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부터 2011년까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91년 12월 24일과 12월 25일

201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하순,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에 즈음하여 세계 정치계가 양분되었다. 그의 서거를 애도하고 조의를 표명한 각국 정부와 정당들이 있었고, 조의를 표명하지 않고 외면한 각국 정부와 정당들이 있었다. 양분현상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에 즈음하여 세계 정치계에 나타난 양분현상의 본질은, 반제자주진영과 그 연대세력을 한 편으로 하고 제국주의진영과 그 예속세력을 다른 한 편으로 하는 정치대립이라는 점이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해체되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던 진영대립구도가 세계 정치계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소련이 무너진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에 즈음하여 현실로 입증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91년까지 냉전시기에 사회주의진영과 제국주의진영이 대립하였던 것과 달리,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된 1991년 이후 사회주의진영 대 제국주의진영의 기존 대립구도는 반제자주진영 대 제국주의진영의 새로운 대립구도로 재편되었다. 냉전시기에 존재하였던 사회주의진영 대 제국주의진영의 대립이 소련과 미국의 정치군사적 대결을 중심으로 조성된 국제질서였다면, 1991년 이후 재편된 반제자주진영 대 제국주의진영의 대립은 북측과 미국의 정치군사적 대결을 중심으로 재편된 새로운 국제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1991년 이후 북측과 미국의 정치군사적 대결을 중심으로 재편된 반제자주진영 대 제국주의진영의 새로운 대립구도를 살펴보면, 북측이 미국과 대결하며 반제자주진영을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미국과 때로 갈등하고 때로 협력하였던 중국과 러시아는 1991년 이후 반제자주진영을 이끌어갈 영도국의 지위를 차츰 상실하였다. 1991년 이후 반제자주진영을 이끌어온 영도국은, ‘핵문제’를 놓고 미국과 정치군사적 전면대결을 벌인 북측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91년 이후 북측을 중심으로 재편된 반제자주진영의 영도자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사실이다. 반제자주진영 대 제국주의진영의 대립으로 재편된 세계 정치계의 중심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 있었다. 전 세계 수많은 국가수반들 가운데 그 누가 세상을 떠난다 해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에 즈음하여 조성된 것과 같은 애도와 외면의 대치정국이 세계 정치계에 조성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전 세계 수많은 국가수반들 가운데 김정일 국방위원장만큼 반제자주사상에 투철하고, 반제자주진영을 정력적으로 이끈 영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소련이 무너지고 세계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된 운명의 날은 199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25일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되기 하루 전인 1991년 12월 24일 북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와 소련 붕괴 및 사회주의진영 해체가 불과 하루 시차로 있었던 것은 어떤 시기적 우연이었을까? 명백하게도, 그것은 시기적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었다. 그 역사적 필연이 무엇인지 알려면, 2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정세격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되는 미증유의 격변은 한반도 정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1990년 9월 30일 당시 사회주의진영의 영도국이었던 소련이 남측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92년 8월 24일에는 당시 사회주의진영의 또 다른 영도국이었던 중국이 남측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격변은 북측에게 불리한 국제정세를 조성하였다.

