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가설과 좌절된 정책, 어떻게 볼 것인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술책을 버리고 정책을 추진한 두 정권

이 땅에 분단정부가 세워진 때로부터 64년을 헤아리는 긴 역사에서 남측 정권이 대북정책을 추진한 시기는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진 단 10년 동안 뿐이다. 그 밖의 다른 역대 정권들은 예외 없이 반북대결로 일관하였다.

반북대결도 정책적 행위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역대 정권들의 반북대결은 정책적 행위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긴장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권유지술책이었다. 술책은 어떤 경우에도 정책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반북대결정책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으며, 다만 편의상 반북대결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북대결을 추구한 남측 역대 정권들은, 한반도 정세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조성되거나 또는 남측 내부에서 사회정치적 모순이 격화되어 정권기반이 통째로 흔들릴수록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북대결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를테면 박정희 정권의 극렬한 반북대결이나 이명박 정권의 극렬한 반북대결이 그런 경우다. 미중관계가 개선된 것,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퇴한 것, 금 1온스를 미화 35달러로 교환해주고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킨 금태환제가 무너진 것, 주한미국군이 대폭 감군된 것 등이 지난날 박정희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은 요인들이었고, 북측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것, 2008년에 터져나온 미국발 금융파산사태를 시작으로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미증유의 재정파산위기에 빠진 것, 남측 경제가 그에 연동되어 파탄위험에 밀려들어가면서 빈부격차 확대라고 표현되는 사회계급적 모순이 격화된 것 등이 오늘 이명박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은 요인들이다.

그런데 반북대결에 집착한 정권유지술책을 버리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북정책을 추진한,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되는 변화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에 일어났다.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 그리고 화해협력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그러한 대북정책이었다. 1999년 6월 15일 제1차 서해교전이 일어났고, 2002년 6월 29일 제2차 서해교전이 일어났지만,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은 흔들림 없이 추진되었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남북대화에 강조점을 찍었던 것에 비해 후자는 정세안정에 강조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정세안정에 강조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노무현 정권 시기에 미국의 부쉬 정권이 ‘북한 핵문제’를 걸고들면서 한반도 정세를 위험천만한 긴장상태로 끌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2005년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부쉬 정권의 반북대결에 가로막혔다. 북측이 강력한 압박공세로 부쉬 정권의 반북대결책동을 제압하였던, 노무현 정권의 임기 말인 2007년 10월에 가서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대북정책의 의의를 평가하면,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남북관계의 탈적대화를 추진하였고,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반북대결책동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권은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서 미국이 꺼내든, 북측과 무력충돌 가능성이 있는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측을 미사일방어체제에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급변사태’라고 부르는 내란을 북측에서 유발하여 북측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작전계획 5029’를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2008년 10월 1일에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직접 언급한 바 있으며,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작성되어 본국에 전송된 비밀전문들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가로막은 ‘보이지 않는 선’

그런데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과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쌓아놓은 성과들은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으로 추진하였던 남북관계개선은 그 이후 어떤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반북대결로 되돌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으나, 이명박 정권은 그런 예상을 깨뜨리고 분단역사에서 가장 극렬하게 반북대결을 추구하였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은 왜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회귀를 저지하지 못하고 좌절하였을까? 이것은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을 극복하고 남북관계개선을 진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이며,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한계를 인식하는 반성적 물음이다.

