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표자회는 왜 연기되었을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다시 읽어야 할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

2010년 6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발표한 결정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소집할 데 대하여’는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주체99(2010)년 9월 상순에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공표한 바 있다. 그런데 예정된 9월 하순이 되었는 데도 당대표자회가 열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반북성향의 남측 언론매체들은 허위정보를 날조하는 습성이 있다. 이를테면, 신의주 일대에 닥친 수해로 민심이 흉흉하여 당대표자회를 소집할 수 없었다느니, 또는 후계문제가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당대표자회를 소집할 수 없었다느니, 심지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당대표자회를 소집할 수 없었다느니 하는 따위의 얼토당토아니한 헛소문이 버젓이 언론보도의 탈을 쓰고 떠돌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언비어를 유포한 비방보도다. 북측 내부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추측보도를 할 수밖에 없는 남측 언론매체들의 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추측보도를 언제나, 무조건 중상비방하는 식으로만 쓰는 것은 악의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중상비방하는 식의 추측보도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해도, 북측에서 당대표자회가 예정된 시기에 열리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당대표자회가 예정된 시기에 열리지 않은 것은 연기되었다는 뜻인데, 44년만에 소집한 당대표자회를 연기해야 할 어떤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연유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아래와 같은 정보를 정밀분석할 필요가 있다.

원래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린 것이고, 당대표자회 소집을 연기하는 결정도 그가 내린 것이다. 따라서 당대표자회 소집을 연기한 결정을 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선 당대표자회 소집 목적을 알아야, 당대표자회 소집을 연기한 연유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23일에 나온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가 명시한 당대표자회 소집 목적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원을 보선하기 위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지만 오로지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결원을 보선하는 것만을 위해 당대표자회가 소집되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결원 보선과 더불어 어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채택하기 위해 당대표자회가 소집되었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다.

그렇다면 예정대로 9월 상순에 당대표자회가 열렸을 경우, 거기에서 채택하려 하였던 정치적 결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지난 6월 23일에 나온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에 들어있는 표현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표현에 따르면, “주체혁명위업과 사회주의강성대국 건설위업 수행에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당과 혁명발전의 새로운 요구를 반영”한 어떤 정치적 결정을 당대표자회에서 채택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문장에 담긴 뜻을 북측 용어로 다시 정리하면, 주체혁명위업과 사회주의강성대국 건설위업 수행에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현 정세에서 당과 혁명발전의 새로운 요구를 반영한 어떤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채택하려는 것이,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강성대국 건설위업 수행에서 일어나고 있는 결정적 전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지는 이 글에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북측은 중화학공업에서 전환적 발전을 일으키는 한편, 북측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경공업과 농업에서도 전환적 발전을 일으키고 있다. 이를테면, 2010년 8월 19일 <로동신문> 사설 ‘빛나는 로력적 성과를 안고 당대표자회를 뜻깊게 맞이하자’에서는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하여 경공업부문에서 지표별 생산량을 1.2배로 장성시키고 수력발전부문에서 매일 평균 수백만kWh의 전력을 더 생산하는 자랑을 떨쳤다”고 지적하고, “수도의 10만 세대 살림집 건설에 전당, 전국, 전민이 모든 힘을 총집중, 총동원하여 수도건설에서 새로운 평양속도를 창조해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경공업과 농업부문의 일군들은 당대표자회를 맞으며 인민들에게 더 많은 인민소비품과 농업생산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투쟁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북측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아서 남측 독자들이 모르고 있지만, 이처럼 북측의 경공업생산과 농업생산은 전력생산, 철강생산, 비료생산 등과 더불어 날로 증대되고 있으며, 대규모 살림집 건설도 활기를 띄고 있다. 반북성향의 남측 언론매체들이 관행적으로 써내는, 북측 인민들이 만성적 식량난으로 허덕인다는 식의 보도는 북측 사정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허위보도다. 1970년대에는 북측 인민들이 남측 국민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 살았는데도, 반북성향의 남측 언론매체들이 퍼뜨린 허위보도를 그대로 믿은 남측 국민들은 당시 북측 인민들이 강냉이죽으로 연명하는 줄 알았다.