북측에게 불리하게 조성된 국제정세를 바라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 미국은 남측을 앞장세워 남북 유엔동시가입을 밀어붙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남북 유엔동시가입은 둘로 갈라진 적도 없고, 둘로 갈라질 수도 없고, 둘로 갈라져서도 안 되는 남측과 북측이 국제법상 두 개의 분단국가로 갈라지는 분단의 합법화를 뜻하였다. 조국통일을 지상과업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전력해온 북측은 국제법상 두 개의 분단국가로 갈라지는 유엔동시가입을 배격하였다. 남북 유엔동시가입을 용납할 수 없었던 북측은 남북이 하나의 국가적 지위를 갖고 유엔에 가입하자는 대안을 제시하였으나, 북측의 대안을 거부한 남측은 북측이 유엔동시가입을 끝내 반대한다면 남측만 단독으로 가입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당시 반제자주노선에서 이탈한 소련과 대미협력에 힘쓰고 있었던 중국이 남측을 단독으로 유엔에 가입시키려는 미국의 책동을 저지해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일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남측 단독가입책동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여 남측이 단독으로 유엔에 가입하였는데 북측이 미국의 방해로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경우, 북측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었다. 자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흉계를 간파한 북측은 남북이 하나의 국가적 지위를 갖고 유엔에 가입하자는 제안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북측 단독으로 유엔가입을 신청하였다. 북측이 남측보다 먼저 단독으로 유엔가입을 신청한 것은, 남북 유엔동시가입이 남북 합의에 의한 동시가입이 아니라 미국이 강제한 분리가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북측에게 불리한 국제정세의 파장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회주의진영 해체는 북측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냉전시기에 북측이 물물교환방식과 사회주의우호가격으로 수입해온 석유, 코크스, 나프타 같은 전략물자들을 현금결재로 수입해야 하였다. 대외무역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경제노선을 견지해오던 북측에게는 전략물자를 수입할 현금이 없었다. 1990년대에 전략물자 수입격감에 따른 북측의 혹심한 경제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북측에게 불리한 국제정세의 파장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소련 붕괴와 사회주의진영 해체로 기고만장해진 미국은 사회주의국가들을 고립시키고 압살하려는 전방위 공세를 가하였는데, 1990년대에 미국이 전방위 공세를 집중한 대상이 바로 북측이었다.

그처럼 불리해진 정세에서 다른 사회주의국가 같았으면, 미국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제국주의진영의 전방위 공세를 잠시 피해보려고 하였을 것이다. 강적이 집중공격을 가해오면 일단 피했다가 반격기회를 노리는 것이 동서고금에 공인되다시피한 전략이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처럼 공인된 전략을 뒤집어버린 사변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핵문제’를 두고 미국과 정치군사적으로 전면대결을 개시한 북측의 대미공세였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미국이 북측의 ‘핵문제’를 걸고들면서 대북공세를 가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북측과 미국이 ‘핵문제’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여온 오랜 과정을 분석하면 정반대의 진실이 나타난다. 20여 년 전 국제사회에 ‘북핵문제’라고 알려진 북미대결은, 당시 북측에게 불리한 정세변화를 틈탄 미국이 북측을 고립시키고 압살하려는 대북공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1990년대에 몰아친 미국의 분단 합법화 책동, 북측의 경제난, 제국주의진영의 전방위 공세를 정면돌파하기로 결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개한 주도적이고 선제적인 대미공세였다. 1991년 12월 24일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도적이고 선제적인 대미공세, 그것이 바로 ‘북핵문제’였던 것이다.

핵통제권을 가진 최고사령관

핵개발은 비전문가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아무 나라나 손을 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매우 복잡험난하게 전개되는 핵개발 단계를 간략하게 표현하면, 핵물질 생산→기폭장치 설계→핵탄두 소형화→핵탄두 탑재 미사일 개발로 이어지는 네 단계를 거치는 것인데, 북측은 각 단계마다 제기되는 수많은 기술적 난제들을 다른 나라의 기술지원으로 풀 수 없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였다.

