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반성과 민족자주사상의 각성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민족자주역량의 최고 강성기 고구려시대

2. 고구려의 통일전쟁과 신라의 외세의존

3. 신라 삼국통일론의 허구성과 당의 침략정책

4. 북방세력권이 사라진 이후 천년 민족사의 반성

5. 고려의 통일국가 건설이 보여준 의의와 한계

6. 지배계급의 문약화와 그 자주역량의 쇠퇴

7. 중화화·일본화·아메리카화

8. 강세화·주력화되고 있는 민중의 자주역량

9. 민족자주사상의 깨우침 - 국가주의의 민족사적 반역성을 깨뜨리고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1. 민족자주역량의 최고 강성기 고구려시대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기원전 수백년 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지역패권을 장악하려는 두 민족이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민족과 중화민족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쟁이었 다. 우리 민족사에서 첫 나라를 세웠던 옛조선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전략요충지였던 요하를 차지하기 위하여 연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3백년 쯤에 있었던 일이다. 이 전쟁은 연나라 진개의 침략군 이 옛조선의 서부지역에 침입하여 일부 변방지역을 강점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었다. 기원전 109년 가을에는 연나라의 뒤를 이어 한나라가 육군과 수군 5만여명을 동원하여 옛조선에 쳐들어왔다. 한군 은 옛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왕검성의 인민들은 끈질기게 항전하였으나 제2차 왕검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옛조선은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고 말았다.

기원전 1세기 초에 옛조선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봉건국가로 등장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개마국, 구다국, 낙랑국, 갈사국, 조나국 같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고, 선비족을 속국으로 삼으면서 나라힘을 차츰 키워갔다. 고구려의 나라힘이 커지게 되면서 주변의 큰 나라들과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부여, 한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계속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는대로, 고구려는 오랫동안 거듭된 외세와의 전쟁 에서 번번이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598년에 고구려는 수나라의 요서지방 을 공격하였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나서 고구려에 대한 전면전을 벌였으나, 고구려의 강 한 군사적 타격을 받고 패전하였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제공격했던 598년부터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싸워 승전한 662년까지 65년동안 수나라가 네 차례, 당나라가 다섯 차례 계속하여 고구려를 침략해 들어왔을 때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맞붙은 전쟁에서 붙잡았던 수나라 전쟁포로 1만명을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 622 년에 돌려보낼 정도로 상대를 여유있게 제압했다.

고구려가 존재했던 시기에 중국에서 일어선 왕조들은 고구려와 맞붙은 싸움에서 패하여 결국 몰 락하고 새로운 왕조로 교체되곤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한족, 거란족, 선비족의 침략을 격퇴하고 그 들의 세력권을 서쪽으로 몰아부치며 자기의 영토를 넓혀갔다. 중국의 고대왕조들은 만주에서 서쪽으 로 진출하는 고구려의 서진정책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구려는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까지 정 벌하여 변방세력들을 밀어부쳤다.

고구려시대는 우리 민족사에서 민족자주역량의 최고 강성기로 기록된다. 만일 고구려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은 중국의 강력한 영향권 안으로 끌려들어가 오래 전에 이미 중국 변방의 한 소수민족으로 포섭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의 민족자주역량이 있었기에 이 민족은 중화민족의 변방화를 거부하고 자기의 민족사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가 자기의 민족자주역량을 군사력을 중심으로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 다. 고구려 군사전략의 특징은 기병과 수군을 동원한 장거리 고속기동전과 수륙양면 작전에 의한 전 격적인 포위기습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자기의 강역 안에 성을 1백76개나 쌓아 철통 같 은 방위태세를 갖추었다고 한다. 거란족, 몽골족 같은 유목민족은 성을 쌓을 줄 몰랐고, 중국의 한족 은 만리장성처럼 성을 길게 일렬로 쌓았던 반면, 고구려는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산과 강을 끼고 쌓은 여러 개의 성을 겹겹이 배치하였다. 고구려의 축성술은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고구려가 발해만과 요동반도를 지키기 위해 요동 반도 끝에 쌓은 비사성은 천 수백년이 지난 청일전쟁 때도 해군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요 동지방을 지키기 위해 천리장성도 쌓았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고구려는 이러한 군사전략을 수행하여 영토를 넓히고 변 방 작은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를 건설했다. 그 빛나는 업적은 광개토대왕에게 돌아간다. 광개토대왕은 무적의 철갑기병 1만5천명을 지휘하면서 전쟁을 이끌었다. 고구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두 필씩 끌고다녔으므로 전쟁에 동원한 군마는 3만필이나 되었다. 강대 국 고구려의 역사적 경험은 어떤 나라든지 군사력을 키워야 민족자주역량을 확보할 수 있음을 여실 히 보여주고 있다. 국가 주권을 지키는 든든한 보루는 무엇보다도 군사력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가 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것을 군사력에만 의존했다고 보면 아니된다. 고구 려는 내몽골에서 말과 유목제품을, 요하 상류지방에서 소금을, 요동반도에서 철금속과 귀금속을, 한 (조선)반도 중부지방에서 농산물을, 동만주에서 가죽제품 같은 수렵산물을 생산하는 풍부한 고구려 경제권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교역망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고구려 경제권 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고구려의 영토확장은 바로 이러한 고구려 경제권을 형성하기 위한 발판과 활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교역은 중국대륙을 넘어 서역으로 끝없이 벋어나가 중앙아시아 를 넘어 페르시아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군사강국이며 경제대국인 고구려를 주변 나라들이 감히 넘보 지 못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광개토대왕 이후 1백50년 동안 고구려는 외세의 침략을 두 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문명을 눈부시게 발전시키는 최고 강성부흥기를 이루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통치기에 이르러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북방의 유목 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를 하나로 아우르는 고구려 문명의 전성기를 펼쳐가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당 대의 최고 문명국으로서 금속가공기술, 건축술, 기상천문학, 의학을 발달시켰고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 다. 고구려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형성하였으니, 그것은 고구려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 계관, 천하관이다. 도진순 교수는 "중화문명과 기반을 달리하는 문명권을 가진 고구려는 당연히 자기 중심의 독자적인 세계관·천하관(天下觀)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하늘의 후손이라고 믿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중화문명권이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체계, 율령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 비단길(Silk Road)를 통한 불교문화의 수용 등을 특성으로 하고 있었다면, 고구려 문 명권은 대초원길(Steppe Road)을 통하여 북방의 유목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를 상호결합시킨 것이었 다고 한다. "이러한 독자적인 천하관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700년 이상 동북아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면서, 백제·신라 등 주변국에 대해 독자적인 화이(華夷)관계를 표방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성부흥했던 나라를 세웠으나 자기의 자주역량으로 삼국을 통일하 지는 못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가진 역사적 한계이기도 했다.

