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2)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특사회담이 아니라 극비회담에서 합의되었다

(3)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는 누가 먼저 결정했는가

(4) 미국은 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는가

(5) 북(조선)은 왜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는가

(6) 정상회담과 최고위급회담의 충돌은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과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의 충돌이다.

(7)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과 김정일 총비서의 조국통일의지

(8) 미국·남(한국)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추진하려는 것은 평화적 분단관리정책이다

(9)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남북합의서가 세상에 발표되던 그날, 사람들의 놀라움은 컸다. 나 자신도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그 소식을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가 한 밤이었는데도 이 대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의전화가 여기저기서 들어왔지만 나는 답변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그 동안 한(조선)반도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라고 자처해온 나라 안팎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그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내다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정세 속에서 돌발적인 변화에 의하여 그 진행방향을 바꾸어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것은 비단 한(조선)반도의 정세변화에만 특정하게 들어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중·미 수교, 베트남 통일, 독일 통합, 소연방 해체 같은 20세기의 세계 지도를 바꾸어놓은 대사건들을 미리 내다본 전문가는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세계 지도를 또 한 차례 바꾸어놓을 대사건인 한(조선)반도의 통일도 바로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급속하게 일어날지 모른다.

전문가들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발표된 뒤에서야 비로소 이러저러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거의 예외없이 '햇볕정책의 승리'를 칭송하고 남(한국)의 기업들이 북(조선)에 경제적으로 진출할 기회가 왔다고 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내용만 쏟아놓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까닭은 이번의 대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분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미 지난 6년 동안 정상회담을 준비해오고 있는 회담의 일방인 북(조선)의 의도와 전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대사건이 어떠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그 정상회담에서 회담의 쌍방이 추구하려고 하는 전략을 파악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눈 앞에둔 지금, 이 글을 조국통일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논제로 세상에 내놓는다.

(2)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특사회담이 아니라 극비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올해 들어서 2월 초까지 북(조선)은 남(한국)에게 경제협력을 제의하고 있었다. 북(조선)이 경제협력을 제의한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진행되었듯이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남(한국)의 민간기업을 통하여 남(한국) 정부당국에게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북(조선)의 경제협력 제의를 남(한국)에 전달한 사람은 금강산국제그룹의 박보희 회장과 박상권 사장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2월 3일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열린 평화자동차 종합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바있다. 이 공장은 통일그룹 산하 금강산국제그룹이 북(조선)과 합작으로 설립한 최초의 자동차 합작공장이다. 북(조선)의 경제협력 제의는 비료지원, 사회간접자본 투자, 북(조선)의 유전 공동개발 등 굵직굵직한 것들이었다. 2월 7일 남(한국) 정부당국자는 북(조선) 서해안에서 원유시추작업을 벌이고 있는 스웨덴의 타우러스사가 현대그룹에게 유전 공동개발을 제의한 것으로 밝혔지만, 이 제의는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과감한 대남 경제협력 제의를 받은 남(한국) 정부당국은 "크게 당황했"으며, "4·13 총선용 제의가 아니냐는 등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3월 9일 '베를린 선언'에서 북(조선)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하기 위한 남북 당국자 회담을 개최하자고 한 발언은 바로 이러한 대남 경제협력 제의에 대한 반응이었다. '베를린 선언'의 첫 조항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지적면서, "이제는 정부 당국 간의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 당국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를린 선언'에 나오는 남북 당국자 회담이라는 표현은 남북 정상회담이 아니라 남북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장관급 회담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2월 중순에서 3월 초에 이르는 기간에 남북 경제협력 문제가 뒤로 물러서고 남북관계에서 가장 예민하고 중대한 정치문제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을 추진한 쪽은 국가정보원이었다. 국가정보원은 베이징의 남(한국)대사관에 나가있는 요원을 통해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를 은밀하게 접촉하면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제안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정원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해서 북(조선)이 처음에 경계심을 보인 것은 당연하였다. 『로동신문』 3월 6일자 기사에서 "북남대화가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참다운 대화가 되려면 북남대화에 대한 자세와 립장부터 바로 가지고 대화를 상대방에 대한 모략공간으로 리용하려는 괴뢰정보원 패거리들의 개입부터 일체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맹비난한 것은, 국정원이 갑자기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자고 제의한 것에 대해서 북(조선)이 처음에 그 제의 의도와 배경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계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베이징에서 은밀하게 대북 접촉을 시작했던 국정원은 장소를 싱가포르로 옮겨 본격적인 극비회담을 진행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고 있던 3월 9일 바로 그날 싱가포르에서는 김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국정원 관계자가 극비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국)의 한 언론은 회담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면서, 3월 9일 싱가포르에서 국정원의 케이(K) 국장(60살)과 에스(S) 단장이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송호경 부위원장과 참사인 에이취(H) 씨, 케이(K) 씨 등과 만나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하는 극비회담을 진행한 바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과 아태평화위의 극비회담은 세 차례나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극비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지휘체계는 임동원 국정원장-케이(K) 국장-에스(S) 단장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 두 사람의 국정원 실무자들은 나중에 남북 특사회담의 배석자로 참석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결정된 것은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의 특사회담이 아니라 국정원과 아태평화위가 세 차례나 접촉했던 극비회담이라는 사실이다. 이 극비회담에서는 이미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세상에 알려진 남북 특사회담은 이미 사전에 물밑에서 진행된 남북 극비회담에서 합의된 원칙을 실무적으로 집행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3)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는 누가 먼저 결정했는가