이 글에서 논하려는 것은,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가 주체혁명위업에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남측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주체혁명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북측에서 주체혁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하는 선군혁명을 뜻하며,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주체혁명위업의 수행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말은, 북측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성하고, 전민족적 범위에서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북측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성하고, 전민족적 범위에서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동시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하는 선군혁명의 과업인 것이다.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에 나오는, 주체혁명위업에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을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해석하면, 북측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성하고, 전민족적 범위에서 자주성을 실현하는 선군혁명위업 수행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선군혁명위업 수행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것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그 양자의 연관성을 밝혀줄 ‘열쇠’는, 당대표자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9월 상순을 몇 일 앞두고 전격적으로 진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동북지방 순방에 들어있었다.

전용열차는 왜 무단장역에 정차하였을까?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 2010년 9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북측의 당대표자회는 원래 9월 7일에 소집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북측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나라의 평양 주재 대사가 북측 당국으로부터 9월 7일에 당대표자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담긴 초대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NHK>가 그렇게 보도한 것이다. 이것은 북측에서 공화국 창건일로 기념하는 9월 9일 직전에 당대표자회가 소집될 예정이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지난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당대표자회에 출석할 대표자를 선거하기 위한 당대표회가 각지에서 속속 진행되었다. <조선중앙통신> 2010년 8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 당대표회와 평안남도 당대표회가 각각 진행되었고, 평안북도 당대표회는 8월 26일에, 인민내무군, 내각, 철도성, 문화성 당대표회는 8월 27일에 진행되었으며, 평양시, 자강도, 량강도 당대표회들은 8월 28일에 각각 진행되었고, 황해북도, 황해남도, 남포시 당대표회들은 8월 31일에 각각 진행되었다. <로동신문> 2010년 9월 4일 보도에 따르면, 함경남도, 함경북도, 강원도, 라선시 당대표회들이 각각 진행되었다.

그런데 각지에서 당대표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인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였다. 그의 중국 방문과 당대표자회 소집은 어떻게 상호연관된 것일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연설문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2010년 8월 27일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난후빈관(南湖賓館)에서 차린 성대한 환영연회에서 연설하였는데, 그 연설문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있었다. “김일성 주석 동지께서는 생전에 사연 많은 이 동북지방을 늘 잊지 않고 회고하시면서 꼭 다시 와보시겠다고 말씀하군 하시였는데 그 소원을 안고 오늘 우리가 왔습니다.” 이 문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대표자회 소집 예정일을 앞두고 중국 동북지방을 순방한 목적이 김일성 주석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었음을 말해준다.

<로동신문> 2010년 8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린시에 보존되어 있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혁명사적지들인 위원(毓文)중학교와 베이산(北山)공원 왕약묘를 참관하였고, 지린화학섬유그룹과 지린카톨릭성당을 참관하였고, 창춘시에서는 창춘농업박람원, 창춘궤도객차공사를 참관하였고,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에서는 헤이룽장혜강식품과 헤이룽장전기그룹을 참관하였다. <연합뉴스> 2010년 8월 30일 보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얼빈시 타이양다오(太陽島)에 있는 동북항일연군 기념관도 참관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로동신문> 2010년 8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중국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하여 헤이룽장성 당위원회가 하얼빈 영빈관에서 성대한 환송연회를 차리고 선물을 드리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용열차가 하얼빈역을 떠나 귀로에 오른 때는 2010년 8월 30일 오전 8시 45분경이었다. 전용열차는 두만강변 국경도시 투먼(圖們)으로 향해 남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투먼으로 직행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전용열차가 오후 1시 45분경 무단장(牧丹江)시에 들어선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일정을 자세히 보도한 <로동신문> 2010년 8월 31일부 관련기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무단장시 방문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원래 공식일정에는 무단장시 방문이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왜 무단장시를 방문하였을까?

