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 미사일을 초고속으로 만들어낸 비결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위성운반로켓이 백두산 계열에서 은하 계열로 바뀐 사연

2012년 12월 6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 나타난 태평양사령관이며 해군제독인 새뮤얼 락클리어 3세(Samuel J. Locklear III)는 국방부 출입기자단에게 북이 현재 준비 중인 위성 발사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측 지도부의 현재 행동이 한반도와 아시아의 전반적인 안보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고려해주기 권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지역만이 아니라 국제안보환경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이 발언은 북의 위성 발사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동일시하는 미국의 견해를 되풀이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요한 사실을 고의로 은폐하면서 북의 위성 발사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고 우기고 있다. 미국이 고의로 은폐한 것은, 북이 이미 오래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고, 지금은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위성운반로켓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우주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북이 위성운반로켓을 백두산 계열에서 은하 계열로 교체하였다는 데 있다. 북은 백두산 1호라는 이름의 위성운반로켓에 시험위성 광명성 1호를 실어 1998년 8월 31일에 쏘아올렸다. 위성운반로켓 백두산 1호는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설계기술로 만든 것이었다.

위성운반로켓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모든 나라들이 장거리 미사일 설계기술로 위성운반로켓을 만드는 초기개발단계를 거치는 법이다. 북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초기개발단계를 거쳤다. 그런데 만일 북이 15년이 지난 오늘에도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쏘아올린다면, 북의 위성 발사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북이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북은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과는 전혀 다른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쏘아올리고 있다.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은 외형부터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북이 2009년 4월 5일에 두 번째로 쏘아올린 위성운반로켓에 백두산 2호가 아니라 은하 2호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인 것은, 단순히 명칭을 바꾼 것만이 아니라, 그 두 번째 위성운반로켓이 8년 전에 쏘아올린 첫 번째 위성운반로켓과는 전혀 다른 계열에 속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올해 북이 두 차례나 은하 3호를 쏘아올리면서 이전에 있었던 시험위성이 아니라 지구관측위성을 탑재한 것은 우주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백두산 1호를 개발하였던 때로부터 그 티를 완전히 벗은 은하 계열의 신형 위성운반로켓을 개발하기까지 약 10년이 걸렸다. 북에서 그 10년은 위성운반로켓 제작기술의 비군사화를 실현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가리켜 위성운반로켓으로 위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우겨대는 미국의 생억지를 반박하려면, 북의 미사일 개발사에 대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북의 미사일 개발사는 북이 이미 오래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그것을 실전배치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위성운반로켓으로 위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중국이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을 받아들인 사연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김일성 주석은 오진우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을 대동하고 중국을 공식방문하였다. 14년 만의 중국 방문이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부설 국제안보 및 군비통제 센터(CISAC)가 발간하는 <국제안보> 1992년 가을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당시 중국 방문 중에 탄도미사일 공동개발을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그 제안에 즉각 응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중국은 북의 미사일 기술수준을 자기들보다 한 수 낮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과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으로서는 북의 제안을 냉정히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1970년대 북과 중국의 미사일 기술수준은 실제로 어떠하였을까? 북은 1973년에 소련에서 미사일 SSC-2B 여섯 기를 도입하였는데, 이 미사일은 탄두무게가 600kg, 사거리가 90km이며, 전파유도항법장치로 날아간다. 북은 이 소련제 미사일을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1974년에 마침내 미사일 생산국이 되었다.

<뉴욕 타임스> 1970년 11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분석가들은 중국이 핵탄두를 탑재하고 1,600km를 날아가는 준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마쳤고, 1970년 말 현재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였다. <뉴욕 타임스> 1971년 8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중국이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마쳤다고 한다. 또한 1975년 4월 14일에 발간된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중국이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을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실어놓은 것을 항공정찰을 통해 포착하였다고 한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당시 북은 사거리 90km의 단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는데 비해, 중국은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북과 중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기술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당시 중국은 북보다 무려 26배나 앞서 있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중국이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년 반이나 시간을 끌며 응답을 하지 않던 중국이 1976년 말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을 받아들였다. 1년 반이나 시간을 끌던 중국은 왜 1976년 말에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에 응하였을까? 너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관련정보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주의 깊게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내막을 엿볼 수 있다.