3월 9일 싱가포르에서 극비회담이 이루어질 때까지도 김대중 대통령의 관심은 남북 정상회담이 아니라 남북 경제협력을 추진할 장관급 회담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대통령이 3월 말에 있었던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특별대담에서 "선거 후에는 중동특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북한특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중소기업들에 상상할 수 없을 규모로 투자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당시 그의 관심은 경제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에 관해서 그는 총선 뒤에나 가능할 것으로 늦추어 잡으면서 별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1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 민주당 창당대회에서 "16대 총선에서 안정의석을 얻으면"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민족화해 등 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의하겠다고 말했던 사실이나, 청와대 대변인이 김대중 대통령은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합의한 것에 대해서 놀라워했다고 밝힌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남북 특사회담이 한참 진행되어 두 번째로 열리기 된 시점이었던 3월 21일에 와서야 비로소 김대중 대통령은 와이티엔(YTN)과 가진 회견에서 "국민 다수 의사가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찬성한다는 판단이 서면 이른 시일 안에 추진하겠다"고 발언하게 되었다. 총선 뒤로 늦추어 잡아놓았던 가능성이 "놀라울 정도로" 이른 시일의 가능성으로 훨씬 앞당겨진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남북 정상회담은 나중에 추진할 일로 제쳐두고 우선 남북 경제협력에 집중되어 있었던 김대중 정권의 관심을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로 급히 돌려놓은 것은 미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국가정보원이 가장 예민하고 중대한 정치문제라고 할 수 있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가지고 북(조선)과 극비회담을 추진하는 것은 미국의 결정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9년 10월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고문 오찬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 국가의 존립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관련된 중대사이기 때문에 미국과 긴밀히 협조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한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말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미국과 긴밀히 협조한다고 하였지만,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자주권을 지니지 못하고 미국의 포용정책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미국과 긴밀하게 협조한다'고 하기 보다는 '미국의 결정을 따른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이번에 나온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문제와 관련해서 남(한국)의 한 언론은 한·미 양국 정부관계자들이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발표에 앞서 사전에 협의했다고 지적했는데, 그것도 실제로는 '사전 협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발표되어 세상이 놀라움 속에 술렁이고 있던 시점에 주한미대사관은 논평에서 "미국은 남북대화 재개를 촉구해왔고 이번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도 대북 포용정책의 중대한 성과"라고 지적했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것을 두고 자기들이 추진하고 있는 "대북 포용정책의 중대한 성과"라고 공언한 그들의 발언은 미국이 이번 정상회담 개최 합의과정에 깊이 개입하고 주도하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1994년 6월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과정에서도 미국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중재라는 형식을 빌어 직접 개입하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남북 정상회담에 관하여 미국이 결정하고 북(조선)과 미국이 합의한 것을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결정도 미국이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자료근거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남북 극비회담을 먼저 제안한 쪽이 국가정보원이었다는 점이다. 3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된 제안에서 북(조선)은 "곧 바로 정상회담 교섭을 시작하고 싶다. 단 교섭에는 국가정보원 관계자를 제외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이 그때까지 남북 극비회담에 상대자로 나온 국가정보원이 아닌 다른 정부부서와 만나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교섭하겠다는 뜻이다. 북(조선)은 국가정보원이 먼저 제의해온 극비회담에 응해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조건에서, 해체해야 할 '괴뢰정보원'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는 국가정보원과 계속 회담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남북 정상회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피해야 했을 것이다.

남(한국)의 국가정보원이 민감한 대북관계, 특히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중대한 문제와 관련된 공작을 추진할 때, 미국 중앙정보국의 개입이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처음으로 북(조선)에 제안하고 이를 합의한 대북공작의 실무집행단위는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국가정보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뒤흔들 중대한 공작을 추진할 때, 중앙정보국과 국가정보원은 동등한 자격·지위·권한으로 상호협력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중앙정보국이 주도하게 된다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판단할 때, 이번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위한 사전공작을 추진한 실체는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미 행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을 생각할 때 남북 정상회담과 같이 미국의 국익에 직결되어 있는 중대한 사안은 중앙정보국이 단독으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없으므로, 최종 결정을 내린 단위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였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문제와 관련하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중앙정보국-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공작선이 가동했고, 또 지금도 가동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4) 미국은 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는가

우리가 던질 수 있는 물음은 미국은 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하려고 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밝혀내기 위하여 우리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이끌어낸 극비회담과 특사회담이 진행되었던 기간에 있었던 또 다른 두 개의 사건, 곧 조·미 고위급 회담과 4·13 총선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먼저 조·미 고위급 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문제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예상되고 있는대로, 이번에 열리게 될 조·미 고위급 회담은 페리 보고서에 나타나 있는 조·미 평화공존정책을 추진하는 제1단계 조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조·미 두 나라 사이에서 평화공존정책이 제1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그리고 이와 더불어 조·일 국교정상화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만일 유독 남북관계만이 풀릴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클린턴 행정부는 조·미 평화공존정책을 반대하는 워싱턴의 반대파들에게 발목을 잡힐 수 밖에 없게 된다. 올해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 지금, 클린턴 행정부가 얼마 남지 않은 임기 안에 추진해야 하는 것은 지난 집권기간 동안에 벌려놓은 외교현안의 매듭이라도 푸는 일이다. 중동 문제와 한(조선)반도 문제가 매듭을 풀어야 할 외교현안들 가운데 선차적으로 등장하는 문제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2월 28일에 열렸던 조·미 베를린 회담에서는 조·미 관계개선을 위한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는 문제를 합의한 바있다. 같은 날, 유엔주재 북(조선) 대표부의 리근 차석대표는 에이피(AP)통신과 가진 전화대담에서 한국(조선)전쟁에서 죽은 미군으로 추정되는 유해 4백15구를 1999년 12월과 2000년 1월에 발견하였는데, 이를 아무 조건 없이 미국에 송환할 것임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적어도 이 지점까지는 조·미 평화공존정책의 제1단계가 무리없이 진전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3월 7일부터 15일까지 열렸던 예비회담에서는 고위급 회담에서 발표할 공동선언문 문안을 놓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1월 22일부터 28일까지 베를린에서 열렸던 예비회담에서 3월 말에 고위급회담을 개최하겠다고 합의한 바있지만, 이 합의는 결국 이행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북(조선)이 전력손실보상 문제를 제기하면서 미국을 위협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조·미회담에서는 미국의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고 있는데 따른 전력손실을 보상하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북(조선)은 미국의 전력손실보상 문제를 제네바 기본합의문의 운명문제와 연관시키고 있다.

