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영화가 전해준 ‘계승의 역사’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소년기에 겪은 잊을 수 없는 체험

북측 언론매체들이 북측의 최고영도자 김정은 부위원장에 대해 이제껏 가장 자세히 보도한 자료는 2012년 1월 8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백두의 선군혁명위업을 계승하시여’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다. 그 기록영화는 김정은 부위원장의 풍모와 영도행적을 북측 인민들과 세상에 처음으로 자세히 알려준 매우 중요한 영상기록이다.

기록영화는 김정은 부위원장의 소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록영화에 나오는 해설에 따르면, 김정은 부위원장은 어렸을 적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짜놓은 일과표에 따라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김정은 부위원장이 이미 소년기부터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생활방식을 체득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가 소년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북측이 최고영도자의 탄생일이 언제인가를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1982년 1월 8일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김정은 부위원장이 소년기에 ‘고난의 행군’을 겪었음을 말해준다. 북측이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1990년대 후반기에 소년기를 보낸 김정은 부위원장이 잊을 수 없는 것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이다. 기록영화에 나온 해설에 따르면, 김정은 부위원장은 소년기에 겪은 자신의 잊을 수 없는 체험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지금도 ‘고난의 행군’ 시기 선군만이 우리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는 신념과 의지를 안으시고 한몸도 가정도 깡그리 선군에 바치시며 머나먼 전선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의 불굴의 모습을 되새겨보노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군 합니다.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는 장군님께서는 생신날마저 집에 돌아오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2월 16일을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으로 보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언제인가는 2월 16일에도 현지지도의 길에서 돌아오지 않으시는 장군님을 어머님과 함께 밤새도록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이중, 삼중으로 나라 안팎에 겹쌓인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 오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고 눈서리와 비바람을 맞으며 전선길을 걷고 또 걸었던 아버지의 간고분투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본 어린 아들의 정신세계는 어떻게 성숙되고 있었을까? 기록영화는 구체적으로 해설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고분투하는 모습은 그 아들의 정신세계를 깊은 곳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다. 1950년대 초 6.25 전쟁 시기에 불철주야 전쟁을 지휘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린 아들의 정신세계에 반제사상과 간고분투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깊이 새겨주었던 것처럼,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불철주야 전선길을 걷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아들의 정신세계에 선군사상과 간고분투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깊이 새겨주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그런 사상과 정신과 의지를 물려받은 아들이 청년기에 이르러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20세가 되던 2002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지 않고,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은 군사지휘관을 길러내는 5년제 교육기관이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동안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군사학을 학습, 연구하고 영군술을 연마하였다. 기록영화에 나온 해설은 김정은 부위원장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시작하시였다”고 밝혔다.

일체성 관계는 5년 동안 계승되었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재학한 5년 동안 김정은 부위원장은 다른 생도들보다 더 열심히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경대혁명가문의 명예가 그의 두 어깨 위에 얹혀있으니 다른 생도들이 한 걸음을 걸을 때 다섯 걸음, 열 걸음을 더 걸어야 하였다. 기록영화에 나온 해설에서 김정은 부위원장은 “나는 밤을 새워 일하는데 습관되여 일없습니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시절에 불철주야 학업과 훈련에 열중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는 그 대학의 전임교수들만이 아니라 군사지휘관들도 ‘외래교수’가 되어 생생한 실천경험을 생도들에게 가르친다. 군사지휘관들은 그 대학 졸업과 함께 임관하여 자기들의 뒤를 이을 후배들을 직접 가르치며 그들과 사제관계를 맺는 것이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출강한 군사지휘관들과 당시 그 대학에 재학 중이던 김정은 부위원장의 만남은, 김정은 부위원장을 ‘선군혁명의 계승자’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극적인 사변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배경설명이 요구된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출강하는 군사지휘관들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인민군대의 핵심역량이다. 만경대혁명가문 출신 김정은 부위원장과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군사지휘관들의 직접적 만남은, 만경대혁명가문과 만경대혁명학원의 관계가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계승되었음을 말해준다. 관계의 계승이란 무슨 뜻일까?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만경대혁명학원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혁명기에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된 전우들의 유자녀들을 위해 1947년 10월 12일에 세운 인재양성기지다. 1991년에 서울에서 출판된 『곁에서 본 김정일』이라는 제목의 책에 따르면, 일제의 탄압과 전쟁참화를 겪으며 뿔뿔이 흩어져 생사여부조차 알 길이 없는 그 유자녀들을 찾아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항일혁명투사들을 국내 및 해외 각지로 파견하던 날, 김정숙 여사는 그들을 붙들고 “결코 한 두 번 찾다가 없다고 되돌아서지 말고, 한 달이 지나도 좋고 두 달이 지나도 좋으니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기어이 찾아 데리고 오셔야 합니다”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파견원들이 어렵사리 찾아낸 옛 전우들의 유자녀들은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거지꼴로 길거리를 떠돌며 비참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정숙 여사는 거지꼴로 자신 앞에 나타난 옛 전우들의 아들딸들을 자택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한 달 남짓 함께 지내면서 친어머니처럼 보살펴준 다음에야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보내주었다. 김정숙 여사는 원생들에게 교복을 만들어 입히고, 김치도 담가주고, 원생들의 생일상까지 차려주었다. 항일혁명에서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김정숙 여사의 동지적 의리가 옛 전우들이 남기고 떠난 아들딸들에게 안겨주는 강렬한 사랑으로 타오른 것이다.

