로 갈라서서 평화공존을 하자는 분단합법화방안의 변종이다.

남북공동선언은 일국론적 기초 위에 있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양국론적 기초 위에 있는 연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선언에는 '공통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김일성 주석과 서동권 특사가 양측의 통일방안의 공통성 문제를 처음으로 논의했던 1990년 10월 평양의 비공개 회담을 살펴보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북측이 연방제 통일안 수용 문제를 들고나올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그 의지가 매우 강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연방제에 '대단한 집착'을 보여 서 특사가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서동권 특사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아이디어를 제기"하면서 "북측의 고려연방제와 우리측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공통점은 "두 방안은 공통적으로 한꺼번에 통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간단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김일성 주석이 옆에 있던 김정일 총비서에게 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김정일 총비서는 "그 내용은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월간 조선』 2000년 5월호, 156-157쪽)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남북공동선언에서 말하는 두 방안의 공통성이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국통일을 한꺼번에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실현하자는 의미의 공통성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연합제안과 마찬가지로 외교권과 군사권을 남과 북의 정부가 각기 따로 갖는다는 의미의 공통성이라고 볼 수 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연합제안 사이에는 이처럼 공통성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차이는 남아있다. 연합제안은 남과 북의 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완전히 따로 보유·행사함으로써 두 주권국가의 관계를 맺는 것인데 반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남북의 두 지방자치정부와 중앙의 연방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각기 나누어 보유·행사하면서도 두 개의 주권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주권국가, 곧 연방통일국으로 된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차츰 발전하면서 지방자치정부가 보유·행사하고 있던 외교권과 군사권은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중앙연방정부로 넘어가게 되고 그로써 높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초점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남북의 두 지방자치정부와 중앙의 연방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과연 어떻게 나누어 보유·행사하느냐는 데로 집중된다. 연방제 국가인 미합중국의 경우를 보면, 중앙의 연방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보유·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정부도 그 권한을 보유·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합중국의 주정부(지방자치정부)들은 각기 주방위군을 보유하고 있고, 다른 나라와 협정을 체결하는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동전도 각기 찍어내고 있다. 군대보유권, 협정체결권, 화폐주조권을 중앙의 연방정부만이 아니라 지방의 자치정부들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 보유·행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방자치정부의 군대보유권, 협정체결권, 화폐주조권은 중앙연방정부의 통제범위 안에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연방국의 안보와 이익에 관련된 중대한 권한은 엄격하게 중앙연방정부의 고유권한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두 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를 유지하는 핵심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국가연합에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보유·행사하는 범위와 수준은 낮은 단계의 연방국에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보유·행사하는 범위와 수준과 같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통일방안을 더욱 깊이 있게 논의하는 과정에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남북공동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방안을 합의하겠다고 약속한 점을 주시하여야 한다. 통일방안을 합의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통일을 실현할 의사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며, 통일을 후대에게 맡기는 일이 아니라 당대의 과업으로 받아들였음을 인정한 것이 아닐까? 오늘의 남북관계가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볼 때, 통일과업을 사실상 회피하고 있는 화해협력정책과 평화공존전략은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 아닐까?

4)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화해협력과제들이 남북공동선언에 포함됨으로써 자주통일정책이 화해협력과제를 배제하지 않는 '통 큰 정책'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회피하거나 반대하면서 자주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자주통일의 원대한 목표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은 곧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과정과 전혀 모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현실 속에서 자주통일정책이 화해협력정책과 충돌하고 있는 근본원인은 자주통일정책이 화해협력과제 그 자체를 반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자주통일과업을 어떻게 해서든지 회피하거나 배제하고 오로지 화해협력을 통해서 양국론적 평화공존을 추구하려는 화해협력정책의 반자주성, 반통일성을 반대하기 때문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면서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 기조(제1항)를 받아들이고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단계로 나아가자는 제안(제2항)을 받아들였으므로, 김정일 총비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제안(제3항과 4항)이 양국론적 화해협력이 아니라 일국론적 자주통일을 지향하는 제안이라고 인정하였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공동선언에 합의하게 된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이 자주통일과업을 회피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그 정책을 자신의 자주통일정책 안으로 '통 크게' 포섭하였다. 이것이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 배경이다.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낸 바 있는 이동복 씨는 "남북공동선언문의 내용과 표현을 보면 그 작성과정이 주로 북측에 의하여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71쪽)