2. 고구려의 통일전쟁과 신라의 외세의존

신라가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느니, 신라가 우리 민족사에서 최 초의 통일국가라느니 말하면서 흔히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역사인식이 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가운데 가장 강한 통일의지를 가지고 삼국통일을 실현하려고 했던 나 라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였다. 만주에서 일어선 고구려는 서진정책을 추진하여 요동지역, 요서지역 을 차지함으로써 강역을 넓혀갔고, 한(조선)반도에서는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한(조선)반도에 형성되어 있는 동족국가인 백제와 신라를 통일하기 위한 통일전쟁으로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한(조선)반도의 통일전쟁에 오랫동안 힘을 기울였고, 그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강대국 고구 려의 남진 통일정책에 밀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493년에 백제와 신라의 왕실이 인척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서려고 했던 것은 남진 통일정책이 그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이었던가를 알려 주는 좋은 예가 된다. 고구려가 이처럼 통일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안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세 동족국가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일어선 후발 약소국 신라는 국가역량이 미약한 조건에 서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곤경에 처한 신라가 선택한 길은 외세의존 이었다. 신라의 외세의존은 결국 외세의 지배전략에 놀아나는 배족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신라는 608년에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침략하라고 청원하는 글을 보냈으며, 611년에는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 쟁을 준비하고 있던 수나라에게 자기들이 고구려를 공격할테니 군사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612 년부터 이태동안 수나라 임금 양제는 전투병력 1백13만3천8백명을 비롯한 총병력 3백만 대군을 내몰 아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이 침략전쟁은 신라의 외세의존 정책과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네 차례 에 걸친 수나라의 침략전쟁을 막아낸 고구려 역사에서 희대의 명장 을지문덕이 지휘한 살수대첩이 위대한 전승으로 기록되었던 612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병력이 북부전선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 남쪽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618년에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의 패전과 자국 내부의 농민항쟁 때문에 결국 망하였고 뒤이어 당나라가 들어서자 그들도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를 서둘렀다. 645년 당의 임금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 하는 전쟁을 벌였다. 연개소문이 최고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당의 침략군을 격퇴하였고, 양만춘은 안시성에서 88일동안 완강하게 항전하여 승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당은 647년과 그 이듬 해에 연속적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김춘추는 648년에 당을 찾아가 고구려와 백제를 함께 치자고 모의하고 전 쟁에서 이기면 대동강 이북지역을 당에게 넘겨주겠다는 비밀협약까지 맺었다. 고구려 침략전쟁에서 패하여 분을 삭이고 있던 당에게 신라의 이러한 반고구려, 반백제 정책은 재침의도를 크게 자극한 계 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라의 한(조선)반도 분할·점령 밀약이 맺어진 뒤에 신라는 어떻게 되었 던가. 한 역사가의 말을 들어보자.

"김춘추가 귀국한 뒤 신라는 종전에 당과 조공관계를 맺어오면서도 계속 유지해 오던 독자적인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관복도 당의 그것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당과 의 밀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당에 대한 신라의 충실성으로 표현코자 한 조치였다."

신라가 당의 관복을 쓰기 시작한 때는 김춘추가 당에 가서 밀약을 맺고 돌아간 이듬해인 649년이 었고, 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 때는 650년이었다. 위의 옮긴 글에서는 신라가 당과 밀착되었다고 표 현했지만, 신라는 사실상 자주성을 버리고 강대국 당에게 의존하는 외세의존의 길로 굴러떨어졌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당·신라의 한(조선)반도 분할·점령 밀약으로 재침의도에 불을 당긴 당은 660년에 소정방이 지휘 하는 침략군 13만명을 출병시켰다. 당의 침략군이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 5만명과 함께 먼저 공격 한 나라는 백제였다. 660년 7월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의 마지막 장군 계백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용맹 한 5천 결사대는 수적으로 열 배나 우세한 신라군에게 맞서 네 차례나 결사항전을 벌여 격퇴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백제의 국운은 기울어지고 말았다. 백제군이 당·라 연합군과 맞붙었 던 마지막 전투인 사비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백제는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전쟁에서 이긴 당은 백 제땅에 도복부 5개를 설치하고 웅진을 자기들의 군사·정치적 전략요충지로 삼는 점령정책을 실시했 다.

백제를 점령한 당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이듬해인 661년 4월에 침략의 예봉을 고구려에 돌렸다. 당의 육군은 압록강으로 쳐들어왔으며, 서해를 건너온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성을 포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소정방, 임아상, 계필하력이 지휘하는 당군은 평양성 전투에 서 맞붙었다. 당은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신라에게 병력을 증원·출병하여 자기의 침략전쟁을 배후에 서 지원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자기들이 점령한 백제 지역에서 백제 유민의 저항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데 군사력을 동원하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당군과 협공하여 고구려의 영토 안으로 진 격하는 작전을 펼 수 없었고 겨우 고구려의 남부전선을 견제하는 데 머물렀다. 당군은 제1차 평양성 전투 때 평양성을 일곱 달동안이나 포위하고 공략했지만, 고구려군은 완강하게 맞서싸웠으며 662년 2 월에는 역포위작전을 벌여 방효태가 지휘하는 당군을 섬멸하였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장기전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자 당군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667년 소정방과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군 과 신라 문무왕이 지휘하는 신라군은 제2차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고구려는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전쟁에서 이긴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점령정책을 펴나갔 다.

당·라 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각각 벌인 이 전쟁을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벌인 '삼 국 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당나라가 주도한 당·라 연합군 과 고구려의 전쟁, 백제의 전쟁은 통일전쟁이 될 수 없었다. 그 전쟁의 기본성격은 당나라의 침략전 쟁이었고, 그 침략전쟁에 신라가 동조·가담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더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우 리는 아래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라에 의한 민족통일은 첫째,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동족을 멸망시킨 반민족공동체 적이고 반자주적인 통일이었다. 둘째, 엄밀한 의미에서 3국 통일이 아니라 백제를 신라의 지배로, 고 구려를 당의 지배로 민족을 분단시키는 2국 통일이었다. 일부 학계에서는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사전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이와 유사한 구도가 형성되었고 또 이러한 결과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하는 반 민족행위를 자행한 통일이었다. 셋째, 민족구성원을 끌어안아 공동체 일원으로 포섭하기 보다는 백제 와 고구려의 일부를 내부 식민지화하였에 수많은 백제 유민이 신라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지배-종속의 통일이었다. 넷째, 이렇게 '영토적 통일과 민족적 반통합성'은 그 후 조선 초기 까지 무려 8백년 이상 민족적 질곡으로 존속한 민족사의 멍에를 남긴 통일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침략전쟁과 통일전쟁을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라의 통일전쟁이 반자주적이라 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면서 자기 힘이 모자라 당을 끌어들 여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보는 이러한 역사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외세의 침략전쟁과 동족국가 사이의 통일전쟁을 명백하게 구분해야 하며, 당·라 연합군과 고구려군이 벌인 전쟁의 성격 은 침략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를 제패하려고 노리고 있던 강대국 당이 자기와 맞선 강대국 고구려을 침략하는 전쟁을 벌였으나 패한 뒤에, 혼자 힘으로는 꺾을 수 없는 강한 상대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고구려의 또다른 적대세력인 신라를 침략전쟁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신라가 삼국 통일의지를 가졌고, 그런 신라가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통일전쟁을 일 으켰고 그 결과 고구려와 백제가 패망하여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궤변이 우리의 역사인식을 지금도 여전히 교란하고 있다.

3. 신라 삼국통일론의 허구성과 당의 침략정책

 

우리가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 첫 번째 근거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주된 세력은 신 라가 아니라 당이라는 사실에 있다. 고구려와 백제를 패망시킨 것은 당·라 연합군이었는데, 이 연합 군의 주도세력은 약소국 신라가 아니라 강대국인 당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신라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643년에 당나라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655년에 당에게 자 기 북쪽지역을 고구려와 백제가 빼앗아갔으니 이를 되찾게 해달라고 애걸했고, 659년과 666년에도 당 에게 군사지원을 구걸하였다. 우리가 당·라 연합군의 성격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오늘날 당·라 연합군을 라·당 연합군이라고 부르면서 그 연합군의 주도세력이 마치 신라였 던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당의 동진전략은 자기의 지배영역을 요동과 만주, 한(조선)반도 북부지역에 걸쳐 있는 고구려의 영토와 한(조선)반도 중남부지역에 걸쳐 있는 백제와 신라의 영토으로 확장하기 위한 침략전쟁으로 진행되었다. 침략외세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백제 지역을 점령하고 고구려 지역을 직 할영역으로 만들었다. 당은 그 뒤로 약소국 신라마저 정복하여 한(조선)반도 전체를 군사적으로 점령 하고 속국으로 만들려는 침략음모를 꾸몄다. 당은 670년에 신라가 백제의 영토와 인민을 차지했다고 하면서 당을 찾아간 신라 사신을 죽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은 671년에 신라가 대동강 이남지역만을 통치하겠다는 서한을 당에 보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김춘추가 이미 648년에 당에 찾아가 전쟁에서 이기면 대동 강 이북지역을 당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던 한(조선)반도 분할·점령 밀약을 다시 확인한 것이었다. 신 라가 이처럼 자기에 대해서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본 당은 674년에 침략의도를 더욱 노골적으 로 드러냈다. 당나라 임금 고종은 자기 나라에 가있던 신라 문무왕의 아들인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내세우고, 유인궤가 지휘하는 당군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를 분열·점령하려고 획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분열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당은 675년에 육군과 수군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에 쳐 들어왔다. 다급해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과 힘을 합해 당군의 침략에 맞서싸웠다.