1970년 대 중반부터 중국은 자기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제기된 기술적 난제를 해결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1973년 7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및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소속 관리들은 중국이 핵무기 개발사업에서는 급속한 진전을 보고 있지만, 그 운반수단인 미사일을 개발하는 사업에서는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미국의 항공우주전문지 <주간 항공과 우주공학(Aviation Weekly and Space Technology)> 1975년 10월 12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은 2단형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서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주간 항공과 우주공학> 1976년 10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중국의 미사일 개발사업은 미국 정보기관이 이전에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급속히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의 경제적 한계와 기술적 제한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고 하였다. <워싱턴 포스트> 1977년 8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은 중국이 가까운 장래에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할 만큼 미사일 개발의 진척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중국의 미사일 능력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험악한 갈등을 빚고 있었으므로 중국은 미사일 기술수준에서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소련으로부터 관련기술을 도입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중국은 소련이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 발전된 미사일 설계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에게 정치군사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미사일 설계기술을 넘겨줄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1976년 어느 날, 중국은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북이 신형 미사일 설계기술을 확보하였다는 정보였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중동전쟁에서 참패하여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이집트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시리아는 영토수복전쟁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는 소련 군사지원단으로부터 배운 엉성한 소련식 전법을 가지고서는 강적 이스라엘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영토수복전쟁을 준비하면서도 고심해오던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동방의 어느 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집트의 나쎄르 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싸드 대통령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고 그 두 나라에 인민군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군사지원단을 파견해주었다. 파견된 인민군 군사지원단은 강적 이스라엘을 제압할 기상천외한 ‘주체전법’을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에 전수해주었을 뿐 아니라, 영토수복전쟁이 개시되자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기습편대를 편성하여 직접 미그 전투기를 몰고 초저공 기습침투비행으로 이스라엘 공군기지를 급습하였고 최전방에 출격하여 이스라엘 공군기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그 전쟁에서 기상천외한 초저공 기습침투비행과 놀라운 공중전 기술로 이스라엘 공군을 격파한 인민군 기습편대를 이끈 전쟁영웅이 바로 젊은 시절의 전투비행사 조명록 차수다.

전쟁 직후, 북의 전폭적인 지원에 감동한 나쎄르 대통령은 소련이 이집트에 제공해주면서 제3국에 절대로 넘겨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소련제 탄도미사일 스커드-B 두 기와 그 미사일을 탑재하는 4축8륜 발사차량 MAZ 543 두 대를 소련 몰래 북에 보냈다. 북은 그 소련제 미사일 두 기를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신형 미사일 설계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북의 미사일 능력을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데 앞장선 자칭 미사일 전문가 로벗 쉬무커(Robert H. Schmucker)는 1999년 6월 스코틀란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제12차 미사일 방어 다국적 회의에 제출한 글 ‘제3세계 미사일 개발: 유엔특별위 경험과 자료평가에 기초한 새로운 평가’에서 북의 미사일 개발경험과 소련, 중국, 이라크의 미사일 개발경험을 비교하면서, 북의 미사일 개발기간이 매우 짧고 미사일 시험발사도 매우 적게 실시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대북혐오감에 사로잡힌 그의 두뇌로 북의 미사일 개발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쉬무커의 지적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는 기간은 7년에서 10년이 걸리고, 실전배치하기 전에 세 차례에서 일곱 차례 시험발사를 실시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미사일을 도입하여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미사일을 모방생산하는 경우에도, 미사일 생산국으로부터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으며 20기에서 50기에 이르는 견본 미사일을 도입하여 분해-역설계하고, 여러 차례 시험발사를 실시한다.

그런데 북은 스커드-B 생산국인 소련으로부터 기술지원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이집트가 소련 몰래 넘겨준 단 두 기의 견본 미사일을 자력으로 분해하고 역설계하고, 불과 몇 해만에 초고속으로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다른 나라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북의 미사일 개발 성공의 비결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사일 공업부문의 과학자들, 기술자들, 노동자들을 자력갱생과 일심단결과 헌신분투의 길로 이끈 특별한 성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개발을 포기한 둥펑 61, 북이 개발에 성공한 화성 6호

북의 미사일 기술자들이 스커드-B 설계도를 들고 중국에 가서 중국의 미사일 기술자들과 함께 신형 미사일 개발에 달라붙었다. 1976년 말부터 북과 중국이 공동개발을 추진하였던 그 미사일은 길이 11m, 탄두무게 1t, 사거리 600km이며,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하는 단거리 미사일이었다.

