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최고영도자의 판문점 시찰과 미국 대통령의 관측초소 방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오바마 대통령은 관측초소에서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백악관 누리집의 백악관 홍보실 공식사진 게시란에 올라있는 현장사진 두 장이 눈길을 끈다. 2012년 3월 25일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미국 대통령이 군사분계선(MDL) 부근에 있는 오울렛 관측초소(Observation Post Ouellette)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 공동경비구역 보안대대 대대장인 미국군 중령 엣 테일러(Ed Talyor)로부터 해설을 들으며 북측을 바라보는 사진이 있고, 쌍안경으로 북측을 바라보는 사진이 있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 날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한 오울렛 관측초소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91m밖에 떨어지지 않은 최전선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관측초소에서 바라보면 군사분계선 너머 인민군 경비초소의 움직임까지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오울렛 관측초소에 관해 알지 못하는 독자들이 그런 보도기사를 읽으면, 오바마 대통령이 적진 바로 앞에까지 나아가서 적정을 살필 만큼 담력이 센 사람이구나 하고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오울렛 관측초소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나면, 그런 상상은 일종의 이미지 조작에 놀아나는 꼴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우선 오울렛 관측초소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위성사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위성사진에 나타난 오울렛 관측초소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800m 정도 떨어진 수림지대의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과 오울렛 관측초소 중간지점에서 약간 아래쪽에는 이전에 스위스와 스웨덴의 중립국감시단이 주재하였던 구역이 있다.

관측초소라는 명칭이 주는 직감적인 말느낌 때문에, 오울렛 관측초소가 전초병 몇 명이 보초를 서는 조그만 전방초소이겠거니 하고 상상하기 쉽지만, 위성사진에 나타난 그 관측초소는 지름이 약 400m 정도나 되는 커다란 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한 소형 군사기지로 보인다. 방호벽으로 둘러싸인 오울렛 관측초소를 들고나는 출입통로는 남쪽으로 하나만 나있을 뿐인데, 관측초소 안에는 건물이 네 동이나 들어서 있고, 지하갱도 입구들이 보인다. 방호벽으로 둘러싸인 군사기지 한 복판에 높다란 전망대를 쌓아놓았는데, 바로 그 곳에 오바마 대통령이 올라간 것이다.

오울렛 관측초소로부터 군사분계선까지 거리가 91m밖에 되지 않는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는, 오바마 대통령이 올라간 전망대에서 군사분계선까지 거리를 지적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라 지름이 약 400m 정도인 오울렛 관측초소의 최북단에 있는 방호벽으로부터 군사분계선까지 거리가 91m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이 올라간 전망대로부터 군사분계선까지 거리는 약 300m가 된다.

전망대 둘레에는 위장막을 뒤집어씌운 모래주머니를 어른 허리춤 높이로 쌓아올렸다. 그런데도 백악관 경호실은 두께 5cm짜리 키높은 방탄유리 세 쪽을 병풍처럼 ㄷ자형으로 이어붙인 커다란 이동식 방탄장비를 미국에서 공수하여 그 전망대에 설치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전망대에서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오울렛 관측초소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그 관측초소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 구역을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묘한 각도에 있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은 그 관측초소 중앙부에 있는 전망대에서 판문각 뒤쪽을 쌍안경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뉴욕 타임스> 2012년 3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자기에게 현장 지형지물을 해설해주기 위해 나온 미국군 대대장에게 군사분계선이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고, 군사분계선 가까운 곳에 있는 북측의 기정동 마을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미국군 소식지 <성조> 2012년 3월 25일 보도기사도 오바마 대통령이 동행한 미국군 대대장에게 묻기만 하였다고 썼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Ronald W. Reagan) 대통령이 오울렛 관측초소 전망대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조지 H. W. 부쉬(George H. W. Bush) 대통령이, 1993년에는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대통령이, 2002년에는 조지 W. 부쉬(George W. Bush) 대통령이 그 전망대에 올랐다. 만일 오바마 대통령이 1983년 이후 근 30년 동안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찾아갔던 ‘유서 깊은 장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것은 미국인들에게 실망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 전망대에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서부전선 최전방을 방문했던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이번에 오바마 대통령도 인민군 병사들이 오가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그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관측초소에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레이건, 아버지 부쉬, 클린턴, 아들 부쉬로 4대째 이어진 미국 대통령들은 그 전망대에 올라가서 한결같이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 북측을 자극하는 도발적 발언을 늘어놓은 바 있다. 그런데 유다르게도 오바마 대통령은 그 전망대에서 미국군 대대장에게 몇 마디 물어보고 그의 해설을 묵묵히 듣기만 하였을 뿐 정치적 발언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전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그는 북측이 미국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명성 3호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준비를 갖추고 있는 민감한 국면에 그 전망대에 올랐으면서도 세간의 예상과 달리 정치적 발언을 자제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그러한 태도는 그가 발언에서 신중을 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북측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바마 대통령은 북측을 자극하는 도발적 발언으로 2.24 베이징 합의를 깨는 어리석은 짓을 피했던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 전망대에 올라 정치적 발언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내려왔다면, 그 바쁜 일정 중에 수많은 경호인력, 전용헬기, 방탄장비까지 동원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왜 전망대에 올라간 것일까?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남측을 방문한 것이 이번에 세 번째인데, 이전에는 군사분계선 방문을 생각하지 않다가 왜 임기 마지막을 앞두고 군사분계선을 찾아간 것일까?

