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악마의 밀약을 계승하였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07년 전에 체결된 악마의 밀약이 계승되었다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에 미국에서 발간된 ‘현대역사잡지(The Current History Magazine)’ 1924년 10월호에 당시 존스 홉킨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 쓴 충격적인 글이 실렸다. 제목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일밀약(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다. 데넷은 미국 연방의회 도서관에서 찾아낸 밀약문서를 읽고 그 글을 집필하였다. 그가 1924년에 찾아낸 미국의 대일밀약이 바로 태프트-가츠라 밀약이다. 그 밀약은 1905년 7월 27일 당시 미국 전쟁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와 당시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桂太郞)가 도쿄에서 만나 밀실처리한 내용을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로 문서화한 것이다. 그 밀약에는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강점을 일본이 용인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강점을 미국이 용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의 몇몇 역사가들은 태프트-가츠라 밀약이 정식협정으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양해각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지만, 정식협정인가 양해각서인가 하는 합의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1905년 당시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강점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강점이 두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적 아시아정책으로 이미 굳어져버린 현실이 문제로 되는 것이다.

107년 전 도쿄에서 작성된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다시 눈여겨보아야 하는 까닭은, 한반도를 식민지예속으로 몰아간 미일 밀약사가 100여 년 전에 끝난 게 아니라 100년이 지난 오늘 교묘하게 변형된 형태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논하려는 1960년의 맥아더-후지야마 밀약과 1967년의 닉슨-사토 밀약이 바로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변형된 형태로 계승한 것이고, 2012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107년 전에 우리나라의 주권을 폭력으로 강탈한 악마의 밀약이 변형된 꼴로 계승되어 오늘 우리 민족이 갈망하는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또 다시 폭력적으로 강탈하려 한다는 점에서, 미일 밀약사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107년 전 미국과 일본이 범죄적으로 공모결탁한 악마의 밀약, 그리하여 마땅히, 일찍이 청산되었어야 할 악마의 밀약이 오늘에 계승된 것은 이 땅의 국민들에게 경악과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960년에 체결된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의 내막

2008년 2월 하순 일본 나고야대학의 하루나 미키오(春名幹男) 교수가 미국 국가문서기록보관청(NARA)이 관리하는, 미시건 대학교 구내에 있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 도서관(Gerald R. Ford Presidential Library)에서 2005년 3월에 기밀해제된 문서 한 편을 찾아냈다. 그 문서는 1960년 1월 6일 당시 주일미국대사 더글러스 맥아더 2세(Douglas MacArthur II)와 일본 외상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郞)가 서명한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2세는 8.15 해방 직후 점령군사령관으로 군림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친형 아서 맥아더 3세(Arthur MacArthur III)의 아들이다. 1960년 1월 6일 더글러스 맥아더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서명한 기밀문서를 일본에서는 ‘조선유사의사록’이라 부른다. ‘조선유사(朝鮮有事)’라는 말은 ‘조선반도 유사’라는 뜻이고, 요즈음 이 땅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바꾸면 ‘한반도 급변사태’라는 뜻이므로, ‘조선유사의사록’은 한반도 급변사태에 관한 미일 밀약인 것이다.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에 따르면, “주한유엔군 부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발생할 긴급사태에 대한 예외적 조치로, 즉각 착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군사작전을 위해 (미국군은) 일본의 시설과 지역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유사의사록’은 한반도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주일미국군기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미국 정부가 1974년에 내부에서 논의한 비망록에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비망록에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주일미국군이 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을 (일본 정부가) 용인하였다”고 쓰여 있다.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이 체결된 바로 그 날 도쿄 외상공관에서 미일 신안보조약 비준서가 교환되었고, 당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미일 신안보조약을 비준하고,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이 체결된 바로 그 날 오후 총리직에서 물러난다고 사의를 표명하였다. 이것은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이 기시 노부스케의 작간으로 체결된 것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을 ‘기시 의사록’이라고도 부른다.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한 대답도 역시 기밀문서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번에는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기밀문서다. 2009년 10월 13일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국가안보문서보관소(National Security Archive)는 1960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 크리스천 허터(Christian A. Herter)가 연방의회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국무부 기밀비망록을 공개하였다. 그 기밀비망록에 따르면, 미국이 핵무기를 일본에 반입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과 협의해야 하지만, 북측이 공격하는 비상상황에서는 미국이 일본 영토를 “요구대로(as needed)”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런 사항을 미국과 일본이 ‘비밀합의’로 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사전협의(prior consultation)라는 개념이다. 외교문서에서는 사전협의라는 용어를 써서 미일관계의 불편한 진실을 가리웠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로 보아야 한다. 미국은 핵전력의 이동 및 배치에 관한 최고 국가기밀을 그 어떤 동맹국과도 절대로 ‘협의’하지 않으며 나중에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물론 일방적 통보마저 하지 않고 극비로 핵전력을 이동하고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핵전력의 이동 및 배치에 관해 동맹국에 통보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경우다. 이러한 기밀조치는 핵전력의 속성상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맥아더-후지야마 밀약과 허터의 국무부 기밀비망록을 연계해서 읽으면 감춰진 뜻이 드러난다. 밀약과 기밀비망록을 연계해서 읽으면, 한반도 전쟁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에게 사전협의는커녕 사후통보도 하지 않고 일본에 핵전력을 반입하거나 일본을 통해 핵전력을 이동한다는 것이다.

