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표자회는 왜 44년만에 열리는 것일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당대표자회를 소집하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커트 캠벨(Kurt Campbell)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가 2010년 9월 9일 워싱턴에서 열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토론회에 참석하였는데, 평양에서 곧 소집될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와 관련하여 그는 “솔직히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주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국무부 관리 커트 캠벨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위관리들도 북측의 당대표자회에 대해 비록 공개발언은 자제하면서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66년에 제2차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뒤, 무려 44년이 지나 제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게 되니 국제정치계의 관심이 평양에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관심이 문제가 아니라 해석이 문제다.요즈음 미국과 남측의 언론매체들은 북측의 당대표자회에 대해 이러저러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사실과 거리가 먼 억측을 꿰어맞춘 헛소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북측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원래 비뚤어졌고, 북측에 대해서는 편견과 오해밖에 내놓을 것이 없는 그들이 당대표자회가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리 만무하다.

평양에서 소집되는 당대표자회에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6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소집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를 발표하였다. 당대표자회 소집결정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발표하였고, 당대표자회 소집권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행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도에 따라 당대표자회의가 소집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44년만에 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도를 알아야 당대표자회의의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도를 세상에 알려주는 유일한 언론매체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로동신문>이다. 그러므로 <로동신문>에 나타난 당대표자회에 관한 해설을 읽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의도를 알 수 있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당대표자회를 소집하는 결정서를 발표한 2010년 6월 23일 이후 <로동신문>이 보도한 사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첫 번째 의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첫 번째 의도는, 조선로동당의 영도적 기능과 역할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다. 2010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높은 정치적 열의와 빛나는 로력적 성과를 맞이하자’라는 제목으로 실린 <로동신문> 사설은 “이번에 소집되는 당대표자회는 우리 당의 령도적 기능과 역할을 백방으로 강화하여 주체혁명위업,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의지의 과시로 된다”고 하면서, “이번 당대표자회는 우리 당을 조직사상적으로 더욱 강화하고 당의 전투력과 령도력을 높이는 데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지적하였다.

당의 영도적 기능과 역할을 더욱 강화한다는 말은 당의 영도체계를 더욱 강화한다는 뜻이다. 조선로동당은 강력한 영도체계를 가진 사회주의 집권당으로 알려졌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당의 영도체계 강화한다는 식의 표현이 <로동신문> 사설에 들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북측의 정치현실에 대해 무지한 남측의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조선로동당의 영도체계가 그 동안 점점 약화되고 그 대신 국방위원회의 영도체계가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이번에 당의 영도체계를 보강하기 위해 당대표자회를 소집했을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그것은 억측이 낳은 오류다. 그들의 억측은 두 가지 점에서 사실과 어긋난다. 하나는 조선로동당의 영도체계가 약화되었다는 억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억측이 당의 영도와 국방위원회의 지도를 구분할 줄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창당 이후 65년 동안 영도체계를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켜온 조선로동당에게 지금 새삼스럽게 당의 영도체계를 강화하는 요구가 제기된 까닭은, 당의 영도체계 강화문제가 수령의 후계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은 1986년 5월 31일 김일성 고급당학교 창립 40돐에 즈음하여 집필한 장문의 강의록 ‘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 경험’에서 “당의 위업을 옳게 계승해 나가기 위하여서는 후계자를 바로 내세우는 것과 함께 그의 령도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쌓고 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수령의 후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의 영도체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상론하려면, 남측 독자들에게 생소한 수령의 후계문제라는 개념을 오해나 편견 없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측에서 말하는 후계자론은 수령의 후계자에 관한 담론이므로, 후계자론이 혁명적 수령관에 직결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후계자론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혁명적 수령관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북측의 혁명적 수령관에 대한 남측의 일반적 인식은 뿌리 깊은 오해와 편견에 휩싸였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올바로 인식하기 힘들다. 북측의 혁명적 수령관을 논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남과 북의 경험을 대조하는 식으로 간단히 논하는 수밖에 없다.

남측의 대통령이 사적(私的) 관계에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국민과의 정치적 관계에 존재하는 수반인 것처럼, 북측의 수령도 사적 관계에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인민과의 정치적 관계에 존재하는 수반이다.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수령은 “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며 자주성을 위한 혁명투쟁의 최고령도자”다.

남측 국민들이 자기 대통령을 신뢰하고 추앙하는 것이 ‘개인숭배(personality cult)’가 아니라 국민의 온당한 대중정치활동인 것처럼, 북측 인민들이 자기 수령을 신뢰하고 추앙하는 것도 당연히 ‘개인숭배’가 아니라 인민의 온당한 대중정치활동인 것이다. 물론 국민 전체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추앙하는 훌륭한 대통령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남측 국민들은, 북측 인민들이 자기 수령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열렬히 추앙하는 대중정치활동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자기 경험이나 정서와 다르다고 해서 수령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신뢰와 열렬한 추앙을 ‘개인숭배’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다.