한(조선)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당의 침략정책은 더욱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당은 677년에 이 르러 고구려의 왕이었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 조선왕'으로 내세우고 그를 요동지방에 보내어 고구 려 유민들의 저항을 무마해보려고 하였다. 686년에는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내세우고, 백제 의자왕의 손자 부여경은 '백제왕'으로 내세워 한(조선)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획책하였다. 당은 대동강 이남지역이 신라의 강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735년에 가서야 비로소 인정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사이에서 이미 일정한 수준의 동족의식이 형성되어 있 음을 발견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한 민족으로 형성되지 못했으므로 서로 동족의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자기들을 멸망시킨 적대국 신라와 힘을 합해 당에 맞서싸운 것을 볼 때, 우리는 이 세 나라 사이의 관계는 이 세 나라와 당의 관계와 구별되 는 동질성을 이미 형성한 동족국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이 세 나라가 비록 근 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을 아직 형성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은 침략외세로 보았고, 신라는 동족으 로 보는 동족의식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도진순 교수는 "삼국이 서로 치열하게 쟁패하는 것은 셋이라 는 대립의 표현이지만, 그 동력은 역설적으로 어떤 하나의 동질성-중국과는 물론, 북방민족이나 왜 (倭)와도 구별되는 공통성-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이 한(조선)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침략야욕을 품고 무력행사와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유민과 힘을 합쳐 당과 맞서싸웠지만, 워낙 당은 강대국이었고, 신라는 약소국 이었으므로 그 싸움에서 신라가 승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당군이 매초성회전과 기벌포회전에서 신라군에게 패하였다고는 하지만, 만일 그때 한(조선)반도를 침략했던 당군이 자기 본국에서 내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철군하지 않았더라면 신라는 당과 벌인 장기전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을지 모르 며, 한(조선)반도는 당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그로써 이 민족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을 형성하기 오래 전에 이미 중국에 동화·해소되었을는지 모른다.

우리가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 두 번째 근거는,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세워져 결국 발 해와 후기신라가 공존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데 있다. 고구려가 당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에도 고 구려 옛땅에서 당의 침략군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한 고구려 유민의 투쟁은 30년 동안이 나 계속되었다. 696년 영주지방에 강제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의 무관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을 중심으로 거란족과 합세하여 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항전을 벌였다. 마침내 698년에 대조영 은 당군과 맞붙은 천문령전투에서 크게 이긴 뒤에 오늘의 길림성 돈화에 있는 동모산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진국을 세웠다. 한(조선)반도의 북부지역과 만주, 연해주, 요동지역에 이르는 넓은 땅에 세워진 진국은 713년에 가서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은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서 지워버리려는 궤변이다. '통일신라'를 통일국가라고 하는 주장은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신라 중심의 편협하고 왜곡된 주장이다. 발해가 우리 민족사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는 한, 김유신과 김춘추의 신라는 '통일신라'가 아니라 후기 신라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사에서 '통일신라 시대'는 없었으며, 발해와 후기신라 가 존재했던 남북국(조) 시대가 있었을 뿐이다. 외세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어 동족국가를 멸망시킨 신 라의 후예들은 마치 자기들이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기 때문에, 발해는 그 존재와 역사가 아예 우리 민족사에서 지워지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남(한국)의 한 역사연구가는 '통일신라사'의 기본구도가 일본의 식민사학자들과 친일사학자들의 '만선사관(滿鮮史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 바있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라이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리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없이 수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 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만선사관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4. 북방세력권이 사라진 이후 천년 민족사의 반성

고구려가 패망한 직접적 원인은 전쟁지휘부의 무능, 내부분열, 투항이었다. 막리지로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그의 맏아들 남생이 666년에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 으나 내분이 일어나 곧 막리지 자리에서 밀려나고 그 아우인 남건이 막리지가 되었다. 실각당한 남생 은 당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였으며, 고위관리 연정토는 고구려 주민 3천5백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 강대했던 고구려의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었다. 이런 기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고구려의 정치·군사력이 말기에 이르러 매우 약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주 는 것이다. 그 무렵 고구려군은 당군에게 빼앗긴 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당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아들 남산 이 항복한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연개소문의 다른 아들인 남건만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져서 결국 그도 당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옛땅에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일어섰던 발해는 처음부터 당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732년 발해의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요서지방을 쳐들어가서 당군을 격파하였다. 발해와 당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전세가 당에게 불리해지자 당은 신라에게 발해의 남쪽지방을 공격해줄 것을 요구하였 다. 신라는 당의 요구에 따라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철군하였다. 발해는 755년에 수도를 동모 산(지금의 돈화)에서 상경 용천부(동경성)로 옮겼고, 785년 이후 한때는 수도를 동경 용원부(지금의 훈춘)로 옮긴 적도 있었다. 발해는 당과 외교·통상을 추진했고, 동해로 진출하여 일본과 외교·통상 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926년에 거란의 침략군이 발해의 수도 홀한성(동경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 고, 이로써 228년 동안 존재했던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는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발해가 거란에게 망한 뒤 수많은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넘어갔다.

발해의 멸망은 옛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진 북방세력권이 우리 민족사에서 사라졌음을 의미한 다. 발해가 멸망한 뒤로 우리 민족은 오랜 생활터전이었던 드넓은 북방강역 만주, 연해주, 요동지방을 잃어버리고 비좁은 남방강역 한(조선)반도 안에 갇히게 됨으로써 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진출하는 진취 적 민족성과 대륙적 기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때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우리 민족은 옛조선- 고구려-발해로 이어진 북방세력권이 사라진 뒤부터 차츰 약소국의 자리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대륙과 바다에서 강대한 외세가 일어설 때마다 우리 민족은 외세의 끊임없는 침탈을 받으며 시 달려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일찌기 실학자 유득공이 1784년에 쓴 저 유명한 『발해고』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신라 중심의 삼국사만 나타나 있고 발해사가 빠져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를 기록한 고려의 시대적 한계, 곧 국력의 한계라고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사 를 반도 안에 가두어놓은 낡은 인습적 발상에 커다란 전환을 불러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 각은 물론 유득공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무렵 실학자들의 역사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민족의식이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 사이에게서 이미 싹트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홍양호의 『해동명장전』, 한백겸의 『동국지리 지』, 신경준의 『강계고』, 한진서의 『해동석사지리고』, 정약용의 『강역고』, 이중환의 『택리 지』 같은 역사지리서와 인문지리서들의 출현에서 우리는 근대적 민족의식의 새로운 움직임을 보게 된다. 실학자들의 민족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 민족의 생활터전인 민족강토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곧 민족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낳게 한 근대 민족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단재 신채호 (1880-1936년)에 이르러 근대 민족주의의 역사인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실학자들이나 근대 민족주의자들의 역사관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강조해야 할 것 은 옛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진 우리 민족의 북방세력권이 사라진 뒤로 생겨난 천년 민족사의 질곡 은 요동과 만주를 잃어버림으로써 진취적 민족성과 대륙적 기질이 사그러들고 말았다는 사실에서만 찾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옛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진 북방세력권의 패망이 우리 민족사에 주는 역사적 의미는 세 가지다. 첫째,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수백년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중화민족과 힘을 겨루었던 우리 민족의 자주역량이 좌절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삼국통일을 실현할 고구려의 역량이 외세인 당의 침략에 의해서 좌절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멸망은 민족자주역량의 좌 절과 한(조선)반도 통일역량의 소멸이라는 커다란 이중적 손실을 우리 민족사에 안겨준 사건이었다. 셋째, 신라 중심주의의 민족사적 이단성이 옛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진 민족사적 정통성을 압도· 능멸하면서 민족사의 발전방향이 뒤틀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5. 고려의 통일국가 건설이 보여준 의의와 한계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하여 한(조선)반도에 최초의 통일국가인 고려를 세운 때는 918년이었다. 고 구려의 계승국 발해가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했던 때가 926년이었으므로, 고려와 발해는 8년 동안 공 존하였다. 고려의 건국세력은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가 외세에게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것이 다. 고려와 발해가 공존했던 이 8년의 세월은 우리 민족사에서 고려와 발해, 후기 신라와 후백제 네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말하자면 4국 시대로 기록될 수 있다.

