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킬릭스가 폭로한 독도와 주변바다에 대한 미일 협공도발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독도 귀속 가로막은 미국, 독도 영유권 포기한 박정희

미국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1933년 12월호에 실린 아시아 지도에는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되어 있다. 그 지도의 한반도 고유지명은 모두 일본식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를테면, 조센(Chosen)이라고 써넣고 그 밑에 괄호 안에 조그맣게 코리아(Korea)라고 적혀있다. 서울은 게이조(Keijo)로, 평양은 헤이조(Heijo)로, 부산은 후산(Fusan)으로 적혀있다.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36년 동안 한반도는 국제법상 일본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자 한반도는 우리나라 영토로 귀속되었으나, 유독 독도만은 국제법상 우리나라 영토로 귀속되지 못했다. 그게 무슨 허튼 소리냐면서 펄쩍 뛰는 사람이 있겠지만, 감추어진 과거사를 들춰내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일제에게 식민지로 강탈당한 한반도는 8.15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 영토로 자동귀속된 것이 아니었다. 영토귀속을 위한 법적 처리가 필요하였는데, 그 처리과정에서 독도 영유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은 아래와 같다.

영토주권을 행사하는 법적 주체인 정부가 수립되어야 영토를 귀속할 수 있었는데 미국의 분할지배정책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양분하였고, 그로써 남측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측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각각 세워졌다. 독도는 북위 38도선 이남에 있으므로, 독도 영유권을 회복할 책임은 남측 정부에게 주어졌는데, 대미굴종외교와 대일굴욕외교에 손발이 묶인 역대 남측 정부들은 국제법상 독도 영유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치욕적인 사연은 이러하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영토귀속문제를 확정하고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전후처리회담이 1951년 9월 8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되었다. 그 국제회담에서 일제가 식민지로 강탈했던 한반도를 우리나라 영토로 귀속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방해공작에 가로막혀 샌프란시스코 회담에 대표를 보내지도 못했다. 한반도 영토귀속문제는 이승만 정부가 배제된 가운데 미국과 일본의 농간에 의해 밀약으로 처리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이 맺은 밀약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로 강탈하였던 한반도를 우리나라 영토로 귀속시키되 예외적으로 독도만은 귀속시키지 않고 여전히 일본 영토로 남겨두었다. 이것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이다. 라이언커트(Liancourt)란 독도를 가리키는 미국 정부의 공식 지명인데, 프랑스어로는 리앙꾸르라 읽는다. 롹스(rocks)란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돌섬을 뜻한다.

둘째, 한일관계 ‘정상화’ 회담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는데,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일본에게 굴복하여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사또 에이사꾸 당시 일본 총리가 서명한 독도-다께시마 밀약에 따르면, 그 섬은 우리나라 영토도 아니고 일본 영토도 아니며, 무국적 섬이다. 또한 그 밀약에 따르면, 남측은 ‘주인 없는 섬’을 점거하고 있으므로, 그 섬에 대한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행사하지 못한다. 점거는 영유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에 의거하여 그 섬이 자국 영토라고 억지를 부려도 남측이 그 억지를 물리칠 국제법적 근거는 없다.

셋째,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과 독도-다께시마 밀약에 따르면, 전후 영토귀속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제법상 일본 영토로 귀속되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가 영유권을 포기한 독도를 남측이 이제껏 ‘불법점거’하고 있는 것으로 된다. 영유권이 확정되지 않은 무국적 지역을 어떤 법적 주체가 물리적으로 점거한 현상을 실효적 지배라 한다.