(3)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결정적인 요인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결정적인 성사요인은 무엇일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서 남(한국) 정부의 발표나 내외언론 보도에서는 지금 답변 아닌 답변이 매우 혼란스럽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부의 정책책임자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제각기 중구난방으로, 제멋대로 해석을 내놓으면서 인식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이 이태 반만에 비로소 효력을 보았기에 평양회담이 이루어졌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요인을 화해협력정책에서 찾는 것은 무지몽매한 일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쪽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난 다섯 해 동안 지속된 경제난에 지쳐버린 북(조선)이 자기 체제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 미국과 남(한국)의 평양회담 제안을 받아들였기에 성사될 수 있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요인이 북(조선)의 체제보장 요구에 있다고 보는 것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헛소리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혁명의 원칙'을 과감히 수정하고 미국의 '변화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평양회담이 이루어진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평양회담을 미국의 '변화 요구'에 연계하려고 하는 논법은 너무 유치해서 더 이상 논의할만한 가치도 없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성사요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결정적인 요인은 북(조선)의 자주통일정책과 그 정책 수행력에 있다는 사실이다. 남(한국)의 화해협력정책은 북(조선)이 자주통일정책을 수행하여 평양회담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말하자면 '조연'을 맡아주었던 것뿐이다. 평양회담이라는 대서사시를 펼쳐가는 과정에서 '주연'은 북(조선)의 자주통일정책이었고 남(한국)의 화해협력정책은 어디까지나 '조연'이었다. 만일 남(한국)이 화해협력정책을 내던지고 지난 시기와 같이 노골적인 대북적대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정하더라도, 북(조선)은 자기의 자주통일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함으로써 평양회담을 기어이 성사시켰을 것이다. 이처럼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결정적인 요인이 북(조선)의 자주통일정책이었으므로 자주통일정책이 그 회담에서 벌어진 정책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주 듣는 말이고, 또 자꾸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말이지만, 모든 관계의 질적 변화는 주체의 운동력에 의해서 결정되고 발생하는 것이다. 평양회담과 그 회담으로 생겨난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도 주체의 운동력이 결정하고 추진한다는 것은 기본상식에 속하는 얘기다. 문제의 핵심은 누구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느냐 하는 데 있다. 평양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던 때, 사람들이 두 눈으로 확인했던 사실을 실례로 들어서 주체의 운동력에 관한 물음에 해답을 찾아보자.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비서가 처음으로 만나는 역사의 현장에 나와있었던 60만 명에 이르는 북(조선)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장면을 현장중계 방송을 통해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시 현지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총비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첫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순안비행장에서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백화원 영빈관에 이르는 경로를 이틀 전에 '삼방송'으로 인민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했다. '삼방송'이란例例箕堅봉?첨단 감청설비로 도청할 수 없는 제3방송, 곧 유선방송을 말한다. (『한국일보』 2000년 6월 15일자)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북(조선)이 자기의 적대세력인 미군의 감청장치에 잡히지 않는 유선방송을 1979년께 부터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다. 그런 유선방송체계를 운영해왔다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유선방송에서 한 마디만 내보내면 수십만 명이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고도의 조직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몇 천 명, 몇 만 명도 아니고 10킬로미터에 걸친 연도에 무려 60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중을 강제로 끌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질환에 가까운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남측 수행원을 도와주었던 북측의 한 안내원은 "어제 김 대통령이 오는 줄로 알고 공(허탕)을 친 사람들은 환영하러 나왔다가 되돌아간 일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군중이 피동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손에 손에 주홍빛 꽃술을 들고 흔들던 60만 군중의 뜨거운 환호성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특별수행원이었던 차범석 예술원 회장은 "주민들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고 말했다. (『신동아』 2000년 7월호, 141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60만 군중이 한결같이, 진심으로 외쳤던 열렬한 구호가 '결사옹위 김정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은 한번도 외치지 않았다. (『중앙일보』 2000년 6월 16일자) 언론은 이 사실에 대해서 그리 주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와하는 함성과 함께 '결사옹위 김정일'을 열렬하게 외친 까닭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남(한국) 언론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듯이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는 함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혁명의 수도'에 초청하여 역사적인 통일회담을 이루어낸 자기들의 영도자를 환호하는 함성이었다.

그러므로 그 군중을 단지 열렬한 환영인파로 보는 것은 착오가 아닐 수 없다. 그 군중은 자기의 영도자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각오로 무장하고 있는 60만 대오였다. 외부사람들에게는 선뜻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이었다. 북(조선)에서는 인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장군님을 목숨으로 지키는 소년근위대 3백만 총폭탄이 되자'는 결사옹위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60만 대오와 영도자가 일치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북(조선)의 저력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지막지한 핵전쟁전략으로 무장한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퍼부었던 5년 총공세에 맞서서 자기의 나라와 체제를 지켜낸 위력적인 힘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거듭된 자연재해와 에너지 부족으로 생긴 경제난 때문에 웬만한 나라 같았으면 열 번이라도 무너졌을 터인데도 역사의 모진 시련을 헤치고 나아간 저력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의 심장부를 위협하는 역공을 퍼부음으로써 결국 미국의 핵전쟁전략을 평화공존전략으로 뒤바꿔놓은 위력적인 힘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족한 식량과 전기, 유행을 따르지 않는 70년대 옷차림만을 보면서 북(조선)을 평가하려는 것은 알맹이는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커다란 착오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남(한국)으로 돌려보자. 김대중 대통령에게 '결사옹위 김대중'을 외칠 충성심 있는 남(한국) 인민들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동교동 시절'부터 그와 운명을 같이 해온 이른바 '가신' 몇 사람들이나 아마 그러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에 돌아가던 날, 서울시는 각 구청별로 귀환환영을 위한 주민동원 인원을 할당하였다. 이에 따라 시청과 구청의 직원 1만5천명이 사무실을 빠져나가 동원되었고, 구청의 지시를 받은 관변단체 소속 회원들, 구청 직원이 통장들을 밤중에 불러내 도로 구간별로 할당한 인원 수천 명이 환영인파로 동원되었다. 서울시와 성남시는 전화 받는 당번을 제외한 3천 여명씩, 강남구는 구청 직원 1천 여명과 주민 3천 여명, 종로구는 구청 직원 5백 여명과 주민 2천 여명, 관악구는 1천 여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한국일보』 2000년 6월 16일자)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야기다. 언론은 이러한 광경을 '한심한 북한 따라하기'라고 꼬집었다.