김정숙 여사는 생의 마지막 시기 2년 동안 만경대혁명학원 원생의 친어머니였고, 517명 원생들은 여사에게서 친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만경대혁명가문과 만경대혁명학원의 관계는 그처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일체성 관계로 맺어진 것이다. 당시 소년기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자택과 만경대혁명학원을 오가며 그런 일체성 관계가 맺어지는 가슴 뜨거운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원생들과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면서 일체성 관계의 중심에 있었다.

만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여사의 육친적 사랑이 없었더라면, 거지로 떠돌다가 어느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졸업생들이, 자기 목숨을 살려주고 당과 국가와 군대의 간부로 훌륭히 키워준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여사에게 절대적 충정을 바친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육친적 사랑과 절대적 충정은 어떤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생사운명을 한 가족처럼 엮어준 관계의 실체였던 것이다. 만경대혁명가문과 만경대혁명학원의 일체성 관계란 바로 그런 극적인 운명과 비범한 삶을 뜻하는 것이며, 오늘 북측에서 말하는 ‘사회주의 대가정’은 바로 그 일체성 관계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거대한 사회집단인 것이다.

만경대혁명가문 출신 김정은 부위원장과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군사지휘관들의 직접적 만남을 통하여 만경대혁명가문과 만경대혁명학원의 일체성 관계가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계승된 것은, 1940년대 후반에 맺어진 육친적 사랑과 절대적 충정의 관계가 2000년대 후반에 또 다시 계승되었다는 뜻이다. 5년 동안 지속된 그 계승과정에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군사지휘관들은 만경대혁명가문 출신 김정은 부위원장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하여 그의 풍모, 자질, 능력을 잘 알 수 있었다. 김정은 부위원장을 ‘선군혁명의 계승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 군사지휘관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시작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처음 군복을 입었던 12월 24일

2009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인민군에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대외비 문건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에 따르면, 김정은 부위원장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지휘관 3년제와 연구원 2년제를 전과목 최우등으로 마친 2006년 12월 24일 졸업증서와 기장을 받았다고 한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군복을 입던 날, 김정은 부위원장은 자신의 격동적인 심정을 담은 편지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드렸다. 2012년 1월 7일 <로동신문>에 실린 정론 ‘지구가 깨여진대도’에 인용된 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최고사령관 동지’라는 부름, 정말 불러보고 싶었던 부름이며 언제나 늘 마음 속에 안고 사는 부름입니다. 오늘은 군복을 입고 저도 불러봅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행복과 긍지를 어디에서 찾느냐는 다르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소리높이 자랑하고 싶은 행복과 긍지는 어떤 공직이냐, 어떤 군직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최고사령관 동지를 혁명무력의 최고 수위에 모신 혁명군대의 군복을 입었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2006년 12월 24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때로부터 15주년이 되는 특별한 기념일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최고사령관 추대 15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에 김정은 부위원장이 첫 군복을 입은 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민군 지휘부가 벌써 그 때부터 김정은 부위원장을 ‘선군혁명의 계승자’로 추대하려는 강한 의사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군복을 입은 김정은 부위원장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2년 동안 어디서 군사복무를 하였을까? 인민군 제5군단 예하 최전방 부대에서 야전지휘관으로 군사복무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평양방어사령부 예하 부대에서 야전지휘관으로 군사복무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민군 제5군단은 강원도 철원군에 배치된 중부전선 최전방 부대이며, 평양방어사령부는 ‘혁명의 수도’를 지키는 최정예부대다. 이런 이야기를 종합하면, 김정은 부위원장이 중부전선 최전방 부대에서 야전지휘관으로 군사복무를 한 뒤에 평양방어사령부 예하 부대로 전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영화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수표(서명)한 문건들을 보여주었는데, 2010년 1월 19일 인민군 총정치국이 작성한 ‘백두산 3대 장군의 령도사적을 빛내이기 위한 사업에 한생을 바쳐가고 있는 자료와 대책보고’라는 문건에 ‘동의합니다’라고 쓰고 그 밑에 수표한 것이 보인다. 인민군 총정치국이 작성한 문건을 결재하는 권한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에게 있으므로, 인민군 총정치국은 똑같은 문건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각각 상신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재와 김정은 부위원장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록영화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2009년부터 인민군 각급 부대들을 시찰하면서 인민군을 직접 지휘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2009년 4월 5일 북측이 인공위성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을 때, 김정은 부위원장은 요격설을 퍼뜨린 미국과 일본의 도발적 군사행동을 물리적으로 제압할 ‘반타격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하였다.

