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정전은 끝나고 있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정전의 종말을 예견할 수 있을까?

2010년 12월 28일 마지막 전원회의를 열고 5년 동안의 사업을 마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작성한 종합보고서는 6.25 전쟁 중 남측에서 미국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희생된 민간인이 5,291명이라고 밝혔다. 피학살자 가운데 여성이 44.4%, 어린이가 18.3%, 50대 이상 노인이 18.7%였다. 이 조사결과는 그들의 희생이 미국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일어난 집단학살사건이었음을 말해준다.

증거도 거의 인멸되다시피 하고 몇몇 생존자나 유가족의 기억도 희미해진 반세기 뒤에 단지 141건의 공습사건만 들춰내 조사한 결과가 그러하였으니, 실제 피학살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더욱이 그 위원회가 조사한 집단학살사건은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 국한된 것이었으니, 미국군의 무차별 공습이 집중되었던 북위 38도 이북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무참히 집단학살을 당하였을까!

6.25 전쟁 때 경상북도 포항시 외곽으로 피난길을 떠난 어느 한 가족도 미국군의 무차별 공습을 피하지 못하고 화를 입었다. 미국군 전투기가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기관포를 난사한 순간, 시골집 마당에서 소녀의 등에 업혀있던 남동생이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남동생과 함께 피투성이로 쓰러진 소녀도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미국군 전투기가 난사한 기관포탄에 목숨을 잃은 그 두 아이는 소년 이명박의 남동생과 누나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가 어렸을 적에 겪은 전쟁의 비극을 자서전에 한 줄로 기록하고 영영 잊었는지 모르겠으나, 정전협정이 남아있는 한 6.25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정전체제에서 사는 남측 국민들의 불행은 여론조사결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선일보>, 한국갤럽, 글로벌 마켓 인사이트가 2010년 12월 16일부터 12월 24일까지 10개 나라 5,1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주변국 위협 때문에 행복이 훼손당한다”고 느끼는 남측 응답자 비율이 69.6%로 다른 나라 응답자 비율보다 월등히 많았고,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측 응답자 비율이 37.5%로 다른 나라 응답자 비율보다 월등히 높았다.

1953년 7월 27일에 시작된 정전은 언제 어떻게 끝나는 것일까? 정전이 종전과 평화로 바뀌는 시점을 ‘예언’할 수는 없으나, 정전이 어떻게 끝나갈 것인지는 예견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파악하면, 7.27 정전이 긴 여운을 끌며 끝나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정세변화에 둔감한 사람들은 전혀 실감할 수 없지만, 7.27 정전은 그들의 무지와 둔감과는 무관하게 차츰 종말에 이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정전이 세기를 넘기고서도 10년이 지난 뒤에 서서히 종말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엊그제 일어난 것 같고 그 뒤에도 국지전 위기가 가셨다는 확증도 보이지 않는데, 7.27 정전이 끝나간다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예견하는 것일까? 7.27 정전이 끝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더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의 해답은 전쟁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사를 알면, 정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다. 전쟁사를 분석함으로써 정전의 종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전쟁사가 7.27 정전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말해주는 것은 아니며, 6.25 전쟁과 같은 배경, 원인, 구조를 지닌 전쟁사가 그에 대해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고, 분단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파악해야 7.27 정전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전망할 수 있는 것이다.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고, 분단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 두 번밖에 없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나 1953년 7월 27일에 정전된 6.25 전쟁, 그리고 1955년 11월 1일에 일어나 1975년 4월 30일에 종전된 베트남 전쟁이다. 6.25 전쟁은 일제 식민지→외세에 의한 분단→북측과 미국의 전쟁이었고,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 식민지→외세에 의한 분단→북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이었다. 비록 시대적 상황과 전개양상은 서로 다르지만, 주목하는 것은 그 두 전쟁이 식민지-분단-전쟁이라는 똑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점이다.