"문제는 경수로 건설이 2003년까지 완공되지 못할 것이 명백해진 조건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인데 미국측은 대통령의 담보서한에서 확약한대로 2003년까지 경수로 건설을 완공하든가 그렇게 못하겠으면 전력손실을 보상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문제는 지금 기본합의문의 당사자들인 우리와 미국이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만이 빈손 털고 나앉아 있을 수는 없다. 때문에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는 것으로 인한 전력손실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식의 핵동력공업을 다시 살려나가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미기본합의문은 파기되고 말 것이다. 결국 미국의 전력손실보상여부는 조미기본합의문의 운명과 관련된다."

임기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조건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조·미 평화공존정책을 반대하는 워싱턴 정치권의 난기류를 사전에 가라앉힐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책략은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 곧 남북 정상회담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조건에서는 조·미 평화공존정책에 대한 반대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국정원-아태평화위 사이의 극비회담이 열리고 있던 바로 그때 뉴욕에서는 조·미 고위급 회담 준비를 위한 예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 극적인 대조는 조·미관계개선과 남북관계개선이 상호연동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4·13 총선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4·13 총선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평화공존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 까닭은 4·13 총선에서 대북 평화공존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김대중 정권이 안정된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김대중 정권의 대북 협상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4·13 총선이라는 현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결과에 따라서 2002년 12월에 있을 대선에서 대북 협상력을 갖추지 못한 세력이 집권할 수도 있는 매우 복잡한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과정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걸림돌이 국가보안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에 조·미 정치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던 초기단계부터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해왔다. 미국이 그러한 견해를 보이는 까닭은, 국가보안법 문제 때문에 남북관계가 전혀 개선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을 경우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포용정책도 워싱턴 정가의 반대파들이 쳐놓은 지지선을 넘지 못하는 적지 않은 난관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국가보안법과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일정한 범위에서 상충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권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을 충실하게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려고 할 때마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은 강하게 반대했고, 김대중 정권은 그 반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 만일 4·13 총선이 민주당-한나라당-자민련 삼각구도로 치루어지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김대중 정권이 다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하여 3분의 1 정도의 의석 밖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올해 국가보안법 문제는 완전히 물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역대 총선 과정에서 그래왔듯이, 이번 총선 과정에서도 총선이 실시되기 이미 오래 전에 총선 결과를 예측하고, 만일 민주당-한나라당-자민련 삼각구도로 치루어질 경우 이번 총선에서 김대중 정권이 참패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지 정보기관의 보고를 받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4·13 총선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대중 정권이 안정된 다수 의석을 확보하도록 힘을 기울여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백악관 안보회의는 남북 정상회담을 김대중 정권에게 안정된 다수 의석을 확보해주는 책략으로 이용하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5) 북(조선)은 왜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는가

지금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의도를 분석하는 데서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나돌고 있다. 첫째, 북(조선)이 남(한국)의 경제지원을 다급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견해가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견해는 나라 안팎에 널리 퍼져있으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틀린 것이다. 만일 경제적 지원을 시급히 요구하기 때문이었다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어야 했을 것이다.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까닭을 경제문제로 보려는 자의적 해석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둘째, 북(조선)이 '햇볕정책의 참뜻'을 이해하고 믿게 되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도 그릇된 견해다. 만일 북(조선)이 햇볕정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지금에 와서야 깨달을 만큼 허술한 정보력과 판단력을 가졌다고 본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러한 견해는 햇볕정책을 고무·찬양하려는 유치한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이 북(조선)의 대외정책, 특히 대남정책의 궤도가 수정된 것이라고 보는 분석이 있는데, 이 분석도 잘못된 것이다. 아래에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자신의 대남정책과 조국통일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관철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 문제를 살펴보면 북(조선)의 대남정책과 조국통일전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는 극비회담 과정에서 '해체해야 할 괴뢰정보원'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국가정보원을 상대자로 만나면서, 국가정보원의 배후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움직이고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북(조선)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추진한 남북 정상회담 개최안에 합의했을 뿐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총선 사흘 전에 합의해줌으로써 총선에서 김대중 정권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서두르기까지 했다. 박지원 장관은 4월 11일 기자회견에서 "사실 북한측에서 총선과 관련해 시기(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을 발표하는 시기를 뜻함-옮긴이)를 물어"왔다고 하면서, 북측이 4월 7일 남측의 요구를 전면 수용할테니 8일 베이징에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해왔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북한측이 정상회담을 빨리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자신들이 내건 일부 조건을 철회해 전격적으로 '민족대사'가 합의됐다"고 밝혔다.

바로 여기서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정세인식은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그것은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김대중 정권을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데, 북(조선)은 그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인식의 혼동이다. 더우기 이번 선거에서 의회 진출을 목표로 삼고 출전했던 세력들, 그리고 이들을 지원했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선거전에서 자기들과 치열하게 맞붙은 김대중 정권을 적극 지원해준 북(조선)의 태도에 반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겉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만을 가지고 정세를 인식해서는 안되며, 여러 사건들이 어떠한 내적 연관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가 하는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회담에서 과연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아래와 같이 두 갈래로 분석한다.