고려의 건국세력은 외세의 침략과 강점으로 멸망한 발해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의지 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통일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정했는데, 그것은 고구려에서 '구'를 뺀 이름 이 아니라, 원래 고구려가 바꾸어 썼던 나라이름 고려를 그대로 되살려 쓴 것이었다. 고려의 건국 세력은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해 인민들을 이주시키는 등 힘썼으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을 원수로 대하면서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은 그들이 옛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 통성을 계승하고, 외세 거란에게 빼앗긴 북방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려는 935년에 후기신라의 경순왕이 투항함으로써 후기신라를 통합하였고, 이듬해에는 후백제 군을 격파하여 고려는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명실공히 통일국가를 수립하였다. 고려의 건국세력 이 외세의존세력이었던 후기신라의 집권세력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통일국가를 세운 것이다. 고려의 건국이 후기신라에 대한 부정이었다는 사실은 신라가 중국에게 의존해온 화이론적 세계관, 사대주의 적 역사에 대한 부정, 곧 신라의 민족사적 이단성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동시에 옛조선-고구려-발해 로 이어진 민족사적 정통성에 대한 긍정이요 계승이었다. 고려의 건국은 또한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로 이어진 동족분열의 천년 과거사에 대한 부정이요 극복이었다.

이처럼 최초의 통일국가 고려의 건국은 외세의존과 동족분열의 역사를 마감하고 단결된 민족자주 역량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두 번 다시 없는 역사적 기회를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지금 으로부터 천년 전, 이 민족과 이 강토는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민족자주역량을 강화하는 민족사적 도 약과 전환의 기회로 설레이며 새 천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의 건국세력은 두 가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 화이론적 세계관의 한계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독자성과 자주성을 전면적으로 실 현하지 못하는 세계관적 한계에 묶여있었다. 둘째, 민족자주역량의 물리적 한계다. 고려의 건국세력은 고구려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있었으나 군사력을 키우지 못했으므로 고구려의 민 족자주역량을 되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려는 끊임없이 이어진 거란족, 여진족, 왜구의 침략에 맞서 힘겨운 전투를 벌여야 했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로 이어진 시기에 동아시아의 정세는 고려, 송, 거란의 삼각관계가 전략 균형을 이루면서 변화되고 있었다. 거란이 고려-송의 전략적 동반관계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판단하 고 고려에 쳐들어온 때는 993년이었다. 이듬해 고려는 송에게 거란을 공격하자고 제의했으나, 송이 이를 거절하자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 무렵 여진인들이 고려에게 거란의 침략을 미리 알려주어 고려 는 각 도에 병마제정사를 파견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서북지방에 방어선을 배치했으나, 마치 이를 비 웃기나 하듯이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거란왕의 사위로 여진족 정벌에서 승전한 소손녕은 정예 병 80만을 이끌고 질풍처럼 고려땅을 짓밟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의 인구가 2백만명 쯤이었으므로, 거란군 80만명 병력은 고려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군이었으며, 또한 수없는 실전경 험으로 단련된 막강한 기동력을 지닌 기병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강군이었다. 거란은 청천강 이북지 역에 있는 강동 6주를 점령하겠다는 강도적 요구를 들이대면서, 압록강을 건너와 봉산을 점령하고 고려의 선봉장을 포로로 붙잡았다. 거란군의 막강한 무력침공에 기가 질린 고려의 지배세력은 비굴하 게도 강동 6주를 거란에게 떼어주자고 논의했다.

그러나 고려의 장군 서희는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터에 섰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 하였다. 만일 땅의 경계를 따진다면 거란의 동경도 우리땅"이라고 하면서 80만 침략군에 용감하게 맞 섰다. 서희가 이처럼 거란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간파할 수 있는 지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고려군은 막강한 기병전력을 동원하여 쳐들어온 거란 침략군의 진격을 저지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군사·외 교적인 조건이었다. 서희가 간파했던 군사적으로 유리한 조건은, 평야지대의 전투경험 밖에 없는 거 란군의 기병전술은 한(조선)조선 반도의 산악전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고려 군은 새로운 무기인 병차로 거란군의 기병전술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려군의 전술은 거란군 을 깊숙이 끌어들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차를 앞세운 산악전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 까 거란군은 병차를 앞세운 고려군의 완강한 산악전에 밀려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서희는 전선이 교착되면서 장기전에 들어갈수록 거란은 송이 자기의 배후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간파했다.

전선으로 달려나간 서희는 적장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벌였다. 이 담판에서 서희는 고려, 송, 거란 의 위태로운 전략균형을 설명하면서 거란군이 철퇴하지 않으면 송이 거란의 배후를 공격할 것임을 강조했다. 마침내 소손녕은 전쟁의 계속이 아니라 평화공존의 길을 선택하면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 다. 고려는 이때 원수의 나라인 거란과 국교를 수립하고 평화공존관계로 들어섰다. 고려의 외교지략 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위력적인 전술로 뒷받침을 받은 서희 장군의 영활한 지략이 80만 대군의 무력 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외세에게 빼앗길 뻔한 강동 6주를 지켜내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거란은 날로 대국화되었고, 나중에 중국대륙에 큰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요나라다. 새로운 군사 강국으로 동아시아 무대에 등장한 요나라는 1010년에 가서 평화공존관계를 깨고 다시 고려에 쳐들어 왔다.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와서 방화와 약탈의 만행을 저질렀다. 신생국 고려가 맞 이했던 새로운 천년은 이렇게 외세 침략의 피로 물들었던 것이다. 그때 만일 고려에게 명장 강감찬이 없었다면 고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왔을 것이다. 고려군 상원수 강감찬은 적장 소배 압이 거르리는 거란군을 삼교천의 물을 막아놓은 쇠가죽 제방을 터뜨려 수공으로 타격을 가하면서 매복전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이 민족의 전쟁사에 귀주대첩으로 기록된 장쾌한 전승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거란군을 섬멸한 개선장군 강감찬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날 현종은 몸소 나아가 개선군을 맞이하였으며, 고려는 전승의 기쁨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이 전승은 마지막 전승이 되었 다.

초기에 옛조선-고구려-발해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려고 하였던 고려는 중기에 이르러 신라 의 민족사적 이단성을 계승하려는 친중 사대주의 세력이 집권함으로써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 을 받는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고려에게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던 것은 말과 소였다. 말은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물자이며, 소는 농업생산에 기초한 경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생산력의 기본이었다. 중국은 조공을 통하여 고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지 못 하도록 짓눌렀던 것이다.