흉내를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북(조선)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영도자와 인민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을 나눈 혈연적 관계로 맺어지는 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아무나 따라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북(조선)이 말하는 '일심단결'이란 대외선전물을 장식해주는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영도자와 인민이 제국주의의 침탈과 전쟁위협에 맞선 간고한 투쟁의 역사를 헤쳐오면서 생사운명을 함께 하는 동지적 관계로 단결하게 되고 그 속에서 강인하게 다져지고 또 다져진 강철대오의 저력을 뜻하는 말이다.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낸 바 있는 이동복 씨는 평양회담에서 "북측은 김정일 중심 체제의 강철 같은 결속을 과시한 반면 남측에서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세력 간의 심각한 갈등구조를 점화시키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72쪽)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주체의 운동력은 어느 쪽에 있을까? 영도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60만 강철대오에 있을까, 아니면 어설프게 흉내나 내려고 동원한 인파에 있을까? 대답은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바로 이러한 힘의 동학관계를 알지 못하면 평양회담이 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지금 남(한국) 사회에서는 평양회담을 계기로 김정일 총비서와 북(조선)에 대한 관점과 견해가 바뀌면서 인식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 동안 '은둔의 독재자'로 비난해왔던 악질적 모략선전에 속아서 살아왔다는 반성과 후회의 열풍이 사회 각 부문마다 불어오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방송을 담당한 제작책임자들은 앞으로 김정일 총비서와 북(조선)에 관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심하고 있으며,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북(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고 있다. (『중앙일보』 2000년 6월 18일자)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북(조선) 사회에서는 평양회담 이후에 인민들의 관점과 견해가 흔들리는 혼란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통일의지가 더욱 높아지고 통일실현에 대한 신념이 더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미제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자기들의 영도자 김정일 총비서의 융숭한 환대를 받고 돌아갔는데도 그들이 인식의 혼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도자의 결심에 전적으로 따른다는 절대신뢰의 기풍, 영도자의 결단을 따르면 승리한다고 믿는 믿음이 전사회적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특별수행원으로 평양회담에 참가했던 장상 이대 총장은 북측 인사에게 "인민들은 이번 회담을 어떻게 생각합니까?"고 묻자, 그는 "장군님이 결정하면 인민들은 따릅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112쪽) 김용순 비서도 "장군님이 수표(서명)했으니 우리는 따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앙일보』 2000년 6월 16일자) 통일정세가 아무리 급격하게 바뀐다해도 영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세력이라면 한 치 흔들림 없이 당당하고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

남북의 적대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북(조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적대하는 세력은 아무래도 조선인민군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인민군이 자랑하는, 인민무력성 총참모부 소속의 육해공군 명예위병대와 군악대 4백명이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는 행사에 나와 사열과 분열을 진행하였다. 요즈음에는 일반적으로 국가원수를 맞이하는 환영행사에서 의장대를 사열은 하지만, 분열은 생략하는 게 외교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그 자리에서는 분열까지 진행하였다. 최상의 예우였다. 북(조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날카로운 적대감을 갖고 있는 군부가 그토록 최상의 예우를 갖춘 것은 군부의 자발적인 선택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군을 이끌고 있는 최고사령관인 김정일 총비서의 결심에 의한 파격적인 조치였을 것이다. 김 대통령의 환영행사에 명예위병대를 동원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군지휘관들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이론을 제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조선)의 군부는 김정일 총비서의 결심을 전적으로 따랐다.

6월 15일 백화원 영빈관 1호각에서 열린 환송오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자리에 군복이 아니라 양복 차림으로 참석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임에 의하여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훌륭한 과업에 대한 성과가 나오고 있는 것을 축하한다"면서 "두 분이 천리혜안으로 민족리익을 첫째로 하여 민족 앞에 력사적 결단을 내려주었다"고 말하고, "우리 국방위원회는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더불어 마련된 통일 건설에 대하여 만족한 생각을 갖고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조명록 차수의 이 발언은 조선인민군을 대표한 발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런 내용의 축하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북(조선) 군부를 대표하는 군지휘관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김정일 총비서는 북(조선) 군부를 대표하여 조명록 차수가 축하발언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김정일 총비서의 '통 큰 정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김정일 총비서가 군부에게 그들이 적대하고 있는 남(한국)의 대통령에게 최상의 예를 갖추어 환영하고 진심으로 축하하라고 하면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에서 김정일 최고사령관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을 힘있게 안받침해주고 있는 힘의 실체, 곧 주체의 운동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조선로동당은 말할 것도 없고, 전민, 전군이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따르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평양회담을 논하는 것은 알맹이 없는 공리공담이다.

텔레비전 방송에 편집이나 가감이 없이 비춰진 김정일 총비서의 모습에는 시종일관 자신 만만한 여유와 소탈하고 폭넓은 아량과 인정이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그 동안 그에 대한 모략과 억측 때문에 그릇된 인상을 지니고 있었던 남(한국) 동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남(한국)의 언론은 여기에서 발언을 멈추고 있지만, 우리는 김정일 총비서의 여유와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물론 영도자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내 뒤에는 2천만 인민의 절대적 지지와 단결력이 있다'는 생각, 다시 말해서 자기 인민의 저력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을 안받침해주는 힘의 실체, 주체의 운동력은 무엇일까? 당리당략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대중으로부터 불신과 비난을 받고 있는 허약한 체질의 정치권이 힘의 실체일까? 느닷없이 몰아닥친 평양회담의 열풍 때문에 '주적개념'에서 혼동을 느끼고 있는 군부가 힘의 실체일까? 이런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화해협력정책을 안받침해주는 힘의 실체는 매우 허약하고 부실하다는 점이다. 그 정책이 그 동안 '간판'을 여러 차례 바꾸어 달면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그 정책이 갈팡질팡하면서도 그나마 자기의 존재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그 힘의 실체가 남(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화해협력정책을 유지해주는 힘의 실체는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수행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4)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과 대미평화공존전략

