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빙궈와 힐러리 클린턴의 2시간 30분 말싸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중국의 전방위 압박에 백기를 든 일본

2010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17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 정상회의와 제5차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진행되었다. 여러 나라 정상들이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는 의례히 양국 정상의 별도 회담이 진행되는 법인데, 중국은 일본이 요구한 양국 정상회담을 거부하였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는 국제정상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회의장 대기실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다.

중일관계가 악화된 까닭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듯이, 두 나라가 댜오위다오(釣魚島)의 영유권 문제로 정면충돌하였기 때문이다. 댜오위다오는 다섯 개 무인도와 세 개 암초로 이루어진 동중국해의 군도(群島)인데, 정면충돌의 발단은 이러하였다.

2010년 9월 7일 오전 10시 15분께 댜오위다오 앞바다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세 척이 중국 어선 한 척을 나포하여 오키나와(沖繩)로 끌어갔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중국인 선장을 공무집행 방해죄로 체포하고 어업법 위반혐의로 조사하였다. 중국 정부가 엄중 항의하자, 일본 정부는 9월 13일 선원 14명과 어선을 중국으로 돌려보내면서도 선장은 붙잡아두고 끝내 사법처리하려고 하였다.

일본이 중국인 선장을 구속한 것은, 중국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자국의 영토주권을 수호하는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로 확대되었다. 만일 일본이 그 선장을 일본 국내법에 따라 사법처리하는 경우, 댜오위다오는 일본의 사법권이 미치는 일본 영토임을 인정한 첫 판례를 남기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섬에 대한 중국의 주권이 훼손당하는 심각한 사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중국은 자국 정부 관리들의 일본 방문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한 자국산 희토류 수출을 금지하고, 중국을 방문 중이던 일본인을 간첩혐의로 구속하는 초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중국 인민들은 각지에서 반일시위를 벌였다. 중국의 강경대응에 밀린 일본은 2010년 9월 29일 중국인 선장을 ‘처분 보류’라는 형식으로 풀어줌으로써 중국의 전방위 압박에 백기를 들었다.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중국과 일본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 재발된 갈등사태에 주목하는 까닭은, 갈등이 중일관계를 넘어 중미관계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중일관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0년 9월 하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방대한 해군력을 동중국해에 집결시켜 중국을 압박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남측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은, 미국의 무력시위는 이러하였다.

2010년 9월 21일 로스앤젤레스급 핵추진 잠수함 그린빌호(USS Greeneville)가 진해에 입항하여 비상대기하였고, 9월 24일에는 버지니아급 핵추진 잠수함 하와이호(USS Hawaii)가 동급 잠수함으로서는 처음으로 괌(Guam)의 에이프라항(Apra Harbor)에 입항하여 비상대기하였다. 이튿날 9월 25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태평양에 배치한 항모강습단을 동중국해로 급파하여 7함대 항모강습단과 함께 비상대기시켰다. 동중국해에 급파된 항모강습단은 워싱턴주 에버렛(Everett)을 출항기지로 하는 초대형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USS Abraham Lincoln)를 주축으로, 미사일순양함 케이프 세인트 조지호(USS Cape St. George)와 미사일구축함들인 맘슨호(USS Monsen), 샤웁호(USS Shoup), 핼시호(USS Halsey), 스터렛호(USS Sterett)로 편성되었다. 친미성향 언론매체들은 미국이 중일갈등을 중재하고 있다는 식의 왜곡보도를 내놓았지만, 미국의 무력시위는 그들의 속셈이 중일 갈등중재가 아니라 대중 압박공세임을 말해 준다.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 중미갈등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그 해역에 미일안보조약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미일안보조약은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를 동아시아 전역의 군사대치로 확대시키는 증폭기 구실을 하고 있다. 미일안보조약이라는 ‘증폭기’를 통해 확대된 동아시아 전역의 군사대치가 한반도 정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갈등강도가 차츰 높아지고 있는 중미관계와 중일관계의 복잡한 내막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같은 운명을 걸머진 댜오위다오와 독도

