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더가 털어놓은 백악관 대북정책 비화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상 최악으로 전락한 오바마의 대북정책

2012년 3월 미국 워싱턴 디씨에 있는 부르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가 눈길을 끄는 책을 펴냈다. 제목은 ‘오바마와 중국의 부상(Obama and China's Rise)’이고, ‘미국의 아시아전략에 대한 내부자의 해명(An Insider's Account of America's Asia Strategy)’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 책을 쓴 사람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 담당 선임국장(senior director for East Asian affairs on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으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정책을 사실상 좌우하였던 제프리 베이더(Jeffrey A. Bader)다.

베이더는 1975년 미국 국무부에 들어간 이후 2002년 국무부에서 나올 때까지 주로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관리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타이완에서 중국어를 배운 것으로 하여 국무부 안에서 ‘중국통’으로 인정받아 국무부의 대중정책을 주로 맡아보았다.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는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던 2009년 1월 베이더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 담당 선임국장으로 임명하였다. 베이더는 2011년 4월까지 그 직책을 맡아보았고, 지금은 부르킹스연구소에서 국제외교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베이더의 백악관 근무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번에 그가 펴낸 책은 2009년 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아시아전략이 수행되어온 과정에 얽혀있는 숨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중국통’으로 알려진 베이더는 백악관에서 일할 때 주로 중국정책에 비중을 두었고, 따라서 그가 펴낸 책도 백악관의 중국정책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는데, 그 책에는 백악관의 대북정책과 관련된 숨은 이야기들도 있다. 그가 자신의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바마 행정부는 대중관계를 올바로 유지하는 것 이외에, 핵을 보유한 북코리아를 상대하는 전략을 고안(devise)하는 것이 동아시아정책에서 가장 큰 도전이라는 점을 알았다.” 이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과 중국정책을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오바마 행정부와 국가정보기관들은 북측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무관하게, 핵무기 프로그램을 유지할 것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가졌다.” 베이더가 쓴 책에 나오는 이 인용문은 비록 짤막한 문장이지만, 거기에는 백악관의 대북정책 추진과정에 뒤엉킨 복잡한 내막이 들어 있다. 그 내막을 파헤쳐보면 아래와 같은 정보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측의 핵포기 공약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북측이 핵포기 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불신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추진과정을 이제껏 내내 지배해왔다. 북측을 불신하는 오바마 행정부는 북측이 핵포기 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으므로, 당연히 북미양자회담을 중단한 채 이른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정책기조에 매달렸다.

그렇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부터 ‘전략적 인내’를 들고 나와 북미양자회담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취임 전후에 보여준 초기행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8년 7월 오바마 당시 대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집권 첫 해에 북측, 이란, 시리아, 쿠바, 베네주엘라 지도자들을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느냐?”는 물음을 받고 “만날 용의가 있다”고 선뜻 답변하였다. 2008년 11월 2일 당시 오바마 대선후보의 한반도 정책 보좌관이었던 프랭크 저누지(Frank Jannuzi)는 “오바마는 대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고위급 회담을 포함한 모든 외교적 대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에 고무된 미국대외정책전국위원회(NCAFP)는 오바마 대선후보가 당선되는 경우 그가 취임한 뒤 몇 달 안에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 전 국방장관이 이끄는 초당적 대표단을 평양에 파견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대선과정에서 오바마 대선후보의 정책자문역할을 했던 미국진보센터(CAP)도 오바마 대선후보가 당선되면 취임 후 100일 안에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파견하는 방안을 제기한 바 있었다.