전격적인 무단장시 방문에 담긴 뜻을 파악하려면,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창춘에서 차린 환영연회에서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꼭 다시 찾아가겠다고 하였던 소원을 안고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혁명사적지를 방문하러 왔다고 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연설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연합뉴스> 2010년 8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단장시에 있는 베이산(北山)공원에 가서 동북항일연군 기념탑을 참관하였다. 하루 전에 하얼빈에서 동북항일연군 기념관을 참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식일정에 들어있지 않은 무단장역에서 정차하여 동북항일연군 기념탑을 또 다시 참관한 뜻은 무엇일까?

무단장시 남쪽에는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풍치 수려한 담수호가 있다. 아득한 옛날,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무단(牧丹)강을 막아 절경을 빚어낸 명승지 징포호(鏡泊湖)다. 북측에서는 무단강을 목단강으로, 징포호를 경박호로 부른다. 김일성 주석은 1993년에 간행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에서 “가렬한 전화의 나날 나는 부대와 함께 이 강을 수없이 건넜”으며, “우리는 이 경박호를 배로도 건넜고 얼음을 타고도 넘나들었다”고 하였다. 그 책에서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만주대륙의 으뜸가는 명승지 경박호의 남쪽 호반에는 남호두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줄임) 호수로 흘러드는 소자지하 물줄기를 따라 상류쪽으로 몇 십리 올라가면 깊은 계곡의 어느 한 산탁에 낡은 귀틀집 두 채가 있었다. 그 집의 한 채가 바로 1936년 2월에 우리가 회의장소로 사용한 집이였다. 지금은 초록에 묻혀 집터자리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다지만, 오륙십 년 전에는 그 귀틀집 앞에 커다란 쇠스레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서 있어 회의장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표적으로 되었다. 1930년대 후반기 력사의 시원지가 다름 아닌 우리 나라 력사가들이 <소자지하의 귀틀집>이라고 부르는 그 집이다.”

김일성 주석이 소집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가 그 귀틀집에서 진행된 때는 1936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다. 북측에서는 그 회의를 남호두 회의라 부른다. 회고록에서 김일성 주석의 회상은 이렇게 이어진다.

“남호두 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새로운 앙양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호두 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와 1930년대 후반기를 구획짓는 조선혁명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남호두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리정표를 가지게 되었다. 남호두 회의는 한 마디로 말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회의라고 할 수 있다.”

44년만에 열리는 당대표자회 소집 예정일을 앞두고 있었던 2010년 8월 3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무단장시를 방문한 까닭은, 김일성 주석이 소집한 남호두 회의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깊은 계곡에 서 있던 그 귀틀집을 7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찾을 길 없었건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단장시에 있는 동북항일연군 기념탑을 찾아감으로써 남호두 회의가 오늘의 현실에 주는 의의를 되새긴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기념탑을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마음 속에서는 2010년에 열릴 당대표자회가 74년 간극을 뛰어넘어 1936년에 열린 남호두 회의와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남호두 회의가 20세기 항일혁명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켰던 것처럼, 당대표자회도 21세기 선군혁명위업 수행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것, 바로 이것이 44년만에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과 의도였다.

특단의 조치와 3단계 중재안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에 나오는, 선군혁명위업 수행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독자들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북측이 선군혁명노선에 따라 전력으로 밀고 가는 한반도 비핵화 추진과정에서 어떤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의 핵심개념인데, 북측에서는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동시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하는 선군혁명의 당면과업이라고 믿고 있다.

당대표자회 소집 결정서가 발표된 시점을 생각하면, 지난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번 여름에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어떤 결정적인 전환을 구상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애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대표자회를 9월 상순에 소집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의 실현을 앞당길 중대한 진전으로 크게 앙양된 전환국면에서 당대표자회를 소집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구상한, 한반도 비핵화의 실현을 앞당길 중대한 진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두 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의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그에 상응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하는 특사교환이 성사됨으로써 북측과 미국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그야말로 세기적인 대전환을 시작하는 것이다.