맥아더-후지야마 밀약과 허터의 국무부 기밀비망록은, 미국이 평시에는 일본과 사전협의를 거쳐야 하지만 전시에는 일본과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고 일본에 핵무기를 반입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히지만, 미국의 핵전력 이동 및 배치에서 전시와 평시의 구분은 전혀 무의미하다. 미국은 전시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일본에게 핵전력의 이동 및 배치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1964년 3월 9일 당시 주일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가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에 따르면, 1964년 3월 5일 라이샤워가 당시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만난 비공개 조찬회동에서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이 유효함을 다시 확인하였고, 오히라가 그 밀약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므로 현 시점에서 그 이상의 재확인은 요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라이샤워가 오히라와 비공개 회동을 하게 된 것은, 1963년 3월 당시 일본 총리 아케다 하야토(池田勇人)가 일본 국회에 출석하여 질문에 답변하면서 미국의 핵추진 잠수함이 일본 항구에 기항할 때는 미국이 일본과 사전협의를 해야 한다고 지적함으로써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에 배치되는 발언을 한 것을 보고 심기가 불편해진 미국이 일본의 밀약준수 의사를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의 유효성을 재확인한 것은, 평시에 미국 핵추진 잠수함이 일본을 제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이 핵전력을 일본을 통해 일본 주변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일본에 배치한다는 말은, 미국이 북측에 핵공격을 가하기 위한 대북핵전쟁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국이 대북핵전쟁 준비와 관련하여 일본과 협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북측의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일본과 사전협의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만큼 다급한 위기상황에서 대북핵공격으로 반격한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이 일본과도 협의하지 않는 극비상황에서 은밀하게 북침핵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처럼 극비상황에서 은밀하게 벌이는 대북핵전쟁이란 북측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북측을 공격하는 선제핵공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협의도 하지 않고 일본의 영토, 영공, 영해에 핵무기를 반입하는 것을 주권침해로 보고,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의 초점을 사전협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보았지만, 그런 이해는 너무 부분적이다.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은 일본의 주권침해에 관련된 사전협의에 관한 밀약이 아니다. 그것은 1960년대에 아직 비핵국가로 남아 있었던 북측에게 일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의의 선제핵공격을 가해 기어이 북침핵전쟁을 벌이려는 미국과 일본의 핵전쟁광신자들이 만들어놓은 핵전쟁밀약이다.

1967년에 체결된 닉슨-사토 밀약의 내막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대일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일본 영토를 점령지로 획득하고 통치하였는데, 미국의 점령지 가운데서도 오키나와(沖繩)와 오가사와라(小笠原)군도는 매우 오래 기간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았다. 오가사와라군도는 오키나와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서태평양에 널리 흩어져 있는 30여 개의 작은 섬들이다.

1951년 9월 4일 일본에게서 전범국의 멍에를 벗겨주기 위해 미국이 조작한 대일강화협정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할 때,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일본이 오키나와에 대한 ‘잔여주권(residual sovereignty)’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공식발언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대일강화협정을 체결한 뒤에도 여전히 오키나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대외선언이었다. 1960년 1월 19일 미일 신안보조약을 체결할 때도, 미국은 오키나와가 자기의 점령지이므로 미일 신안보조약의 효력이 그 섬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점령정책을 영구히 시행할 수 없었던 미국은 오가사와라군도부터 먼저 일본에 반환하였다. 1967년 11월 14일부터 15일까지 미국 수도 워싱턴 디씨를 방문한 당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백악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과 정상회담을 갖고 오가사와라군도 반환문제를 매듭지었다. 존슨-사토 정상회담에서 무슨 밀담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상회담 직후 일본에 돌아간 사토가 취한 두 가지 행동이 눈길을 끈다.

