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에서 눈물의 ‘야전식사’를 함께 나눈 소년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로동신문>에 실린 김정은 제1위원장의 회고서술

북에서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발행되는 <로동신문>은 일반적인 일간지가 아니라 당보다. 당보는 단순한 사실보도를 싣는 게 아니라 북측 인민들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말한 “사상정신적 량식”을 주기 위한 글을 싣는다. <로동신문>에 실린 글들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의도에 따라 북측 인민들에게 ‘사상정신적 양식’을 주기 위해 기사화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2013년 1월 7일 <로동신문>에 실린, ‘우리가 사는 시대’라는 제목의 ‘정론’도 북측 인민들에게 ‘사상정신적 양식’을 주기 위한 글이다.

그런데 그 ‘정론’에 들어있는 특별한 내용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회상한 글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북이 1990년대에 겪은 ‘고난의 행군’은 북의 건국 이래 가장 힘든 시련이었는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처럼 혹심했던 시련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회상한 내용이 인용문 형식으로 그 ‘정론’에 담긴 것이다. 인용문은 아래와 같다.

“나는 고난의 시기 전선시찰의 강행군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장군님을 수행하면서 장군님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무한한 헌신성, 송고한 인민적 풍모를 가슴 뜨겁게 새겨 안게 되었으며 장군님의 그 강행군길에 나의 발걸음을 맞추어 나갔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과 같이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 기간 장군님을 모시고 인민들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다. 만일 후날에 력사가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은 어떻게 지냈는가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떳떳이 말해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나는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 이에 대한 증견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고난의 행군 시기를 영원히 잊을 것 같지 못하다.”

북에서 발간되는 모든 종류의 글에 최고영도자의 발언이 실리는 경우 예외 없이 “김정은 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는 인용의사를 명시한 뒤에 이중꺾쇠 인용부호를 붙이는데, 서술이 아니라 담화의 경우에는 존댓말로 표기된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회고내용은 예외적으로 인용의사도 명시되지 않았고, 이중꺾쇠 인용부호도 없으며, 존댓말로 표기되지도 않았다. 존댓말로 표기되지 않은 것을 보면, 위의 인용문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회고담화가 아니라 회고서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로동신문>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회고서술을 왜 그처럼 예외적인 형식으로 기사화하였는지 북측 외부에서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후계자로 추대되기 이전에 서술한 글을 기사화하는 경우 그런 형식으로 표기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회고서술은 후계자로 추대되기 이전에 쓴 글로 생각된다.

회고서술에서 주목하는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고난의 행군’ 시기 전 기간에 걸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선시찰을 수행하면서 당시 북측 인민들이 겪고 있었던 고생을 함께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북에 대해서는 악담과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 <조선일보>가 2013년 1월 17일 보도기사를 통해 위에 인용한 회고서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대북악담 중독증에 걸린 <조선일보>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스위스에서 “호화 유학생활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다른 반북수구언론들도 일제히 그렇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거듭된 보도사례를 돌아보면, 반북수구언론이 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과 맞지 않으며, 사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심지어 없는 일까지 날조하면서 북을 헐뜯으려는 악선전에 지나지 않았다. 위에 인용한 회고서술에 대한 반북수구언론의 주장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서의 유학생활

가끔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지도자의 사생활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법이다. 특히 북에서는 최고영도자의 ‘혁명활동’만 보도하는 것이 철칙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스위스 유학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 추대되었을 때, 남측, 미국, 일본의 수구언론매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자본주의나라들의 수구언론매체들까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스위스 유학에 관해 일제히 보도한 바 있어서, 북측 외부에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스위스에 유학하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문제는, 대북악담 중독증에 걸린 반북수구언론들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해외유학에 관해 너무 심하게 사실을 왜곡하였다는 데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스위스 연방수도인 베른(Bern)의 쾨니츠(Köniz) 지역의 리베펠트(Liebefeld)에 있는 슈타인휠츨리(Steinhölzli) 공립학교에서 3년 동안 유학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 학교에 입학한 때는 1998년 8월이다. 스위스 학제에 따르면, 새 학기는 8월에 시작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1998년 8월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 7학년(남측 학제로는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3년 동안 그 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친 뒤 2000년 가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02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입학하여 5년 학과과정을 마치고 2007년에 졸업하였고, 야전부대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 입학한 때가 1998년 8월이라는 사실은, 미카엘로(Micaelo)의 회고발언에서 확인된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Telegraph)> 2010년 9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미카엘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같은 반에서 옆자리에 앉아 함께 공부한 급우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는 1995년 1월 1일부터 1997년 12월 31일까지 3년이다. 북은 1997년 말까지 ‘고난의 행군’을 결속하였고, 1998년 1월 1일부터 2년 동안은 일종의 조정기인 ‘사회주의강행군’ 시기를 거쳤으며, 2000년 1월 1일에 발표한 공동신년사설에서 ‘사회주의강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측 인민들에게 ‘강성대국 건설구상’을 처음 밝힌 것은, 북이 ‘고난의 행군’을 결속하고 ‘사회주의강행군’을 시작하였던 1998년 8월에 있었던 일이다.