1135년에는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세력이 반외세 민족주의의 기치를 들고 나서면서 송 나라에 대해서 대등한 외교관계를 주장하고 금나라를 징벌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쇠잔해진 고려를 일으키기 위해서 '서경천도설'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이 세력은 친중 사대주의 세력인 김부식 일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1135년 서경에서 군사정변을 일으켰으 나, 김부식의 토벌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고려는 무신의 반란으로 비틀거리게 되었으며, 나라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졌다.

1231년에 시작된 몽골의 침략은 고려의 인민과 국토를 죽음과 황무지로 몰아넣었던 대참화였다.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고려에서는 민중들의 치열한 반침략 투쟁이 있었고, 삼별초군을 지휘한 배중손의 진도항쟁, 김통정의 제주항쟁이 처절하게 전개되었으나, 고려의 지배계급은 침략자 몽골군 이 주도한 몽·려연합군에 편입되어 동족의 반침략 항쟁을 꺾어버리는 반민족적인 길로 들어서고 말 았다.

1274년에 왕의 자리에 오른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그 뒤로 고려의 왕 들은 모두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침략자의 피가 섞인 아들을 세자로 두어야 했다. 몽골은 고려의 어린 세자들을 원나라의 수도 북경에 끌어다가 키우며 길들였고, 적절한 때가 되면 고려의 왕 관을 머리에 씌워주는 기막힌 정치사기극이 벌어졌다. 고려의 왕은 '조(祖)'나 '종(宗)'이라는 개념을 써서 자신의 왕이름을 지을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왕(王)'이라는 개념을 썼으며, 더우기 그 앞에는 언제난 '충(忠)'자를 덧붙여서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하는 치욕의 길을 걸어야 했다. 왕의 지 위를 떼고 붙이고 하는 것도 원나라가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의 지배계급은 몽골식 이름 을 갖고, 몽골식 변발을 하고, 몽골식 옷을 입고, 몽골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몽골 귀족들은 고려여 인을 첩으로 두는 것이 신분을 과시하는 요건이었다. 이 암울한 시대에 한(조선)반도의 통일국가 고 려는 나라의 자주성을 잃어버리고 한낱 몽골제국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족자주역량을 잃어버린 나라에는 외침이 더욱 끊이지 않아서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이 기승을 부렸다. 고려를 침략하고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의 명나라가 들어선 때는 1370년이 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388년 명나라는 철령 이북지방을 요동에 병합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 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강계에 쳐들어왔다. 고려땅을 빼앗아가겠다는 강도적 요구에 강하게 맞선 고려는 명나라 사신 21명을 처단하고 5명을 억류하는 한편, 명나라를 공격하는 전쟁계획 을 세웠다. 고려는 전국 8도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병력 5만명으로 최영이 지휘하는 요동정벌군을 편 성하였다. 고려의 요동정벌군 5만명이 펄럭이는 군기와 번득이는 창검을 치켜들고 압록강을 향해서, 462년 전 발해가 멸망하면서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땅 요동을 향해서, 아니 이 민족의 자주권을 짓밟 으려는 오만한 침략자 명나라를 징벌하기 위해서 북소리를 울리며 진군할 때, 이 민족의 역사 안에서 는 새로운 힘이 잉태되고 있었다. 요동정벌군의 출동은 고구려가 당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로 720년동 안 흘러온 치욕과 예속의 역사를 단숨에 뛰어넘어 민족자주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웅비와 용맹의 진 군이었다. 고구려 이후 720년 동안 이 민족, 이 강토는 외세의 침략으로 얼마나 많은 격전을 치러야 했으며, 외세의 무력 아래 짓밟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가. 바야흐로 그 반역의 역사를 뒤집 어 자주의 역사를 세우려는 장엄한 싸움이 고려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요동정벌군의 선봉대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역을 공격하고 개선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친명 사대주의 반역자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갔으며 정권을 찬탈하였다. 고구려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되살리려 했던 72살의 백전노장 최영은 이성계가 이 끈 반란군에게 참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서 우리는 민족자주역량의 좌절과 사대주의 반역세력 의 발호를 본다.

6. 지배계급의 문약화와 그 자주역량의 쇠퇴

동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가 당에게 패망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자주역량이 약화된 결정적인 사건 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당에게 패망한 이후 우리 민족사에는 전에 없었던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동족국가를 패망시키고 침략외세와 손을 잡으려는 배족적 외세의존세력이 민족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민족사적 이단성이 중심세력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라의 지배계급은 동족국가들 사이의 세력다툼 에서 승리하려는 데에 눈이 팔려 당의 지배전략이 몰고올 치명적 해악을 간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들은 동족국가를 멸망시켜 패권을 잡으려는 눈앞의 적은 이익을 탐하다가 결국 만주, 연해주, 요동의 드넓은 활무대를 영원히 포기하는 반역의 길로 나갔다. 사실 신라는 만주, 연해주, 요동을 차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나라였다. 이때로부터 동족국가를 멸망시키고 침략외세와 손을 잡으려는 외세의존세력이 민족사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자주역량은 중심권에서 차츰 밀려나 주변세력화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패망은 민족자주역량의 패배와 외세의존세력의 승리를 뜻하는 비극이었다. 외세 의존성은 후기신라가 들어선 뒤로 차츰 심화·전면화되어갔고 그와 반비례해서 민족자주성은 차츰 약화되어갔다.

삼국시대와 발해의 임금들은 대부분 장군형 통치자들이었다. 그들은 군사에 정통한 군사전략가들 이었으며, 자신이 병력을 친솔하고 전투를 이끌었던 뛰어난 군지휘관들이었다. 그러나 후기신라 이후 의 왕들 가운데는 그런 장군형 통치자들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들은 전쟁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고 군사를 알지 못하는 문사형 통치자들이었다. 후기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가 일제 침략으로 멸망한 20세기 초까지 이 땅의 지배계급은 거의 모두 칼과 활을 멀리하고 책과 붓을 손에 잡았다. 삼 국통일전쟁에서 승리한 왕건이나 군사반란으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모든 임금들이 문사형 통치자였다. 이처럼 국가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이 군사를 알지 못하고 전쟁을 지휘 하지 못하는 무능한 문사형 통치자들이었으므로 그런 나라가 군사강국의 자리를 되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고려와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이 책과 붓을 손에 잡은 것을 두고 군사력 대신에 문화역량을 중시한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으나, 그들이 몸을 담았던 문화는 중화민족의 문화를 가장 위대한 문화로 여겨 받들어 섬기고 그 대신 자기 민족의 문화를 멸시·천대하는 사대주의적이고 예속적인 문화였다. 문약화된 지배계급은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흉내내고, 중국의 사상과 세계관을 받들어 섬기면서 국가 의 명맥을 유지하는 속국이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지배계급의 문약화는 민족자주역량의 핵심인 정치·외교력과 그것의 물리적 담보인 군사력을 끊 임없이 약화시켰고, 그 결과 고려와 조선왕조는 끊임없이 이어진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고전했다. 조 선왕조 시기에 와서는 외세의 침략을 완전 제압하고 쾌승한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화민족을 섬 기는 사대주의 반역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중국 에 대한 사대와 예속으로 깊이 물들었던 조선왕조는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해 3월 1일 왜의 육군 15만 8천7백명과 수군 수만명이 9개 부대를 편성하여 현해탄을 건너 쳐들어왔다. 조선왕조는 7년 동안 새로운 해양세력의 침략에 맞서 피투성이의 싸움을 해야 했 다. 만일 이순신의 조선함대가 없었더라면 이 민족은 왜군에게 점령당하여 나라를 잃었을지도 모른 다.