북측에서 수령의 후계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까닭은 그 문제가 혁명위업을 계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측에서 말하는 혁명위업이란 주체혁명위업, 다시 말해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위업”이다. 북측에서 간행된 자료들에 따르면, 혁명과 건설은 사회주의체제가 세워진 뒤에도 계속 전진해야 하며, 따라서 혁명위업을 완성하려면 오고 오는 다음 세대들에게 혁명위업이 끊임없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의 단결과 협력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그리하여 사회구성원들이 “완전한 사회정치적 자주성을 가지고 가장 값높은 삶을 누리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혁명위업은 끊임없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혁명위업의 계승은 혁명이 계속 전진하느냐 아니면 중도에 멈추느냐 하는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문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북측에서 말하는 혁명위업은 세대를 넘어 계속되는 영속적인 위업이므로, 그런 위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후계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런 이치에 따르면, 혁명위업을 계승하는 문제와 후계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1986년 5월 31일 김일성 고급당학교 창립 40돐에 즈음하여 집필한 장문의 강의록 ‘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 경험’에서, “후계자문제는 정치적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계승하는 문제입니다. 수령의 령도적 지위와 역할은 그 후계자에 의하여 변함없이 계승되여야 합니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로동계급의 당의 위업을 누가 어떻게 계승하는가 하는 것은 당의 운명, 혁명의 운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4년만에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의도는 당의 영도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고, 당의 영도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후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의 조직사상적 기반을 쌓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두 번째 의도

당의 영도체계는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영도체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의도는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영도체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영도체계를 강화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2010년 6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소집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에서 “주체혁명위업,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위업 수행에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당과 혁명발전의 새로운 요구를 반영하여 조선로동당 최고지도기관 선거를 위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를 주체99(2010)년 9월 상순에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당대표자회를 소집한 목적이 조선로동당 최고지도기관을 선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결정서에 나온 당의 최고지도기관이라는 말은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를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44년만에 소집되는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선거가 진행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남측에서 간행된 자료에 따르면,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145명이 선출되었는데, 2010년 현재 당중앙위원회 위원은 68명이다. 또한 제6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은 19명, 후보위원은 15명이었는데, 2010년 현재 정치국 위원은 3명, 후보위원은 5명이다. 또한 제6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은 19명이었는데, 2010년 현재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은 6명이다. 이처럼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성원들이 줄어들 까닭은, 1980년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혁명 1세대 성원들의 노령화로 결원이 생겼기 때문이다.

북측에서는 혁명발전단계에 따라 세대를 구분하는데, 1세대는 1930-40년대 항일혁명과 8.15 해방 직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에 참가한 항일혁명세대, 2세대는 1950-60년대 전후복구사업과 사회주의혁명에 참가한 사회주의혁명세대, 3세대는 1970-80년대 사회주의 제도 수립 이후 3대혁명에 참가한 3대혁명세대, 4세대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선군혁명에 참가한 선군혁명세대로 이어져 왔다.

30년 전에 소집된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성원으로 선출된 세대는 1세대와 2세대였는데, 이제는 3세대와 4세대가 그 뒤를 이어야 할 때가 되었다.

북측에서 세대교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배세대가 후배세대를 체계적으로 교양, 육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44년만에 소집되는 당대표자회는 30년 전 제6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성원들 가운데 결원을 3세대와 4세대로 보선하는 계기로 될 것이다. 조선로동당 규약 제30조는 “당대표자회에서는 당의 로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에 관한 긴급한 문제들을 토의 결정하며,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당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 또는 준후보위원을 제명하고 그 결원을 보선한다”고 규정하였다. 1세대와 2세대가 지난 30년 동안 체계적으로 교양, 육성해온 3세대와 4세대가 이번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전면에 등장하여 당의 영도체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과 남측의 정보기관들과 언론매체들이 북측의 당대표자회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운 까닭은, 자기들이 이름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특정인이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등장하지 않을까 하고 제멋대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측의 객관적인 현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북측에 대한 자기들의 천박한 상상을 마치 사실인양 꾸며내는 선정주의적 보도행태가 아닐 수 없다. 명백하게도, 이번 당대표자회는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소집되는 것이지, 후계자를 추대하기 위해 소집되는 것이 아니다.