위의 사실을 종합하면, 독도는 남측이 그 섬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동안에만 남측 국내법상 우리나라 영토이고, 국제법상으로는 영유권이 확정되지 않은 무국적 섬이다. 일본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고 집요하게 획책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만일 독도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로 넘겨지면, 일본은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과 독도-다께시마 밀약을 국제법적으로 유효한 외교문서로 제출할 것이고, 그로써 독도는 국제법상 일본 영토로 확정될 것이다. 국제법이 국내법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국제사법재판소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정하면 남측은 독도를 일본에게 내주어야 한다. 영토분쟁을 해결하는 법적 근거는, 고지도나 고문서 따위가 아니라 외교문서인데, 일본은 자국의 ‘다께시마 영유권’을 입증할 결정적인 외교문서를 두 개나 움켜쥐고 있는 데 비해, 남측에게는 독도 영유권을 입증할 외교문서가 없다.

앞에서는 도발적 발언, 뒤에서는 비밀제안

<교도통신> 2006년 4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 해상보안청은 두 가지 정보를 입수하였다. 첫째는, 노무현 정부가 2006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독일에서 열릴 국제수로기구(IHO) 해양지명소위원회에 우리말로 지은 동해 해양지명 18개를 등재하는 신청서를 제출할 것이라는 정보다. 등재신청을 하려는 18개 해양지명에 독도 앞바다 해저지명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였다. 둘째는, 노무현 정부가 2006년 2월부터 3월까지, 그리고 7월과 10월에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독도강탈에 혈안이 된 일본은 노무현 정부의 그런 움직임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노무현 정부의 동해 해저지명 등재신청과 독도 주변바다 해양조사를 가로막으려는 도발음모를 꾸몄다. 일본의 도발음모는, 주일미국대사 토머스 쉬퍼(J. Thomas Schieffer)가 작성하여 2006년 4월 18일 발송한 2급 비밀전문(Secret) ‘라이언커트 롹스: 일본이 비밀제안을 한국에 제의(LIANCOURT ROCKS: JAPAN OFFERS SECRET PROPOSAL TO THE ROK)’에 나타나 있다.

이 비밀문건에 따르면, 일본은 앞에서는 일본 해상보안청 측량선을 독도 앞바다로 들여보내 해양조사를 강행하겠다는 도발발언을 늘어놓으면서, 뒤에서는 노무현 정부에게 비밀제안을 제의하는 수법을 썼다. 2006년 4월 18일 일본 해상보안청 측량선이 독도 앞바다를 향해 출발하는 것과 때를 맞춰 야치 쇼따로 일본 외무차관이 라종일 주일한국대사에게 비밀제안서를 보냈다. 일본이 노무현 정부에게 비밀제안을 보낸 사실은 일본 정부 안에서도 최고위급 몇몇 관료들만 아는 극비사항이어서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이 해상보안청 측량선을 독도 앞바다로 들여보내 도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노무현 정부는 2006년 4월 17일 해양경찰청 경비함들을 독도 앞바다로 급파하였다. 독도 앞바다에서는 해양경찰청 경비함 18척이 집결하여 대처훈련을 실시하는 가운데, 일본 해상보안청 첩보선박과 초계기가 출몰하여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이 노무현 정부에 보낸 비밀제안은, 쉬퍼 대사가 작성하여 2006년 4월 20일 발송한 2급 비밀전문 ‘라이언커트 롹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JAPAN WORKING TO RESOLVE LIANCOURT ROCK DISPUTE)’에 나와있다.

첫째, 남측이 동해 해저지명 등재신청을 보류하면, 일본도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강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둘째, 앞으로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하기 위한 사전통보절차와 시행방법을 한일 양국이 합의하자는 것이다.
셋째, 2000년 6월 이후 중단된, 동해 배타적 경제수역(EEZ) 경계선을 획정하기 위한 한일협상을 재개하자는 것이다.

4월 18일에 발송한 2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만일 노무현 정부가 비밀제안을 받아들이면, 일본은 측량선을 독도 앞바다에 들여보내지 않겠지만, 비밀제안을 거부하면 일본은 4월 20일 해상보안청 측량선 한 척과 경비함 두 척을 독도 앞바다에 들여보내 닷새 동안 해양조사를 강행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 땅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처럼, 노무현 정부가 독도 앞바다에서 실시하려는 해양조사를 가로막는 일본의 방해책동이야말로 해양주권에 대한 침해다.