핵개발 네 단계를 살펴보면, 우선 국가 차원에서 과학기술력을 총동원해야 핵개발에 착수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약 20년에 걸쳐 수많은 유능한 수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기술자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이처럼 과학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약 20년 동안 힘써야 하고, 핵개발을 위해 또 다시 약 20년 동안 힘써야 하므로, 네 단계에 걸친 핵개발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40년 동안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북측의 핵개발 단계를 살펴보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추대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북측의 과학기술력을 총동원하여 핵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남측의 정보자료에 따르면, 북측의 핵개발사업에 과학자 200명, 공학자 3,000명, 기술자 6,000명이 참가하였으며, 대규모 핵시설 20여 개소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느린 속도로 추진되던 북측의 핵개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자 진척속도를 부쩍 높이며 연이어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 당시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제출한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북측이 초기단계 핵장치 개발에 성공한 때는 1990년이었다. 1990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기 1년 전이므로, 그가 초기단계 핵장치 개발에 성공한 직후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될 때부터 이미 핵통제권을 가진 최고사령관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초기단계 핵장치 개발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핵탄두 소형화 단계를 거쳤으며, 핵탄두를 탑재하는 최신형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로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진해온 핵개발이 완성되었는데, 그 때가 북측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난의 행군’을 하던 1990년대 중반이었다. 북측이 핵보유국 지위를 갖고 미국과 당당하게 맞서 핵협상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로다.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0년대 후반부터 핵개발을 집중적으로 지도하지 않았다면, 북측은 1990년대 중반까지 핵개발을 완성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일 북측이 1990년대 중반에 핵개발을 완성하지 못하였다면, 대북침공기회를 노리던 미국은 당시 ‘고난의 행군’을 하며 혹심한 시련을 겪던 북측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고 오판하고 결국 북침전쟁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에 따라 한반도 전역이 전쟁참화로 파괴되었을지 모른다. 북측 인민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미국의 전쟁도발위험으로부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지켜준 평화의 수호자라고 칭송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핵개발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원래 목적은, 미국의 북침전쟁도발을 봉쇄하고 북측의 사회주의와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1990년대 중반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과 미국의 북침전쟁위험을 1970년대 후반에 예견하고 그에 대비하여 핵개발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진한 핵개발은 그것을 저지하려는 미국을 결정적으로 자극하여 대북경제제재와 북침전쟁위험을 되레 더 강화고조시켰다. 지금 핵개발을 추진 중인 이란이 미국과 제국주의진영으로부터 심각한 경제제재와 무력침공위협을 받게 된 것처럼,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북측도 오늘 이란이 당하는 것처럼 미국으로부터 심각한 경제제재와 무력침공위협을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로 핵개발을 완성한 것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북침전쟁도발을 봉쇄하고 북측의 사회주의와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하는 데서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하였지만, 그가 핵개발을 추진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핵개발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핵개발의 목적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데 있었다. 핵개발의 목적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는 말은, 분단체제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적 모순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 실상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들린다. 분단체제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진한 핵개발의 목적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단체제의 실상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설명이 요구된다.

남측과 북측이 한반도 분단을 합의한 적도 없고,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므로, 분단체제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남측과 북측이 분단을 합의하지도 않았고 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분단체제를 성립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정전체제다. 정전체제와 분단체제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정전체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분단체제도 존재하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정전체제는 분단체제의 존재근거다. 그러므로 정전체제 철폐는 분단체제를 철폐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된다.

정전체제를 철폐하는 방도는 두 가지다. 한 가지 방도는 정전당사자들이 정치적 합의에 따라 평화적으로 철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대치자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비평화적으로 철폐하는 것이다. 자주적 평화통일을 국가적 지상과업으로 정한 북측은 위의 두 방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지 않고 두 가지 방도를 모두 가능성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북측과 정반대로, 미국에게는 정전체제를 철폐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되레 정전체제를 영구화하려고 획책하였다. 미국이 정전체제 철폐문제를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북측의 군사력이 약화된 때를 노리다가 북침전쟁으로 정전체제를 철폐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바랐던 것처럼, 북측의 군사력이 약화된 적은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북측의 군사력은 미국의 예상을 깨고 지속적으로 증강되었으므로, 지난 시기 미국은 여러 차례 시도하였던 북침전쟁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정전체제 유지에 매달렸다. 미국이 정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도는 자국 무력을 남측에 배치하고 북침전쟁연습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것이다. 오늘날 정전체제는 오래 전에 무효화된 정전협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화된 주한미국군 주둔과 지속적인 북침전쟁연습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전체제를 철폐하기 위해 주한미국군 철군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면, 우선 정전체제를 철폐해야 하는데, 정전체제 철폐는 주한미국군 철군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군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선차적 과업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0년대 후반에 핵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목적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첫 공정은 당연히 주한미국군 철군으로 설정되었다.

