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투항한 나세르주의자의 비극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그는 나세르주의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2011년 10월 20일 절망적 상황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던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al-Gaddafi)가 반란군에게 붙잡혀 사살되었다. 카다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반란군이 마구 총질을 해대는 수라장에서 그가 살아남을 가망은 없었다. 미국의 카다피 제거작전은 그렇게 피묻은 막을 내렸다.

오래 전부터 카다피를 “미친 개(mad dog)”라고 욕하며 증오하였던 미국의 반카다피 정서는 맹목적인 증오가 아니었다. 카다피 정권과 미국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미국이 나세르주의(Nasserism)의 마지막 계승자를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나세르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를 없애버리려는 제거음모, 바로 이것이 지난 30년 동안 미국이 집요하게 추진해온 카다피 제거작전의 정치적 동기였다.

리비아에서 지난 8개월 동안 정부군 대 반란군의 내전이 벌어졌다고 보는 견해는,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추진해온 카다피 제거작전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카다피의 피살과 카다피 정권의 붕괴는 나세르주의와 제국주의의 갈등관계를 원인으로 하여 일어났다. 나세르주의와 제국주의의 갈등은, 미국이 자기에게 투항한 나세르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를 자기가 배후조종한 반란군에게 넘겨주어 살해한 비극적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반란군을 고용하여 카다피를 제거하고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린 주범은 미국이다. 미국이 카다피를 제거하고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린 경과는 아래와 같다.

나세르주의는 1956년부터 1970년까지 이집트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가 주창한 범아랍민족주의 정치이념이다. 1952년 7월 23일 당시 이집트군 청년장교였던 나세르는 자유장교단운동(Free Officers Movement)을 조직하고 군사정변을 일으켜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국을 세웠다. 1956년 7월 26일 나세르 대통령이 영국 소유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무력침공하였고, 그에 따라 아랍권에서는 반서방 군중시위가 폭발하였는데, 당시 청소년이었던 카다피는 반서방 군중시위에 참가해 투쟁하면서 어느덧 나세르주의자가 되었다.

범아랍민족의 단결과 비동맹 독자노선을 주장한 나세르 정권이 등장하면서 나세르주의가 아랍권에 확산되고 있었던 1967년 6월 5일, 나세르주의 확산을 차단하려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 대한 동시기습공격으로 도발한 무력침공으로 일어난 것이 제3차 중동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패하여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나세르 정권이 복수를 벼르던 시기, 군에 입대하여 청년장교가 된 카다피는 70여 명으로 구성된 ‘자유장교단운동’을 이끌고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왕 아이드리스(Idris)가 통치하던 군주국을 뒤집어엎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것은 나세르가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때로부터 17년이 되던 1969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나세르 정권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것처럼, 카다피 정권도 리비아 석유자원을 국유화하였다. 카다피 정권의 석유자원 국유화 법령에 따라 1970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본부를 둔 거대한 국영석유회사가 창설되었으니, 그것이 국가석유회사(National Oil Corporation)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석유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이며, 전 세계 석유매장량 순위에서 13번 째에 오른 주요산유국이다. 리비아의 석유매장량은 이제껏 확인된 것만 해도 431억 배럴이며, 천연가스매장량은 3조7,700 큐빅피트(cubic feet)에 이른다.

카다피의 석유자원 국유화와 미국의 카다피 제거음모

카다피가 군사정변을 일으키기 10년 전, 아이드리스 국왕이 통치하던 1959년에 미국계 석유회사들이 리비아에 몰려가 석유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카다피 정권은 미국 석유회사 코노코(Conoco)가 지배하는 움 파루드(Umm Farud) 유전을 1970년에 국유화하였고, 영국 석유회사 프리티쉬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ium)이 지배하는 사리르(Sarir) 유전을 1971년에 국유화하였고, 미국 석유회사 아모코(Amoco)가 지배하는 사하비르(Sahabir) 유전을 1976년에 국유화하였다. 카다피 정권이 시행한 석유자원 국유화는 리비아에 몰려간 미국계 석유회사들의 자원수탈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이 카다피를 증오하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6년 전 패전으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여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리비아는 친이스라엘국가에 대한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당시 석유금수조치로 미국은 막대한 경제손실을 입었다. 그로써 카다피에 대한 미국의 증오는 더욱 커졌고, 그 때부터 미국은 카다피를 증오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카다피를 없애버리려는 제거음모를 꾸몄다.

