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군사분계선 딛고 선 할머니의 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대문에 걸린 자그마한 현판

1994년 4월, 10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찾아간 서울은 봄기운에 젖어 있었다. 문익환 목사가 별세한 날로부터 100일이 되는 4월 28일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에서 한반도 정세 토론회가 열렸는데, 나는 토론회 발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청을 받았다.

10년 전 모습과 꽤 달라진 서울거리. 갈 곳을 정하지 않고 그저 서울거리를 홀로 걷고 싶어 문을 나선 나의 뇌리에 1984년 여름의 기억 한 줄기가 스쳐갔다. 그 해 늦여름 어느 날, 뉴욕에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잠시 귀국한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묘소에 갔다. 무덤가에서 아버지는 일제식민통치기에 할아버지가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할아버지는 경기도 가평 고향마을을 떠나 항일독립운동으로 들끓던 만주로 갔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국통일운동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무덤가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가 울고 있었다.  

할아버지 무덤가에서 산새 울음소리를 들었던 때로부터 꼭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원에 있는 문익환 목사 묘소에서 수많은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추모식에서 나는 처음으로 박용길 장로를 뵈웠다.  

서울 강북구 수유6동에 있는 박용길 장로의 집 대문에는 그가 친필로 쓴 ‘통일의 집’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넣은 자그마한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 날 각계층 인사들이 모여 ‘통일의 집’ 개관식을 진행하였다. 수수한 우리옷 차림을 한 박용길 장로는 쾌활한 목소리와 소탈한 웃음으로 미국에서 찾아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통일의 집’에는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가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출발하여 조국통일운동으로 전진하여온 삶과 투쟁의 자취가 가득하였다. 박용길 장로의 자상한 해설을 들으며 우리는 문익환 목사가 남긴 유품들을 숙연한 심정으로 돌아보았다. ‘통일의 집’에서 찍은 17년 전 기념사진들은 지금도 사진첩에 소중히 보관되어 잊지 못할 그 날의 추억을 전해준다.

평양에서 다시 만난 박용길 장로

그로부터 1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난 1995년 7월 초, 나는 중국 베이징에 있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해외통일운동 대표자들과 범민련 북측본부 관계자들이 분단 50년을 맞은 그 해 8.15에 열릴 민족통일행사 준비를 협의하는 회의에 재미동포 통일운동권 인사 몇 사람과 함께 나도 참석하였는데, 그 회의를 마친 뒤에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우리는 박용길 장로가 지금 거기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북측 안내자에게 박용길 장로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더니, 토론해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한참 뒤에 우리 앞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어렵사리 상부의 허락을 받은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를 태운 승용차가 평양 시내를 달렸다. 대동강 부근 울창한 숲속에 초대소가 있었다. 남측에서는 영빈관이라 하고, 북측에서는 초대소라 하고, 미국에서는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라 한다. 녹음이 우거진 초대소 정원 저 쪽에서 야생꿩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수려한 풍치가 실로 매혹적인 그 초대소는 1989년 3월 25일 통일방북을 결행한 문익환 목사가 머문 곳이었다. 박용길 장로는 자신의 방북길에 동행한, 자신의 오랜 지인인 재일동포 통일인사 정경모 선생과 함께 그 초대소에 머물고 있었다. 박용길 장로와 정경모 선생을 평양에서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내게 반가움과 기쁨이 한층 더 컸다.

그 때 박용길 장로와 정경모 선생은 김일성 주석 1주기를 맞아 추모방문으로 평양에 갔었다. 박용길 장로는 1995년 7월 8일 평양에서 거행된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식에 남측에서 유일하게 참석하였다. 박용길 장로는 문익환 목사 10주기를 맞은 2004년 1월 16일 <통일뉴스>에 실린 대담기사에 자신의 추모방북에 관한 회고담을 남겼다. 회고담에 따르면, “큰 방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러 사람이 들어오는데 김정일 장군이 악수하면서 첫 마디가 가신 분들의 유지를 받들어서 통일사업에 매진해야 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붕괴설’이 범람하던 분단장벽을 훌훌 뛰어넘어 결행한 그의 추모방북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국상 1주기를 맞은 북측 인민들 속에서 민족화해와 조국통일을 향한 강렬한 불꽃을 지펴올렸다. “내가 (1주기 조문가서) 길에만 가면 (북측 인민들이) 너무 좋아 만세 부르고 난리였다”고 그는 회억하였다. 16년 전에 나온 언론보도사진을 다시 찾아보니, 박용길 장로는 금수산기념궁전 개관식에 소복차림으로 참석하였다. 7년 전 <통일뉴스>에 실린 회고담에는, 개관식장에서 박용길 장로가 “자꾸 한발짝 뒤로 갈라고 하면 김정일 장군이 자꾸만 앞으로 오라고 끌었다”고 회억한 대목이 나온다.