정책에는 반드시 전략이 뒤따르기 마련이고, 전략은 영활한 전술이 있어야 위력을 발휘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에는 대북평화공존전략과 대미추종전략이 뒤따르고 있다. 반면에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에는 두 가지 전략, 곧 대남통일전선전략과 대미평화공존전략이 뒤따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에서 대북평화공존전략과 대미추종전략의 연관관계도 그렇지만,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이 수행하고 있는 두 가지 전략도 서로 끊을 수 없는 연관고리로 결합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선차적인 의의를 갖는 것은 대미평화공존전략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만일 대미평화공존전략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대남통일전선전략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이 두 전략을 어떻게 추진하여 자신의 자주통일정책을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평양회담의 본질인식과 발전전망을 밝혀주는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는 문제이므로 앞으로 자료근거를 가지고 더 자세하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글쓴이의 능력부족과 지면제약으로 아쉽지만 시론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북(조선)에서 자주통일정책을 수행하는 새로운 전략단위로 대미평화공존전략이 설정된 것은 김정일 총비서의 업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5년 전에 김정일 총비서가 대미평화공존을 전략적 방침으로 제시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러한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이 밖으로 전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알 수 없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자주통일을 실현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는 전쟁전략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침략전쟁전략을 해방전쟁전략으로 제거하느냐 아니면 침략전쟁전략을 평화공존전략으로 제거하느냐 하는 문제로 집약되었다. 25년 전이라는 시점의 북(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쟁은 정의의 전쟁, 해방전쟁이라는 불변의 대원칙만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그 밖의 가능성은 전략적 사고 안으로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 무렵 북(조선)에서 누가 만일 제국주의와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전략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곧 수정주의라는 비판과 배격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 누구도 제국주의와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해방전쟁론의 대원칙을 전혀 수정하지 않으면서도 원론적 정세인식의 틀을 과감히 뛰어넘었다. 그는 한(조선)반도에서 아메리카 제국주의를 전쟁의 방법으로 몰아낼 수도 있고 평화적 방법으로 몰아낼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만일 전쟁의 방법을 택할 경우 우리 민족 전체가 입게 될 전쟁피해는 엄청난 것일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전략적 사고에서는 평화적 방법이 더 우선적인 전략으로 선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평화적 방법이라는 것은 미국과 정치협상을 통해서 자주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초강대국 아메리카가 동방의 작은 사회주의 적대국이 추구하려는 평화적 방법 자체를 일체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치협상 제안에 대해서는 코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만일 힘이 월등히 강한 제국주의가 자기 보다 힘이 약한 사회주의 적대국을 대상으로 정치협상을 벌이게 된다면, 그것은 세계 정치외교계를 웃기는 촌극 중의 촌극이 될 것이다. 세계지배의 야망을 떠들어대는 아메리카 대제국이 그러한 촌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워싱턴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북(조선)과 정치협상 탁자에 마주앉는다는 것은, 북(조선)을 이른바 '깡패국가'가 아니라 주권국가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자기와 대등한 지위에 있는 강대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이것을 인정하기가 죽기 보다 싫었다. 아니 그 보다도 미국의 명예와 자존심에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워싱턴은 오랫동안 북(조선)의 정치협상 제안을 완전히 무시하는 전술로 일관하였다. 한(조선)반도에서 정전상태를 대체하는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선택은 평화적 정치협상이 아니라 오로지 전쟁전략이었다. 워싱턴으로서는 다른 방도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칠천만 민족이 지난 수십년 동안 전쟁공포 속에서 가위눌리며 시련을 겪어야 했던 근본원인이다.

미국을 정치협상으로 끌어내어 적대관계를 청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역시 북(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힘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김정일 총비서가 간파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북(조선)이 미국으로 하여금 정치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길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급소를 겨냥한 위협전술 밖에는 없었다. 김정일 총비서의 위협전술은 군사분야와 국제정치분야에서 동시적으로 강한 타격을 주는 양면전술로 준비되고 실행되었다. 그가 미국을 상대로 벌인 대결과 협상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때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기습전, 매복전, 고속기동전 같은 다양한 전술을 동원하여 워싱턴을 경악과 공포에 몰아넣으며 끊임없이 괴롭혀왔다는 것은 이미 세계 정치외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편만 들기를 좋아하는 서방언론들은 협상과정에서 번번이 벼랑 끝에 몰리곤 했던 쪽이 북(조선)이라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지만, 사실 벼랑 끝에 몰려 식은 땀을 흘린 쪽은 미국이었다.

척 카트먼 한(조선)반도 평화회담 특사와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만나는 고위급 회담장에 나가보면 그런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카트먼 특사는 회담장에 들고 나가면서 문 밖에 몰려있는 기자들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다. 반면에 김계관 부상은 기자들에게 여유 있는 인사말도 건네고 질문이 들어오면 간단히 답변도 하곤 한다. 또 회담이 끝나고 으레 갖게 되는 기자회견에서 카트먼 특사는 변변히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있는 반면에, 김계관 부상은 시종 여유 있게 발언하는데, 그 때마다 카트먼 특사는 김 부상의 입에서 무슨 폭탄 같은 발언이 나오지나 않을까 하여 극도로 긴장하면서 그 입술만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회담장을 따라다니며 오래 현장취재를 했던 특파원들이 취재담 기사에서 밝힌 이야기다.