첫째, 현단계에서 북(조선)은 대남관계개선을 대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보조축으로 여기고 있다. 한(조선)반도 통일정세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기본축은 조·미관계이며, 남북관계는 보조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축이 움직여야 보조축도 그 뒤를 따라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다. 다시 말해서 북(조선)은 페리 보고서의 대북 평화공존정책이 집행단계에 들어선 것을 확인한 뒤에 비로소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안팎에서 불리한 조건이 조성되어 기본축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보조축을 돌려 기본축을 다시 돌려야 하는 것도 정한 이치다. 2000년에 들어와서 조·미 고위급 회담이라는 기본축이 돌아가기 시작은 했으되 기대했던만큼 시원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보조축을 돌림으로써 기본축을 돌려가려 하는 것이다.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시기를 2000년 6월로 결정하고, 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4월에 발표하려고 결정한 것은 바로 그 때가 조·미 고위급 회담의 진전을 촉진시킬 수 있는 유리한 시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북(조선)은 대남관계개선을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방책으로 삼고 있는데,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구현하는 데서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국가보안법을 가리켜 "동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북과 남의 인민들과 각계 인사들 사이의 접촉과 교류를 범죄시하며 남조선의 통일애국력량을 탄압하는 반민족반통일악법"이라고 단죄했다.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이룩하는 데서 가장 큰 장애는 남조선의 <국가보안법>"이며, "이런 악법을 그대로 두고 <대화>와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기 위하여 가장 앞장서서 투쟁해온 세력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이다.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투쟁해왔다. 국가보안법 문제와 관련한 정치지형은 철폐세력, 개정세력, 유지세력이 삼파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현단계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역량은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안고 있으며, 개정세력도 유지세력의 저지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4·13 총선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극력 반대하고 있는 세력이 패하게 만들고, 적어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려 하거나 철폐를 반대하지 않는 세력이 승리하도록 하는 것이 북(조선)에게 유리할 것은 자명하다. 북(조선)은 자민련과 한나라당의 총선 패배와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국가보안법 철폐에 유리한 조건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국가보안법 체제를 뒤흔드는 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개정세력의 총선 승리를 현실적인 차선책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도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총선 직전에 발표함으로써 총선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두 손 들고 반길 일이었다. 총선용 발표는 이러한 배경에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을 총선 사흘 전에 발표하여 득표에 영향을 주려고 했던 공작은 실제로는 기대한 것만큼 성과적이지 못했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을 발표한 것 때문에 투표과정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아본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17.4퍼센트만이 영향을 받았다고 응답했으며, 33.7퍼센트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고,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 응답자는 47.8퍼센트였다. 이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커다란 영향을 준 요인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후보자의 병역, 납세, 전과에 관한 사실을 공개한 것으로 나타났다.

(6) 정상회담과 최고위급회담의 충돌은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과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의 충돌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오는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열리게 되면, 그것은 민족사의 변화와 발전을 예고하는 대사건, 전세계를 놀라게 하는 대사건이 될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와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만나 손을 맞잡는 감동적인 광경은 분명히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의 그러한 감격적인 광경 뒤에서는 두 세력이 정치협상력을 총동원하여 맞붙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 접전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협상력의 충돌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북(조선)을 한 편으로 하고, 미국과 남(한국)을 다른 한 편으로 하는 두 세력이 각기 추구해오고 있는 정책과 전략이 치열한 접전을 시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치열한 접전의 분위기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남북합의서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회담에 대해서 미국과 남(한국)은 정상회담이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북(조선)은 최고위급회담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한 회담을 두고서 이렇게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이 회담에서 추구하려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원래 정상회담(summit talks) 또는 수뇌회담이란 두 개 이상의 주권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국가원수)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국가간 정치협상을 뜻한다. 그런데 오는 6월에 평양에서 열릴 회담은 두 개 이상의 주권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들 사이에서 열리는 회담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 있는 남북의 최고위급 대표자 사이에서 열리는 정치협상이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한국)은 정상회담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고 있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였던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재확인할 수 있듯이, 남북관계가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니라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인데도 미국과 남(한국)은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남북관계의 본질을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왜곡하려 하고 있다. 저들이 남북기본합의서를 무시하면서까지 남북관계를 국가 사이의 관계로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오는 6월 평양에서 열릴 회담을 통해서 추구하려는 최종 목표가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불안정한 분단체제를 국가 대 국가의 안정된 공존관계로 변질·고착시키려는 데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는 6월에 평양에서 열릴 회담을 정상회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므로 최고위급회담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미국과 남(한국)이 부르는대로 정상회담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상이 다 아는대로, 남북관계는 화해·협력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다. 남북 정상회담을 한 차례 개최한다고 해서 반세기 묵은 적대관계가 저절로, 급속하게 화해·협력관계로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정치협상은 겉으로는 감격과 감동의 자리로 보일 수 있지만, 속으로는 협상력이 충돌하는 자리다. 그것은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지략과 전술을 총동원한 힘과 힘의 충돌이다.