일본의 비밀제안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2006년 4월 20일 발송한 2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는 일본의 비밀제안을 거부하였고, 일본이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하면, 동해 해저지명 등재를 연기하여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신청하겠다는 응답을 보냈다.

2006년 4월 20일 발송한 2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일본의 비밀제안이 거부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인 4월 20일 오전 11시 야치 외무차관은 급히 쉬퍼 주일미국대사를 만났다. 야치 외무차관은 한일관계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은 측량선을 독도 앞바다에 들여보내려 하는데 노무현 정부가 물리적으로 차단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쉬퍼 대사는 “미국은 일본이 국제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한국은 분별 없이 행동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미친 짓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염려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미국이 일본의 독도도발을 감싸고 돌면서 그 도발에 맞서 해양주권을 지키려는 노무현 정부의 정당한 행동을 미친 짓으로 비난, 모욕한 폭언이다. 쉬퍼 대사의 그런 폭언은 미국이 일본의 독도도발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20,000㎢ 바다를 강탈하려는 음모

2006년 4월 21일 일본은 해상보안청 경비함 두 척을 출동대기시킨 채, 한일협상을 위해 야치 외무차관을 서울에 급파하였다. 조셉 도노반(Joseph R. Donovan) 주일미국대사관 공사가 작성하여 2006년 4월 24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confidential) ‘사태수습: 일한합의로 해양조사분쟁 끝나다(PATCHED UP HULL: JAPAN-ROK AGREEMENT ENDS MARITIME SURVEY DISPUTE)’에 따르면, 유명환 당시 외교통상부 제1차관과 야치 외무차관이 협상을 벌였다. 이 비밀전문에 따르면, 한일협상은 “아슬아슬한 때에” 타결되었지만, 협상결과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 비밀전문에 나온 협상결과는 아래와 같다.

첫째, 일본은 분쟁수역 해양조사 계획을 중단한다.
둘째, 한국은 해저지명소위원회에 해저지명을 등록하려는 계획을 연기한다.
셋째, 쌍방은 가능한대로 이른 시일에 국장급 양자회담을 한다.

일본 외무성 사도시마 시로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마이클 미저브(Michael Meserve) 주일미국대사관 정치참사에게 한일협상결과가 남측으로부터 “중대한 양해”를 받아낸 것이 아니라 미봉책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노라고 자찬하였다. 또한 시로 국장은 노무현 정부가 “적절한 때에” 해저지명 등재를 신청하겠다는 연기설을 꺼냈지만, 일본은 노무현 정부가 등재신청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로 국장은 그 까닭을 설명하면서, 남측이 적절한 때에 등재신청을 하겠다는 의사를 외교문서에 남기려 하지 않고 말로만 연기의사를 표시하였을 뿐 아니라, 적절한 때에 신청한다는 말을 신청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느냐는 일본의 발언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대일협상에서 패하였음을 말해준다.