북측이 2010년 7월에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직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측의 카터 초청에 응답을 주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2010년 8월 26일에 가서 대통령 특사자격도 주지 않은 그를 평양에 보냈다. 북측의 특사교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특사교환에 대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거부는,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길을 가로막은 커다란 장애가 아닐 수 없다. 그 장애를 극복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하려면 특단의 조치가 요구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과 전격적인 당대표자회 연기 결정이 연이어 나온 것은 바로 그 특단의 조치였던 것이다.

북측에서 당대표자회가 연기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북측과 미국 사이에 걸려있는 두 가지 현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충국면을 조성하였다.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사교환 추진 요구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6자회담 재개 요구가 날카롭게 맞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날카롭게 맞선 북측과 미국을 오가며 중재에 애쓰게 되었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추진하는 특사교환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추진하는 6자회담 재개가 상충하는 국면은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

상충국면의 결말을 전망하기에 앞서, 현재 진행 중인 두 가지 움직임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방도를 계속 외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중재안을 성사시키기 위해 또 다시 발벗고 나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방도를 외면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2010년 9월 6일 <통일뉴스>에 실린 나의 글 ‘정상회담은 왜 넉 달만에 다시 열렸을까?’에서 자세히 논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중재안을 성사시키기 위한 중국의 발빠른 움직임이다. 중국이 미국에게 촉구하는 6자회담 재개의 의미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에게 요구하는 6자회담 재개의 의미와 크게 다르다. 중국의 중재안은 북미 양자회담을 선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6자 예비회담과 6자 본회담을 단계적으로 개최하자는 것이다. 언론보도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3단계 중재안이다. 북미 양자회담을 선행하고 6자회담으로 직행하는 2단계 중재안이 아니라, 그 사이에 6자 예비회담을 끼워넣어 3단계 중재안으로 만든 까닭은, 북미 양자회담의 결과를 남측과 일본이 받아들일 중간단계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3단계 중재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북미 양자회담이다. 북측과 미국이 양자회담을 선행해야 하고, 그 회담에서 어떤 진전을 이루어내야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국이 제시한 3단계 중재안에서 방점은 북미 양자회담에 찍혀있는 것이다. 중재안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북측의 대미회담전술을 위해 북측과 조정한 방안으로 보인다. 3단계 중재안을 6자회담 재개안이라기 보다 북미 양자회담 재개안이라고 보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북미 양자회담 재개안을 통해 북측과 중국의 대미공동전선이 형성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말을 고한 ‘전략적 인내’

지미 카터 전직 대통령은 2010년 9월 15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자신의 글 ‘북측은 타협을 원한다(North Korea Wants to Make a Deal)’에서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북측이 6자회담에 “사형선고를 내리기는 했으나 사형을 아직 집행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평양 방문 중 북측 당국자들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측이 중국의 북미 양자회담 재개안에 따라 미국의 6자회담 재개 요구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북측 당국자들이 카터 전직 대통령에게 그런 의사를 내비쳤으니, 중국에게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그런 의사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처럼 대미협상전술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북측의 의중을 파악하고 크게 고무된 쪽은 중국이다. 그리하여 2010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우다웨이(武大偉) 조선반도 사무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하였다. 침몰원인이 갈수록 미궁에 빠져든 천안함 사태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이명박 정권이 북침공격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던 시기에 바야흐로 북측과 중국의 대미공동전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다웨이 특별대표가 2010년 8월 26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 도쿄, 워싱턴을 차례로 순방하며 설득작업에 들어갔던 배경에 북측과 중국의 대미공동전선이 구축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욕 타임스> 2010년 8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우다웨이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던 8월 셋째주, 미국 국무부에서는 힐러리 클린턴(Hillary R. Clinton) 국무장관이 주재하는 고위급 대북정책회의가 진행되었다. 주목하는 것은, 그 회의에서 대북접촉을 재개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클린턴 국무장관은 스티븐 보스워즈(Stephen W. Bosworth)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서울, 도쿄, 베이징에 파견하였다. 서울에 나타난 그는 2010년 9월 13일 기자들에게 “우리는 북미 양자접촉을 거쳐 궁극적으로 6자회담 재개로 이어지는 다자접촉이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고, 신각수 외교통상장관 직무대행을 만난 자리에서는 “멀지 않은 미래에 (북측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낙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것만이 아니다. 2010년 9월 16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커트 캠벨(Kurt Campbell)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미국이 “북측과 충실한 생산적 외교(truly productive diplomacy)를 할 준비를 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은 수세에 몰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3단계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3단계 중재안을 받아들인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도,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비핵화를 위한 “되돌릴 수 없는 조치(irreversible steps)”를 북측에서 먼저 취해야 한다는 식의 판깨기 발언을 꺼내놓는 까닭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미 양자회담에 선뜻 나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미 양자회담이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한 선행조건인 것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첫 관문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수세에 몰려 3단계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도 도무지 자신이 없어 불안한 것이다.