박용길 장로의 추모방북길에 동행한 정경모 선생이 <한겨레> 2009년 12월 10일 부에 남긴 회고담은 박용길 장로가 어떻게 추모방북을 결행하였는지를 알려준다. “그때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겨우 지팡이를 짚고 걸음마를 시작한 때였으나, 문 목사도 떠난 뒤고 나라도 가야 하지 않겠나 결심을 하고 서울 수유리 박용길 아주머님께 간다는 뜻을 전했소이다. 그랬더니 아주머님께서 ‘나도 간다. 혼자 가면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동행을 주장하시더군요. 그래서 아주머님을 모시고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소이다. 안기부가 눈치채지 않도록 몰래 서울을 빠져나와,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씨알의 힘’ 숙생인 가네코에게 부탁해 도쿄에서는 꽤 거리가 있는 이토라는 온천장에서 열흘 넘게 지내도록 한 다음, 무사히 추모일 며칠 전에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소이다.”

나는 부끄러웠고 서글펐다

박용길 장로는 자신이 묵고 있는 방이 1989년 방북 당시 문익환 목사가 묵었던 바로 그 방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하얀 반투명 커튼이 살포시 드리워진 커다란 유리창문으로 7월의 눈부신 햇볕이 비쳐들고 있었다. 정경모 선생도 자신이 묵고 있는 방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살았던 베르사이유 궁전이 아마 이렇게 생겼을지 모른다고 말하여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이제 몇 날이 지나면 박용길 장로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평양에 갈 때는 정경모 선생과 동행하였지만, 서울로 돌아갈 때는 박용길 장로 홀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야 하였다. 그 저주스런 선을 넘자마자 ‘북한붕괴설’을 떠드는 자들이 연로한 박용길 장로를 체포하여 철창으로 끌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근심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다.

방 안에 흐르던 침묵을 깨고 박용길 장로가 우리에게 자신의 귀로에 동행해줄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1989년 여름 임수경 전대협 대표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한 뒤에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에 돌아갈 때 문규현 신부가 동행하였던 것을 기억하며 그런 의향을 우리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용길 장로와 동행하여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또 다른 ‘고난의 행군’에 선뜻 나설 용사는 우리들 가운데 없었다. 나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 잠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박용길 장로의 표정이 지금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평양을 떠나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은 무거웠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홀로 넘어가 체포될 박용길 장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훌쩍 떠나와버린 나의 무력한 처지가 못내 부끄러웠고 서글펐다.

통일열망 안고 걸어간 봄길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뉴욕의 우리집으로 우편배달된 일간지 <한겨레>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1995년 8월 1일 <한겨레>에 실린 보도사진 한 장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보도사진 속에는 소복을 입은 낯익은 할머니 한 분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딛고 두 손을 치켜든 채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감동적인 장면을 실은 <한겨레> 보도사진에 해설기사라고는 한 줄도 없고, “평화통일 만세!”라는 여섯 글자만 씌여있었다. 그렇지, 거기에 무슨 긴 설명을 더 적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섯 글자가 가슴 뜨거운 사연을 다 말해주고 있었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딛고 선 할머니의 짧은 외침. 이윽고 커다란 산울림으로 퍼져간 그 여섯 마디 “평화통일 만세!”는 분단의 비극 속에서 슬픔도 가책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깊은 잠에 빠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신새벽의 외침이었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딛고 선 박용길 장로의 얼굴에는 근심 따위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그런 모습이 담긴 보도사진을 말없이 바라보던 내게서 불현 듯 어떤 강한 힘이 솟구치고 있음을 느꼈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사랑하는 아내이자 평생동지인 그에게 지어준 봄길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처럼, 박용길 장로의 삶은 평화통일의 봄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한겨울 추위가 봄길을 막아서지 못하듯, 군사분계선도, 주한미국군도, ‘국가보안법’도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방해물도 감히 막아서지 못하는 바로 그런 길이었다. 분단시대를 뛰어넘어 통일의 봄소식을 안고 달려온 길이었고, 심장의 박동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통일열망을 안고 꿋꿋이 걸어간 길이었다. 부음을 들은 날, 나는 시인 신동엽이 아주 오래 전에 불렀던 절창 마지막 구절을 조용히 따라부르며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들 두 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통일뉴스 2011년 9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