4월 21일 협상결과에 따라, 2006년 6월 12일과 13일 동해 배타적 경제수역 경계선을 획정하기 위한 한일협상이 일본 도쿄에서 진행되었다. 주일미국대사관 도노반 공사가 작성하여 2006년 6월 9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일본-한국 EEZ회담 진전에 관한 최신 정보 찾아보기(SEEKING UPDATE ON PROGRESS OF JAPAN-KOREA EEZ TALKS)’에는 2006년 6월 9일 일본 외무성 동북아시아국 다까바 요 부국장이 도노반 공사에게 전해준 정보가 있다. 그 정보에 따르면, 2006년 4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협상에서 “일본은 하시모토 당시 일본 총리와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이 만난 1996년 정상회담에서 배타적 경제수역 협상과 라이언커트 롹스 영토분쟁을 분리시키기로 한 합의사항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요 부국장은 “일본 정부의 염려는 한국측 협상자들이 두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일본의 오키섬과 라이언커트 롹스 사이의 중간선을 제안하게 되리라는 것”인데, 그런 제안은 “(일본에게) 재앙이 될 것”이며 “하시모토-김영삼 합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일본측 협상자들은 한국측 협상자들이 중간선 최종 합의에 이르기까지 양측이 분쟁 중인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서 공동으로 과학조사활동을 벌이는 임시조치를 제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6년 김영삼 정부 시기부터 2000년 김대중 정부 시기까지 네 차례 진행된, 동해 배타적 경제수역 경계선을 획정하기 위한 한일회담에서 남측 정부는 울릉도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 오키섬에 이르는 직선거리의 중간선을 경계선으로 획정하자고 하였는데, 2006년 6월에 재개된 회담에서 노무현 정부는 독도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 오키섬에 이르는 직선거리의 중간선을 경계선으로 획정하자는 수정제안을 내놓았다. 독도를 기점으로 삼을 경우, 남측의 배타적 경제수역은 약 20,000㎢가 된다. 군사분계선 이남의 영해 총면적이 2,800㎢이므로, 배타적 경제수역 20,000㎢는 엄청나게 넓은 바다면적이다.

한일협상의 쟁점은, 남측 정부가 독도를 남측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 넣으려는 반면, 일본 정부는 독도를 자기측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 넣으려는 생억지를 부려 격화된 것이다. 일본이 그런 생억지를 쓰는 까닭은, 미국이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잔류시켰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도 영유권을 포기한 독도-다께시마 밀약에 서명하였기 때문이다. 그 두 밀약에 목덜미가 잡힌 남측 정부는 독도와 주변바다 20,000㎢에 대한 국제법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두 밀약을 틀어쥔 일본은 독도와 주변바다 20,000㎢를 강탈하려고 집요하게, 노골적으로 책동하는 것이다.

2006년 6월 한일협상에서 노무현 정부는 독도 기점을 주장하였고, 일본은 그 주장에 코웃음을 치는 통에 합의는 불가능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독도를 기점으로 경계선을 획정하자는 자기 주장을 일본이 받아주리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시기 네 차례 협상에서 남측 정부가 제시한 울릉도 기점 주장도 번번이 거부하였던 일본이 그보다 더 공세적인 독도 기점 주장을 받을 리 만무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의 도발책동은 더욱 악랄해졌다.

‘해양2000호’ 항해와 미일 협공도발

주일미국대사관 도노반 공사가 작성하여 2006년 6월 29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라이언커트 롹스: 분쟁수역에 조사선박을 보내려는 한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LIANCOURT ROCKS: GOJ TO REPOND TO ROKG DISPATCH OF RESEARCH VESSEL TO DISPUTED WATERS)’에 따르면, 2006년 6월 29일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 사사에 겐니찌로 국장은 도보반 공사를 만나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전해주었다.

첫째, 한일협상에서 일본은 분쟁수역(독도 앞바다를 뜻함-옮긴이)에 양측 조사선박이 함께 들어가자고 제안하였으나, 노무현 정부가 거부하였다.
둘째, 노무현 정부는 2006년 7월 3일 분쟁수역에 해양조사선을 들여보낼 것이다.
셋째, 일본은 해상보안청 경비함을 출동시켜 한국 해양조사선의 분쟁수역 진입을 차단한 다음, 7월 11일에 해상보안청 측량선을 분쟁수역에 들여보낼 것이다.
넷째, 노무현 정부의 해양조사선 파견에 대한 일본 국내의 부정적인 반응은 지난 4월 사건 때보다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미사일 발사를 앞둔 북측에 대응하여 한일협력이 절실한 때에 노무현 정부가 일본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굉장히 손상될 것”으로 우려된다.
여섯째, 미국이 이번 사태와 관련한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일본이 예측한 대로, 2006년 7월 2일 한국 국립해양조사원 소속 해양조사선 ‘해양2000호’가 부산항을 떠나 독도로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7월 3일 독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17일까지 동해 여러 곳에서 해류, 수온, 염분농도 등을 조사하기 위한 항해였다. ‘해양2000호’가 독도 앞바다에 접근하면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함이 덤벼들 것에 대비해 노무현 정부는 해양경찰 경비함이 근접 호위하는 방침을 정했다. 2007년 7월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었던 아베 신조는 2010년 10월 9일 다꾸쇼꾸대학 창립 심포지움에 출연하여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함이 ‘해양2000호’의 항해를 차단할 경우 발포하라는) 위협사격명령이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남측 해양경찰청에게) 은밀하게 내려왔다”고 회고하였다.