1세대가 2세대에 속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한 것은 1세대가 2세대를 체계적으로 교양, 육성한 과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세대가 2세대를 체계적으로 교양, 육성하기까지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는 10년 기간이 요구되었고, 2세대가 3세대를 체계적으로 교양, 육성하기까지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10년 기간이 요구되었다. 그에 이어서, 3세대가 4세대를 체계적으로 교양, 육성하기까지 2000년대 초부터 2010년대 초에 이르는 10년 기간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4년 2월에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되었고,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소집된 제6차 당대회에 이어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6기 1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미 6년 전에 후계자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과거 경험을 보면,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결원을 보선한 당중앙위원회가 장차 전원회의를 열게 될 것이고, 그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를 추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를 추대하더라도, 외부에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가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장차 소집할 제7차 당대회가 열릴 때, 그 때 비로소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1974년 2월에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부터 1980년 10월에 소집된 제6차 당대회까지 6년의 시간 격차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상당한 시간 격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성산 일화와 후계자의 모습

남측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경우, 당연히 대통령 후보의 품격과 자질이 국민대중의 관심사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측에서 수령의 후계자를 추대하는 경우에도 그의 품격과 자질이 인민대중의 관심사로 된다. 김일성 주석은 위의 강의록에서 “로동계급의 당은 당과 혁명에 끝없이 충실하며 온 사회에 대한 정치적 령도를 원만히 실현할 수 있는 품격과 자질을 갖춘 인민의 지도자를 후계자로 내세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36년 전, 1세대 혁명투사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한 것은 그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서 당과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보았기 때문이고, 정치적 영도를 실현할 품격과 자질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차 등장할 후계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본받은 인민의 지도자일 것이다. 북측 인민들은 그런 인물을 자기들의 지도자로 추대할 것이다.

2010년 8월 23일 <로동신문> 1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사진에는 사람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화강암을 깎아 만든 자그마한 사적비만 비스듬한 각도로 찍혀 있다. 확대경으로 사진을 들여다보면 비문을 읽을 수 있는데,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께서 1998년 8월 3일 이 곳에서 몸소 차를 밀고 오르시였다”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대북정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그 한 줄 문장만 읽으면 뜻을 이해하기 힘들며, 더욱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8년 8월 3일에 차를 밀고 산길을 오른 것이 왜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지 알기 힘들다. 사연은 이러하였다.

그 자그마한 사적비는 오성산 벼랑길에 서 있다. 군사분계선 북쪽에 있는 산이기에 남측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성산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와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광주산맥이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과 근북면에서 솟구쳐 생겨난 산악이며,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한탄강의 발원지다.

1998년 8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른 오성산 주봉의 해발고도는 1,062m인데, 주봉 동쪽에 해발고도 927m의 동봉이, 주봉 서쪽에는 해발고도 1,050m의 서봉이 각각 서 있고, 주봉 북쪽에 해발고도 920m의 북봉이, 주봉 남쪽에는 해발고도 781m의 남봉이 각각 서 있다. 산세는 깎아지른 듯 험하다.

오성산은 화강암층이 발달한 돌산인데, 그 산의 남쪽에 펼쳐진 철원평야에는 중부전선이 가로지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오성산은 중부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다. 6.25 전쟁 때 오성산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까닭이 거기에 있으며, 1997년 7월 16일 오성산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이 약 30분 동안 포격전을 벌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6년 3월 20일 오성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 2년 뒤인 1998년 8월 3일 또 다시 오성산을 찾은 것이다. 해발고도 1,062m인 오성산 주봉에 오르려면, 151개나 되는 굽이를 돌아가는 험한 벼랑길을 타야 한다. 2010년 8월 24일 <로동신문> 기사에 따르면, 지금은 굽이마다 이정표를 세우고 안전뚝도 쌓아놓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성산에 오른 12년 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만한 길 아닌 길, 한 발만 헛디뎌도 천길 낭떠러지라 내려다보기조차 소스라치는 칼벼랑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변안전을 우려한 수행원들은 그가 비마저 내리는 굳은 날씨에 사고위험이 곳곳에 도사린 산길에 들어서는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국방위원장의 전용차를 모는 운전기사는 그처럼 위험한 곳으로 국방위원장을 모실 수 없다며 운전대를 놓고 아예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 이러면 나는 포차라도 끌고 올라가겠소”라고 말하고, 몸소 운전대를 잡았다고 한다. 오성산 벼랑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데다가, 한여름 장맛비로 비안개가 갈마들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가려보기도 힘들었는데,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151개 굽이의 벼랑길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던 차량 바퀴에 풀대가 휘말리며 진흙탕에 빠져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차에서 내려 “비를 흠뻑 맞으며 어깨로 차를 밀기” 시작하였다. 그가 “단신으로 차를 밀면서” 열다섯 걸음 전진하였을 때, 갑자기 “차바퀴가 미끄러져 가까스로 멈춰선 지점은 아찔한 낭떠러지로부터 불과 30cm”밖에 떨어지지 않은 벼랑끝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왜 사고위험을 무릅쓰고 오성산 정상에 오른 것일까? 남측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이 물음에 답하려면 아래의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성산 정상에 올랐던 1998년 8월은 북측과 미국이 그야말로 숨막히는 정면대결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고난의 행군’을 헤쳐가는 북측 인민들은 모진 시련을 겪고 있었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3개월 뒤에 북측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 붕괴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이른바 ‘3개월 위기설’을 내돌리고 있었다. 이것은 3개월 안에 북침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군의 ‘작전계획 5027(OPLAN 5027)’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대북선제타격 전쟁시나리오인지 남측 국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그 무렵, 7함대 항모강습단은 북침공격시기를 탐색하기 위해 동해를 들락거리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불의의 시각에 일어날 미국의 북침공격을 억지하고 사회주의와 한반도를 지켜야 하는 정치군사적 하중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온통 집중되고 있었다. 그것은 사생결단 각오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엄청난 하중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수행원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오성산 정상에 오른 것은, 그의 사생결단 각오가 얼마나 비장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생결단의 비장한 각오는 감성의 발로가 아니다. 그런 각오에는 인간적 고뇌가 뒤따르는 법이다. <로동신문> 2010년 8월 24일부 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당시 시련 중에 자신이 겪은 인간적 고뇌를 훗날 이렇게 술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나는 그 때 별의별 생각을 다하였습니다. 수령님 생각이 간절해지고 수령님 모습이 자꾸 어려왔습니다. 그래서 수령님과 속대화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 때의 수령님의 그 말씀들이 나에게 커다란 힘과 고무를 주었으며 나는 더욱 용기백배하여 선군의 길에 나섰습니다.”