위와 같은 시기구분을 살펴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스위스에 유학하였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엉터리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북이 ‘고난의 행군’을 결속한 뒤 약 7개월이 지난 1998년 여름에 스위스로 해외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대북악담에 중독된 <조선일보>의 사실왜곡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위에 인용한 보도기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스위스에서 “호화스러운 유학생활”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 역시 왜곡이다. 아래와 같은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

스위스 연방수도 베른에는 그 도시에 장기체류하는 다른 나라 외교관 자녀들이나 주재원 자녀들이 다니는 ‘베른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가 있다. 베른의 무리 베이(Muri bei) 지역에 있는 스위스 주재 북측 대사관저에서 ‘베른 국제학교’까지 직선거리는 동쪽으로 1.3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 ‘베른 국제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북측 대사관저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가 4.1km나 떨어진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 입학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북측 대사관저에서 생활하면서 바로 옆에 있는 ‘베른 국제학교’까지 통학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먼 곳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것일까?

2013년도 ‘베른 국제학교’ 학비사정을 알아보면, 6-8학년생의 연간 학비는 1인당 27,900 달러이고, 9-12학년생의 연간 학비는 1인당 31,350 달러다. 학비 이외에 생활비까지 계산하면, 1인당 연간 50,000 달러 이상 지출할 수 있는 부유층 자녀들이나 그 ‘귀족학교’에 다닐 수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스위스 베른에서 3년 동안 국제학교가 아니라 공립학교를 다니면서 유학하였다.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공립학교는 근로대중 자녀들이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니는 서민학교이며, 특히 김정은 제1위원장이 다녔던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는 다른 나라들에서 스위스에 갓 건너온 외국인 근로자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전형적인 서민학교다. <동아일보> 2009년 6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그 공립학교 전교생 가운데 무려 45%가 외국인 자녀들이다.

또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리베펠드 키르흐슈트라쎄(Kirchstrasse) 10번지에 있는 연립주택에 방을 얻어 살면서 약 200m를 걸어서 통학하였다. GPS 위성지도로 찾아보면, 그 연립주택은 근로자들이 사는 검소한 거주공간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다닌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서 공부하였던 급우들 가운데 한 사람인 임호프(Imhof)의 회상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밤에 절대로 외출하지 않고, 파티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규율 있는 유학생활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스위스 베른에서 3년 동안 유학하는 기간 대사관저가 아니라 검소한 연립주택에 살면서 서민학교에서 공부하며 규율 있는 유학생활을 한 것은, 인민적 풍모를 지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서는 독일어로 교육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급우였던 미카엘로는 포르투갈 이민자의 아들이어서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인가 김정은 제1위원장이 거주하는 연립주택에 갔을 때, 그곳에 사는 ‘가족’들이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미 중학생 시절에 영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어 실력을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미국 <CNN> 방송 2010년 9월 28일 보도에 나온 미카엘로의 회상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중학교 유학시절에 특별히 농구와 컴퓨터를 아주 잘 했고,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텔레그라프> 2010년 9월 26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미카엘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유학생활을 할 때 북측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특히 북측 애국가를 자주 불렀다고 회상하면서, “지금도 그 노래(북측 애국가를 뜻함 - 옮긴이)를 기억하고 있다”고 취재기자에게 말했다. 얼마나 애국가를 자주 불렀으면, 외국인 급우의 기억 속에 아직까지 남아있을까. 이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먼 나라에 가서 유학하면서도 조국을 생각하는 애국심을 지니고 생활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지난 냉전시기부터 북이 서방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였다.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바로 그 통로에서 3년 동안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서, 서구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였고 외국어 실력을 쌓았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활지침은 이미 소년시절 김정은 제1위원장의 유학생활지침이기도 하였다.