독도 앞바다에서 남측 해양조사선이 조사활동을 벌이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도, 독도가 자국 영토 다께시마라는 생억지를 부리는 일본은 ‘해양2000호’의 독도 앞바다 진입을 막으려고 광기를 부렸다. ‘해양2000호’의 항해로 한일관계는 극도의 긴장 속에 빠져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긴장국면에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버쉬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작성하여 2006년 7월 5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일본의 분쟁수역 조사활동 염려한 반기문 장관(FM BAN CONCERNED WITH JAPANESE SURVEY OF DISPUTED WATERS)’에 노무현 정부의 대처행동이 나타나 있다.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장관은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측은 ‘신속한’ 조사활동을 (일본측에) 제안하였다”고 버쉬바우 대사에게 말했다. 신속한 조사활동은 무슨 뜻일까? 위의 3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해양2000호’가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하려면 시속 18km로 항해해야 하는데, <연합뉴스> 2006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해양2000호’는 독도 서북서 방향 45km 해역에서 시속 30km의 빠른 속도로 동남동 방향으로 항해하면서 ‘신속한 해양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해양2000호’가 해양조사를 포기하고, 독도 앞바다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갔음을 뜻한다. 위의 3급 비밀전문에 첨부된 ‘의견(comment)’에 따르면, ‘해양2000호’가 독도 앞바다를 통과한 시간은 약 두 시간이었으므로,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함이 독도 앞바다에 나타나기도 전에 도망치듯 빠져나온 것이다.

명백하게도,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일본에게 굴복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과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주권을 절대로 훼손할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함의 차단기동에 맞서 발포명령까지 내렸는데, 왜 갑자기 해양조사를 포기하고 일본에게 굴복한 것일까? 그 내막을 밝혀줄 단서는, 쉬퍼 대사가 작성하여 2006년 7월 3일 발송한 2급 비밀전문 ‘라이언커트 롹스: 한국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LIANCOURT ROCKS: ROK SHOULD “PAY A COST”)’에 들어있다. 이 비밀전문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사사에 국장은 “일본-한국의 전반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하는 한국은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라고 도노반 공사에게 말했다. 또한 사사에 국장은 “앞으로 48시간이 한국의 해양조사활동이 시작되지 못하도록 막을 마지막 기회”라고 하면서, “미국 정부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한국의 그런 행동을 차단해주기를 강하게 암시(strongly imply)하였다.” 문맥을 읽어보면, 강한 암시라는 표현은 미국에게 다급하게 요청하였다는 뜻으로 읽힌다.

비록 위킬릭스가 폭로한 비밀전문들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일본의 다급한 요청을 받은 미국은 노무현 정부에게 ‘해양2000호’ 조사활동을 즉각 중지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해양조사활동을 중지하라는 긴급지시를 ‘해양2000호’에게 내려 독도 앞바다를 급히 지나가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상황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버쉬바우 대사가 작성하여 2006년 7월 5일 발송한 위의 3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버쉬바우 대사는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장관에게 “국제해양법에 대한 워싱턴의 해석이라고 하면서, 한일 양측이 (독도 앞바다에서) 공동으로 해양조사활동을 벌이는 방도가 있다”고 말했고, 반기문 장관은 “한국의 견해는 아니지만, 그 해석에 유의하겠다”고 화답하면서, “대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조용한 협의’를 바란다”고 말했다.