7.27 정전은 6.25 전쟁의 산물이며 그 연장이다. 따라서 7.27 정전이 끝나야 식민지-분단-전쟁의 완전 종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종전은 식민지-분단-전쟁의 완전 종식이었으므로, 7.27 정전과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비교, 고찰하면 7.27 정전의 종말을 예견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사의 전환점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그에 따라 미국군이 철군하기 시작한 전환점은 무엇이었을까? 베트남 전쟁사를 다시 읽어보면, 1968년이 눈길을 끈다. 베트남 전쟁사에서 전쟁 발발 13년 만에 확전이 중지되고, 7년의 종전 과정이 시작된 대전환은 1968년에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4월 30일에 끝났지만, 그보다 7년 앞선 1968년부터 종전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대전환이 1968년에 있었다고 보는 까닭은,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그 해에 뗏 총공격(Tet General Offensive)이라고 부르는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미국군의 기를 꺾어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세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6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남측에서는 베트남 국군을 월남군으로, 베트남 인민군을 월맹군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베트콩으로 부르지만, 그런 자의적 호칭은 부정확하므로 고유한 명칭을 쓰는 것이 옳다.

둘째, 뗏 총공격이라는 말은 미국군이 쓴 용어인데, 뗏 응웬 단(Tet Nguyen Dan, 節元旦)이라는 베트남말에서 온 것이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총공격을 개시한 1968년 1월 31일은 베트남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에서 민속명절로 지키는 음력설이었다.

셋째, 반제군사노선을 견지하는 “형제적 사회주의 진영”에서 베트남 전선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한 나라는 북측이다. 북측은 1967년 초 베트남 전선에 전투기 조종사 200명과 2개 방공포 여단을 파병하여 미국군의 공중우세에 파열구를 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대담한 작전도 전개하였다. 북측의 군사작전은 1968년 1월 21일과 1월 23일에 있었다.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난 1.21 사태는 청와대 습격을 기도한 군사작전으로 알려졌으나, 주한미국대사관도 기습공격 대상에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동아일보 2011년 1월 19일). 1.21 사태 이틀 뒤, 북측은 북측 동해 영해선을 침범한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기습 나포하였다. 미국 연방상원 외교위원회가 1968년 1월 26일에 진행한 비공개회의 회의록이 2010년 7월 4일에 기밀해제되었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때로부터 사흘 뒤 연방상원 외교위원회 비공개회의에 출석한 딘 러스크(Dean Rusk) 당시 국무장관이 “이번 일(푸에블로호 나포를 뜻함)은 북코리아가 북베트남과 연대를 과시하기 위한 노력으로, 아마도 우리 병력을 베트남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한 대목이 들어있다. 이처럼 북측 인민군이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로 방대한 미국군 전투력을 동해에 묶여놓은 가운데,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음력설 총공격을 개시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음력설 총공격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968년 1월 31일부터 3월 28일까지 제1단계 공격을 가했고, 5월 5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2단계 공격을 가했고, 8월 17일부터 9월 30일까지 제3단계 공격을 가했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의 44개성(省) 전역에 걸쳐 100여 개가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미국군, 베트남 국군, 미국 추종 참전국 군대들에게 동시다발 총공격을 퍼부었다.

미국군의 잔혹한 전쟁범죄가 세상에 알려진 1968년 3월 16일의 밀라이 민간인 학살사건(My Lai Massacre)도 음력설 총공격 기간 중에 자행되었고, 미국 전쟁사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께산 전투(Battle of Khe Sanh)도 음력설 총공격 기간 중에 있었다. 원래 께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에 시작되었는데, 음력설 총공격 기간에 최고조로 격화되었다. 께산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뜨리(Quang Tri)성(省)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미국군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께산 진지는 군사분계선(DMZ) 바로 아래에 있었다. 1968년 1월 21일에 시작하여 4월 8일까지 77일 동안 계속된 께산 전투에서 베트남 인민군은 진지 점령 공격전을 벌였고, 미국군 제3해병대 병력과 베트남 국군 부대는 진지 사수 방어전을 벌였다.

전멸위기에 처한 미국군 해병대를 구출하기 위해 미국군 지휘부는 “베트남 전쟁사에서 가장 집중적인 공중화력을 동원하였다.” 77일 동안 미국 공군 전폭기들은 께산 상공으로 9,691회 출격하여 14,223t의 폭탄을 퍼부었고, 미국 해병대 전폭기들은 7,098회 출격하여 17,015t의 폭탄을 퍼부었다.