2009년 1월 13일 힐러리 클린턴(Hillary R. Clinton) 당시 국무장관 후보자는 존 케리(John F. Kerry) 연방상원 외교위원장의 서면질의에 대한 서면답변에서 자신은 “북측과 어떤 형태의 외교관계를 수립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하면서, 북측 외무상을 만날 용의가 있느냐고 물은 질문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선택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어떤 외국 지도자라도 만날 의향이 있다”고 답변하였다. 그녀는 국무장관에 취임한 직후인 2009년 2월 13일 뉴욕에 있는 아시아협회(Asia Society)에서 연설에 출연하여 “북측이 진정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하게, 검증할 수 있게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의 오랜 정전체제를 평화조약으로 대체하고, 에너지 지원을 비롯하여 북측 인민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북측의 핵폐기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병행 추진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은 적어도 취임 직후인 2009년 2월까지는 북미양자회담을 외면할 생각이 없었고,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라면 북미정상회담도 추진할 용의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급반전되어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기조가 나오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외부에서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베이더가 쓴 책을 읽어보면, 2009년 2월 어느 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측의 핵포기 공약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북미양자회담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거의 3년 동안이나 그들의 대북정책을 지배해왔던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기조는 바로 그런 결정이 낳아놓은 결과물이었다. 베이더는 ‘전략적 인내’에 기초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추진방향을 자신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고, 검증할 수 있는 북측의 비핵화를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목표로 재확약(recommit)한다.
둘째, 북측의 핵물질 확산과 미사일 및 미사일 관련기술의 확산을 차단한다.
셋째, 북측의 핵물질이 제거될 때까지, 북측에 현존하는 핵무기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고 퇴화(degrade)시킨다.
넷째, 미국의 동맹국들 특히 남측과 함께 더욱 강력한 대북공조를 추진하기 위해 외교통로를 이용한다.

위에 열거한 내용을 보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미양자회담은 말할 것도 없고 6자회담마저 차버리는 최악상태에 이르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지난 시기 부쉬 행정부는 6자회담이라도 추진하였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6자회담을 재개할 기회마저 스스로 걷어찼으니,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부쉬 행정부의 대북정책보다 더 악화되어 사상 최악으로 전락한 것이다.

북측을 실망시킨 미국 국무장관의 친서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2009년 2월 어느 날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은 북측이 ‘대포동 2호’를 쏘아올리려고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하였다. 미국이 사실을 왜곡하여 ‘대포동 2호’라고 부른 미사일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인데, 당시 북측이 쏘아올리려고 준비한 것은 시험통신위성 광명성 2호를 싣고 지구저궤도로 날아간 위성운반로켓 은하 2호였다.

북측이 시험통신위성 광명성 2호를 위성운반로켓 은하 2호에 실어 쏘아올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남측의 주요언론매체들이 처음 보도한 날은 2009년 2월 5일이다. 남측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보도기사에 따르면,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 있는 동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운반로켓(소식통은 ‘미사일’이라고 왜곡하였음 - 옮긴이)이 식별되었다고 하였다.

남측 언론매체들이 북측의 위성발사 준비상황에 관해 처음 보도한 날짜보다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그 준비상황에 관한 정보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한 날짜가 앞섰던 것이 분명하므로, 백악관이 그 긴급정보를 보고받은 날짜는 2009년 2월 2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해 2월 1일은 일요일이었으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할 수 없었다. 베이더가 쓴 책에 서술된 관련대목의 문맥을 읽어보면, 데니스 블레어(Dennis C. Blair) 당시 미국 국가정보국장(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이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를 통해 북측의 위성발사 준비상황을 포착하였다는 정보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 정보를 받은 백악관은 발칵 뒤집혔다.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북측이 위성발사를 준비하는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위관리들의 이해력으로는 알다가도 모를 ‘이변’이었다.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북측의 위성발사 준비상황에 대처하여 차관급 위원회(Deputies Committee)를 자주 소집하면서 정보를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백악관에 갓 들어가 업무를 개시한 고위관리들의 이해력으로는 알다가도 모를 ‘이변’이었겠지만, 북측이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에 위성발사를 준비한 것은 북미양자회담을 즉각 개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특별신호’였다. 이에 관해서는 2009년 2월 16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발사위협이 아니라 특별신호다’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당시 북측은 백악관에 ‘특별신호’를 보내는 한편, 북측의 정확한 의사를 백악관에 전해주기 위해 미국의 전직관리들과 한반도 전문가들로 구성된 방북단을 평양으로 초청하였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지명자 스티븐 보스워즈(Stephen W. Bosworth), 해군전쟁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담당교수 조너던 폴락(Jonathan D. Pollack), 국무부 정보조사 담당 차관보와 국방부 미주 및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모튼 에이브러모위츠(Morton Abramowitz), 사회과학연구협회 동북아시아 협력안보 연구 담당자 리언 시걸(Leon V. Sigul) 등 7명으로 구성된 방북단이 평양에 도착한 날은 2009년 2월 3일이었다. 방북단은 2월 7일까지 평양에서 북측의 고위관리들과 10여 차례 회담을 진행하였다.