버쉬바우 대사가 반기문 장관에게 말해준 미국의 ‘해법’이라는 것은, 독도와 주변바다를 강탈하려는 일본의 생억지와 꼭 마찬가지로 한일 양측이 독도 앞바다에서 공동조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일관계 긴장국면에서 미국이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는 척하지만, 뒤에서는 일본의 독도도발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독도도발은 일본의 강탈책동과 미국의 배후지원이 결합된 미일 협공도발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강탈책동과 협공도발을 뻔히 보면서도 외교통상장관은 미국이 ‘해법’으로 둔갑시킨 일본의 독도도발에 ‘유의’하겠다느니, 일본과 ‘조용한’ 밀실협의를 하고 싶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였으니 어찌 기막힐 노릇이 아닌가. 이 땅의 외교통상장관이 미국 대사 앞에서 그런 주권포기 망언이나 늘어놓은 것은 대미굴종의 극치였다.

협상자들의 말문이 막혔다

쉬퍼 대사가 작성하여 2006년 7월 7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라이언커트 롹스: 한국의 조사활동에 항의한 일본(LIANCOURT ROCKS: JAPAN PROTESTS ROK SURVEY)’에 따르면, 서울에서 버쉬바우 대사가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장관을 만난 시각, 도쿄에서는 야치 외무차관이 라종일 주일한국대사를 만났다. 야치 외무차관은 라종일 대사에게 일본의 거듭되는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측이 “분쟁 중인 배타적 경제수역과 한국이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는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실시한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항의라는 말은 미국 대사가 비밀전문에 집어넣은 외교용어이고, 실제로는 질책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나타난 것처럼, 노무현 정부는 미일 협공도발에 굴복하여 독도 앞바다 해양조사를 포기하였고, 일본도 그런 포기사실을 알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라종일 대사를 불러 질책하였다. 도둑놈이 도둑질하다가 들키자 집주인에게 매를 든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일본은 미일 협공도발에 굴복한 노무현 정부를 질책한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야치 외무차관은 라종일 대사에게 “그 섬(독도를 뜻함-옮긴이)을 일본 영토로 여기고 있으므로, 일본은 ‘적절한 시기에’ 해양조사를 실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노무현 정부를 미일 협공도발로 굴복시켜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한 술 더 떠서 독도 앞바다를 침범하겠다는 폭언까지 늘어놓은 것이다. 위의 비밀전문은, 야치 외무차관이 “일본 정부가 (9월 중순으로 예정된) 협상과정에서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를 확정지으려 한다고 강조하였”고, 사전통보와 공동조사활동을 보장하는 “과도적 합의(transitional framework)”를 내오겠다고 확언하였다.

