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의 첫 공식일정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분단시대의 슬픈 자화상

1883년 9월 18일 오전 11시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 미국 제21대 대통령과 프레드릭 프렐링허이슨(Frederick T. Frelinghuysen) 당시 국무장관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오가호텔(Fifth Avenue Hotel) 1층 응접실에 나왔다. 곧 이어 관복을 입은 조선인 여덟 사람이 일렬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들은 조선국왕 고종이 서양에 처음으로 파견한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 일행이었다. 보빙사 전권대신 민영익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바닥에 엎드려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렸다. <프랭크 레슬리스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페이퍼(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83년 9월 24일 부에는 그들이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는 장면을 그린 삽화가 실렸다.

큰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미국 언론은 조선인 왕자와 수행원들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바닥에 “입을 맞추었다(kissed)”고 보도하였지만, 보빙사 일행의 큰절은 국왕을 알현하는 예를 갖춰 대통령을 접견한 최상의 의전행위였다. 공화국의 대통령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보빙사 일행에게는 대통령도 국왕과 똑같은 최고통치자였다. 최고통치자라는 점에서 대통령과 국왕은 같지만, 대통령과 국왕을 동일시한 것은 그들이 보여준 우스꽝스러운 혼동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나 있을 법한 우스꽝스러운 혼동이 오늘 남측 사회에 확산된 것은 충격적이다. 후계자와 왕세자를 동일시하는 혼동이 차츰 사회적 통념과 정설로 굳어지는 듯하다. 127년 전 보빙사가 혼동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대통령도 국왕과 같은 최고통치자라는 한 가지 사실만 알았을 뿐, 대통령과 국왕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정보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보빙사가 미국의 대통령 선출과정, 대통령의 지위와 역할 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대통령은 최고통치자라는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던 것처럼, 21세기의 세습론자들도 북측의 후계자 추대과정, 후계자의 지위와 역할 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다. 세습론자들은 후계문제를 주체사상에 근거하여 해결하는 북측의 특유한 정치체제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친자관계만 들먹거릴 뿐이다. 세습론이 북측의 정치체제에 대한 인식을 이처럼 19세기 수준으로 퇴행시킨 것은, 북측의 특유한 정치체제에 대한 무지와 오해와 편견이 빚어낸 분단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물론 북측의 특유한 정치체제를 외부에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65년 동안 지속된 남북의 격폐상태가 정보소통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렇다. 더욱이 수구우파의 대북비방선전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북측 언론에 나온 대북정보를 객관적 사실로 인정하는 것마저 ‘국가보안법’에 의해 금압당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북측의 특유한 정치체제를 자유롭게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19세기 말 보빙사의 대통령 접견에서 드러난 것처럼, 대통령제에 대한 인식은, 아이들도 다 아는, 대통령이 최고통치자라는 단순개념 속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당정치와 선거제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대통령에 관한 헌법조항이 무엇인지, 대통령의 통치방식이 어떠한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여론과 평가가 어떠한지 등 갖가지 지식과 정보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대통령제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측의 후계문제에 대한 인식도, 누구나 다 아는, 후계자가 수령의 아들이라는 기초정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일반적 사회주의와 달리, 북측의 ‘주체형의 사회주의’에서 수령의 유일영도를 실현해온 특유한 역사와 현실, 수령의 유일영도사상과 유일영도체계, 후계자의 유일지도체계, 북측 인민들의 후계자 옹립운동, 당에서 후계자를 추대하는 절차와 방식 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후계문제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번에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추대한 객관적 사실을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분석한 글은 단 한 편도 언론에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북측의 후계문제에 대한 남측의 일반적 이해는 너무 천박할 뿐 아니라, 후계문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모두 오해와 편견이다.

후계문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갖지 못한 남측에서는 세습론에 대한 찬반논란만 오가고 있다. 최근 북측에서 일어난 ‘현상’이 과연 후계자 추대냐 아니면 세습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수구우파의 대북비방선전에서 흘러나온 세습론을 놓고 무모한 찬반논란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를 어찌 무지몽매라 아니할 수 있으랴!