지리적으로 따져보면, 댜오위다오는 분명히 중국 영토다. 그 섬은 대만에서 북동쪽으로 172km, 중국 본토에서 동쪽으로 363km, 일본 오키나와에서 남서쪽으로 421km 떨어진 곳에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따져봐도, 그 섬는 중국 영토다. 그 섬의 이름은 1403년에 나온 명나라 시기의 문헌 ‘순풍상송(順風相送)’에 처음 기록되었다. <신화통신> 자매지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 2009년 12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대만 가오슝사범대학 차이건샹(蔡根祥) 교수는 ‘부생육기(浮生六記)’ 제5권 ‘중산력기(中山歷記)’ 필사본에 중국인 선푸(沈復)가 1808년에 댜오위다오를 거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에 있었던 옛 왕국)으로 건너갔다고 씌여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1884년보다 76년이나 앞서 그러한 역사기록이 있었으니 그 섬은 예로부터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1863년에 제작된 청나라 지도에도 그 섬은 푸젠(福建)성에 속한 댜오위타이군도(釣魚臺群島)라는 이름으로 올라있다.

그런데 1894년 8월 1일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정면충돌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당시 일본 총리와 리홍장(李鴻章) 당시 청나라 북양대신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중국에서는 마관[馬關]조약으로 부름) 제2조는 청나라가 대만을 일본에게 할양한다고 규정하였다. 댜오위다오는 대만에 딸린 섬(屬島)이므로, 패전국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승전국 일본에게 대만을 빼앗기면서 그 섬도 딸려가고 말았다. 대만과 대만에 딸린 섬들을 빼앗은 일본은 댜오위다오를 센카쿠열도(尖閣列島)라고 불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강탈하기 시작한 1905년부터 독도를 시마네(島根)현 오키(隱岐)섬에 딸린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른 것과 똑같은 짓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이 식민지로 강탈했던 영토를 본디대로 귀속시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댜오위다오가 중국 영토라는 사실이 명백한 데도, 미국은 1951년 9월 8일 대일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전후 영토귀속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이 식민지로 강탈하였던 중국 영토 가운데서 대만은 중국에 귀속시키면서도, 대만에 딸린 댜오위다오를 떼어내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미국은 한반도와 관련된 영토귀속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과정에서 과거 일본이 점령했던 한반도에 딸린 섬들 가운데서 울릉도를 남측에 귀속시키면서도, 울릉도에 딸린 독도를 떼어내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 ‘독도밀약’이다. 작성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모두 공개하는 일본 외무성이 유독 한일수교회담 과정에서 작성된, ‘독도 영유권 문제’라는 제목이 붙은 외교문서만은 단 한 줄도 공개하지 못하는 까닭은 ‘독도밀약’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2010년 6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주미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과 국립중앙도서관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주한미국대사관이 1952년 10월 15일에 작성한 3급 비밀문서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말해 준다. ‘독도밀약’에 대해서는 2008년 8월 4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독도문제, 밀약파기가 유일한 해결책이다’에서 논한 바 있다.

주목하는 것은, 댜오위다오 영유권과 독도 영유권을 끊임없이 우기는 일본에게 영유권 주장의 근본원인을 제공한 ‘배후 주범’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1971년 12월 30일 중국 외교부는 성명에서 댜오위다오가 중국 고유의 영토라는 사실을 밝혔으나, 미국은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오키나와와 댜오위다오를 계속 점령하고 있다가, 1972년 5월 15일에 가서야 일본에 돌려주었다. 그 때부터 일본은 댜오위다오를 독자적으로 불법점유하게 되었다.