당시 국무장관직에 취임한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던 클린턴 국무장관은 대북정책 특별대표 지명자 보스워즈를 통해 자신의 친서를 북측에 전하였다. 클린턴 국무장관의 친서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을까? 국무장관 친서의 내용은 이번에 베이더가 쓴 책을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 책에 따르면, 클린턴 국무장관은 만일 북측이 위성발사를 보류(forgo)하면,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지명된 보스워즈를 다시 평양에 보내겠지만, 만일 북측이 위성발사를 강행하는 경우 보스워즈를 다시 보내지 않겠다고 자신의 친서에 썼다고 한다.

국무장관의 친서를 받아본 북측은 실망하였다. 왜냐하면 북측이 미국에게 요구한 것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이 아니라 국무장관의 방북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베이더는 “북측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위성운반로켓 은하 2호 발사를 그렇게 왜곡하였음 - 옮긴이)로 자기 의무를 저버리는 판에, 미국이 녕변 핵시설 불능화를 이행하는 데 요구되는 그 이상의 양보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자신의 책에 썼다. 베이더가 말한 “녕변 핵시설 불능화를 이행하는 데 요구되는 그 이상의 양보”란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2009년에 클린턴 국무장관이 방북하여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였다면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북측은 미국에게 약속한 대로 녕변 핵시설을 완전히 불능화하고, 미국이 요구한 대로 은하 2호 발사를 중지하였을 것이며, 미국이 크게 우려한 우라늄농축시설과 시험용 경수로도 당연히 건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2009년에 북미관계에서 그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면,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것이고, 그러했더라면 한반도 정세는 지금쯤 전혀 다르게 변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미관계는 정반대 방향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베이더가 연출한 오바마-이명박 ‘깜짝쑈 시나리오’

미국 국무장관이 방북하기를 바라는 북측의 요구를 사실상 거절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행동은, 한반도를 비핵화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생각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이더가 이끄는 “차관급 위원회에서는 녕변 핵시설의 불능화를 이행하기 위한 차기 단계의 행동에 관한 대북협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북측과 대화하지 않고 힘의 대결을 벌이겠다는 결정이었다.

‘중국통’으로 오래 일해오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데다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 담당 선임국장으로 임명된 직후 북미관계에 대해 헷갈렸던 제프리 베이더는 ‘초강대국에게 감히 도전하는 약소국’을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크게 오산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 오바마 행정부가 갓 출범한 2009년 2월 초까지만 해도 북측은 백악관에 들어앉아 ‘차관급 위원회’를 이끌며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사실상 주무르기 시작한 베이더의 정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북측은 베이더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베이더는 북미관계에 대해 헷갈렸으니 북측과 미국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북측의 은하 2호 발사를 앞두고 북미관계에서 긴장이 매우 높아지던 때, 백악관이 기껏 찾아낸 대응책은,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아니라, 2009년 4월 2일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 Summit) 중에 있는 각국 정상들의 기념사진 촬영시간을 이용하여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2분 동안 만나주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방미초청의사를 밝히는 ‘깜짝쇼 시나리오(surprise show scenario)’였다.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2분 깜짝쇼’의 연출가는 베이더 자신이었다. 베이더는 그 책에서 ‘2분 깜짝쇼’가 한미동맹에 대한 미국의 변함없는 태도를 북측에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고 강변하였으나, 북측은 그런 식의 ‘깜짝쇼’를 초등학생 수준을 넘지 못한 한심한 행동으로 보고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어놓으려는 북측은 2009년 4월 5일 마침내 위성운반로켓 은하 2호를 쏘아올렸고, 북측의 평화적 위성발사를 ‘범죄’로 몰아간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움직여 대북제재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런데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북측은 은하 2호를 쏘아올린 직후, 미국이 북측의 위성발사를 유엔안보리로 끌고 가서 대북제재결의를 채택하려고 부산히 움직이고 있을 때, 비공식 통로를 통해 백악관에 보낸 “사적인 연락(private meaasage)”에서 세 가지 조치를 추가로 취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베이더가 자신의 책에서 밝힌 북측의 세 가지 위협조치란 핵무기 폭발실험을 실시하는 것,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 경수로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우라늄농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처럼 초강경한 대미위협조치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자기에서 밀려오는 위협에 대응할 방책을 찾지 못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초조와 불안 속에서 무모하게도 ‘전략적 인내’에만 매달려 있었다.