첫째, 사토는 1967년 12월 11일 일본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이른바 ‘비핵3원칙’을 발표하였다. 그가 발표한 ‘비핵3원칙’이란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않고, 제조하지도 않고,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사토의 지시에 따라 1970년 2월 3일 일본 정부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않고 제조하지도 않겠다는 것을 국제법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핵확산금지조약 서명은 일본이 핵무기 불보유 및 불제조를 국제법적으로 규정한 것이고, ‘비핵3원칙’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핵무기 불보유 및 불제조 원칙과 더불어 핵무기 불반입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사토의 ‘비핵3원칙’ 발표와 일본의 핵확산금지조약 서명은 오키나와 반환문제와 직접 연관된 것이었다. 미국은 사토가 ‘비핵3원칙’을 발표하고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한 때로부터 이태가 지난 1972년 5월 15일에 가서야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였는데, ‘비핵3원칙’ 발표와 핵확산금지조약 서명은 오키나와 반환의 전제조건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미국은 왜 ‘비핵3원칙’ 발표와 핵확산금지조약 서명을 오키나와 반환의 전제조건으로 삼았던 것일까? 거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27년 동안 그 섬을 일본에 반환하지 않은 까닭은, 그 섬을 핵전쟁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점령기간 동안 오키나와에 엄청난 분량의 핵무기, 화학무기, 생물학무기를 집중배치하였다. 미국이 오키나와에 핵무기만이 아니라 무려 10,000t에 이르는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까지 배치하였다는 사실은 1969년 7월 18일 <월 스트릿 저널> 보도기사에서 폭로된 바 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핵무기를 철거할 의사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오키나와에서 핵무기를 철거하면 자기의 핵전쟁능력이 감소된다고 생각하였고, 미국의 ‘핵우산’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일본은 미국의 핵억지력이 감소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반환은 일본의 주권문제에 속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고, 피폭국인 일본의 국민들은 핵무기 배치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강했다. 일본 국민들에게 오키나와 반환은 곧 핵무기 없는 오키나와를 되찾는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핵무기 없는 오키나와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일본 국민들을 감쪽같이 속일 기만술책이 당시 미국과 일본의 집권세력에게 요구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사토의 ‘비핵3원칙’ 발표는 바로 그런 기만술책이었다.

사토의 기만술책은 아래와 같이 정밀하게 설계된 것이었다. 일본 국민을 속이고 전 세계를 속여야 하였으니 대충 설계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기만설계의 내막은 아래와 같다.

일본의 핵확산금지조약 서명으로 일본의 핵무기 불보유 및 불제조는 국제법적으로 규정되었지만, 핵무기 불반입은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원칙으로 발표된 것이다. 법적 규정은 그것을 지킬 의무를 동반하지만, 원칙 발표는 그것을 지킬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다. 일본은 ‘비핵3원칙’을 끝내 법제화하지 않고 몇 해 뒤에 국회결의안으로 채택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일본이 핵무기 불반입 원칙을 지킬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1969년 10월 7일 일본 외무성 북미국장이 작성한 ‘총리에 대한 보고’라는 문서에는 “(사토가) 비핵3원칙에 반입금지를 포함한 것은 실수였다고 반성하고 있다. 불완전 무장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해 좀 더 분명히 밝혔어야 하지 않았나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다. 이 문서에는 사토가 핵무기 불반입 원칙을 발표한 뒤에 그것을 실수로 여기며 반성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토는 자신의 실수를 반성한 게 아니라 미국 핵무기를 반입하기로 밀약을 맺었던 것이다. 미국의 핵무기를 반입하는 밀약을 체결한 사토가, 핵무기 불반입 원칙을 천명한 것을 자기의 실수로 여기고 반성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 반환을 합의한 뒤에도 미국의 핵전력을 그 섬에 종전대로 유지하기 위한 밀약의 존재는, 밀약체결로부터 40년이나 지난 2009년 12월 하순에 가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사토의 유족이 사는 집에서 40년 묵은 밀약문서가 나온 것이다. 원래 그 밀약문서는 1987년에 사토의 처가 사망하였을 때, 유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인데, 미일 밀약문제로 일본이 시끄럽던 2009년 12월 하순에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합의의사록’이라는 표제가 붙은 밀약문서는 1969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미국을 공식방문 중이던 사토 에이사쿠와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이 백악관에서 오키나와 반환문제를 놓고 정상회담을 진행하던 중에 대통령 집무실에 딸린 밀실에 들어가서 밀담을 나눈 뒤에 서명한 것이다.