1972년 9월 25일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 당시 일본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와 국교정상화를 합의하였다. 1978년 8월 12일 베이징에서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었고, 10월 22일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국 부주석이 일본을 방문하여 중일평화우호조약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한 결정을 다음 세대에게 맡기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의 댜오위다오 불법점유를 중지시키지 못해 화근이 남았다. 1978년 일본 우익단체들이 댜오위다오에 불법상륙하여 등대를 세우더니, 1980년부터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그 섬 앞바다를 돌아다니며 중국 어선을 ‘영해침범’이라는 구실로 억류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1992년에 영해법을 제정하면서 그 섬을 자국 영토로 명시하였으나, 1996년 클린턴 정부 시기 커트 캠벨(Kurt Campbell) 당시 국방부 차관보는 댜오위다오가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대상이라는 점을 처음 공식적으로 밝혔다.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가 미일안보조약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2009년 3월 5일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일본 관방장관의 발언에서 또 다시 드러났다. 그는 기자들에게 “센카쿠열도는 오키나와 반환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진 이래 일본의 행정권이 미치고, 일미안보조약이 적용된다는 것을 미국측으로부터 확인했다”고 말했다. 2010년 8월 18일 고다다 가즈오(兒玉和夫) 일본 외무성 보도관은 댜오위다오가 “(중국의) 공격을 받을 때 일본과 미국이 함께 대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은 댜오위다오를 일본 영토로 규정하고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대상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독도도 일본 영토로 규정하고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대상으로 보고 있다. <아사히신붕> 2010년 7월 8일 보도에 따르면, 1960년에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은 조약의 적용범위를 일본에 한정하지 않고 극동이라고 명시하였는데, 2010년 7월 7일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미일안보조약 개정에 관련된 외교문서에는 당시 일본 정부가 말한 ‘극동’이란 “필리핀 이북의 일본과 그 주변지역으로, 한국과 대만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범위는 일본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지역’인 남측과 대만까지 포괄된다는 뜻이다. 미국과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남측과 대만은 미일 양국의 ‘안보유지’에 필요한 ‘주변지역’이기 때문에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범위에 포함되고, 댜오위다오와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기 때문에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범위에 자동적으로 포함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 영토와 주권을 강탈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강도적 본색이 드러나 보인다.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가 중일관계를 넘어 중미관계로 확대되면서 오랫동안 은폐된 근본원인이 드러난 것처럼, 독도 영유권 문제도 한일관계를 넘어 한미관계로 확대되어야 ‘독도밀약’에 은폐된 근본원인이 드러날 것이다.

클린턴 국무장관의 교활한 화술

<중앙일보> 2010년 11월 1일 보도에 따르면, 베트남 하노이에서 진행된 제17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3 정상회의와 제5차 동아시아정상회의에 참석한 힐러리 클린턴(Hillary R. Clinton) 국무장관은 양제츠(楊潔篪) 외교부장과 만난 별도 회담에서 “(댜오위다오가) 미일안보조약에 명기된 미국의 방위의무의 일부”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항해와 상업활동의 자유는 미국의 국익이다. (중국과 주변국들의) 해양분쟁이 국제 관습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도록 (미국이) 관여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클린턴 국무장관은 댜오위다오 문제를 풀기 위해 미중일 외교장관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였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양제츠 외교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미일안보조약을 꺼내들고 미국의 개입의사를 밝히면서 3국 외교장관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것은, 미국이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에 개입하는 속셈이 무엇인지 드러낸 것이다. 아래에서 상론하겠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면 미국은 중일 영토분쟁을 빌미로 중국과 정면대결을 벌이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 커보인다. 미국이 댜오위다오 분쟁에 개입하려는 명분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겉으로 드러낸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양제츠 외교부장에게 말한 내용 가운데서 주목하는 것은, 항해권 문제를 언급한 대목이다. 클린턴 국무장관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의 동중국해 항해권은 미국의 국익이므로 중국은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상상황을 상정하는 것이지만, 만일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중국 영토로 인정하고 그 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미국 선박이 그 섬 앞바다를 거쳐 동중국해를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댜오위다오가 중국 영토라는 사실이 국제법적으로 공인되는 경우, 당연히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은 더 넓어질 것이지만, 동중국해에서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넓어지더라도 미국 선박은 국제해양법이 보장하는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을 인정받기 때문에 그 수역을 드나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클린턴 국무장관은 왜 생뚱맞게 항해권 문제를 꺼냈을까?