그렇게 된 까닭은 앞으로 7개월 뒤인 11월 6일 미국에서 실시될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기의 재선을 바라는 고정지지표만 가지고서는 재선에 성공하기 어렵고, 표심을 아직 정하지 못한 유동표를 공화당 대선후보에게 빼앗기지 않고 상당부분 흡수해야 재선에 성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미국이 지켜주는 자유전선 최전방’까지 직접 찾아가 북측을 살피는 인상 깊은 장면을 연출하여 유동층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둘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선표밭을 움직이는 유동층 유권자들은 ‘미국이 지켜주는 자유전선 최전방’에서 쌍안경으로 북측을 살피는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였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유엔군사령부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 주둔지인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에서 미국군 병사들에게 즉석연설까지 하고 병사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지만, 백악관 공식사진게시판에 캠프 보니파스 방문사진은 한 장도 게시되지 않고 오울렛 관측초소 방문사진만 게시된 것은, 그의 관측초소 방문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오바마 대통령의 오울렛 관측초소 방문은 자기의 재선을 위해 연출한 사전득표활동이었던 것이다.

1996년 11월 24일과 2012년 3월 2일

백악관이 오바마 대통령의 군사분계선 방문계획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한 때는 2012년 3월 13일 오전(미국 동부지역 시간대)이었다. 그 날 제이 카니(Jay Carney) 백악관 부대변인은 “대통령의 군사분계선 방문은 한반도를 지키고, 북측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언론매체들이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소식을 전한 2012년 3월 3일로부터 꼭 열흘 뒤에 백악관이 오바마 대통령의 군사분계선 방문계획을 공개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북측과 미국이 아직 종전을 하지 못한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한 상호대치상태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바마 대통령의 오울렛 관측초소 방문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에 대응하는 성격을 띄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나온 백악관 부대변인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백악관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다. 상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대응하였으니, 제대로 대응하였을 리 만무하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판문점을 시찰한 때로부터 15년 4개월만에 그곳을 시찰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6년 11월 24일 판문점을 시찰하였는데, 그 날의 판문점 시찰은 1972년 7월에 처음으로 판문점을 시찰한 이후 네 번째로 되는 판문점 시찰이었다. 북측 자료에 따르면, 1996년 1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판문점을 시찰하려고 하자 최고영도자의 신변안전을 우려한 측근들은 판문점 시찰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간곡히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러면 조국통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나에게 가기 힘들고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계속 두 개의 조선으로 놔두자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판문점 시찰은 꼭 해야 합니다. 지금 정세가 긴장하기 때문에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 군인들에게 신심을 주어야 합니다. 나보다 동무들이 더 힘들겠지만 우리 함께 이겨냅시다”고 말하고, 판문점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1996년 11월 24일은 북측 인민들이 휴식하는 일요일이었다.