북(조선)을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오만방자한 미국을 정치협상으로 끌어내는 결정적인 위협전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김정일 총비서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일은 북(조선)의 국력을 기울여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날카로운 감시체계를 따돌리고, 자본과 기술이 매우 부족하고 빈약한 조건에서 그 엄청난 국책사업을 '속도전'으로 추진해야 했으므로 수많은 우여곡절과 난관이 앞을 가로막았을 것은 묻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는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중국의 개방과 개혁,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서거, 계속되는 자연재해와 식량난,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전면적인 고립압살로 이어진, 그야말로 폭풍우 같은 시련과 난관은 잠시도 그칠 줄 몰랐다. 지난 90년대는 김정일 총비서에게 모든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특히 미국의 5년 총공세는 웬만한 나라의 통치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중한 사태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국을 사회주의 적대국과의 정치협상에 끌어내고야 말았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정치협상에 끌려나오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98년 8월 31일에 '광명성 1호'를 발사한 일이다. 이 사건은 아메리카 제국주의에 대해서 가장 날카롭게 맞서있는 사회주의 적대국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음을 전세계에 엄숙히 선포한 대사건이었다. 허를 찔린 워싱턴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으며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작은 나라도 일치단결하여 투쟁하면 초강대국에게 정치군사적 타격을 능히 가할 수 있다는 기적 같은 현실을 목격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약소국들과 국제공산주의운동,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은 일제히 환호와 갈채를 터뜨렸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침탈이 몰아온 군사적 위협, 외교적 고립, 경제적 시련, 정치적 예속 때문에 고생하면서 '고난의 행군'길을 헤쳐가고 있는 전세계 수십억 피압박 민족들은 '광명성 1호'가 휘황한 불꽃을 내뿜으며 우주공간을 향해 동해의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순간, 승리의 신념을 안겨준 '희망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 때부터 2천만 북(조선) 인민들은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미래'를 향하여 '천리마 대진군'을 시작했다.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다는 사실은 군사적으로는 미국의 심장부를 직접 위협하는 전술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국제정치적으로는 미일동맹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집권세력을 충동·자극하여 미일 사이의 모순관계를 심화시키고 결국 미일동맹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전술적 효과를 가져왔던 것은 물론, 미국의 세계 지배를 보장해주는 강력한 도구인 핵확산금지조약 체제를 전면적으로 위협하는 전술적 효과를 가져왔다. 김정일 총비서의 역공은 실로 대성공이었다.

김정일 총비서의 역공전술을 당해낼 수 없었던 클린턴은 결국 고립압살정책을 평화공존정책으로, 그리고 전쟁전략을 협상전략으로 바꾸는 정책전환을 명령하였다. 그 명령을 받은 실무책임자는 워싱턴에서는 제법 전략적 사고를 할 줄 안다는 윌리엄 페리다. 1999년 9월에 나온 페리보고서는 '광명성 1호'가 없었으면 발표될 수도 없었고 정책전환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자기의 정책을 전환했다는 페리보고서를 발표해놓고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질질 끌면서 평화공존정책의 이행을 자꾸 뒤로 미루었다. 그 원인은 클린턴의 정책전환을 달가워하지 않고 북(조선)의 위협전술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워싱턴의 무지몽매한 반대파들이 정책이행의 길을 가로막으며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정책전환을 주도한 클린턴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게 된 상황에서, 워싱턴 정치권이 클린턴의 정책전환에 동조·지지할 때만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던 김정일 총비서는 '광명성 2호'의 발사준비를 명령하였다. 이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지자 반대파들도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방해작전에 매달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올해 초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이다.

조미관계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은 북(조선)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첫 단계에 들어가는 대신, 북(조선)에게 남(한국)과 최고책임자회담을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로마회담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평양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발표가 나온 것, 그리고 콸라룸푸르회담에서 미군 유해 공동발굴을 재개한다고 합의할 때 북(조선)이 이전과 달리 보상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두 나라의 관계가 잘 풀려나가리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평양회담이 끝난 바로 뒤에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일정하게 풀고 '깡패국가'라는 모욕적 표현을 버리고 '우려국가(state of concern)'라는 덜 모욕적인 표현으로 바꾼 조치 같은 것도 그러한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New York Times, 2000년 6월 20일자) 미 국무부 대변인 리커는 조미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0년 5월 26일자)

이렇게 놓고 볼 때, 김정일 총비서의 역공전술이 없었더라면 미국의 정책전환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만일 그의 역공전술이 없었더라면, 페리보고서도,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도, 그리고 역사적인 평양회담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의 대미평화공존전략이 보여주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구걸이나 청원이 아니라 미국의 총공세에 역공으로 맞서면서 강한 정세돌파력을 발휘한다는 데 있다. 이제 평양회담을 기점으로 하여 대미평화공존전략은 한 급 높은 단계로 올라설 것이다. 조미 사이의 고위급 정치회담이 줄이어 성사될 것이며, 김정일 총비서는 앞으로 그 회담들에서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바꾸어놓는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다. 워싱턴의 아시아태평양정책센터 소장 더글러스 팰은 북(조선)이 고위급인사를 미국에 보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는 외교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세계일보』 2000년 6월 22일자)

김정일 총비서는 대미평화공존전략으로 조미관계를 정상화 과정에 진입시킨 뒤에 비로소 대남관계 개선에 나섰다. 워싱턴의 전략가들과 서방언론들은 미국의 이른바 '남북 당사자 해결원칙'에 따라 먼저 대남관계를 개선하면 미국도 북(조선)과 관계개선을 추진하겠는데, 김정일 총비서는 왜 대남관계 개선을 제쳐놓고 대미관계 개선에만 주력하고 있는가 하는 까닭을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김정일 총비서의 전략적 사고를 읽지 못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슨 '통미봉남 전술'이라는 엉뚱한 말이 나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평양회담은 바로 조미관계와 남북관계의 개선을 한꺼번에 앞당긴 비약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 김정일 총비서는 대미관계 개선의 줄과 대남관계 개선의 줄을 번갈아 당기면서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자신의 전략목표인 자주통일의 실현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미국 대외관계협의회의 한(조선)반도 전문가 마이클 그린은 언론과 가진 대담에서 앞으로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 김정일 총비서가 주도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으며(『세계일보』 2000년 6월 20일자), 더글러스 팰은 "북한이 주변 4강에 대해서 주도권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 입지를 확보한 뒤 이제 4강 세력균형의 중심점 역할을 맡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2000년 6월 22일자) 이것이 김정일 총비서와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북(조선) 인민들이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추진하고 있는 자주통일정책의 진면목이다. 평양회담을 통하여 김정일 총비서의 지략과 전술이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를 자주통일의 궤도로 올려놓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한(조선)민족의 운명은 그 궤도 위에서 도약의 눈부신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5) 김정일 총비서의 자주통일정책과 대남통일전선전략