일반적으로 적대관계에서 벌어지는 정치협상은 치밀한 준비를 갖추는 쪽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첫째, 전략적 목표가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협상력이 강해야 한다. 셋째, 승전의지와 단결력이 안받침되어야 한다. 넷째, 협상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준비를 갖추기까지에는 오랜 시간과 적지 않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은 이러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는 언론대담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정상회담은 실현되면 좋지만 그를 위해선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72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을 위해 무려 2년 간의 준비가 있었다. 이렇게 준비하고서도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김정일처럼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만나기 위해선 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김 대통령이 그런 준비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하여 어떠한 준비를 갖추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은 조국통일 3대헌장에 집약되어 있다. 조국통일 3대헌장이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과 1980년의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 발표된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설방안, 그리고 1993년에 발표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이다. 북(조선)에서는 이것을 "김일성 주석이 제시하고 김정일 총비서가 정립한 민족공동의 통일강령"이라고 부른다.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경험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들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조국통일의 3대헌장"이라는 것이다. 북(조선)은 지금 조국통일 3대헌장을 지지하는 국제적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번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남북합의서의 첫 문장이 조국통일 3대헌장의 첫 부분인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합의서에는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면서"로 기록되었다. 그 합의서의 초안을 작성한 쪽은 북(조선)이었는데, 그들이 이 합의서에서 조국통일전략에서 수행하려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재확인하면서도, 조국통일 3대헌장에서 제외시킨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조국통일 3대헌장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하고 김정일 총비서가 정립한 통일강령이지만,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정부당국의 고위급 회담에서 합의·채택한 것이다. 북(조선)은 일찌감치 남북기본합의서를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시키는 성의를 보인 것에 반해 남(한국)은 국회에 상정조차 하지 않고 지난 8년 동안 내버려두었다. 북(조선)은 남북 고위급 회담의 합의보다도 김일성 주석이 제시하고 김정일 총비서가 정립한 조국통일 3대헌장을 더 중시하면서 이를 구현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저들의 강력한 의지는 이번에 남북합의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조국통일 3대원칙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말하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1972년 5월 대북 밀사로 평양을 방문했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것이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은 "나는 우리 나라의 통일문제는 반드시 외세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 원칙에서,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여야 한다고 인정합니다"고 말한 바있다. 이 내용은 나중에 7·4 남북공동성명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순서가 조금 바뀌었지만 그대로 합의되었다. 자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가운데서 두 번째 원칙과 세 번째 원칙이 순서를 바꾸어 공동성명에 기록된 것이다. 조국통일 3대원칙에 대하여 김정일 총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성의있는 노력과 주동적 발기에 의하여 1972년에 오래동안 격폐되였던 북과 남 사이에 대화의 문이 열리고 김일성주석께서 내놓으신 자주, 평화통일, 민족적 대단결의 3대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력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의있고 꾸준한 노력이 가져온 빛나는 결실이였으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외세의존로선과 민족분렬로선에 대한 민족자주로선과 조국통일로선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이를 구현하려고 하는 북(조선)은 이번의 남북 정상회담도 이 원칙에 기초하여 합의되었다고 믿고 있다. 1990년 9월부터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도 이 원칙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으며, 남북기본합의서의 전문에도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한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그러나 남(한국)은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이상의 합의사항(조국통일 3대원칙을 뜻함-옮긴이)이 조국통일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고 하였으면서도, 이 약속을 저버렸다. 약속을 저버렸을 뿐아니라 7·4 남북 공동성명의 핵심내용인 조국통일 3대원칙을 왜곡하려고 하였다. 1988년 7월 7일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7 특별선언'은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원칙을 내버리고 그 대신 "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족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문화·경제·정치공동체를 이룩"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민족공동체'란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일된 연방국이 아니라 현재 남북의 적대적 분단체제를 국가 대 국가의 평화공존관계로 전환시킨 국가연합(그는 이것을 '남북연합'이라고 불렀다)을 뜻한다. 김영삼은 199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자주·평화·민주의 3대원칙을 주장했다. 현재의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면서 국가연합을 건설하려고 하는 민족분열주의는 그 뒤로 현 정권에게 그대로 흘러왔다.

이러한 국가연합 건설방안이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회피·반대하려는 미국의 평화적 분단관리전략, 곧 영구분단전략에서 나왔다는 점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김대중 정권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남북관계의 질적 변동과정에서 미국의 평화적 분단관리전략을 따르면서 국가연합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북(조선)은 조국통일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오고 있다.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조국통일 3대원칙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1999년 9월 28일 북(조선)의 백남순 외상은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과 가진 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7·4 공동성명에서 밝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존중하는 등 전적으로 남측 하기에 달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북(조선)이 조국통일 3대원칙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기어이 관철하려고 애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두 갈래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7·4 남북 공동성명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통일강령이기 때문이다. 북(조선)은 1982년 7월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10주년에 즈음하여 이 공동성명의 발표와 관련된 김일성 주석의 담화 내용을 『로동신문』에 실었으며, 담화 발표 15주년이 되는 1987년 5월, 20주년이 되는 1987년 7월에 각각 기념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995년 8월에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비망록'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72년 5월 3일 북남고위급 정치회담에 참가한 남조선측 대표를 접견하신 석상에서 통일은 첫째로,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실현하며 둘째로, 사상과 리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며 셋째로,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할 데 대한 3대원칙을 천명하시였다. 조국통일 3대원칙은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의 기본내용으로 포함되여 세상에 공포되였으며 이때부터 민족공동의 통일강령으로 공인되게 되였다"

둘째, 7·4 남북 공동성명은 분단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북 정부당국이 합의하고 전민족적인 지지·찬동을 얻은 조국통일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은 한(조선)반도의 통일원칙이기 때문이다. 1973년 10월에 열렸던 유엔총회 제28차 회의는 이 성명에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바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조국통일 3대헌장'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핵심내용은 민족대단결의 원칙과 그 실현방도라는 사실이다. 민족대단결의 원칙은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되었고 1993년 4월 김일성 주석이 작성·발표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 심화·구체화되었는데, 북(조선)은 이 강령을 "통일의 주체적 력량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지침"이라고 부른다. 북(조선)은 1980년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도 민족대단결의 강령을 통일국가체계로 실현하는 방도라고 보고 있다. 북(조선)의 논리에 따르면, "련방제 통일이자 민족대단결이며 민족대단결은 곧 련방제 통일"이라는 것이다.

북(조선)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1954년 10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 회의 호소문을 발표했을 때부터였다. 그런데 그 무렵 민족대단결의 개념 속에는 남북 당국자 사이의 대화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남(한국) 정부당국은 배제되었다. 북(조선)이 민족대단결 개념 속에 남(한국) 정부당국을 포함시킨 때는 남일 부수상(당시)이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강조했던 1959년 10월 26일이었다.