닉슨-사토 밀약은 “미국이 중대한 긴급사태에 대비해 오키나와에 현존하는 핵무기 저장지들인 가데나(嘉手納)기지와 헤노코(邊野古)기지 등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합의한 것이다. 또한 그 밀약에서 닉슨은 “중대한 긴급사태가 일어날 경우, 미국은 일본을 포함하여 극동지역 여러 나라를 방위하기 위해 일본과 사전협의를 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오키나와에 다시 반입하고 오키나와를 통과할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사토는 “미국이 일본과 사전협의를 통해 그 문제를 제기하면 일본은 지체 없이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닉슨과 사토는 밀약을 체결하면서 밀약문서는 백악관과 일본 총리 집무실에만 보관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닉슨-사토 밀약은 미국이 오키나와에서 평시에 핵기지를 유지하고 있다가 전시에 핵무기를 재반입한다는 밀약이다. 닉슨-사토 밀약에는 미국이 핵무기를 일본에 재반입하기 위해 일본과 사전협의를 해야 하는 것처럼 기술되었으나, 닉슨-사토 밀약보다 앞서 체결된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에서 이미 그런 사전협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규정하였으므로, 미국은 오키나와에서 평시에 핵기지를 유지하고 있다가 전시에 사전협의 없이 핵무기를 오키나와 핵기지로 반입하는 것이다.

또한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의 적용대상이 중국이 아닌 것처럼, 닉슨-사토 밀약의 적용대상도 중국이 아니다. 닉슨-사토 밀약은 중국과 일본이 무력충돌을 벌일 때 미국이 핵억지력으로 일본을 방어해준다는 대일방어밀약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국이 오키나와를 대북핵공격기지로 사용한다는 핵전쟁밀약이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발간되는 월간지 <주오고론(中央公論)> 2010년 1월호에 실린 오사카 시립대 연구원 고바야시 소메이(小林聰明)의 글에 따르면, 닉슨-사토 밀약이 체결된 직후 당시 주한일본대사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가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면담한 자리에서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해도) 유사시 핵무기 반입이 가능하다고 해석된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닉슨-사토 밀약이 중국이 아니라 북측을 겨냥한 핵전쟁밀약이었음을 말해준다.

한반도 재침야욕을 평생 가슴에 품고 미국의 핵전쟁정책에 매달렸던 사토 에이사쿠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오키나와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을 대북핵전쟁기지로 미국에게 제공하려고 생각하였다. 2010년 12월 22일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69년 7월 31일 사토는 총리관저에서 당시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William P. Rogers)와 밀담을 나누면서 한반도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만약 한국으로부터 이 문제(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미국군의 후방지원 문제를 뜻함-옮긴이)에 대한 정식요청이 있을 경우, 오키나와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의 기지에서도 후방지원을 맡겠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후방지원’이란, 병참지원 따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 닉슨-사토 밀약에 담긴 미국 핵무기의 일본 재반입, 다시 말해서 일본을 미국의 대북핵전쟁기지로 제공한다는 뜻이다.

<마이니치신붕> 2010년 3월 7일 보도에 따르면, 1966년에 미국은 일본 정부와 사전협의를 하지 않고 이와쿠니(岩國) 해군기지에 배치한 미국 해병대 상륙함에 핵무기를 석 달동안 보관한 적이 있었다. 또한 <니혼게이자이신붕> 2009년 12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미드웨이호(USS Midway)가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를 모항으로 삼고 드나들 때, 그 항공모함이 핵무기를 탑재하고 입항할 경우에도 사전협의를 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1973년에 맺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사토-로저스 밀담에서 오키나와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을 미국의 대북핵전쟁기지로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 사토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1905년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한반도의 식민지강점을 부르는 악마의 밀약이었다면, 1967년 닉슨-사토 밀약은 한반도의 핵참화를 부르는 악마의 밀약이었다. ‘비핵3원칙’ 발표라는 희대의 기만술책으로 일본 국민과 전 세계를 감쪽같이 속이며, 북침전쟁야욕을 품고 한반도의 핵참화를 부르는 악마의 밀약을 체결하였던 핵전쟁광신자 사토 에이사쿠는 그의 특출한 기만과 야욕과 광기의 공로를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아 1974년에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넘지 말아야 ‘마지막 선’을 넘었다

폭로전문 누리집 ‘위킬릭스(Wikileaks)’에 게시된, 주일미국대사관 부대사 제임스 줌월트(James P. Zumwalt)가 작성하여 2009년 7월 24일 본국에 보낸 ‘일본의 3대 핵원칙을 2대 핵원칙으로(MOVING FROM 3 TO 2 NUCLEAR PRINCIPLES IN JAPAN)’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을 지낸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가 미일 밀약의 존재를 언론에 공개한 의도를 분석하였다.

