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만에 부활한 도둑정치 반대투쟁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특별보상원정군의 애너코스티아강변 점거투쟁

미국 수도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포토맥강과 애너코스티아강이 만나는 아우라지에 자리잡고 있다. 두 물줄기는 워싱턴 남쪽 끝자락에서 만나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79년 전인 1932년 6월 워싱턴 연방의사당 남쪽에 있는 애너코스티아강변으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애너코스티아공원이 조성되기 전이라서 당시 그곳은 물웅덩이와 잡초언덕밖에 없는 벌판이었다. 군중들은 각종 폐기물을 가져가 그 벌판에 올망졸망한 판잣집을 짓고 무기한 점거투쟁을 시작하였다. 점거투쟁에 참가한 군중은 날로 불어나 43,000명에 이르렀고, 점거지역은 드넓은 빈민촌으로 변했다.

미국 수도에서 무기한 점거투쟁을 벌인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종전과 더불어 퇴역한 참전군인 17,000여 명과 그 가족 및 지지자들 26,000여 명이었다. 그들이 무기한 점거투쟁을 벌인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 연방정부가 참전군인 특별보상금(bonus) 지급을 거부한 것이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파탄이 몰고온 극심한 궁핍과 빈곤이었다.

1929년 9월 4일에 일어난 주가폭락이 10월 29일 뉴욕 주식시장을 무너뜨렸고, 그로써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자본주의나라들은 미증유의 경제파탄에 빠졌으니 이를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 한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미국의 산업생산은 -46% 포인트, 대외무역은 -70% 포인트 곤두박질쳤고, 실업은 607% 포인트 치솟았다.

하루아침에 일자리와 집을 잃고 거리로 쫓겨난 극빈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절망과 고통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공황기 1930년대에 미국 각지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빈민촌이 생겨났는데, 미국인들은 그 빈민촌들을 후버촌(Hooverville)이라 불렀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제31대 대통령으로 재직한 헐벗 후버(Herbert C. Hoover)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참전군인들에게 특별보상금 지급증서까지 발행한 미국 연방정부는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자 지급을 거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와 집을 잃고 길거리로 쫓겨난 참전군인들은 특별보상금마저 떼어먹히게 되자 워싱턴으로 몰려가 점거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932년 애너코스티아강변 점거투쟁에 참가한 군중은, 미국사에 특별보상원정군(Bonus Expeditionary Force)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참전군인들이었기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1932년 6월 17일 미국 연방상원에서 참전군인 특별수당 지급안이 부결되자, 애너코스타강변에서 점거투쟁을 벌이던 특별보상원정군은 격분하여 의사당으로 진출하는 시위투쟁에 나섰으나, 미국 연방정부는 그들의 절박한 요구에 총칼로 대답하였다. 1932년 7월 28일 전차 6대를 앞세운 2개 보병연대병력 4,000명이 점거투쟁현장에 출동하였다. 잔인한 진압이었다.

진압군을 이끌고 현장에 출동한 지휘관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cArthur)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였고, 6.25전쟁 때는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도 성차지 않아 핵폭탄 대량투하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보다 몇 십배 더 참혹한 핵참화를 한반도에 들씌우려 날뛰었던 극악한 반공광신자 맥아더는 이미 1932년에 애너코스티아강변에서 생존권을 부르짖는 미국인들을 총칼로 짓밟은 민중의 적이었다.

전차를 앞세우고 쳐들어온 진압군에게 무참히 짓밟힌 특별보상원정군과 그 가족 및 지지자들 43,000명의 운명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진압군의 강제해산 이후 그들의 행적은 미국사에 나오지 않는다. 다른 후버촌으로 뿔뿔이 흩어져 절망과 고통을 안고 한많은 생을 살았을 것이다.

79년만에 또 다시 일어난 대공황

전차를 앞세운 진압군이 애너코스티아강변 점거투쟁을 짓밟은 때로부터 79년이 지난 2011년 9월 17일 “월 스트릿을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는 외침이 뉴욕 맨해튼에서 들려왔다. 주목하는 것은, 1932년 애너코스티아강변 점거투쟁과 2011년 월 스트릿 점거투쟁의 발생원인이 같다는 사실이다. 79년 시간격차를 두고 일어난 그 두 점거투쟁의 공통적인 발생원인은 대공황이다.

158년 역사를 가진, 자산규모 6,000억 달러의 거대한 투자회사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가 2008년 9월 15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당했는데, 그 파산은 1929년 10월 29일 뉴욕 주식시장이 주가폭락으로 무너진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로부터 79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 붕괴로 대공황이 일어난 것처럼, 2008년 한 해 동안 리먼 브라더스를 비롯한 대형 투자회사들은 물론 대형 보험회사들과 대형 저당회사들의 연쇄파산으로 사실상(de facto) 대공황이 일어났다.

금융권 연쇄파산으로 사실상 대공황이 일어나자, 미국 연방정부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금융권을 회생시키려 긴급구제금융을 투입했다. 하지만 구제금융투입은 미봉책이었다. 경제지표를 보면, 사실상 대공황이 이미 2008년 9월에 일어났는 데도, 미국 연방정부는 대공황을 대침체(Great Recession)라고 둘러대었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은 일시적인 경기후퇴라고 둘러대었다. 대공황을 대침체라고 둘러대며 지내온 지난 3년 동안 미국인들은 극심한 궁핍과 빈곤으로 내몰렸다.