민족대단결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남북 사이에서 정치적 화해와 단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남북 사이의 정치적 화해와 단합은 정부당국 사이에서,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세력들 사이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민족대단결을 정부당국 사이에서,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세력들 사이에서 함께 추진한다는 것은 북(조선)의 일관된 방침이다. 북(조선)은 남북 정부당국자 회담이 개최되는 것과 더불어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방침은 1993년 4월의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에서, 그리고 1998년 4월의 민족대단결 5대방침에서 명백하게 밝힌 바있다.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보아도 북(조선)은 이 방침을 추진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통일분위기가 고조되었던 때인 1972년 8월 19일 북(조선)은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주장하였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할 때도 북(조선)은 남·북·해외의 조국통일운동세력들이 조직적으로 결합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2000년 6월에 열리기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과 더불어 조국통일운동세력의 만남을 어떻게 실현하려고 하는가. 싱가포르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기 위한 극비회담이 열리고 있던 때와 같은 시기인 2월 26일과 27일 북경에서는 주목해야 할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제8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공동의장단 회의가 그것이다. 매우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국가정보원과의 극비회담과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는 어쩌면 한(조선)반도의 당면한 통일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이 글의 논의주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제8차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에서 남·북·해외를 망라한 '2천년 통일대축전 11차 범민족대회 공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시점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될 6월로 잡아놓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오는 8·15 전에 해내외의 광범한 운동단체 대표들과 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 밑에 '2천년대 통일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토론회'를 성대히 진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은 진정으로 애국애족하고 통일을 바라는 단체라면 민족주의단체이건 종교단체이건 시민단체이건 우선 단결할 것"이라고 밝힌 바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과 더불어 조국통일운동세력들 사이의 전민족적 단결을 범민련의 기초 위에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과 김정일 총비서의 조국통일의지

김정일 총비서의 조국통일의지를 알지 못하면, 북(조선)이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의도와 그 회담에서 추진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린 사람이 김정일 총비서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정일 총비서가 6년 동안 연기되었던 남북 정상회담을 2000년 6월이라는 특정한 시점에 성사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1994년 6월 17일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미국과 남(한국)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로써 남북 정상회담은 1994년 7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서한 뒤 사흘이 지난 7월 11일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당시 직책)은 전화통지문을 통해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 최고위급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하여 통지한다"고 전했다. 이로써 남북 정상회담은 지난 6년 동안 연기되었다. 김정일 총비서는 이번에 성사되는 남북 정상회담을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추진하려 했다가 이루지 못한 유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북(조선)에게 있어서, 1990년대 안에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이었다. 그들은 "90년대 통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유훈이다. 90년대 통일의 력사적 과제는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김정일 동지의 령도 밑에 반드시 수행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있다. 그리하여 북(조선)은 1995년부터 2000년이 오기 전까지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으려는 아름찬 목표를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다.

이미 알려진대로, 1990년대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은 두 궤도 위에서 추진되었다. 첫 번째 궤도는 대미전략의 궤도이고 두 번째 궤도는 대남전략의 궤도이다. 대미전략의 당면목표는 조·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파탄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파탄되어가는 과정은 미국의 남(한국) 지배체제가 무너지는 과정과 일치하게 된다. 조·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은 곧 미국의 지배체제인 한·미 동맹체제가 무력화·해체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대남전략의 당면목표는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과 정면으로 충돌·배치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가 국가보안법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려면 먼저 남(한국) 정부당국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선행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그 선행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조선)은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일관된 주장을 이제와서 철회하고만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북(조선)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국가보안법 체제를 무너뜨릴 돌파구를 내려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1999년까지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겠다는 목표는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이므로, '수령제 사회주의'인 북(조선)이 그 유훈을 온힘을 기울여 무조건 이루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일성 주석의 뒤를 이어 수령의 지위를 계승한 김정일 총비서가 1999년을 막 넘긴 올해 안에 최우선적으로 집행해야 할 것은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이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력한 조국통일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의 조국통일의지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조선은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여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의 조선만을 생각하지 두 개의 조선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조선민족은 둘로 갈라져서는 살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습니다. 조선은 둘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입니다. <조선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조국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은 애국의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조선민족으로서의 자격도, 조선에서 살 자격도 상실한 목석입니다. 민족의 분렬을 더없는 아픔으로 여기면서 조국통일에 마음과 뜻을 둔 사람이라야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분렬을 가장 큰 아픔으로 생각하면서 조국통일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사람만이 애국자이며 혁명가입니다. 조국통일은 곧 애국이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은 최대의 애국투쟁입니다. 우리 일군들은 신심과 락관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합니다. 모든 일군들이 언제나 조국통일 생각하며 일해야 합니다. 당사업을 해도 조국통일을 생각하고 경제사업을 해도 조국통일을 생각하여야 하며 대외사업을 해도 조국통일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일군들의 모든 사색과 활동은 조국통일과 잇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의 조국통일의지는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을 받아안고 나서부터 더욱 강렬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1995년 7월 김일성 주석 서거 1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방북했던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선생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수령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통일을 위해 김정일이 있습니다. 7천만에게 통일을 안겨주지 못하면 김정일이 아닙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국통일실현에 대한 강한 집념과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1996년 11월 판문점에 세워져있는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 친필비 앞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맹세하는 마음가짐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첩첩한 난관이 가로놓여있으나 우리 대에 통일은 이룩되여야 합니다. 백두산에서 항일대전의 총성을 자장가로 들으며 자라난 빨찌산의 아들인 나는 수령님께서 이룩하시지 못한 민족의 통일위업을 반드시 성취할 것입니다. 통일도상에 가로놓인 장애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우리는 난관을 맞받아나아가는 조선혁명가들의 기질을 이어 두러움없이 투쟁하여야 합니다."