빌 클린턴 방북에서 보스워즈 방북까지

이른바 ‘탈북현장’을 취재하겠다고 북중 국경지대에 나타난 미국 <커런트(Current) TV> 소속 미국인 여기자 두 사람이 2009년 3월 17일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어 북측에 잠입하다가 국경을 지키는 인민군 내무군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2009년 북미관계에서 미국인 여기자 억류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갓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가 북측과의 대화와 협상을 끊어버렸고, 오바마 행정부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북측이 밀어붙인 대미위협조치가 차츰 강도를 더해가던 날카로운 긴장국면에서, 평양에 억류된 미국인 여기자를 미국에 송환하기 위한 북측과 미국의 고위급 직접협상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북미관계에서 긴장을 해소하고 대화국면을 복원할 좋은 기회로 되기 때문이었다.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 당시 뉴멕시코주 지사 빌 리처드슨(Bill Richardson), 연방상원 외교위원장 존 케리(John F. Kerry)가 평양에 억류된 미국인 여기자를 송환하기 위해 방북하겠노라고 각각 자청해 나섰다. 그러나 2009년 4월 24일 북측은 억류 중인 미국인 여기자들을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6월 8일에는 북측 중앙재판소가 미국인 여기자들에게 노동교화형 12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백악관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백악관은 전직 부통령 앨 고어(Al Gore)를 평양에 보내겠다고 북측에 긴급히 알렸으나, 북측은 앨 고어가 아니라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을 보내라고 통보하였다. 평양에 억류 중인 두 여기자를 송환하려면 빌 클린턴을 보내라는 북측의 통보를 받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고위관리들 대부분이 빌 클린턴의 방북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억류기간이 길어지자 미국 여론이 들끓었고, 적국에 억류된 미국인을, 그것도 젊은 두 여기자를 ‘구출’하지 못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 미국 각계층에서 터져나오며 백악관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여기자 송환문제와 관련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벼랑끝에 몰렸고, 처음에는 빌 클린턴의 방북을 반대하였던 고위관리들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런데도 빌 클린턴의 방북을 끝까지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베이더였다. 그리하여 빌 클린턴은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도 받지 못한 채, 자기의 지지자인 부호가 빌려준 전용항공기를 타고 개인자격으로 2009년 8월 4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개인자격의 초라한 모습으로 평양에 나타난 빌 클린턴을 접견한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에 관한 구두친서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빌 클린턴의 방북에 대해서는 2009년 8월 10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빌 클린턴 방북의 숨은 그림’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접견을 받고 두 여기자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 빌 클린턴은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방북결과를 설명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2009년 8월 24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전직 대통령의 보고, 전현직 대통령의 밀담’과 2009년 9월 21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그들은 일 물리노에서 다시 만났다’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에 관한 구두친서를 전하였는데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측이 바라는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을 추진하지 않았고, 그 대신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만 추진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원래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은, 2009년 8월 4일 평양을 방문한 빌 클린턴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건의했고, 나중에 미국 국무부가 북측에게 공식 제안하였으나 북측이 거절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던 것인데, 북측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를 지닌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방북하는 조건으로 그의 방북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2009년 12월 8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파견한 특사방문단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친서를 들고 평양에 도착한 스티븐 보스워즈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성 김 당시 국무부 대북회담 특사(Special Envoy for North Korean Talks), 대니얼 러셀(Daniel A. Russell)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일본/코리아 국장(National Security Council Director for Japan and Korea), 찰스 루츠(Charles D. Lutes)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반확산전략 국장(Director for Counterproliferation Strategy), 마이클 쉬퍼(Michael Schffer) 국방부 동아시아 담당 부차관보(Deputy Assistant Secretary for East Asia)와 동행하였다. 이들의 방북에 대해서는 2009년 12월 28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평양에 나타난 특사방문단’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특사방문단이 이처럼 대통령 친서를 들고 평양을 방문하였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태도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그에 따라 북미관계는 대결상태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바마는 베이더를 두고두고 원망할지 모른다