다른 나라 국가수반이라면 장마철 굳은 날씨에 외출을 삼가고 냉방으로 쾌적한 집무실에 머물렀을 것이고, 더욱이 극도로 위험한 벼랑길을 타고 아아한 산정에 오르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성산 정상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에 오른 것일까?

오성산 정상에는 중부전선을 지키는 인민군 제5군단 전방지휘소가 있다. 그 전방지휘소에서 내려다보면, ‘백골사단’이라 불리는 한국군 제3보병사단이 지키는 철원평야가 시야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저 멀리 남해안으로 통하는 중부고속도로가 보이고, 경기도 의정부까지 관측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평택으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12년 전만 해도 의정부에는 주한미국군의 대북침공 전초기지들인 캠프 에쎄이욘스(Camp Essayons), 캠프 폴링 워터(Camp Falling Water), 캠프 잭슨(Camp Jackson), 캠프 레드 클라우드(Camp Red Cloud), 캠프 스탠리(Camp Stanley), 캠프 씨얼스(Camp Sears)가 오만방자하게 버티고 있었다.

오성산은 인민군 갱도진지로 뒤덮혀 있는데, 화강암층을 깊이 파고 들어가 구축한 산악갱도진지에는 수많은 240mm 방사포가 들어있다. 240mm 방사포 사거리는 오성산에서 의정부까지 거리와 일치하는 60km다. 만일 미국이 북침전쟁을 도발하면, 오성산 갱도진지의 240mm 방사포들은 주한미국군의 북침공격 전초기지를 격멸함으로써 인민군이 서부전선을 돌파하여 서울로 직행하는 진격로를 열어놓을 것이고, 오성산 갱도진지에 배치된 수많은 대구경 장거리포들은 중부전선의 한국군 부대들을 제압함으로써 인민군이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직행하는 진격로를 열어놓을 것이다. 이처럼 북침공격을 역습으로 격파할 군사전략거점이 오성산에 있는 것이다. 북측 인민들은, 1998년 8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뚫고 나간 그 벼랑길이 미국의 북침공격기도를 억지한 반제군사전선의 침로였다고 믿고 있다.

비내리는 151개 굽이의 벼랑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오성산 정상의 전방지휘소 정문에 들어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용차는 진흙탕으로 뒤덮혀 있었다. 차문을 열고 나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옷에서는 진흙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를 영접하기 위해 달려나온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얼굴에서는 격정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전설 같은 실화가 북측 각지에 전해지자, 최고사령관과 인민군의 정신적 일체감이 끓어올랐고, 영도자와 인민들의 정치적 결속력이 열기를 뿜었다.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1998년 여름, ‘고난의 행군’과 북침공격위협을 이겨낸 거대한 힘은 그렇게 분출되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성산 정상의 전방지휘소를 시찰한 날로부터 28일이 지난 1998년 8월 31일, 북측은 오랜 세월 공들여 개발한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음으로써 마침내 미국의 북침공격기도에 격파의 마침표를 찍었다. 광명성 1호 발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오성산 전방지휘소 시찰과 결부될 때 더 뚜렷한 의미를 드러낸다.

북측 인민들이 잊지 못하는 오성산 일화가 말해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 그런 모습을 본받은 후계자는 누구일까? (2010년 9월 13일 통일뉴스)