찰스 세자와 리셴룽 총리

후계자 추대와 세자 책봉을 혼동하는 세습론자들은 국왕과 세자가 없는 공화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세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세습론자들은 영국 같은 입헌군주국들에서 진행된 세자 책봉 과정을 살펴보면서, 후계자 추대와 세자 책봉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영국 왕실의 웨일스공 찰스 세자(Prince Charles)는 1948년 11월 14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Queen Elizabeth II)과 에딘버러공 필립 왕자(Prince Philip)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영국 왕실은 그가 세 살 되던 1951년에 그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1953년 6월 2일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여왕 등극식이 진행될 때, 다섯 살 난 찰스는 여왕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할머니인 대비(大妃)와 여왕의 여동생이자 그의 고모인 마가렛 공주(Princess Margaret) 사이에 앉음으로써 자신이 세자로 책봉받았음을 마침내 세상에 알렸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찰스를 세자로 추대하는 옹립운동을 벌인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또한 영국의 집권당이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찰스를 세자로 추대하는 절차를 밟은 적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영국 왕실이 세 살 난 찰스를 세자로 책봉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자 책봉은 영국 국민들이나 영국 집권당의 의사와는 무관하였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세자 책봉에는 공화주의적 절차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땅의 세습론자들이 말하는 세습의 실상이다.

그런데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측 인민들이나 인민군대의 의사도 들어보지 않고, 당중앙위원회에서의 토의와 결정도 거치지 않은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하게도 왕실의 세자 책봉 전통을 따른 세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북측에서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추대한 과정은 전혀 달랐다. 북측의 후계자 추대과정은 북측 인민들의 후계자 옹립운동, 인민군대의 후계자 옹립운동,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의 토의와 결정,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내부적 추대를 각각 오랜 세월 동안 거친 것이다. 2010년 10월 4일 <통일뉴스>에 실린 나의 글 ‘후계문제 ‘암호’를 푸는 독해법’은 북측에서 적어도 2001년부터 약 9년 동안 그러한 과정과 절차가 진행되었음을 자세히 논증하였고, 후계자 추대의 역사적 연원은 만경대혁명학원이 설립된 1947년으로 거슬러오른다는 점도 밝힌 바 있다. 북측의 후계문제를 이해할 때, 후계자 추대의 역사적 연원, 인민군대와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후계자를 옹립한 과정, 그리고 당중앙위원회에서 후계자를 추대한 절차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지 친자관계에만 집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입헌군주국이 아니라 공화국인데도,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통치자가 된 나라가 북측 이외에도 더러 있다. 싱가포르도 그런 나라들 가운데 하나다. 리셴룽(李顯龍) 총리는 리콴유(李光耀) 전직 총리의 맏아들이다. 1952년 2월 10일에 태어난 리셴룽 총리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였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인재 양성기관인 공공정책대학원(Kenndy School of Government)과 미국 육군 지휘관 대학(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을 졸업했다. 그는 1984년에 32세로 정계에 입문하였는데, 리콴유 당시 총리는 자기의 맏아들인 그를 국방부와 산업무역부의 지방장관에 임명했고, 이태 뒤에는 국방부 차관과 산업무역부 장관 대리로 승진시켰다. 1990년 11월 28일 고척동(吳作棟) 총리가 취임하면서 그는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1998년에 통화국(Monetary Authority)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2001년에 재정장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때는 2004년 8월 12일이다. 2006년 5월 6일에 실시된 선거결과를 보면, 리셴룽 총리가 이끄는 국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의 득표율은 66.60%다. 국민행동당은 1959년 이후 오늘까지 50년이 넘도록 장기집권해온 당이다. 다른 당의 득표율은, 노동자당(Worker’s Party) 16.34%, 싱가포르 민주동맹(Singapore Democratic Alliance) 12.99%, 싱가포르 민주당(Singapore Democratic Party) 4.07%다. 이처럼 리셴룽 총리에 대한 싱가포르 국민들의 높은 지지율와 싱가포르의 공화주의 정치체제가 존재하는 한, 리셴룽 총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통치자가 된 것은 결코 세습이 아니다.