공격선에 다시 나간 951호 전차

“오늘은 선군혁명사에 특기할 참으로 의의 깊은 날입니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1월 5일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에서 기동사격훈련을 지도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년 전 당시 북측 언론매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105땅크사단 기동사격훈련을 지도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도한 바 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무척 감동 깊은 표정으로 오늘은 선군혁명사에 특기할 참으로 의의 깊은 날”이라고 말한 사연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그 말은, 2010년 1월 5일의 기동사격훈련에서 선군혁명사에 특기할 사변이 김정은 부위원장에 의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김정은 부위원장에 의해 일어난 특기할 사변은 무엇이었을까?

<로동신문> 2012년 1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0년 1월 5일 기동사격훈련을 마치고 막 돌아온 951호 전차를 바라보다가 그 전차를 다시 공격선으로 진출시키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2012년 1월 8일에 방영된 기록영화에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951호 전차를 직접 조종하면서 공격선으로 나아가는 장면, 951호 전차가 질주하면서 전차포를 쏘는 장면, 기동사격훈련을 마친 뒤 전차 위에서 전차병들, 지휘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 등이 들어있다. 또한 2010년 1월 5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현장사진들 가운데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직접 모는 951호 전차가 ‘중앙고속도로 춘천-부산 374km’라고 씌여진 대형 표지판 앞을 질주하는 장면을 찍은 현장사진이 있다.

2010년 4월 25일 북측에서 인민군 창건일로 지키는 건군절 78주년을 맞아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 ‘텔레비죤 기념무대’에 출연하여 체험담을 이야기한 인민군 군인들 가운데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 전차병 김영권이 그 현장사진에 담긴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 전차병은 2010년 1월 5일에 진행한 기동사격훈련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땅크병들은 서울, 대전, 부산이라고 써놓은 훈련장 푯말을 단숨에 지나, 나타나는 정황들을 대담하게 극복하면서 질풍같이 땅크를 몰아갔습니다. 땅크에서 장쾌한 적 명중포성이 울릴 때, 남조선 해방의 만세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김정은 부위원장이 951호 전차를 직접 몰고 공격선에 나가 남진예상로를 질주하며 포사격을 한 것은, 만일 미국이 한반도에서 북침전쟁을 도발하는 경우 비대칭전력과 비대칭전법으로 전격전을 벌여 서울, 대전, 부산을 단숨에 점령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지금 북측이 평화통일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있지만, 만일 미국이 북침전쟁을 도발할 경우 지체없이 무력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이 ‘키 리졸브/독수리’ 훈련 같은 북침전쟁연습을 자꾸 벌여놓는 것은 북측을 자극하여 그들의 무력통일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은 자기들에게 참담한 전쟁패배를 안겨줄 북침전쟁연습 같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군사도발행동을 즉각 중지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실천적 조치를 취하여야 마땅하다.

왜 하필이면 수륙양용전차를 몰았을까?

기록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김정은 부위원장이 직접 몰고 공격선에 진출한 951호 전차는 PT-85 수륙양용전차다. 이 수륙양용전차는 북측에서 독자 개발한 것이어서, 전 세계에서 북측에만 있다. 전차병 4명이 탑승하는데, 전차무게가 다른 중전차 무게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20t이어서 가볍고 날렵한 경전차다. 85mm 전차포와 대전차미사일, 7.62mm 기관총과 14.5mm 기관총을 장착하고 평지에서 시속 60km로 달리고, 물에서 시속 10km로 달린다. 인민군은 그런 PT-85 수륙양용전차 560대를 최전선에 집중배치해놓았다.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은 주력전차인 폭풍호 전차를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천마호 전차를 보유하였으며, 대형 타이어가 네 개 달린 차륜식 무인전차까지 보유한 최정예 전차사단이다. 그런데 김정은 부위원장은 폭풍호 주력전차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PT-85 수륙양용전차를 몰고 공격선에 나갔을까?