북중 미사일 공동개발사업은 약 2년 간 지속되다가 당시 중국 내부에 복잡하게 조성된 정치상황 때문에 1978년 말에 중단되었다. 2년 동안 북과 중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신형 미사일의 완성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북과 중국이 적극 협력하면서 밀고나갔으므로 상당한 진척을 보았을 것이다.  

중국이 자기 내부 정치사정으로 북과 추진해오던 미사일 공동개발을 중지하였지만, 북과 중국은 공동개발사업을 중단한 이후에도 각자 단독으로 미사일 개발을 계속 추진하였다. <뉴욕 타임스> 1979년 7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에서 송출되는 중국 라디오 방송은 중국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나온 자료들에 따르면, 당시 북과 중국이 미완으로 끝낸 공동개발에서 설계된 신형 미사일 명칭은 ‘둥펑(東風) 61’이다. 공동개발이었으므로, 중국이 중국식 명칭을 붙인 것에 상응해서 북도 당연히 조선식 명칭을 붙였을 것인데, 북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 전문가들은 조선식 미사일 명칭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981년에 북이 개발한 미사일의 명칭이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를 도는 붉은 별의 이름을 따서 화성(火星)으로 붙여졌다는 사실이 북측 외부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퍽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는데, 오만하고 무식한 미국 전문가들은 화성이라는 고유명칭이 알려진 뒤에도 여전히 ‘스커드’라는 소련식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고집으로만 볼 게 아니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이 미사일 기술을 자체로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고, 소련의 미사일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미련한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북이 1981년에 개발한 화성 미사일은 1976년 말부터 약 2년 동안 북이 중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었던 탄도미사일의 탄두무게를 1,000kg에서 800kg으로 줄이는 대신, 사거리를 600km에서 800km로 늘인 것이다. 이 신형 미사일이 바로 화성 6호다.  

북의 미사일 능력을 축소하기 좋아하는 미국 전문가들은 화성 6호를 화성 5호와 헷갈렸다. 어떤 전문가는 북이 소련제 미사일 스커드-B를 개량하여 1985년에 화성 6호를 만들었는데, 사거리가 320km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런 주장은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면 착오다.

북이 화성 6호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들은 나라들이 평양에 대표단을 보내 구입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1983년 4월 5일 당시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는 북을 공식방문하여 화성 6호를 구입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9월 6일에는 국방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이집트 군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또한 1983년 10월 23일 이란 국무총리 루홀라 무사비(Ruhollah Musavi)와 국방장관 모하메드 할리미(Mohammed Salimi)도 이집트에 이어 북을 공식방문하고 화성 6호 구입계약을 체결하였다. 북은 이란에 화성 6호 120기와 발사차량 20대를 수출하였고, 나중에는 화성 6호 생산시설을 수출하고 기술진을 파견하여 현지에 생산공장까지 세워주었다. 북에서 건설해준 이란의 화성 6호 생산시설에서 만들어낸 미사일이 샤합(Shahab) 2호인데, 화성 6호에 비교하여 탄두무게를 800kg에서 990kg으로 늘인 대신, 사거리는 800km에서 750km로 줄였다.

이처럼 북은 화성 6호를 이집트와 이란에 대량 수출하였을 뿐 아니라, 쿠바, 민주콩고, 시리아, 미얀마, 리비아, 베트남, 예맨, 에디오피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에도 수출하였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이 화성 6호 1,000기를 생산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북이 1981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동안 생산한 화성 6호가 1,000기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북, 마침내 화성 미사일을 발사하다

<서울신문> 1991년 12월 7일 보도에 따르면, 그 해 가을 북과 중국이 공동개발한 미사일을 중국 닝샤후이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시험발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과 중국은 미사일 공동개발을 1978년 말에 중단한 이후 미사일 공동개발을 재개한 적이 없으므로, 1991년에 중국에서 시험발사된 미사일을 두 나라가 공동으로 개발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오보였다. 명백하게도, 그 미사일은 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데, 북은 자기의 미사일 개발에 관한 정보가 미국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국의 동의를 얻어 중국에서 시험발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신형 미사일이 어떤 미사일이었는지는 그로부터 1년 9개월 정도가 지난 1993년 5월 말에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언론인 데이빗 생어(David E. Sanger)가 1993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에 쓴 보도기사에 매우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있다. 그 기사는 1993년 5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북이 발사한 미사일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데이빗 생어가 일본 정부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북의 미사일 발사지점을 강원도 원산 부근 미사일 기지라고 쓴 것은 착오였고, 실제는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 해안에서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한 미사일을 동해 쪽으로 쏜 것이었다.