영국 왕실의 세자 책봉과 싱가포르 총리 선출을 비교해 보면, 북측의 후계자 추대와 왕실의 세자 책봉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사실이 그처럼 명백한 데도, 친자관계라는 단순개념만 들고나와 후계자 추대를 세자 책봉이라고 우기는 것은 궤변 중의 궤변이다. 세습 개념을 분별없이 쓰는 대중선동은 중단되어야 한다.

17개월 뒤 남측 언론에 보도된 기념사진

2010년 10월 1일 <연합뉴스>가 북측에서 촬영된 사진 한 장을 보도하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 사진은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2009년 4월 2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원산농업대학 현지지도 소식을 전하면서 방영한 사진 33장 가운데 한 장이다. 울창한 종비나무들이 사진배경에 나온 것으로 봐서, 그 사진은 원산농업대학 구내에서 촬영한 것이다. 2009년 4월 27일 <로동신문>은 “원산농업대학의 구내에는 250여 종에 수 십만 그루나 되는 수종이 좋은 나무들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펼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진은 초점을 맞추지 못한 것처럼 너무 흐려서, 인물 영상을 식별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그 사진에서는 2009년 당시 인민군대와 북측 인민들이 후계자로 옹립하였던 ‘청년대장’과 김기남 당중앙위원회 비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사진은 ‘청년대장’의 오른쪽으로 김기남 당비서와 여성 한 사람, 그의 왼쪽으로 남자 세 사람이 서있는 모습을 찍은 기념사진이다.

김기남 당비서는 만경대혁명학원 2기생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고 모스크바 국제대학에 유학하였는데, 1975년에 당월간지 <근로자> 주필로 일하다가 이듬해부터 1985년까지 당일간지 <로동신문> 책임주필로 일했고, 1985년에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직을 맡았고, 1992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담당 비서로서 당의 선전선동사업을 줄곧 맡아왔다.

북측 언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 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을 보도할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상이 들어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영상만 들어있는 기념사진을 보도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청년대장’과 김기남 당비서를 비롯한 여섯 사람이 촬영된 기념사진을 이례적으로 보도한 것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를 수행한 ‘청년대장’이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담당 비서와 함께 별도로 찍은 기념사진이 보도된 것은, 인민군대와 북측 인민들이 전개한 후계자 옹립운동에 이어 당중앙위원회의 후계자 추대 선전선동사업이 이미 2009년에 진행 중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남측에서 대북정보를 독점한 정부기관은 ‘국가정보원’이므로, 2009년 4월 27일 북측이 보도한 그 기념사진은 ‘국가정보원’이 정보자료로 보관하고 있다가 2010년 10월 1일에 가서야 <연합뉴스>에 보도자료로 넘겨준 것이다. 이것은 ‘국가정보원’이 이미 오래 전부터 북측에서 전개되어온 후계자 옹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연합뉴스>는 그 기념사진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원산농업대학 현지지도를 보도하면서 방영된 사진 33장 가운데 한 장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오보다. <로동신문>은 같은 날짜에 내보낸 기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월 25일 인민군 창건 77주년에 즈음하여 인민군 제851군 부대 지휘부를 방문하였음을 보도하였는데, 원래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사진 33장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원산농업대학을 현지지도한 사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민군 제851부대 지휘부를 방문한 사진도 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북측 언론이 2009년 4월 27일 ‘청년대장’과 김기남 당비서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이례적으로 보도한 것으로 봐서, 당시 ‘청년대장’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여 인민군 제851부대 지휘부를 방문하였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은 원산농업대학 구내에서 찍은 기념사진 한 장만, 그것도 초점을 흐릿하게 하여 누구인지 잘 알아보기 힘들게 손질하고, 거의 1년 반이 지난 뒤에서야 <연합뉴스>에 넘겨주었다. 북측에서 오래 전부터 인민군대와 북측 인민들이 진행해온 후계자 옹립운동과 당의 후계자 추대사업에 관한 정보를 ‘국가정보원’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숨겨왔으니, 세습론자들이 후계자 추대와 세자 책봉을 혼동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세계 정계와 언론이 주목한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