통일국가건설위업의 첫 단계에서 겪은 시련과 역경

미국이 주한미국군 철군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1970년대에 미국이 주한미국군 주둔문제를 논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베트남전쟁으로 급증한 군사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감군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남측에 배치한 미국군을 감군하면서도, 대만에 배치한 미국군은 철군하였다. 한반도의 분단과 달리, 중국의 분단은 정전체제에 의해 유지되는 분단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대만에 배치한 미국군을 철군하였어도 중국의 통일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이 대만에 배치한 미국군을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중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이 핵보유국 지위를 갖지 못하였다면, 미국은 대만에 배치한 미국군을 유지하였을 것이고 중국을 분열, 붕괴시키기 위해 적대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만에 배치된 미국군을 철군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중국의 핵개발 완성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후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중국의 핵개발 완성으로 대만에서 미국군이 철군한 동북아시아 정세변화가 놓여있었다. 자주적 평화통일을 가장 중대한 국가전략목표로 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개발을 완성하여 핵보유국 지위를 갖는 것만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정전체제를 철폐할 현실적인 방도라고 생각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핵개발은 핵개발 완성→주한미국군 철군→정전체제 철폐→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통일국가건설위업의 첫 단계인 것이다.

1990년대는 당시 핵개발 완성의 마지막 단계를 지휘하고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시련과 역경의 시기였다. 미국의 집요한 정찰과 감시, 악착같은 봉쇄와 방해를 받으면서, 그리고 미국과의 두 차례 전면전 위기,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서거,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고난의 행군’ 등으로 거듭되는 혹심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핵개발의 가장 어려운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여야 하였던 북측의 고충은 얼마나 심했으며, 그처럼 힘겨운 핵개발을 20년에 걸쳐 잠시도 쉬지 않고 지휘해야 하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어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다른 나라 통치자들 같으면, 그처럼 혹심한 시련과 역경을 피하기 위해 핵개발을 일시적으로 중지하였겠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지라는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는 1990년대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 통일국가건설위업을 위해 간고분투하였던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1990년대가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핵개발의 가장 어려운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기 위해 간고분투한 시기였다면, 2000년대는 핵보유국 지위를 갖고 미국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치열한 핵협상 공방전을 벌인 시기였으며, 1990년대에 겪었던 경제난을 극복하고 사회주의강성부흥을 추구한 시기였다. 북측에서 말하는 사회주의강성부흥이란,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된 이후 중국과 러시아에서 사들이는 수입량이 급감하였던 석유, 코크스, 나프타 같은 전략물자들을 자체로 해결하는 성과를 이룩하였을 뿐아니라, 최신공학기술을 자력으로 개발하여 각급 생산체계를 CNC로 개조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마지막 강타로 제압한 버티기전술

북측이 세계 무대에 핵보유국으로 등장하였는데도, 미국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북미 핵협상을 끊임없이 공전시키는 잔꾀를 부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이 북미 핵협상을 공전시키는 잔꾀를 끝장내기 위해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하였다. 그가 내린 결정은 연속타격으로 미국을 압박하여 북미 핵협상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첫 번째 연속타격은 2006년 7월 4일 미사일 집중발사훈련과 10월 9일 지하핵실험을 연속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두 번째 연속타격은 2009년 4월 5일 인공위성 발사와 5월 25일 지하핵실험을 연속적으로 실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처럼 연속타격을 4년 동안에 두 차례나 얻어맞고서도 북미 핵협상을 공전시키며 계속 버텼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마지막 강타로 미국의 버티기전술을 제압하고 미국을 북미 핵협상에 끌어내야 하였는데, 마지막 강타도 이전처럼 연속타격전술이었다. 미국의 버티기전술을 제압한 마지막 강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2010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진행된 인민군 열병행진에서 최신형 초강력미사일을 공개한 것이다. 5축10륜 발사차량에 실린, 사거리가 3,500km나 되고, 탄두부가 우유병 꼭지처럼 생긴 다탄두 미사일인데, 그런 모양의 탄두부에는 우라늄 핵탄두가 탑재된다.