만일 댜오위다오가 중국 영토라는 사실이 국제법적으로 공인되면, 미국의 항모강습단, 핵추진 잠수함, 장거리 정찰기들이 그 수역에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클린턴 국무장관이 동중국해 항해권 문제를 꺼낸 것은 생뚱맞은 소리가 아니라, 7함대 항모강습단, 핵추진 잠수함, 장거리 정찰기의 대중 작전범위를 축소시키려들지 말라는 뜻이다. 중국의 해양주권을 위협하는 미국군의 해양군사활동을 ‘항해권 문제’로 대체한 그의 교활한 화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댜오위다오를 미일안보조약 적용대상으로 규정한 발언은, 클린턴 국무장관이 양제츠 외교부장 앞에서 처음 꺼낸 것이 아니다. 2010년 9월 23일 뉴욕에서 진행된 미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클린턴 국무장관은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일본 외상에게 “(댜오위다오는)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를 규정한 미일안보조약 제5조의 적용대상”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국무장관의 그런 발언은,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의 영토주권을 침해하고, 동중국해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중국의 해양주권을 위협하는, 중국이 참기 힘든 폭언으로 들린다. 중국 외교부 공식 웹싸이트 2010년 10월 30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양제츠 외교부장은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한 중국의 단호한 입장을 재확인하고, 미국이 고도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분별있게 처신해야 하며, 중국의 주권과 영토통합을 존중해야 하며, 그릇된 언동을 삼가라고 촉구하였다.” 영토주권과 해상주권을 침해한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에 대해 중국 정부는 외교적 표현을 버리고 직설적 표현으로 강경대응한 것이다.

미국 해양정찰함은 왜 그 바다에 들어갔을까?

일본은 댜오위다오가 오키나와에 딸린 섬이라고 강변하면서, 댜오위다오 주변수역을 오키나와 주변수역과 함께 일본 해상보안청이 관할하는 제12관구 수역으로 지정해 놓았다. 그리고 2009년 2월 1일부터 헬기를 탑재한 2,000t급 최신형 무장순시선(PLH)을 댜오위다오 앞바다에 상시 배치하였다. 중국을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번에는 미국도 중국을 자극하였다. 2009년 3월 4일 미국 해군 해운사령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3,384t급 해양정찰함 빅토리어스호(USNS Victorious)가 서해에 나타났다. 중국 동해안에서 약 190km 떨어진 해상에 들어간 것이다.

1958년 6월 12일 중국은 상하이(上海) 연안에 군사항해수역, 대만 주변에 군사작전수역, 보하이완(渤海灣) 입구에 군사경고수역을 선포하였다. 또한 국제해양법으로 규정된, 해안에서 320km 밖에 그어진 배타적 경제수역에 다른 나라 군함이 들어가려면 사전에 통보하고 통항승인을 받아야 하며, 그 수역 안에서는 다른 나라의 해양과학조사활동도 규제된다. 다른 나라 군함이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서 벌이는 군사활동은 적대행위로 간주된다. 이런 정황을 보면, 미국 해양정찰함이 중국 정부의 통항승인를 받지 않고 중국 동해안에서 약 190km 떨어진 해상에 들어간 것 자체가 불법적이고, 더구나 수도 베이징으로 직통하는 해상로가 지나는 배타적 경제수역 안으로 들어가 해양정찰활동을 벌인 것은 도발행위였다.

빅토리어스호가 출현하자 중국 어업지도국 소속 순찰정이 다가가 탐조등을 계속 비추었고, 이튿날에는 중국 해군 해상정찰기가 날아가 해양정찰함 상공 120m 높이에서 위협비행을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서해에서 중국과 미국이 대치하고 있던 3월 5일 미국 해운사령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5,368t급 해양정찰함 임페커블호(USNS Impeccable)가 남중국해의 중국 배타적 경제수역 안으로 들어갔다. 미국은 서해와 남중국해에서 동시에 중국을 자극하는 도발행동을 취한 것이다.