미국의 카다피 제거음모는 1979년 12월 29일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1982년 3월 10일 미국은 리비아산 석유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고, 리비아에 있는 미국계 대형석유회사들을 1983년 1월까지 철수시켰다. 1986년 1월 7일 미국은 ‘국제비상경제강국법(International Emergency Economic Powers Act)’을 발동하여 리비아에 대한 교역을 전면 중단하였고, 미국에 있는 리비아 자산을 동결하였고, 리비아 여행을 금지하였고, 리비아에 남아있던 나머지 미국계 석유회사들도 모두 철수시켰고, 4월 15일에는 리비아 공습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리비아를 압박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 198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미국 여객기가 폭발한 테러사건이다.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유엔으로 끌고가 더욱 확대, 강화하였는데, 유엔안보리는 1992년 3월 31일과 1993년 11월 11일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경제제재만으로는 카다피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미국은 경제제재와 함께 정권전복도 추진하였다. 세계 곳곳에서 반미정권을 무너뜨리는 전복공작경험이 풍부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90년대 초에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란단체를 조직하고 반란군을 모병하여 ‘리비아 급변사태’를 일으키는 전복공작에 달라붙었다. 이에 대해서는 2011년 3월 28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미국의 리비아 침공에 숨겨진 비화’에서 논한 바 있다.

운명적인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선 카다피

미국이 경제제재와 전복공작으로 카다피 정권을 위협하고 있었던 그 무렵, 국제정세는 카다피 정권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카다피 정권을 지원해주던 소련은 1990년 3월 11일 해체의 길에 들어서더니 1991년 12월 25일 세계지도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고, 소련 해체를 전후로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들이 줄지어 무너졌다. 카다피 정권이 지원자를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고 있었던 1990년 8월 2일 미국은 이라크 무력침공을 개시하였고, 1991년 2월 28일까지 계속된 걸프전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에게 치명적 패배를 안겼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리비아도 침공할 것이라고 우려하던 카다피 정권에게 충격적인 사건은, 1999년 3월 24일 미국이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개시한 것이다.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에 놀란 카다피 정권은 1999년 4월 5일 미국 여객기 공중폭발사건 테러혐의자 두 명을 네덜란드 사법당국에 넘겨주었고, 같은 해 5월 미국에게 화학무기 폐기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면서 비밀협상을 제안하였다.

카다피 정권이 그처럼 일방적으로 양보하였으나, 카다피 제거와 정권 붕괴를 노리던 미국은 양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비밀협상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경제제재와 전복공작의 고삐를 계속 틀어쥐었다. 그로써 카다피 정권은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미국에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정권존립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에 투항하느냐 하는 운명적인 양자택일이었다.

카다피 정권이 미국에 맞서 싸우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였다. 한 가지 조건은 카다피 정권에 대한 리비아 국민의 강력한 지지였고, 다른 한 가지 조건은 미국의 무력침공을 저지할 강력한 전쟁억지력이었다. 그런데 카다피 정권은 그 두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나세르주의에 대한 리비아 국민의 지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맥이 풀렸고, 카다피가 1977년 3월 2일 리비아식 인민민주주의 정치제도로 창설한 자마히리야(Jamahiriya)는 관료주의에 잠식당해 앙상한 뼈대를 드러냈다. 자마히리야의 실패원인에 대해서는 2011년 3월 2일 블로그 ‘변혁과 진보’에 발표한 나의 글 ‘자마히리야 붕괴의 비극’에서 논한 바 있다.