그처럼 엄청난 공습을 퍼부었어도 베트남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게 되자, 1968년 2월 1일 얼 윌러(Earle G. Wheeler) 당시 미국군 합참의장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C. Westmoreland) 베트남 주둔 전선사령관에게 “께산의 전황이 그처럼 불리하게 돌아가는 경우,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것인지”를 묻고 “나는 전술핵무기 또는 화학무기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문제를 전망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급해진 미국군 지휘부는 핵공격까지 검토하였으나, 께산 전투에서 미국군 205명, 베트남 국군 229명이 전사하였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음력설 총공격 기간에 미국군 30,000명을 도시 방어진지에서 끌어내 께산 전투에 묶어놓음으로써 미국군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남베트남 각 도시와 마을에 주둔하는 미국군 진지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여 전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베트남 국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남베트남 정부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것이 음력설 총공격의 전략목표였다.

첫째, 베트남 국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공격전은 군사분계선에서 50km 떨어진 도시 훼(Hue)에 집중되었다. 베트남 전쟁사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로 기록된 훼 전투는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합동작전으로 전개되었다. 훼 전투에서는 베트남 인민군 및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10개 대대가 미국군 5개 대대 및 베트남 국군 11개 대대와 맞붙었다. 1968년 1월 30일부터 3월 3일까지 계속된 그 전투에서 미국군 221명, 베트남 국군 452명이 전사하였다.

둘째, 남베트남 정부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공격전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동시다발 기습공격으로 전개되었는데, 그들의 공격은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집중되었다. 탄손눗 공항, 독립궁, 미국 대사관, 롱빈 해군본부, 국립라디오방송국이 공격목표였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들은 국립라디오방송국을 점거한 6시간 동안 티우 정부를 반대하는 총봉기를 일으켜 사이공을 해방할 것을 사이공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호치민(Ho Chi Minh) 주석의 육성녹음을 방송하려고 하였으나, 방송국이 점령되자마자 베트남 국군이 방송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방송탑 전선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방송하지 못하였다.

또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19명은 넉 달 전에 신축공사를 마친, 4층 건물로 된 미국 대사관의 담장에 폭파구멍을 내고 들어가 대사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헬기로 긴급 수송된 미국군 지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여섯 시간 동안 대사관 경내에서 계속된 총격전에서 미국인 5명이 죽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미국 대사관을 공격한 목적은 정치적 승리를 얻으려는 데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대사관이 기습공격을 받고 피격으로 피투성이가 된 미국인들이 들것에 실려 나오는 장면이 미국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보도되자, 미국은 공포와 충격에 휩싸였고, 이미 불이 붙은 반전운동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명백하게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음력설 총공격으로 심각한 정치적, 군사적 타격을 입었다.

북측 인민군의 10대 군사작전

20년 동안 계속된 베트남 전쟁의 방향을 바꿔놓은 대전환이 1968년 음력설 총공격이라면, 근 60년 동안 계속되는 7.27 정전의 방향을 바꿔놓은 시점은 언제일까? 2009년에 시작되어 2010년까지 계속된 북측의 대공세가 7.27 정전의 방향을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라고 말할 수 있다. 1968년 음력설 총공격에서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미국군의 기를 꺾어놓음으로써 종전 과정이 시작된 것처럼, 2009년과 2010년에 있었던 대공세에서 북측 인민군이 미국군의 기를 꺾어놓음으로써 이 땅에서도 마침내 종전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북측의 대공세란 북측 인민군이 2년 동안 전개한 10대 군사작전을 뜻한다. 10대 군사작전을 시간적으로 배열하면 아래와 같다. 10대 군사작전에 관한 자세한 분석은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 각각 담겨있다.

첫째, 2009년 4월 5일 은하 2호를 쏘아 올렸다. 이것은 무게가 1t 이상 되는 핵탄두 여러 기를 싣고 워싱턴까지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09년 4월 6일에 발표한 ‘정찰위성을 따돌린 특수열차’, 4월 13일에 발표한 ‘광명성 2호는 어디에 있을까?’, 4월 27일에 발표한 ‘광명성 2호, 10분 시차의 비밀’에서 자세히 논했다.