만주족이 세운 후금은 1636년 4월에 나라이름을 청으로 고치자마자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 는 오만·방자한 요구를 들이댔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그해 12월 청의 태종은 만주족 7만8천명, 한족 2만명, 몽골족 3만명으로 혼합편성된 침략군 12만8천명을 직접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 다. 청의 침략군이 압록강을 건넌 때로부터 불과 엿새만에 인조는 부랴부랴 왕궁을 버리고 남한산성 으로 달아났다. 남한산성에서는 조선군 1만4천명이 청나라 침략군 12만8천명의 맹렬한 포위공격을 받 으며 고립무원한 절망적 상황에서 항전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송파 부근의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세 차례 절을 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조선왕이 청의 태종에게 항복 한 이후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할 때까지 258년동안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조는 청에게 자주권을 빼앗긴 속국으로 지내야 했다. 청의 속국이었던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이르러 일본에게 속국 의 지위마저 완전히 강탈당하고 식민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왕조가 일제의 침략으로 망하게 되었을 때 지배계급의 문약화 현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7. 중화화·일본화·아메리카화

옛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진 북방세력권의 자주역량이 민족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로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로 내려오면 올 수록 지배계급의 자주역량은 약화·쇠락하는 길을 걸었으며, 따라서 주 변열강의 침략과 수탈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대로다. 북방세력권이 사라진 뒤로 우리 민족의 자주역량은 차츰 주변세력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 내부에는 중국의 힘에 의 존하여 살아가려는 친중예속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고, 지배계급은 자주성을 내던지고 중화화(中華化) 의 길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초강대국 중국왕조는 스스로가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위에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거대한 질서를 세우려 하였다. 이른바 사이팔만(四夷八蠻)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중국왕조가 지배하고 관리하는 중화화된 세계로 차츰 바뀌어갔다.

중화화의 길은 곧 '사이팔만'의 미개한 주변세계를 문명한 중화민족의 힘으로 개방·개혁하는 길 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세계화의 길'이었다. 중화민족이 이처럼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 었던 시기에 그 주위에 있었던 약소민족, 약소국들은 이러한 세계화 전략에 순응·복종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저항하는 자주화 전략을 추진하든지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수많은 약소민족, 약소국들이 중화민족의 막강한 힘에 눌려 중화화의 길에 순응·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으 나, 고구려는 예외였다. 고구려는 중화화의 길을 거부하고 중화민족의 침략과 지배전략에 저항하였으 며, 자주화 전략을 추진한 나라였다. 고구려가 강성부흥했을 때는 고구려의 문화가 중화민족에게 영 향을 주기도 했다. 오늘 우리가 고구려의 민족사적 의의와 정통성을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고구려가 중화민족의 세계화 전략을 거부하고 자주화 전략을 추진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외세의존세력이 중화화의 길을 걸어간 것은 당시 초강대국 중국의 침략 앞에서 약소민족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만일 우리 민족이 중화화의 길을 거부했다면 중국의 침략을 받아 오래 전에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며 따라서 그나마 민족을 보존하지 못했으리라는 논리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외세의 지배전략에 투항하고 외세의 발밑에서 굴종하면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자기를 보전하는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말일까. 그러한 궤변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남에게 굴종·예속 된 삶은 자기부정, 자기해체의 암흑에 파묻혀 사는 '노예의 도덕'을 교묘하게 정당화·합리화하고 있 다. '노예의 도덕'을 자기 보전의 현실적 선택이라고 인정·칭송하는 궤변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 려는 어리석은 짓이다.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자주역량을 부정하는 궤변 속에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싸 우며 자기를 지키고, 외세에게 빼앗긴 자기를 되찾기 위한 기나긴 투쟁사에서 이 민족이 흘린 피눈물 젖은 항쟁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범죄적 의도가 들어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우리 민족을 침략했거나, 아니면 속국이나 식민지로 지배했던 나라, 또는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 일본, 미국이다. 몽골도 그런 나라였지만, 지금 그 나라는 매우 위축·약 화된 상태에서 한(조선)반도에 대한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므로 일단 논의에서 제외할 수 있 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 이후의 우리 민족사는 중화화, 몽골화, 일본화, 아메리카화의 길로 교 체·변천되면서 자주역량을 끊임없이 훼손·유린 당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 천년이 지난 지금도 한 (조선)반도는 미국의 지배주의 전략, 일본의 재침야욕, 중국의 패권주의 앞에 마주서있다. 지난 1백년 동안 한(조선)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들은 이 세 나라들이 우리 민족과 충돌한 전쟁이었다. 오늘날 분단체제가 반세기가 넘도록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미국의 지배력, 일본의 재침야욕, 중국의 패권주 의에 한(조선)반도의 분단체제가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년 전에 왕건이 세운 통일국가는 나중에 몽골민족에게 자주권을 빼앗긴 속국으로 존재했고, 조선왕조는 중화민족에게 자주권을 상납한 속국으 로 존재하다가 그 천년을 마감하는 끝무렵에 일제의 식민지 노예국이 되었으며, 일제를 제압한 미국 이 일제를 몰아내고 한(조선)반도에 들어오면서 통일국가마저 유지하지 못하고 분단국가로 전락했다.

일찍이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을 무력으로 제압했고, 가까이는 소련과 맞선 동서냉전에서 살 아남은 미국은 인류역사상 가장 강대한 제국을 건설하였고, 오늘 전세계를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메리카화의 길은 냉전 이후 이른바 '세계화'라는 거창한 개념으로 팽창되면서 지금 그 막바지에 올라서고 있다. 미국은 남(한국)을 자기의 세계화 전략에 의하여 개방·개방함으로써 문명 화해야 할 변방의 미개한 나라로 보았다. 지난날 중화민족이 '사이팔만'을 문명화한다는 구실을 내걸 고 이 민족을 중화화하려는 지배주의 전략을 추진했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황국신민화(皇國臣民 化)'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떠들면서 동아시아의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한 '팔굉일우(八紘一隅)'와 '대동아공영'의 지배주의 전략을 추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남(한국)에서 아메리카화를 추진하였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은 남(한국)을 지배·수탈하는 속국으로, 일본 을 아시아·태평양 지배전략의 발판으로, 중국을 미국식 시장경제의 침투대상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 인 지배전략이다. 지난날 중화화, 몽골화의 길이 한(조선)반도에 대한 조공·책봉의 예속관계를 유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아메리카화의 길도 남(한국)에서 은밀하고 세련된 형태로 조공·책봉의 예속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이 강토 안에 주둔하고 있는 미·한연합군은 일반적인 의미의 동맹군이 아니라 당·라연합군과 몽·려연합군의 지위와 역할을 이어받은 후신이다.

남(한국)의 아메리카화는 한(조선)반도의 분단고착화·영구화의 화근으로, 북(조선)과 날카롭게 대 치하는 전쟁위기의 화근으로 존재해왔다. 우리 민족이 자주역량을 키워 중화화, 일본화, 아메리카화의 길에서 벗어나 자주화, 중립화, 연방화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한, 남(한국)은 21세기에 가서도 여전 히 미국으로부터 현대판 조공·책봉의 예속관계를 강요당하고, 중국과 일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 는 번방(藩邦)의 희생물로 남아있을 것이다.

발해 이후 천년 민족사를 반성하며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하는 문제는 천년의 민족사를 꿰뚫고 흘 러온 민족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문제란 한 마디로 민족의 자주화 위업을 실현하는 것이다. 민족의 자주화 위업은 일제 식민지시대에는 자주독립의 과업으로,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분단시대에는 자주통일의 과업으로 제시되었다. 식민지시대의 자주독립과업은 자주적 민족국가 를 세우는 건국과업이었으며, 오늘 분단시대의 자주통일과업은 자주적 통일국가를 세우는 건국과업이 다. 따라서 조국통일의 실현은 민족의 자주화 위업을 수행하는 것이며, 민족자주역량의 되살림은 자 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열쇠다. 남(한국)의 한 통일문제 연구가는 이렇게 말했다.