야치 외무차관이 말한 대로, 2007년 9월 4일부터 한일협상이 재개되었다. 어떤 협상결과가 나왔을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노무현 정부는 미일 협공도발에 굴복하였고, ‘외교적 승리’를 거둔 일본은 기고만장하여 날뛰었으니 협상결과는 보나마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노무현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외교적 패배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다. 쉬퍼 대사가 작성하여 2006년 9월 11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일본과 한국, 라이언커트 롹스 근해에서의 방사능 합동조사에 합의하다(JAPAN AND KOREA REACH AGREEMENT ON JOINT RADIATION SURVEYS NEAR THE LIANCOURT ROCKS)’에 따르면,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아시아-유럽회의에 참석 중이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는, 독도 앞바다에서 한일 공동 방사능 조사를 10월 중 한 차례 실시하기로 한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합의서에 따르면, 남측과 일본은 각각 해양조사선 한 척씩 동원하고, 양측 조사원들이 서로 상대측 선박에 교차승선하여 공동조사를 실시하는데, 먼저 독도 앞바다 해저 세 곳을 조사한 뒤에 일본측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이동하여 세 곳을 더 조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이없는 합의가 어떻게 나온 것일까? 그 내막은, 주한일본대사관 정치참사 아마모또 야스시가 주한미국대사관 정치참사 조셉 윤에게 전해준 정보에서 드러난다. 조셉 윤 참사가 작성하여 2006년 9월 13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한국-일본, 한 차례 해저조사에 합의(KOREA-JAPAN ONE-TIME AGREEMENT ON SEABED SURVEY)’에 따르면, 일본은 “(독도 앞바다에서) 해양조사를 실시하는 합법적 권리가 일본에게 있음을 입증하는 전화번호부책만한 부피의 방대한 기록문서(dossier)를 2006년 여름 내내 준비”한 뒤, 그것을 회담장에서 남측 협상자들에게 보여주며,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유엔 국제해양법에 따라 국제적 중재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의 정보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적이다. 하나는, 일본이 독도와 주변바다를 강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청와대가 일본의 독도도발을 질책하는 대통령 특별담화문 한 장을 작성하는 동안, 일본은 전화번호부책만큼 부피가 큰 방대한 ‘증빙자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남측 정부를 꼼짝못하게 만들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는 사실이다. 위의 비밀전문에서 야스시 참사는 “우리는 그들에게 총을 보여주면서도 방아쇠는 당기지 않았다”고 조셉 윤 참사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남측 정부를 꼼짝못하게 만든 ‘비장의 무기’란 국제해양법에 따른 국제적 중재를 뜻하는데, 그들이 말한 국제적 중재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넘기겠다는 협박이다. 그들이 협상탁자에 꺼내놓은 전화번호부책만한 부피의 ‘증빙자료’ 속에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귀속시킨다고 명시한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 사본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명으로 독도 영유권을 사실상 포기한 독도-다께시마 밀약 사본이 첨부되었을 것이다.

일본측 협상자들이 방대한 ‘증빙자료’를 꺼내놓고 협박하자 남측 협상자들의 말문이 막혔다. 더 이상 협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회담장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위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남측 협상대표가 공동조사를 독도 앞바다에서만 실시할 것이 아니라 일본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서도 실시하는 수정제안을 내놓으면서, “손에 펜을 쥐고 지도 위에 세 군데 점을 찍었다.” 그가 지목한, 일본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 안의 세 군데 해역은 원래 방사능 오염이 없는 청정해역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말문이 막힌 남측 협상자들의 수정제안은, 독도 앞바다에서만 공동조사를 실시할 경우 자기들의 대일협상실패가 세상에 알려질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을 조사할 필요가 없는 일본측 해역에서도 공동조사를 실시하는 척하는 눈가림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한일협상에서 자기들이 승리한 사연을 말해주던 야스시 참사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표하였다고 조셉 윤 참사는 비밀전문에 기술하였다.

일본은 침범하고, 남측은 방치하고

위의 비밀전문에서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이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해마다 한 차례씩 해양조사 명목으로 독도 앞바다를 침범해왔다는 점이다. 그 비밀전문에는, 일본이 독도 앞바다에 들어가 10년 동안이나 해양조사를 계속 실시했어도 남측 정부가 “그에 대해 항의하지도 않았고, 그 사실을 발표하지도 않았다”고 씌여있다.

