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공산주의자 피카소의 상상력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영원한 공산주의자의 추억

팔랑헤당의 우두머리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와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1883-1945)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혁명전쟁을 잔인하게 짓누르면서 스페인 현대사를 피로 물들였다.

파시즘의 광기가 스페인을 휩쓸던 시절, 악명 높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폭압을 피해 프랑스로 떠난 망명자들 가운데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도 있었다.

망명지 파리에서 머물던 피카소는 1939년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조선이 낳은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춤공연을 관람하였다. 193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춤을 서양무대에 올렸던 최승희가 1938년의 첫 파리 공연에 이은 두 번째 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피카소는 최승희의 춤에 매료되어 그에게 자신의 그림을 선물하였다. 최승희의 춤은 피카소만이 아니라 당대 유럽 예술인들을 황홀한 경지로 이끌고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공연무대 위에서 그가 머리에 얹었던 앙증맞게 생긴 풀갓(초립)은 한때 파리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 장식물로 되었다고 한다.

파리가 나치 독일군의 점령에서 해방된 직후인 1944년 10월 피카소는 프랑스공산당(PCF)에 입당하였다.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을 나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공산당에 입당하던 날의 기억입니다. 나는 파리에서 입당했습니다.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피카소의 진솔한 고백이다.

프랑스 인민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또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이 영화배우이자 가수로서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던 때는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58년이었다. 그로써 프랑스공산당은 파블로 피카소와 이브 몽땅을 '영원한 당원'으로 받아들인 영예를 간직하였다.

피카소는 프랑스공산당 창당 30주년이 되던 1949년에 비둘기를 안고 있는 사람을 그렸다. 힘차면서도 단순한 선으로 형상화한 그 작품은 프랑스공산당 대회에 반전평화를 주제로 하여 내걸었던 선전화로 그린 것이었다. 그는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던 아이가 파시스트의 손에 학살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그 선전화를 그렸다고 한다. 피카소의 손끝에서 창조된 비둘기의 영상은 제국주의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양민학살을 단죄하는 인류의 양심 위에 평화의 상징으로 새겨졌다.

피카소는 소련정부가 주는 레닌평화상을 1950년과 1962년에 두 차례나 받았으나, 1967년에 프랑스정부가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르를 주겠다고 하였을 때는 수상을 거부하였다.

피카소가 남긴 작품을 달러로 계산하는 것에나 익숙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본주의세상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화려한 여성편력을 가진 괴상한 천재화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피카소를 영원한 공산주의자로 부르는 까닭은 그가 단지 프랑스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는 5월 1일 세계노동절에 노동자 행진대오에 동참할 만큼 정치적 실천에도 적극적이었다.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을 비난하는 광풍이 유럽대륙을 휩쓸고 지나갈 때도 공산주의에 대한 피카소의 애정과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1973년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변함없이 프랑스공산당 당원으로서 살았다.

부자지간처럼 자기와 가깝게 지냈던 프랑스공산당 당원 조르주 타바로(Georges Tabaraud)에게 언젠가 피카소는 자신이 인민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화가가 인민을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면 그가 인민과 거리를 둔 어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자신은 인민들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고백한 것이다.

2. 1937년의 게르니카, 그 이후

1937년은 제국주의의 광란이 극에 이른 해였다. 1937년 12월 일제침략자들이 중국 남경을 점령하고 30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민을 살육한 남경대학살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여덟 달 전에는 나치 독일군이 스페인의 게르니카에서 양민학살을 자행하였다.

스페인 인민의 혁명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1937년 4월 26일, 프랑코의 반혁명군을 지원하는 나치 독일군의 폭격기 편대가 스페인의 공격목표를 향해 출격하였다. 그날 인민전선정부를 지지하는 바스크 자치정부의 수도 게르니카는 나치 독일군이 세 시간 동안이나 퍼부은 무차별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사흘 동안 불길 속에 휩싸였다. 무고한 양민 1천600여 명이 무차별 폭격으로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900여 명이 피를 흘렸다.