"민간통일운동 과정에서는 민족자주성의 문제가 일관되게 제기되어 왔는데 이는 통일운동은 곧 민족자주화 운동이고, 일제시기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공간의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과 맞닿 아 있는 민족정통성의 길임을 말해 주고 있다. 결국 '통일운동 50년'의 기본 성격은 민족구성원의 화 해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자주성이 보장되는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민족자주성 회복운동으 로 규정할 수가 있다."

8. 강세화·주력화되고 있는 민중의 자주역량

몽골 침략 이후 고려의 지배계급은 몽골화의 길에 순응·복종하였고,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은 중화 화의 길에, 순응·복종하다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기에는 일본화의 길에 앞장서서 순응·복종 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남(한국)은 총체적으로 아메리카화되고 말았다. 남(한국)사회의 아메리카화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심화·전면화되어 미국 달러화의 위력에 굴종·맹종하고, 초 등학교 아이들부터 대통령까지 누구나 미국말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지 않으면 출세하지 못하고, 미국 문화를 즐기고 미국 상품을 쓰면서 미국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최상의 생활로 여기고 있다. 남(한국)사회는 '아메리카화 집단중독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어느 시대나 민족의 운명이 존망의 벼랑끝으로 몰려가게 되었을 때, 목숨 바쳐 민족 을 구원한 것은 평소에 떵떵거리며 큰소리 치던 지배계급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무지랭이'라고 멸 시·천대한 이름없는 민중이었다. 강대한 외세가 첨단무기로 무장하고 우리 강토에 쳐들어와서 닥치 는대로 죽이고, 빼앗고,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을 때마다 가장 먼저 달아난 비겁한 도망자는 지배계 급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촌토를 영웅적 항쟁의 피로 지킨 수호자는 민중이었다. 만 일 발해 이후 지난 천년 민족사에서 이 땅의 민중들이 외세침략에 저항하며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 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우리 민족사에서 만일 민중의 반외세·반침략투쟁 이 미약했었더라면 이 민족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외세의존과 사대주의에 물젖은 지배계급의 손 아귀에서 민족의 자주역량은 완전히 실종·소멸되고, 아마 중국말을 하는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 되어 버렸거나, 아니면 일본말을 하는 일본의 한 소수민족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발해가 멸 망한 뒤로 천년 민족사를 이끌어온 민족사의 정통성과 주체적 맥락이 민중의 반외세·반침략운동에 있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이처럼 발해 이후 천년 동안 민족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항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주역이 지 배계급이 아니라 민중이었는데도, 민중의 자주역량은 아직 사회역사발전을 이끌어가는 힘으로 주력화 되지 못하고 있다. 천년 민족사가 안고 있는 비극의 원인은 외세에게 아부·굴종하는 지배계급, 더 나아가서 침략외세의 앞잡이로 변신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외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반민족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해온 반역의 역사가 이어져온 데에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매달려있는 반역의 역사를 뒤집어 보면, 거기에는 민중이 창조해온 자주화의 역사가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민중이 개척해온 자주화의 길은 처음에 어떻게 시 작되고 전개되었을까? 옛조선 이후 이 민족의 역사에 등장했던 봉건국가들은 지배계급과 민중의 계 급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봉건국가의 권력과 재부는 언제나 민중의 손에 있지 않았고 지배계급의 독 점물,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자주역량이 차츰 표출되 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는 망이, 망소이, 금초, 김순 같은 민중의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농민항쟁과 만적이 이끌었던 노비해방투쟁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이것은 민중의 자주역량이 역사의 무대로 나서 서 사회역사를 개조하게 될 자주시대의 다가옴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민중의 자 주역량은 더욱 장성·발전되었다. 조선왕조시기는 이른바 '민란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지배 계급에 대한 민중의 항쟁이 더욱 격렬하게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다. 조선왕조의 말기에 와서 지배계급은 극도로 문약화되어 그 자주역량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종당에는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게 투항·굴복하였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처음에는 미약한 잠재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민중의 자주 역량은 강인한 항전의 불길 속에서 날로 강세화·주력화되었다. 민족사가 현대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지배계급의 자주역량은 문약화·쇠퇴화되는 반면, 민중의 자주역량은 폭풍우 처럼 휘몰아쳐오는 역사 의 고난과 시련에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날로 강세화·주력화되어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 다. 민중은 반외세·반침략 항쟁의 불길 속에서 자기의 자주역량을 벼리고 벼리어 마침내 한 덩어리 강철처럼 강인해져 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천년 민족사에서 민중의 자주역량이 강화·발전 되어온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지배계급이 자주역량을 지니고 있었던 고대기인데, 이 시기에 민중의 자주역량은 잠 재력으로 존재하였고, 지배계급이 주도한 반외세·반침략항쟁에 포섭된 동력으로 존재했다.

둘째 단계는 지배계급의 자주역량이 문약화·쇠퇴화하던 중세기인데, 이 시기에 민중의 자주역량 은 반외세·반침략항쟁과 계급투쟁이 결합시킨 힘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셋째 단계는 지배계급의 자주역량이 완전히 소멸하고 외세에 아부·굴종했던 일제 식민지 시기인 데, 이 시기에 조선민중은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는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넷째 단계는 일제의 패망 이후 오늘까지 이어진 시기인데,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민중의 자주역량은 미국이라는 강대한 외세의 분단고착화 정책, 그리고 친미예속세력의 집중적인 탄압 때문 에 일시적으로 좌절하였으나 오랜 고통의 상처를 딛고 지금 다시 일어서고 있는 중이다.

9. 민족자주사상의 깨우침: 국가주의의 민족사적 반역성을 깨뜨리고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지금까지 남(한국)사회에서는 민족의 자주화 위업을 교란·방해하고 민중의 자주역량을 짓눌러 없 애려는 반역의 논리가 판을 쳐오고 있으니 그것은 다른 게 아닌 국가주의라는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뒤로 천년 동안 끊임없는 외세의 침탈에 시달려온 민중의 눈에는 외세와 갈등을 빚고 있는 세력은 앞뒤를 잘 살펴볼 필요도 없이 자기 편으로 인정하는 사회심리적 반응이 나타나게 되었다. 국가주의 세력은 바로 이러한 불투명한 반응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둔갑시켰다. 민중의 자주역량 이 장성하고, 그것의 사회사적 운동방식인 반일민족해방운동이 궤도에 오르기 이전의 과도기에 나타 난 것은 민족주의와 그 사회사적 운동방식인 민족주의운동이었다.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운동은 일정한 수준과 범위에서 반외세·반침략의 투쟁양상을 띄고 있었으므로, 국가주의 세력은 자기의 민족사적 반역성을 감추기 위해 자기의 정체를 곧잘 민족주의 담론으로 변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국가주의의 민족사적 반역성을 배격하면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구분선 을 분명하게 그어야 하는 까닭은, 국가주의 세력은 스스로를 민족주의 담론으로 교묘하게 위장하면서 민중을 기만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일제 식민지시대 이후 분단시대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민중의 자 주역량을 짓눌러 없애려 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 민족주의세력을 이른바 '반국가사범'으로 내모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15 이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실현하려는 민중의 자주역량을 압살하려고 나선 미군정과 그 앞잡이 이승만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유엔헌장 제75조에 나와있는 신탁통치조항과 결부시 켜서 민중의 반외세 민족감정을 자극·선동하고 이른바 '즉시독립을 위한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스 스로를 민족주의로 위장하고 민중을 기만하였는데, 이것이 남(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로 위장한 국가 주의 세력이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첫 번 사례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을 우두머리로 한 반민중 적 국가주의 세력은 1948년 8월 이 땅에 친미예속적인 분단정권을 세웠고, 반공·반북의 구호를 민족 주의 담론으로 위장했으며, 정권유지에 필요한 때마다 반일적인 발언도 내뱉곤 했는데, 이러한 경향 은 모두 민족주의로 변장한 국가주의에서 흘러나온 더러운 분비물에 지나지 않는다.