6.25 전쟁사가 그 사연을 말해준다. 북측의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가 집필하여 1981년에 발행된 책 ‘조선전사 제25권’에는 6.25 전쟁 시기 인민군이 벌였던 네 차례의 도하전투가 기록되어 있다. 1950년 6월 25일 임진강 도하전투, 7월 3일 한강 도하전투, 7월 14일 금강 도하전투, 8월 3일 낙동강 도하전투다. 미국군의 공중폭격으로 모든 교량이 파괴되어 수많은 강과 하천을 계속 건너야 했던 인민군에게는 도하장비도 없었고 수륙양용전차도 없었다. 인민군이 남진하면서 매우 힘든 도하전투를 벌일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당시 미국군과 한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는데, 남북으로 160km, 동서로 80km에 걸쳐 타원형처럼 구축된 낙동강 전선에서 무려 2개월 동안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6.25 전쟁 중에 교전쌍방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이 낙동강 전선에서 벌어진 공방전이다. 미국은 낙동강 전선이 뚫리면 한반도를 포기하고 곧바로 퇴각, 철군하는 최후의 극비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만일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수륙양용전차가 있었다면, 진격속도가 훨씬 빨라져 낙동강 전선이 미처 구축될 틈도 없이 전쟁은 한 달 안에 끝나버렸을 것이고, 한반도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었을 것이다.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은 당시 38도선을 지키던 한국군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도하한 후 경기도 오산에서 격돌한 미국군 스미스 특공대를 궤멸시켰고, 부산에 상륙하여 북상하던 미국군 제24보병사단을 포위, 궤멸시키고 대전을 점령하는 전격전을 주도하며 계속 남진하였으나, 결국 낙동강 전선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여야 하였다.

명백하게도, 6.25 전쟁 시기에 인민군의 진격속도를 늦춘 결정적인 요인은 한반도 곳곳에 널려있는 천연장애물인 강과 하천이었다. 인민군이 PT-85 수륙양용전차를 독자 개발하여 최전선에 560대나 집중배치한 까닭이 거기에 있으며, 인민군이 2002년에 폭풍호 주력전차를 개발할 때, 수중 4.5m를 주행할 수 있는, 전 세계 전차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도하기능을 지닌 무쇠철마로 만들었던 까닭도 역시 거기에 있다.

기록영화에 나온 해설에 따르면, 김정은 부위원장이 모는 수륙양용전차가 ‘중앙고속도로 춘천-부산 374km’라고 씌여진 대형 표지판 앞을 질주하며 포사격을 하는 광경을 바라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대장이 울린 포성은 조국통일위업과 주체혁명위업을 백두산 총대로 굳건히 계승완성해나갈 드팀없는 신념과 의지를 내외에 선언한 승리의 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새해 첫날 군부대 시찰일정은 계승의 역사였다

2012년 1월 1일 김정은 부위원장이 과연 새해 첫날 군부대 시찰일정을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세계 정치계와 언론계의 이목이 쏠렸던 바로 그 시각, 그가 찾아간 곳은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이었다. 2012년 1월 7일 <로동신문>이 보도한 정론 ‘지구가 깨여진대도’에는 새해 첫날 군부대 시찰일정을 그 전차사단에서 시작한 김정은 부위원장이 전차사단 지휘관들에게 한 말이 실렸다.

“오늘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았을 때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겠는가? 105땅크사단에 가겠다고 말씀드리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동무들을 찾아왔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동무들을 만나고 왔다고 장군님께 꼭 보고드리겠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자취를 이어 ‘선군혁명의 전선길’을 그와 똑같이 걸으려는 절절한 심정이 담긴 말이다.

오중흡7련대 칭호를 수여받은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은 1960년 8월 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혁명을 영도하기 시작한 전투부대이며, 김정은 부위원장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직후 2007년 1월 어느 날 군복을 입고 인민군 5군단 예하 중부전선 최전방에서 야전지휘관으로 첫 군사복무를 시작하였던 전투부대이며, 2010년 1월 5일 김정은 부위원장이 전차를 몰고 공격선을 돌파하는 것으로 선군혁명계승을 선포한 전투부대이며, 2012년 1월 1일 선군혁명을 계승한 그가 새해 첫날 군부대 시찰일정을 시작한 유서 깊은 전투부대다.

김정은 부위원장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만경대혁명가문과 만경대혁명학원의 일체성 관계를 계승하였던 것처럼, 그는 제105땅크사단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을 계승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병을 앓으면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걷고 또 걸었던 전선길, 몰아치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그 머나먼 전선길에 나선 김정은 부위원장은 오늘도 북녘땅 어느 곳에서 계승의 역사를 펼쳐가고 있을 것이다.  (2012년 2월 6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