남(한국) 사회에서 통일전선전략이라는 개념은 공안기관과 반북세력의 집요한 모략선전 때문에 남(한국) 체제를 위협하는 이른바 '적화통일'이라는 개념과 거의 동의어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를뿐더러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이다. 북(조선)의 견지에서 보면, 통일전선전략이라는 개념이 상대쪽의 기피어, 혐오어가 되어 버렸으므로 그 개념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드러내놓고 사용할 수 없었다. 이번 평양회담이 김정일 총비서의 대남통일전선전략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도 북(조선)의 언론에서 통일전선전략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미평화공존전략과 더불어 대남통일전선전략은 김정일 총비서가 자신의 자주통일정책을 수행하는 한 전략단위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1)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전선전략은 대상을 타도·정복하려는 상극의 전략이 아니라, 대상과 손잡고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려는 상생의 전략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회담에서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윈·윈전략'을 말한 적이 있는 데, 상생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만을 놓고 본다면 통일전선전략이나 '윈·윈전략'이나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 가서 평양회담이 '윈·윈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 다들 좋아하겠지만, 만일 통일전선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면 대뜸 반발할 것이다. 반대로 평양에 가서 평양회담이 통일전선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 다들 좋아하겠지만, '윈·윈전략'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할 것이다. 언어와 개념은 사전적 의미로만 규정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산생(産生)시키고 통용시키는 정치상황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은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전선전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로 모아진다.

통일전선전략이란 '적화통일전략'이 아니라, 사상과 이념이 다른 대상이 공동의 민족적 과업을 위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을 때, 주저 없이 그 대상과 손을 잡는다는 상생의 전략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김정일 총비서는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지도자이며, 김대중 대통령은 자본주의 정치인이다. 사상과 이념의 잣대로 재어보자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상극의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전선전략은 사상과 이념의 잣대를 치우고 공동의 민족적 과업인 자주통일위업을 위하여 지난 날 서로 반목하고 적대하던 상대라 하더라도 과거를 묻지 않고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평양회담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공동선언을 합의·채택함으로써 공동의 민족적 과업인 자주통일위업을 위하여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주통일과업을 합의한다면 비록 미국을 추종하고 있는 자본주의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터놓고 만나 손을 잡겠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2) 통일전선전략은 '일시적인 기만전술'이 아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정세에 따라 상대를 적당히 이용하다가 정세가 달라지면 다시 태도가 돌변하여 타도·정복하려는 '일시적인 기만전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전선전략은 공동의 민족적 과업을 성취할 때까지, 아니 연방통일국을 건설한 뒤에도 끝까지 손잡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동행자로 함께 가겠다는 전략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평소에 '혁명적 의리'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 평양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첫 날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다"고 말한 사실은 일단 손을 잡은 동행자에게는 의리를 지키겠다는 그의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한 번 다진 신념, 한 번 맺은 의리를 끝까지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로동신문』 1999년 5월 26일자)