데이빗 생어는 그 기사에서 북이 일본 열도의 동해 쪽에 있는 노토반도(能登半島) 쪽으로 미사일을 쏘았다고만 하였으나, 실상은 노토반도 쪽으로 날아간 그 미사일이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표적에 명중하였던 것이다. 북이 발사한 미사일이 부표표적에 명중하였다는 사실은, 1991년 10월 4일 <연합뉴스>에 보도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서동권의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북은 미사일 탄착상황을 관측하기 위해 노토반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해상에 라진급 프리깃함 한 척과 소해정 한 척을 서로 30km 거리를 두고 배치하였다.

데이빗 생어는 그 기사에서 북이 노토반도 쪽으로 발사한 미사일의 사거리를 1,000km로 추정하면서, 실제는 500km밖에 날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가 보도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북이 무수단 해안에서 쏜 미사일이 500km를 날아갔다면, 그 미사일은 노토반도를 넘어가서 도야마만(富山灣) 한 복판에 떨어졌을 것이지만, 북의 프리깃함이 일본 영해 안으로 들어가 부표표적을 설치할 리는 없으므로 실제 탄착점은 노토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떨어진 해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동해의 폭이 좁으므로, 북은 미사일 사거리를 일부러 500km로 줄여 쏘았다.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표적이 크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북이 쏜 미사일이 500km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맞춘 것은 명중률이 매우 높은 미사일을 쏘았음을 말해준다. 특히 그 미사일은 탄도비행 마지막 단계에서 탄두가 동체에서 분리되어 초고속으로 낙하하였는데, 탄두와 동체의 상호분리가 미사일 항법기능을 더욱 높여주어 명중률을 끌어올린 요인으로 되었다.

데이빗 생어의 지적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미사일은 무게 1t짜리 육중한 탄두를 싣고 1,300km를 날아갈 수 있다. 탄두무게가 1t이라는 것은 고폭탄두나 화학탄두는 물론이고 더 중요하게는 핵탄두까지 실을 수 있음을 뜻한다. 북이 1993년 5월 29일에 발사한 명중률이 매우 높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그 준중거리 미사일이 바로 화성 7호다. 미국은 화성 7호를 로동 1호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북이 화성 7호 미사일을 발사하여 500km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명중시키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왜냐하면 사거리가 1,300km인 화성 7호는 일본 열도를 타격권 안에 넣고 있을 뿐 아니라, 저 멀리 북으로는 호카이도에서 남으로는 오키나와까지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이 일본 전역을 타격할 미사일 공격력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북의 화성 7호 발사를 보고 일본 방위청(당시 명칭)은 “매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화성 7호의 충격에 휩싸인 일본은 자기의 보호자인 미국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93년 8월 2일 일본 방위청 사무차관 하타케야마 시게루(畑山蕃)는 미국 국방부 정책담당 부장관 프랭크 와이즈너(Frank Wisner)와 회담을 갖고 화성 7호에 대처하기 위한 미일 공동위원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일본 방위청은 북의 미사일 발사를 감시할 정찰위성을 개발하는 비공개 연구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북의 화성 7호 발사는 새로 개발한 미사일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미사일을 수입하려는 나라들에게 실제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발사였다. 이에 대해서는 1993년 8월 15일 <워싱턴 타임스>가 보도한 주한미국군사령관 출신 로벗 리스카시(Robert RisCassi)의 발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물론 북이 화성 7호 미사일을 발사한 목적이 미사일 수입국들에게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고, 미국을 압박하여 북미 양자회담에 끌어내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정치적 목적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발사 당일 현장에서는 이란의 미사일 전문가들과 파키스탄의 미사일 전문가들이 화성 7호 미사일 발사를 참관하였다. 1993년 7월 14일 일본 언론은 이란 정부 대표단이 이미 1993년 4월에 방북하여 화성 7호 미사일 150기를 수입하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고 보도하였다. 다른 한 편, 1993년 12월에는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북을 공식방문하였다. 그녀의 방북 역시 화성 7호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2010년 3월 29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이상한 핵실험과 핵확산 재개’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이란이 북으로부터 화성 7호를 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파악한 이스라엘은 발칵 뒤집혔다. 왜냐하면 이란이 화성 7호로 무장하는 날, 이스라엘은 심각한 미사일 피격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의 화성 7호가 이란에 들어가는 것을 차단해야 할 절박한 요구를 느낀 이스라엘은 1993년 6월 14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 쉬몬 페레스(Shimon Peres)의 방북의사를 밝혔고, 6월 25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부 부총국장 에이탄 벤트수르(Eitan Bentsur)는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관리를 만나 이란에 화성 7호를 수출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중동문제에 관해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그처럼 민감한 협상현안이 해결될 리 만무하였다. 1993년 8월 16일 이스라엘 총리 이작 라빈(Yitzhak Rabin)은 중동지역에 미사일을 수출하려는 북과의 협상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화성 7호는 이란으로 가서 샤합(Shahab) 3호가 되었고, 파키스탄으로 가서 가우리(Ghauri) 2호가 되었고, 시리아에서도 면허생산되었다.