최전방에서 눈물의 ‘야전식사’를 함께 나눈 소년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에 인용한 회고서술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고한 전선시찰에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었다고 술회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1995년 초부터 1997년 말까지 이어진 3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선시찰을 수행하면서 ‘고난의 행군’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북측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외부사람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그런 회고서술을 무심히 대할 수 있지만, 북에서는 그 회고서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까닭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북측 자료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인민경제 생산현장들에 대한 시찰을 뒤로 미루고 인민군 야전부대들에 대한 시찰에 집중하였다. 산짐승도 오르기 힘든 고지 위에, 바람 세찬 작은 섬 언덕에, 적진 가까운 긴장된 해안지대에 자리 잡은 야전지휘소, 경계근무초소, 전투훈련장, 병사들의 숙소와 세목장, 식당과 부식창고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찾아간 시찰대상이었다.

북측 시각에서 바라보면,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강도 전선시찰은 ‘북한 정권 붕괴’를 노리며 대북침공을 물리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미국의 선제공격위험으로부터 북을 지키고 사회주의의 미래를 수호하기 위한 실로 간고한 혁명투쟁이었다. <조선중앙통신> 2012년 12월 16일 기사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그 길은 제국주의자들과의 총포성 없는 싸움이였다.” 당시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처럼 간고한 반제혁명투쟁을 진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3년 동안 수행하였던 것이다.

둘째,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선시찰은 최전방 야전부대들을 시찰한 것이다. 그 시절로부터 퍽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북측 인민들은 철령, 초도, 오성산, 대덕산, 351고지 등 수많은 인민군 야전부대를 시찰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의 회고서술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 자신이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고 회상하면서 “이에 대한 증견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전방 야전부대들을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선시찰을 수행하였으므로 당시 최전방 야전지휘관들은 자기 부대를 찾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10대 소년시절 모습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회고서술에서 말한 증견자들이 바로 그 야전지휘관들이다.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과 인민군 야전지휘관들은 ‘고난의 행군길’에서 그렇게 상봉하였던 것이다.

그 특별한 상봉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김정은 제1위원장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움직임이 인민군대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까닭은, ‘고난의 행군’ 시기 최전방 야전지휘관들이 줴기밥(남측에서는 주먹밥)으로 ‘야전식사’를 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선시찰을 수행하던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을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였던 초강도 전선시찰은 적들과 첨예하게 대치한 최전방을 돌아보는 것이므로, 그런 전선시찰길에서 식사시간에 맞춰 대중식당에 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최전방에 대중식당이 있을 리 없으며, 더욱이 식량부족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각지의 대중식당들도 때로 문을 열지 못했거나 단축봉사를 해야 하였을 것이다.

그런 시련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택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과 함께 당시 북측 인민들이 먹었던 죽 한 공기를 아침식사로 들고 문을 나섰을 것이며, 부인이 싸드린 밥곽(남측에서는 도시락)을 야전차에 싣고 전선시찰을 떠났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회고서술에 따르면, 밥곽 안에는 줴기밥이 들어있었고, 줴기밥도 먹을 수 없는 때는 삶은 풋강냉이 한 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남측 독자들은 전선시찰 도중 줴기밥을 나누는 ‘야전식사’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야전식사’를 말해주는 북측 자료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북측 자료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시기 어느 날 동해안 쪽으로 전선시찰을 떠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점심시간에 야전차를 세우고 길가에 있는 너럭바위에 수행원들과 둘러앉았는데, 한 사람마다 줴기밥이 두 덩이씩 주어졌다. 줴기밥 두 덩이와 함께 “무오가리와 절인 오이에 까나리”가 밥반찬으로 나왔다. 무오가리는 말린 무를 잘게 썰어 무친 것으로 보이고, 절인 오이는 오이장아찌인 것으로 보이고, 까나리는 바다에서 잡은 작은 물고기다.