경험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추진한 남북관계개선은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의 단계까지만 나아갔을 뿐 남북관계개선을 그 단계 이상으로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길에 넘어설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넘지 못한 ‘보이지 않는 선’은 전략적 오판의 한계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은 반북대결에서 벗어나 북측과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하였지만, 그 정책에 내포된 전략적 오판 때문에 북측이 남북관계개선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하였어도 그에 호응하지 못하고 남북관계개선을 대화, 교류, 협력의 수준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고, 정권교체 이후에는 이명박 정권이 대화, 교류, 협력의 성과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에 내포된 전략적 오판이란 무엇일까? 전략적 오판이란 남북이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일정 기간 동안 추진하면, 북측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개방’하고 ‘개혁’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우리는 북측을 개혁, 개방하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중국이나 베트남 예를 봐서도 개혁, 개방이 전 세계의 일반적 추세입니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는 자리여서 그렇게 외교적으로 발언하였지만, 원래 그는 북측이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도록 남측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4년 11월 16일 남미 순방길에 노무현 대통령은 수행기자단에게 “북한이 어떻게 개혁하고 시장경제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세계를 향해서 개방해서 먹고 살게 도와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한국의 주된 관심”이라고 말했다.

북측의 ‘개방’과 ‘개혁’에 대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차이에 대해 말하면, 전자가 북측이 자발적으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도록 기다리면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았고, 후자는 북측을 강제로 ‘개방’시키고 ‘개혁’시켜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 차이였을 뿐이며, 북측이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남북이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으로 나아가면 북측이 그에 조응하여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던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개방과 개혁의 징후’가 북측에서 나타날 때까지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두 정권의 집권기간 10년 동안 ‘징후’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주목하는 것은, 북측의 ‘자발적인 개방과 개혁’에 대한 기대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들어있는 전략적 오판이었고, 그런 전략적 오판을 내포한 대북정책은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회귀를 저지하기 못하고 좌절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원인을 북측의 ‘개방’과 ‘개혁’을 기대한 전략적 오판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부분적인 이해다. 만일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그런 전략적 오판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 두 정권은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넘어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략적 오판 이외에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선’이 그 두 정권의 대북정책 추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선’은 미국이 그어놓은 금지선이다. 미국은 남북관계개선이 자기의 통제를 벗어나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진척되어 평화와 통일의 국면이 열리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전체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전략적 오판이라는 ‘보이지 않는 한계선’만이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미국이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금지선’ 안에서 제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의 길이가 제한되어서, 미국이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금지선’에 관한 서술은 다른 집필기회로 미룬다.

그들은 왜 가설을 믿게 되었을까?

“일단 개혁과 개방에 발을 들여놓은 북한이 회피하려고 하더라도 체제의 기본적 골격의 개혁에까지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북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고만 것이다.” 이 인용문은 일본의 ‘북한 문제 전문가’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가 1992년에 펴낸 책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서술이다. 그는 그 책에서 북측이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자기의 가설을 여러 자료를 들먹이며 논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북측은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개방’과 ‘개혁’과는 전혀 무관한 선군정치의 길을 가고 있다. 명백하게도, 북측의 선군정치는 ‘개방’과 ‘개혁’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계승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북측을 선군정치의 길로 이끌어갈 것이다.

어떤 가설이 20년이 지난 뒤에도 현실로 입증되지 못하였다면, 그 가설은 틀린 것이다. 20년 전에 북측의 ‘개방’과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가설을 내놓았던 스즈키 마사유키는 20년이 지나도록 자기 가설이 전혀 현실로 입증되지 않은 오류에 대해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북측에서 ‘개혁과 개방의 징후’가 미약하지만 보이기는 보인다는 식의 억지스러운 변명을 꺼내놓을 수 있을까?