카다피가 추구한 나세르주의는 리비아 국민을 단결시켜 미국의 무력침공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허술한 민족주의 정치이념이었고, 리비아식 인민민주주의는 관료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불안정한 조건에서 리비아군이 전쟁억지력을 갖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카다피 정권에게는 미국과 맞서 싸울 사상적, 정치적, 군사적 진지가 없었던 것이다.

투항자를 깜쪽같이 속인 미국

미국의 경제제재와 전복음모로 어려움을 겪던 카다피 정권은 미국이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고, 2003년 3월 20일 이라크를 무력침공하자, 하는 수 없이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투항의 길에 들어섰다. 이를테면, 2003년 3월 카다피 정권은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포기하기 위한 비밀협상을 제안하였고, 8월 14일에는 미국 여객기 공중폭발사건 유가족에게 피해보상금 27억 달러를 지급하였고, 12월 19일에는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을 준수하겠다는 일방적인 공약을 발표하였다. 또한 2004년 1월 4일 카다피 정권 핵심인사는 영국 언론과의 대담형식을 빌어 파키스탄에서 핵무기 설계도를 입수하였다고 ‘자백’하였고, 이틀 뒤 카다피 정권은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을 비준하였고, 화학무기조약(CWC)에 즉각 가입하여 리비아군이 보유한 화학탄두와 화학무기 생산설비를 자진하여 해체하기 시작하였다.

카다피 정권은 미국에게 투항하면 정권존립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미국의 흉계를 알지 못한 치명적 오판이었다. 2004년 1월 18일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특수작업반을 리비아에 급파하여 리비아군의 미사일 개발시설과 화학무기 개발시설을 불능화하였고, 소련의 원조로 1980년대에 건설된 10메가와트급 연구용 원자로도 불능화하였다. 카다피 정권의 정치적 투항은 리비아를 지켜줄 전략무기의 폐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카다피 정권의 석유자원 국유화로 쫓겨났던 미국계 석유회사들이 리비아에 다시 몰려가 석유와 천연가스 탐사를 재개하기 시작한 때는 2005년 1월 30일이었고,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면서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철회한 때는 2006년 5월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카다피 정권은 리비아와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으로 믿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관계정상화는 미국이 연출한 교활한 기만극이었다. 리비아군의 전략무기를 폐기한 미국은 카다피 정권의 정신무장까지 해제하였다. 이를테면, 2008년 9월 5일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국무장관이 리비아를 방문하여 카다피를 만났고, 위킬릭스(Wikileaks)에 폭로된 정보를 인용한 미국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2011년 8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공화당 극우정객들인 존 매케인(John S. McCain), 조우 리버만(Joe Lieberman), 린제이 그레이엄(Lindsey Graham), 수전 콜린스(Susan Collins)로 구성된 상원의원단이 2009년에 리비아를 방문하여 카다피에게 “미국이 리비아에 무기를 지원할 의사가 있다”는 거짓말로 그를 안심시켰고, 2010년 5월 20일 미국은 리비아와 무역투자기존협정(TIFA)을 체결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뉴욕 타임스> 2011년 9월 2일 보도에 나온 것처럼, 카다피 정권 전복공작을 미친 듯이 준비해온 미국 중앙정보국이 국제테러혐의자들을 불법체포하여 2002년부터 6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리비아 정보기관에 인도함으로써 카다피 정권의 방심을 유도하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연출한 그 모든 우호적인 분위기는 카다피의 정신무장을 해제시킨 친선외교의 속임수였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은 미국이 방심을 유도하면서 ‘급변사태 계획’에 따른 전복음모와 무력침공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미국이 리비아군 출신자 2,000여 명을 반란군으로 조직하여 훈련시키고, 반란단체 ‘리비아 구국전선’을 조직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2011년 3월 28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미국의 리비아 침공에 숨겨진 비화’에서 논한 바 있다.

카다피를 제거한 미국의 ‘비밀병기’

미국 텔레비전방송들이 보도시간에 방영한 리비아 반란군의 모습은 오합지졸이다. 그들은 군사훈련도 받지 못했고, 조직규율이나 군령체계도 모르고, 무장마저 변변치 않았다. 그런데 정규군이 그런 오합지졸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7,0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히고 참패하였다.