북측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날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나눈 ‘야전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먼 길을 떠날 때에는 줴기밥을 싸가지고 다니다가 배가 고플 때 먹곤 합니다. 밥은 줴기밥이 제일 맛있습니다. 나하구 함께 다니느라면 이제 줴기밥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줴기밥은 감도 특별한 것이 필요 없고, 만드는 데 품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급히 길을 떠나야 할 때 준비하기 쉬워서 좋고, 가다가 아무데서나 펼쳐놓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도 얼마 떼우지 않고, 현지 일군들이나 주민들에게 폐도 끼치지 않아서 좋습니다. 줴기밥은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도중식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북측 자료도 있다. 1998년 4월 15일 군사분계선에 가까운 최전방 군부대를 시찰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마침 점심시간이 되자 “변변치 못하지만 내가 싸온 점심밥도 함께 들자고 하시며 마련해가지고 오신 점심곽을 풀어놓으시였”는데, “밥곽들에는 크지 않은 줴기밥 몇 덩이와 몇 가지 나물채가 들어있었”다.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이 설마 “이런 밥곽을 싸가지고 다니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군부대 지휘관들은 “왈칵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울음을 삼키는 군인들 앞에 밥곽을 밀어놓으시며 어서들 들라고, 그래야 나도 먹을 게 아닌가고 하시면서 오늘은 뜻깊은 명절날이니 한 잔씩 들자고 하시며 축배도 부어주시였다”고 한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야전부대 지휘관들이 눈물 속에서 나누던 ‘야전식사’ 현장에서 함께 줴기밥을 들었던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런 눈물 어린 체험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으로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에 인용한 회고서술에서 “나는 앞으로도 고난의 행군 시기를 영원히 잊을 것 같지 못하다”고 술회하였던 것이다.

‘일심단결 운명공동체’로부터 받아 안은 사상정신적 양식

북의 최고영도자가 ‘고난의 행군’ 시기를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문제는, 북에서 매우 중대한 정치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북측 시각에서 바라볼 때, 최고영도자는 자기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혁명활동을 통해서, 그런 간고한 투쟁 속에서 ‘일심단결 운명공동체’로 상호결합되고, 그런 운명공동체 안에서 최고영도자로 추대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북에서 말하는 ‘혁명적 수령관’의 핵심내용이다.

북에서 간행된 역사자료를 읽어보면, 김일성 주석은 1930년대 항일혁명기에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혁명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인민들과 ‘일심단결 운명공동체’로 결합되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25 전쟁시기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잿더미로 변한 평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1950년대 후반 전후복구기에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혁명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인민들과 ‘일심단결 운명공동체’로 결합되었다. 당시 소년기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들과 함께 전후복구의 구슬땀을 흘린 노동현장들이 숱하게 많지만, 그 가운데서 소년기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가한 대규모 건설공사만 손꼽으면 1958년에 있었던 평양시 2만 세대 살림집 건설을 위한 경상골 부재생산 전투와 해주-하성 광궤철도 부설공사, 그리고 1958년과 1959년에 있었던 대동강 호안 공사 등이다.

북측 시각에서 바라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북의 건국 이래 가장 혹심한 시련이었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미 소년기에 혁명활동에 동참하면서 ‘일심단결 운명공동체’ 속에 들어선 것으로 된다. 만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지 않고 호의호식하였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을 최고영도자로 추대한 것과 ‘혁명적 수령관’은 서로 합치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고난의 행군’ 3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고한 전선시찰을 수행하면서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혁명적 수령관’에 의거하여 후계자로 추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하여 북에서 후계자가 단지 혈연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북의 혁명적 후계추대를 봉건국가의 혈연적 세습책봉으로 단정해버린 북측 외부의 주장이 왜 이치에 맞지 않는지를 알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고한 전선시찰을 3년 동안 수행한 경험은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김정은 제1위원장의 세계관 및 인생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북측 시각에서 바라보면, 최고사령관과 야전지휘관들이 최전방에서 함께 나누던 그 눈물의 줴기밥은 소년기의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일심단결 운명공동체’로부터 받아 안은 사상정신적 양식이었다. (자주민보 2013년 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