‘청년대장’과 김기남 당비서가 함께 찍은 이례적인 기념사진이 보도된 때로부터 근 1년 반이 지난 2010년 10월 5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책임간부들과 함께 인민군 훈련을 참관하였음을 보도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찾아간 군부대가 1년 반 전에 함께 방문하였던 바로 그 인민군 제851부대라는 점이다.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북측 언론은 인민군 제851부대가 진행한 훈련이 당창건 65주년에 즈음한 훈련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 훈련이 통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특별한 훈련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북측 언론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내부적으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후계자로 추대한 직후, 후계자가 첫 공식일정으로 인민군 제851부대를 방문하였음을 보도하였던 것이다.

북측의 후계자 추대가 언론을 통해 만방에 알려졌으니, 전세계 정계와 언론이 그의 동향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수구우파의 대북비방선전과 세습론자들의 인식혼란으로 시끌벅적한 통에, 남측에서만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에 대해 무관심하고 넘어가는 맹점을 노출하였다.

전세계 정계와 언론이 후계자의 동향에 관심을 집중시킨 가운데, 후계자가 첫 공식일정으로 인민군 제851부대를 방문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이 인민군 제851부대 방문으로 정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중앙통신> 2010년 10월 5일 보도는 인민군 제851부대의 실탄사격훈련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각종 지상포들의 위력한 화력타격과 구분대들의 치밀한 협동에 의하여 <적진>은 송두리채 날아가고 <적집단>은 삽시에 소멸되였다.” 구분대란 대대급 이하 부대를 뜻한다. 실탄사격훈련이 “제851군부대 군인들의 협동훈련”이었다는 보도기사만 읽으면,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이 포병부대와 구분대의 통상적인 협동훈련을 참관한 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이 통상적인 협동훈련을 참관하는 것으로 끝났을 리는 만무하다.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에는 북측이 세상에 알리지 않은 매우 중요한 일정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다.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 가운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남측 언론보도를 통해 조용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0년 10월 6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2010년 9월 16일부터 원산 근해에서 전함, 전투기, 지상포 등을 동원한 대규모 육해공군 합동훈련을 진행해 왔는데, 인민군 제851부대의 협동훈련은 3군 합동훈련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계자의 첫 공식일정이 대규모 3군 합동훈련을 참관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후계자가 당창건 65주년에 즈음하여 실시된 3군 합동훈련을 참관만 한 것이 아니라 지휘하였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북측 언론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훈련현장에서 맞이한 사람들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작전지휘성원들과 군종, 병종사령관들”이었다. 이 보도내용에서 주목하는 것은, 3군 합동훈련을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지휘하였다는 점이다. 원래 인민군 총참모부가 지휘하는 3군 합동훈련을 이례적으로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지휘한 것은, 최고사령관의 후계자로 추대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그 훈련을 총지휘하였음을 말해준다. 만일 그 훈련을 인민군 총참모부에서 지휘하였다면 리영호 총참모장이 총지휘하였겠지만, 인민군 최고사령부에서 지휘하였으므로, 최고사령관의 후계자가 총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3군 합동훈련은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총지휘하고, 최고사령부 작전지휘성원들과 군종, 병종사령관들이 현장에서 통제한 훈련이었던 것이다.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선군혁명위업의 승리를 경축한” 당창건 65주년에 즈음하여 준비되었고, 더욱이 후계자 추대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대규모 3군 합동훈련을 지휘할 적임자는 ‘선군혁명의 후계자’ 이외에 없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다.

‘선군혁명의 후계자’와 최정예 미사일 부대

‘선군혁명의 후계자’가 총지휘한 3군 합동훈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군사기밀에 속하는 훈련상황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군 당국이 <연합뉴스> 2010년 10월 6일 보도에서 언급한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정보에 따르면, 인민군 제851부대는 강원도 안변군에 주둔하는 인민군 제7보병사단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안변군 북쪽은 원산항에서 동해로 나가는 영흥만으로 직통하고, 안변군에는 해발고도 1,268m의 황룡산이 동쪽에 있고, 해발고도 972m의 장수봉이 남쪽에 있어서 군사전략거점을 설치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유리한 지형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0년 동안 그 부대를 여섯 차례나 방문하였으니, 그 부대가 동해를 지키는 매우 중요한 군사전략거점에 배치된 것이 분명하다.