3) 통일전선전략의 역사적 근원은 김일성 주석의 조국광복회에 있으며, 분단시대에 들어와서는 1948년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그 원형질을 마련하였다. 김정일 총비서는 조국광복회를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로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량심적인 종교인과 자본가들까지 광범한 애국력량을 망라한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라고 설명하였다. (『로동신문』 1998년 4월 29일자)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말하면서 생각나는 것은 평양에 있는 통일전선탑이다. 평양을 한 품에 안고 흐르고 있는 대동강에는 릉라도, 양각도, 두루섬, 쑥섬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줄지어 떠있는데, 그 가운데 쑥섬에는 김일성 주석이 세운 통일전선탑이 있다. 북(조선)에서는 이곳을 중요한 사적지로 보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1948년 4월의 일이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의 분단고착화정책을 반대하여 이 민족이 자기의 목숨을 바쳐 피의 투쟁을 벌였건만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의 앞날은 차츰 어두워져만 가던 그때, 평양에서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기 위한 절박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연석회의는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이라는 절대절명의 민족적 과업을 위해서라면 사상과 이념, 정견의 차이를 떠나 우선 한 민족으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분단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공적으로 쌓아놓았던 통일전선전략의 긴급회의였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김구 선생은 그 회의 이전까지만 해도 리승만, 김성수와 함께 '타도 대상'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김구 선생이 평양에 가게 되었을 때, 평양시 곳곳에 나붙은 '김구 타도'라는 구호를 급히 지웠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북(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김구 선생을 배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구 선생도 평생 공산주의를 반대해왔던 것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은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이라는 공동의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길에서 한 때 '타도 대상'으로 불렀던 김구 선생과 손을 잡았다. 통일전선탑이 서있는 쑥섬에는 그 당시 김구 선생, 김규식 박사 등 남측 원로 정치인들이 북측의 젊은 지도자 김일성 주석과 함께 대동강에서 쑥섬까지 건너갈 때 탔던 거룻배 한 척이 정히 보관되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날 젊은 지도자 김일성 주석은 삼팔선을 넘어서 평양을 방문한 김구 선생, 김규식 박사 등 남측 원로 정치인들과 함께 대동강을 건너면서 극진한 예를 갖추어 그들을 모셨다고 한다. 이것은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평양회담에서 김정일 총비서가 70대의 노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을 극진하게 예를 갖추어 환영하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남측의 원로 정치인들은 5월 1일 평양에서 벌어진 국제노동절 기념행사 주석단에 서서 북측 군대의 분열과 사열을 받았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평양회담에서 김정일 총비서가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조선인민군 명예위병대의 분열과 사열을 진행하도록 하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김일성 주석이 52년 전에 '타도 대상'으로 불렸던 김구 선생과 손을 잡았던 평양의 연석회의와 52년이 지난 오늘 김정일 총비서가 '미제의 앞잡이'로 불렸던 김대중 대통령과 손을 잡았던 평양회담은 하나의 사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통일전선전략사의 동일한 맥락이다. 김정일 총비서에게 있어서 평양회담은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해서 단군의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역량을 하나로 묶어 세우려는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들고 52년이라는 험하고 험한 분단의 시간대를 관통해온 통일전선전략의 계승과 발전이었다. 사상, 이념, 정견의 차이를 뒤로 밀어두고 우선 공동의 민족적 과업인 자주통일위업을 위해 단합과 단결의 손을 잡으려는 민족대단결사상이 변함 없이 흐르고 있었기에, 평양의 연석회의에서 마련되었던 통일전선전략의 원형질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평양회담을 이루어낸 역사적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민족대단결사상은 1993년 4월에 발표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여기서 그 강령의 내용을 해설하지는 않겠으나, 한 가지 밝혀야 할 사실은 그 강령이 '적화통일'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일시적인 기만전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강령에는 공동의 민족적 과업인 자주통일위업을 이루려는 김일성 주석의 의지와 사상이 배어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김정일 총비서는 남북 연석회의 50주년이 되는 1998년 4월 18일 연석회의 50돐을 기념하는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낸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를 발표하였다. 이 서한에서 그는 민족대단결사상을 구현하는 전략적 방침을 다섯 항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서 이 글의 주제에 결부되는 내용은 남북관계의 개선에 관한 항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그 서한에서 자신의 전략적 방침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민족적 단합과 조국통일의 길에서 변함없이 광폭정치를 실시하여 민족적 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그와 단결하며 조국통일의 한 대오에서 손잡고 나갈 것입니다. (줄임) 우리는 남조선의 집권상층이나 여당과 야당 인사들, 대자본가, 군장성들도 민족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그들과도 민족대단결의 기치 밑에 단합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손을 잡은 사람들과는 조국통일의 길에서 뿐 아니라 통일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한 투쟁에서도 힘을 합쳐나갈 것이며 조국통일에 공헌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민족의 이름으로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로동신문』 1998년 4월 29일자)

이러한 통일전선전략에 따라 김정일 총비서는 먼저 공산주의의 적대자로 분류되는 '대자본가' 정주영 씨를 만났다. 그가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제시하면서 '대자본가'와도 손을 잡고 통일전선전략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지 꼭 여섯 달이 되던 1998년 10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로써 11월부터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다. 현대는 2000년 5월말까지 2억 4천 6백만 달러를 북(조선)에 보냈고, 2005년 2월까지 9억 4천 2백만 달러를 보낼 것이다. (『중앙일보』 2000년 5월 31일자) 남(한국)에서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북(조선)의 '개방을 지향한 변화'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것은 대자본가라 하더라도 자주통일위업의 길에서 손을 잡겠다는 김정일 총비서의 통일전선전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자주통일위업을 함께 이룩하자고 했을 때, 대자본가 정주영 씨가 바로 그 '돈 있는 사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총비서를 만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자주통일위업을 함께 이룩하자고 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바로 그 '힘 있는 사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총비서를 만난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전선전략의 목표는 민족대단결이며 그 기초는 민족대단결사상이다.

4) 통일전선전략은 세 가지 형태로 전개된다. 제1형태는 남(한국)의 정치적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통일전선전략이다. 이것은 남북 정부당국의 정치협상으로 추진되고 있다. 역사적인 평양회담은 이 형태의 결정판이었다. 제2형태는 남북해외 민족대단결운동의 전민족적 통일전선전략이다. 이것은 범민련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3형태는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이 남(한국) 안에서 추진하는 통일전선전략이다. 이것을 추진하는 주체는 북(조선)이 아니라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이다. 이 글에서 논의할 것은 통일전선전략의 제1형태, 곧 남(한국)의 정치적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통일전선전략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평양회담을 통일전선전략의 제1형태로 추진하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평양회담은 남(한국)과 북(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책임자 사이에서 진행된 통일전선전략의 회담이었을 뿐아니라, 남측의 집권당인 민주당과 자민련 인사들과 북측의 조선로동당과 그 우당인 조선사회민주당 대표들 사이에서, 그리고 남과 북의 각계층 대표들 사이에서 진행된 통일전선전략의 회담이었다는 사실이다. 특별수행원으로 평양회담에 갔던 자민련의 이완구 의원이 전한 말에 따르면, 이번에 평양에서는 "정당사회단체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남북한 정당사회단체가 한꺼번에 모여 민족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민족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상회담을 잘 보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104쪽)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상봉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6월 13일 저녁, 평양의 중앙 텔레비전 방송은 「민족대단결의 위대한 구성」이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방영했는데, 이 영화는 김일성 주석이 1948년 4월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부터 1991년까지 평양을 찾아간 남(한국)의 각계층 인사들과 상봉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인터넷 한겨레』 2000년 6월 13일자) 이것은 이번 평양회담이 민족대단결을 실현하려는 대남통일전선전략에 따라 남북의 최고책임자가 만나는 정치회담이었을 뿐아니라 남북의 각계층 인사들이 만나는 남북 정당사회단체 회의였음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회담에 유일한 여성 특별수행원으로 참가했던 장상 이대 총장은,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박재규 통일부 장관에게 "여성 대표인 내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가"고 물었으나 박 장관은 "전혀 모른다. 저쪽에서 정한다. 가 봐야 안다"고 대답했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112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측의 특별수행원들은 자신들이 남북 정당사회단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평양에 간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평양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제2형태의 통일전선전략과 제3형태의 통일전선전략은 국가보안법 체제의 혹심한 탄압과 방해에 가로 막혀 있었다. 제1형태의 통일전선전략이 평양회담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제2형태와 제3형태의 통일전선전략을 가로막았던 국가보안법 체제가 밑둥부터 흔들리면서 범민련운동과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이 움직일 수 있는 활동공간이 크게 확장되었다. 제1형태의 통일전선전략의 수행이 심화·발전되면 될수록 범민련운동과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에게 유리한 정세가 조성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6) 맺음말을 대신하여 - 통일영웅 왕건을 다시 생각한다