둘째, 2009년 5월 25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 있는 지하핵실험장에서 두 번째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태평양지역에 산재한 미국군 기지들을 날려버릴 소형 전술핵탄두를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09년 6월 1일에 발표한 ‘풍계리발 인공지진, 끝장공세와 연속타격’, 6월 15일에 발표한 ‘불가사의한 5.25 핵실험의 실상’에서 자세히 논했다.

셋째, 2009년 7월 4일 미사일발사훈련 중에 초음속 순항미사일을 동해로 쏘았다. 이것은 한반도로 접근하는 항모강습단을 타격할 능력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09년 7월 6일에 발표한 ‘항공모함을 향해 날아가는 ‘바닷새’’에서 자세히 논했다.

넷째, 2010년 1월 15일 육해공군 대규모 합동실탄사격훈련을 서해안에서 실시하였다. 이것은 한반도에 상륙하는 미국군 제3해병대 원정강습단을 타격할 능력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2월 1일에 발표한 ‘인민군은 왜 바다로 방사포를 쏘았을까?’에서 자세히 논했다.

다섯째, 2010년 5월 12일 핵융합장치를 개발하였음을 언론보도를 통해 공개하였다. 이것은 수소폭탄도 만들 수 있는 최첨단 핵기술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5월 17일에 발표한 ‘북측은 핵융합장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에서 자세히 논했다.

여섯째, 2010년 8월 9일 서해 ‘북방한계선’을 따라 무인전투기 위협비행을 하였다. 이것은 최첨단 전자무기를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8월 23일에 발표한 ‘북측 무인항공기의 담대무비한 위협비행’에서 자세히 논했다.

일곱째, 2010년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공군의 북침작전연습에 대응하여 전파방해 전자전 공격을 가했다. 이것은 공습을 저지할 전자전 능력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9월 27일에 발표한 ‘센터늘 포커스 10B는 왜 망쳤을까?’에서 자세히 논했다.

여덟째, 2010년 10월 10일 인민군 열병행진에서 각종 첨단 미사일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미사일, 전투기, 전폭기를 공중에서 요격하고, 미국군의 전략거점을 타격할 각종 첨단 전술미사일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10월 18일에 발표한 ‘미국이 공포 느낀 북측의 첨단무기들’에서 자세히 논했다.

아홉째, 2010년 11월 12일 방북한 미국 핵과학자에게 최첨단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최첨단 우라늄 핵기술을 보유하였음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11월 22일에 발표한 ‘북측이 공개한 첨단 핵능력, 최고로 강한 대미압박’에서 자세히 논했다.

열째, 2010년 11월 23일 서해 분쟁수역에서 실탄사격훈련을 강행하는 한국군 연평부대에게 집중포격을 가했다. 이것은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한다는 의사를 미국에게 전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11.23 포격전 정밀분석’, 12월 6일에 발표한 ‘언론에 나지 않은 포격전 내막’에서 자세히 논했다.

위에 열거한 10대 군사작전을 살펴보면,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북측이 얼마나 초강경한 대미 압박공세를 계속하였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이 이끄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새로 구성되자마자 북측의 초강경한 압박공세로 큰 타격을 받았다. 타격을 받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전략적 인내 정책, 유엔안보리 대북결의안 채택, 항모강습단 서해 출동, 각종 북침전쟁연습 등으로 허겁지겁 대응하였지만, 북측은 근 2년 동안의 초강경한 압박공세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치명적 위협을 가했다.

북측의 10대 군사작전으로 치명적 위협을 받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백악관 특별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에게 미국이 북측의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음을 거론하고(뉴욕 타임스 2011년 1월 20일), 그보다 앞서 중국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로벗 게이츠(Robert M. Gates) 미국 국방장관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면담한 직후 기자들 앞에서 미국이 북측의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음을 거론한 것(워싱턴 포스트 2011년 1월 11일)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기가 꺾였음을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3단계 전략적 변화

중요한 것은, 북측의 10대 군사작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1968년 음력설 총공격으로 기가 꺾인 미국에게 어떠한 전략적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보면, 북측의 10대 군사작전으로 기가 꺾인 미국에게 지금 어떠한 전략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사를 다시 읽어보면, 음력설 총공격으로 기가 꺾인 미국에게 일어난 세 가지 전략적 변화가 시야에 들어온다.