두 종류의 화성 미사일을 더 쏘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력적인 지도로 추진된 북의 국방공업 강화사업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실무적으로 집행하였던 김광진 차수(당시 직책은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는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이 북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말을 1990년 10월에 남긴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12년 9월 17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제4핵강국의 조용한 등장 알려주는 사진’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위의 정보에 따르면, 북의 화성 7호가 일본 노토반도 앞바다에 떠있는 부표표적을 맞춘 놀라운 미사일 정밀도를 과시하였던 1993년 5월 말 현재 북은 사거리 1,3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 화성 7호 이외에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도 생산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의 관련보도에 따르면, 북이 1993년 5월 29일 화성 7호 한 기를 발사한 뒤, 이튿날에는 다른 종류의 미사일 두 기를 더 쏘았는데, 이튿날에 쏜 미사일 두 기는 100km 정도 날아간 단거리 미사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보도는 사실과 다른 엉터리 보도다. 1993년 5월 30일 북이 두 번째로 쏜 미사일 두 기는 화성 8호와 화성 9호였다. 화성 8호는 사거리 2,0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이고, 화성 9호는 사거리 4,000km의 중거리 미사일이다.

북은 화성 8호를 남쪽으로, 화성 9호를 동쪽으로 각각 쏘았다. 화성 8호는 무수단에서 동중국해를 넘어 서태평양의 미국 영토인 괌(Guam)으로 날아가, 괌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서태평양 해상에 떨어졌다. 다시 말해서, 무수단에서 괌까지 거리가 2,100km이므로, 화성 8호는 괌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서태평양에 탄착한 것이다.

화성 9호는 무수단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을 넘어, 북태평양의 미국 영토 미드웨이제도(Midway Islands)를 넘어, 하와이 쪽으로 날아가다가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에서 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해상에 탄착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수단에서 하와이 진주항까지 거리가 4,400km이므로, 화성 9호는 하와이 가까이 날아간 것이다.

일본은 화성 8호와 화성 9호가 자기들 머리 위로 넘어가 서태평양과 북태평양 한 복판에 각각 떨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노토반도 쪽으로 날아간 화성 7호만 보고 깜짝 놀라 소동을 피우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성 8호와 화성 9호를 보고 경악과 충격을 겪은 쪽은 미국이었다. 북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기들의 태평양 전략거점들인 괌과 하와이가 화성 8호와 화성 9호의 타격권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성 8호와 화성 9호의 충격을 겪은 미국은 1993년 6월 2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진행된 북미 양자회담에 끌려 나갔으며, 그 회담에서 미국이 북의 주권을 존중하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내용으로 된 북미 공동성명을 사상 처음으로 채택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적국의 무력압박을 견디지 못해 적국이 요구한 양자회담에 끌려 나가 적국이 요구하는 내용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해준 것은 미국이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였음을 말해준다. 1993년의 북미관계가 잘 말해주는 것처럼, 북의 미사일 개발사는 미국과의 격렬한 무력대결에서 이긴 북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킨 역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북은 미국으로부터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마지막 정치적 굴복을 받아내려는 반미대결전 준비를 완료한 것이다. (자주민보 2012년 1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