지금 남(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케이비에스에서는 '태조 왕건'이라는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다. 반만년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통일국을 세운 통일영웅 왕건의 일대기를 그린 연속극이다. 나는 이 글을 민족의 영웅 왕건의 통일업적을 되새겨보면서 맺으려 한다. 역사는 내일을 개척하는 지혜의 보고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평양회담 이후 칠천만 민족 앞에 마침내 열려지고 있는 통일시대를 왕건의 통일시대와 견주면서 전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첫째, 통일영웅 왕건은 탁월한 통일전략과 강한 통일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조선)반도의 정치지형은 수많은 지방호족세력이 분할·통치하고 있었다. 지방호족세력을 단합된 민족역량으로 묶어냄으로써 통일국을 세우는 민족대단결과 통일국 건설, 이것이 그 시대 왕건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였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고 추진했다. 본관제를 시행하여 지방호족세력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면서 그들을 포섭한 것은 그가 어떠한 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사실 왕건의 이 전략 덕분에 그 때부터 한(조선)민족은 본관을 갖게 되었다. 본관제의 실시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방자치권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연방통일국을 세우려는 탁월한 통일전략이었다.

왕건의 통일전략은 지방호족세력들과 손을 잡는 일종의 통일전선전략이었다. 그와 손을 잡았던 지방호족세력들은 그의 통일건국사업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그에 동참하였다. 그는 한(조선)반도를 통일하기까지 모두 29명에 이르는 지방호족의 딸들과 정략혼인을 하였다. 황해도에서 9명, 경상도에서 6명, 경기도에서 4명, 충청도에서 3명, 강원도에서 3명, 전라도에서 2명,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출신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정략혼인이라는 전술로 지방호족세력을 자신의 통일전선으로 포섭한 것은 그의 뛰어난 지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각지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견훤이나 궁예는 통일전략도 통일의지도 없었다. 한 때 세력과 명성을 떨쳤던 그들이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왕건에게 통일위업이 주어진 것은 그가 다른 통치자들과 달리 통일전략과 통일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예는 후기신라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견훤은 우세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후기신라에 쳐들어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였지만, 통일의지가 없었던 까닭에 곧 철군하고 말았다. 그러나 왕건은 달랐다. 그의 군사력은 후기신라에 비해서 우세하였는데도 신라를 찾아가서 신라왕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북(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광폭정치'다. 그로써 신라인민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고, 신라의 경순왕은 왕건과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항복하였다. 이것은 후기신라를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후기신라에 대한 왕건의 정책은 단순한 화해협력정책이 아니라, 후삼국 통일이라는 원대한 구상과 심오한 경륜에서 나온 통일정책이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둘째, 통일영웅 왕건은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지 않고 자주통일위업을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자"고 밝힌 남북공동선언 제1항의 자주통일정책은 이미 1천년 전 통일영웅 왕건도 추진한 바 있다. 왕건의 통일위업에는 외세와의 '공조'나 '협력'이 끼여들 자리가 없었다.

셋째, 통일영웅 왕건은 후기신라를 무력으로 정복하는 무력통합이 아니라 평화통일의 길을 택하였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왕건은 동족끼리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술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왕건이 후백제와 후기신라의 집권세력을 배척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그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통일국 고려를 건설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후백제를 통일한 뒤에, 패망한 후백제 통치세력의 불만과 저항을 수습하는 일에 힘썼다. 그가 충남 논산에 거대한 사찰 개태사를 세운 것은 바로 후백제의 통치지역을 통일국 안으로 포섭하려는 '통 큰 정치'의 일환이었다.

이 강토 위에 최초의 통일국이 세워진 뒤로 거의 1천년이라는 세월이 아득히 흘러갔어도 개태사 발원문은 통일영웅 왕건의 통일위업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뚜렷이 증언하고 있다. 그 발원문에는 그의 통일위업의 근본목적이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적혀있다. 민족의 통일영웅 왕건이 꿈꾸었던 그 평화와 번영의 통일세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게 1백년 동안 시달려온 우리 한(조선)민족이 자주강국, 경제부국, 문화대국을 건설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해방세상, 통일세상은 또 다른 통일영웅의 손에 의해서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2000년 6월 22일 작성, 뒤에 가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