20년 전에 일본인 ‘북한 문제 전문가’만 그러했던 게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북한 문제 전문가’로 자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북측의 ‘개방개혁 불가피성’을 믿고 있으며, 그들의 그런 믿음은 북측의 선군정치 현실과 무관하게 수구언론매체를 타고 널리 퍼지며 이 땅의 국민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측의 ‘개방개혁 불가피성’에 관한 온갖 잡다한 가설들은 북측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꾸며낸 낭설이다. ‘북한 개방개혁 가설’이 낭설이라는 점은, 스즈키 마사유키가 그 가설을 자기 책에서 논한 이후 20년 동안 북측에서 펼쳐진 선군정치의 현실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북측의 ‘개방개혁 불가피성’에 관한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낭설을 믿고 ‘북한 개혁개방’에 대한 기대를 품었고, 그런 기대에 의거하여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하였다는 점이다. 진실을 알지 못하고 낭설을 믿었으니,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회귀를 저지하지 못하고 좌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정책수립과정을 들여다보면, ‘북한 문제 전문가’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이론적 기초로 제공하여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전략적 오판에 빠뜨렸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과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은, ‘북한 개방개혁 가설’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에 처음부터 발목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북한 문제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왜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믿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파생시킨 이론적 근거를 더듬어 올라가면 이른바 사회주의 필망론에 가닿게 된다. 사회주의 필망론이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원인 모를 적대감을 가진 학자들이 주장한 사회주의 필망론이란, 사회주의체제가 내적 모순을 해소하지 못하고 어느 때인가 반드시 ‘개방’과 ‘개혁’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으며, ‘개방’과 ‘개혁’에 의해 사회주의체제가 변질되면 결국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다. 스즈키 마사유키가 자신의 책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를 집필하고 있었을 때, 아닌 게 아니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개방’과 ‘개혁’으로 무너졌고, 소련 사회주의체제가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논한 그 책의 서문을 1992년 6월 25일에 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가설의 뿌리를 파헤쳐 보면

주목하는 것은, ‘북한 개방개혁 가설’의 뿌리인 사회주의 필망론이 오류에 빠진 허구적 논리라는 점이다. 아래와 같은 논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원래 사회주의 필망론은 파시즘(fascism)을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규정한 비판적 인식을 엉뚱하게도 사회주의에까지 연장시킨 술수로 조작된 것이다. 유럽에서 전체주의라는 신조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에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학자들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의 출현과 함께 고개를 들기 시작한 파시즘을 전체주의라는 신종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1930년대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우두머리로 하는 독일 파시즘이 발호하자, 전체주의는 곧 나치즘(Nazism)과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반공주의에 사로잡힌 학자들이 끼어들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Stalinism)을 동일시하는 교묘한 술수를 부리며 반사회주의 악선전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나치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들인데, 나치 독일에 대한 적대감을 소련에까지 연장하여 스탈린주의도 배격하였던 것이다. 학자라고 자처하였지만, 그들의 사회주의 이해수준은 무식한 반공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만 그럴 듯한 학술용어를 사용한 것이 무식한 반공주의자들과 달랐을 뿐이다. 그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치 독일과 소련은 똑같이 전체주의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전체주의체제의 특징은 국가이념(state ideology)을 인민에게 강제로 주입하여 세뇌하고, 그 규범에서 이탈한 인민을 무자비하게 억압한다는 것이다. 국가이념을 인민에게 주입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다르다. 권위주의는 인민을 정치적으로 억압할 뿐, 인민에게 국가이념을 주입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런 도식을 그대로 모방한 이 땅의 자유주의 학자들도 북측의 사회주의체제을 전체주의체제라고 부르고, 남측의 반공독재정권을 권위주의정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어떤 사상을 강제로 주입하여 세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전체주의론자들의 주장은, 비과학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오류다. 인간은 어떤 사상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세뇌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거짓선전과 거짓선동에 기만당하여 진실과 허위를 가려보지 못하는 우매한 대중들이 있지만, 대중을 기만한 속임수는 한때 기승을 부려도 오래 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인간을 어떤 사상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세뇌당하는 존재라고 보는 비과학적인 인간관은, 현생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만일 그런 비과학적인 인간관에 따른다면, 오늘 인류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국가이념 또는 중세 봉건제 사회의 국가이념을 주입받고 여전히 세뇌된 채 살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진보와 발전은 강제로 주입당하고 세뇌당한 낡은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을 추구해온 사상의 진보와 발전, 바로 그것이었다.