지난 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청년대장’과 함께 그 부대를 방문하였던 날로부터 두 달 열흘이 지난 2009년 7월 4일, 인민군 미사일발사차량들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9시간 40분 동안 시차를 두고 안변군 깃대령 산악지대의 여러 갱도진지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며 미사일 7발을 동해로 각각 발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2009년 7월 6일 <통일뉴스>에 실린 나의 글 ‘항공모함을 향해 날아가는 ‘바닷새’’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그 글에서 특기한 것은, 미사일 7발 가운데 오후 4시 10분과 5시 40분에 발사한 미사일 2발이 미국군 항모강습단을 동해에 쳐박을 최신형 초음속 순항미사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앞서 2006년 7월 5일에도 인민군은 안변군 깃대령에서 미사일 6발을 발사하여 미국군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정황을 보면, 당창건 65주년에 즈음하여 진행된 3군 합동훈련에는 육해공군 부대들과 더불어 최정예 미사일 부대도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측 언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번에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제851부대 협동훈련을 참관한 것만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3군 합동훈련을 총지휘하였으므로, 최정예 미사일 부대도 후계자가 총지휘한 3군 합동훈련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총지휘한 3군 합동훈련은 항모강습단 격침훈련이었던 것이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군혁명의 후계자’로 추대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항모강습단 격침훈련을 총지휘하는 첫 공식활동을 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장 중시하는 반제군사전선을 대를 이어 강화,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항모강습단 격침훈련에 참가한 최정예 미사일 부대가 미사일을 발사하였다면 미국군 수뇌부가 그에 관한 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주었을 것인데, 미국 언론이 잠잠한 것으로 봐서, 최정예 미사일 부대는 전술기동훈련과 지휘소 훈련만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민군이 동해에서 3군 합동훈련을 실시하면, 미국군 정찰기는 인민군의 요격을 두려워하여 얼씬도 하지 못한다. 이번에도 미국군 지휘부는 첩보위성을 통해 인민군의 훈련상황을 파악하였을 것이다.

인민군의 최정예 미사일 부대는 2010년 10월 10일 당창건 65주년을 맞아 평양에서 진행된 대규모 열병식에 등장하여 위용을 과시하였다. 외신들이 “무수단으로 추정되는 신형 미사일”이라고 부른 중거리미사일을 탑재한 대형 발사차량 8대가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중거리미사일은 적재중량 28t급 6축 12륜 발사차량에 탑재된 미사일이었다.

남측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0년 3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최근 인민군 총참모부 미사일지도국 산하에 신형 중거리미사일 사단을 창설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미사일사단은 3천km 이상의 신형 IRBM을 작전배치 및 관할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다”고 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중거리미사일 가운데 6축 12륜 발사차량에 탑재한 미사일은, 2005년 제2포병단에 작전배치된 최첨단 중거리미사일 DF-25다. DF-25의 성능을 보면, 사거리가 3,200km로 괌(Guam)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을 타격할 수 있고, 탄두는 2,000kg급 단일 핵탄두를 장착할 수도 있고, 3발의 소형 핵탄두도 장착할 수 있다. 이번에 북측이 열병식에서 공개한 신형 중거리미사일도 DF-25와 같은 성능을 가진 최첨단 전략미사일이다.

북측이 그런 최첨단 전략미사일을 열병식을 통해 세상에 공개한 것은, 괌과 일본열도에 구축된 미국군의 군사전략거점들을 통째로 날려버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음을 과시한 것이다. 더욱이 최신 군사과학기술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후계자가 “무장력 강화와 군수산업 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 지도”하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으니, 인민군의 미사일은 머지 않아 미국군의 미사일과 수위를 다투는 세계 최강 수준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2010년 10월 11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