판문점에 세워져있는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 친필비에는 1994년 7월 7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있다. 이 친필비는 김일성 주석이 생애 마지막 날인 7월 7일 조국통일과 관련한 문건에 서명한 직후 급서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로부터 다섯해가 지난 뒤에 북(조선)은 정부 비망록을 발표하고 "심장의 고동을 멈추기 바로 몇시간 전인 주체83(1994)년 7월 7일 조국통일과 관련한 중대문건을 보아주시고 생애의 마지막 존함친필을 남기시였다"고 기록한 바있다. 그 문건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성사될 남북 정상회담에서 제기할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한 중대한 문건일 것이다. 『연합뉴스』는 1998년 4월 13일 평양방송의 보도를 인용하면서 김일성 주석이 1994년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직후인 6월 20일부터 7월 5일까지 조국통일과 관련한 수십 차례의 교시와 10여건의 친필교시를 주었다고 전했음을 보도하였는데, 7월 7일의 문건은 이 교시들을 모두 집대성한 최종 문건이었을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으로 서명한 그 최종 문건을 집행함으로써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일성 주석이 생애 마지막 날에 서명한 최종 문건에서 후대에 남긴 '조국통일유훈'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북(조선)은 그 내용을 아직까지 밝힌 바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실현하려고 하였던 조국통일전략과 1994년 7월 당시의 통일정세를 되돌아보면서 그 최종 문건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분단 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남북 정상회담의 실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민족대단결의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남북 정상회담에서 제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의 '조국통일유훈'은 민족대단결의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구체적인 방도는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은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함으로써 국가보안법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둘째,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은 조국통일 3대원칙을 찬동하는 남·북·해외 조국통일운동세력들의 전민족적인 단합을 이루는 것이다.

'수령의 조국통일유훈'을 받아안은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4월 18일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련석회의 50돐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낸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서 김일성 주석의 민족대단결사상을 강조하면서 민족대단결 5대방침을 제시하였다. 그 5대방침은 "민족대단결은 철저히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야 한다. 애국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이 단결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자면 북과 남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자면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고 외세와 결탁한 민족반역자들, 반통일세력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자면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이 서로 래왕하고 접촉하며 대화를 발전시키고 련대련합을 강화하여야 한다"로 정리된다.

이 5대방침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에 직결된 문제는 세 번째 방침으로 제시된 남북 관계개선의 방침에 들어있다. 그 방침을 해설하면서 김정일 총비서는 "남조선 당국자들이 정책전환을 하여 반북대결정책을 련북화해정책으로 바꾼다면 북남관계가 신뢰와 화해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민족적 단합과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련북화해정책이란 "민족적 단합과 조국통일을 가로막는 파쑈적이며 반통일적인 법률과 기구를 철폐하고 온갖 정치적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그 서한에서 "우리가 남조선의 력대 통치자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집권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대한 것은 남조선 력대 통치자들의 외세의존정책과 반통일정책, 매국배족행위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이 진정으로 애국애족의 립장, 련북단합의 립장에 선다면 그들과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조선)은 2000년 2월 29일 평양방송을 통해 "우리는 남조선의 집권상층, 여당과 여당인사들, 대자본가와 군장성들이 민족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그들과도 민족대단결의 기치 밑에 단합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내용은 3월 1일과 4월 17일에도 재방송되었다.

'조국통일 3대헌장'에 집약되어 있는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이 민족대단결의 과업을 실현하는 데로 집중되고 있음은 이미 위에서 밝힌대로다. 그런데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은 민족대단결의 과업과 더불어 민족자주의 과업을 실현하는 데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 전략은 두 개의 당면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자주란 남(한국)이 미국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서 자주권을 세우는 것을 뜻하는데, 북(조선)은 그것이 주한미군 철수라는 당면목표를 통하여 실현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북(조선)의 조국통일전략이 추구하고 있는 두 개의 당면목표는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로 요약된다.

북(조선)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조·미 고위급 회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국가보안법 철폐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다. 어떤 분석가는 북(조선)이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지만, 그것은 그릇된 분석이다. 북(조선)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남북 사이에서가 아니라 조·미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다. 지난 2월 말 남북 극비회담이 열리고 있던 기간에도, 그리고 3월 17일부터 4월 8일까지 남북 특사회담이 세 차례나 열리고 있던 기간에도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태는 높아지고 있었다. 3월 7일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인 토머스 슈워츠는 미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가 북(조선)이라고 말했다. 3월 23일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는 "미군이 관할하고 있는" 서해 5개섬에 대한 통항질서 6개항을 발표했다. 이것은 1999년 9월 2일에 공포한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확정에 대한 후속조치다. 4월 5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미·한 연합전시증원(RSOI)연습을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실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판문점을 통해 북(조선)에 전달했으나, 북(조선)은 이 편지를 되돌려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한(조선)반도의 군사문제는 남북관계개선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조·미관계개선으로 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북(조선)은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두 개의 당면목표가 실현될 때 비로소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설하는 조국통일실현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두 개의 당면목표 가운데 추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 국가보안법 철폐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하는 정치협상 보다도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남(한국)을 상대로 하는 정치협상이 더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조선)의 전략구상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국가보안법을 사실상 사문화시킴으로써 국가보안법으로 유지되어오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반민족적, 반통일적, 반민중적인 세력이 약화되는 통일정세의 질적 변화라는 것이다.

(8) 미국·남(한국)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추진하려는 것은 평화적 분단관리정책이다

1999년 12월 30일 청와대가 공개한, 일본 사민당 기관지 신년호에 실린 김대중 대통령과 도이 다카코 사민당수의 회견문에서 김 대통령은 "통일을 서두르는 것은 북한에도, 한국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지금 곧 통일해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조국통일과업을 당면과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으며, 우선 남북 사이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발표한 베를린 선언은 조국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이었으며,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남북 정상회담의 개최 목적도 오로지 평화공존에 집중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선언'을 채택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김대중 정권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한(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적 분단유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삼 정권도 1994년 7월 25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선언'을 채택하려고 준비한 바있다. 이것은 평화통일정책이 아니라 평화적 분단관리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북의 평화공존정책은 한(조선)반도의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미국의 분단관리정책과 일치되는 것이다. 페리 보고서에서 드러난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평화공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클린턴 정권의 포용정책과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주권국가들 사이의 평화공존체제를 한(조선)반도에 수립하기 위한 대북정책이다.