임페커블호가 나타나자, 중국 해군 프리깃함이 출동하여 뱃머리를 전방 90m까지 가까이 들이대며 두 시간 동안 차단기동을 하였다. 잠시 후 중국 공군 소속 쌍발 프로펠러기 Y-12가 나타나 임페커블호 상공 180m 높이에서 열한 차례 위협비행을 하였고, 프리깃함이 다시 임페커블호 뱃머리 쪽으로 약 400m 다가와 차단기동을 하였다. 3월 7일에는 중국 정보수집함이 임페커블호에게 불법활동을 중지하고 그 해역을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그래도 임페커블호가 말을 듣지 않자, 3월 8일 중국은 해군 소속 해양정찰함 한 척, 국가해양부 소속 순찰정 한 척, 어업지도국 소속 순찰정 한 척, 소형 트롤어선 두 척을 현장에 긴급출동시켰다. 그 선박들은 3월 9일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해상에서 임페커블호 가까이 7.6m 거리까지 접근하여 대치하였다. 그러자 태평양사령부는 3월 12일 9,200t급 최신형 미사일구축함 충훈호(USS Chung-Hoon)를 현장에 급파하여 임페커블호를 호위하였다.

2009년 5월 1일 해양정찰함 빅토리어스호가 또 다시 서해에 나타났고, 중국 어업지도국 순찰정 두 척이 접근하여 해상대치하였다. 이처럼 미국 해양정찰함들이 중국 근해에 들어가는 까닭은, 제임스 라이언스(James Lyons) 전직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2009년 4월 13일 <워싱턴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잠수함 연안침투작전을 준비하려면 해저지형을 측량하여 해저지도를 작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해안에서 185km 떨어진 바다라도 그 수심은 100m 정도로 낮아서, 미국 해군 잠수함이 중국 해안에 근접침투하려면 해저지도가 필수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2009년 6월에는 미국 해군 소속 핵추진 잠수함 한 척이 베이징으로 직통하는 중국의 내해(內海) 보하이만 부근까지 들어가 수중침투작전연습을 벌였다. 사태가 이처럼 험해지자, 중국은 2009년 7월 말 워싱턴에서 진행하려던 미중일 국장급 상설회의체 결성에 불참하였고, 회의체 결성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군의 해상도발이 날로 심각해지는 가운데, 2009년 6월 23일부터 24일까지 베이징에서 제10차 중미 연례국방협의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해상대치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합의는 불과 넉 달도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다. 이번에도 미국이 그 합의를 깼다. 2009년 10월 10일부터 16일까지 7함대 항모강습단이 서해에 전격 출동하여 격렬비열도 근해에서 대규모 해상작전연습을 벌인 것이다. 격렬비열도에서 산둥(山東)반도까지 300km이고, 백령도에서 산둥반도까지는 180km밖에 되지 않는데, 그처럼 비좁은 바다에 항모강습단이 들어간 것은 중국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은 2010년에 들어와 해상작전연습을 더욱 심하게 강행하였다. 북측과 중국을 동시에 자극하는 미국의 해상작전연습은 3월에 ‘키 리졸브’, 7월에 ‘불굴의 의지’, 8월에 ‘을지 프리덤 가디언’으로 이어졌다. 특히 2010년 6월 28일 미국 핵추진 잠수함 세 척이 부산, 필리핀 수빅만(Subic Bay), 인도양 전략기지 디에고 가르시아섬(Diego Garcia)에 동시 출현하였다. 핵추진 잠수함의 동시 출현은, 천안함 사태를 빌미로 서해에서 실시하려던 미국의 해상작전연습에 대해 중국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실탄사격훈련을 강행하는 가운데, 미국이 연출한 대중 무력시위였다. 미국의 해양정찰과 해상작전연습은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 영유권 갈등을 동북아시아 전역의 무력충돌위험으로 확산시키는 요인이다.

싼야공항 귀빈실에서 벌어진 격렬한 말싸움

<뉴욕 타임스> 2010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하노이에서 열린 27개국 아세안 지역포럼(27-member Asean Regional Forum)에 참석한 클린턴 국무장관은 공식발언에서 “남중국해에서 항해 자유,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해양공유수역과 국제법에 대한 존중은 미국의 국익”이라고 말했다. 동중국해는 물론이고,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도 미국이 적극 개입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날, 양제츠 외교부장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만나 회담하였는데, <신화통신> 2010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양제츠 외교부장은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중국은 외국 전함과 군용기가 황해(서해)와 다른 중국 근해에 들어와 중국의 안보와 이익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고 잘라말했다.