뒷날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이 자백한 바에 따르면, 게르니카 폭격은 제국주의군대의 공중공격이 어떠한 전쟁효과를 가져오는지 실험한 것이었다고 했다.

게르니카 양민학살사건에 격노한 군중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37년 5월 1일 파리에서 일어난 세계노동절 시위투쟁에는 파시즘의 살육만행을 규탄하는 100만 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분노와 함성으로 뒤덮인 파리의 시위군중들 속에 피카소도 있었다. 그는 자기 화실 창문을 뒤흔드는 시위군중의 함성을 들으며 붓을 움켜쥐었다. 그때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 달 동안 열정적으로 매달려 마침내 완성한 대형벽화가 바로 저 유명한 대작 '게르니카(Guernica, 1937년 작)'이다. '게르니카' 속에 흐르는 것은 20세기 인류의 가슴을 대량살육의 핏물로 적신 극악한 제국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웠던 프랑스 인민의 분노이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장에 설치된 스페인관에 벽화로 내걸었던 '게르니카'에는 뿔 달린 황소가 아이를 그러안고 울부짖는 어머니를 짓밟는 영상, 앞니를 드러내고 울부짖는 말 한 마리가 땅에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 영상이 그려져 있다. 평화의 등불을 움켜쥔 여성의 팔 위에 그린 폭격의 상징은 기하학적 추상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게르니카'를 20세기 미술사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한다. 그 작품은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중앙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카소가 밤과 낮을 이어 한 달 동안 '게르니카'를 그리며 제국주의자들, 파시스트들과 맞선 격렬한 창작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영국의 저명한 사회주의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스페인 혁명전쟁의 현장으로 달려가 맑스주의 통일노동자당의 무장대에 자원입대하여 혁명의 총을 잡았으며, 점자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던 전설적인 미국인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스페인 혁명전쟁에서 싸우는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정치활동을 벌였다. 스페인 혁명전쟁에 참전한 뒤, 영국에 돌아간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1938년 작)'라는 혁명체험소설을 남겼다.

나치 독일군이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여 자행한 대량살육의 참극은 그로부터 8년 뒤 제국주의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자행한 핵참화의 대량살육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로부터 다섯 해 뒤인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조선)전쟁에서 미국군이 자행한 무차별 폭격의 참화로 이어졌고, 다시 그로부터 12년 뒤인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군이 자행한 융단폭격의 참화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역사의 심판을 받고 사라졌는데도 그들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코는 1975년에 여든 세 살로 죽을 때까지 파시즘체제의 고삐를 쥐고 스페인 인민을 짓눌렀다. 프랑코의 파시즘체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히틀러와 무쏠리니의 뒤를 이어 제국주의 미국이 그를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프랑코 정권을 남부유럽의 '자유'를 지키는 '반공의 보루'로 내세웠고 프랑코가 지배하던 스페인을 1955년에 기어이 유엔에 가입시켰다.

3. 1950년의 신천과 1980년의 광주

2002년 2월 1일 영국의 비비씨(BBC) 방송이 '타임워치'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바에 따르면, 한국(조선)전쟁 중에 미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은 자료에서 밝혀진 것만 해도 61건이나 된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당시 50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양민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산하였다.

미국군은 한(조선)반도 전역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는데, 그 가운데서도 전세계를 경악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든 사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저지른 대학살이다.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인 3만5천383명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피살자들은 남자가 1만9천149명, 여자가 1만6천24명이었다. 신천대학살은 전쟁 중 양민학살을 금지한 제네바협약이 1949년 8월에 채택된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일어난 대량살육만행이었다는 점에서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2006년 5월 18일 남(한국)의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사진영상기록보존소에 소장된 사진자료 몇 점을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신천대학살 현장을 찍은 사진이 들어있다.