첫째, 음력설 총공격으로 심대한 정치적, 군사적 타격을 입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전쟁전략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음력설 총공격에서 패한 이후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군의 전략은, 베트남 국군이 주도하고 미국군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베트남 전선에 배치된 미국군은 대규모 작전을 중단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소규모 작전만 전개하였다. 그 대신 베트남 국군에게 미국산 신형 무기를 넘겨주어 그들의 무장력을 강화시켰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자기들의 그러한 전략적 변화를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 of the Vietnam War)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둘째, 음력설 총공격 직후 두 달 만에 대통령에 당선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은 1969년 1월 20일 제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베트남 전쟁에서 “순전히 군사적으로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8일 25,000명이 철군하였고, 9월 16일에는 35,000명이 철군하였다. 1969년 11월 3일 닉슨 당시 대통령은 비공개 시간표에 따라 전면 철군계획을 작성하고 있음을 밝혔고, 12월 15일 50,000명을 1970년 4월까지 철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970년 4월 20일 닉슨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 연설에서 앞으로 12개월 동안 150,000명을 철군하겠다고 밝혔다. 1971년 11월 12일 닉슨 당시 대통령은 45,000명을 1972년 2월 1일까지 철군하겠다고 밝혔고, 1972년 1월에는 70,000명을 1972년 5월 1일까지 철군하겠다고 밝혔고, 4월 26일에는 20,000명을 철군하겠다고 밝혔고, 6월에는 10,000명을 1972년 9월까지 철군하겠다고 밝혔고, 8월에는 12,000명을 철군하겠다고 밝혔다.

셋째, 미국군은 1965년 3월 2일부터 롤링 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는 작전명으로 북베트남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음력설 총공격이 끝난 때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68년 11월 1일에 중단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베트남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중단한 까닭은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1969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미국,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남베트남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위한 4자 평화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틀 뒤인 1월 20일 닉슨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우리는 대결의 시기를 지나 협상의 시기로 들어서고 있다”고 말하였다. 196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시작된 4자 평화회담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4자 대표들이 베트남의 전쟁종식과 평화회복을 관한 협정(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에 조인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음력설 총공격 이후 5년 동안 베트남 전선에서 일어난 미국의 전략적 변화는 3단계로 전개되었는데,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단계적 철군→평화회담 개최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정전상태에 있는 한반도에서도 미국의 전략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2010년 10월 8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제42차 한미안보협의회(SCM)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에서 한미 국방장관들이 채택한 공동성명 제10항은 전시작전통제권을 2015년에 한국군 합참에게 넘겨주는 문제를 이렇게 재확인하였다. “양 장관은 연합전쟁 수행을 위한 전시작전통제권을 2015년에 대한민국 합참으로 전환하는 것을 포함하여 향후 수년 동안 한미동맹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한 포괄적 전략을 확인하였다. 전작권 전환은 동맹의 연합방위태세 능력을 유지, 제고시켜야 하며, 한미동맹의 주요 국방 우선과제들과 미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원래 2012년 4월 17일에 한국군 합참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던 전작권을 2015년 12월 1일에 넘겨주겠다고 변경하면서 반환시점을 3년 뒤로 연기하였다. 전작권 반환에 따라, 한국군 합동사령부와 미국 한국사령부가 각각 창설되면,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국군이 지원하는 새로운 전략이 시행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전략의 변화는 음력설 총공격에서 패한 이후 베트남 전선에서 베트남 국군이 주도하고 미국군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던 전략적 변화와 일치된다. 음력설 총공격 이후 5년 동안 베트남 전선에서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단계적 철군→평화회담 개최로 전개된 미국의 3단계 전략적 변화가 말해주듯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2015년 12월 1일에 전작권을 한국군 합참에게 넘겨준다는 말은, 전작권 반환을 완료하기 이전에 한반도 평화회담이 열리고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7.27 정전을 끝내기 위한 종전 과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백악관 특별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꺼내놓은 발언

2011년 1월 20일 <뉴욕 타임스>는 당시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이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오바마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관한 보도기사를 내보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한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만일 중국이 북측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국 영토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북측의 공격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아시아의 미국군을 재배치해야 할 것”이라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경고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그러한 발언은 2010년 12월 6일 오바마-후진타오 국제전화통화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2011년 1월 18일 백악관 관저의 대통령 가족 전용 식당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차려진 비공식 만찬(private dinner)에서 또 다시 나왔다.