남측에서나 북측에서나 판문점은 분단의 현실과 통일의 미래를 누구나 직관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인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분단의 원한이 서린 판문점을 조국통일의지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개변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친필비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세운 것은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친필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기와 지도에 의하여 광복 50주년을 앞둔 1995년 8월 11일 판문점 북측 구역에 있는 통일각 옆에 건립되었다. 세상에 알려진대로, 친필비에는 김일성 주석이 활달한 글씨체로 쓴 ‘김일성’이라는 세 글자와 ‘1994.7.7’이라는 다섯 개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아홉글자는 김일성 주석이 병환으로 뜻밖에 급서하기 직전 조국통일문제에 관련된 부피 두꺼운 문건에 남긴 마지막 비준서명이었다. 그 문건이 어떤 내용인지 알려진 바 없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그 문건을 통일유훈으로 삼고 통일유훈관철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1996년 11월 24일 짙은 안개가 감도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판문점에 도착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가장 먼저 친필비부터 찾았고, 그리고 판문각 노대(balcony)에 나가 남측을 살펴본 다음 또 다시 친필비를 찾았다. 북측 기록에 따르면, 그곳을 떠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몇 걸음 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친필비를 다시 돌아보고 또 다시 몇 걸음 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친필비를 다시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얼마나 간절한 심정이었으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그렇게 돌려야 하였을까!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오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병환으로 뜻밖에 급서하였으니, 조국통일유훈 관철임무는 이제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계승하였다. 북측 시각으로 보면, 만경대 혁명가문은 조국통일위업 수행임무를 3대에 걸쳐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2012년 3월 2일에 있었던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은 만경대 혁명가문에 3대째 계승되어온 조국통일위업 수행임무를 성취하려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의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96년 11월 24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판문점 시찰에 따라나선 동행자는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김봉률 인민군 차수 그리고 인민군 대장들인 현철해, 박재경, 김명국, 원응희 6명이었는데 비해, 이번에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에 따라나선 동행자는 북측 언론에서 실명을 밝힌 사람만 해도 11명이며,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동행자들과 함께 친필비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동행자가 18명이나 보인다. 이례적으로 그처럼 많은 고위간부진을 대동한 판문점 시찰에서 조국통일위업을 성취하려는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강한 정치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2009년 12월 9일에서 2013년의 미래에로

판문점 북측 구역에는 정전담판회의장과 정전협정조인장이 있다. 이 역사적인 장소들은 이 땅에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실물로 증언하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를 향한 민족의 염원과 갈망을 웅변하고 있다.

1996년 11월 2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판문점을 시찰하면서 정전담판회의장과 정전협정조인장을 돌아보았을 당시에 펼쳐진 한반도 정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6년 1월 11일 미국 하와이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미 미국군 유해발굴회담이 열렸고, 2월 22일에는 북측 외교부(당시 명칭)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에게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북미 잠정협정부터 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을 받을 수 없었던 미국은 1996년 4월 16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을 북측에 역제안하였다. 그러자 북측은 1996년 11월 9일 판문점 북측 연락사무소를 폐쇄하면서 미국을 압박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바로 그런 긴박한 정세 속에서 판문점을 시찰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읽으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은 1996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북미 사이에 미국군 유해발굴회담이 열린 변화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려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선언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2.24 베이징 합의가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던 2012년 2월 29일 직후에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2년 2월 29일 북측이 발표한 북미 합의사항들 가운데 첫 번째 합의사항은 “조미 쌍방은 (줄임)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정전협정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초석으로 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2012년 3월 5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글 ‘2.24 합의는 평화실현 앞당길 불멸의 이정표’에서 북측이 사멸된 정전협정을 재생시킨 것만이 아니라, 재생시킨 정전협정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초석으로 삼고, 그 초석 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런 해석의 연장선에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판문점 시찰과 2.24 베이징 합의를 상호연결하는 의미맥락을 다시 읽으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24 베이징 합의에 명시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판문점 시찰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다시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복수의 남측 정부 소식통들이 전한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09년 1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스티븐 보스워즈(Stephen W. Bosworth) 당시 오바마 대통령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북측이 미국에게 6자회담이 재개되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4자회담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하였고 미국이 그 제안에 ‘공감’하였다는 것이다. 2009년 12월 9일 평양에서 있었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당시 직책)과 보스워즈 특사의 회동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되었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그 친서에서 북측이 비핵화에 나설 경우,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완전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런 맥락을 상기하면, 2.24 베이징 합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4자 평화회담 개최 제안과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합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올해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한반도 평화정책을 계승한 대선후보가 승리하고, 중국에서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하면, 2009년 12월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안하였던 한반도 4자 평화회담이 2013년에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미국과 남측의 대선판세가 매우 유동적이어서 4자 정상들이 만나는 평화회담 개최여부를 확언하기는 이르지만, 4자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미래의 현실은 상상만해도 감동적이지 아니한가! (자주민보 2012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