2011년 10월 현재 미국에서 구직단념자를 포함한 실질실업률은 16%에 이르렀는데, 특히 20-24세 이르는 미국 청년층 가운데 28%가 대학에도 다니지 못하고 직업도 없는 절망상태에 빠져 있다. 미국 인구 3억명 가운데 4,900만명이 굶주리거나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전국에 분산배치된 노숙자 수용소들에서 20만 가구가 연명하고, 정부가 발행하는 식품지원금(Food Stamp)에 의존하는 극빈층은 2011년 3월 현재 4,458만7,000명이다. 이제 국제구호단체들은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미국인들을 위해 긴급구호물자를 보내야 할 형편이다.

한국에서 지금 그런 것과 똑같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미국인들은 쉽게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각종 범죄에 빠지거나 자살로 생을 마친다. 사실상 대공황이 2008년 9월에 시작된 이후 3년 동안 미국의 정신질환 발병률, 범죄율, 자살률이 급증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극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1929년 대공황 당시 최상위 부유층 1%의 소득은 전체 소득 가운데 22.35%이었는데, 2007년 최상위 부유층 1%의 소득은 23.05%였다. 지금 미국 부유층 10%가 미국 전체 자산의 69.5%를 거머쥐고 있다. 미국의 경제활동인구 1억5,230만4,000명 가운데 최상위 부유층은 1.0%(152만4,000명)이고, 중산층은 8.9%(1,360만명)이고, 하위 서민층은 90.1%(1억3,720만명)다.

1%의 최상위 부유층과 90%의 서민대중으로 갈라진 양극화, 바로 이것이 오늘 미국 사회를 절망에 빠뜨린 끔찍스러운 사회현실이다. 2011년 5월을 기준으로 미국의 소득불평등 지수는 아이보리 코스트, 파키스탄, 이디오피아, 카자흐스탄보다 높고 우간다와 거의 같아졌다. 미국은 세계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심한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863년 11월 19일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게티스벅 연설에서 “민주정치는 모든 인민의, 모든 인민을 위한, 모든 인민에 의한 직접적인 자기통치(Democracy is direct self-government, over all the people, for all the people, by all the people)”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오늘 미국의 정치현실은 정반대다. 미국의 정치는 부유층의, 부유층을 위한, 부유층에 의한 금권정치(plutocracy)다. 미국 연방상원의원의 58%, 연방하원의원의 44%가 부유층에 속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도둑정치 반대투쟁,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2008년 5월부터 6월까지 서울 중심가에서 계속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와 마찬가지로, 지금 뉴욕에서 계속되는 월 스트릿 점거투쟁도 자연발생적이다. 2011년 9월 17일부터 군중들이 월 스트릿 인근에 있는 주코티 공원에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즉석 정치토론회도 열고, 시위행진에 나서기도 한다. 어느 단체가 주도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2011년 10월 1일 이후에는 워싱턴 디씨, 보스톤, 로스앤젤레스, 샌프랜시스코를 비롯한 미국 대도시들에서도 크고 작은 점거투쟁과 군중시위가 벌어졌다. 10월 2일 뉴욕의 시위군중은 10,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부르클린 다리를 건너 월 스트릿으로 향하던 시위군중 700여 명이 진압경찰에 연행되었다. 10월 5일에는 뉴욕 시내 각급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1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월 스트릿 점거투쟁에 참가한 미국인들이 외치는 구호는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의 점거투쟁이 공동목표를 향해 수렴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그들은 자기들을 불행과 궁핍으로 몰아넣은 경제적 불평등을 반대하고 월 스트릿 금융권의 막대한 이윤수탈에 분노한다. “월 스트릿을 점거하라”는 공동구호를 외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을 극단적으로 몰고간 주범은, 각종 금융파생상품을 조작해내어 천문학적 부를 긁어모은 월 스트릿 금융권이다. 그런 행위는 미국 인구 90%에 이르는 서민대중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적 부를 구조적으로 수탈한 것이다. 더욱이 워싱턴 정치권은 월 스트릿 금융권과 결탁하여 금융자본의 구조적 이윤수탈을 묵인하였다. 그러므로 1%를 위한 금권정치의 감춰진 뒷모습은, 정치권과 금융권이 결탁한 동맹이 90%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적 부를 구조적으로 수탈하는 도둑정치(kleptocracy)다.

79년 전 애너코스티아강변 점거투쟁이 특별보상을 떼어먹은 도둑정치에 맞서싸운 민중저항운동이었던 것처럼, 오늘 월 스트릿 점거투쟁도 사회적 부를 수탈한 도둑정치에 맞서싸우는 민중저항운동이다. 특히 월 스트릿 점거투쟁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전자통신수단을 이용하여 파급력을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으로 널리 퍼뜨리는 특징을 보인다.  

하지만 월 스트릿 점거투쟁에 참가한 미국인들은 79년 전에 있었던 애너코스티아강변의 쓰라린 패배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79년 전이나 오늘이나 대공황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도둑정치 반대투쟁은, 자연발생적 저항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오랜 민중저항운동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진보적 정권교체와 동떨어진 자연발생적 민중저항운동은 실패와 좌절을 피하지 못한다. 2008년 5월과 6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투쟁으로 폭발하여 반MB투쟁으로 상승발전하던 자연발생적 저항운동도 경찰진압과 보수언론공세를 돌파하지 못하고 결국 좌절하였다. 오늘 미국에서 벌어진 도둑정치 반대투쟁도 그렇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소리 2011년 10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