미국 측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을 수행한 토머스 도닐런(Thomas E. Donilon)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힐러리 클린턴(Hillary R. Clinton) 국무장관이, 중국 측에서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수행한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과 양제츠(楊潔篪) 외교부장만 참석한 특별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화제의 초점을 무역 불균형이나 위안화 문제 또는 이란 문제나 대만 문제에 맞춘 것이 아니라 줄곧 북코리아에 맞추었다. 그는 “북측의 우라늄농축시설, 플루토늄 핵무기 생산,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이 “미국을 찌르는 세 갈래 위협(three-pronged threat to the United States)”이라고 지적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하거나 또는 미국군 방어태세를 전환하거나 또는 미국군을 재배치(redeploy)하는 것과 같은 장기적 조치들(long-term measures)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오바마 대통령은 양측 국가원수가 각기 고위관리 두 사람만 대동하고 참석하는 비공식 만찬을 특별히 마련하고, 그 자리에서 미국이 북측으로부터 심각한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음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강대국의 체면을 차리고 싶어 비록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측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매우 심각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비공식 특별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이 북측을 압박하지 않으면 동북아시아 미국군을 재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는데, 이 발언은 현실과 너무도 어긋나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중국 국가주석에게 꺼내놓았다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중국은 북측을 압박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국의 압박이건 설득이건 간에 북측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도리어 북측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중국에게 북측을 압박하라고 요청하였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이런 맥락을 보면, 오바마 대통령이 비공식 특별만찬에서 꺼낸 발언의 핵심은 중국의 대북 압박 요청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미국군을 재배치하여야 한다는 의사표명이었다. 바로 그러한 오바마 대통령의 의사표명에서 동북아시아 미국군을 재배치하려는 전략적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 미국군을 재배치하여야 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말에서 엿보이는 전략적 변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오바마 대통령의 재배치 발언은, 병력을 증강하여야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반대로 병력을 감축하여야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중국 국가주석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만찬에서 자기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동북아시아에 미국군 병력을 증강 재배치하겠다는 식의 협박성 발언을 꺼낼 수 있었을까? 지난 시기 중국 국가주석의 백악관 방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최상의 예를 갖춰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맞이한 특별만찬 분위기는,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을 자극할 협박성 발언을 꺼낼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미국군을 재배치하여야 한다는 발언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군 병력을 감축 재배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현재 조성된 군사정세를 보면, 동북아시아에서 감축 재배치할 수 있는 미국군 병력은 주한미국군과 오키나와(冲繩) 주둔 미국군 해병대뿐이다. 2006년 5월 미국과 일본은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에 배치된 미국군 해병대 제3원정군 병력 일부를 미국 영토인 괌(Guam)으로 재배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국군 해병대사령부 병력 8,600명과 그 가족 약 9,000명을 2012년까지 괌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전비용 102억7,000만 달러 가운데 일본이 60억9,000만 달러를, 미국이 41억8,000만 달러를 분담한다. 주일미국군의 재배치는 이미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동북아시아에서 새로 감축 재배치할 대상은 주한미국군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초청한 특별만찬에서 꺼내놓은, 동북아시아 미국군을 재배치한다는 말은 주한미국군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철군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원래 미국 군부는 전작권을 반환한 뒤에도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미국이 북측으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을 받기 이전에 미국 군부의 구상이었지, 북측의 군사적 위협을 받기 시작한 이후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결정한 사항은 아니다. 군사상황이 변화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직접 겨냥하며 신흥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북측의 군사적 위협이 점증하고 있는 현재 군사상황에서 북측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안전을 지켜야 할 중대하고 시급한 임무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주어졌다.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재임기간에 4자 평화회담을 추진하여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베트남 주둔 미국군을 철군한 것처럼, 오바마 대통령도 재임기간에 한반도 평화회담을 추진하여 7.27 정전을 끝내고 주한미국군 단계적 철군을 시작하는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35년 전에 끝난 베트남 전쟁에서 얻어야 할 한반도 전략지침이 바로 그것이다. (2011년 1월 24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