김대중 정권의 평화공존정책은 어제 오늘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9월 24일 박정희는 서독 신문과 가진 회견에서 "우리가 유엔에 가입하고자 하는 목적은 평화통일이 이룩될 때까지의 잠정적 조치로서 우선 평화공존체제를 굳히려는 데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남북의 평화공존을 강조하였다. 박정희의 평화공존론은 같은해 10월 9일 벨기에 신문과 가진 회견에서도 되풀이되었다. 1977년 1월 12일 박정희는 연두교서에서 선평화 후통일론을 내놓으면서 "북한 동포들을 위한 식량원조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평화공존론과 식량지원이 함수관계에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평화 후통일론은 1978년 1월 18일 연두기자회견에서도 되풀이되었다. 1978년 6월 23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남북 경제협력기구를 구성하자고 제의하였으며, 1979년 1월 19일의 연두기자회견에서는 남북 당국자 회담을 제의하였다.

요컨대 미국의 포용정책이나 남(한국)의 햇볕정책의 본질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통일'이 아니라 '평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평화공존론에 있다. 한(조선)반도에 두 개의 주권국가를 세우고 평화공존관계를 맺도록 하자는 이른바 '국가연합(또는 남북연합, 공화국연합) 건설론'이 평화공존론의 최종목표로 설정된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평화는 선이며 전쟁은 악이다. 그러나 모든 평화가 다 선인 것은 아니며, 모든 전쟁이 다 악인 것은 아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으려는 범죄적 의도에서 나온 평화공존론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반민족적인 죄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국통일은 회피하면서 현재의 대결적인 분단체제를 평화적인 분단체제로 바꾸어 관리하겠다는 평화공존론은 남과 북을 하나의 통일조국으로 결합시키려는 전민족적인 통일염원과 의지를 거스르며, 대결적인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평화적 공존관계로 바꾸어보겠다는 반통일정책이므로, 만일 미국과 남(한국)의 생각대로 된다면, 삼천리 강토에 그어진 군사분계선은 국경선으로 바뀌게 될 것이며, 우리 민족은 영영 두 나라로 쪼개지고 마는 것이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평화공존, 화해와 안정, 교류와 협력이라는 말 속에는 바로 이러한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인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통일을 염원하고 추구하는 민족의 양심으로 반민족적, 반통일적 평화공존론을 반대·배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국·남(한국)이 국가연합창립을 위한 선행단계로 평화공존체계를 추진하고 있는 것과 달리, 북(조선)은 연방국가창립을 위한 선행단계로 평화보장체계를 추진하고 있다. 북(조선)은 "평화를 보장하고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가동되면 련방제 통일에 더욱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수 있다"고 확언하고 있다. 북(조선)은 "북과 남은 1991년 북남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평화보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앞으로 조건이 성숙되는 데 따라 북남대화가 재개되면 이미 세워진 제도적 장치가 가동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성숙되어야 할 조건이란 조·미 평화보장체계의 수립이다.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조선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는 데서 기본은 남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며 군통수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문제를 푸는 것"이므로, "정전협정의 실제적 당사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이 조·미 평화보장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더욱이 미국에 의해 정전협정의 기본조항들이 파기되고 정전기구들이 마사진 조건에서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이 정전체계를 평화보장체계로 바꾸는 문제를 담당해야" 하며, "미국이 이미 조미기본합의문을 통해 공약한대로 조선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는 실천적 행동에로 넘어가려면 낡은 정전체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데로 지향해야"한다는 것이다.

(9) 맺음말

이제 우리는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 6월 이후에 다가올 변화를 내다보아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는 우리 민족 내부에서 조국통일을 향한 열망과 의지를 드높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올해 8월 15일을 앞두고 조국통일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면서 대중적 지지와 성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대중의 반북대결의식이 약화되는 반면, 반외세 민족의식은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던 1994년 6월에 일어나고 있었음은 당시 여론조사로 입증된 바있다.

초강대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을 위협하여 결국 협상자리에 끌어내오고, 협상과정에서도 기상천외의 협상술을 동원하여 거만한 미국을 벼랑끝으로 밀어내는 강력한 협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북(조선)과 미국의 전략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남(한국)이 정상회담을 개최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북(조선)이 올해 2000년을 가리켜 '대전환의 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첫째, 국가보안법 체제의 붕괴 가능성이다. 서울의 한 일간지가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6대 국회의원 당선자 가운데 14퍼센트는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전면 개정하자고 주장했고, 64퍼센트는 부분 개정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로써 국가보안법 개정에 찬성하는 국회의원 당선자는 78퍼센트가 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개정은 결국 그 법을 사문화시킬 것이며, 그로써 그 법 위에 세워졌던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인 체제는 더 이상 버티고 서있지 못하고 머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둘째, 조·미 평화공존체제 수립을 합의할 가능성이다. 페리 보고서에 제시되어 있는대로 조·미 관계개선과정의 제1단계에 들어선 두 나라는 이미 파기된지 오래된 정전협정을 대신할 새로운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게 되어있다. 이 새로운 조치가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에서처럼 협정 형식으로 될 것인지 아니면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서처럼 공동성명 형식으로 될 것인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외교문서가 나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올해 6월은 한국(조선)전쟁이 일어난지 50년이 되는 해다. 지금 워싱턴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지 열흘 뒤에 이 전쟁 5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적 차원의 행사를 준비하느라고 분주하다. 미국인들은 자기 역사에서 무려 반백년이 지나도록 정전상태를 해결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사태가 조·미관계 이외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워싱턴 정가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으니 이제는 조·미 적대관계를 평화공존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은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에 변화의 급류를 몰아오는 파열구를 열어놓을 것이며, 21세기 우리 민족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을 대격변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21세기의 머지 않은 장래"에 다가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이야기해오던 "조국통일의 역사적인 그날"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이처럼 성큼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5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조선)반도 통일의 정세변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국통일이라는 역사의 기관차에 변화의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지금부터 그 기관차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가속도로 질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국통일을 위하여 피땀과 눈물을 흘리며 험한 길을 여기까지 헤쳐 걸어온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역사의 기관차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동음을 듣고 있는 지금 피할 수 없는 물음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과연 조국통일의 그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놓았는가, 우리는 조국통일의 그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2000년 4월 2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