1961년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은 박정희 군부세력의 집권시대로 넘어오면서 남(한 국)사회에서는 국가주의가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다. 이 시기의 국가주의는 북(조선)의 공격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경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반공·반북을 국책으로 삼은 군부출신의 국가주의 세력은 입으로는 '자주국방'이니, '부국강병'이니, '민족중흥'이니, '조국 근대화'니 하는 그럴 듯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인 민족사적 반역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담론은 실제로는 집권연장을 획책하는 국가주의의 기만술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안보와 근대화'를 앞세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부국강병론이 일본 메이지 시대의 국가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부국강병론을 서툴게 흉내낸 반역성을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박정희는 그의 글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차제에 우리 민족 전체가 일대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공산주 의의 도전에서 우리 민족을 수호하고, 주권자로서 다시는 실정과 부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서는 일대 민족적인 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혁명은 민족적 각성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만 얼핏 들어서는, 국가주의자의 논리와 민족주의자의 논리를 가려내기 힘들 만큼 정교한 변장 술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말한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는 북(조선)이 통일의 대 상이 아니라 배격과 소멸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박정희 식의 국가주의에서 북(조선)은 언제나 '침략외 세'와 동의어로, '민족'의 대립항으로서만 존재한다. 박정희 식의 국가주의 담론에 자주 나오는 '민족 적 자아'니, '자립정신'이니, '주체의식'이니 하는 따위의 민족주의적 용어들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원 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된다. 박정희는 민족주의 언술로 변장한 철저한 반통일적 국가주의자였다. 이 반통일적 국가주의자가 수호하겠다고 했던 '민족', 근대화를 통하여 번 영과 발전의 길로 이끌겠다고 했던 그 '민족'은 실제로는 민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중의 자주역량을 짓누르며 민족의 사회역사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분단과 예속의 국가주의 체제였다. 오늘도 매국적 외교행각이라고 배척을 받고 있는 '한·일기본조약'의 타결을 이끌어내던 무렵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 다.

"오늘날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적은 국제 공산주의 세력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어느 누구에게 도 다시 빼앗겨서는 안되지만 더우기 공산주의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고 벗이 될 수 있다면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 내일의 조국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감정을 참고 씻어 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올시다. 더구나 중공의 위협이 나날이 증대하여 가고 있고 국제사회가 이른바 다원적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반세기 전에 우리가 겪은 민족의 수난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 해서는, 국가의 안정보장과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는 현명한 판단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대중 앞에 나설 때는 곧잘 민족주의적 언술로 변장했지만, 실제로는 민중의 자주역량을 짓눌러 없애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도 유신독재말기에 미국의 카터정권과 갈등을 빚으면서 '자주 국방건설'과 핵무기 독자개발에 열을 올리던 국가주의자 박정희와 그 집권세력에게 무슨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는(또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분위기가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오늘 남(한국)사회에서 지난 시기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정치감각의 자율신 경이 길들여진 언론과 지식인들은 국가주의가 민족주의의 탈을 쓰고 대중을 기만하는 치졸한 사기극 을 부채질하기에 정신이 없으며, 심지어는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들마저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혼 동하면서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그 뿌리가 같은 부국강병론의 이념적 기초이므로 이를 경계·배척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8·15 이후 남(한국) 사회에서 국가주의의 흐름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대표되는 분단독재세력으로 이어지고, 오늘의 집권세력에게 흘러들었다. 이 계승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주의 세력은 언제나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중의 자주역량을 짓눌러왔던 것은 말할 것 도 없고, 김구→조봉암→장준하→문익환으로 대표되는 통일민족주의의 주체적 맥락마저도 끊어버리려 광분했다. 이처럼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대립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지난 시기 민족주 의가 일정한 수준과 범위에서나마 민중의 자주적 요구를 대변하고,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해온 반면에, 국가주의는 언제나 민중을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보면서 민중에게 국가주의 이념을 강제로 주입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나돌아 다니는 세계화 담론은 국경 없는 자본의 이동,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차단하는 신 자유주의를 떠들고 있으므로, 국가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초국가적 담론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화 담론은 약소국의 국가주의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강대국의 국가주 의를 위해 복무한다. 세계화란 강대국의 국가주의가 약육강식의 야만적 법칙을 전세계적 판도에서 한 층 견고한 지배와 수탈의 질서로 만들어내려는 세기적 음모다. 박정희 식의 '부국강병 근대화론'에 서부터 세계화 담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주의적 담론 안에서 민중은 사회역사발전의 주체가 아니 라, 지배계급이 국가주의적 부국강병책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하는 대상이 되며, 강대국의 국가주의가 마구 휘두르는 약육강식의 야만적 법칙 아래서 약소민족, 약소국은 지배와 수탈의 희생물이 된다.

분단과 예속이 뒤엉켜있는 낡은 체제를 혁파하고 자주적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오늘의 민족사 적 과업을 외면하는 지배계급, 민중의 자주역량과 그 운동에 대립하는 정치세력은 비록 그들이 일시 적으로 반외세 경향을 보이면서 그럴듯한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뱉는다고 하여 우리가 민족주의라고 속아서는 결코 아니된다. 국가주의자가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반외세의 경향을 내보인다고 하여 민 족주의자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외세를 반대하는 근본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데 있 다. 통일민족주의자는 외세를 반대하는 목적을 민족문제의 해결, 곧 자주적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에 두고 있지만, 분단국가주의자는 부국강병책을 동원하여 분단현실을 무한정 유지·연장하려 하고 있 다. 이것이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며, 이것이 또한 우리가 국가주의를 마땅히 배격해야 할 이유가 된 다.

돌이켜보면, 분단시대 남(한국)의 사회정치사는 분단국가주의와 통일민족주의가 대립·투쟁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정치사는 반통일적 국가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조국통 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압살하려는 폭정과 억압의 역사며, 민중이 좌절과 굴종의 상처를 씻고 자 주화 위업을 수행할 주역으로 다시 일어서는 자기해방의 역사다.

그런데 이처럼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의 민족사적 반역성과 맞서 싸워왔는데도 현실적으로는 민족 주의와 국가주의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거듭 혼동에 빠져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주 의가 시대적, 이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민족의 자주화 위 업은 어디까지나 민중이 자신의 힘으로 수행해야 할 민중 자신의 과업인데,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자주화 위업을 지향하면서도 그 위업을 수행하는 주역이 민중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민족주의는 자주 역량은 민중에게서 나온다는 진리, 민족의 자주화 위업을 실현하는 주체가 민중이라는 진리를 투명하 게 반영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민족주의는 민중의 자주역량과 그 운동사적 경험을 자기의 사상으 로 정립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의 시대적, 이론적 한계다. 민족주의는 민중의 자주역량과 그 운동사적 경험을 전면적, 총제적으로 체현한 민족자주사상의 출현, 민중을 사회역사발전의 주역으 로 이끌어갈 민족자주사상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던 과도기에 사상의 미숙아로 존재했다. 분단과 예속 이 짓누른 어두운 대지 위로 민족자주사상의 아침해가 눈부시게 떠오르면 그동안 어둠 속을 비추던 민족주의의 촛불은 빛을 잃고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된다.

옛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세월동안 이 땅의 민중은 자주화의 길을 피땀으로 개 척해오는 역사적 과정, 집단적 경험 속에서 자주역량을 끊임없이 키워왔다. 이제 민중의 자주역량은 민족주의라는 작은 그릇으로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원천으로 새로운 세기의 역사 무대 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중의 자주역량은 민족주의의 껍질과 분리되어야 하며, 민족자주사상의 새로운 지 평을 향해 진보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새로운 세기의 민중은 민족자주사상을 깨우침으로써 민족의 자주화 위업을 최고 수준에서 완수할 것이다. 민족자주사상으로 무장한 민중운동은 국가주의의 민족 사적 반역성을 깨뜨리는 전투적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2000년 2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