마지막 강타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2세대 원심분리기 2,000기가 돌아가는 초현대식 우라늄농축시설을 영변 핵시설단지 안에 초고속으로 완공한 북측은, 2010년 11월 12일 미국의 핵과학자를 불러 그 핵시설을 보여주면서 저농축우라늄이 아니라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농축도가 20% 이하면 저농축우라늄이고, 85% 이상이면 고농축우라늄인데, 고농축우라늄은 당연히 핵무기 제조에 쓰인다. 2002년 9월 북측이 우라늄농축시설을 건설하였음을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미국은 그 시설이 저농축시설이겠거니 여기고 안심하였는데, 북측이 이제껏 고농축시설을 가동해왔다니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북측이 2010년 10월 10일 우라늄 핵탄두를 탑재하는 다탄두 미사일을 공개하고, 11월 12일 고농축우라늄을 제조하는 초현대식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한 것은, 사거리 3,500km의 다탄두 미사일에 탑재할 우라늄 핵탄두를 급속히 생산하고 있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미국이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플루토늄 핵탄두를 생산하는 핵시설은 분산, 은폐하기 어렵지만, 우라늄 핵탄두를 생산하는 핵시설은 얼마든지 분산, 은폐할 수 있으므로, 미국은 북측의 우라늄 핵탄두 생산을 저지하기는커녕 그 핵시설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다. 이제껏 북미 핵협상에서 미국은 자기들의 정찰과 감시에 노출된 북측의 핵시설을 폐기해야 한다고 줄곧 요구해왔는데, 미국의 정찰과 감시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북측의 우라늄 핵시설은 존재 자체가 오리무중이므로 북미 핵협상을 진행한들 아무런 논의도 하지 못한다. 미국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북측의 비밀핵시설에서 무기급 핵물질이 급속히 생산되고 있으니, 미국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적인 날을 닷새 앞두고

2009년에 연속타격을 얻어맞고서도 ‘전략적 인내’에 매달리며 버텨오던 미국은 2010년 11월에 마지막 강타를 얻어맞고 버티기전술을 포기하였다. 2011년 7월과 10월 뉴욕과 제네바에서 각각 북미 고위급회담이 진행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의 버티기전술을 마지막 강타로 제압하고 미국을 북미 핵협상으로 끌어낸 정치적 승리였다.

놀랍게도, 2011년 10월 24일과 25일 제네바에서 진행된 제2차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과 미국은 10년이 넘도록 미국의 잔꾀로 공전되어온 핵협상을 사실상 결속하였고, 2011년 12월 22일에 열릴 제3차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핵협상 일괄타결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12월 22일로 예정되었던 핵협상 일괄타결 발표야말로 북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한반도 정세를 뒤집어놓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사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핵협상 일괄타결을 발표하는 역사적인 날을 불과 닷새 앞둔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너무도 뜻밖에 서거하였다. 1991년부터 2011년까지 20년 동안 온갖 시련과 역경을 헤쳐오며 핵개발을 완성하였고, 핵보유국 지위를 갖고 미국을 상대로 당당하게 핵협상을 벌였고, 미국의 버티기전술을 제압하고 핵협상을 일괄타결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런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그가 일괄타결 발표를 닷새 앞두고 갑자기 서거하였으니, 그 사정을 아는 북측에서 어찌 가슴을 치며 오열하지 않았겠는가.

핵협상 일괄타결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애 마지막 시기에 남긴 유산이며, 통일국가건설은 그가 생애 마지막 시기에 남긴 유훈이다. 그 유산과 유훈을 후대에게 남기고 자신이 사랑했던 인민들과 영결한 그는 지금 조국의 대지 위에 생전의 모습으로 누워있다. 비록 그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으나, 그가 1991년부터 2011년까지 2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결시킨 핵협상 일괄타결은 머지않아 통일국가건설의 대격변을 일으킬 것이다. 바로 그런 대격변의 전망을 안고 이 강산에 2012년 새해가 밝았다. (2012년 1월 2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