전체주의론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소련공산당이 소련의 국가이념인 맑스-레닌주의를 소련 인민에게 주입하여 세뇌하였기 때문에 소련이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로 소련 인민을 교양하는 사상교양사업을 사실상 거의 시행하지 않은 까닭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과학적이고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이에 관해서는 바만 아자드(Bahman Azad)가 2000년에 쓴 책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Heroic Struggle Bitter Defeat)’가 실증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만일 소련공산당이 맑스-레닌주의로 소련 인민을 교양하는 사상교양사업에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가 맑스-레닌주의를 폐기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신사고(New Thinking)’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대중운동이 소련에서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르바쵸브-옐친 집권기에 소련에서 ‘신사고’에 대한 당원대중과 인민들의 반대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에서 인민에게 사회주의국가이념이 강제로 주입되었다는 전체주의론자들의 주장이 현실과 정반대 되는 낭설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말해준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가 말해주는 명백한 사실은,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사회주의국가이념을 인민에게 주입한 전체주의체제였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당원대중과 인민을 맑스-레닌주의로 교양하지 못한 사상적 허약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개방’과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체제가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처럼 ‘개방’과 ‘개혁’으로 무너지느냐 아니면 자체의 발전동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체제에서 사회주의사상교양사업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느냐 하는 기준에 의해 판별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련 및 동유럽의 소련식 사회주의와 북측의 조선식 사회주의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화인민당은 케말리즘 사상교양을 모른다

소련식 사회주의와 다른 북측의 조선식 사회주의는, 북측 표현을 빌리면 ‘주체의 사회주의’다. ‘주체의 사회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북측에서 주체라는 말이 널리 쓰이니까 그런 표현이 생겨났을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좀 오해가 섞인 생각이다. ‘주체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에서 주체는 수령과 인민대중이 상호결합된 관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북측이 말하는 ‘주체의 사회주의’는 수령과 인민대중의 상호결합관계 위에 성립한 사회주의라는 뜻이다.

북측의 사회주의체제는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점에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측은 건국 이래 지금까지 수령과 인민대중을 일체화된 관계로 상호결합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힘써오고 있다. 북측에서 수령과 인민대중의 상호결합관계는, 북측 표현을 빌리면, “사상의지적 통일과 도덕의리적 단합으로” 일체화된 관계다.

그런데 북측에서 살아보기는커녕 북측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수령과 인민대중이 어떻게 일체화된 관계로 상호결합한다는 말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사회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컨대 미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미국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안목이 있어야 미국 사회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미국에서 살아보지 못했고 미국에 가보지도 못했어도 미국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회과학적 안목을 가진 사람은 그러하지 못한 미국인들보다 미국 사회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대북인식에서도 똑같은 논리가 성립한다.

북측을 인식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과학적 안목이란 북측 사회의 본질적 측면을 파악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 설령 그런 안목이 없더라도, 북측이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와 다르게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반북대결론자들은 북측에서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개인 우상화’라고 비방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개인이 아닌 것처럼 수령도 개인이 아니며, 이 땅의 청소년들이 인기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북측 인민들이 자기 지도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비난할 수 없다. 북측과 터키의 현실을 비교하면, ‘개인 우상화’라는 비방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토만제국이 무너지자 터키를 점령한 제국주의연합세력을 물리치고 1923년 10월 29일에 터키공화국을 창건하였고 1938년에 서거할 때까지 터키공화국 제1대 대통령을 지낸 터키의 민족적 영웅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Mustafa Kemal Pasha, 1881-1938)다. 그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사랑과 숭배심은 그가 서거한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뜨겁다. 이를테면, 터키의 모든 공공건물, 학교교실, 그리고 일반 가정집에 그의 초상화가 정중히 모셔져 있으며, 그가 74년 전에 운명한 바로 그 시각인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는 해마다 터키 전국에서 모든 차량들이 기동을 멈추고 1분 동안 그를 추모한다. 서거 후 74년이 지난 오늘에도 터키 국민들의 사랑과 숭배심이 그토록 뜨겁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 터키인들은 최고영도자에 대한 북측 인민들의 사랑과 숭배심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 없이 잘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남측 국민들은 터키 국민들이 케말 파샤를 받드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북측 인민들이 최고영도자를 받드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낀다. 동일한 현상을 보면서도 왜 그런 차별적 감정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러한 차별적 감정반응은, 북측 인민들이 최고영도자를 받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반북대결선전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북측과 터키의 역사와 현실은 똑같지 않다. 터키 국민들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받드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받들었던 것처럼, 민족적 영웅을 받드는 영웅숭배인데 비해, 북측 인민들이 북측의 최고영도자를 받드는 것은 ‘인민의 수령’을 받드는 수령숭배다. 영웅과 수령은 지위와 역할이 서로 다르다.