무라타는 2009년 6월 29일 <마이니치신붕>에 실린 대담기사에서 자신이 외무성 사무차관에 임명되었을 때 전임 사무차관으로부터 미일 밀약문서를 인계받는 자리에서 그 밀약의 내용을 신임 외상에게 설명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자신도 사무차관직에서 물러날 때 후임 사무차관에게 그와 같은 관례에 따라 인계하였다고 밝힌 바 있었다.

무라타가 언론에 그 존재를 공개한 미일 밀약이란, 1960년 1월 6일에 체결된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밀약은 일본도 알지 못하는 불의의 선제핵공격을 북측에 가해 기어이 대북핵전쟁을 벌이려는 미국과 일본의 핵전쟁광신자들이 만들어놓은 핵전쟁밀약이다.

그런데 줌월트가 작성한 위의 비밀전문은,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의 존재를 언론에 공개한 무라타의 의도를 분석하였다. 줌월트는 무라타의 의도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무라타 개인의 의도가 아니라, 무라타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일본의 수구우파세력이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줌월트의 분석을 읽으면, 일본의 수구우파세력이 맥아더-후지야마 밀약의 존재를 언론에 공개한 의도가 미국의 핵무기 일본 반입을 공식적으로, 명시적으로 인정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함으로써 ‘핵우산’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수구우파세력은 핵무기의 보유, 제조, 반입을 금지한 ‘비핵3원칙’ 가운데 반입금지원칙을 제외시키고 ‘비핵2원칙’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010년 3월 17일 일본 외상 오카다 가츠야(岡田克也)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출석하여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비핵3원칙’에 저촉되더라도 미국 핵무기의 일본 반입을 허용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카다의 발언은, 줌월트가 분석한 것처럼, ‘비핵3원칙’을 폐기하고 ‘비핵2원칙’으로 전환하여 일본 전역을 미국의 대북핵전쟁기지로 제공하려는 일본 수구우파세력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런 의도는 이미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교도통신> 2009년 6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일본에 전진배치된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동해에 출동하기 위해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津輕)해협, 일본과 한반도 남부 사이의 쓰시마(對馬)해협 등 5개 해협에서 일본 영해 범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된 12해리(22.2km)에서 3해리(5.5km)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이 미국의 대북핵전쟁을 위해 자국 영해를 제7함대 항모강습단에게 제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에서 논한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악마의 밀약을 체결한 미국과 일본이 대북핵전쟁준비를 이미 1960년에 끝내고 지난 50년 동안 전쟁도발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대북핵전쟁준비는 대북첩보공작으로 전개되었다. 2010년 8월 1일 <아사히신붕>에 실린 대담기사가 그에 대해 말해준다. 자신이 1964년에 자위대 육상막료감부(陸上幕僚監部, 한국군에서는 육군참모본부) 휘하 ‘제2부 특별근무반’이라는 특수부대에서 반장으로 2년 동안 부대를 지휘하였다는, 일본 자위대 육장보(陸將補, 한국군에서는 육군소장) 출신 히라조 히로미치(平城弘通)의 발언이 충격적이었다. 그는 1954년 주일미국군사령관이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게 제안하여 육상막료감부 휘하에 ‘제2부 특별근무반’이라는 비밀첩보부대를 도쿄 교외에 있는 미국군기지 캠프 드레이크(Camp Drake) 안에 창설하였고, 1957년부터 주일미국군의 지도로 일본 자위대 첩보요원들을 육성한 뒤에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제2부 특별근무반’ 소속 첩보요원은 15명이었는데, 북측, 소련, 중국, 북베트남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이 악마의 밀약을 맺었던 50년 전부터 이미 대북첩보공작을 실행에 옮기었음을 말해준다.

50년 전에 시작된 대북첩보공작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북정찰과 대북침투로 더욱 강화되었다. 대북침투공작으로 북측에서 ‘급변사태’를 유발하여 내란을 일으키고, 내란개입 무력침공으로 북측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내용으로 미국이 작성한 ‘작전계획(OPLAN) 5029’는, 미국과 일본이 지난 50년 동안 기회를 엿보았던 대북전쟁도발을 대북침투공작이라는 실제 행동으로 옮겼음을 말해준다. 미국과 일본은 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까지 넘은 것이다.

한반도 군사상황이 이처럼 심각한 데도, 미국이 요구하고 일본이 재촉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국민들 몰래 체결하여 일본에게 대북군사정보를 넘겨주려다가 발각된 이명박 정부의 ‘막장 드라마’는 너무 끔직하다. (2012년 7월 7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