어깃장은 통하지 않는다

평양, 베이징, 워싱턴에서 협상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속속 일어나고 있었으나, 이명박 정권은 무모하게도 어깃장을 놓았다. 북측이 천안함 사태에 대해 사과해야 3단계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우긴 것이다. <통일뉴스> 2010년 9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방문 중에 3단계 중재안에 대한 남측 당국자들의 완고한 반대의사를 들은 우다웨이 특별대표는 하는 수 없이 9월 1일 워싱턴에 가서 미국 국무부 관리들에게 남측 당국자들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로부터 약 두 주 뒤에 보스워즈 특별대표가 서울에 나타난 까닭은 중국의 중재안 추진에 어깃장을 놓은 이명박 정부를 설득해야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고위당국자는 천안함 문제를 “어디서든 다뤄서 잘 되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태와 6자회담을 연계하여 어깃장을 놓던 태도를 접고 양자를 분리하여 대응하는 쪽으로 물러섰음을 암시한다. 보스워즈 특별대표가 서울에 나타나 이명박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한 것이 그러한 퇴각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북측은 북측 수역으로 넘어갔다가 나포된 고기잡이배 대승호와 선원 7명을 2010년 9월 7일에 돌려보냈고, 그로부터 이틀 뒤 커트 캠벨 차관보는 워싱턴에 있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어떤 진전이 있으려면, 남북이 화해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모든 당사자들에게 이 점을 아주 분명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2010년 9월 16일 워싱턴에 있는 미국평화연구소(USIP)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미국은 적절한 환경(appropriate circumstances)이 마련되면 대북협상을 하기 위해 6자회담 당사자들과 마주앉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협상 재개에 요구되는 적절한 환경이란 남북관계 개선이다. 그는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중요한 첫 조치는 남북 사이의 재관여(reengagement)를 요구한다. 나는 이것이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과 워싱턴의 시차를 따져보면, 커트 캠벨 차관보가 그러한 발언을 하기 직전인 2010년 9월 16일, 판문점에서는 인민군과 미국군의 군사실무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9월 1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적십자사 실무접촉이 열렸고, 9월 24일에는 판문점에서 아주 오랜만에 남북 군사실무회담이 열리기로 예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북미 양자회담 재개에 요구되는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주고 있다.

어째든 이명박 정부의 어깃장과는 상관 없이, 북측이 미국에게 제안하고, 중국이 중재한 북미 양자회담 재개안은 성사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다. 44년만에 열리는 당대표자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집결하였던 각 지역 대표자들은 당대표자회 연기 결정에 따라 지방으로 돌아가서 대기상태에 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구상한 대로 북미 양자회담이라는 전환적 계기는 차츰 다가오고 있다. 북측은 당창건 65돐을 맞는 10월 10일 전에 어떤 전환적 계기를 마련하려는 것이 아닐까?

“멀지 않은 미래에 (북측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낙관하고 있다”는 스티븐 보스워즈 특별대표의 발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말마따나 북미 양자회담은 머지 않아 재개될 것이다. 그리고 당대표자회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고집해온 ‘전략적 인내’를 돌파한 승리를 안고 머지 않아 열릴 것이다. (2010년 9월 20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