북측의 수령숭배가 터키의 영웅숭배와 다른 차이점은, 수령과 인민대중의 결합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케말 파샤는 대통령으로 재직 중에 터키 국민들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그가 1919년에 창건한 공화인민당은 터키 국민을 케말리즘(Kemalism)으로 교양하지 않았다. 케말리즘은 여러 통치이념들 중 하나일 뿐 세계관적 기초를 가진 사상체계가 아니며, 케말리즘을 기치로 든 공화인민당은 지금 집권당도 아니고 제1야당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케말 파샤를 받드는 터키 국민의 영웅숭배가 국가적 전통으로 정착된 것이지, 오랜 기간에 걸친 당의 사상교양사업을 통해 실현된 사회체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국가적 전통과 사회체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다

터키의 공화인민당과 달리, 북측의 사회주의집권당인 조선로동당은 수령과 인민대중의 상호관계를 일체화시키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에 당적 역량을 총집중한다. 사상교양사업을 추진하려면 당연히 인민대중을 교양할 사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북측의 사상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74년 2월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제시하였고, 2012년 4월 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주체사상을 김일성-김정일주의로 정식화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제시하였다. 사회주의정치제도의 특성상, 당의 최고 강령은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이므로, 북측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이 얼마나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는지는 북측에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측에서 당이 추진하는 사상교양사업은 인민대중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는 지적 활동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 활동이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평생 끊임없이 계속한 현지지도는 인민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돌아보며 그들과 소통하는 현장정치활동만이 아니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만남을 통해 인민들이 수령과 자기들이 ‘혼연일체’임을 직접 체험하는 사상교양의 정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바로 그 정수를 계승하여 인민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찾아가는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북측 시각에서 보면, 최고영도자가 인민대중과의 일체화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현지지도를 계속하고, 집권당의 최고 강령으로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정립되어 있고, 집권당의 사상교양사업을 1970년대부터 장장 40년 이상 추진해온 풍부한 경험과 성과가 있고, 인민대중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활동 전반이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실현해나가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북측에서는 ‘개방’과 ‘개혁’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런 말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남측에서 북측의 ‘개방’과 ‘개혁’을 거론할 때마다 북측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까닭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야 이해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개혁개방은 좋은 것이고, 개성공단이 잘 되면 북쪽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저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북에서는 개성공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못마땅하다고 했다. 개성공간이 잘 되면 북쪽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말이었다. 우리 정부라도 그런 말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개성공단은 함께 가는 자리지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위에서 논한 내용을 종합하면, 사회주의 필망론은 오류이고, 거기에서 파생된 ‘북한 개방개혁 가설’도 오류이며, 그처럼 잘못된 가설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도 남북관계개선을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진척시키지 못하였고,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로 좌절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개선을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진척시켜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길로 나아가려면,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폐기하여야 하며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한계를 넘어선 새롭고 진정성 있는 대북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정책수립의 임무는 2013년 2월에 출범할 새로운 정권에게 주어질 것이다. 올해 12월에 실시될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을 계승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승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2012년 7월 16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