1951년 5월 신천군 양민학살현장을 직접 취재하였던 국제기자단에는 영국공산당(CPGB) 기관지 '데일리 워커(The Daily Worker)'의 특파원과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떼(L'Hmanite)'의 특파원도 있었다. 열성당원이었던 피카소도 다른 당원들과 마찬가지로 당기관지에 실린 신천대학살 기사를 읽었을 것이다. 신천대학살 현장기사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피카소가 1951년에 완성한 작품이 저 유명한 '조선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피카소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 작품을 보면, 죽음의 공포에 질린 네 어머니와 네 아이들, 그들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는 파괴된 작은 집이 어렴풋이 보이고 그 언덕 아래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끌려왔을 구불구불한 길이 나있다. 그리고 집중사격 자세를 취한 중세기 철갑병사들이 여러 개의 총부리를 어머니들과 아이들에게 겨누고 있다.

"모두 쏴버려, 모두 죽여버려!(Fire on everything, Kill'em all.)" 이것은 영국 비비씨 방송에서 방영하였던 기록영상편집물에서 나온, 한국(조선)전쟁 중에 미국군 병사가 직접 들었다는 발포명령이다. '조선에서의 학살'을 바라볼 때면, 신천대학살을 명령하였던 미국 육군 중위 해리슨 매든(Harrison Madden)의 핏발 서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신천대학살이 신천군에 주둔하였던 미국군의 지휘 아래 저질러진 조직적인 전쟁범죄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미국의 제국주의세력이 피카소를 증오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정부가 취한 입국금지조치 때문에 피카소는 생전에 미국땅을 밟지 못했고, 따라서 미국군이 저지른 신천대학살을 인류의 양심에 고발하였던 작품 '조선에서의 학살'도 미국에서 전시되지 못하였다. '게르니카'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공교롭게도, 금지조치가 풀려 '조선에서의 학살'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던 때는 주한미국군사령관 존 위컴(John Wickham)의 작전지휘 아래 전두환 일당이 동원한 계엄군이 광주민중항쟁 현장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있었던 1980년이었다.

지난날 극우반공세력이 피카소라는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게 억눌렀던 서울에서는 지금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4. 정치적 상상력을 위하여

피카소는 눈으로 바라본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을 그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미술창작에 들여온 입체주의(cubism)는 사람의 눈에 비친 현실이 아니라 작가의 머리 속에 비친,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 그 자체를 형상화하는 미술사조이다.

그러나 원근화법과 명암법을 무시하면서 작품의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하는 입체주의는 사실주의(realism)를 계승, 발전시킨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어울릴 수 없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피카소가 추구하였던 입체주의를 부르주아형식주의라고 비판하고 배척하였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로 살았으나 정작 사회주의나라들이 그의 작품에 냉담한 것은 바로 그러한 예술관의 근본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는 것은, 파블로 피카소의 창작세계에 넘실대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작가 조지 오웰이 스페인 혁명전쟁의 체험에서 찾아냈던, 해방된 인민의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는 상상력이었고, 사회주의장애인활동가 헬렌 켈러가 눈과 귀와 입이 막힌 삼중고의 고통스런 현실을 넘어 끝없이 펼쳐간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생전에 피카소의 창작세계에 넘실댔던 예술적 상상력은 불행하게도 그의 정치적 실천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은 천재 화가에게서 흘러나와 화폭으로 옮겨간 것이었을 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서 솟구쳐 나와 현실로 옮겨간 정치적 상상력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피카소의 예술적 상상력이 화폭으로 통하였던 것에 비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은 언제나 사회변혁의 미래로 통한다. 사회변혁운동에 요구되는 것은 낡고 썩은 현실을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이며,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이 땅 위 곳곳에 휘날리는 진보의 깃발에 아로새겨진 것은 바로 그런 정치적 상상력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를 짓누르고 옥죄고, 자기의 피땀을 쥐어짜는 현실을 박차고 세계의 주인으로 벌컥 일어설 때, 낡고 병든 세상을 단숨에 뛰어넘는 정치적 상상력이 그들 속에서 솟구친다. 그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사회변혁의 길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와 만난다. (2006년 5월 3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