그러나 클린턴 국무장관은 양제츠 외교부장의 항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7함대 항모강습단이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에 들어가 정찰활동과 작전연습을 벌이는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결정한 ‘정당한 국익 추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7함대 항모강습단 사령관 케빈 도네건(Kevin Donegan) 소장은 2010년 10월 30일 홍콩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남중국해에서 감시활동을 계속할 것인지를 물은 기자에게 “물론 국제수역에서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은 해상교역로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대답했다.

7함대 항모강습단 사령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미국이 서태평양에 이중으로 그어놓은 ‘해상방어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해상방어선은 일본열도-류큐제도-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로 이어지고, 제2해상방어선은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이오지마(硫黃島)제도-마리아나제도(Mariana Islands, 미국 영토)-얍군도(Yap Islands, 마이크로네시아 영토)-팔라우군도(Palau Islands, 팔라우공화국 영토)-말루쿠제도(Maluku Islands, 인도네시아 영토)로 이어진다. 미국은 태평양과 인도양 전체를 태평양사령부 관할수역으로 지정해 놓고 “세계 바다를 미국이 지배한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그에 맞서 중국도 일본 큐슈(九州)-대만-베트남으로 이어지는 제1도련선(島鍊線)을 그어놓았고, 일본 중부 앞바다-필리핀해로 이어지는 제2도련선을 그어놓았다. 이처럼 미국의 ‘해상방어선’과 중국의 도련선은 서로 겹쳐지므로 두 나라 해군이 충돌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일본 언론보도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0년 10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2010년 10월 24일 사이타마(埼玉)현에 있는 육상자위대 아사카(朝霞)훈련장에서 진행된 자위대 열병식에서 연설하면서 “중국이 군사력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해양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정세는) 점점 엄격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극우정객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같은 날 후지TV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일본의 군사력을 전개하면 (미국의 도움 없이 중국과) 독자적으로 싸워도 (댜오위다오의) 제해권, 제공권을 보유할 수 있지만, 2-3년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 정가의 분위기가 그런 지경이므로, 중국은 2010년 10월 29일 베트남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중일 경제장관 회담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여 그 회담은 취소되었다.

이처럼 갈등이 격화되자 중국과 미국의 고위관리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내막은 이렇다. 동아시아정상회의가 끝난 2010년 10월 30일 오후 클린턴 국무장관은 원래 캄보디아로 떠날 일정이 잡혀있었건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노이에서 중국의 하이난다오에 있는 휴양도시 싼야(三亞)로 직행하여, 공항 귀빈실에서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긴급회동을 가졌다. 미국 국무장관이 예정되지 않은 긴급회동을 중국 영토 안에서 가진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긴급회동의 자세한 내막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일보> 2010년 11월 1일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중국과 미국의 고위급 외교관리들이 국제회의장에서 말싸움이나 벌이면 제3자에게 창피한 노릇이므로 하노이에서는 자제하였으나, 싼야공항 귀빈실에서는 그런 자제력이 요구되지 않았으므로 각자 주장을 꺼내놓고 2시간 30분 동안 격렬한 말싸움을 벌인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다이빙궈-클린턴 긴급회동에서 격론을 촉발시킨 민감한 문제가 말싸움 한 차례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공항 귀빈실에서 2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격렬한 말싸움은 중국과 미국이 정면충돌로 다가서고 있음을 말해주는 징조다.

미국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가 2007년 4월에 발표한 ‘용의 소굴로 들어가기: 중국의 접근거부 전략과 그 전략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Entering the Dragon’s Lair: Chinese Antiaccess Strategies and their Implications for the United States)’이라는 장문의 보고서는 중국 해군이 미국군 항모강습단을 공격하는 네 가지 시나리오를 열거한 다음, 미국이 항공모함 한 척만 동원하여 중국과 충돌하면 패할 수 있다고 하면서 괌(Guam)에 항공모함을 더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시나리오가 나온 때로부터 3년 반이 지난 2010년 11월 4일 미국 국방부 정례언론설명회에서 제프 모렐(Geoffrey S. Morrell) 대변인은, 지난 10월 말 서해에서 실시하려다가 그만둔 항모강습단 훈련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가 출동하는 훈련 일정을 논의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용의 소굴’로 항모강습단을 들어보내려는 위험한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10년 11월 8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