정치참사 조셉 윤은 위의 비밀전문 맨마지막에 붙어있는 ‘의견’을 이런 문장으로 끝맺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경향을 지닌 노무현 대통령이 언제나 문제다. 우리(주한미국대사관을 뜻함-옮긴이)는 노무현이 그 합의를 받아들이기까지 여러 날 걸렸음을 알고 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하면, 이미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일본의 독도 앞바다 침범을 방치함으로써 해양주권을 포기하였고, 침범방치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질까 쉬쉬하면서 숨겨왔고, 2006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의 해양주권침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해양조사를 시도하려고 하다가 미일 협공도발에 걸려 여러 날 고심한 끝에 결국 굴욕적인 합의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미일 협공도발에 걸려 굴욕적으로 수용한 합의에 따라 남측과 일본은 형식적인 공동조사를 한 차례 실시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와 주변바다를 강탈하기 위한 명분쌓기에 한일 공동조사를 이용하려고 하였으므로, 한 차례 공동조사로 끝내지 않았다. 일본은 또 다른 도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2007년이 되자 일본은 이전보다 더 강한 도발책동을 들고 나왔다.

정치참사 조셉 윤이 작성하여 2007년 4월 17일 발송한 3급 비밀전문 ‘라이언커트 롹스의 거친 바다 예측하는 외교통상부(MOFAT FORECASTS ROUGH SEAS FOR LIANCOURT ROCKS)’에는 2007년 4월 17일 외교통상부 조약국 임한택 국장이 조셉 윤 참사를 만나 고충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털어놓은 고충은, 협상에서 이겨 기고만장해진 일본이 더욱 압박하는 통에 노무현 정부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일본의 도발책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도 앞바다 공동해양조사를 2006년에 한 차례 실시하였는데, 앞으로는 공동해양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으니 그 업무를 전담할 한일 국제기구를 설립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조사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협조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앞으로는 일본이 독도 앞바다에서 단독해양조사를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임한택 국장이 조셉 윤 참사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13년 동안 (독도 앞바다에서) ‘몰래(clandestinely)’ 단독조사를 실시해왔는데”, 2007년 7월 또는 8월에 독도 앞바다에서 공개적으로 단독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남측 협상자들에게 밝혔다는 것이다.

일본의 강력한 도발로 곤경에 빠진 남측 정부 당국자들은 주한미국대사관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친미사상에 찌든 외교통상부 관료들은 자기들이 ‘혈맹’으로 믿는 미국에게 자기들의 딱한 처지를 하소연하면 어떤 도움이나 받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위의 비밀전문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을 찾아간 임한택 국장의 하소연이 이렇게 적혀있다. “임한택이 전달한 한국 정부의 요청은, 미국 정부가 라이언커트 롹스 문제에 대해 공평성을 유지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미국이 일본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치를 취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지원하며 협공도발에 나선 미국에게 공평성을 요청한 어이없는 꼴은, 더 이상 논평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다.

위킬릭스에 노출된 독도문제 관련 비밀전문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그 이후에 주한미국대사관과 주일미국대사관이 발송한 비밀전문들은 위킬릭스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의 비밀전문들을 읽어보나마나, 2007년 여름 이후에도 일본은 이전에 해마다 그러했던 것처럼 독도 앞바다를 침범하여 해양주권을 짓밟았을 것이고, 임기말의 무능한 노무현 정부는 일본의 독도 앞바다 침범을 방치하면서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쉬쉬하였을 것이다.

친일성향이라면 독도 영유권을 포기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2008년부터 일본은 독도와 주변바다를 강탈하기 위해 또 무슨 교활, 흉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을까? 지난 3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일본의 독도 앞바다 침범을 방치하면서 ‘조용한 외교’에 매달렸으니, 이 땅의 국민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 땅의 국민들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구호를 외치기 전에, 미일 협공도발을 물리치고 독도와 주변바다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라이언커트 롹스 밀약을 원천무효로 선언하고, 독도-다께시마 밀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때, 그리하여 6.15 공동선언에 따라 평화통일을 실현할 때, 미국과 일본이 감히 넘보지 못할 통일공화국이 독도와 주변바다를 지킬 수 있다. 독도문제 해결은 진보적 정권교체와 자주적 평화통일에 있다. (2011년 9월 26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