미국 국무부는 2010년 4월 중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초청하여 뉴욕에서 보스워즈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북미고위급회담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미국 국무부가 직접 나서서 김계관 제1부상을 초청하지 않고 미국대외정책전국위원회(NCAFP)가 초청하는 형식을 취하고, 그 위원회가 주최한 행사에 김계관 부상이 참석하면서 실제로는 김계관-보스워즈 회담을 진행하려는 방안이었다. 당시 미국 외교가에서는 그 방안을 ‘북미 트랙 2 외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북미고위급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베이더가 쓴 책에 따르면, 북미고위급회담 계획이 무산된 까닭은 베이더 자신이 그 계획을 끝까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 “나는 그 당시 보스워즈-김 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에 대해 극도로 불편한 감정을 가졌다”고 썼다. 그는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커트 캠벨(Kurt Campbell)을 시켜 청와대 고위관리와 서로 연락하게 하면서 북미고위급회담 계획을 무산시키는 ‘막후공작’을 벌였다. 베이더의 ‘막후공작’이 통할 수 있었던 까닭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혹에 쌓인 천안함 사건을 무조건 북측의 소행으로 단정한 베이더는 북측의 ‘천안함 대남도발’로 격분한 청와대가 완강하게 반대하는 북미고위급회담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우겨댄 것이다. 하지만 베이더가 그처럼 완강하게 반대하였어도 북미고위급회담은 열릴 수밖에 없었으니, 그 사연은 이렇다.

<아사히신붕> 2011년 4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2011년 4월 17일 클린턴 국무장관은 청와대를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에게 6자회담을 재개하려 하니 남측과 북측이 먼저 수석대표회담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미국이 대북식량지원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2011년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로벗 킹(Robert King) 국무부 대북인권특사가 대북식량제공 사전준비를 위해 식량평가단을 이끌고 방북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이 마침내 ‘전략적 인내’를 포기하고 북측과 대화를 재개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전략적 인내’를 포기하고 대북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한 때와 베이더가 백악관에서 떠난 때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1년 4월에 있었던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에 대해서는 2011년 6월 6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대남폭로전술과 대미협상국면’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대북정책 전환에 따라, 2011년 7월 28일과 29일 뉴욕에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보스워즈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만나 제1차 북미고위급회담을 진행하였다.

베이더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가운데 여러 사람은 북측의 붕괴와 남측의 대북흡수통합이 북측의 핵추구에 대한 가장 현실성 있는 장기적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단기적 위협이나 중기적 위협에 충분히 대응할 근거가 아니다. 역사가 (북측이 붕괴하고 남측이 북측을 흡수통합하는) 제 갈 길로 들어설 때까지, 북측의 핵프로그램을 억제하고 동결하고 퇴화시키는 전략이 아직 필요하였다.”

베이더는 이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 허황한 거짓말들인 ‘북한붕괴설’과 ‘대북흡수통합설’을 굳게 믿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부쉬 행정부 시기에 국무부 군비통제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를 지내며 반북대결론자로 악명을 떨친 존 볼튼(John R. Bolton)에 버금가는 반북대결론자다. 그런 최악의 반북대결론자가 백악관에 들어앉아 대북정책을 주물렀으니 오바마 행정부가 북미양자회담과 6자회담을 모조리 거부하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를 거의 3년 동안 고집하였던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포기하고 2011년 7월 제1차 북미고위급회담에 나선 것은, 반북대결론자 베이더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 담당 선임국장직을 그만둔 2011년 4월 이후에야 가능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자승자박시킨 주모자는 ‘북한붕괴설’과 ‘대북흡수통합설’을 믿은 최악의 반북대결론자 베이더였다. 그 주모자의 작간에 휘말린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실현할 기회를 차버리고 근 3년 동안이나 허망하게도 ‘전략적 인내’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북미관계는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다. 대규모 북침전쟁연습에 열을 올린 미국 군부는 항모강습단을 서해에까지 들이미는 위험천만한 도발행동으로 한반도 위기지수를 끌어올렸고, 녕변 핵시설단지에 현대식 우라늄농축시설을 건설하고 확장, 가동해온 북측은 올해 시험용 경수로 완공을 앞두고 있다.

올해 11월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여 2013년 1월에 다시 집권한다 해도, 녕변 핵시설단지에서 우라늄농축시설과 시험용 경수로가 꽝꽝 돌아가는 조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실현하려면,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부쉬가 8년 동안 대통령 재직 중에 북미관계에서 겪은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심한 고통을 겪으며 베이더를 두고두고 원망할지 모른다. (2012년 5월 7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