원래 119,000명으로 편성된 리비아군은 프랑스제 전투기 미라주 F-1과 러시아제 전투기 미그-23을 비롯한 각종 작전기 150여 대와 공격헬기 40여 대를 배비하고 있었고, 전차 800여 대와 장갑차로 무장한 지상군 병력 50,000명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119,000명 정규군이 15,000명 오합지졸 반란군에게 어이없게 패하였다. 왜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첫째, 미국이 리비아군 지휘통제력과 공중작전력부터 급속히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미국군은 2011년 3월 19일 리비아군 지휘소와 통합방공망을 선제공습으로 모조리 파괴하였다. 당시 리비아군은 31개소의 지대공 미사일 기지에 지대공 미사일 216기를 배비하고 있었으나, 지하시설에 엄폐되지 않고 지상에 노출되었으므로, 기습적인 선제공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로써 리비아군 전투기와 공격헬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며, 리비아군은 지상전투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무인정찰기들이 리비아군의 전차나 장갑차 같은 중무장 병기를 따라다니며 정밀폭격을 유도하는 바람에, 리비아군 지상전투력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미국군의 공습을 막아낼 대응력을 갖추지 못한 리비아군 공군부대와 기갑부대는 그렇게 궤멸되었다.

둘째,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릴 치명적인 ‘비밀병기’를 틀어쥐고 있었다. ‘비밀병기’란 급변사태공작과 군부와해공작을 뜻한다. 위킬릭스에 폭로된 정보를 인용한 <뉴욕 타임스> 2011년 4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연방의회가 설립하고 해마다 지원금 1억 달러를 쏟아 붓는 단체가 ‘전국민주주의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이고, 미국 국무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단체가 ‘자유의 집(Freedom House)’이다. 미국은 이 두 단체를 앞세워 리비아 반란단체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면서 급변사태를 일으킬 준비를 갖추었다.

미국은 급변사태공작과 함께 군부와해공작에도 힘을 넣었다. 미국이 리비아군 와해공작에 특별히 힘쓴 까닭은, 카다피 정권의 군사력을 약화시켜야 내부반란과 무력침공을 배합한 급변사태를 일으켜 카다피 정권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리비아군 와해공작에 나선 미국 중앙정보국은 리비아 군부에 간첩들을 침투시켜 군지휘관들을 매수, 포섭하였다. <월 스트릿 저널> 2011년 8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카다피 친위대에서 복무하며 경호업무를 총괄해온 고위장교 마흐무드 벤 주마(Mahmoud Ben Jumaa)는 반란군 앞잡이였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처럼 정부군에서 활동하며 얻은 정보를 반군에게 알려주는 이중간첩이 리비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미국인 취재기자에게 말했다. 그보다 앞서, 2011년 5월 3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리비아군 장성 5명, 대령 2명, 소령 1명이 합동기자회견을 열고, 리비아군 지휘관 120여 명이 리비아를 탈출하여 리비아군 전투력이 20% 수준으로 축소되었다고 밝혔다.

2011년 3월 18일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군부는 급변사태 계획(contingency plan)을 수행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바마 대통령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카다피를 제거하고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온갖 음모와 술책을 벌여오던 미국은 결국 내부반란과 무력침공을 배합한 급변사태를 일으켰다. 그제서야 미국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카다피는 급히 오바마에게 공습중단을 간청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모든 것은 끝나가고 있었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야욕을 간파하지 못한 채, 정치적 투항으로 살아남으려고 하였던 나세르주의의 마지막 계승자에게 닥쳐온 최후는 참혹하였다.

반란군이 카다피를 사살한 날, 리비아 급변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한 총책인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백악관 출입기자단 앞에서 “(리비아에서) 폭정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혀졌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리비아의 앞길에는 극심한 정치혼란과 자원약탈의 광풍이 몰아칠 것이다. 리비아 반란단체 우두머리들이 정권쟁탈에 광분하고 있을 때, 미국은 리비아인들의 피가 섞인 석유를 가져갈 것이다. (2011년 10월 24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